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ila -- air 1hrs --> Iloilo

다시, 오전 6시 반에 일어났다. 피곤한지 택시를 잡고 싶어하는 눈치지만, 난 별 일 없으면 택시를 타지 않았다. 건강을 생각해서 걸어야지. 한 시간쯤 거리를 헤멨다. 어제 오랫만에 무리하게 움직였더니 물먹은 솜뭉치처럼 몸이 무겁다.

오전 7시 10분, 근처 공사장에서 인력시장이 열렸다. 고양이들이 웅크리고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어제 LRT(light rail transit)를 탈 때는 몰랐는데, LRT 차량 앞쪽은 여성 전용이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필리핀에서 '헐리우드가 놀란 blockbuster' 쉬리를 개봉했다. 동남아 국가 중에서는 상당히 늦은 축에 속할 것이다.

국내선 터미널까지 걸어갔다. 돈이 아까와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건강을 위해서다. 터미널에는 많은 한국인 신혼부부들이 있었다. 가슴에 여행사 스티커를 붙이고 있었다. 가이드북을 보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자기들이 가게될 까띠끌란과 보라카이가 궁금하지 않을까? 필리핀의 애국지사가 누군지, 필리핀이 어째서 특이한 저성장 구조를 가지고 있고 관광 사업에 목숨을 거는지, 그들의 지난한 역사를 반영하는, 영어와 스패니시가 뒤죽박죽 섞인 따갈로그에 관해서도, 복잡한 인종 구성을 가지게 된 배경도 아는 바가 없겠지. 25만년 전 얘기니까. 하다못해 나를 향한 사랑 뿐, 거의 아무 것에도 관심없는 내 아내도 그쯤은 기본적으로 안다. 어리고 값싼 술집 여자들과 하얀 백사장이 펼쳐진 해변 이외에 그들에게 필리핀은 뭘까? 게을러 터진 나무늘보같은 사람들이 사는 그저그런 저개발 열대 국가?

한국이 동남아의 모든 국가에서 왕따 당한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길 희망한다. 나라 밖에서 사고 치지 말고, 한국과 동남아시아가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그럴 여지는 충분하다.

iloilo 행 비행기를 탔다. 두당 43$, 1시간 운행. 싯 벨트를 끌르자마자 스튜어디스가 마이크를 잡더니 자리에 앉은 승객들 더러 나와 노래를 불러 보라고 한다. 두어 사람이 나가서 마이크를 잡고 정말 노래를 불렀다. 어, 관광버스 같은데?

택시는 대충 무시하고 물어물어 지프니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탁월한 방향감각에 힘입어 제대로 찾아가서 20$ 짜리 호텔을 잡았다. 파나이 주의 프로빈셜 오피스가 있는 일로일로의 중간급 호텔 중에서는 최상급이다. 에어컨, 케이블 tv, 냉장고, 그리고 아침 포함. 여행 중에 이런 호텔에 묵어본 적이 없었다. 허름한 게스트하우스를 돌아 다니다가 두고 두고 핀잔 듣고 싶은 생각이 없다. '신혼 여행'이니까.

시내 중심가에서 불이 났다. 강한 북풍 때문에 불길이 순식간에 번졌다. 주민들 틈에 끼어 전망 좋은 곳에서 30분쯤 불구경을 했다. 남의 재산이 활활 타 들어가는 불구경은 역시 지역 주민과 함께 봐야 제맛이다.


일로일로, 강한 북풍으로 불이 삽시간에 번졌지만 20분 만에 진화되었다.

박물관에 갔다. 전시한 것들은 구석기 시대부터 근세의 원주민, 식민 시대 좌초한 배에서 '출토'한 중국 도자기 등등 보잘 것 없었다. 한국에서부터 필리핀의 고대사에 관해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32도의 뙤약볕 아래서 어려운 걸음 해 주셨는데 전시 수준이 신석기 수준이었다. 우리는 심지어 아이들이 그린 창의력이 철철 넘치는 그림을 보기도 했다.

일로일로는 별 볼 일 없는 도시다. 알고 있었다. 옆에 붙어 있는 마다가스카르같이 생긴 섬에는 별 볼 일이 있지만 MTB를 빌려 산악길을 달려야 재미가 나는 섬이라 아내에게는 상관없는 섬이었고 그래서 나한테도 상관이 없어졌다.

그럼 일로일로에 왜 왔을까? 일로일로에는 영어 연수를 받으러 오는 한국인들이 많다. 일로일로는 1200만의 인구가 바글거리는 마닐라처럼 지저분하고 온갖 문제가 발생하는 대도시와 달리 소박한 지방 도시의 특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일로일로는 파나이 섬의 가장 큰 도시다. 다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얘기다. 그저 일로일로를 묘사하는 가이드북에서 seafood paradise라는 것이 눈에 띄었을 뿐이다. 마치 형광펜으로 밑줄이라도 그어 놓은 것처럼 상당히 환하게 눈에 띄었다.

그랬다. 8.4$ 짜리 값비싼 식사를 하고 나서 여행 중 드물게 성공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에피타이저로 나오는 24개의 엄청나게 신선한 굴이 단돈 40페소(880원) 였다. 믿어지지 않는 가격이다. 8.4$ 짜리 다소 부담스러운 가격의 식사를 했지만, 웨이터에게 1. 광둥 스타일의 해산물 수프, 2. 한 접시 가득한 spicy drunken shrimp, 3. 전복, 버섯, 오징어, 새우 등의 재료를 듬뿍 넣어 굴 소스로 조리한 mixed seafood, 4. 평범한 fried rice 한 접시, 5. plain steamed rice 한 접시, 6. 신선한 pineapple juice를 주문했다.


사람들이 친절했다. 일로일로에는 관광객이 거의 없다. 오직 우리 같은, 음, 맛따라 길따라나 오는 곳이 아닐까 싶다. 아쉽게도 하루 밖에 머물지 않는다.

인터넷 접속을 시도했다. high speed internet이라지만 초당 3.2kB/sec 짜리였다. 인터넷 사용에 대비해 뭔가 적절한 준비를 해 오지 않았다. 따라서 이 여행기는 상당한 시일이 지나야 인터넷에 올릴 수 있게 될 것 같다.

수퍼에서 맥주를 샀다. 호텔의 텅텅 빈 냉장고에 넣어두고 한 시간쯤 급속 냉동했다. 작전 시각은 6시 40분. 비극의 '아폴로 13'를 보면서 맥주를 마셨다. 일로일로의 또다른 특산물은 '끝내주게 맛있는 세계 최고의' 망고다. 망고 수확철은 4월이다. 우리는 '끝내주게 맛있지만' 덜 익어 떫은 망고 두 개와 피넛, 피스타치오를 안주 삼아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산 미구엘 필센과 산 미구엘 라이트를 마셨다. 산 미구엘 라이트는 독일산 맥주의 공세에서 산 미겔의 매출이 떨어지자 2년전 등장해 필리핀을 휩쓴 맥주다. 마치 맥시코의 테카테 같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데, 맥주라기 보다는 청량음료에 가까웠다. 330ml 짜리 캔이 18페소(대략 400원)다. 알딸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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