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기

이해만으로는 부족한 것

paedros 2005. 6. 4. 19:17
생각해보니 내 블로그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제목이 상당히 꿀꿀해 보이는데? finite state machanism이라... 꾸란 생각하면 그게 맞다. 꾸란은 데카당하고, 꾸란은 who are you? what do you want? where are you stand? 같은 의문에 무책임하다.

who are you는 종종 what are you? 라고도 말하는데, 동네깡패들이 골목에서 지나가는 애를 잡고 넌 뭐야? 라고 묻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상황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동네깡패가 말하는 것이나 교황이 묻는 것이나 매일반이라고 본다. 저 질문에는 상대방을 한코 죽이자는 뜻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 머리속으로 이리저리 심중을 궁리하면서 아마도 정황에 걸맞는 대꾸를 하거나, 이름을 대거나, 누구누구의 자식이라거나, 아니면 자신의 지위와 신분, 또는 권위 등 자신의 힘으로 얻었거나 천성적으로 가진 어떤 것을 말할 수 있겠지만 그 대답들은 삥 뜯을려고 마음먹은 동네깡패(내지는 교황, 기타등등)를 만족시키지 못할 뿐더러 심지어 그들에게 바보 소리를 듣거나 화를 돋구게 마련이다. 너는 누구인가? 나? 대답 못해서 어린 시절에 오다가다 죽도록 맞았다. 더 안 맞기 위해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어느날 질문의 근원을 폭력적으로 처리하고 그 후로 다시 그 질문을 듣지 않게 되었다. 이런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누가 누구더러 너는 누구냐? 라고 물을 때 쓸만한 대답이 없으면 일단 때려 눕혀 입을 다물게 만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넌 뭐냐?" <-- 상황에 따라 자격과 권위를 요구하는 질문같아 보이겠지?
대꾸, "그러는 넌 뭔데?" <-- 시간낭비의 대표적인 사례.

바빌론5 시리즈 시즌1부터 시즌5까지 끝냈다. 그 다음에 크루세이드가 있고 중간에 메이킹 오브 바빌론5가 있지만 화면으로 충분히(아니 질리게) 본 이상 관심 밖이다.

극중에서 제일 좋아했던 인물은 마르코스다. 그를 죽인 시나리오 작가를 결코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그 다음은 이바노바다. 선장 쉐리단은 죽었다 살아난 탓인지 별다른 바이탈 사인을 보여주지 못하고 시즌4,5에서 줄곳 골빈 좀비처럼 지냈다. 어쩌면 딜란과 결혼한 다음에 가족과 사랑의 필요성을 절절히 느끼는 등, 안된 말이지만, 맛이 간 것일께다. 물론, 유부남-좀비-쉐리단이라는 도식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잭에게 정들 뻔 했다 -- 타이틀 하나 단 다음부터는 그 바보 같은 웃음끼가 사라졌고 그래서 아쉽다. 지카르의 현란하게 활자화된 고통과 론도의 아이러니와 데까당이 시즌4부터는 갑자기 사라지면서 (미국식으로) 진지해졌다. 막판에 신파가 되는 한국 드라마처럼 미국 드라마들은 애국과 정의, 의무와 책임에 관한 설교 어쩌고로 실없이 시간을 보내는 경향이 있는데 워낙 나라가 누더기 기워놓은 모양이다 보니 페트리봇을 생산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인 듯. 다 자란 애들이 원하는 것은 마초스러움, 신나는 우주 전쟁과 상명하복, 모두를 엿먹이는 절묘한 사기극과 함께 easy come easy go하는 패턴이 아닐까. 미래에 대한 되도않는 희망을 품거나, 인생이란 그렇게도 가는 것이지 류가 아니라.

시즌4부터 바빌론5는 엡실론 에리다니 어디 비루한 행성계에 궁상스럽게 떠 있다는 느낌이 전혀 안 들었다. 슬프게도, 맛 간 것이다. 바빌론5는 '로봇'에 관해서는 침묵했다. 100여편의 에피소드 중에서 단 한 번,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이 단 몇 초간 언급되었을 따름이다. 전반적으로 초반에 너무 막 나갔다. 우주를 구하고, 지구를 구하고, 튄다니, 무법자가 개과천선해서 지구를 구하고 우주를 구하는 것보다 티피컬하고 어글리한, 말하자면 험상궂은 설정 아닌가?

바빌론5는 하나의 줄거리를 가지고 거의 2000년 역사중 극히 짧은 6년을 다루고 있다. 시즌4,5을 제외하고는 그럭저럭 시간 때우기 적당했다. 텔레파시 전쟁은 재미가 없거나 속편 기획에 지쳐서 다들 쓰러진 탓인지 뉘앙스만 풍기고(이런 거 정말 싫다) 전개가 흐지부지하다. 제대로 했어야 했다. 센타우리(아마 알파 센타우리겠지? 그런데 본인들이 센타우리 인이라고 하면 자존심도 없어 보이잖아)와 나른의 흥망성쇠가 좀 더 치열하고 유머러스하게 전개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론도 말대로 우주는 자기를 싫어하고, 개나 소나 다들 알다시피, 우주는 imperfect하니까. 그 다음에 이어지는 메들리란...

초능력 중에 가장 쓸만해 보이는 것이 tele kinesis다. 물리적 실재에 영향을 끼치니까. 그런데 그 반대로, 직업이 시원찮다 보니 tele kinesis와 '거의 비슷한' tele kinetics나 tele metrics 따위를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바빌론5에서 갖은 궁상을 다 떠는 텔레파시들(자기 몸을 팔아서 텔레파시들만의 homeworld를 만들려고 애쓰는 처녀도 있다)에게 공감이 간다.

천부적인 재능이 하도 끝내줘서 정치가, 기업가, 연구가, 예술가는 될 수 있다고 어린 시절 굳게 믿었지만 기술자만큼은 정말 만만치않게, 어렵게 느꼈다. 기술자 노릇 뿐만 아니라 언급한 나머지 네 가지 역할을 해야 하니까. 그런데 재밌는 것은 나머지 네 가지 부류 떨거지들에게는 사람들이 그리 많은 것을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않는 것 같다. 요구받거나, 기대되거나, 기술자에게 필요한 것은, 또는 기술자를 구성하는 주된 요소로는, discipline, knowledge, love, insight, faith, inspiration, focus, loyalty, courage, compassion, dignity, charity, professionalism, fidelity, enlightment가 있고, 개중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income이다.

왜 tapwave에서 조디악(황도대)이란 생뚱맞는 모델명을 사용하게 되었는지 대충 알겠다.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보니까 내 조디악2가 그제서야 조디악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색깔도 그렇고 모양도 그렇고 정말 딱 조디악이다. 디자인 컨셉이 조디악이었거나 디자이너가 만들어 놓고 보니 다들 조디악처럼 보여서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일께다. 마치 바빌론5에서 레인저들이 몰고 다니는 몸매 잘 빠지고 쌔근하게 생긴 화이트 스타라는 우주선이 약간... 마이너한 관점에서는... 날아다니는 통닭처럼 보이는 것처럼. 우주를 구하기 위해 열심히 활약하고 있는데 통닭이라고 말하면 미안하지 않겠나. 조디악이 조디악처럼 생겼다고 말하는게 더 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구나.

스타워즈 보기; 바빌론5 보느라(45분짜리 에피소드가 무려 110편이다!) 기력을 다 소진해 어디 돌아다니며 영화볼 시간도 없고. 에라 모르겠다 인터넷으로 다운받아 누워서 노트북으로 봤다. 작업용 필름이 누출된 것인가? 초반의 신나는 액션씬을 제외하면 스토리라인에 뭐 신선한 것 없이, 죽은 시체 불알 만지듯 플랫라인을 그렸고 시종일관 구질구질했다. 대사만 나오면 졸았다. 그러다가 정말 잠 들었고(그 동안 100여개의 바빌론5 에피소드를 보느라 피곤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두 번째 divx를 마저 봤다. 대단한 제다이 유전자를 지닌 스카이워커 집안이 대대로 돌대가리라는 점은 이것으로 의심의 여지 없이 명확해진 것 같다. 어쩌면 바빌론5의 피튀기는 외교전을 보다가 스타워즈의 숙명 어쩌구 하는 허튼 소리를 들으니 더더욱 한심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