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꾸까라챠

여행기/Mexico 2003. 3. 24. 07:29
'라 꾸까라챠'가 에스파뇰로 '바퀴벌레'였구나... 라 쿠카라차~ 라 쿠카라차~ 아름다운 그 모습~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피라미데스는 내일 보러가기로 했다. 내일도 늦게 일어나면 그냥 안 가고 말자고 생각했다. 대신 박물관만 세 군데를 돌았다. 박물관이 너무 많아서 어디부터 봐야할 지 갑갑하다. 거리를 아름다운 보라빛으로 물들인 하까란다 꽃나무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날씨가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현대 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바깥으로 나오니 다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지난 일주일간 하루에 30-40킬로미터(6-8시간)는 걷다보니 지난 2-3개월 동안 운동을 안 한 탓인지 다리가 몹시 아팠다. 숙소로 돌아갈까 하다가 오로쓰꼬와 리베라의 그림을 더 보고 싶어 진통제를 한 알 삼켰다.

리베라 미술관에서 신음처럼 나이스를 연발하고 있을 때 자기도 나이스하다고 생각한다며 말을 붙여오는 친구가 있었다. 속으로 내 나이스함은 너의 나이스함보다 우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국식 억양을 사용해서 반가웠지만 국적은 모르겠고(묻질 않았으니) 자기는 홍콩에서 3년쯤 살았는데 홍콩이 무지 좋았더라며 중국에 흡수된 이후로 사정이 어떻냐고 나한테 물었다. 홍콩이야 뭐... 대다수가 만다린을 열나게 배워 본토의 그 괴상한 공산주의(ridiculous communism)에 적응해 잘 살고 있다고 대꾸했다. 그랬더니 자기는 멕시코에 넘어와서 온갖 사기를 다 당해서 멕시코에 정이 떨어진다면서 자기가 이 500ml짜리 미네랄 워터를 얼마주고 샀는지 아냐고 물었다. 관심 밖이라서 가만히 있으니까 자기는 최근에 정가가 5페소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멕시코인들은 그걸 8페소에 판다고 개탄했다. 이건 왠 뚱딴지 같은 소리냐? 난 500ml 짜리 물을 4페소 이상 줘 본 적이 없는데? 자기는 인도에도 갔다왔고 태국에서도 몇 개월 있었다면서 이런 넘들은 처음 본다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중얼거리더라... 이해가 안 갔다. 관광지나 터미널에서 정가보다 비싸게 파는 일은 있었지만 멕시코인들이 사기를 친 적은 없었다. 멕시코에 넘어온 후부터 난 협상을 아예 안했다. 파는 음식이나 물건 가격을 가게 앞에 다 써붙여 놓았으니까. 아참 그와 헤어지면서 생각난 건데 내가 홍콩인인줄 알았나 보다. 세상에는 꼭 이상하게 당하는 녀석들이 있게 마련이다. 거짓말 하는 것 같지는 않고... 지금도 거리를 헤메면서 사기 당하고 있을 그... 착하게 생긴 녀석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싼 인터넷 까페를 찾다가 흘러흘러 소나 로사까지 왔다. 전쟁 소식이 궁금해서 미치겠다. 한 시간에 10페소 하는 곳을 보고 다리도 아프고 해서 더 이상 찾지 않고 들어왔다. DSL을 사용해서 인지 인터넷 속도는 환상적이다. 400kb/sec 정도 나오니 파일 전송이 순식간이네?

서울 수퍼에 들러 미역이라도 장만할까 하다가 이젠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대신 부페집에 들어가서 69페소(6.1 USD)짜리 거나한 점심을 먹었다. 얘넨 저녁 만찬은 없고 점심을 아주 잘 먹는 편이라 하루종일 돌아다니다가 저녁에 거나하게 식사를 하려면 좀 난감해지곤 했다. 아마 저녁은 간단히 먹고 디스코나 바에서 술을 걸치는 듯. 부페에 500cc 맥주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두잔째를 따라 주려고 했지만 워낙 배가 불러서 입맛을 다시며 거절했다. 대체 어디가서 6불 주고 멕시칸 스타일의 요리들, 무제한의 빵과 또르띠야에 스프에 7가지 고기 요리와 6가지 소스와 갖은 야채, 거기에 과일과 푸딩과 심지어 맥주를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대답해봐라 배낭 여행자야. 음. 태국이 있었군. 태국에서 10불에 태국 최고라는 요리사가 만들어 준 음식을 먹었다. 태국이나 베트남 음식이 맛있다는 것을 여행 몇 개월 하고 나니까 알게 되었다. 하지만 베트남은 음식값 가지고 장난을 쳐서 재수없는 족속들이다. 음식 가지고 장난 치는 놈들이 제일 증오스럽다.

따꼬스는 음식이 참 재미있고 종류도 각양각색이다. 가판에서 파는 것조차 바로(!) 불고기를 해서 즉석해서 잘게 썰어 또르띠야(옥수수 전병 같은 것)에 얹어 준다. 거기에 양파와 토마토 채 썬 것을 얹고 이런 저런 소스를 뿌리고 멕시코의 거의 모든 음식에 쓰이는 듯한 레몬즙을 뿌리고 손으로 말아 한 입 배어 문다. 담백한 육즙과 시큼한 시트릭산 그리고 매콤한 소스가 입안에서 뒤섞인다. 부드러운 고기와 뽀드득한 야채가 입안에서 함께 씹힐 때는...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입가심으로 고추 절임을 집어 먹으면 입안이 화하고 개운해진다. 하루에 한번은 꼭 먹게 만들었다. 이런 것을 한국에서는 만원 돈 주고 그 적은 양에 입만 다시다가 말고는 했는데... 한국에 돌아가서 다시 멕시코 음식을 먹게 될까? 하나에 300원 하는 것을 거진 2000원에 파는데? 입 다물고 많이 먹어두자. 그나저나 멕시코시티의 가판은 다른 도시보다 좀 맛이 떨어지는 듯... 마이스가 질긴 것이 옥수수 뿐만 아니라 뭔가 부재료를 섞은 것 같다.

이슬람 세계에서 내가 그들의 형제였다면, 멕시코에서 나는 그들의 친구(amigo)다. 형제들 일이 무척 걱정된다. 친구들이 반전 시위를 하고 있지만...

거리에서 반전 시위가 있었다. 무진장 복잡한 도로에서 1-2백명도 아니고 수천 명이 떼거지로 몰려 나와 교통체증을 불러 일으켰다. 구호를 보고 오늘 또 하나 에스파뇰 단어을 배웠다. Guerra는 전쟁이고 Ley는 정의다. 엊그제 대통령궁에서 본 눈 먼 정의의 여신이 떠오른다. 그나저나 이 동네 소칼로는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거리 구석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연주하는 밴드와 매일 벌어지는 별별 공연들, 이벤트들, 할머니나 할아버지나 10대 애들처럼 환호하고 춤을 추고 있었다. 아... 정말 시끄럽고 놀기 좋아하는 '친구들'이다.

미국의 서부와 동부에 사는 사람들이 정서가 다르다고 주장하는 동부 미국인이 있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반전을 주장하는 일부 서부의 철없는 히피들이 뉴욕을 한번 방문해 보면 왜 이라크를 공격해야 하는가 저절로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 새롭게 출현한 미국 돌대가리다. 그의 주장은 그러니까, 알 쿠에다와 이라크의 실질적인 연결고리가 있거나 이라크가 잠재적인 테러국가라서 내비두면 안된다는 것일테고, 시민의 슬픔과 분노의 희생양으로 이라크를 공격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뜻이 되는건가? 내 형제나, 친구들 중에 저런 미국인같은 돌대가리는 없는 것 같다.

그나저나 이 중요한 시기에 바티칸은 예나 지금이나 전쟁이 유감스럽다느니 하는 따위의 안타까운 성명만 발표해 대고 있어서 눈쌀을 찌푸리게 했다. 어서 신비에 싸인 바티칸 소속 비밀 결사단을 풀어야 하지 않나.

오전 11시30분께 암만의 알 후세이니 사원에서 예배를 마친 시민들은 알 하시미 거리를 점거하고 10여분간 “미국은 우리의 적” “바그다드여 영원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어... 암만에 있을 때 숙소가 바로 알 후세이니 사원 앞이었는데... 이집트 얘기도 나왔다. 메이단 타흐리르 주변에 반전 시위 군중이 운집했었다는... 내가 경험하는 한 아랍 국가 중에서 국민들이 미국을 가장 싫어하는 나라가 이집트다. 거진 북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집트는 석유가 나지않아 마음껏 반전,반미를 부르짖어도 된다.

멕시코에 와서 데낄라 한 잔 마시지 않았다는 것이 영... 하지만 백두산보다 높은 고도 2240미터의 세계 최대의 메트로폴리탄에서 그렇잖아도 잘 안 마시는 물을 하루에 거진 2리터나 마셔대고 있는데(엄청나게 건조하다) 술까지 마시면 이렇게 미친듯이 움직이다가 뻗을 것 같아 내키지 않았다. 멕시코 시티를 여행하는 중요한 룰은 가급적 담배를 피우지 말 것과 실외에서 격렬한 운동을 삼가할 것 둘이다. 고도가 고도지만 엄청난 대기오염 때문이다. 담배를 빨다보면 확실히 몸이 축나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럽다.

아스떼까 문명에 관해 공부 좀 했다. 박물관에 가서 쪽팔리게 뭔지도 모르고 멍하니 쳐다본다거나 유적지에서 돌덩이나 걷어 차는 신세는 면해야 겠다. 아스떼까가 그리 대단한 문명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차라리 거진 중국 수준의 대륙적 성향을 가지고 자신의 문화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멕시칸들이 존경스럽다. 한 도시에 이렇게나 많은 박물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나 그런 박물관이 정말로 살아있는 장소로 꾸며져 있다는 점 등등이. 미국식 서부영화에 의해 길들여졌던, 멍청하고 게을러터진 멕시칸의 이미지는 이미 작살났다. 이 나라에는 수준높은 예술가들이 있고 혁명으로 나라를 바꾸는 열정이 있고 가난해도 자존심 하나는 끝내주게 쎈 사람들이 외국인한테 사기 안 치고 구걸해도 몸이 성한 한 뭔가 쑈를 꼭 해서 벌이를 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박물관에 제발 영어로 토를 달아놨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