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no

여행기/Peru 2003. 5. 23. 20:59
오늘도 늦잠을 잤다. 차는 11.30am에 출발하는데 일어나니 10.30am. 고양이 세수를 하고 비바 라틴에 들러 가이드북을 전해주고 터미널까지 뛰었다. 데모 때문에 중심가에 택시가 다니지 않는다. 저 빌어먹을 데모는 페루에 도착하면서 부터 줄창나게 보았다. 알고 보니 후지모리가 쫓겨나고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교사 봉급을 인상해 주기로 하고 안 올려서 교사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오얀따이땀보에서 기차가 멎은 것도 데모대가 기차 운행 중지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꾸스꼬에서 마추 피추로 가는 유일한 교통수단인데 그게 멎었으니 관광객들은 엿 되고 말았다. 그래서 엿된 관광객인 나는 삽질하며 트럭을 타게 된 것이고.

3300m에서 배낭 메고 뛰는 것은 할 짓이 못 된다. 간신히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11.30am. 숨을 고르면서 버스 회사에 물어보니 아직 출발하지 않았단다. 버스는 12.30pm이 되어서야 출발했다.

내가 산 10솔 짜리 싸구려 티켓은 자리가 배정된 것이 아니라서 이리 저리 세 번쯤 쫓겨 다니다가 간신히 자리를 얻었다. 여러가지 복합적이고 페루적인 냄새가 나는 자리다. 일층에서 현지인들과 쭈그리고 앉았다. 관광객들은 이층에 있었다. 그래도 10솔에 비즈니스 클래스가 어디냐...

차량 운행을 방해하는 데모대가 없는 춥고 황량한 사막을 잘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펑크가 났다. 해는 이미 졌다. 3800m에서 덜덜 떨며 쭈그리고 앉아 펑크 때우는 모습을 구경했다. 관광객들이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담배 한 대 물었다. 멀리 민가의 불빛(장작불이었다)이 보이고 개가 늑대처럼 울고 있었다.

뿌노에 도착하니 8.30pm. 택시를 타야 하나. 두리번 거리니 마침 버스 터미널을 하릴없이 배회하는 삐끼가 있었다. 그에게 말을 붙였다. 그가 숙소를 권한다. 20솔. 노, 10솔. 숙소는 쉽게 협상이 되었다. 10솔에 욕실 포함된 걸 잡아보긴 처음인데?

그와 15분 쯤 열나게 달려서 숙소에 들어갔다. 날더러 꼬레아가 고산 지대에 있냐고 물어본다. 아니라고 대꾸했다. 내 나이를 묻는다. 동갑이다. 희안하게도 그가 묻는 에스빠뇰이 귀에 들린다. 왜 묻나 싶더니 난 배낭 매고 뛰는데도 숨 한번 안 헐떡이는데 그 친구는 헉헉거리고 있었다. 무척 신기한가 보다. 꾸스꼬에서 여행자들에게 들어보니 우아나피추를 30분 만에 뛰다시피 기어 올라간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다들 한 시간 걸렸단다. -_-;

숙소를 잡아준 동갑내기 삐끼와 협상해서 띠띠까까 섬 1박 2일 투어를 40솔에 쇼부쳤다. 35솔 정도면 그놈에게도 마진이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구워 삶아도 씨알이 안 먹힌다. 밥 먹으러 가야 하는데 시간은 없고... 바가지 쓴 것 같은 필이 왔다. 그 필링은 정가는 25솔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어쩌겠나 시간도 없는데 협상하기도 귀찮고, 어서 투어를 잡아야지. 1-2불에 연연하지 말자. 나중에 정보를 뒤져보니 다른 사람들도 40솔에 잡은 것 같다. 고개를 갸웃 했지만, 맞겠지.

밥 먹으러 나오니 가게들이 거의 문을 닫았다. 한참 삽질하며 걷는데 누가 뒤에서 갑자기 덮쳤다. 경찰이다. 가방 조심하란다. 고작 그 말 해주려고... 깜짝 놀랬잖아. 주먹이 나갈 뻔 했다. 소매치기나 강도는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지만 경찰을 대하면 좀 캥겼다.

아침에 또 늦게 일어났다. 요즘 왜 이러지? 볼리비아 대사관에 들어가니 비서관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꼬레아노! 하하하하!! 라고 소리친다. 어이가 없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어떻게 한국인인 줄 알았지? 알아본 건 둘째치고 대사관을 쥐새끼처럼 들락거렸지만 이런 괴상한 사무관은 처음 봤다. 여권의 파키스탄 비자 가지고 뭐라 왈가왈부 하지 않는 최초의 사람이다. 20불 은행에 납부하고 영수증을 갖다주었다. 스탬프를 여권 페이지에 찍은 후 은행 영수증을 붙인다. 별 것 아닌 그걸 하는데 10분이 걸렸다.

비자 받으니까 기분이 좋다. 등짝에 햇살을 받으며 광장을 거닐었다. 아레끼빠나 꾸스꼬하고는 분위기가 또 다른 도시다. 그들 도시 보다 더 가난한 것 같은데 사람들이 활기차고 밝다. 광장에서 기분좋게 햇살을 쬐며 구두닦이 소년들과 웃었다.

데모가 한창이라 술렁거리는 거리에서 가판대의 신문을 흘낏 봤다. 꾸스꼬의 데모가 심해지고 있는 것 같다. 엊그제 꾸스꼬의 광장에 있는 성당 옆에 서 있던 데모진압용 차량을 보았다. 사과탄을 쏜 것 같다. 6월 24일이 페루의 태양 축제라는데(교묘하게 피해가게 되서 정말 다행이다) 태양 축제 때 몰릴 관광객들 때문에 정부 쪽에서 강경하게 진압할 것 같다. 돈 되는 그링고들을 돌려보낼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데모하는 교사들의 월급이 700솔이란다. 겨우 200달라.


꾸스꼬 광장 앞의 데모대의 광장 진입을 저지하고 있는 경찰(오른쪽). 왼쪽 구석에 보이는 시위진압 차량. 며칠 후에는 경찰도 파업할 예정이란다.

하루종일 남은 돈이 얼마나 되나 계산했다. 그게 왜 하루종일이 걸리는지 모르겠다.
루트를 짰다. 시간이 별로 없다.


고산 적응은 잘 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코카 잎을 너무 씹은 것 같다. 하루종일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은 까닭은 코카 잎 때문이다. 어제 이리저리 길길이 키아누 리브스 처럼 뛰어 다녔는데도 피곤하지 않은 것도 코카잎 때문이다. 이렇게 효과적인 진통제는 처음 경험해 본다.

self destruct dvd의 불투명한 장래: 한번 보고 버린다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쓰레기를 양산한다는 환경주의자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좋은 방법이 있는데. 48시간이 지나면 dvd가 쿠키로 변하면 되지 않을까?

정치에는 낭만이 있어야지 -- 김종필이 룸사롱에서 술 먹다가 그렇게 말했다. 왈가왈부를 떠나, 재밌다. 하하하

한국행 항공권 정보:
2003-6-11 1220-1555 UA897 LA-TOKYO
2003-6-12 1900-2130 UA827 TOKYO-INCH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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