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enque

여행기/Mexico 2003. 4. 3. 10:34
마야 유적지로 간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 얼른 세수를 마치고 막 출발하려는 꼴렉티보를 손짓해서 세우고 잠시 기다리라고 소리친 후(모멘또! 모멘또!) 바나나를 사서 올라탔다. 기분 좋은 아침이다. 햇살은 깔끔했고 날은 덥지도 춥지도 않다. 여행자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꼴렉티보에 탄 사람은 나와 아줌마 한 명 뿐이다. 매표소에서 학생인데 할인 좀 해달라고 해봤지만 나쇼날 nacional 이라고 생글생글 웃을 뿐. 멕시코 국내 학생증이 아니면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입구에 그 유명한 석관 부조의 모조가 전시되어 있었다. 우주선을 타고 날아가는 죽은 왕의 모습이 새겨진 부조로, 마야 문명을 아주 신비롭게 각색하는 사람들의 주 테마 중에 하나. 진짜를 봐야지 아무렴 하고 무시하고 지나갔다가, 후회했다. 유적지는 물론이고 박물관에도 원본을 전시하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무척 기대했는데. templo inscripcion에도 줄을 둘러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아. 가장 중요한 신전인데... 문 닫을 시간 쯤에 관리인에게 싸바싸바하면 살짝 들어가게 해 준다고 가이드북에 적혀 있었다. ...... 그냥 말지.

유적지는 정글 한 복판에 있었다. 단체 관광객 몇 팀 정도가 소란스러웠을 뿐 대체로 평화스러워서 왕의 무덤에 앉아 싸들고 온 바나나와 망고를 펼치고, 바나나와 망고를 까먹고 행복해진 나무늘보처럼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유적지 위로 매가 날고 있었다. 저 멀리 아득한 정글 너머로 지평선이 보인다. 궁전에서 30분, 그리고 태양의 신전에서 일없이 한 시간을 보냈다. 울창한 밀림이 그늘을 드리우고 시원한 바람이 사이사이를 샅샅이 지나갔다. 좋다.


Temple of the Cross, 내 앞으로 정글 속에 푹 파묻힌 궁전이 보인다

중앙 광장의 궁전을 중심으로 한 구조물들은 그렇다치고 정글 곳곳에 오솔길을 따라 널려있는 유적지를 돌아다닐 때는 기분이 그럴듯 했다. 마침 사람도 없었고, 있는 사람들이라봐야 길을 잃고 이리저리 헤메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마야의 후손들'을 친절하게 안내해 주기도 했다. 이 아줌마는 구르포 에이로, 저 할아버지들은 구르포 비로, 미국인 팀은 지옥으로. :)

망원경을 들고와 정글 속에서 요사스럽게 울고 있는 열대의 새들을 관찰하는 프랑스인들이 있었다. 나도 보고 싶은데... 뭔가 열심히 프랑스어로 논쟁을 벌이는 중이라 끼지도 못하고... 종종 망원경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앗. 그러고보니 망원경이 있으면 망원렌즈를 안달아도 되는 것 아닌가? 망원경의 접안 렌즈에 카메라를 바짝 대고 찍으면 되잖아. 음. 아니군. 상이 많이 흔들리겠구나. 내 것 하고 똑같은 gps를 들고 유적지를 헤메는 사람도 있었다. 그냥 야생의 감각과 개코로 길을 찾았다.

정글 속에서 뭔가가 자꾸 목덜미와 팔등을 물어 간질간질하다. 모기 같지는 않고, 대체 뭘까. 떡대좋은 아줌마가 긁지 말라며 사래질을 한다. 뭐라뭐라 그러는데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냇물에 얼굴을 씻었다. 석회수? 위를 쳐다보니 정말로 석회기둥들이... 그랬구나. 유적지의 건물들은 거친 석회암으로 지어진 것들이었다. 지붕은 A-beam형태로 높고 뾰족한데 벽면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일직선의 환기 시스템을 구성했다. 사실 잘 지었다고는 죽어도 말 못할 건축이었다. 건물의 사면으로 짐작컨대 복도를 따라 긴 그늘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 같다. 석관이 소장된 무덤터는 사방이 꽉 막혀 있어 무덥고 습기가 가득 차 있었다.

박물관에 도착하니 벌써 두 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소녀에게 저 데드 마스크의 소재가 뭐냐고 물었다. 비취인지 옥인지 모르겠다. 그녀는 옥이라고 했다. 마침 그녀의 애인으로 보이는 작자가 나타나서 슬며시 꼬리를 접고 마야 문자들을 쳐다보러 갔다. 유적지에서 너무 시간을 보낸 것이 아쉽다. 한 시간쯤 박물관에서 발견된 부장품을 둘러 보다가 박물관 앞에서 꼴렉티보를 타고 시내로 귀환. 거리를 뒤져 20페소 짜리 menu del dia(오늘의 메뉴)를 잘 먹고 아주 흐뭇해졌다. 우유같은 음료수의 이름이 hochata라는 것을 드디어 알았다.

고생 끝에 windows 2000/xp용 한글 IME를 다운 받았다. 용량이 무려 11메가. 여섯 번이나 끊기고 2시간이 걸렸다. 위성 링크라지만 속도는 느리고 가격은 비싼 편. 이럴 줄 알았으면 산 끄리스또발에서 게으름 피우지 말고 얼른 받아두는 건데. 이제 어떤 운영체계에서도 한글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우어어! 단, USB 포트가 있어야 한다. 우어어! 그런데 한글 쓸 수 있으면 뭘 하지? 딱히 할 일이 없잖아? 우어어어어!!

사진을 200장쯤 찍었다. 그중 몇 장을 버려야 할까 생각하다가 많이 지웠다. 유적의 돌덩이들이야 어디가든 사정을 모르면 다 비슷비슷해 보인다. 사진을 정리해야 하는데 박물관에서 본 것들 때문에 머리속이 뒤죽박죽 되어 어디부터 시작할 지 난감하네...

어제 먹은 맛있는 빵집에서 빵을 여덟 개 샀는데 어제보다 더 싸게 받는다. 웃는다. 그 옆집에서 우유와 담배를 샀다. 200짜리 지폐를 건네니까 30뻬소라면서 아저씨가 50뻬소 짜리 네 장과 15뻬소를 건네 주었다. 200-30=215? 묵묵히 잔돈을 받아들고 시급히 가게를 빠져나왔다. 요즘 머리가 굳어서 뺄셈이 잘 안된다.

식당에서도 그렇고 거리에서 만난 '아미고들'이 어깨를 두들기며 지나간다. 오늘 무슨 날인가? 외국인에게 친절해지는 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