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able ego

여행기/Peru 2003. 5. 9. 17:41
엘 도라도. 빠나마 시티의 어떤 구역. 빠나마 시티가 줄곳 발전하면서 시 외곽으로 날로 확장에 확장을 거듭해 가다가 생긴 곳. 내게 전해질 소포가 보관되어 있어야 할 곳. 엘 도라도를 들락거리면서 FlashPlus를 받을 수 있을 꺼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2주 전에 한국의 컴퓨터부품 쇼핑업체를 통해 플래시플러스를 전자결제로 구매하고 지인에게 부탁해 우편으로 파나마로 부쳐달라고 했다. 그동안 줄곳 국경을 넘나들고 있어서 몇 가지 주의사항을 전하는 것을 잊은 것이 잘못이다.

1. 빠나마 시티에서 우편을 받으려면 지역을 반드시 지정해야 한다. poste restante 서비스 우체국이 하나가 아니다. 가이드북에서 말한 main post office는 그 자리에 없다.
2. 소포는 관세부과를 심사하므로 플래시플러스를 종이로 싸서 우편봉투에 넣어 부쳐야 한다.
3. 일반 우편 서비스는 3-5일 안에 처리된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더 많은 시일이 걸릴 수 있으므로 fedex나 dhl을 사용했어야 한다.

그런데 '부품이 도착하면 그걸 바로 파나마의 이 주소로 부쳐주기 바란다' 라는 SMS 메시지만 달랑 남기고 말았다. 주도면밀하게 계획했더라면 그 부속품을 제때 수신했을 것이다. 왜 주도면밀하지 못했을까. 1항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2항,3항은 어떻게 되겠지 하는 심정이었다. 가이드북만 보고 빠나마에서 영어가 통하리라 짐작하고 만일 수신할 수 없으면 추적이라도 가능하겠지 싶었는데(지정한 곳으로 재전송 해 달라고 부탁하면 되니까) 우체국에서 업무를 보는 사람들이 모두 할머니였다. 영어는 한 마디도 못했다/안했다/난처해했다. 어떻게 그들에게 복잡한 내용을 에스빠뇰로 설명할 수 있을까. 없다. 내가 고작 할 수 있는 말은, 내 이름은 이러한데 우편을 찾고 싶다. 당신이 안되면 영어할 수 있는 사람이나 담당자를 불러달라. 아니다. 그건 우편이 아니라 소포다. 소포란 이렇게 생긴 것을 말한다. 그림. 한국에서(그림) 누군가가(그림) 소포를(그림) 나에게(그림) 보냈다(그림). 지금 그 소포는 관세부과 심사(난해한 그림) 중인가. 그렇다면 세관(매우 난해한 그림)은 어디인가. 아니면 다른 우체국(그림을 그린 나조차도 이해가 잘 안가는 그림)에서 찾을 수 있는가?

2-3일 동안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어다니며 어떻게 해보려고 했지만 부품값과 운송료 50$과 이틀을 고스란히 허공에 날렸다. 아아... 삽질로 보낸 아까운 내 청춘.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 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거야.

플래시플러스가 없으면 한번 리셋된 pda는 기본적인 기능 밖에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읽을 책이 단 한 권도 없는 난처한 상태가 되었다. 요즘은 늘 그런 상태다. 앞으로는 해변에서 가장 재미없는 책을 골라 읽다가 스르르 잠이 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재미없는 책이 없으니까 멀뚱멀뚱 있다가 그냥 갑자기 잔다. 요즘 장거리 버스에서 하는 짓이 그렇다. 자기 전과 깬 후가 이어졌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린 것처럼 순탄하고 연속적으로.

그나저나 우편을 집에서 수신하지 않고 poste restante(빠나마에서는 entrega general이라고 불렀다) 서비스로 우체국의 사서함을 통해 받는다는 것이 의외로 낭만적으로 보였다. 오늘 편지가 왔나 우체국을 방문해 안 왔으면 다음날 다시 방문하고... 방문하고... 나들이할 때마다 혹시나 하고 방문하고... 마치 떠나간 님이 보낸 편지가 오늘은 도착하지 않았을까, 저 눈이 어두운 할머니가 혹시 내 편지를 지나치고 못본 것은 아닐까 애가 타는 심정으로...

캬...
내가 그랬지.
애가 탔지.

항공권을 구하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가이드북의 페루 페이지조차 들춰보지 않았다. 그대신 스포츠 투데이의 만화와 작문 실력이 출중한 굿데이의 연애란을 낄낄거리며 쳐다보았다. 굿데이를 좆데이라고들 하던데 한국 3류 연애 가십 언론의 꽃 중의 꽃인 것 같다. 우리나라도 이제 이런 신문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기업으로 넘어간 뒤 매우 한심해졌다는 리마 국제 공항에 내리면 삐끼들이 반겨준다는 말을 들었다. 미라플로레스행 택시를 타면 된다나. 그 와중에 잡음이 좀 있을테지만 평소처럼 인상 쓰고 악 쓰다 보면 별일 없이 순탄하게 풀리는 것 같다.

충전기 문제는 해결했지만 그동안 사진을 줄곳 찍지 못했다. 충전기 수리를 맡긴 작자에게 디지탈 카메라 수리까지 맡길 껄 그랬나? 어디를 고치면 멀쩡해지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여태 안 고치고 있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사실 사진 찍기 귀찮아서 며칠은 배낭에서 사진기를 꺼내지 않았다.

Costa Rica 사진
Panama 사진

서울 식당에 가서 밥이나 먹어줄까 했는데 오후만 되면 문을 닫았다. 빠나마시티는 조금 색다른 국제도시였다. panamian authentic cousine이 있기나 한건지 의심스러운, 다국적군같은 부페 식단에 익숙해지자마자 떠날 때가 되었다. 생선은 신선하고 스프는 야릇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몇 가지 야채와 돼지고기 비계를 함께 오랫동안 고아 만든 스튜인지 스프인지(그들은 스프라고 한다) 알 수 없는 음식이 특히 그랬다. 비계가 느끼하지 않고 젤라틴처럼 쫄깃하고 맛있다. 고수가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스프맛이 제대로 안 났을 것이다. 싼 음식점임에도(이름 있는 음식점이었지만) 훌륭하다.

-*-

교통체증 때문에 공항까지 가는데 1시간에서 3시간까지 걸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일찌감치 일어났다. 한시 반에 자서 다섯시에 일어났다. 씻고 어젯밤 수퍼에서 산 빵과 비스켓으로 아침을 먹었다. 이틀 동안 에어컨 때문에 추워서 침낭을 뒤집어 쓰고 잤다. 스스로가 바보스러웠다. 에어컨을 끄고 자면 되는데. 입김이 서린다.

버스 타는 곳까지 걸어갔다. 도로 중간에 서서 지나가는 버스를 세웠다. 도로가 엉망이고 버스 정류장 표시는 있으나 마나 였다. 아무나, 아무데서나 세웠다. 이점은 마음에 든다. 공항까지 1시간 30분 걸렸다. 아침인데도 땀에 절었다.

출국 수속할 때 파나마 출국세 20$와 페루 입국세 15$를 내고 나니까 눈물이 핑 돌았다. 검문대를 통과하다가 경찰이 라이터 있냐고 묻길래 엉겁결에 고개를 끄떡이고 말았다. 모처럼 라이터를 담배곽 안에 잘 숨겨놨는데 빼앗겼다. 한번도 뺏긴 적이 없었는데...

비행기가 비구름 위로 날아올랐다. 비행기나 시내버스나 요즘은 그게 그거였다. 멀뚱멀뚱 하다가 잠이 들었다. 가이드북을 뒤적여 페루에 관해 뭣 좀 알아봐야 하는데 정신이 딴데 가 있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짐을 찾아 출국장으로 나오니 막막하다. atm에서 돈을 찾다가 300솔(대략 90불)을 찾는다는 것이 300달러를 인출했다. atm에 머리를 한 번 박은 다음 추가로 300솔을 인출하고 잔돈을 거스를 겸 인터넷으로 숙소를 뒤져봤지만 없다. 기껏 돈 들여 인터넷을 사용하면서 환율을 점검해보지 않고 일어섰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정신이 구름 위로 올라가 있는 걸까. 한숨 한 번 쉬고 출국장을 나왔다.

택시 기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나를 둘러쌌다. 오..예... 정신이 번쩍 난다. 처음 가 보는 곳에서 이렇게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 힘이 솟고 여행할 맛이 난다. 오늘 한 바보짓을 만회할 기회다. 그들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쏘이 데 꼬레아. 꼬레아 수르. 티코, 꼬레아!(난 한국에서 왔어요. 한국, 남한이라고요. 아저씨들 몰고 있는 티코가 한국제에요.) 티코는 남자라는 뜻도 있었다. 꼬스따 리까인들은 자신을 자랑스럽게 티코라고 말했다. 술집에서 술 마시고 껄껄 웃으며 소란을 피우는 그들은 정말 남자스러웠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모두 티코 택시 기사였다. -_-; 그런데 난 돈이 없어서 버스를 탈 꺼에요. 그리고 나서 평소에 잘 짓고 다니는 저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손가락질 해서 버스를 어디서 타는지 가르쳐준다. 왜들 이러나. 이러면 안되지. 택시 밖에 없다고 한 목소리를 내야지. 삐끼 교범 1장. 먹이감의 한정된 시야와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고립된 상황을 조장한다.

음. 버스라? 버스는 관두자. 스스로의 바보짓에 의기소침한 나를 행복하게 해준 이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지. 인도에서나 하던 경매를 시작했다. 30초도 안 되어 가격이 죽죽 떨어진다. 10불에서 20솔(5.76$)까지 떨어졌다. 손가락으로 한 아저씨를 집어서 얼마? 라고 물었다. 20! 노! 아저씬 얼마? 15! 그러면 안되지 아저씨. 10 없어요? 10을 부르자 모두들 야유를 던진다. 한 용감한 아저씨가 13을 소리쳤다. 괜찮을 것 같아서 오케이 했다. 열받은 한 아저씨가 10에 해주겠다고 나선다. 뒤에서 다른 기사 아저씨가 찌른다. 저거 10달러야 10달러. 아무래도 10은 무리인가보다. 13이면 3.74$ 가량인데... 제대로 한건가 모르겠다.

가방을 티코 뒷자석에 던지자 차가 출렁거린다. 이제 차에 올라 제 2 라운드를 시작해야지. 아저씨가 중간에 잔대가리를 굴려보려고 한다. 기름값 좀 줘. 푸하하하. 그럴 줄 알았지요. 드리지요 네. 돈을 줬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기름을 넣자마자 잔돈을 그 자리에서 주려고 한다. 어? 사기 쳐야 하는데? 공항 이용료가 택시비에 포함되지 않았다거나 짐값은 별도라거나 톨게이트 통과료를 내야 하고 잔돈 없어서 나중에 준다고 말해야 하는데? 안 그럼 맥 빠지는데? 페루에 관해 여행자들로부터 내가 들은 얘기는 어떻게 실랑이를 벌였고 어떻게 사기를 당하고 어떻게 도둑질을 당했는가 하는 얘기 뿐이었다.

잔돈 계산을 못해 쩔쩔매는 아저씨의 손바닥에서 필요한 만큼 집어갔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에서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인도에서 배운 것 같다. 좋든 싫든 인도에서 굴러먹은 것 때문에 소심하고 두려움이 많은데도 여행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상황이 손바닥 보듯 늘 뻔하다.

차가 멈추면 시동이 꺼진다. 그래서 신호등 정차 후에는 번번이 시동을 다시 건다. 말은 잘 안 통하지만 그 아저씨와 즐겁게 얘기했다. 페루가 좋아질 것 같다.

미라플로레스가 다른 지역에 비해 안전하다는 말을 듣고 미라플로레스로 안 가기로 했었다. 그래서 시내로 들어왔는데 의외로 분위기가 좋다. 더 볼 것도 없이 마치 길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번도 안 헤메고 숙소를 잡았다. 싱글 6$. 양쪽 벽에 라파엘 풍의 아도니스(?) 그림이 걸려있는, 그럭저럭 괜찮은 아담한 방이다.


WinHEC 컨퍼런스에서 빌 게이츠가 오버를 좀 한 것 같다. 참가자들은 누군가 빌 게이츠를 해킹해서 새로 프로그래밍한 것 아니냐고 야유를 던졌다. 게이츠가 거진 맥과 비슷한 컨셉(펀 컴퓨팅, 굿 룩스)을 들고 나왔다. 낯설지 않다. 게이츠는 10여년 전부터 맨 머신 인터페이스에 관해서는 종종 이성을 잃곤 했다. 맨 머신 인터페이스와 상관있는 것중에, 무선랜을 이용해서 화장실에서 컴퓨팅을 하도록 만들어보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의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변비 걸린다고. 마오쩌뚱도 모르나? 천한 것들...

빌 게이츠가 불쌍해 보이는 것은 그가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진 작자임에도(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천할 의지와 돈도 있다) 그가 가진 말쑥한 댄디 이미지에 가려져 아무도 그를 제정신이라고 믿어주지 않는데 있다. 솔직히 말해서 컨퍼런스에서 윈도우즈의 보안 따위의 정 떨어지는 얘기를 하면 속으로 짜증이 나지는 않았을까? 그가 보이는 정열은 어쩌면 그가 망쳐놓은 이상적인 컴퓨팅 환경에 대한 원죄 의식 때문일런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그의 방법이 재수없어 보였지만 나이가 들어서인지 10년 전에 일어났어야 했을 인터페이스 혁명을 그가 저승으로 돌아가기 전에 제대로 완수 해 보길 바란다. 인터페이스는 변해야 한다. 컴퓨터와의 인터랙션 속도가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점 때문에 늘 짜증이 났다. 이 지긋지긋한 마우스, 이 지긋지긋한 키보드...

blog는 점점 '박진감 넘치는 소설'이 되어가고 있고 앞으로는 점점 더 심해질 것 같다. 이전에는 바그다드에 살고 있는 라에드라는 친구의 글이 블로거들을 바글바글 끓게 했다면 이번에는 이사벨 V.라는 정략결혼에 희생된 어느 여자가 쫓기는 스토리가 화제가 되고 있다. 뭐 둘 다 재미가 없어서 안 보지만... 그런 거 말고 NSA 전직 직원이 쓴 콘돌같은 스토리가(사실이건 아니건) 블로그에 등장하는 날을 고대한다. 나를 포함하여, 남들의 드라마틱한 사건이 없는 시시껄렁한 일상에서 잔잔한 감동 따위의 평소 지겨워 하는 종류를 다시 보길 바라지는 않았다. 그것 보다는 액션과 모험, 위험과 로맨스, 그리고 하이테크와 죄악이 병존하며 활활 타오르는 블로그가 등장하길 고대했다.

활활 타오르는 블로그라.
활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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