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atemala City

여행기/Guatemala 2003. 4. 19. 18:49
Chichicastenango -> Guatemala City -> El Salvador border -> San Salvador

2003/4/19 토요일

깨어보니 9시. 아는 척 하는 동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마침 지나가는 닭장차에 올라탔다. 작은 도시에서 이틀이나 묵으며 같은 길을 열댓번은 지나 다녔으니 '꼬레아'를 모를 리가 없겠지. :) 지금까지 탄 닭장차들 중에서 가장 상태가 안 좋은 버스였다. 세 시간을 다리에 힘주고 버티다가 과떼말라 시티에 내리니 기진맥진했다.

황량하다.

과떼말라 인구 2천만 중 천만이 살고 있는 도시 임에도 거리에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가게들은 거의가 아니라 전부 문을 닫았다. 항공권 날짜를 조정하려고 하루나 이틀쯤 묵을 예정이었는데, 세마나 산타 때문에 엿되었다.

배낭을 단단히 메고 걸었다. United Airlines 사무실을 먼저 찾아보려고 했다. 문득 '부활절 휴가'라는 것이 생각났다. 한숨 짓고 중도에 포기했다. 숙소를 찾으려고 한시간 쯤 더 걸었다. 택시를 잡아 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택시가 보여야지 타던지 말던지 하지.

이쯤되면 막 가자는 거지. 숙소에 짐을 내려놓자 마자 바로 나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해가 지기 전에 산 살바도르행 버스 정류장을 찾아 다시 한 시간을 걸었다. 출발시간이라도 알아놓을 참이다. 이 도시에는 터미널이 무려 13개나 되었다.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하니 버스편을 미리 알아둘 밖에.

거리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다. 술주정뱅이를 향해 한 경찰이 총을 겨누고 다른 경찰이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잘못 보고 세 사람이 사이좋게 장난치는 줄 알았다. 떨렸지만 용기를 내어 업무 수행에 여념이 없어 보이는 경찰에게 살그머니 다가가 산 살바도르행 버스 정류장을 물었다. 발길질을 멈추고 이마의 땀을 닦고 싱그럽게 웃으며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신시가지로 일컬어지는 INGUAT(과떼말라 관광 사무소) 앞이었다. 그리고 다시 업무 수행에 열중했다. 저러다가 사람 잡겠다. 내가 뭘 어쩔 수도 없고...

세마나 산타 행렬을 피해 성당 안에 들어갔는데 마침 미사가 막 시작되려는 참이라서 성당을 나왔다. 십일조가 겁났다. 이 화려한 성당을 짓고 유지하려면 엄청난 십일조를 걷었을 것이다. 성당이란 참 편리한 곳인 것 같다. 뭔가 나쁜 짓을 하고 나면 성당으로 쪼르르 달려와 몇 마디로 용서를 빌고 그 덕에 가벼워진 영혼으로 나쁜 짓을 더 하러 나갈 수도 있고... 음... 마음에 쏙 든다. 오늘은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했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으나 하나님이 무시할만한 시시한 것 밖에 없다.

많이 지쳤다. 해가 진 후 광장 앞에서 따꼬스와 맥주를 시켜 먹으며 한가하게 거리를 구경했다. 다들 가족을 데리고 나왔다. 과떼말라의 따꼬스는 맥시코에 비해서 별로 맛이 없는 편이다. 따꼬스는 그렇다치고 지난 한 달 동안 먹은 또르따다스 중 가장 맛있고 stuffy한 것도 멕시코에서 먹은 것이다. 맛이 별로인데 뭔가 하나 제대로 먹을 요량이면 3-4000원은 들었다. 과떼말라 음식값은 전혀 싸지가 않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따꼬스와 샤와르마와 펠라펠과 수불라끼 삐따 사이에 별 차이가 없었다. 고기와 야채와 소스를 밀가루/옥수수 전병에 싸 먹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곁들여 먹는 것이 피클류의 식초에 절인 야채류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어째서 이다지도 대중 음식이 비슷하게 다양성이 부족한 것일까? 고대문명은 모두 한통속이었던가?

멕시코와 과떼말라에서 사용하는 마이스(옥수수 전병)는 영 아니었다. 아랍에서처럼 진흙 화덕에서 원적외선으로 구워야 제맛이 날 것으로 추측된다. 원적외선과 철판구이는 확연히 달랐다. 전병에 얹어먹는 속은 다양한 고기와 매운 소스를 사용하는 멕시코와 과떼말라가 훨씬 낫지만, 가격 대비 성능을 생각하면 아랍쪽 음식들이 월등히 나았다. 맛? 아랍쪽 음식은 별 맛이 없다. 맛있어 하는 나 자신만 있을 뿐이다.

도시를 이동할 때마다 간식이든 주식이든 따꼬스를 한두 개 씩은 꼭 먹어 봤는데, 개중 치치카스떼낭고의 광장에서 파는 따꼬가 과떼말라 전체를 통털어서 가장 괜찮았다. 고기 기름을 끼얹어 4-6장의 마이스를 뜨거운 불판에서 지지는 동안 돼지 족발을 포크로 재주를 부려 갈기갈기 찢은 다음 반쯤 불판에서 튀겨진 마이스 위에 얹고 볶은 양파와 절인 야채를 얹고 그 위에 두 종류의 칠리 소스를 뿌리고 다시 마이스 두어장으로 덮어준다. 다시 마이스로 덮는다... 이런 따꼬는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했다. 열이 달아나지 않도록 하는 것일까? 2-3개 정도 먹으면 배가 불렀다. 레몬즙을 약간 짜 주면 고기맛도 상큼해지고 위생에도 좋을텐데 과떼말라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아서 약간 아쉽다. 멕시코에서는 거의 모든 음식에 레몬을 뿌려 먹었다. 레몬즙(citric acid?)이 살균작용을 하기 때문에 더운 여름에 세균에 의한 급성 복통 같은 것이 생기지 않도록 한 합리적인 후처리로 생각된다. 멕시코에서 흔히 쓰이는 레몬은, 아니 거의 모든 음식에 곁들여지는 레몬은, 콜레라에 대한 공포심 때문인 것 같다.


광장 앞 노점에서 따꼬스에 맥주 한 잔 하며 찍은 사진

맥주와 따꼬스로는 배가 안 찼다. 거리에 유난히 중국 음식점이 많이 보여 그중 한 군데 들어가 별 기대를 안 하고 볶음밥을 시켰다. 5분 후에 나온 볶음밥의 기쁘지만 한편으로 부담스러운 양은 그렇다치고, 정통 중국식으로 제대로 만든 것이라서 몹시 놀랐다. 달콤한 간장 냄새, 샹차이와 파를 넣은 것은 물론,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하고 적당한 그을음까지? 널쩍한 중국식 프라이팬에서 조리를 해야 나는 제대로 된 화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맛도 좋았다. 정통 중국식 볶음밥처럼 목구멍으로 삼켰을 때 밥알이 위장에서 곤두서는 기분이 제대로 났다. 오오... 코를 박고 정신없이 먹다가 누군가 인사하길래 쳐다보니 그집 주인장이다. 중국인이다. 니 하오마! 그럼 그렇지. 아는 중국어는 다 말했다. 이, 얼, 싼, 쓰. 음... 할 말이 다 떨어져서 엄지를 들어 최고라고 말해줬다.

중국 노동자들이 파나마 운하 건설 때 집단 이주 했다는 얘길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여기서 중국 음식점을 하는 이 사람들이 바로 그들의 후손인 것 같다. 가이드북에서는 이렇게 맛있는 음식점은 놔두고 영 거지같은 음식점들만 추천하는데 그런데서 맛 없고, 양 적고, 영양가 없고, 값비싼 음식을 먹다보면 어느새 영국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영어에 important(importado)라는 단어가 있었지. 그 단어의 어원이 import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 먼 외국에서 수입한 것은 귀중한 것이다? 커피도 그렇고 후추도 그렇고, 감자, 고추, 토마토, 옥수수, 각종 보물 등등. 특히나 영국은 자국의 음식 전통은 쥐꼬리만큼 남았고, 인도와 중동 등 제 3세계의 음식문화를 대거 수입하여 사실상 영국인의 식단을 갈아치웠다. 식사가 부실한 국가는 정신병자가 많이 나오게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유럽이 그렇고 미국도 그렇다.

생마늘을 들고 다니며 가끔 비타민제 먹듯이 먹었다. 웹에서 찾아보니 항암작용은 물론이고, 알려진 것만 해도 27 종류의 세균에 페니실린보다 '독하다'고 나와 있었다. 마늘의 참조 항목에 된장(soy paste)이 있었다. 그럼 그렇지. 드라큘라에게 간장을 뿌리면 몸부림 치다가 간장 냄새를 풍기며 고통스럽게 죽을 지도 모른다.

과떼말라에 한국 식당이 20여개나 있다던데, 별로 갈 생각은 없다. 비쌀테니까. 과떼말라 공업의 20%를 한국계 봉제공장이 장악했다. 그런데 봉제공장 사장들이 여종업원에게 나쁜 짓을 자꾸 하고 노조문제로 채산성이 악화되자 부도를 내고 달아나서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나빠져 비자 받기가 까다롭다나.

저녁 8시, 거리는 벌써 썰렁해졌다. 경찰이 두려워서 일찍 숙소로 돌아왔다. 낮에는 몰랐는데 방 벽에 친숙한 마크들이 보인다. 잘못 그린 옴 마크와 피스 마크 따위들... 아... 어디가나 배낭 여행자 숙소들이란... 죽어라고 비틀즈 노래만 불러대는 일본 여행자 한 떼거지만 있으면 '완벽한' 배낭여행자 숙소처럼 보일 것이다. 그 대신에, 다소 철이 지난 감은 있지만 흐뭇하게도 메탈리카의 음악이 요란하게 흘러나왔다.

숙소 안의 작은 정원에서 과떼말라인들과 미국인들이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잠깐 앉아 있다가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 방으로 돌아갔다. 아니다 다를까, 술 먹다가 욕설이 오고간다. 며칠 안 있어봤지만 과떼말라인들 술 버릇이 개판이라고 생각하는 편. 미국인들이 아무리 싫어도 그렇지, 얼굴에다 대고 욕을 해서야 쓰겠나... 욕 나오게 분위기 파악 못하고 과떼말라의 사정을 싸가지없이 언급하는 미국인이 있다손 치더라도, 술 먹고 하는 주사는 제 3자에게 인정받기 힘들 것이다. 어쨌거나 마음 좋게 생긴 주인 아저씨가 수습을 하고 나니 정원이 비고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그 위로 비행기 폭음이 들렸다.

밤은 깊어가는데 간혹 총소리가 들려온다. 벌써 열한발 째다. 과떼말라 시티의 시가지 중심부는 단위면적당 사설 경호원 수가 지금껏 돌아다녔던 23개 도시 중 가장 많다. 120 달러면 라이플을 구할 수 있단다. 파키스탄하고 가격이 비슷하다는 점이 믿기지가 않는다. 예전에 미국이 군부를 지원할 때 공급한 무기란다. 과테말라를 분열 양상으로 몰고 있는 심각한 빈부 격차는 국부의 대부분을 점거하고 있는 스페인계 백인 혼혈, 메스티소 mestizo와 그러한 계급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애썼던 민주적 정치인들을 탄압하기 위해 메스티소와 군부를 지원한 미국 때문이다. 동남아와 중동에서 제국주의 때문에 마음이 아팠는데 여기서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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