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아침에 샤워를 하고 첵아웃 한 후 버스 터미널에서 K. Kansar행 로컬 버스에 올랐다. 로컬버스는 어디가나 똑 같은 듯. 지겹게들 타고 지겹게들 내렸다. 그래서 정상 운행시간보다 1~2시간 정도 늦어지는 것은 예사인듯 하다.
 
말레이지아 정부의 노력이 어디를 가나 여실히 느껴진다. 잘 만들어진 도로망, 값싼 버스비, 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도로망과 전력선과 수도가 잘 갖추어진 것 같다. 아니, 내가 말레이지아에 대해 가지고 있던 후진국이라는 선입견이 잘못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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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알라 캉사르로 가는 길에 본 말레이지아의 가옥. 정글은 그들의 뒤뜰이었다. 타이핑에서 이포에 이르는 길은 말레이지아의 전통 가옥을 보기 가장 좋은 곳이라고 한다.


캉사르에 내리자마자 double lion 호텔을 잡고 그렇게 아름답다는 Ubudiah Mosque를 찾아 길을 나섰다. 시내가 작아 길을 찾는 것은 쉬운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레이지아 최초로 심어졌다는 고무나무를 찾지 못해 여러번 뺑뺑이를 돌았다. 최초로 심어진 고무나무 이후, 말레이지아는 주요 생고무 수출국이 되었다. 그것보다는 값싼 반도체 칩의 주요 생산지로 말레이지아가 낯설지 않았다.
 
이것 저것 구경하다가 공원에 들렀는데, 썰렁하기 그지 없다. 공원은 두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었다. 말레이 인들이나, 중국인들이나, 인도인들이나 강이 만나는 곳을 신성시하여 무슨 공원 같은 것을 만드는 일을 자주 하는 듯. 그러고 보면 한국도 마찬가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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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고관 대작 마누라들의 놀이터. 이런게 왜 중요한 관광 포인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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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강이 만나는 지점. 한 쪽은 맑은 물. 한 쪽은 흙탕물. 그래서 성스러워 하는 듯.

 
태양이 한참 뜨거울 무렵에 한 시간 쯤 뙤약볕 아래를 걸었다. 가는 길 저 멀리 황금빛 모스크가 보인다. 기실 카메론 하이랜드에서 보냈던 엽서 중 몇 장은 저 모스크가 찍혀 있었다. 엽서의 그림은 대단히 아름다웠으나 직접 보니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생각보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탓이다. 그나저나 땀이 줄줄 흘러 내렸다.
 
모스크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들어갈 수 없다고 손을 가로젓는다. 복장이 문제냐니까 아니라고 한다. 그럼 관람 시간이 정해져 있냐고 하니 그것도 아니란다. 외국인은 안되는건가? 아니다. 그럼 뭐가 문제냐? 그냥 안된다. 문지기가 뭔가 말레이어로 설명하려고 하는데 무슨 뜻은지 잘 모르겠다. 하여튼 복장, 외국인, 시간, 그런 문제는 아닌 건 대충 알겠는데 이 아저씨야, 난 한 시간을 뙤약볕을 참아가며(고행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그렇게 쉽게 문전박대할 수 있는거냐? 어쨌든 뭐라고 얘길하든 영어를 알아듣질 못하니 그냥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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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udiah Mosque. 1917년 이드리스 무르시둘 아드잠 샤아 1세가 지었다. 말레이지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로 손꼽한다. 아름답긴 아름답다. 내가 더위를 먹어서 그렇지.


다시 자외선을 듬뿍 함유한, 뜨겁다 못해 칼날 처럼 살갗을 도려내는 듯한 뙤약볕 아래를 걸을 생각을 하니 눈 앞이 캄캄해서, 궁리 하다가 관리인 안 보는 새에 모스크의 뒤로 돌아가 슬쩍 들어갔다.
 
예절상 신발은 벗었다. 그리고 모스크 내부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타부를 타파하기 위해 회랑의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아뿔싸, 240장쯤 들어갈 꺼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디지털 카메라는 193장 째에서 사진을 더 이상 찍을 수 없었다.
 
원형으로 모스크 안쪽을 빙 두른, 이쪽 복도와 저쪽 복도 사이에서 사람들이 대화하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층으로 재빨리 기어 올라갔다. 193장 이상 찍을 수 없다... 계산을 잘못했다. 사진당 차지하는 메모리 용량이 각기 틀리기 때문에 복잡한 사진을 찍으면 용량을 더 차지해서 실제로는 240장이 아닌 200여장의 사진을 담을 수 있는 것 같다. 쓸모없는 사진을 찾아 일일이 지울 시간도 없고, 전지도 거의 떨어진 상태라 할 수 없이 사진 찍기를 포기했다. 정말 억울했다. 예배당 안쪽과 펼쳐진 채 독서대에 얹혀 있는 커다랗고 낡은 코란을 찍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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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브디아 모스크의 내부 회랑. 과연 이 내부를 찍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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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은 티끌 하나 없이 정말 광 나게 닦아놨다. 왼쪽 사진의 오른쪽 구석에 보이는 칠판에는 예배 일정이 적혀 있다. 드러누워 한 잠 자고 싶은 곳이다.


아래층에서 인기척이 가시자 살금살금 기어 내려와 쪽문을 통해 모스크를 빠져 나왔다. 타이핑에서 태평스럽게 노닥거리다가 카메라의 전지를 충전해 놓지 않은 나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전지 용량이라도 남아 있으면 시간을 들여서라도 불필요한 사진을 삭제할 수 있었을텐데...
 
다음은 박물관과 왕궁을 구경할 차례다. 터덜터덜 걸어갔다. 길은 이것 하나 뿐이고,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미치게 덥다. 한 걸음 뗄 때마다 턱 밑으로 땀방울이 떨어졌다. 도저히 안 되겠기에 앙상한 나무 밑에 앉아 쉬었다. 잎사귀 하나 없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 햇빛은 사정 없이 내리 꽂히고, 사위는 정적만이 감돌았으며 인적이 도대체 보이지 않았다. 아스팔트는 이글이글 달아올라 있었다. 근처에는 음료수를 사먹을 가게조차 하나 보이지 않는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20분쯤을 폭염의 정적 속에서 땀을 줄줄 흘리며 멍청히 앉아 있었다. 대책이 없다.  

마침 학교에서 파하고 돌아오는 학생들이 지나가길래 손을 흔들며 다가가 뭣 좀 물어보려고 하는데,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쏜살같이들 도망갔다. 사실은 시내까지만 태워주면(아니 내가 몰고 널 뒤에 태워서) 맛있는 아이스 토푸를 사주겠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시내까지 돌아갈 생각을 하니 도저히 엄두가 안난다.
 
시내 쪽으로 향하는 차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았으나 온통 챠도르를 뒤집어쓴 아줌마들이다. 손을 절레절레 저으며 그들도 달아났다. 불끈 욕이 튀어 나왔다. 외갓남자 좀 태운다고 차가 폭발하나? 차도르 벗지 않으면 말레이지아 경제발전은 어림없다! 망할 말레이 놈들아, 너네들 정말 재미없게 산다! 예쁜 여자도 없지? 차도르 벗겨봤자 뭐하겠냐? 원래 못생겼을텐데!
 
더위 먹었다고 생각했다. 간신히 어떤 아저씨가 타고 가는 오토바이에 히치하이킹 할 수 있었다. 정말 구세주라도 만난 기분이다. 그는 원래 시내에 들어갈 생각이 아니었는데 나를 시내까지 데려다 주었다. 뭔가 사례를 하고 싶어 붙잡았지만 극구 사양하고 손 한번 맞잡았을 뿐이다. 그는 미소와 함께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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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청사 건물. 잘못 찍은 사진.


숙소에 돌아와 샤워하는 중에 나에게 이곳을 추천해준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녀석은 오토바이가 있으니까 유유자적 이곳을 관광할 수 있었지만 나는 택시를 대절해서 왔다갔다 할만한 곳이다. 망할 놈. 그러면 그렇다고 말해줄 것이지.
 
시내에 돌아와 튀김과 소야 주스(아이스 토푸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맛은 같다)를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쓰러질 지경이었지만 먹는 것을 게을리하면 오히려 몸을 망치는 일이려니 하고 꾸역꾸역 먹었다. 튀김 모양은 각기 달랐지만, 튀김옷만 입혔다 뿐이지 내용물은 모두 같았다. 순 닭이었다. 이 빌어먹을 말레이지아 놈들은 맨날 닭고기만 먹고 살았다. 함께 사는 인도애들은 소를 안 먹지, 이슬람 애들은 돼지를 안 먹지, 그러니까 닭하고 생선만 죽어라고 먹어대는 것이다. 온 사방에 KFC가 있었고 모든 고기 요리는 닭 아니면 생선이다.
 
내 식사는 온통 닭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밀가루 국수건 쌀 국수건 닭이 들어가 있었다. 이들의 주식은 흰 쌀밥에 튀긴 닭고기를 얹던가, 안 튀긴 닭고기를 얹고 거기에 소스를 살짝 뿌린 것이었다. 국수 국물은 천편일률적으로 닭국물이었다. 똥을 싸도 닭똥만 쌀 놈들이다. 게다가 그 맛있는 닭똥집은 안 먹는 것 같다.   

닭 먹고 침대에 벌렁 누웠다. 잠이 들었다. 오후 내내 살만 죽어라고 태우고 고생만 했다. 깨어보니 2시간쯤 지났고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약간 두통끼가 있다. 더위 먹고 닭 먹어서 그런 것 같다.
 
캉사르를 둘러보기 위해 나가 보았으나 작은 도시에 불과하다. 시내의 길이는 고작해야 400m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두세시간쯤 소설 보며 개기다가 식사하러 밖으로 나갔다. 한참을 돌아다녔으나 고작 7:30pm 밖에 안 되었는데 먹을만한 곳들은 이미 문을 닫았다. 식사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니 그저 황당할 뿐이다. fajar(광장이란 뜻) 뒷 편의 아마도 하나뿐인 food court에서 국수 한 그릇 먹었다. 콜라 값 계산이 잘못된 듯. 무시. 호텔로 돌아오니 인도인들이 바글거린다. 객실은 하나 밖에 안 잡아놓고 사람은 여섯명이 들어차 있다. 하하 역시 인도놈들은 어디가나... 하고 웃음이 나왔다. 새벽 한 시까지 소설 읽다가 잤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싸고 첵아웃하고 디포짓 받으려 했는데 10rm밖에 안 돌려준다. 어제 60rm을 건네주고 돌려받은 것이 20rm, 그러니까 deposit을 20rm 줘야 하는데... 뭐라 했지만 증거가 없다. 내가 돈을 건네줄 때 50rm을 줬어야 하는데 60rm을 건네준 것을 받았고, 난 디포짓이 원래 20rm인 줄 알고 있었다. 환장하겠군.
 
무작정 시비 걸며 시간 보내기도 뭣해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KL행 표는 구할 수 없었고, 할 수 없이 ipoh에 가서 ipoh에서 KL로 가야할 것 같다. 로컬 버스를 타고 이포로 향했다. 힌두사원이 있는 석굴과 불교 사찰이 있는 석굴이 볼만하다고 CH에서 귀뜸해 주었지만 캉사르에서 하도 데어서 들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포에서 장거리 버스 터미널을 찾아 KL행 버스를 찾아 보았다. 터미널에서 표를 파는 시스템이 한 창구에서 한 목적지를 파는 형태가 아니라 여러 버스 회사가 제각각 창구를 통해 같은 목적지의 표를 팔고 있기 때문에 창구를 제대로 찾아야 썩은 버스 안 타고 좀 나은 버스를 탈 수 있는데 VIP 버스는 한 시간 후에야 있고, 기다리고 예약하는 것은 질색이라 눈에 띄는 KL행 버스 아무 것에나 올랐다.   

역시 썩은 차다. 로컬 버스만 계속 타서 지긋지긋한데 모처럼 타는 익스프레스 버스도 이처럼 똥차니 불운의 별은 아무나 타고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출발한다. 버스에 손님이 나 혼자 뿐이었다. 그런데도 KL까지 잘 간다. 운전수는 거의 할아버지, 할아버지 운전수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영어를 잘 못해 그리 오래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어디에서 내려줄꺼냐고 지도를 보여주며 이곳 저곳 짚어 보이니 푸드라야 터미널이란다. 가이드북은 못 미더운 형편인데 아는 데라고는 푸드라야 터미널 밖에 없는 내 입장에서는 한 시름 놓았다.   

터미널에 도착. 이번에는 트래블러스 문 롯지를 제대로 찾아 10링깃에 도미토리에 투숙. 주인이 한국인이 있다며 나를 그 곳에 넣어줬다. 일본인 둘, 한국인 하나가 묵고 있다고 한다. 왜 동양인끼리 한군데 몰아 넣어 주려고 난리인지 원. 가뜩이나 한국인 안 만났으면 좋겠다 싶은데. 한국인 만나면 또 술을 마실 것이 뻔했다. 그것은 과다 경비 지출로 이어지고... 사실 경비 문제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있지만 기념품을 산다던가, 택시를 탄다던가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서울 이었다면 한잔 걸치고 택시비 아까운 줄 모르고 1- 2만원씩 내고 탔을텐데 여행만 하면 구두쇠가 되는게 신기하다. 아니다. 검소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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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jid Jamek모스크. 잘 못 찍은 사진. 한밤중에 보면 환상적이다.

간단히 샤워하고 지도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KL 시내 지도] 날씨가 후덥지근하다. 습기 때문에 금새 땀으로 티셔츠가 축축해진다. 강변을 걷다가 마침 지하철 역이 보여 별 생각없이 타 봤다. 맨 앞칸의 앞 좌석은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터널 전경이 보인다. 애 하고 둘이서 신기하게 그걸 쳐다보고 있었다.
 
페트로나스 빌딩까지 갔다. 한국 건설업체가 저런 건물을 지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잘 지어놨다. 올라가고 싶었지만 입장권을 사야 되는 것 같아서 관뒀다. 지도를 보면서 시내를 주욱 걸어 말레이지아 관광 안내소에 들렀으나 타이핑과 팜플렛이 거의 똑같아서 별달리 더 구할만한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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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ronas Twin Tower. Petronas는 석유를 의미.


 부킷 빈탕 거리를 이리저리 방황했다. 말레이지아 최대의, KL 최대의 쇼핑가라지만 쇼핑에 관심이 없어서 그저 빌딩에 들어가 에어컨 바람이나 쐬고 나오는 정도였다. Lot 10 앞에 있다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인터넷 까페 앞에서 들어갈까 말까 망설였다. 그다지 email 보고 싶은 기분도 아니고 컴퓨터 만지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관두기로 했다.
 
빈탕 거리 옆길에는 많은 식당이 있었다. 거기서 맛있는 새우 국수를 먹고 숙소까지 걸어갔다. KL 중심 시가를 반이나 돌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4시간이었다. 말레이지아 최대의 도시가 하루 관광 코스라면 나머지 도시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만 같다. 아니면 한국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기형적으로 성장한 도시의 전형들을 보아온 탓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국의 도시 때문에 내가 도시를 싫어하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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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ara Kuala Lumpur (KL Tower) 텔레콤 타워로도 불리우며, 말레이 지폐에도 등장. 말레이 지폐는 액수만 다를 뿐, 다 똑같이 생겼다.


공동 샤워장에서 샤워하고 도미토리 침상으로 돌아와 보니 한국인 여자가 옆 침대에 있어서 아는 척을 했다. 싱가폴에서 살고 있는데 태국으로 올라가는 길이란다. 말레이지아는 나잇 라이프가 없어서 심심하단다. 내게 태국 북부 치앙마이에서 할 수 있는 고산족 트래킹에 관해 이것저것 물었다. 아는 대로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내 생각엔 태국 북부 산악지대 트래킹은 말레이지아 정글 트래킹에 쨉이 안 될 것 같았지만...
 
그녀는 외국인과 함께 나갈 준비를 했다. 날더러 같이 나가잘까봐 슬쩍 게스트하우스를 빠져 나왔다.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강변을 따라 생각에 잠겨 한참 걷다보니 길을 잃었다. 길 잃는 것에 관해서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7 일레븐에서 맥주를 샀지만 먹을만한 곳이 없어 식당 같은 곳으로 들어가 닭 튀김을 하나 주문하고 먹었다. 종업원이 술은 안된다고 뭐라고 그러길래 식당을 살펴보니 인디언 레스토랑이었다. 채소만 먹고 사는 사람들 상대로 하는 가게에서 왜 닭을 팔지? 술 마신다고 뭐라고 지랄했지만 무시하고 게눈 감추듯 맥주를 숨기고 홀짝 홀짝 마셨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왜 고독하거나 외롭지 않을까. 

숙소에 돌아와보니 인사성 바른 일본인이 옆자리에서 TIC에서 잔뜩 가져온 팜플렛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행자들과 대화를 잘 안 나누는데,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일본애 셋과 얘기했다.   

한국인 여자애는 옥상에서 닭 같이 생긴 외국애와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 정말 닭같이 생겼다. 말투도 어눌하고 어딘가 핀트가 어긋난 녀석 같아 보인다. 별로 얘기하고 싶지도 않고 담배 한대 피우고 그냥 도미토리로 돌아와 일본애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한국 여자가 내려와 같은 한국인끼리 얘기하지 않아서인지 섭섭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영어도 잘하고 외국 생활도 오래했기 때문에 외국인과 잘 어울리니까 그녀가 섭섭해 할 이유는 없다고 봤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그녀의 티셔츠에 적힌 어떤 말 때문에 서양애들이 그녀를 무슨 젓소처럼 쳐다보는 것이 꽤 기분이 나빴던 것 같다. 문귀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왠간한 남자들이라면 그게 무슨 뜻인지 알만한 말이다.   

밍기적 거리다가 잠에서 깨어 일어나보니 아홉 시, 몇몇 사람들이 일어나 책을 읽고 있다. 얼굴을 보니 머리털이 엉망진창. 샤워하고 돌아왔다. 한국 여자애는 밥 먹으러 나갔다. 나가서 미 훈을 시켜 먹었다. 먹으면 먹을수록 마음에 든다. 충분히 한 끼 식사가 된다.   

짐을 챙기러 숙소로 돌아왔다가 어떤 서양인이 굉장히 친근한 척 하며 말을 걸어왔다. 하, 재밌는 친구인데? 멜라카행 버스가 그리 쉽지만은 않을 꺼라고 충고한다. 난 예약할 필요가 없다고 큰소리를 뻥뻥 쳤다. 첵 아웃하고 푸드라야 터미널에 가보니 멜라카행은 3:30pm이 가장 빠른 차. 난감해서 한 시간쯤 카운터 사이를 헤멨다. KL과 멜라카 사이는 기껏해야 150-200킬로미터 밖에 안된다. 또한 멜라카는 말레이지아 최고의 역사유적지이자 관광지니까 버스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숙소 나오면서 저런 논리로 큰 소리 뻥뻥 쳤는데 버스를 못 잡는다면 수치스러운 일이다.
 
한참 돌아다녔다. 결국 12:30 차를 잡을 수 있었다. 빙고. 잘하는 짓인지 의심스러운데, 멜라카에서 3일 정도 개겨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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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duraya Bus & Taxi Station 정말 사람 많고 복잡하다.


버스 타고 가는 동안 줄곳 팔, 다리가 가려웠다. 멜라카에 도착해서 보니 한쪽 팔과 한쪽 다리에 점점이 붉은 반점이 나 있었다. 땀 때문에 피부가 가려워서 그러려니 무시하고 숙소를 찾아 돌아다녔다. 지도가 워낙 형편없고 설명대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말레이지아 어디를 돌아다니든 내리면 낯설고 생소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야 했다. 덕택에 입에 거미줄이 안 생기고, 외롭고 고독해지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숙소들이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더위 뿐이라면 견디겠는데 이놈에 습기 때문에 조금만 걸어도 쉽게 지친다. 

땀에 절어 자전거를 끌고 가는 일본인 둘이 있었다. 그들 숙소가 마침 거기란다. 그래서 그들을 따라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박박 머리를 민 주인이 나와 인사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이 없단다. 도미토리를 둘러 보았다. 희안하게도 침대마다 칸막이를 쳐 놓았다. 나쁘지 않아 보여 묵겠노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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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가는 길.


사워를 했다. 정강이에서 허리선을 따라 팔뚝까지 이르는 긴 붉은 반점의 열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AIDS 같아 보여 더럭 소름이 끼쳤다. 알몸을 둘러보니 여기저기 가려운 반점들이 있었다. 때마침 공동 샤워실을 나오는, 팬티만 입은 내 모습을 본 주인장이 울퉁불퉁 부어오른 내 피부를 보더니 벼룩 때문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는 내게 어디서 묵었냐고 물었다. 트래블러스 롯지라니까 그럴 줄 알았다며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KL의 거의 모든 싸구려 숙소들마다 벼룩이 있고 그들의 본부가 트래블러스 롯지란다.
 
그는 내 배낭과 소지품을 모두 들고 오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배낭을 들고 숙소 안쪽의 정원에서 짐을 모두 꺼내 햇빛 아래 늘어놓았다. 때마침 먹구름이 몰려와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정원에는 영국인 할멈이 앉아 오렌지 쥬스를 홀짝이며 (난 그때까지 팬티만 입고 돌아댕기고 있었다) 내 몸에 돋아난 발진을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며 꼬치꼬치 이것저것 캐 물었다.
 
주인이 Tiger balm을 가져다 줘서 그걸 환부에 발랐다. 안티 프라민 연고와 비슷하다. 얼마나 지속될지 걱정이다. 일본인 여자애 둘에게 발진을 보여주며 그들을 놀래켰다. 나도 참 할 짓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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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약


영국 할멈이 수다를 멈추고 신문을 챙겨 산책하러 간 사이에 주인장이 조용조용 말해 주었다. 게스트 하우스 주인 치고는 꽤 다정하고 친절한 양반이다. 도미토리에서 묵을 때 귀중품은 자기에게 맡기던가 따로 챙겨서 복대에 넣어두라고 한다. 왜 그러냐고 하니, 어젯밤에 도미토리에서 묵던 프랑스인이 상당한 액수의 돈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숙소의 주인은 도난에 책임이 없기 때문에 프랑스인은 돈을 잃고 기분이 나빠진 나머지 숙소를 나갔다고 말했다. 이틀 전에도 비슷한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공통점이 있다면 내가 묵기로 한 침대 건너편에 어떤 작자가 들어온 후부터 그런 도난 사고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조심하라고 말한다.   

발진 때문에 가려워서 계속 바르다보니 호랑이 약을 거의 다 썼다. 침대에 앉아 한 시간 내내 약만 바르고 있자니 웃기고 처량했다. 마침 지나가던 주인장의 아내가 주인장하고 똑같은 말을 했다. 옆 침대의 여행자가 도둑 같다는 것이다. 

약 다 바르고 나니 저녁이 다 되었다. 바깥으로 나와 일단 호랑이 약을 구해보기로 했다. 이리저리 거리를 헤메다가 조그만 수퍼에서 연고를 두 개 사고 저녁을 먹으러 돌아다녔다. 가랑비가 스멀스멀 내리고 있었다. 주문을 받은 가게 주인이 내 말을 잘못 알아들어 수프와 국수를 따로 내왔다. 양이 상당했지만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아(4링깃) 둘 다 먹었다. 배가 한 아름 튀어 나왔다.

동네가 참 조용해서 마음에 든다. 관광지까지는 거리가 좀 되지만 숙소도 훌륭하고 식당도 훌륭하다. 오는 길에 식당에 들러 맥주를 한 잔 했다. 그 지역의 나이든 사람들만 찾는 곳인지 젊은 놈이 들어가 혼자 담배 피우면서 맥주를 홀짝이니까 경계심을 갖고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어쩌면 팔뚝에 돋아난 반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봐도 무시무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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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때면 맥주 마시러 가곤 하던 동네 술집 대낮에는 음식점이다.


숙소에 돌아와서 주인장에게 병원이 어디있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이 준 약이 효력이 없어서 그렇다고 판단했는지 벼룩 물린 것 가지고 병원에 갈 필요까지는 없다고 말렸다. 그렇지가 않았다. 호랑이 약을 바른 후 한두 시간은 가려움증이 사라졌지만 그 후에 다시 발라줘야 했다. 이 상태로는 여행이 어려울 것이다. 주인 말로는 발진이 보통 일주일은 간다고 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일을 당한 여행자들은 보통 숙소에 짱박혀 쉬면서 발진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린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겠노라고 고개를 끄떡이고 말았다. 옆 침대의 도둑놈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언제쯤 들어오냐니까 밤 늦은 시각에 들어온단다. 

pda를 꺼내 소설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팔, 다리가 가려워서 깨어나 다시 약을 발랐다. 그러면서 내일은 병원에 가 보기로 마음 먹었다. 잠을 청하려고 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벼룩에게 물렸다는 사실, 그것을 알고 치료해야 겠다고 마음먹은 일, 그리고 내게 별로 시간이 없다는 것. 정보들이 나를 괴롭혔다. Reality from information, from an accumulation of knowledge.   

새벽 한 시쯤 지나 주인이 현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숙소는 깨끗하고 마음에 들지만 숙소를 들락거릴 때마다 일일이 주인이 문을 열어 줘야 한다는 것이 다소 불편하게 여겨졌다. 들어온 친구는 옆 침대에 묵고 있는 그 도둑놈이었다. 주인과 도둑놈 은 하다못해 인삿말 한 마디 주고받지 않았다. 방의 불이 모두 꺼져 있었기 때문에 그 친구가 어떻게 생겼는지 살펴볼 수 없었다.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었다. 비몽사몽, 발진이 가렵기도 하고 어디서 벼룩이 기어다니는 것 같아 영 찜찜하다. 그때 옆 침대에서 드르렁 거리는 소리가 멎었다. 난 그가 도둑이라는 주인장의 심증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돈이 든 조그만 보조가방을 열어놓은 채 그대로 방치해 두고 있었다. 녀석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살금살금 걷는 소리.   

지척에 있는지 그 친구의 땀 냄새가 났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돌아와서 샤워도 하지 않고 침대로 향했다. 내 침대로 가까이 다가 왔길래 인기척을 냈다. 그러자 그 자리에 멎어 내 동태를 살피는 것 같다. 나는 인기척을 내며 침대에서 몸을 굴렀다. 용수철이 찌릉찌릉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녀석은 내가 충분히 잠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자기 침대로 살금살금 기어가 소리를 죽여 침대에 기어 올랐다. 침대가 오래되어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저 녀석이 정말 도둑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잘 것 같아 불편하고, 또, 기분이 나빠졌다. 그냥 가만히 있다가 가방에 손을 뻗을 때 덥석 잡고 빽 소리를 질렀더라면 훨씬 편해졌을텐데. 벌레에 물려 그렇잖아도 기분 더럽던 참에 주먹질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다가 장난끼가 들어 침대에서 살그머니 일어섰다. 그리고 발소리를 일부러 내면서 그의 침대로 다가갔다. 고개를 숙여 그의 침대를 쳐다보니 배개를 비딱하게 벤 그 녀석의 얼굴이 어슴프레하게 보였다. 눈을 감고 자는 척 하는 것 같다. 내 침대로 돌아오면서 미친 놈처럼 히히히, 히히히, 히히히 웃었다.   

그리고 연고를 좀 더 바른 후 바로 곯아 떨어졌다. 피곤한 탓이다.   

아침에 깨어보니 옆 침대가 비었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그가 아침 일찍 나가더란다. 내게 뭐 잃어버린 것이 없냐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내 배낭은 어제 오후부터 정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옷가지들은 모두 세탁기 속에 넣어 두었다. 자질구레한 짐들이 탁자에 엉망진창으로 놓여 있어 그중 하나를 살며시 슬쩍 해가도 모를 형편이다. 항공권도, 여권도, 크레딧 카드도, 현금도 모두 그 무더기 앞의 작은 바구니에 놓여 있었다. 얼마나 나는 부주의했던가? 그에게 전날 밤 일어난 웃기는 일을 설명할까 하다가 관두고,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약을 바르러 정원에 나가보니 일본인 남자들이 떼거지로 앉아 아침을 먹고 있었다. 군이나 기숙사 단체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탁자에 이 열로 마주보고 앉아 조용히 똑같은 식사를 하는 모습이 왠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더치 레이디, 이 맛있는 우유를 먹고 토스트 한 조각 먹어 두었다. 냉장고 속에서 뭔가 꺼내먹는 것은 자유로웠다. 그 옆에 장부 겉장에는 당신의 양심을 믿는다고 적혀 있었다. 나도 내 양심이 있다고 믿는 편이기 때문에 내 이름이 적힌 칸에 우유 하나 먹었다고 적어 놓았다. 생각해 보니 나는 양심도 있고 pda도 있었다. 얼마 전에 여자친구를 잃었고 재산은 없었다. 재산은 원래 없었으니까 그렇다 치고 여자애는 얼굴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했는지도, 언제 만나서 뭘 했는지도 기억 안 난다. 아무리 건망증이 심하다지만 정말 한심한 지경이다. 아니, 어쩌면 나는 망각의 기술을 제대로 터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는 그 애 때문에 한 동안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다.   

본래 중요하게 생각지도 않았던 것을 마치 중요했던 것처럼 떠들어대는 위선적인 태도는 버리고, 지금은 배낭 무게 보다 백 배는 무거웠던 짐들을 하나 하나 버리고 느긋하고 편안하게 쉬러 여행을 온 것이다. 잊어버리자.   

간단히 옷가지를 챙겨 입고 거리로 나섰다. 어제 버스 내릴 때 지나쳐왔던 풍광들이 이 도시의 중심부인 듯. 맬라카의 지도를 참고하여 코스를 정하고 하나 하나 밟아 나갔다. 돈이 별로 없어 먼저 은행을 찾아봐야 했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거리에서 과일 파는 아저씨에게 한참을 물어봤지만 visa 카드로 현금 인출이 가능한 은행은 고사하고 내 손엔 어느새 과일 한 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내게 과일봉지를 내밀고 4링깃 달라고 불쑥 말한다. 그걸 먹으면서 땡볕 아래를 걸으니 십분도 안되어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물어물어 찾아가 본 병원은 마침 일요일이라고 문을 열지 않았다.   

스태듀이스 인지 하는 특이한 식민지 양식의 건물 앞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을 때 Trishaw가 다가와서 날더러 관광 하지 않겠냐고 묻는다. 나는 내 몸에 돋아난 끔찍한 발진들을 보여주고 관광보다 병원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와 협상했다. 문을 연 병원을 찾을 때까지 태우기로 한다는 조건으로 15링깃 지불. 협상을 마무리하고 그의 트라이쇼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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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보이는 것은 Christ Church of Melaka. 1753년 독일인들이 지었다. 앞의 시계탑 옆 건물이 그 유명한(?) Stadthuys로 1641년 더치가 지었다. 이 동네에서 빨간색 건물은 무조건 더치가 지은 것 같다.

트라이쇼는 달렸다. 나는 그가 땀을 뻘뻘 흘리며 애처럽게 페달을 밟는 모습을 옆 자리에서 지켜 보았다. 바짝 마른 젊은 친구다. 그가 내 얼굴에 돋아난 땀과 몸에 난 발진에 기겁을 하면서 혹시 춥지 않냐고 물었다. 춥냐고? 이 친구는 내가 말라리아에 걸린 줄 아는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발진을 보고 모기에 물린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나는 하하 웃으면서 말라리아는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나도 말라리아 증세 쯤은 알고 있었다. 말라리아 걸리면 말라리아 걸렸다는 것을 알만큼은 된다.  

그에게 수입이 얼마나 되냐고 물었다. 자기는 돈 벌어서 태국에 가끔 놀러간다고 말한다. 결혼 했냐고 물으니 결혼 안 했단다. 나도 안 했다고 말하고 나는 그래서 자유인이라고 말했다. 녀석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씨익 웃으며 자기도 자유인이라고 말한다. 자식, 태국에 놀러가는 이유야 뻔한 것이다. 말레이지아에서는 저녁이면 가게들이 문을 닫으니까 욕구충천한 젊은 녀석들 술도 못 마시고 여자도 사귀지 못하는 것인가 보다. 태국 가면 2000 밧에 15살 짜리 소녀를 살 수 있다니, 나는 그에게 다 안다는 듯한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녀석도 징그럽게 웃었다. 자유인이라... 젊은 남자에겐 참 징그런 개념이군.   

사전 정보가 있었는지, 아니면 운이 좋은 것인지 첫번 째 들른 병원의 문이 열려 있다. 왠지 15링깃이 아깝게 느껴졌다. Lingham Medical Centre. 그는 굳이 나를 따라오며 가는 길까지 태워주겠다고 말한다. 병원 카운터에는 예쁘장한 아가씨가 앉아 접수를 받고 있었다. 외국인이 병원을 찾는 것이 처음인지 빤히 쳐다보며 생글생글 웃는다. 접수증을 끊어 늙수레한 의사가 있는 진료실로 안내해 주며 문께 기대고 선 채 말똥말똥 쳐다 보았다. 인도인과 말레이인과 중국인의 피가 섞인 소녀들은 귀여워 보였다. 이러다가 내가 로리콘이 되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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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진료 카드.

내 얼굴과 몸에 돋아난 발진을 본 의사가 대뜸 하는 소리가 나와 같이 온 트라이쇼 청년과 같은 애기였다. 춥지 않냐? 땀은 왜 그렇게 뻘뻘 흘리는가? 모기에 물린 자국이 아닌가? 나는 말라리아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가 드디어 청진기 몇 번 대보더니 대뜸 food poisoning(식중독) 이라고 말했다. 사실 나도 발진을 보고 처음 생각했던 것이 식중독이었다. 그는 내가 지난 2-3일간 먹었던 음식들을 꼬치꼬치 캐 물었다. 해산물 먹었냐? 물론 먹었다. 그럼 식중독이 맞다. 내가 말했다. 아니다. 이건 식중독이 아니다. 의사가 의아하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의사가 말했으면 들어야지 왠 잔소리냐는 표정이었다. 그는 식중독의 증세를 일일이 나열하며 열이 있다거나 현기증을 느낀 적이 있냐고 물었다. 이 뙤약볕에 열이 안난다면 이상한 거고 뙤약볕 아래서 거리를 한 20분 걸으면 현깃증 나는 거야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래도 도무지 말을 안 들어서, 배를 걷어 보이고 여기에는 발진이 없다. 이게 만일 식중독이라면 온 몸에 발진이 낫어야 한다 라고 주장했다. 세상에, 나는 지금 의사와 내 증세에 관해 왈가왈부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옆에 있던 우람한 간호사가 낄낄 웃더니 내 편을 들어 주었다. 그래서 내가 이겼다. 대체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인가! 나는 심지어 벌레 물린 데 먹는 약 종류 까지 알고 있었다. 안티 알러지와 안티 히스타민 아니면 안티 바이오틱류? 그래서 나는 부작용이나 위장 장애를 느낀 적이 없다고 미리 말씀드렸다. 간호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프람 코리아, 유 노우 댓 푸어 컨추리? 고개를 가로 저으며 직업이 뭐냐고 물었다. 엔지니어 라고 대꾸했다.   

간호사, 카운터 보는 아가씨, 그리고 한 80은 먹은 것 같은 의사, 이렇게 세 명이 이 조그만 '의원'을 꾸려나가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는 카운터의 아가씨 까지 외국인 진료를 견학하면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의사가 엉덩이를 걷으라고 말했다. 아... 주사는 뭐... 안 맞으면 안되나? 의사가 맞아야 한다고 우겼다. 나는 간호사와 젊은 아가씨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들은 낄낄 웃으며 문을 닫고 사라졌다. 의사가 주사를 놓기 전에 긴장을 푼답시고 말하길, 벼룩은 숫놈과 암놈이 있는데(그건 나도 안다) 언제나 그렇지만 암놈이 항상 더 위험하다고 말하며 주삿바늘을 엉덩이 깊숙이 찔러넣고 가차없이 피스톤을 눌렀다. 나도 의사 선생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암컷은 항상 위험하다. 주삿바늘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빠졌다. 잠시 오른쪽 엉덩이가 뻣뻣해서 제대로 서 있기 힘들었다.   

타블렛(알약) 몇알을 받아 챙기고 낄낄 웃는 간호사와 카운터 아가씨를 뒤로 한 채 계산을 끝냈다. 거의 40링깃 가까운 돈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대기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트라이쇼 운전사의 어깨를 빌어 절뚝절뚝 병원을 빠져 나왔다.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녀석은 스태듀이스로 돌아가는 내내 잔소리를 늘어놓거나 태국 아가씨들이 얼마나 예쁜지 모르겠다는 말을 늘어 놓았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이제는 괜찮다고도 말하고 껴안았다.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다.   

음료수 하나 마시고 알약 몇 알을 입에 삼키고 잠시 쉬다가 관광을 시작했다. 파모사를 거쳐 언덕 위에 있는 성 파울스 교회에 올라가니 해안이 보인다. 폐허가 된 건물은 한창 복구 공사가 진행중이었고 그 안에는 한 할아버지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하루중 가장 더운 때 였으므로 관광객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대뜸 내 국적을 묻더니 KBS인지 SBS인지 한국의 방송국이 자기를 며칠 전에 두번 째로 찍어갔다는 말을 무덤덤하게 늘어 놓았다. 그가 그린 그림 중에 딱히 인상적인 것이 없었고 방송을 거의 십년 넘게 안 보았기 때문에 뭘 찍어갔는지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담배 피우면서 그가 작업하는 모양새를 구경하고 말이나 몇 마디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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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osa. 1511년 포르투갈이 지은 것. Famosa란 fortress를 말하는 것으로 훗날 더치들이 침략하여 성곽을 박살냈다. 1641년 복원됨.

그에게 담배나 한 대 주고 잠시 쉬다가 언덕을 넘어 박물관에 들렀다. 박물관에서 이런 저런 멜라카의 역사를 대충이나마 공부했다. 멜라카는 그야말로 뒤죽박죽인 식민지 도시였다. 지정학적인 위치 탓에 유럽의 침탈이 잦았고 포르투갈 교회와 독일식으로 지어진 기독교 교회와 스페인식 성곽과 중국식 건물과 말레이 전통 가옥과 현대적인 건물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하루 관광 코스였다. 습기 탓에 끈적거리고 땀이 많이 나서 걸어다니기는 불편하고, 자전거를 빌리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하지만 이꼴로는 돌아다니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가려워서 두 시간에 한 번씩 병원에서 준 연고를 발라야 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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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독일 건물. Stadthuys.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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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내부의 정원. 매우 인상적으로 썩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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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 걸려있는 역사화. 거짓말쟁이는 물에 던져 넣었을 때 살아날 수 없지만, 진실을 말하는 자는 아무리 오래 물 속에 있어도 살아난다고 적혀 있다. 난 45초 정도는 진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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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음하다 걸린 사람은 마을 광장에 붙들어 매놓고 태형으로 다스린다. 옆 사진과 더불어 괜히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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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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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g Li Po의 벽이라 불리우는 것. 대단히 잘 찍은 사진. 1459년에 멜라카의 술탄과 결혼한 중국 공주의 집이었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와서 소원을 빈다.

일단 뭐라도 먹어야 겠기에 pda를 뒤적여 광장 한복판에 놓여있는 백화점으로 향했다. 마코타 퍼레이드. 가다보니 서라벌 식당인지 뭔지 하는 한국 간판이 눈에 띄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한국 음식 먹는다는 것이 우스워 지나쳤다. 멜라카는 작은 도시고, 관광청에서 얻은 정보만으로도 충분히 여행이 가능하기 때문에 별달리 얻을 정보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게스트 하우스 주인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백화점에서 부페식 식사를 했다. 먼저 조리사에게 손가락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가르키면 그것을 접시에 담아준다. 다 끝나면 금액을 알려 주고 근처 카운터에 가서 돈을 지불한다. 필요하다면 음료수를 사고, 돈을 카운터에 냈다는 영수증을 들고 음식점에 내밀면, 음식을 담아놓은 접시를 내준다.   

아무래도 샤워라도 해야 겠기에 숙소로 돌아와보니 영국 할멈이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디 한 군데 짱박혀서 몇날 며칠이고 시간을 보내며 조용하고 여유롭게 지내는 스타일인 것 같다. 내게 시간이 좀 더 있다면 할멈처럼 느긋하게 지낼 수 있으련만. 너무 짧은 기간에 이곳 저곳 메뚜기처럼 돌아다니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무엇보다도 타이핑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오후 5시 무렵, 숙소를 나와 백화점에 잠시 들러 아이스크림을 먹고 천천히 언덕 꼭대기의 세인트 폴 교회로 올라갔다. 마침 일몰이 떨어지면서 선선한 해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몇몇 연인들이 서로 어깨를 기대 앉아 일몰을 즐기고 있다. 평화롭다.   

일몰이 끝났다.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다. 교회 계단 맡에 앉아 개미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하다만 생각을 계속했다. 내가 여자애에게 작별편지를 보낸 것이 잘한 일인가 하고. 그 덕에 그 아이에 관한 것들을 거의 다 잊어버렸다. 아니 나는 작년 초에 이미 그 아이의 눈빛에서 막연한 거부감을 느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내가 느낀 거부감을 피하려고 애썼다. 무언가 내가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 있을꺼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면서. 하지만 작년 말까지 그 아이와 가끔 만나거나 얘기하는 동안 다른 여자애들은 만나지 않았다. 심지어 내게 관심있어 하던, 아니 나를 좋아한다던 여자애들을 둘이나 걷어찼다. 아니 여자애에게 관심이 없을 때는 흔해빠진 상투구 그대로, '미안하다. 난 애인이 있다'고 얘기했다. 그럼 내게 다시 말을 걸지 않아 편했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나는 나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여자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어 본 적이 드물었고 또한 그것조차 오래가지 않았다. 그냥 making love만 죽어라고 했다.   

내 인생은 무언가에 orient되어 있었다. 제길. 한글 안쓴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단어가 생각 안 나는군. 그럼 어째서 그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내가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 내겐 정이 없었다. 사람들과의 만남에 연연하지 않았기 때문에 늘 혼자였고 고독했지만 그것 때문에 불편해 한 적은 없었다. 혼자 있는 것을 즐겼다.   

일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그것 모두 이제 끝이 났다. 오히려 여자애보다 일 문제가 더 가슴아팠다. 다시는 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더더욱 우울해졌다. 공부를 열심히 했고 불가능한 일이라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꼭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해보고 싶었던 종류의 일이었다. 지능을 시뮬레이션 하는 것. 어린 시절에 내가 무엇이 되겠다고 결정할 때, 내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기술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원하는 것을 실체화할 수 있는 강력한 매력과 중독성 때문이었다. 나는 이미 프로페셔널이 되어 있었다. 세 명의 프로그래머가 의기투합해 만든 벤처는 이제 끝났다. 이 여행은 그것 때문에 생긴 상실감을 맑은 공기로 채우기 위한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주인이 수 차례 바뀌었던 도시에서 해가 뉘엿뉘엿 지고 땅거미가 깔릴 때까지 계단 밑으로 새까만 개미 떼가 한 줄로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처음으로 나는 '시간을 내서' 내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잘못했다는 따위를 생각했다. 그동안 여행 덕택에 바빴기 때문에 괴롭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제대로 냉정하게 직면했다. 그 아이에게서 내가 느낀 것은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것, 내가 일이 잘 안되어서 괴로움을 느꼈던 것은 내가 투자에 관한 오판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다음에 다시 그런 종류의 일을 하게 되면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켜 크리티컬한 부분에서 엄밀한 냉정함을 유지할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몇몇이 가슴 아프다거나 작살이 나더라도 품고 있는 생각을 밀어붙일 것이라는 점.   

그나저나 거의 다 잊어버렸다. 과거사를 덮어두고 금방 잊어버린 채 히죽히죽 웃을 정도로 내가 냉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이다지도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제작년에 원했던 바대로 나는 제대로 된, 아니 철저한 개인주의자가 되었다. 한동안은 그 상태를 지속할 것이다.
 
담뱃불을 개미열의 한가운데에 갖다 대니 혼란을 느낀 개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몇몇은 타 죽었다. 대열은 1분쯤 지나 원상복귀되었다. 다시 담뱃불을 떨구어 오래토록 놓아두자 대열은 거의 사라지고 주변이 혼란스러워졌다. 길을 잃은 개미들은 각자 자신들이 오던 반대편으로 황급히 달아났다.   

언덕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무척 선선하다. 한낮의 짜증나는 습한 더위가 무색해질 정도. 천천히 언덕을 넘어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낮에는 한적하고 비좁은 도로였던 곳에 장이 서고 가판이 벌어지고 휘황한 조명이 반짝였다. 담배를 물고 느적느적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맥주도 먹고 밥도 먹고 광장에서 벌어지는 쇼도 구경했다.   

돌아오는 길에 스태듀이즈 앞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의 어렴풋한 실루엣을 보았다. 낮에 나를 병원으로 데려다 주었던 비쩍 마른 트라이쇼 청년이다. 그는 발진은 많이 가라 앉았는지, 가렵지는 않은지 내 걱정을 해 주었다. 하하 웃으며 그를 껴안고 걱정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빛과 소리의 향연' 쇼가 광장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빛과 소리를 이용해 말레카의 역사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지난한 식민지 역사 임에도 불구하고 말레이 인들은 그것들을 묘한 관광상품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다. 박물관에서 본 바로는 식민 시대를 굳이 수탈의 역사라고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식민지 시대에 그들은 서양으로부터 문화를 흡수하고 원주민들이 서양문물과 큰 충돌없이 공존했던 탓에 수탈은 커녕 문화의 다양성을 포괄하는 건강한 마음을 일찌감치 가질 수 있게된 것인지도 모른다.
 
말레이지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애초에 말레이지아를 그냥 통과하는 나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음에 다시 한 번 와봐야 겠다. 나잇 라이프가 전무하다시피 해서 밤이 되면 심심해지지만, 그런 밤엔 기네스 맥주 한 캔 오두마니 앞에 놓고 책을 읽으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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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파울즈 교회 폐허에서 바라본 빛과 소리의 쇼가 벌어지는 광장

어제갔던 노인네들이 많은 가게에 다시 들러 뻔뻔한 이방인으로서 맥주 한 잔 하고 숙소로 돌아와보니 주인장이 늦은 시각에 컴퓨터 앞에 앉아 포르노 사이트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가 마침 보고 있던 화면에는 korean girls가 나와 있었다. 작달만하고 호리호리한 이 주인장은 마누라 몰래 밤이면 전세계 각종 여성들의 사타구니 사이를 구경하는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어왔던 것 같다.
 
식당에 앉아 냉장고에서 찬 음료를 꺼내 마시고 pda를 꺼내 오랫만에 날짜를 체크해 보았다. 말레카가 마음에 들어 하루 더 머물 생각이다. 

아뿔싸. 날짜 계산을 잘못했다. 카메룬 하이랜드에서 KL을 거치지 않고 바로 말레카로 온다는 일정으로 날짜에 여유가 있겠거니 했더니만, KL에서 암컷 벼룩들에게 봉사하며 하룻밤을 머무는 바람에 싱가폴에서 이틀쯤 보낸다는 계획이 틀어졌다. 내일 당장 떠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싱가폴에서 일박 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다.   

잠시 느긋하게 마음을 놓기라도 하면 이놈에 여행일정이 물 먹은 가죽끈으로 꽉꽉 조여오는 것 같다. 사방에 흩어진 짐 정리부터 해야 할 것이다.
 
옆 침대에 필리핀 아저씨가 짐을 풀어놓고 런닝과 팬티 바람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그에게 필리핀이 가볼만한 곳이냐고 묻는 것은 어쩐지 실례가 될 것 같아 생략했다. 나이를 꽤 먹었음에도 배낭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날더러 싱가폴까지 바로 가지 말고 조호바루에 내려 조호바루에서 싱가폴로 들어가는 시내버스 같은 것을 타면 경비가 절약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KL의 싼 숙소들을 알려주었다. 물론 벼룩 조심하라는 말도 빼먹지 않았다.
 
벼룩을 예방하려면 바닥과 침대 사이에 그놈들이 기어올라갈 수 있는 교두보를 만들면 안되는데, 벼룩이란 놈들은 매끈매끈한 비닐이나 금속은 잘 안 지나다니므로 배낭을 침대에 기대 놓을 때 밑바닥에 비닐을 깔면 될 것이라고 말해 줬다. 그야 물론 줏어들은 애기를 해 주었을 뿐, 실험해 본 적이 없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KL의 숙소에서 나처럼 배낭을 침대에 기대 두었던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식당에서 필리핀 아저씨와 잡담을 늘어놓고 있을 때 지나가던 숙소 여주인에게 물어보니 내일 싱가폴로 가는 버스가 없을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말을 한다. 관광객들이 싱가폴로 돌아가면서 좌석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왠지 불안했지만 아침 일찍 터미널에 가서 버스를 알아보기로 했다.   

게스트북을 뒤져보니 한국인들이 적어놓은 글귀들이 보인다. 숙소가 깨끗하고 마음에 든다는 애기였다. 대부분 홈스테이같은 편안함을 느꼈던 것 같다. 나도 한 줄 적어 놓고 일찌감치 자러 갔다.   

아침 일찍 시내 버스를 타고 시외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이리저리 카운터를 헤메며 알아보니 오후 2시쯤 버스가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간만에 인도 음식으로 아침겸 점심 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주인이 이층 방들의 모습을 구경시켜 주었다. 일층의 도미토리에서만 지내느라 모르고 있었는데 정말 훌륭한 방들이다. 이런 방이라면 여행의 피로가 완벽하게 가실 것 같다. 왠지 도미토리에서만 묵은 것이 억울하다.   

계산을 끝내고 다시 들르마 말하며 시외 버스 터미널로 출발. 시간이 좀 남아 내가 타야할 버스에 미리 짐을 구겨 넣고 군것질 꺼리로 인도 음식을 사고(인도 음식이 아니라 말레이에 적응한 인도 음식이다) 근처 컴퓨터 가게들 구경하다가 버스에 올랐다. 차가 출발할 때 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차만 타면 조는 버릇은 인도 여행 때 생긴 것이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국경이었다. 어젯밤 필리핀 아저씨의 충고는 좋은 정보였지만 시간이 별로 없고 싱가폴에 늦게 도착해서 숙소 찾아 헤메다니다가 시간 다 보낼 것 같아 싱가폴 행 버스표를 끊었다.   

출입국 절차는 간단했다. 여권, 출국증 내고, 여권, 입국증 내고 맞은편으로 가면 타고왔던 고속버스가 싱가폴 시내까지 승객을 태우려고 대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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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폴 출입국소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쳐다보는 고양이.

싱가폴 시내로 들어가면서 뭔가 빼먹은 것 같은 허전한 기분이 들어 그게 뭔지 곰곰히 생각해 보다가 축 늘어졌다. 또, 깜빡 잊고 환전을 안 한 것이다.
 
싱가폴 정보가 거의 전무한 상태다. 버스가 도착한 곳이 어딘지 모르겠다. 버스 터미널에서 물어보니 라벤더 거리, 대체 라벤더 거리가 어디쯤 붙어있는 곳이란 말인가? 싱가폴 달러가 당장 없어서 하다못해 버스건 택시건 잡아탈 수가 없다. 급한 대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atm이 있는 곳을 가르쳐 달라고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다. 

버스 터미널 근처에서 서성이다가 봉고 운전수 아저씨에게 atm이나 은행이 어디있는지 물으니 그도 모른단다. 그럼 부기스 정션으로 가는 길은? 겉으로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나 자신의 멍청함에 온갖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이런 또라이, 남은 링깃이라도 환전을 해 두었어야지! 알고 있는 단 한 가지 정보란 것이, 카메룬 하이랜드에서 만난 한국인 부부가 알려준 시즌즈 홈스테이가 로처 로드와 부기스 정션 부근에 있다는 것과 멜라카에서 묵었던 숙소에서 주인장이 적어준 시즌스 홈스테이 약도 달랑 한장 뿐이다. 그 약도에 라벤더 스트리트는 나와있지 않았다. 봉고 운전사 아저씨가 부기스 정션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었다. 

배낭을 단단히 여미고 출발하려던 참에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자기가 거기까지 태워주겠다고 한다. 이런 고마울 데가. 일이 있지 않느냐고 물으니 상관없다. 집에다 전화 한 통 하면 된다며 전화를 걸어 뭔가 말하더니 봉고에 오르라고 한다. 그는 말레이지아에서 싱가폴로 온 사람이었다. 내가 말레이지아 사람들이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라고 추켜 세우니 요즘은 그렇지도 않단다.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내전으로 수많은 인도네시아 난민들이 인접국인 말레이지아로 들어오면서 그 가난한 사람들이 말레이지아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고 한다. 절도, 강도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말레이지아 인심도 이제 옛말이라는..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그와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이 동네에서는 사람들과 악수와 포옹을 참 자주했다.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환전을 해야 한다. 부기스 정션 부근의 래플즈 아케이드에서 atm 앞에 늘어선 사람들을 발견. 들어가보니 말레이 링깃을 싱가폴 달러로도 환전해 주고 있었다. 링깃과 달러를 꺼내 겨우 종이 몇 장에 불과한 싱가폴 달러를 받아쥐었다. 갑자기 긴장되었다. 내가 가진 돈은 다 합쳐서 125 싱가폴 달러, 숙소 잡고 내일 센토사 섬에 가고 식사 한 두끼 하면 그걸로 끝이다. 여차하면 수수료 엄청나게 비싼 크레딧 카드를 또 사용해야 한다. 싱가폴 물가수준은 한국보다 약간 비싼 편이었다.   

돈이 생기니 그래도 안심이 되었다. 물어물어 지물인 인터컨티넨탈 호텔을 찾고 리앙 샤 스트릿과 탄쿼란 스트릿을 찾았다. 길거리를 헤메느라 일곱시가 넘은 시각. 시즌즈 홈스테이를 발견하고 비좁은 계단을 올라가다가 중간에 발견한 종이 쪽지는 방이 다 나가서 미안하다는 내용. 마침 계단 꼭대기에서 안경을 쓴 나이깨나 들어보이는 숙소 주인이 내려오다가 나를 발견하고 거듭 확인이라도 시켜주려는지 방이 없다는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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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가는 길. 사인펜으로 표시한 것은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는 버스 정류장 표시. 래플즈 호텔 앞에 있다.

히죽히죽 웃으면서 알았다고 말하고 발길을 돌리려는데 주인장이 불러 세웠다. 올라오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생각났다. 여기 주인장이 관상을 본다고 그랬던가? 방이 있었다. 이층 침대가 놓인 작은 방이다. 창문이 없다. 이렇다 저렇다 가릴 처지도 아니라 바로 첵인 하려고 카운터에 앉았다. 하루 묵는다니까 싱가폴 관광은 최소한 2박 3일은 해야 한다고 주인이 주장했다. 타월을 하나 빌렸다. 아... 타월 잊어먹은게 참 별스럽게 사람 귀찮게 만든다. 어찌된 일인지 여행갈 때마다 꼭 타월을 빼먹었다. 그에게 전화 좀 쓸 수 있겠냐고 물었다.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는다. 

바깥으로 나와 거리를 거닐다가 다시 전화를 했다. 이번엔 전화를 받았다. 이전에 icq로 만났던 싱가폴인인데 놀러가면 꼭 가서 만나보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하지만 날짜가 촉박해 오늘 저녁 아니면 만날 여유가 없을 것 같다. 그가 날더러 오처드 로드까지 오라고 말했다. 내가 싱가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다면 오처드 로드하고 벤쿨렌 스트릿 그저 둘 뿐이다. 오처드 가는 벤쿨렌 거리를 찾기 위한 리퍼런스 였고 벤쿨렌 거리는 저렴한 숙소가 있다는 지역이다. 그것도 모두 2-3년전 정보라서 이제는 맞지 않았다. 몹시 지저분해서 싱가폴인들의 자존심에 사소한 흠집을 내왔던 벤쿨렌 거리는 철거되었다고 한다. 

지하철을 타고 갔다. 내리자마자 그가 근무하고 있다는 가게를 발견했다. 가게 앞에서 전화하려니 카드식 전화기에다가, 하루 묵을 건데 카드를 구입하기는 애매해서 동전 전화기 찾느라 헤메다녔다. 서울과 똑 같았다. 거리를 돌아다니고 오처드 로드에 즐비하게 늘어선 백화점 건물마다 들어가 봤지만 몽땅 카드식 전화기였다. 지하철 구내로 돌아와 보니 동전 전화기가 보였다. 가게 앞으로 오란다.   

가게 앞에서 그를 보았다. 전에 사진을 본 적이 있어 얼굴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내 몰골이 말이 아니라서 깨끗하게 차려입은 얼굴을 보니 왠지 기분이 영 아닌데? 사실 이 양반은 가게 안에 있는 다른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사람이다. 그가 들여보내서 가게 안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한밤중에 가끔 대화를 나누던 얼굴과 마주했다. 당황했는지 어쩔 줄을 몰라하며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한다. 업무 시간 중에 찾아온 것이 미안해서 한 바퀴 돌아보고 오겠노라고 말하고 나왔다.   

백화점, 번화가는 체질에 잘 안 맞는다. 서울하고 다를 것도 없었고 백화점 들어가봤자 사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없다. 거리 곳곳에 벤치가 있는 것이 특이했다. 주욱 걷다가 수퍼에서 맥주와 간단한 안주감을 사서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홀짝였다. 그리고 찬찬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시원하게 담배를 빨았다.
 
담배 꽁초 버리다가 걸리면 천문학적인 액수의 벌금을 문다는 것을 깜빡 하고 꽁초를 바닥에 버렸다. 특이한 것은, 사람들이 무척 행복해 보인다는 점, 거리에서 깔깔 웃고 마음껏 얘기하며 다양한 인종들이 느긋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종종 관광객이나 여행객이 눈에 띄기도 했다. 그들은 티가 났다.   

느긋하게 걸어 그들이 근무하는 가게에 도착했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은 듯. 가게 앞 벤치에 앉아 일하는 모양을 구경했다. 컨티넨탈 레스토랑인데 한 사람은 지배인이자 아줌마고 한 사람은 거기 종업원이자 아가씨였다. 작년에 icq로 만나 얘기를 했는데 왠일인지 내 얘기를 재밌어 했다.   

그들과 함께 보트키(boat que)로 갔다. 술집이 많은 동네라는데 여행객들에게 들은 정보로는 약간 비싸다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들이 자주 가는 바닷가 옆 노천 술집에서 맹숭맹숭한 칵테일을 한잔 받아 마셨다. 칵테일인줄 알았는데 그냥 토닉 워터였다.
 
담배를 줄창 피우면서 밤 바다와 그 건너편에 늘어선 건물을 구경했다. 맹숭맹숭한 술이 별로여서 더 쎈 것을 달라니까 스카치 위스키를 갖다 주었다. 연거푸 세 잔을 마시고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아줌마는 내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해 종이에 영어로 적어주어 대화했다. 내 악필은 워낙 한심해서 말도 같이 해줬다. 가게 실내에서는 밴드가 락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몇몇 사람들이 락 음악에 맞춰 블루스인지 디스코인지를 추고 있다. 그 모양이 너무 점잖아서 우스워 보인다.   

넉 잔쯤 마시니까 알딸딸하다. 시간도 많이 흘렀다. 밤새 퍼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제 슬슬 숙소로 가보겠다고 말하니 데려다 주겠다며 따라왔다. 밤 거리가 한산하고 조용하다. 20분 쯤 걸어 숙소 앞에 도착해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들은 내일 아침 나를 데리러 숙소 앞으로 와 주겠다고 말했다.   

숙소로 기어 들어가 잠들어있는 주인을 깨워 타월을 얻었다. 샤워한 후 방에 들어가 곯아 떨어졌다. 배낭은 가져온 그대로 풀지도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찌뿌둥하고 입안이 텁텁했다. 비좁은 도미토리 침대 사이를 가로질러 샤워장에 갔으나 이미 누가 안에 들어가 있어 오줌만 눗고 세면대에서 대충 얼굴만 씻었다. 배낭을 카운터에 맡기고 첵 아웃 한 후 아침 햇살이 비추는 숙소 앞 카페에 앉아 음료수와 물 한 병을 꼬박 다 마셨다. 약속 시간인 9시가 지났음에도 그들이 오지 않아 어제 술김에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의아해했다. 방금 도착한 여행자 두 명이 거리를 뚜벅뚜벅 걸어 내가 묵었던 숙소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인솔하는 숙소 주인과 여행객들이 다시 나왔다. 숙소 주인이 그들을 어딘가로 안내해 주면서 내게 아침인사를 건넸다. 하하. 그 양반은 정말 관상을 보는 것 같다. 내가 묵었던 방은 침대가 둘이나 있었는데...   

오겠다던 사람들이 왔다. 오전에는 근무를 안 하므로 나와 함께 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말한다. 싱가폴에 볼꺼리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돌아가는 비행기는 밤 11시쯤에 있고 나는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쑤시고 돌아다닐 수 있다고 안심시켰지만 자기들이 안내를 해주겠다고 우겼다. 센토사섬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정작 나 자신이 전혀 대책이 없는 형편이었지만, 그들도 센토사 섬에는 오랫만에 가보는지 지하철을 타고 버스 타러 가는 길에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었다. 지하철을 타는 동안 아줌마가 내게 표를 빌려 주었다.  
 
센토사 행 버스 앞에서 한국인 여자 여행객 둘을 만났다. 그들이 들고 있는 가이드북이 한글이라서 알아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인사하니 웃어준다. 내 몰골이 좀 꾀죄죄한데다 일행이 있는 것을 보고 별 말은 나누지 못했다. 이런 값비싼 여행지에 놀러온 두 아가씨를 보니 수준 차이가 느껴진다. [센토사 섬 지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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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tosa 섬, 싱가폴에서 만난 친구들. 왼쪽은 처녀, 오른쪽은 유부녀, 뒤에 있는 것은 용대가리.

버스표와 함께 입장권을 팔았다. 아줌마가 세 사람의 입장권과 버스표를 모두 지불했다. 난 멍청히 표를 받고 자리에 앉아 얘기를 나눴다. 아줌마는 자기 딸과 핸드폰 sms로 대화를 주고 받았다. 핸드폰 sms 사용이 무척 일상화되어 있는 것 같다. 

유원지라는 센토사 섬에 도착해 모노레일을 타고 중간 중간 내려서 나비 박물관이니 해양 박물관 따위를 구경했다. 그렇게 재밌지도 않았고 그저 시간을 보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저기서 담배를 피우고 했지만 나를 잡는 경찰관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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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tosa Island에서 바라본 싱가폴의 전경. 싱가폴은 그다지 깨끗한 곳은 아니었다.

오후 한 시쯤 되어서 맥주와 점심을 먹고 아가씨는 레스토랑으로 돌아갔다. 버스 정거장 앞에서 화장실에 들렀다 나오는 나를 보고 작별인사를 한다. 나와 아줌마는 핑크색 돌고래 쑈를 구경했다. 한심한 쇼다. 하나도 볼 것 없는 쇼였다. 아줌마는 오늘 쉬는 날이라 하루종일 구경을 시켜 주겠다고 한다. 한심하게 작은 해변을 걸으면서 그녀는 남편과 이혼할 생각이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애는? 애는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고 말한다. 응? 그걸 물은 것이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더 물어볼 수도 없고. 남편이 자기에게 잘 안 해준다고 한다. 혼자 살꺼냐고 하니까 그렇다고 한다.   

센토사 섬을 나오니 딱히 가볼만한 데가 없었다. 정보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장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녀와 걸으면서 이런 저런 애기를 했다. 한국에 한번 놀러온 적이 있는데 그래서 한국어를 공부하기도 했다. 내 생일에 보내준 생일카드에는 '안녕하세요? 생일 축하합니다'라고 한글로 적혀 있었다. 그녀가 자랑스레 보여준 한국어 교재는 참 적나라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 남녀관계 섹션을 보면 '벗겨 주세요' '아주 좋아요' '더 해주세요' 이런 말이 적혀 있어서 읽고 있는 내가 낯이 뜨거워졌다. 누군지 참 여러가지 상황 고려해서 책을 종합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시장을 한 바퀴 돌고, 심지어 수산물 시장과 야채 시장까지 골고루 관람한 후 오처드 로드로 돌아왔다. 서점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서점에 앉아 science 섹션과 science fiction 섹션에 앉아 이런 저런 책을 뒤적이다보니 세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저녁 먹으러 가자, 어떤 걸 먹고 싶냐? 나는 중국식에 엄청난 환상을 가지고 있으므로 당근 중식을 먹겠다고 했고 꽤 유명해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번호표를 받아 대기하다가 자리가 나서 들어갔다. 메뉴판은 홍콩에서 보았던 것과 형태가 비슷했다. 먹고 싶은 것에 체크를 하게 되어 있었다. 아는 것이 없어 아줌마의 지도를 받아가며 몇 가지를 체크하니 다섯 접시가 차례대로 나왔다. 먹다가 배가 불러서 더 못먹을 지경이었지만 정말 맛있다. 아줌마가 다 계산해 줘서 난 멍청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아가씨 보러 레스토랑으로 나를 안내해 줬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그 아가씨에게 애인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애인 사진도 내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숙소에 잠깐 들러 배낭을 찾고 작별인사를 하려고 했더니 공항까지 마중하러 가겠다고 말한다. 아줌마와 버스를 탔다. 버스는 넓고 쾌적했으며 TV를 볼 수 있었다. 거의 한 시간을 달려 창이 공항에 도착했을 때 아가씨가 보낸 sms 메시지가 아줌마의 핸드폰에 떠 있었다.   

친구에게 작별인사로 포옹을 해주라는 충고였다. 고개를 가로젓고 히죽히죽 웃으며 그녀와 작별하고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했다. 공항은 포근하고 멋지게 생겼다. 세계 최고의 공항 다웠다. 심지어는 pda용 적외선 싱크를 할 수 있는 코너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면세점을 전전하며 술을 살까 망설이다가 관두기로 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나는 돈 한푼 없는 알거지가 된다. 말 그대로 진짜 알거지였다. 밤 11시 30분 쯤, 비행기가 이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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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기 창밖의 풍경. 해가 뜨고 있다. 오른쪽 구석의 빨간 점들은 U.F.O.

오사카 공항에 도착. 공항 대기실에는 몇몇 여행자들을 빼고는 아무도 없다. 화장실에서 배낭을 끌러 긴 팔과 긴 옷으로 갈아 입었다. 그리고 세수를 했다. 3시간 후에 이륙할 예정. 옆 자리에 앉아 있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애 셋 중 둘은 인도를, 하나는 태국을 다녀온 것 같다. 히죽히죽 웃었지만 대화에 굳이 끼어들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아... 언제쯤 그리운 인도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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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찍은 사진 저 검은 배경 뒷편에 도사린 사람들

서울 도착. 점심 무렵. 공항을 빠져 나오자 찬 바람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춥다. 꾸역꾸역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컴퓨터는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었다. 배낭을 내려놓고 옷을 벗은 후 보일러를 세게 틀어놓고 열대에서 보냈던 기분좋은 시간들을 상상하며 잠들었다. 
일주일 동안 사람들을 만나 두어 번 술을 마시고, 여행 얘기는 가능 한 하지 않았다. 집에서 게으름을 피우다가 돈도 없고 쌀도 떨어지고 해서 이력서를 이곳저곳 돌렸다. 저녁에 소개를 받고 이력서를 보냈다가 그 다음날 면접 보고 취직했다. 불과 한 달 전의 과거하고 단절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곳에서 행복했다.
 
- 2001.4.11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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