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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3.04.16 Pickpocket 1
  5. 2003.04.14 lost in the volcano 3
  6. 2003.04.12 Antigua
  7. 2003.04.11 Tikal Ruinas
  8. 2003.04.11 to Guatemala 2

Guatemala City

여행기/Guatemala 2003. 4. 19. 18:49
Chichicastenango -> Guatemala City -> El Salvador border -> San Salvador

2003/4/19 토요일

깨어보니 9시. 아는 척 하는 동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마침 지나가는 닭장차에 올라탔다. 작은 도시에서 이틀이나 묵으며 같은 길을 열댓번은 지나 다녔으니 '꼬레아'를 모를 리가 없겠지. :) 지금까지 탄 닭장차들 중에서 가장 상태가 안 좋은 버스였다. 세 시간을 다리에 힘주고 버티다가 과떼말라 시티에 내리니 기진맥진했다.

황량하다.

과떼말라 인구 2천만 중 천만이 살고 있는 도시 임에도 거리에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가게들은 거의가 아니라 전부 문을 닫았다. 항공권 날짜를 조정하려고 하루나 이틀쯤 묵을 예정이었는데, 세마나 산타 때문에 엿되었다.

배낭을 단단히 메고 걸었다. United Airlines 사무실을 먼저 찾아보려고 했다. 문득 '부활절 휴가'라는 것이 생각났다. 한숨 짓고 중도에 포기했다. 숙소를 찾으려고 한시간 쯤 더 걸었다. 택시를 잡아 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택시가 보여야지 타던지 말던지 하지.

이쯤되면 막 가자는 거지. 숙소에 짐을 내려놓자 마자 바로 나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해가 지기 전에 산 살바도르행 버스 정류장을 찾아 다시 한 시간을 걸었다. 출발시간이라도 알아놓을 참이다. 이 도시에는 터미널이 무려 13개나 되었다.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하니 버스편을 미리 알아둘 밖에.

거리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다. 술주정뱅이를 향해 한 경찰이 총을 겨누고 다른 경찰이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잘못 보고 세 사람이 사이좋게 장난치는 줄 알았다. 떨렸지만 용기를 내어 업무 수행에 여념이 없어 보이는 경찰에게 살그머니 다가가 산 살바도르행 버스 정류장을 물었다. 발길질을 멈추고 이마의 땀을 닦고 싱그럽게 웃으며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신시가지로 일컬어지는 INGUAT(과떼말라 관광 사무소) 앞이었다. 그리고 다시 업무 수행에 열중했다. 저러다가 사람 잡겠다. 내가 뭘 어쩔 수도 없고...

세마나 산타 행렬을 피해 성당 안에 들어갔는데 마침 미사가 막 시작되려는 참이라서 성당을 나왔다. 십일조가 겁났다. 이 화려한 성당을 짓고 유지하려면 엄청난 십일조를 걷었을 것이다. 성당이란 참 편리한 곳인 것 같다. 뭔가 나쁜 짓을 하고 나면 성당으로 쪼르르 달려와 몇 마디로 용서를 빌고 그 덕에 가벼워진 영혼으로 나쁜 짓을 더 하러 나갈 수도 있고... 음... 마음에 쏙 든다. 오늘은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했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으나 하나님이 무시할만한 시시한 것 밖에 없다.

많이 지쳤다. 해가 진 후 광장 앞에서 따꼬스와 맥주를 시켜 먹으며 한가하게 거리를 구경했다. 다들 가족을 데리고 나왔다. 과떼말라의 따꼬스는 맥시코에 비해서 별로 맛이 없는 편이다. 따꼬스는 그렇다치고 지난 한 달 동안 먹은 또르따다스 중 가장 맛있고 stuffy한 것도 멕시코에서 먹은 것이다. 맛이 별로인데 뭔가 하나 제대로 먹을 요량이면 3-4000원은 들었다. 과떼말라 음식값은 전혀 싸지가 않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따꼬스와 샤와르마와 펠라펠과 수불라끼 삐따 사이에 별 차이가 없었다. 고기와 야채와 소스를 밀가루/옥수수 전병에 싸 먹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곁들여 먹는 것이 피클류의 식초에 절인 야채류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어째서 이다지도 대중 음식이 비슷하게 다양성이 부족한 것일까? 고대문명은 모두 한통속이었던가?

멕시코와 과떼말라에서 사용하는 마이스(옥수수 전병)는 영 아니었다. 아랍에서처럼 진흙 화덕에서 원적외선으로 구워야 제맛이 날 것으로 추측된다. 원적외선과 철판구이는 확연히 달랐다. 전병에 얹어먹는 속은 다양한 고기와 매운 소스를 사용하는 멕시코와 과떼말라가 훨씬 낫지만, 가격 대비 성능을 생각하면 아랍쪽 음식들이 월등히 나았다. 맛? 아랍쪽 음식은 별 맛이 없다. 맛있어 하는 나 자신만 있을 뿐이다.

도시를 이동할 때마다 간식이든 주식이든 따꼬스를 한두 개 씩은 꼭 먹어 봤는데, 개중 치치카스떼낭고의 광장에서 파는 따꼬가 과떼말라 전체를 통털어서 가장 괜찮았다. 고기 기름을 끼얹어 4-6장의 마이스를 뜨거운 불판에서 지지는 동안 돼지 족발을 포크로 재주를 부려 갈기갈기 찢은 다음 반쯤 불판에서 튀겨진 마이스 위에 얹고 볶은 양파와 절인 야채를 얹고 그 위에 두 종류의 칠리 소스를 뿌리고 다시 마이스 두어장으로 덮어준다. 다시 마이스로 덮는다... 이런 따꼬는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했다. 열이 달아나지 않도록 하는 것일까? 2-3개 정도 먹으면 배가 불렀다. 레몬즙을 약간 짜 주면 고기맛도 상큼해지고 위생에도 좋을텐데 과떼말라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아서 약간 아쉽다. 멕시코에서는 거의 모든 음식에 레몬을 뿌려 먹었다. 레몬즙(citric acid?)이 살균작용을 하기 때문에 더운 여름에 세균에 의한 급성 복통 같은 것이 생기지 않도록 한 합리적인 후처리로 생각된다. 멕시코에서 흔히 쓰이는 레몬은, 아니 거의 모든 음식에 곁들여지는 레몬은, 콜레라에 대한 공포심 때문인 것 같다.


광장 앞 노점에서 따꼬스에 맥주 한 잔 하며 찍은 사진

맥주와 따꼬스로는 배가 안 찼다. 거리에 유난히 중국 음식점이 많이 보여 그중 한 군데 들어가 별 기대를 안 하고 볶음밥을 시켰다. 5분 후에 나온 볶음밥의 기쁘지만 한편으로 부담스러운 양은 그렇다치고, 정통 중국식으로 제대로 만든 것이라서 몹시 놀랐다. 달콤한 간장 냄새, 샹차이와 파를 넣은 것은 물론,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하고 적당한 그을음까지? 널쩍한 중국식 프라이팬에서 조리를 해야 나는 제대로 된 화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맛도 좋았다. 정통 중국식 볶음밥처럼 목구멍으로 삼켰을 때 밥알이 위장에서 곤두서는 기분이 제대로 났다. 오오... 코를 박고 정신없이 먹다가 누군가 인사하길래 쳐다보니 그집 주인장이다. 중국인이다. 니 하오마! 그럼 그렇지. 아는 중국어는 다 말했다. 이, 얼, 싼, 쓰. 음... 할 말이 다 떨어져서 엄지를 들어 최고라고 말해줬다.

중국 노동자들이 파나마 운하 건설 때 집단 이주 했다는 얘길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여기서 중국 음식점을 하는 이 사람들이 바로 그들의 후손인 것 같다. 가이드북에서는 이렇게 맛있는 음식점은 놔두고 영 거지같은 음식점들만 추천하는데 그런데서 맛 없고, 양 적고, 영양가 없고, 값비싼 음식을 먹다보면 어느새 영국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영어에 important(importado)라는 단어가 있었지. 그 단어의 어원이 import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 먼 외국에서 수입한 것은 귀중한 것이다? 커피도 그렇고 후추도 그렇고, 감자, 고추, 토마토, 옥수수, 각종 보물 등등. 특히나 영국은 자국의 음식 전통은 쥐꼬리만큼 남았고, 인도와 중동 등 제 3세계의 음식문화를 대거 수입하여 사실상 영국인의 식단을 갈아치웠다. 식사가 부실한 국가는 정신병자가 많이 나오게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유럽이 그렇고 미국도 그렇다.

생마늘을 들고 다니며 가끔 비타민제 먹듯이 먹었다. 웹에서 찾아보니 항암작용은 물론이고, 알려진 것만 해도 27 종류의 세균에 페니실린보다 '독하다'고 나와 있었다. 마늘의 참조 항목에 된장(soy paste)이 있었다. 그럼 그렇지. 드라큘라에게 간장을 뿌리면 몸부림 치다가 간장 냄새를 풍기며 고통스럽게 죽을 지도 모른다.

과떼말라에 한국 식당이 20여개나 있다던데, 별로 갈 생각은 없다. 비쌀테니까. 과떼말라 공업의 20%를 한국계 봉제공장이 장악했다. 그런데 봉제공장 사장들이 여종업원에게 나쁜 짓을 자꾸 하고 노조문제로 채산성이 악화되자 부도를 내고 달아나서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나빠져 비자 받기가 까다롭다나.

저녁 8시, 거리는 벌써 썰렁해졌다. 경찰이 두려워서 일찍 숙소로 돌아왔다. 낮에는 몰랐는데 방 벽에 친숙한 마크들이 보인다. 잘못 그린 옴 마크와 피스 마크 따위들... 아... 어디가나 배낭 여행자 숙소들이란... 죽어라고 비틀즈 노래만 불러대는 일본 여행자 한 떼거지만 있으면 '완벽한' 배낭여행자 숙소처럼 보일 것이다. 그 대신에, 다소 철이 지난 감은 있지만 흐뭇하게도 메탈리카의 음악이 요란하게 흘러나왔다.

숙소 안의 작은 정원에서 과떼말라인들과 미국인들이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잠깐 앉아 있다가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 방으로 돌아갔다. 아니다 다를까, 술 먹다가 욕설이 오고간다. 며칠 안 있어봤지만 과떼말라인들 술 버릇이 개판이라고 생각하는 편. 미국인들이 아무리 싫어도 그렇지, 얼굴에다 대고 욕을 해서야 쓰겠나... 욕 나오게 분위기 파악 못하고 과떼말라의 사정을 싸가지없이 언급하는 미국인이 있다손 치더라도, 술 먹고 하는 주사는 제 3자에게 인정받기 힘들 것이다. 어쨌거나 마음 좋게 생긴 주인 아저씨가 수습을 하고 나니 정원이 비고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그 위로 비행기 폭음이 들렸다.

밤은 깊어가는데 간혹 총소리가 들려온다. 벌써 열한발 째다. 과떼말라 시티의 시가지 중심부는 단위면적당 사설 경호원 수가 지금껏 돌아다녔던 23개 도시 중 가장 많다. 120 달러면 라이플을 구할 수 있단다. 파키스탄하고 가격이 비슷하다는 점이 믿기지가 않는다. 예전에 미국이 군부를 지원할 때 공급한 무기란다. 과테말라를 분열 양상으로 몰고 있는 심각한 빈부 격차는 국부의 대부분을 점거하고 있는 스페인계 백인 혼혈, 메스티소 mestizo와 그러한 계급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애썼던 민주적 정치인들을 탄압하기 위해 메스티소와 군부를 지원한 미국 때문이다. 동남아와 중동에서 제국주의 때문에 마음이 아팠는데 여기서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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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 Pedro -> Panajachel -> Solora -> Los Cuentros -> Chichicastenango

새벽 5시에 아담이 시계를 돌려준다고 깨웠다. 그 차림으로 가면 힘들텐데? 괜찮아. 면 바지와 면 티셔츠 한장만 걸치고 어깨를 움츠린 채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길로 휘청휘청 걸어간다. 아담 덕택에 오랫만에 아름다운 새벽을 구경했다. 온갖 새들이 포근한 안개 속에서 지저귀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한기가 스며들어 방으로 기어 들어가 10시까지 잤다.

Darien Gap을 통과하는 꿈을 꾸었다. 파나마와 콜럼비아 사이의 전설적인 정글 속에서 나는 총을 들고 사방을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여행 내내 다리앤 갭을 통과하는 공상을 했다. 어젯밤 아담과 그것에 관해 얘기했다. 그는 꿈도 꾸지 말라고 한다. 몇몇 사람들이 시도했다가 실종자 리스트에 올라갔고 자기도 하려고 했지만 안전에 들이는 비용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만사를 싸다 비싸다로 구분짓는 것은 나와 비슷했다. 그가 경제적인 표정을 짓고 있다면 나는 심각하게 저렴한 표정을 짓는 편이었다. 다리앤 갭을 통과한 사람이 있긴 있었다고 한다. 파나마 시티에서 간혹 정신병자들이 팀을 이루어 길잡이 내지는 총잡이를 고용하고 대략 일주일 동안 트럭과 보트를 이용해서. 요리용 바나나를 잔뜩 짊어지고... 다리앤 갭 통과는 돈들인 개죽음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침햇살을 받으며, 썩 괜찮았던 산 뻬드로를 떠난다. 선착장에 우두커니 앉아 보트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보트가 화산에 둘러싸인, 놀랍도록 잔잔한 호수를 시속 40km로 달린다. 보트가 멈추었을 때 밑을 볼 수 있었다. 바닥에는 수초가 깔려 있었고 기포가 방울방울 올라왔다. 어쩌면 클레오파트라 배쓰처럼 밑바닥에서 물이 스며 올라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gps를 켜놓고 있으니 옆에 앉은 서양인 둘이 gps가 왜 필요한가 서로 옥신각신 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다큐멘터리 제작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과떼말라에 온 걸 보니 그 직업이 여간 고생스러운 것이 아닐듯 싶었다. 한 친구는 손가락 세 개가 없었다. 그는 동네 마약상처럼 거의 멸종해가는 히피였다.

치치행 직행 버스는 사람이 워낙 없어 취소되었다. 택시를 타겠냐고? 배시시 웃었다. 물어물어 미어 터지는 닭장차를 두 번 갈아탔다. 로스 엔꾸엔뜨로스에서는 버스가 안 보여 트럭 뒷편에 배낭을 던져 놓고 앉았다. 혼자 화물칸에 기대어 전후좌우로 흔들리며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렸다. 신선한 공기와 햇살을 마음껏 만끽했다. 닭장차보다 분위기가 좋다. 해발 2300미터의 산지에 위치한 치치카스떼낭고에 도착. 목요일 시장을 보러 왔다. 거리가 한산한데?

할 일이 딱히 없어서인지 길거리에는 대낮부터 술 먹고 맛이 가서 개처럼 뒹굴고 있는 마야의 후손들이 곳곳에 보였다. 시장은 철저하게 간강지화 되어 있었다. 다만 원주민들이 우글거렸다. 규모는 멕시코에 비해 작았다. 망고 장수마저 외국인을 등쳐 먹겠다는데 한 치의 후회나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 양반에게 제 가격에 산 것을 들고가 보여 주면서 희롱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혼자 다니다 보니까 외로워서... 갑자기 최고의 여행지에서 최악의 여행지로 굴러 떨어진 듯하지만, 다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 별다른 유감은 없다. 그런 관광지가 어디 한두 군데였던가?

마야의 창세 신화를 담은 Popul Vuh가 우연히 발견 되었다는 Santo Tomas에 들렀으나 뽀뿔 부가 거기 있을 리가 만무하다는 점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뽀뿔 부를 알게 된 것은 대략 15년전 쯤 된다. 동명의 프로그레시브 락 그룹이 있다. 대신, 러그를 파는 아낙네들과 돈을 달라는 아이들에게 둘러 싸였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숙소 삐끼를 따돌리고 싼 값에 숙소를 잡아 이틀을 편안히 묵을 예정이었으나 2시간 만에 관광을 끝내고는 허무해졌다. 갈 곳이 더 없다 -- 박물관에는 갈 생각이 없다. 그곳에 묵는 한국인은 내가 처음이라며 매니저가 신기해 하는데, 이틀에서 하루만 묵고 하루치 방값을 돌려줄 수 없냐고 애원하니까 징그럽게 웃으며 안 된다고 막무가네다. 그러고는 할 일이 있다며 황급히 자리를 뜬다. 어휴, 숙소가 마음에 들어 이틀치를 선불한 내가 바보지. 숙소의 종업원들은 나를 '코리아'라고 불렀다. "코리아, 세마나 산타야. 와서 보라구." "코리아, 하루 더 묵길 잘했지?" "코리아, 식당은 윗집이 괜찮아." 코리아, 코리아... 무슨 여자 이름 같다.

양지 바른 테라스에 앉아 벼룩에 물린 상처를 바늘로 찔러 피를 냈다. 닭장차를 타다가 옆 사람에게서 옮긴 것 같은데?

기기들이 점점 맛이 가기 시작한다. 돌연 PDA가 먹통이다. 리셋이 되는 바람에 프로그램들이 날아갔다. 설상가상으로 이럴 경우를 대비해 준비한 플래시 모듈 역시 고장 나서 프로그램을 설치할 수 없다. 인터넷으로 중남미 지역에서 pda 악세사리 구할 데를 알아봤지만 없다. 별 대책이 없어 한숨이 나왔다. 포스떼 레스딴떼로 부쳐 달랄까? 워낙 기억력이 형편없어서 pda를 사용할 수 없으면 괴롭다.

거리의 가게들은 세마나 산타와 이스터 때문에 대부분 문을 닫았다. 일주일 동안 노는 것이다. 아침부터 주변 마을에서 사람들이 꾸역꾸역 교회 앞으로 모여들더니 오후 무렵에는 바글바글하다. 세마나 산타 준비로 하루종일을 보내더니 두 시간쯤 행진. 생전에도 수난을 많이 당한 예수를 비롯한 여러 성자들이 매일 거리를 쏘다니느라 몹시 피곤해 보였다.


숙소 뒷편에서 바라본 Semana Santa 행진

여행자들이 없다. 다들 세마나 산타 때문에 안띠구아에 있는 것일까? 치치는 그렇다치고 어렵게 찾아온 이 숙소는 정말 괜찮은데. 여행자들이 없어 거리에서 장사하는 아줌마들과 거지들, 주정뱅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시내를 한 바퀴 산책하고 숙소의 테라스에 앉아 멍하니 아무도 없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지는 않았다. 다만, 거리의 불빛이 약해 슬며서 걸어가는 사람들의 윤곽이 마치 공포영화에 나오는 씬 같달까.

과떼말라 여행이 끝나가면서 왠지 모를 쓸쓸함이 찾아왔다. 해가 졌다. 별들이 소박하게 반짝였다.

배가 고파 거리에서 따꼬를 사서 먹었다. 거리에서 나를 '꼬레아'라고 부르는 녀석이 있었다. 소문 한번 빠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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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는 미국 처녀다. 에스빠뇰을 공부하고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친구와 여행을 시작했다. 멕시코 여행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과떼말라에 와 있단다. 그녀는 계획이 전혀 없다. 무뇌아인 줄 알았는데 내 가이드북을 쳐다보길래 빌려줬더니 게걸스럽게 읽는다. 마약 하는 친구들은 밥맛이라고 흉을 보고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자기 방에서 친구와 빈둥댄다. 그녀의 친구는 돌부처처럼 말이 없다.

그녀는 나처럼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부엌에 있던 각종 소스들이 사라져서 아침부터 우리는 조금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나는 레스토랑에서 '설탕'을 냅킨에 조금 덜어 가져왔다고 말하며, 여행을 오래하다 보면 이런 꽁수가 생긴다고 은근히 자랑했다. 그녀는 자기 방에서 비닐 봉투를 가져와 봉투에 담긴 살사 칠리를 천진하게 보여준다. 허거덕. 액체를? 그녀는 치밀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레스토랑을 방문하는 준비된 고수였다...

엘레나는 여행자들을 만나거나, 풀밭에서 다른 미국인들처럼 요가에 몰두하거나, 파티씬에 휩쓸리지 않은 채, 정말 아무 것도 안 하고 시간을 보낸다. 한 마디로 여행자들 사이에서 흔히 보는 시간이 한 없이 느리게 흘러가거나 아예 정지된 놈팽이였다. 그렇다고 여행을 통해서 현지인과의 각별한 우정을 기대한다거나 모험과 로맨스를 기대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며 쿨함을 과시했다.

첫 여행이라는데, 장기 여행자의 노련미가 철철 풍겼다. 장기여행자들이야 만사가 시들하기 그지없다. 뭘 봐도 그게 그거같은 돌덩이인데... 가 증세다. 장기 여행자가 말하는 모험이란, 기껏해야 삐끼에게 당해 고생하거나(삐끼도 바보는 아니라서 몹시 경제적인 표정을 짓고 돌아다니는 나같은 놈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주머니를 몽땅 털리거나, 비자 문제로 국경에서 오도가도 못하거나, 화산 꼭대기에서 폭풍을 만나 오들오들 떠는 종류의 것으로, 별로 낭만적이지 못하면서 오랫동안 쓸데없이 두뇌의 소중한 메모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아무 탈 없이 정신적으로 고양되는 진국인 것보다 많았다. 로맨스? 우리는 각자 같은 목적지에서 같은 시간에 만나 삶을 맛보다가 어느 순간 잡고 있는 손을 뿌리치고, 자다가 깨어 후회한다. 어쨌거나 엘레나는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나에 비해 어른스럽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저 경지에 도달하려면 여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어떻게 아무 것도 안 하고 하루 종일 앉아서 야채나 과일을 오물거릴 수 있을까. 저중심 설계 탓일까?

그런 사람이 게스트 하우스에 한 명 더 있다. 나이 70 먹은 과떼말라 노인이다. 그는 한밤중에 불을 꺼 놓고 방 앞 의자에 멍하니 앉아 지나가는 닭이나 개를 뚜러지게 바라보고는 했다. 심지어 사람도 닭 보듯이 뚜러지게 쳐다보았다. 그 나이에 이르면 닭이나 사람이나 비슷해지는 걸까? 하지만 닭은 인사를 하지 않는다.

그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가장 일찍 일어나서 의자에 앉아 있고는 했다. 하루에 칫솔질을 세 번하고 세수도 세 번 했다. 나와 엘레나가 음식을 해 먹는 광경을 보고 고무된 나머지, 이제는 그 노인도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음식 만드는 과정은 장인의 솜씨를 담은 한 편의 장편 다큐멘터리였다. 단순한 야채 스프를 만드는데 무려 3시간이 걸렸다. 재료를 씻고 써는데 2시간 반이 걸렸다. 그는 시간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최고의 장기여행자였다.

날이 흐려서 마당에서 움직이는 것들이 많지 않았다. 뭔가 움직이는 것들이 없어 볼거리가 떨어져 살아갈 희망을 잃으면 어쩌나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 모를 노인과 나는 하루에 여섯 차례 인사를 주고 받았다. 에스빠뇰을 잘 모르는 관계로 노인과 무슨 대화를 하기는 어려웠다. 어쩌다가 눈길이 마주치게 되면, 아침이면 아침 인사, 점심에는 점심 인사, 저녁에는 저녁 인사를 나눴다. 오늘은 꼬모 에스따? (how are you?)라는 에스빠뇰을 익혔기 때문에 그와의 대화가 어제보다 윤택했다. 내가 부에나 따르데스(good afternoon)하면 그가 부에나 따르데스 라고 답했다. 내가 다시 꼬모 에스따? 라고 하면 그는 비엔, 그라시아스 아미고(fine, thanks my friend)라고 말했고, 그가 꼬모 에스따? 라고 물으면 나는 비엔 그라시아스 라고 대꾸했다. 그는 흡족한듯이 다시 닭들을 쳐다보고 나는 히히 웃고 새로운 에스빠뇰을 찾아 보았다.

이제 Que Soy? 라는 에스빠뇰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돌아갈 날이 머지않은 노인과의 대화에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고 무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꿰 쏘이?' 는 아마도 '나는 누구인가?' 내지는 '나는 뭔가?' 라는 뜻일께다. 안띠구아의 거리를 지나가는 한 청년이 그 문장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오늘은 동네에 짱 박혀 사는 서양 마약 장수가 커미션이나 벌어보자고 음산하게 생긴 서양인을 한 명 데리고 왔다. 게스트 하우스에 막 도착한 그가 한 첫 질문은, 부엌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한 동안 부엌과 주방기구를 정성스레 살피며 무엇을 해 먹을지 골몰하다가 눈썹을 찌푸리며 비관적인 표정을 지었다. 옷 차림새를 보니 작정하고 찾아온 장기여행자 같다.

그의 이름은 아담이다. '애덤'이라고 하는 걸 보니 그링고구나. 표정이 왜 저 모양일까 싶었다. 그래서 세면대에 가서 내 표정을 살펴 보았다. 내 표정이 아담하고 많이 비슷했다. 아랍에서 표정이 굳은 후로 별로 풀리지 않았다. 특히 눈꼬리가 조금 반항적인데, Que Tu?(넌 뭔가?) 라고 묻는 듯이 건방졌다.

아담과 함께 한가하게 보름달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조용히, 화장실이 어디있냐고 물었다. 부디 아름다운 보름달과는 아무 상관없는 질문이기를 바랬다. 한때 나는 태양이 250와트 짜리 할로겐 전구이고 보름달은 15와트 탄소 전구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각박하게 살았다. 이제는 안다. 달은 대기가 없는 황량한 곳일 뿐이고 달을 쳐다보는 내 시선이 백만배는 아름다우며 그건 몰지각함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사람은 바보스러울 때라야 행복해진다. 따라서 사람은 영원히 행복할 수 있다. 그 바보스러운 상태를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바보스러움은 (부질없는) 열정과 결합했을 때 인간이 가진 가장 부도덕하고 매력적인 것이 된다. 그 바보스러움은 아담과 내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화장실에 갔다온 그는 음산한 표정으로, 내일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날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알람시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표정을 보고 있으면 내일 아침이 세계 멸망의 그날인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다른 미국인들과 정신 상태가 달랐다. 코맹맹이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는 이미 남미에서 많이 굴러먹었다. 볼리비아에 꼭 가야 한다면서 하던 말을 흐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유 노? 잇츠 라이크 인디아 한다. 대체 볼리비아에 뭐가 있길래 만나는 사람마다 볼리비아 하면 감격부터 하는 것일까... 혁명 정신에 몰지각한 볼리비아에서 게바라가 손목이 잘리고 비참하게 죽지 않았던가?

그는 여행 내내 본의 아니게 나처럼 독실한 수도승이 되어 있는 상태인 것 같았다. 다른 미친 미국인들과 달리 엘레나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엘레나에게 한 첫 마디가, 여기가 샤워실이군 이었고 엘레나는 별 꼴이야 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설겆이에 열중했다. 수도승처럼 생긴 사람들은 여자들에게 무시당하기 때문에 더더욱 수도승의 길로 정진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는 샤워실을 몹시 비관적인 표정으로 살핀 후 입을 다물었다. 아무 하고도 말을 하지 않고 식당에 혼자 앉아 식사하는 서양 남자 여행자를 많이 보았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오래토록 식당에 앉아 있지 않았다. 밥 먹으면 바로 일어섰다. 어디 딱히 갈 데도 없으면서 갈 데가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서두른다. 사람들과의 화학반응을 신경쓰지 않거나 못하는 것은 나를 포함한 거게 남자 (수도승) 여행자들의 공통점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에게 차고 있던 손목 시계를 빌려주었다. 마약 장수가 데려와서 마약하는 녀석인 줄 지레 짐작한 것이 미안했다.

혹시나 해서 그에게 이곳 게스트 하우스가 하룻밤에 20퀘찰이라고 넌지시 말하니까 알람시계가 없음을 밝힐 때보다 훨씬 더 비극적인 표정을 지었다. 마약 장수한테 주는 커미션을 포함해서 방값을 좀 많이 지불한 모양이다. 자존심 때문에 자기가 묵고 있는 방값을 끝끝내 말하지 않는 여행자들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낙천적이며 인생을 즐길 줄 안다는 듯한 말투로 종종, 10꿰찰 더 주고 배쓰가 포함된 아늑한 방에서 안락하게 묵는 것이 바퀴벌레가 기어다니는 방보다 낫지 않아요? 라고 말하는데, 그럼 나는, 그럼요. 그깟 10꿰찰(1.5달러)이 얼마나 대단한 돈이라고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없지요. 라고 대꾸했다. 언제나 그 게임의 승자일 수 없기에 내가 한 말은 비웃음이나 조소가 아니었고 사실 그대로였다.

음산한 아담은 별 말 없이 앉아 오랜 기간 간경련에 시달린 듯한 비극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방문을 열어 놓은 적이 없었다. 창문도 꼭꼭 닫아 걸었다. 마당에 앉아 있을 때도 그랬다. 그래서 그가 안에 있는지 없는지는 창틈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으로나 알 수 있었다. 방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보름달을 보고 화장실이 생각나는 자폐증 환자 같은 미국인은 처음 보았다. 멕시칸 마초같이 껄렁대는 녀석들은 무진장 많았고 그게 아니더라도 무언가 중얼거리거나 떠벌리거나 친절한 척 하거나 상황에 쫄았다는 티를 안 내려고 시시껄렁한 위트를 꼭 빼놓지 않고 사용하는 미국인은 많이 보았다.

말 나온 김에, 미국인이 웃기는 점 중에 하나가 무척 약은 척 하면서 사기는 다 당하고 다니는 것이었다. 카우시우스하고 컨시우스하고 프래그마틱 한 체 하는 것은 어쩌면 미국에 사는 백인의 국민성 내지는 자기 정체성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런 편인데(얼웨이즈 노우 더 얼터너티브 웨이), 나보다 정도가 심해서 옆에서 보면 좀 안쓰럽다.

투어 하다가 가이드한테 팁 좀 주자고 뭔가 그럴듯한 제안을 해서 기쁜듯한 표정을 짓는 놈이 개중 제일 증오스럽다. 하여튼 미국인들이 아담처럼 뭘 묻기 전에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으면 좋겠다.

묵묵히 바퀴벌레를 입에 물고 있는듯한 아담은 과떼말라에서 한 달 정도 보낼 예정이었는데 의외로 가볼만한 곳이 없더라고 말했다. 그는 마야 유적지의 이끼 낀 돌덩이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오리지날 장기 여행자였다. 아스카 관광은 어땠는지 물었다. 가격은 그럭저럭 적당한데 비행시간이 짧다. 그렇다고 걸을 수는 없고 운운. 우주인에 관한 견해라도? 긴 답변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짧다. 모르겠다. 잉카 트레일에 관해 묻자, 투어리스틱해서 재미없고 비싸다고 말했다. 어디가 좋아? 온두라스 해변. 싸다. 끝내준다. 열 댓마디가 찬사 일색이었다. 특히 싸다는 점이 요점이었다. 이 친구, 비록 표정은 꽝이지만 무언가 유용한 정보를 말할 줄 아는 친구같다. 아.. 다시 카리브해가 생각났다.

게스트 하우스에 있는 모든 투숙객들은, 아마도 담배를 안 피우는 아담도 앞으로 포함될 것 같은데, 음식을 만들 때 가스레인지의 불을 켜기 위해 여행자 중 유일하게 라이터를 갖고 있는 나에게 라이터를 빌리러 왔다. 엘레나에게 내 이름은 인디안 식으로 '머나먼 동쪽에서 불을 가지고 온 자'라고 말했다. 인디오 아줌마처럼 복스럽게 가슴을 흔들면서 웃는다.

이렇게 해서, 네 명의 여행자가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앉아 인사를 주고 받고, 하나 밖에 없는 화장실 차례를 기다리게 되었다. 나는 내일 아침 일찍 떠난다.

인류에게 주어진 환경은 그것과 어울리거나 그것을 극복하거나 심지어 그것으로부터 소외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냥 경계없이 주마간산격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지능이 있는 한, 필요한 만큼 울궈 먹으면 될 것 같다.

아띠뜰란 호수가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이 마을에 몰려드는 관광객들에 부응한 개발욕을 막을 수 있는, 환경을 생각할 줄 아는 '지성인'의 주장은, 각박한 환경 내지는 현실 속에서 대낮에 일 없이 울어대는 미친 닭들의 울음소리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일 없이 벽에 기대 졸고있는 주민들은 돈에는 크게 욕심이 없어 보였다 -- 주님이 있었다. 오히려 이 마을에 흘러 들어와 정착해서 살고 있는 서양인들이 서양인들을 상대로 장사 잘 하면서 건물 층수를 나날이 올리고 있었다.

산 뻬드로에는 식민지풍의 예쁘장한 건물이 없다. 계획없이 무절제하게 지었는데, 한 마디로 하드보일드했다. 어두컴컴한 맨콘크리트 건물 속에서 걸어나온 전형적인 인디오 복장의 아줌마가 주저없이 호숫가에 세제를 풀어 빨래를 하고 아이들의 목욕을 시켰다. 그 물을 퍼다가 음식을 만들고 식용수로 썼다. 경찰은 경찰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버스는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차례차례 도시에서 온 짐들을 내리고, 아침마다 장이 열리고 거리에는 쓰레기가 넘쳤다. 그럼 난 여기서 환경 걱정은 집어치우고 뭘 해야 하지? 요가를 하던가, 카누를 타던가, 말을 타던가, 화산 트래킹을 하던가, 쏠라 파워로 데운 호수물에서 목욕을 하던가. 아니면 마리화나를 피우던가? 음... 그냥 일없이 시간을 죽였다.

콘크리트 벽에 써 있는 글자들: Dios es amor 또는 Dios te ama. 미루어 짐작컨대 '신은 사랑이시다'. Jesus mi mejor amigo. '예수는 나의 가장 친한 벗'. 거리에는 요란한 개신교 찬송가가 하루 종일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을에 개신교도가 꽤 많은 것 같다. 이런 저런 교회에서 아침 저녁으로 집회가 열린다.

담벼락에 기대앉은 젊은 인디오는 외국인들에게 그라스를 팔고 있었다. 그에게도 주님이 있었다. 경찰이 다가오자 갑자기 어투가 미묘하게 바뀌면서 악세사리 장사꾼으로 돌변하여 내게 해마 목걸이를 쥐어주며 영어로 그 정교한 기교와 오리지널리티를 유창하게 설명한다. 마리화나를 피우는 인디오 개신교도의 52배속 접신이라든가 현격한 영혼의 상승이 기대된다. 진심으로, 영적인 면에서나, 재정적인 면에서나 하나님의 축복이 깃들길 바랬다.

과떼말라에 온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레스토랑에서 식사해 본 것이 손에 꼽을 정도라 죄책감이 들어 삐노끼오라는 이탈리아 '관광' 식당에서 라자냐를 주문했다. 무려 25꿰찰이나 했는데, 예상했던 대로 무늬만 라자냐였다. 시장 골목에서 계산이 서툴러 한참을 곰곰히 생각해야만 하고, 그러고도 번번이 셈이 틀리는 할머니와 옥신각신 하면서 야채를 사서 저녁을 해 먹는 편이 나았다. 할머니는 낄낄낄 웃으면서 어제처럼 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했다. 마치 어린애 같다.

인터넷 가게 주인이 2꿰찰을 이유없이 할인해 주었다. 어제 사진 찍어줘서 그런가? 주민들은 멕시코에 있을 때보다 현저하게 아미고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조금 있으면 떠날 나라이지만 사람들이 기분 좋은 나라다. 그런데 남들 다 좋다는 안띠구아는 별로 좋은 줄을 모르겠다. 하지만 산 뻬드로는 좋다. 그냥 좋다. 세월이 흐르면 여기도 변할 것이다. 너무 늦지 않게 온 것을 행운이랄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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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pocket

여행기/Guatemala 2003. 4. 16. 15:54
미국의 침공으로 바그다드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박물관에 있던 수메르 유물들이 몽땅 털렸다는 뉴스를 보고 억장이 무너졌다. 그나저나 부시는 게임 이론 대로 움직이는 장난감 같다.

공원에 앉아 감사하게 내리쬐는 햇빛으로 가이드북을 말렸다. 떡이 된 책이 제대로 살아날 것 같지는 않다. 옷들은 다 빨아서 말렸지만 신발은 대책이 없다. 덕지덕지 묻은 검은 화산탄 가루를 털어냈다. 털어도 털어도 어디서 기어 나오는지 끝이 없다.

거리를 할 일 없이 헤메다 보니 5인조 밴드가 광장에서 악기를 팔면서 연주와 노래를 하고 있었다. 사진 찍는 것을 잊었다.

왜 xp에서 뉴스를 다운받을 때면 한없이 느려지는가 싶더만, joc web spider 3.43에 버그가 있는 것 같았다. 3.50을 사용하니 잘 작동한다.

밥해먹고 나니 밤에 할 일이 없어 밴드 소리를 좇아 교회를 방문. 교회 안팍으로 엄청난 인파가 몰려 있었다. 교회의 제단 장식이 무엇에 소용되는가 싶더니만 어이없게도 그것을 배경으로 빛과 소리의 쇼가 진행되는 중이다. 교회의 높은 천정과 기둥 사이에서 강력하고 장엄한(때로 닭살 돋는 비장한 나레이션과 함께) 사운드가 울려 퍼지자 교회가 전혀 다르게 보였다. 벤허의 테마와... 이름을 알 수 없는 교향곡들, 심지어 스타워즈의 테마까지 흘러 나왔다. -_-; 일요일의 대단원을 보기 위해 토요일 쯤에 안티구아로 돌아올까? 숙소가 있긴 할까?

옆방 꼬마가 깨워 일어났다. 전날 밤 삶아둔 계란 두 개와 망고와 오이와 3일째 먹고 있는 3리터짜리 쥬스로 아침을 때웠다. 빠나하첼에 가야하는데... 젖은 후 안 마르고 여전히 걸레같은 가이드북을 살펴봐도 몇 시간 걸린다던지 하는 정보가 없다. 벌써 10시. 되는 대로 짐을 싸서 일단 버스 터미널로 나갔다. 마침 출발하는 차를 타고 치말떼낭고에 도착.

뙤약볕 아래서 30분을 기다려도 빠나하첼행 버스가 오지 않는다. 에스빠뇰이 좀 되는 것 같은 서양 여자애 둘은 기다리다 지쳐서 대절 봉고에 오른다. 나도 탈까 하다가 비싸 보여서 망설였다. 마침 오고 있는 산 뻬드로행 버스를 타도 되겠다 싶었다. 아띠뜰란 호수 근처니까. 입구는 오르내리는 사람들로 아비규환이었다. 하. 이런 버스 오르는 것은 자신있지.

버스에 막 오르려는데 누군가 앞 주머니를 건드렸다. 지갑을 슬며시 꺼내려는 것이 느껴진다. 지퍼 내리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손을 잡으려니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간다. 타이밍도 그렇고, 솜씨가 프로다. 감격이다. 닭장차에 아비규환에 소매치기까지, 꿈꾸던 그림같은 상황이 만들어졌다. 감격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다. 서둘러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누군지 알 수 없다. 어떤 새끼인지 잡아서 족쳐야 할텐데... 버스가 막 떠나려고 한다. 발이 공중에 떴다. 버스가 언제올지 기약이 없어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냥 올라탔다.

닭장 차에는 더 이상 사람을 실을 수가 없을 정도로 미어 터졌다. 홰를 치는 닭들도 몇 마리 보인다. 여행자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형형색색의 로컬리들 뿐이다. 너무 기쁘다. 이런 차를 타야 여행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과테말라 온 후부터는 줄곳 닭장차였다. 말 그대로 chicken bus, 미국에서 수입해 온, 유치원 애들이 타고 다니는 다 낡은 '노란색' 버스의 좌석에는 어른 둘이 앉을 자리 밖에 안 되지만 한 좌석에 셋이 앉았다. 한 사람은 엉덩이를 반만 걸치는 것이다. 게스트 하우스 주인은 날더러 닭장차를 견딜 수 있겠냐고 걱정스러운 듯이 묻기도 했다. 돈 조금 더 들이면 편하게 갈 수 있는데 사서 고생하는 것이 바보스러운가 보다.

사람이 너무 많아 배낭을 잡고 한 시간 반을 서서 갔다. 가끔 차장이 소리를 지르면 서있는 승객들과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경찰이 과적 차량을 단속하는 것이다. 외국인이 자기들처럼 곧잘 하니까 재미있는지 낄낄 웃는다. 우둘두둘한 길을 달리는 동안 이빨이 와다닥 부딛친다. 커브를 돌 때는 한줄의 일곱 명이 동시에 쏠렸다. 재밌다.

올더스 헉슬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라고 극찬해 마지 않던 아띠뜰란 호수 lago atitlan에 도착했다. 3시간 걸렸다. 오는 중에 화산 분진과 가스로 숲과 마을이 자욱하게 덮여있는 멋진 광경을 보았다. 어떻게 보면 준 재난상태 같기도 하다. 화산이 한번 폭발해줘야 잊지 못할 추억이 될텐데...

그런데 내릴 때 모자를 버스에 두고 내렸다. 소매치기는 안 당하면서 왜 매번 모자만 죽실나게 잃어 버리는 것일까...

몇군데 들러봤지만 숙소가 꽉 찼다. 고생길이 열렸다. 계획에 없던 도시에 오고, 소매치기를 못 잡고, 특히 모자를 잃어버려서 짜증이 났다. 한창 공사 중인 hospedaje에 물어보니 방이 있단다. 살았다. 숙소가 만족스럽다. 넓은 마당이 있고 처마가 있고 빨래줄이 걸려 있고 부엌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 특히 너른 마당이 마음에 든다.

하릴없이 호숫가를 배회했다. 물이 검어서 호수에서 빨래를 하며 호수를 오염시키는 아줌마들을 저주했는데, 자세히 보니 바닥에 검고 잘디잘은 화산탄이 깔려 있었다. 물은 매우 깨끗했다. 이런 호수는 사람 손이 닿지않는 몽골 같은 곳에나 있을 성 싶다.


아띠뜰란 호수. 해발 1530m

해가 지기 전에 뭔가 만들어 먹으려고 시장에 들러 야채를 샀다. 오늘 요리는... 음... 오에코돈? 시도해보자. 쌀과 야채를 넣고 일단 끓였다. 뜸을 들일 무렵 밥 위에 계란을 풀어서 얹었다. 거기에 케첩과 살사 칠리를 얹으니 맛이 그럴듯 하다. 그 이상한 음식을 오에코돈이라고 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알 바 아니다. 1.5퀘찰(250원)에 배불리 한끼를 해결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밤이 되자 희미한 하늘 위로 보름달이 떠올랐다. 풀문 파티로 정신없는 '서양 여행자 거리'를 제끼고 조용한 호숫가를 돌다가 숙소의 내 방 앞에 의자와 탁자를 끌어와 앉아 달을 쳐다 보았다. 산 빼드로에 장기체류자들이 많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여러 화산에 둘러쌓인 깨끗한 호수가 있고 풀벌레 소리와 동네의 패권을 다투는 개들의 소란스러운 소음이 들리는 아름다운 곳이다. 아침에 동네를 거닐어보니 꼬리가 잘린 개들이 종종 눈에 띄어 간밤의 치열한 격전을 떠오르게 했다.

카약을 빌리려고 여기저기 헤메다가 포기했다. 뭐, 안 타도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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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까야 화산에 갔다 온 후 정신적 충격이 대단해서 하루 더 안띠구아에서 느긋하게 지내기로 했다.

엊그제 끝내주게 맛있는 초우멘을 만들었지만 정작 자랑하고 싶었던 중국 여자애는 체크아웃하고 나가 버렸다. 그래서 2인분을 배불리 먹었다. 게스트 하우스는 텅 비었고 어제, 오늘 내린 비로 빨래는 걸레가 되었다.

이번이 세번째인가? 전에 만났던 한국인을 다시 봤다. INGUAT 관광청 추천 시티 투어 코스를 함께 슬슬 걸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한국인이 아는 척을 했다. 광장에 멍하니 함께 앉아 하품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감동한 것 같았다. 그날 하루 쓴 돈이 숙박비를 포함해서 10불이 채 안 되었으니까. 나? 난 6불 썼다. 난 밥을 해 먹으니까.

어제 빠까야 화산에 갔다왔다. 조난 비슷한 상황에서 고생을 하다 왔기 때문에 돌아오자 마자 뻗었다.

오후 1시쯤 12명이 투어차를 타고 출발했다. 오후 2시 화산 아랫 마을에 도착. 대략 4킬로미터를 올라가는 산길. 고도차는 740m. 어림잡은 예상 등반 시간은 2시간 정도였으나 미국인들이 워낙 굼떠서 거리의 반에 해당하는 본격적인 화산지대로 들어가는데 1시간 30분이 걸렸다. 오후 3시 반. 답답해서 미국인들과 가이드를 제끼고 앞서갔다.

빠른 걸음으로 거의 뛰다시피해서 앞서가던 경비대 마저 추월했다. 비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메케한 아황산 가스 냄새가 풍겼고 풍향이 수시로 바뀌었다. 비구름 속을 통과할 무렵 차갑고 두꺼운 빗줄기가 사정없이 떨어져 내렸다.

경사는 45도 가량, 비바람 뿐이면 별 문제 아니지만 비가 분화구에 떨어지면서 대량의 수증기가 발생하여 가시권이 3미터 이내였다. 잘게 부서진 화산탄이 발목에 푹푹 잠기면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살갗이 따끔거리고 온몸을 휘청이게 만드는 강한 비바람 때문에 잔자갈들이 비탈을 구르면서 무시무시한 소리를 냈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오기가 생겼다.


비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빠까야 화산 오르막길. 포기하고 돌아갔어야 했다. 이후로는 사진을 찍을 상황이 아니었다. 살기 바빠서... -_-;

정상에 도착. 손목시계를 쳐다보니 불을 켜도 시각이 안 보인다. 아황산가스 때문에 목구멍이 다소 쓰리다. 물과 결합하면 이것들은 체내에서 황산이 된다. 빗물이 바위에 닿을 때마다 치익치익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분화구 주변에는 거대한 수증기의 벽이 형성되어 있었다. 아무 것도 제대로 안 보이고 비바람이 심해서 분화구 안쪽에 기대 앉았다. 추워서 손이 곱고 이빨이 닥닥거리지만 대조적으로 발밑과 엉덩이는 매우 뜨겁다.

일행이 도착하길 30분쯤 기다렸지만 정상에 아무도 올라오지 않았다. 시계를 문지르고 품에 넣고 잘 쳐다보니 4시 50분. 해는 5시 30분에 진다. 팬티 속까지 젖었다. 모자 주변으로 끊임없이 물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바람과 수증기가 뒤죽박죽 되어 길이 보이지 않는다. 상황이 안 좋다.

올라 오는 길에 능선의 대략적인 방향을 파악했고 거리도 대충 알고 있다. 봉우리는 대략 300미터 가량. 그 후 이어지는 능선은 1킬로쯤 남서쪽. 풍향은 남동. 발밑은... 보이지 않는다. 재수없다. 바람 방향이 바뀌면 좋으련만. 목이 슬슬 아파온다. 오래 있으면 위험해질 것 같다. 냄새나는 아황산가스 뿐만 아니라 목을 탁탁 막히게 하는 이산화탄소도 있었다. 그보다는 당장 추워서 견딜 수가 없다.

미끌거리는 발밑을 조심하기만 하면 15분이면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손이 곱아 신발끈을 조이는데 애를 먹었다. 뜨거운 화산암을 쥐고 있다가 신발끈을 맸다. 조난이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고작 2500미터짜리 조그만 봉우리라고 방심한 것이다.

해가 지기 전에 내려가야 한다. 하지만 저 미친듯한 비바람과 수증기 속을 통과하는 것이 겁난다. 갈짓자로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옷과 신발은 이미 화산탄 부스러기로 뒤범벅되어 시꺼멓다. 미끄러졌다. 되는대로 손을 뻗어 화산탄을 잡았다. 맥없이 부러진다. 손바닥에 감각이 없다. 잔자갈과 함께 아래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스키 타는 것 같아서 신나긴 했다.

유령 같은 그림자 둘을 보았다. 우리팀, 몽카 블랑카 소속의 두 독일인 연인이 오도가도 못하고 공포스러운 표정으로 떨고 있었다. 일행과 떨어져 조난당한 것 같다. 따라오라니까 선뜻 발길을 떼지 않는다. 걱정하지 말아라. 나한테 gps리시버가 있다. 남자가 고개를 끄떡였다. 반팔에 샌들 차림으로 온 여자는 겁에 질려 있었다. 지친 것 같다. 골치 아픈데... 여자들은 저중심 설계로 제조되어서 내리막길에서는 쥐약이다. 특히나 힘이 빠져 있을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잖아도 엊그제 띠깔에서 어떤 아줌마가 15미터 계단을 굴러내려 이빨이 다 깨지고 두개골 일부가 함몰되고 피범벅이 된 채 기억상실증에 걸려 유적지 일부가 폐쇄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작 2500미터 라길래 물을 들고 오지 않았고 담배 피우면서 올라왔다. 비바람 속에서 강풍이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자 희미하게 능선의 거무스레한 윤곽이 보인다. 한숨을 쉬었다. 길을 찾았다.

300미터쯤 내려오자 비바람이 잦아 들었다. 남자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자 앞에서 자존심이 상한 것 같다. 조그만 동양 남자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자기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남자는 비에 젖은 시궁쥐처럼 떨고 있었다. 내 꼴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자에게 나머지 일행이 어디있냐고 물었다. 모른다. 그럼 그들은 올라오지 않은건가? 뛰어 내려갔다. 20분 정도 걸려 마을에 도착했다. 몽카 블랑카 팀원들은 모두 무사했다.

우습게도 정상에 올라간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상에서 천사들이 날개를 손질하는 모습을 본 것은 나 밖에 없었다. 분화구에 사악한 절대반지를 버리고 세상을 구했지만 아무도 몰라주게 되었다.

입구 화장실에서 양말을 빨고 신발에 묻은 흙을 대충 털었다. 옷을 짜고 싶지만 그럴 형편이 안 되었다. 사람들이 떨고 있다가 독일인 연인이 도착하자 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 올라 안띠구아로 돌아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바보짓을 했다. 내가 한 치명적인 바보짓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1. 오버트라우저를 가져가지 않았다. 가져갔으면 비바람에도 불구하고 느긋하게 분화구에서 용암을 구경했을 것이다. 오버 트라우저가 없어서 물에 쩔은 쥐새끼같은 꼴로 돌아다녀 체면을 구겼다.

2. 껌을 안 샀다. 껌을 씹으면 날씨가 개판이건 말건 호연지기가 생기고 기분이 즐거워진다.

3. 무엇보다도, 날계란을 안 가져왔다. 계란을 뜨거운 바위 틈에서 익혀 맛있게 먹는 것이야말로 화산 여행의 묘미다. 그런데 분화구 곁에 쭈그리고 앉아 열기를 쬐면서 배가 고파 살구와 망고를 먹었다. 화산에서 살구와 망고라니... 알만한 사람이 그런 무식한 짓을 한 것이다.

이런 용서할 수 없는 실수를 했기 때문에 조난은 필연적이었다. 이번 산행을 반성의 기회로 삼자.

국립공원 입장료 25꿰찰을 내려고 50꿰찰 짜리 지폐를 주니 70꿰찰을 건네준다. 잔돈이 신선하고 감동적이었다. 인도보다 0을 먼저 발명하는 등 수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 바 있는 마야 후손의 믿을만한 계산법이고, 다들 정신적 충격을 받은 상태라서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를 일으키면 안될 것 같아 얌전히 낼름 집어 삼켰다.

오락가락 하는 정신에 인터넷으로 뉴스를 다운 받고 밥을 해 먹은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숙소에 도착하니 9시. 1500미터 고지에서 딱 라면에 말아먹을 분량만 인디카 쌀을 씻어 알맞은 정도로 찰기와 윤기가 지게 밥을 짓는 것은 예술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라면은 또 어떻고? 이제 처음 보는 라면으로도 기본적으로 삼양 라면 맛을 낼 수 있다. 어떤 거지같은 면발도 쫄깃쫄깃하게 되살릴 수 있다. 매운 라면 국물과 밥. 꼭 그렇게 먹어야 추위로 얼어붙은 몸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폰지가 물을 빨아 들이듯이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말끔하게 해치웠다. 찬바람 맞으며 고생하다가 뜨겁고 얼큰한 국물을 들이키니 살맛이 났다. 야채와 탄수화물이 풍부한 진정한 구휼식품이었다.

칫솔질과 간단한 세수만 하고 따뜻한 침낭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아아... 좋다.

아침에는 갑자기 영양보충 하고 싶어져서 스테이크를 해 먹었다. 며칠 전에 멕시칸 스타일로 스테이크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바닥에 마늘을 깔고 고기를 얹은 후 양파 등을 넣고 지지면서 맥주를 때때로 붓는다. 소금과 후추로 적당히 간을 맞췄다. 당근을 넣고 지지다가 계란을 얹자 먹음직스러운 등심 스테이크가 완성되었다. 맥주 때문에 맛이 좀 썼다. 설탕을 좀 넣을껄 그랬나? 그래도 처음 만들어 본 스테이크 치고는 맛이 훌륭했다. 다음번에 할 때는 붉은 와인을 쓸 것이다. 육즙을 은근히 우려내는 것이 테크닉인 것 같다.


프라이팬에서 덜다가 계란이 뭉개져 모양이 망가졌지만 맛있는 스테이크. :)

돈을 좀 찾고 스노클과 옷가지를 우편으로 한국에 부쳤다. 우편료가 비싸다. 5일치 경비가 순식간에 날아갔다. 돈을 더 찾아야 하나.

"노스웨스트항공은 이달 15일 정오 온라인(www.nwa.com/kr)상에서 부산발 LA 또는 샌프란시스코행 89만원짜리 왕복 항공권을 39만원에 할인판매하는 행사를 벌인다고 11일 밝혔다." -- 새삼스럽게 왜 이렇게 운이 안 따라주는 것일까 하고 울부짖기도 뭣하다.

"국민의 값진 세금을 이런 편집증적인 일에 써도 된다고 언제 국민의 동의를 얻었는지도 묻고 싶다. 언론이 정부를 감시하는 게 정상인데 우리는 정부가 언론을 감시하겠다니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 -- 2003.4.12 조선일보 사설. 어차피 영문 모를테고, 말문이 주욱 막혔으면 좋겠다.

안드레 군더 프랑크, 리오리엔트, 이산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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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gua

여행기/Guatemala 2003. 4. 12. 19:14
인터넷 까페에서 옆에 앉아있던 그링고가 내가 사진 올린 것을 점검하고 있으니까 url을 가르쳐 달란다. 나갈 때까지 사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찍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슬며시 감췄다. 쪽 팔렸다.

사진을 잘 찍겠다는 욕심이 사라졌다. 일부는 입장시간 제한 때문이다. 아침 일찍이나 오후 늦게까지 문을 여는 곳이 드물다. 인도라면 가능했다. 오직 인도에서만 가능한 것 같다.


스타워즈의 어떤 씬이 띠깔의 이 광경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었다. Great Pyramid에서 바라본 이 사진을 아주 잘 찍는 방법을 알고 있긴 했다.

해는 5시 45분에 맞은편 지평선에서 뜬다. 해가 뜨기 20분 전에 사이트에 도착한다. 숲속에서 안개가 피어오를 것이다. 지평선 부근은 핑크빛을 띄고 먼 하늘은 푸르게 빛날 것이다. 화면을 네 부분으로 대충 나누고 지평선을 3/5 위치에 둔 다음 근경과 원경, 핑크빛과 푸른빛 사이에 피라밋 대가리를 위치시킨다. 그러려면 저 사진처럼 꼭대기에서 찍을 것이 아니라 피라밋에서 열계단쯤 내려온 후 카메라를 약간 아래로 내리는 기분으로 찍으면 될 것 같다. 해가 뜨려고 할 때쯤 빛은 지평선과 근경 사이를 수평으로 달린다. 해가 거의 질 무렵도 마찬가지다. 석양 무렵이 아침보다 낫지 않은 것은 정글에 깔리는 안개 때문이다. 안개가 숲을 반쯤 가리면 띠깔 유적지는 지구가 아닌 곳이 될 것 같다. 달이 아주 밝은 날 해가 바로 질때쯤. 음 이건 일년중 며칠 기회가 없겠군. 예전에 이란에서 터키로 넘어올 때 아라랏산을 보고 맛이 간 적이 있었다. 해가 질 무렵 아랫동이는 어둠 속에 잠기고 꼭대기는 날카로운 황금색으로 반짝였다. 그때는 멋진 광경에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하지만 스무장이 넘는 사진 중 단 한 장도 제대로 찍힌 것이 없어서... 울었다.

띠깔보다 멋있는 광경이 있을까? 있다. 인도 함피다. 띠깔 유적지가 20km^2나 되는 '거대' 유적지라지만 함피의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엄청난 유적 규모와 비교하면 세발의 피다. 함피의 비자야나가르 유적지는 거의 공짜면서 건축물의 아름다움은 띠깔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또 있다. 지금까지 내가 돌아본 유적지 중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인도 카쥬라호의 서부 유적군이고 단일 건축물로는 인도의 마두라이에 있는 미낙쉬 신전이다. 미낙쉬 신전에서 넋이 빠져서 사진 찍는 것을 잊었다. 규모와 아름다움 양자를 다 말하려면 앙코르와트 뿐이다. 세상의 어떤 유적지도 보는데 적어도 3일이 걸리는 곳은 앙코르와트 말고는 없다.

섣불리 단정짓지 말고, 다 보고 나서 얘기 하라고 말할 개제가 아니다. 주요 고대 문명은 잉카를 제외하고 다 봤으니까. 잉카의 사이트는 크기나 아름다움에서 상기한 사이트보다 나을 수가 없다. 시니컬하게 말해서 마야/아즈텍/잉카 문명이 주목받는 이유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선구 문명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나마 미국/유럽인들이 '안심하고' 갈 수 있는 유적지이기 때문인 것 같다.

게스트 하우스를 찾느라 한 시간을 거리에서 헤멨다. 이 삐끼, 저 삐끼를 전전했지만 방값이 비교적 비싸다. 왜 그런가 싶더니만 세마나 산타라는 그리스도 수난극이 다음주 중에 안띠구아에서 벌어질 예정. 전세계에서 가장 정교하다는 축제인데(관광청 팜플렛을 보니) 시작되자 마자 다른 도시로 뜰 생각이다. 지금 묵고 있는 게스트하우스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고 축제 덕택에 숙소 잡기가 어려워서 애 먹은 생각을 하면...

부엌을 사용할 수 있다길래 오랫만에 뭔가를 만들어보려고 애썼다. 그런데 뭘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다. 습관적으로 밥을 얹어놓고, 야채를 썰고, 볶다가, 밥이 다 익어서 야채 볶는데 그냥 부었다. 국이라도 하나 만들어야 겠기에 야채를 잘게 썰어 소금 약간 넣고 끓이다가 계란을 붓고 저으면서 거품은 건졌다. 게스트 하우스에 묵고 있는 무진장 시끄러운 중국 처녀가 괜히 시비를 걸었지만 개무시하고 묵묵히 만들었다. 남이사 '복잡하고 손이 가는' 요리를 만들어 먹던 말던 신경쓰지 말고 얼른 나가서 관광이나 잘하란 말이야. 자기가 권한 옥수수를 안 먹으니까 '점잔을 빼면서' 심통 부리는 것 같다. 음. 다 만들어놓은 음식은 고양이조차 거들떠보지 않았다. 삐깐떼(매운 야채 절임)와 곁들여 먹으니 무척 맛있다. 저녁에는 '광둥 스타일 정통 초우면 컴패티블 푸드'을 만들어서 중국 여자애를 한코 죽이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수퍼마켓에서 Salsa Soya 소스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Salsa란, 재료가 뭐든 간에 '무조건 맛있다'는 뜻이다.


정식 요리 명칭: backpacker's 'really' gut-filling fried rice with unstable quatum mechanical probablity

화산에 가려니 아침 6시에 출발한단다. 또 새벽인가? 좀 쉬어야겠다. 화산에 갈 생각이 없었는데 활화산이라는 소리를 해서 갑자기 마음이 동했다. 가능하면 투어 안하고 호젓하게 혼자 올라가고 싶은데... 산적들을 만나서 산생활의 고충을 들어보고 도네이션도 좀 하고...

띠깔 유적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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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kal Ruinas

여행기/Guatemala 2003. 4. 11. 17:47
환경이 훌륭함에도 대마는 한 포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 땅에서 대마가 핍박받고 있다는 증거다.

오늘도 새벽 4시에 일어났다. 덥다길래 일찍 가면 덜 덥겠거니 싶었는데, 아니다. 빨빨 거리며 돌아다니는 사람들한테나 더울 것 같다. 새벽 바람에 '떨면서' 짐을 싸서 호텔에 맡기고 띠깔 유적지행 차를 탔다. 새벽 6시에서 저녁 4시까지 10시간 가까이 띠깔 유적지에서 개겼다. 뭐 사진을 찍는다거나 마야 문명의 미스테리에 관한 뭔가 중요한 실마리를 잡으려고 두리번 거렸다기 보다는... 싸 가지고 간 두 끼 분량의 도시락을 천천히 먹거나 모기에 뜯기면서 밀림 속을 거닐거나(헤메거나) 유적의 제단에 누워 잠을 자는데 시간을 보냈다. 제단은 의외로 포근했다.

띠깔 유적지는 띠깔 국립공원 한복판에 있었다. 빨렝게에서 그렇게 해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원없이 밀림을 헤메다녔다. 밀림 속에 혹시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유적지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없었다.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야생동물을 부지기수로 만났을 뿐이다. 아쉽게도 이번에도 쌍안경을 구하지 못했다. 쌍안경으로 야생동물을 관찰하기에는 끝내주는 곳이다. 바나나 한 조각이나 빵 한 조각에 혈안이 된 녀석들이 우글거렸다. 유적지 곳곳에 뜻은 잘 모르겠지만 comida, anima 란 단어 따위가 들어간 에스빠뇰 게시판이 있다. 미루어 짐작컨대 동물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뜻인 것 같다. 하지만 밥 먹을 때마다 아장아장 기어와 옆에서 밥 달라고 쳐다보는데.. 안 주기가 뭣했다.


길을 잃고 정글 속을 헤메다가...

마야 유적에 워낙 흥미를 잃어서 이젠 뭘 봐도 그저 그렇지만(아시아에 비하면 엄청 단순한 인간들인 것 같다) 사원 양식을 대충은 구분할 수 있었다. 이건 떼오띠와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군. 이게 이거보다 앞서 지은 것 같은데? 등등 혼잣말을 중얼거릴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지금까지 들러본 박물관 덕택이다. 멕시코에 비하면 유적 관리는 엉망임에도 입장료는 동등한 수준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다.

공교롭게도 추측이 대충 맞았다. 끔찍한 가뭄이 이어지는 동안 피지배층이 사제 계급을 대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천문 관측은 점점 덜 중요해지고 달력은 잊혀지고 사제들은 권력을 잃었다. // 중간계급이 없었던 마야 사회에서 지배층의 붕괴는 사회적으로 큰 혼란을 야기했을 것 같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이라는 두 계급 구조 밖에 없었다는 점이 아주 신기하다. 어떻게 그런 사회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가 의문이다. 그럼 상거래로 돈을 버는 상인들 역시 지배층이었다는 말인가? 세금을 징수하는 관료도 지배층이고, 기술과 학문을 유지하는 사람들이야 사제들이었을 것 같지만. . 마야 제국(?)이 순식간에 붕괴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일 것 같다. 그걸 제국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신석기 동굴 씨족 원시인들의 자위행위지.

세력 확장이 없었고 계급갈등이나 권력의 분배 문제가 별로 없고 인디오들 전부가 교육을 받지 못해 미신에 사로잡혀 있었고 다른 대륙과 긴밀한 무역을 하지 않아 우물 안 개구리였고 청동기도 없었고 세상에 그 흔해빠진 사랑의 시조차 기록에 남은 것이 없고 두 말 할 것도 없이 학문이나 기술의 전승도 없고 어둠의 일곱 신과 싸우는 태양신을 돕기 위해 인신공양이나 드리고 앉아 왕의 '신전'을 건설하는데 몰두해 있었다면 이 문명은 망해도 싸고 망해야 한다고 봤다.

마야 유적과 마야 유적지에서 발굴된 각종 유물들을 보면서 느낀 것은 AD 12~18세기 무렵까지 '찬란하게 이어졌다는' 마야 문명이 의외로 초라하고 한심하다는 것. 뭐가 찬란하다는 것인가. 대체 뭐가? 그 시기에 건너편 땅덩어리에 살고 있는 다른 문명권은 마야에 비하면 1000년은 족히 앞서 있었다. 마야 문명이 그럴듯하고 신비스러워 보이는 것은 새로운 문명을 발견한 고고학자들 눈에나 그렇게 보일 뿐이지, 정체된 문명, 정체된 사회, 내부적으로 소통조차 없었던....

너무 심하게 말했나? 흠. 박물관에 가서 친히 둘러보라. 그 시절까지 꾀죄죄한 토기들과 천 쪼가리들, 개나 소나 만들 수 있는 금세공품 밖에 안 보인다. '문화'가 실종되었고 '발명'과 '발견'이 없다. 도시에 수로를 만들었다지만 하천의 관계 시설을 만들지 않았다. 하천을 제어하면 대규모 농경이 가능함에도 대규모 농경을 하지 않은 것 같다. 식량창고가 있기나 했을까? 정글에 불 지르고 화전을 계속 하면서 움직여 다녔는데 그건 지극히 원시적인 농경이다. 열대다 보니 천문관측기술이 농경에 도움이 된 적은 없을 것이다. ·"$%"·$%"·$

남쪽 유적지의 따뜻한 바위에 누워 있다가 선잠에서 깨어보니 벌써 오후 4시. 사방에서 원숭이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해가 지고 있다. 유적지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차를 타고 산타 엘레나에 도착하니 오후 5시. 어젯밤 삐끼가 말해준 중국 음식점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양 많고 싸다길래... 그런데 음식점이 아니라 디스코텍이다. 왜 음식점 이름이 mi disco일까 궁금했었다. 중국인으로 보이는 주인에게 물으니 음식을 판단다. 메뉴판을 갖다준다. 음식점 맞군. 쵸우면과 맥주를 시켰다. 중국인이 운영하니까 정통 초우면을 먹을 수 있을 꺼라 내심 기대했는데 국적불명의 이상한 음식이 나왔다. 어떤 음식이든 칠리 소스를 뿌리면 맛있어지기 때문에 왕창 뿌렸다. ...... 짬뽕맛이 났다.

피곤하지만 과떼말라 시티에 갔다가 바로 안띠구아로 움직였다. 며칠째 제대로 잠을 못 잤다. 유적지에서 자고 유적지에서 세수하고 움직이는 형편. 차 시간이 많이 남아 광장에서 애들 농구하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플로레스나 안띠구아나 짐작대로 관광도시였다. 차 타고 오면서 안띠구아에서 일주일쯤 스페인어를 배워볼까 생각하다가 문득. 스페인어를 배워서 여행하려면 아랍에서도 그렇게 했어야 했다. 스페인어를 알게 되면 중남미인들과 아주 재미있게 놀 수 있다는데 그건 아랍도 마찬가지였다. 여행하러 왔지 스페인어 배우려고 온 것이 아니고, 다른 데에서는 하지 않았는데 왜 굳이 중남미에서는 하려는가... 하는 반성을 했다. 앞으로도 줄기차게 어려움이 이어지겠지만, 끝까지 게기자. 음... 그래도 치치까스떼낭고의 분위기가 정 좋으면 더 머물기 위해서라도 하는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까?

안띠구아에 도착하자 마자 커다란 화산이 눈에 들어왔다. 피곤해서 세 시간쯤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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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Guatemala

여행기/Guatemala 2003. 4. 11. 11:05
출발은 여섯시인데 다섯시부터 깨우고 지랄이다. 왜들 이리 부지런을 떠는가. 피곤해 죽겠는데. 샤워를 하려고 수도꼭지를 돌리니 물이 안 나온다. 머리가 젖은 채로 잤더니 심하게 뻗쳤는데... 하는 수 없이 피같은 미네랄 워터를 조금씩 부어가며 칫솔질과 세수를 했다. 250ml 밖에 안 썼다. 리셉션에서는 미네랄 워터로 세수했다니까 웃고 지랄이다. -_-; 잠이 덜 깨 거리를 나서니 마치 베트남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멕시코가 잘 사는 이유는(값비싼 여행지가 된 이유는) 이런 사소한 것들에 있는 것 같다. 부지런함.

비가 온다. 우기가 시작된 것 같다. 비가 아주 심하게 왔다. 잤다. 깼다. 멕시코 이민국에서 출국 수속을 마쳤다. 유속이 아주 빠른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강이 아무래도 멕시코와 과테말라의 국경을 가르고 있는 것 같다. 맥주캔이 떠내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강물 곳곳에는 작은 소가 형성되었다.

썰렁한 강 건너편에 도착하니 거기가 과테말라 이민국이란다. 내 비자를 굉장히 유심히 쳐다본다. 패스포트를 이리저리 넘겨본다. 코리아? 씨.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래봤자 어쩌겠냐. 비자 받았으면 그만이지.

과테말라행 편도 투어행을 잡길 아주 잘했다. 혼자서 빨렝게에서 이런 저런 교통수단을 알아보고 새벽 네시부터 차를 두 번 갈아타고 배를 타러 온 미국인은 사공이 건네주지 않으려 해서 반쯤 얼이 빠져 있었다. 투어팀은 강을 건넜지만 그는 300뻬소를 주고도 배에 사람이 찰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간신히 보트를 타고 다시 버스를 타기 위해 50꿰찰을 지불한다. 그가 소요한 총 경비는 400뻬소 가량, 투어가격은 250뻬소. 나같으면 보트 가격을 협상해서 100뻬소만 주겠다. 안 받으면 안 간다. 미쳤냐? 25분 배 타는데 무슨 비행기 타는 것도 아니고 300뻬소 씩이나 주게. 하여튼 가이드북의 괴이한 헛소리를 믿었더라면 고생할 뻔 했다.


국경을 넘어, 과테말라 이민국 앞.


아이들이 마을 공터에서 축구하고 있다. 떼거지로 몰려들어 인사를 한다. 서양것들은 애들을 애써 무시한다. 귀여운 것들, 인사성도 바르지. 누군가 갑자기 군바리식 경례를 했다. 답례를 하자 다들... 경례를... 왠지... 인도 깡촌이나 라오스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과떼말라에 오길 잘했다. 굉장히 친근감이 들게 생긴 고물차를 타고 역시 친근하기 짝이 없는 비포장도로를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달린다. 이렇게 차가 심하게 흔들려야 관절과 근육이 골고루 움직여 뻐근해지지가 않는다. 비포장도로와 똥차가 그래서 좋다. 친근감이 팍팍 우러나오는 소들이 마치 차를 처음 보기라도 하는듯이 화들짝 놀래 길에서 도망친다. 그리고...

화전을 보았다. 정글 곳곳에서 마른 불꽃과 연기가 치솟았다. 이것이야말로... 마야 역사 3000년 동안 변치 않았던 바로 그 농작법! 오오... 아. 감탄할 일은 아니지. 메소아메리카 문명권은 어쩐 일인지 청동기가 없었다. 청동기 문화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알래스카로 넘어간 후 갈라파고스처럼 고립된 것일까? 고립은 그렇다치고, 동광맥에서 불 한번 지펴보지 않았단 말인가? 이렇게 축복받은 땅에서.

국경을 건너자마자 이렇게 달라지다니. 재밌다. 25년 전에 과떼말라를 방문한 늙은 미국인 부부가 버스에 타고 있었다. 직업을 묻진 않았지만 고고학자 처럼 보인다. 마야 유적만 죽실나게 돌아다녔는지 모르는게 없다. 아는 게 없어서 질문할 것도 없었다. 그냥 어떻게 해서 마야력이 그렇게 정확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는지 아냐고 물으니 실실 웃으면서 자기는 모른다고 대꾸했다.

플로레스에서 내렸다. 국경에서 환전하지 않았다. 환율이 나쁘니까. 플로레스에 도착한 것이 4시, 은행은 문을 닫았다. 2시 반에 도착해야 할 차가 사람이 덜 찼다고 안 가고 개기니까 네시가 되서 도착한 것이다. 과테말라 돈이 없어서 숙소를 잡을 수가 없다. 게다가 배고프고 더위에 지쳐 갈증 나는데. 여기 저기 물어 인터넷 가게에서 환전. 다섯시. 가이드북의 숙소 정보는 믿을 수가 없어서 땀나게 동네를 돌아다니며 싼 숙소를 찾아보았다. 40꿰찰 이하의 숙소는 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무시했다. 과테말라는 인도같은 곳이다. 있다. 있을 것이다. 다섯시 반 간신히 체크인. 30꿰찰, 약 4불 가량. 숙소는 인도의 감방같이 생긴 그런 곳이었다. 길에서 만난 저렴하게 생긴 일본인에게 숙소 정보를 물으니 20불 짜리에 묵으면서 아주 만족한다고 말한다. 나와는 레벨이 다른 사람이었다. 해브 펀 하고 돌아섰다.

잘 사는 멕시코와 달리 과테말라 사람들은 인간 냄새가 난다. 헤헤 잘 웃고. 수도인 과테말라 시티가 위험한 곳이니 가지 말고 안띠구아로 바로 가란다. 고개를 끄떡였지만 가야 한다. 그에게 한국이 대체 어디 붙어있는지 지도를 그려 가르쳐 주었다. 자기들 땅보다 좁은 땅덩이에 4500만이 산다니까 몹시 놀란다. 과떼말라 총 인구가 2천만이란다. 알지. 잘 알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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