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 SARS 걸린 사람들이 없는게 고추와 마늘 때문 아닌가? 워낙 독한 사람들이니... 마늘이 먹고 싶다. 돼지고기 먹을 때마다 마늘 생각이 나고는 했다. 어젯밤 햄버거를 먹을 때도 절인 고추가 없었더라면 다 먹지 못했을 것이다.

늦게 일어났다. 늦게 잤으니까. 급한 김에 노점 음식을 두 차례 허겁지겁 먹고 뱃속을 미리 물로 가득 채웠다. Chichen Itza로 가는 2등 버스표를 끊었다. 에어컨을 켜도 버스 안은 무더웠다. 입장료 87뻬소(8$). 무시무시하다. 그 돈을 다 내는 멕시코인들도 무시무시했다. 정글을 뚫고 유적지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런 시도를 할 생각을 못 한 것은 입장권이 두 개이기 때문인데... 하나는 손목에 채우는 것이었다. 우스말의 입장권도 마찬가지였는데 한 서양인은 요행을 바라고 우스말의 입장권을 달고 다녔지만 치첸이사의 입장권과 색깔이 달랐다. 사방에는 큰 눈이 부리부리한 유적지 관리인들이 깔려 있었다. 참, 어렵다.

열대에 오니까 짐 무게가 1.5배는 더 나가는 것 같다. 오후의 햇살은 기세등등했다. 삼십분도 안되 팔과 목덜미가 타들어갔다. 바람이 불어줬지만 열풍이라 땀을 식히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유적을 관람하면서 위안이 되었던 것은 옷을 거의 안 입은 굉장한 미녀가 남자들을 이끌고 유적지를 종횡무진 누비는 모습을 시종일관 볼 수 있었던 점이었다. 음... 그런 여자를 졸졸 따라다니는 여러 메뚜기같은 남자들 중에 하나가 되었다. 유적의 보전 상태가 훌륭했지만 여자들의 모습은 더더욱 훌륭했다. 어느새 마야 유적지에 꽃이 잔뜩 피었다. 뜨겁고 강렬한 햇살이 여자들의 옷을 벗겼다. 사실 안 입은 것만 못했다. 입장료가 하나도 안 아까왔다. 그러고보니까 발기가 안되는 늙은이들이 햇볕 정책을 싫어했던 것 같다.


El Castillo. 보고 뻑 가다.

멕시코 사진 다섯번째


유적지를 돌고 나온 시각이 4시. 버스 정류장 앞에는 배낭여행자로 보이는 친구들이 잔뜩 있었지만 Cancun행 2등 버스를 타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어? 이상한데? 한번 들러볼까 했던 발라볼리드 근처를 지나친다. 발라볼리드에서 5km 가량 떨어진 멕시코 교도소를 지나쳤다. 그 교도소의 수감자들이 만들어 교도소가 판매하는 해먹은 우수한 품질을 자랑한다던데... 들를 껄 그랬나.. 왠지 아쉽다. 유카탄 시골은 인도의 촌락처럼 허름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탓일 것이다.

지평선 위로 해가 졌지만 여전히 정글 사이로 뱀처럼 가늘게 뻗어있는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고 있었다. 버스 안에는 손님이 나 밖에 없었다. 맞은편으로 아주 가끔 차가 한 대씩 지나쳤다. 분위기가 영 을씨년스러워 잘못 탄 것인줄 알았지만 운전수가 맞단다. 검은 아가리를 쫙 벌리고 있는 울창한 정글을 버스가 미친듯이 달려갔다. 촌락의 불빛조차 안 보인다. 저녁 9시쯤 되어서야 깐꾼에 도착했다. 안도감에 담배를 연거푸 빨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바글거리는 유스호스텔에 짐을 내려놓았다. 멕시코에 온 후로 유스호스텔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그만 방에 침대를 여덟 개쯤 들여놓아 비좁아 터진데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사방에서 부스럭거려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우스말에서 보았던 한국인을 다시 보았다. 곧 결혼을 앞두고 있는 아가씨였다. 어쩌면 과테말라에서도 다시 보게 될지 모르겠다. 맥주 한 잔 하고 도미토리로 기어가 샤워만 간신히 하고 눈을 붙였다.

호스텔에서 아침이랍시고 주는 것이 몇 안되는 빵쪼가리 달랑 그것 뿐이다. 배가 고파서 편의점에서 라면을 사 먹었다. 국물은 고춧가루가 잔뜩 들은 '한국맛'이지만 면발이 영 꽝이었다. 물어물어 이슬라 무헤레스로 가는 배를 탔다. 별 도움이 안되는 가이드북을 제끼고 숙소를 전전하며 가격을 맞춰봤지만 150뻬소 이하의 싱글은 더 이상 없는 듯 했다. 섬에 들어왔으니 이제 나갈 때까지 본의 아니게 탐욕스러워진 상어들에게 뜯어 먹히는 일만 남았다. 아미고 삐끼가 맥주 사달라고 조른다. 망할 놈, 니가 사주면 덧나냐? 여기도 형광등이 나갔다. 매니저와 함께 형광등을 갈았다. -_-

마돈나가 노래했던 '라 이슬라 보니따'가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임을 어느날 갑자기 알게 되었다. 이슬라 무헤레스의 무헤레스는 화장실에서 많이 본 단어였다. 무헤레스는 여자라는 뜻인데, 여자 화장실에 몇번 들락거린 후로는 절대로 잊지 않게 되었다. 에스빠뇰로 남자는 뭔지 모르겠다. '남자'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슬라 무헤레스, 여자의 섬. 1500년에 대량 출토된 Ixchel 여신의 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이름 때문에 뜯어먹힐 각오를 하고 섬에 들어왔다.

하얀 백사장과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는 카리브해의 해변이 시원스럽다. 해변을 걸었다. 여기저기 가슴을 축 늘어뜨린 채 자고 있는 서양 여자들이 보였다. 봐도 그저 그랬다. 하도 많이 봐서... 랄까. 그것도 보니따 스러운 것만. 80뻬소 짜리 아바나산 시가를 물고 30 뻬소나 하는 마르가리따를 홀짝이며 60뻬소 짜리 비치 의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카리브해에 가면 꼭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간간이 물속에 들어가거나 살을 태우며 잤다. 더 태우는 것은 끔찍해서 파라솔 아래에서 편히 누워 있다가 해가 떨어질 무렵 자리에서 일어섰다.


Isla Mujeres의 북부 해변

놀랍게도 깐꾼이나 이슬라 무헤레스나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 꽤 되었다. 무심결에 튀어나오는 영어를 알아듣는다. 하긴, 분위기가 미국인들 휴양지나 다름없어 보였다. 휴양지이므로 맥주 한병 살 때도 허걱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섬 휴양지라도 빈틈은 있게 마련이다. 섬에 살고 있는 현지인을 대상으로 한 가게들이 있을테니까. 태국에서도 섬에서 지역주민들이 애용하는 식당으로 근근이 살아남았다. 태국의 해변 만한 곳은 지구상에 없을 것 같다.

해변의 마야 유적지인 뚤룸에는 가지 않기로 했다. 입장료가 무섭다. 그래도 멕시코 내의 중요한 마야 유적지는 다 본 셈이고(Mayapan을 안 갔지만) 내가 마야 문명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않음을 확인했다. 서점에서 이 지역의 문명에 관한 책을 잠시 읽다가 내려놓은 것과 무관하지 않을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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