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기

예술 실무

paedros 2004. 6. 9. 03:05
아침부터 이곳 저곳 돌아다니느라 녹초가 되었다. 사업을 접게 되어 퇴사한다는 양씨 아저씨 일행을 만나러 그들의 사무실로 갔다. 의기소침해 있을 그들을 위로한다기 보다는... 퇴사가 결정된 마당에 다음번에는 무슨 일을 할까, 그들의 인생에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 산 sj33 자랑 할 겸. sj33을 시큰둥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이런 저런 잡담을 늘어놓다가 열이 받아서 회의실 화이트보드에 그들의 인생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프라이멀 누마 클러스터를 비롯한 이런 저런 도형을 그렸다. 사각형에 어노테이션을 달아놓은 전형적인 그림은 자주 수정되었고, 논쟁이 이어지면서 무언가를 첨가하거나 지웠다. 퇴사할 인간 둘이 자기들 친구를 사무실로 불러들여 왜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는걸까, 인수인계나 잘 하지. 그 이유가 궁금했는지 어떤 작자가 빼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회의실을 들여다 보았다. 두 갑째 피웠다. 하다 하다 제풀에 지쳐 나가 떨어져 의자에 기댄 채 물끄러미 화이트보드에 완성된 그림을 보던 그들 중 한 친구가 우리 사이에서 욕설에 해당하는 말을 했다. '이건 아트야' 구현되지 않은 기술은 헛소리일 따름이다. 사무실을 나오면서 위로는 제대로 한 것인지, 자랑은 제대로 한 것인지 문득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아트야 늘 하는 거지만 하늘은 흐렸다.


지하철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내 sj33을 보고 물었다. '이거 핸드폰 됩니까?' 아니요. '인터넷은?' 안 되는데요. 할아버지는 뭐 그런 것도 안되느냐는 표정으로 슬며시 관심을 거두었다. 이것이 중고가가 무려 20만원이나 하는 첨단 기술의 집적체인 PDA가 천대받는 한국이란 말인가? 구매한 이후로 줄곳 좌절이다. 꺼내 들라치면 상위 기종이 불쑥 탁자에 나타나질 않나, pda가 없는 사람들은 인터넷, 핸드폰 되냐고 묻질 않나. 나야 견딜만 하지만 알아주는 이 하나 없는 sj33이 가엾다.

최씨 아저씨는 양아치 같은 차림으로 한국에 왔다. 이온 프로펄션 쪽을 공부하는 것 같던데 의문인 것은 동태를 여기저기 배달하는 외우주 이민선도 아니고, 최근 각광 받고 있긴 하지만, 지구 근궤도에서 그걸로 충분한 걸까? 충분치 않은 시간 때문에 흥미로울 것 같은 얘기를 물어보지 못했다.

박씨 아저씨한테 디스크 볼륨 레이블이 '즐'인 HDD를 건네주긴 했지만, 뭔가 석연찮은 것이 내심 불안하다. 왜 KIN일까?

좌담회에서 밥값을 하고 싶어도 할 말이 없었다. 입이 안 떨어졌다. sf를 읽으며 이미 수준이 올라갈대로 올라가 버린 독자들을 만족시키고(흥행성?) 동시에 어리석은(?) 문단을 엿먹이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탁월한 수단과 신선하고 이질적인 시선으로 감동과 기쁨을 주는 '아트'(내지는 평양의 그 유명한 '날으는 처녀들'에 필적하는 아크로바트)를 보여줄 수 있는 역량있는 작가를 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 아줌마와 아스 아가씨가 말하는 서사라... 요즘은 어디서 서사 얘기를 들으면 맥락의 일관성을 말하는 것인지 이야기 구조가 본질적으로 지닌 점착성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과거 영광의 작가들이 가지고 있던 주제의식의 빛나는(정말 빛이 났다) 개연적 통합을 얘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삼자 사이의 배분과 혼합을 얘기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글빨이 서사에 포함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문장의 대가를 보고 싶다. 그건 글자로만 할 수 있는 일인데 백날 똑같은 시시한 연애담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아무래도 문장력 때문이다. 통 글 잘 쓰는 사람을 못 봤다.

pda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박씨 아저씨를 쳐다봤다. 그는 창작을 하지 않았다. 그 옆의 고양이 아줌마도 쳐다봤다. 그는 창작을 무기한 보류했다. 그 옆옆의 김씨 아저씨도 쳐다봤다. 자기는 여차하면 창작도 할 수 있다고 늘 자신만만이다. 내 발 끝도 쳐다봤다. 기다리다 보면 하늘에서 붉은 비가 내리고 젊은 변태가 나타나 줄곳 패시미스틱해 지기만 하는 sf계에 새파란 피를 긴급 수혈해주지 않을까? 한국 sf계를 구원할 예수가 나타나도 팬덤의 회의주의자들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린 채 푸른 피를 질질 흘리며 죽어갈 가능성이 더 높긴 했다. 푸른 피를 받아먹은 팬덤의 유태계 노인네들은 불노장생할 것이다. 출판사도 불노장생할 것이다.

출판사가 철수하고 문학이 일정대로 뒈지고(왜?) sf 번역서가 출간되지 않고, 창작이 시원찮아도, 이렇게 호기심 많고 즐거운 떼거리가 사랑하고 미워하고 서로 도륙질을 하며 같이 늙어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몇 년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진지한 일은 지각있는 올드보이들에게 맡겨 두자.

* 난지도 야외캠핑장에서 바베큐 파티를 언제 하나?
* 애영동에서 Lexx를 낄낄거리면서 같이 볼 수 있을까?

정도가 관심꺼리다. 할일은 많은데 배 부르고 잠이 솔솔 오네...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