잡기

잡기

paedros 2003. 3. 8. 01:06
볼륨을 있는 대로 올려 outer limits의 20분 짜리 잡동사니 클래식 the scene of the pale blue를 듣고 갱생했다. 이런 류의 음악은 따뜻하고 빨간 심장에 따뜻하고 빨간 피가 돌게 해 주었다. 심지어 미래에 대한 가열찬 희망 마저 느끼게 해 주었다. 모든 잘 만든 예술 작품들은 거울에 비친 날개를 공통적으로 연상케 했다. 날고 싶다는, 날 수 있다는, 날아봤다는 달콤한 복감적 환상과 혼동, 그리고 세계속으로의 상쾌한 추락을 동반하며.

아마도 제목이 long love letter 였던 것 같다. 매우 못마땅하고 인정하기 싫은 기분나쁜 사실이지만, 세상에는 본질적으로 단 한 종류의 소설만이 존재했다. 1편에서 그는 얼빵하게 생긴 학생들을 상대로 칠판에 아인슈타인적인 세계선을 그리며 '지금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는 헤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지금을 살아야 한다'고 중얼거리면서 자신이 동경하던 여자에게 다가가는데 갑자기 생긴 모종의 신비스러운 폭발 사고로 그와 그녀와 학교가 통째로 날아갔다. 보다가 입을 쩍 벌렸다. 마음 깊은 곳에서 2편은 안봐도 된다는 모호한 기쁨이 슬금슬금 솟아나왔다. TV 시리즈물 드라마란 그렇게 시작해서 사꾸라 정신으로 끝을 맺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다는 어떤 제품이 정말로 가능한가 하는 따위의 논쟁으로 32시간을 보냈다. 성냥개비 모양으로 생겼다. 땅에 꽂으면 30일 후 꽃이 핀다고 한다. 3개월 후에는 딸기를 따먹을 수도 있다고 했다. 제 3차 농업혁명이라고도 했다. 쓰잘데기 없는 꽃이야 그렇다치고, 화분에 성냥개비를 꽂아 놓고 90일 동안 너는 정말 딸기가 될 수 있는거냐? 라는 회의적인 시선으로 뚜러지게 쳐다보고 있는데도 과연 딸기가 생길지는 의문이다. '철학적으로' 그것이 딸기 모양을 하고 딸기 맛이 나는 딸기의 오마쥬 내지는 파스티쉬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시련과 스트레스를 딛고 꿋꿋이 자란 빨갛고 달콤한 딸기를 먹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근에 2000원 하는 딸기를 사다 먹었다. 먹으면서 심수봉의 '딸기 밖에 난 몰라'라는 노래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