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scene

여행기/Mexico 2003. 4. 10. 10:25
칠레가 무비자 국가가 된 것을 말 그대로 '천진난만'하게 좋아했다.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상(FTA)이 곧 있을 예정이었다.

호텔이 무덥고 답답해서 밤거리로 나섰다. 노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핥아 먹었다. 맥주를 먹고 싶지만 뻬소화가 거의 바닥났다.

광장에는 갓 구운 빵을 구워 파는 상인들과 가죽 제품을 수공하는 공인들이 책상 하나만 들여놓고 작업중이다. 일 없이 깔깔대며 웃는 젊은이들이 광장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가족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 하루 일과를 끝마치고 광장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런닝셔츠 차림의 인부들, 과일이나 따말레나 따꼬스나 아구아 데 오차따를 팔고 있는 행상, 그리고 나무 사이로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매일밤 광장에서 보는 풍경인데도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할일 없는 여행자들도 광장에 나처럼 멍하니 앉아 있어야 할텐데 오늘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먼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였다. 어젯밤 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비에 젖은 아스팔트를 보았다. 우기가 시작되려나 보다.

정작 중요하고 재밌는 순간에는 카메라가 없었다. 가라폰의 수정처럼 맑은 스노클링 포인트에서도, 대낮의 열기를 피해 나무그늘에 앉아 땀을 식히고 앉아 있을 때에도, 아니면 타이티섬을 주제로 한 고갱의 그림같은 밤의 낭만이 지금 내 눈 앞에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는데도. 밀림의 고색창연한 유적지에서 울부짖는 원숭이들을 찍지 않았다. 빛과 구름의 기묘한 변화로 시시각각 변해가는 아도비를 쳐 박아 놓은 그 웅장한 건축물의 번쩍이는 모습도, 아름다운 퀘찰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마르코스의 모습도, 선주민들의 화려한 복식도 마찬가지고. 이런 광경들이 훗날 힘들고 괴로울 때 다시 생각날까? 그럴 리가 없다. 난 잊어 버리는 일이 전문인 새대가리다. 훗날 기억나는 인상이란 스스로 조작한 왠지 천당스러운 이미지 뿐일 듯.

내일 새벽에 떠난다.
바나나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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