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까야 화산에 갔다 온 후 정신적 충격이 대단해서 하루 더 안띠구아에서 느긋하게 지내기로 했다.

엊그제 끝내주게 맛있는 초우멘을 만들었지만 정작 자랑하고 싶었던 중국 여자애는 체크아웃하고 나가 버렸다. 그래서 2인분을 배불리 먹었다. 게스트 하우스는 텅 비었고 어제, 오늘 내린 비로 빨래는 걸레가 되었다.

이번이 세번째인가? 전에 만났던 한국인을 다시 봤다. INGUAT 관광청 추천 시티 투어 코스를 함께 슬슬 걸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한국인이 아는 척을 했다. 광장에 멍하니 함께 앉아 하품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감동한 것 같았다. 그날 하루 쓴 돈이 숙박비를 포함해서 10불이 채 안 되었으니까. 나? 난 6불 썼다. 난 밥을 해 먹으니까.

어제 빠까야 화산에 갔다왔다. 조난 비슷한 상황에서 고생을 하다 왔기 때문에 돌아오자 마자 뻗었다.

오후 1시쯤 12명이 투어차를 타고 출발했다. 오후 2시 화산 아랫 마을에 도착. 대략 4킬로미터를 올라가는 산길. 고도차는 740m. 어림잡은 예상 등반 시간은 2시간 정도였으나 미국인들이 워낙 굼떠서 거리의 반에 해당하는 본격적인 화산지대로 들어가는데 1시간 30분이 걸렸다. 오후 3시 반. 답답해서 미국인들과 가이드를 제끼고 앞서갔다.

빠른 걸음으로 거의 뛰다시피해서 앞서가던 경비대 마저 추월했다. 비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메케한 아황산 가스 냄새가 풍겼고 풍향이 수시로 바뀌었다. 비구름 속을 통과할 무렵 차갑고 두꺼운 빗줄기가 사정없이 떨어져 내렸다.

경사는 45도 가량, 비바람 뿐이면 별 문제 아니지만 비가 분화구에 떨어지면서 대량의 수증기가 발생하여 가시권이 3미터 이내였다. 잘게 부서진 화산탄이 발목에 푹푹 잠기면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살갗이 따끔거리고 온몸을 휘청이게 만드는 강한 비바람 때문에 잔자갈들이 비탈을 구르면서 무시무시한 소리를 냈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오기가 생겼다.


비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빠까야 화산 오르막길. 포기하고 돌아갔어야 했다. 이후로는 사진을 찍을 상황이 아니었다. 살기 바빠서... -_-;

정상에 도착. 손목시계를 쳐다보니 불을 켜도 시각이 안 보인다. 아황산가스 때문에 목구멍이 다소 쓰리다. 물과 결합하면 이것들은 체내에서 황산이 된다. 빗물이 바위에 닿을 때마다 치익치익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분화구 주변에는 거대한 수증기의 벽이 형성되어 있었다. 아무 것도 제대로 안 보이고 비바람이 심해서 분화구 안쪽에 기대 앉았다. 추워서 손이 곱고 이빨이 닥닥거리지만 대조적으로 발밑과 엉덩이는 매우 뜨겁다.

일행이 도착하길 30분쯤 기다렸지만 정상에 아무도 올라오지 않았다. 시계를 문지르고 품에 넣고 잘 쳐다보니 4시 50분. 해는 5시 30분에 진다. 팬티 속까지 젖었다. 모자 주변으로 끊임없이 물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바람과 수증기가 뒤죽박죽 되어 길이 보이지 않는다. 상황이 안 좋다.

올라 오는 길에 능선의 대략적인 방향을 파악했고 거리도 대충 알고 있다. 봉우리는 대략 300미터 가량. 그 후 이어지는 능선은 1킬로쯤 남서쪽. 풍향은 남동. 발밑은... 보이지 않는다. 재수없다. 바람 방향이 바뀌면 좋으련만. 목이 슬슬 아파온다. 오래 있으면 위험해질 것 같다. 냄새나는 아황산가스 뿐만 아니라 목을 탁탁 막히게 하는 이산화탄소도 있었다. 그보다는 당장 추워서 견딜 수가 없다.

미끌거리는 발밑을 조심하기만 하면 15분이면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손이 곱아 신발끈을 조이는데 애를 먹었다. 뜨거운 화산암을 쥐고 있다가 신발끈을 맸다. 조난이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고작 2500미터짜리 조그만 봉우리라고 방심한 것이다.

해가 지기 전에 내려가야 한다. 하지만 저 미친듯한 비바람과 수증기 속을 통과하는 것이 겁난다. 갈짓자로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옷과 신발은 이미 화산탄 부스러기로 뒤범벅되어 시꺼멓다. 미끄러졌다. 되는대로 손을 뻗어 화산탄을 잡았다. 맥없이 부러진다. 손바닥에 감각이 없다. 잔자갈과 함께 아래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스키 타는 것 같아서 신나긴 했다.

유령 같은 그림자 둘을 보았다. 우리팀, 몽카 블랑카 소속의 두 독일인 연인이 오도가도 못하고 공포스러운 표정으로 떨고 있었다. 일행과 떨어져 조난당한 것 같다. 따라오라니까 선뜻 발길을 떼지 않는다. 걱정하지 말아라. 나한테 gps리시버가 있다. 남자가 고개를 끄떡였다. 반팔에 샌들 차림으로 온 여자는 겁에 질려 있었다. 지친 것 같다. 골치 아픈데... 여자들은 저중심 설계로 제조되어서 내리막길에서는 쥐약이다. 특히나 힘이 빠져 있을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잖아도 엊그제 띠깔에서 어떤 아줌마가 15미터 계단을 굴러내려 이빨이 다 깨지고 두개골 일부가 함몰되고 피범벅이 된 채 기억상실증에 걸려 유적지 일부가 폐쇄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작 2500미터 라길래 물을 들고 오지 않았고 담배 피우면서 올라왔다. 비바람 속에서 강풍이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자 희미하게 능선의 거무스레한 윤곽이 보인다. 한숨을 쉬었다. 길을 찾았다.

300미터쯤 내려오자 비바람이 잦아 들었다. 남자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자 앞에서 자존심이 상한 것 같다. 조그만 동양 남자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자기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남자는 비에 젖은 시궁쥐처럼 떨고 있었다. 내 꼴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자에게 나머지 일행이 어디있냐고 물었다. 모른다. 그럼 그들은 올라오지 않은건가? 뛰어 내려갔다. 20분 정도 걸려 마을에 도착했다. 몽카 블랑카 팀원들은 모두 무사했다.

우습게도 정상에 올라간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상에서 천사들이 날개를 손질하는 모습을 본 것은 나 밖에 없었다. 분화구에 사악한 절대반지를 버리고 세상을 구했지만 아무도 몰라주게 되었다.

입구 화장실에서 양말을 빨고 신발에 묻은 흙을 대충 털었다. 옷을 짜고 싶지만 그럴 형편이 안 되었다. 사람들이 떨고 있다가 독일인 연인이 도착하자 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 올라 안띠구아로 돌아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바보짓을 했다. 내가 한 치명적인 바보짓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1. 오버트라우저를 가져가지 않았다. 가져갔으면 비바람에도 불구하고 느긋하게 분화구에서 용암을 구경했을 것이다. 오버 트라우저가 없어서 물에 쩔은 쥐새끼같은 꼴로 돌아다녀 체면을 구겼다.

2. 껌을 안 샀다. 껌을 씹으면 날씨가 개판이건 말건 호연지기가 생기고 기분이 즐거워진다.

3. 무엇보다도, 날계란을 안 가져왔다. 계란을 뜨거운 바위 틈에서 익혀 맛있게 먹는 것이야말로 화산 여행의 묘미다. 그런데 분화구 곁에 쭈그리고 앉아 열기를 쬐면서 배가 고파 살구와 망고를 먹었다. 화산에서 살구와 망고라니... 알만한 사람이 그런 무식한 짓을 한 것이다.

이런 용서할 수 없는 실수를 했기 때문에 조난은 필연적이었다. 이번 산행을 반성의 기회로 삼자.

국립공원 입장료 25꿰찰을 내려고 50꿰찰 짜리 지폐를 주니 70꿰찰을 건네준다. 잔돈이 신선하고 감동적이었다. 인도보다 0을 먼저 발명하는 등 수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 바 있는 마야 후손의 믿을만한 계산법이고, 다들 정신적 충격을 받은 상태라서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를 일으키면 안될 것 같아 얌전히 낼름 집어 삼켰다.

오락가락 하는 정신에 인터넷으로 뉴스를 다운 받고 밥을 해 먹은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숙소에 도착하니 9시. 1500미터 고지에서 딱 라면에 말아먹을 분량만 인디카 쌀을 씻어 알맞은 정도로 찰기와 윤기가 지게 밥을 짓는 것은 예술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라면은 또 어떻고? 이제 처음 보는 라면으로도 기본적으로 삼양 라면 맛을 낼 수 있다. 어떤 거지같은 면발도 쫄깃쫄깃하게 되살릴 수 있다. 매운 라면 국물과 밥. 꼭 그렇게 먹어야 추위로 얼어붙은 몸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폰지가 물을 빨아 들이듯이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말끔하게 해치웠다. 찬바람 맞으며 고생하다가 뜨겁고 얼큰한 국물을 들이키니 살맛이 났다. 야채와 탄수화물이 풍부한 진정한 구휼식품이었다.

칫솔질과 간단한 세수만 하고 따뜻한 침낭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아아... 좋다.

아침에는 갑자기 영양보충 하고 싶어져서 스테이크를 해 먹었다. 며칠 전에 멕시칸 스타일로 스테이크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바닥에 마늘을 깔고 고기를 얹은 후 양파 등을 넣고 지지면서 맥주를 때때로 붓는다. 소금과 후추로 적당히 간을 맞췄다. 당근을 넣고 지지다가 계란을 얹자 먹음직스러운 등심 스테이크가 완성되었다. 맥주 때문에 맛이 좀 썼다. 설탕을 좀 넣을껄 그랬나? 그래도 처음 만들어 본 스테이크 치고는 맛이 훌륭했다. 다음번에 할 때는 붉은 와인을 쓸 것이다. 육즙을 은근히 우려내는 것이 테크닉인 것 같다.


프라이팬에서 덜다가 계란이 뭉개져 모양이 망가졌지만 맛있는 스테이크. :)

돈을 좀 찾고 스노클과 옷가지를 우편으로 한국에 부쳤다. 우편료가 비싸다. 5일치 경비가 순식간에 날아갔다. 돈을 더 찾아야 하나.

"노스웨스트항공은 이달 15일 정오 온라인(www.nwa.com/kr)상에서 부산발 LA 또는 샌프란시스코행 89만원짜리 왕복 항공권을 39만원에 할인판매하는 행사를 벌인다고 11일 밝혔다." -- 새삼스럽게 왜 이렇게 운이 안 따라주는 것일까 하고 울부짖기도 뭣하다.

"국민의 값진 세금을 이런 편집증적인 일에 써도 된다고 언제 국민의 동의를 얻었는지도 묻고 싶다. 언론이 정부를 감시하는 게 정상인데 우리는 정부가 언론을 감시하겠다니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 -- 2003.4.12 조선일보 사설. 어차피 영문 모를테고, 말문이 주욱 막혔으면 좋겠다.

안드레 군더 프랑크, 리오리엔트, 이산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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