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 Yangon

여행기/Myanmar 2005. 3. 30. 20:56
이번 여행부터 찍는 사진은 1024x768로 사이즈를 바꿨다. 파일 크기가 3배쯤 늘어나지만 최소한 프린팅이 가능한 수준이 되도록.

아침에 일어나니 목이 뻐근하다. 잘 때 자세가 안 좋았던 듯. 6시에 깨어 세수하고 짐을 챙겨 숙소를 나왔다. 남은 잔돈으로 쥬스를 하나 사 먹고 50밧 지폐는 나중을 위해 남겨 두었다. 쓸모가 있으리라. 59번 에어컨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며 졸았다. 이틀 묵었던 만남의 광장이 마음에 든다. 마치 누가 죽고 누가 경찰에 잡혀가는 등 해서 사람들의 발길이 갑자기 뜸해진 델리의 나브랑 게스트하우스처럼 묵고 있는 투숙객은 나와 어느 방송사 PD를 비롯한 방송팀 뿐, 남은 객실은 텅 비었다. 만남의 광장이 운하 옆으로 이전해서 아침에 식당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건너편 상인들이 장사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 보며 담배를 피웠다. 방콕에 가게 될 일이 있으면 다시 만남의 광장으로 갈 것이다. 24개의 침대가 텅 비어있는 도미토리를 혼자 쓸 수 있는 기회는 당분한 흔치 않을 테니까.

양곤행 비행기는 대략 1시간 운행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기내식과 음료 서비스가 나왔다. 배 고픈데 잘 되었다. 주는 대로 빼놓지 않고 받아 먹었다. 양곤에 가면 점심 한 끼 안 사먹어도 된다. 푸켓 에어의 737-200 항공기 좌석수는 200여개지만 손님은 30명이 채 안 되었고 배낭을 든 사람이 없는 걸 보니 그나마 나같은 배낭 여행자는 없는 것 같다.


동남아를 꽤 많이 다닌 셈이지만 비행기에서 델타를 본 것은 처음. 양곤에 거의 접근. 버마를 거저 먹은 영국은 이 델타의 가치를 일찌감치 알아채고 양곤을 전략 수출입 도시로 키웠다. 그나저나 미얀마의 주요 수출품은 티크목재, 황마, 쌀, 그리고 흥미롭게도, 아편이다.


미얀마의 비옥한 델타. 뭔가를 한창 건설중인 듯. 버마는 영국 식민 시절의 이름인데, 나중에 만나는 미얀마 사람들마다 물어보니 영국에 별다른 적개심을 가진 것 같지 않다. 동남아 대개 국가는 제국주의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은데, 나같은 제 3자가 오히려 더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선교사가 동남아시아로 넘어오면서 친절하게도 이 종족, 저 종족의 아이덴티티를 확실히 해 주시는 바람에 종족 간에 잘 지내던 나라들이 불화에 휩쌓이게 된 것이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 북부 카렌족은 여전히 군부독재와 투쟁중이고, 여전히 핍박받으며 도망다닌다. 자기들이 버마족이라고 믿고 있는 미얀마인들의 태반은 몬족이다. 마치 한국에 양반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처럼. 티벳 몽고어족인 미얀마어는 한국어와 어순이 같다. 버마족은 과거 매우 강대한 종족이었고... 이런...

양곤 공항에서 출입국 수속을 대충 마치고 공항 바깥으로 빠져 나오니 삐끼가 달라 붙는다. 양곤 시내까지 택시 3$ 부른다. 협상이나 할까 하다가 마음이 바뀌어 그에게 어디서 버스 탈 수 있냐고 물으니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친절하게라... 의외로군. 택시가 글른 것 같으니까 환전하지 않겠냐고 되묻는다. 달러당 얼마? 450짯. 900으로 해 주세요.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동료들과 뭐가 재미있는지 킥킥 웃더니 좋은 여행 되길 빈다고 말한다. 미얀마 첫 인상이 상쾌하다. 생각해보니 시리아가 그랬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물어 20짯 짜리 픽업을 타고(시외버스 터미널처럼 생긴 아담한 공항을 빠져 나와 왼쪽으로 직진, 주욱 가면 픽업들이 서 있는 교차로가 나타남) 잔시(?) 라는 곳으로 가서 내린 다음 버스를 기다려 탔다. 51번 버스 40짯. 둘 다 사람들이 미어터져 몸을 꼼짝할 수가 없다. 아무튼 미얀마 숫자 쓰는 법을 익혀둔 덕택에 버스 번호가 눈에 보인다. 미얀마 알파벳도 좀 알아두고 싶은데 자료를 구하지 못했다.

버스에서 영어를 썩 잘 하는 대학생과 얘기했다. 전공이 경제학인데 한국에 내년에 가게 될 것 같다고 한다. 그의 형은 부산에서 일한다. 한국에서 일하게 되면 어떤 직업을 갖을 수 있을 것 같냐고 묻는다.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뭐라고 해야할 지... 전공이 뭐든 상관없이 동남아에서 풍운의 꿈을 안고 온 대학생들이 별로 적절치 않은 대접을 받으며 공장에서 나사 만드는 등의 일을 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해줄까. 이 지역에서 대학생이면... 그러나 교육수준이나 질은 한국과 상당히 다르다. 물론 그들 역시 많은 것을 바라거나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삽질해서 번 '큰 돈'으로 미얀마에서 부유하게 살아보는 것이 꿈일 테니까. 버스가 신호등에 걸렸을 때 옆 라인에 토니여행사의 짚차가 섰다. 미얀마 여행을 계획할 때 한 번 쯤은 접하게 되는 이름.

대학생의 안내로 술레 파고다에 내려 오끼나와 게스트하우스까지 함께 가면서 그에게 내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한국에 오게 되면 한번 연락하라고... 오끼나와 게스트하우스는 시설이 꽤 좋은데 가격이 비싸 그냥 나왔다. 그의 말에 따르면 미얀마에 온 한국인은 무슨무슨 호텔에 묵는다고 하더라. 내가 묵으려 하는 곳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좀 싼 편이라고 한다.

기절할 정도로 쌌으면 바랄 나위가 없겠다. 술레 파고다 바로 앞에 있는 가든 게스트 하우스로 올라갔다. 싼 방은 다 나가고 에어컨 방 밖에 없단다. 6$, 고민하다가 잡았다. 오끼나와에서 5$주고 도미토리에 묵는 것보다는 낫지. 이 숙소에 대한 트래블 게릴라의 평가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5층을 오르락 내리락하기에는 불편하단다. 술레 파고다를 바라보는 끝내주는 전망 얘기는 없었다. 어쩌면 탑들이 지겨워서인지도.


Sule Pagoda, 붓다의 머리카락이 여기 있다는 소문이 있다. 양곤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본 파고다. 한국으로 치면 남대문쯤 되겠지. 앞으로 수천 개의 파고다를 보게 될 것이다.


이 정도면 양호한 숙소 아닐까 싶다. 물론 2002년에 새로 지은 오끼나와의 럭셔리함과는 비교가 되겠지.

시장통에서 달러당 900에 50$만 환전. 론지를 살까 하다가 3000씩이나 한대서 망설였다. 삐끼와 바고 가는 차가 있냐 없냐로 옥신각신했다. 그의 말로는 2500짯이라는데 바고 까지 고작 한 시간에 2500짯이면 어딘가 가격이 불합리해 보인다. 걸어서 보따타웅 파고다까지 갔다. 2$를 삥 뜯기고(현지인은 무료입장) 낫 사당부터 보았다.


낫(nat, 정령) 신앙의 본거지인 뽀빠산에는 안 갈 생각. 절간의 삼신각과 비슷한데 한국에서는 절간 어느 한구석에 조그맣게 쳐 박혀 있는 것이 이곳에서는 금칠도 하고 대접 받는다. 이놈은 좋은 신령 같다.


어서옵쇼


보따(군인) 타웅(천명)은, 다곤(현재의 양곤)에 살던 두 형제인 Okkla와 Bhallika가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곳인 인디아의 부다가야로 찾아가 부처에게 꿀케잌을 바치고 그가 건네준 여덟 가닥의 성스러운 머리카락을 받아 다곤으로 돌아올 때 오칼라파 왕이 천명의 지휘관을 데리고 나와 영접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천명의 군인과 자비의 화신이라...


이 파고다는 내부를 공개하여 부처의 머리카락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이곳에 오면 부처의 머리카락을 보려고 안간힘을 다 썼다. 나도 노력했다. 그런데 저렇게 방치해도 되는 것일까? 저렇게 털기 쉬운 성물이라니... 이 김에 인디아나 정스가 되서 털어봐...


정말 성스러운 곳이라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려면 입장료와 별개로 1$를 더 내야 한다. 딱히 감시하는 것 같지는 않고 해서 사진기를 들이댔다. 안의 거울처럼 꾸민 여러 방에는 각각 의미가 있겠지만...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갯벌이 반인 이 해변에서 무려 천 명이나 되는 지휘관이 서서 부처의 머리카락이 당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천명의 군바리와 부발의 묘한 아이러니. 부처는 왜 미얀마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뜯어 줬을까? 팜플렛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부처는 불교가 미얀마에서 융성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부처는 락이 가고 블루스가 왔던 것처럼 미얀마에서 불교가 뜨리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았던 것이다.


2500년이 지난 현재, 해변 도로의 건너편에는 천 개의 컨테이너 박스가 있다.

시계를 흘낏 보니 기온이 38.5, 최근 12시간 동안 기압은 안정적. 아까도 꽤 더워서 땀을 많이 흘렸는데 이 더위에 차욱타지 파고다까지 6km를 걷는 것은 몹시 위험한 짓인 것 같아 중간에 택시를 세웠다. 1200짯에 대충 협상하고 올랐다. 아내가 늘상 하는 양상의 호구 조사를 해보니 운전수에게는 1년 7개월된 딸 하나 있고 딸 생각만 하면 입이 찢어지려고 한다. 심도있게 조사해보니 수입은 하루 7000짯 가량, 많을 때는 15000짯 까지 벌었다. 환산하면 8$-20$쯤. 택시는 렌트해서 사용하는 것, 하루 렌트비가 7000짯. 일인당 국민소득이 150$이라는 나라에서 의외로 고소득자였다. 아니면 개방 이후 다른 많은 나라처럼 미얀마 경제가 급속히 팽창하는 중이라던가, 관광객이 늘어났던가. 호구조사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는 영어라고는 숫자가 거의 전부인 기사 양반과 별별 수단을 동원해서 알아낸 것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깨달음도 얻었고 해서, 팔자 좋게 늘어져 있는 길이 195m 짜리 부처


이 나라 부처의 피부는 유난히 희다. 그가 미얀마어로 말했다; 아웅 레베 까잇데(아웅 목 아파), 뭐 재밌는 일 없을까?


쫄따구들이 오늘 공양은 잘 했는지... 내가 일어서기만 하면 군부 독재 정권 쯤이야 우습지. 보살들 시켜서 법륜 한 번 땀나게 굴려봐?


저 아저씨는 안 가고 아예 죽치고 살려나 보네. 그냥 눕지 그래... -- 이 나라에서 네번째로 큰 이 집 부처가 하루를 보내는 방법.

차욱따지 파고다를 나와 축축 늘어지는 더위 속에서 걸었다. 쉐다곤 파고다까지 만큼은 걸어볼 심산이다. 지나가던 아이가 앞에서 쳐다보길래 싱긋 웃어주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모르는 아이답게 내 얼굴을 한참 노려본다. 한 시간쯤 걸어가니 아까 그 아이가 어떻게 앞서 갔는지 앞에 다시 서 있다. 다시 웃어 주었다. 이번에는 아이도 살짝 웃는다. 낯선 외국인이 미소 지을 때는 함께 미소지으면 된다는 것을 깨닫고, 혼자 연습도 해 보고, 실무에 적용해 본 것이다. 재밌긴 하다.

쉐다곤 파고다 앞에서 파는 150짰 짜리 얼음 넣은 사탕수수 즙 먹고 힘냈다. 쉐다공 파고다에 다 왔다. 5$ 삥뜯길 준비도 했다. 가능한 안 걸려서 안 냈으면 좋겠다. 계단을 오르려니 아이가 따라와서 비닐 봉투를 덥석 손에 쥐어주고 신발을 싸서 들고 가란다. 5짯 주니까 히힛 웃으면서 사라졌다. 5짯이면 우리나라 돈으로 5원 가량? 이들 물가 수준이 아직 감이 안 잡힌다. 수퍼에 들러 대충 가격이라도 알아봤으면 좋겠는데 그럴 시간이 없다.

소문대로, 어디선가 귀신같이 나타난 젊은 친구가 나를 잡더니 티켓 판매소로 친절하게 안내해 주셨다. 외국인은 돈을 내야 하는 것이다. 친절은 계속되었다. 티켓 안내소의 아가씨들은 미소를 지으며 5000짯이라고 말하고, 꼭 사야할 것 같은 팜플렛은 1000짯 별도라고 말한다. 달러로 내겠다고 했다. 그 편이 계산하면 더 싸니까. 팜플렛을 사양하니 풀이 죽은 것 같다. 갑자기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혹시 카메라 있으시냐고 묻는다. 카메라는 1$ 더 내야 한다. 없다고 했다.


카메라가 없긴 왜 없어. 있지.


지나가던 카메라 촬영사나 가이드는 내 생일이 금요일이라니까 공교롭게도 붓다의 생일도 금요일이라고 기뻐하며, 오늘 당신이 이곳을 방문한 것은 행운이라고 자기들이 더 기뻐한다. 저게 행운의 참 모습이냐? 공사중이라 찬란한 황금빛에 대나무 금이 갔다. 공사는 5월에나 끝난단다. 내가 불만을 토로하자, 삐끼들은 그러나 여전히 당신은 행운아라고 말했다. 아직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공사가 마무리된 꼭대기의 찬란한 보석들은 볼 수 있지 않냐는 것이다.


신경질이 난 나머지(마누라는 먼저 갔다오고도 공사중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가이드와 쉐다공 파고다에 대해 누가 더 많이 아는지 서로서로를 가이드 해주기 시작했다. 그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전과 후 뭐가 달라졌는지 구분 안하였다. 나는 그가 겪은 고난 중에 마야(마라)가 특히 그의 심경을 괴롭혔음을 강조하고 틈틈이 미얀마 숫자를 자유자재로 읽을 수도 있음을 과시했다. 그리고 쉐다곤 파고다에 박혀 있는 무수한 보석들이 밤에 조명을 받아 반짝여 봤자, 꼭대기에 달린 다이아몬드의 찬란한 번쩍임 만큼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루비는 피빛으로 붉고 사파이어는 안다만 바다처럼 시퍼런데, 직접 보고 나서 말하라고 한다. 구석에 몰려도 아웅산 수지가 감방에서 밥은 잘 먹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주저 앉아서 지나가는 카메라 삐끼들과 한가한 얘기나 나누며 사람들이 절하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파고다의 이름에 스웨가 접두어로 붙는 것들이 많다. 스웨는 황금이란 뜻이다. 스웨다곤은 황금 다곤, 다곤은 양곤의 옛 이름. 파고다에 자기 몸무게 만큼의 금을 기부하는 풍속은 미얀마에서는 신소부 여왕때부터 시작된 것 같은데, 그녀가 기증한 금은 40kg이었다. 그녀가 기부한 금의 무게가 현재에 살아가는 많은 여성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지, 공주가 만약 80kg의 금을 기부했다면 지금처럼 존경받았을까? 의문이다.


쉐다곤 파고다에서 받은 이미지: 쪼리를 질질 끌고 다니며 담배를 뻑뻑 빨고 있는 승려, 콘크리트 붓다, 부처 머리에 앉아 똥 싸는 참새, 한가한 가족 나들이, 한 줄로 주욱 즐비하게 늘어선 기부함, 라이브 도네이션 현장. 사원에서 기부받은 돈을 즉석해서 회계처리하는 인디아식의 영리함을 이곳에서는 보지 못했다. 인도에서 가장 큰 사원의 회계사에게 물었다. 하루에도 수십만의 사람이 들락거리는데 어떻게 한푼의 에누리도 없이 정확하게 계산이 맞아 떨어지는가? 그야 신께서 도와주시니까. 영적으로나 회계적으로나 한국의 개신교에서도 그 분께서 장부 처리를 도와주고 있을까? 돈을 세고 있는 하나님 모습을 상상했다. 지나가던 독일인이 지겹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부다, 부다, 부다, 어나더 부다...' 부처가 참 많긴 한데, 각 부처마다 보살피는 것이 다른 것 같다. 낫 신앙과 뒤섞인 힌두식 남방불교. 미얀마는 대승 불교에서 소승 불교로 갈아탄 것으로 알고 있다. 인상깊은 것이 하나 더 있다. 세계 주요 도심에서 나름대로 진화하기 전의, 닭둘기 조상이 이곳에 대거 서식한다.


저녁 8시쯤 정전. 술레 파고다는 그래도 희미하게 빛났다. 성스러운 전용 발전기가 있는 것 같다. 정전으로 암흑에 휩싸인 도심의 한복판에서 파고다가 surealistic하게 반짝인다. 그야말로 sf였다. 노출보정 +1, 노출시간 0.6초, iso200, 손 삼각대. 아마추어 사진에 더 많은 것을 바래서는 안되겠지. 더 이상의 노력은 포기.

오끼나와 식당에서 1200짯 짜리 오끼나와 특별 수프를 시켜 먹었다. 정전 탓에 촛불을 켜고. 방콕에 있을 때 똠양꿈을 못 먹어 섭섭했는데 여기서 먹게 될 줄이야... 오끼나와 스페셜 스프는 똠양꿈 맛인데 그런 줄 모르고 설탕을 안 넣어 시디 신 라임소다를 곁들여 먹었다.


에어컨 프로텍터. 전압이 242v 이상 치솟으면 에어컨 전원을 off 시키는 것 같다. 인디아에서는 왜 이런 장치를 본 적이 없을까. 60-250v까지 제멋대로 정신없이 변하는 전압에서는 섬세한 일본 기기나, 유럽, 미국의 전자기기들은 가차없이 나가 떨어졌다. 한국의 모 기업의 tv가 인디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은 60-250v까지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전압으로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줄이려고 정격의 수 배에 달하는 내압을 지닌 값비싼 컨덴서를 포함한 회로를 전자기기에 장치하면서 부터다. 발전 사정이 좋지 못한 비서구권 제3세계 국가에서 한국 전자기기는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훌륭한 현지적응 사례다.

보조제 마켓의 한 노점상에서 손톱깎이를 살 때 상인은 태국제, 중국제, 한국제를 구별했다. 한국제가 가장 비싸다. 주저없이 중국제를 골랐다.


어둠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좋아 날뛰고, 불빛 주변에는 사람들이 불나방처럼 모였다. 덕택에 미얀마의 수도에서 별을 보았다. 쩨주베(고맙다).

인터넷 까페는 아홉시에 문을 닫고 이 글은 언제쯤에나 블로그에 올리게 될지. 노트북에 저장해 둔 비틀즈의 노래를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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