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1

술자리에서 부른다. 스티프(stiff, 시체)를 읽으며 낄낄 거리다가 버스를 잘못 탔다. 간만에 웃기는 책이다. 택시로 갈아 타면서 그 동안의 트레이닝이 효과가 있는지, 내일 연습 삼아 동해안에 가볼까 생각했다. 황가는 50cc 오토바이로 방향을 바꿨다. 함께 자전거 타이어로 일본 땅을 밟아보자는 계획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 같이 갈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지. 나 혼자 라도 가야지. 부슬비가 내렸다.

8/12

느즈막이 일어나 아침밥을 해먹다가 휴일 나흘 동안 멍하니 집에 틀어박혀 건강에도 안 좋은 컴퓨터만 들여다 볼 것이 아니라 어제 술집에서 헛소리 한 대로 동해안에 가기로 했다. 누나한테 전화하니 동생 때문에 방문하기 힘들단다. 숙소 하나가 날아가는군. 홀씨 지도로 위치 검색해 좌표를 찍어보다가 데이텀이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전에 고양시 중남미 문화원을 gps에 입력해 놓고 찾아가다가 200m 정도 어긋났다. 아무래도 데이텀을 Japan을 사용하는 것 같다. 국토지리원도 거의 표준인 wgs84 대신에 japan을 사용해서 데이텀 변환이 아주 귀찮았다. 홀씨 지도는 그러니까... 무료라는 점 이외에 거의 쓸모가 없었다. 다행히 알맵 딜럭스는 wgs84인 것 같다.

12:20pm, 얼른 준비해야 할텐데, 찜질방 닷 컴과 '야후 거기'를 뒤져 숙소를 알아내고 그것을 알맵 딜럭스에서 다시 검색해 경위도를 얻었다. 야후 거기는 의외로 쓸모 있다. 그렇게 해서 두 시간에 걸쳐 동해, 울진, 포항, 경주의 찜질방 좌표를 얻은 것이 작업의 전부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서울시 지도를 찬찬히 들여다보니 동서울 터미널까지 자전거로 갈 수 있을 것 같다. 준비를 끝낸 시각이 3:00pm.

짐:

* 전자기기: gps, pda, 모바일폰, pda 충전 어댑터. 이것들을 넣을 비닐봉투.
* 자전거관련: 휴대공구, 예비튜브, 펑크 패치 셋, 백라이트, 휴대용 에어펌프
* 옷가지: 반바지 한 벌과 쿨맥스 팬티 하나는 비닐봉투에 쌌다. 그리고 입고 있는 수영복 바지, 쿨맥스 긴팔 티셔츠, 등산 손수건, 손가락 끝을 잘라낸 작업 장갑, 모자
* 기타: 스카치 테이프, 가위 -- gps를 스템에 고정하기 위한 것.

저울로 무게를 달아보니 가방 포함해 3.4kg, 별 것 없는데 의외로 무겁다.

BB나 패달, 또는 스프라켓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일단 점검을 받아보려고 동네 자전거 포에 들렀는데 문을 닫았다. 두어 군데 들러 봤지만 자기들 제품이 아니라고 손봐주기를 거절한 채 산 곳에 가서 물어보라고 한다. 야속한 주인들이지만 그 중 한 아저씨가 미안하다며 말릴 틈도 없이 wd-40을 기어에 뿌려준다. 어, 뿌리면 안되는데...

중랑천 입구까지 잘 나갔다. 그런데 지루하다. 중랑천 건너편으로 넘어가니 자전거 도로가 끊겼다. 어디로 가야 자전거 도로가 나타나는지 모르겠다. 2호선 지하철 역을 따라 강변 역까지 간신히 갔다. 도착하니 6:30pm, 집에서 버스 터미널까지 가는데만 3시간이 걸렸다. 중간 중간 길을 헤메고 자전거 포가 보일 때마다 들렀더니만... 어이가 없군. 자전거를 터미널 앞에 묶어놓고 얼른 동해행 표를 끊었다. 강원도 가는 사람들이 창구마다 바글거린다.

버스에 자전거를 싣겠다고 하니 어떻게 실을 꺼냐고 묻는다. 잘 실을 수 있다고 웃으며 대꾸했다. 자전거는 버스 짐칸에 쉽게 들어갔다. 배가 고파서 김밥과 바나나 우유를 사 먹었다. 버스는 3시간 조금 넘어 동해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11시가 넘은 시각이라 사방은 컴컴하고 터미널이 시 외곽에 위치한 탓인지 참조할만한 지형지물이나 길을 물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처음 와 본 도시라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gps를 스카치 테이프로 스템에 고정하고 스위치를 켠 후 첫번째 목표로 내비게이션을 시작했다. 말하자면 악천후 계기비행인 셈이다. 10여분 화살표를 따라가니 오차 범위 20m 이내에서 화정원 찜질방을 가르켰다. 알맵 지도에도 안 나온 장소를 어림잡아 찍었지만 gps는 아주 양호했다.

자전거 여행할 때 찜질방을 전전한다는 얘기를 동호회에서 익히 들었지만 자전거 보관을 어떻게 하는지가 궁금했다. 창구 여직원에게 물으니 지하 기계실에 놓아 두란다. 찜질방에 들어서니 사람들로 바글거린다. 술 먹고 들어와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사람들은 대부분 서울에서 올라온 관광객들인 것 같다. 배가 고파 미역국 하나 시켜먹고 잠을 청해 보려고 했지만 사위가 시끄러워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마치... 난민 구호 캠프 같다.

8/13

선풍기 옆 구석 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사람들이 오락가락 하며 선풍기를 껐다 켰다를 반복하느라 부스럭 거리고(이 선풍기 어떻게 켜는 거에요? 라고 깨워서 묻기도 한다...) 가끔은 허벅지나 발을 밟고 지나갔다. 잠을 설치며 뒤척였다. 햇살이 눈부셔 일어났다. 멍하니 앉아 있었다. 별다른 계획은 없고 오늘부터 그저 아래로 내려가면 된다.

정신 차리고 샤워 한 후 체중을 재어 보았다. 어제는 66.6kg, 오늘도 66.6kg, 언제나 그렇듯이. 그리고 어째서 수년 전부터 저울로 몸무게를 잴 때마다 별일 없으면 66.6kg가 나오는지 의아하다. 내가 바로 정신이 육체를 제어한다는 살아있는 증거? 아마 몇 년 전에 공교롭게도 몸무게가 66kg였는데, 이왕이면 600그램만 더 더해서 분위기 로맨틱하게 만들어보자고 작심했다. 그렇게 되더라.

8:30am 출발. 햇살이 '소름끼치게' 싱그럽다. 시계를 보니 기압은 1010밀리바, 약한 측풍, 아침 기온은 음지에서 27.5도 가량. 양호하군. gps를 트래킹 모드로 맞추고 목표지점2, 3, 4를 route로 맞췄다. 이렇게 해두면 3일 동안 울진, 포항, 경주를 차례로 거치게 된다. 부산에 가려다가 경주가 자전거 하이킹 하기 좋다기에 수십년 전 수학여행 가서 어리버리 둘러보다가 지나친 유적이나 한가하게 둘러보는 것도 좋겠지 싶어 부산 대신 경주로 최종 목표를 변경했다.

몇 번 검토해 봐도 마찬가지다; 동해안 도로는 7번 국도를 따라 주욱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이처럼 쉬운 루트도 없을 것이다.

찜질방을 나오자 마자 uphill, 아침부터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업힐, 다운힐, 업힐, 다운힐을 반복했다. 1차선, 2차선을 왔다갔다 하는 도로임에도 뒤쫓아오는 버스가 위협적으로 크랙션을 울리며 빵빵 거리지 않고 조용히, 슬며시, 배려 하면서 멀찍이 옆에 거리를 두고 지나쳐갔다. 역시 강원도야. 빌어먹을 서울 시내 같지 않다고.

동해시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한참을 지나도 삼척이 안 보인다. 겨우 삼척 동쪽 외곽에 다다라 수퍼 앞에 쭈그리고 앉아 우유와 빵으로 허기를 때우고 물을 한 병 샀다. 잠시 쉬었다. 기온은 29도. 7번 국도는 삼척 외곽을 따라간다. 다리를 건너 삼척역을 지나 아래로 내려갔다. 업힐, 다운힐이 계속 반복되었다.

다시 한 시간이 지나 다리 옆에서 쉬었다. 싯포스트가 자꾸 덜렁거려 조여야 할 것 같다. 트럭들이 쌩쌩 옆으로 지나간다. 담배 한 대 물고 열심히 휴대용 공구로 작업하고 있는데 자전거를 타고 가던 친구가 옆에 섰다. 어디까지 가세요? 묻는다. 울진이요. 아 저도 오늘 울진 가요. 그런데 이 길 맞아요? 글쎄요 이 길 맞는 것 같은데...

7번 '국도'가 갑자기 자동차 전용도로로 바뀌는 지점이다. 그래서 차들이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하는 곳이다. 좀 물어봐야겠네요, 하더니 사라진다. 멋진 자전거다. 한달 내내 거리에서 자전거만 보이면 물끄러미 쳐다보는 버릇이 생긴 탓에 그의 자전거가 최소한 60만원 이상 가는 '그럭저럭 쓸만한 수준', 그러니까 델로어급은 된다는 것을 대충은 알았다. 상의, 하의 모두 저지를 갖추고 등에 달라붙는 전용 가방을 매는 등 복장이 나하고 엄청 비교되었다.

여행 다닐 때 쓰는 구깃구깃한 모자에 인부들이 작업용으로 쓰는 고무 밑창 달린 장갑을 가위로 손가락 나오게 잘라 내고 등산 상의에 수영복 하의를 입은 나하고는 참 비교 많이 된다. 자전거는 또 어떻고. 어설픈 MTB에 억지로 갖다붙인 짐받이, 정체불명의 잡동사니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gps를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 놓았으니 참 없어 보이는게, 마치 유럽 배낭 여행자와 인도 배낭 여행자만큼이나 격차가 컸다. 어쩌겠어, 자전거 여행은 장비가 아니라 근성으로 하는거지, 암!

그 친구가 돌아와서 말한다. 이 길 말고요, 저쪽 해수욕장으로 나는 구도로로 가는 것이 낫대요. 하긴 그렇겠다. 자동차 전용 도로에 들어가서 갓길에 짜부러든 채 오들오들 떨면서 갈 수야 없으니까. 아 고마워요, (장비 때문에 기가 죽어서) 먼저 가세요. 라고 말했다. 예 그럼 수고 하세요. 그 친구가 멀어진다.

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패달질을 시작했다. 시작하자 마자 업힐이다. 언제 끝나는건지 원. 해는 중천에 떠올라 기온이 서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다리가 뻗뻗해진 무렵에 업힐이 끝났다. 언덕 아래로 바다가 새파랗게 보인다. 지평선 너머는 경계가 불투명하다. 구름이 띠엄띠엄 흘러가고 그 위에 군림하는 태양이 성질을 갈군다. 고갯마루에 이르자 시야 중앙 아래에 하얀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신나는 다운힐이다. 바람이 귓가로 스쳐가고 모자가 펄럭였다. gps의 속도계에는 45kmh가 찍혔다. 길이 구불구불해서 속도를 더 올리는 것은 겁이 난다. 브레이크를 간간히 잡았다. 앞서 가던 친구와의 격차는 10분 정도 밖에 안 되는데 벌써 한참 지나갔는지 그림자도 안 보인다.

넘은 고개는 한치이고 언덕에서 본 아름다운 백사장은 한치밀 해수욕장이다. 다운힐이 끝나자 기분좋은 평지가 주욱 펼쳐졌다. 하맹방 해수욕장을 지나 개천이 보이길래 잠시 쉬었다. 11시 무렵. 자전거를 제방에 자빠뜨리고 다리밑 그늘로 기어들어가 웃도리를 벗고 개울로 뛰어 들었다. 시원하다. 20분쯤 물속에 몸을 담그고 물장구 치고 놀면서 담배 한 대 빨다가 올라왔다. 너무 기분 낸 것 같군. 자, 다시 출발해야지.

어? 그런데 아까 본 친구가 버스 정류장 앞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정류장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인사 하고 먼저 간다고 빙긋 웃었다. 바로 옆에 시원한 개울 있는데 왜 버스 정류장 처럼 사방이 막혀 바람 한 점 들어갈 틈이 없는 곳에 홀로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일까? 아, 그렇지. 그는 져지를 입고 있었지. 나야 수영복 입고 나돌아다니니까 개울만 보이면 뛰어들어도 괜찮지만 그 친구는 좀 그렇겠지. 아마 수영복 입고 자전거 여행 하는 사람 없을꺼다. 하하하.

한참을 갔는데 쫓아오는 기색이 안 보인다. 평지는 끝났다. 업힐, 다운힐을 반복했다. 지긋지긋하다. 근육이 뻑뻑해지기 시작한다. 해는 하늘 천정에서 화살촉같은 햇살을 쏘아대고 있다. 도로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상의는 쿨맥스 임에도 다 배출하지 못한 땀이 배어 나면서 축축하게 젖었다. 힘겹게 업힐을 끝내면 다시 짤막한 다운힐이 이어지고 패달을 밟아도 밟아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언덕이 연이어 이어지면서 지쳐갔다. 대체 어디까지 온 것일까... 지도가 없으니 어디있는지 모르겠다.

황영조 기념 공원을 지나칠 때 앞서가는 자전거가 보였다. 앞에 누군가가 있으면 그를 목표로 삼으면 덜 힘이 든다. 리듬을 그에게 맞추고 천천히, 천천히, 간신히 고갯마루에 이르니 그가 그늘에 자전거를 세우고 앉는다. 옆을 지나쳤다. 쉬었다 가요. 아, 예. 해죽 웃으며 쳐다보니 나이는 들었지만 호리호리한 아저씨, 아니 할아버지다. 좋은 자전거다. 다운힐에서 보니 항력이 없어 잘 나가기 때문에 다음에 이어지는 업힐 중간까지는 무난하게 올라가는 것 같다. 내 자전거는 앞에 자전거 가방을 달아 바람의 저항이 있어 잘 나가지 않는 편이고 브레이크가 무겁게 걸린다. 고작해야 자전거와 짐을 합쳐 그 '좋은 자전거'들과 7-9kg 가량의 차이지만 그 차이는 무시못할 지경이다. 자전거 경량화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 하면, 자전거 차체 무게 1kg 줄이는데 못해도 50만원은 든다. 3킬로 줄이면 150만원이다. 그래서 필요도 없는 1kg가 넘는 짐받이를 굳이 붙이고 온 것이 후회될 지경이다.

아침에 우유 하나, 빵 하나 먹고 500ml 짜리 물병 하나 사온 처지라 지나가다가 수퍼라도 보이면 들르려고 했는데 잘 안 보인다. 일기예보의 기온은 34도 라는데, 실제 도로에서 내 시계로 찍은 온도는 35~36를 오락가락 했다. 쉬었다 가야 한다. 저 멀리 언덕에서 아지랑이가 이글이글 피어 오르고 아스팔트는 더위에 녹아 길 옆으로 몇 센티미터 밀려 있다. 지긋지긋한 업힐, 다운힐이 반복되는 가운데 도저히 더 이상은 기어올라가지 못할 것 같아 자전거에서 내렸다. 내려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다.

여기 언제 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기시감을 느꼈다. 신남 해수욕장이라? 마을 입구에 멀쩡한 간판까지 달려있는 것이 영락없는 관광지 같다. 아주 오래전에 동해안을 거침없이(?)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 들렀던 곳인 것 같다. 반가운 마음에 내려갔다. 동네 전체가 민박촌으로 변했다. 포구 하나와 작은 해변이 있다.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싶지만 기껏해야 10여미터가 안되는 그 중간의 모래밭을 지나갈 생각을 하니 소름이 끼친다. 살 타면 여행 끝이다.

대신 민박집 주인 할머니에게 부탁해 수돗가에서 한참 동안 흐르는 수돗물에 머리를 틀어박았다. 수퍼에서 메로나 하나를 사먹었다. 툇마루에 앉아 할머니와 노가리를 풀었다. 할머니가 옆에 쭈그리고 앉아 마늘을 까면서 이 더위에 왜 자전거를 타고 사서 고생이냐고 징한 영동 사투리로 타박한다. 영동 사람들은 나같은 영서 사람들의 서울말 닮은 '얍삽한' 사투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내 말이 그 말이다. 지난 한 달 동안 연습을 충분히 한 건지, '비교적 쉽다는' 동해안 도로를 대상으로 현지 검증을 하려고 온 것이지 땀을 바가지로 흘리면서 여름을 저주하고 한국도로공사를 저주하고, 개처럼 혀를 내빼고 헥헥 거리는 품위 안 서는 바보짓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동네가 다 민박촌으로 바뀌었지만 인심은 바뀌지 않았다. 심지어 수퍼 아줌마는 이 더위에 미쳤지 쯧쯔 라고 도움 안되는 걱정을 해주기도 했다.

그래도 가야지 어쩌겠나. 할머니에게 인사하고 씩씩하게 일어섰다. 일어서서 고갯마루로 올라가는데 다리에 힘이 안 생긴다. 손수건을 꺼내 물에 적셔 팔다리를 닦고 목에 둘렀다. 십여분쯤 멍하니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조금 있으면 두 시다. 두 시 넘기 전에 반은 가야지.

이 놈에 업, 다운, 업, 다운은 언제 끝나나. 이제 두 시다. 열파가 악마떼처럼 도로를 휩쓸고 지나갔다. 눈썹에서 떨어진 땀방울이 안경을 타고 공공연하게 흘러내렸다. 볼이 미끈거리고 입안이 타들어갔다. 졸립다. 바야흐로 신경계의 셧다운이 일어나려 하는 것 같다. 업힐 몇 개 하고 지쳐 나가떨어져 잼버리 공원인지 하는 곳의 송림 속으로 자전거를 들이받듯이 몰고 들어갔다. 급제동하다가 페달의 뾰족한 모서리가 허벅지를 긁어 피가 맺혔다. 신경 안 쓴다.

피서 나온 몇몇 가족이 돗자리를 펴고 고기를 구워먹으며 한가하게 즐기고 있다. 고기 굽는 냄새를 맡으니 머리가 확 돌아버렸다. 마침 전화가 울려 김씨 아저씨가 밥 맛있게 먹고 술 한 잔 하며 잘 놀고 있다고 안부 전화를 걸었다. 그래... 염장을 질러라.

생각해 보니 아침에 우유, 빵 쪼가리 하나 먹은 걸로 지금까지 버틴게 기적이지. 밥을 안 먹어서 그런거야. 아니야, 그 동안 업힐 연습을 게을리 한 거지. 이쯤이면 충분하다고 자만한거지, 고작해야 30분짜리 업힐 연습을 하루에 한번 한 걸로 지구를 다 정복할 수 있다고 뻔뻔하게 군거야, 그런데, 드라군이 출동하면 어떨까? 별별 잡 생각이 다 든다. 비좁은 벤치에 몸을 다 누이지 못한 채 그 나마도 벤치가 기울어 몸도 절로 반쯤 기우뚱한 자세로 누워, 먹을 꺼라고는 자일리톨 껌 두엇과 미지근한, 1/3쯤 남은 물을 아끼느라 홀짝이면서 이러고 있으니 처량하다. 옆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얼음물을 마셔도 안 시원하다느니 하는 말을 늘어놓으며 남은 음식을 바리바리 싸서 자리를 떠났다. 그들이 고기를 쩝쩝, 물을 꿀꺽꿀꺽 맛있게 먹는 그 소리를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담배 한 대 빨았다. 담배는 pain killer다.

오후 3시. 심장이 헐떡이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업힐, 온 몸이 타는 것 같다. 이번에는 목표가 분명하다. 눈에 보이는 첫번째 음식점에 들어가 밥을 먹자. 첫번째 음식점이 해장국집이다. 작은 마을을 거쳐가는 운전수들이 끼니를 해결하는 곳 같다. 열량이 제일 높아 보이는 해장국을 주문했다. 꽁꽁 얼린 물을 내준다. 1.5리터 들이 병의 반을 비웠다. 대체 땀이 얼마나 흐른건지 알 수가 없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니 밥이 입에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 밥 더 줘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물이라도 더 마셔요, 여기 물이 아주 맛있어요. 정말 맛있네요. 그러더니 내 빈 병에 물을 채우라고 물을 한 통 더 꺼내준다. 정말 고맙습니다!!

다시 업힐이다. 언덕만 보이면 아주 돌아버리겠다. 구름이라도 해를 가려줬으면 고맙겠고만. 방금 음식 먹은 것들이 소화되면서 더위와 더해져 체온은 점점 높아져만 가는 것 같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쿵쿵 뛴다. 안장에서 내렸다. 한 친구가 내 옆을 스르르 지나쳐 간다. 가볍게 눈인사를 주고 받았다. 고갯마루에 이르니 그가 그늘에서 자전거를 세운 채 헉헉거리고 있었다. 우리 둘 다 땀을 비오듯이 흘렸다. 짐받이를 보니 흘낏 지도가 보인다. 대체 이 길이 언제쯤 끝나요? 내가 물었다. 원덕 까지는 계속 이렇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어디까지 가세요? 울진이요. 탄식하듯 대꾸했다. 저는 오늘 울진까지 가려고 했다가 원덕에서 쉬려고요. 원덕? 원덕은 어디지? 얼마나 먼 거지? 얼마나 먼지 무슨 상관이겠어 일단 나는 울진까지는 갈 것이다. 힘 냅시다. 내가 먼저 인사하고 출발했다.

그 친구와 나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한동안 같이 달렸다. 나하고 체력이 비슷한 것 같다. 딱히 말하자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 젊은 친구는 근육질 몸이고 내 몸에는 근육 비슷한 것을 찾아보기가 힘든 형편이다. 그와 내가 비슷한 체력이라는 점에서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체중 대비 머슬 파워인 것 같다. 대략 70kg 쯤 되어 보이는데, 그가 울퉁불퉁한 근육을 가지고 있을 지언정 여분의 4kg을 부양하려면 나만큼이나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w/kg라는 단위는 썩 잘 들어맞는 것 같다. 마라톤 선수들이 닭처럼 바짝 말랐고, '갸날픈 몸매로 세계를 여행한 여자들'이 부지기수인 것을 보면.

맛있는 물이 다 떨어졌다. 다운힐중 휴게소가 보였다. 빙과류중 폴라포를 집었다. 탁월한 선택이다. 폴라포는 500원에 거의 얼음덩어리와 당분이 주성분이고 용량이 140ml 밖에 안된다. 메로나 같은 것은 한 입에 꿀꺽 삼킬 수 있지만 폴라포는 얼음 덩이 때문에 140ml를 입에 다 넣으려면 5분은 걸린다. 급해도 천천히 먹을 수 밖에 없고 다 먹어도 그 용량이 140ml 밖에 안되니 액체로 된 음료수보다 몸을 식히고 수분을 섭취하는데 이상적이다. 왜 예전에는 이걸 몰랐을까. 폴라포를 맛있게 쪽쪽 빨아먹고 있는데 아까 그 친구가 언덕을 질주하는 것이 보인다. 씨익 웃어 주었다. 고개를 끄떡이며 마주 웃는다. 세워서, '폴라포를 먹어요. 이거 끝내줘요'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원덕에 이르렀다. 개울이 보인다. 웃통을 훌렁 벗고 개울로 뛰어 들어가서 몸을 식혔다. 기분 끝내준다. 동네 사람들이 개울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어 흡사 미친놈처럼 보일까 두려워 얌전히 '냉탕'을 즐겼다. 아, 정말 살 것 같다. 개울이 계속 나타났으면 좋겠다.

길 옆에 있는 임원 해수욕장에 다다르니 오후 4시다. 이번엔 해수욕을 즐겼다. 차갑고 짭짜름한 물 속에서 열을 식혔다. 나곡 해수욕장에도 들렀다. 오후 5시. 혼자 놀아도 상당히 재밌다. 자맥질을 몇 번 반복하고 나니 몸에 소름이 돋는다. 해가 서편으로 멀리 가 버리자 해수욕장에는 그늘이 드리워졌다. 바닷물은 상대적으로 차갑다. 여기서 민박을 할까 아니면 울진으로 들어갈까 고민했다. 그래도 울진까지는 가보자. 다시 출발. 이번에는 웃통을 벗고 그야말로 수영복 차림으로 달렸다. 땀이 나서 다시 입었다. 쿨맥스 긴팔 티셔츠, 성능 끝내준다. 왜 진작 이걸 안 입었나 싶다.

7번 국도를 벗어났다. 앞에 개천이 보여 몸을 담그고 싶어서 개천가까지 갔다. 발을 담그니 물 비린내가 물씬 풍긴다. 2급(하)수다. 얼른 다리를 뺐다. 강원도를 벗어나자 마자 하천이 이 모양이 되다니 거참 신기하네. 울진 원자력 발전소를 지나쳤다. 울진 원자력 스포츠 센터에 들렀다. 비타500 한병을 자판기에서 뽑아먹고 안면 몰수하고 화장실에 들어가 팔다리를 씻었다. 샌달도 박박 씻었다.

다시 출발. 터널을 지날 때마다 뒤쫓아오는 차량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려온다. 무섭다. 마치 눈알을 히번뜩이며 이빨을 자근자근 가는 나쁜 늑대들에게 쫓기는 기분이다. 내장과 심장이 덩달아 쿵쾅거려 서둘러 패달을 밟았다.

7번 국도에서 한참 벗어났기 때문에 길 찾기가 어렵다. gps의 나침반은 진행방향이 맞다고 표시하고 있지만 어딘지 을씨년스럽다. 차 한 대 안 지나가는 외진 도로의 차량 정비소에 이르니 사방에서 개들이 미친듯이 짖어댄다. 이리 가면 맞아요? 가다가 길이 막히면 공항로로 우회하면 됩니다. 도로가 끊긴 지점에 이르렀다. 새 도로로 우회하면 되지만 공사중이라고 도로를 막아놓은 쪽으로 들어섰다. 얕은 오르막 경사가 이어지는, 시원하게 죽 뻗은 도로 중간에 폭주족 애들이 썩 훌륭한 오토바이를 모아놓고 앉아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이 길로 죽 가면 울진 나와요? 네. 그중 한 친구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그들 옆을 고작 시속 14kmh로 스쳐가는 나를 보더니, 대단하십니다 존경스럽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빌어먹을 자식들 누굴 놀리나. 이렇게 체통을 구기면서 발질 또는 지랄하고 있는 나 보다는 니들이 훨씬 더 멋있어 보인다. 라고 안 들리게 중얼거렸다.

gps를 보니 울진까지 8km 남았다. 거의 다 온 셈이다. 막힌 도로 마지막 지점에서 풀밭에 대자로 누웠다. 잠시 후 모기와 날파리들이 몰려와 살갗을 물어 뜯었다. 풀잎이 정강이를 베고 있어도 신경쓰지 않았다. 힘들다. 정말 힘들다. 이래 가지고서야 포항까지 갈 수 있을까.

일어섰다. 해가 지고 있다. 미등이 있긴 하지만 시원찮아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고 헤드 라이트도 없다. 해가 지는 시각은 7:17pm. 여명을 고려하면 7:30pm. 그전까지는 울진 시가지에 도착해야 한다. 7시다. 해가 곧 진다. 해 지면 가로등 하나 없는 지방도에서는 좆된다. 패달을 힘차게 밟았다.

다행히 울진 시가지에 도착했다. 차분한 시가지다. 마음에 든다. 가면서 저렴한 가격에 단백질을 효과적으로 섭취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반짝, 햄버거가 떠올랐다. 햄버거집을 찾자. 시내 중심부에 이르니 롯데리아가 보인다. 자전거를 세우고 들어가 불고기 버거 셋에 콜라 대신 오렌지 쥬스를 시키고 감자칩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콜라를 한 잔 더 시킨다는 것이 직원이 리필로 알아듣고 돈도 안 받고 채워준다. 이게 왠 횡재냐? 원래 롯데리아에서 리필이 되나? 단백질과 수분 보충을 끝내고 gps 지시에 따라 찜질방을 찾아갔다. 찜질방에서 맥주 한 잔 하기로 하고 해바라기씨도 샀다.

욕탕에 들어가기 전에 몸무게를 재어봤다. 64.4kg, 사우나를 마치고 나오니 64.1kg, 그새 2kg이 빠졌단 말인가? 햄버거 200g, 오렌지 쥬스+콜라 하면 500g은 족히 될 터이고 그동안 먹은 음식과 물의 양을 생각하면 실제 빠진 것은 10시간 만에 4~5kg? 전율을 느꼈다. 아내에게 꼭 권해줘야겠다.

찜질방이 어째 동네 목욕탕 스러워 보인다. 찜질방이 돗대기 시장같다. 안에 식당이 없어 전화를 걸어 동네 가게에서 냉국수를 시켜 먹었다. 메뉴는 냉국수, 온국수, 미역국 뿐이란다. 대낮 동안 수분을 섭취하고 배출하는 것은 그렇다치고, 염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먹은 음식만으로는 부실하고 충분치 않은데. 이틀째 제대로 염분을 섭취하지 못했다. 눈 딱 감고 세포들이 뽀드득해지길 기원하면서 목욕탕의 이빨 쑤시는 소금을 한 모금 집어 삼켰다.

8/14

이번에도 잠을 설쳤다. pc 방이 없어 포항까지의 도로 사정을 조사하지 못했다. 나와보니 자전거가 어째 좀 이상하다. 누군가가 세자리 숫자로 돌아가는 키락을 열어놨다. 하지만 훔쳐가지는 않은 것이 장난 치면서 키락을 깬 것에 스스로 흐뭇해진 것 같다. 자식.

근육이 욱신거린다. 울진 시가지를 빠져 나가면서 옆에 터미널이 보였다. 가지 말자. 더 이상 가면 고통스럽기만 할 뿐이다. 실험은 끝났다. 실험 결과: 아직 여행할 수준이 못 된다. 지구력을 강화하고 업힐 연습을 더 많이 하자. 포항행 7번 도로에서 방향을 틀어 터미널로 돌아섰다. 서울행 표를 끊으려다가 경주 가는 차가 보이길래 얼떨결에 경주행 버스표를 끊었다. 아무래도 대미는 '관광'으로 장식해야지 싶다.

울진에서 포항까지 가는 길은 비교적 완만하다. 가는 길에 키락의 바뀐 번호를 알아내려고 000-999 사이의 조합을 시도했다. 쉽게 풀린다. 이런 종류의 자물쇠는 원래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동해에서 울진까지 gps에 찍힌 주행거리는 78.5km다. 이래저래 쉰 시간을 빼면 8시간 동안 78.5km를 달린 것이니 시간당 10kmh로 잡으면 울진에서 포항까지 117km면 10시간에 충분히 주파할 수 있을 것 같다. 라고 생각했지만 오늘도 어제처럼 10시간 넘게 35도를 넘는 더위 속에서 주행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지나치게 교만한 것이다.

원래 계획은 포항까지 가서 하룻밤 자고 포항에서 경주까지 30여 km를 달려서 경주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를 타는 것이다. 남들 다 하는데 나는 못하는 것 뿐이다. 체력이 안되니까.

경주 시외 버스 터미널에서 내렸다. 자전거를 꺼내는 도중에 서두르다가 다시 페달에 정강이를 긁혔다. 피가 맺혔다. 관광 안내소에서 자전거 도로 지도를 얻었다. 불국사까지 얼마나 걸려요? 안내 데스크 아가씨는 불국사까지 18km이며 2시간 걸린다고 말했다. 희안하네? 18km 가는데 2시간이나 걸린다니. 그럼 대부분 그 지긋지긋한 업힐, 다운힐 반복이란 말인가? 그것은 경주 도로가 거의 평지나 다름없다는 '사실'과 배치된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나왔다.

터미널에서 출발해 대릉원, 첨성대, 계림, 석빙고, 안압지, 국립경주박물관 코스를 밟았다. 자전거로 돌아다니기 정말 딱 좋다. 경주 박물관 가는 길에서 주행 중 물병을 꺼내 마시다가 물병에 햇살이 반사되어 눈이 부셔 왈칵, 사래 걸려 컥, 핸들이 틀어지면서 내리막길에서 가로수와 들이받았다. 핸들을 놓을 새도, 물병을 던질 생각도 못하고 미련하게 오른 팔과 다리로 나무를 밀다가 긁혔다. 이런 젠장. 오른 팔 소매가 찢어지고 팔이 긁히고 다리도 긁혔다. 양쪽 정강이와 팔 다리에 무수한 상처와 멍이 생겼다.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나 많은 상처가 생기다니... 욱씬거린다.

박물관에 들어서자 화장실부터 찾았다. 수건에 물을 적셔 피를 닦아내고 돗대기 시장처럼 바글거리는 박물관 구경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나왔다. 사람이 많으니 집중이 안된다. 날은 오지게 덥다.

상처가 쓰리고 아침부터 먹은 거라고는 바나나 두 쪽 뿐이라 허기가 져서 불국사행을 포기하고 시내로 들어섰다. 뭘 먹을까 한참을 두리번 거리다가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 식당이 보여 무작정 들어갔다. 아... 이게 그 경주 밀면이구나. 4천원이란 저렴한 가격에 얼음덩이가 송송 뜬 푸짐한 국수가 나왔다. 면발이 쫄깃하고 국물이 시원하면서 얼큰한 것이 그럴듯 하다.

배가 부르니까 갑자기 희망적인 생각이 들어(방금 전에 바보같은 짓을 하다 팔 다리가 상처 투성이가 되어 스스로를 자책하며 의기소침했는데) 불국사를 향해 패달을 밟았다. 새삼스럽게 음식의 소중함을 느꼈다.

자전거가 어째 무겁다. 뒷바퀴를 흘낏 쳐다보니 바람이 없는 것 같다. 불국사 초등학교 앞에서 지나가던 할아버지한테 내가 앉아 있을 때 뒷바퀴가 어떻냐고 물어보니 빵꾸났단다. 어, 펑크인 거냐? 펑크 패치가 있지만 거리에 쭈그리고 앉아 펑크를 때울 생각을 하니 끔찍하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자전거 가게를 찾았다. 마침 장터 근처에 있어 장기 두고 있는 자전거 가게 아저씨한테 3천원 주고 때웠다. 내가 때우려고 노력했더라면 아마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구멍이 워낙 미세해 튜브를 물에 담그고 한참을 이리저리 굴려서 간신히 찾아낸다.

그 동안 장터를 구경했다. 시골장 같다. 거참 신기하다. 경주는 관광 산업으로 꽤 큰 도시라고 믿고 있었는데. 아침에 본 여러 관광지보다 장터 구경과 동네 청년들이 8.15 기념 운동회 하는 걸 구경하는 것이 더 재미있다. 술과 음식을 동네 사람들에게 거저 나눠주는데 점심을 배터지게 먹은 것이 아쉽다.

불국사까지 주행시간만 1시간 20분, 펑크 때우고 구경하느라 1시간, 족집게 처럼 정확하게 시간을 맞춘 관광안내소 안내양에게 경탄했다.

불국사 주차장에 자전거를 대충 세워두고 가방도 그대로 놔뒀다. 훔쳐갈만한 것도 없으니까. 훔쳐가봐라. 그냥 확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겠다.

화장실에 들러 웃통을 벗어 빨았다. 소금끼가 묻어 하얀 자국이 나 있다. '옷가지 빨지 말 것'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내친 김에 팔 다리도 깨끗이 씻었다. 절집에 가는데 옷차림이 단정해야지 무슨 헛소리야?

불국사는 어렸을 때 본거나 지금 본거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볼거리는 많지 않다. 울궈먹기도 이런 울궈먹기가 없을 것이다. 다보탑과 석가탑은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답다. 한국문화의 여러 방면에서 나타나는 그 담백함과 깔끔함은 한국인의 개같은 민족성과 심하게 배치되어 보일 때도 있다. 음, 이를테면 아시아나 항공의 기내 서비스는 세계 최고 수준인데, 걔네들이 세계 최고 수준이 된 이유는 개같은 한국인들을 워낙 많이 상대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라고 믿는다. 그런 아름다움인 것이다...

석굴암까지 가는데만 50분 걸린다기에 덥고 지쳐서 그냥 근처 잔디밭에 앉아 그저 빙과류 마시면서 시간을 때웠다. 가이드북을 들고 다니는 일본 애들이 보여 광복절인데 한국에 찾아와 관광을 즐기는 일본애들의 깡에 경탄했다. 불국사 관람한 소감이 어떻냐고 물으니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헤헤 웃더니 그냥 달아난다. 얘들아, 내가 비록 몰골은 심하게 없어 보여도 불교면 불교, 이슬람이면 이슬람, 힌두교면 힌두교, 조금씩은 다 안단 말이다. 일본 갈 때 두고보자. 말 걸었는데 무시하다니... 영어로 해서 그런가... 일본인들이나 한국인들이나 우물안 개구리라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해 보였다. 한국에는 심지어 신문의 국제면에서 쓸만한 기사가 거의 하나도 없다고 볼 수 있었다. 그저 해외토픽 수준이지.

보문관광단지로 향했다. 야트막한 업힐이라 길은 아주 쉬웠다. 그래도 땀이 비오듯이 흘러내려 휴게소에 들러 폴라포를 하나 사 먹었다. 수분을 섭취한 세포들이 몹시 기뻐한다. 맛있어 보이는 팥빙수를 먹고 싶지만 배가 무거울 것 같다. 한가하게 오리배 떠다니는 모습을 관람했다. 보문관광단지의 마스코트는 아무래도 오리배와 현대xx건물 인 것 같다.

전혀 발 담그고 싶은 기분이 안 드는 2급수 형산강변을 따라 시내로 천천히 주행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멈추지 않고 경주 주변을 내내 돌고 있다. 대나무숲이 물결치면서 피리 불듯이 낮게 부우부우 우는 소리를 낼 것만 같다. 그야말로 서라벌에 부는 바람이다. 자전거 모는 것이 전혀 힘들지 않았지만 더위 때문에 지친다. 대교 눈높이 전국 축구대회가 마침 벌어지고 있었다. 대회장 식수터에 가서 물과 차를 얻어 마시고 잘한다고 박수도 쳐줬다. 애들 축구 잘하네?

시내로 들어서니 오후 5시. 여전히 덥다. 돈을 찾으러 은행의 ATM에 들어가니 시원해서 신발 벗고, 음, 아예 드러누었다. 왜 진작 이러지 않았을까, 무료로 시간 보내면서 더위 식히기 딱 좋은 장소인데. 감시 카메라에 어떻게 찍혔을 지 가관도 아니겠다. 감시 카메라를 고려해서 엉덩이를 잠시 까 보였다.

gps의 좌표만 믿고 찾아가보니 시외버스 터미널이 나온다. 어? 이게 아닌데... 찜질방은 어디간거지? 아뿔싸, 이 좌표는 시외버스 터미널 좌표다. 찜질방 좌표를 입력하지 않은 것이다. 관광 안내소는 문을 닫았고 지나가는 택시 기사한테 물어보니 경주 시내에는 찜질방이 없다는 것이다. 찜질방은 시 외곽으로 나가야 있다나? 어떻게 찾아 가야 하는지 지도를 내밀고 물으니 그 따위(!) 지도로는 찾아갈 수 없다고 손사래를 친다. 이 지도 괜찮은데?

어쩐다. 날이 어두워지는데 자전거 몰고 다니며 찾을 수는 없고 시내 구경도 하고 싶고, 어차피 내일 터미널에 다시 돌아와야 하니 터미널 주변에 즐비하게 널린 자전거 가게를 찾아 다니며 자전거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한 가게가 5천원 주면 맡아 주겠단다. 자전거를 맡기고 시내 구경을 했다. 중심가란다. 롯데리아에 들러 에어컨 바람 쐬면서 단백질 보충하고 콜라 리필해서 두 번쯤 더 마시고 나왔다. 에어컨 앞에서 기체조도 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찜질방이 어딨냐고 물으니 동대 부근에 있단다. 이런... 동국대면 아까 경주 시내로 들어오면서 지나친, 다리 건너편인데. 뭐 그게 어렵다고 택시기사들이 안 알려준건지?

동대 황토 찜질방에 택시 타고 갔다. 버스 타고 가면 되는데 어쩌나 보려고 택시를 타 봤다. 택시 기사가 한참 헤메면서 찾았다. 3500원 나왔다. 택시 기사가 일부러 헤멘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음... 왜냐하면 나는 경주 시내 지리를 안다. 자전거 타고 한 바퀴 돌아 봤으니까. 다음날 아침 우연히 동대 앞에서 시내로 돌아가는 택시를 다시 타게 되었는데 그때는 1900원 나왔다. 경주 택시 기사 양반들이 그 따위로 하면 그네들 인상만 구겨질 뿐이란 것을 제주도 관광택시들이 오래전에 이미 전례를 만들었다고 보는데.

찜질방이 다소 생각외다. 목욕탕은 없고 샤워실에 수건 하나 달랑 준다. 내일 아침에는 어쩌라고? 물론 찜질방이 가동중이지도 않았고 에어컨 조차 켜지 않았다. 그냥 7천원 짜리 도미토리다. 그래도 경주 시내의 값비싼 호텔이나 여관에 비하면 감지덕지다. tv로 남-북 축구 보면서 주인 아줌마와 노가리 까고 가게도 봐주면서 맥주 한 잔 하고 아무 방에 들어가 누웠다. 새벽 두 시까지 한 사람 두 사람, 사람들이 꾸역꾸역 찾아와 아무데나 널부러져 잤다. 분위기 참 마음에 든다. 나는 유일하게 선풍기가 달려있는 넓은 회의실을 통째로 차지하고 방바닥을 이리저리 굴러 다녔다(돌바닥에 오래 머무르면 미지근해 지니까 포지션을 바꿔서). 아무도 안 들어와 혼자 편히 자고 있는데 여자애들 셋이 한꺼번에 들어와 회의실의 반을 차지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반만 굴렀다.

8/15

요란하게 한방 황토 찜질방임을 과시하는 이곳은 들창으로 아침이 가차없이 침투하는 구조라 6시에 어쩔 수 없이 깨어났다. 3일 내내 제대로 잠을 자 보지 못했다. 샤워하고 짐을 챙겨서 숙소를 나와 동대 앞까지 걸어가 택시를 타고 시외 버스 터미널에 도착. 자전거 가게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아 돼지국밥 한 그릇 시켜 먹고 터미널 의자에 앉아 시간을 죽였다.

자전거 가게 주인 아저씨가 내 자전거가 괜찮은 자전거란다. 글쎄, 그다지 안 좋다. 거의 한 달 타고 돌아다녔더니 BB나 페들 어딘가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어쩌면 스프라켓을 통째로 갈아야 할 지도 모르겠다. 프레임은 괜찮지만 디레일러만 빼고는 어쩐지 부속들이 싸구려 같다. 최근 며칠 타고 다니는 동안 걸리적 거리는 소음이 들려 서울 올라가면 자전거를 제대로 한 번 점검 받아야겠다.

자전거를 싣고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16300원. 울진에서 경주로 오는 온갖 군데 다 서는 시골 완행 버스를 13500원 주고 타고 왔는데 그보다 낫다. tv에서 노무현이 광복절 기념사를 하고 있었다. 60주년을 맞은 이번 광복절은 여러 행사가 덧붙여 지면서 나름대로 특별해진 것 같다. 졸다 깨다를 반복했다.

남부 터미널에 도착. 어떻게 강북으로 가야할지... 무작정 반포대교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마침 반포대교 밑으로 자전거 도로가 나 있다. 이렇게 해서 서울시를 빠져나가는 두 가지 주요 경로를 다 알게 되었다. 동서울 터미널과 남부 터미널까지 가는 길.

평균 20kmh 속도로 꾸준히 14km를 달려 집에 도착했다. 중간에 폴라포도 하나 먹어줬다. 보약이다. 팔 다리가 상처 투성이다. 코끝과 다리가 새카맣게 탔다. 약국에 들러 약을 사서 바르고 여행 내내 먹고 싶었던 복숭아를 사먹었다.

자전거 타고 혼자 다니는 사람들을 여럿 봤다. 자전거 여행은 타지 여행과 참 많이 비슷하다. 서로 만나면 아는 척도 하고. 수고 많으시다.

그런데 돌아와서 보니 살이 좀 타서 화끈거리는 것 빼고 다리에 근육통이나 뭐 이런 것이 없다. 신기하네...

뻔뻔하게 나흘 내내 수영복만 줄곳 입고 돌아다니면서 보이는 개울이나 바다에 마음껏 뛰어들 수 있어 아주 좋았다는 것 빼고, 이번 자전거 여행에서 건진 것은 고작, 건강 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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