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Bagan

여행기/Myanmar 2005. 4. 7. 20:34
아침에 일어나니 벼룩 물린 자리가 예닐곱 군데 생겼다. 미얀마 벼룩은 36.7도의 따뜻한 고기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것 같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 식사 중에 영국인 여자와 '데이'를 '다이'라고 발음하는 영국인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인도에 있다 와서 짜이맛을 그리워 했다. 그가 양곤에서 만난 세 한국인 여자들 얘기를 했다. 꼴까타에서 비행기를 타고 무작정 양곤에 왔는데 가진 것이 카드 뿐이고 수중에 달러가 없어서 애를 먹어 한국 대사관을 찾고 있단다.

미얀마에는 us 달러 외에는 거의 사용하기 힘들다. 어제 만난 오스트라아 친구는 유로당 850짯이라는 환율상의 불이익을 무릅쓰고 간신히 유로를 짯으로 환전할 수 있었다. 대사관 주소와 전화번호가 있긴 하지만, 만날 수가 있어야 도와주지. 인터넷은 커녕 전화기에도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야 간신히 통화할 수 있는 형편이니. 옆에 있는 영국 여자가 참견하길, 큰 호텔에서 비자 카드로 7퍼센트의 수수료를 떼고 현금 지급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자기는 그렇게 했다고. 혹시 시도나 호텔 아뇨? 그렇단다.

항공권 일자 변경이 잘 안되어(전화가 잘 안된다) 열 시까지 시도하다가 전날 예약한 마차 투어를 시작했다. 어쩐지 타운에서 나만 마차 투어하는 외국인 '봉' 같다.

바간은 미얀마 최초의 통일 왕조가 들어섰던 곳이고 왕조를 형성한 지 3대 만에 몽골이 심심해서 침략했다가 멸망했다 -- 몽골 녀석들은 말을 한 번 타면 어떻게 멈추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왔다가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시시했는지 그냥 돌아갔다. 그걸 역사상 중요한 사건으로 여기는 관점과 달리 미시 역사 해석에서는 왕조의 절멸이 북부 미얀마 문명의 절멸을 의미하지는 않고, 미얀마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역사학자들이 즐기는 그 관점에서는 몽골의 침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 3대째 왕의 무리한 파고다 건설 작업에 의해 국부가 바닥난 상황이라 몽골의 침략은 단지 마지막 쐐기를 틀어박은 것이라고 한다. 대다수 파고다는 바고에서 끌고 온 3만여명의 중들이 설계하고 만든 것이다. 지역 전체에는 4천 여개의 파고다가 있었고, 그중 2천개는 지진이나 전란 등으로 무너졌다.

파고다에 관해 일일이 설명하기가 귀찮다. 사실상 이곳에서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원 외형은 몇 안되었다.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이고 무지한 관점에서다.

마부는 젊은 친구인데 적당히 일하고 돈을 벌려는 생각인 것 같아 다소 빡세게 굴렸다. 오후 세 시가 넘자 눈에 띄게 지쳐서 음료수 하나 사주고 다독이며 계속 굴렸다. 별 이유는 없었다. 바고에서 늙은 싸이카 운전수는 다섯 시간 넘게 그 앙상한 몸뚱이로 제 다리를 놀리고 땀을 뻘뻘 흘리며 죽을둥 말둥 일해 간신히 돈을 벌었는데 이 녀석은 6천짯이나 되는 돈을 마차를 몰며 편히 다니는데도 날더러 다른 관광객은 그렇게 많은 곳을 둘러보지 않는다 둥, 날도 더운데 두 시쯤 마무리하고 돌아가자는 둥 바간의 무수한 파고다를 향한 활활 타오르는 열정을 지닌 손님을 무시하는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계약의 무서움도, 돈벌이의 힘겨움도 모르는 스물 네살 짜리 인생에게 다소 살벌하게 구는 것을 보니 나도 많이 늙은 것 같다.

그의 이름은(미얀마 남자는 여자와 달리 성이 없다) 바간 왕조의 두번째 왕의 이름이지만 자기 이름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미얀마인은 출생한 요일에 해당하는 미얀마 글자 자음으로 시작하는 이름을 갖는다.

파고다의 여러 사이트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가끔, '오빠', '진짜 루비', '구경하고 가세요' 따위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들이 프레젠트를 주고 받은 천원 짜리 지폐를 짯으로 바꿔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그들은 손으로 만든 작고 보잘 것 없는 선물을 건네주고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관광객의 주머니에서 기어이 천원, 오십밧, 십위엔, 백 리알 짜리 지폐를 꺼내게 만들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들과 자주 마주쳤고, 그들에게 그들이 그린 그림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주기도 했다. 상황이 웃겼다. 바간의 환쟁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은 그림을 그려서 판매하는데, 자기가 그린 그림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크리슈나를 부처라고 하기도 하고, 마라를 천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날도 더운데 돌겠다.

바간의 넓은 사이트에서 만난 미얀마 사람들은 이곳이 유명한 관광지임을 느끼게 했을 뿐이다. 하지만 앙코르와트에서 만난 사람들도 이 지경까지 '무식'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뽑기에서 아주 나쁜 패를 뽑은 것 같다. 고수들은 이 더위에 집에서 쉬고 있나 보다.

몇몇 사이트에서 본 페인팅은 더 바랄 나위없이 훌륭했다. 작열하는 태양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사원들을 팔짝팔짝 뛰어다닌 보람이 있다.

비록 겉 껍데기는 인도 짝퉁 사원이지만(수학적 엄밀함에 필적하는 대칭성에서 비롯된 아름다움, 복제 손실과 그 문화가 지닌 독자적인 창조적 재해석 등 여러 관점에서) 그런 그림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대개의 그림은 부처의 행적을 묘사한 것인데 면 캔버스에 회반죽을 입히고 벽면에 고착시킨 후 여러 암석에서 추출한 염료와 금가루를 섞은 안료로 그렸다. 십이세기 무렵의 그림인데 열대성 기후에서도 그 화려한 색채를 잃지 않은 것도 있다. 십이세기나 되었는데 사실 그림의 정교함은 좀...

보전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지만(터키의 카파도키아라고... 네스토리우스의 버섯 둥지에서 본 적이 있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페인팅을 생각하면 관광객으로서 판단컨대 가격대 성능비가 양호하다) 관광객들이 마음대로 만지게 하고, 백열등을 비추는 등 관리 상태는 아주 나빴다. 나야 늘 그렇듯이 사진 찍지 말라는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대다수 역사 유적지에서, 플래시를 터뜨리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전등을 비추는 것이 그림을 더 손상시키는 것임에도, 디지탈 카메라를 들이대지 못하게 하는 것을 대단히 우스꽝스럽게 여긴다.

바간 지역은 워낙 광활해서 둘러보는데 만도 며칠이 걸릴 것 같다. 이 더위에 제대로 둘러보긴 무리일 듯. 마차를 타고 편하게 돌아다니는데도 지친다.

지나가다가 자전거를 타고 사이트를 순회하는 일본계 미국인 여자를 만났는데, 날더러 대뜸 '마차를 타고 돌아다니니까 편하고 좋겠어요' 라고 말한다. 그녀의 남편은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면서 자전거를 허리춤에 기대놓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암요. 그 재미죠(yep, that's why i took the horse wagon) 라고 말하고 미소지으며 그녀의 헉헉거리는 자전거를 추월했다. 그녀는 의식있는 훌륭한 남편을 둬서 정.말. 좋겠다. 답사는 역시 말 다리가 아닌 자신의 두 다리로 직접 해야지, 나처럼 마차 타고 드러 누워 한가하게 돌아다니면 안되고 말고. 정말 서양인들의 체력은 끝내주는 것 같다. 자전거야 500짯이면 빌리고 원하는 곳은 어디나 갈 수 있는데, 이 놈에 호스웨건은 6000짯이나 하면서도 드라이버와 어디 가자 어디 가지 말자 신경전을 벌여야 하니 말이다. 아, 덥다. 이번에는 어느 사원으로 다그닥다그닥 느긋하게 달려가 볼까.

거의 모든 한가한 삐끼들은 한결같이 내 목에 두른 손수건을 탐냈다. 한국 천의 품질과 발색의 우수성이야 두 말 하면 잔소리지. 물건 볼 줄 아는군. '진짜 루비' 정도면 견줄만 한 거야. 이것하고 같은 빨간색 루비하고 바꾸자니까 손사레를 친다. 손수건을 물에 적셔 목에 두르면 시원하고 신경계의 열폭주도 막아준다. 내 시계도 탐을 냈지만 그에 상응하는 값어치를 지닌 물건은 안 보인다.

어떤 녀석은 불상 머리를 잘라 팔려고 했다. 왜 그러는거야 대체 엉? 한참 캄보디아가 앙코르와트 하나로 먹고 살고, 문화재가 어쩌고 저쩌고 설교를 늘어놓았다. 이 김에 인디아나 정스 짓이나 해볼까. 11세기 무렵의 빨리 한 보따리 가지고 오면 시계와 바꾸겠다고 말했더니 표정들이 진지해진다. 구하지 못할 꺼니까 어떻꼐 잔머리 굴려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관광객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모조품을 미리미리 준비해 둘 것이지. 파고다에서 방금 캐낸 것처럼 적당히 박쥐똥 냄새와 썩은 내도 나게 해서. 산스크리트와 빨리어 잘 아는 나이 든 중 하나 꼬셔서. 장삿꾼들이라 장사만 안다. 장사 잘하려면 물건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안 그럼 용팔이처럼 헛소리나 늘어놓고...

물론 미얀마 정부는 안틱의 외부 유출을 막고 있다. 지나가는 관광객 한테 자기들 유물의 가치에 관해 되레 설명을 듣고 있으니 어디 관광지에 가나 장사꾼들이 무시당하는 거다. 뭐 일단 값어치 있는 것들은 일찌감치 벌써 털려 나갔을 것이다. 남은 것들은 쓰레기 뿐. 그러나 시리아 다마스커스의 평범한 시장통에서 오래된 골동품이 보이듯이 여기도 대외적으로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던 국가였던 터라 잘 뒤지면 뭔가 나오긴 할 것 같다.

투어가 끝나니 오후 6시, 말은 뻗은게 이해가 가는데, 마부도 뻗었다. 소파에 널부러진 그의 손에 돈을 쥐어 주고, 내년에 또 보자니까 질렸다는 듯이 히히 웃고 슬며시 외면한다. 녀석... 마음에 안 든다. 이 놈은 한국인을 좀 더 만나봐야 할 것 같긴 한데, 워낙 아는 것이 없고 제 편한대로 게을러서 추천해주긴 뭣하다.

사진은 많이 안 찍었다.





































저녁에 누와 레스토랑에 들러 가격대 성능비가 우수한 천짯짜리 미얀마 백반을 주문하는데, 날더러 일본인이냐길래 한국인이라니까 일하는 아가씨들이 꺅꺅 소리를 지르며 난리 법석을 부린다. 조금 있으면 저기 틀어놓은 tv에 한국 드라마가 나온단다. 태국에서 요즘 한창 '불새'라는 드라마를 하는데 혹시 그건가? 그렇잖아도 미얀마인들이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본다는 얘기를 나한테 부러 하던데, 날더러 뭘 어쩌라고. tv에서 한국 드라마가 나오기 전에 재빨리 밥 먹고 튀었다.

다음 날은 아침부터 냐웅 우 주변 마을과 쉐지곤 파고다를 돌아다녔다. 라기 보다는 길을 잃어 정처없이 헤멨다. 숙소와 레스토랑이 몰려있는 관광지인 냐웅 우 지역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미얀마 촌락의 살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하게 산다. -끝-

오늘도 어제 만났던 일본계 미국인 여성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쉐지곤 파고다를 방문했다. 난ㄴ 일본 여성들에게는 비교적 친절한 편이다. 그런데 어제 나하고 함께 온 오스트리아 외톨이는 어디 짱 박혔길래 관광 안 하고 있는 것일까. 만나서 내가 신경 써서 완성한 밀리터리 캠프 아이디어를 들려주고 어떤지 물어보고 싶은데. 일본 여성에게 남편은 어디 갔냐고 물으니 숙소에서 쉬고 있단다. 푸훗.

특이하게도 그녀는 일본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 삐끼들이 돈 많은 일본인 취급해서 귀찮지 않냐고 물으니 그렇잖아도 괴롭단다. 그럴 땐 한국인 행세를 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마흔이 넘은 지금이 처음 동남아를 방문하는 것이다. 일본도 안 가봤다. 남편 참 대단한 사람이다. 여긴 인도에서 굴러다니는 녀석들이나 좋아할만한 곳이지 왠만한 사람들은 견디기 힘들텐데. 학교 교사고 딸이 하나 있고 자기는 남편 말 듣고 따라 왔는데 이렇게 고생스러운 줄 몰랐단다. 잠시 뒷골이 땡겼다. 아내하고 다닐 때 저 아줌마 남편처럼 나도 그랬던 것 같긴 한데, 함께 파고다 경내의 달구어진 돌위를 팔짝팔짝 뛰어다니다가 버스 시간이 가까워져서 헤어졌다.


Shwezigon paya, 붓다의 치사리를 등에 지고 돌아다니던 코끼리가 '''더위에 지쳐''' 멈춘 자리에 세운 사원.


Shwezigon paya, 아, 이것은 남인도에서 많이 보던 방식. 왠만큼은 건전한데, 한 군데, 반나의 여자들이 승려 밑에서 춤추고 있다. 뭐하자는 걸까. 약올리는건가? 아니면 육보시?


Shwezigon paya, 미로처럼 얽힌 회랑을 따라 걷기. 만만해 보였는데, 십분 가량 걸은 것 같은데, 미로가 끝이 안 난다. 그래서 허들을...


Shwezigon paya, 그럴듯. 설교듣는 분위기 나올 듯.


Shwezigon paya, 동쪽 입구의 긴 회랑을 걷던 중 왼편에 보이던 힌두 사원. 아저씨는 사방을 두리번 거리더니 오줌을 누었다.


쉐지곤 파야 Shwezigon paya, 동쪽 입구의 긴 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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