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 subway 1hrs --> Kimpo Domestic Airport -- shuttle bus 30min --> Incheon International Airport -- air 2hrs --> Taipei -- air 2hrs --> Manila

전날 밤 짐을 싸뒀다. 큰 배낭 하나, 작은 배낭 하나, 힙쌕 하나, 10.95kg. 버릴만한 옷들을 입고 챙겨 가져갔다. '신혼 여행'을 앞 둔 우리의 결심: 이번에는 빈티 내지 말자. 다운시프트 웰빙하자.

아침 7시에 일어나니 피곤하다. 걷고, 뛰고, 지하철을 옮겨 타고, 버스를 타는 등 가장 저렴하게 공항으로 갈 수 있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비행기 출발 40분 전에 인천 국제 공항에 도착. 사람들이 많이 밀려 보딩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춰 비행기에 탈 수 있었다. 늘 있는 일이니까 늦는 것 정도로는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 싸구려 항공권이라 오고갈 때 트랜짓을 했다. 좋다. 2만원을 더 주고 돌아오는 편을 트랜짓에서 스탑오버로 변경했다. 왕복 항공권으로 필리핀과 대만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좀 더 신경 썼더라면 38만원 미만의 항공권을 구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신혼 여행'이니까 돈에 연연하지 말자.

서울->타이뻬이 2시간, 1시간 트랜짓 대기, 타이뻬이->마닐라 2시간, 4시간 비행에 기내식을 두 번이나 줘서 흡족했다. 누군가의 경험에 따르면 필리핀 사람들(pinoy)이 워낙 굼떠서 조금이라도 이미그레이션에 늦게 도착하면 처리 시간이 두어 시간씩 걸린다는 말을 듣고 인천 공항에서 발권할 때 앞자리를 달라고 하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뛰다시피 걸었는데, 왠걸, 순식간에 처리되어 맥이 빠졌다.

인천공항을 빠져나갈 때 아내의 패스포트에 문제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인적 사항이 기록된 여권의 첫 장이 떨어져 나갔다. 까다로운 이미그레이션 오피스에 잘못 걸리면 본국으로 송환될 우려가 있다. 위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권 첫 페이지가 손상되어 고생하던 외국인 여행자를 본 적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위조하기 간편한 여권을 만든 이들이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다. 자기 나라 국민이 다른 나라에 불합리하게 억류되면 왜 그런 지역에 가서 사서 고생하느냐고 팔짱을 끼고 호통을 치는 바로 그 외교통상부였다. 예를 들어 이라크에서 사람이 잡혔다고 치자. 미국, 독일, 일본, 이탈리아 여행자들은 갖은 수를 다 써서 여행자들을 귀환시키는데 한국 외교통상부는 감방에 갇혀 3개월이 흐르고 나서야 뭔가 조처를 취하는 식이다. 가끔은 여행자들을 통해 라면 배달도 시킨다. 외교통상부 덕택에 한국인 여행자들은 문제가 생기면 알아서 해결하는데 익숙한 것 같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다고 해 두자. 때로는 이렇게 지독한 인간들을 만들어 주시는 외교통상부가 고맙다. 요즘은 서사모아 제도의 이름모를 무인도 한 귀퉁이에 떨구어 놓아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시장을 지나가다가 강력접착제를 샀다. 숙소를 잡고 나서 짐을 풀자 마자 여권을 정말 튼튼하게 붙였다. 외교통상부 덕택이다.

인천 공항, 타이뻬이 공항, LRT 스테이션, 필리핀 도메스틱 에어포트 등을 거치는 동안 기내 반입이 금지된 칼을 배낭 속에 넣어 두었다가 인스펙션에 걸려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다. 그 동안 갈고 닦은 탁월한 솜씨 덕택이다.


대만, 타이뻬이 공항, 트랜짓 대기 시간 동안 가이드북을 읽는 아내

필리핀의 첫 인상: 꼬모에스타라는 인삿말이 있고 우노,도스,트레스,꽈뜨로,씽꼬라는 숫자가 있다. 거리 이름과 사람 이름은 에스파뇰이고 거지 마저도 영어를 알아 듣고 말했다. 일부 거지는 '한국돈 만원 오케이' 라고 당당하게 외치기도 했다. 메스티소와 인상이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 비슷하게 살이 쪘고 무표정한 것 마저도 비슷했다. 바둑판 모양의 거리는 깨끗했다. 거지들이 개, 고양이와 함께 땅바닥에서 굴러 다니며 자더라도 쳥결에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마닐라에서의 첫 식사는 만족스러웠다. 150페소(3300원)짜리 간장 소스에 볶은 굴 요리를 포함한 세 가지 요리를 시키고 시원한 산 미구엘 맥주를 곁들였다. 케이블 방송에서 '겨울연가(?)' 따갈로그 더빙판을 보면서... 90페소쯤 슬쩍 바가지를 씌우려고 했지만 그들 뜻대로 되지 않았다. 거리를 헤메다가 간신히 게스트 하우스를 찾았다. 아직 거리 개념이 잘 안 잡힌다. 거리 구조도 스페인식 바둑판이었다. 단지 필리핀 인들은 n blocks라는 개념은 없는 것 같다. 무조건 over there이란다.

밤 10시. 식당을 나와 걸었다. 아니 숙소를 못 찾아 헤멨다. 구걸하는 사람들과 거리에 아무렇게나 나자빠져 자는 사람들이 보인다. 오전에는 별 일 없어 보이던 가게들이 모두 bar로 변한 것만 같다. 필리핀에는 두 종류의 바가 존재했다. 웨스턴 바와 girlie bar라는, 여자가 나오는 나가요 분위기의 술집. 바 앞에 여자들이 앉아 초롱초롱 눈알을 빛내고 있었다. 한번쯤 들어가 보고 싶지만 뜻대로 잘 될 것 같지는 않다. 숙소에 돌아오자 마자 나가 떨어졌다. 피곤하다.

아내는 자기 사진을 보고 심한 충격을 받아 식음을 전폐한 채 다이어트에 몰두해 있다. 세 접시를 깨끗이 먹어 치우고 침대에 누워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는 특이한 다이어트였다.

벽은 얇고 창문은 안 닫히고 복도의 불빛이 환하게 12$짜리 게스트 하우스를 비춰주었다. 피곤한 관계로 첫날밤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래서 묻지마 첫날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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