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니 여행자 보험을 들지 않았다. 크게 쓸모가 있다기 보다는 값싸게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외국에서는 의료보험이 안되기 때문에 들어두는 것이 바람직했다. 여행중 인터넷으로 들 수도 있지만 저번에 8개월 짜리 여행할 때도 귀찮아서 안 들었다. 동부화재던가? 3개월 짜리가 3만원. 남미 여행 중에는 들었다. 외국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보통 연수 명목으로 보험을 들지 않고 3개월 짜리 여행자 보험을 들고 나중에 재가입하는 식이었다.

어젯밤에 진통제를 먹고 잤다.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피부가 당기고 화끈거려서 저녁 9시 이후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산책이라도 할 요량으로 거리를 걸었는데, 어제 탄 부위에 햇살이 닿으니 욱신욱신 거렸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신혼 부부 중에 새까맣게 탄 피부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 이들은 보지 못했다. 아웃트리거의 오른쪽 날개에 엎어져 낚시줄을 드리우고 바닷속을 뚜러지게 쳐다보고 있었던 30분, 오후 1시 30분에서 2시 사이에 숯불 그릴에 올려놓은 꼬치구이처럼 피부가 익었다.

상당히 비싸 보이는 리젠시 호텔 레스토랑에서 로미와 국수, 달랑 다섯 개 나오는 참치 초밥을 시켜 먹었는데 먹은 양에 비해 터무니 없는 가격(600페소)을 불렀다. 음식 먹을 때마다 일로일로와 자꾸 비교가 된다.

난 필리피노의 영어를 잘 알아 듣는 편인데 아내는 잘 알아듣질 못했다. 발음... 때문이라고 하지만 c,t를 강하게 발음하고, 엑센트가 거의 없이 줄줄 이어 붙어 가지만 그네들 발음에 딱히 문제는 없다고 본다. 가게에서 가끔 그들은 스패니시 숫자를 사용했다. 아이스크림을 사먹을 때 '뜨레인따' 라고 말했다. 마치 라틴 아메리카의 어떤 나라를 여행하는 것처럼 반자동적으로 30페소를 꺼냈다.

미용실 아가씨는 날더러 가이드냐고 묻는다.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은 보통 한국인 관광객을 이끌고 오는 가이드라고 한다. 가이드들이 단지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시장에 데리고 온 한국인 관광객의 등을 쳐먹고 산다고 말했다. 옆 아줌마도 지리한 예를 들어가며 맞장구를 쳤다. 이틀 내내 한국인 가이드의 바가지에 관한 얘기를 듣다보니 그들이 순 사기꾼 같아 보였다.

일주일 전쯤 어느 게시판에서 필리핀 정보를 수집하던 차에(필리핀 여행 정보가 별로 없다) 한 배낭 여행자가 보라카이 섬의 한국인 관광 가이드의 횡포를 언급하자, 자기는 가이드라며 2개월 동안 필리핀에 관해 고시공부 하듯 두문불출하며 빡세게 공부하고 나름대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가이드를 하고 있다는 이가, 섭섭했는지 일부 가이드들의 행태를 대다수의 '좋은' 가이드에게 같은 혐의를 뒤집어 씌우지 말아 달라고 적어 놓았다. 유명한 여행 사이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논쟁이고, 좋은 가이드도 있고 나쁜 가이드도 있으니 이런 걸로 논쟁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 정도로 보통 결론이 난다. 웃겼다.

그의 말마따나 몇 푼 벌지도 못하고 스트레스 받으면서 오직 보람과 자부심만 가지고 일할 정도로 생각있는 친구라면 관광 가이드 일을 그만두고 주변의 가이드들 역시 그만 두라고 권유하거나, 그 배낭 여행자 편을 드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작 2개월 공부한 걸 가지고 뭘 할 수 있을까. 한 나라의 문화와 정서, 언어를 이해하는데 2개월 고시공부로 될까? 글쎄올시다.

아내는 가이드 일을 잠시 했다. 가이드가 아니라 길잡이라고 불렀다. 교통과 숙박편을 원래 가격 그대로 거래를 성사시켜 주면서 함께 다니다가 여행객들이 그 나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자신감이 생기면 서약서를 쓰고 '독립' 시켰다. 앞으로 벌어지는 일에 관해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서약서다. 그들은 참, 별로 돈 안 들이고 재밌게 여행했다. 옆에서 보기에도 퍽 바람직한 시스템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을 즐거워 하고 길잡이 일이 끝나면 받는 약간의 보수로 자신의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는 점이, 희안한 '보람과 자부심'을 가지고 일한다는 한국인 관광 가이드와 다르기 때문에 아내와 같은 사람들은 자신을 길잡이라고 불렀고 어디 가서도 떳떳했다. 그들은 길잡이 이전에 여행자였고 여행의 고충을 이해하며 자신의 경험을 통해 다른 여행자들이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했다.

태국이나 필리핀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영업하는 관광 가이드와 그 점이 달랐다. 가이드는 관광객을 이끌어 숙소를 잡아주고 그들 대신 투어를 예약하고 협상하는 일을 하면서 커미션을 받는다. 그들은 커미션이 얼마인지 공개하지 않았다. 아까 글을 쓰는 작자들이 흔히 자신의 실명을 언급하지 않고 '대다수의 좋은 가이드'라고 말하거나, 남에게 자신의 퍼포먼스를 입증하기 위해 가격을 언급하지 않았기에 그의 말은 신뢰할 수 없다. 가격은 얼마든지 검증받을 수 있고 정당한 커미션과 깨끗한 거래는 누구나 환영한다. 그리고 그 가격은 혼자 하는 배낭 여행자보다 싸야 맞다.

게시물을 쓴 그 배낭여행자가 자기는 배낭 여행(요즘은 자유 여행이라고 하드만) 중 아일랜드 호핑 투어를 40$에 했는데 한국인 가이드를 끼면 80-100$로 펄쩍 뛴다고 했다. 가격은 단순 비례가 아니다. 인원수가 늘면 현저하게 단가가 떨어진다. 참고로 그 배낭여행자와 달리 우리는 20$ 가량에 했다. 가격이 워낙 낮아 길에서 호객하던 뱃사공 마저도 그 가격에는 맞출 수 없다고 절래절래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관광 가이드란, 인원수를 무기 삼아 아일랜드 호핑 투어를 두당 15$에 성사시키는 사람이지 호핑 투어의 단가가 80$라며 두당 60$의 삥을 뜯어 현지인 여행사와 한국의 여행사와 자신이 나눠 먹으며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은 아니다.

간단할 수 있음에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기 때문에 가이드는 필리핀 현지인, 한국인 관광객, 여행자들에게 십자포화를 당하는 일이 당연했다. 가이드는 없어지는 것이 바람직했다. 밤마다 술 퍼먹으러 돌아다니고, 사고나 치고, 여자를 찾아 혈안이 되어 있지만 스스로 사귀는 것은 못하는 한국인 남자들 때문에 인간에 관해 메스꺼움을 느끼면서 과연 보람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까?

수요가 있으니 관광 가이드질도 할 만한 것이겠지. 한국이란 나라는 3면이 바다고 그나마 땅덩이가 붙어있는 북쪽은 갈 수 없는 나라다. 섬이다. 땅덩이가 붙어 있는 인접국이 없으니 해외여행의 기회가 드물고 그것 때문에 외국에 나가는 것이나 외국인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반대 급부로, 그래서 외국에 나가야 한다. 비행기 타고 바다 건너 나라에 혼자 가서 사기 당하고 삥 뜯기고 상처 입고 두들겨 맞으면서(심했나?) 돌아다녀 봐야 한다. 가이드 없이, 겁 먹지 말고.

5일째 해산물만 먹었더니 슬슬 해산물 식단이 질리기 시작한다. 필리핀 먹거리 중에는 투포투포, 이하우이하우, 라푸라푸 등 재밌는 이름이 많다. 말레이 음식처럼 코코넛 밀크를 사용하기도 하고 스패니시의 영향 때문에 많은 양의 음식을 내놓았다. 해산물 요리는 중국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이 먹는 국수는 뭘 먹어도 꽝이었다. 아내와 누워서 천정을 바라보며 각 나라의 맛있던 음식을 떠올렸다.

필리피노 퀴진은 극단적으로 야채를 적게 사용한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설마 했는데 고기가 담긴 접시에 야채라고는 오이 한 조각 뿐인 식이다. 먹을만한 과일이 별로 안 보여 열대과일이 풍성한 이 좋은 나라까지 와서 수퍼에서 후르츠 칵테일 통조림을 사먹을 때는 비참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저녁은 야채를 잔뜩 진열해 놓은 부페 식당에 들어가 고기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야채를 왕창 먹었다. 웨이터가 음료수를 마시라고 권했지만 사양했다. 음료수 마시면 배가 금방 차서 몇 접시 먹지 못하니까. 둘이서 여섯 접시를 비웠다.

옆방에 묵고 있는 필리피노 연인이 작업 중이라 야자잎으로 엮어 놓은 숙소 전체가 좌우로 흔들렸다.

숙소 벤치에 앉아 산들 바람에 맥주를 들이키며 노트북에 들어있는 John Cusac 주연의 High Fidelity를 보았다. 아내는 재미가 없는지 일찍 잠이 들었다. 야자잎으로 만든 숙소에는 개미가 우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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