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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하러 간다길래 싸얌 스퀘어에서 황가와 헤어졌다. 앞에 보이는 건물에 커다랗게 적혀있는 MBK가 무슨 뜻일까. 선경을 SK라고 하고, 럭키 골드스타를 LG라고 하듯이 아마도 마분콩을 MBK라고 하다가, 마분콩이란 이름은 SK나 LG처럼 자연소멸할 것 같다. 더워서 움직이기 귀찮아 MBK에서 oishi에 들러 품질에 비해 심하게 비싼 뎀뿌라 라멘(89)을 먹었다. 오늘은 이상하게 일식이 먹고 싶다.

태국 전역은 바겐세일 중이다. 의류 매장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690밧 하는 반바지를 50% 세일가인 345밧에 샀다. 디자인은 꽝이지만 품질은 만족스럽다. 닷새째 수영복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짓을 이제 그만 하게 된 것이다.

MBK의 SF Cinema City에서 스파이더맨 2(100b)를 봤다. 그저 더위에 바깥에 나가기 싫다. 그래피컬한 스파이더맨의 움직임이 재미있고 동전 빨래방에서 유니폼을 빠는 '영웅'의 일상사가 재미있다. 여하튼 영화의 분위기를 망치고 '영웅'이란 것들을 궁상 떨게 만드는 것들은 항상 여성이다. 그놈에 궁상은 끝이 없다.


불 지르고 왼쪽으로 튀어라?


석쇠에 남녀를 가지런히 올려 구운 후 오른쪽으로 서빙

저녁은 뭘 먹을까. 일식집에서 초밥을 먹자고 결심을 굳히고 Big C 4층의 Yamane에서 오코노미야키(59b)와 마키모노모리(130b)을 시켜 먹었다. 마요네즈를 잔뜩 처바른 오코노미야키는 영 꽝이고 김초밥 맛은 평범했지만 간만에 찰밥을 먹으니 위장이 즐겁다. 그러나 잘 만든 인디카종 쌀밥 맛과 향기좋고 단맛이 강한 자포니카 쌀밥의 맛에 굳이 우열을 가릴 수 있을까? 문화 때문이지. 중국의 일부 지역, 한국, 일본만이 자포니카 종을 소비하는 별종들이다. 태국식 찰밥의 이름이 카우 니여우란 것이 갑자기 생각났고 라오스와 태국 북부에서도 먹었다. 손가락으로 돌돌 뭉쳐 먹는 찰밥의 맛이란...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월텟 앞에서 미어터지는 2번 버스를 타고 숙소에 도착하니 저녁 9시다. 일반 시내버스 요금은 0.5밧씩 올라 각각 4밧(주야간), 5.5밧(심야)씩 했다. 에어컨 버스의 가격은 올랐다가 내렸다. 황가는 쇼핑한다고 젓가락 몇 개를 사고 7시에 돌아 왔는데 내가 방 열쇠를 가지고 있어 샤워를 못하고 있었다.

숙소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낄낄거리면서 어제 하다만 여행 얘기를 계속 했다. 젊은이들 셋이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말레이지아, 싱가폴을 25일 동안 주파한다는 말에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의문스러웠다. 말레이지아에서의 정글 트래킹과 산악 트래킹은 사나이의 피를 끓어 오르게 하지만, 말레이지아를 루트에서 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충고하면서 뒤가 캥겨 멈칫멈칫 했다. 여행을 처음 하는 사람들이 나같은 사람들 몇 명에 둘러 싸여 미주알 고주알 경쟁적으로 자기가 아는 만큼만 늘어놓는 '경험담'을 들어 좋을 것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 여행일진대 가이드북에 나오는 도시 중에서도 특히 그곳을 지나간 경험이 있어 어디를 가고 어디를 빼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다 보면 사서 고생하는 여행의 '진미'를 제대로 맛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경험자의 그런 말을 듣고 여행을 하다 보면 늘상 뻔한 코스 밖에 안 나온다. 25일 일정 중 거의 10일을 차 안에서 보내게 되는 가엾은 상황이라도 애당초 계획했던 일정대로 해볼만한 가치는 있다. 낯선 도시에서 헤메고, 졸다가 엉뚱한 장소에서 내리고, 연속적인 실패로 좌절하고, 피치못할 사고로 일정을 드라마틱하게 변경하게 될 때부터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된다. 심하게 말하자면 그렇지 못한 나머지는 관광과 다를 것이 없다고 봤다. 모험심이 별로 없는 한국인 여행자들에게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다. 한국문학에서 상상력을 기대하지 않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해봐야 하지 않을까, 남들 안가는 별난 도시의 시시함과 진부함을 진중히 견디며 문명의 결절점인 도시의 내재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 말이야 그럴듯 하지만 난 피곤해서 그렇게 안 한다.

오전 0시, 아내를 마중나갈 시각. 동대문에서 만나기로 했다. 여행객 말을 들어보니 동대문은 오후 10시 30분쯤 문을 닫는단다. 어쩌다 그렇게 된걸까. 카오산이 변하긴 했지만 오전 두 시까지 안 변하는 것 하나 쯤은 남아 있었으면 했는데. 그뿐만 아니라 사원 옆길의 장황한 노상 주점도 사라졌다. 길거리에서 칼부림하고 웩웩 거리며 지나가는 취객들이 못마땅한 나머지 사원에서 철거를 요구했을 지도 모른다. 동대문 역시 취객들의 소란이 귀찮아서 일찌감치 건전하게 문을 닫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동대문이 일찍 문을 닫아 하는 수 없이 옆 술집에 앉아 땀냄새, 몸냄새 풀풀 풍기는 서양인들 틈에 끼어 한가하게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미 술을 많이 마신 듯 혀가 꼬부라졌다. 서양인들이 불교 얘기를 하는 것은 언제 들어도 신기했다.

황가와 싱하 한 병(90b) 시켜놓고 히주그레 앉아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나타나 자리에 앉았다. 어? 새벽 2시쯤에 도착할 줄 알았는데? 열시 좀 넘어 도착했는데 승객이 거의 없어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하자마자 짐도 바로 찾을 수 있었고 그대로 택시 잡고(200b) 카오산에 왔단다. 그 좋은 59번 버스 놔두고 값비싼 택시는 왜 혼자 타는지, 게다가 150밧에 올 수 있는데... 등등 조잔하게 궁시렁거렸다.

황가에게 줄 선물로 석류즙을 인도에서 사왔다. 아침 방송에서 본 적이 있다. 여성 성인병 예방에 도움이 되고, 에스트로겐과 유사하다던지 그것을 보충해 줄 수 있는 수단이라고 떠들어 댔다. 아침 방송의 주부들을 상대로 하는 건강 코너는 순 구라 같아 보였다. 궁금해서 여기저기 뒤져보니 석류즙이 여성 성인병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입증된 적이 없다. 희안한 민간 전승 대로라면 지네나 고양이 먹고 허리가 튼실해졌다는 말도 주부들에게는 먹혀 들어간다는 뜻이겠지. 이 나라의 주부'님'들은 과학적 사고방식과 무관한 인생을 살아왔을 지도 모른다.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궁금하지 않은건가?

아내에게 쌀국수를 먹이고 시원한 수박 쥬스를 사주고(그래, 이 맛이야! 라고 감탄한다) 숙소로 돌아오니 아까 화기애애하게 떠들던 무리는 사라졌다. 방 안에서 잡담을 늘어놓다가 야심한데 떠든다고 빈축을 사고 오전 두 시쯤 잠들었다. 팟뽕 갔다 돌아온 옆방 아가씨들이 그때쯤 방에 돌아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났다. 방과 방 사이가 베니어 판이라 온갖 소리가 다 전도되니까 아내가 왜 이런 방을 잡았냐고 궁시렁 거렸다. 필리핀에서의 '허니문' 첫날밤도 베니어판으로 지은 방에서 잤는데 새삼스럽게 뭘... 에어컨 펑펑 잘 나오고 사위가 조용하고 창문과 발코니까지 달린 방을 카오산에서 300밧에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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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가는 아침 일찍 공항으로 떠났다. 문을 두들기지 않았고, 일어나기에는 좀 피곤했다. 황가 생각을 하면 미안한 맘 뿐이다. 일주일 내내 나같은 놈하고 같이 다니느라 된통 걸어다니기만 했다. 택시는 딱 한 번 탔는데, 아가씨들 둘이 있어서 일행이 넷이라 쉐어하니 두당 10밧 정도 밖에 안 나올 것 같아 눈 딱 감고 잡았다. 개중 하일라이트는 거의 40도에 육박하는 숨 막히는 더위에서 길이 1.6km짜리 빠통 비치를 네 번 왕복한 후 저녁에 다시 세번 왕복한 다음 몇 시간 못자고 아침에 일어나 섬에 들어가 한 시간 반을 길을 잃고 헤메다가 간신히 숙소를 잡고 퍼진 일이다. 밥도 안 먹이고 온 사방으로 걸어다녔다. 건강한 육신에 건강한 회의가 깃든다. 어쨌건 미안한 맘 뿐이라(히히 웃음이 나왔다) 한국에 돌아가면 삼겹살에 소주 한잔 사야겠다.

아홉시 조금 넘어 일어나니 할 일이 없다. 그저 방콕을 탈출해야 만사가 지겨워지는 이 망할 방콕병에서 벗어날 것만 같아 어젯밤 그렇게 좋다는 수코타이로 가기로 했다. 가이드북에는 오전 중에 차편이 하나 정도 나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가이드북을 믿지 않았다.

숙소에서 나오는 길에 아내가 이틀 전에 숙소에서 나와 함께 얘기하던 아저씨를 아는 척 한다. 3년 전 베트남에서 만났단다. 베트남?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사람에 대한 아내의 기억력은 종종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는 하노이에서 아내에게 고추장을 줬고 아내는 라오스의 방비엥에서 나를 만났다. 방비엥에서 전날 술을 먹고 완전히 뻗어있던 나를 깨워 시장에서 사온 찰밥에 그가 준 고추장을 비벼 줬다. 꿀맛이었다. 우리 셋은 고추장으로 연달아 맺어진 인연인 셈이다. 고추장에 비빈 밥이 영 맛이 없었다면 한국에서 아내를 다시 안 만났을 것이고 혼인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가 준 맛있는 고추장 때문이다. 그는 오늘 라오스에 간단다. 길지 않은 대화 였지만 이런 사정이 꽤 재미있었다.

버스터미널에서 콘송 머칫 마이(북부 터미널, 이런 단어가 갑자기 메모리에서 팝업되는 것도 놀랍다. 대체 이런 기억들은 어디 숨어있다가 나타나는 것일까) 행 버스 번호를 물었다. 3번 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도착. 28번인지 29번 창구에서 수코타이 행 2등 에어컨 버스표를 샀다. 7시간 30분이 걸린다. 터미널에 가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왔는데 버스표가 있었다. 수코타이가 안되면 아유타야나 깐차나부리, 또는 롭부리, 정 안 되면 치앙마이나 치앙라이로 갈 생각이었다. 이런 '낙천적인'(될대로 되라) 사고방식은 여행이 내게 가져다 준 부작용이자, 덧없는 즐거움이다. 간단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차에 올랐다.

오후 열두시 출발. 태국어로 화장실이 헝남이란 것마저 떠올랐다. 급하면 뭔가 머리속에서 하나씩 떠올랐다. 정말 신묘하다. 아내와 나는 버스 뒷좌석에 불량(?) 청소년처럼 편한 자세로 널부러져 쉴새없이 떠들었다. 오후 7시 30분 수코타이 터미널 도착.

대충 협상하고 좀 많이 준다 싶은 기분으로 쌈러를 타고 20밧에 숙소로 찍어준 TR 게스트하우스까지 갔다. 이 사람 저 사람이 깐차나부리나 아유타야를 말리면서까지 추천한 도시에다가 숙소까지 꼭 거기 가보라고 찍어 주던데, 생글생글 웃는 아가씨나 체크인이 끝나기 무섭게 지도 한 장 펼쳐놓고 수코타이 시내와 유적지를 일일이 설명하는 친절한 주인 아저씨 덕택에 인상이 좋다. 방도 널찍하고 그럭저럭 훌륭했다. 전화하면 버스 터미널에서 픽업까지 해준다던데... 그 점을 잊고 있었다.

짐을 풀고 곧장 밥 먹으러 나갔다. 호텔 식당에 들러 79밧 짜리 부페 수끼 2인분과 싱하 큰 병(65b)을 시켜 먹었다. 재료가 많지 않아 약간 맛이 떨어지는 편이지만 아내는 오랫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어서인지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참 잘 먹는다. 비가 살살 와서 우산을 쓰고 과일시장에 들러 sallaca(0.5kg, 15b)와 람부탄(1kg, 40b)을 샀다. 망고스틴은 보이지 않았다. 부직포같은 껍데기를 벗기면 시큼한 알맹이가 들어있는 살랏(sallaca)은 이번 여행에서 처음 먹어보는 열대과일이다.

사람들 표정이 순하고, 도시가 작아 마음에 든다. 오랫만에 유적지를 볼 생각을 하니 두근거리기도 했다. 오래전에 여행중 태국 역사를 공부할 때 얼핏 기억하고 있는 수코타이는 아마도 태국의 최초 왕조였던 것 같다. 태국에 와서 유적지를 구경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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