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Mandalay

여행기/Myanmar 2005. 4. 2. 21:06

만달래에 다다르기 전 마지막 휴게소.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다. 잠을 거의 못자고 꼬박 밤을 샜다. 일부는 밤새 틀어놓은 비디오 때문이다.

휴게소에 들러 비빔 국수를 먹었다. 우리네 참기름과 유사한 것에 땅콩가루와 양념을 넣고 비벼준다. 그리고 작은 종지에 배추국을 담아 주는데 흔히 휴게소에서 파는 쓰레기 같은 음식치고는 둘 다 맛있다. 지불하려고 하니 잔돈을 사탕으로 준다. 이 녀석이 외국인이라고 몹시 순진한 방법으로 골탕 먹이네. 캔디를 돌려주고 돈으로 받았다.

만달래 도착. 시외버스 터미널이 시 중심 시가지와 4km쯤 떨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11km인 것 같다. 미얀마 삐끼들은 몇 마디 안해도 알아서 자기가 다 말해준다. 세상에 이런 순박한 삐끼가 어디 있을지. 시내까지 천짯에 갈 수 있단다. 700이면 가겠다고 했다. 어차피 단가도 모르고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불러대면 대충 감 잡을 수 있겠지... 700에 가겠다는 친구가 나타났다. 500부터 시작할껄...

론지 뒤에 수첩을 차고 있길래 빼서 읽어봐도 되냐고 물었다. 그는 세 아이의 아버지다. 젊은 아버지다. 아무튼 삐끼와 이렇게 많은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 그의 수첩 첫 장에는 경구가 2개 국어로 적혀 있고 그 다음 장에 청동 캐스팅에 관한 얘기가 있고, 그 다음부터 그가 공부한 여러 가지 분야의 학습 내용이 적혀 있다. 찬찬히 읽었다. 작은 노트라 35분 가는 동안 다 읽을 수 있었다. 감동했다. 수준의 고저를 떠나 이 친구는 낮에 싸이카 운전수로 밥벌이하고 틈틈이 시간나는 대로 이것 저것 공부하는 중이다. 그는 자신의 영어 발음에 자신이 없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정치 얘기가 나오자 그가 쉿 하면서 주변에 사람들이 보고 있다고 말한다.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그가 미얀마에 살고 있는 나가 라는 원시 종족에 관한 얘기를 해줬다. 나가 종족에는 두 가지 타잎이 있는데 한 쪽은 조상이나 적의 머리를 베는 습속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 쪽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갑자기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 나중에 조사해보자.

로얄 게스트 하우스 앞에 도착. 천짯을 운전수에게 건넸다. 300은 당신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나라에 온 후로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자꾸 감상적이 되는 것 같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날더러 '안녕하세요' 라고 말한다. 설마 이곳을 2주 전에 다녀간 아내가 가르친 것은 아니겠지. 한국인들이 지나가면서 그런 걸 가르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새로운 도시에 도착했을 때 사방에서 들려오는 '곤니찌와' 만으로도 충분히 지겹다. 5달러 짜리 방을 보여주다가 살며시 아래위로 내 분위기를 살피더니 3달러 짜리 방이 있다고 말한다. 그야 당근 3불이지. 방 상태는 살피지도 않고 얼씨구나 하고 잡았다. 이제 오전 열시 이십분.

띠보(Thibow, Hsipaw)행 버스를 예약하려고 은방울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를 가진 게스트 하우스 주인 자매에게 물었다. 내가 알고 있는 좌표를 그대로 말한다.

만들래의 거리는 격자형. 가로 도로 넘버와 세로 도로 넘버로 참조. 아주 쉽다. 티켓 오피스에 가기 전에 그 유명한 나일론(닐론) 아이스크림 샵에 들렀다. 300짯 짜리 아이스볼(팥빙수)을 주문했다. 명불허전,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좀더 이것저것 시켜봐야겠다. 그리고 이번에는 바나나 스플릿을 꼭 먹자.

버스 티켓 오피스에 찾아갔다. 버스 회사 사무실이 안 보인다. 한참 헤메다가 원점으로 돌아왔다. 인터넷이나 일단 하자. 가게에 들어가니 30분당 이천짯을 부른다. 순 날강도네. 6메가 분량의 파일을 올려야 하는데 속도가 나올까? 해보니 너무 느리다. 그만하겠다고 하자 2천짯을 달란다. 에게 3분 사용했는데? 그래도 받겠단다. 하는 수 없이 줬다.

다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티켓 오피스를 찾으러 돌아다녔다. 원점으로 돌아왔다. 도저히 티켓 오피스라고 믿어지지 않는 위치에 그것이 간신히 존재했다. 2800짯, 내일 아침 티켓을 예매. 할 일 다 한 기분이 들어 밥이나 먹자는 생각으로 라쇼 레이 식당(Lashio Lay)을 찾아 북쪽으로 올라갔다. 거리가 워낙 orthographical해서 n 블럭 동쪽으로 이동 후 n 블럭 북쪽으로 이동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언젠가 어느 책에서 읽은 바로는 이런 도로 설계법이 몇 가지 단점이 있단다. 단점이 뭔지 잊어버렸다. 라쇼레이에서 새우 한 접시와 돼지고기 한 접시, 밥 한 됫박(정말 됫박이다), 카믈라 티를 시켜 먹고 워낙 양이 많아 남겼다. 2550짯 나왔다.

엄청나게 럭셔리한 식사를 한 탓에 죄책감이 들어 만들래 힐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대략 6km, 오후 1시 20분, 열심히 걸으면 1시간 내 도착할 거리. 걷기 시작했다. 양곤과 달리 만들래 거리에는 그늘이 거의 없다. 40도 땡볕에서 30분을 걷자 온몸이 뜨거워지고 입 안이 타 들어갔다. 그때쯤 객기 그만 부리고 싸이카를 탔어야 하는데 한 30분 더 걷고 나니까 악이 생겼다. 오냐 끝까지 가보자. 6km 걷는데 1시간 30분 걸렸다. 엄청나게 더웠고 더 걷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 무렵 만들래 언덕의 입구가 나타났다. 오렌지 쥬스 한 잔 사 마시고 잠깐 쉬다가 계단을 오르기 시작. 790여개인지 1600여개의 계단인지 모르겠지만 중간에 가다가 멈췄다. 더 걷다간 쓰러진다. 사원에 누워 30분 동안 잤다. 그리고 물을 끊임없이 마셨다. 탈진하기 바로 직전인 상태였다. 아, 내가 미쳤구나...


'아뵤! 여기야 여기! 내가 죽은 후에 여기서 불교가 열나 뜰꺼야!!' 라고 지존께서 말씀하신 언덕이 바로 만들래 언덕이다. 그는 불법을 설파하기 위해 인도로부터 그 먼 길을 걸어왔고 바로 이 자리에서 만들래라는 도시가 융성하게 될 것을 예언했다. 하지만 동상의 생김새는 그 분위기가 아닌 것 같다.

이 자리에 그대로 뻗어 잤다. 더 이상 올라가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이쯤에서 숙소로 돌아가 닐론 아이스크림에서 맛있는 아이스크림이나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 몸이 나른한 것이 일사병 증세다. 손수건에 물을 적셔 온 몸을 닦고 목덜미에 얹었다. 사원마다 조그만 물항아리가 있다. 나그네가 사원을 방문하면 더위를 식히라고 떠놓은 '구원의 물'이다. 그 물로 버텼다. 한동이는 썼다. 그 물, 사먹는 물보다 시원하고 맛있다. 토기 항아리라 먼지가 잔뜩 낀 물이라도 몇 시간 놓아두면 먼지는 모두 침전되고 항아리 숨구멍을 통해 수증기가 증발하면서 내용물이 차가와지는 것. 어린 시절 시골에서 이런 물을 마셨는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물맛이 달았다.

30분 쉬고 힘없이 계단을 내려왔다. 다섯시 전에는 내려와야 싸이카 삐끼를 만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헬렐레 하고 있는데 삐끼가 다가왔다. 1500짯이면 다운타운까지 데려다 준단다. 500짯. 그건 불가능하단다. 8km나 되는 거리를 500짯에 어떻게 가냐고. 난 그 거리를 걸어왔다. 천짯 부른다. 가라고 힘없이 손짓했다. 그럼 천짯에 만들래 힐 주변의 몇몇 관광명소를 둘러보고 가는 코스는 어떻겠냐고 오히려 삐끼가 제안. 좋다. 3군데 둘러보고 다운타운까지 가는 조건으로 천, 합의. 하지만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상황에서 관광이고 나발이고 전혀 기운이 안 난다. 겉모습만 후다닥 보고 얼른 닐론 아이스크림으로 가고 싶은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도착하자 마자 닐론 아이스크림에서 300짯 짜리 후루츠 칵테일을 먹고 담배 한대 피우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건기 40도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더위 속에서 걷는 것은 확실히 미친 짓이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자.

숙소에서 샤워를 마치고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나일론 호텔로 갔다. 내 백달러 짜리를 상인들이 거절하기 일쑤였다. 나일론 호텔에서 여러 모로 내 헌드레드 노트를 살피더니 스몰 헤드는 안된단다. 상인한테도 그 얘기를 들은 바 있다. 스몰 헤드 말고 빅헤드를 달라고. 왜 거두를 선호하는지, 그게 무슨 뜻인가 물어보니, 백달러 노트 신권은 큰 대가리 얼굴이 새겨져 있는데 구권은 작은 대가리란다. 아항... 내게 있는 것들은 모두 스몰 헤드라서 앞으로 애로사항이 꽃필 전망이다. 이런 젠장할. 숙소에 물어보니 역시나, 숙소에서도 바꿔줄 수 없단다.

궁리하다가 길거리에 보이는 싸이카 운전수 중 가장 몰골이 형편없는 작자를 골랐다. 이왕 도와줄 바에는 손님들에게 선택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가엾은 사람을 도와주자 싶었다. 시도나 호텔까지 투웨이로 얼마요? 투 따우잔드. 노 완 따우잔드. 잇츠 파. 완 따우잔드. 타협이 안 되서 그를 보냈다. 내 수중에는 마침 천 짯 밖에 없다. 그가 가다가 말고 돌아와서 오케이 한다.

시도나 호텔은 정말 멀었다. 그러나 난 관광객이 아니고, 그 가격은 (최소한 내 감으로는) 맞다. 호텔 입구에 그를 기다리게 해 놓고 들어갔다. 미얀마 기준에서는 으리으리한 호텔이다. 프론트에서 다짜고짜 도와 달라고 청하고 백달러 노트를 꺼내 작은 돈으로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매니저 눈치를 보는 아가씨가 망설이다가 매니저의 눈짓을 받고 바꾸러 가는 동안 옆에 있던 아가씨가 말을 붙여온다. '안녕하세요, 한국인이시죠?' 꽥. 왠 난데없는 한국어람. 한국어 배우는 중인데 발음이 안 되서 고민이란다. 참하고 예쁘장한 아가씨다. 국경과 신분을 초월해 사랑을 꽃피울 정도는 되었다. 그 동안 여자애들을 봐도 시큰둥했는데 미얀마에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있을 줄이야... 꼬시면 백퍼센트 넘어온다. 뭐 그런 확신이 들었지만 내게는 훌륭한 아내가 있다. 미련없이 홱 돌아서서 나왔다. 호텔 앞에서 플라타너스 잎사귀처럼 흔들리는 수많은 삐끼들을 마다하고 내 전용 운전사의 싸이카에 올라타고 다시 나일론 호텔 앞으로 왔다.

숙소에서 몇천짯 꺼내와 즉시 사람들이 버글거리는 나일론 아이스크림으로 들어가 아이스볼을 주문해 먹었다. 아, 정말 맛있다.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가는 크림과 오도독 오도독 씹히는 얼음 덩이, 그리고 혓바닥을 흥건히 적시는 과즙. 베트남 시장통에서 먹어본 잊을 수 없는 푸룻 아이스크림에 필적했다. 그러고 보니 내 생애 하루에 세 번 들른 음식점은 이 곳이 처음이다.

숙소에 돌아와 노트북으로 음악을 듣다가 그대로 뻗었다. 정말 피곤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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