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 at Zocalo

여행기/Mexico 2003. 3. 27. 08:18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연예인들: 신해철, 김종진, 언니네 이발관, 시나위, 자우림, 신성우, 송백경, 휘성, 부활, 트렌스픽션, 체리필터, 나비효과 ... 그리고 노브레인이 있었다. 노 브레인 조차도 파병이 잘못 되었다는 것쯤은 안다. :)

여태까지 멕시코에서 보았던 그 어느 성당보다도 삐까번쩍한 산토 도밍고에서 내려오는 길에 보기 드물게 쫙 빠진 멕시칸 미녀가 맞은편에서 걸어왔다. 34-24-30쯤? 그 뒤를 느끼한 표정으로 쫓아가는 미국인 젊은이가 있었다. 가관도 아니었다. 날개만 안 돋았다 뿐이지 천사를 바라보는 표정, 천사를 열렬히 쫓아가는 표정이었다. 그 친구 표정이 워낙 느끼해서 가던 길을 멈추고 황급히 콜라를 한 병 사서 입을 헹궜다. 아, 인간의 얼굴에서 저런 표정이 나오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멕시코 거리 이름에는 유난히 날짜를 상기시키는 것들이 많았다. 5 de mayo(5월 5일), 5 de febrero, 16 de septiembre, 기타 등등... 그리고 20 de novembre. 얘들이 뭘 좀 알긴 아는구나 싶어 흐뭇했다. 11월 20일이 뭐하는 기념일인지 찾아 보니 은근히 기대하던 바대로 혁명 기념일. 덕택에 멕시코 혁명기념일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저녁 6시마다 공연이 있었다. 할일없이 길을 걷다가 불쑥 들어간 곳이 와하까 문화국인지 하는 곳이었는데 두툼한 일주일 간의 행사 일정이 적힌 팜플렛을 건네준다. 와하까 시립 교향악단이 쏘깔로에서 연주회를 했는데 시트라우스와 바그너의 멕시코 버전이 이렇게 요란하구나 싶었다. 주로 관악기들이 지랄했다. 개중 리까르도 까스뜨로의 음악이 좀 들을만 했다. 내일은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다는데 글쎄... 그건 또 얼마나 '열정적'일런지 기대가 된다. 이 모든 멕시코 전역에서 펼쳐지는 2주 동안의 행사가 고작 봄이 오는 것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 멕시칸... 징하다 너희들. 그래! 그렇게 무슨 이유를 갖다 붙여서라도 날마다 즐겁게 살아야지 아무렴!!


쏘깔로 광장 옆 까페에서 맥주 한 병 시켜놓고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거리를 구경할 때 새삼 느끼는 바가 있었다. 6시면 일과를 마치고 칼같이 퇴근해서 저녁을 즐기는 멕시칸들. 거리에 즐비한 근사한 바와 레스토랑들. 아름답고 로맨틱하고 재밌는 저녁이라는 것. 이런 곳은 혼자 올 곳이 못 된다는 것.

웃겼다. 하루 생활비 대략 20~25$ 가량. 예쁘고 산뜻한 볼거리들. 구미 당기는 맛있는 음식. 잘 발달한 관광 시스템 등등 매력적인 여건임에도 국내에 멕시코 관련 정보가 별로 없다. 멕시코 시티에만 교민이 2만이 넘게 살고, 지나가다가 짜장면집 하고 사우나하고 당구장 까지 봤는데도, 멕시코가 한국에 덜 알려져 있었다. 터키의 그 초라하고 시시껄렁한 헬레니즘/로만 유적을 보느니 멕시코에 와서 낮에는 유적 관람하고 밤에는 맥주 마시며 즐기는 것이 훨씬 나아 보인다. 이들의 문화유산은 수천년째 살아 움직이고 있지만 내가 본 터키와 이집트는 박제화된 유물 관광의 전형이었다. 여기 미술관에서는 심지어 하루에 한번씩은 현지인들을 상대로 그림 하나를 잡고서 이 그림을 어떻게 그렸으며 왜 이렇게 그렸는가를 설명하는 시간을 갖는다. 멕시코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둘러보면서 말 그대로 문화적으로 상당히 엘러건트한 곳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공연이 끝났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치즈를 듬뿍 얹은 바삭바삭하고 매콤한 나쵸스와 시원한 떼까떼 맥주 두 병을 사와서 침대에 누워 먹고 마셨다. 점심에 부페 먹고 시장통에서 말레 뽀요라는 음식을 먹고(짜장면 소스 같은 것에 닭과 밥을 비벼서 또르띠야에 얹어 칠리 소스를 뿌려먹는) 간간이 따꼬스를 간식으로 먹고 이런 저런 먹거리들을 하루종일 먹어대고 나서 침대에 누우니 발가락 하나 까딱이기도 싫다. 밤새도록 시끌벅적한 유스호스텔에서 선잠을 자느니 두 배나 비싸고 깨끗하고 전망 좋은 '독방'으로 옮기길 잘했다. 그래봤자 옆 호스텔의 깔끔한 도미토리하고 가격이 같다.

누워서 방 천정을 멍하니 보다가 고개를 치켜 들고 사위를 둘러보았다. 들어올 때는 몰랐는데 방 전체가 연분홍색이다. 침대는 더블이고. 앞에 세면대가 보인다. 그 옆에 작은 탁자와 의자, 그리고 거울이 놓여 잇다. 멕시코 시티의 허름한 호텔에 있는 동안 밤새도록 숨가뿐 신음소리가 들려왔는데 여기도 혹시... 얘들은 밤에 할짓 하면서 옆 방에 누가 있던 신경쓰지 않는 것 같던데. 자세를 바꿔서 더블 침대에 비딱하게 누워 침대를 꽉 채웠다.

그런데 로맨스 안 생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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