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axaca -> Tapachula -> San Cristobal de las Casas. 24hrs.

미국 참전 병사 중 멕시코계가 2명 사망해서 난리도 아니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멕시코가 유엔 안보리 차기 이사국이라는 것. 멕시코는 자원과 산물이 풍부하고, 석유도 나고, 3000년 이상의 유구한 역사/문화적 전통을 자랑하고, 엄청나게 넓은 땅에, 혁명도 성공시킨 나라에다가 자부심과 자존심도 강한 나라니(일부 주장에 따르면 스페인의 식민지 점령 당시의 노예근성이 아직까지 남아있다고 비판하지만 국력이 막강하니 그런 것쯤은 이미 극복했으리라 본다) 미국이 멕시코 땅을 먹은 일을 잊지 않았고 반전 반미도 만만치 않다.

여행중 본 박물관 중 '최고'에 속하는 산토 도밍고 문화센터에서 참으로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특히 추장 머리 장식을 달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상과 최후의 만찬은 압권이었다.

따빠출라로 향했다. 저녁에 출발해 아침에 도착. 어리버리한 정신 상태로 과떼말라 영사관을 찾아갔으나 이사. 물어물어 끝까지 고집부려서 택시 안타고 걸어갔다. 어이없게도 버스 터미널에서 바로 두 블럭 뒤였다. 아침부터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한 시간 반을 걸어 과떼말라 국기가 휘날리는 영사관에 도착. 이미 귀소문으로 들었던 것처럼 따뜻한 환대와 함께 즉시 비자를 발급해 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아니다. 여권을 한참 훌터보더니 파키스탄, 이란, 시리아, 요르단을 줄줄이 들쳐 보이면서 꼬치꼬치 그들 나라에 방문한 목적이 무엇인지 묻더니 여권을 들고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더니 안되겠다는 것이다. 어? 이건 무슨 소리여? 30분 동안 영사관과 직원들을 설득하고 애원했다. 미국 비자를 보여주면서 내가 미국 비자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나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엿먹을) 그렇게 까다롭고 엄격한 미국에서도 비자를 받았다. (엿먹을) 자, 내 재산 증명서와 회사 명함과 크레딧 카드가 여기 있다. (엿먹을) 내가 아랍 국가를 방문한 것은 순전히 관광 목적이었으며 이집트를 육로로 가려면 그 길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랍 형제들에게 미안하다...) 얼마나 머물길 원하냐고 물었다. 기회다! 60일! 왜냐하면 60일은 아무도 시도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난 60일 짜리를 받아야 한다. 쿠바에 갔다와야 하니까! 갔다오면 사랑하는 과테말라에 며칠 밖에 있지 못한다. 시리아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이 인간들 정말 독했다. 영어를 알아들음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에스파뇰로 물었고 개중 몇 안 되는 단어를 간신히 알아들어 힘겹게 대답했다. 정말로 60일 짜리를 받고 싶으냐?(에스파뇰로) 그렇다(영어로). 그럼 돈을 더 내야 하는데(에스파뇰로. 알아듣지 못했다). 무조건 고개를 끄떡였다. 50불이다. 원래 가격은 25불이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좋다. 50불 내겠다. 그래서 60일짜리 과테말라 비자를 받아들고 뿌듯한 기분으로 영사관 문을 나오며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모두 그라시아스(고맙다)! 라고 인사했다. 심지어 경비원과 청소부 아줌마한테도.

비자 받는데 시간을 너무 소비해서 산 끄리스또발 데 라스 까싸스로 가는 버스를 놓쳤다. 왜 나는 비자 받을 때마다 경우가 지랄스러운지 모르겠다. 이제사 얘기지만 LA 공항에 입국할 때도 아랍 비자들 때문에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하마터면 2차 입국 심사를 받으러 갈 뻔 했다. 2차 입국 심사란 입국심사대를 나와 조그만 사무실로 들어가 경찰(또는 FBI) 입회하에 심문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어디선가 이것에 관해 읽은 기억이 났었다. 내가 한국에 돌아가 왕복 항공권을 한국에서 받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내 미국 체류 기간은 3월 12일 입국해서 6개월 간으로, 2003년 9월 11일에 끝난다. 그거 보고 한참을 웃었다. 여행자들에게 그걸 보여주면 아주 재미있어 했다. 프랑스 친구는 날더러, 2주년 기념 불꽃놀이는 못 보고 떠나서 아쉽겠네? 라며 가시돋힌 농담을 했다. 911 2주년 기념 아랍권의 보복 테러를 말한다. 3일 만에 미국을 빠져 나왔는데 여전히 잘했다고 생각했다.

싼 끄리스또발로 가는 길은 무척 아름다웠다. 가는 길에 희안한 구름을 보았다. 내 평생에 푸른색 구름은 처음 본다. 푸른색 적란운이란 것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오! 치아빠스! 치아빠스에서 1994년 민중봉기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민중봉기의 주역인 게릴라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그의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멕시코판 체 게바라라는 소리를 듣던 작자였다. 폭스가 다수당을 물리치고 멕시코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 폭스는 정부군과 싸우던 그에게 화해 제스쳐를 취했고 그는 임대버스를 타고 치아빠스에서 멕시코 시티까지 행진했다. 그리고 대통령 궁이 있는 멕시코 시티의 쏘나 로싸에서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연설했다. 그때부터 성공적인 무혈 시민혁명이 발생했던 치아빠스에 관한 꿈을 꾸었고 언젠가 한번은 꼭 가보리라고 다짐했다. 오늘 6년 전의 소원을 이뤘다. 싼 끄리스또발로 가는 버스에서 치아빠스를 보았다. 마치 한국의 시골을 연상시키는 모습, 식민지 양식의 건물이 즐비한 지배세력이 사는 멕시코 북부가 아닌 가난한 멕시코 촌락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렇게 해서 버스로 19시간을 달리고, 배낭을 짊어진 채 어제 오늘 합쳐서 3시간을 걸어 파김치가 된 상태로, 숙소를 잡고 밥을 먹고 인터넷 샵을 네 군데나 전전해서야 간신히 인터넷을 사용하고 지금은 빈둥거리며 놀고 있다. 여기 볼꺼리 라는 것이 소위 토착민들, 아시아에서라면 소수민족이라고 해야겠지만 여기서는 그 수가 워낙 많아 소수민족이라고는 할 수 없는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자기 문화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 토착민들인데, 안 보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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