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들이 소란스럽게 울었다. 게으른 장기 배낭 여행자 답지 않게 오늘도 아침 7시 30분에 어리벙벙 깨어났다. island hopping 하는 날이다. 알란과 선장을 만나 시장통에서 생선(120p)과 오징어 반 킬로그램(65p), 굴 1kg(20p), 조개 1kg(25p) 따위를 샀다. 양파와 양념, 숯 등등도 잊지 않고 샀다.

장기 배낭 여행자 답게 옷은 다국적이었다. 이집트 다합에서 산 얇고 긴 여성용 바지와 터키 이스탄불에서 산 팬티, 영등포에서 산 수영복, 필리핀의 보라카이 시장통에서 3달러 쯤 주고 산 빨간색 러닝 셔츠, 스님이 줬다는 소림사 티셔츠 따위를 챙겼다. 일반 배낭 여행자들은 열대에서 짧은 팔에 반바지, 샌들을 신고 다니지만(한국인의 표준 복장이랄까?) 우리는 긴팔 바지와 긴 팔 셔츠와 운동화나 쪼리를 질질 끌면서 어슬렁 어슬렁 돌아다녔다. 꾀죄죄하고 초라하고 허름해 보이긴 하지만 그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이번 투어 동안은 줄곳 젖을 예정이라서 투 피스(수영복, 티셔츠)를 입을 수 밖에 없었다. 살 타는 것은 정말 끔찍하다.

아웃트리거 보트를 타고(이거 참 재밌다) 보라카이 섬 남단을 지나 크리스탈 섬과 크로커다일 섬을 둘러갔다. 알란은 우리가 만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로지른 최초의 한국인이라고 주장했다. 파도가 높아서 신혼여행 코스로는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죽여줬다. 선장은 올해 1월에 열린 아웃트리거 보트 대회에서 7위를 했다. 그가 피우는 담배는 hope였고 말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척 보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보트의 평균 시속은 어림잡아 40kmh 가량이었다. gps를 가져오는 것을 잊었다. 바다에서야 말로 gps가 대단한 힘을 발휘하는데 말이다. 모터 보트보다 빠른 속도였고 달아놓은 돛대 만으로 그 정도의 속도가 난다는 것이 놀라웠다. 로맨틱하지 않냐며, 알란이 또 말하길, 이 배를 타고 한국까지 갈 수도 있다고 허풍을 떨었다. 나는 시속 40kmh로 주욱 달리면 한국까지 직선 거리로 대충 70일쯤 걸린다고 말해 찬물을 끼얹었다. 수치는 나의 사랑스러운 벗이다. 알란은 지지 않고 고기 잡으면서 가면 된다고 말했다. 아쉽게도 동남아에는 인간을 잡아 귀중품을 빼앗고 고기밥으로 바다에 던져 버리는 해적이 판을 친다. 리얼리티 역시 나의 오랜 벗이다.


만조 때 였고, 까띠끌란과 보라카이 섬 사이에 형성된 작은 해협으로 강한 조류가 흘러 바람을 안고 가는 동안 큰 파도가 몰아쳐 여러 차례 물 보라를 뒤집어 썼다. 아내는 바닷물 샤워를 할 때마다 비명을 질렀고 나는 배의 균형을 잡으려고 오른쪽과 왼쪽 윙으로 아슬아슬하게, 바삐, 움직였다. 여차하면 추락이고 뼈도 못추릴 것 같은 파도에 조류였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 낄낄거렸다.

몽키 아일랜드에 멈췄다. 선장이 시장에서 사온 해산물을 요리하는 동안 우리는 스노클링을 했다. 알란이 아내의 손을 잡고 바다 쪽으로 나가는 동안 나는 멕시코의 무헤레스 섬에서 공짜로 얻은 스노클과 돗수 있는 선글라스 겸용 수영 안경을 끼고 코를 노출 시킨 채 느적느적 그들 뒤를 따라갔다. 고글이 코를 가리지 않아 생각만큼 헤엄치기가 쉽지 않아 콧속으로 바닷물이 자꾸 들어갔다. 핀이 있으면 좀 더 속도를 내서 해변에서 상당히 떨어져있는 몽키 섬까지 왕복할 수 있을 테지만 파도가 높아 여의치 않았다. 아내가 비명을 질렀다. 해파리에게 물렸단다. 그들은 돌아갔고 나도 그들이 있던 자리까지 헤엄쳐 가다가 해파리에 쏘였다. 다리가 굳었다. 잠시 쉬면서 산호초 사이에서 뛰노는 물고기들을 구경하며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쉬었다. 물고기가 참 많다. 아침에 빵 사오는 것을 잊어버려 물고기들을 내 손으로 유인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 스노클링 할 때마다 번번이 잊어버렸다.

만조라서 먼 바다에 있던 해파리들이 가까운 해변까지 떠밀려 왔던 것이다. 아내는 해파리에 쏘여 아마도 난생 처음으로 근육 경직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해파리는 거미처럼, 평소 작은 고기들을 독으로 마비시켜 싱싱하게 살려둔 채 소화기로 빨아들여 천천히 녹여 먹어 치우는 것 같다. 말하자면, 자기 소화기로 빨아 먹을 수 없는 커다란 인간에게 독을 허비하는 바보짓을 한 것이다. 그들은 왜 여름이면 한국의 동해안에 바글거리는 인간을 먹어치우기 위해 거대하게 진화 하지 않는 것일까? 가오리나 오징어는 뭔가 깨달았는지 금새 커졌더만.

해파리 때문에 더 이상 스노클링은 어려울 것 같아 선장이 불을 피우고 생선을 굽고 있는 자리에 갔다. 보기 보다 엄청나게 큰 생선이다. 그들은 오징어의 내장을 빼지 않고 그릴에 그대로 올려 구웠다. 먹물이 뚝뚝 떨어진다. 다소 원시적이랄까. 간장 소스처럼 보이는 것에 하얀 소스를 넣고 거기에 레몬즙을 타고 양파를 잘게 썰어 맛깔스러운 소스를 만들었다. 선장이 현지인에게 밥을 사 왔다. 넓은 바나나 잎에 구운 해산물과 소스에 버무린 약간의 야채, 그리고 밥을 얹고 동굴 곁 자리로 옮겼다. 코코넛 나무 자른 것을 의자 삼아 앉아 식사했다. 선장, 알란, 나, 아내, 그리고 개 두 마리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알란이 따온 코코넛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배 터지게 먹고 음식을 남겼다. 다시 출발. 아까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 거대한 파도가 사방에서 밀려왔다. 보트는 공중에 떴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아내는 무서웠는지 공포에 질려 벌벌 떨었다. 나는 그저 너무 기뻤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코티지 열쇠가 사라졌다. 얼씨구?

보라카이 섬의 북부 해변에 도착했다. 인적없는 해변은 우리가 묵고 있던 화이트 비치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멋졌다. 그 멋진 해변에서 사진을 찍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아침에 게스트하우스를 나올 때 CF 메모리를 가지고 나오지 않아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가 정말 멋진 곳일까?

몰디브와 사모아 제도의 몇몇 섬들의 해변을 가보지 못해 어떤 해변이 세계 최고라고 섣불리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여전히 태국의 꼬 따오에서 롱 보트를 타고 들어가는 꼬 낭유안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꼬 낭유안은 지금까지 여행하며 돌아다녀 본 섬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아내의 손을 잡고 해변에 앉아 발가락 주위로 모여드는 물고기를 구경하고 해가 지는 모습을 보면서 신혼 여행 때 해야 한다는 장래 계획을 잡아보는 것이 좋을 성 싶다. 우리도 어젯밤에 장래 계획에 관해 고민한 후 결론을 내렸다; 왠만하면 잘 먹고 잘 살자. -끝-

마지막으로 닻을 내리고 바다 한 가운데서 낚시를 했다. 아내는 고기 한 마리를 잡고 해파리 한테 다시 쏘였다. 나는 그 망할 해파리 두 마리만 낚시줄에 달라 붙어 있엇다. 여지 없이 쏘였고, 선장은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보라카이 스테이션 3 피어로 돌아왔다. 2시 30분. 다섯 시간 반 동안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피부를 태웠다.

아내가 새카맣게 탄 피부 때문에 고통스러워 했다. 약국에서 약(care for sun burn)을 샀다. 글리세린과 비타민 A, 비타민 D가 들어있는, 근본적으로 보습제에 약간의 피부 영양 성분을 함유한 것이다. 알란의 말에 따르면 피부가 타면 시장에서 식초를 사서 문지르는 것이 좋단다. 음. 냄새 나잖아. 옷집으로 원피스를 사러 들어갔다. 아가씨들이 실실 웃어 낯 뜨거워서 허겁지겁 원피스를 사서 나왔다. 언제든지 빤스는 빨아서 널어줄 수 있지만 원피스를 사 가지고 오라는 등등의 민망한 짓은 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뭐, 사진은 찍지 못했다. 특히 파도가 좋았다.


Boracay, Island hopping tour를 마치고 코티지에 돌아오자 마자 찍은 사진.

숙소로 돌아오니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섬은 섬이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숙소 앞 의자에 앉아 이 글을 쓴다. 아쉽게도 숙소에 해먹이 달려 있지 않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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