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 Pedro -> Panajachel -> Solora -> Los Cuentros -> Chichicastenango

새벽 5시에 아담이 시계를 돌려준다고 깨웠다. 그 차림으로 가면 힘들텐데? 괜찮아. 면 바지와 면 티셔츠 한장만 걸치고 어깨를 움츠린 채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길로 휘청휘청 걸어간다. 아담 덕택에 오랫만에 아름다운 새벽을 구경했다. 온갖 새들이 포근한 안개 속에서 지저귀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한기가 스며들어 방으로 기어 들어가 10시까지 잤다.

Darien Gap을 통과하는 꿈을 꾸었다. 파나마와 콜럼비아 사이의 전설적인 정글 속에서 나는 총을 들고 사방을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여행 내내 다리앤 갭을 통과하는 공상을 했다. 어젯밤 아담과 그것에 관해 얘기했다. 그는 꿈도 꾸지 말라고 한다. 몇몇 사람들이 시도했다가 실종자 리스트에 올라갔고 자기도 하려고 했지만 안전에 들이는 비용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만사를 싸다 비싸다로 구분짓는 것은 나와 비슷했다. 그가 경제적인 표정을 짓고 있다면 나는 심각하게 저렴한 표정을 짓는 편이었다. 다리앤 갭을 통과한 사람이 있긴 있었다고 한다. 파나마 시티에서 간혹 정신병자들이 팀을 이루어 길잡이 내지는 총잡이를 고용하고 대략 일주일 동안 트럭과 보트를 이용해서. 요리용 바나나를 잔뜩 짊어지고... 다리앤 갭 통과는 돈들인 개죽음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침햇살을 받으며, 썩 괜찮았던 산 뻬드로를 떠난다. 선착장에 우두커니 앉아 보트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보트가 화산에 둘러싸인, 놀랍도록 잔잔한 호수를 시속 40km로 달린다. 보트가 멈추었을 때 밑을 볼 수 있었다. 바닥에는 수초가 깔려 있었고 기포가 방울방울 올라왔다. 어쩌면 클레오파트라 배쓰처럼 밑바닥에서 물이 스며 올라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gps를 켜놓고 있으니 옆에 앉은 서양인 둘이 gps가 왜 필요한가 서로 옥신각신 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다큐멘터리 제작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과떼말라에 온 걸 보니 그 직업이 여간 고생스러운 것이 아닐듯 싶었다. 한 친구는 손가락 세 개가 없었다. 그는 동네 마약상처럼 거의 멸종해가는 히피였다.

치치행 직행 버스는 사람이 워낙 없어 취소되었다. 택시를 타겠냐고? 배시시 웃었다. 물어물어 미어 터지는 닭장차를 두 번 갈아탔다. 로스 엔꾸엔뜨로스에서는 버스가 안 보여 트럭 뒷편에 배낭을 던져 놓고 앉았다. 혼자 화물칸에 기대어 전후좌우로 흔들리며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렸다. 신선한 공기와 햇살을 마음껏 만끽했다. 닭장차보다 분위기가 좋다. 해발 2300미터의 산지에 위치한 치치카스떼낭고에 도착. 목요일 시장을 보러 왔다. 거리가 한산한데?

할 일이 딱히 없어서인지 길거리에는 대낮부터 술 먹고 맛이 가서 개처럼 뒹굴고 있는 마야의 후손들이 곳곳에 보였다. 시장은 철저하게 간강지화 되어 있었다. 다만 원주민들이 우글거렸다. 규모는 멕시코에 비해 작았다. 망고 장수마저 외국인을 등쳐 먹겠다는데 한 치의 후회나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 양반에게 제 가격에 산 것을 들고가 보여 주면서 희롱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혼자 다니다 보니까 외로워서... 갑자기 최고의 여행지에서 최악의 여행지로 굴러 떨어진 듯하지만, 다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 별다른 유감은 없다. 그런 관광지가 어디 한두 군데였던가?

마야의 창세 신화를 담은 Popul Vuh가 우연히 발견 되었다는 Santo Tomas에 들렀으나 뽀뿔 부가 거기 있을 리가 만무하다는 점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뽀뿔 부를 알게 된 것은 대략 15년전 쯤 된다. 동명의 프로그레시브 락 그룹이 있다. 대신, 러그를 파는 아낙네들과 돈을 달라는 아이들에게 둘러 싸였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숙소 삐끼를 따돌리고 싼 값에 숙소를 잡아 이틀을 편안히 묵을 예정이었으나 2시간 만에 관광을 끝내고는 허무해졌다. 갈 곳이 더 없다 -- 박물관에는 갈 생각이 없다. 그곳에 묵는 한국인은 내가 처음이라며 매니저가 신기해 하는데, 이틀에서 하루만 묵고 하루치 방값을 돌려줄 수 없냐고 애원하니까 징그럽게 웃으며 안 된다고 막무가네다. 그러고는 할 일이 있다며 황급히 자리를 뜬다. 어휴, 숙소가 마음에 들어 이틀치를 선불한 내가 바보지. 숙소의 종업원들은 나를 '코리아'라고 불렀다. "코리아, 세마나 산타야. 와서 보라구." "코리아, 하루 더 묵길 잘했지?" "코리아, 식당은 윗집이 괜찮아." 코리아, 코리아... 무슨 여자 이름 같다.

양지 바른 테라스에 앉아 벼룩에 물린 상처를 바늘로 찔러 피를 냈다. 닭장차를 타다가 옆 사람에게서 옮긴 것 같은데?

기기들이 점점 맛이 가기 시작한다. 돌연 PDA가 먹통이다. 리셋이 되는 바람에 프로그램들이 날아갔다. 설상가상으로 이럴 경우를 대비해 준비한 플래시 모듈 역시 고장 나서 프로그램을 설치할 수 없다. 인터넷으로 중남미 지역에서 pda 악세사리 구할 데를 알아봤지만 없다. 별 대책이 없어 한숨이 나왔다. 포스떼 레스딴떼로 부쳐 달랄까? 워낙 기억력이 형편없어서 pda를 사용할 수 없으면 괴롭다.

거리의 가게들은 세마나 산타와 이스터 때문에 대부분 문을 닫았다. 일주일 동안 노는 것이다. 아침부터 주변 마을에서 사람들이 꾸역꾸역 교회 앞으로 모여들더니 오후 무렵에는 바글바글하다. 세마나 산타 준비로 하루종일을 보내더니 두 시간쯤 행진. 생전에도 수난을 많이 당한 예수를 비롯한 여러 성자들이 매일 거리를 쏘다니느라 몹시 피곤해 보였다.


숙소 뒷편에서 바라본 Semana Santa 행진

여행자들이 없다. 다들 세마나 산타 때문에 안띠구아에 있는 것일까? 치치는 그렇다치고 어렵게 찾아온 이 숙소는 정말 괜찮은데. 여행자들이 없어 거리에서 장사하는 아줌마들과 거지들, 주정뱅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시내를 한 바퀴 산책하고 숙소의 테라스에 앉아 멍하니 아무도 없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지는 않았다. 다만, 거리의 불빛이 약해 슬며서 걸어가는 사람들의 윤곽이 마치 공포영화에 나오는 씬 같달까.

과떼말라 여행이 끝나가면서 왠지 모를 쓸쓸함이 찾아왔다. 해가 졌다. 별들이 소박하게 반짝였다.

배가 고파 거리에서 따꼬를 사서 먹었다. 거리에서 나를 '꼬레아'라고 부르는 녀석이 있었다. 소문 한번 빠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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