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에 해당되는 글 119건

  1. 2004.07.01 피피에서
  2. 2004.06.30 방콕에 내려 2
  3. 2004.02.27 신혼여행 #8 1
  4. 2004.02.23 신혼여행 #7 1
  5. 2004.02.21 신혼여행 #6
  6. 2004.02.20 신혼여행 #5
  7. 2004.02.19 신혼여행 #4 1
  8. 2004.02.18 신혼여행 #3
  9. 2004.02.17 신혼여행 #2
  10. 2004.02.16 신혼여행 #1 1
  11. 2003.06.13 coming for to carry me home 2
  12. 2003.06.09 ...... 11
  13. 2003.06.08 Santa Cruz 4
  14. 2003.06.06 Silver Mine
  15. 2003.06.05 Potosi
  16. 2003.05.30 Oruro 12
  17. 2003.05.29 Valle de la Luna 항공권 4
  18. 2003.05.27 La Paz 2
  19. 2003.05.26 Titicaca 5
  20. 2003.05.23 Puno 4
  21. 2003.05.22 Idle
  22. 2003.05.21 Back to Cusco
  23. 2003.05.20 Machu Picchu 4
  24. 2003.05.19 Cusco -> Machu Picchu
  25. 2003.05.17 Arequipa to Cusco 2
  26. 2003.05.15 Colca Canyon
  27. 2003.05.13 Arequipa 4
  28. 2003.05.12 Isla Ballestas 1
  29. 2003.05.11 Pisco
  30. 2003.05.09 Movable ego 5

피피에서

여행기/Thailand 2004. 7. 1. 18:43
7/2

선라이즈 게스트하우스의 젊은 아저씨 말을 믿어 무궁한 옵션을 스스로 제약한 것은 전적으로 내 탓이다. 토니 리조트 맞은편에는 아침 포함 400밧 짜리 숙소가 있었다. 선라이즈 직원이 말한, 싸다는 해산물 가게에서 오징어 두 마리, 새우 네 마리, 생선 한 마리, 카우 팟 둘, 맥주 한 병을 먹고 무려 900밧을 냈다. 사실 직원이 말 못한 사실도 더 있었는데 푸켓에 가면 먹을만한 음식이 솜찟 국수라는 것. 그가 일러준 무에 타이 경기장은 옛날에 사라졌고 한국 식당 주인에게 물어서 찾아간 무에타이 경기장도 역시 사라진 상태였다. 타이거 바에서 한 숨 돌릴 때까지 주 도로를 두 번 왕복했는데, 약 한 시간 반 동안 거리를 헤멘 셈이고 그 동안 쏟아지는 비를 피해 이리 쫓기고 저리 쫓겨 다녔다. 아무튼 그 '잘난' 배낭여행자 주제에 그저 좀 귀찮다는 이유로 '관광사 직원' 말을 듣고 있었으니 잘될 일이 없었다.

토니 리조트에 바우처를 주고 방을 잡을 때 아침 식사 티켓을 주지 않아, 왠지 이상해서 방으로 돌아갈 때 프론트에 아침을 언제 먹을 수 있냐고 물었더니 그제서야 티켓을 슬며시 준다. 피곤에 지쳐 숙소로 돌아와 맥주 한 잔 하고 곧바로 골아 떨어졌다. 밤 열시쯤, 빠통 비치의 끝내주는 나이트라이프는 완전 무시한 채 잠이 든 것이다. 황가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 보였고 사실 별로 가고 싶지도 않았다. 봉쑈, 게이바, 사이몬 쑈, 이런 것들은 이제 졸업한 것이다. 선라이즈 직원 말에 따르면(그는 누가 들을까봐 목소리를 낮췄다) 아가씨는 1500밧이란다. 어? 방콕은 2000밧인데? 글쎄다. 예전에 왔을 때도 빠통 비치에 괜찮은 계집은 통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방콕의 나나 플라자가 나은 것 같다. 콧구멍이 돼지처럼 벌렁 제껴지고 바싹 마르고 새까맣고 조그만 남부 아가씨들보다는 방콕 북부를 비롯한 태국 전역에서 제발로 온 예쁜 아가씨들이 많으니까. 북부 유럽 놈들은 바통의 그런 아가씨들에 환장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네들의 미적 기준은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저렇게 못생긴 여자를 옆에 끼고 가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

방안의 알람 시계는 고장난 상태였고 두 번이나 부탁했던 모닝콜은 울리지 않았다. 픽업 봉고가 온다는 바로 그 시각이라 허겁지겁 짐을 꾸렸다. 기껏 얻어온 티켓으로 아침을 챙겨먹기는 커녕, 세수도 하지 못하고 봉고에 올랐으니 그 시각이 7시 30분. 봉고는 5분 동안 지체했다. 그 와중에도 리조트 직원들은 방 키를 들고 냉장고에서 뭐 먹고 계산을 덜 한 것이 있나 뒤지러 방으로 올라갔다. 바쁘다 바뻐.

봉고 안에는 한국인 부부 둘과 중국인 부부가 타고 있었다. 한 팀은 푸켓에 온 적이 있거나 어디서 얻은 정보(선라이즈 게스트하우스가 아닐까?)를 다른 부부에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스노클링 투어 하면 '정가'가 600밧이니까 알아서 잘 깎아보라고 정성어린 충고를 해 준다. 나도 한 마디 할까 하다가 괜히 친한 척 할까봐, 잘 알지도 못하는 피피섬에 관해 이것 저것 물을까봐 관뒀다; 스노클링 투어는 정가가 450밧이고 점심, 물, 과일 포함이고, 큰 배로 가는 편이 작은 배로 가서 작열하는 햇살 아래 고생하는 것보다 낫다 라고.

파도가 거칠어서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갑자기 비가 쏟아져 내리기도 했다. 꽤 많은 사람들이 배멀미로 고생하거나 토할 것만 같은 상황을 꾹 참고 버티고 있었다. 의외로 거친 파도다. 안내 방송이 나왔다. 파도가 높아 피피 레는 갈 수 없다고 한다. 거친 파도 위에 먹구름이 삽시간에 드리우고 폭우가 쏟아졌다.

돌아가는 길의 파도는 조류를 거슬러 가기 때문에 더 거칠텐데 사람들이 견딜 수 있을까? 황가에게 크라비로 가자고 말했지만 그도 배멀미 탓에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지 나중에... 라고 말한다.


피피 섬의 톤사이 만에 이르자 파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잠해졌다.


이 고깃배들이 왜 여기있나 싶어 의아했다. 나중에야 이유를 알았다.

피피섬에 다다르자 마자 황가를 scv처럼 섬 이곳저곳으로 보내 숙소값을 알아보라고 하고 나는 세븐 일레븐 옆에 앉아 삐끼들과 노가리를 깠다. 황가가 가이드북에서 찝은 숙소는 짚시2 게스트 하우스였다. 싸긴 싼데 벌레가 우글거릴 것 같고 내부가 어두울 것만 같다. 손톱깍기를 꺼내 발톱을 깎으면서 숙소 가격을 흥정했다. 어찌된 일인지 황가는 한 시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적어도 숙소 열곳은 둘러 보라고 했더니 정말 그러나 보다. 한가하게 앉아 있다가 온수가 나오고 냉장고가 있는 안다만 리조트를 300에 합의했고 그 정도면 적당하다 싶었는데 황가는 여전히 안 왔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돌아온 SCV는 섬을 한 바퀴 돌다가 길을 잃고 헤멨단다. 어쨌거나 짐을 픽업해서 핫 야오의 숙소로 향했다. 숙소가 그럴듯 했다. 아니 이런 숙소를 300밧에 얻어 내심 뛸듯이 기뻤다. 황가를 괜히 고생시키지 말고 그냥 앉아 있다가 가격을 물어보고 올껄 그랬구나 싶다. 난 정말 나쁜 놈인 것 같다.


창문에 방충망이 없다. 모기가 없다는 증거일까?


숙소에서 해변까지 걸어서 15초 가량 걸렸다. 경험한 가장 해변이 가까웠던 숙소는 97년 꼬 따오에서 잡았던 이름모를 게스트 하우스였는데 바로 앞이 바다였다. 그후 그런 숙소는 다시 보지 못했다.

식당을 찾아 다녔다. 내 기억에 피피호텔 뒷편에 로칼리 식당이 있다. 찾다 지칠 무렵 나타났다. 어제 900밧 씩이나 주고도 한심한 식사를 한 탓에 다운시프트 웰빙 트래블 한답시고 스마트 애스인 척 하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120밧에 카우 팟 꿈, 카우 팟 까이 각각 한 접시, 팟씨우 한 접시를 먹었다. 새우가 매우 싱싱했다. 섬이라 물가가 비싸다는 것을 고려하면 한 끼 40밧 짜리 식사는 어쩔 수 없는 가격이다. 물론 남 깽 쁠라우(얼음물)는 공짜였다. 푸켓 사람들이 돈에 미쳐 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뭍에 비하면 엄청나게 비싼 과일을 좀 샀다. 황가는 어제 람부탄과 망고, 그리고 뭔가 열대과일을 먹었다. 오늘은 어제 빠통 해변에서 태운 피부가 땡긴다고 해서 엄청나게 비싼 애프터 선 로션과 선 블럭 크림을 샀다.

할 일이 없어 해변에 누워 있다가 비를 맞거나 고양이와 놀다가 비를 맞거나 숙소 의자에 앉아 오는 비를 쳐다 보았다. 황가는 책을 읽다가 자거나 멍하니 앉아 있다가 자빠져 잤다.


지나가던 고양이를 불러 놀았다. '야옹'이라고 말하면 '야옹'이라고 대꾸했다. 애꾸 고양이도 있었는데 그 놈은 눈을 잃은 후 정신 상태가 이상해진 탓인지 '야옹'이라고 말하면 묵묵무답이다.


숙소에 고양이들을 재웠다. 검은 놈은 나이가 어려 어리석다.


해변에 룽기를 깔고 누워 '칼의 노래'를 읽었다.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진 해변에 먹구름이 밀려 왔다. 곧 광기어린 비가 쏟아져 내렸다.

오후 3시가 지나자 썰물 때문에 톤사이 만의 물이 만 바깥쪽 저 멀리로 밀려갔다. 그제서야 해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고깃배들이 왜 그곳에 정박해 있나, 이유를 알았다. 발목까지 찰랑거리는 바닷물을 따라 만 입구까지 걸었다. 해변의 모래가 찰져 발바닥에 달라붙는다. 한 시간쯤 걷다가 조개를 잡는 아가씨들과 노닥거렸다. 옷이 바닷물에 흠뻑 젖었다.

오후 6시까지 책을 마저 다 읽고 저녁 꺼리를 준비하려고 해변에서 일어섰다. 시장통에서 10밧 짜리 밥을 둘 사고 10밧 짜리 반찬을 둘 사고 Took BBQ에서 새우 꼬치와 닭똥집 튀김을 각각 2개씩 90밧에, 내일 스노클링할 때 쓸 10밧 짜리 고기 먹이(빵 찌꺼기)를 제과점에서 사고 세븐 일레븐에서 50밧 짜리 창 맥주와 85밧 짜리 메콩 위스키를 샀다. 뭘 사건 비싸다는 느낌이다. 심지어 냉장고에 넣어둔 코코넛을 20밧에 팔았다. 섬 여기 저기 그저 매달린 채 할 일 없이 익어가는 그것들이 이제는 돈을 받고 판매되는 상품이 된 것이다. 워낙 자연적인 수순인지라 안타깝지 않았다. '칼의 노래'를 빌어서 표현하면, (나는 자본주의의) 그 공허함을 견딜 수 없다.

프론트에 부탁해서 숟가락을 얻었다. 왠지 장기여행자스러운 이런 궁상이 황가에게 미안스러웠다. 하지만 어제 식으로 돈을 펑펑 쓰게 되면 일주일에 이삼십만원은 우습게 깨질 것이다. 웰빙 여행의 공허함을 견딜 수 없다.

밥은 몹시 맛있었다. 비단 20밧에 한끼를 해결했다는 담백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원한 코코넛 수액을 반쯤 먹어 없애고 그 자리에 메콩을 반쯤 부었다. 옛날에 고씨가 그렇게 만들어서 참 희안한 칵테일이다 싶었는데, 정말 그렇게 마시는 놈들이 있었다. 해적들은 럼을 코코넛과 섞어 마셨다. 수상쩍은 맛 때문에 다 비우지는 못했다. 그래도 알딸딸했다. 해변에 누워 있다보니 밀물이 밀려와 발가락을 간지럽혔다.


고양이들이 식사를 함께 했다. 메콩 코코넛 칵테일을 빨대로 빨아 먹었더니 몹시 알딸딸했다.

이 소상한 일지는 이순신이 난중일지를 적던 그 시절의 정밀함에 필적했다. 그러나 내가 적는 이 한푼 어치도 안 되는 보잘것 없는 사실들의 기록은, 베어버릴 적도, 수사의 공허함도, 죽음을 향해 진군하는 삶의 덤덤한 묘사하고도 하등 관계되지 않았다. 김훈의 '칼의 노래', 그의 문장 스타일을 하나하나씩 깨우쳐 갈수록, 그의 글에서 푹력에 버금가는 상상력을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것도 함께 깨우쳐 갔다. 그의 글에 상을 준 심사위원들은 그의 글을 젊다고 표현했다. 그렇게나 잘 만든 음식에서 나는 지랄스러운 청춘을 느끼지 못했다.

밥 먹고 해변에서 밀물이 발바닥을 희롱할 때까지 누워 궁상을 떨었다. 시간의 느림, 정지를 가끔씩 체험했는데 이번에도 그것이 보였다. 신체와 마음의 시간이 느려지면 사물의 상대적인 속도가 빨라지는데, 그럴 때면 달의 움직임이 보였다. 달이 움직인다. 지금쯤 꼬 팡안에서는 LSD를 빨면서 미쳐 돌아가지 않을까? 지금쯤 치앙마이 트래킹의 한 지점에 머문 여행자들을 아편으로 꼬드기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달이 달 같지 않고 바다가 바다같지 않고 해변이 해변같지 않은 무의미한 사진.

섬을 한 바퀴 돌았다. 돌아오니 열시가 넘었다. 열시 반부터 불쑈를 숙소 바로 앞의 히피 바에서 한다던데 별로 구경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봉 양쪽에 불을 붙이고 빙글빙글 돌리는 묘기인데 그런 걸 봐서 뭘 하나, 지겹기만 하지. 바에 들러 술을 마시려다가 황가를 내버려두고 가는 것도 왠지 꺼림직스러워 관뒀다. 바와 몇몇 가게를 제외하고 섬의 대부분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참, 평화로운 하루였다. 이 맛에 섬에 들어오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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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비닐 봉투에 담은 쥬스를 들고 입가에 Krong Tip을 물고 카오산 거리를 돌아다니던 것만큼은 바뀌지 않았다. 다른 많은 것들은 바뀌었다.

황가는 어디로 가야할 지 갈팡질팡 했다. 처음에는 라오스 일주를 계획했으나 시간이 없어 포기, 그 다음에는 북부 트레킹과 남부 섬 일정을 계획했지만 편히 쉴 곳을 간절히 원하는 직장인에게는 맞지 않는 듯 했다. 그래서 푸켓을 거쳐 꼬 피피에 들러 며칠 푸욱 쉬다 오는 일정으로 다시 잡았다. 나야 뭐 아무데나 가도 상관없다. 여기가 거기같고 저기가 여기 같았다. 아무데나 가서 아무렇게나 돈을 쓰다 보면 날짜란 흘러가게 마련 아니었던가.

비행기를 탈 때 짐 무게를 달아보니 5kg이 나왔다. 배낭 무게만 해도 1-2kg은 나갈텐데,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싶었다. 티켓은 타이항공 것이지만 아시아나 부스 옆에서 출입국 신고서를 레이저 프린터로 깔끔하게 출력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기내식으로 태국음식이 나왔고 간만에 먹은 탓인지 먹자 마자 곧바로 화장실로 갔다. 태국의 첫 맛은 늘 설사였다. 태국 음식에 사용되는 향신료 때문이 아닐까 싶다.

28만원짜리 항공권은 97년도에나 나올법한 가격인데다 방학이 겹쳐 기내에는 외국인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입국서류는 말 그대로 20초도 안되 다 채워 넣었다. 지루한 비행 후 돈 무앙 공항에 도착하니 새벽 한 시. 서둘러 입국 수속을 마쳤다. 이력이 생긴 탓인지 저절로, 퍼스트클래스보다 늦게 나오고도 퍼스트 클래스 보다 일찍 나왔다. ATM에서 카드로 3000밧을 찾았다. 이번 여행에는 현금(달라)를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다.

공항 오른쪽으로 주욱 가서 5밧 짜리 59번 버스를 탔다.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엄청나게 많은 한국인들 중 59번 버스를 타고 카오산으로 가는 작자들은 나와 황가, 이름모를 한국인 한 명 뿐이었다. 혹시 그들은 그 버스가 24시간 운행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나저나 그들이 한결같이 들고 다니는 '헬로 태국' 분홍색 책은 2년 전의 것이고 정보 대부분이 out of date된 것들이다. 인세 문제로 저자가 더 이상 책을 업데이트 하지 않는 것 같다. 사실이라면 한국 출판사는 변함없이 한심해 보였다.

버스는 후덥지근한 공기를 가르며 광포하게 한 시간을 달려 민주 기념탑, 복권청 맞은편에서 내렸다. 카오산으로 걸어갔다. 카오산 거리는 2년 새에 많이 바뀌었다. 마치... 바뀐 인사동 같았다.

숙소 찾기를 황가에게 맡겼다. 홍익여행사는 자리를 옮겼고 만남의 광장도 자리를 옮겼다. 사원 뒤로 돌아 홍익인간 골목으로 들어가 peachy guest house에서 직원을 깨워 160밧 짜리 팬 더블룸을 잡으니 새벽 2시 10분. 그나마 그 동네에서 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마땅히 술 한 잔 할 곳이 없어 닭꼬치 셋과 맥주 두 병을 사들고 숙소로 다시 돌아와 샤워하고 마셨다. 눈을 붙일 때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30분이다.


Peachy Guesthouse. 팬이 잘 안돌았지만 자는 중에는 그리 덥지 않았다.


6/30

몇 시간 자지도 못한 채 뒤척이다가, 아침에 일어나 항공기 날짜를 바꾸러 홍익 여행사에 들렀다. 홍익여행사에는 한국인들이 바글거렸다. 저 줄을 기다리려니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차라리 내가 직접 타이항공에 전화를 걸어 항공권 일자를 바꾸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타이항공에서 전화를 받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TAT에 들러 지도를 얻고 타이항공까지 걸어갔다. 날씨가 후덥지근하다.

홍익여행사에서 이전에 이집트 다합에서 만난 적이 있는 한국인 아가씨를 만났다. 그녀는 최근에 버스에서 소매치기를 당할 뻔했고 경찰서에서 몇 시간을 보냈으며 태국 방송에도 나왔다고 한다. 여전히 사건사고를 몰고 다녔다. 만나고 다시 만나고 또 만나고 카오산 같은 곳에서 인사를 하게 되는 것이 여행자들의 운명 같은 것일까? 아무래도 비슷한 고생을 한 동병상련의 감정 탓일께다. 다른 한국인들과는 사실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나 욕을 먹던 만남의 광장이 없어진 탓에 사람 만나기는 더더욱 힘들어졌다. 식당을 하고 있는 홍익인간에 앉아 만나는 사람들에게 정보를 물어보며 죽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영업방해다. 그래서 그곳에는 가고 싶지 않다. 홍익인간 역시 한국인이 적었을 당시에는 재밌는 곳이었을 것이다. 만남의 광장 사장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나 들어와 다다미방에 누워 만화책을 읽고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었던 것을 참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기 뛰는 여행자들이 잘난척하며 영웅담? 고생담?을 늘어놓으며 여자애들에게 껄떡대는 모습이나 노련한 경험?으로 그들에게 약간의 은혜를 베풀고 날로 먹으려는 수작질을 보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닐진대, 만남의 광장 사장만이 유달리 자기 게스트하우스를 찾은 예쁜 아가씨들에게 껄떡댄다고 볼 수도 없었고 여행 나와 제대로 마음 단속 하지 못하는 여자애들에게 똑같은 책임전가를 한다는 것을 불공평하다고 여기는 것 마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쨌던 구설수는 참 무서운 것이다. 수년 전 악당처럼 생긴 만남의 광장 사장이 참담한 표정으로 내게 묻던 일이 생각났다. 여기 있는 컴퓨터 전부가 바이러스 먹어서 인터넷은 못해. 누가 의도적으로 그러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없다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30번 버스를 타고 콘송 사이따이(남부터미널; 이름을 잊은 줄 알았는데 용케 기억하고 있었다)에 들러 푸켓행 VIP 24석 버스를 755밧 주고 예약했다. 이렇게 비싼 버스는 처음 타 본다. 예전에 푸켓에 갈 때는, 아니 태국의 어디를 가던 창문을 열고 다니며 온갖 지점에서 서는 일반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래서 세수를 하면서 코를 풀면 콧구멍에서 검정색 땟국물이 나왔다. 일반 버스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타는 버스라서 여행자들이 잘 타지 않았는데 뒷자석에 대자로 누워 잠자기 좋았다. 가끔은 탑승한 현지인들이 위스키를 권해 주기도 했고 야심한 밤에 기어 올라와 흔들어 깨우는 잡상인들에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나이가 드니 그런 짓은 다시 못 하겠다.

다시 511번 버스를 타고 시내 중심가로 이동. 수쿰윗의 반 카니타에 가서 태국 궁중식을 먹어보려 했지만 오후 두 시가 넘어 포기했다. 가게 문을 닫았을 것이다. 대신 월텟의 MK restaurant에서 오랫만에 수끼를 먹었다.


World Trade Center는 World Plaza로 이름을 바꾸었고 그 맞은편에 Gaysorn 백화점이 공사를 마치고 새로 개장했다. 센과 이세탄 백화점 앞에는 밤이면 밴드 연주를 하며 맥주와 식사를 즐길 수 있는 노천식당이 생겼다. 지나가는 태국인 중 아무도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고 그들은 2년 전에 볼 때보다 얼굴 표정이 굳어 있었다. 급속한 문명화의 부작용일께다. :)

카오산으로 돌아와 tanning oil과 mosquito repelant를 구입하고 한 시간쯤 인터넷을 했다. 홍익 여행사에 맡긴 짐을 찾아 남부 터미널에 가서 버스에 올랐다. 난생 처음으로 태국에서 VIP 버스를 타 본다. 상당히 넓은 좌석이고 항공기보다 편한 리클라이닝 시트다. 들어가자 마자 빵 세트와 우유, 물 따위를 나눠주었다.


남부터미널로 가는 도중 시내 버스 안에서. 왼쪽의 서 있는 작자는 차장. 버스에 차장과 운전수 체계로 운영하는 것이 운전수 혼자 돈 받고 운전도 하는 한국식 시스템보다 나아 보인다. 비록 비용은 더 들겠지만 운전수는 운전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새벽 한 시쯤 버스가 멎고 VIP 전용 식당에서 간단한 식사를 했다. 감격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VIP 버스구나 싶었다. 버스에서는 비디오로 Torque를 틀어주었다. 뒤척이면서 자다가 깨보니 푸켓에 도착했다. 7:30pm 출발해서 6:30am 도착.

7/1

어젯밤 인터넷으로 뒤져 알아낸 선라이즈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황가는 까말라 비치에 가길 원했고 인터넷을 뒤졌지만 마땅한 정보가 없어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면서 물어볼 생각이었다. 방은 3일치 예약이 꽉 찼다. 이것저것 물어보니 게스트하우스의 점원으로 보이는 젊은이도 배낭여행자에게 도움이 될만한 저렴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까말라 비치에 fantasea가 있다는 것 정도? 빠통 해변의 지도 위에 갈만한 곳을 상당히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그리고 푸켓에는 볼꺼리가 없어 비치에 숙소를 잡는 것이 좋다고 한다. 글쎄다. 볼 것이 없는 것은 둘째치고 수년 전에 푸켓타운에 묵을 때는 150밧에 혼자서 샤워가 달린 더블룸을 잡았다. 아마 그때 숙소에서 베트남 상이용사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던 것 같다. 숙소를 푸켓타운에 잡아두면 그곳을 기지삼아 여기 저기 돌아다니기 좋다. 비수기임에도 불구하고 비치에서 아무리 싼 숙소라도 400-500밧 이상이 나온다. 그가 권해준 토니 리조트는 게스트하우스가 아니었고 무려 1100밧이나 했다. 황가의 의향을 물으니 서슴없이 그곳에 묵잔다. 직원이 바우쳐를 뽑아올 동안 이번에도 역시 관광이 되는구나 탄식했다. 푸켓타운에 볼꺼리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푸켓타운의 시장이나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중국 화교 및 이슬람의 영향, 씨 짚시들, 거기에 포르투갈 양식의 건물 등등을 나름대로 흥미롭게 관찰할 수도 있을텐데... 싸게하려면 얼마든지 싸게 할 수도... 모르겠다.

선라이즈 사장님이 우리를 국수집 까지 태워 주셨다. 25밧 짜리 바미 남을 시켜 먹었다. 상당히 훌륭한 맛이다. 라농 거리에서 빠통 비치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옆에 앉아있던 할마시가 친절하게도 버스는 두당 15밧이라고 가르쳐준다. 썽태우는 20밧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시내에서 중국인들처럼 중국식 아침을 먹을 수도 있고 딤섬도 먹을 수 있다는 것, 시장통에서 밥과 반찬을 사먹던, 이런저런 기억들이 떠올랐다.

버스가 빠통 비치에 접근해 가는 동안 집채만한 파도가 해변으로 밀려오는 것을 보고 속으로 '좆됐다' 라고 중얼거렸다. 피부를 올리브 빛으로 태우려는 열망으로 이곳에 온 황가의 얼굴은 흙빛이었다. 숙소는 상당히 좋아보였다. 짐을 풀고 샤워하고 빨래를 하니 피곤이 몰려왔다.



간단히 짐을 챙겨 해변에 나갔다. 의자 하나 빌리는데 50밧, 태닝 오일을 몸에 바르고 누웠다. 하늘이 수시로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 가끔 비가 오기도 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피부를 태웠다. 갑자기 비가 와서 해변을 떠났다. 첫번째 ATM에서 돈을 뽑는데 실패, 그 옆의 것에서는 다행히 돈을 뽑을 수 있었다. 빗줄기가 굵어져 숙소로 황급히 대피했다. 비는 한 시간 내내 미친듯이 내리다가 말끔하게 개었다. 지구 온난화에 발맞춰 태국의 우기도 점점 지랄스러워 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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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여행 #8

여행기/Taiwan 2004. 2. 27. 17:14
한식당(북경)에서 짬짜면(짬뽕과 짜장면)과 우동을 먹었다. 김치와 깍두기, 단무지와 양파 등이 밑반찬으로 나와 그럴듯 했는데 세 음식 모두 뭔가 맛이 좀... 어쨌든 듬뿍 들어 있는 야채와 '정상적인' 면발로 배를 채웠다.

간혹 한국인 남자가 필리핀인 여자의 팔짱을 끼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http://phillove.co.kr에 가면 필리핀의 나이트라이프에 관한 많은 양의 정보를 구할 수 있는데, 아쉽게도, 바에 한 번도 들어가보지 못했다. 아내가 옆에 있으니까...

아침 일찍 일어났다. 식비는 100페소 이상씩 펑펑 쓰면서도 마지막까지 4페소 짜리 지프니를 타고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네 번 씩이나 패스포트를 꺼내 검사 받고 줄을 서서 짐 검사를 두 번씩이나 했다. 시간이 많이 걸려 비행기 떠날 시간이 다 되어 탑승 승객을 찾는 final call 방송을 들으면서 비행기에 탔다. 그런 와중에도 짐 검사를 한 줄로 하더라. 비효율. 오랫만에 보잉의 7xx 시리즈가 아닌 에어버스 비행기를 타본다.

Manila -- air 2hrs --> Taipei -- bus 1hrs --> Hsinjoo -- train 15min --> Hsinfong

타이뻬이에서 42km 떨어진 창카이섹 국제 공항에 도착. 어리벙벙하다. 중국 여행의 경험이 생각나 왠지 숨이 막혀 왔다. 사전 지식 없이 공항에 올 때까지 가이드북도 안 읽었으니까. 공항->시내, 시내에서의 숙소, 3일 간의 일정을 잡고 있는 동안 아내가 유 신부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장난 전화기를 붙들고 헤메고 있었다. 간신히 통화에 성공, 하지만 어떻게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대만인의 도움으로 공항 버스를 탔다. 15분쯤 달렸을까? 갑자기 승객들이 내렸다. 어리벙벙하게 따라 내렸다. 갈아타야 한단다. 가는 길 내내 즐비하게 늘어선 공장을 보았다. 신쭈우(新竹)에 내렸다. gps로 포인트를 찍어 보았다. 여차하면 타이뻬이로 돌아가야 하니까. 신쭈 근처에는 컴퓨터 생산 공장이 있다. 사이언스 파크도 눈에 띄었다.

내리고 나자 다시 황당. 가이드북에 나오지 않는 도시. 물어물어 택시를 타고 간만에 들어보는 그 정겹고 이가 갈리는 이름, 후어처짠(기차역)으로 향했다. 중국에서 한 달 남짓 있는 동안 후어처짠을 4성에 맞춰 발음하느라 고생했다. 발음이 안 좋아 대다수 중국인들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신쭈에서 신퐁(新豊) 행 전철을 잡으면서 다시 헤멨다. 2시간 반 동안 정신없이 이동한 끝에 천주당(성당)에 도착했다. 천주당 입구에 김대건 신부가 갓 쓰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유 신부님이 반갑게 맞아 주셨다. 사제관에서 머물도록 허락해 주셨다.

마치 도교 사원 처럼 생긴 중국식 천주교당에서 미사에 참가했다.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며, 유 신부님에게는 실례된 말씀이지만, 마치 사이비 종교의 제례를 닮은 다소 희안한 미사를 구경했다. 수녀 중에 젊은 사람이 눈에 띄지 않았다.

유신부님이 자신의 월급의 1/5에 해당하는 돈을 경비에 보타 쓰라며 불쑥 건네 주신다. 아내는 안 받으려고 한사코 사양 했지만 난 누가 뭔가를 주면 거절하지 않는 타입이다. 평소에도 주는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편이다.

대만에서의 첫 식사는 샤부샤부 였다. 대만식 김치를 넣었다는데 얼추 김치찌게 비슷한 맛이 났다. 듣자하니, 신쭈와 신퐁에는 한국에서 반도체 도면을 빼돌려(산업 스파이) 그것을 대만에 팔아버린 한국인 기술자들이 모여 산다고 하더라. 밤에는 파푸아 뉴기니에서 오신 이 신부님과 합석해 술 먹고 노래를 불렀다. 이 신부님이 사람을 20여명이나 죽인 살인마에게 영세를 줬던 어처구니 없는 사연을 얘기해 주셨다. 신부에도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수용 신부와 수출용 신부. 아무래도 수출용 신부님들이 훨씬 재밌다. 하하하. 58이라 불리는 끝내주는 고량주와 여러 종류의 맥주를 섞어 마셨다. 새벽 5시쯤 파장.


대만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샤브샤브 가게. 이곳은 김칫국물이 육수였다!

-*-

아내가 아홉시에 깨웠다. 어젯밤 술을 섞어 마셔 술이 안 깬다. 얼른 씻고 나왔다. 아랫배가 찌부두둥해 가게에서 우육면 비슷한 것을 시켜 먹었다. 머리가 아파 전철에서 줄곳 눈을 감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물을 마시는 건데...

기룽까지 2 시간 동안 전철을 타고 갔다. 그동안 아까 먹은 느끼한 국수 때문에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꾹 참고 있었다. 기룽에 도착해 화장실에서 먹은 것을 토하니 속이 시원하다. 두통약(아세트아미노펜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브루펜인 듯. 아내의 말로는 아세트아미노펜을 주성분으로 하는 타이레놀보다 브루펜 계열이 부작용이 적고 좋단다)을 사다 먹느라 1시간을 소비했다. 좀 진정이 되는가 싶더니만, 이번에는 아내가 보리 음료를 마신 후 피부가 견딜 수 없이 가렵단다. 다시 약국을 찾아 돌아다니며 안티 히스타민 약을 샀다. 늘상 보아오던 zirtec(하이드로클로라이드)이었다. 우리 둘은 약 먹은 병아리처럼 골골 대다가 이대로는 도저히 버스 타고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비정성시를 찍은 골목길이 있는 그 도시에 가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정을 포기하고 근처 중산 공원으로 향했다. 약기운이 퍼지기 시작한 아내는 중산공원 꼭대기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진통제 때문에 나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아, 그나마 3일 밖에 안되는 일정 중 하루를 이동하고 술 마시느라 보내고 그 다음날은 전날 숙취와 희안한 알러지 때문에 날려보내는구나 싶었다.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꾸며놓은 절에 들러 시주하고 사이좋게 기대 졸다가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은 것이 없다. 벌써 오후 3시다. 거리에서 음식을 사먹으며 기운을 좀 차렸다.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아내가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지룽의 명물은 구경도 해 보지 못하고 터미널로 돌아왔다.

터미널에서 신퐁행 버스가 눈에 띄었다.별 생각없이 차표를 구입해서 시내버스(?)에 올랐다. 2 시간 거리에 있는 도시로 가는 버스가 시내버스라는 점이 이상하긴 했지만 대만이 워낙 작은 동네고, 금액이 얼추 비슷하게 맞아 떨어지고, 우리 부부는 맛이 간 상태였다.

버스에서 졸다가 깨어보니 보여서는 안 될 해안선이 보였다. 머리 속의 자석은 버스가 동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지시했다. 우리는 서쪽으로 가야 한다. 어쨌거나 바다가 보이니 기분이 좋았다. 졸았다. 깨어보니 사람들이 모두 내리고 버스가 멎은 채 우리만 남았다. 운전기사 아저씨와 손짓 발짓으로 얘기해 보니 우리는 신쭈 근방의 신퐁에 온 것이 아니라 지룽 근교의 신퐁이라는 똑 같은 이름의, 한창 건설이 진행중인 신 도시에 온 것이었다. 얼레벌레 엉뚱한 표를 사고 엉뚱한 버스를 탄 것이다.


여기가 대체 어딜까... 말도 안 통하고... 무작정 버스를 기다리며.

잠이 다 깼다. 정신 차리고 다시 터미널로 돌아왔다. 하루 일정을 망친 것도 모자라서 이런 바보같은 짓을 하다니... 아내는 환불 받아야 한다며 버스 터미널 매표소로 가서 아저씨들한테 따졌다. 일단 한 번 산 표는 환불이 안된다고 말하지만 아내가 우기면 안 되는 일이 왠일인지 잘 되는 경향이 있었다. 240위엔(8400원) 주고 산 표를 시내 버스 두 번 타고 아내의 말에 따르면 '약간 손해를 보면서' 150원(5250원)을 환불 받았다.

배가 고파 이것 저것 사 먹으면서 전철에 올라 또다시 꾸벅꾸벅 졸면서 신퐁에 도착하니 밤 아홉시 무렵이다. 배가 고프던 차에 신부님이 남은 해물탕과 밥을 주셨다. 밥 먹고 잠깐 중국인의 구린 정신 세계에 관해 얘기하다가 잠들었다. 어제, 오늘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 허전하다.

-*-

아침 일찍 일어나 신부님께 작별 인사를 드리고 타이뻬이로 향했다. 오늘은 기필코 일정대로 하자고 다짐했다. 먼저 온천에 들러 온천을 한다, 그리고 나서 장제스가 중국 본토에서 날라온 70만점의 유물이 있다는 고궁 박물관 National Palace Museum에서 공들여 중국 문화의 진수를 맛본다. 그리고 쇼핑하고 공항으로 향한다.

비교적 쉽게 타이뻬이 근교의 온천을 찾아갔다. 간판이 모두 한문 일색이라는 점을 빼면 타이뻬이가 마치 서울 같아 보였다. 10:20분 도착했는데 온천이 잠시 문을 닫았다가 12:00pm부터 다시 문을 연단다. 1시간 반을 공중에 날리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밥을 먹고 근처를 떠돌며 시간을 보내다가 노천탕이 문을 열자 마자 들어갔다. 유황 냄새가 코끝을 징하게 달군다. 필리핀에서 검게 태운 살 껍질이 사정없이 벗겨졌다. 온천이 뜨거워 1분 이상은 제대로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어 정말 시원하다.



계획대로 고궁 박물관으로 향했다. 시간이 별로 없어 버스 정류장 앞에서 택시를 잡아 탔다. 오디오 가이드를 구할 수 없어(기계를 이미 모두 대여 중) 아쉽지만 별다른 설명을 들어 보지 못한 채 유물을 관람해야 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예전에 책에서 본 중국 최고의 보물들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면서 1,2,3층을 뒤져 보았다. 문가에 놓인 어느 팜플렛을 뒤적이다가 전시물 중 아주 귀한 것들은(특히 서화류) 10월에서 11월 사이에만 공개한다는 것을 알았다.

적어도 3시간 이상은 구경해야만 제대로 볼 수 있다던 고궁 박물관 관람은 2시간이 채 안 되어 끝났다. 딱히 볼만한 것들이 없었다. 전시 상태가 훌륭하지만 중국의 박물관에서 보았던 것들 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몇몇 물품들은 최고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전에 봤던 그 많은 보물들은 다 어디 쳐박혀 있는건가. 2004 taiwan touch your heart라면서 타이완이 관광진흥책을 펴고 있었다. 가슴을 그렇게 건드려대니 가슴이 아플 수 밖에. 고생해서 왔는데 화가 치밀고 입가에 욕설이 슬며시 맴돌았다. 이런 잡동사니를 보려고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3일 내내 닭짓 하다가 고작 이걸 보려고... 뭐 그런 것이었다.


찍으면 안되는데, 찍었다. 서화는 찍지 말란다.

아내가 급하게 서둘러 타이뻬이 시내로 돌아오자 마자 공항버스를 타고 공항에 도착했다. 가이드북에는 안 막힐 때 1시간 가량 걸린다고 적혀 있었지만 실제로는 40분 가량 걸렸다. 볼 때마다 희안한 생각이 드는 가이드북이었다. 이 책은 배낭여행자를 위한 책이 아니다. 대부분 중고급 호텔을 숙소로 소개해 놓았고 관광 포인트의 지도가 부실했다. 교통편은 그걸 정보라고 적어놓은 것인지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만한 정보량을 축적한 한국인이 쓴 가이드북이란 점이 존경스러워 저자 부분을 살펴 보았다. 어... 그런데, 이거 일본 가이드 북 번역하고 어니홍이란 사람이 감수한 것이잖아? 살 때 미처 보지 못했다. 악, 하고 말았다.

면세점에서 이것저것 선물을 샀다. 필리핀에서도 사고 대만에서도 샀다. 술만 다섯 병을 샀다. 이것 저것 합치면 대략 200$ 가량이 선물 값으로 나간 것 같다. 950$을 환전해 들고다니면서 그중 720$을 썼다. 선물값 200$을 빼면 520$ 가량을 순수 경비로 사용한 셈이고 그중 200$이 필리핀에서 비행기를 2번 타는데 든 비용이다. 그럼 대략 320$ 가량을 10일 동안 쓴 셈이 되나? 계산을 제대로 안 해 봐서 정확하지 않지만, 큰 비용을 들이지는 않았다.

열흘 동안 비행기를 여섯 번 탔다. 잘한 짓은 아니다.

일정이 짧아 제대로 구경조차 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아 안타깝다. 여행 준비를 소홀히 한 것은 그 동안의 짬밥 때문에 생긴 자만심 탓이리라. 여행 기간이 짧으면 정보를 더 많이 수집하고 여행 계획을 정교하게 짜야 한다.

타이완에서 세계 최고의 철도 코스 중에 하나인 아리산 철도를 못 타본 것이나 요리 한 접시 제대로 먹어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대만은 여행하기 참 편한 나라다. 중국처럼 영어가 전혀 안 통하는 것도 아니고 인프라가 잘 발달되어 있어 별 고생없이 여행할 수 있는 나라인 것 같다. 언제 한 번 다시 가 보고 싶다.

9:30분쯤 한국에 도착. 인천 국제 공항에 비행기 타고 돌아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착륙하고 나서 한참 동안 비행기를 자동차처럼 굴려 게이트로 향하는 과정이 몹시 지루하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 앞으로 걸어가다가 눈보라를 만났다. 황당했다. 오뎅국을 만들어 소주를 한 병 마시고 잤다. 소주가 쓰다.

대만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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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acay -- boat 15min --> Caticlan -- air 1hrs --> Manila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북 루손, 마닐라 북부의 Angeles(앙헬레스)는 미국 주둔 시대의 대규모 공창으로 명성을 날렸다. 여전하다. 북 루손의 더 북쪽으로 세계의 여덟 번째 불가사의라 불리우는 rice terrace로 유명한 Banaue가 있다. 북 루손과 남 루손은 육로로 연결된다. South Luson에는 원뿔형의 mayon 화산이 있다. 남 루손 끝단에서 서쪽으로 Visayas 주의 섬들이 늘어서 있는데 Cebu 섬의 세부는 태국의 푸켓에 버금가는 필리핀의 주요 관광지다. 세부섬 옆의 Bohol 섬에는 괴상하게 생긴 Chocolate Hills가 있다. 세부섬 남쪽에 있는 거대한 Mindanao 섬에는 수많은 이슬람이 살고 있고 분쟁이 잦아 관광지로는 부적합하다는 평을 듣는다. 이슬람에 대한 이런 기분나쁜 평가를 무시하면 아무도 안 가는 민다나오 섬이야 말로 가볼만한 곳일지도 모르겠다. 세부섬 북서쪽의 Panay섬 북단 끝에 위치한 Boracay 섬은 한국인들이 우글거리는 세계적인 관광지다. Panay 섬 서쪽으로 Palawan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다던데, 어떤 작자의 말로는 한국의 해상 국립 공원과 태국의 코 피피 섬 부근을 합쳐놓은 듯한 곳이란다. 우리 여행의 첫번째 타겟이었지만 워낙 깡촌이라 카드가 안되고 교통편이 부실해서 안 갔다. 팔라완 섬에서 동쪽으로, 그러니까 파나이 섬 북쪽으로 Mindoro 섬이 있다. Puerto Galera를 중심으로 보라카이에 버금간다는 White beach와 나잇 라이프의 중심지인 Sabang beach가 있는데 마닐라에서 가까워 필리핀에 거주하는 한국인 유학생들, 또는 한국인들이 보라카이의 관광지스러움을 피해 가는 곳이다. 그곳도 가고 싶었지만 시간 때문에 가지 못했다. 그외에도 필리핀에는 알려지지 않은 무인도,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끝내주게 멋있는 개인 소유의 섬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다.

아내나 나는 섬 생활에 별다른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보라카이 섬에서의 며칠은 특히나 지겨웠다. 식사의 가격대 성능비가 형편없고 해변에 나가면 사람들이 우글거렸다. 밤에는 바에서 틀어대는 음악으로 소란 스러웠다. 마침 그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딱한 일이지만 해변에 누워 별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전등빛이 사방을 밝혔다. 일부는 보라카이 섬이 주변 섬들과 가까워 충분한 고립감을 체험하기 힘든 탓도 있었다.

보라카이 섬을 빠져 나왔다. 비행기를 타고 마닐라로 향했다.


전날 asiatravel.com 사이트를 통해 Atrium hotel을 정가의 25%에 예약했는데 컨펌을 받지 못했다.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토요일, 일요일이었다. 아트리움 호텔에서 저렴하게 마닐라만의 전설적인 석양을 볼 수 있다. 전설적인 석양은 마닐라의 고질적인 매연 -- 대기중 부유물질 -- 때문에 생긴 것이다. 아트리움 호텔의 위치가 좋았고 가격대 성능비가 썩 괜찮았다. 아쉽지만, Malate 지구에서 아트리움 호텔보다 더 비싸고 시설은 후진 Adriatico 호텔을 대신 잡았다. 대략 26$ 짜리, 지금까지 잡은 숙소 중 가장 비싼 것이다.

마닐라에 도착하자 마자 호텔 맞은편의 hot pot 식당에 들어갔다. 신선로나 일본의 샤브샤브, 말레이의 hot pot은 재료가 조금 다를 뿐 기원이 같은 음식이다. 한국식 샤브샤브와 신선하고 맛있는 어묵을 넣는 말레이의 핫 폿을 좋아했다. 중국것은 기름기가 너무 많고, 일본 것은 맹숭맹숭했다. 식당 안은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원래 계획은 곤지를 먹으려던 것이지만 식당 분위기를 보니 hot pot을 먹어야만 할 것 같다. 샥스핀으로 만든 딤섬도 주문했다. 그렇게 해서 입이 쩍 벌어지는 800페소 짜리 식사를 했다. 고기를 지나치게 많이 넣어 깔끔하고 담백한 맛은 없었지만 간만에 매운 소스를 만들어 건더기를 찍어 먹으니 땀이 나고 머리가 핑 돌았다.

너무 많이 먹어 움직이기 거북한 아내를 숙소에 남겨두고 거리를 이리저리 헤메다가 리잘 공원과 마닐라 박물관을 찾아갔다. 문을 닫았다. 중국 정원에 앉아 쉬다가 부산에 자주 갔다는 필리핀 아저씨를 만나 한 동안 얘기했다. 밤에 거리에 나다니지 말란다. 필리핀의 밤 거리가 약간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다고 위험하다고 느낄 사람도 아니었다. 한국 여성 여행자들은 여행지에서 만큼은 위험에 대한 자각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어쩌면 동행이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그들이 혼자 낯선 도시의 밤거리를 걸어보기는 한 것일까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내에게 밤거리가 위험하다고 말하면 아내는 필경 날더러 겁쟁이라고 할 것이다 -- 겁쟁이 소리를 들어도 기분 상하지 않을 것이다.

선거 운동 때문에 광장이 시끄러웠다. 피노이들이 '글로리아'라고 부르는 현 대통령(글로리아 아로요일 것이다)을 밀어내고 선거에서 '에디'를 대통령으로 밀잔다. 광장에는 '에디 형제'의 사진이 그려진 노란 티셔츠, 수건, 모자를 입고 쓰고 두르고 다니는 사람들이 우글거렸다. 에디 측에서 공짜로 나눠주는 것인 줄 알고, 평소 에디 만이 필리핀을 구할 애국자라고 생각했기에 한 장 얻으려 했는데 티셔츠 한 장이 100페소란다. 그럼 저 많은 사람들이 자기 돈 내고 티셔츠를 샀단 말인가? 대단하군. 민중 봉기로 부패한 정부를 단죄한 실력 있는 국민들이다. 선거 운동을 축제처럼 재밌게 한다. 부럽다.


브라더 에디의 선거 유세.

Robinson Place의 2층, 3층, 4층 한쪽 wing의 대부분은 음식점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필리핀 사람들은 하루에 식사를 다섯 번 한다고 들었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 임은 알겠지만 건물의 3개 층을 오직 음식점만으로 채워 놓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내는 들짐승 고기를 안 좋아하기 때문에 해물만 애타게 찾아 다녔다. 그 많은 '저렴한' 식당들 앞에서 환희의 탄성을 내지르기도 전에 7일째 질리게 먹은 해물을 또 먹을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아내가 해산물을 잔뜩 넣은 베트남 쌀국수를 그저 그리운 마음에 먹는 동안, 나는 중국식 패스트푸드점인 초우 킹에 들러 그동안 먹고 싶었던 곤지(피노이들은 고또 goto라고 불렀다)를 먹었다. 이름이 King's Gongee. 쌀죽에 잘게 썰은 생강과 파를 넣고 고소하기 짝이 없는 양곱창을 몇 점 넣었다. 별도의 접시에 나온 튀김을 하얀 쌀죽에 얹고 레몬즙을 살짝 뿌려 먹었다. 정말 맛있다. 깔끔하고 담백하다. 감동했다. 중국식 만두도 하나 시켜 먹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살사 소스와 치즈를 잔뜩 바른 나쵸스를 또 먹고 노점에서 샥스핀 딤섬(피노이식으로는 샤오마이)을 한 접시 주문해 먹었다. 마지막으로 차갑고 신선한 두유(라지만 설탕을 넣은 두부 국물)를 한 잔 들이켜 식사를 깨끗이 마무리하려다가 배가 불러서 먹지 못했다. 그렇게 배불리 먹어도 100페소(2$)가 안 되었다. 웰빙 한답시고 음식점에서 500-800 페소씩 주고 먹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보라카이 섬에서 먹은 음식들 때문에 이틀 동안 가벼운 설사를 했다. 보라카이 섬에서 채소, 과일, 육류 할 것 없이 모두 철이 지난 재료를 사용한 것인지 먹고 나서 속이 안 좋았다. 따뜻하고 담백한 곤지가 설사를 한방에 날려 버렸다.

피곤해서 저녁 나절 부터 정신없이 자다가 한밤중에 깨어났다. 목이 말라 음료수라도 사 먹으려고 호텔을 나왔다. 여자들 서넛이 졸졸 붙어 다니며 한국어를 포함해 4개 국어로 사랑 한 번 하자고 중얼거렸다. 심지어 호모도 한 마리 붙어서 호텔까지 따라왔다. 경비원이 막아서지 않았다면(어느 가게에나 경비원이 있었다) 방까지 쫓아올 기세였다.

책을 몇 권 노트북에 들고 갔지만 읽지 않았다. 지금 읽는답시고 노트북에 넣어 둔 것은 유시민의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마빈 해리스의 '작은 인간', 브라이언 버드의 '환자와의 대화', 임휘명의 '머리가 좋아지는 음식물 나빠지는 음식물' 등등. 진도가 참 안 나간다.

2004/2/23

아침부터 마닐라 만에 비가 내렸다. 그 유명한(글로리아 마리스 만큼은 안 유명할 지도 모르겠다) 합창 찻집에서 곤지와 국수로 간단히 요기했다. 항공권을 리컨펌하고(할 필요는 없지만 길 가는 도중에 항공사가 보여서 화장실에 갈 겸 들른 것) Kalesa라 불리우는 마차를 타고 Fort Santiago로 향했다. 가격을 몰라 마부와 적당히 협상하다가 30페소를 줬다. 2km 정도의 짧은 거리였으나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으니 비용 만큼의 효용은 있었다.

산띠아고 성은 스페냐드가 파시그강과 마닐라 만 사이의 전략적 요지에 지은 곳이다. 스페냐드에 저항하던 의사(Physicist면 의사 맞지 않나?)이자 작가인 호세 리잘 Jose Rizal이 처형 당하기 전까지 구금되어 있던 장소였다. 그는 자신의 감방으로부터 걸어서 Intramuros를 지나 Rizal Park의 한 장소에서 처형 당했다. 길이 몹시 길어서 뙤약볕 아래를 걸으며 갖가지 생각이 다 들었을 것이다. 그의 처형은 애국의 거센 태풍을 일으켰다. 피노이들은 그를 Our hero, Sir Rizal 이라고 꼬박꼬박 경칭했다. 어렸을 적에 안중근 '선생'과 윤봉길 '선생'이 리잘과 마찬가지로 의사(doctor)인 줄 알았다.

일본군 점령 당시 산띠아고 요새는 포로 수용소로 쓰였다. 필리핀 애국자들(게릴라들)을 정기적으로 도살하던 장소였다. 총알이 아까워 스시칼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1945년 마닐라 대 공습 당시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많은 수의 포로와 민간인을 죽였다. 미국인의 공습 역시 무고한 민간인을 무수히 죽였고 인트라무로스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퇴각하던 일본군과 미국군의 십자포화로 10만여명에 달하는 필리핀 민간인들이 죽었다. 상당히 지랄같은 경우였다(하지만 마닐라 공습은 한국의 6.25 전란에 비하면 세발의 피였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마닐라 대 공습(raid)이라고 하지 않고 마닐라 전투(battle of Manila)라고 불렀다. 인트라무로스는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었다. 마닐라 시가지에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닐 스티븐슨의 소설에서처럼 나는 gps를 가지고 산띠아고 요새와 인트라무로스를 돌아다녔다. 우산을 쓰고 있었지만 비를 맞았다. 리잘이 사형장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따라 산띠아고 요새를 빠져나와 인트라무로스로 향했다.


호세 리잘이 처형 장소로 향하는 발걸음을 동판으로 땅에 새겨 놓았다. 엄숙한 역사 앞에서 숙연해야 한다. 장난치지 말고.

Manila Metropolitan Cathedral에도 역사가 있었다. 1571년 처음 지어진 후 태풍에 날아가고, 화재로 소실되고, 세 번의 지진에 차례차례 파괴되었다. 1945년 1월 마닐라 대 공습 때도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역사를 머금은 성당은 썰렁하기 그지 없었다. 필리핀 시민들의 신심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저성장, 저개발, 또는 마르코스의 독재로 인해 성당 지을 돈이 부족했던 것 같다.

하여튼 1945년의 마닐라 대 공습(또는 전투) 때문에 마닐라는 볼 것 없는 도시가 되었다. 마닐라는 there is nilad라는 뜻. nilad는 망그로브. 가이드북에 보면 다 나오는데 어떤 친구의 필리핀 여행기에는 마닐라를 색다른 뜻으로 적어 놓았다. 뭐라고 적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LRT를 타고 가다가 EDSA 역에서 MRT로 갈아타고 Ayala 역에서 내려 SM 몰의 기념품 상가에서 기념품을 샀다. 필리핀에서 살만한 기념품은 조개로 만든 것들, 야자 섬유로 만든 전등갓 등의 수공예품과 자연산 진주인데 다른 열대 국가들처럼 손기술이 한국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편인 것 같다. 한국의 자개상감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인 것 같다 -- 적어도 필리핀의 자개 제품 중에 한국것과 경쟁할 만한 것들은 없어 보였다. 조개 제품을 자꾸 사들이면 환경주의자들에게 욕을 먹을 것 같다. 조개제품을 자꾸 사면(수요가 생기면) 바닷 속에서 잘 살고 있던 조개를 자꾸 따서 조개들을 죽인다고 한다. 마치 환경주의자들이 밍크 코트나 여우 코트를 입은 사람을 싫어하듯이, 사람 가죽을 벗겨 책 표지로 써서 일부 몰지각한 장서가들을 기쁘게 하면 증오심에 불타는 환경주의자들의 눈초리를 접하게 될 것이다.

필리핀에서의 마지막 밤. 어메이징 쇼를 보러 갈까... 하다가 남장 여자들이 춤추는 쇼인 것 같고, 20$씩이나 해서 관뒀다. pc방에 들어가 노트북을 쓰게 해 달라고 우겨보고, 맥주 한 병 마셔야겠다.

런닝 바람에 수영복을 입고 쪼리를 질질 끌면서(마치 현지인처럼) 노트북을 들고 pc방에 왔다. -- 이 정도면 마닐라의 밤거리가 얼마나 안전한지 입증한 것 같은데? pc방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것 같다.


나머지 사진들: 필리핀 사진 2, 필리핀 사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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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카이에서 가장 맛있는 피자를 만든다는 소문을 듣고 코코망가스 식당을 찾아갔다. 피자를 제대로 만들긴 하지만 14가지 토핑을 얹어준다던데, 맛이 가고 기름이 질질 흐르는 참치를 포함해 토핑 수가 일곱 가지 밖에 되지 않았다. 아무리 피자가 찌꺼지 음식으로 만드는 것이라지만 다 시들은 피망 따위를 재료로 사용하는 것은 용서가 안된다. 297 페소 짜리 미디엄 사이즈 피자를 거의 혼자서 꾸역꾸역 먹었다. 보라카이 해변 중심에 독일인이 운영하는 steak house라는 집이 유명하다던데 갈 기회는 없을 것 같다.

스테이션 2 피어 근처에 앉아 한국인들이 내리는 모양을 구경하고 있었다. 젊은 필리핀 친구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일랜드 호핑 투어를 5시간 동안 1200 페소에 해줄 수 있다고 한다. 그에게서 한국인 가이드에 관한 얘기를 또 들었다. fun diving 원래 단가가 50$, 라이센스가 있으면 25$ 가량인데 한국인 가이드를 통하면 100$ 이란다. 아웃트리거 보트 1시간 타는데 10$ 받는 것을 두당 20$씩 따로 받는단다. 그 친구가 그런 얘기를 하는 까닭은, 한국인 가이드와 한국인 업소가 그들의 일을 빼앗아 가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정말 그런지 궁금해서 아내가 한국인 다이빙 업소에서 바삐 뛰어 나오는 직원에게 가격을 물어 봤다. fun diving 2시간에 100$란다. 다음은 독일인이 하는, 나이트록스 장비를 제대로 갖춘, 꽤 괜찮은 다이빙 샵에 들어가 물어봤다. 50$를 불렀다. 글쎄다... 태국의 한국인 다이빙 샾은 그런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데... 필리핀에서는 한국인 다이빙 강사를 모셔 오기가 무지 힘든 관계로 단가를 두 배 받아야 하는가 보다. 한국인 관광 가이드나 한국인 다이빙 샵이나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150 페소 주고 트라이시클 타고 Luho 산에 올라갔다. 전망이 끝내준다는 곳인데 생각보다 별로였다. 트라이시클을 타거나 물건을 살 때나, 필리핀 사람들이 기본적인 바가지 이외에 별다른 사기를 안 치고 독한 면이 없어서 대하기가 편했다. 오직 이 동네에서 바가지를 씌우는 사람들은 한국인 업소, 한국인 가이드 뿐인가 보다.


가랑비가 살살 와서 하루종일 빈둥거리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저 그것 밖에 하지 않고 한가하게 시간을 보냈다. 필피피노 컵라면을 먹다가 워낙 맛이 없어서 버리고 시장에서 과일과 채소를 사다가 먹었다. 섬에서 별로 먹을만한 것이 없다. 어젯밤에 부페를 먹을 때는 해산물이 신선하지 않았다. 시장에서 채소나 과일을 사도 신선한 것을 찾아보기가 힘들 뿐더러 가격 마저 비싸다. 이제 그만 섬을 나가고 싶다.

아내는 살이 쪄서인지 사진 찍기를 싫어했다. 그래서 아내가 나온 사진은 지웠다.

보라카이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나이트에도 안 가고, 밤에 바에 앉아 밴드의 음악을 들으며 칵테일 한 잔 기울여 보지도 못했다. 시시하다. 수퍼 가서 맥주나 사 들고 들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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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 여행자 보험을 들지 않았다. 크게 쓸모가 있다기 보다는 값싸게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외국에서는 의료보험이 안되기 때문에 들어두는 것이 바람직했다. 여행중 인터넷으로 들 수도 있지만 저번에 8개월 짜리 여행할 때도 귀찮아서 안 들었다. 동부화재던가? 3개월 짜리가 3만원. 남미 여행 중에는 들었다. 외국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보통 연수 명목으로 보험을 들지 않고 3개월 짜리 여행자 보험을 들고 나중에 재가입하는 식이었다.

어젯밤에 진통제를 먹고 잤다.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피부가 당기고 화끈거려서 저녁 9시 이후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산책이라도 할 요량으로 거리를 걸었는데, 어제 탄 부위에 햇살이 닿으니 욱신욱신 거렸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신혼 부부 중에 새까맣게 탄 피부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 이들은 보지 못했다. 아웃트리거의 오른쪽 날개에 엎어져 낚시줄을 드리우고 바닷속을 뚜러지게 쳐다보고 있었던 30분, 오후 1시 30분에서 2시 사이에 숯불 그릴에 올려놓은 꼬치구이처럼 피부가 익었다.

상당히 비싸 보이는 리젠시 호텔 레스토랑에서 로미와 국수, 달랑 다섯 개 나오는 참치 초밥을 시켜 먹었는데 먹은 양에 비해 터무니 없는 가격(600페소)을 불렀다. 음식 먹을 때마다 일로일로와 자꾸 비교가 된다.

난 필리피노의 영어를 잘 알아 듣는 편인데 아내는 잘 알아듣질 못했다. 발음... 때문이라고 하지만 c,t를 강하게 발음하고, 엑센트가 거의 없이 줄줄 이어 붙어 가지만 그네들 발음에 딱히 문제는 없다고 본다. 가게에서 가끔 그들은 스패니시 숫자를 사용했다. 아이스크림을 사먹을 때 '뜨레인따' 라고 말했다. 마치 라틴 아메리카의 어떤 나라를 여행하는 것처럼 반자동적으로 30페소를 꺼냈다.

미용실 아가씨는 날더러 가이드냐고 묻는다.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은 보통 한국인 관광객을 이끌고 오는 가이드라고 한다. 가이드들이 단지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시장에 데리고 온 한국인 관광객의 등을 쳐먹고 산다고 말했다. 옆 아줌마도 지리한 예를 들어가며 맞장구를 쳤다. 이틀 내내 한국인 가이드의 바가지에 관한 얘기를 듣다보니 그들이 순 사기꾼 같아 보였다.

일주일 전쯤 어느 게시판에서 필리핀 정보를 수집하던 차에(필리핀 여행 정보가 별로 없다) 한 배낭 여행자가 보라카이 섬의 한국인 관광 가이드의 횡포를 언급하자, 자기는 가이드라며 2개월 동안 필리핀에 관해 고시공부 하듯 두문불출하며 빡세게 공부하고 나름대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가이드를 하고 있다는 이가, 섭섭했는지 일부 가이드들의 행태를 대다수의 '좋은' 가이드에게 같은 혐의를 뒤집어 씌우지 말아 달라고 적어 놓았다. 유명한 여행 사이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논쟁이고, 좋은 가이드도 있고 나쁜 가이드도 있으니 이런 걸로 논쟁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 정도로 보통 결론이 난다. 웃겼다.

그의 말마따나 몇 푼 벌지도 못하고 스트레스 받으면서 오직 보람과 자부심만 가지고 일할 정도로 생각있는 친구라면 관광 가이드 일을 그만두고 주변의 가이드들 역시 그만 두라고 권유하거나, 그 배낭 여행자 편을 드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작 2개월 공부한 걸 가지고 뭘 할 수 있을까. 한 나라의 문화와 정서, 언어를 이해하는데 2개월 고시공부로 될까? 글쎄올시다.

아내는 가이드 일을 잠시 했다. 가이드가 아니라 길잡이라고 불렀다. 교통과 숙박편을 원래 가격 그대로 거래를 성사시켜 주면서 함께 다니다가 여행객들이 그 나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자신감이 생기면 서약서를 쓰고 '독립' 시켰다. 앞으로 벌어지는 일에 관해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서약서다. 그들은 참, 별로 돈 안 들이고 재밌게 여행했다. 옆에서 보기에도 퍽 바람직한 시스템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을 즐거워 하고 길잡이 일이 끝나면 받는 약간의 보수로 자신의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는 점이, 희안한 '보람과 자부심'을 가지고 일한다는 한국인 관광 가이드와 다르기 때문에 아내와 같은 사람들은 자신을 길잡이라고 불렀고 어디 가서도 떳떳했다. 그들은 길잡이 이전에 여행자였고 여행의 고충을 이해하며 자신의 경험을 통해 다른 여행자들이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했다.

태국이나 필리핀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영업하는 관광 가이드와 그 점이 달랐다. 가이드는 관광객을 이끌어 숙소를 잡아주고 그들 대신 투어를 예약하고 협상하는 일을 하면서 커미션을 받는다. 그들은 커미션이 얼마인지 공개하지 않았다. 아까 글을 쓰는 작자들이 흔히 자신의 실명을 언급하지 않고 '대다수의 좋은 가이드'라고 말하거나, 남에게 자신의 퍼포먼스를 입증하기 위해 가격을 언급하지 않았기에 그의 말은 신뢰할 수 없다. 가격은 얼마든지 검증받을 수 있고 정당한 커미션과 깨끗한 거래는 누구나 환영한다. 그리고 그 가격은 혼자 하는 배낭 여행자보다 싸야 맞다.

게시물을 쓴 그 배낭여행자가 자기는 배낭 여행(요즘은 자유 여행이라고 하드만) 중 아일랜드 호핑 투어를 40$에 했는데 한국인 가이드를 끼면 80-100$로 펄쩍 뛴다고 했다. 가격은 단순 비례가 아니다. 인원수가 늘면 현저하게 단가가 떨어진다. 참고로 그 배낭여행자와 달리 우리는 20$ 가량에 했다. 가격이 워낙 낮아 길에서 호객하던 뱃사공 마저도 그 가격에는 맞출 수 없다고 절래절래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관광 가이드란, 인원수를 무기 삼아 아일랜드 호핑 투어를 두당 15$에 성사시키는 사람이지 호핑 투어의 단가가 80$라며 두당 60$의 삥을 뜯어 현지인 여행사와 한국의 여행사와 자신이 나눠 먹으며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은 아니다.

간단할 수 있음에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기 때문에 가이드는 필리핀 현지인, 한국인 관광객, 여행자들에게 십자포화를 당하는 일이 당연했다. 가이드는 없어지는 것이 바람직했다. 밤마다 술 퍼먹으러 돌아다니고, 사고나 치고, 여자를 찾아 혈안이 되어 있지만 스스로 사귀는 것은 못하는 한국인 남자들 때문에 인간에 관해 메스꺼움을 느끼면서 과연 보람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까?

수요가 있으니 관광 가이드질도 할 만한 것이겠지. 한국이란 나라는 3면이 바다고 그나마 땅덩이가 붙어있는 북쪽은 갈 수 없는 나라다. 섬이다. 땅덩이가 붙어 있는 인접국이 없으니 해외여행의 기회가 드물고 그것 때문에 외국에 나가는 것이나 외국인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반대 급부로, 그래서 외국에 나가야 한다. 비행기 타고 바다 건너 나라에 혼자 가서 사기 당하고 삥 뜯기고 상처 입고 두들겨 맞으면서(심했나?) 돌아다녀 봐야 한다. 가이드 없이, 겁 먹지 말고.

5일째 해산물만 먹었더니 슬슬 해산물 식단이 질리기 시작한다. 필리핀 먹거리 중에는 투포투포, 이하우이하우, 라푸라푸 등 재밌는 이름이 많다. 말레이 음식처럼 코코넛 밀크를 사용하기도 하고 스패니시의 영향 때문에 많은 양의 음식을 내놓았다. 해산물 요리는 중국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이 먹는 국수는 뭘 먹어도 꽝이었다. 아내와 누워서 천정을 바라보며 각 나라의 맛있던 음식을 떠올렸다.

필리피노 퀴진은 극단적으로 야채를 적게 사용한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설마 했는데 고기가 담긴 접시에 야채라고는 오이 한 조각 뿐인 식이다. 먹을만한 과일이 별로 안 보여 열대과일이 풍성한 이 좋은 나라까지 와서 수퍼에서 후르츠 칵테일 통조림을 사먹을 때는 비참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저녁은 야채를 잔뜩 진열해 놓은 부페 식당에 들어가 고기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야채를 왕창 먹었다. 웨이터가 음료수를 마시라고 권했지만 사양했다. 음료수 마시면 배가 금방 차서 몇 접시 먹지 못하니까. 둘이서 여섯 접시를 비웠다.

옆방에 묵고 있는 필리피노 연인이 작업 중이라 야자잎으로 엮어 놓은 숙소 전체가 좌우로 흔들렸다.

숙소 벤치에 앉아 산들 바람에 맥주를 들이키며 노트북에 들어있는 John Cusac 주연의 High Fidelity를 보았다. 아내는 재미가 없는지 일찍 잠이 들었다. 야자잎으로 만든 숙소에는 개미가 우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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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들이 소란스럽게 울었다. 게으른 장기 배낭 여행자 답지 않게 오늘도 아침 7시 30분에 어리벙벙 깨어났다. island hopping 하는 날이다. 알란과 선장을 만나 시장통에서 생선(120p)과 오징어 반 킬로그램(65p), 굴 1kg(20p), 조개 1kg(25p) 따위를 샀다. 양파와 양념, 숯 등등도 잊지 않고 샀다.

장기 배낭 여행자 답게 옷은 다국적이었다. 이집트 다합에서 산 얇고 긴 여성용 바지와 터키 이스탄불에서 산 팬티, 영등포에서 산 수영복, 필리핀의 보라카이 시장통에서 3달러 쯤 주고 산 빨간색 러닝 셔츠, 스님이 줬다는 소림사 티셔츠 따위를 챙겼다. 일반 배낭 여행자들은 열대에서 짧은 팔에 반바지, 샌들을 신고 다니지만(한국인의 표준 복장이랄까?) 우리는 긴팔 바지와 긴 팔 셔츠와 운동화나 쪼리를 질질 끌면서 어슬렁 어슬렁 돌아다녔다. 꾀죄죄하고 초라하고 허름해 보이긴 하지만 그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이번 투어 동안은 줄곳 젖을 예정이라서 투 피스(수영복, 티셔츠)를 입을 수 밖에 없었다. 살 타는 것은 정말 끔찍하다.

아웃트리거 보트를 타고(이거 참 재밌다) 보라카이 섬 남단을 지나 크리스탈 섬과 크로커다일 섬을 둘러갔다. 알란은 우리가 만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로지른 최초의 한국인이라고 주장했다. 파도가 높아서 신혼여행 코스로는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죽여줬다. 선장은 올해 1월에 열린 아웃트리거 보트 대회에서 7위를 했다. 그가 피우는 담배는 hope였고 말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척 보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보트의 평균 시속은 어림잡아 40kmh 가량이었다. gps를 가져오는 것을 잊었다. 바다에서야 말로 gps가 대단한 힘을 발휘하는데 말이다. 모터 보트보다 빠른 속도였고 달아놓은 돛대 만으로 그 정도의 속도가 난다는 것이 놀라웠다. 로맨틱하지 않냐며, 알란이 또 말하길, 이 배를 타고 한국까지 갈 수도 있다고 허풍을 떨었다. 나는 시속 40kmh로 주욱 달리면 한국까지 직선 거리로 대충 70일쯤 걸린다고 말해 찬물을 끼얹었다. 수치는 나의 사랑스러운 벗이다. 알란은 지지 않고 고기 잡으면서 가면 된다고 말했다. 아쉽게도 동남아에는 인간을 잡아 귀중품을 빼앗고 고기밥으로 바다에 던져 버리는 해적이 판을 친다. 리얼리티 역시 나의 오랜 벗이다.


만조 때 였고, 까띠끌란과 보라카이 섬 사이에 형성된 작은 해협으로 강한 조류가 흘러 바람을 안고 가는 동안 큰 파도가 몰아쳐 여러 차례 물 보라를 뒤집어 썼다. 아내는 바닷물 샤워를 할 때마다 비명을 질렀고 나는 배의 균형을 잡으려고 오른쪽과 왼쪽 윙으로 아슬아슬하게, 바삐, 움직였다. 여차하면 추락이고 뼈도 못추릴 것 같은 파도에 조류였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 낄낄거렸다.

몽키 아일랜드에 멈췄다. 선장이 시장에서 사온 해산물을 요리하는 동안 우리는 스노클링을 했다. 알란이 아내의 손을 잡고 바다 쪽으로 나가는 동안 나는 멕시코의 무헤레스 섬에서 공짜로 얻은 스노클과 돗수 있는 선글라스 겸용 수영 안경을 끼고 코를 노출 시킨 채 느적느적 그들 뒤를 따라갔다. 고글이 코를 가리지 않아 생각만큼 헤엄치기가 쉽지 않아 콧속으로 바닷물이 자꾸 들어갔다. 핀이 있으면 좀 더 속도를 내서 해변에서 상당히 떨어져있는 몽키 섬까지 왕복할 수 있을 테지만 파도가 높아 여의치 않았다. 아내가 비명을 질렀다. 해파리에게 물렸단다. 그들은 돌아갔고 나도 그들이 있던 자리까지 헤엄쳐 가다가 해파리에 쏘였다. 다리가 굳었다. 잠시 쉬면서 산호초 사이에서 뛰노는 물고기들을 구경하며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쉬었다. 물고기가 참 많다. 아침에 빵 사오는 것을 잊어버려 물고기들을 내 손으로 유인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 스노클링 할 때마다 번번이 잊어버렸다.

만조라서 먼 바다에 있던 해파리들이 가까운 해변까지 떠밀려 왔던 것이다. 아내는 해파리에 쏘여 아마도 난생 처음으로 근육 경직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해파리는 거미처럼, 평소 작은 고기들을 독으로 마비시켜 싱싱하게 살려둔 채 소화기로 빨아들여 천천히 녹여 먹어 치우는 것 같다. 말하자면, 자기 소화기로 빨아 먹을 수 없는 커다란 인간에게 독을 허비하는 바보짓을 한 것이다. 그들은 왜 여름이면 한국의 동해안에 바글거리는 인간을 먹어치우기 위해 거대하게 진화 하지 않는 것일까? 가오리나 오징어는 뭔가 깨달았는지 금새 커졌더만.

해파리 때문에 더 이상 스노클링은 어려울 것 같아 선장이 불을 피우고 생선을 굽고 있는 자리에 갔다. 보기 보다 엄청나게 큰 생선이다. 그들은 오징어의 내장을 빼지 않고 그릴에 그대로 올려 구웠다. 먹물이 뚝뚝 떨어진다. 다소 원시적이랄까. 간장 소스처럼 보이는 것에 하얀 소스를 넣고 거기에 레몬즙을 타고 양파를 잘게 썰어 맛깔스러운 소스를 만들었다. 선장이 현지인에게 밥을 사 왔다. 넓은 바나나 잎에 구운 해산물과 소스에 버무린 약간의 야채, 그리고 밥을 얹고 동굴 곁 자리로 옮겼다. 코코넛 나무 자른 것을 의자 삼아 앉아 식사했다. 선장, 알란, 나, 아내, 그리고 개 두 마리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알란이 따온 코코넛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배 터지게 먹고 음식을 남겼다. 다시 출발. 아까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 거대한 파도가 사방에서 밀려왔다. 보트는 공중에 떴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아내는 무서웠는지 공포에 질려 벌벌 떨었다. 나는 그저 너무 기뻤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코티지 열쇠가 사라졌다. 얼씨구?

보라카이 섬의 북부 해변에 도착했다. 인적없는 해변은 우리가 묵고 있던 화이트 비치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멋졌다. 그 멋진 해변에서 사진을 찍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아침에 게스트하우스를 나올 때 CF 메모리를 가지고 나오지 않아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가 정말 멋진 곳일까?

몰디브와 사모아 제도의 몇몇 섬들의 해변을 가보지 못해 어떤 해변이 세계 최고라고 섣불리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여전히 태국의 꼬 따오에서 롱 보트를 타고 들어가는 꼬 낭유안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꼬 낭유안은 지금까지 여행하며 돌아다녀 본 섬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아내의 손을 잡고 해변에 앉아 발가락 주위로 모여드는 물고기를 구경하고 해가 지는 모습을 보면서 신혼 여행 때 해야 한다는 장래 계획을 잡아보는 것이 좋을 성 싶다. 우리도 어젯밤에 장래 계획에 관해 고민한 후 결론을 내렸다; 왠만하면 잘 먹고 잘 살자. -끝-

마지막으로 닻을 내리고 바다 한 가운데서 낚시를 했다. 아내는 고기 한 마리를 잡고 해파리 한테 다시 쏘였다. 나는 그 망할 해파리 두 마리만 낚시줄에 달라 붙어 있엇다. 여지 없이 쏘였고, 선장은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보라카이 스테이션 3 피어로 돌아왔다. 2시 30분. 다섯 시간 반 동안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피부를 태웠다.

아내가 새카맣게 탄 피부 때문에 고통스러워 했다. 약국에서 약(care for sun burn)을 샀다. 글리세린과 비타민 A, 비타민 D가 들어있는, 근본적으로 보습제에 약간의 피부 영양 성분을 함유한 것이다. 알란의 말에 따르면 피부가 타면 시장에서 식초를 사서 문지르는 것이 좋단다. 음. 냄새 나잖아. 옷집으로 원피스를 사러 들어갔다. 아가씨들이 실실 웃어 낯 뜨거워서 허겁지겁 원피스를 사서 나왔다. 언제든지 빤스는 빨아서 널어줄 수 있지만 원피스를 사 가지고 오라는 등등의 민망한 짓은 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뭐, 사진은 찍지 못했다. 특히 파도가 좋았다.


Boracay, Island hopping tour를 마치고 코티지에 돌아오자 마자 찍은 사진.

숙소로 돌아오니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섬은 섬이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숙소 앞 의자에 앉아 이 글을 쓴다. 아쉽게도 숙소에 해먹이 달려 있지 않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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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oilo -- bus 4hrs --> Kalibo -- minivan 2hrs --> Caticlan -- boat 15min --> Borcay

나는 지금으로부터 8개월 전, 아내는 7개월 전에 마지막 해외 여행을 마쳤다. 다시 말해, 게스트 하우스의 욕실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궁상스럽게 팬티와 양말을 빨아본 것이 적어도 7개월 전이 마지막이다.

호텔에서 '공짜'로 준다는 아침 식사를 챙겨먹기 위해 일어났다. 새소리가 들린다. 또 아침 7시다. 이러다가 아침형 인간들과 친구 되겠다. 해산물을 간절히 기대했지만 쓸데없는 날짐승, 들짐승 류 따위가 나온 부페식 이침 식사는 실망스러웠다.

짐을 챙기고 체크아웃 하고 아침 햇살을 받으며 버스 터미널로 걸어갔다. 에어컨 버스는 10시 20분에 있고 논 에이컨 버스는 15분 마다 있단다. 두 말 할 것 없이 논 에어컨 버스에 탔다. 값싸고 신선한 시골 공기를 흠뻑 마실 수 있고 서는 정류장 마다 떼거리로 버스에 올라와 물건을 파는 행상들이 있어 여러 모로 이익이다. 시골 버스의 또다른 장점은 서스펜션/쿠션이 상당히 안 좋아 심하게 덜컹이는 관계로 고급 버스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전신 운동이 골고루 되고 내장도 함께 흔들려 소화 촉진 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에어컨 버스 같은 고급 버스를 타면 쿠션이 너무 좋아 자세가 고정되어 졸다가 목이 아프다거나 허리가 결리고 배가 더부룩해 지는 등 건강에 안 좋다고 본다. 건강을 생각하는 시대이니 만큼 이제는 시골 버스를 타야 하는 것이다.

네 시간 동안 평균 50kmh의 속도로 달려 칼리보에 도착했다. 칼리보는 예상했던 대로 썰렁한 도시였다. 물어물어 까띠끌란행 미니밴을 찾았다. 사람들이 다 차야 출발한단다. 시간이 남고 승객이 더 생기려면 한참은 걸릴 것 같아 보여 아내를 놔두고 거리를 이리저리 헤메다가 초우 킹의 쇼 윈도우에 달싹 붙어 상당히 맛있어 보이는 곤지(congee)를 군침을 흘리며 쳐다 보았다.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국가들처럼 필리핀에도 중국음식점이 많았다. 언젠가는 저 곤지를 꼭 먹고 말겠다. 미니밴 터미널로 돌아오니 운전수, 차장, 승객들이 모두 바깥으로 나와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까띠끌란 항에는 한국인들이 우글거렸다. 배표가 17.5페소인데 항구 이용료가 20페소라니 웃기잖아? 닐 스티븐슨의 크립토노미콘에서나 보던 아우트리거 보트(out-trigger boat)를 탔다. 모터가 달려 있다. 여기저기서 전라도 사투리가 들렸다. 20분쯤 뱃전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섬에 도착했다. 이런 저런 코티지, 팬션, 게스트 하우스를 둘러 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곳이 딱히 눈에 띄지 않았다. 시장 뒷편에 있는 코티지를 잡았다. nipa hut이라고 불리우는 야자잎으로 얽기섥기 엮어 만든 오두막을 하룻밤 400페소에 잡았다.

보라카이 해변이 세계 최고라고? 이런 저런 여건을 보건해 보라카이가 태국 해변에 비하면 그다지 좋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2km에 달하는 하얀 모래 해변은 인상적이었다. 하얀 모래 해변은 아마도 산호가 바스러져서 생긴 것일께다. 대낮에 해변을 돌아다니면 눈이 아플 것만 같다. 게스트 하우스 주인에게 물어 값싸게 해산물을 잔뜩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을 알아두었다. 시장통에 있었다.


Boracay, 게스트하우스를 잡고 한숨 돌린 후 해변에서...

해변에서 빈둥거리다가 arlan이란 18살 짜리 꼬마와 모래로 장난치면서 협상을 시작했다. 2-30분쯤 떠들면서 어르고 구워 삶아서 3시간에 1000페소 짜리를 5시간에 1200페소(22$ 가량)에 합의했다. 세 가지가 다른 패키지와 달랐다. 1. 내일 아침에 알란을 데리고 시장에 나가 해산물을 현지인 가격으로 사 준다. 2. 고여사에게 수영을 가르쳐 주기로 했다. 3. 우리 둘과 캡틴, 보조 딱 4명만 배에 타고 간다. 가이드가 붙어있는 한국 관광객의 경우 80-100$ 주고 열댓 명이 떼거지로 하는, 소위 Island hopping이란 것이다.

알란은 한국인 가이드가 엄청난 커미션을 챙긴다고 말했다. 또, 한국인 관광객이 없으면 보라카이는 망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의 말대로 보라카이에는 맨 한국인들만 보였다. 특이하게도 어느 여행지를 가나 바퀴벌레처럼 꾀죄죄한 몰골로 돌아다니는 일본인 여행자들이 필리핀에서 만큼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피노이들한테 일본 식민지 시절의 증오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럴 리가 없다. 돈 이면 안되는 것이 없는 세상이다.

해산물 식당을 못 찾아 상하이 레스토랑으로 갔다. 그나마 싸고 맛있다는 평판을 듣고 있는 상하이 레스토랑의 식사는 한심했다. 일로일로에서 워낙 잘 먹은 탓에 이런 평범한 배낭여행자의 식사가 이제는 한심해 보이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더 이상 가난하고 꾀죄죄한 배낭 여행자가 아니란 말이다, 지난 날의 고생을 딛고 다시금 새롭게 태어나 두 사람이 하루 평균 40-50$씩 쓰는 21세기형 웰빙 배낭 여행자란 말이다.

해변에 밀려온 뗏목이 보였다. 아내를 태워 바다로 밀었다. 멀리 떠나 보내고 제 2의 인생을 살아보자는 계획이었다. :)

보라카이 해변 북쪽에는 한국인을 상대로 하는 가게가 여럿 보였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리조트 등의 비싼 숙소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1박에 100$ 이상씩 하는 호텔 수준의... 아내가 저런 숙소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아 다행이다.

워낙 생각없이 온 탓에 준비한 것이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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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ila -- air 1hrs --> Iloilo

다시, 오전 6시 반에 일어났다. 피곤한지 택시를 잡고 싶어하는 눈치지만, 난 별 일 없으면 택시를 타지 않았다. 건강을 생각해서 걸어야지. 한 시간쯤 거리를 헤멨다. 어제 오랫만에 무리하게 움직였더니 물먹은 솜뭉치처럼 몸이 무겁다.

오전 7시 10분, 근처 공사장에서 인력시장이 열렸다. 고양이들이 웅크리고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어제 LRT(light rail transit)를 탈 때는 몰랐는데, LRT 차량 앞쪽은 여성 전용이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필리핀에서 '헐리우드가 놀란 blockbuster' 쉬리를 개봉했다. 동남아 국가 중에서는 상당히 늦은 축에 속할 것이다.

국내선 터미널까지 걸어갔다. 돈이 아까와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건강을 위해서다. 터미널에는 많은 한국인 신혼부부들이 있었다. 가슴에 여행사 스티커를 붙이고 있었다. 가이드북을 보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자기들이 가게될 까띠끌란과 보라카이가 궁금하지 않을까? 필리핀의 애국지사가 누군지, 필리핀이 어째서 특이한 저성장 구조를 가지고 있고 관광 사업에 목숨을 거는지, 그들의 지난한 역사를 반영하는, 영어와 스패니시가 뒤죽박죽 섞인 따갈로그에 관해서도, 복잡한 인종 구성을 가지게 된 배경도 아는 바가 없겠지. 25만년 전 얘기니까. 하다못해 나를 향한 사랑 뿐, 거의 아무 것에도 관심없는 내 아내도 그쯤은 기본적으로 안다. 어리고 값싼 술집 여자들과 하얀 백사장이 펼쳐진 해변 이외에 그들에게 필리핀은 뭘까? 게을러 터진 나무늘보같은 사람들이 사는 그저그런 저개발 열대 국가?

한국이 동남아의 모든 국가에서 왕따 당한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길 희망한다. 나라 밖에서 사고 치지 말고, 한국과 동남아시아가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그럴 여지는 충분하다.

iloilo 행 비행기를 탔다. 두당 43$, 1시간 운행. 싯 벨트를 끌르자마자 스튜어디스가 마이크를 잡더니 자리에 앉은 승객들 더러 나와 노래를 불러 보라고 한다. 두어 사람이 나가서 마이크를 잡고 정말 노래를 불렀다. 어, 관광버스 같은데?

택시는 대충 무시하고 물어물어 지프니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탁월한 방향감각에 힘입어 제대로 찾아가서 20$ 짜리 호텔을 잡았다. 파나이 주의 프로빈셜 오피스가 있는 일로일로의 중간급 호텔 중에서는 최상급이다. 에어컨, 케이블 tv, 냉장고, 그리고 아침 포함. 여행 중에 이런 호텔에 묵어본 적이 없었다. 허름한 게스트하우스를 돌아 다니다가 두고 두고 핀잔 듣고 싶은 생각이 없다. '신혼 여행'이니까.

시내 중심가에서 불이 났다. 강한 북풍 때문에 불길이 순식간에 번졌다. 주민들 틈에 끼어 전망 좋은 곳에서 30분쯤 불구경을 했다. 남의 재산이 활활 타 들어가는 불구경은 역시 지역 주민과 함께 봐야 제맛이다.


일로일로, 강한 북풍으로 불이 삽시간에 번졌지만 20분 만에 진화되었다.

박물관에 갔다. 전시한 것들은 구석기 시대부터 근세의 원주민, 식민 시대 좌초한 배에서 '출토'한 중국 도자기 등등 보잘 것 없었다. 한국에서부터 필리핀의 고대사에 관해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32도의 뙤약볕 아래서 어려운 걸음 해 주셨는데 전시 수준이 신석기 수준이었다. 우리는 심지어 아이들이 그린 창의력이 철철 넘치는 그림을 보기도 했다.

일로일로는 별 볼 일 없는 도시다. 알고 있었다. 옆에 붙어 있는 마다가스카르같이 생긴 섬에는 별 볼 일이 있지만 MTB를 빌려 산악길을 달려야 재미가 나는 섬이라 아내에게는 상관없는 섬이었고 그래서 나한테도 상관이 없어졌다.

그럼 일로일로에 왜 왔을까? 일로일로에는 영어 연수를 받으러 오는 한국인들이 많다. 일로일로는 1200만의 인구가 바글거리는 마닐라처럼 지저분하고 온갖 문제가 발생하는 대도시와 달리 소박한 지방 도시의 특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일로일로는 파나이 섬의 가장 큰 도시다. 다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얘기다. 그저 일로일로를 묘사하는 가이드북에서 seafood paradise라는 것이 눈에 띄었을 뿐이다. 마치 형광펜으로 밑줄이라도 그어 놓은 것처럼 상당히 환하게 눈에 띄었다.

그랬다. 8.4$ 짜리 값비싼 식사를 하고 나서 여행 중 드물게 성공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에피타이저로 나오는 24개의 엄청나게 신선한 굴이 단돈 40페소(880원) 였다. 믿어지지 않는 가격이다. 8.4$ 짜리 다소 부담스러운 가격의 식사를 했지만, 웨이터에게 1. 광둥 스타일의 해산물 수프, 2. 한 접시 가득한 spicy drunken shrimp, 3. 전복, 버섯, 오징어, 새우 등의 재료를 듬뿍 넣어 굴 소스로 조리한 mixed seafood, 4. 평범한 fried rice 한 접시, 5. plain steamed rice 한 접시, 6. 신선한 pineapple juice를 주문했다.


사람들이 친절했다. 일로일로에는 관광객이 거의 없다. 오직 우리 같은, 음, 맛따라 길따라나 오는 곳이 아닐까 싶다. 아쉽게도 하루 밖에 머물지 않는다.

인터넷 접속을 시도했다. high speed internet이라지만 초당 3.2kB/sec 짜리였다. 인터넷 사용에 대비해 뭔가 적절한 준비를 해 오지 않았다. 따라서 이 여행기는 상당한 시일이 지나야 인터넷에 올릴 수 있게 될 것 같다.

수퍼에서 맥주를 샀다. 호텔의 텅텅 빈 냉장고에 넣어두고 한 시간쯤 급속 냉동했다. 작전 시각은 6시 40분. 비극의 '아폴로 13'를 보면서 맥주를 마셨다. 일로일로의 또다른 특산물은 '끝내주게 맛있는 세계 최고의' 망고다. 망고 수확철은 4월이다. 우리는 '끝내주게 맛있지만' 덜 익어 떫은 망고 두 개와 피넛, 피스타치오를 안주 삼아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산 미구엘 필센과 산 미구엘 라이트를 마셨다. 산 미구엘 라이트는 독일산 맥주의 공세에서 산 미겔의 매출이 떨어지자 2년전 등장해 필리핀을 휩쓴 맥주다. 마치 맥시코의 테카테 같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데, 맥주라기 보다는 청량음료에 가까웠다. 330ml 짜리 캔이 18페소(대략 400원)다. 알딸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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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 subway 1hrs --> Kimpo Domestic Airport -- shuttle bus 30min --> Incheon International Airport -- air 2hrs --> Taipei -- air 2hrs --> Manila

전날 밤 짐을 싸뒀다. 큰 배낭 하나, 작은 배낭 하나, 힙쌕 하나, 10.95kg. 버릴만한 옷들을 입고 챙겨 가져갔다. '신혼 여행'을 앞 둔 우리의 결심: 이번에는 빈티 내지 말자. 다운시프트 웰빙하자.

아침 7시에 일어나니 피곤하다. 걷고, 뛰고, 지하철을 옮겨 타고, 버스를 타는 등 가장 저렴하게 공항으로 갈 수 있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비행기 출발 40분 전에 인천 국제 공항에 도착. 사람들이 많이 밀려 보딩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춰 비행기에 탈 수 있었다. 늘 있는 일이니까 늦는 것 정도로는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 싸구려 항공권이라 오고갈 때 트랜짓을 했다. 좋다. 2만원을 더 주고 돌아오는 편을 트랜짓에서 스탑오버로 변경했다. 왕복 항공권으로 필리핀과 대만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좀 더 신경 썼더라면 38만원 미만의 항공권을 구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신혼 여행'이니까 돈에 연연하지 말자.

서울->타이뻬이 2시간, 1시간 트랜짓 대기, 타이뻬이->마닐라 2시간, 4시간 비행에 기내식을 두 번이나 줘서 흡족했다. 누군가의 경험에 따르면 필리핀 사람들(pinoy)이 워낙 굼떠서 조금이라도 이미그레이션에 늦게 도착하면 처리 시간이 두어 시간씩 걸린다는 말을 듣고 인천 공항에서 발권할 때 앞자리를 달라고 하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뛰다시피 걸었는데, 왠걸, 순식간에 처리되어 맥이 빠졌다.

인천공항을 빠져나갈 때 아내의 패스포트에 문제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인적 사항이 기록된 여권의 첫 장이 떨어져 나갔다. 까다로운 이미그레이션 오피스에 잘못 걸리면 본국으로 송환될 우려가 있다. 위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권 첫 페이지가 손상되어 고생하던 외국인 여행자를 본 적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위조하기 간편한 여권을 만든 이들이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다. 자기 나라 국민이 다른 나라에 불합리하게 억류되면 왜 그런 지역에 가서 사서 고생하느냐고 팔짱을 끼고 호통을 치는 바로 그 외교통상부였다. 예를 들어 이라크에서 사람이 잡혔다고 치자. 미국, 독일, 일본, 이탈리아 여행자들은 갖은 수를 다 써서 여행자들을 귀환시키는데 한국 외교통상부는 감방에 갇혀 3개월이 흐르고 나서야 뭔가 조처를 취하는 식이다. 가끔은 여행자들을 통해 라면 배달도 시킨다. 외교통상부 덕택에 한국인 여행자들은 문제가 생기면 알아서 해결하는데 익숙한 것 같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다고 해 두자. 때로는 이렇게 지독한 인간들을 만들어 주시는 외교통상부가 고맙다. 요즘은 서사모아 제도의 이름모를 무인도 한 귀퉁이에 떨구어 놓아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시장을 지나가다가 강력접착제를 샀다. 숙소를 잡고 나서 짐을 풀자 마자 여권을 정말 튼튼하게 붙였다. 외교통상부 덕택이다.

인천 공항, 타이뻬이 공항, LRT 스테이션, 필리핀 도메스틱 에어포트 등을 거치는 동안 기내 반입이 금지된 칼을 배낭 속에 넣어 두었다가 인스펙션에 걸려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다. 그 동안 갈고 닦은 탁월한 솜씨 덕택이다.


대만, 타이뻬이 공항, 트랜짓 대기 시간 동안 가이드북을 읽는 아내

필리핀의 첫 인상: 꼬모에스타라는 인삿말이 있고 우노,도스,트레스,꽈뜨로,씽꼬라는 숫자가 있다. 거리 이름과 사람 이름은 에스파뇰이고 거지 마저도 영어를 알아 듣고 말했다. 일부 거지는 '한국돈 만원 오케이' 라고 당당하게 외치기도 했다. 메스티소와 인상이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 비슷하게 살이 쪘고 무표정한 것 마저도 비슷했다. 바둑판 모양의 거리는 깨끗했다. 거지들이 개, 고양이와 함께 땅바닥에서 굴러 다니며 자더라도 쳥결에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마닐라에서의 첫 식사는 만족스러웠다. 150페소(3300원)짜리 간장 소스에 볶은 굴 요리를 포함한 세 가지 요리를 시키고 시원한 산 미구엘 맥주를 곁들였다. 케이블 방송에서 '겨울연가(?)' 따갈로그 더빙판을 보면서... 90페소쯤 슬쩍 바가지를 씌우려고 했지만 그들 뜻대로 되지 않았다. 거리를 헤메다가 간신히 게스트 하우스를 찾았다. 아직 거리 개념이 잘 안 잡힌다. 거리 구조도 스페인식 바둑판이었다. 단지 필리핀 인들은 n blocks라는 개념은 없는 것 같다. 무조건 over there이란다.

밤 10시. 식당을 나와 걸었다. 아니 숙소를 못 찾아 헤멨다. 구걸하는 사람들과 거리에 아무렇게나 나자빠져 자는 사람들이 보인다. 오전에는 별 일 없어 보이던 가게들이 모두 bar로 변한 것만 같다. 필리핀에는 두 종류의 바가 존재했다. 웨스턴 바와 girlie bar라는, 여자가 나오는 나가요 분위기의 술집. 바 앞에 여자들이 앉아 초롱초롱 눈알을 빛내고 있었다. 한번쯤 들어가 보고 싶지만 뜻대로 잘 될 것 같지는 않다. 숙소에 돌아오자 마자 나가 떨어졌다. 피곤하다.

아내는 자기 사진을 보고 심한 충격을 받아 식음을 전폐한 채 다이어트에 몰두해 있다. 세 접시를 깨끗이 먹어 치우고 침대에 누워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는 특이한 다이어트였다.

벽은 얇고 창문은 안 닫히고 복도의 불빛이 환하게 12$짜리 게스트 하우스를 비춰주었다. 피곤한 관계로 첫날밤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래서 묻지마 첫날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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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크루즈, 멕시코 시티, 엘에이, 도쿄, 지나친 도시들은 모두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왔다. LA에서 공항으로 갈 때는 심지어 Big Blue bus를 탔다.

멕시코 시티에서 엘에이로 갈 때 작은 실랑이가 있었다. 티켓을 발급한 로이드 아에로 볼리비아노 항공사에서는 자기들이 발급한 티켓이지만 항공사가 달라 연결편을 제공할 수 없다나? 세관을 통과해서 멕시코에 재 입국하여 다시 출국해서 짐 검사를 받고 비행기를 타라고. 흐음... 엿 먹어라. 한 시간쯤 델타 항공사와 나 자신에게 피차 기억하지 않았으면 싶을 시간이 지나갔다. 그렇게 해서 비행기 뜨기 바로 전에 보딩 패스를 손에 넣었다. 종이에 손으로 갈겨 쓴 것이었다. 산간오지에서 막 떠나려는 버스를 잡아 타는 분위기였다.

네 번의 항공기 이동에서 이번에 실험해 본 것은 과연 작은 가방에 칼을 넣고 공항 검색을 통과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해냈다. 네 번의 검색 중에 걸리지 않았다. 테크닉은 간단했다. gps 리시버에 스카치 테잎으로 감아 붙이고 가방에 넣은 후 가방을 x-ray 검색대에 수직 방향으로 세워놓은 것이다. 그렇게 하면 칼의 형태가 드러나지 않는다. 미국 대사관에 칼을 들고 들어간 이후 두번 째 쾌거였다. 미국 대사관에 칼을 들고 들어갔다라... 어째 말이 좀 으스스하군.

공항 면세점을 기웃거리며 살만한 것들을 찾아봤다. 맛이 간 디지탈 카메라를 대체할 만한 것을 사려고... 그러려면 일단 한국의 웹 사이트에 들어가서 가격 정보를 알아봐야 한다. 면세점 가격이 더 비싸다. 그러다가 내가 호스팅을 하는 x-y.net이 시만텍 사이트 프로텍트 프로그램에서 블랙 리스트에 올라온 곳임을 알았다. 홈페이지에 들어갈 수가 없다. hotmail도 마찬가지였다. x-y.net에 perl 모듈을 좀 설치해 달라고 했더니 친절하게 돌아온 답장이, 귀하 한 분을 위해서 설치해 줄 수가 없다나... 돌아가는 대로 모종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LA에서 산타 모니카 비치에 하룻밤 묵었다. 하느라 했지만 그날 연결편은 오버부킹 된 상태였다. 계획에 없었으므로, 계획이 없었으므로 숙소 부터 찾아야 했다. 비지터 센터의 귀가 맛이 간 할머니에게 산타 모니카의 지도와 버젯 어코모데이션 리스트를 구한다고 얘기했다. 버젯 어커모데이션이 50불 부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헐리우드의 한인이 경영하는 게스트하우스로 가는건데... 해변의 벤치에 가방을 내려놓고 리스트를 훌터 보았다. 잔디밭에는 노숙자들이 누워 빈둥거리고 있었다. 노숙할까? 비가 온다. 젠장할. 유스 호스텔이 하나 있다. 도미토리 31불. 5불 짜리 햄버거와 7.5불 짜리 영화티켓과 9불 짜리 점보 팝콘과 반스앤 노블스에서 산 두 권의 sf 등등등을 합쳐 70불을 하루 만에 날렸다. 산타 모니카 피어에서 멸치를 미끼로 쓰는 낚시꾼들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지만 잡는 것들이 시원치 않았다. 말로만 듣던 운동화 따위가 잡혔다. 거의 하루 종일 반스앤 노블스에 죽치고 앉아 책을 읽었다. 그렉 이건의 singleton은 참 싱겁고 영양가 없는 단편이었다.

인천 국제 공항에 도착하니 10시, 도착하자 마자 전화는 딱 두 통 했다. 둘 다 받지 않았다. 얼씨구.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도착하니 열쇠가 없다. 담을 넘었다. 냉장고 속에는 온갖 것들이 썩어가고 있었다. 냄비가 없어서 프라이팬에 짜파게티를 끓여 먹었다. 젓가락이 없어서 철사 옷걸이를 적당히 끊어 젓가락으로 사용했다. 그릇을 씻으려니 세제가 없다.

새벽 5시에 애니메트릭스라는 진부한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워낙 진부해서 잠이 온 것 같다. 시차적응에 도움이 되는 영화같다.

방은 변한 것이 없다. 오히려 더 망가졌으면 더 망가졌지. 컴퓨터의 os를 새로 설치하고 pda를 되살렸다. 평소처럼 핸드폰을 뒷 주머니에 꼽고 머리방에 갔다. '언니'가 나를 기억했다. 파나미안 신성일 스타일은 그렇게 해서 잘려 나갔다. 샤워할 때 보니 여기 저기 벼룩에 물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벼룩에 뜯긴 자국이 사라질 때 쯤이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겠지.

배낭을 탈탈 털어 모든 옷을 빨았다. Tuesday Island라고 적혀 있는 웃도리는 가끔 거기가 어디냐고 묻는 여행자들의 호기심꺼리였다. 모르겠는데? 라고 대답하다가 서 사모아 북부에 있는 작은 바위섬인데 일년 중 절반은 수중에 잠겨 있다 라고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걸 믿는 녀석도 있었고 그래서 로빈슨 크로소의 프라이데이 아일랜드의 배경이 되었으며 신밧드가 고래라고 착각한 섬도 그 섬이라고 말했다. 그 얘기가 새끼에 새끼를 거듭쳐서 언젠가 미국이 핵폭탄 실험을 한 장소가 되었다가 원주민들이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공물을 바치던 섬이 되었다가 약 300년 전에 드디어 풀 한 포기가 돋아나기 시작했고 꽃게로 뒤덮여 있기도 하고 바닷새가 태평양을 횡단하다가 쉬러 잠시 들르는 섬이기도 하고 펭귄도 있고(멕시코의 빠라까스를 방문한 후 추가) 해적들이 섬의 모습을 보고 달려 가다가 암초에 걸려 무수한 배가 침몰했던 장소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동대문 짝퉁 긴팔 웃도리에 새겨진 Tuesday Island라는 신비로운 장소가 탄생했다. 사실 그 Tuesday Island 라는 브랜드는 Thursday Island의 카피라고 말해줬어야 했는데... 목요일 섬은 어디냐고? 목요일 섬은 목요일 섬 나름대로 스토리가 있다. 세상에는 몇몇 모험심이 강한 뱃사람들의 기억에서만 희미하게 존재하는 전설 속의 무인도가 일곱 개 있는데... 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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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기/Bolivia 2003. 6. 9. 13:48
일요일이라 문 연 가게가 드물었다. 하릴없이 돌아다니다가 부페 집을 발견하고 들어가서 먹었다. 4000m에서 내려오니까 좋은 점이 하나 있었다. 제대로 익은 밥이 나왔다. 할 일이 없다. 공원에 가서 어제 만난 애들과 놀았다. 말이 안 통하지만... 볼리비아 에스빠뇰은 느리다. 충청도에 온 것 같다. 오늘은 신발을 공짜로 닦아준다. 꾀죄죄하지만 애들이 밝다. 노점에서 300원 짜리, 사과 껍질을 벗기고 카라멜인지 에나멜인지를 발라 놓은 것을 사줬다. 신발 닦는 비용보다 비싸다. 애들이 먹는 걸 보니까 맛있어 보인다. 먹어 본 적이 없다. 길거리에 사는 거지마저도 행복해 보였다.

오고 나서부터 날이 흐렸다. 비가 왔으면 좋겠다. 좋은 나라를 떠나게 되어 유감이다. 뻬루와 볼리비아 외에 남미의 다른 나라는 가보지 못했지만 볼리비아는 중미와 남미 일부를 통털어 최고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볼리비아에 오기 전에 만난 장기 뛰는 친구들이 왜 웃으면서 말없이 썸스 업을 했는지 이해가 갔다.

영화 보기 전에 마지막으로 성당에 들렀다. 버릇처럼 성호를 그었다. 성당을 나오면서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는 좋은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광장에 선 장에서 피리와 삼뽀냐를 샀다. 망설이니까 알아서 깎아준다. 느긋한 일요일 오후다.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하는 tears of the sun을 봤다. 미군이 사지에서 고생하는 얘기로 추측된다. 나하고 상관없는 애들이라 뭔가 인도주의 같은 것을 보여주는 동안 고개를 비딱하게 하고 쳐다 보았다. 좋은 총이야... 극장은 사람들로 가득찼다. 여기저기서 샴푸 냄새가 났다. 10시 쯤 영화가 끝났다. 광장을 할 일 없이 배회했다. 분위기가 좋다. 연인과 젊은이들이 웃고 있었다. 부모를 따라온 꼬마애를 심각하게 쳐다 보니까(쥐를 줄에 묶어서 애완견처럼 데리고 다녔다) 나를 쳐다보고 까르르 웃는다. 즐거웠던 여행의 마지막 밤이란다 얘야.

비행기를 타러 가기 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 LA에 도착해서 스케쥴 변경이 가능하면 바로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탈 것이다.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럼 3일 내내 비행기를 네 번 타는 셈이다.

서울에서 잘 할 수 있을까?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읽은 것 중 감명 깊었던 것. 재밌어서 낄낄거리며 세 번은 읽었다. 처음 보는 '신선한 표현들'은 강조체로.

-*-

미친년들.. 욕나오게 만드는군요..
이제부터 욕좀 하겠습니다.-_-;;


무뇌아도 정도가 있지..
멍청한 년들.. 씨부랄 유가 그냥 들어오려고 해서 이 난장치냐?
미국인이신 분께서 우리나라에서 돈 좀 만져보겠다고 취업비자로 들어오신다는데 그럼 한국국민은 절라 호구라 예~ 와서 돈 많~ 이 벌어가셔용~그 지랄 옘병해야 옳은거냐구.

인권침해? 좋아하시네.
너네 우리나라 미혼여성이 미국, 일본갈때 얼마나 힘든지 알어?
(물론 관광이야 쉽다만.)
미국 가서 우리나라 돈 쓰면서 공부하러 가겠다고 해도 부모 직업이랑 연소득 평가해서
기준치 미달이면 짤탱없이 못가 이 개잡년들아.
이유? 우리나라같이 개발도상국의 미혼여성이 돈 많은 나라 미국 와서 돈벌어가구
나아가 미국새끼 하나 물고 눌러앉을까봐란다.

본인 일어전공하고 졸업후 워킹 신청했다가 무자비하게 짤렸단다. 마찬가지 이유지. 가면 곧바로 언어되니까 술집같은 데 가서 엔화 긁어갈까봐.-_-+(미쳤냐? 한국서 대학졸업하고 일본가서 술집나가게-_-근데도 그지랄이야-ㅁ-+)

그런데 이 일본보다 더한데가 미국이거든?
아무리 친미라도 미국대사관 한번 드나들면 골수 반미로 바뀐단다.
유학시도한 친구년들이 다 대사관 벽에 머리찧고 울더라.

세계인권 어쩌구 하는데.. 어느 나라든 자국의 이익을 중시하기 때문에, 취업비자를 그리 쉽게 내 주는 데가 없어.
그럼 개나소나 외국가서 돈벌어오게?-_-

울나라 사람이 외국에 돈 벌러 나가는 게 이지랄인데..
온국민 뒤통수 함몰되게 때리고 토낀 씨부랄 유새끼가 돈좀 만져보겠다고 취업비자 달라 그러는 거 안주겠다는 게
니넨 인권유린으로 보이냐? 이 여름철 쌀벌레같은 년들아.-ㅁ-+

관광비자로 들어와서 지돈 쓰고, 그간 벌어간 돈 풀고, 백배사죄해도
광화문 네거리에 묶어놓고 투석하고 싶은 이마당에..
취업비자??? 어제도 얘기했지만.. 진짜 안 되는 허리로 허공에 좃질하고 있다.-_-+

글구.. 이 개잡년들아, 인권위원회랑 법무부에 왜 그 지랄옘병 도배를 하는거냐?? 엉?
씨부랄 유새끼는 미국인이야~!!!!
왜 울나라 인권위원회에 지랄이냐구.
씨바.. 내가 낸 세금으로 울나라서 고생하는 외국인 노동자도 못 챙기는데,
미국에서 잘 사는 미국인 인권까지 따지게 생겼어?? 엉??
외국선례 어쩌고.. 나 참..진짜.. 개 풀뜯어먹는 소리 하고 있네.-ㅁ-+

니들 생각해봤냐?
우리나라같은 특수성을 가진 국가에서 제일 좋은 시절에 군대가서 조또 좃뺑이쳤던 니들 아버지, 오빠들..
2년넘게 개밥먹고 눈치우고 봉와직염으로 발가락썩어간 대다수의 남자들은 ?
원래 가기 싫은 거 억지로 끌고 들어가는 게 더 큰 인권유린 아니냐?
미국땅에서 지 먹고싶은 거 쳐먹고 가족이랑 사는 새끼가
울나라 들어와서 돈 못벌어가는 거 하나 가지고 인권유린이라 개삽질하면,
2년넘게 가족이란 떨어져있고, 모든 행동에 다 제약받는 우리나라 군인들은 뭐냐구.
군대가는 인간들은 인권이 없어서, 천하의 호구라서 군대갔겠냐.
남자들이 왜 갔겠냐?? 응?
우리나라가 전시상황이고, 분단국가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하나밖에 없는 특수성을 가진 나라이기 때문에 어쩔수없이 의무로 가는 거 아녀. 씨바~!
국방의 `의무` 란다. 이 개빠순년들아.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랑 같냐구~!!
비교할 걸 비교를 해야 그러려니 하지~! 이 본드에 버무린 탕수육 같은 년들아~!!

씨부랄 유새끼가 미국 국민 되고 싶고, 가족이랑 같이 살고 싶어서,
미국 국민 됐다는데 언제 우리나라에서 말렸어? 아님 의무 어겼다고 감방에 처넣었냐?
이미 미국 국민인데 뭘 어쩌겠어.
관광비자로 들어온다고? 것도 머 어쩔 수 없지. 협약이 글케 돼 있는데.
(물론 공항에 내리는 그 순간부터 생명의 위협이 있겠다만. 들어온다 그러면 도끼들고 다닐거야 썅.-_-+)
근데 그냥 미국국민도 아니고, 한국인들 ? 19a 民堉?함몰시키고 간 미국인이
다시 돈벌어가겠다고 깝치는데 너넨 글케 기분 좋냐?
이 자존심도 없는 년들아~!!!

니들 나이들어 연애하고, 한참 좋아죽으려고 할 때 남친 함 군대보내봐라.
그때도 씨부랄 유 불쌍하단 얘기가 나오나.

글구 니들이 지랄옘병하는 얘기중에 하나..
`울 오빠는 군대간다 한 적 없어요~ 언론에서 오보한 거예요~`
미친년들.. 아예 내 귀가 먹었다고 그래라.
전국민한테 다 들리는 말이 니들 귀에는 안들리냐??
씨부랄 유새끼가 부르는 노래 듣는 니들 귀가 제대로 됐기를 바라는 건 너무 큰 희망인가보다만..
썅.. 전봇대로 귀를 파 줘야 정신들을 차리지.

울오빠 와서 국위선양? 진짜 조까네.
미국 국위선양하게?? 엉?
진짜 우리나라 위상을 알리고 싶으면 할리우드에서 성공하란 말이다.
유럽비자 받고 유럽가서 가수하든지. 아님 중국을 가든지.
그래서 절라 성공한 다음에 외국애들한테 한국 얘기해.
어케 국위선양을 우리나라 들어와서 할 생각이 난다냐, 그 씹새는??
여기서 붕어 딴따라 짓 해봤자 외국에서 알아주냐?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한데.
진짜 썩은 닭대가리 티 글케 팍팍 낼래??-ㅁ-+

빠순이들아..씨부랄 유새끼가 지가 한국인이고 한국이 소중하다고 붕알 터지는 소리 한 걸 철썩같이 믿나본데..
진짜 한국인이고.. 한국 정서를 조금이라도 알면,
우리 나라의 특수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생각했으면
그 붕어주딩이로 절대 들여보내달라는 얘기 못한다.
난 그새끼가 들어와서 국위선양하네, 반성했네 하면서 인권을 위해 들여보내 달라고 얘기하는 것 자체가
그 씹자지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증거라 생각하거든??
한국인중에 병역의 의무를 기피한 인간은... 절대로 글케 지밖에 모르는 발언을 할 수 없단다. 이년들아.
절대로 앞으로 나서서 그 지랄 못하지.
에휴.. 전에도 그새끼가 가만히나 있었으면 중간이나 갔지.
남자라면 해병대 어쩌구 하면서 붕알 물고 옆돌기 하며 절라 나대던 건 생각 안나니?
참.. 나..옘병.. 이회창이 아들레미도 대선때마다 눈치보면서 소록도 봉사가는 이마당에-_-+
그 지랄해놓고 미국국민 된 주제에..참.. 좃껍데기같은 소리 한다.-_-+
확 자* 를 ㄹ자로 꺾어 후장에 박고 록타이트를 부어버릴 새끼.-_-

이 광빠년들아.. 제발 좀 정신차려라..
정신 못차리면 나대지나 말고.

같은 여자로서 쪽팔리다.
왜 사람 입에서 욕나오게 하냐.-_-+

아.. 씨바.. 짱나.-_-

(출처: 보배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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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ta Cruz

여행기/Bolivia 2003. 6. 8. 16:27
Potosi -> Sucre -> Santa Cruz. 20hrs

시계가 맛이 가서 10.30am에 12.30pm인 줄 알고 차를 탔다. 4000m에서 420m까지 떨어졌다. 열대 도시가 의외로 을씨년스럽고 춥다. 한 시간 반을 숙소를 찾아 헤메다가 시장 한복판의 숙소를 값싸게 얻었다. 6시간쯤 걸었는데 다리에 피가 몰려 쑤셨다. 고도차 때문일까. 그 전에는 자다가도 숨쉬기가 힘들어 헉헉 거렸다.

점심때 아마존 생선을 먹었다. 이빨이 흉칙하게 돋은 80cm 짜리를 토막낸 것이었다. 튀긴 생선을 고추 간장 절임에 찍어 먹었다. 이 맛이지.

그 동안 못한 얘기를 하자. 아니, 안 한 얘기를.
그러고 보니 중남미 히피 얘기는 한번도 한 적이 없구나.

히피들아... 잘 지내고 있냐? 내가 만난 히피 중 단연 으뜸은 라 빠스에서 보고 오루로에서도 본 미국인인데 50대 아저씨였다. 네팔에 등반하러 갔다가 친구들이 그를 버려두고 떠나서 어쩌다가 놀러 갔던 파슈파티나트에서 사람을 만나 그를 찾아 돌아 다니다가 한 구루(진짜인지는 알 수 없지만)와 인연을 맺었다. 몇 개월 산 속에서 매일 매일 스승으로 부터 그에게 깨달음을 주려고 옮아 온 spritually fucking 벼룩을 잡으며 지냈다.

한 번은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 카트만두 시내에 갔다가 곤드레가 된 이후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고(그의 스승이 너는 나를 찾는데 실패할 것이라고 경고했단다) '길'을 찾다 찾다 지쳐서 울면서 고국으로 돌아왔단다. 가 보니 자기 부모님들이 돌아가시고 마누라와 아이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래서 자동차 한 대 끌고 발길 닿는 대로 가다보니(차가 고장나서 나중에는 걸었다. 그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어느새 비자도 없이 두 나라 국경을 넘었다.

경찰이 그를 잡았고 용케 대사관에 끌려갔다가 거기서 여행 서류를 만들어 돈 한 푼 없이 인디헤나를 따라 트럭을 타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방황했다. 여행자들이 그를 도와줘서 과떼말라에서 2년쯤 있다가 돈이 좀 되어 다시 여행을 시작한 것이란다. 도저히 백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은 검은 피부, 지속적인 영양 불균형 상태, 발달한 폐...

그를 처음 만난 라 빠스에서 내가 똥 빠지게 찾은 숙소에서 체크인 하고 있을 때 옆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내가 누굴 닮았다면서 말을 걸어왔다. 자기가 네팔에 있을 때 어떤 한국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10년 넘게 수도를 하고 있다고. 수행? 글쎄다... 구루한테 영혼을 삥 뜯기고 있었을 것 같은데. 야금야금.

그가 가르쳐줬다. 당신 이름이 루크야? 응 그런데? 루크...라고 발음하는 사람은 없을 껄? 응? 루코라고 하지 않아? 아... 그의 말을 들어보니 그런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왜 내 이름을 여기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기만 하면 그들이 깔깔 웃어대는지 평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묻고 있었다. 루코는 말이야... 에스빠뇰로 '미쳤다'는 뜻이야. 아... 그랬군. 6년을 넘게 돌아다녀서 꼬라지는 거지 같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간신히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미친 놈이었구나...

그를 오루로에서 다시 봤을 때, 나는 재키 찬이라는 맛없는 중국집에서 한 식사로 기분이 상해 공원에 앉아 시발시발 거리고 있었다. 그가 다가와, '어이 루코'(어이 미친놈) 이라고 말을 붙였다. 그는 신지학(그런 관심을 둘 필요가 없는 괴상한 학문이 있다)에 조예가 깊어서인지 나한테 장광설을 늘어놓다가 공원에서 요가 생쑈를 하며 애들 푼돈을 뜯고 있었고 난 졸지에 그의 친구가 되어 원숭이쇼에 동참하며 코카잎을 삥 뜯겼다. 코카잎으로 피리를 분다. 재밌다.

내가 네팔에 다시 갈 꺼라니까 너는 나와 '인연'이 있으니 다시 만날꺼다 라고 말했다. 그의 스승처럼 말하고 싶었다. 비틀비틀(zigzag) 걷기 때문에 나를 똑바로 찾아올 수 없을 꺼라고. 그가 그날 내게 준 가르침은 '오늘 벌지 못하면 끝장이야' 였다. 그는 내가 묵고 있는 뜨거운 물 펑펑 나오는 숙소같은 곳은 잡을 엄두를 못 냈지만 그렇다고 돈을 꾸지는 않았다. 일견 비장미가 넘쳐 보이면서도 거지로서 지녀야 할 최후의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중남미에서 만난 히피 중 유일하게 인터넷을 할 줄 아는 최신식 히피가 아니었다. 올드패션인 그의 이름은 에드먼드인데 언젠가 그 홀쭉한 180cm의 대머리를 만나면 오루로에서 '미친놈'에게 삥 뜯은 것을 갚을 때가 되었다고... 지금쯤 곧은 철길을 따라 비틀비틀 걷고 있지 않을까?

멕시코의 유스 호스텔에서 만난 노트북 히피도 있었다. 그는 자기가 만난 사람들의 대화를 끊임없이 노트북에 기록했다. 천천히 말하라고 강요했다. 왜 기록을 하냐고 물으니까 그게 자신의 삶을 찾는 실마리라고 말했다. 자기가 타인과 하는 말을 관조하는 것 같다.

내 생각에 그의 영혼의 실마리는 검색엔진에서 찾는 것이 훨씬 경제적일 것 같아서 구글을 사용해 봤냐고 물었다. (그런 류의 nerd들은 구글광이다) 그는 한참 딴 소리를 하다가 자신이 '인도에서 제작된 허접한 공산품'임을 고백했다 -- 인도에서 2년, 인도 정부에서 그에게 나가달라고 말했단다. 추방이다. 15년 전 얘기니까 인도에서 한참 바퀴벌레같은 히피들을 박멸할 때 얘기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아무래도 드러그 트래피킹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고아, 파티, 영적이고 때로 육체적인 관계들.

중남미 히피 커넥션의 핵심은 인도에서 영혼을 찾아 헤메다가 영혼이 1/3만 발견되어 섭섭한 나머지, 남은 영혼을 찾으러 중남미로 넘어온 케이스들인 것 같다. 그는 내가 만난 히피 중 '유일하게' 산 스크리트어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혹시나 대학교수 쯤 되는 줄 알고 여러 차례 그를 추켜세우며 추궁해 봤지만 전력을 말해 주지 않았다. 말하자면 신비에 쌓인 보잘 것 없는 히피였다.

그런데 산 스크리트 어를 해독하는 히피를 본 적이 있나? 난 처음 봤다. 내 생각이지만 산 스크리트 어를 해독하면 깨달음이 백만 배 쯤 빨라지지 않을까 싶다. 그에게 여자 히피들과 성관계를 가져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그 점이 늘 관심꺼리였다. 그는 나를 잠깐 노려보다가 뭐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날 저녁에 뒤가 캥겨서 그에게 맥주를 한 병 사 줬다. 나는 두 병을 마셨고 그는 한 병을 비운 후 더 사러 가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 동안 그의 노트북을 구경했다. 폴더에 내 이름은 있었는데 다른 사람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 열 받았지만 모른 척 하고 있었다. 이 자식 거짓말을 하고 있군. 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노트북을 열어 자기가 기록한 것들을 조금 보여줬다. 내가 잘못 알았다. 다른 파일들이 있었다. 그는 나를 히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머리도 짧고 깔끔했으며 세상은 불행으로 가득차 있다고 믿는 편이었고 영적인 것들과는 아주아주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전생에 영적으로 지독한 샌드플라이한테 물렸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 점 때문에 내게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걔가 내 맥주는 안 사왔기 때문에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날 시끄러운 멕시칸 청년과 브라질 청년이 나가서 춤이나 추자고 꼬시고 있었고 나는 몸치인 것이 좀 쪽팔려서 화장실에 짱박혀 똥을 오래 누었기 때문에 기억이 잘 났다.

우리는 email 주소를 교환했는데 두어 번 안부인사를 묻고 감감 무소식이다. 그 후로 그가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왠지 그랬다. 산 스크리트어는 죽은 언어고 죽은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은 죽을 꺼라고 생각했다. 그게 주술과 마법이 죽은 이유다. email에서 그는 볼리비아로 갈 꺼라고 말했다. 내심 그를 볼리비아에서 다시 볼 수 있을 꺼라고 기대했다. 그가 볼리비아에 와서 나를 만났더라면 우주 창생의 비밀을 알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다. :)

그에게 '기록'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처럼 내가 그에게 한 말들을 시간을 두고 읽어보고 싶었다. 얼마나 헛소리를 많이 늘어 놓았는지, 내가 살아가면서 한 헛소리들의 두께를 보고 싶었다. 이 blog도 사실 헛소리였다. 여행하면서 얻은 중요한 얘기는 하나도 적지 않았으니까. 적으면 어떻게 될까.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얘기를 여기다가 구체적으로 적으면 어떤 그래피티가 나올까. 촘촘히 엮인 실이 아니라 스웨터를 만들 수 없는 잘못 짜여진 편직물에 비추어진 내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이 더더욱 처절하게 드러나겠지? 그럼 슬프겠지? 슬픈 짓을 왜 하지? 그래서 슬퍼지지 않으려면 그런 짓을 할 생각을 걷어야겠지? 울컥.

하지만 어쨌든 사진에 사람을 찍지 않듯이 사람 얘기를 별로 안 하게 된다.

그나저나 이상하게도 나한테는 어디서 거지같은 행색을 한 히피들이 똥에 꼬이는 파리처럼 많이 꼬였는데(전생에 팔자가 드센 증거) 히피 얘기라면 할 말 참 많다. 그들에게 나눠줄 네팔제 버팔로 뿔로 만든 피어싱 악세사리를 누군가에게 다 줘 버려서 그런 작자들을 만날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고는 했다. 그래도 히피를 만나면 재밌다. 영 우스꽝스러운 관광객이나 바쁜 여행자들 하고는 틀리니까. 하다못해 은하수를 보고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는 순진한 인간들이라... 아무리 그들이 철판 깔고 행복 외에는, 인류의 복지 외에는 딴 생각 해 본 적이 없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어도, 하나가 되자는 허튼 소리를 늘어 놓더라도. 어쩌면 정서적으로 내가 그 피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멕시코 마리아치 히피도 있고 처녀귀신처럼 생긴 할머니 히피도 있고... 그들은 내 영혼을 갉아먹기 위해 네팔이나 인도에서 화물로 붙인 것 같았다. 어째서 히피들은 하나같이 옴나마 시바나 자이구루 나부랑이 따위를
중얼거리며 접근하는 것일까? 신기하도다. 그리고 왜 나만 괴롭히고... 지랄이야.

볼리비아 제 2의 도시임에도 싼타 끄로스는 지극히도 볼 것이 없다. 마침, 토요일, 일요일에 걸려 문을 일찍 닫았다. 가지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옷을 론드리에 맡겼다. 지금 입고 있는 옷으로 이틀을 버텨야 한다.

인터넷을 하고 밥을 먹고 공원에 하릴 없이 앉아 시간을 보냈다. 구두닦이가 내 신발을 닦아줬다. 1 Bs였다. 운동화를 닦을 수 있는지 몰랐다. 닦을 수 있었다. 까불까불 하는 구두닦이 녀석들과 시간을 보냈다. 오늘 밤에는 영화를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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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ver Mine

여행기/Bolivia 2003. 6. 6. 14:31
뽀또시에 도착하자 마자 한 일이 은 광산 투어 신청이다. 주인장은 태권도를 하고 있었다. 메달과 상장 따위를 보여준다. 태권도를 할 줄 알고 해서... 10 Bs 깎았다.

숙소에 샤워실이 하나 밖에 없었다. 아침에 샤워 하러 가니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 앞의 여자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서 수도 꼭지 만지면 감전된다고 충고해 줬다. 감전 당했다. 떨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220V적인 떨림은 아니었다. 고작 48V 가량쯤? 그럼 당근 누전이지.

투어하러 가니 운 좋게도 투어 참가자가 나 밖에 없다. 다른 팀은 모두 떼거지였다. 광산에 가기 전에 광부에게 줄 선물을 사야 한다나... 이왕 해 주는 거 좀 비싸더라도 10 Bs(1.5$) 하는 다이나마이트를 샀다. 다이나마이트를 만지작거리니까 기분이 좀 이상했다. 갑자기 자신감이 넘치고... 흐뭇하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야릇한 기분이... 어릴 적에 폭탄을 좋아했다. 군용 매뉴얼을 참고해 직접 만들어서 로켓을 날렸다.

가이드와 많은 얘기를 나눴다. 가이드보다 내가 더 말을 많이 해서 좀 이상하긴 했지만. 은 광산은 거의 붕괴될 지경에 이른 상태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조사위원회가 몇 차례에 걸쳐 광산을 폐기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지만 8000명이 한꺼번에 일자리를 잃는 것을 두려워 한 정부는 거의 아무런 수익이 없는데도 광산을 가동하고 있었다. 사실 이 나라 처지에서 뾰족한 수가 없었다. 광산을 박물관으로 만드는 것은 어떨까. 모르겠다.

다이나마이트 터지는 소리가 18번 들렸다. 쿵...쿵... 진동이 온 몸으로 느껴진다. 비좁은 광산 안에서 방금 전까지 쾌활하던 가이드는 얼어붙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이나마이트가 터진 쪽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천정에서 우수수 흙자갈이 쏟아져 내렸다. 가이드는 정말로 겁을 집어먹은 상태였다. 그는 나가자고 말했다. 그전까지는 분위기가 좋았다. 광부들의 신 앞에서 담배 빨면서 97% 짜리 알코올을 홀짝 홀짝 마시고 입에 불 붙이고 장난하면서 한가하게 얘기를 나누었다. 말이 투어지 그는 내 말벗이었다. 오랫만에 영어 할 줄 아는 현지인을 만났겠다...


겁을 먹은 그가 주변 광부들에게 물어보니 연 이틀을 쉰 건너편 광부들이 원래는 터뜨리지 말아야 할 다이나마이트를 오늘 한꺼번에 터뜨리고 있단다. 저번 주에 그러다가 한 명 죽었다. 말을 건네준 광부들도 움직이지 않았다. 일은 중단된 상태였다. 누군가 오늘 일은 종쳤다고 말했다. 다이너마이트가 너무 많이 터져 갱도에 먼지가 가득 찬 상태였다. 영 안 좋아 보여서 나왔다. 그래도 3시간은 채웠다.

작년에 광산에서 30명 죽었다. 작업 하는 모습을 보니 그럴만도 했다.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는 정과 망치, 그리고 수레 정도였다. 갱도를 받치는 부목도 없었다. 워낙 파대서 발을 구르니 바닥이 무너질 것 같았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광산이다. 오리지날 자연산 석면을 보았다. 그거 만지다가 피부암으로 맛이 간 사람들이 좀 있단다. 어떤 광부가 기념으로 은광석을 내 손에 쥐어 주었다. 가이드가 말하길 그는 갱도에서 25년 동안 '살아 남은' 베테랑이란다.

투어가 끝나고 길거리를 하릴없이 배회했다. 은광석을 만지작거렸다. 햇살 아래에서 약간 푸른 빛을 띄고 있었다. 베테랑이라... 난 33년 동안 비좁은 갱도처럼 답답한 세계에서 질식하지 않고 살아 남은 베테랑 2.0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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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tosi

여행기/Bolivia 2003. 6. 5. 15:31
Uyuni Tour에 관한 정보 페이지를 만들기로 했다. 300여장의 사진 중에서 추린 것들은 114장, 일정의 대부분은 정신없이 돌아가고 운전수는 영어를 할 줄 몰랐다. 멋 모르고 사진을 정신없이 찍었고 그 덕에 투어가 끝난지 3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료 정리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

유우니 3박 4일 투어는 지금까지 내가 경험해 본 투어 중 최고였다. 더럽게 추워서 그렇지.

아... 뽀또시는 해발 4000m. 지금 나는 세상에서 제일 높은 인터넷 까페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Bolivia Photos
Uyuni Tour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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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uro

여행기/Bolivia 2003. 5. 30. 13:55
첫날밤은 여자 셋과 잤고, 둘째날은 다섯 명과 잤고, 세째날은 네 명과 잤다. 볼리비아 남서부 3박 4일 투어의 결과다.

적응이 안 된다.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넘어온 후 태양의 위치 때문에 곤혹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동에서 떠서 북을 지나 서로 진다. 남위 20도다. 이성은 잘 알고 있다고 비명을 지르지만 길을 걸어갈 때 동서가 감각적으로 헷갈렸다. 북두칠성은 북쪽 지평선에 낮게 깔려 있다. 아... 미치겠다. 길 찾기는 거의 본능적인 것이다. 내 뇌의 오래된 부분은 아직도 북위 36도에 살고 있다고 고집을 부렸다.

학생들이 많아 공기가 상큼했던 오루로를 떠나 유우니에 도착하니 9.30pm. 내리자마자 여행사에 들러 채 1분도 안 되어 70불로 낙찰을 봤다. 다른 에이전시를 돌아봤지만 80불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다. 밤 늦은 시각이라 눈에 띄는 아무 숙소나 잡고 들어가서 누웠다. 추웠다. 추워서 침대 바깥으로 나가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아침, 이런 저런 여행사에서 어중이 떠중이들을 모아 투어 팀을 후다닥 만든다. 투어 개시 시각인 10시에서 1시간 늦었다. 한두 번 해 보는 것도 아니고, 원래 투어란 것이 그러려니 생각하고 짐을 여행사에 맡긴 후 차에 올랐다. 어젯밤 리스트에는 아르헨티나인 3명, 그리고 국적이 불분명한 두 명이 기재 되어 있었다. 차량의 정규 수용 인원이 6명이니까 내 이름만 쓰면 리스트가 완성되는 것이다. 사기인 줄 알면서도 서명했다. 안 그러면 그 밤중에 투어 맴버를 찾으러 레스토랑을 전전해야 하니까. 아니면 하루를 까먹던가.

우리 그룹의 여섯 명 중 나를 뺀 다섯이 여자였다. 셋은 독일 출신, 하나는 스위스, 하나는 벨지움이었다. 차량에 차례차례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향후 나흘 동안 먹구름이 피어오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다 다를까, Salar de Uyuni(소금 평원)에 도착하자 마자 우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방사상으로 흩어졌다. '개성'이라면 나도 어디가서 한 몫 해내는 편인데... 정말 개성 만점 맴버들이다.


Salar de Uyuni와 개성 만점의 투어 그룹 맴버들

왜 그룹 맴버가 중요한가. 나흘 동안 숙식을 같이 하면서 붙어 다니기 때문이다. 그룹 맴버를 고르지 않고 그냥 투어를 한 것이 실수였다. 정력이 남아돌아 있는 힘껏 날뛰는 벨지움 여자는 그룹 맴버 중 처음부터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 민폐를 끼치기 일쑤였다. 본인은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독일 여자애 셋은 독일어와 에스빠뇰을 주로 했다. 영어를 잘 못한다. 벨지움 처녀는 혼자 나돌아 다니고, 독일 여자애 셋은(편의상 독일 전차군단으로 칭함) 수퍼 본드로 붙여놓은 것처럼 찰싹 달라 붙어서 자기들끼리 독일어로만 얘기했다.

첫날 밤 식사가 끝난 후 그룹 맴버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서(대체 전기도 안 들어오는 그 깡촌에서 갈데가 어디 있을까) 스위스 애가 늘어놓는 수다 내지는 한탄을 들었다; 자기가 지난 5개월 남미를 여행한 경험 중에서 최악의 그룹 투어 맴버 구성이라고 한다.

스위스 여자애의 영어 솜씨가 워낙 유창해서 의아스러웠다. 너네 스위스 사람들은 독어를 하지 않니? 물었더니 지역 마다 다르단다. 프랑스와 맞닿은 부분은 프랑스어를 하고 독일어를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자기처럼 영어를 하는 사람들은 희안한 케이스에 속한다고. 우리 둘은 하루 종일 붙어 다녔다. 나야 시간 많고 할 일은 없었으니까. 날더러 친절하고 매너가 좋다고 칭찬했다. 암, 그룹 투어는 매너로 하는 거지. 스물 네살. international relation을 전공하고 싶다고 했다.

벨지움 여자는 독신이었고(그룹에서 유일하게 나는 다른 맴버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회사에서 쫓겨난 후 퇴직금을 받아 3개월째 남미 여행 중. 서른 여섯, 말 끝마다 남자 친구 얘기를 늘어 놓았지만 남자 친구하고 헤어진 것 같다. 가족이 없고 의심 많고 겁도 많고 그룹 맴버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4개 국어를 유창하게 하지만 취직 문제가 곤혹스러운지 걱정이 많았다.

툭하면 여행 경험 자랑을 늘어 놓았고 그럴 때면 옆에서 기를 죽여놨다. 난 거기서 제일 싼 숙소에 묵었는데 120밧이었지 그러면 어? 난 90밧이었는데? 라고 말했다. 그녀는 동남아시아의 깡촌 오지를 안 가본 데가 없고 다음 목표는 엘 살바도르라며 엘 살바도르 얘길 구질구질하게 늘어놓길래 엘 살바도르 활극을 얘기했다. rubbery를 대낮 거리 한복판에서 두들겨 패고 발른 얘기. 사실 얘기하고 싶지 않았는데 워낙 꼬치꼬치 캐물어서... 날더러 칼 들고 설치는 것들이 무섭지 않냐고 물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모든 남자가 6개월에서 3년 정도 군 생활을 하며 some kind of killing skill을 익힌다고 떠벌렸다. 그러자 예전에 꼴까 계곡에서 총 한 자루만 주면 여기 있는 콘돌들을 싹슬이할 수 있노라고 떵떵거릴 때처럼 갑자기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killing skill이 아니고 some kind of killing skill이다. 거짓말 한 것은 아니다. some kind of..란 '거침없는 깡'과 '이유없는 개김성'을 말하는 것인데... 하여간 여행 하면서 뻥만 느는 것 같다.

독일 전차 군단은 그룹과 사교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라 빠스에 볼 일이 있어서 왔고 이번 투어는 좀 쉬어 볼 요량으로 무리하게 시간을 낸 것이다. 학교에서 전공이 social work라는데 영어를 잘 못해서 그들의 전공이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라 빠스에서 집 없는 애들에게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가르치는 여자애들은 자기들이 딴 나라에서 왔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며 (문맥을 짐작컨대) 남자애들은 버르장머리가 없어서 싫다나... 내가 약간 노한 기운을 보이니까, 덧붙이길, 하지만 남자애들이라면 자기들이 먼 나라에서 왔다는 것을 여자애들에 비해 금새 이해햇을꺼란다. 당근이지. 우리 남자들은 비행기와 수세식 변기를 발명했고 심지어는 모두가 싫어하는 전쟁에도 재능을 쏟아 부으니까.

놀라운 것은 그들의 '자원 봉사'가 정부나 어떤 단체로부터도 보수를 받지 않는 것이었다. 심지어 비행기 경비나 숙소 등도 자기들 돈을 들였다. 24~26세 사이. 오리지날 게르만족, 뽀사시한 피부에 금발. 명랑하지만 벨지움 여자를 거의 폭탄 취급했고 틈만 나면 뒤에서 그 여자 이바구를 깠다. 하여튼 투어 내내 온갖 우아를 다 떨었다. 가슴도 빈약한 주제에.

서양인들이 워낙 개성이 강하고 혼자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각각 개성이 워낙 뚜렷한 사람들, 특히나 여자들이 그렇게 모이니까 투어 내내 피곤했다. 말이 볼리비아 남서부 3박 4일 투어지, 사실은 '머슴 투어'였다. -_- 여자들이 차량에 꾸역꾸역 올라올 때부터 한숨을 쉬었다. 한국 여자들은 그나마 눈치라도 있어서 괜찮은데 서양 여자애들은 자기 생각 밖에 안 한다. 그 점이 별로...

우리 차는 8인승 은색 랜드 크루저였다. 운전수 겸 요리사는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따라서 나는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여기서 볼거리가 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룹 맴버 중 유일하게 스위스 여자애가 가끔 날 위해 통역을 해 주는 정도였다.

4일 내내 포장도로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차량이 그나마 다른 투어 팀에 비해 나아서 먼지를 덜 뒤집어 썼다. 투어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니고, 시작하자마자 잽싸게 가장 좋은 프론트 시트를 점령했다. 그리고 투어 내내 독차지 할 생각이었지만 매너가 워낙 좋다보니, 아니 여자 다섯 명 틈에서 머슴 노릇이나 하다 보니 그 자리에 앉은 적은 그 후로, 없었다.


우리 그룹 투어 차량. 오른쪽 산 밑의 조그마한 점은 우리 그룹 공식 폭탄, 미스 벨지움. 그녀는 대체 어디까지 갈 생각인가, 그리고 언제 돌아 오려는가... 아아...

밥을 해 먹을 시간이면(주로 야외에서) 가스통과 버너, 식기류를 루프에서 내려야 하는데 여자들이 무슨 힘이 있겠나. 운전수와 둘이서 내렸다. 허름한 숙소에 도착하면 운전수와 내가 짐을 부리는 동안 여자애들은 좋은 침대를 먼저 차지했다. 단촐한 내 짐과 달리 가방 세 개씩은 가져왔다. 내 자리는 3일 밤 내내 문 바로 옆에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침대였다. 걔들이 옷을 갈아 입을 동안에는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덜덜 떨었다. 다섯이다 보니 다섯배로 시간이 걸렸다. 두당 5분씩 잡으면... 뜨거운 물이 떨어지면 불을 지펴 물을 끓였다. 속이 메슥거린다며 자리를 바꿔달래서 이 자리 저 자리로 옮겨 다니다가 결국 뒷좌석의 짐칸으로 쫓겨났다. 여자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꽃동산 투어? 누군가 우리 팀을 보고 내가 부러워 죽겠다는 듯이 찬탄을 금치 못했다. 글쎄다... 그래서 다른 투어 차량이 보이면 담뱃불 꾸러 간다는 핑계로 거기 남자들과 이런저런 사나이스러운 얘기를 나누러 피난갔다.

이들 전부가 싸가지가 없다고 여겨졌던 것은 그 추운 날씨에(영하 15도다) 운전수 혼자 고생하고 있을 때 차량 안이나 숙소에 짱박혀 도와주러 나설 생각을 하지 않는 것 때문이었다. 운전수 손등이 거북이처럼 터졌고 우리 식사가 끝난 후에야 남은 음식 찌꺼지를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혼자 불쌍하게 먹고 있을 때 조차 한 번도 그나마 따뜻한 숙소 안으로 부르지 않았다. 한국 여자애들이라면 그렇게 내버려 뒀을까?

기껏 늘어 놓는 얘기가 여기가 문명화가 되면서 전통적인 삶들이 사라져가고 있어 무척 아쉽다나? 속으로 천한 것들이라고 중얼거렸다. 이들도 먹고 살아야 하고 이들도 문명을 누릴 권리가 있다. 이들도 TV를 보고 전기를 끌어오고 제대로 된 상수도 시설을 가지고 싶어 한다. 그 좆같은 전통적인 삶인지 빌어먹을 것인지 하는 것으로 원주민을 쇼윈도우 속에서 '전통' 나부랑이 하는 것들로 쇼를 하게 만든 것이 바로 우리 같은 관광객들이다.

여자애들은(유럽은) 현지인과 접촉하지 않았다. 흙바지를 입은 애들과 낄낄거리고 있으면 더럽다는 듯이 차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다시 한번, 한국 여자애들이라면 그랬을까? 그나마 한국 여자애들이 그런 면에서는 좀 나은 것 같다. 그나마.

한국 역시 불과 20년 전만 해도 볼리비아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말하자면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살았다. 30대 이상 이라면 이들 풍경이 낯설지 않고 정이 갈 것 같다. 그 황량한 벌판에 뻘쭘하게 서 있는 축구 골대 두 개가 왠지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했다. 흙바닥에서 굴러 다니다가 해거름이 다 되어 집집마다 굴뚝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면 엄마한테 혼난다며 하나둘씩 사라지던 친구들...

불행히도 볼리비아의 촌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사치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나흘 동안 돌아다닌 마을 중에서 전력선이 마을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을 본 것은 손에 꼽을 지경이었다. 변변한 상수도 시설도 없었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꾀죄죄한 모습으로 가난하게 살았다. 그나마 투어 차량이 묵는 숙소는 태양 전지로 축적한 전기를 밤에 한시적으로 쓸 수 있는 정도 였다. 그리고 촛불과 끝없는 먼지...

자연 경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끝내줬다. 지난 1년 여행한 것을 모두 합쳐도 볼리비아의 altiplano(고평원쯤?)의 풍경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평균 고도 3800m(최저 3600, 최고 4900, 모두 gps로 찍어본 것들) 사이에 위치한 드넓은 평원과 그 높이에서 바라보는 '아기자기한' 6000~7000m의 설산과 아름다운 호수들, 얇은 대기를 뚫고 천연덕스럽게 쏟아져 내리는 자외선에 시꺼멓게 그슬린 자갈과 흙, 그 사이로 흐르는 실핏줄 같은 시냇물, 듬성듬성 자라난 고원 억새풀과 야마떼, 그리고 전기 조차 안 들어오는 숙소에서 바라본 지평선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찬란하게 펼쳐진 은하수...

지질학자라면 볼리비아의 알티플라노에 경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내 알량한 지식으로도 이렇게 풍부한 미네랄은 처음 봤다. 화산에서 쏟아져 나온, 말 그대로 엄청나게 다양한 광물질군이다. 준보석류 부터 화석, 온천수, 미네랄 때문에 다양한 색깔을 내는 호수들이 있었다. 예상치 못했고,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충격과 놀라움이 더욱 컸던 것 같다. 그냥, 볼리비아에 왔으니, 유우니에 왔으니, 유명하다는 투어나 하자는 심정이었다.

사진을 270장쯤 찍었다. 자연경관 만으로 사진을 270장 찍어보긴 처음이다. 그중 130장을 남겼고 파노라믹 뷰를 만들려고 별도로 10장을 더 찍었다. 360도 파노라믹 뷰 만드는 프로그램이 어디있더라... 한국에 가서 찾자.


카메라가 맛이 가서 잘못 찍힌 사진이지만, 이 분위기가 맞다. surreal!

밤이면 영하 15도~30도로 기온이 떨어졌다. 해만 떨어지면 거센 바람과 함께 추위가 밀어닥쳤다. 반면 해만 뜨면 살 것 같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바람은 줄기차게 불어왔다. 마치 화성이라도 되는 것처럼, 식물군은 무척이나 단조로웠다. 주로 해조류(algae)와 이끼류가 강력한 자외선과 칼바람, 기온차에 살아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그 풍광은 티벳 고원과는 많이 달랐다. 누가 볼리비아를 '남아메리카의 티벳'이라고 하는가. 바보 아냐?

수도가 없다보니 화장실에서 쓸 물 조차 부족해 나흘 동안 세수를 하지 못했다. 물론 머슴질 때문인 탓도 있었다. 2리터 짜리 여섯 개 들이 한 박스씩 들고온 생수로 우아하게 칫솔질을 하고 세수를 하는 독일전차군단을 보니 부럽긴 하드라. 난... 지나가다가 냇물이 보이면 얼굴이라도 씻었다. 자연공원이다 보니 비누를 사용할 수 없었다. 얼음장처럼 차갑다. 세째날 온천이 있어서 뛰어들고 싶었지만 여자가 다섯이다... 발 담그고... 그냥... 시시하게... 놀았다... 얼굴이 많이 탔다.

투어 둘째날 오전, 스위스 애가 맛이 갔다. 비포장 도로에서 춤추듯 달리는 차 때문에 화장실에 달려가 게웠다. 오후에는 독일전차군단의 전차 한 대가 연료 역류 현상으로 작동 불능 상태가 되었다. 연료 주입을 거부하고 밤새도록 게웠다. 그녀는 투어 나흘 내내 식사를 하지 못했다. 세째날은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깡촌을 두루 답사했다고 주장하는 벨지움 처녀가 감기와 멀미로 맛이 갔다. 비포장이 처음은 아닐텐데? 희안하게도. 아울러 마지막 날, 그동안 남은 2대로 튼튼하게 버티던 독일 전차군단 마저 궤멸 상태에 이르렀다.

유능한 운전수와 좋은 차 임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로 처참한 투어였다. 운전수가 얼마나 유능하냐면, 4륜 구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연료 절감을 목적으로?) 2륜으로 버텼다. 파워 스티어링 핸들도 아니었다. 우리 차는 다섯 여자의 밍기적거림(그들은 운전수가 게으르다고 하지만 식사를 한 시간 반 하고 이어 차를 마시며 채팅을 최소한 한 시간을 하는 그들이 어째서 운전수 탓을 하는가?)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다른 차량을 추월하고 따돌리고 앞서갔다. 함께 머슴질을 하는 운전수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면서 그의 훌륭한 프로페셔널 서비스에 감탄했다(그가 알게 모르게 우리 팀을 위해 사소한 것 까지 챙겨주고 있다는 점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더더욱 처참했던 것은 이들 다섯 명이 모두 채식주의자라는 점이었다. 나 하나 때문에 고기 식단을 만들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풀을 씹었다. 아침은 달걀과 풀, 점심은 풀과 달걀, 저녁은 풀죽과 더 많은 풀과 더 많은 달걀이었다. 식사는 많은 양이 남았다. 채식주의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소식을 하는 것 같다. 과일은 첫날 모두 해치워서 마지막 날에는 비타민이 부족했다. 우욱...

3800m의 희박한 대기 속에서 맞바람을 맞으며 '무산소 운동' 열심히 하다 보면 근육이 무척 좋아지는 것 같긴 한데, 영양 배급만큼은 제대로 해야 할텐데... 어느 정도로 심한가 하면 3일 동안 똥이 안 나왔다. 불쌍한 내 몸은 그나마 먹는 풀이라도 완전 연소 시켜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 같았다.

베지타리안 독일전차군단이 식사 중에 천연덕스럽게 한국에도 채식단이 있냐고 물었다. 있는 대로, 사실 대로 말했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채식단을 가지고 있노라고. 그런데 한국인의 음식 문화가 최근 10년 새에 급격히 변해 채식단의 다양성이 차츰 사라져 가고 있다고. 내친 김에 한국에서는 식용 식물군 중 약재와 식재를 구분하지 않으며 약재가 곧 식재라고 얘기했다. 생각나는 대로 얘기했지만 전부 사실이다. 나물류의 다양성이 식단에 그나마 남아있는 곳은 절간 정도 밖에 없다. 독풀이 아닌 한 모두 먹으면서 수천년에 걸친 인체실험 끝에 탄생했던 '위대한' 채식단은 사실상 소멸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도 여전히 세계 최고의 다양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 정도 채식단의 다양성을 세계 어느 깡촌에서도 본 적이 없을 뿐더러, 문명권은 문명권 나름대로 식단이 이미 평균화, 균일화 되어 가면서 단조로워 지고 있는 추세인 것 같다. 식재를 약재로 취급하는 나라라면 중국 정도인데 중국의 나물류가 한국만큼 발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시금치를 주로 볶아대니까.

사실 이들에게 화산 지대의 생성과 미네랄에 얽힌 흥미로운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런 데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이들은 그리 냄새가 심한데도 호숫가에 퇴적된 인을 알아보지 조차 못했다. 그들에게 돌들을 보여주고 이게 바로 신석기를 이끈 주역들이라고 설명했지만... 음... 개무시 당했다. 난 머슴이니까?

여자들이 과학기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불평을 늘어 놓아서야 말이 안되는 것 같다. 미국의 '여성 과학 기술 인력 개발 위원회'에 따르면 과학기술계에는 보편적인 성 차별이 존재하며 대부분의 여성들이 과학기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내 생각엔, 여자들은 과학기술에 원래 별로 관심이 없다. 그들의 진정한 관심꺼리는 네트웍과 소통인 것 같다. 그래서 유난히 뛰어난 화술을 구사하는 것 같다. 나와 함께 투어에 참여한 여자들은 각각 최소한 2개 이상의 언어를 아주 유창하게 구사했다. 난 모국어인 한국어도 제대로 못하는데... 그러니까... 쓰잘데 없는 돌덩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보다는 쓰잘데없는 돌에 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을 알고 그와 대화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여자들이 소통을 중시해서 언어지향적인 대뇌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사회생물학의 여러 위험스런 주장과 마찬가지로 목적론적이다. 목적론은 아주 위험해서 이 우주가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주장을 서슴치 않았다. 교육 받은 사람이라도 목적론과 자연선택을 종종 헷갈려 하는 케이스도 많은 것을 보면... 이 점에서도 여성은 그게 무슨 차이냐고 주장할 것 같다(무식 -_-). 목적론은 받아들이기가 아주 쉽다. 그리고 그것을 합리적이라고 판단한다.

좆데이(굿데이)가 어디서 줏어들은 기사를 인용한 것에 따르면 잘 생긴 남자는 정자의 활동력이 평범한 사람보다 활발하고, 잘 생긴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여러 가지 능력 면에서 뛰어나다고 한다. 과연 좆데이다! 우리 나라에 이런 신문이 하나 쯤은 있어서 장수해야 한다.

저 한심한 기사의 '그럴듯함'이 목적론이 지닌 '그럴듯함'과 같다. 왜냐하면 잘 생긴 여자는 많은 남자들이 뒤따르니까. 그래서 이런 의구심이 들겠지? 잘생긴 것과 자연 선택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지 않을까?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하여(굳이 통계적 조작이 아니더라도) 조사해 본 결과 정말 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저런 얘기가 나온다. 자연 선택이 '무지향성'이라는 것을 백날 강조해도 이런 데에서는 사실 씨알이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무미 건조 하고 재미 없으니까). 저런 기사는 근데 나도 사람들하고 말할 때 울궈 먹는다. 재밌으니까.

일정이 오후 4시에 끝나고 바깥이 몹시 추운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잠들기 전인 9시 까지는 그룹 맴버들이 모여 얘기를 나눠야 했다. 식탁에서 벌어지는 이 끔직스러운 대화는 영어와 에스빠뇰과 도이치, 때로는 프랑세즈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서로 서로 통역을 했다. 첫날은 그나마 다른 투어 차량들이 함께 있어서 다른 팀의 남자들과 얘기라도 할 수 있었지만 둘째날 부터는 창 밖으로 참새 한 마리만 날아가도 까르르 웃어대고 촛불 하나를 주제로 족히 한 시간은 떠들어대는 아가씨들과 얘기하는 것이 대체로 고역에 가까왔다. 벨지움 여자는 담배 알러지가 있었고 스위스는 케첩의 품질에 관해 정신병리적인 증세를 보였다.

독일전차군단의 도이치 진세를 돌파하는 것은 몹시 피곤했다. 그들은 투어 중에도 시즈 모드로 일관했다 -- 춥다고 차 안에 짱박혀 부동의 앉은 자세로 창 밖을 바라봤다. 그 와중에 벨지움 여자는 어디론가 사라져서 언제 돌아올 지 기약이 없었다. 스위스는 부루퉁하게 '중립'을 지키고 있었고,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찬 바람에 차량 주위를 빙빙 맴돌며 담배만 피웠다.

문을 잠그고 파수견처럼 문가 옆 침대에 눕는다. 촛불이 꺼지고 추위와 어둠이 찾아오면 전차 한 대가 괴성을 내며 overthrow를 시작했다. 밤새도록... 이런 저런 충고를 했지만 두 대의 독일 전차가 자기들이 해결하겠노라고 강경하게 막았다. 두 전차 역시 별 대책이 없어 보이는데도.

남미에 와서 최고의 민간 치료술을 배웠다. 코카잎이다. 코카잎은 고통을 비롯한 감각을 제거한다. 걱정근심도 없앤다. 믿기지 않았지만 코카잎은 거의 만병통치약에 가까웠다. '통'자가 들어가는 모든 질환에 효과가 있으며 심지어는 심인성 장애까지 치료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지역에 사는 인간들이 코카잎을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페루의 현대 미술관에서 코카잎에 관한 무한히 다양한 용도를 묘사한 그림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독일전차군단은 코카잎을 싫어했다. 마약이라나... 마약 아닌데... 코카잎에서 알칼라이드를 고농도로 추출해 코카인을 만든다면 모를까. 코카 잎을 다린 차는 진통제나 두통약 보다 효과가 탁월했다. 다만 약간의 소화 장애와 식욕 감퇴가 있는 것 같다. 페루에 있을 때 코카잎을 가져갈 수 있냐고 물으니 세관에서 잡는단다. 벌금과 압수. 대신 코카잎으로 만든 차를 가져가라고 하는데 깜빡 잊고 사는 것을 잊었다. 바보.


화산과 야마와 호수

독일전차군단에게 있어 투어는 재앙에 가까웠다. 세 대 모두 궂은 날씨와 도로 사정으로 고장났다. 그들은 거의 아무 것도 본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투어가 만족스러웠다고 자구했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misty from orient를 제외하고 서로서로가 최악의 맴버라고 흉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잠결에 이렇게 노래 불렀다. always look on the bright side of the life~ 아, 그 노래. 안다. monty python이라는 정신병자들이 만든 영화의 주제가다.

여행 1년 동안 이렇게 개성이 강한 구성은 처음 봤다. 독일전차부대는 3일에 투어를 마치고 돌아가고 싶어 했지만(난 별 이유 없이 찬성) 벨지움의 독기 어린 반대로 무산되었다. 벨지움은 독일전차부대 앞에 대놓고 지금 투어를 마치는 것은 무척 멍청스럽다고 말했다. 독일전차부대는 벨지움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와우! 스위스는 여전히 자기와는 상관없다며 '중립'을 지켰다. (그러니 스위스가 3류 국가가 되가고 있는 것 아닐까?)

틈 나는 대로 그들 각각에게 투어 비용으로 얼마를 줬냐고 물어봤다. 그들 모두 에스빠뇰이 유창했고 내가 에스빠뇰 한 마디도 못하는데 어떻게 사기 안 당하고 여행할 수 잇냐며 의아스러워 했지만, 흐흐흐, 모두 80불씩 주고 투어에 참가했다.

내가 아는 생존 에스빠뇰...

버스 터미널이 어디에요?: 부스 터미날, 아미고?
피삭까지 버스비가 얼마에요?: 피삭 부스, 꾸안또 에스, 아미고?
꾸스꼬에서 뿌노까지 몇 시간 걸려요?: (손가락을 쥐락 펴락 하면서) 꾸스꼬, 뿌노, 꾸안또 띠엠뽀, 아미고?
버스가 우로스에 도착하면 내려 주세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고) 우로스! 아미고! <-- 몇번 반복.
여기가 우로스인가요? : 우로스? 아미고?

안녕하세요? 홀라! 아미고!
방 있어요? : 홀라, 아미고!
방값이 얼마에요? : 꾸안또 에스, 아미고?
싱글룸이 얼마에요? : 솔로! 꾸안또 에스! 아미고!
체크아웃 타임이 언제에요? : (먼저, 시계를 가리키며) 꾸안또 호라, 아미고? (자는 시늉에 이어서 손가락으로 걸어 나가는 표현)
짐 좀 맡아주세요. : 이뀌빠헤! 아미고!
짐 찾으러 왔어요. : 이뀌빠헤! 아미고!
화장실이 어디에요? : 바뇨! 아미고! 바뇨!
화장실 달린 방 주세요: 바뇨! 아미고! 바뇨!

싼 걸로 주세요: 바라또! 아미고!
깎아 주세요: 디스꾸엔또! 아미고! 마스 디스꾸엔또! 아미고! (그리고 애원...)

화장지 있어요? : 띠에네 빠펠, 아미고?
식사 되요?: (말없이 숟가락질 하면 된다)
이해가 안가는데 영어로 말해 주시면 안 될까요? : 노 엔띠엔도. 잉글레스, 아미고?
인터넷 한 시간에 얼마에요?: (손가락 하나만 펴고) 꾸안또 에스, 아미고?

지난 3개월 동안 몇 안 되는 단어로 여행했다. 내가 아는 에스빠뇰은 꾸안또 에스(how much)와 숫자들, 그리고 길에서 줏어들은 몇 단어 정도 뿐. 단무지 정신이라고 하더라. 단순, 무식, 안되면 지랄.

안경 코 받침이 부러졌다. 강력 본드로 붙였다. 전지 케이스가 부서졌다. 망가질 만한 것들은 한 차례씩 다 망가져서 앞으로 망가질 것이 더 없다는 생각이 들자 내심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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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le de la Luna

항공권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너무 비싸다.

속이 쓰려서 밥이나 먹어야 겠다고 마음 먹고 이름 모를 식당으로 들어갔다. menu especial dia de la madre라... entrada(전채)로 Huevitos de cordorniz, soup은 Chairo paceno, segundo(main dish)로 arroz chaufa와 ensalada classica, pollo a la naranja, 그리고 고구마 한 조각, postre(후식)으로 mouse de chocolate를 먹었다. 10볼리비아노, 1.2$였다. 먹으면서 울었다. 페루에서 시급히 볼리비아로 넘어 왔어야 했다. 세상 어느 나라에서 풀 코스를 2달러가 안되는 돈으로 먹을 수 있나.

점심 시간 무렵에는 사무실들이 문을 닫아 애를 먹었다. 볼리비아의 점심시간이 2시간 가량 되고 여행사나 은행 따위는 12시에 식사를 시작해 3시나 되어야 사무실 문을 꾸역꾸역 열었다. 재개장 시각을 몰랐다. 성수기가 시작되면서 항공권 가격이 오르고 있어 조바심이 났다.

어제까지 640$ 가량 하던 항공권이 오늘은 720$ 정도 되었다. 라 빠스의 중심가 부근의 여행사를 이 잡듯이 뒤졌다. 이틀 동안 안 가본 여행사가 없다. 저렴한 항공권 구매에 관한 몇 가지 방법을 이번에 배웠다. 하지만 하루 차이로 80-90$이 그냥 날아갔다. 망설였기 때문이다. 이 방법이 통할까 하고.

라 빠스의 여행사들은 할인이 무지막지하게 이루어지는 multi carrier combined ticket에 관해 그다지 잘 모르고 있었다. 내가 알아낸 방식은 로이드 아에로 볼리비아노의 산타 크루스->메히꼬시티 티켓과 컨티넨탈이나 델타 또는 유나이티드 에어의 메히꼬시티->로스 앤젤레스 구간 티켓이다. 이 조합이 가장 저렴하고 스톱 수가 적은 방식인데 대개는 직항 노선이나 연결구간 사이에 협약을 맺은 항공사 끼리의 연결편을 제시했다. santa cruz -> miami -> (atlanta) -> los angeles 하는 식으로. 그들이 제시한 티켓 가격은 그래서 1080~1340$ 정도였다. 다시 말해 국제적으로 거의 모든 여행사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항공권 예약 프로그램은 일부 유명한 구간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최적화된 항공권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두번째는 여행사마다 그 온라인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숙달도가 달라서 최저 항공권을 제시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애가 타서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지시를 해주기도 했다. 세번째, 각 여행사가 취급하는 항공권은 특정 항공사로 제한되어 있다. 이를테면 여행사를 고를 때 여행사 윈도우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항공사 스티커를 유심히 살펴봐야 발품을 줄일 수가 있다.

내가 제시한 조합보다 여행사가 제시한 티켓이 더 쌀 거라고 믿었다. 그런 일에는 닳고 닳은 사람들일 테니까. 그런데 첫날 열 댓 군데를 돌아봐도 항공권 가격이 1080$ 이하로 떨어지지 않아 낙심했다. 그럴 리가 없다. 중남미는 그링고들이 떼거지로 놀러 오는 곳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LAB와 UA를 임의적으로 조합한 티켓 가격을 알려 달라고 했다. 750$ 까지 떨어졌다. 다음날 아침부터 뒤져 720$까지 떨궜다. 그들이 제시하는 최저선인 1080$에서 무려 360$이나 가격을 떨굴 수 있었다. 그럼에도 속이 쓰리다. 항공권 예매에 관한 보다 세련된 지식을 갖고 있었더라면, 게으름 피우지 말고 라 빠스라는 도시를 좀 더 잘 이해하고 있었더라면(지금처럼 좌충우돌하면서 배우는 식 말고) 70-80$을 더 세이브할 수 있었다. 하루 만에 가격이 올랐다. 이집트에서 항공권을 구할 때 망설이다가 하루 차이로 몇백불 날렸을 때는 욕할 놈이라도 있었지만(부시 십새) 지금은 내 머리를 벽에 박아야 한다.

항공권 예약에 관한 몇 가지 기본적인 상식을 알게 되었다. 첫번째, 월요일은 다른 주일보다 항공권 가격이 싸다. 최대 100$ 정도 차이가 난다. 두번째, 국적기는 이국기에 비해 구간 요금이 저렴하다. 이를테면 조합 항공권을 구하려 할 때 해당 국가의 국적기를 이용해 트랜짓(트랜스퍼?)을 조합하는 것이 유리하다. 세번째, 최소한 1개월 전에 예매해야 싼 티켓을 구할 수 있다는 상식이 있지만 버킷 티켓(할인 티켓)은 출발 며칠 전에야 구할 수 있다. 네번째, 여행사가 제시하는 가격만 믿을 것이 아니라 항공사 시간표를 참조하거나 인터넷 항공 티켓 구매 사이트를 참조해 조합 가능한 항공편을 미리 알아두어 여행사에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주 유리하다.

항공권을 구매하기 위해 돌아다닌 시간은 이틀에 불과하지만 항공권 구매에 관해 생각한지는 일주일이 넘었다. LA로 돌아가는 길은 세 가지가 있었다. 1. 유우니 투어를 마치고 국경을 넘어 칠레를 종단해 산 티아고에서 LA로 가는 방법, 2. 루레나바께에서 정글 투어를 마치고 브라질로 넘어가 상 파올로나 리우 데 자네이로에서 마이애미를 거쳐 LA로 가는 방법, 3. 볼리비아 여행을 마치고 라 빠스로 돌아와 국제버스를 타고 페루의 리마로 돌아가 LA행 티켓을 구하는 방법(항공권은 500$ 가량). 세 가지 방법 다 장단점이 있다. 일정이 빡빡한 처지라 여행 경로가 방법 따라 워낙 다양하고 무궁무진해서 네 번째 방법을 택하는데 일주일이 걸렸다.

서울-LA 왕복 구간 티켓이 원래대로 6개월 짜리였으면 이런 고생 안 해도 되었다. 그래서 내게 항공권을 사기 쳐서 팔아먹은 탑 항공의 그녀가 다시 생각났다. 그녀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돌아가서 종이 비행기 백만개를 접어 그녀의 얼굴에 집어 던질까?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른다.

침대에 누워 허접스럽게 생긴 티켓을 이리저리 살펴 보았다. 볼리비아에서 미국으로 날아가는 이 티켓에 붙은 세금은 무려 120$ 씩이나 된다. 원래 항공권 가격은 600$ 가량이다. 모험심을 발휘해 산타 크루스에서 하루 정도를 남겨두고 티켓을 구해보는 건데, 그러다가 저렴한 티켓을 구하지 못하면 300$ 가량을 일없이 날리게 되니까 무서워서 시도할 엄두가 안 난다.

이렇게 일이 안 좋게 풀려 나갈 때는 맛좋은 음식을 먹고 기분을 푸는 것이 바람직했다. 멕시코에서부터 간혹 살떼냐를 볼 수 있었다. 중미 스타일의 만두인데 멕시코, 중남미를 지나면서 먹을 때는 그렇게 맛있는 줄 몰랐다. 허기나 지우려고 길에서 우연히 먹었다. 가슴이 아팠다. 이렇게 맛있는 것을 고국에서 삽질하고 계신 동포 여러분들을 제껴두고 나 혼자 먹고 있으니... 살떼냐 두 개면 배가 찼다. 고작 300원 돈이다. 살떼냐에 여섯 가지 소스를 발라 먹고 마무리로 120원 짜리 오렌지 쥬스를 들이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어젯밤에 바나나를 사려고 시장에 갔다가 잠시 딴 생각하는 바람에 바나나 두 뭉치를 가슴에 안게 되었다. 어? 왜 이렇게 많이 주지? 3kg, 200원 어치였다. 무슨 생각으로 그 많은 바나나를 샀는지 모르겠다... 바나나 때문에 다른 음식을 못 먹게 생겨서 상심했다.

바나나를 먹고 다시 유쾌해졌다.

훌륭한 식사를 하는 민족이니 볼리비아 사람들이 제정신일 수 밖에 없다.
밤거리는 놀랍도록 한국과 흡사했다 -- 안전하고 시끄럽다.

밥을 거나하게 먹고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여행사들은 오후 3시나 되어야 문을 열테니. 그래서 Valle de la Luna(valley of the moon)으로 갔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감으로 찍어서 내렸다. 시내에서 대략 10km, 골짜기 아래. 정확한 위치다. 적도 부근부터 남반구로 내려 오면서 태양의 위치 때문에 종종 방위 감각을 잃었다. 북반구에 너무 오래 산 탓인 것 같다.

오늘 달의 계곡을 방문한 사람은 다 합쳐서 10명이 안 되었다. 미니 카파도키아 같다. 별 다른 감상은 없었다. 터키에서 훨씬 오래되고 장엄한 카파도키아 버섯을 이미 본 처지라. 한 시간쯤 거닐다가 적당한 곳을 찾아 오줌을 누어 제대로 마무리를 하고 라 빠스로 돌아왔다.


Valle de la Luna. 달의 계곡이라서 로맨틱한 곳인 줄 알았는데 영 황량한 것이... 달 표면 같다.

매트릭스를 보러 갔다. 매표원과 한참을 싸웠다. 그녀는 티켓을 줬다는데 나는 좌석 배정표만 받았다고... 티켓 달라고... 옥신각신 하다가 영화가 시작되어 정직하지 못한 그를 한껏 비웃은 후 지갑을 꺼내 표를 다시 사려고 했다. 어? 그런데 티켓이 지폐 사이에 끼어 있었다. 거스름돈을 받다가 중간에 끼인 것 같다. 망신살이 뻗쳤다. 민망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여러 차례 사과 했지만 토라진 얼굴이 풀리지 않았다. 극장은 의외로 돌비 디지탈이었다.

네오가 개폼 잡고 하늘을 날 때부터(he's doing superman thing)알아봤다. 다음에는 부활일 꺼라고. 뱀파이어들이 누리는 가장 큰 호사가 예수의 몸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포도주를 성배에 부어(천사들이 거들 것이다) 우아하게 마시고 거듭 생명을 유지하고 생명을 재생하는 것일께다. 따라서 뱀파이어 구전의 원흉은 창에 찔려 포도주를 펑펑 쏟아내는 예수가 맞다고 본다. 네오는 코드를 사용해 트리니티를 부활시킨다. 그 과정이 좀 더 극적이고 하이테크하게 묘사되었다라면 얼마나 좋을까. 잔 말도 많고... 시스템은 버그 투성이고... 매트릭스의 소스를 들여다보니 아니 이럴수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만든 것이잖아? 이러는 거 아니야? 열쇠쟁이라니. 어쩌면 크립톨로지의 은유가 그렇게 한심하다냐... 매트릭스의 우주관, constructor(generator). 시온의 거리에는 크리슈나(destructor)의 포스터가 팔리고 있었다. 워쇼스키 형제는 그렉 이건의 sf를 봤어야 했다. 창조자에 의해 거듭 '릴로드' 되는 한 사나이의 비극을 봤어야 했다. 새로우 우주의 탄생과 프로세스 랙으로 느려진 시간 속에서 외우주와 상관 없이 영원히 거주하게 된 인간 정신의 복제본을 봤어야 했다. 하다 못해 인과율의 모서리가 부서져가는 우주의 지평선이 등장하는 그의 충격적인 단편이라도... 쌈마이 패치워크로 충만한 영화가 마음에 안 든다. 철학서 몇 권 봤다는데 시나리오가 고작 그거냐? 어떤 영화에서 인가, 크리스토퍼 월큰이 늙고 염세적인 뱀파이어로 나와 지껄이는 웅변적인 몇 마디가 훨씬 더 그럴듯 하다. 워쇼스키 형제가 매트릭스를 쓰레기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말하자면 cause and effect에 따라 머리 속에 든 게 없어서 그렇다는 결론이 나온다. 쌈마이 워쇼스키. 아... 정말, 현대과학기술의 철학적 액기스가 가득 담긴 성배를 맛보고 디지탈 영생을 얻고 싶다. 액션 뽕짝 쌈마이 (짜가) 시뮬라시옹 말고. 액션도 많은데 영화가 왜 이렇게 구질구질해 보일까. to be concluded. 그건 멋졌다. 하하하. 거지같이 만들어 놨어도 결론을 내리겠다는 정신은 정말 훌륭하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 왈, "광신도 집단들이 미래의 위험한 전쟁을 준비 중인 파키스탄이 바로 악마의 집"이라고 주장했다. -- 신문 기사 중. 어렸을 때 앙리 레비의 소위, '철학서'를 읽은 적이 있었다. 취향에 안 맞는 작자로 여기고 있었다. 악마의 집? 여전하군.

"여행상품 : 7월 17일까지 스리랑칸 항공을 이용한 특별상품이 출시됐다. 목요일 출발 5일 상품(128만원)과 월요일 출발 6일 상품(144만7000원). 정상가보다 15% 이상 할인된 가격이다. 숙소에 따라 요금 차이가 있다. 클럽메드 코리아(www.clubmed.co.kr)" -- 어, 생각보다 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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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Paz

여행기/Bolivia 2003. 5. 27. 18:34
Puno - border - Bolivia Copacabana - La Paz 12hrs.

아침 일찍 일어나 La Paz행 버스를 탔다. 왠 일로 아무 사고 없이 버스가 잘 가나 싶더니만 경찰 체크포인트에 차가 멈춰서 조사랍시고 설문지를 돌린다. 문항을 살펴보니 외국인 여행자들을 상대로 페루의 관광 시스템에 관한 만족도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대체 어느 나라가 공권력을 앞세워 관광객 설문 조사를 한다며 잘 가던 버스를 한 시간 넘게 세워둘까. 설문지를 신랄하게 작성하고 나니(그래도 페루는 좋았다) 고생 하셨다면서 기념품을 준다. 버스가 가다가 다시 멎었다. 창밖으로 수떼! 수떼!를 외치는 걸 보니 또 데모구나... sute는 suit가 아닐까 싶다. Puno 사람들은 좀 무서웠다. 아스팔트에 돌 뿐만 아니라 깨진 유리병 조각을 깔아놓았다. 4시간 지체.

국경에서 여권 복사본을 달란다. 볼리비아는 과떼말라와 더불어 한국에 대한 감정이 아주 안 좋은 나라로 알고 있다. 이민국 사람들이 어째 다소 희극적으로 보였다. 군복 탓일까.

여행 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지나온 국가들의 색채 이미지: 미국 노랑, 멕시코 낡은 주황, 과떼말라 회초록, 엘 살바도르 검정, 온두라스 황금색, 니까라구아 연두, 꼬스따 리까 은색, 빠나마 엷은 하늘색, 뻬루 짙은 초록, 볼리비아 채도가 낮은 빨강. 지나가면서 색깔이 바뀌었다.

꼬빠까바나에 하루쯤 묵어보는 건데,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라 빠스(라 빠스는 어두운 녹색)까지 버스표를 끊어놓은 것을 후회했다. 띠띠까까 호수에 면한 조용하고 편한 도시 같다. 아름답다. 베리 매닐로우의 노래가 여기를 무대로 한 것인가? 로라라는 이름의 쇼걸이 있었습니다 라고 시작하는 노래. 꼬빠까바나에서 내려 눈에 띄는 호스텔에 들어가 뒷일을 보고 관광버스 차장의 지시로 버스를 갈아탔다. 그 동안 옆 자리의 에쿠아도르 인한테서 벼룩이 옮았다. 말은 잘 안 통하지만 벼룩은 통했고 그의 출입국 카드 작성을 도와줬다. 워낙 많이 작성해 봐서 빈칸 채우기에 불과했다.

페루에서 볼리비아로 넘어오면서 풍광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설산들이 열을 맞춰 왼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페루의 어떤 현대 화가가 설산을 인격화 해 표현한 그림이 떠올랐다. 설산은 그의 그림처럼 생겼다. 히말라야 같이 위압적이지 않고 마치 흰 머리와 흰 수염이 얼굴을 덮은 늙은 할아버지처럼 평원을 말 없이 지켜보고 있는 듯 했다. 늙었지만 죽지 않은, 죽을 것 같지도 않은 정정한 노인네 같다.

흙벽돌로 지은 뒤숭숭한 가옥들이 눈에 띄었다. 중간에 버스에서 내려 보트로 호수를 건너는 동안 내가 탔던 버스는 별도의 목조선에 올라 호수를 건넜다. 가라앉을 것처럼 위태위태한데 용케 건너온다. 띠띠까까 호수는 변함없이 맑았다. 호수 중간에서 엑스칼리버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오... 라 빠스... 저 멀리 황금색으로 물든 설산을 배경으로 석양 속에서 라 빠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가지를 형성한 비탈을 따라 끊임없이 이어진 허름한 콘크리트 건물군은 다마스커스를 연상시켰다. 어째서 도시 이름이 평화(paz = peace)일까. 평화가 없기 때문인가?

7시간이면 와 닿을 곳을 12시간 걸려서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숙소를 전전했다. 아직 성수기가 시작되지 않았을텐데 숙소 구하기가 힘들다. 거리에는 그링고가 우글거렸다. 한 시간 넘게 비탈을 오르락 내리락 하니 기진맥진했다. 간신히 25 볼리비아노 짜리 숙소를 잡았다. 3.3$짜리 치고는 깔끔했다. 배고프다. 짐을 내려놓고 식당을 찾아 돌아 다녔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밥 먹으려면 시장에 가라.' 라고 LP에 적혀 있었다. 시장에 서서 접시를 받아들고 이름 모를 음식을 먹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거리에서 이젠 딱히 신기하게 여길 만한 것이 없다. 마지막 순간까지 투어 만이 남았을 뿐이다.

가이드북을 읽어보니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가 최후를 마감한 곳이 볼리비아의 어떤 작은 도시 근처에 있는 광산이라고 하더라. 아, 잊지못할 그 영화의 한국어 제목과 마지막 프리즈가 떠올랐다. 그때 흘렀던 노래가 raindrops falling on my head였던가?

선댄스: 오늘은 내가 쏠께. 내일은 니가 쏴라.
부치: 좋은 생각이야. 넌 명사수니까.

-_-

볼리비아는 그러니까,

1. 체 게바라가 빨지산을 하다가 볼리비아군에게 죽음을 당한 곳
2. 베리 매닐로우가 젊은 날의 잊지못할 추억을 노래한 곳
3. 전설적인 강도단 부치와 선댄스가 볼리비아군에게 벌집이 된 곳.

이렇게 슬픈 사연이 많은 곳 임에도 옆 방에서는 이스라엘리 남녀가 헉헉대고 있었다.

투자의 세계에 엔지(NG)는 없다 - 김준형
옆집은 뭘해먹지 - http://wwww.menupan.com
http://www.alberteinstein.info

상트 페테르부르크 - 세계3대 박물관 에르미타지 박물관.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삼위일체 다리 등. 삼위일체 다리?

부산∼광주 통일호 운임 8,300원. 우등고속 18,700원과 일반고속 12,700원의 절반. 8h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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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icaca

여행기/Peru 2003. 5. 26. 19:40
아침 일찍 일어나 띠띠까까 호수로 향했다. '아침 일찍'... 으윽... 배를 타고 보니 투어에 참가한 사람은 모두 열세 명. 나와 일본인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모두 쌍쌍이다.

미국인 아줌마의 주장에 따르면 자국에서 사용하는 영어의 수준이 좀 한심한 편이란다. 그녀는 가이드가 구사하는 '복잡한' 단어에 감동한 것 같다. 그녀는 '영어'교사를 하고 있었고 여행 좀 하게 생긴 마이애미 총각하고 줄곳 얘기를 나누었다. 마이애미 총각은 아줌마에게 이란에 꼭 가보라는 얘기를 했다. 내심 그가 이란을 여행하다니, 참 대단한 미국인이라고 생각했다. 국적이 탄로나면 맞아 죽을 각오를 해야 하니까. 그와 단 둘이 얘기 할 기회가 있어서 페르세폴리스에 관해 얘기했다. 페르세폴리스가 여러 가지 면에서 마추 피추를 능가한다고 안 되는 영어로 하나 둘 따지고 있었는데, 이 친구 쉬라즈 얘기를 하면서 페르세폴리스는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의아해서 이란에 언제 갔었냐고 물으니 얼버무린다. 엉? 케밥 먹어봤다며? 그는 쉬쉬케밥이 무언지 몰랐다. 황급히 도망친다. 그 친구 대신 미국인 아줌마한테 진짜 페르시아를 느끼고 싶으면 케르만의 시장통에 가보라고 열나게 설명했다. 가급적 '어렵고 우아한' 단어를 써가면서.

프랑스 사람들은 프랑스 사람들끼리 떠들거나 서로 개성을 존중하는 것인지 앙숙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이를테면 '너 같은 관광객 때문에 띠띠까까 호수가 오염되고 있는거야' 하는 표정으로.

Uros, Amantani, Taquile 섬을 도는 1박 2일 투어였다. 여러 투어를 비교해서 밥을 가장 많이 주는 이 투어를 선택했다. 섬의 민가에서 하룻밤 자고 점심, 저녁, 심지어 아침까지 얻어 먹는다. 저렴하고, 밥이 공짜라서 내심 기뻤다.

그런데 어떻게 40km 이내에 있는 섬들을 둘러보는데 2일씩이나 걸리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배를 타고 gps를 켜보니 이해가 갔다. 배는 12km/hr라는 어이없는 속도로 '일정하게' 달렸다. 자전거도 아니고... 띠띠까까 호수에는 모두 40여개의 섬이 있었다. 호수 건너편은 곧 가게 될 볼리비아다. 볼리비아 생각을 하면 가슴이 두근 거렸다. 싸다니까.

우로스 섬은 갈대를 1m 두께로 얹어 띠띠까까 호수 위에 떠 다니는 인공섬이다. 띠띠까까 호수에 관해 이전부터 알고 있는 유일한 사실은 우로스 섬의 원주민들이 유전병 치료의 혁명적인 단초를 제공한 순수한 피를 가진 종족이라는 것 뿐이었다. 그외에도 잉카 전설 속에 등장하는 신화 속의 호수 라던가(그들 태양신의 탄생지), 내륙호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가장 큰 규모의 호수라는 등의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titi = puma, caca = great or stone 이라는 뜻인데 심혈을 기울여서(또는 사시를 치켜뜨거나 스스로를 납득시키면) 호수 모양이 문득 푸마처럼 보일 때가 있다. 띠띠까까 호수에 얽힌 잉카 전설과 그들의 전통적인 삶은 원주민들과 뿌노의 관광업 종사자들을 먹여 살리는 주수입원이므로 강력하게 보전되어야 마땅했다.

우로스 원주민들이 가족혼을 통해 순수한 혈통을 면면이 이어 왔으리라 생각하고 물어보니 인근 아유마라와 혼인을 해서 피가 섞인 상태였다. 실망.

워낙 철저하게 강간지화가 진행되어 거의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갈대 배 타고 다른 곳으로 간 동안 할 일이 없어, 띄엄띄엄 영어를 할 줄 아는 원주민 아저씨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태양전지를 발견하고 환호했다. 제대로 사네? 그는 '관광수입'으로 지멘스제 750불 짜리 태양전지를 최근에 장만했다. 저녁이 되어 관광객들이 돌아가면 태양전지로 축전된 전기로 TV를 관람하고 전등을 켰다. 그런 모습을 대낮부터 보여주면 관광산업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태양전지 때문에 한 달에 150달러가 날아간다고 한다. 페루의 교사 월급이 200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그는 꽤 잘 사는 편이었다. 날더러 사진 찍겠냐고 묻길래 돈 받냐고 물었다. 그렇단다. 그럼 안 찍는다. 돈 안 받을 테니까 찍어도 좋다. 그래서 그가 즐겨 먹는 물고기 사진과 그의 거친 팔뚝을 찍었다. 그는 관광객들에게 자신들의 전통적인 삶을 보여주는 것에 다소 짜증이 난 상태인 것 같았는데, 자기가 지금 이런 집에서 살고 있지만 집 뒤에는 야마하제 모터를 단 최신식 모터 보트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을 늘어 놓았다. 물론 관광객들을 위해서는 갈대배만 몰았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우리는 그래서 엿먹을 전통이나 갈대로 만든 좆 같은 관광 상품은 제껴두고 주로 남들이 재미없어 하는 얘기들을 나눴다. 그가 우로스 섬에 '전통적으로' 앉아 있으면 투어 가이드가 간강객들을 데리고 와 동물원 원숭이처럼 자기들을 보여준 후 여행사가 적당액을 분배해 주는데 그 수입이 변변치 않아서(여행사가 착취) 먹고 살기 위해 물고기도 잡는다고 한다. 물 위에 둥둥 떠다니니 밭이 없어 농작물을 사와야 할 때가 죽을 맛이란다. 너도 '전통'맛 좀 보겠냐고 위협했다. 오... 노...

전통을 피해 달아났다. 배는 세 시간을 지루하게 달려 아만따니 섬에 닿았다. 원주민 가정 한 가구당 관광객 두 명씩 배정했다. 짝이 없는 나는 일본인 할아버지와 같은 가족을 따라갔다. 할아버지는(오까다 상)은 몸이 불편한데도 여기까지 올 생각을 하다니 대단하다.

오스까라는 그집 아들네미와 마리라는 그집 딸네미와 땀 나도록 놀았다.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어쩐지 애들 놀이상대로 그 집에 들어간 듯 했다. 마리는 내 다리에 찰싹 붙어 다녔다.

오스까가 가진 재산 일호는 소니 라디오였다. 20솔 짜리 라디오인데 내 gps는 소리가 안 나기 때문에 그의 흥미를 자극하지 못했다. 사실 기를 쓰고 5불도 안 되는 그 싸구려 라디오보다 120불이나 하는 내 gps가 더 좋다고 자랑을 늘어놓는 등 좀 한심한 짓을 했다. gps는 말이야, 아웃도어의 거친 세계를 지향하는 사나이의 첨단 로망이라고... 이 자식 영어를 모른다. 소니제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전깃줄이 곳곳에 보이고 방 안에 전구가 있어 전기가 돌아오나 싶었는데 그건 그냥 폼이었다. 우로스 섬과는 달랐다. 집 안을 슬며시 뒤져 보았지만 태양전지나 축전지나 TV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이 섬에서 라디오는 외부 세계와 연결되는 첨단 미디어 통신기기인 셈이다. 왜 그리 라디오를 자랑스러워 하는지 알겠다.


Isla Amantani

밥 먹고 산 꼭대기에 올라갔다. 할머니들과 어린 여자애들만 반긴다. 그래서 아쉬움이 많았다. 이래 가지고야 언제 젊은 원주민 처녀들과 로맨틱하고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보나 싶어 아쉬웠다.

산꼭대기에서 아름다운 석양을 기대하고 있었다. 정말 그랬다. 선명하고 날카로운 석양이다. 빛들은 칼날처럼 구름 사이로 쪼개졌다. 여기가 몇 미터더라... 4100m 되는 것 같다.

그 다음은 별이다.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조금 더 참았다. 저녁을 먹고 사람들이 관광객용 피에스타(파티)에 몰려간 동안 마당에 서서 별을 쳐다 보았다. 혼자 보기 아까워서 침대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오카다 상의 손을 끌어 별을 보여 주었다. 그는 감동했다. 말을 잊었다. 3900m의 전깃불이 없는 청명한 밤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과 은하수이 있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그믐에서 며칠 안 지났다. 운이 좋다.

한참 후에 오카다 상이 혹시 남십자성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남십자성을 별자리 지도를 통해서만 알고 있었다. 쉽게 찾았다. 비로소 실감이 났다. 나는 지금 적도를 넘어 남반구에 있는 것이다. 한국은 지금 여름으로 향하고 있지만 여기는 겨울로 들어서고 있다. 별자리들 중 생소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선이 그어지지 않는다. 난생 처음 보는 것들이니까. 아아... pda가 날아가지만 않았어도 밤새도록 덜덜 떨면서 별을 잇는 기쁨을 맛 보았을텐데. 심지어 여긴 전기도 안 들어오는데...

마리가 꽃잎을 잔뜩 들고 방안에 들어왔다. 심심한가 보다. 촛불 아래서 마리의 산수 공부를 지도했다. 내가 경험한 중남미인들은 뺄셈, 특히 돈 계산에 취약하니 그거라도 가르쳐줘야 생활이 보탬이 될꺼라고 생각했다. 밥이 공짜니까 있는 대로 더달라고 해서 계속 먹었다. 일본인 할아버지는 음식이 워낙 더러워서 잘 먹질 못했다. 관광지라더니 내가 묵고 있는 집의 가족들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쩔쩔 매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 산업도 자꾸 하다보면 익숙해질 것으로 믿는다.

간간이 일본인 할아버지와 얘기했다. 그는 한국 음식을 좋아했다. 특히 '진로'를 그리워했다. 일본애들 만나면 의례껏 한국음식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는데, 그런 수준이 아니고 한국음식 매니아였다. 예전에 부산을 방문한 목적도 '본토 음식'을 맛보기 위해서라나. 그에게 페루의 전 대통령인 후지모리의 안부를 묻자 좀 당황한 것 같다. 그가 나와 그 가족 사이의 통역 역할을 해 줬다. 고마웠다. 어딘가 모르게 파키스탄에서 만났던 일본 승려와 닮았다. 나보다 꼭 2배 나이가 많다.

밤에는 몹시 추웠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할 엄두가 안 나 그냥 선착장으로 내려왔다. 내려가는 길에 아줌마가 뜬금 없이 춤추는 거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다 안다는 듯이 히죽히죽 웃었다. 어젯밤에 마리랑 춤을 췄는데 걔가 고자질한 것 같다. 어휴...

따말레섬, 주민들이 '전통적인 삶'을 유지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가이드의 지리한 설명을 들었다. 미국인들이 원주민 사진을 찍고 돈을 몇 푼 슬쩍 건네주는 모습을 봤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어색해 한다. 씁쓸하다.

만족스러운 투어를 끝마치고 픽업을 타고 시내로 돌아왔다. 관광객들이 하나둘씩 자기 호텔에 내렸다. 2성, 3성 하는 호텔에 내리는데 나 혼자 여인숙 같은 곳에 내리니까 기분이 좀 묘했다. 다들 저렴한 여행자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다.

여행 1주년을 자축하려고 했는데 깜빡 잊고 지나쳤다. 오늘이라도 하자는 생각에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가 돈을 펑펑 썼다. 그래봤자 4.7$어치 밖에 안 되었다. 지금까지 먹은 식사 중 가장 비싼 것은 꼬스따 리까의 산 호세 번화가에 있는 이탈리아 식당에서 먹은 한 접시에 10$ 가량 하는 파스타였다. 워낙 고가라서 카드로 긁었다.

다른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여행이란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머리 식히는 과정인 것 같다. 잠시 머리 식히자는 것이 어느덧 일 년 째가 되어 머리가 점점 식어 가다가 절대 0도 부근에서 대뇌가 초전도 현상을 일으키는 것 같기도 하다. 생체자석이 말을 안 들어 고민했다.

주간지 3개, 일간지 6개를 포함해 12개의 사이트를 정기 구독하고 틈틈이 만화책을 다운받아 보았다. 그런지 벌써 3개월쯤 되었다. 한 시간 정도 인터넷 사용하면서 blog를 기록하거나 사진을 업로드하는 동안 뉴스와 만화책을 다운 받았다. 1시간 다운 받으면 3시간 정도 심심하지 않게 보낼 용량의 자료를 얻을 수 있다. 값싸고 저렴한 문화생활이다. 그래서 웃겼다.

숙소에 돌아오니 뜨거운 물은 커녕 찬물도 나오지 않았다. 별 수 없이 종업원들을 상대로 지랄했다.

여행 중에는 빛나는 승리로 점철된 영웅적인 행각을 이어갈 수 있지만, 한국에 돌아가면 난 좆도 아니다. 그래도 나는 노다메처럼 행복했다. 별빛 아래서 꼬마애와 춤도 추고.

띠띠까까 호수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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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no

여행기/Peru 2003. 5. 23. 20:59
오늘도 늦잠을 잤다. 차는 11.30am에 출발하는데 일어나니 10.30am. 고양이 세수를 하고 비바 라틴에 들러 가이드북을 전해주고 터미널까지 뛰었다. 데모 때문에 중심가에 택시가 다니지 않는다. 저 빌어먹을 데모는 페루에 도착하면서 부터 줄창나게 보았다. 알고 보니 후지모리가 쫓겨나고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교사 봉급을 인상해 주기로 하고 안 올려서 교사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오얀따이땀보에서 기차가 멎은 것도 데모대가 기차 운행 중지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꾸스꼬에서 마추 피추로 가는 유일한 교통수단인데 그게 멎었으니 관광객들은 엿 되고 말았다. 그래서 엿된 관광객인 나는 삽질하며 트럭을 타게 된 것이고.

3300m에서 배낭 메고 뛰는 것은 할 짓이 못 된다. 간신히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11.30am. 숨을 고르면서 버스 회사에 물어보니 아직 출발하지 않았단다. 버스는 12.30pm이 되어서야 출발했다.

내가 산 10솔 짜리 싸구려 티켓은 자리가 배정된 것이 아니라서 이리 저리 세 번쯤 쫓겨 다니다가 간신히 자리를 얻었다. 여러가지 복합적이고 페루적인 냄새가 나는 자리다. 일층에서 현지인들과 쭈그리고 앉았다. 관광객들은 이층에 있었다. 그래도 10솔에 비즈니스 클래스가 어디냐...

차량 운행을 방해하는 데모대가 없는 춥고 황량한 사막을 잘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펑크가 났다. 해는 이미 졌다. 3800m에서 덜덜 떨며 쭈그리고 앉아 펑크 때우는 모습을 구경했다. 관광객들이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담배 한 대 물었다. 멀리 민가의 불빛(장작불이었다)이 보이고 개가 늑대처럼 울고 있었다.

뿌노에 도착하니 8.30pm. 택시를 타야 하나. 두리번 거리니 마침 버스 터미널을 하릴없이 배회하는 삐끼가 있었다. 그에게 말을 붙였다. 그가 숙소를 권한다. 20솔. 노, 10솔. 숙소는 쉽게 협상이 되었다. 10솔에 욕실 포함된 걸 잡아보긴 처음인데?

그와 15분 쯤 열나게 달려서 숙소에 들어갔다. 날더러 꼬레아가 고산 지대에 있냐고 물어본다. 아니라고 대꾸했다. 내 나이를 묻는다. 동갑이다. 희안하게도 그가 묻는 에스빠뇰이 귀에 들린다. 왜 묻나 싶더니 난 배낭 매고 뛰는데도 숨 한번 안 헐떡이는데 그 친구는 헉헉거리고 있었다. 무척 신기한가 보다. 꾸스꼬에서 여행자들에게 들어보니 우아나피추를 30분 만에 뛰다시피 기어 올라간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다들 한 시간 걸렸단다. -_-;

숙소를 잡아준 동갑내기 삐끼와 협상해서 띠띠까까 섬 1박 2일 투어를 40솔에 쇼부쳤다. 35솔 정도면 그놈에게도 마진이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구워 삶아도 씨알이 안 먹힌다. 밥 먹으러 가야 하는데 시간은 없고... 바가지 쓴 것 같은 필이 왔다. 그 필링은 정가는 25솔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어쩌겠나 시간도 없는데 협상하기도 귀찮고, 어서 투어를 잡아야지. 1-2불에 연연하지 말자. 나중에 정보를 뒤져보니 다른 사람들도 40솔에 잡은 것 같다. 고개를 갸웃 했지만, 맞겠지.

밥 먹으러 나오니 가게들이 거의 문을 닫았다. 한참 삽질하며 걷는데 누가 뒤에서 갑자기 덮쳤다. 경찰이다. 가방 조심하란다. 고작 그 말 해주려고... 깜짝 놀랬잖아. 주먹이 나갈 뻔 했다. 소매치기나 강도는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지만 경찰을 대하면 좀 캥겼다.

아침에 또 늦게 일어났다. 요즘 왜 이러지? 볼리비아 대사관에 들어가니 비서관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꼬레아노! 하하하하!! 라고 소리친다. 어이가 없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어떻게 한국인인 줄 알았지? 알아본 건 둘째치고 대사관을 쥐새끼처럼 들락거렸지만 이런 괴상한 사무관은 처음 봤다. 여권의 파키스탄 비자 가지고 뭐라 왈가왈부 하지 않는 최초의 사람이다. 20불 은행에 납부하고 영수증을 갖다주었다. 스탬프를 여권 페이지에 찍은 후 은행 영수증을 붙인다. 별 것 아닌 그걸 하는데 10분이 걸렸다.

비자 받으니까 기분이 좋다. 등짝에 햇살을 받으며 광장을 거닐었다. 아레끼빠나 꾸스꼬하고는 분위기가 또 다른 도시다. 그들 도시 보다 더 가난한 것 같은데 사람들이 활기차고 밝다. 광장에서 기분좋게 햇살을 쬐며 구두닦이 소년들과 웃었다.

데모가 한창이라 술렁거리는 거리에서 가판대의 신문을 흘낏 봤다. 꾸스꼬의 데모가 심해지고 있는 것 같다. 엊그제 꾸스꼬의 광장에 있는 성당 옆에 서 있던 데모진압용 차량을 보았다. 사과탄을 쏜 것 같다. 6월 24일이 페루의 태양 축제라는데(교묘하게 피해가게 되서 정말 다행이다) 태양 축제 때 몰릴 관광객들 때문에 정부 쪽에서 강경하게 진압할 것 같다. 돈 되는 그링고들을 돌려보낼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데모하는 교사들의 월급이 700솔이란다. 겨우 200달라.


꾸스꼬 광장 앞의 데모대의 광장 진입을 저지하고 있는 경찰(오른쪽). 왼쪽 구석에 보이는 시위진압 차량. 며칠 후에는 경찰도 파업할 예정이란다.

하루종일 남은 돈이 얼마나 되나 계산했다. 그게 왜 하루종일이 걸리는지 모르겠다.
루트를 짰다. 시간이 별로 없다.


고산 적응은 잘 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코카 잎을 너무 씹은 것 같다. 하루종일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은 까닭은 코카 잎 때문이다. 어제 이리저리 길길이 키아누 리브스 처럼 뛰어 다녔는데도 피곤하지 않은 것도 코카잎 때문이다. 이렇게 효과적인 진통제는 처음 경험해 본다.

self destruct dvd의 불투명한 장래: 한번 보고 버린다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쓰레기를 양산한다는 환경주의자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좋은 방법이 있는데. 48시간이 지나면 dvd가 쿠키로 변하면 되지 않을까?

정치에는 낭만이 있어야지 -- 김종필이 룸사롱에서 술 먹다가 그렇게 말했다. 왈가왈부를 떠나, 재밌다. 하하하

한국행 항공권 정보:
2003-6-11 1220-1555 UA897 LA-TOKYO
2003-6-12 1900-2130 UA827 TOKYO-INCHEON

이글 보는 사람 중에 혹시나 해서: 마중 나오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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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le

여행기/Peru 2003. 5. 22. 21:14
거리에서 한국인 남녀를 봤다. 버스표를 사서 돌아오는 길에 그 한국인 남녀를 다시 봤다. 비바 라틴에서 김치볶음밥을 먹고 있을 때 한국말이 들렸다. 책을 읽다가 계산을 치르고 나오는데 주인 아저씨가 방금 지나간 여자가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저자란다. 이 책의 저자를 웹에서 한동안 자주 봤다. 그럼 미키님 인가보죠? 예스. 아까 거리에서 본 여자가 미키님이었구나. 이틀에 걸쳐 비바 라틴 사장님과 미키님 등 유명인사 둘을 다 본 셈이다. 흐뭇하다. 마주 치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뻘줌해 질 것 같아서 서둘러 나왔다.

비바 라틴에 뭔가 도움을 주고 싶은데, 가난한 배낭 여행자가 밥 한두끼 먹어준다고 사업에 보탬이 될 것 같지는 않고... 버스 타러 가는 길에 중미 가이드북이나 슬며시 놓고 가야지.

"미얀마인들은 Minggala Sutta라는 부처님의 설교집 속에 있는 행복해 질 수 있는 33가지 교시를 통해 그들의 가치관을 형성한다." 이중 마음에 드는 것들만, 바보 같은 친구를 멀리할 것, 술에 취해 이성을 잃지 말 것, 검소할 것, 해탈에 이르는 길을 견지할 것, 공포심을 버릴 것. 팔정도; 정견(正見), 정사유(正思維),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情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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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to Cusco

여행기/Peru 2003. 5. 21. 18:59
Machu Picchu photos

Agua Caliente -> Ollantaytambo -> Urbamba -> Cusco

새벽 5시에 일어난다는 것이 밍기적거리다가 5.30am, 기차는 5.45am에 출발. 짐을 싸고 허겁지겁 달렸다. 아침 일찍 일어난 동네 아줌마들이 깔깔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기차역을 알려준다. 계단에서 한번 엎어졌다. 일으켜준다. 추운 새벽인데도 땀이 줄줄 흐른다.

기차는 8시쯤 오얀따이땀보에 도착해야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중간에 섰다. 자다 깨서 객실을 살펴보니 이미 모든 사람들이 다른 교통편을 알아보러 짐을 짊어지고 나갔다. 기차가 언젠가 가겠지, 여기서 움직이면 돈 낭비고 체력 낭비라니깐 하는 무책임한 희망을 품고 느긋이 객실에 앉아 눈을 붙였다. ...... 합쳐서 두 시간 넘게 지나도 아무 일이 없어 차장에게 물어보니 기차가 언제 출발할지 자기도 모른단다. 멋지군. 하는 수 없이 짐을 들었다.

gps로 찍어보니 목적지인 오얀따이땀보까지는 직선거리로 12km. 고개가 많은 산악이고 고도가 높아 배낭을 메고 도저히 걸어 갈만한 거리는 아니다. 지나가는 트럭에 올라탔다. 합승객이 너무 많아 아비규환이다.

차는 시속 10km의 속도로 비포장 도로를 달려갔다. 마추 피추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왜 도로를 안 만들었을까? 기껏해야 40~50km 구간인데. 대부분의 수입이 정부에 귀속되어 다른 일에 쓰여지던가 아니면 일부 재벌들에게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 페루의 IGV라는 부가세 비슷한 세금은 무려 18%나 했다. 도로 건설은 국가 개발 계획의 핵심적인 사업이다. 세금 걷어서 도로를 지을 것이지 빌어먹을 새끼들. 그러고 보니 주요 도로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도로가 비포장이었다. 페루의 관광지를 전전하면서 비까번쩍한 도심의 상가와 페루 농촌의 극단적인 가난이 이루는 대비가 보통 가난한 나라들 수준 이상 임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페루에서 데모가 잦은 것 같다.

트럭은 오얀따이땀보를 4km쯤 남겨두고 섰다. 앞에 데모 행렬이 걸어가면서 도로에 돌을 던져 놓고 있었다. 운전수가 내려 돌을 치운다.

하는 수 없네. 걸어야지. 트럭에서 내릴 때 말썽이 좀 있었다.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서양 여행객들과 트럭 이용료가 3솔이라고 바가지를 긁는 운전수와 대판 싸움이 붙었다. 대략 10km쯤 달렸으니까 운임은 0.5솔 정도가 적당한데 서양인들은 1솔 이상은 못 주겠다며 화를 내고 있었다. 아마 2솔 정도로 타협할 것이다. 나는 그 가격에 절대로 못 탄다. 일부는 달라는 대로 다 준 서양인들도 있었다. 그래서 서양애들이 흥정할 때는 끼어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같이 덤터기 쓰니까. 나 혼자만 외롭게 0.5솔(신 꿴또~~)을 외치다가 목소리가 묻혀 버려서 트럭에서 내려 운전수에게 해맑은 표정으로 웃으면서 인사하고 돈 안 내고 그냥 걸었다. 서양애들에게 바가지 씌우느라 바빠서 0.5솔 짜리를 신경쓸 틈도 없을 것이고 내가 0.5솔 짜리라는 것쯤은 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협상해봤자 본전도 못 건질테고... 운전사와 차장이 뻘쭘하게 웃으면서 보내준다. 3솔 낸 녀석들이 내 운임까지 내준 셈이 될 것이다. 나야 그런 일에는 무관심한 편이다.

몇몇은 씩씩거리며 억울하다는 듯이 2솔을 말 그대로 도로에 집어 던지고 나를 따라 걸었다. 앞으로 2km만 걸어가면 된다. 대여섯 명이 걸었다. 미국인 셋, 좀 시건방진 프랑스 여자애 둘. gps를 보고 몇 분 정도 걸으면 된다고 말해주고 상대하기 싫어서 혼자 성큼성큼 걸었다. 그들이 현지인을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밥맛 떨어져서 그랬다.

기차가 멎자마자 재빨리 튀어나와 먼저 트럭을 타고 도착해서 헤메고 있는 여행자들과 시장통의 북적거림을 뚫고 지나갔다. 데모로 사방이 정신이 없다. 말려야 할 경찰은 박수치면서 데모대를 환영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페루의 사정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여기서 꾸스꼬 행은 드물게 한 두 차례 밖에 없다. 우르밤바에서 꾸스꼬 행을 갈아타는 것이 낫다. 꾸스꼬행 버스를 기다리는 몇몇 허름해 보이는 여행자들에게 따라오라고 손짓 했다. 까탈 안 부리고 따라오면 저렴하게 너희들을 꾸스꼬까지 데려다 줄 수 있지롱. 꾸스꼬행 다이렉트 버스는 5솔이다. 우르밤바까지 1솔, 한 시간 거리. 꾸스꼬까지 3솔, 두 시간 거리. 4솔.

꾸스꼬에 내려 여행자들과 바이바이했다. 푸노 간단다. 고도차 때문에 머리가 어지럽다. 고산증이 벌써 일주일 넘게 괴롭힌다. '비바 라틴'이라는 한국 식당에 들어가 라면을 시켜먹었다. 라틴 여행인가 하는 책을 보니 중남미 코스를 밟은 몇몇 여행자들의 글이 있었다. 비바 라틴 사장님이 한국인이다. 숙소를 같이 하는 것 같아 물어보니 10달러란다. 아! http://www.amigos.co.kr이 여기였구나! 10달러는 좀 비싸서 짐을 지고 숙소를 찾으러 광장으로 향했다.

전에 묵은 숙소도 좋지만 다른 숙소를 찾아보려고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숙소가 정말 많다. 15솔 하는 숙소를 30초 만에 10솔로 협상하고 얻었다. 새로 지어 깨끗하다. 하룻 동안 쌓인 피로가 그제사 갑자기 몰려왔다. 밤 열시쯤 컴퓨터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아침에 깨었다. 뭘 할까...
마추 피추를 보고 나니 잉카 유적은 좀 그렇다. 더 보고 싶지도 않다.
다 제끼고 그냥 빈둥거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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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hu Picchu

여행기/Peru 2003. 5. 20. 19:33
gps가 고장났나? 마추 피추에 올라왔다. gps에는 2500m라고 찍혔다. 오얀따이땀보가 3500m니까 그것보다 훨씬 잘난 마추 피추는 4000m는 되어야 하지 않나 싶었다. 200m를 더 올라가 와나 피추에 이르렀을 때 정상 지석에는 2700m라고 적혀 있었다. 어라? 맞잖아? 학자들이 마추 피추가 경이로운 건축물이라고 게거품을 물었을 때 나는 마추 피추가 최소한 4000m는 되어서 엄청난 노동력을 들여 어렵게 건설한 것으로 믿었다. 2500m라... 약간 실망. 멕시코의 떼오띠우와깐이 중남미 전체를 통털어 최고의 건축인 것 같다... 잉카의 건축가들은 부조나 조각을 별로 남기지 않았다... 단지 벽을 쌓고 집을 지었는데 아파트 건설업자와 뭐가 다른지 누가 설명 좀 해 줬으면 좋겠다...

마추 피추 입구에서 폐기된 국제학생증의 구멍을 살짝 가리고 내밀었다. 학생할인, 되었다. 만세다.

남들은 120$ 주고 잉카 트레일로 3박 4일 벌벌 떨며 고생해서 와 닿는 곳인데 나는 50$ 들여서 2박 3일로 버스 타고 기차 타고 마지막까지 안 걸으려고 버스 타고 마추 피추에 올라갔다. 그 사람들이 잉카 트레일을 트래킹해서(고생해서) 닿았는데 마추 피추가 별로 안 멋있으면 김 새거나 열 받을 것 같다. 그래서 마추 피추는 최고다. 이렇게 멋진 계획 도시는 로마 시절에는 흔해 빠진 것이긴 하지만 700m의 깍아지를 듯한 절벽 위에 세운 건물들과 저 멋지고 용도를 알 수 없는 테라스는 입에서 으윽 하는 감탄사가 안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심하게 씹었군.

처음 마추 피추의 테라스를 보았을 때 칼리오스트로의 성과 천공의 성 라퓨타가 떠올랐다. 우연찮게도 작은 광장에 커다란 나무가 있었고 야마 몇 마리가 한가하게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그 주위에는... 음... 유럽 여행자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도 웃통을 벗고 선텐을 하고 있었다. 보기 싫다.


마추 피추 전경. 맞은편의 산은 와나 피추.

마추 피추의 사소한 단점들은 몇 안 되었다.

그들은 모르타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면도날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이 정교하게 지었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탐구욕으로 가득찬 채 건물의 돌을 들어 보았다. 들린다. 밀어 보았다. 밀린다. 욕 먹을까 봐 제자리로 돌려 놓았다. 주위에는 인부들이 돌 틈에 낀 이끼를 제거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 저 이끼들은 벽을 무너뜨릴 것이다. 하여튼, 발로 열나 걷어차면 마추 피추는 무너진다. 이유는 모르타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얄 패밀리가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몇몇 건물들과 성스러워 보이는 것들은 면도날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잘 지어 놓았다. 그런데 그것들은 무너지고 있었다. 종으로 힘을 균등하게 받지 못해서 그렇다. 기초 공사를 어떻게 한 거지? 어떤 일본 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마추 피추의 어떤 부분은 한 달에 1cm씩 가라앉고 있단다. 그래서 2002년부터 마추 피추에 하루 입장객 수를 500명으로 제한했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마추 피추는 언젠가 그링고 관광객들과 함께 무너져 내릴 지도 모르겠다. 의외로 장관일 것 같다.

그 다음은 용도를 알 수 없는 테라스다. 테라스에는 작물을 키울 수가 없다. 농작물을 키우면 테라스가 무너진다. 테라스가 좁아 농작물을 키우면 지력이 급격히 약화된다. 그래서 테라스를 만든 것이 경작 목적은 아닌 것 같다. 일단 건축물의 무게를 분산시키는 역할을 하고(잉카인의 아크로 폴리스를 지탱하기 위해) 그리고 아마도 야마를 키우려고 뿌리가 깊숙히 박히지 않는 풀들이 테라스 에서 자라게 내버려 둔 것 같다. 풀이 자라면 야마들이 풀을 뜯어먹고, 잉카인은 야마를 잡아먹고. 테라스의 또다른 목적은 도시를 잘 은닉하는데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밑에서는 테라스 때문에 건물들이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위에서는 아래가 보이지 않았다. 마추 피추에는 자폐증 왕족들이 살고 있었을까? 어떤 주장에 따르면 선택받은 여자들이 마추 피추에서 살았다고 한다. 유골의 80%가 여성이었다. 소수의 사제와 다수의 여성들이라면 음... 흔한 그림이 나오는군...

마추 피추 유적에서 유일하게, 눈에 띄게 '과학적'인 부분은 태양석이다. 한눈에 보자마자 알았다. 그런데 그놈에 태양석은 하루 중 시간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눈금이나 파낸 흔적이 없다) 계절의 변화만을 추적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천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장치 같은 것은 없었다. 잉카 문명은 ad 12세기에서 ad 17세기 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에 다른 문명권에서는 시간 뿐만 아니라 계절의 변화를 정확하게 추적할 수 있는 천문 관측 시설을 이미 만들어 놓았다. 천문관측의 목적도 아리송하다. 주변에 컬티베이션이 가능한 면적은 강을 따라 지극히 좁았다. 여긴 꼴까 계곡처럼 광대한 경작지가 될 여건을 갖추지 못했다.

잉카인들은 창문을 항상 마름모꼴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건축의 기적 중에 하나인 아치를 17세기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중국은 ad 2세기 무렵 그것을 발견했다. 아마 더 이전에 아치를 알았을 것이다. 가이드라면 왜 그들이 마름모꼴로 창문을 만들었는가 라고 질문한 후, who knows? nobody knows! 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연극적으로. 흐음...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3000년 전의 인간과 현재의 인간은 완전히 똑같다. 현세의 사람들이 그 당시 사람들이 뭔가를 하나 이룩해 놓았으면 기특하다는 듯이 찬탄을 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추 피추의 수로 관계 시설: 로마에 비교할 바는 아닌 것 같고, 위쪽 지방의 떼오띠우아깐 문명의 사우나 시설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그 당시 아랍 문명권은(특히 무굴은) 기압차를 이용하여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물을 끌어 올리고 자랑 삼아 분수를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잉카는 2단계 수도꼭지를 만들었다. 이거 정말 신기하다. 말로 설명하려니 어렵고 눈으로 보면 재밌다. 오얀따이땀보에서 가이드가 시범을 보일 때는 오얀따이땀보의 수로만 그런 줄 알았는데 여기서도 실험해 보니까, 된다.

아무튼 여러 가지 면에서 마추 피추는 최고라고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잘못 읽었나 하고 여러 문헌을 뒤져 보았다. 잘못 읽었다. 마추 피추는 '남미' 최고의 유적지였다. 으어어어...

마추 피추는 고소 공포증을 유발할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처럼 분위기가 사뭇 으시시했다. 직접적인 경험을 반영하지 못하는 여러 사진들의 입체감이 없는 묘사와는 달리 그 테라스를 걷고(모르타르 안 발랐다. 모서리에서 발 구르다가 추락할 수도 있다) 건물 사이를 돌아 다니면 내가 마치 공중에 뜬 건물을 유영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발걸음이 가볍다->시원하다->썰렁하다->으시시하다 순으로 기분이 변했다. 감이 느려서 그런건가...

마추 피추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심심해서 와나 피추로 올라갔다. 와나 피추란 마추 피추 사진에 흔히 등장하는 마추 피추보다 약 200미터 높은 모나미 볼펜 끄트머리처럼 생긴 산이다. 올라가는 입구에서 이름을 적었다. 가끔 떨어져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생길까봐 이름을 적어두고 돌아오면 돌아왔다고 신고하란다. 그렇게 위험한가? 고소 공포증이 거의 없는 편인데도 올라갈 때부터 분위기가 안 좋다. 바위는 미끄럽고 계단은 무너질 것 같았다. 다시 생각나는 것인데, 이 미친 놈들은 모르타르를 안 썼다. 잉카인은 날개라도 달렸단 말인가? 아니면 영양실조로 몸무게가 날아갈 것처럼 가볍기라도 했나? 최소한 잉카인들에게 고소 공포증은 존재하지 않는 종류의 정신병인 것 같다. 태양과 콘돌의 후손이니까?

빡세게 30분 가량 올라가 마지막 오분은 오체투지로 기다시피해서 정상에 이르렀다. 2500미터라서 숨이 턱까지 올라온다. 그리고 무시무시하다. 뭘 하나 굴리면 지엄한 중력 가속도를 충실히 지키며 떨어져 내릴 것 같은 900미터의 깍아지를 듯한 절벽이 눈 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와나 피추에서 중력의 사과와 에너지 바를 피지컬한 점심으로 먹고 담배 한대 피운 후 내려왔다. 바람이 안 불어서 정말 다행이다. 정상에서 겁에 질렸음에도 겁에 질리지 않은 체 하는 있는 집 페루 자제들과 농담 따먹기를 했다. 어제부터 줄곳 만났는데, 재밌고 밝은 아이들이다.

에너지 바: 트래킹할 때 반드시 지참하라는 식품. 여러 곡물류와 견과류를 살짝 압축해서 만든 과자. 대략 100kcal 정도인데 400kcal라고 믿을 수 없는 사기를 치는 제품도 있다. 적어도 4개를 먹어야 한 끼 식사를 한 정도가 되는데(1솔) 조금 무겁더라도 사과(1kg에 1솔)가 나을 것 같다. 초콜렛바만도 못하다. 신뢰가 안 가는 제품이다. 잉카의 전통적인 어떤 식품은 고단백질이라 우주 비행사들이 먹는다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음료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잉카 사람들은 콘돌이 나는 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기들도 날아보자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콘돌 같은 커다란 날개를 만들고 벼랑에서 연습 끝에 드디어 조정에 성공했다. 상승기류를 정복했다. 그들은 당시 잉카의 전통적인 고단백질 음료수를 끼니 때마다 마셨을 것이다.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키고 와나 피추와 마추 피추와 그 아래에 있는 아구아 깔리엔떼 사이를 행 글라이더를 타고 이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잉카 글라이더는 잊혀지고 말았다.

그들은 과학 문명의 발전과 예술의 방종이 인간성을 망가뜨리고 자연을 파괴하리라는 사실을 신석기 시대에 숙지한 다음 모든 과학문명을 폐기하고(글라이더나 바퀴 따위 빛나는 최신 기술) 그것을 기록하는 문자 체계를 없애버린 채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에서 살다가 다시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삶을 선택했다. 그런데 그들은 황금을 찾아 헤메다니는 스페냐드라는 돌발변수를 예측하지 못했다. 때문에 잉카는 몰살 당하고 현재의 잉카 후손들은 스페인 문화에 거의 동화되거나 흡수되고 심각한 빈부의 격차가 중대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 잉카의 후손들이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게 된 데에는 거개의 사정이 있었던 것이지, 잉카 문명이 다른 문명과 교류를 못해 심각하게 정체된 탓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발해와 돈독한 교류를 가졌더라면 글라이더에 바퀴를 달고 양 날개에 화통을 설치하고 몸통에 화약을 달아놓은 콘도르 전폭기를 개발했을 지도 모른다. 수백대의 콘도르 전투기가 푸른 하늘을 뒤덮고 구름 사이를 넘나들며 스페냐드의 무적 함대를 전멸시키는 장쾌한 광경을 상상해 봤다. 상상만 할 수 있어서 아쉽다. 식민 역사란 더럽게 슬프고 구역질나는 것이다.


와나 피추 정상. 매우 스산.

돌아와서 몇 명이나 와나 피추를 올라갔나 봤다. 오늘은 140명 가량. 별로 추천해주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가봤자 전망이 끝내 주게 좋지도 않았다. 원근이 안 잡힌다. 그냥 정력이 남아돌아서 올라갔다 오는 것이지. 마추 피추는 hut of the care taker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가장 멋지다. 엽서 사진에 워낙 많이 등장해서 식상하긴 하지만. hut of care taker에서 draw bridge 쪽으로 좀더 가면 테라스와 도시 윤곽이 한 눈에 들어오는 지점이 있다. 발자국이 나 있었다.

마추 피추에서 내려 올 때 버스를 탔다. 왕복 버스표를 끊었다. 버스에는 노인네들만 탔다. 다른 사람들은 걸었다. -_-; 1m 라도 덜 걸어보자고 하는 짓이긴 하지만 내가 좀 심했던 것 같다. 아니, 사실은 마추 피추가 4000m는 되는 줄 알고 부러 왕복 버스표를 끊었다. 4000m가 어떤 곳이냐. 내리막길에서도 숨이 턱까지 차고 땀이 주르륵 흘러 내리는, 그런 곳이다. 사전 정보를 제대로 수집하지 않은 탓이다.

마추 피추에 올라가느라 고생 했으니 이제 온천욕을 즐겨야지. 수영복은 없고 반 바지와 타올을 들고 온천을 찾아갔다. 오오... 단돈 1.5$짜리 노상 온천이다. 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온천에는 서너 명의 인디헤나 밖에 없다. 머리에 비를 맞으며 따뜻한 온천 속에서 손가락이 심하게 쭈글쭈글해 질 때까지 밍기적 거렸다. 뼈속까지 시원하다... 여독이 순식간에 풀리는 것 같다. 온천은 흙바닥에 사방을 콘크리트로 둘러놓은 단순한 것이었다. 발바닥이 따끈따끈한 것을 보니 밑에서 물이 데워지는 것 같다. 서양애들이 몇몇 들어오려고 해서 재빨리 나왔다. 서양 애들의 몸에서 나는 냄새에 대한 공포 내지는 거부감이 있었다. 그들이 탕에 들어오면 물이 더러워 진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며칠 샤워를 안한 내가 더 탕을 더럽혔을텐데...

온천을 끝냈으니 이번에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해 보자. 식당을 전전했다. 별로 마땅한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식당 고르는 건 정말 일이다. 그러다가, 입이 방정이라고... 20솔 하는 식사를 6솔에 해주면 먹겠다고 말했다. 그는 7솔을 불렀다. 맙소사. 식사를 가지고 흥정을 하다니... 그리고 흥정이 되다니! 아무리 everything is negotiable이라고 하지만 식사 가지고 흥정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머리를 긁적이며 들어섰다. 손님이 없다. 비수기니까. 레스토랑 세팅이 럭셔리하다. 괜히 비싸 보이는데 들어온 것 같은데.. 그냥 점심 때처럼 시장통에서 왕창 퍼주는 밥이나 배불리 먹을 껄 그랬나? 그래도 빈티 좀 그만 내고 제대로 먹어보자. 온천에 들어가 모처럼 기분이 개운한데...

송어가 이 지방 특산물이었지. 물이 차갑고 맑은 동네다. 하지만 강원도하고는 비교할 바가 못된다. 온두라스 정도라면 강원도와 막상막하가 되지 않을까 싶다. 옥수수 크림 스프와 송어 튀김과 밥과 감자 튀김과 샐러드와 레몬 쥬스를 시켰다. 감자 튀김은 언제나 plentyful하게 나와서 만족스럽다. 감자의 제국이니까.

스프가 잘 나왔다. 제대로 크림을 얹어왔다. 따뜻하다. 적당한 끈기에 맛이 고소하고 식욕을 돋군다. 식탁 세팅은 약식이지만 제대로 해 놨다. 한켠에 스페인 와인 셀렉션 북이 놓여 있다. 암 그래야지. 책을 뒤적이고 있는데 메인 디시가 나왔다. 송어 튀김은 뼈를 바르고 양쪽을 저며서 밀가루 옷을 아주 얇게 입혀 튀겨왔다. 모양은 예쁘장하고 그럴듯 한데, 소스가 약간 무겁고 고기 맛이 별로다. 무슨 망할 놈에 양식이라고... 역시 송어는 회를 떠서 회고추장에 퍽퍽 발라 소주와 함께 배불리 먹어야... 샐러드는 약간 미끈거리지만 좋은 재료를 써서 먹을만 했다. 레몬 쥬스는 단순히, 신선했다. 레몬 쥬스는 만점이다. 서빙 보는 태도가 나쁘고 와인을 권하지 않았다. 아무리 싸게 '할인'해서 먹는 것이지만 디저트 주문을 안 받아 점수가 많이 깎였다. 난, 젤리를 먹을 생각이었다... 음. 빈티가 나서 그랬나? 뜨내기 손님을 받는 관광지 식당에서 많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그럭 저럭 맛있게 먹었다. 온천욕 다음에 괜찮은 식사를 한 정도면 까탈 부리지 말고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맨날 식당에서 이 지랄을 하니 여자가 도망가지.

지배인이 약간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계산서를 내밀었다. 나도 약간 비웃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계산을 치렀다.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당근 하뽕(일본)이지. 사요나라, 하고 인사한다. 암, 사요나라지. 마추 피추 마을은 관광지답게 숨이 턱턱 막히는 가격을 제시하고는 했다.

아, 그러나 마추 피추...
오늘 저렴하게 한 관광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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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군데를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을 사서 10불 주고 사서 그중 여섯 군데를 돌았다. 구멍난(폐기된) 학생증을 내밀었지만 25세 이상이라며 할인이 안된단다. 성당 들어가는데 돈을 받는 것에 익숙해 지지 않는다. 중미에서는 즐비하게, 화려한 것들을, 공짜로 봤는데... 남미는 다른가?

꾸스꿰냐, 잉카인들의 뛰어난 건축 기술 중 최고봉에 속한다는 것. 벽돌 이음새에 면도칼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만들었다는 것. 꾸스꼬의 도시 계획을 보니 꾸스꼬의 거리와 건물 배치가 푸마를 닮도록 해 놓았다. 샥샤이후만이 머리에 해당한다면 꾸스꿰냐는 음경 쯤에 위치. 암. 머리만큼 음경은 중요하지. 규모로 보아 그럴게 대단치는 않았다. 그러나 대비는 매우 인상적이다. 몇백 명 안되는 피사로의 부하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성당을 지었을 리는 만무하고, 스페냐드 군대의 칼날에 떨었을 잉카인들이 자신의 조상들이 지어놓은 멋진 성을 파괴해서 그 벽돌로 스페냐드식 건물을 지었을 터인데, 그것들과 더러 남아있는 꾸스꿰냐의 기반이 부조화를 이루었다. 형편없이 만든 성당과 면도날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만든 성벽이라...

잉카 문명이 지배했던 시기를 살펴보았다. ad 12세기에서 17세기까지다. 전 세계적으로 그 시절의 건축술을 비교해 보건대, 잉카 건축술이 남다르게 뛰어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돌을 다루는 사람들이라면 그 정도 쯤은 할 수 있다. 건물 벽 마다 약간의 경사를 주었는데(0.5도 가량)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왜 그렇게 이상하게 만들어 놨는지, 이런 건물을 왜 만들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특이한 것은 이들이 건물을 짓기 전에 일종의 3차원 설계 조감도를 돌로 만들어 놓고 시작했다는 것. 특이하다고 하는 이유는 진흙으로 만들면 간단한데 왜 돌로 만들었나 하는 점이다. 아니면 돌로 만든 것만 남아있는 것이던지. 잘 만든 것들은 아름답다. 부스러기와 윤곽 밖에 남지 않았지만 꾸스꿰냐는 아름다웠다.

까떼드랄에서 사진 찍다가 걸렸다. 부주의했다. 사방에 사진 찍는 것을 감시하는 짭새가 깔려 있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들더니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날더러 여권을 달라고 한다. 어... 지금 없다고 했다. 이건 명백한 절도 행위이므로 경찰에 가자고 한다. 바쁜데 경찰에는 왜 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 그러면 사진 지우면 될 꺼 아네요. 개중 혼자서 길길이 날뛰는 작자가 있었다. 아아 사진 찍으면 안 되는지 몰랐다. 미안하다. 내가 지우려니까 무슨 수작을 부릴 것이 염려스러웠던지 자기가 직접 지운다. 성당이 성스럽기 때문에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그걸 재산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박물관에서 찍은 잉카 유물을 찍은 사진은 지우지 않았다. 잉카 유물 찍은 것은 안 지우고 성당의 별볼일 없는 그림들은 지운다? 재산의 값어치를 평가하는 방법이 다른 것 같다. 상황이 안 좋으니 부조리에 항의하지 말고(잉카 유물 사진도 지워야 공평하지 않은가!) 입 다물자. 경찰이 성당 바깥까지 정중하게 안내해 주었다. 다시 말해, 쫓겨났다. 성당 바깥에서는 성당 내부를 찍은 엽서를 버젓이 팔고 있었다. 비웃어야 하는데 민망하기만 하다. 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므로 돌아 다니면서 계속 사진을 찍었다.

까뜨리나 성당에 들어가서 여기 저기 기웃거리다가 관리인에게 들켰다. 굴뚝에 관해 좀 이상한 얘기를 나눴다. 그녀는 성당의 역사에 관해 설명해 주려고 했다. 별 관심 없는데... 내 국적을 묻더니 내가 리마에서 왔거나 미국인일 꺼라고 생각했단다. 거짓말. 그래서 그녀에게 시내에 일본 음식점이 있냐고 물었다. 알려준다. 킨 따로 주인은 나를 보더니 대번에 한국인인 줄 알아보았다. 음식이 쥐꼬리만큼 나와 몹시 허전했다. 한국인은 이렇게 먹으면 쓰러진다...

한국 식당이 눈에 띄어 들어갔다. corea house라고 씌여 있었지만 메뉴에는 중국식, 일식, 페루음식들이 뒤죽 박죽 섞여 있었고 심지어 가라오께도 운영하고 있다. 메뉴를 보고 이게 꼬레아노 라면 맞냐고 몇 번을 확인해서 물으니 그렇다면서 가져온 것이 중국식 완탕 스프였다. 어? 아닌데. 신라면 봉투를 들고온다. 바로 그거라고요! 끓여온 라면에 돼지고기와 닭고기가 들어가 있다. 어쨋든 라면에 밥 말아 먹으니 좋다. 고기는 건졌다.

구불구불한 꾸스꼬 거리 모습이 인상적이다. 개중 절반이 레스토랑과 호텔이었다. 해가 질 무렵 산 블라스에서 느적느적 고개 중턱으로 올라가(꾸스꼬의 도시 설계상 푸마의 등 언저리에 해당) 불빛이 하나 둘씩 켜지는 모습을 감상했다. 달은 둥글고 선명했다. 달은 광장에 서성이는 레스토랑 삐끼떼와 그링고 그룹 관광객들과 무력하게 앉아 있는 거지들을 자세히 비춰 주었다.

밤에는 극심한 편두통에 시달렸다. 꾸스꼬에서 경험한 여러 아이러니와 부조리 때문이라고 믿는다. 낮에는 쌀쌀하고 잘 때는 어깨가 시렸다.

디즈니가 48시간 이후면 다시 읽을 수 없도록 스스로 망가지는 self destructing dvd를 발매할 예정이라고 한다. 산소에 노출되면 dvd가 붉은색에서 검정색으로 변해 레이저를 차단한다나. 렌탈 회사에 다시 되돌려줄 필요가 없는 일회용... 훌륭한 기술이다. 빌려서 48시간 이내에 복사하고 원본은 쓰레기통에 버리면 된다.

조지 부시가 '조지고 부시는' 사람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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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sco -> Urbamba -> Ollantaytambo -> Agua Caliente

마추 픽추를 힘 안 들이고 가장 싸게 가는 길을 알게 되었다. 그 와중에 꾸스꼬 부근의 전 유적지를 3.5일 만에 다 돌아볼 수 있는 괜찮은 스케쥴을 '발견'했다. 그것보다 짧은 루트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난 그대로 하지 못한다. 이미 옵티마이징을 할 시기가 지나 버렸다. 꾸스꼬는 페루 관광의 핵심이라 많이들 찾는 곳임에도 최적 루트에 관해 아무도 얘기를 안 하고 있다는 점이 신기하다.

리마에서부터 만나는 여행자들을 계속 만나고 있다. 하긴, 내가 지금 가는 코스는 페루 남부 여행 루트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지.

무슨 무슨 협회의 고산병 적응에 관한 몇 가지 주의점을 읽었다.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1. 물을 많이 마실 것.
2. 탄산 음료를 마시지 말 것. <-- 증세를 악화시킴.
3. 기름기 있는 음식을 피할 것.
4. 코카잎이나 코카잎으로 만든 차를 계속 마실 것.
5. 서서히 운동을 해 나갈 것
6. 음식을 조금씩 자주 먹을 것.

어떤 멕시코 여행자가 가르쳐 준 고산병 적응에 관한 방법이 하나 있었다: 달디 단 캔디를 수시로 복용.

오얀따이땀보에서 예기치 못한 수확을 얻었다. 잉카 시절의 도시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저 기차 시간이 남아서 돌아다닌 것 뿐인데... 운이 좋다. 성스러운 계곡에서 꽤 시간을 보냈다. 관광객들이 많아 어차피 조용하게 시간 보내기는 글른 곳이었다. 지나가는 가이드의 설명을 귀동냥하면서...

페루는 투어를 따라가는 편이 안 그런 것 보다 나아 보인다. 가격 차이가 심하게 나는 것도 아니고. 바예스타스 섬이나, 나스카나, 꼴까 계곡 등은 투어가 아니면 도저히 제대로 볼 방법이 없다. 바예스타스 섬이나, 나스카는 투어가 아니면 아예 갈 방법조차 없다. 꾸스꼬 주변의 잉카 유적도 마찬가지다. 왠간히 공부해 오지 않는 한, 이건 정말 심한 돌덩이들이다. 부조가 전혀 없다. 그래서 추측이나 상상이 매우 어렵다. 유적 형태의 기능적인 분류가 일부분 가능한 정도다. 이 지역을 방문할 때 배낭 여행자들이 늘 그렇듯이 혼자 돌아다니는 것을 별로 추천해 줄 수가 없다. 투어가 낫다. 가이드들 대개가 성실하다. 이런 것을 누가 조언해 줬더라면(아니면 게시판에 올리던가) 페루에서 멍청하게 도시를 전전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을텐데...

중남미 쪽은 한국 여행객들이 찾는 비율이 다른 지역에 비해 현저히 낮은 것 같다.

기차를 타니 아구아 깔리엔떼로 가는 배낭 여행자들이 거의 200명 가까이 되었다. 마추 픽추로 가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잉카 트레일은 3박 4일에 140$ 가량 하고 지금 내가 따라온 길은 2박 3일에 50$ 정도 든다. 140$ 가량 들면서 나흘 동안 추위에 벌벌 떨면서 갖은 고생을 하고 마추 픽추를 찾는데, 나처럼 이런저런 트래킹을 많이 해 본 사람에게는 잉카 트레일이 별다른 매력이 없을 것 같다. 여행사를 전전하면서 잉카 트레일의 사진들을 쳐다보다가 안 하기로 결정했다. 사진을 안 봤으면 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 사진에는 산뜻한 오솔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과, 떼거지로 모여 밥을 먹는 사람들이 보였다. 마음에 안 든다. 새벽 4시30분부터 시작해서 오후 3-4시면 캠핑 사이트에 도착하고 그 다음에는 밥 먹고 할 일이 없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덜덜 떠는 것 밖에. 으쓱. 돈 더 들여 더 고생 하겠다는 패기가 하나도 안 부럽다. :)

Colca Canyon &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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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quipa to Cusco

여행기/Peru 2003. 5. 17. 19:11
엊그제 바빠서 미처 적지 못한 것들. Colca Canyon tour에 추가할 것들.

함께 투어에 간 일행은 페루에 정착해 살고 있는 미국인 가족 4명(아들, 딸은 페루인) 25$, 캐나다인 2명 20$, 한국인 1마리 18$, 페루 가족 3명 ?$. 캐나다인들과 한국인만 빼고는 모두 에스빠뇰을 할 줄 아는 관계로 스트레스 받게 에스빠뇰로 자세히 설명하다가 영어로 다시 설명한다. 남들 다 웃은 다음에 웃는 기분 아나?

국립공원을 지나갔다. 길은 내내 비포장이었다. 그 옆으로 아스팔트 길을 내고 있었다. 하하, 나는 운이 좋다. 뻑 가게 멋있는 국립공원이다. 특히 당나귀처럼 신음하는 고물 봉고로 비포장에서 먼지 날리며 달려야 제맛이 날 것 같다. 강수량이 연중 40mm에 불과한, 매우 황량한 동네라 정착해 살고 싶은 기분은 영 들지 않는 곳이다. 사람이 살만한 동네가 아닌 곳은 종종 멋졌다. 꼴까 계곡과 국립공원의 아름다움은 구차하게 주전부리를 떨 것이 아니라 그냥 한가할 때 가서 보면 될 것이다. 자외선이 듬뿍 들어간 햇살로 살균하면서. 구름, 새파란 하늘, 화산, 탁 트인 지평선, 점점이 움직이는 짐승들.


Reserva Nacional Salinas y Aguada Blanca. 앞 산은 El Misti(5822m). 아레뀌빠를 작살냈던 화산. 그 앞에 거의 멸종될 뻔 했던 Vicunya들이 한가하게 놀고 있다

적어놓은 가격은 그들이 투어에 지불한 액수다. 가격 탓인지 우리는 각각 다른 숙소에 묵었다. 페루인 가족과 나는 한 숙소에 묵었다. 수준 차이가 현격하게 났다. 캐나다인 둘과 투어 내내 붙어 다녔는데, 별 이유는 없고 에스빠뇰이 물결치는 투어 차량 안에서 우리 셋먼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잉카 문명에 관해 공부할까 하다가 김이 새 버렸다. 그들이 식용으로 사용한 감자의 종류가 2000종이라는 글도 있고 200종이라는 글도 있었다. 헷갈리잖아. 문제는 그게 아니고 그들이 품종 개량을 시도한 적이 없는 것 같다는 점이다. 어떻게 수천년 동안 자기들이 재배하는 주요 농작물을 그렇게 방치해 놓을 수 있을까. 시장에서 본 감자들의 종류가 여전히 가지각색이다. 바퀴가 없었다는 것은 이번에는 부차적인 문제다. 수도사 멘델 이전에도 평생 농사를 짓고 살아온 사람들은 인위적인 교배가 품질 개량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꼴까 계곡은 그런 육종학 실험을 하기에 완벽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연간 서늘하고 일정한 기온과 풍부한 수량, 비옥한 토질 등등. 어쩌면 그런 이상적인 환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 근심 없이 살다보니까... 모르겠다. 나란 놈은 그런 시시한 것에 토라진다.

중간 중간 다른 투어차를 타고 온 일본인들과 얘기를 나눠보니 걔네들 가이드는 설명을 안 해주었단다. 차를 타고 행선지에 도착하면 사진 찍고 멀뚱히 있다가 다시 이동한다고. 그래서 그들에게 잉카 토착인들의 복식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해 주기도 했다. 우리 가이드는 아는 것이 많아서 너무 많은 설명을 해 줬다.

우리 팀 가이드는 머리가 벗겨진 인텔리인데 잉카 제국 얘기를 하다가 아레뀌빠의 식민 역사와(초기 피사로의 정복 기지) 현재의 아레뀌빠에 살고 있는 토착 인디헤나(인디언)의 비참한 삶을 얘기했다. 그들은 요즘 물이 없어 원주민끼리 돈을 걷어 50솔에 물탱크 하나를 산다고 한다. 아레뀌빠 시민들의 자존심 얘기도 줄기차게 늘어놓았다. 아레꿰빠는 식민지에 정복당하여 식민 생활에 젖은 페루인들을 멸시했는데, 먹고 살자니 자기들도 서양인들이 가져온 편리한 서구식 생활에 적응하는 등 전통적 이념과 생활의 불일치가 한동안 골이 깊었다나. 그런데 지진이 싹쓸이를 한 후 사정이 변했단다.

우리 안경을 끼고 머리가 벗겨진 인텔리 가이드는 취미생활로 태권도를 하고 있다. 날더러 한국에서도 태권도가 인기있냐고 물었다. 내가 아는 것은 태권도 협회의 뿌리깊은 비리 뿐이었다. 차마 그렇게는 말하지 못하고 거의 모든 종류의 무술과 구기 종목에서 한국이 일본을 앞지른지 오래되었다는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데이빗(캐나다인)이 나에게 물었다. 넌 그중 뭘 할 줄 아냐? 아무 것도 못해. 몹시 비웃는다. 당황한 나머지 나를 포함한 한국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태권도를 배우고 살인술도 배우고 개나소나 총질을 다 한다고 말했다. 나한테 M16A1 한 자루만 주면 여기 있는 콘돌들을 한 시간 만에 전부 몰살시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말 좋은 사격 표적이라고도 말했다. 그러자 분위기가 몹시 썰렁해졌다. 콘돌이 페루의 국조였던가?

데이빗은 참 대단한 친구다. 한숨도 못자고 지난 밤에 10시간 동안 설사를 해서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와중에도 투어 팀의 여자들 앞에서 미소를 띄운 채 재롱을 떨며 그들을 즐겁게 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가지만, 그 정신 만큼은 본받을만 하다.

캐나다인들을 포함한 우리 아웃사이더(떨거지) 셋은 콘돌을 멍하게 쳐다보는 일이 남자가 할 짓이 아니라는 데 동의하고(사실 할 일이 없어서) 1200미터짜리 계곡을 내려 가려다가 경찰한테 걸려서 무안을 당했다. 하긴 그랬다, 우리는 콘돌이 아니라서 떨어지면 상승기류를 탈 수 없을 것이다.

높이 높이 높이 멀리 멀리 멀리 하지만 우아하고 느긋하게. 9시가 지나자 콘돌들이 사라졌다. 콘돌은 어디로 갔나. 잉카인의 비극을 절절하게 노래하는 시나 노래 제목으로 어울릴 것 같다. 어쩌면 어렸을 적에 그런 얘기를 들어서 지금 기억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대머리 인텔리 가이드 아저씨 말처럼 페루인들은 정체성을 잃고 특히나 돈이 한푼도 없이 방황하고 있다. 인디헤나의 유아 사망률은 극단적으로 높단다. 페루는 극빈국 중에 하나였다. 잊어먹기 전에 적자. 가이드의 이름은 기예르모다. 그는 인류학과를 졸업한 후 전공을 살려 가이드로 삽질하고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얘기는, 스페니야드에게 개죽음을 당하고 토지를 약탈당한 사람들이 반군을 만들어 그들과 대항하다가 죽어간 얘기다. 그중 한 명은 잡혀서 사지를 말에 묶어 능지처참을 하려고 했는데 잘 찢어지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목을 잘랐다고 한다. 그 찢어지지 않은 남자를 꾸스꼬의 거리 무랄에서 발견했다. 과떼말라의 가엾은 인디오처럼 술과 마약에 쩔어 길거리에 개처럼 나뒹굴지 말고 잉카의 후손들은 잘 해 나가길 빌어줬다.


돌아오는 길에 치바이에서 데모가 있었다. 선생들이 파업하고 학생들이 그들을 밀어줬다. 선생들 봉급 인상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길거리에 서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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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끼빠에서 꾸스꼬까지 12시간 걸리는 버스가 실제로는 20시간 가까이 걸렸다. 편하게 가지고 그나마 침대차를 탄 것인데 이 모양이다. 중간 중간 도로를 점거하고 데모하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때마다 버스가 멎었다. 그때마다 잠에서 깨어났다. 밤새 데모를 한 모양이다. 어쩌면 일시를 정해 동시에 국가적 차원에서 시작한 데모인지도 모르겠다. 이 데모가 마음에 안 드는 점은, 주요 도로 상에 돌을 깔아 차량 통행을 막고 구호를 외친다는 점이다. 투어 이틀하고 20시간 차를 타고 고산병 때문에 속이 메스꺼워서 거진 3일째 맛이 간 상태인데 어서 빨리 꾸스꼬에 도착해 발 뻗고 누워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래도 궁금함을 참지 못해 도착하자마자 페루 소식을 뒤져봤지만 별다른 얘기가 없다. 대체 이 나라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건가?

버스가 멈춘 곳이 어딘지도 모르겠고 벌써 4시간을 기다렸다. 하는 수 없이 지도를 펼치고 gps로 지점을 찍어 대충 위치를 파악했다. 26번 도로와 어떤 도로가 만나는 지점인 것 같다. 한마디로 교통의 요충지인데 여기서 2시간을 더 가야 꾸스꼬가 나올 것이다. 직선 거리는 98km. 버스 앞으로 수십 대의 차량이, 버스 뒤로 또한 수십 대의 차량이 네 시간째 데모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다. 한 시간만 더 기다려보고 짐을 버스에서 내려 각개전투를 할 생각이다. 히치라도 해야지 이거야 원.

버스가 움직였다. 다시 선다. 피시식 김이 샌다.

남들이 한 번 쯤은 와 보고 싶어하는 꾸스꼬에 그렇게 간신히, 꾸역꾸역, 돌을 치워가며 도착했다. 데모대는 도로에 깔아 놓은 돌을 치우지 않고 그냥 돌아갔다.

하지만 아레끼빠에서 꾸스꼬로 오는 도중에 본 풍경이 오래오래 인상에 남을 것 같다. 엄청나게 커다란 보름달이 평원을 비추는 장관을 넋을 잃고 쳐다 보았다. 잠을 못 잤지만... 아... 그래도 나는 운이 좋다. 정말 운이 좋다.

별 생각 없이 페루에 와서 좋은 것 많이 본다. 멕시코 여행할 때처럼 어리버리 하다가 한 달 보내는 것은 우스울 것 같은 나라다.

꾸스꼬를 페루의 카트만두라고 하던데 도심의 지독한 매연이 카트만두와 정말 똑 같았다. 다른 점? 많다.

고산병 증세가 거의 사라졌다. 마떼 데 꼬까(코카잎으로 끓인 차)와 코카잎을 줄기차게 마시고 씹었다. 차 안의 안내양은 내가 시들어 갈 때마다 따뜻한 마떼 데 꼬까를 건네줬다. 아레끼빠 사람들의 친절이 인상에 남는다. 아레끼빠 사람들은 지금까지 만난 페루 사람들과는 어딘가 모르게 조금 다른 것 같다.

광장에 있는 INTEJ로 학생증 만들러 가봤다. 만드는 작자가 마추 피추 할인받으려고요? 라고 묻는다. 그런데요? 카드는 만들 수 있지만 꾸스꼬에서는 이 카드로 아무 것도 할인 안 됩니다. 예? 안되요. 예... 안 되는구나. 안 되는데 가지 말까?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말이랬지.

지쳤다. 만사가 귀찮아서 택시 타고 시내로 들어와 밥부터 먹고 빨래는 론드리에 맡겼다. 수염 안 깍은 지 일주일이 넘었다. 걸레같은 옷 뿐만 아니라 마음도 남루해졌다. 지금은 그냥 우라늄 235가 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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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a Canyon

여행기/Peru 2003. 5. 15. 18:26
9am. 투어 시작. 4800m에서 잠시 휴식. 머리가 아파 줄곳 Coca잎을 씹었다. 한번에 10개 이상은 씹지 말란다. 그래서 20개씩 씹었다. 황홀하다.

3.30pm. Chivay 도착. 꼴까 계곡은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계곡이 아니다. 하지만 가이드 설명에 초를 치지는 않았다.

펀치 드렁큰 상태로 작은 마을을 좀비처럼 어슬렁거렸다. 고산에 오르면 어김없이 두통이 찾아왔다. 다른 사람들은 금방 적응하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일까.

1. 적혈구의 헤모글로빈 수가 원래 적다. 빈혈끼가...
2. 운동 부족과 흡연으로 폐활량이 작다. 폐가 망가져서...
3. 대뇌의 산소 소비량이 매우 크다. 머리를 많이 써서...

3항이 유난히 마음에 든다.

고산증 치료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통을 가라 앉히면서 적혈구 숫자가 늘어나길 기다려 보는 수 밖에. 고산병에 시달리고 있는 관계로(앞으로도 주욱) 내게는 코카잎이 꼭 필요하다. 원츄~

그나저나 4000미터만 넘으면 한결같이 화성같아 보일 꺼라고 지레 짐작했는데 꼴까 계곡 근처는 좀 달랐다. windows xp 초기 바탕화면 같은 곳이었다.

5am. 기상. 아침. 코카잎을 너무 많이 먹어 밤부터 10시간을 줄곳 잤다.
6am. Cruz del Condor 방문.

콘돌이 1200미터 깊이의 계곡 사이에서 상승기류를 타고 활공하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스프링처럼 빙글빙글 돌며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간다. 꼬리 날개를 좌우로 비틀어 방향을 조절했다. 갈색의 새끼들은 이곳에서 활공 연습을 한다고...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잉카 전기 시대에 두 종족이 이 꼴까 계곡으로 내려왔는데 하나는 콘헤드고 하나는 플랫헤드였단다. 콘헤드 족은 뾰족한 화산에서 살았고 플랫헤드족은 평평한 분화구가 있는 화산에서 살았는데,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기억하기 위해서 어렸을 적부터 머리를 모자로 묶어 머리 모양을 완성한단다.

참... 멋진 부족들이다. 피사로가 꾸스꼬에서 산맥을 넘어와 그들을 몰살시켰다. 그래서 콘헤드와 플랫헤드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5.30pm. 아레뀌빠로 돌아왔다. 꾸스꼬행 버스표를 예약했다. 한 시간 후에 꾸스꼬로 떠난다. 여전히 머리가 아프다.

나스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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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quipa

여행기/Peru 2003. 5. 13. 17:45
Nazca Lines Over Flight tour는 아침 8시에 시작해서 딱 한 시간 만에 끝났다. 공항 픽업, 3인승 경비행기 35분, 다시 시내로. 예쁜 일본 아가씨가 함께 해서 즐겁게 오버했다. 그나저나 너무 일찍 끝나서 하루 종일 할 일이 없다. Arequipa행 버스는 저녁 8시에 떠난다. 체크아웃한 숙소에 가서 양해를 구하고 세 시간쯤 잤다.

40년 동안 나스카 라인을 연구한 마리아 라이히 Maria Leiche 여사의 주장에 따르면, 나스카 라인은 별자리를 나타낸다. 몽키가 큰곰자리하고 같다나? 그 그림들은 나스카 사람들이 심심해서 그린 것 같다. 왠일인지 학계는 인류 문명과 예술을 발전시켜 온 가장 큰 동인인 '심심함'을 줄곳 무시했다. '심심한데 뭐 재미있는 일 없을까?' 하다가 시작한 것들.

예술이 죽여주는 점은 처음에는 심심해서 했는데, 하다 보니까 의미와 추상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찍어 놓은 나스카 사진은 맨눈으로 판독이 불가능해 이미징 작업이 필요해서 아직 안 올렸다. 미스테리 스럽지는 않았다. 심심해서 만든 티가 확연히 났다.

라이히 여사는 1998년에 죽었는데 올해는 라이히 여사의 100년째 탄신을 맞아 이런 저런 행사를 일주일 동안 하는 모양이다. 행사, 축제는 가능한 피해 다니는 형편이라 뭘 하는지 관심은 없지만.

LP를 보고 들어간 파스타 집에서 맨 스파게티를 시켜 먹었다. 그게 가장 쌌으니까. 맨 스파게티에 약간의 소금과 후추와 버터 가루만 뿌린 것 임에도 맛있다. 오랫만에 잘 만들고 제대로 삶은 스파게티를 먹어본다.

책 만드는데 돈이 그렇게 많이 들면 차라리 이 사이트를 화석화시키는 방법을 강구해 보기로 했다. 사람들이 읽기나 할까? 재미없고 쓸데없이 긴 여행기로 텍스트의 쓴 맛을 보여주지.

아레뀌빠까지 9시간. 버스는 좋았지만 자기엔 매우 불편했다. 터미널에서 바로 꼴까 계곡으로 가려다가 감기 기운 때문에 하루 쉬기로 했다. 음... 가지 말까? 가봤자 별 것도 없을텐데. 콘돌 몇 마리 보고 1200m 짜리 계곡을 잠시 걸어다니는 것이 전부다. 3-4000미터고, 추울테고, 가면 1-2일 묵어야 할 것이다. 교통이 불편하다.

평생에 한 번 와볼까 말까 한 곳이니 빼먹지 않고 다 가는 여행자와 내가 다른 점은 그런 것에 별 미련이 없다는 점이다. 여행 중 포기를 잘 했다. 귀찮거나 힘들어서.

"포기란 배추를 셀 때나 하는 말이고, 실패란 바느질할 때나 쓰는 말이다." -- 어느 집의 가훈.

가훈이 왜 저 모양일까. 배추가 없어서 꼴까 계곡 투어를 신청했다. 처음 들어간 여행사에서 가격도 묻지 않고 신청했다. 아줌마가 믿음직스러워서. 18$. 14시간 왕복 교통편, 하룻밤 숙박, 아침식사, 입장료 포함.

'오늘의 메뉴'(Menu del dia)는 리마, 삐스꼬, 나스까를 거치면서 점점 싸지더니 아레뀌빠에서는 2솔(0.5$)에 새우 스프와 오징어 튀김, 샐러드, 밥, 음료수가 나왔다.

페루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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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la Ballestas

여행기/Peru 2003. 5. 12. 14:18
Isla Ballestas 투어 참가. 여행사를 돌며 깎아보려고 애 쓰다가 그냥 40솔 짜리로. 거의 12$ 가량 되는 투어. 차 타고 배 타고 한 시간쯤 섬을 빙빙 돌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인데 왜 이렇게 비싼가. 추워 죽겠구먼. 펭귄 한 마리, 펠리컨 잔뜩, 그리고 바다 사자의 군락지를 보고 왔다. 바다 사자들이 떼거지로 모여 목청껏 소리지르고 있었다. 장관이었다. 물개는 컹컹 짖지만 바다 사자는 으르렁거린다. 그 차이다. [바다사자의 울음 소리]


바에스따스 섬 가기 전에 빠라까스 반도에서 깐델라브라라는 이상한 그림을 목격했다. 모터 소리에 파묻혀 가이드의 설명을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모래밭에 그려진 저 그림은 2000년전 것이란다. 황당했다. 내가 잘못 들은건가?

바에스따스 섬에는 투어 외에는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뭐 원하는 장관을 구경했으니 40솔이 그리 아깝지는 않았다.

차 시간이 남아 시장 구경 하다가 시장통에서 세비체를 먹었다. 멸치(anchovy)와 조갯살, 문어를 잘라 야채와 레몬즙으로 버무려놨다. 거기에 푹 끓인 마 비슷한 식물이 곁들여져 나왔다. 맛있다.

버스를 탔다. 차가운 사막이다.

중남미 오기 전에는 그 나라가 그 나라 같았는데, 바로 옆 나라라도 워낙 다른 것이 많아 마치 동남아시아 인접국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듯 했다. 동남아시아는 잘 지내고 있을까?

5시. 일찌감치 해가 지고 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반갑게 아우성치는 삐끼들, 10솔을 부르는 삐끼가 있어 미끼를 물은 붕어처럼 나도 모르게 끌려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르는 숙소 가격은 10솔로 한결 같았다. 나스카라인 보려면 항공권을 구매해야 하는데 담합이라도 한 것인지 40$로 일정했다. 숙소 삐끼 말로는 독점이란다. 삐끼 말은 안 믿는다. 날더로 오늘이 어버이날이라며(feliz mama dia; good mother day쯤 되겠지. 이젠 그냥 몰라도 찍는다) 가격 다 똑같으니까 어서 계약하고 자길 집에 보내달라며 사정한다. 그를 자리에 앉혀두고 만일 다른 곳도 가격이 다 똑같으면 10분 후에 돌아와서 당신 껄로 해 주겠다고 말하고 거리로 나왔다. 45$ 부르는 도둑놈들 투성이였다. 한 시간쯤 느적느적 돌며 대여섯 군데를 둘러보고 돌아보니 가격이 다 그 모양이다. 하는 수 없이 지나가는 외국인들에게 물어봤다. 자기들도 다 알아봤단다. 걔들도 40$. 어? 그런가? 숙소로 돌아오니 삐끼가 처량한 표정으로 아직도 앉아 있다. 정성이 갸륵해서 계약했다. 입이 찢어지게 좋아한다.

밥 먹으러 숙소를 나오니 누군가 나를 잡는다. 아까 들렀던 사무실인데 30$에 해달라고 우기다가 영 협상이 안되서 그냥 나온 곳이다. 그가 이제 와서 30$에 해 주겠단다. 한숨이 나왔다. 진작 그럴 것이지. 계약 다 해놓으니까...

짱께집에서 5솔 짜리 식사를 주문, 또 다시 엄청난 양의 접시를 보고 기겁했다. 거기다가 620ml짜리 맥주까지 시켜 놨으니... 맛이 없으면 남기겠지만... 그렇지도 않고... 꾸역꾸역 먹고 펭귄처럼 뒤뚱거리며 숙소로 돌아왔다. 갈수록 운동량은 적어지고 식사량만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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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sco

여행기/Peru 2003. 5. 11. 12:13
날씨가 쌀쌀하다. 날이 흐리다.

거리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위험하다는 곳을 골라 다녔지만 엘 살바도르에서처럼 나를 주시하는 부랑아의 눈길 같은 것은 느끼지 못했다. 저녁 9시가 넘었지만 안전하다. 새벽애는 거리에서 아이들이 축구를 했다.

귤 1kg가 1솔(345원), 점심 한 끼가 3.5솔(1200원) 가량. 꼬스따 리까나 빠나마보다 싸다. 두 나라는 이해할 수 없이 물가가 비쌌다. 지들이 미국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그 나라들 밥값이 비싼 것은 오로지 미국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페루도 후지모리가 대통령 하던 시절에 떼거지로 이민 온 일본인들 때문에 물가가 상당히 오른 편이라고 들었다. 몇몇은 그것 때문에 화가 많이 난 것 같다.

극장에서 x-men 2를 봤다. 마치 서커스 단원들이 학교에서 열심히 연습한 다음 한 가지씩 묘기를 부리러 나온 것 같았다. 스토리의 밀도가 희박하다. 잘들 놀고 있구나 싶었다. 마그네토의 철학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편이다. 자비에르 박사에게 그런 대단한 능력이 진즉부터 있었다면 성능이 떨어지는 보통 인간들을 싹쓸이 해 버렸어야 한다. make it so 해 버리라고 피카드. 정신병에 걸린 호머 사피엔스는 6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차도가 안 보인다.

방법 개념도를 그렸다. 멕시코에서 손으로 그려 보고 두 번째로 그리는 셈이다. 작전지도를 그리고 나니 루트가 한 눈에 들어왔다. 페루 북부(아마존과 안데스의 고봉)는 제꼈기 때문에 간단해서 좋다. 15일 정도면 관광을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리마에서 삐스꼬로 이동. 사막과 해변 한 가운데로 길이 나 있다. pan-america highway. 적도 부근이고 해변 근처인데(따라서 고도가 100m가 채 안되는데) 날씨가 이렇게 차가운 것은 그... 악명 높은 해류의 영향 때문인가? El Nin~o. 에스빠뇰을 아주 조금(little, poco)이나마 이해하기 때문에 니뇨가 작은 사내아이를 뜻하리라고 짐작한다. 엘 니뇨는 7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고(7년 짜리 어린애) 그 다음 해에는 La Nin~a(작은 소녀)가 이어진다. 엘 니뇨와 라 니냐는 말 그대로 집안(페루)의 재앙이다. 엘 니뇨 때문에 사막이 암처럼 자라나는 것 같다. 나일강을 따라 이어진 누비아의 사막이 떠올랐다. 그 사막은 자존심이 있어 보였다.

삐스꼬에 도착하자 시큼한 생선 냄새가 사방에서 풍겨왔다. 게스트하우스에 체크인하는데 내 앞에 있는 아저씨가 작성한 카드를 보니 corea del sur(남한)라고 적혀 있었다. 한국분이세요? 고개를 끄떡인다. 그 아저씨도 나처럼 사람 만나는 일에 관심이 없는지 시큰둥하다. 같은 숙소에 묵지만 별로 내키지 않아서 다시 만나지 않았다. 피차 그러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들인 것 같다.

빠라까스의 해변에서 시간을 보냈다. 좀 일찍 도착했더라면 물개가 왕창 있는 국립공원 뒷편에 가 볼 생각이었는데 버스 기사가 이 시간에 가면 별로 안 좋을 꺼라고 말렸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반도를 돌다가 나를 내려준다. 친절하다. 하는 수 없이 해변에서 빈둥거리다가 다가온 거지와 얘기했다. 그는 삐스꼬 사람들이 미쳤다고 말했다. 그들이 자기를 미친 놈 취급한다고 말한다. 무슨 사고가 나서 삐스꼬에 있다고 하는데 대부분이 횡설수설이다. 물개 얘길 하다말고 갑자기 펭귄으로 바뀌었다. 거지가 어떻게 그리도 영어를 유창하게 하나. 미쳤다고 생각할 밖에. 그와 오랜 시간 옥신각신 하다가 내가 1솔을 동냥하고 그가 리마에서 나를 재워 주기로 합의를 봤다. 펠리컨들이 자기 배인 양 어선에 올라서서 저녁식사로 무슨 생선을 먹을까 골몰한다. 태평양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삐스꼬로 돌아와 밥을 먹었다. 세비체를 먹을까 했는데 음... 이 집에는 없네? 아로스 꼰 마리스꼬스. 1.5불로 엄청난 양의 밥과 샐러드가 나와 어안이 벙벙했다. 여러 종류의 어패류가 밥 속에 파묻혀 있다. 페루 사람들은 대식가인가? 며칠 동안 밥 양이 너무 많아 남기기도 뭣하고, 좀 난처했다. 식당을 나와 배가 무거워 펭귄처럼 걸었다.

pc방을 기웃거리다가 마침 컴퓨터를 조립하는 친구가 보여 펭귄처럼 걸어가 windows xp cd를 구워달라고 부탁했다. 12솔. 약 3달라 가량? 비싸게 받아먹는군. 으쓱. 어쩌겠나 아쉬운 사람이 손 벌려야지. 2개월 전 집을 나올 때 빅토리녹스 칼과 xp cd를 두고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얼간이인 것 같다.

원숭이 우리에 컴퓨터를 넣어두고 어떤 글자를 타이핑하나 살펴 보았단다. 원숭이들은 S를 유난히 좋아했다더라. 서칭 엔진의 검색 1위를 차지하는 단어는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S로 시작했다. 결론: 인류의 90% 이상은 원숭이 시절부터 지금까지 별 진전이 없어 보인다. :)

오아시스 도시인 Ica에 가볼까?
내일 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때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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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able ego

여행기/Peru 2003. 5. 9. 17:41
엘 도라도. 빠나마 시티의 어떤 구역. 빠나마 시티가 줄곳 발전하면서 시 외곽으로 날로 확장에 확장을 거듭해 가다가 생긴 곳. 내게 전해질 소포가 보관되어 있어야 할 곳. 엘 도라도를 들락거리면서 FlashPlus를 받을 수 있을 꺼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2주 전에 한국의 컴퓨터부품 쇼핑업체를 통해 플래시플러스를 전자결제로 구매하고 지인에게 부탁해 우편으로 파나마로 부쳐달라고 했다. 그동안 줄곳 국경을 넘나들고 있어서 몇 가지 주의사항을 전하는 것을 잊은 것이 잘못이다.

1. 빠나마 시티에서 우편을 받으려면 지역을 반드시 지정해야 한다. poste restante 서비스 우체국이 하나가 아니다. 가이드북에서 말한 main post office는 그 자리에 없다.
2. 소포는 관세부과를 심사하므로 플래시플러스를 종이로 싸서 우편봉투에 넣어 부쳐야 한다.
3. 일반 우편 서비스는 3-5일 안에 처리된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더 많은 시일이 걸릴 수 있으므로 fedex나 dhl을 사용했어야 한다.

그런데 '부품이 도착하면 그걸 바로 파나마의 이 주소로 부쳐주기 바란다' 라는 SMS 메시지만 달랑 남기고 말았다. 주도면밀하게 계획했더라면 그 부속품을 제때 수신했을 것이다. 왜 주도면밀하지 못했을까. 1항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2항,3항은 어떻게 되겠지 하는 심정이었다. 가이드북만 보고 빠나마에서 영어가 통하리라 짐작하고 만일 수신할 수 없으면 추적이라도 가능하겠지 싶었는데(지정한 곳으로 재전송 해 달라고 부탁하면 되니까) 우체국에서 업무를 보는 사람들이 모두 할머니였다. 영어는 한 마디도 못했다/안했다/난처해했다. 어떻게 그들에게 복잡한 내용을 에스빠뇰로 설명할 수 있을까. 없다. 내가 고작 할 수 있는 말은, 내 이름은 이러한데 우편을 찾고 싶다. 당신이 안되면 영어할 수 있는 사람이나 담당자를 불러달라. 아니다. 그건 우편이 아니라 소포다. 소포란 이렇게 생긴 것을 말한다. 그림. 한국에서(그림) 누군가가(그림) 소포를(그림) 나에게(그림) 보냈다(그림). 지금 그 소포는 관세부과 심사(난해한 그림) 중인가. 그렇다면 세관(매우 난해한 그림)은 어디인가. 아니면 다른 우체국(그림을 그린 나조차도 이해가 잘 안가는 그림)에서 찾을 수 있는가?

2-3일 동안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어다니며 어떻게 해보려고 했지만 부품값과 운송료 50$과 이틀을 고스란히 허공에 날렸다. 아아... 삽질로 보낸 아까운 내 청춘.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 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거야.

플래시플러스가 없으면 한번 리셋된 pda는 기본적인 기능 밖에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읽을 책이 단 한 권도 없는 난처한 상태가 되었다. 요즘은 늘 그런 상태다. 앞으로는 해변에서 가장 재미없는 책을 골라 읽다가 스르르 잠이 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재미없는 책이 없으니까 멀뚱멀뚱 있다가 그냥 갑자기 잔다. 요즘 장거리 버스에서 하는 짓이 그렇다. 자기 전과 깬 후가 이어졌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린 것처럼 순탄하고 연속적으로.

그나저나 우편을 집에서 수신하지 않고 poste restante(빠나마에서는 entrega general이라고 불렀다) 서비스로 우체국의 사서함을 통해 받는다는 것이 의외로 낭만적으로 보였다. 오늘 편지가 왔나 우체국을 방문해 안 왔으면 다음날 다시 방문하고... 방문하고... 나들이할 때마다 혹시나 하고 방문하고... 마치 떠나간 님이 보낸 편지가 오늘은 도착하지 않았을까, 저 눈이 어두운 할머니가 혹시 내 편지를 지나치고 못본 것은 아닐까 애가 타는 심정으로...

캬...
내가 그랬지.
애가 탔지.

항공권을 구하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가이드북의 페루 페이지조차 들춰보지 않았다. 그대신 스포츠 투데이의 만화와 작문 실력이 출중한 굿데이의 연애란을 낄낄거리며 쳐다보았다. 굿데이를 좆데이라고들 하던데 한국 3류 연애 가십 언론의 꽃 중의 꽃인 것 같다. 우리나라도 이제 이런 신문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기업으로 넘어간 뒤 매우 한심해졌다는 리마 국제 공항에 내리면 삐끼들이 반겨준다는 말을 들었다. 미라플로레스행 택시를 타면 된다나. 그 와중에 잡음이 좀 있을테지만 평소처럼 인상 쓰고 악 쓰다 보면 별일 없이 순탄하게 풀리는 것 같다.

충전기 문제는 해결했지만 그동안 사진을 줄곳 찍지 못했다. 충전기 수리를 맡긴 작자에게 디지탈 카메라 수리까지 맡길 껄 그랬나? 어디를 고치면 멀쩡해지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여태 안 고치고 있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사실 사진 찍기 귀찮아서 며칠은 배낭에서 사진기를 꺼내지 않았다.

Costa Rica 사진
Panama 사진

서울 식당에 가서 밥이나 먹어줄까 했는데 오후만 되면 문을 닫았다. 빠나마시티는 조금 색다른 국제도시였다. panamian authentic cousine이 있기나 한건지 의심스러운, 다국적군같은 부페 식단에 익숙해지자마자 떠날 때가 되었다. 생선은 신선하고 스프는 야릇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몇 가지 야채와 돼지고기 비계를 함께 오랫동안 고아 만든 스튜인지 스프인지(그들은 스프라고 한다) 알 수 없는 음식이 특히 그랬다. 비계가 느끼하지 않고 젤라틴처럼 쫄깃하고 맛있다. 고수가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스프맛이 제대로 안 났을 것이다. 싼 음식점임에도(이름 있는 음식점이었지만) 훌륭하다.

-*-

교통체증 때문에 공항까지 가는데 1시간에서 3시간까지 걸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일찌감치 일어났다. 한시 반에 자서 다섯시에 일어났다. 씻고 어젯밤 수퍼에서 산 빵과 비스켓으로 아침을 먹었다. 이틀 동안 에어컨 때문에 추워서 침낭을 뒤집어 쓰고 잤다. 스스로가 바보스러웠다. 에어컨을 끄고 자면 되는데. 입김이 서린다.

버스 타는 곳까지 걸어갔다. 도로 중간에 서서 지나가는 버스를 세웠다. 도로가 엉망이고 버스 정류장 표시는 있으나 마나 였다. 아무나, 아무데서나 세웠다. 이점은 마음에 든다. 공항까지 1시간 30분 걸렸다. 아침인데도 땀에 절었다.

출국 수속할 때 파나마 출국세 20$와 페루 입국세 15$를 내고 나니까 눈물이 핑 돌았다. 검문대를 통과하다가 경찰이 라이터 있냐고 묻길래 엉겁결에 고개를 끄떡이고 말았다. 모처럼 라이터를 담배곽 안에 잘 숨겨놨는데 빼앗겼다. 한번도 뺏긴 적이 없었는데...

비행기가 비구름 위로 날아올랐다. 비행기나 시내버스나 요즘은 그게 그거였다. 멀뚱멀뚱 하다가 잠이 들었다. 가이드북을 뒤적여 페루에 관해 뭣 좀 알아봐야 하는데 정신이 딴데 가 있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짐을 찾아 출국장으로 나오니 막막하다. atm에서 돈을 찾다가 300솔(대략 90불)을 찾는다는 것이 300달러를 인출했다. atm에 머리를 한 번 박은 다음 추가로 300솔을 인출하고 잔돈을 거스를 겸 인터넷으로 숙소를 뒤져봤지만 없다. 기껏 돈 들여 인터넷을 사용하면서 환율을 점검해보지 않고 일어섰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정신이 구름 위로 올라가 있는 걸까. 한숨 한 번 쉬고 출국장을 나왔다.

택시 기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나를 둘러쌌다. 오..예... 정신이 번쩍 난다. 처음 가 보는 곳에서 이렇게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 힘이 솟고 여행할 맛이 난다. 오늘 한 바보짓을 만회할 기회다. 그들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쏘이 데 꼬레아. 꼬레아 수르. 티코, 꼬레아!(난 한국에서 왔어요. 한국, 남한이라고요. 아저씨들 몰고 있는 티코가 한국제에요.) 티코는 남자라는 뜻도 있었다. 꼬스따 리까인들은 자신을 자랑스럽게 티코라고 말했다. 술집에서 술 마시고 껄껄 웃으며 소란을 피우는 그들은 정말 남자스러웠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모두 티코 택시 기사였다. -_-; 그런데 난 돈이 없어서 버스를 탈 꺼에요. 그리고 나서 평소에 잘 짓고 다니는 저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손가락질 해서 버스를 어디서 타는지 가르쳐준다. 왜들 이러나. 이러면 안되지. 택시 밖에 없다고 한 목소리를 내야지. 삐끼 교범 1장. 먹이감의 한정된 시야와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고립된 상황을 조장한다.

음. 버스라? 버스는 관두자. 스스로의 바보짓에 의기소침한 나를 행복하게 해준 이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지. 인도에서나 하던 경매를 시작했다. 30초도 안 되어 가격이 죽죽 떨어진다. 10불에서 20솔(5.76$)까지 떨어졌다. 손가락으로 한 아저씨를 집어서 얼마? 라고 물었다. 20! 노! 아저씬 얼마? 15! 그러면 안되지 아저씨. 10 없어요? 10을 부르자 모두들 야유를 던진다. 한 용감한 아저씨가 13을 소리쳤다. 괜찮을 것 같아서 오케이 했다. 열받은 한 아저씨가 10에 해주겠다고 나선다. 뒤에서 다른 기사 아저씨가 찌른다. 저거 10달러야 10달러. 아무래도 10은 무리인가보다. 13이면 3.74$ 가량인데... 제대로 한건가 모르겠다.

가방을 티코 뒷자석에 던지자 차가 출렁거린다. 이제 차에 올라 제 2 라운드를 시작해야지. 아저씨가 중간에 잔대가리를 굴려보려고 한다. 기름값 좀 줘. 푸하하하. 그럴 줄 알았지요. 드리지요 네. 돈을 줬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기름을 넣자마자 잔돈을 그 자리에서 주려고 한다. 어? 사기 쳐야 하는데? 공항 이용료가 택시비에 포함되지 않았다거나 짐값은 별도라거나 톨게이트 통과료를 내야 하고 잔돈 없어서 나중에 준다고 말해야 하는데? 안 그럼 맥 빠지는데? 페루에 관해 여행자들로부터 내가 들은 얘기는 어떻게 실랑이를 벌였고 어떻게 사기를 당하고 어떻게 도둑질을 당했는가 하는 얘기 뿐이었다.

잔돈 계산을 못해 쩔쩔매는 아저씨의 손바닥에서 필요한 만큼 집어갔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에서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인도에서 배운 것 같다. 좋든 싫든 인도에서 굴러먹은 것 때문에 소심하고 두려움이 많은데도 여행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상황이 손바닥 보듯 늘 뻔하다.

차가 멈추면 시동이 꺼진다. 그래서 신호등 정차 후에는 번번이 시동을 다시 건다. 말은 잘 안 통하지만 그 아저씨와 즐겁게 얘기했다. 페루가 좋아질 것 같다.

미라플로레스가 다른 지역에 비해 안전하다는 말을 듣고 미라플로레스로 안 가기로 했었다. 그래서 시내로 들어왔는데 의외로 분위기가 좋다. 더 볼 것도 없이 마치 길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번도 안 헤메고 숙소를 잡았다. 싱글 6$. 양쪽 벽에 라파엘 풍의 아도니스(?) 그림이 걸려있는, 그럭저럭 괜찮은 아담한 방이다.


WinHEC 컨퍼런스에서 빌 게이츠가 오버를 좀 한 것 같다. 참가자들은 누군가 빌 게이츠를 해킹해서 새로 프로그래밍한 것 아니냐고 야유를 던졌다. 게이츠가 거진 맥과 비슷한 컨셉(펀 컴퓨팅, 굿 룩스)을 들고 나왔다. 낯설지 않다. 게이츠는 10여년 전부터 맨 머신 인터페이스에 관해서는 종종 이성을 잃곤 했다. 맨 머신 인터페이스와 상관있는 것중에, 무선랜을 이용해서 화장실에서 컴퓨팅을 하도록 만들어보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의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변비 걸린다고. 마오쩌뚱도 모르나? 천한 것들...

빌 게이츠가 불쌍해 보이는 것은 그가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진 작자임에도(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천할 의지와 돈도 있다) 그가 가진 말쑥한 댄디 이미지에 가려져 아무도 그를 제정신이라고 믿어주지 않는데 있다. 솔직히 말해서 컨퍼런스에서 윈도우즈의 보안 따위의 정 떨어지는 얘기를 하면 속으로 짜증이 나지는 않았을까? 그가 보이는 정열은 어쩌면 그가 망쳐놓은 이상적인 컴퓨팅 환경에 대한 원죄 의식 때문일런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그의 방법이 재수없어 보였지만 나이가 들어서인지 10년 전에 일어났어야 했을 인터페이스 혁명을 그가 저승으로 돌아가기 전에 제대로 완수 해 보길 바란다. 인터페이스는 변해야 한다. 컴퓨터와의 인터랙션 속도가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점 때문에 늘 짜증이 났다. 이 지긋지긋한 마우스, 이 지긋지긋한 키보드...

blog는 점점 '박진감 넘치는 소설'이 되어가고 있고 앞으로는 점점 더 심해질 것 같다. 이전에는 바그다드에 살고 있는 라에드라는 친구의 글이 블로거들을 바글바글 끓게 했다면 이번에는 이사벨 V.라는 정략결혼에 희생된 어느 여자가 쫓기는 스토리가 화제가 되고 있다. 뭐 둘 다 재미가 없어서 안 보지만... 그런 거 말고 NSA 전직 직원이 쓴 콘돌같은 스토리가(사실이건 아니건) 블로그에 등장하는 날을 고대한다. 나를 포함하여, 남들의 드라마틱한 사건이 없는 시시껄렁한 일상에서 잔잔한 감동 따위의 평소 지겨워 하는 종류를 다시 보길 바라지는 않았다. 그것 보다는 액션과 모험, 위험과 로맨스, 그리고 하이테크와 죄악이 병존하며 활활 타오르는 블로그가 등장하길 고대했다.

활활 타오르는 블로그라.
활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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