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xmal

여행기/Mexico 2003. 4. 5. 12:57
형광등이 나갔다. 수리하려고 불렀다. 언어가 안 되니까 수화를 사용했다. 형광등이 너무 높은 곳에 달려 있어 우리는 아주 단순한 문제로 추상적이고 애매한 대화를 나눴다. 일단은 현상을, 그 다음에 원인을, 그리고 해결 모색을 위한 방법을 탐구하는... 마치... 천정에 걸려있는 바나나를 따먹기 위해서는 궤짝이 몇 개나 필요할까 라는 문제로 골치를 썩이는 원숭이들처럼.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이런 '표준화된 절차'나 '공통 관심사'가 아니라면 나와 지배인 사이에 대화가 통할 전망은 없어 보인다. 최근 가장 많이 사용한 말은 그래서 habla inbgles?(do you speak english?)와 no entiendo(can't understand) 그리고 no habla espanol(i can't speak spanish)였다.

언어가 안 통해도 외국인 아줌마와 30분 대화한 것 만으로 그 집안 내력을 파악하는 한국 여자를 보고 기가 막혔던 기억이 났다. 여자들은 인간관계를 삶의 핵심적인 요소로 파악하는 것 같다. 아줌마 둘이 모이면 그들이 보유한 전력을 상대방에게 노출시키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그들 사이의 원순적인 공통 관심사이기 때문인 것 같다.

우스말 Uxmal 유적지로 가는 길에 에스파뇰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한국인을 만나 동행했다. 그에게 세계를 간다 멕시코와 중미편을 빌려 보았다. 숙소 정보는 영 떡이었지만 깨알같은 글자로 1200페이지나 하는 내 가이드 보다 유적을 설명하는 수준이 나았다. 세계를 간다 번역판을 읽고 여행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리는 얘기는 아니고, 정말 그렇게 부실한 정보로도 여행 잘 해 나가는 것이 신기하다. 여행을 11개월째 하고 있지만 그들이 나보다 훨씬 여행을 잘 하는 것 같다.

우스말 유적에 관해 그다지 아는 것이 없어 돌덩이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분위기를 즐겼다. 360도 사방으로 정글이 지평선까지 뻗어 있었다. 빨렝게를 본 경험을 바탕으로 단언컨대 우스말 유적이 한 수 위였다. 어쩌면 마야 유적에 관해 얘기할 때 사용하는 용어인 전고전주의와 후고전주의의 차이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 유적의 규모는 비교적 작았다. 작은 유적인데 87뻬소나 받아 먹었다. 그러고도 가장 중요하고 정말 정말 멋지게 생겨 반드시 기어 올라가봐야 될 것처럼 생긴 마법사의 신전(soothsayer니까 예언자쯤?)에 기어 올라가지 못하게 막았다. 인류의 공동 유산인데, 계단이 가파라서 누군가 기어오르다가 떨어져 죽었건 말건 왜 못 들어가게 하냔 말이냐. 왜 호기심을 키워놓고 본전 생각이 나서 관광 수입에 혈안이 된 멕시코 정부를 저주하게 만드냔 말이다. 음. 흥분했군. 빨렝게에서도 기록의 신전에 못 올라갔는데...


마법사의 신전 Mexico 사진 4번째 페이지


마법사의 신전이라고 누가 적어놨는지 모르겠다. 예언자가 맞을 것이다. 예언자도 아니고 사제가 맞을 것 같다. 정글 한 복판에 혼자서 고고하게 서있는 그 신전 꼭대기에서 누군가가 천체의 흐름을 읽고 정확한 달력을 제작했을텐데 그건 최고위 사제들만이 가진 고급 정보에 속하는 것일께다. 고급 정보? 그러고보니 당시에 몇 년 마다 중미 전역의 사제들이 모여 일자 수정에 관한 역법 회의를 했다는 말도 본 것 같다. 그런데 마야인들이 정밀한 달력을 제작하게 된 이유가 짐작이 안 간다. 치아빠스를 비롯한 유카탄 반도의 마야 문명의 전통적인 농경법은 대규모 경작을 하지도 않았고 날씨, 기후와 유달리 깊은 관계를 지니지 않았다. 정글에 불 지르고 땅 파서 옥수수알 심어 놓으면 잘 자랐으니까. 기거나 날거나 걸어다니는 단백질 수집도 용이한 편이고. 일년에 겨우 0.0002일의 오차 밖에 없는 초정밀 달력을 만들어야 했던 이유는 그들의 역법 체계에서 52년 마다 한번씩 세계가 바뀐다는 말도 안되는 개뻥을 사제들이 민간인에게 강요하기 위해서 였을까? 아무리 신앙심이 견고한 사람이라도 52년이 지났음에도 어제와 오늘이 같음을 알텐데 그런 뻥이 통할 리가 없다. 하지만 52년마다 짓던 신전과 문명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해간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자연현상의 경이에 대한 두려움과 그것을 예측할 수 있는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사제의 능력에 두려움을 느꼈을지도.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구분되지 않을 테니까? 어쨌거나 답답한 마야 학자들이 결국 외계인론으로 얘기를 몰고 가는 것이 수긍이 간다. 게다가 낭만적이잖아.

사제들의 '횡포'(구체적으로 어떤 횡포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배자는 늘 포악했으니까)에 저항하는 유카탄 반도의 마야인들이 수천년부터 그들의 피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지독한 혁명 유전자 덕택에 사제 계급을 싹 쓸이하고 스스로 분서갱유를 시도하여 찬란했던 마야 문명이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춘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야인들이 계급사회를 이루었고 당시 로마에서나 있었던 매우 훌륭한 관계수로 시스템을 운영했으면 빨렝게 유적에서는 steam bath의 흔적마저 있었다. 돌을 달구고 그 위에 물을 뿌려 증기탕을 만들었다. 그러니 로마가 최고인줄 알았던 우물 안 개구리 제국주의자들이 경악할 수 밖에 없었을테지.

마야 문명이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현지인과 친해진 어떤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되었었다는 글을 읽었다. 원주민은 그들이 신성시하는 채색화를 고고학자에게 보여주었는데 그때까지 바위에 새겨진 글자는 있었지만 문서로 남겨진 기록이 없었는데 이집트의 꽃게 기어가는 듯한 회화와 동일한 마야 회화를 보았다는 얘기. 그레이엄 헨콕이던가? 신의 지문? 별로 내키진 않지만 초고대문명이라는 매력적인 가설을 만들었던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헨콕 못지않게 '과학'과 '경이'를 빌미로 사기치는 한국의 어떤 집단 때문에 영 정은 안 가는 편이지만.

만일 그들이 정말로 정밀한 달력을 만들기 위한 천체 관측을 할 수 있으려면 몇 가지 필수적인 기구나 지식이 필요하다. 삼각법이나 삼각법과 대등한 원의 성질에 관한 지식, 육분의, 기본적인 천문도, 무엇보다도 시계. 0.0002일의 오차를 가진 달력을 만들었다는 얘기는 많이 봤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서 오차가 그것 밖에 안 나오는지 설명하는 글은 본 적이 없다. 어쩌면 세차운동까지 알고 있거나 지동설과 비슷한 천문관을 가지고 있었을텐데, 그런데 왜 유적지에서는 마야의 전설에 등장하는 뱀 대가리와 새 대가리는 그렇게 많으면서 별들이 신성하게 반짝이는 부조는 없는가. 아... 금성 사원은 있구나. 하지만... 하다못해 점성학이라도... 그리고 수 체계는 물론이고 계산 체계와 측정 도구가 있어야 할텐데 마야 유적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에서 황금으로 수를 놓은 멋지게 생긴 천구도나 천문관측기구는 본 적이 없다. 서기 600년경의 아랍세계에는 있었다. 기껏해야 왜 털없는 짐승의 이름을 털있는 짐승인 것처럼 써놨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알고보니 춘분때 생기는 그림자 모양이 그 짐승의 털모양이었다는 류의 얘기로 마야인들이 얼마나 영악했는가를 설명하는 기괴한 글이나 있고... 시간을 들여서 조사해 볼 필요를 느꼈다. 생각보다 대단치도 않은 건축물과 얼마 안되는 기록으로 어떻게 그들의 수학이랄지 산법이 나왔는지. 인도보다 먼저 0을 발명했다... 계산도 했는가? 그들은 분수를 사용하지 않았다는데? 무리수도 알았을까? 별 기록이 없는데 혹시 어디서 '발명'된 낭만적인 얘기들 아닐까? 혹시 스톤헨지류의 지어낸 이야기들? 스톤 헨지에 외삽해 놓은 자료가 그 돌무더기보다 더 많듯이... 돌덩이를 쪼개는 도구가 돌덩이 밖에 없던 작자들이 어떻게 해서 산법을 개발했는가?

마치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외계인설로 몰고 가는 것 같군. 외계인들이 2000년 후면 완전히 부스러지는 환경친화적이고 멋진 전자시계와 계산기를 줬다.

아니면 치사하게도 지들만 사용하고 노예로 멋대로 부려먹다가 재미가 없어서 떠났다. 음. 미솔하를 보러 간 것도 사실 프레데터가 그런 비슷한 류의 주제를 가지고 만든 흥미 만점의 sf액션 스릴러였기 때문이다.

수만 년 동안 지구는 외계인들의 레저용 사냥터였다. 하지만 무분별한 학살을 지양하려고 지구의 유카탄 반도 지역만 자유 수렵구로 지정해 놓았다. 그래서 외계인들은 유카탄 반도의 마야인들을 사냥하고 살을 발라내 뼈를 수집하여 서재에 걸어두었다. 지구에서의 짧지만 흥미로웠던 휴가을 되새기면서 눈가위가 뻥뚫린 신기하게 생긴 동물의 두개골을 바라보며 흐뭇해 하는 것이다. 마야인들이 워낙 미개한 나머지 위험이 없는 일방적인 사냥 내지는 학살의 재미가 시들해질 무렵, 일부 사냥꾼들은 마야인들에게 한시적으로 도구를 쥐어주고 사냥의 재미를 높였는데 몇 차례 사고가 생긴 후 외계정부가 그런 일을 자행한 불법 사냥꾼들을 적발해 엄벌에 처하고 유카탄 수렵구를 영구히 폐쇄했다. 외계인들이 떠난 후에도 마야인들은 공포심에 사로잡혀 52년 마다 거주지를 옮겼다. 아니 충분히 정착해 살 수 있었음에도 정글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쫓기는 생활을 했다. 그리고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뚜러지게 쳐다보며 외계인들이 쳐들어 오는가를 감시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들의 문명과 삶은 전적으로 이렇게 하늘을 목이 부러져라 관찰하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었다. 잉카 제국이 있었던 나스카 평원은 사정이 달랐다. 그들은 외계인들의 휴양지 였기 때문에 학살을 모면했으며 비행장을 건설하여 멀리서 휴가 온 외계인들을 맞았다. 외계인은 두 종족이었다. 하나는 퀘찰이라 불리던 새 모양의 날개가 달린 종족이었고 다른 하나는 뱀 모양을 한 파충류였다. 뱀 모양을 한 외계인은 지구의 고대 인류를 발전시키는데 흥미가 있었지만, 새 종족은 지구 환경 보호 차원에서 그것을 적극 말리고 있었다. 뱀 종족은 마야인들에게 공공연하게 무기를 쥐어 주기도 했다. 훗날 환경보호자들이 승리하고 조류는 미화가 되어 천사가 되었으며 뱀은 미개한 지구인들에게 악마로 불리웠다. 그들은 전세계 모든 문명권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신화적인 상징이 되었다. 심지어 멕시코 국기는 이들 두 외계 종족의 정치적 분쟁을 상징하는 그림을 국기에 새겨 놓기도 했다.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 였던 마야인들은 그들을 소름끼치도록 생생하게 묘사했다. 박물관에 가면 그들의 모습을 지금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두개골 수집을 본 딴 마야인들의 토착 신앙을 엿볼 수 있다. 우하하하!

메리다 시내에서 네 번이나 인터넷 까페에 들렀다가 컴퓨터들이 부적절해서 돌아섰다. 다섯번째 가게에서 사용을 마치고 나오니 한 시간에 20뻬소란다. 주위를 둘러 보았다. 무심코 호텔에 들어와서 인터넷을 사용했던 것이다. 한 시간에 12뻬소씩 하는 인터넷 까페를 놔두고 왜 이런 곳에 들어왔을까... 소름이 끼쳤다.

새벽 세시가 되어서야 모기에 뜯기면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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