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기

o banana

paedros 2006. 9. 23. 23:20
자다 깨서 치킨 한 마리와 생맥주를 배달해서 먹고 마시며 이 글을 쓴다. The Unit라는 드라마를 틀어놓고. 얼마 전에 고씨를 만나 그쪽 파티의 근황을 물었더니 미드 얘기를 하면서 Carnivale에 모두 엄지를 치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과 시공간이 분리된지 오래되었지만 정서적 반응은 아직 서로 비슷한 것 같다. 종이를 먹고 사는 송충이 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결혼식 때 그쪽 사람들을 아무도 부르지 않아 상종못할 개자식이라고 불린단다. 사소한 감탄사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아이 엄마가 자극적인 음식을 먹으면 모유를 먹던 아이가 설사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했다. 그런가? 인도애들은 맵게 자라겠군.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내가 경험한 인도 성인 자지는 크지도, 단단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마누라에게 먹이려고 바나나를 샀다. 바나나를 먹이면 바나나 모유가 나올 것이다. 아내더러 애가 심심할텐데 하나 더 낳을 생각 없냐고 물으니, 없단다. 아내는 마오쩌뚱이 사랑받던 시절 중국에 떠돌던 경구를 알고 있을까?

돼지와 개들만 새끼를 둘 이상 낳는다.

개돼지처럼 변방에서 애들을 낳았던 소수 민족 통합에 올인하다시피 한 현대 베이징의 고심을 내심 약간은 웃음 반, 기대 반으로 쳐다봤다. 그들이 50년 후 마침내 성공한다 해도 박수치지 않을 것 같다.

FTA 문제는 수면에 떠오른 다음 의외로 걱정할 것 없이 잘 흘러갔다. 조선일보는 미친개처럼 이유없이 짖었고(우리 소울이도 이유없이 울 때가 있다), 농민들은 농사도 짓고 시민단체와 함께 데모도 했다. 강풀이란 만화가는 FTA 공포증에 관한 좀 바보스러운 코메디 만화를 그렸다. 정치가들은 언제나처럼 자중지난에 여념없이 땀을 뻘뻘 흘리고, 사람들은 어김없이 정부의 무능에 진저리를 치면서 소줏잔을 기울였다. 얘들은 어디서 줏어들은 얘기를 한두마디 늘어놓는 쿨한 멍청이로 남아 있다(요즘 애들은 왠지 일본애들같이 국제 미아처럼 보였다). 신선하고 엉뚱해서 어이없이 진행되는 결정적인 사건은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술 마시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시간이 너무 지났다. 서울행 버스를 타려고 버스 터미널로 정신없이 뛰었다. 가는 길에 코스모스를 한웅큼 뜯었다. 누군가 흔들기에 깨어보니 버스 청소 하는 아줌마가 여기서 자면 안된단다. 차는 세차장에 있었다. 아, 예, 잠이 깰 때까지 멍하니 다른 취객들과 호객하는 택시 운전수 틈에 앉아 담배를 빨았다. 이건 왠 코스모스지? 지하철을 탔다. 자다 깨보니 지축역이다. 집을 지나친 것이다. 간신히 막차를 타고 되돌아 올 수 있었지만 지하철은 가다가 멎었다. 집까지 비틀비틀 걸어왔다. 마누라에게 저녁 때 딴 코스모스를 건네 주었다. 평소 즐겨하지 않는 짓을 한 그의 남편더러 그거 들고 오느라고 낯 뜨겁지 않았냐고 묻는다. 취해서 모르고 있었다. 술을 줄여야겠다.

프리스트의 글래머가 잘 팔리냐고 물으니 잘 팔린단다. 그거보고 지겨워 하는 사람들 없냐고 물으니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류의 이야기를 들었다. 좀 더 섹시하게 얘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글로 이루어진 예술의 진정성은 기억과 환상에 있다. 그럼 서사구조나 환타지는? 서사나 환타지는 비아그라같은 것이다. 좋아하는 놈들만 환장한다. 최근의 과학적 성과는 뇌의 어떤 부분이 감정이입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는데(그걸 굳이 밝혀내야 알 수 있는 과학자들이 불쌍했다) 그 부분이 제대로 활동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매장 당할 수가 있다고 한다. 콧방귀를 뀌었다. 과학자들은 언젠가 여성이 남성보다 정서적으로 감응이 잘된다는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를 뒤집을 물리적 증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회사나 집에서 웹질로 뉴스 볼 시간이 없다. 이래저래 일이 많아 녹신하다. a과장에게 물으니 과업을 할당하고 기간을 정했으면 자기는 팀원들에게 신경쓰지 않는단다. 그러다가 도태되는 사람이 있으면 그건 그 사람 팔자니까 어쩔 수 없고. 대다수 사람들은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쁘단다. 따라서 나는 내 멋진 고집 대로 움직이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사서 고생하는 바보천치로 보이는 것 같다. 고개를 끄떡였다. 저들 팀장이 바보천치로 보이면 일이 잘 안 돌아가니까 개선해야 할 점이다.

그런데 개나소나 이구동성으로 추천하는 '조엘 온 소프트웨어'가 왜 괜찮은 책인지 의문이다. 심지어 그 책은 '리팩터링'같은 입닥치고 일이나 잘해보자는 구체적인 책보다도 더 잘팔리는 책이 되었다. 그는 훌륭한 멘터질을 한 적도 없고 눈에 띄게 뛰어난 성과를 거둔 적도 없고 프로그래밍 방법론에 관한 어떤 궤적을 논한 적도 없고 이렇다 할 철학같은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대다수의 창백하고 불행한 프로그래머가 경험하거나, 심하게 말해서 남들 다 아는 소프트웨어 업계의 내부 작동 원리와 가십과 해석을 덧붙여 블로그에 올렸다가 출판한 것 뿐인데? 연봉 8만에서 13만불 짜리 프로그래머와 연봉 3-6만불 짜리 프로그래머는 같은 상황에 처해 있어도 삶을 대하는 태도가 현저하게 다르다. 기작이 다르다. 조엘이 동종의 프로그래머이니까 하게 되는 독자들의 감정이입은 앵무새나 원숭이도 잘 하는 짓이다. 인간이 원숭이보다 약간 나아보이는 것은 머리를 굴릴 줄 알고 자기가 머리를 굴릴줄 안다는데 있다. 그의 글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고 과대평가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그가 관리자들에 관해 쓴 것들은 그저 미소가 나올 뿐이었다. 합리성이나 생산성과는 거리가 먼 카오틱한 근무 여건에서 그래도 희안하게 프로젝트를 성사시키는 아시아라는 원더랜드에서는 조엘이 그저그런 말많은 쪼다 중에 하나처럼 보일 것 같기도 했다. 조엘과는 한 가지 공감하는 것이 있다. craftmanship(장인정신)과 슈퍼히로만 가지고는 소프트웨어를 제대로 짜기 힘들다. 소프트웨어 퍼블리싱은 SF의 세계창조와 버금가는 제너시스 내지는 생태계 형성에 비견할 수 있다. -- 따라서 아키텍트는 클럭메이커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온릉 어느 부근에서 휴대폰을 주웠다. 잊거나 버려진 물건은 잊거나 버려진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나, 언젠가 휴대폰을 우체국에 갖다주고 주인이 찾아가면 2만원 준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 생각났다. 어쩔 수 없이 훈훈한 정이 오가는 이웃이 안될래야 안될 수가 없는 제도같다. 9월 4일 우체국에 갖다 줬는데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없다. 진짜로 아무 보상을 바라지 않고 이웃을 돕고 그것을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는 문화시민이 되었다. 2만원이면 돼지갈비 세 근에 소주 두 병으로 문화시민이 기분좋은 저녁을 보낼 수 있다.

팀원들 데리고 회식하겠다 하니까 at your own risk라고 말한다. 회사에서 최근 발행해 준 내 법인카드의 한도액은 천만원이다. 우리 마누라도 알고 있는 뻔한 사실은 내가 굉장히 도덕적이지만 risk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팀원들이 프로그래밍을 제대로만 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떤 리스크라도 안을 각오가 되 있다. a과장이 나를 바보천치같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 관점이고 조엘이 관리자에 관해 별로 아는게 없어 농담 따먹기로 대충 넘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애들을 처음 데리고 간 어떤 횟집은 평가가 성공적이었다. 다음에는 중국집에서 맛있는 식사를 할 것이다. 술 처먹고 오입이나 시키는 느끼하고 별로 신선하지 않은 회식도 언젠가는 통과의례처럼 해야할 지 모르겠지만... 그것보다는 나흘치 식량과 칼, 라이터, 지도 를 챙기고 치앙라이에서 배낭하나 메고 메홍손까지 트래킹하는 것이 더 재밌을 것 같다. 평생 기억에 남을 개고생을 시켜주고 그에 비하면 소프트웨어 개발은 껌이지, 라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키워주고 싶다. 아울러 탈진해서 쓰러진 동료를 버려두고 갈 것인지 말 것인지 진지한 토론도 해 보고. -- 프로그래머들이 대부분 판단 부족으로 일을 그르치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더 나쁜 것은 기술자들은 보통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관리자에게 전해야 할 정보를 조직적으로 차단하는 일을 거리낌없이 한다는 점. 건 그렇고, 전문직 종사자들은 자신들이 응당 가져야 할 평균보다 높아야 할 수준의 직업윤리를 상식 선으로 낮춘다. 말하자면 전문직 종사자 중에 개새끼가 유난히 많다. 관리자 대부분이 개새끼인 것에 비하면 좀 나은 편이지만.

자전거 사고가 많이 나는 편이다. 특히나 지루하게 이어지는 평평한 자전거 도로에서는 잠시 딴 생각을 하거나 한눈 팔다가 맞은 편에서 오는 자전거를 박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지금까지 사고가 안 난 것이 무척 신기하기만 하다. 늦은 밤 퇴근길에 성산대교 앞의 공터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바람 쐬면서 멍하니 앉아 담배 한 대 빨 때가 행복하다. 바나나 모유를 먹이는 애도 있는데 '출퇴근길에 개값 치르지 말자' 라는 자세로 자전거 타고 출퇴근을 한다. 바빠서 자전거를 자주 타지 못해 그런 결의를 자주 다지는 편은 아니다.

충전용 건전지 대부분 성능 미달 -- 2700mAH 전지가 이상하게 방전이 잘 된다싶더만 불량품이라고 수입사측에서 리콜해준단다. 같은 타잎의 전지 대신 대기시간 동안 방전량이 적은 에네루프 충전지로 바꿨다. 용량은 이전보다 적은 2000mAH지만, GPS에 사용해보니 한번 충전해서 하루 4-5시간 사용할 때 나흘 가량 사용이 가능했다. 방전특성이 기존 충전지에 비해 상당히 좋은 것이다. 다소 비싼 편이지만 앞으로 살 충전지는 무조건 에네루프로 하자고 마음먹었다.

시판 체온계 절반 부적합 판정 -- 뉴스 보고 생각나서 체온계를 구매했다. 이마에 대고 찍는 적외선 체온계인데 귀에 넣고 찍는 체온계는 애들이 짜증을 잘 내고 나라도 남의 귀 후비적 거리는 것이 짜증나서 체온이 틀리게 나오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이마형 체온계는 이마에 대고 적외선 센서로 체온을 읽는 것인데 겨드랑이에 끼고 체온을 재는 것보다 당연히 오차가 클 줄 알았지만... 사용이 편하고 비교적 정확하게 온도를 표시하는 것 같다. 멀쩡할 때 내 체온은 냉혈한 답지 않게 대략 36.4 ~ 36.6 정도 나오는데 새로산 도토리 플러스만 그렇게 출력했다. 물론 이마에서 재는 체온이 항상 맞을 리가 없다. 이마는 열받으면 쉽게 달아오른다.

프로젝트 명칭의 유래를 알려 달란다. hades는 거래처가 하도 지랄같아서 '이젠 죽었다 시팔' 하는 심정으로 만든 9개월짜리 프로젝트이고(내가 하는 프로젝트가 늘 그렇듯이 기간 예측은 정밀폭격에 비견된다. 그러니까 고문과 비명은 정확하게 9개월에 딱 맞춰 끝났다) kronos는 시간 없는데 또 일꺼리를 만들어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프로젝트이고(프로젝트 시작할 때 이건 1개월에 끝나요, 하지만 적어도 6개월 동안 발목을 잡고 지긋지긋하게 물고 늘어질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medusa는 처음으로 종속성을 없애고 엿같은 거래처에서 해방된 기쁨으로 만든 프로젝트이다. 라고 알려주지 않았다. 거짓말은 잘 못하지만 이야기는 잘 지어냈다. 우리 프로젝트는 그래서 기품있고 아무도 상처입지 않는 과거를 가지게 되었다.

데니 크레인처럼 광우병 환자가 아닐까 의심스럽지만, 좋은 관리자가 되겠다는 프로젝트는 2년 짜리다. 4개월이 지났다. 4개월 동안 한 일은 고작 함께 일할 사람을 한 자리로 모으고 사무실을 독립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The Unit의 대원들처럼 아내한테 하는 일에 관해 얘기하지 않았다. 대다수의 남자들 역시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모른다. 시골에 계신 할머니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친절하게 말하자면, 지금 하는 일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른 사람들이 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아내를 데리고 몰디브에 가서 물고기 떼와 함께 수영하고 싶다. 3주 동안 안나푸르나 서킷 트래킹을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하는데 돈을 벌려면 프로그램을 짜야 한다. 프로그램을 잘 짜려면 다음주에는 팀원들을 데리고 작은 배를 빌려 낚시하러 가야 한다. 비용은 회사에서 처리하고. 이런 일을 하려면 관리자가 되면 된다. 간단하다.

그럼 프로그래밍은? 그 좋아하던 프로그래밍은 안 하나? 매니징은 현대예술과 비슷한 점이 워낙 많아서(독단적이고 무례하며 자기만의 세계관을 가지고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해석하며 해석해봤자 본전도 못건지는 등) 사람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는 것이 당연한데, 그것보다 덜 예술적인 프로그래밍은 짬짬이 여가활동으로 하면 될 것 같다. 에스타블리싱 폴리시, 디벨롭먼트 서포팅, 멘터링, 코드 작성, 인터널 커뮤니케이션, 컨서머 릴레이션, 아웃소싱, 컨셉 디자인 및 설계스펙, 코스트/마켓 애널리시스 등 시골에 계신 할머니가 이해할 수 없는 사소한 것들은 거론할만한 가치가 별로 없다. 관리자와 프로그래머가 공감하며 늘상 중요하게 토론되는 것들은, 믿음, 소망, 사건 사고 소식, 재테크, 낚시, 여행, 4주 휴가, 급여 왕창 등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