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xico City

여행기/Mexico 2003. 3. 23. 06:00
빨래하다 걸리면 50 USD를 벌금으로 내야 한다고 숙소 곳곳에 적혀 있었다. 하루에 대여섯 시간은 기본으로 걷는데 양말과 속옷은 빨아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생까고 빨래 했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했다는 불길한 소식을 들었다. 광장에서 벌어지는 평화 시위에 미국에서 관광 온 노인네들과 함께 참석했다. 생전 처음으로 이런 류의 시위에 자발적으로 참가해 본다. 촛불 따위를 들고 전쟁에 희생된 어린이들을 위해 2분간 묵념 해보기도 처음이다. 진심으로 평화를 기원하는 양심의 발로 때문은 아니고, 저녁인데 볼거리는 다 봤고, 배도 부르고 딱히 할 일이 없어서였다.

메모 - 이강주, 캥거루를 위하여. 만화책.

아직 더럽게 빠른 에스파뇰에 적응이 안된다. 언어에 영 잼병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어떻게 일주일이 지나도 이 모양일까 좀 한심했다. 숫자도 다섯까지 밖에 못 세고... 먹고 이동하고 자고 하는데는 별 문제는 없었다.

할 말이 없어져 가는 현상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광범위한 지식을 쌓아왔음에도 정작 입을 열면 '헬로' 한 다음에는 입이 막혔다.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이 계속 안녕히 잘 지내길 바라면서 자리를 떠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음. 어제 만난 일본인과는 꽤 오래 얘기했던 것 같다. 한 시간쯤? 뉴욕에 살고 있다던데 무척 외로운가 보다. 나한테 말을 다 거는 걸 보니. 옆에서 자고 있던 두 미국인 호모 친구들하고는 '헬로'까지만 했다. 오늘은 부시가 이라크를 공격했을지도 모르는 지경인데 지미 헨드릭스가 구닥다리라서 시대에 안 맞는다고 주장하는 미국인의 얘기를 멀거니 들어줬다. 지미 헨드릭스를 구닥다리로 치부할 수 있는 사람이 미국인이라는 점이 새삼스럽거나, 공교롭지는 않았다. 그럴 배짱이 있는 녀석들은 대개 미국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러니까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하겠다는 닭대가리가 태어나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나라인 것이다. 그 옆에는 지미 핸드릭스가 구닥다리가 아니라며 당신(지미 핸드릭스가 구닥다리라고 주장하는 작자)의 사이콜로지가 의심스럽다고 주장하는 미국인 여성이 있었다. 그런 걸 논쟁꺼리라고 떠들어대는 바보들이 태어나서 양육되는 나라가 미국인 것이다. 그나마 괜찮은 미국인들도 있다고? 음... 소수의 괜찮은 미국인들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고, 부시만 닭대가리라는 주장에도 찬성하지 않는다. 미국 전체가 그렇다는 얘기고, 그 점에서는 당분간(한 30년?) 생각이 바뀔 것 같지가 않다. 심지어 멕시코의 어느 한가한 관광지에서 미국인들과 평화 시위를 함께 하고 있음에도, 그들이 자기가 부시를 뽑지 않았다고 주장하거나 당장 부시를 사임시켜야 한다며 목청을 높여도 그렇다. 현재의 미국인들은 부시를 사임시키고 싶어하지 않으며, 전쟁 반대가 53%라는 뻥을 믿지도 않는다. 보편적인 미국은 하고많은 반전운동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침공을, 부시를 지지하는 것 같다.

평화 시위에 참석한 동양인은 어떤 일본인 여성과 나 뿐이었다. 그녀는 무척 예쁘게 생겨서 딱히 구경할 만한 것이 없었던 나에게 좋은 피사체가 되어 주었는데, '헬로'라고 말하고 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씁쓸히 돌아서야 하는 최근 형편상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음. 전통적인 미국의 동맹이었던 멕시코는 이번에 미국의 협력 요청을 거절한 반면(반전 반미), 일본과 한국은 미국을 지원하는 30개국 가운데 끼어 있다는 사실이(참전 용미) 왠지 나라 떠나서 여행하는 사람에게 초라하고 쪽 팔리게 느껴졌다. 내가 만일 지금 중동에 있었더라면 이슬람 형제들에게 뭐라고 구차스럽게 변명을 늘어놓아야 하나 난감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슬람 형제들도 후세인이 또라이라는 점에는 공감하고 있었고 이라크 일은 귀찮아서 신경쓰지도 않는 편이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당사자일지도 모르는데도 반전운동을 하지 않았다. 웃기지 않는가? 그들은 물론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아니다. 내가 뽑은, 또는 뽑으려고 했거나 국민의 각의로 선출된 대통령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 섭섭한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가. 우리는 왜 이렇게 미국 앞에 비굴해야 하나. 여하튼 다양한 감정을 느꼈는데 한 일분쯤 이런저런 감정을 느끼고 그만 두었다. 기분 좋고 '평화로운' 저녁에 할 짓이 못된다. 그래서 또 밥 먹고 샤워하고 브라질 친구와 멕시코 친구와 노닥거렸다. 그들은 게스트 하우스를 나가서 새벽 4시까지 살사를 추다가 돌아와서 말 그대로 뻗었다. 밥도 안 먹고. 어떻게 밥도 안 먹고 밤새도록 춤을 춰댈 수 있는지... 이 나라의 무궁한 저력 앞에서는 도무지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한겨레, 중앙, 오마이뉴스, 뉴스위크, 뉴욕타임즈, 와이어드. 조선일보는 늘 마지막으로 읽었다. 다 읽고난 후 마지막으로 조선일보를 보면 여러 모로 신선했다. 그리고 이런 기괴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잘 이용해서 이익을 볼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보기도 했다. 앞으로 변화한 나 자신에게 적응하려면 조선일보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데에서 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이를 먹으면 누구나 어쩔 수 없이 닭대가리, 돌대가리, 머저리가 되어 가는 것은 자연의 순리다. 일부는 자신은 아니라면서 끝까지 저항하지만, 그 자신을 좀 더 닭대가리같아 보이게 치장하는 역할을 하는 정도다. 인풋에 대한 소화력은 떨어지고 타성에 젖어 생활에 쫓기게 되고 호기심과 정열은 사그라들고 이런 모든 현상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뇌세포의 자살이 있고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니까. 늙은이들의 닭질을 비웃던 내가 늙어가고 있으니, 한동안은 스스로를 조롱하느라 바쁠 것 같다. 마치 조선일보를 욕하듯이. 흐흥...

돈을 달라고 구걸하는 거지도 있지만, 기타 하나 들고 노래를 부르면서 구걸하는 마리아치도 꽤 되는 것 같다. 노래를 잘 불러서 하는 수 없이 2페소를 건네주었다. 노래를 잘 하는데야... 왠간한 강심장이 아니고는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를 타러 갔다. 메히꼬 시티(시우다드 데 메히꼬가 맞다!)에 도착하니 지금까지 돌아봤던 멕시코의 도시들과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삭막하달까.

지하철 역에 들어서자 각 역을 상징하는 아이콘들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문맹자들을 위한 배려인 것 같다. 환승 역에는 처음 보는 종류의 프랙탈 사진들이 복도를 따라 진열되어 있었다. 복도의 한 부분은 전기가 나갔는지 어두컴컴했다. 지나가보니 천정에 별자리를 그려놓은 곳이다. 지나가는 동안 즐거웠다. 그러면서 시시껄렁한 한국의 지하철 '벽화'들이 생각났다.

멕시코 시티에는 일종의 집단적 히스테리가 존재했다. 어느 가게를 가던, 아주 작은 가게라도 탈출구를 가리키는 표식판이 있었다. 그간의 끔찍스러운 지진이 이들의 정신상태에 끼친 영향이 대단한 것 같다.

성당 둘과 정부 관사에서 보쉬 Bosch를 연상시키는 리베라 Rivera의 '멕시코 전근대사를 주제로 한 혁명화'를 구경했다. 멋지다. 조금 있으면 리베라의 연인이었던 Frida Kahlo의 영화가 극장에 걸릴텐데... 헐리웃의 유명 여배우들 사이에서 그 역을 맡으려고 경쟁이 치열했다던데... 근처의 꼬요아깐에 가면 그녀의 연인에 대한 신경질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구경할 수 있다던데... 갈까말까... 하지만 리베라의 그림 보다는 과달라하라에서 보았던 오로스꼬 Orozco의 그림이 더 내 취향에 맞았다. 어쨌거나 두 화가 모두 재밌는 색깔들, 이를테면 서구 예술에 찌들어버린 동태눈으로 보았을 때, 색감이 매우 신선하고 강렬하다. 왜 프랑스에는 가면서 멕시코에는 예술 하러 오지 않는 것일까. 평생 예술 할 분위기가 팍팍 느껴지는 곳인데... 음식도 맵고 맛있고...

박물관에 들어가려니 입장권을 사라고 독촉했다. 거의 반사작용이 되어 버렸는데 '소이 에스뚜디엔떼' i'm a student라고 말하니까 아무 말 없이 그냥 들여 보내주었다. 알고보니 가이드북에는 입장료가 적혀 있었고 학생 할인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더 뒤져보니 학생 할인이 언급된 곳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땡 잡았다! 경험상, ISIC가 있으면 박물관은 무조건 무료였다! 세상에 이런 멋진 나라가 존재한다.

어쨌거나 들어간 박물관이 Templo Mayor였는데 사전 정보 없이 들어갔다가 비참한 기분이 들어 허겁지겁 나왔다. 아즈텍 문명에 관한 대단한 규모의 박물관이었고 보다가 기가 질려서 나왔다. 스스로가 쪽 팔렸다. 아즈텍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 공짜로 들어가서 너무 미안했다. 관련 유적군을 다 돌고나서, 공부도 좀 하고 나서 봐야지 이해가 가는 장소였다. 죄책감마저 느껴진다. 유럽사는 달달 외면서도 아시아 문화권과 아메리카 문화권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점이... 아무리 생각없이 하는 여행이라지만 그들에게 다소간의 예절은 갖춰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시쯤 소나 로사 Zona Rosa를 찾아 헤멨다. 장미의 지역? 핑크빛 구역? 이름이 왜 그 모양인지 가자마자 알았다. 내 취향에는 안 맞는 동네다. 멕시코나 미국의 부자들이 엘레강스를 즐기는 곳 쯤? '서울 수퍼'가 눈에 띄었다. 멕시코에 교포가 엄청나게 많이 산다던데 한국인은 꼬리조차 구경해 본 적이 없다. 8시쯤 돌아올 때는 거리가 텅텅 비었다. 마치 LA의 기분나쁜 밤거리를 연상시켰다. 드문드문 거지같은 차림의 일없는 애들이 거리에 서서 지나가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밤에 한가하게 나돌아 다닐만한 분위기는 아닌 듯 싶다. gps에 만사를 맡겨 놓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건 길을 잃어도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1시간 20분 쯤 걸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어제, 그제 왜 애들이 거리를 할보하며 축제를 벌였고, 오늘 밤 광장에서 왜 축제가 벌어지는지 알았다. 3월 20일이 춘분이다. 봄이 오는 것을 축하하는 축제다. 미국인과 얘기하다가(대체 여긴 왜 이렇게 미국인이 많은 거야!) 그가 equinox(춘분)를 이해하지 못해서(게다가 만나는 놈마다 하나같이 무식하다, 심지어 엊그제 뉴욕에 산다는 일본애는 돈 끼호떼나 세르반떼스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개나 소나 다 아는데...) 한참 곰곰히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궁리했다. 그러다가 생각난 것, 그러니까 춘분은 말이야... 해가 정동(90)에서 떠서 정서(270)로 지면서 해가 떠 있는 시간과 해가 없는 시간이 각각 12시간이 되는 일년에 두 번 있는 천문학적인 이벤트를 말하는거야. 피라밋과 아즈텍의 피라미데스나 여러 고대 건축물 이를테면 스톤헨지나 한국의 첨성대 같은 것들은 춘분 때 정확하게 그 한 사면이 빛을 받도록 되어있지! 아...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히게 설명 잘했다. 농경술과 춘분의 관계에 관한 얘기를 하려다가 단어가 막혀서 더 설명할 수 없었다. 농경술과 천문학의 관계, 즉 문명의 태동과 천문학의 관계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잘난 척 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건축물을 지을 때 equinox와 solstice에 맞게 지은 것을 고대인의 대단한 지혜 운운 하던데, 뭐가 지혜인지 모르겠다.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일관성을 찾아내는 것은 지혜가 아니고 그냥 과학이라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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