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동안 같이 돌아다닌 한국인은 자신이 '맛따라 길따라'라고 밝힌 바 있다. 아, 반갑군. 맛따라 길따라는 말이야, 숙소나 교통은 처절하게 싸구려를 지향해도 음식 만큼은 결코 양보해서는 안되지. 하지만 나를 따라 다니다가 계산서가 500밧, 700밧(18$ 가량?) 씩 나올 때면 표정이 안 쓰럽게 변했다. 나하고 같이 다니면 배낭여행자처럼 할 수는 없어. 라고도 말했다. 왜냐하면 나는 하루에 천밧씩 쓸 예정이거든? 보통은 하루에 200밧으로 식사 두 끼와 숙박비, 느적거리며 여기 저기 버스 타고 돌아다니고, 거기에 150밧 정도를 보태면 적당한 바에서 맥주 한 잔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하루 생활비를 한 끼로 썼다. 물론 국수와 길거리 음식도 보이는 족족 꾸준히 먹어 주었다. 하루에 간식 빼고라도 여섯 끼 정도는 먹어줘야 하니까. 그 친구는 원래 방콕에 이틀 정도 있다가 북부로 갈 생각이었는데, 인도에서 굶주리다 온 탓에 태국의 풍부함 음식에 눈을 반짝이다가 결국 방콕에서 일주일 가량을 묵게 되었다 -- 주저앉았다. 머리는 땋아서 파인애플처럼 만들어 놓았다. 앞으로 그가 여행할 어떤 도시도 방콕 같지 않을 것이고 방콕 보다 좋지도 않을 것이다.


새 아침. 8시. 너무 일찍 일어났다. 묵고 있는 도미토리에 아무도 없다. 벌써들 나간건가? 만남의 광장이 좋은 점은 숙박객이 별로 없어 팬티만 입고 복도를 활기차게 돌아다녀도 된다. 저 빨간 바지는 여행 내내 입었던 단 한 벌 뿐인 바지. 저녁마다 빨았다. 빨아도 빨아도 빨간 물은 줄기차게 흘러 나왔다. 인도제나 네팔제나... -_-

카오산을 흐느적거리며 걷고 있는데(더위는 아침이라고 봐주지 않으니까) 왠 시크 교도가 불러 세우며 날더러 다짜고짜 행운아라고 한다. 암 행운아지. 평상시에는 운이 안 따라줘서 안 해도 되는 삽질을 꼭 하게 되는데 죽을 일이 생기면 운이 따라붙는단 말이야? 장수하면서 고생하는 운이라는 것이지. 그러더니 손금을 봐주겠다며, 내 어머니 이름을 알아맞출 수 있단다. 아침부터 재수가 없다. 난 행운아가 아네요. 당신을 만난 것만 봐도 그래요. 그러고는 히히히 웃어주었다. 그 친구도 히히히 웃는다.

문을 연 가게가 없어 시장통에서 아침 밥을 먹고 인터넷 좀 하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샤워하고 어젯밤 숙소에 체크인한 미국계 일본인과 그가 온 몸에 새겨 놓은 문신에 관해 노닥거리다가 체크아웃하고 짐을 맡겨 놓고 월텟행 버스를 탔다. 딱히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월텟의 일 층에서 일식당을 본 것 같아 한 번 방문해 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여전하다. 태국에서 먹는 초밥은 변함없이 꽝이다. 나를 일본인으로 아는지 중업원들이 무척 어려워 하면서 말 끝마다 일본어를 사용했다. 카드로 결제하려니 안 된다. 어제부터, 이상한 일일세?

에어컨 펑펑 나오는 월텟의 벤치에 앉아 놀았다. pda에 책 몇 권을 담아 왔는데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그 동안 나름대로 바빠서 읽지 못했던 '데프콘'을 읽었다. 숙소에 일본인 둘이 있었는데 자기 전에 그들의 얼굴을 흘낏 쳐다보고, 데프콘 한-일전 편을 마저 읽기도 했다. 소설에서는 한국이 핵폭탄으로 일으킨 해일에 일본이 침몰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본이 어이없이 아작나서 고개를 갸웃했다. 일주일 가량 인터넷을 못했고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그 동안 모르고 있었는데 방콕에서 뉴스 사이트를 돌아보니 중국에서 일본을 비난하는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상임이사국 엿 될 것 같다. 일본은 왜 저럴까? 얻는 것도 없으면서. 원숭이기 때문일까? 혹시 요즘 일본 여성 여행자들의 얼굴이나 몸매가 영... 그런 것과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책 읽으며 빈둥거리다 보니까 어느새 오후 4시. 빅씨로 가서 1kg 가량의 망고스틴을 사고 근처 이탈리안 식당에서 스파게티를 먹었다. 스파게티 맛이 꽝이다. 먹다 말고 남기고(배도 부르고 해서) 냅킨으로 입술을 닦고 주문한 루트 비어로 목을 축였다. 요새는 민트 티나 루트 비어 따위 이상한 것들도 시켜 마셨다. 계산하려고 식탁에 그동안 철렁거리던 남은 잔돈 동전을 파고다처럼 쌓아 놓았다. 스카이스크래이퍼, 장관이다. 종업원을 향해 히죽 웃어보였다. 요즘 방콕 사람들은 외국인을 향해 잘 웃지 않는다.

11시 30분 인천행 항공권이지만 방콕의 악명 높은 교통체증 때문에 일찌감치 서둘러야 한다. 버스를 타고 카오산에 도착하니 6시. 카오산은 지나치게 바글거렸다. 내가 마지막으로 카오산에서 맥주 마시고 노닥거린 때가 언제인지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최근 몇 년 동안 카오산에서 논 적이 없다.


코카콜라 협찬 송크란인가 보다. 펄럭이는 코카콜라 깃발 밑에서 펩시 깡통 차(좌측)가 나타나 공짜로 펩시 콜라를 나눠 준다. 며칠 전부터 하루에 여섯끼씩 먹느라 배가 불러서 콜라 같은 저질 싸구려 탄산음료는 영 손이 가지 않는다.

길 가는데 어떤 여자애가 물을 뿌렸다. 뒤돌아 봤다. 그 표정. 뭔가 말할까 하다가 돌아섰다. 나는 아내에게 충실했다. 그건 짝짓기나 사랑 나부랑이 등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의 문제였다. 게다가 21세기는 신용사회다.

숙소에 맡긴 짐을 찾고 수박쥬스 한 잔 마시고 짐을 챙겨 일어나 복권청 앞에서 59번 버스를 한 시간 가량 기다렸지만 안 온다. 오후 7시 30분. 교통체증을 감안하면 공항에 도착하는 시각은 9시 무렵이 될 텐데... 더 늦으면 땀나는데... 송크란 때문일까? 아침부터 재수가 없나보다 싶어 짐을 들었다. 하는 수 없이 공항 버스를 타기로 했다.

걷는 도중 59번 버스가 막 오고 있다. 반전해서 버스 정류장으로 허겁지겁 뛰었다. 가까스로 버스에 올랐다. 졸다가 눈을 떠보니 공항에 가까워진 듯. 짐을 챙겨 확인도 안 하고 성급하게 내렸더니 공항까지는 아직 3km 남았다. 에고야... 이런 실수를. 마지막 순간까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걷게 되다니.

망고스틴을 넣은 가방이 걱정이다. 쿼런틴에서 걸리지 않을까. 망고스틴 몇 개가 한국의 자연환경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리는 없다. 그 보다는 컨테이너 선저에 담겨오는 이국의 바닷물에 포함된 미생물이나, 검역을 소홀히 한 육가공품, 엄청난 양의 채소들에 함께 딸려오는 작은 생물군이 지역 생태계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한 종의 멸절, 먹이 사슬을 구성하는 피라미드의 한쪽 변이 무너지면서 그 종과 연관된 주변 종들이 트럼프로 지은 집처럼 함께 무너져 내려 생태계 전체가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는 가설이 있다 <-- 여러 모로 의구심이 많이 생기는 썰이긴 하나, 주접 떨기보다는 망고스틴 잘 챙기고 여행기나 마무리 짓자. 산처럼 쌓아놓은 망고스틴 피라미드에서 망고스틴을 하나 하나 고를 때마다 심혈을 기울였다. 심지어 지나가는 아줌마에게 망고스틴 고르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꼭지는 연노랑, 잡티 없고 짙은 보라빛의 탱글탱글한 바디라인, 배꼽이 단단한 것들.

공항 대기실에 도착하니 9시 50분. 수속은 10시 30분. 아까 빅씨에서 사온 100밧 짜리 초밥 도시락을 꺼내 흡족하게 배를 채웠다. 어떻게 고급 일식당의, 그때 그때 만들어 배에 얹어 띄우는 초밥 보다 대형 수퍼마켓에서 대충 만들어 파는 초밥이 더 맛있을 수가 있을까. 신기한 일이지. 오늘은 다섯 끼 밖에 안 먹었지만 나머지는 기내식으로 보충하자고 마음먹었다. 대기실 구석에 앉아 ac 아웃렛에 어댑터를 꽂고 노트북을 연결해 이 글을 쓰고 있다.

탑승 수속이 11시 50분으로 밀렸다. 대기실은 갑자기 사람들로 미어터졌다. 돗대기 시장 같다. 무슨 일인가 물으니 송크란 휴일로 한국에 가는 사람들과, 아침부터 송크란 때문에 항공기가 연착하여 밀린 사람들이 몰렸단다. 그래서 전세기가 3대나 동시에 출발한다. (여러 이유 탓에 동남아의 중산층이 가장 선호하는 관광지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같다) 어느 나라에 가나 축제는 일정을 틀어지게 만드는 귀신같은 것이다. 축제 때는 이동이나 숙소 구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축제를 요리조리 피해가는 것을 기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술 먹은 한국인 아저씨가 옆에서 고성을 지르고 있다. 여행사에 사기 당했다고 소리 지르는 것 같은데, 비행기 한두 시간 연착한 걸 가지고 뭘 그리... 아무도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지만 참 열심히도 소리를 지른다.

담배나 한 대 피우려고 흡연실에 들어가니 어떤 한국인이 말을 걸어오며 한국 담배를 권한다. 고맙게 받았다. 화보 촬영차 태국에 왔다는 것이다. 음식 값이 싸다면서 식당에서 한끼 식사로 15만원을 썼단다. 그 시간에 누군가는 미얀마에서 42도 뙤약볕에 죽을 고생을 하고 있었다(45도라는 설도 있다). 방콕 가면 에어컨 펑펑 나오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한끼에 무려 10$나 하는 음식으로 우아하게 배를 채우자, 뭐 그런 다짐을 하면서. 담배를 다 태우고 나니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왠지 나와는 클래스가 다른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나를 오지만 찾아 빡세게 여행하는 용가리같은 비일상적 존재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아는 비일상적인 여행이란 이런 것이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 얘기하면서 미얀마 북부의 외국인 여행자 제한 지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북부 기점 도시에 도착하면 버스를 이용하지 않고 픽업을 탄다. 픽업으로 30분에서 한 시간 단위로 짧게 이동한다. 무수한 검문소가 있으므로 여행자 티나는 복장을 하지 않는 편이... 해가 지는 오후 6시가 넘을 때까지 제한 지역으로 계속 밀고 들어가서 도시에 도착한다. 외국인 여행자 숙박이 인가된 숙소를 제외하고는 외국인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이미 해가 져서 오도가도 할 형편이 못되고, 미얀마 사람들은, 참, 친절하다. 태국에서 따지렉을 거쳐 육로로 미얀마에 입국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그 역은 가능하다. 그리고 미얀마에서 중국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인도는 모르겠다. 하지만 시도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한번쯤 장기여행을 해 봐서 인지 도시에서 도시를 잇는 것이 아닌, 아무도 안 가본 곳을 가는 것이 요즘은 여행 같다고 느끼고 있고, 가끔(그걸 가끔이랄 수 있을까?) 만나는 히피같은 작자들은 나와 달리 그런 비일상적 여행을 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인터넷에 블로그 따위를 안 올리고 책도 안 쓴다. 그래서 세상에 알려진 바가 없다. 알려지면 대단한 오지탐험가쯤 되는 오해를 받는다. 이를테면 한비야같은 사람. :) 구설을 통해서만 몇몇 이름과 사연이 알려지고(대개는 어느 나라의 '아무개'가 어떻게 몇 년을 여행했다는 식으로), 우연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 그 도시의 가장 싸구려 숙소의 도미토리가 이상적인데 마치 이들 숙소는 체인점이라도 되는 것처럼 히피 해픈 라인을 연결하여 도시에서 도시로, 점에서 점으로 가늘고 희미하게 이어져 있다. 아마도 내가 그런 여행자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던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싶다 -- 싼 숙소만 찾아 가니까. 그들을 통해 다른 여행자들과는 약간 색다르고 상대적으로 '진기한' 경험담을 들을 수 있다. 마치 신밧드의 모험처럼. 하지만 그건 남들 얘기고, 해보지 않은 나와는 상관없다. 이런 직업 생활하면서 가능한 것도 아니다. 여행과 직업생활 중 어떤 것이 더 재미있다고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었다. 그러니 교대로 해 보고 나서 몸이 뜻대로 잘 안 움직일 때 다시 평가해 보자.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는 올 때보다 더 형편없었다. 기내식, 서비스, 기타 등등... 무의식적으로 포장도 안 뜯은 모포를 챙겨 가방에 넣었다.

아침, 랜딩 후 이어지는 지루한 택싱이 끝나고 인천 공항에 도착. 검역소에서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i hvae nothing, nothing to declare. 인천은, 서울은, 한국은 마치 거대한 에어컨 룸 같다.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고 덜덜 떨면서 버스를 기다렸다. 크룽 팁 담배곽에서 마지막 가치를 꺼내 빨았다. 입맛이 쓰다.

내 앞에서 서양인 둘이 어떻게 버스를 타야될 지 몰라 헤메고 있었다. 내 옆에 앉아있던 싱가폴 항공 기장이 그들을 도와준다. 나와 가는 방향이 같다. 602-1.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버스를 타려니 카드가 되지 않는다. 어제부터 왜 이리 말썽인가. 원화가 하나도 없어 10달러를 내고 7000원짜리 (어이없이 비싼) 버스표를 끊고 잔돈으로 2500원을 거슬러 받았다. 카드 받기를 거부하는 운전사나, 환율을 적당히 때려맞춰 적당히 잔돈을 거슬러주는 두 양반에게 그래도 삿대질을 하고 으르렁거리지 않았다. 여긴 모든 것을 협상하고 타협해야 하는 여행지가 아니다. 안되면 안되는 거고 주는대로 받으면 되는거다. 이 곳은 한국이다. 게기면 표 안 팔고 버스 안 태워준다. 무서운 여행지다.

인도네시아에 지진과 해일이 덮치기 바로 전 인도네시아 보르부두르 유적지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휴가 계획은 그랬다. 항공권을 안 끊은 아내의 게으름이 내 생명(?)을 구했고, 그래서 바꾼 여행지가 고생만 죽어라고 한 미얀마였다. 동남아 3대 고대 유적지 중 두번째가 그렇게 끝났다. 동남아(south east asia)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 독일인 학자였다. 지리적 편의상 지어진 그 이름보다 나은 것은 정녕 없었을까.

집에 와서 짐을 풀고 잤다. 휴대폰으로 전화가 와서 깼다. 태국에서 카드 사용하셨죠? 네. 거래를 중단시켰습니다. 동남아에서 말이죠... 그러니까... 불법 도용... 그래서... 안되고... 카드를... 그러므로... 다시... 발급하세요...

이런 망할. 이불 덮고 다시 잠을 청했다. 노트북 배터리는 완전방전되어 고물이 되고 회사에 안부 인사하니 지난 2주 동안 파란만장한 사연이 절절하게 흘러나온다. 나는 내가 없어도 일은 잘 돌아간다고 굳게 믿었다 -- 굽힐 수 없는 사내의 신념으로.

--끝--

총 여행일수: 미얀마(7일), 방콕(4일) = 12일
총 여행비용: 294+490 = 784$

미얀마 여행 경비: 168+26+17+83 = 294$

* 방콕->양곤 항공권 6600밧(168$, 푸켓에어 한달 오픈), 밍글라돈 공항 출국세: 10$

* 숙박비: 양곤(2박, 6+5=11$), 만들래(2박, 6$), 시뽀(1박, 1500짯), 바간(2박, 7$) = 약 26$
* 입장료: 보타따웅(2$), 쉐다곤(5$), 바간(10$) = 17$
* 교통,음식,기타비용: 환전(70$ = 63000chat, 환율 900chat/$), 보유액(12000) = 75000(약 83$)
* 항공권, 공항세를 제외한 일평균 비용: 126/7일 = 18$

태국 여행 경비: 360+104+26 = 490$

* 인천<->방콕 항공권: 세 포함 360000원, 돈무앙 공항 출국세: 500+500 = 1000baht = 26$

* 숙박비: 방콕(4박, 400밧) = 약 10$
* 교통,음식,기타비용: 3600밧 = 약 94$
* 항공권, 공항세를 제외한 일평균 비용: 104/4일 =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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