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그 대부분 다 잡았고 기능 하나만 더 추가하면 된다. 한참 일하다 말고, 충동적으로 금요일 오후에 평창에 가기로 했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6.55pm 출발 12300원, 3h20m.

자전거 가방에 자전거를 넣어보니 들고 다니기가 참 뭣하다. 어쩔까 망설이다가 자전거를 타고 동서울터미널까지 가기로 했다. 간단한 옷가지 정도만 챙기고 집을 나섰다. 나서자 마자 비를 맞았다. 훗. 어련할라고. 항상 비님이 호들갑을 떨며 마중나와 주셨지.

쇼핑몰 처마에 우두커니 서서 담배를 태우며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그칠 기미가 안 보여 할인마트에 들어가 쵸코바와 우유 둘을 샀다. 30분 동안 내린 비 덕에 도로가 많이 젖었다. 물이 튈 때마다 출발 전에 기름을 먹여둔 체인에 물때가 끼고 녹이 슬까봐 걱정했다. 녹이 슬면 자전거가 안 나간다.

에라 모르겠다. 신나게 물을 튀기면서 강변도로를 질주했다.

출발 30분을 남기고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하니 배가 고프다. 매번 터미널에 들를 때마다 앞에 즐비하게 늘어선 포장마차 음식이 형편없어서 안 먹는다, 안 먹는다 하다가도 먹게 된다. 떡볶이를 시켰더니 고작 한줌에 2천원씩 받는다. 배가 덜차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두 개를 사먹었다.

버스 짐칸에 자전거를 쑤셔넣고 버스에 올랐다. 졸다 깨다 하면서 pda로 음악을 들었다. 옆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휴게소에서 내리는 바람에 자리에 편안히 앉아서 갔다. 휴게소에서 천둥번개가 치고 억수같은 비가 쏟아져 내렸다. 훗. 그럴 줄 알고 비옷을 준비해왔지.

장흥을 거쳐 대화, 평창에 도착했다. 해가 져서 사방이 깜깜한데 보슬비가 살짝 내린다. 피부에 소름이 돋는다. 잠자리를 찾아 시내를 배회했다. 출발 전에 민박집을 좀 뒤져보다가 관뒀다. 펜션이나 민박이나 평창읍내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들 있는 듯 하다. 비가 올 지도 모르는데 한밤중에 가로등이 들어오지 않는 도로를 달리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찜질방을 찾아냈다. 웰컴 투 동막골에서나 듣는 종류의 사투리로 응답한다. 아줌마가 청소하다 말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대체로 여자들이 알려주는 길은 방향 외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지만 무척 친절하게 설명해주려고 애쓴다. 이 도로를 따라 읍 외곽으로 나가면 무슨 호텔이 하나 있는데 그 옆 샛길로 가다보면 있단다. 이름이 뭐에요? 그건 모르겠고... (정말 막연하지?) 어두컴컴한 도로를 달렸다. 비는 그쳤다.

청성애원 건강센터라는 곳이다. 사슴농장인데 골프장과 찜질방을 지어놨다. 자전거를 세울데가 마땅치 않다. 밤에 비가 내릴 것 같은데... 산등성이 너머로 번개가 번쩍인다. 경비실 앞 나무에 매어놨다. 들어가보니 손님이 거의 없다. 나를 포함해 일곱명의 남자. 사우나에서 간단히 샤워하고 맥주를 찾아서 이리저리 헤메다녔다. 냉장고에 맥주가 있긴 했다. 마시고 싶은데 사람이 자리를 비웠다. 그래 마시지 말자. 스카이라운지의 해먹에 누워 빈둥거렸다. 춥다. 안으로 들어갔다.

빨간색이 안 나오는 TV에서 월드컵 개막식을 한다. 여자들을 끈에 묶어 공중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마치 공중 부양 하듯이) 월드컵의 신화를 이룬 역사적인 인물들이 입장한다. 입장이 꽤 오래 걸렸다. 호리병처럼 매달린 여자들은 14개의 각기 다른 대륙을 상징한단다. 좋은데, 그만 내려줬으면 좋겠다. 개막 행사가 끝날 때까지 매달아 놓았다. 마치 월드컵은 여자애들 목 매달아놓고 벌이는 마초 행사다, 뭐 그런 의미인 것 같다. 독일 친구들 유머감각이 별난 것 같다.


사람이 거의 없는 한산한 찜질방 구석의 어두컴컴한 땅굴 같은 곳에서 잠이 들었다. 경주의 이름모를 황토찜질방 생각이 난다. 거기도 아무도 없었지. 흡사 외국 여행지의 도미토리 같았달까. 새들이 짹짹 우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 어? 모두 어디 간거지? 시계를 보니 8am. 목욕탕에 아무도 없다. 깜빡 잊고 칫솔을 안 챙겨왔다. 제길. 체중을 쟀다. 67.5kg. 샤방하게 꽃단장 하고 출발준비를 마쳤다.


아침이 밝아온다. 찜질방 스카이라운지.

자전거 여행 중 들었던 곡: Gravy Train, Ballad Of A Peaceful Man, Alone In Georgia (4:33)

gps를 켜고 평창읍으로 달렸다. 흘낏 현수막을 보니 평창읍내의 장은 5일, 10일 열린단다. 오늘이네? 터미널 주변에 짐보따리를 내려놓은 장꾼들이 보인다. 규모가 작다. 평창읍에 상설시장이 생기면서 장 역시 규모가 작아진 듯 싶다. 시장에서 메밀부침을 지지고 있다. 식욕을 돋구는 고소한 냄새가... 안 난다. 올갱이 국수와 메밀부친개를 먹을까 하다가 편의점에 들러 그냥 삼각 김밥 하나와 우유, 그리고 컵라면으로 때웠다. 출발이다.


9.30am 평창강을 끼고 달리는 도로. 영월까지 내내 이렇다. 분위기 몹시 상쾌. 저 멀리 빌립보 환경친화 어쩌구저쩌구 단지의 흰 돔이 보인다. 풍력 발전기가 돌아간다. 풍력발전기가 소음이 요란하고 지나가는 새들 회 치는 것으로 악명이 높던데... 요즘은 많이 좋아졌으려나?

며칠 전에 눈 다리끼가 났다. 벌써 세번째다. 병원에 들르니 피곤해서 생긴 거란다. 피곤했지. 여의사가 눈이 에쁘시네요 하며 안심시키더니 갑자기 눈두덩을 잡고 있는 힘껏 고름을 짜낸다. 어어... 아파서 눈물이 핑 돌았다. 신음을 삼켰다. 정말 징하네. 그리고나서 내 생애 맞았던 주사 중 순위권 안에 들 정도로 프로페셔널한 엉덩이 주사를 맞았다. 언제 바늘이 들어갔는지 모르겠고 빠질 때도 느낌이 없다.

주사가 정말 좋았는데 한 30분 지나고 나서부터 오른쪽 다리에 힘을 주면 엉덩이가 쭈볏거리며 쑤셨다. 이틀 내내 그 모양이라 자전거 탈 때 걱정했다. 그보다는 밥 먹고 이틀 동안 먹는 항생제가 골칫거리였다. 아직 부어오른 눈두덩이 덜 가라앉아 약을 먹는데, 먹을 때마다 머리가 핑 돌았다. 위궤양약, 진통제, 항생제, 안약, 연고. 의사들이 원래 상상력이 부족한건가? 세상에 약이란 것은 원래 저 다섯가지 뿐인건가?


길은 여전히 아름답다. 가끔 차가 지나다닐 뿐 한적한 도로. 있으나 마나한 갓길. 그 옆으로 언제든지 뛰어들어도 괜찮은 지방 1급수 하천 평창강. 이번에도 역시 수영복만 입고 자전거를 탔다.

한가하게 관광하듯 자전거를 설렁설렁 몰았다. 도로교통 표지판에는 '천천히'라고 쓰여 있었다. 천천히 즐기면서 갈만한 길이다. 우거진 신록에서 향긋한 풀내음이 난다. 십오년 전에 이 길을 걸은 적이 있다. 그때는 gps가 없었다. gps도 없이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마음에 드는 길이 나타나면 내려서 걸었다. 걷다가 지치면 주저 앉았다.


이쯤에서 빠지는 길이 있을텐데... 있다. 십오년전 그 도로다. 오른쪽으로는 새로 뚫린 영월, 제천행 도로가 이어진다. 핸들을 꺽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리로 비포장길을 한참 가면 길이 끊긴다. 길이 끊기는 지점에 나루터가 있고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넌다.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는 도로가 있겠지?


간만에 나타난 포장길. 비포장길을 한 시간쯤 달렸다. 비포장 오르막길은 아스팔트 오르막길보다 1.7배 가량 힘이 더 드는 것 같다. 비포장에 이르러서야 MTB의 진가가 드러났다. 내 자전거의 두꺼운 타이어가 늘 마음에 안 들었는데 비쭉비쭉 튀어나온 자갈길에서 펑크 나지 않고 잘 나간다. 내리막에서 속도를 낼 때는 이를 악물었다. 안 그러면 도로의 요철 때문에 턱이 으덜덜덜 떨린다. 길가에 나비가 앉아 있다가 자전거가 지나가면 훨훨 날아간다. 나비가 참 많다. 그러고보니 오랫동안 나비 구경을 못했다.

길이 끊긴 곳에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새로 도로를 내려는지 아스콘을 치기 전 도로 토목 작업을 여기저기서 하고 있었다. 평창의 도시 구호가 해피700이던가? 인간이 생활하기 가장 좋은 고도가 700m인데 그 고도에 평창이 있다고 주장한다. gps에 찍힌 평창읍의 고도는 280m였다.

여기저기 메밀밭이 보인다. 늙은 농부들이 기도하듯이 고개를 숙인 채 김매기를 하고 있다. 자전거가 지나가면 농가에서 개가 짖는다. 개들은 사람을 닮아 말을 아낀다. 컹~ 컹~~ 하고. 마치, 왠일로 여기 왔대요? 그냥 가나요? 하듯이. 강가에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고기를 잡거나, 물놀이를 하거나, 아니면 술을 마시고 있다. 평균 2km 간격으로 놀이팀이 있다. 누가 옆에 붙어 있는 걸 못 견디는 편이라 여름의 동해안 해수욕장에는 한 번도 놀러간 적이 없다.

강변의 몫 좋은 곳에는 여지없이 팬션이 보인다. 강가에는 수영금지 팻말이 여기저기 붙어 있다. 유속이 느리고 물이 얕아 수영이 가능하다. 자전거를 세우고 물가에 앉아 발을 담궜다. 차다. 어쩔까. 물에 몸을 적실까. 땀이 거의 나지 않았다. 게다가 날이 흐려 상대적으로 물이 더 차게 느껴진다. 신발을 도로 신었다. 그냥 가자.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20년 넘게 살다가 사람들이 얍삽하고 성질 더러운 큰 도시에 옮겨온 지 십년이 넘었다. 여행은 나를 다시금 문명이 그다지 필요없는 생활로 돌아가게 해 주었다. 비누와 치약, 컴퓨터 정도만 있으면 나름대로 살만하다.

간간이 감질맛나게 보슬비가 내렸다. 최종병기인 비옷을 입을까 말까 망설이게끔 하는 정도만. 아내한테 전화가 왔다. 서울에는 천둥번개를 동반한 큰 비가 온단다. 그러길래 토요일에 출발했으면 엿될뻔 했지. 나만 괴롭히는 것 같은 날씨신을 엿 먹이려고 하루 땡긴 것이다. 그래서 눈 다리끼로 탱탱 부은 눈을 하고 항생제로 찌든 몸임에도 일찌감치 출발한 것이었지.

비야, 왜 안 오니? 이럴 땐 ㅋㅋㅋ 하고 웃어줘야지.

책 박물관으로 향하는 길. 언젠가 영월 책 박물관의 홈페이지에서 책 박물관 인근 마을을 헤이온와이같은 고서 마을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본 기억이 난다. 게다가 가는 길에 책 박물관이 있다니 꼭 들러봐야 하지 않겠는가? 가는 길에 없다면 안 들러도 무방하지만. 길을 잘못 알아서 오르막길을 두번 오르락 내리락 하고 나서야 박물관에 도착했다. 자전거를 마땅히 세워둘 곳이 없어 계단 참의 난간에 매 두고 올라갔다. 왠 폐허가 나타났다. 흔히 폐교라 불리는 것이다. 아, 그렇구나. 책 박물관은 폐교를 수리해서 만든 것이구나. 분위기 좋아 보인다.

담배 한 대 빨고 입장권을 사려고 건물을 빙 둘렀다. 주인 아줌마가 차 닦다 말고 2천원짜리 표를 끊어준다. '철수와 영이'가 그려진 표다 -_- 신발을 벗고 달랑 교실 세 개짜리 분교 건물로 들어섰다.


정약용이 쓴 한글 언해본. 근데 제목이 뭐였지? 얼마 전에 소설 정약용 살인사건을 읽었는데 꽤 재미있어서 자전거 타고 해남에 갈 생각이었다. 며칠 전에 소설의 저자와 중국집에서 쿄코님이 극찬하던(?) 연태고량을 연거푸 퍼마셨는데(34도짜리 순한 술로 향과 맛이 일품인데다 뒷끝이 깔끔하다) 저자는 정작 책이 잘 안 팔려서 시무룩한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연태고량은 가을 저녁 길가에서 슬며시 잡아본 여인의 허벅지 아니 팔똑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온기가 느껴지는 술이다. 저절로 입맛을 다시게 되는군. 쩝쩝

3개의 전시실을 둘러 보았지만 별로 볼만한 것이 없다. 서종이 논리적이거나 치밀하거나, 다양하거나, 재밌지 않았다. 아직 두서가 없는 편. 그런데 영월책마을 프로젝트의 로드맵은 어딨는거야? 물어봐야지.

갑자기 애들이 저그 떼처럼 밀어 닥쳐서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아 황급히 나왔다. 아! 책박물관을 나와서 한참 업힐을 낑낑거리며 오른 다음에야 주인장에게 직지 프로젝트 홈페이지 알려준다는 걸 잊어버렸다 -_-


한창 도로를 건설 중인 자갈길을 오르락 내리락했다. 원래 가려던 길이 아닌데 gps를 보니 가는 길인 듯 하여 선암마을이라는 곳을 지나치게 되었다. 강굽이가 기이하게 틀어져 내려다보면 한반도 지형처럼 보이는 곳이란다. 저 멀리 이 지방 토박이들의 원성을 자아내고 있는 현대시멘트의 공장 건물이 보인다. 현대시멘트 가동 후 마을의 대기중 미세먼지 농도가 서울의 무려 4배 수준에 이르렀다. 묘하게도 중국 위치쯤이 되어서 중국에서 날리는 황사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한국처럼 보였다. 지도의 서해안 부분은 새만금 간척 사업으로 고통받고 신음하는 갯펄처럼 보이지 않나? 사진의 동쪽은 한국에서 내노라하는 오지 마을 중 하나(였)다.


한반도 지형은 그저 그런데 조망대가 아름답다. 시원한 솔바람도 불어오고. 올 봄 조망대 밑에 무궁화 묘목을 심어놨다. 옆에는 '일본 독도망상을 규탄한다' 라고 적혀 있다. 말 뜻 그대로 해석하면, 누가 망상이나 공상을 하는 것은 지탄받아 마땅한 것처럼 보인다. 또는, 이념이 다르면 확 죽여버리겠다는 것과 뭐가 다른가. 그냥 '맨날 회나 쳐먹는 빌어먹을 원숭이 놈들아 독도는 우리 꺼야!' 라고 적어놓는게 훨씬 직관적이고 호소력이 있지 않을까 싶다. 플랭카드 한 장에도 센스를 담자 님들아.

공사한다고 길을 막아놨다. 길이 없고 요즘 생기는 중이다. 생기는 중인 길을 가는 것이야말로 여행자의 로망이지 싶어 턱이 으덜덜덜 떨리는 비포장 도로를 마구 달려갔다. 사우나 마다 설치되어 있는 벨트식 허리 진동기는 허리에 낀 지방을 제거하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다. 상하로 흔들어댄다고 지방이 분해될 리가 없지. 체지방이 분해되는 경우는 딱 한 가지밖에 없다. 소화된 탄수화물-당분이 다 분해되어 더 태울 것이 없어지면 체지방을 연소시키는 것. 그러니까 물과 공기만 마시며 허기져서 쓰러질 때까지 운동하면 된다.

땀방울이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소금끼가 까칠한 맨살에서 먼지 알갱이처럼 굴러 떨어졌다. 체지방 연소도 좋지만 배가 고파서 어제 비올 때 편의점에서 사둔 초코바를 꺼내 씹어먹었다. 영월에 도착하면 그때나 밥을 먹자고 마음 먹었다. 어제부터 제대로 된 식사를 못했다. 지나가는 덤프트럭 때문에 먼지 풀풀 날리고 포크레인이 삽질하고 있는 길을 달리는데 현장감독쯤 되 보이는 아저씨가 승용차를 멈춰 세우고 '아저씨 저 길로 돌아가는게 좋을 겁니다' 라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아, 예.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힐탑까지 올라가 도로를 탔는데 뒤에 경찰차가 따라 붙었다. LA라면 악셀을 밟아 뺑소니 치겠지만, 자전거를 갓길에 세우고 경찰차가 옆에 설 때까지 기다렸다. 경찰만 보면 왠지 캥겼다. '아저씨 여기 자동차 전용 도로라서 이리 가면 안되요.' 라고 말씀 하셨다. 열나 업힐해서 장마비처럼 땀을 흘리며 올라왔는데 내려가라니 억울하잖아요? 좀 가다가 옆길로 빠질께요. 라고 말해야 할 상황이지만, 얌전하게 네. 하고 대꾸하고 핸들을 틀었다.

강원도에서는 법대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아무도 없는 도로에서 녹색 신호등이 점등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출발한다. 법이 광의적인 의미에서 사회적 합의라면, 사회라 부를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는 상황이라면 굳이 규칙을 지켜야 하나? 오래 전 배낭여행자들이 숙소에 모여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싱가폴에서는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침을 뱉거나 술을 마시면 즉결로 넘어가 곤장을 맞고 추방당하는데, 이색체험이랍시고 태형을 한 번 당해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여행자로서 색다른 관록 하나를 만든다? 할 짓이 없어서 자기 몸을 혹사하는 그런 일을 할까? 그런데 나는 그 세 가지를 다 해 봤다. 사귄 여자애가(물론 싱가폴 아가씨다) 가게에서 나오길 기다리며 가게 맞은 편에 놓여있는 오처드 로드의 한 벤치에 앉아 근처 수퍼에서 산 맥주를 홀짝이며 담배를 피우고 침을 뱉었다. 내 옆에는 경찰관이 서 있었다. 잡혀가지 않았다. 그날 밤 보트키에서 한물 간 디스코 리듬에 춤을 추고 술을 아주 많이 마시고 떡이 되어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이국의 거리를 헤메며 비틀거렸다.

곤충박물관이 나타났다. 역시 폐교를 개조해서 만들었다. 입장료 2천원이 전혀 아깝지 않은 다양한 수집물과 정성어린 표제가 눈에 띈다. 잘 봤습니다 수고하세요 하고 나왔다. 음료수를 마시며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비가 올듯 올듯 하다가 오지 않는다. 해가 보일듯 말듯 하다가 구름 속에 숨었다. 어린 시절 즐겨 튀겨먹던 저것이 노린재 중에 하나였구나. 호랑나비보다 제비나비를 더 좋아했다. 어렸을 적에 번역된 존 파울즈의 소설은 거의 다 읽었다. 미란다, 마구스, 콜랙터, 꾀뜨미네의 사흘, 프랑스 중위의 여자. 그중 콜랙터는 몹시 인상에 남는 소설이었다. 박제를 볼 때마다 그 소설이 생각났다. 이제 출발해야지. 몇 안되는 업힐이지만 길고 지루해서 지친다. 평창강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업힐에서 자전거가 취한 것처럼 비틀거렸다. 앞뒤 기어비는 1:1. 입술을 핥았다. 짜다.


다 오르니 선돌이 100m 앞에 있단다. 오로지 주행만 할 생각이었는데 오늘 볼꺼리가 이것저것 꽤 되는 편. 선돌 앞에서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고 한다. (어딘들 안 그렇겠나) 소원을 빌었다. 통일 되게 해주십쇼. 개마고원 함 달려보게. 남자가 순진한 여자애 꼬시는듯한 모습이네?

시원한 내리막이다. 오후 4시다. 여기저기서 길을 헤메지 않았더라면 좀 더 빨리 왔을텐데. 내리막 끝에는 유배 생활하다가 사약 받고 승하한 단종을 모신 단종대가 있다. 충절의 고장 영월이라고 하더라. 모험 관광의 출발지 영월이라고도 한다. 입장료 내고 들어가서 구경하다 갈까, 하다가 영월->서울행 버스 시간을 모르고 허기져서 영월에서 밥 한끼 먹는 것이 정서적 안정에 더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영월로 발길을 돌렸다. 어린 시절 대인관계와 성정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는 애착 이론에 따르면 나는 non-secure attachment 타잎의 삶을 살았다. 생후 일년 이내에 부모와 아이 사이에 형성되는 애착 형성이 훗날 대인관계에 아주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얘긴데, 비안정애착을 마치 안 좋은 성장 장애처럼 묘사하는 아동심리학을 약간 희안하게 여기는 편이다. 대인관계와 리더십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라고 말하면 나같은 놈을 dismissing avoidant attachment type이라고 불러 주신다. 대부분의 정치형 리더는 조직과 집단에서 공개된 희생양 내지는, 신성한 공물일 가능성이 더 크다. 안정애착형 대부분은 대인관계가 몹시 좋을진 몰라도 리더는 평생 못해 먹는 잡초같은 인생을 살아간다(잡초가 비아냥은 아니고 내 인생의 중요한 지향점이긴 하다). 대인관계는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우주의 크기가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공상을 하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왜 애를 안정애착형 만들려고 전전긍긍하나? 타인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읽고도 대충 무시하고 살아가는 비안정집착 또는 자유방목형에는 나름대로 장점이 꽤 많다. 말은 못하겠군.

영월에는 김삿갓 박물관이 있고 동강이 평창강과 만나고 고씨 동굴이 있고 한겨울에 벌벌 떨면서 타오르는 화성을 구경했던 별마로 천문대도 있다. 그럼 먹을만한 밥집은?

오기 전에 곤드레 나물밥을 먹을 수 있는 청산회관과 평창식당(김인수할머니 순두부집)을 점찍어 두었다. 청산회관은 입구가 영 식당틱하게 생기지 않아 평창식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반찬 14가지에 순두부 찌게 한 그릇. 밥맛은 훌륭한데 14가지 찬은 그저 그랬다. 하여튼 7가지 이상의 반찬으로 배를 든든하게 채웠다. 더 드릴까요? 아네요 이것만 해도 너무 많은데요. 배불리, 맛있게, 잘 먹어서 고맙습니다 인사하고 나왔다.

강변에서 벌어지는 마을 잔치 구경하다가 버스 시간에 맞춰 터미널에 도착했다. 자전거를 버스에 우겨넣고 좌석에 앉으니 승객 수가 11명 뿐이다. 토고 감독이 보따리 싸서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다소 황당한 뉴스를 보았다.

차에 타고 좀 가다가 창밖으로 비가 퍼부을 기세로 내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가방에서 옷을 꺼내 갈아 입었다. 비옷도 꺼내 놓았다. 강남 터미널에 도착하니 비가 멎었다. 자전거를 타고 반포대교를 건너 빗물이 척척하게 고인 강변로를 따라 달렸다. 비 때문에 아무도 없다. 어두워지고 있다. 신나게 밟으며 집에 가서 뭘 먹을까 오직 그 생각만 했다. 두 시간 반 전에 배불리 먹었는데도 이틀 동안 워낙 먹은 것이 없어 여전히 배가 고프다. 살갗을 스치는 이 스산한 바람에 통닭과 맥주를 마시기는 그렇고, 고깃집에 혼자 가서 땟국물 좔좔 흐르는 이 복장으로 소주에 삼겹살 먹는 것은 청승맞고... 아내는 친구네 집에 놀러가고 없다. 자고 오라고 말했다.


집에 돌아와 부대찌게를 만들어 소주 한 잔 곁들였다. 반 병도 채 마시지 못했다. 강가에서 찬 바람 쐬다가 뜨덧한 것이 목구멍에 들어가니 살 것 같다. 누워 노트북으로 영화 아르센 루팡을 보다가 그대로 뻗었다. 루팡이 의외로 재밌다. 루팡 2탄 꿈을 꾸었다.

점심 무렵 일어나 어제 먹다 남은 부대찌게로 밥을 해먹고 빗물과 먼지로 엄청 지저분해진 자전거를 장장 세 시간에 걸쳐 분해하고 정비했다. 기름때가 잔뜩 묻었다. 목욕탕에 가서 정성껏 때를 밀었다.


주행기록을 살폈다. 평창-영월 구간만 68km. 최대속력 51.7kmh. 주행시간 7h36m, 그리고 평속 9kmh(당연하지. 핏발 세우며 주행에 전념한 것이 아니라 거의 빈둥거리면서 갔으니까). 아닌게 아니라 정말 기가 막힌 길이다. 줄곳 내리막인 경관 수려한 자전거 관광 전용 도로라 할만 하다! 평창,영월군은 이 코스 필히 개발해야 한다.

* 평창->영월 GPS Trackmaker file
* 평창->영월 Google Map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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