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피에서

여행기/Thailand 2004. 7. 1. 18:43
7/2

선라이즈 게스트하우스의 젊은 아저씨 말을 믿어 무궁한 옵션을 스스로 제약한 것은 전적으로 내 탓이다. 토니 리조트 맞은편에는 아침 포함 400밧 짜리 숙소가 있었다. 선라이즈 직원이 말한, 싸다는 해산물 가게에서 오징어 두 마리, 새우 네 마리, 생선 한 마리, 카우 팟 둘, 맥주 한 병을 먹고 무려 900밧을 냈다. 사실 직원이 말 못한 사실도 더 있었는데 푸켓에 가면 먹을만한 음식이 솜찟 국수라는 것. 그가 일러준 무에 타이 경기장은 옛날에 사라졌고 한국 식당 주인에게 물어서 찾아간 무에타이 경기장도 역시 사라진 상태였다. 타이거 바에서 한 숨 돌릴 때까지 주 도로를 두 번 왕복했는데, 약 한 시간 반 동안 거리를 헤멘 셈이고 그 동안 쏟아지는 비를 피해 이리 쫓기고 저리 쫓겨 다녔다. 아무튼 그 '잘난' 배낭여행자 주제에 그저 좀 귀찮다는 이유로 '관광사 직원' 말을 듣고 있었으니 잘될 일이 없었다.

토니 리조트에 바우처를 주고 방을 잡을 때 아침 식사 티켓을 주지 않아, 왠지 이상해서 방으로 돌아갈 때 프론트에 아침을 언제 먹을 수 있냐고 물었더니 그제서야 티켓을 슬며시 준다. 피곤에 지쳐 숙소로 돌아와 맥주 한 잔 하고 곧바로 골아 떨어졌다. 밤 열시쯤, 빠통 비치의 끝내주는 나이트라이프는 완전 무시한 채 잠이 든 것이다. 황가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 보였고 사실 별로 가고 싶지도 않았다. 봉쑈, 게이바, 사이몬 쑈, 이런 것들은 이제 졸업한 것이다. 선라이즈 직원 말에 따르면(그는 누가 들을까봐 목소리를 낮췄다) 아가씨는 1500밧이란다. 어? 방콕은 2000밧인데? 글쎄다. 예전에 왔을 때도 빠통 비치에 괜찮은 계집은 통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방콕의 나나 플라자가 나은 것 같다. 콧구멍이 돼지처럼 벌렁 제껴지고 바싹 마르고 새까맣고 조그만 남부 아가씨들보다는 방콕 북부를 비롯한 태국 전역에서 제발로 온 예쁜 아가씨들이 많으니까. 북부 유럽 놈들은 바통의 그런 아가씨들에 환장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네들의 미적 기준은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저렇게 못생긴 여자를 옆에 끼고 가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

방안의 알람 시계는 고장난 상태였고 두 번이나 부탁했던 모닝콜은 울리지 않았다. 픽업 봉고가 온다는 바로 그 시각이라 허겁지겁 짐을 꾸렸다. 기껏 얻어온 티켓으로 아침을 챙겨먹기는 커녕, 세수도 하지 못하고 봉고에 올랐으니 그 시각이 7시 30분. 봉고는 5분 동안 지체했다. 그 와중에도 리조트 직원들은 방 키를 들고 냉장고에서 뭐 먹고 계산을 덜 한 것이 있나 뒤지러 방으로 올라갔다. 바쁘다 바뻐.

봉고 안에는 한국인 부부 둘과 중국인 부부가 타고 있었다. 한 팀은 푸켓에 온 적이 있거나 어디서 얻은 정보(선라이즈 게스트하우스가 아닐까?)를 다른 부부에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스노클링 투어 하면 '정가'가 600밧이니까 알아서 잘 깎아보라고 정성어린 충고를 해 준다. 나도 한 마디 할까 하다가 괜히 친한 척 할까봐, 잘 알지도 못하는 피피섬에 관해 이것 저것 물을까봐 관뒀다; 스노클링 투어는 정가가 450밧이고 점심, 물, 과일 포함이고, 큰 배로 가는 편이 작은 배로 가서 작열하는 햇살 아래 고생하는 것보다 낫다 라고.

파도가 거칠어서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갑자기 비가 쏟아져 내리기도 했다. 꽤 많은 사람들이 배멀미로 고생하거나 토할 것만 같은 상황을 꾹 참고 버티고 있었다. 의외로 거친 파도다. 안내 방송이 나왔다. 파도가 높아 피피 레는 갈 수 없다고 한다. 거친 파도 위에 먹구름이 삽시간에 드리우고 폭우가 쏟아졌다.

돌아가는 길의 파도는 조류를 거슬러 가기 때문에 더 거칠텐데 사람들이 견딜 수 있을까? 황가에게 크라비로 가자고 말했지만 그도 배멀미 탓에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지 나중에... 라고 말한다.


피피 섬의 톤사이 만에 이르자 파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잠해졌다.


이 고깃배들이 왜 여기있나 싶어 의아했다. 나중에야 이유를 알았다.

피피섬에 다다르자 마자 황가를 scv처럼 섬 이곳저곳으로 보내 숙소값을 알아보라고 하고 나는 세븐 일레븐 옆에 앉아 삐끼들과 노가리를 깠다. 황가가 가이드북에서 찝은 숙소는 짚시2 게스트 하우스였다. 싸긴 싼데 벌레가 우글거릴 것 같고 내부가 어두울 것만 같다. 손톱깍기를 꺼내 발톱을 깎으면서 숙소 가격을 흥정했다. 어찌된 일인지 황가는 한 시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적어도 숙소 열곳은 둘러 보라고 했더니 정말 그러나 보다. 한가하게 앉아 있다가 온수가 나오고 냉장고가 있는 안다만 리조트를 300에 합의했고 그 정도면 적당하다 싶었는데 황가는 여전히 안 왔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돌아온 SCV는 섬을 한 바퀴 돌다가 길을 잃고 헤멨단다. 어쨌거나 짐을 픽업해서 핫 야오의 숙소로 향했다. 숙소가 그럴듯 했다. 아니 이런 숙소를 300밧에 얻어 내심 뛸듯이 기뻤다. 황가를 괜히 고생시키지 말고 그냥 앉아 있다가 가격을 물어보고 올껄 그랬구나 싶다. 난 정말 나쁜 놈인 것 같다.


창문에 방충망이 없다. 모기가 없다는 증거일까?


숙소에서 해변까지 걸어서 15초 가량 걸렸다. 경험한 가장 해변이 가까웠던 숙소는 97년 꼬 따오에서 잡았던 이름모를 게스트 하우스였는데 바로 앞이 바다였다. 그후 그런 숙소는 다시 보지 못했다.

식당을 찾아 다녔다. 내 기억에 피피호텔 뒷편에 로칼리 식당이 있다. 찾다 지칠 무렵 나타났다. 어제 900밧 씩이나 주고도 한심한 식사를 한 탓에 다운시프트 웰빙 트래블 한답시고 스마트 애스인 척 하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120밧에 카우 팟 꿈, 카우 팟 까이 각각 한 접시, 팟씨우 한 접시를 먹었다. 새우가 매우 싱싱했다. 섬이라 물가가 비싸다는 것을 고려하면 한 끼 40밧 짜리 식사는 어쩔 수 없는 가격이다. 물론 남 깽 쁠라우(얼음물)는 공짜였다. 푸켓 사람들이 돈에 미쳐 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뭍에 비하면 엄청나게 비싼 과일을 좀 샀다. 황가는 어제 람부탄과 망고, 그리고 뭔가 열대과일을 먹었다. 오늘은 어제 빠통 해변에서 태운 피부가 땡긴다고 해서 엄청나게 비싼 애프터 선 로션과 선 블럭 크림을 샀다.

할 일이 없어 해변에 누워 있다가 비를 맞거나 고양이와 놀다가 비를 맞거나 숙소 의자에 앉아 오는 비를 쳐다 보았다. 황가는 책을 읽다가 자거나 멍하니 앉아 있다가 자빠져 잤다.


지나가던 고양이를 불러 놀았다. '야옹'이라고 말하면 '야옹'이라고 대꾸했다. 애꾸 고양이도 있었는데 그 놈은 눈을 잃은 후 정신 상태가 이상해진 탓인지 '야옹'이라고 말하면 묵묵무답이다.


숙소에 고양이들을 재웠다. 검은 놈은 나이가 어려 어리석다.


해변에 룽기를 깔고 누워 '칼의 노래'를 읽었다.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진 해변에 먹구름이 밀려 왔다. 곧 광기어린 비가 쏟아져 내렸다.

오후 3시가 지나자 썰물 때문에 톤사이 만의 물이 만 바깥쪽 저 멀리로 밀려갔다. 그제서야 해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고깃배들이 왜 그곳에 정박해 있나, 이유를 알았다. 발목까지 찰랑거리는 바닷물을 따라 만 입구까지 걸었다. 해변의 모래가 찰져 발바닥에 달라붙는다. 한 시간쯤 걷다가 조개를 잡는 아가씨들과 노닥거렸다. 옷이 바닷물에 흠뻑 젖었다.

오후 6시까지 책을 마저 다 읽고 저녁 꺼리를 준비하려고 해변에서 일어섰다. 시장통에서 10밧 짜리 밥을 둘 사고 10밧 짜리 반찬을 둘 사고 Took BBQ에서 새우 꼬치와 닭똥집 튀김을 각각 2개씩 90밧에, 내일 스노클링할 때 쓸 10밧 짜리 고기 먹이(빵 찌꺼기)를 제과점에서 사고 세븐 일레븐에서 50밧 짜리 창 맥주와 85밧 짜리 메콩 위스키를 샀다. 뭘 사건 비싸다는 느낌이다. 심지어 냉장고에 넣어둔 코코넛을 20밧에 팔았다. 섬 여기 저기 그저 매달린 채 할 일 없이 익어가는 그것들이 이제는 돈을 받고 판매되는 상품이 된 것이다. 워낙 자연적인 수순인지라 안타깝지 않았다. '칼의 노래'를 빌어서 표현하면, (나는 자본주의의) 그 공허함을 견딜 수 없다.

프론트에 부탁해서 숟가락을 얻었다. 왠지 장기여행자스러운 이런 궁상이 황가에게 미안스러웠다. 하지만 어제 식으로 돈을 펑펑 쓰게 되면 일주일에 이삼십만원은 우습게 깨질 것이다. 웰빙 여행의 공허함을 견딜 수 없다.

밥은 몹시 맛있었다. 비단 20밧에 한끼를 해결했다는 담백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원한 코코넛 수액을 반쯤 먹어 없애고 그 자리에 메콩을 반쯤 부었다. 옛날에 고씨가 그렇게 만들어서 참 희안한 칵테일이다 싶었는데, 정말 그렇게 마시는 놈들이 있었다. 해적들은 럼을 코코넛과 섞어 마셨다. 수상쩍은 맛 때문에 다 비우지는 못했다. 그래도 알딸딸했다. 해변에 누워 있다보니 밀물이 밀려와 발가락을 간지럽혔다.


고양이들이 식사를 함께 했다. 메콩 코코넛 칵테일을 빨대로 빨아 먹었더니 몹시 알딸딸했다.

이 소상한 일지는 이순신이 난중일지를 적던 그 시절의 정밀함에 필적했다. 그러나 내가 적는 이 한푼 어치도 안 되는 보잘것 없는 사실들의 기록은, 베어버릴 적도, 수사의 공허함도, 죽음을 향해 진군하는 삶의 덤덤한 묘사하고도 하등 관계되지 않았다. 김훈의 '칼의 노래', 그의 문장 스타일을 하나하나씩 깨우쳐 갈수록, 그의 글에서 푹력에 버금가는 상상력을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것도 함께 깨우쳐 갔다. 그의 글에 상을 준 심사위원들은 그의 글을 젊다고 표현했다. 그렇게나 잘 만든 음식에서 나는 지랄스러운 청춘을 느끼지 못했다.

밥 먹고 해변에서 밀물이 발바닥을 희롱할 때까지 누워 궁상을 떨었다. 시간의 느림, 정지를 가끔씩 체험했는데 이번에도 그것이 보였다. 신체와 마음의 시간이 느려지면 사물의 상대적인 속도가 빨라지는데, 그럴 때면 달의 움직임이 보였다. 달이 움직인다. 지금쯤 꼬 팡안에서는 LSD를 빨면서 미쳐 돌아가지 않을까? 지금쯤 치앙마이 트래킹의 한 지점에 머문 여행자들을 아편으로 꼬드기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달이 달 같지 않고 바다가 바다같지 않고 해변이 해변같지 않은 무의미한 사진.

섬을 한 바퀴 돌았다. 돌아오니 열시가 넘었다. 열시 반부터 불쑈를 숙소 바로 앞의 히피 바에서 한다던데 별로 구경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봉 양쪽에 불을 붙이고 빙글빙글 돌리는 묘기인데 그런 걸 봐서 뭘 하나, 지겹기만 하지. 바에 들러 술을 마시려다가 황가를 내버려두고 가는 것도 왠지 꺼림직스러워 관뒀다. 바와 몇몇 가게를 제외하고 섬의 대부분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참, 평화로운 하루였다. 이 맛에 섬에 들어오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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