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일리지가 좀 남아 있어 저저번주부터 머리 식힐 겸 제주도에 가려고 했다. 제주도에 가긴 가는데, 별달리 뾰족한 테마가 생각나지 않았다. 제주 날씨; 안 좋다. 다시 다음주로 미룰까 하고 아시아나 홈페이지에 들어가 발권 상황을 보니 시간 맞는 것이 없다. 다음주는 본격적인 장마니까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좌석이 없어 일요일 아침에 도착해 월요일 오전에 돌아오는 표를 끊었다.

6/25, 간단히 짐을 싸두고 자명종을 맞춰 두고 자료 수집 시작. 주로 '야후 거기'의 콩나물 지도를 참조. 별다른 테마가 없고, 있다 해도 돈이 들 것 같아 그냥 한라산에 가보자고 마음 먹었다. 제주를 두 번 갔지만 번번이 한라산에 갈 기회가 없었다. 한라산, 어떤 코스로 가도 당일치기가 가능하다. 하지만 항공권 사정상 일정이 이틀 짜리라 시간이 남아돈다. 제주에 사는 사람들이 추천하는 코스는 영실(어리목)에서 올라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어리목(영실)로 내려오는 코스였다. 경치가 괜찮다는데 등반 시간이 짧다. 남은 시간에 뭘 해야 할지. 게다가 비가 오니 경치 관람은 별 의미가 없다. 성판악에서 출발, 관음사로 나오는 코스는 10시간 가량. 길이 평탄하고 지루하단다. 그래도 10시간 동안 줄창 걸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든다.

처음 제주에 간 것은 십 년도 전의 일이다. 그때 아마 전국 여행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목포까지 가서 어디갈까 궁리했다. 갈데가 없다. 그래서 배를 탔다. 그날 바다에는 폭풍이 몰아쳤다. 커다란 배가 기우뚱 기우뚱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을 때 갑판에 나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거대한 파도가 일렁이는 모습을 보며 공포에 질렸다. 바다의 무서움을 그때 처음 느꼈다. 제주항에 도착했을 때 항구에서 노란 비옷을 입고 있는 여자가 다가와 하룻밤 같이 보내잔다. 창녀였다. 제주의 첫인상이 그랬다.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닌 그냥 첫인상이다. 우중충한 선창에서 선명하게 반짝이던 노란색 비옷. 매킨토시? :)

두번째 제주 여행은 4년 전, 그때도 폭풍이 몰아쳤다. 3일 밤낮으로 폭풍을 뚫고 자전거를 타고, 끌고, 밀며 해안도로를 일주했다. 제주에서는 빗방울이 수평 궤적을 그리더라, 하니까 믿지 않는 작자도 있었다. 폭풍이 제주도를 유린하던 그 와중에 텐트 치고 자기도 했다. 매우 고생했다.

6시 집에서 출발, ATM에서 10만원을 찾았다. 7시30분 김포공항 도착.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350ml짜리 물(1400원)을 사 먹었다. 그리고 초코바를 세개 샀다. 8시 비행기를 탔다. 기내에서 나눠주는 사탕을 한웅큼 집었다. 캐빈 어시스탄트가 헤~ 하고 웃었다. 배낭여행만 해서인지 이놈에 거지 근성은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남아있는 것 같다.

9시 5분, 제주공항 도착. 교통 경찰에게 물어 시내 버스 타고(850원) 제주 시외버스 터미널 도착. 5분 걸렸다. 최근 제주 시내버스가 파업에 돌입했다. 최저 생계 보장을 외치고 있다. 시내버스 타고 다니기 힘들겠구나 싶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터미널에서 1700원 주고 표를 샀다. 담배 한 대 빨고 성판악행 버스에 올랐다. 9시 25분 출발. 간간이 안개를 통과했다.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속으로 엿됐다 중얼거렸다. 성판악에 도착하니 매표소가 어딘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와 안개가 잔뜩 끼어 있다.

오버 트라우저로는 아무래도 버티지 못할 것 같아 비닐로 된 일회용 우의를 샀다. 3천원. 이리저리 헤메다가 매표소를 발견. 1600원. 오후 한 시까지는 진달래 대피소에 다달아야 정상에 올라갈 수 있단다. 기상 상태가 안 좋단다. 슬슬 비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별 걱정하지 않았다. 제주의 '지랄 비바람'은 익숙한 것이다.



한라산의 동서 사면은 기울기가 비교적 완만해 3-5도 사이, 남북은 5-7도 사이다. 거의 산책로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그렇게 편한 길이지만 한라산에서 한 달 평균 3-4건의 탈진, 부상 사고가 발생한다. 사고가 나면 별다른 방법이 없어 안전요원이 산에 올라가 들쳐 업고 내려온다. 운 나쁘게 정상 근처에서 사고가 생기면 왕복 10시간 거리다.

등산객이 거의 없어 호젓한 것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여기저기 해송과 산꽃나무가 보였다. 귀찮기도 하고, 카메라를 꺼내 찍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빗방울이 굵어지고 비바람이 숲을 뚫고 몰아쳐서 오버트라우저가 흠뻑 젖었다. 그걸 벗고 대신 비옷을 걸쳤다.

오후 한 시가 한계라 발걸음을 빨리 했다. 앞에 놀러온 부산 아가씨들이 씩씩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깔깔거리며 제주도에 왔으니 백록담을 꼭 보고 가겠다고 호언장담한다. 빗물에 홀딱 젖은 티셔츠로 브라 끈이 비쳐 보인다. 길이 편하긴 하지만 준비없이 빗 속에 올라가는 것은 무리인데... 지방층이 두터우니까 추위를 잘 견디겠지. 나야 애당초 백록담 볼 생각은 없었다. 그냥 비바람을 '즐기자고', 뭐 그런 마음을 품었다. 아까 비행기에서 얻은 사탕을 나눠주고 지나쳐 올라갔다.

안개와 비바람에 휩싸인 진달래 대피소에 도착하니 11시 40분, 사람들이 대피소 안에서 바글거렸다. 얼른 컵라면(1600원) 하나와 포카리스웨트(1000원)을 사서 먹었다. 뱃속이 따뜻해지고 액체를 섭취하니 좋다. 하산하는 등산객들 중 몇몇 사람들이 정상 부근에서 비바람이 심해 올라가다 돌아왔단다. 별다른 대비없이 무작정 올라왔던 사람들은 홀딱 젖어서 아까 본 아가씨들처럼 비맞은 강아지 꼴이었다. 오들오들 떨고 있다. 정상 부근은 추울텐데? 왜 올라왔나 싶다. 아이까지 데리고 올라온 사람들은 또 뭘까. 성판악에서 정상까지 4시간 30분 걸린다. 왕복만 해도 10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인데 아무리 길이 편하다지만 애들 데리고 10시간 동안 걷는 것은 무리다. 앗. 애들한테 빗 속에서 열시간 산행을 시키는 것이 혹시, 아이들을 '강하게 키우기 위해'?

12시에 출발. 1570m 지점에서 gps를 찍었다. 시계를 살펴보니 기압계는 830 헥토 파스칼, 비는 한 동안 계속 올 것이다. 우의를 벗고 비에 젖은 오버트라우저를 다시 입고 그 위에 우의를 걸치고 배낭을 바깥에 매고 배낭 끈으로 우의 바깥을 단단히 조였다. 초콜렛 바를 두개 우걱우걱 씹어먹고 실개천에서 손으로 물을 받아 마셨다. 차고 달다.


개울로 변한 등산로. 신발에 물이 차서 질퍽거리지만 찬 개울물에 발 담근 것처럼 시원하고 기분 좋다. 이래서 사고가 나는 걸까...

진달래 대피소를 나오자 길이 조금씩 가파라지기 시작했다. 숨을 헐떡이면서 1800까지 구상나무 숲을 지나쳐갔다. 빗속이지만 특유의 테르핀 향내가 풍긴다.

개활지에 이르자 광포한 비바람이 남남서에서 불어닥쳤다. 풍속이 10~20m/sec에 이르는, 내가 두번째 제주 자전거 여행에서 익히 그 맛을 보았던 바로 그 지랄풍이었다. 반갑다 지랄풍. 제주의 참맛은 역시 지랄풍이지. 빗방울은 수평으로 날아다니고 피부에 빗방울이 닿자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비닐 우의는 미친듯이 파다닥거렸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람이 벽으로 몰아 세웠다. 비틀비틀, 시계가 겨우 1m 정도인 막막한 계단길을 엉거주춤한 자세로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다. 죽이는군.

정상에 다달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재수 좋으면 백록담에서 한가하게 뛰노는 노루떼를 구경할 수 있다는데 온 사방이 그냥 하얀 백지 상태였다. 한라산 중턱에는 버려진 밭이 있는데, 밭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어느날 한라산 자락에 공들여 풀어 놓은 노루 중 새끼를 잡아 먹었단다. 그래서 노루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밤마다 밭에 내려와 작물을 망쳐 놓았다.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밭을 포기한 채 산을 내려갔다는 민담이 있다. 정상에서 이히히, 이히히 웃으며 노래 부르고 있는데 옆의 오두막에서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뛰쳐 나와 그만 내려가란다. 관음사로 내려갈 꺼라고 소리 질렀다 -- 서로 말이 안 들린다. 계곡에 물이 불기 전에 빨리 내려가란다. 서 있기가 곤란한 처지라 얼른 바람을 피해야 겠기에 정상에서 겨우 5분 남짓 있었다. 올라오는데 3시간 걸렸다. 관음사에서 정상까지 5시간 가량, 하지만 내리막이니 3시간 정도면 될 것 같다.

내려 오다보니 무릎이 욱신거리고 사타구니 양쪽이 아프다. 사타구니를 만져도 엄밀히 그곳에서 통증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런가 싶더만 몇 년간 줄곳 쿠션이 있는 운동화를 신고 다니다가 이번에 밑창이 그냥 고무 한 장인 아쿠아 뭐라는, 집에서 슬리퍼로 신던 신발을 신고 와서 뒷꿈치와 발끝으로 전해오는 충격이 무릎과, 넙적다리와 골반을 연결하는 부위로 직접 가해져서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거 안 좋은데? 타이레놀을 한 알 삼켰다. 내리막이니 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한가하게 천천히 내려왔다. 골반, 무릎이 쑤셔서 무리하게 발가락에 힘을 주고 걸어서 이번에는 정강이에 알이 배겼다. 잘 한다. 내 정강이는 왠간한 여자들의 것보다 미끈하게 잘 빠졌다니 관리 잘 해야지.

기압이 1000헥토 파스칼로 정상 회복되었고 곧 비도 멎을 것 같다. 정상 부근에서 불어대는 바람 때문에 배낭 커버가 살짝 벗겨지면서 그 사이로 빗물이 비집고 들어와 배낭에 넣었던 여분의 티셔츠가 흠뻑 물에 젖었다. 다행히 pda는 젖지 않았다. repligo를 깔아서 제주 정보를 넣어 둔 것이다.

두 시간 쯤 걸려 2/3를 내려왔다. 비가 멎었다. 잠시 쉬면서 신발의 물기를 닦아내고 두번째 휴식을 취하면서 남은 초콜렛 바를 먹으며 10분쯤 쉬었다. 까마귀가 까악까악 울어댄다. 까마귀들은 조류 중에 유난히 머리가 좋아서(그래봤자 새대가리지만) 데리고 놀기 딱인데 사람 손을 많이 탔는지 초코바를 조금씩 뜯어서 뿌려 두었는데도 관심을 안 보인다. 바람이 한 번 지나갈 때마다 울창한 숲속에서 쏴아 쏴아 파도치는 소리가 들린다. 분위기 좋다.


산수국. 토질의 산성도에 따라 색깔이 바뀐다. 분홍색, 흰색, 또는 푸른색으로.


산수국. 겉의 네 잎 달린 것은 헛꽃(무성화). 내심 한라산의 꽃과 나무에 기대를 걸고 올라왔지만 본 것이 몇 안 된다.


건천은 건천답게, 이날 내린 비가 33mm 가량이나 되는데도 비가 그치지 마자 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건천 주위에 널린 화성암, 퇴적암 등에는 침식 등 기계적 풍화작용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하류 부근에서는 깎인 바위의 침적에 의해 얕은 물이 고인 물 웅덩이가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다공질의 화성암 사이로 스며든 그 방대한 양의 물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깊은 지하로 스며들어 해안가의 용천에서 솟아나온다? 그렇기도 하고, 수퍼에서 '제주 삼다수'로 잘 팔린다. 마시자, 제주 삼다수!

이리저리 미끄러지면서 딱 6시간 걸려 등산을 마쳤다. 비가 안 오면 5시간대에 주파할 수 있을 것 같다. 골반이 쑤셔서 관음사 휴게소로 어기적 어기적 기어 나왔다. 장소가 썰렁한 것이 버스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관리인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여기서 오른쪽으로 4km쯤 걸어 나가면 버스 정류장이 있단다.

길가에 주저앉아 짐을 풀고 옷가지들을 말리며 담배 한 대 빨았다. 바람이 많이 불어 옷가지는 금방 마를 것 같다. 젖은 옷가지를 배낭에 매달았다. 그리고 슬슬 걸었다. 아침 6시부터 일어나서 돌아다녔더니 녹초가 되었다. 걸어가려니 힘들다. 앞은 목장인지 말들이 한가하게 풀을 뜯어 먹고 있다.


얼마나 열심히 뜯어 먹었는지 신록의 계절인데도 땅바닥에 녹색이 안 보인다. 그 뒤로 초속 12m/sec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먹구름'떼'.

히치가 된다. 사람 태우면 해꼬지 한다고 히치하이킹을 안 해주는 각박한 인심이 없는 곳이 강원도와 제주도다. 처음 제주도 여행 할 때 절반을 히치로 다녔다. 역시 좋은 곳이야.

아줌마는 주말이면 관음사 코스로 한라산을 자주 오르는데 오늘은 비바람이 심해서 중간에 포기했단다. 오늘, 내일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분단다. 공교롭게도 내심 내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던 것, 관광객들이 아이들 데리고 한라산 오르는 것을 성토한다. 아줌마 말에 따르면 성판악-정상-관음사 코스가 보통 10시간 걸리는데 애들을 그런데 데리고 다니면 제주도에 무슨 좋은 인상이며 추억이 남겠냐는 것이다. 그러더니 버스 정류장에 안 세워주고(그곳은 버스가 자주 없다면서) 목석원 앞에 세워 주면서 이왕 제주도에 왔으니 다만 목석원이라도 구경하고 가라신다. 아, 정말 고마워요.


목석원. '갑돌이의 인생'이 있다.



기괴한 형상의 말라 비틀어진 나무와 바위를 전시하는 곳.


아이를 안은 천사같은 엄마


목석원의 여러 전시물에 제목을 단 사람은 SF적인 센스는 전혀 없었다. 한눈에 봐도 전시물 대개가 SF&F로 완벽하게 번역되는데.


이 바위는 일러스트로 본 적이 있는 형상이다. 용암이 식으면서 겉 표면과 속의 식는 속도가 달라 밀도차가 생겨 연필심 모양으로 속이 빈 바위가 화산지대에 생긴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목석원 구경을 끝내고(입장료 2000원) 길가에 앉아 옷을 말리다가 시내 버스가 와서 탔다. 자리에 앉아 pda를 꺼내 주린 배를 채울만한 곳을 찾았다. 일단 그 유명한 도라지 식당에 가보기로 하고 시청 앞에서 내렸다.

시청 앞 작은 광장에서 관중이 모여 노래를 듣고 있다. 잠깐 벤치에 앉아 보다가 식당을 찾아 골목길을 돌아다녔다. 헤메다가 찾아가니 오늘은 영업을 안한다. 온몸이 삐꺽인다. 17시. 해는 세 시간 후에 지니까 식사를 마치고 해변가의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 하고 숙소를 찾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지만 몸이 노곤하니 만사가 귀찮다. 택시를 타고 신제주 시가지로 향했다(3700원). 두번째 후보로 삼았던 '용꿈돼지꿈' 식당은 엄청 푸짐하다는 한정식 집이다. 혼자라서 곤란하다기에 몹시 안타까웠지만 지친 다리를 끌고 인근의 '청해원'으로 걸어갔다.


지친다...

자리물회를 시킬까 하다가 술안주로는 안 어울려 보여 한치물회를 시켰다. 밑반찬이 나오는데 생선젓도 맛있고 수북히 담아오는 간장게장을 안주삼아 반 병을 비웠다. 게장이 좀 달긴 하지만 이건 거의 한끼 먹을 분량을 주니 허겁지겁 먹을 밖에. 한치물회를 안주 삼아 소주 한 병을 순식간에 비우고 해물 뚝배기를 달라니까 종업원이 눈이 동그래서 쳐다본다. 아침부터 굶었어요. 말투가 조선족 아줌마 같다. 종업원이 조선족 아줌마나 아가씨면 왠지 기분이 좋다. 조개와 오분자기, 성게, 게 따위가 수북하게 들은 해물 뚝배기를 다 먹으니 배가 터질 것 같다. 한치물회 6000원, 해물뚝배기 8000원, 소주 한 병 3000원. 혼자온 탓에 옥돔, 고등어, 갈치 따위를 못 먹는 것이 좀 아쉽긴 하다.

느적느적 걸으며 숙소로 찍은 밸리스 불가마로 향했다. 도착하니 8시, 7000원 짜리 표를 끊고 사우나에 푹 잠겨 딱딱해진 근육을 물렁하게 풀었다. 냉탕에 머리를 박았다. 지나치게 근육을 풀어 온 몸이 흐늘흐늘해졌다. 빈둥거리며 pda에 담아온 시리즈물 비디오를 보다가 미역국 한 그릇 먹고 아이스크림 따위를 사 먹고 두 시까지 pda 비디오를 보다가 땅굴에 기어 들어가 잠들었다.

밸리즈 불가마가 한국에서 1등 먹은 곳이라는데 시설이 과연 훌륭하다. 놀이방, 아이스방, 헬스 시설, 노래방 등등, 특히 벽면을 보면 엄청난 돈을 들인 것 같다. 그렇지만 특별히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사우나만 놓고 보자면 살고 있는 동네의 수양탕 만한 곳은 찾기 힘들었다. 온탕에 몸을 담그고 tv를 보거나 폭포수에 편안히 몸을 식히는 것이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이벤트 탕' 따위 여러 개 두는 것보다는 다 년간 사용자의 편의를 도모한 UI면에서 실용적이고 충실한 것이다.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수양탕의 TV는 몇몇 사우나에서 드물게 본 적이 있지만 수양탕의 폭포수 냉탕에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이 있다. 위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와 함께 사타구니 사이로 강력하게 뿜어 올라오는 두 개의 냉류, 회음부를 그 냉류에 맡기고 허벅지 사이를 부르르 떨다보면 온갖 근심걱정이 사라진다 -- 그것이야말로 장기간 목욕탕을 경영하여 소비자의 니즈를 철저히 분석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노하우인 것이다.

8시 기상. 자던 땅굴에서 어기적 어기적 기어나왔다. 온 몸이 뻐근하다. 사우나 몇 번 들락거리며 땀을 뺐다. 어제, 오늘 합쳐 600g 감량. 내 몸은 제주도의 건천처럼 금새 말라버려, 어제 그처럼 배불리 먹었건만 아직도 배가 고프다. 인근의, 유명하다는 유리네 식당을 찾아갔다. 성게 미역국을 시켜 먹었다. 명성에 비해서 맛은 별로 였다. 벽면에는 온갖 유명한 사람들의 사인이 붙어 있다. 어젯밤에도 그랬지만 제주에서 미역국 먹는 것은 바보짓인 것 같다. 그냥 갈치국이나 시켜먹을껄 -_- 밑반찬은 훌륭했지만 아무리 성게가 들어갔다고 해도 미역국이 8000원이나 하는 것은 좀 그랬다.

엇. 밥 먹다가 생각났다. 불가마에서 나눠준 옷에서 어젯밤 이것 저것 사먹고 남은 돈 4000원을 빼놓지 않았다. 자신의 실책을 갈구고 채찍질한다는 의미에서, 택시비를 날렸으니 공항까지 걸어가자. 일단 온 몸이 뻑적지근하고 심난하니 담배 한 대 빨고.

담배 사러 수퍼 들어갔더니 아줌마가 날더러 대학생...이죠? 라고 묻는다. 울컥 하고 속에서 북받쳐 올랐다. 민증 보여드려요? 서른을 넘긴 지가 몇 년 전인데, 아무리 간만에 사우나에서 때 빼고 광을 냈지만 그건 좀 심한거다. 그런데 두 번째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담배를 내주면서, 담배값이 얼마지 학생? 하고 묻는다. 내가 고삐리처럼 보일 수도 있단 말인가... -_-

제주 시내에는 가히 돌풍이 몰아쳤지만, 목덜미로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푄 현상인 것 같다. 이런 바람이면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난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걸어 가면서 내내 그 생각을 했다; 변변한 게스트하우스가 드믄 실정에서 7~8달러의 저렴한 가격에 각종 레저,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는 불가마가 있기에 비로서 한국에서 배낭여행이 할만한 것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달리 말해 한국에서 게스트 하우스는 불가마라는 강력한 라이벌을 만난 것이다. 외국인들이 이 중요한 사실을 알기나 할까? 한국에는 전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럭셔리한 도미토리에서 7~8달라에 묵을 수 있다는 것을.


제주공항에 거의 도착. 언제 그렇게 비바람이 몰아쳤나 싶다.


땅에 떨어진 이게 뭘까. 설마, 감귤?

저기압 탓인지 엄청난 측풍 때문인지 롤러 코스트처럼 덜컹대는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 만에 서울에 도착. 비행기 타면서 추락을 걱정해 본 것은 참 오랫만이다. 비행기를 타면 언제나 보게 되는 도우미의 착륙시 비상 행동 요령 율동이나 안내 책자는 감성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2만 피트 상공에서 비행기가 지상에 추락하면 뼈도 못 추리는 것이야 당연하고, 마치 바다에 떨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구명의 착용 요령을 가르쳐 주는데, 시속 500 마일로 날아가는 수백톤 짜리 비행체가 2만피트 상공에서 바다로 추락하면 지상에서와 동일한 효과가 난다. 비행기에서 엔진 2기가 모두 꺼지면 그냥 무거운 쇳덩이가 되는 것이다. 2층 창문에서 떨어진 화분처럼 와장창. 살기를 바라는 것이 럭셔리한 착각이지.

서울에 오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쩔은 옷들은 벗고 바로 일을 시작했다.

한라산의 간략한 정보 정리

여행 일정: 1박 2일
경비 내역: 총 56200원 (하루 평균 28100원)

* 항공권 - 마일리지로.
* 숙박 - 불가마 7000
* 식비 - 3끼(한치물회 6000, 해물뚝배기 8000, 소주 3000, 미역국 4000, 성게미역국 8000) = 29000
* 간식 - 컵라면 1600, 아이스크림x2 2000, 쵸코바x3 1500, 샌드위치 1400 = 6500
* 교통비 - 시내버스x2 1700, 시외버스 1700, 택시 3700 = 7100
* 기타 - 우의 3000, 한라산 입장료 1600, 목석원 입장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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