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pocket

여행기/Guatemala 2003. 4. 16. 15:54
미국의 침공으로 바그다드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박물관에 있던 수메르 유물들이 몽땅 털렸다는 뉴스를 보고 억장이 무너졌다. 그나저나 부시는 게임 이론 대로 움직이는 장난감 같다.

공원에 앉아 감사하게 내리쬐는 햇빛으로 가이드북을 말렸다. 떡이 된 책이 제대로 살아날 것 같지는 않다. 옷들은 다 빨아서 말렸지만 신발은 대책이 없다. 덕지덕지 묻은 검은 화산탄 가루를 털어냈다. 털어도 털어도 어디서 기어 나오는지 끝이 없다.

거리를 할 일 없이 헤메다 보니 5인조 밴드가 광장에서 악기를 팔면서 연주와 노래를 하고 있었다. 사진 찍는 것을 잊었다.

왜 xp에서 뉴스를 다운받을 때면 한없이 느려지는가 싶더만, joc web spider 3.43에 버그가 있는 것 같았다. 3.50을 사용하니 잘 작동한다.

밥해먹고 나니 밤에 할 일이 없어 밴드 소리를 좇아 교회를 방문. 교회 안팍으로 엄청난 인파가 몰려 있었다. 교회의 제단 장식이 무엇에 소용되는가 싶더니만 어이없게도 그것을 배경으로 빛과 소리의 쇼가 진행되는 중이다. 교회의 높은 천정과 기둥 사이에서 강력하고 장엄한(때로 닭살 돋는 비장한 나레이션과 함께) 사운드가 울려 퍼지자 교회가 전혀 다르게 보였다. 벤허의 테마와... 이름을 알 수 없는 교향곡들, 심지어 스타워즈의 테마까지 흘러 나왔다. -_-; 일요일의 대단원을 보기 위해 토요일 쯤에 안티구아로 돌아올까? 숙소가 있긴 할까?

옆방 꼬마가 깨워 일어났다. 전날 밤 삶아둔 계란 두 개와 망고와 오이와 3일째 먹고 있는 3리터짜리 쥬스로 아침을 때웠다. 빠나하첼에 가야하는데... 젖은 후 안 마르고 여전히 걸레같은 가이드북을 살펴봐도 몇 시간 걸린다던지 하는 정보가 없다. 벌써 10시. 되는 대로 짐을 싸서 일단 버스 터미널로 나갔다. 마침 출발하는 차를 타고 치말떼낭고에 도착.

뙤약볕 아래서 30분을 기다려도 빠나하첼행 버스가 오지 않는다. 에스빠뇰이 좀 되는 것 같은 서양 여자애 둘은 기다리다 지쳐서 대절 봉고에 오른다. 나도 탈까 하다가 비싸 보여서 망설였다. 마침 오고 있는 산 뻬드로행 버스를 타도 되겠다 싶었다. 아띠뜰란 호수 근처니까. 입구는 오르내리는 사람들로 아비규환이었다. 하. 이런 버스 오르는 것은 자신있지.

버스에 막 오르려는데 누군가 앞 주머니를 건드렸다. 지갑을 슬며시 꺼내려는 것이 느껴진다. 지퍼 내리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손을 잡으려니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간다. 타이밍도 그렇고, 솜씨가 프로다. 감격이다. 닭장차에 아비규환에 소매치기까지, 꿈꾸던 그림같은 상황이 만들어졌다. 감격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다. 서둘러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누군지 알 수 없다. 어떤 새끼인지 잡아서 족쳐야 할텐데... 버스가 막 떠나려고 한다. 발이 공중에 떴다. 버스가 언제올지 기약이 없어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냥 올라탔다.

닭장 차에는 더 이상 사람을 실을 수가 없을 정도로 미어 터졌다. 홰를 치는 닭들도 몇 마리 보인다. 여행자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형형색색의 로컬리들 뿐이다. 너무 기쁘다. 이런 차를 타야 여행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과테말라 온 후부터는 줄곳 닭장차였다. 말 그대로 chicken bus, 미국에서 수입해 온, 유치원 애들이 타고 다니는 다 낡은 '노란색' 버스의 좌석에는 어른 둘이 앉을 자리 밖에 안 되지만 한 좌석에 셋이 앉았다. 한 사람은 엉덩이를 반만 걸치는 것이다. 게스트 하우스 주인은 날더러 닭장차를 견딜 수 있겠냐고 걱정스러운 듯이 묻기도 했다. 돈 조금 더 들이면 편하게 갈 수 있는데 사서 고생하는 것이 바보스러운가 보다.

사람이 너무 많아 배낭을 잡고 한 시간 반을 서서 갔다. 가끔 차장이 소리를 지르면 서있는 승객들과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경찰이 과적 차량을 단속하는 것이다. 외국인이 자기들처럼 곧잘 하니까 재미있는지 낄낄 웃는다. 우둘두둘한 길을 달리는 동안 이빨이 와다닥 부딛친다. 커브를 돌 때는 한줄의 일곱 명이 동시에 쏠렸다. 재밌다.

올더스 헉슬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라고 극찬해 마지 않던 아띠뜰란 호수 lago atitlan에 도착했다. 3시간 걸렸다. 오는 중에 화산 분진과 가스로 숲과 마을이 자욱하게 덮여있는 멋진 광경을 보았다. 어떻게 보면 준 재난상태 같기도 하다. 화산이 한번 폭발해줘야 잊지 못할 추억이 될텐데...

그런데 내릴 때 모자를 버스에 두고 내렸다. 소매치기는 안 당하면서 왜 매번 모자만 죽실나게 잃어 버리는 것일까...

몇군데 들러봤지만 숙소가 꽉 찼다. 고생길이 열렸다. 계획에 없던 도시에 오고, 소매치기를 못 잡고, 특히 모자를 잃어버려서 짜증이 났다. 한창 공사 중인 hospedaje에 물어보니 방이 있단다. 살았다. 숙소가 만족스럽다. 넓은 마당이 있고 처마가 있고 빨래줄이 걸려 있고 부엌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 특히 너른 마당이 마음에 든다.

하릴없이 호숫가를 배회했다. 물이 검어서 호수에서 빨래를 하며 호수를 오염시키는 아줌마들을 저주했는데, 자세히 보니 바닥에 검고 잘디잘은 화산탄이 깔려 있었다. 물은 매우 깨끗했다. 이런 호수는 사람 손이 닿지않는 몽골 같은 곳에나 있을 성 싶다.


아띠뜰란 호수. 해발 1530m

해가 지기 전에 뭔가 만들어 먹으려고 시장에 들러 야채를 샀다. 오늘 요리는... 음... 오에코돈? 시도해보자. 쌀과 야채를 넣고 일단 끓였다. 뜸을 들일 무렵 밥 위에 계란을 풀어서 얹었다. 거기에 케첩과 살사 칠리를 얹으니 맛이 그럴듯 하다. 그 이상한 음식을 오에코돈이라고 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알 바 아니다. 1.5퀘찰(250원)에 배불리 한끼를 해결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밤이 되자 희미한 하늘 위로 보름달이 떠올랐다. 풀문 파티로 정신없는 '서양 여행자 거리'를 제끼고 조용한 호숫가를 돌다가 숙소의 내 방 앞에 의자와 탁자를 끌어와 앉아 달을 쳐다 보았다. 산 빼드로에 장기체류자들이 많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여러 화산에 둘러쌓인 깨끗한 호수가 있고 풀벌레 소리와 동네의 패권을 다투는 개들의 소란스러운 소음이 들리는 아름다운 곳이다. 아침에 동네를 거닐어보니 꼬리가 잘린 개들이 종종 눈에 띄어 간밤의 치열한 격전을 떠오르게 했다.

카약을 빌리려고 여기저기 헤메다가 포기했다. 뭐, 안 타도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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