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Bago

여행기/Myanmar 2005. 4. 1. 21:00
여섯시 기상. 숙박비에 포함된 아침을 먹었다. 토스트 3장. 커피와 인디아식 밀크티, 짜이의 인스탄트 버전을 맛보다.


담배 한 대 빨면서 밝아오는 아침을 구경.


숲의 도시 양곤의 중심 시가지.

이틀 정신없이 걸어 다녔더니 몸 여기저기서 삐걱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젯밤에 숙소 점원에게 바고로 갈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을 물어봤으나 아웅 밍글라 버스 터미널로 가라는 말을 되풀이 했다. 친절하게 미얀마어로 적어주었다. 중심가 어딘가에서 분명히 바고로 가는 픽업이나 버스가 있을테지만 한시간 반을 고생해서 가는 것보다는 버스를 이용하는 편이 낫다는 것일까... 좀 쉬고, 움직이자.

시청 맞은편에서 43번 버스를 기다렸다. 무수히 많은 43번 버스가 지나갔지만 차장이 아니란다. 원숭이처럼 오는 버스마다 팔짝 팔짝 뛰어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라 담배 파는 아저씨에게 부탁했다. 탔다. 어제 열나게 걸어다니던 인야 호수가를 지나 시골 마을 몇 군데를 거쳐 50분을 달려 아웅 밍 갈라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삐끼가 친절하게 맞아 주신다. 10시 차가 때마침 있다. 1000짯 주고 올라탔다. 그럼 그렇지. 2500짯이라니 놀랐잖아. 버스는 열 시 정각에 출발했다. 기다리는 15분 동안 땀을 비오듯이 흘렸다. 덥다. 몹시 덥다.

버스가 잠시 정차할 때마다 후끈한 열파가 밀어닥쳤다. 어서 달려서 바람이라도 들어와 주셨으면... 열두 시에 바고에 도착했다. 사이카(자전거 옆에 좌석을 붙인 세발 달린 트릭쇼, 탈 것) 삐끼가 반갑게 맞아 주신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내내 삐끼의 어원을 궁리해 봤다. 아무래도 picky 같다.

일단 삐끼의 사이카에 올라 코딱지만한 바고 중심가를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바고에서 만달래(mandalay)로 가는 버스가 있는지 알아 보았다. 사기꾼 같이 생긴 친구가 에어컨 버스를 8천 부른다. 넌에어컨 버스는 6천. 하다야 까페에서 물어보니 자리는 없고 4500에 midst seat를 끊을 수 있단다. midst seat가 뭘까 궁금해 하니 aisle에 붙여놓은 좌석을 말하는 것 같다. 누군가 타면 일어서 주고, 누군가 나가면 일어서 주는, 그러니까, 밤새도록 잠도 못 자고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는 좌석이랄까. 그 좌석은 좀 난감해서 하다야 까페 옆의 노상에서 버스표를 파는 친구에게 물어봤다. 좌석이 없단다. 샌프란시스코 호텔로 갔다. 역시 없다. 미야난다 호텔 직원이 슬며시 끼어들며 자기한테 좌석이 있단다.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가 사기꾼이라고 말한다. 분위기를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삐끼가 자기가 아는 장소가 하나 더 있다며 데려간다. 정부 관리 호텔, 자리 없음. 구둣방 주인, 전화 한참 해 봤으나 역시 자리 없음. 남은 옵션은 하다야 까페에서 4500짯 짜리 표를 사는 것과 10$짜리 엄청나게 비싸고 5시간 더 늦게 도착하는 기차표 정도. 만난 사람 누구도 삐끼와 커넥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입술을 씹고 하다야 까페에서 미디스트 좌석을 예약했다. 로봇처럼 말하길, 5.30pm까지 까페로 오란다.

나 때문에 1시간 넘게 자전거를 끌고 땀을 질질 흘리면서 이리저리 함께 돌아다닌 40살 먹은 말라깽이 삐끼를 그냥 보내기도 뭣하고 해서(뭐 그걸 노리고 하는 일이지만), 그와 투어 협상을 했다. 1500에 여섯 군데 사이트를 모두 돌기로 합의봤다. 혹시 10$이나 하는 입장료 안 내고 들어갈 방법은 없는지 물어보니 자기한테 입장료의 반액을 주면 4-5pm 이후 외국인 입장객 감시원들이 퇴근할 때 맞춰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것 봐라? 머리 굴리는데? 그 얘긴 즉슨, 내가 천오백짯만 줘도 시간 잘 맞추면 여섯 군데 다 들러볼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당신한테 5달러 줄 필요가 없지.

그가 강가 까페로 나를 데려갔다. 분위기 괜찮다. 110짯 짜리 음료수 하나 시켜놓고 가격 협상을 하다가, 문득 자선하는 셈치고 이 친구한테 5달러를 주는 것이 어떨까 싶었다. 지도를 그리고, 동선을 따져보면 이 친구가 나를 태우고 40도의 뙤약볕에서 하룻동안 운행하는 거리가 20km 가량 된다. 시간으로 따지면 3시간 반 이상.

입장료 수입은 정부가 챙긴다. 따라서 각 사이트에서 감시하는 사람들도 자기 수입으로 들어오는 일이 아니니 근무시간이 끝나면 외국인이 입장하건 말건 그냥 멀뚱히 쳐다보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이 얘기는 여러 여행 사이트에서 확인한 것이다. 내가 굳이 자선할 이유가 없지만 이 친구의 행실을 보니 사기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겨우 5천원 벌려고, 이 비수기에 열파 속에서 삽질하는 그 친구를 가여워 해서라기 보다는 군부 독재정권에게 고스란히 돈을 갖다 바치는 대신 현지인이 이득을 보게 하는 방법이 나쁘지 않다. 하지만 5달러는 큰 돈이고 만일 내가 5달러를 준다면 그것이 선례가 되어 다음에 오는 여행자들이 5달러씩 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마음 속으로 생각한 적정가는 2천5백짯이고 제시할 협상가는 2천짯이지만 눈 질끈 감고 5달러로 했다. 마음 속에서 너는 지금 큰 실수를 하는 것이다, 라는 메아리가 들렸다.


먼저 들른 곳은 무슨 monastry(승원). 아마 Kha Khat Wain Khaung일 것이다. 4년 동안 빨리(pali, 원래는 팜트리 껍데기에 산 스크리트어로 새겨진 독경 같은 것)를 열나게 외우는 어린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이다. 돗데기 시장같은 분위기지만 삐끼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그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한가하게 지켜보았다. 암기교육의 본산.

그는 40살 먹었고 두 자식을 데리고 있다. 그는 대학을 나왔고 병원에서 안경을 조제하는 일을 하다가 싸이카 모는 것이 수입이 더 좋을 것 같아 업종 전환했다. 사이카 한 대 가격은 15만 짯, 사이카의 라이센스 플레이트를 정부로부터 받으려면 7만짯을 내야 하고, 자기 사이카를 장만하기 위해 월부금을 열심히 붓고 있는 중.

아들은 중학교 다니고 미얀마는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이며 대학에 입학하고 공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단다. 정부를 몹시 싫어했지만 입 밖에 내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워 한다. 버마와 타일랜드의 역사 때문에 그 두 민족은 알게 모르게 일본과 한국처럼 자존심 싸움을 가끔 벌이는 것 같다. 미얀마 군은 육군 밖에 없고 그나마 가지고 있는 무기라고는 2차대전 때나 쓰던 소총 뿐이라 타이와 한판 붙으면 작살 나는 쪽은 가난한 미얀마지만, 마치 북한처럼 그저 자존심과 악과 깡이 남았다. 그럴 때는 안 건드리는 것이 이롭다.

미얀마는 불교 국가로 알고 있는데 타이를 침공했을 때 부처 대가리는 왜 베었소? 하니까 그때는 전쟁중이었으니까, 하는 따위의 말을 했다. 아웅산 수지 사건을 그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심지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폭탄 테러범의 이름까지도 알고 있었다.

바고에 한국인 individual traveller는 얼마나 왔소? 하니 일 년에 다섯명 보기 힘들단다. 성수기때 그의 수입은 하루에 5달러 정도씩 삥 뜯어서(유러피안은 사정이 나아서 20달러까지 가능하단다) 한달 250달러 가량. 꽤 수입이 괜찮은 편. 약은 일본 학생들은 투어 단가를 3천짯까지 떨구기도 한단다. 말은 안 했지만 그 가격이 내 생각(2500)에도 적정가 맞다. 물론 태국 여행자는 미얀마에 극히 드물다. 형편이 풀린 태국 학생 배낭 여행자들이 최근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이고 보면 역사란게 무섭긴 하다.

과거 미얀마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영국과의 관계는? 그들과의 비즈니스는 국가 차원에서 잘 이루어지고 있으며 관계는 나쁘지 않다. 그런 정치적 멘트야... 그러나 미얀마인들, 특히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in deep inside of mind, i...)... 서구 열강에 의해 식민 시절을 보냈던 모든 동남아 국가들에 관해 유난히 알고 싶은 내용이었다. 내가 평소 특히나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것은, 이 동남아 새끼들은 더위 먹어서 배알이 없나? 였다. 알았으니 됐다.


여기가 어디더라... 마하깔랴니시마(Maha Kalyani Sima). 옛날에 승려들 출가 의식 하는 곳. 누워서 한숨 자기 좋다. 개와 사람들이 누워 자고 있다.


마하깔랴니시마에서 눈 붙이고 있는데 다가와서 히히거리던 아이들. 얼굴에 칠한 것은 단라까 라고, 오래되어 기억나지 않지만 무슨 나무에서 추출한 가루인데 천연 자외선 차단/보습제 같은 것. 여기 여자들이나 아이들이 칠하고 다니는데 효과가 우수한 것 같다. 미얀마 여자들 피부 곱다.


그래도 명색이 투어 인지라 갈 곳은 빠짐없이 들렀다. 뭔가 설명을 들었는데 뭐 하는 곳인지 모르겠다.


보리수 그늘에서 깨달음을 얻은 부처와 함께 있던 제자들. 미얀마 나름의 시뮬라시옹. 보리수도 심고, 제자들도 잘 배치해 놓고... 저 아이랑 놀았다. 참 순진하다. 발랑 까진 한국의 초딩과 워낙 비교가 되었다. 날 졸졸 따라다니며 부처님 계시니까 신발 벗으라고... 알았다니깐... 응... 벗을께. 됐지?



싸이카로 하는 싸구려 투어인 관계로 바고시 입구의 사면 부처상은 못 보러가고 대신 짝퉁이나마... 아, 진짜 관광사진 찍기 싫다.


쉐구레 파고다 Shwegulay pagoda, 파고다 내부에 64명의 부처상을 모셔놓은 곳.

2시가 좀 넘자 시계에 찍힌 기온이 41도다. 믿어지지 않았다. 바짝 마른 싸이카 운전사는 땀나게 페달을 밟고 있는데 나는 오르막에서 내려 주거나 그가 쉴 시간을 벌어주려고 투어를 늦추거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41도라니 이건 좀 심하다 싶어 노점에 자전거를 세우고 그가 좋아하는 스타콜라를 사줬다. 그 맛없는 청량음료를 미얀마 사람들이 자주 먹더라. 나는 얼음에 담가놓은 멜론을 썰어 먹었다. 60짯. 얼음에 담근 멜론을 썰고 설탕과 연유를 뿌려 컵에 내오는데 맛있어서 하나 더 먹었다.

어제부터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 이번 미얀마 여행에서는 대체로 초심으로 돌아왔다. 말하자면 열심히 돌아다니고 식사는 대충 되는 대로 줏어 먹고 숙소는 잠만 잘 수 있으면 된다. 그래야만 했다. 몸이 맛이 간 것은 둘째치고 정신상태가 글러먹어 이런 식으로는 안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입가에 군침이 도는 그 맛있어 보이는(약간 짤 것이다) 샨 음식이나 버마식 백반을 멀리했다.

우리는 점심을 먹지 않았다. 싸이카 운전사는 눈에 띄게 지쳐 있었다. 어쩌겠나. 5달러 벌려면 그만한 노력을 해야지.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다시 출발. 태양의 기세는 좀 수그러 들었다. 38도, 약간의 바람과 다양한 흙먼지, 이 정도면 견딜만 하다. 슬슬 '공무원'이 빠져 나갔을 장소로 향하자.


힌타곤 파고다 Hintha Gon pagoda, 무당, 기(gyi)라고 한다. 낫 신앙에서 비롯된 우리나라의 무당과 비슷한 여자. 머리에 아카시아 꽃을 두르고 소매, 주머니 여기 저기, 그리고 입에 지폐를 문 채 퍼쿠션에 맞춰 춤을 추며 쉰 목소리로 실성한 사람처럼 뭔가를 중얼거린다. 한국에서야 제대로 신을 맞았는지 무당질을 부탁하는 사람들이 꼼꼼이 확인하고 칼에서 춤을 추지만, 이 친구들은 워낙 순박해서인지 무당이 사기꾼인지 아닌지 굳이 확인하지 않는 듯. 하다못해 간단한 차력 시범 정도는 보여줘야지 싶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신통력도 없는 무당을 신뢰할 수 있다고...


힌타곤 파고다, 시원해서 낮잠 자기 딱 좋게 생겼지만 시간 관계상... 싸이카 운전수를 좀 고생시켜 쉴 새 없이 계획에도 없던 곳들을 돌리고 있다. 어쩌겠나. 시작한 투어는 제대로 해야지. 누운 부처상(shwethalyaung budha)은 흘낏 보고 지나쳤다. '크다'는 것 외에 별 감흥이 없다. 대신 그 둘레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힌타공 파고다에서 바라본 쉐모도 파고다.


쉐모도 파고다 Shwemawdaw Pagoda, 오늘의 메인 이벤트. 5pm이 되어 도착. 20분 이내에 다 보고 나와야 하다야 까페에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듯. 사진을 재빨리 찍었다.


쉐모도 파고다야 쉐다곤 파고다 만큼이나 유명하니... 이제 만들래에 가서 마하무니 파고다만 보면 짜익티요 삐고는 다 보는 셈인가.


마치 이란의 모스크처럼 이것들은 끊임없이 금칠을 새로 하고 보수한다. 국제적인 기준에서 보았을 때 그저 찢어지게 가난할 뿐인 싸이카 운전수는 자기한테 2000달러가 있으면 여기에 파고다를 만들 것이란다. 왜? 그것은 지위, 부, 체면, 명성, 그러니까 그들 사회의 근본적인 계급 구조와 사회 구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니 굶어 죽어도 파고다는 수십만 개를 만들어 놓았지. 백만 달러 정도면 100m 짜리 웅장한 파고다를 만들 수 있단다. 잘들 한다.


그래서 저 새끼 파고다는 기증자들이 돈 되는대로, 쥐꼬리만한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전시하는 것이다.
그들 문화를 비아냥거릴 생각은 없다.


쉐모도 파고다 안에서 만난 이 친구, 한참 이야기 하는 중에는 웃기도 잘 웃고 다정하고 재밌었는데, 얼씨구? 사진기를 들이대자 곧바로 근엄해지네? 이래서 종교가 싫다니깐.


투어를 마치고 돈을 건네주니 사색이던 얼굴에 콰광 희망의 번개가 쳤다. 입이 찢어지게 좋아한다. 이 비수기에 단비같은 돈인건가. 돼지같은 군부는 대체 뭘 하고 있는걸까. 벌이가 짭짤해 뵈는 파고다를 중들로부터 빼앗아 보수해서 외화벌이 한 돈으로, 이 나라 저 나라에 자기 딸들을 수출한 돈으로 대체 뭘 하고 있을까. 하다못해 국민이 굶주린다고 찔찔 짜다가 자기 아니면 나라 못 바꾼다고 말년에 머리가 돌아버린 박정희 대통령이라도 닮았으면...

하다야 까페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며 라파이를 시켜 홀짝 홀짝 마셨다. 인디아의 짜이와 그 맛이 백퍼센트 똑같은데 과자 몇 접시가 함께 나왔다. 과자를 집어 먹으면 나중에 합산해서 계산해준다. 하다야 까페 주인은 마치 rpg 게임에 나오는 mob처럼 대사가 기묘하게 정해져 있었다. 재밌다. 좋은 사람 같다.

영어할 줄 아는 미얀마 인한테 필수 생존 미얀마어 세 가지를 배웠다. i want to go to mandalay -- 쩐노 만달래 꽈찬례, please tell me this is mandalay -- 만달래 야오예 뚀바, how much is it -- 배 라울래

그 다음부터는 고독했다. 옆 자리에 아일랜드 여자와 남자가 앉았다. 평소에는 여행자에게 말을 안 붙이는 편인데 여행자가 하도 없다보니 반가워서 말을 걸었다. 인레 호수로 간단다. 난 아마 안 가게 될 것 같다. 나를 미얀마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제임스 조이스를 안다니까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쳐다봤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전공이 조이스였다. 호, 이런 즐거운 우연의 일치가... 그래서 나는 먹고 살기 위해 낮에는 구두 수선하다가(이 나라에는 그런 대학생들 천지다) 저녁에 잠깐 시간이 나면 이 책 저 책 읽어본 미얀마의 대학생 정도 되는 신분으로, 그녀는 조이스의 본고장에서 온 조이스를 공부하는 학생쯤 되는 사람으로서, 대화를 시작했다. 일단 기본적인 초식부터 보여줘야 하니까 내가 읽은 조이스의 저서를 얘기했다. 어 포트레이트 오브 영 아티스트, 피네간스 나잇, 율리시즈. 그녀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제외하고 다른 책들은 읽어본 적이 없었나 보다. 게다가 night가 아니라 wake인데 알아채지 못했다. 말을 더듬더듬하더니 그런 스스로가 당황스러웠는지 눈알을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렸다. 나는 조이스가 왜 미쳤는지 얘기 중이었다. 차가 와서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미얀마가 세계에서 고립된 깡촌오지가 아니라는 점만 알았으면 된 거다.

차에 오르니, 얼씨구? 4500으로 들었는데 5500을 내란다. 무슨 소리냐? 설마 자리라도 있는거냐. 고개를 끄떡인다. 미얀마인들의 보이지 않는 친절은 사람을 바보로 만들기 일쑤다. 누군가 나 때문에 midst seat로 옮겨간 것이 뻔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나는 각기 다른 에이전시를 통해 이미 표가 없음을 수 차례 확인했다. 없는 표가 하늘에서 떨어질 일은 없고, 미얀마에서는 차를 잡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다. 특히 지금은 새해를 맞이해 엄청난 인구가 이동중이라 못해도 하루 전에 예약을 해야 표를 구할 수 있다. 게다가 내 자리에 있어야 할 물병과 물수건이 없다. 누군가 앉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져간 것이다. 어쩌면 하다야 까페 주인이 손을 쓴 것일지도 모르겠다.

쓴웃음을 짓고 돈을 건넨 후 자리에 앉았다. 차가 좁아 허리가 아프다. 에어컨 버스인데 에어컨 나오는 모양을 보니 기대할 형편은 아닌 것 같고, 사람들이 창문을 열어놓았다. 자리가 불편해 잠이 안 온다. 비디오를 틀어놓으니 차안의 모든 미얀마인들이 그 비디오를 보느라 정신 없다. 차 안에 있는 외국 여행자는 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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