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권 일자 변경은 실패. 버스표를 어제 간신히 예매했는데, 이번에는 정말 좌석이 없다. 복도 중간에 앉았다. 거참 자리 훌륭하다.

이 더위에 버스에 에어컨이 안 나오는 거야 뭐 늘 그랬으니 그렇다치고. 버스에 정말 전형적인 jerk처럼 생긴 젊은 미국인 남녀가 탔다. 여기가 발리섬이라도 되는지 하와이안 꽃무늬 반바지와 난방을 입고 있었다. 분위기가 상당히 안 어울린다. 밤새도록 미국 여자애가 징징대고 옆 자리의 아가는 울어대고 앞 자리 아줌마는 바닥에 드러눕고 차는 타이어가 터져서 새벽에 허허벌판 한 가운데 멎었다. 새로 간 타이어 역시 어디가 잘못 되었는지 얼마 못 가서 다시 차를 세운다. 승객들과 운전수가 합심해서 지나가는 버스를 세워 바퀴를 하나 빌려 돌돌 굴려왔다. 터진 두 바퀴는 짐칸에 다시 쑤셔넣고 그 분량의 짐을 객실로 옮겼다. 버스 안은 난장판이 되었다. 일이 다 끝나자 차장이 미안한 지, 그들이 스노우 타월이라 부르는 '물수건'을 공짜로 하나씩 더 나눠준다. 다들 뜬 눈으로 고생 많았다. 잠도 못 자고, 미얀마에서 탄 것 중 최악의 버스다.

양곤에 도착해서 지친 나머지 택시를 타고 술레 파고다 까지 갈까, 삐끼와 간신히 2천에 협상 하고 택시에 짐을 실었다. 얼른 숙소 가서 씻었으면 좋겠다. 옷가지, 짐, 드러난 팔 다리에 온통 땀과 기름과 먼지가 얼룩덜룩 앉았다.

두 미국인은 나와 택시를 쉐어 해서 양곤에 들어가려다 말고 미얀마에 질렸다면서 바로 공항으로 간단다. 가 봤자 비행기 좌석이 당장 안 나와서 한참 기다려야 할텐데... 미얀마에 있는 내내 죽어라고 바나나로 연명하고 값 비싼 코카콜라를 마시면서(스타 콜라 가격의 무려 일곱배다)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아 택시 협상을 도와주려고 했는데, 뭐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니 멀뚱히 쳐다봐 주었다. 어쨌든 꽃무늬 티셔츠, 반바지 차람의 럭셔리 배낭 관광객은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처음 봤다. 버스 터미널에서 공항까지 천짯이면 충분한데 무려 십 달러를 준다. 가는 길을 지켜봐 줬다. 힘들었는지 표정이 많이 안 좋다. 불쌍한 녀석들...

택시가 손님 더 끌어모으려고 기다리길래, 짐을 내려 터덜터덜 버스 터미널 입구까지 걸었다. 바보같은 택시 삐끼 녀석들, 밤새 고생해서, 2천씩이나 내고 자진해서 봉이 되 주겠다는데 다른 손님 태우려고 욕심을 부리니까 손님을 놓치는 거지. 50짯 주고 물어물어 시내버스에 올랐다.

옆 자리에 미얀마 에너지성에서 근무하는 샨족 출신의 할아버지가 앉았다. 그의 고향은 시뽀였고, 일본에서 컴퓨터 컨트롤 시스템 교육을 받고 캐나다에도 있었지만 정부에 소속된 관리라 다시 미얀마로 돌아왔다. 언젠가 내가 다시 미얀마를 방문하게 되면, 자기는 내년에 은퇴하여 고향에 돌아가니까, 시뽀로 놀러오란다. 40여년을 기술자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가 부럽다. 행상을 짊어지고 나와 함께 버스 타고 열일곱 시간을 달려왔지만 몰골은 그래보여도 아세안 에너지 부문 미팅에 참석하는 엘리트다. 이 나라의 엘리트들은 말년에 쉬지도 못하고 텔렉스 전문 한 통과 동봉한 버스표 한 장 달랑 받고 먼 길을 제발로 찾아와 국제 행사에 참석하나 보다. 그는 자신이 샨족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악수하고 헤어졌다.

단지, 전세계 배낭 여행자 숙소 중 세계 최고의 무료 아침 식사를 제공한다는 자화자찬을 확인할 겸(디스커버리에도 나온 적이 있는지 요란한 선전 문구가 입구에서부터 새겨져 있다), 화이트 하우스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6달러 짜리 값비싼 8층 독방에 체크인 하고(아무 생각없다. 이 상태로 도미토리에서 도저히...) 샤워하고 8시부터 시작하는 아침을 먹으러 식당에 내려갔다. 거짓말이 아니다. 돌아다녀 본 어떤 나라도 아침 식사가 이런 성찬인 곳은 없다. 심지어 '식중독 경고'까지 붙어 있었다; 아래와 같은 것은 함께 먹지 말 것, 식중독 걸림: 수박과 계란, 라임과 우유, 망고스틴과 설탕. 아... 그렇구나. 하나 배웠다. 그런데 음식을 그렇게 안 내 놓으면 될 것 아니야?

샤워하고 방 안에 퍼져 있다가 티켓 오피스가 문 열 시간 즈음에 프론트로 내려가 푸켓 에어라인 오피스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니 왠 여행사를 가르쳐 준다. 사쿠라 빌딩 일층의 sun far라는 곳. 지쳤지만 이놈에 신년 때문에 또 발이 묶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어 꾸역꾸역 걸어갔다. 직원이 30분 쯤 간신히 전화하고 나서야 티켓 날짜를 '드디어' 바꿨다. 아... 만들래, 바간 때부터 계속 시도했는데 정말 징하다. 이 나라의 전화는 대체...

아까 할아버지 말로는 미얀마의 인터넷 라인은 바간넷 이라는 사설 회사가 아이비스타의 회선을 임대해서 운영한다고 하는데(그의 처제?가 그곳에 근무한다), 다른 데는 안 될지 몰라도 양곤에서는 인터넷이 가능할 꺼라고 말한 기억이 나서 사이버월드라는 인터넷 카페로 찾아갔다. 그는 자신의 대부가 살고 있는 캐나다와 자주 email을 주고 받았는데 얼마전부터 계정을 차단 당했다고 한다. 옆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어서 자세한 얘기를 더 하지는 못했다. 입 조심 해야지.

인터넷 카페에 찾아가 양 손을 비비며 이제 사진을 올릴 수 있겠구나 히히 했는데 왠 걸, ftp 포트를 여전히 막아놨다. 한 장, 한 장 손으로 올리면 되지만 20메가 분량의 백여장 사진을 그렇게 올릴 수는 없고. 터미널 서비스 포트도 막아놨고 메신저 포트도 막혀 있고 dns 연동이 안 되고, 심지어 nslookup조차 막아놨다. 웹질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그것도 프록시에 여러 제한을 둬서. 중국도, 이란도, 시리아도, 이 지경까지는 아니었는데. 이 나라 군부독재 여러분, 정말 대단하십니다요.

미얀마 여행은 끝났다. 짧은 시간 동안 메뚜기처럼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체력이 허덕여 힘들었다. 더워서 많이 둘러 보지 못했고 더 돌아다니다가는 여행이 아니라 고행이 될 것 같아 인레 호수는 가지 않고 양곤으로 돌아왔다. 미얀마에 대한 인상이 참 좋다. 새해와 건기 막바지가 겹치고 물이 몸에 안 맞아 항상 입이 바짝 타 있는 등 여행하기에는 괴로웠지만, 시골에서 사람들이 보여준 친절은 잊지 못할 것 같다. 그것 외에는, 볼 것은 없는 나라다. 파고다 매니아라면 또 모를까. 기예하고는 '약간' 거리가 있는 무수한 파고다, 파고다, 또 파고다, 부다, 부다, 부다들은 좀...

윌리엄스라는 학자는 미얀마의 역사를 이라와디 강의 흐름에 비유했다. 이라와디 강의 저류는 변화하지 않고 상층부는 흐른다는 것. 그러니까 외세의 침탈과 수난, 모진 식민 역사를 겪어 왔지만 버마 사람들의 문화와 사회는 마치 강바닥의 저류처럼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남아에는 문자화된 역사 기록이 오직 베트남에만 남아있어 서기 이전의 역사 기록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지만, 나는 너무나 오랫 동안 동남아를 식민지 침탈의 정치경제적 역사 현장으로만 인식해 왔고, 그러한 내 관점이 동남아를 바라보는 시선을 상당히 왜곡했다고 생각한다. 다음 번 여행에서는 접근 방법에 변화가 있을 것 같다.

왜 여행 중에 방문하는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알기 위해 이 지랄을 떨고 있을까. 일부를 제외하고 개인사는 보잘 것 없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문화와 사회 전통은 그들의 삶이 영위되는 살아있는 현장이다. 따라서 문화와 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그들을 이해하는 주요한 지침이 된다 -- 이런 대외적 선전 문구 보다는, 그 나라를 좋아하기 위해서다.

시프트, 컨트롤, 영문 o, 숫자 일, 숫자 9 키가 안 먹는 맛이 간 리브레또의 키보드로 몹시 힘들게 타이핑 한, 미얀마에 대한 '문자화된' 내 여행 기록은 여기까지다.

방콕 도착. 할 꺼 다 하셨으니 맛있는 거 먹으며 스킨 케어하고 살 찌우고 놀자. 얼굴이 정말 맛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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