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Myanmar'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05.04.11 4/10, 4/11 Bangkok, Incheon 1
  2. 2005.04.11 4/10 2
  3. 2005.04.10 4/8-4/10 Bangkok
  4. 2005.04.08 4/8 back to Yangon
  5. 2005.04.07 4/7 Bagan
  6. 2005.04.05 4/5 to Bagan 3
  7. 2005.04.04 4/4 Back to Mandalay
  8. 2005.04.03 4/3 Hsipaw
  9. 2005.04.02 4/2 Mandalay 1
  10. 2005.04.01 4/1 Bago 2
  11. 2005.03.30 3/30 Yangon 1
  12. 2005.03.29 태국에 도착해서.. 3
이틀동안 같이 돌아다닌 한국인은 자신이 '맛따라 길따라'라고 밝힌 바 있다. 아, 반갑군. 맛따라 길따라는 말이야, 숙소나 교통은 처절하게 싸구려를 지향해도 음식 만큼은 결코 양보해서는 안되지. 하지만 나를 따라 다니다가 계산서가 500밧, 700밧(18$ 가량?) 씩 나올 때면 표정이 안 쓰럽게 변했다. 나하고 같이 다니면 배낭여행자처럼 할 수는 없어. 라고도 말했다. 왜냐하면 나는 하루에 천밧씩 쓸 예정이거든? 보통은 하루에 200밧으로 식사 두 끼와 숙박비, 느적거리며 여기 저기 버스 타고 돌아다니고, 거기에 150밧 정도를 보태면 적당한 바에서 맥주 한 잔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하루 생활비를 한 끼로 썼다. 물론 국수와 길거리 음식도 보이는 족족 꾸준히 먹어 주었다. 하루에 간식 빼고라도 여섯 끼 정도는 먹어줘야 하니까. 그 친구는 원래 방콕에 이틀 정도 있다가 북부로 갈 생각이었는데, 인도에서 굶주리다 온 탓에 태국의 풍부함 음식에 눈을 반짝이다가 결국 방콕에서 일주일 가량을 묵게 되었다 -- 주저앉았다. 머리는 땋아서 파인애플처럼 만들어 놓았다. 앞으로 그가 여행할 어떤 도시도 방콕 같지 않을 것이고 방콕 보다 좋지도 않을 것이다.


새 아침. 8시. 너무 일찍 일어났다. 묵고 있는 도미토리에 아무도 없다. 벌써들 나간건가? 만남의 광장이 좋은 점은 숙박객이 별로 없어 팬티만 입고 복도를 활기차게 돌아다녀도 된다. 저 빨간 바지는 여행 내내 입었던 단 한 벌 뿐인 바지. 저녁마다 빨았다. 빨아도 빨아도 빨간 물은 줄기차게 흘러 나왔다. 인도제나 네팔제나... -_-

카오산을 흐느적거리며 걷고 있는데(더위는 아침이라고 봐주지 않으니까) 왠 시크 교도가 불러 세우며 날더러 다짜고짜 행운아라고 한다. 암 행운아지. 평상시에는 운이 안 따라줘서 안 해도 되는 삽질을 꼭 하게 되는데 죽을 일이 생기면 운이 따라붙는단 말이야? 장수하면서 고생하는 운이라는 것이지. 그러더니 손금을 봐주겠다며, 내 어머니 이름을 알아맞출 수 있단다. 아침부터 재수가 없다. 난 행운아가 아네요. 당신을 만난 것만 봐도 그래요. 그러고는 히히히 웃어주었다. 그 친구도 히히히 웃는다.

문을 연 가게가 없어 시장통에서 아침 밥을 먹고 인터넷 좀 하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샤워하고 어젯밤 숙소에 체크인한 미국계 일본인과 그가 온 몸에 새겨 놓은 문신에 관해 노닥거리다가 체크아웃하고 짐을 맡겨 놓고 월텟행 버스를 탔다. 딱히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월텟의 일 층에서 일식당을 본 것 같아 한 번 방문해 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여전하다. 태국에서 먹는 초밥은 변함없이 꽝이다. 나를 일본인으로 아는지 중업원들이 무척 어려워 하면서 말 끝마다 일본어를 사용했다. 카드로 결제하려니 안 된다. 어제부터, 이상한 일일세?

에어컨 펑펑 나오는 월텟의 벤치에 앉아 놀았다. pda에 책 몇 권을 담아 왔는데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그 동안 나름대로 바빠서 읽지 못했던 '데프콘'을 읽었다. 숙소에 일본인 둘이 있었는데 자기 전에 그들의 얼굴을 흘낏 쳐다보고, 데프콘 한-일전 편을 마저 읽기도 했다. 소설에서는 한국이 핵폭탄으로 일으킨 해일에 일본이 침몰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본이 어이없이 아작나서 고개를 갸웃했다. 일주일 가량 인터넷을 못했고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그 동안 모르고 있었는데 방콕에서 뉴스 사이트를 돌아보니 중국에서 일본을 비난하는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상임이사국 엿 될 것 같다. 일본은 왜 저럴까? 얻는 것도 없으면서. 원숭이기 때문일까? 혹시 요즘 일본 여성 여행자들의 얼굴이나 몸매가 영... 그런 것과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책 읽으며 빈둥거리다 보니까 어느새 오후 4시. 빅씨로 가서 1kg 가량의 망고스틴을 사고 근처 이탈리안 식당에서 스파게티를 먹었다. 스파게티 맛이 꽝이다. 먹다 말고 남기고(배도 부르고 해서) 냅킨으로 입술을 닦고 주문한 루트 비어로 목을 축였다. 요새는 민트 티나 루트 비어 따위 이상한 것들도 시켜 마셨다. 계산하려고 식탁에 그동안 철렁거리던 남은 잔돈 동전을 파고다처럼 쌓아 놓았다. 스카이스크래이퍼, 장관이다. 종업원을 향해 히죽 웃어보였다. 요즘 방콕 사람들은 외국인을 향해 잘 웃지 않는다.

11시 30분 인천행 항공권이지만 방콕의 악명 높은 교통체증 때문에 일찌감치 서둘러야 한다. 버스를 타고 카오산에 도착하니 6시. 카오산은 지나치게 바글거렸다. 내가 마지막으로 카오산에서 맥주 마시고 노닥거린 때가 언제인지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최근 몇 년 동안 카오산에서 논 적이 없다.


코카콜라 협찬 송크란인가 보다. 펄럭이는 코카콜라 깃발 밑에서 펩시 깡통 차(좌측)가 나타나 공짜로 펩시 콜라를 나눠 준다. 며칠 전부터 하루에 여섯끼씩 먹느라 배가 불러서 콜라 같은 저질 싸구려 탄산음료는 영 손이 가지 않는다.

길 가는데 어떤 여자애가 물을 뿌렸다. 뒤돌아 봤다. 그 표정. 뭔가 말할까 하다가 돌아섰다. 나는 아내에게 충실했다. 그건 짝짓기나 사랑 나부랑이 등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의 문제였다. 게다가 21세기는 신용사회다.

숙소에 맡긴 짐을 찾고 수박쥬스 한 잔 마시고 짐을 챙겨 일어나 복권청 앞에서 59번 버스를 한 시간 가량 기다렸지만 안 온다. 오후 7시 30분. 교통체증을 감안하면 공항에 도착하는 시각은 9시 무렵이 될 텐데... 더 늦으면 땀나는데... 송크란 때문일까? 아침부터 재수가 없나보다 싶어 짐을 들었다. 하는 수 없이 공항 버스를 타기로 했다.

걷는 도중 59번 버스가 막 오고 있다. 반전해서 버스 정류장으로 허겁지겁 뛰었다. 가까스로 버스에 올랐다. 졸다가 눈을 떠보니 공항에 가까워진 듯. 짐을 챙겨 확인도 안 하고 성급하게 내렸더니 공항까지는 아직 3km 남았다. 에고야... 이런 실수를. 마지막 순간까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걷게 되다니.

망고스틴을 넣은 가방이 걱정이다. 쿼런틴에서 걸리지 않을까. 망고스틴 몇 개가 한국의 자연환경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리는 없다. 그 보다는 컨테이너 선저에 담겨오는 이국의 바닷물에 포함된 미생물이나, 검역을 소홀히 한 육가공품, 엄청난 양의 채소들에 함께 딸려오는 작은 생물군이 지역 생태계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한 종의 멸절, 먹이 사슬을 구성하는 피라미드의 한쪽 변이 무너지면서 그 종과 연관된 주변 종들이 트럼프로 지은 집처럼 함께 무너져 내려 생태계 전체가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는 가설이 있다 <-- 여러 모로 의구심이 많이 생기는 썰이긴 하나, 주접 떨기보다는 망고스틴 잘 챙기고 여행기나 마무리 짓자. 산처럼 쌓아놓은 망고스틴 피라미드에서 망고스틴을 하나 하나 고를 때마다 심혈을 기울였다. 심지어 지나가는 아줌마에게 망고스틴 고르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꼭지는 연노랑, 잡티 없고 짙은 보라빛의 탱글탱글한 바디라인, 배꼽이 단단한 것들.

공항 대기실에 도착하니 9시 50분. 수속은 10시 30분. 아까 빅씨에서 사온 100밧 짜리 초밥 도시락을 꺼내 흡족하게 배를 채웠다. 어떻게 고급 일식당의, 그때 그때 만들어 배에 얹어 띄우는 초밥 보다 대형 수퍼마켓에서 대충 만들어 파는 초밥이 더 맛있을 수가 있을까. 신기한 일이지. 오늘은 다섯 끼 밖에 안 먹었지만 나머지는 기내식으로 보충하자고 마음먹었다. 대기실 구석에 앉아 ac 아웃렛에 어댑터를 꽂고 노트북을 연결해 이 글을 쓰고 있다.

탑승 수속이 11시 50분으로 밀렸다. 대기실은 갑자기 사람들로 미어터졌다. 돗대기 시장 같다. 무슨 일인가 물으니 송크란 휴일로 한국에 가는 사람들과, 아침부터 송크란 때문에 항공기가 연착하여 밀린 사람들이 몰렸단다. 그래서 전세기가 3대나 동시에 출발한다. (여러 이유 탓에 동남아의 중산층이 가장 선호하는 관광지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같다) 어느 나라에 가나 축제는 일정을 틀어지게 만드는 귀신같은 것이다. 축제 때는 이동이나 숙소 구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축제를 요리조리 피해가는 것을 기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술 먹은 한국인 아저씨가 옆에서 고성을 지르고 있다. 여행사에 사기 당했다고 소리 지르는 것 같은데, 비행기 한두 시간 연착한 걸 가지고 뭘 그리... 아무도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지만 참 열심히도 소리를 지른다.

담배나 한 대 피우려고 흡연실에 들어가니 어떤 한국인이 말을 걸어오며 한국 담배를 권한다. 고맙게 받았다. 화보 촬영차 태국에 왔다는 것이다. 음식 값이 싸다면서 식당에서 한끼 식사로 15만원을 썼단다. 그 시간에 누군가는 미얀마에서 42도 뙤약볕에 죽을 고생을 하고 있었다(45도라는 설도 있다). 방콕 가면 에어컨 펑펑 나오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한끼에 무려 10$나 하는 음식으로 우아하게 배를 채우자, 뭐 그런 다짐을 하면서. 담배를 다 태우고 나니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왠지 나와는 클래스가 다른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나를 오지만 찾아 빡세게 여행하는 용가리같은 비일상적 존재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아는 비일상적인 여행이란 이런 것이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 얘기하면서 미얀마 북부의 외국인 여행자 제한 지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북부 기점 도시에 도착하면 버스를 이용하지 않고 픽업을 탄다. 픽업으로 30분에서 한 시간 단위로 짧게 이동한다. 무수한 검문소가 있으므로 여행자 티나는 복장을 하지 않는 편이... 해가 지는 오후 6시가 넘을 때까지 제한 지역으로 계속 밀고 들어가서 도시에 도착한다. 외국인 여행자 숙박이 인가된 숙소를 제외하고는 외국인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이미 해가 져서 오도가도 할 형편이 못되고, 미얀마 사람들은, 참, 친절하다. 태국에서 따지렉을 거쳐 육로로 미얀마에 입국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그 역은 가능하다. 그리고 미얀마에서 중국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인도는 모르겠다. 하지만 시도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한번쯤 장기여행을 해 봐서 인지 도시에서 도시를 잇는 것이 아닌, 아무도 안 가본 곳을 가는 것이 요즘은 여행 같다고 느끼고 있고, 가끔(그걸 가끔이랄 수 있을까?) 만나는 히피같은 작자들은 나와 달리 그런 비일상적 여행을 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인터넷에 블로그 따위를 안 올리고 책도 안 쓴다. 그래서 세상에 알려진 바가 없다. 알려지면 대단한 오지탐험가쯤 되는 오해를 받는다. 이를테면 한비야같은 사람. :) 구설을 통해서만 몇몇 이름과 사연이 알려지고(대개는 어느 나라의 '아무개'가 어떻게 몇 년을 여행했다는 식으로), 우연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 그 도시의 가장 싸구려 숙소의 도미토리가 이상적인데 마치 이들 숙소는 체인점이라도 되는 것처럼 히피 해픈 라인을 연결하여 도시에서 도시로, 점에서 점으로 가늘고 희미하게 이어져 있다. 아마도 내가 그런 여행자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던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싶다 -- 싼 숙소만 찾아 가니까. 그들을 통해 다른 여행자들과는 약간 색다르고 상대적으로 '진기한' 경험담을 들을 수 있다. 마치 신밧드의 모험처럼. 하지만 그건 남들 얘기고, 해보지 않은 나와는 상관없다. 이런 직업 생활하면서 가능한 것도 아니다. 여행과 직업생활 중 어떤 것이 더 재미있다고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었다. 그러니 교대로 해 보고 나서 몸이 뜻대로 잘 안 움직일 때 다시 평가해 보자.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는 올 때보다 더 형편없었다. 기내식, 서비스, 기타 등등... 무의식적으로 포장도 안 뜯은 모포를 챙겨 가방에 넣었다.

아침, 랜딩 후 이어지는 지루한 택싱이 끝나고 인천 공항에 도착. 검역소에서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i hvae nothing, nothing to declare. 인천은, 서울은, 한국은 마치 거대한 에어컨 룸 같다.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고 덜덜 떨면서 버스를 기다렸다. 크룽 팁 담배곽에서 마지막 가치를 꺼내 빨았다. 입맛이 쓰다.

내 앞에서 서양인 둘이 어떻게 버스를 타야될 지 몰라 헤메고 있었다. 내 옆에 앉아있던 싱가폴 항공 기장이 그들을 도와준다. 나와 가는 방향이 같다. 602-1.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버스를 타려니 카드가 되지 않는다. 어제부터 왜 이리 말썽인가. 원화가 하나도 없어 10달러를 내고 7000원짜리 (어이없이 비싼) 버스표를 끊고 잔돈으로 2500원을 거슬러 받았다. 카드 받기를 거부하는 운전사나, 환율을 적당히 때려맞춰 적당히 잔돈을 거슬러주는 두 양반에게 그래도 삿대질을 하고 으르렁거리지 않았다. 여긴 모든 것을 협상하고 타협해야 하는 여행지가 아니다. 안되면 안되는 거고 주는대로 받으면 되는거다. 이 곳은 한국이다. 게기면 표 안 팔고 버스 안 태워준다. 무서운 여행지다.

인도네시아에 지진과 해일이 덮치기 바로 전 인도네시아 보르부두르 유적지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휴가 계획은 그랬다. 항공권을 안 끊은 아내의 게으름이 내 생명(?)을 구했고, 그래서 바꾼 여행지가 고생만 죽어라고 한 미얀마였다. 동남아 3대 고대 유적지 중 두번째가 그렇게 끝났다. 동남아(south east asia)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 독일인 학자였다. 지리적 편의상 지어진 그 이름보다 나은 것은 정녕 없었을까.

집에 와서 짐을 풀고 잤다. 휴대폰으로 전화가 와서 깼다. 태국에서 카드 사용하셨죠? 네. 거래를 중단시켰습니다. 동남아에서 말이죠... 그러니까... 불법 도용... 그래서... 안되고... 카드를... 그러므로... 다시... 발급하세요...

이런 망할. 이불 덮고 다시 잠을 청했다. 노트북 배터리는 완전방전되어 고물이 되고 회사에 안부 인사하니 지난 2주 동안 파란만장한 사연이 절절하게 흘러나온다. 나는 내가 없어도 일은 잘 돌아간다고 굳게 믿었다 -- 굽힐 수 없는 사내의 신념으로.

--끝--

총 여행일수: 미얀마(7일), 방콕(4일) = 12일
총 여행비용: 294+490 = 784$

미얀마 여행 경비: 168+26+17+83 = 294$

* 방콕->양곤 항공권 6600밧(168$, 푸켓에어 한달 오픈), 밍글라돈 공항 출국세: 10$

* 숙박비: 양곤(2박, 6+5=11$), 만들래(2박, 6$), 시뽀(1박, 1500짯), 바간(2박, 7$) = 약 26$
* 입장료: 보타따웅(2$), 쉐다곤(5$), 바간(10$) = 17$
* 교통,음식,기타비용: 환전(70$ = 63000chat, 환율 900chat/$), 보유액(12000) = 75000(약 83$)
* 항공권, 공항세를 제외한 일평균 비용: 126/7일 = 18$

태국 여행 경비: 360+104+26 = 490$

* 인천<->방콕 항공권: 세 포함 360000원, 돈무앙 공항 출국세: 500+500 = 1000baht = 26$

* 숙박비: 방콕(4박, 400밧) = 약 10$
* 교통,음식,기타비용: 3600밧 = 약 94$
* 항공권, 공항세를 제외한 일평균 비용: 104/4일 =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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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

여행기/Myanmar 2005. 4. 11. 12:41
아침 8시에 일어났다. 할일 없이 빈둥거리다가 씰롬에 괜찮은 식당이 있대서 찾아갔으나 문을 닫았고,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오이시에 들어가 수끼+초밥 부페를 먹었다. 배불리 먹었다. 오이시가 돈 좀 벌더니 예전 같지 않아 입맛을 다셨는데 아직 부페를 하는구나... 그러나 역시 초밥은 맛이 없었다. 배 터지게 먹고 펭귄처럼 걷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월텟 4층에 올라가 벤치에 누워 시원한 에어컨 바람 쐬면서 잤다. -_-

아내는 참 운이 없다. 이세탄 백화점에 들러 두 시간 동안이나 쪽팔림을 무릅쓰고 정성들여 보석을 둘러보고 간신히 25만원짜리 썩 괜찮은 사파이어 목걸이를 골라 포장까지 마치고 계산 하는데, 점원이 실수로 4밧 더 많게 계산해서 그걸 취소하고 다시 카드로 긁으려니까 카드 결제가 되지 않았다. 한참 시도 해 봤지만 만밧이 조금 넘는 트랜젝션을 두 번 실수한 탓인지, 아니면 한국의 은행이 영업시간을 넘긴 탓인지 거래가 되지 않는다. 점원 말로는 하루 사용 금액을 초과했다고 한다. 글쎄? 내가 한미카드 vip고객인 것으로 아는데? 국제 전화를 걸어야 하는 등, 일이 귀찮게 꼬여서 거래를 취소하다. 한가하게 돌아다니며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을 사 먹었다.

에어컨이 나오는 대형 백화점 사이를 전전하며 빈둥대다가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영화를 보기로 했다. '사하라' 영화가 별로 재미 없다.

밤 아홉시 가까이 되어 수쿰빗으로 가서 이런 저런 바를 돌아다녔다. 생음악 하는 술집들은 보통 아홉시 반에 시작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술은 안 마시고 서성이며 분위기 보다가 다른 바로, 또 다른 바로, 여기저기 메뚜기처럼 바 호핑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일본인들 상가 부근의 도쿄 조'스 블루스 바에 들렀는데 분위기 괜찮다. 사약같은 기네스 드라프트를 시켜 먹으면서 흥겨운 음악을 들었다. 아, 방콕에 이런 곳이 있었구나. 바 안에 있는 사람들 절반이 뮤지션이다. 오늘 잼 세션이 있는 날이라서 악기를 들고 서성이는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분위기 매우 훌륭하다. 블루스가 워낙 마초 폼 잡는 음악이라 그런지 집적거리는 게이도 없고 재즈바처럼 음악에는 별 관심없는 찌꺼지들 아니 계집애들도 없고 담배 연기 자욱한 가운데 다들 입 다물고 음악을 듣는다. 연주솜씨가 괜찮다. 분위기가 좋아서 자정을 넘겼다. 너무 늦어버렸다. 거리로 나오니 썰렁하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카오산으로 돌아왔다.

아쉽다. 엊그제 한국인 젊은 친구 도와준답시고 이틀을 같이 다니는 바람에 밤마다 수쿰빗의 바를 전전하는 계획이 틀어진 것이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방콕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 동안 배낭 여행 한답시고 거지처럼 돌아다니느라 방콕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런데, 나는 왜 맨날 방콕에 올 때마다 처음 방콕에 오는 친구들의 가이드질을 하게 될까. 아무래도 한국인 게스트 하우스에 묵어서 그런 것일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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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10 Bangkok

여행기/Myanmar 2005. 4. 10. 01:07


화이트 하우스 옥상에서. 만달래 맥주 마시고 알딸딸.

아침에 일어나 아침을 정신없이 먹었다. 게스트 하우스 손님들은 8시 정각에 기상해서 개떼처럼 식사를 하러 내려오지만 거의 아무 말도 없이 아침만 먹고 일어나는 지극히 특이한 분위기였다. 배 채우기 바빠서? 아니면 최근 여행자들 추세가 인터넷이나 가이드북으로 인해 충분한 사전 정보를 가지고 오기 때문에 서로 할 말이 없어져서?

양곤에 온 후 엽서를 구하려고 돌아다녔지만 품질이 좋으면 가격이 비싸고 가격이 싸면 품질이 떨어져서 망설여졌다. 화이트하우스에서 50짯에 한 장 짜리를 15장 구매했다. 아침을 든든이 먹고 숙소를 나와 시장통을 돌아다녔지만 택시 협상이 신통치 않다. 아홉시가 넘었고, 1달러 깎으려고 보낸 시간이 벌써 30분째, 에라 모르겠다. 협상은 그만 하고... 2500짯 주고 택시에 올랐다. 35분을 달려 공항에 도착. 수속을 재빨리 마치고 대합실에 들어가니 썰렁하다.


양곤 밍글라돈 공항 대합실 맞은편 흡연실. 한산. 대합실에서 기다리는 무료한 시간 동안 남은 돈 1340짯을 어떻게 처분할까 고민했다. 아내를 본받아 엉뚱한 짓을 해보기로 했다. 대합실 윗편의 레스토랑으로 올라갔다. FEC(Foreign Exchange Currency)만 받는다고 써 있었다. 여행자들 사이에서 악명 높았던 FEC는 얼마 전에 사라졌다. 메뉴판에는 달러만 받는다고 써 있었다. 매니저를 불러 나한테 지금 1300짯이 있는데 이 2 달러짜리 코카콜라를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 순순이 오케이 한다. 700짯 짜리를 1300짯 주고 마셨으니 왠지 스스로가 바보같았지만 최소한 그 걸레같은 지폐 쪼가리들을 처분했다.


돌아오는 727-200편의 좌석은 30여석만 차고 나머지는 비었다. 일제 중고 시내버스를 타고 비행기를 향해 간다. 내리려면 위의 버튼을 눌러야 한다. :)


방콕에 도착하니 억수같은 비가 내렸다. 버스 정거장까지 비 맞고 간신히 걸어갔다. 미얀마에서 돌아와서 그런지 방콕이 상대적으로 쌀쌀했다.

송크란 축제가 예년같지 않다. 푸켓 해일로 막심한 피해를 입은 태국이 대대적으로 준비하는 듯한 인상.

만남의 광장에 다시 가니 이번에는 사람이 들어차 있다. 빨랫줄에 걸어놓은 빨래들을 보니 인도에 갔다온 사람인 듯. 대충 씻고 빈둥거리니까 들어온다. 24살, 450만원 짜리 1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완 월드 티켓을 들고 처음 들른 곳이 인도. 함께 돌아다녔다. 나랑 돌아다니면 안 좋을텐데... 왜냐하면 나는 하루에 천밧씩 사용할 작정으로 방콕에서 나흘 있을 예정이니까. 방콕에 온 기념으로 쌀국수 가게를 소개해 주고 저녁에 함께 수끼를 먹었다.

그랜드 쉐라톤 호텔에 밤 아홉시 사십분쯤 도착. 썩 괜찮은 재즈를 들을 수 있다길래 찾아온 것이다. 스트릭트 드레스 코드 때문에 문전박대 당했다. 젠장. 예상했어야 했다. 인도 갔다온 복장, 미얀마 갔다온 복장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그냥 나가기 뭣해서 옆 자리에 구겨져 않아 두당 235밧 짜리 맥주를 마셨다.

방콕에서는 평생 다시 탈 일이 없을 것 같은 마이크로 버스에 매달려 카오산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젊은 친구와 함께 대충 밥을 먹고 빤팁 플라자로 향했다. 그의 도시바 노트북이 부팅이 안 되는데 그걸 계속 들고다니려니 애물단지가 되고, 한국에 보내려니 안에 넣은 것들이 많아 아깝다. usb 외장 cdrom drive를 구하면 windows xp를 다시 깔기만 하는 것으로 복구가 가능하리라 짐작했다. 빤팁 플라자의 여러 매장을 돌아다녔지만 usb external cdrom drive를 구하기가 만만찮다. pcmcia cdrom drive로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 usb floppy로 시도했으나 파티션이 ntfs로 포맷되어 있고 리패어 서비스 센터에는 ntfs를 다룰 수 있는 툴이 없다. 외외로군. 간신히 물어물어 usb cdrom drive를 찾았는데 그것도 안 된다. 주인장 말로는 도시바 전용 cdrom drive만 가능할 꺼란다. 벌써 네 시간이 흘렀고 지쳐서 그냥 나왔다.

빅씨의 4층 일식당에서 돈까스를 먹고 평일에도 밀리는 길을 버스 타고 돌아오는 길에 축제 행렬을 만났다. 축제가 시작된 것인지 교통 체증이 보통이 아니다.




즐겨 피우는 크룽 팁의 겉 표지에 이런 사진을 올리다니... 태국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트랜스젠더다.


역시 트랜스젠더다.


사타구니 사이가 솟아있는 것을 보면 아직 덜 트랜스했다.


뭔가 할 것 처럼 한참 지껄이더니...


닌자 차림의 두 남자가 무대에 나타나 굉장히 재미없는 퍼펫쇼를 한다.


파아팃 선착장 옆, 무슨 공원에서 바라본 라마 xx 다리


공연, 꽤 재미있었지만 밥 먹으러 갔다.


파아팃 선착장 옆의, 적당한 가격에 괜찮은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인데, 이름을 잊었다. 방콕에 처음 방문한 외국인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오늘의 추천 메뉴를 소개해 달라니 뿌 팟뽕 까리와 똠 얌 꿍을 주저없이 권한다. 푸훗. 그 둘과 싱하 두 병, 밥 두 접시 해서 740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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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권 일자 변경은 실패. 버스표를 어제 간신히 예매했는데, 이번에는 정말 좌석이 없다. 복도 중간에 앉았다. 거참 자리 훌륭하다.

이 더위에 버스에 에어컨이 안 나오는 거야 뭐 늘 그랬으니 그렇다치고. 버스에 정말 전형적인 jerk처럼 생긴 젊은 미국인 남녀가 탔다. 여기가 발리섬이라도 되는지 하와이안 꽃무늬 반바지와 난방을 입고 있었다. 분위기가 상당히 안 어울린다. 밤새도록 미국 여자애가 징징대고 옆 자리의 아가는 울어대고 앞 자리 아줌마는 바닥에 드러눕고 차는 타이어가 터져서 새벽에 허허벌판 한 가운데 멎었다. 새로 간 타이어 역시 어디가 잘못 되었는지 얼마 못 가서 다시 차를 세운다. 승객들과 운전수가 합심해서 지나가는 버스를 세워 바퀴를 하나 빌려 돌돌 굴려왔다. 터진 두 바퀴는 짐칸에 다시 쑤셔넣고 그 분량의 짐을 객실로 옮겼다. 버스 안은 난장판이 되었다. 일이 다 끝나자 차장이 미안한 지, 그들이 스노우 타월이라 부르는 '물수건'을 공짜로 하나씩 더 나눠준다. 다들 뜬 눈으로 고생 많았다. 잠도 못 자고, 미얀마에서 탄 것 중 최악의 버스다.

양곤에 도착해서 지친 나머지 택시를 타고 술레 파고다 까지 갈까, 삐끼와 간신히 2천에 협상 하고 택시에 짐을 실었다. 얼른 숙소 가서 씻었으면 좋겠다. 옷가지, 짐, 드러난 팔 다리에 온통 땀과 기름과 먼지가 얼룩덜룩 앉았다.

두 미국인은 나와 택시를 쉐어 해서 양곤에 들어가려다 말고 미얀마에 질렸다면서 바로 공항으로 간단다. 가 봤자 비행기 좌석이 당장 안 나와서 한참 기다려야 할텐데... 미얀마에 있는 내내 죽어라고 바나나로 연명하고 값 비싼 코카콜라를 마시면서(스타 콜라 가격의 무려 일곱배다)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아 택시 협상을 도와주려고 했는데, 뭐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니 멀뚱히 쳐다봐 주었다. 어쨌든 꽃무늬 티셔츠, 반바지 차람의 럭셔리 배낭 관광객은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처음 봤다. 버스 터미널에서 공항까지 천짯이면 충분한데 무려 십 달러를 준다. 가는 길을 지켜봐 줬다. 힘들었는지 표정이 많이 안 좋다. 불쌍한 녀석들...

택시가 손님 더 끌어모으려고 기다리길래, 짐을 내려 터덜터덜 버스 터미널 입구까지 걸었다. 바보같은 택시 삐끼 녀석들, 밤새 고생해서, 2천씩이나 내고 자진해서 봉이 되 주겠다는데 다른 손님 태우려고 욕심을 부리니까 손님을 놓치는 거지. 50짯 주고 물어물어 시내버스에 올랐다.

옆 자리에 미얀마 에너지성에서 근무하는 샨족 출신의 할아버지가 앉았다. 그의 고향은 시뽀였고, 일본에서 컴퓨터 컨트롤 시스템 교육을 받고 캐나다에도 있었지만 정부에 소속된 관리라 다시 미얀마로 돌아왔다. 언젠가 내가 다시 미얀마를 방문하게 되면, 자기는 내년에 은퇴하여 고향에 돌아가니까, 시뽀로 놀러오란다. 40여년을 기술자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가 부럽다. 행상을 짊어지고 나와 함께 버스 타고 열일곱 시간을 달려왔지만 몰골은 그래보여도 아세안 에너지 부문 미팅에 참석하는 엘리트다. 이 나라의 엘리트들은 말년에 쉬지도 못하고 텔렉스 전문 한 통과 동봉한 버스표 한 장 달랑 받고 먼 길을 제발로 찾아와 국제 행사에 참석하나 보다. 그는 자신이 샨족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악수하고 헤어졌다.

단지, 전세계 배낭 여행자 숙소 중 세계 최고의 무료 아침 식사를 제공한다는 자화자찬을 확인할 겸(디스커버리에도 나온 적이 있는지 요란한 선전 문구가 입구에서부터 새겨져 있다), 화이트 하우스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6달러 짜리 값비싼 8층 독방에 체크인 하고(아무 생각없다. 이 상태로 도미토리에서 도저히...) 샤워하고 8시부터 시작하는 아침을 먹으러 식당에 내려갔다. 거짓말이 아니다. 돌아다녀 본 어떤 나라도 아침 식사가 이런 성찬인 곳은 없다. 심지어 '식중독 경고'까지 붙어 있었다; 아래와 같은 것은 함께 먹지 말 것, 식중독 걸림: 수박과 계란, 라임과 우유, 망고스틴과 설탕. 아... 그렇구나. 하나 배웠다. 그런데 음식을 그렇게 안 내 놓으면 될 것 아니야?

샤워하고 방 안에 퍼져 있다가 티켓 오피스가 문 열 시간 즈음에 프론트로 내려가 푸켓 에어라인 오피스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니 왠 여행사를 가르쳐 준다. 사쿠라 빌딩 일층의 sun far라는 곳. 지쳤지만 이놈에 신년 때문에 또 발이 묶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어 꾸역꾸역 걸어갔다. 직원이 30분 쯤 간신히 전화하고 나서야 티켓 날짜를 '드디어' 바꿨다. 아... 만들래, 바간 때부터 계속 시도했는데 정말 징하다. 이 나라의 전화는 대체...

아까 할아버지 말로는 미얀마의 인터넷 라인은 바간넷 이라는 사설 회사가 아이비스타의 회선을 임대해서 운영한다고 하는데(그의 처제?가 그곳에 근무한다), 다른 데는 안 될지 몰라도 양곤에서는 인터넷이 가능할 꺼라고 말한 기억이 나서 사이버월드라는 인터넷 카페로 찾아갔다. 그는 자신의 대부가 살고 있는 캐나다와 자주 email을 주고 받았는데 얼마전부터 계정을 차단 당했다고 한다. 옆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어서 자세한 얘기를 더 하지는 못했다. 입 조심 해야지.

인터넷 카페에 찾아가 양 손을 비비며 이제 사진을 올릴 수 있겠구나 히히 했는데 왠 걸, ftp 포트를 여전히 막아놨다. 한 장, 한 장 손으로 올리면 되지만 20메가 분량의 백여장 사진을 그렇게 올릴 수는 없고. 터미널 서비스 포트도 막아놨고 메신저 포트도 막혀 있고 dns 연동이 안 되고, 심지어 nslookup조차 막아놨다. 웹질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그것도 프록시에 여러 제한을 둬서. 중국도, 이란도, 시리아도, 이 지경까지는 아니었는데. 이 나라 군부독재 여러분, 정말 대단하십니다요.

미얀마 여행은 끝났다. 짧은 시간 동안 메뚜기처럼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체력이 허덕여 힘들었다. 더워서 많이 둘러 보지 못했고 더 돌아다니다가는 여행이 아니라 고행이 될 것 같아 인레 호수는 가지 않고 양곤으로 돌아왔다. 미얀마에 대한 인상이 참 좋다. 새해와 건기 막바지가 겹치고 물이 몸에 안 맞아 항상 입이 바짝 타 있는 등 여행하기에는 괴로웠지만, 시골에서 사람들이 보여준 친절은 잊지 못할 것 같다. 그것 외에는, 볼 것은 없는 나라다. 파고다 매니아라면 또 모를까. 기예하고는 '약간' 거리가 있는 무수한 파고다, 파고다, 또 파고다, 부다, 부다, 부다들은 좀...

윌리엄스라는 학자는 미얀마의 역사를 이라와디 강의 흐름에 비유했다. 이라와디 강의 저류는 변화하지 않고 상층부는 흐른다는 것. 그러니까 외세의 침탈과 수난, 모진 식민 역사를 겪어 왔지만 버마 사람들의 문화와 사회는 마치 강바닥의 저류처럼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남아에는 문자화된 역사 기록이 오직 베트남에만 남아있어 서기 이전의 역사 기록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지만, 나는 너무나 오랫 동안 동남아를 식민지 침탈의 정치경제적 역사 현장으로만 인식해 왔고, 그러한 내 관점이 동남아를 바라보는 시선을 상당히 왜곡했다고 생각한다. 다음 번 여행에서는 접근 방법에 변화가 있을 것 같다.

왜 여행 중에 방문하는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알기 위해 이 지랄을 떨고 있을까. 일부를 제외하고 개인사는 보잘 것 없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문화와 사회 전통은 그들의 삶이 영위되는 살아있는 현장이다. 따라서 문화와 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그들을 이해하는 주요한 지침이 된다 -- 이런 대외적 선전 문구 보다는, 그 나라를 좋아하기 위해서다.

시프트, 컨트롤, 영문 o, 숫자 일, 숫자 9 키가 안 먹는 맛이 간 리브레또의 키보드로 몹시 힘들게 타이핑 한, 미얀마에 대한 '문자화된' 내 여행 기록은 여기까지다.

방콕 도착. 할 꺼 다 하셨으니 맛있는 거 먹으며 스킨 케어하고 살 찌우고 놀자. 얼굴이 정말 맛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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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Bagan

여행기/Myanmar 2005. 4. 7. 20:34
아침에 일어나니 벼룩 물린 자리가 예닐곱 군데 생겼다. 미얀마 벼룩은 36.7도의 따뜻한 고기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것 같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 식사 중에 영국인 여자와 '데이'를 '다이'라고 발음하는 영국인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인도에 있다 와서 짜이맛을 그리워 했다. 그가 양곤에서 만난 세 한국인 여자들 얘기를 했다. 꼴까타에서 비행기를 타고 무작정 양곤에 왔는데 가진 것이 카드 뿐이고 수중에 달러가 없어서 애를 먹어 한국 대사관을 찾고 있단다.

미얀마에는 us 달러 외에는 거의 사용하기 힘들다. 어제 만난 오스트라아 친구는 유로당 850짯이라는 환율상의 불이익을 무릅쓰고 간신히 유로를 짯으로 환전할 수 있었다. 대사관 주소와 전화번호가 있긴 하지만, 만날 수가 있어야 도와주지. 인터넷은 커녕 전화기에도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야 간신히 통화할 수 있는 형편이니. 옆에 있는 영국 여자가 참견하길, 큰 호텔에서 비자 카드로 7퍼센트의 수수료를 떼고 현금 지급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자기는 그렇게 했다고. 혹시 시도나 호텔 아뇨? 그렇단다.

항공권 일자 변경이 잘 안되어(전화가 잘 안된다) 열 시까지 시도하다가 전날 예약한 마차 투어를 시작했다. 어쩐지 타운에서 나만 마차 투어하는 외국인 '봉' 같다.

바간은 미얀마 최초의 통일 왕조가 들어섰던 곳이고 왕조를 형성한 지 3대 만에 몽골이 심심해서 침략했다가 멸망했다 -- 몽골 녀석들은 말을 한 번 타면 어떻게 멈추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왔다가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시시했는지 그냥 돌아갔다. 그걸 역사상 중요한 사건으로 여기는 관점과 달리 미시 역사 해석에서는 왕조의 절멸이 북부 미얀마 문명의 절멸을 의미하지는 않고, 미얀마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역사학자들이 즐기는 그 관점에서는 몽골의 침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 3대째 왕의 무리한 파고다 건설 작업에 의해 국부가 바닥난 상황이라 몽골의 침략은 단지 마지막 쐐기를 틀어박은 것이라고 한다. 대다수 파고다는 바고에서 끌고 온 3만여명의 중들이 설계하고 만든 것이다. 지역 전체에는 4천 여개의 파고다가 있었고, 그중 2천개는 지진이나 전란 등으로 무너졌다.

파고다에 관해 일일이 설명하기가 귀찮다. 사실상 이곳에서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원 외형은 몇 안되었다.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이고 무지한 관점에서다.

마부는 젊은 친구인데 적당히 일하고 돈을 벌려는 생각인 것 같아 다소 빡세게 굴렸다. 오후 세 시가 넘자 눈에 띄게 지쳐서 음료수 하나 사주고 다독이며 계속 굴렸다. 별 이유는 없었다. 바고에서 늙은 싸이카 운전수는 다섯 시간 넘게 그 앙상한 몸뚱이로 제 다리를 놀리고 땀을 뻘뻘 흘리며 죽을둥 말둥 일해 간신히 돈을 벌었는데 이 녀석은 6천짯이나 되는 돈을 마차를 몰며 편히 다니는데도 날더러 다른 관광객은 그렇게 많은 곳을 둘러보지 않는다 둥, 날도 더운데 두 시쯤 마무리하고 돌아가자는 둥 바간의 무수한 파고다를 향한 활활 타오르는 열정을 지닌 손님을 무시하는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계약의 무서움도, 돈벌이의 힘겨움도 모르는 스물 네살 짜리 인생에게 다소 살벌하게 구는 것을 보니 나도 많이 늙은 것 같다.

그의 이름은(미얀마 남자는 여자와 달리 성이 없다) 바간 왕조의 두번째 왕의 이름이지만 자기 이름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미얀마인은 출생한 요일에 해당하는 미얀마 글자 자음으로 시작하는 이름을 갖는다.

파고다의 여러 사이트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가끔, '오빠', '진짜 루비', '구경하고 가세요' 따위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들이 프레젠트를 주고 받은 천원 짜리 지폐를 짯으로 바꿔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그들은 손으로 만든 작고 보잘 것 없는 선물을 건네주고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관광객의 주머니에서 기어이 천원, 오십밧, 십위엔, 백 리알 짜리 지폐를 꺼내게 만들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들과 자주 마주쳤고, 그들에게 그들이 그린 그림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주기도 했다. 상황이 웃겼다. 바간의 환쟁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은 그림을 그려서 판매하는데, 자기가 그린 그림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크리슈나를 부처라고 하기도 하고, 마라를 천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날도 더운데 돌겠다.

바간의 넓은 사이트에서 만난 미얀마 사람들은 이곳이 유명한 관광지임을 느끼게 했을 뿐이다. 하지만 앙코르와트에서 만난 사람들도 이 지경까지 '무식'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뽑기에서 아주 나쁜 패를 뽑은 것 같다. 고수들은 이 더위에 집에서 쉬고 있나 보다.

몇몇 사이트에서 본 페인팅은 더 바랄 나위없이 훌륭했다. 작열하는 태양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사원들을 팔짝팔짝 뛰어다닌 보람이 있다.

비록 겉 껍데기는 인도 짝퉁 사원이지만(수학적 엄밀함에 필적하는 대칭성에서 비롯된 아름다움, 복제 손실과 그 문화가 지닌 독자적인 창조적 재해석 등 여러 관점에서) 그런 그림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대개의 그림은 부처의 행적을 묘사한 것인데 면 캔버스에 회반죽을 입히고 벽면에 고착시킨 후 여러 암석에서 추출한 염료와 금가루를 섞은 안료로 그렸다. 십이세기 무렵의 그림인데 열대성 기후에서도 그 화려한 색채를 잃지 않은 것도 있다. 십이세기나 되었는데 사실 그림의 정교함은 좀...

보전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지만(터키의 카파도키아라고... 네스토리우스의 버섯 둥지에서 본 적이 있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페인팅을 생각하면 관광객으로서 판단컨대 가격대 성능비가 양호하다) 관광객들이 마음대로 만지게 하고, 백열등을 비추는 등 관리 상태는 아주 나빴다. 나야 늘 그렇듯이 사진 찍지 말라는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대다수 역사 유적지에서, 플래시를 터뜨리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전등을 비추는 것이 그림을 더 손상시키는 것임에도, 디지탈 카메라를 들이대지 못하게 하는 것을 대단히 우스꽝스럽게 여긴다.

바간 지역은 워낙 광활해서 둘러보는데 만도 며칠이 걸릴 것 같다. 이 더위에 제대로 둘러보긴 무리일 듯. 마차를 타고 편하게 돌아다니는데도 지친다.

지나가다가 자전거를 타고 사이트를 순회하는 일본계 미국인 여자를 만났는데, 날더러 대뜸 '마차를 타고 돌아다니니까 편하고 좋겠어요' 라고 말한다. 그녀의 남편은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면서 자전거를 허리춤에 기대놓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암요. 그 재미죠(yep, that's why i took the horse wagon) 라고 말하고 미소지으며 그녀의 헉헉거리는 자전거를 추월했다. 그녀는 의식있는 훌륭한 남편을 둬서 정.말. 좋겠다. 답사는 역시 말 다리가 아닌 자신의 두 다리로 직접 해야지, 나처럼 마차 타고 드러 누워 한가하게 돌아다니면 안되고 말고. 정말 서양인들의 체력은 끝내주는 것 같다. 자전거야 500짯이면 빌리고 원하는 곳은 어디나 갈 수 있는데, 이 놈에 호스웨건은 6000짯이나 하면서도 드라이버와 어디 가자 어디 가지 말자 신경전을 벌여야 하니 말이다. 아, 덥다. 이번에는 어느 사원으로 다그닥다그닥 느긋하게 달려가 볼까.

거의 모든 한가한 삐끼들은 한결같이 내 목에 두른 손수건을 탐냈다. 한국 천의 품질과 발색의 우수성이야 두 말 하면 잔소리지. 물건 볼 줄 아는군. '진짜 루비' 정도면 견줄만 한 거야. 이것하고 같은 빨간색 루비하고 바꾸자니까 손사레를 친다. 손수건을 물에 적셔 목에 두르면 시원하고 신경계의 열폭주도 막아준다. 내 시계도 탐을 냈지만 그에 상응하는 값어치를 지닌 물건은 안 보인다.

어떤 녀석은 불상 머리를 잘라 팔려고 했다. 왜 그러는거야 대체 엉? 한참 캄보디아가 앙코르와트 하나로 먹고 살고, 문화재가 어쩌고 저쩌고 설교를 늘어놓았다. 이 김에 인디아나 정스 짓이나 해볼까. 11세기 무렵의 빨리 한 보따리 가지고 오면 시계와 바꾸겠다고 말했더니 표정들이 진지해진다. 구하지 못할 꺼니까 어떻꼐 잔머리 굴려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관광객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모조품을 미리미리 준비해 둘 것이지. 파고다에서 방금 캐낸 것처럼 적당히 박쥐똥 냄새와 썩은 내도 나게 해서. 산스크리트와 빨리어 잘 아는 나이 든 중 하나 꼬셔서. 장삿꾼들이라 장사만 안다. 장사 잘하려면 물건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안 그럼 용팔이처럼 헛소리나 늘어놓고...

물론 미얀마 정부는 안틱의 외부 유출을 막고 있다. 지나가는 관광객 한테 자기들 유물의 가치에 관해 되레 설명을 듣고 있으니 어디 관광지에 가나 장사꾼들이 무시당하는 거다. 뭐 일단 값어치 있는 것들은 일찌감치 벌써 털려 나갔을 것이다. 남은 것들은 쓰레기 뿐. 그러나 시리아 다마스커스의 평범한 시장통에서 오래된 골동품이 보이듯이 여기도 대외적으로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던 국가였던 터라 잘 뒤지면 뭔가 나오긴 할 것 같다.

투어가 끝나니 오후 6시, 말은 뻗은게 이해가 가는데, 마부도 뻗었다. 소파에 널부러진 그의 손에 돈을 쥐어 주고, 내년에 또 보자니까 질렸다는 듯이 히히 웃고 슬며시 외면한다. 녀석... 마음에 안 든다. 이 놈은 한국인을 좀 더 만나봐야 할 것 같긴 한데, 워낙 아는 것이 없고 제 편한대로 게을러서 추천해주긴 뭣하다.

사진은 많이 안 찍었다.





































저녁에 누와 레스토랑에 들러 가격대 성능비가 우수한 천짯짜리 미얀마 백반을 주문하는데, 날더러 일본인이냐길래 한국인이라니까 일하는 아가씨들이 꺅꺅 소리를 지르며 난리 법석을 부린다. 조금 있으면 저기 틀어놓은 tv에 한국 드라마가 나온단다. 태국에서 요즘 한창 '불새'라는 드라마를 하는데 혹시 그건가? 그렇잖아도 미얀마인들이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본다는 얘기를 나한테 부러 하던데, 날더러 뭘 어쩌라고. tv에서 한국 드라마가 나오기 전에 재빨리 밥 먹고 튀었다.

다음 날은 아침부터 냐웅 우 주변 마을과 쉐지곤 파고다를 돌아다녔다. 라기 보다는 길을 잃어 정처없이 헤멨다. 숙소와 레스토랑이 몰려있는 관광지인 냐웅 우 지역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미얀마 촌락의 살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하게 산다. -끝-

오늘도 어제 만났던 일본계 미국인 여성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쉐지곤 파고다를 방문했다. 난ㄴ 일본 여성들에게는 비교적 친절한 편이다. 그런데 어제 나하고 함께 온 오스트리아 외톨이는 어디 짱 박혔길래 관광 안 하고 있는 것일까. 만나서 내가 신경 써서 완성한 밀리터리 캠프 아이디어를 들려주고 어떤지 물어보고 싶은데. 일본 여성에게 남편은 어디 갔냐고 물으니 숙소에서 쉬고 있단다. 푸훗.

특이하게도 그녀는 일본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 삐끼들이 돈 많은 일본인 취급해서 귀찮지 않냐고 물으니 그렇잖아도 괴롭단다. 그럴 땐 한국인 행세를 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마흔이 넘은 지금이 처음 동남아를 방문하는 것이다. 일본도 안 가봤다. 남편 참 대단한 사람이다. 여긴 인도에서 굴러다니는 녀석들이나 좋아할만한 곳이지 왠만한 사람들은 견디기 힘들텐데. 학교 교사고 딸이 하나 있고 자기는 남편 말 듣고 따라 왔는데 이렇게 고생스러운 줄 몰랐단다. 잠시 뒷골이 땡겼다. 아내하고 다닐 때 저 아줌마 남편처럼 나도 그랬던 것 같긴 한데, 함께 파고다 경내의 달구어진 돌위를 팔짝팔짝 뛰어다니다가 버스 시간이 가까워져서 헤어졌다.


Shwezigon paya, 붓다의 치사리를 등에 지고 돌아다니던 코끼리가 '''더위에 지쳐''' 멈춘 자리에 세운 사원.


Shwezigon paya, 아, 이것은 남인도에서 많이 보던 방식. 왠만큼은 건전한데, 한 군데, 반나의 여자들이 승려 밑에서 춤추고 있다. 뭐하자는 걸까. 약올리는건가? 아니면 육보시?


Shwezigon paya, 미로처럼 얽힌 회랑을 따라 걷기. 만만해 보였는데, 십분 가량 걸은 것 같은데, 미로가 끝이 안 난다. 그래서 허들을...


Shwezigon paya, 그럴듯. 설교듣는 분위기 나올 듯.


Shwezigon paya, 동쪽 입구의 긴 회랑을 걷던 중 왼편에 보이던 힌두 사원. 아저씨는 사방을 두리번 거리더니 오줌을 누었다.


쉐지곤 파야 Shwezigon paya, 동쪽 입구의 긴 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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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to Bagan

여행기/Myanmar 2005. 4. 5. 14:32
6시 기상. 숙소 카운터에 가서 티켓을 다시 물었다. 금시초문인 듯 한 말 또 하게 만든다. 어젯밤 다시 이 숙소를 찾아왔지만 도무지 나로서는 숙소 스태프들이 친절한 줄 모르겠다. 남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저 앵무새처럼 '안녕하세요'하는 정도랄까. 그들은 백불 환전해 달라는 내 부탁도 잊어 버렸고, 바간 버스 시간표를 아는 내 앞에서 바간 버스는 하루에 오후 한 편 뿐이라고 우겼고, 아침식사 준다는 말도 안 해서 저번에는 아침을 걸렀고, 체크인 다 마치고 20분 기다리는 동안에도 방 청소가 안 끝났고, 다시 찾아온 손님을 이래저래 귀찮게 하고(두번째 체크인인데 패스포트를 다시 꺼내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어젯밤 부탁한 티켓을 알아보지 않아 다시 묻게 만들었다. 좋은 숙소란 생글생글 웃으며 안녕하세요 라고 말 붙이는 것보다 손님을 위해 할 일을 제대로 하는 곳을 말한다.

사적인 통화를 하느라 20분이 지나서야 티켓 상황을 알려준다. 자리가 없단다. 입석이라도 괜찮냐고 묻는다. 일종의 감이 있어 괜찮다고 말했다. 오늘 바간 가는 사람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 명 있단다. 그러고는 은방울 자매와 스태프는 그 건을 잊은 채 태평하게 앉아 있어서, 내려오는 여행자들 마다 바간 가냐고 물었다. 이틀 동안 본 친구다. 택시 쉐어 하기로 하고 숙소를 나왔다. 로얄 게스트 하우스가 친절? 그냥 평범한, 그저 그런 숙소다.

택시를 같이 탄 친구는 오스트리아에서 왔다. 내가 구질구질하게 이 사람 저 사람 만난 얘기를 줄곳 장황스럽게 늘어놓는 이유는, 아내가 나는 사람들을 만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다.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평범하고 구질구질한 얘기, 한 이야기 또 하게끔 하는 이야기가 별로 내키지 않아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처음 나누는 말들이 무엇인가. 신변과 하는 일(여행에서 만난 여행자라면 여행 얘기)에 관한 것들이다. 서너번 하다보면 질린다. 어쨌거나 그게 얼마나 재미없고 지겨운 얘기인지(특히 아내는 거의 믿지 않을테지만, 나처럼 사람을 많이 만나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증명하려면 좀 더 흥미로운 주제를 제쳐두고 사람들 만난 얘기를 늘어놓겠다. 그러다보면 여행이 사람을 만나는 과정이라는 남들의 개똥철학이 가진 자기모순이 스스로 드러나겠지.

택시 잡으려고 돌아다니다가 택시 삐끼가 하나 접근해서 버스 터미널까지 간다니까 운전수가 2천 달라고 하자 대뜸 하는 말이 i don't like cheating. don't cheat me. 였다. 갑자기 앞날에 먹구름이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 원체 서양 여행자들하고 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지만 왜 가격 뻔한 걸 가지고... 그 친구가 잠깐 환전하러 간 사이 여러 택시 삐끼들과 환담을 나눠 판단해보니 2천이 적정선 맞다. 20분 남았는데 500짯 주고 싸이카 타고 가기는 시간이 늦고, 택시를 잡았다. i don't like cheating 어쩌구 하기 전에 시계를 보여줘서 입을 막았다. i don't like cheating이라니... 간만에 들어본다. 내가 알기로 치팅을 즐기는 여행자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숙소에서는 좌석이 없다고 했지만 믿는 구석이 있어서,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 돈을 지불했다. 4200짰, 이제 대충 교통비를 감 잡았는데, 시간당 500짯으로 계산하면 소여시간과 도시간 이동 교통비가 얼추 드러난다. 4200짯이면 8시간 거리라는 뜻이다. 그리고 빙고! 좌석이 있다. 그럼 그렇지. 한 시간 전에 예약해도 자리는 난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좌석을 강제로 양보당했을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짐을 버스 상판에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오스트리아 친구와 나란히 일,이번 상석이다. 버스는 30분 후에 출발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이 친구는 치앙마이에서 항공권을 끊어 만달래로 곧장 날아왔다. 복식의 특징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인도에 다닌 티가 났다. 정말 그랬다. 제일 좋아하는 인도의 도시가 어디냐고 물으니 푸시카르란다. 푸시카르? 버스 여행 하다가 속이 뒤집혀서 푸시카르에서 묵게 되었는데 요양겸 며칠 쉬다보니 3주를 묵었단다. 25루삐짜리 숙소에서. 스물일곱, 독신, 학생. 가족은 아버지와 스페인에 살고 있는 여동생이 하나 뿐이고 빈에서 비즈니스 스쿨을 6년 다녔다. 빠이에서 잘 놀다가 누가 미얀마가 좋다는 소리를 해서 왔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빠이는 완전히 맛이 갔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태국 동부와 태국 최남단의 괜찮은 처녀지가 아직 남아 있다.

그의 아버지는 기차 운전수였고, 그는 열살때 처음으로 기차를 몰아봤다. 기분 끝내줬겠다. 그래서 기차를 좋아하지만 버스는 영 아니란다. 남인도 얘기를 하다보니 그가 사원에도 제대로 들어가 본 적이 없고 프리스트와 노가리 까 본 적도 없고, 사두와 놀아본 적도 없는 등 다른 많은 서양 여행자들처럼 인도에서 재미있는 것만 쏙 빼고 불쌍하게도 다르질링이나 스리나가르 같은 곳에서 짱박혀 시간 죽이다 보니 깔리가 년인지 놈인지 잘 파악이 안 되는 상황인 것 같다. 다른 많은 '전형적인' 여행자처럼 여행 이야기가 나오면 고생담을 줄줄이 엮고 가끔 나이스 플레이스 한둘 쯤 튀어나오는 뭐 그런 것이다.

날더러 종교가 있냐길래 없다니까 놀라워 하는 눈치다. 한국에서는 출생 신고서에 종교를 적지 않냐고 묻는다. 한국에 종교 비슷한 것이 있는데 종교 라기보다는 종교 마케팅과 종교 삐끼와 종교 시장이 있어서 수요자들이 종교 쇼핑을 한다고 대꾸했다.

네가 한국에서 밤 비행기 타고 돌아다니게 되면 엄청나게 많은 네온 글로우 크로스를 볼 수 있는데(월리엄 깁슨을 아냐? 알면 상상이 될꺼다. 모른다) 마치 거대한 그레이브 야드를 연상시킬 것이라고, 도시는 그런데, 한국의 모든 산에는 호국 몽크들이 죽치고 있는 템플이 있어서 크리스찬과 몽크가 종교시장에서 경합을 벌이는 중이며 공식적으로는 한국의 종교시장을 크리스찬과 몽크가 7:3으로 나눠 먹고 있는데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은 관계로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고 말해줬다. 종교시장은 그렇지만 그 생활과 문화가 종교와 분리되지 않은 의미에서의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한국의 개신교가 선교 활동이라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활동을 여전히 하고 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에게는 그게 무척 신선했던가 보다. 종교 얘기를 한참 하고 나서야, 중국, 일본, 한국의 유사성과 차이점에 관한 얘기가 뒤따랐다.

말한 것 중 요점만 간략하게 정리하면, 한국, 일본은 중국은 한 뿌리다. 자기들끼리는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그 문화, 역사가 동아시아권 역사로 통합될 수 있고 그것 때문에 앞으로 골치아픈 문제들이 많다. 뭐 그 정도. 한국이 어디 붙어 있는 지도 모르는 형편이라 한국이 20세기 신흥공업국가 중에서 매우 큰 생장(성장이 아니다)포텐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없이 약하다는 것도 모른다. 그가 한국이 모더나이즈된 국가라고 할 때 나는 한국이 웨스터나이즈된 국가라고 야유했다. 그는 내심 한국의 생활 수준이 동남아 여러 국가 보다 약간 나은 정도로 생각하는 편이었다. 아는게 그거 밖에 없으면 그거라도 알면 된 거다 굳이 알려줄 필요 없고 서양 사람들한테 한국이 어떻다느니 설명하는 것을 별로 잘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는 여행을 통해 동양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그 나라 사정을 알게 되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한국의 숙소 가격이 얼마냐고 묻길래 미니멈 십불이고 그걸로는 거지같은 방 하나 간신히 구하니까 유스호스텔을 잘 찾아보라고 말해줬다.

십오세가 넘은 사람은 오스트리아에서 직업과 진학 둘 중에 하나를 스스로 선택하는데 대부분 직업을 선택해서 오스트리아 인들 중에서 자기만큼 영어를 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며 유럽식 교육의 문제점을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그만큼 영어를 잘 하는 오스트리아 사람을 여러 번 만났던 것 같다.

어쨌거나, 인간은 호모 제록스라서 반복암기, 복제를 통한 학습이 창의력 운운하며 실제로는 그저 스스로 생각하게 하려고 '방치하는' 학습보다는 유효하다고 본다. 창의력의 상당 부분이 섬세한 복제 능력, 따라하기에 좌우된다는 것은 창의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만한 얘기다. 소위 창의력(창조적 문제해결 능력이라고 좀 더 기술자스럽게 말해)의 습득 시기가 영아 때 일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20세 이전까지 단순 암기 학습한 것들이 전면에 등장해 뇌에서 조화로운 양자 폭풍(패턴 일치, 깨달음 등 뭐라고 부르건 간에)을 일으키는 시점은 십육세-이십세 무렵이 맞지 않을까 싶다.

(영아때 사고의 자율성을 통제하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는 그것이 발현될 토양이나 사고 선택의 자유가 현세 이전에 단지 부족했을 뿐일 수도 있다. 한국인이 밀집 사회에서 별고없이 존재하려면 자신의 미친 생각을 합의 가능한 최저-상한 수준으로 노말라이즈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을 보라. 이제 아무도 한국 사회가 초딩부터 보수 꼴통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다양성을 수용하지 못한다고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사회 구성원의 상당수가 사회를 박살낼 것 같은 반타협적이고 자기중심적 규준으로부터 균등 조화와 이데올로기의 일치를 목말라 하지 않던가?

내 견해는 그러니까 창의적 사고방식은 반복적이고 단순한 암기 등의 방식으로 충분한 지식을 습득하고(이 과정이 가장 중요. 영아 시기를 지나면 지식의 흡수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진다. 지식-수단을 확보하지 않은 채 사고를 전개하는 것은 맨땅에 헤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봄) 더불어 학습의 방법을 배우는 등의(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자발적인 사고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맞지 않냐 하는 것이다. 그는 이 이야기를 그럴듯 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저 그의 자유방만한 유럽식 교육의 문제점에 맞장구를 쳐 준 것이고, 한국에서 유행하는 창의력 교육이나 대안교육이 기존의 강압적이고 전통적인 학습에 비해 효과가 현저하게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며 오히려 더 나쁠 수도 있다고 여겼다.

흠, 영어나 학습은 그렇다치고,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 세계 인식이 없으면 그냥 오스트리아라는 깡촌에 사는 촌뜨기에 불과하다. 그는 여행이 한국인을 만나 한국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 여행의 즐거움이라고 여기는 것 같지만 지적인 면에서 나같은 한국 여행자를 통해 그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극히 한정적이다. 차라리 한국에 관한 책을 한두 권 읽고 한국에 찾아가서 사회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아야지, 나 같은 한국인을 만나면 한국 상황은 나름대로 즐거운 무협지가 되어 버린다. 학습에 관한 얘기 이후로는 입 안으로 먼지를 삼키며 졸기 바빠서 더 이상 대화에 진전이 없었다.

그러다가 차가 송아지를 치일 뻔 해서 깨어나 다시 잡담을 늘어 놓았다. 어찌된 일인지 승객이 30퍼센트는 늘어난 것 같아 버스가 미어터질 지경이다. 그가 한국에서 갈만한 곳이 어딘지 추천해 달란다. 한국만의 독특한 관광 아이템이 뭐가 있을까... 외국인을 만나면 떠들어대는 내 십팔번은 백두대간 종주이지만 너무 자주 써먹어서 나 자신이 식상해진 나머지 새로운 아이템을 떠올려 보았다.

요즘 유행하는 템플스테이를 알려주었다. 외국인 여행객 상대하는 여행사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하면 성공할 것 같은데, 절간에서 몽크들과 함께 참선하다가 잠시 딴 생각하거나 조는 머리통에 죽대를 한방씩 날리면 중들도 재밌어 할 것 같다. 제대로 하기 위해, 머리는 민다. 자기가 먹을 나물은 자기가 캐도록 하고 숙소 청소 등속도 '마음 수양'을 위해 본인이 알아서 하게 하면 되니까 절간에도 여러 모로 큰 노력 안 들이고 이익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두번째 테마는(이건 말하지 않았다) 한국 고유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밀리터리 트레이닝 캠프다. 제대해서 놀고 있는 조교들 모아 가슴에 명찰 하나씩 붙여준다. 'license to kick'이라고, 한국 군대의 강도높은 훈련은 주둥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자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일단 한국의 살벌한 분단 대치 상황을 설명하고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를 잠시 브리핑한 후, 돈 내고 들어온 여러분은 조인트를 까여도, 불알 한 쪽이 터져도 그 책임을 묻지 않겠으며 여기서 받은 훈련 내용을 절대로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는(별 이유는 없다. 장사속이다) 피의 각서를 쓰게 한 후 입교시킨다.

훈련은 6주 과정이다. 여행자 훈련생들의 인생에 길이길이 남을(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이마데 돋은 식은 땀을 닦게 될 정도로) 살벌한 훈련과 갖은 구타를 통해 그들은, 한국식 군대용어로, 드디어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만일 자기 힘 믿고 개기는 혈기 왕성한 놈이나 방법론적 회의에 심취한 녀석이 있으면 그 즉시 조교들 떼거리로 집단구타를 실시한다. 그리고 훈련이 없는 날에는 잔디깎기와 경쟁을 붙여준다.

훈련 일주차, 마리화나에 쩔은 몸을 갱생하고 플라워 파워를 믿는 온갖 히피스러운 정신상태를 고상한 맨정신, 즉 군바리 정신으로 일깨운다. 훈련 2주차, 익숙해질만하면 온갖 트집을 다 잡아 군대란 그저 집에 키우는 강아지처럼 상사에게 철저하게 복종하는 곳임을 똑똑히 깨닫게 만든다. 훈련 3주차 pt열나게 시키고 마지막에 실탄 사격 훈련 5분 실시하고 훈련 4주차에 일주일간 행군을 실시하여 개인주의자에게 동성애, 아 실수, 동지애를 가르치고, 5주차에 야산을 빌려 서바이벌 북진 통일 게임과 일본 원숭이 정벌 게임을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영예로운 향토 예비군복을 지급한 후 이틀에 걸쳐 진정한 전역 군인의 행동거지를 지도한다. 이거 의외로 익사이팅하고 도전적이다. 대다수 국가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군 경험이 전무하며 한국군의 훈련 강도는 세계적으로 수준이 높다. 장비가 후져 정신력으로 버티다보니... 이 밀리터리 캠프의 단점은 실탄 사격 연습이 가능한가와 이런 걸 즐기는 개마초들에게 묘한 중독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 친구에게는 아시아권 최고의 밤문화를 자랑하는 한국의 나이트 부킹 또는 루어낚씨질을 소개해 줬다. 한국에 놀러온 여행자들이 동아시아 일대를 휩쓸고 있는 영어 학습 열풍에 힘입어 쉽게 강사 자리를 얻고 수많은 현지 여자들을 골라 사귀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등등.

이렇게 쓰잘데기 없는 얘기를 여덟 시간에 걸쳐 했다. 내 자신이 지겹다. 이런 얘기나 늘어놓으려고 비싼 돈 들여 여행하겠나. 아내 말대로 나는 사람을 가린다. 귀찮아 한다. 오늘 충분히 했고 아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만은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매우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사람이라면 믿지 않겠지. 가급적 안 만난다. 안 만나고 얘기 안 한다. 그게 내 삶에서 앞으로 주욱 나아갈 방식이다.

한국이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오스트리아 촌뜨기는 버스에 내려서 삐끼떼가 몰려오는데도 전혀 기뻐하지 않고 그들을 마다했다. 나는 마음에 드는 삐끼 하나 골라잡아 마차에 누워 숙소까지 띵까띵까 가는데 그는 배낭 메고 졸졸 따라온다. 마치 다른데 갈 것 처럼 두리번거리면서. 숙소에 도착해서 안 도와줬다. 협상 안되니까 멍하니 있다가 다른 데 가서 에어컨도 없는 방을 이틀에 십불로 잡았다. 나? 나는 그가 협상하다가 실패한 아가씨더러 예쁘다고 한 마디 해주고 더블룸 에어컨 있고 배쓰 포함해서 이틀에 7불.

이번 여행에서는 가이드북도 안 들고 왔고, 프린트물도 쳐다보지도 않고, 아내가 즐겨하는 방식대로 무작정 가서 알아서 하는 방식을 택했다. 숙소 매니저에게 항공권 날짜를 바꿀 수 있는지 항공권을 맡기고 괜찮은 식당을 물었다. 미얀마식 백반으로 오랫만에 포식했다. 대략 2달러에 고기 커리 한 가지와 열 다섯가지 반찬, 국, 한 솥 분량의 밥이 통째로 나오고 식사가 끝나면 세 가지 디저트를 먹는 코스다. 모든 반찬이 기름에 볶아 기름기가 너무 많고 약간 짜서 반찬을 많이 먹지는 못했다.

숙소에 벼룩이 있는 것 같다. 에어컨을 틀고 나일론으로 된 츄리닝을 입고 잤다. 벼룩은 나일론을 싫어한다. 그나저나 젠장 난 왜 맨날 벼룩에 물리냐...

열시 무렵에 픽 쓰러지듯이 잠들었다. 빨래를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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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일어났다. 닭들이 우짖는다. 미얀마 닭들은 마지막 여운을 생략하는 경향이 있다. '꼬끼요꼬끼요' 대신 '꼬끼요 꼭'하고 잘룩 울음허리를 끊었다. 낮에는 발음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베란다로 붉디 붉은 해가 떠올랐다. 해 뜨는 시각 5:30am, 해지는 시각 6:30pm.


2달러가 안되는 괜찮은 숙소의 아침.

주인 아줌마의 추천으로 옆집에 가서 '꼭이요 꼭' 아침 닭으로 국물을 우려낸 맛있는 샨족 스타일 국수나 먹을까 했는데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근처 찻집에 앉아 라파이를 시켜 한 잔 들이키고 뜨거운 차를 몇 잔 더 마셔 속을 풀었다. 입술이 하얗게 떠 있다. 숙소 주인장에게 기차 시간을 물으니 'nine thrity maybe'에 출발한다고 알려준다. '아마도 9시 30분'까지는 '최소한 한 시간'쯤 여유가 있어 동네를 좀 더 둘러보기로 했다.


아름다운 동네 정경. 오른쪽의 쓰레기만 빼고. 아침을 만들어 먹으려고 곳곳에서 피운 장작불 탓에 대기가 뿌옇다. 어쨌든 호빗족이 사는 평화로운 마을같지 않을까 싶다. 오른쪽 쓰레기만 빼고.


잠에서 깬 사람들이 다운타운에서 먹거리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

샨 궁전에 갔으나 너무 이른 시각인지 문이 닫혀 있다. 그에게 샨족 역사에 관해 듣고 싶었는데 아쉽다. 샨족은 아마도 중국 서북부에 사는 장족이 이주한 것이 아닐까 싶다. 샨 궁전만 빼고 사실상 이 동네의 모든 '관광' 포인트를 어제 다 둘러본 것 같다. 트레킹이 있는데 소수민족 구경거리는 별로 내키지 않는다.

숙소로 돌아왔다. 어제는 주인장한테 온수 샤워는 필요없다고 떵떵거렸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쌀쌀하다. 공동 샤워장에서 슬그머니 온수 수도꼭지를 돌려보았다. 윽 차거. 태양열 축열로 쌓아놓은 온수는 어젯밤에 벌써 다 식었나 보다. 방값을 지불하고 체크아웃했다. 주인 아줌마는 장사속이라고는 볼 수 없는 목소리로 며칠 더 쉬다가지... 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묻지도 않았는데 기차역 가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해준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고개를 끄떡이며 들었다.


아침 시주 행렬에서 본 괴승. 가다가 pda를 숙소에 두고 온 것 같아 철로변에 쭈그리고 앉아 배낭을 열어 뒤적이고 있었는데, 슬며시 다가와 시주받은 과자 하나 건네주고 쓰읍 웃더니 자기 갈 길을 간다. 중들이 원래 시주받은 거 사바세계의 평민 족속과 나눠먹기도 하던가? 아니, 그건 그렇고, 내 몰골이 뭐가 어쨌길래 자비심이 발동한 거지?

기차역은 정말 징하게 생겨 먹었다. 식당인지 역사무실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공무원'이 앉아 외국인 삥 뜯어먹고 있었다. 오늘 출발하는 외국인이 있냐고 물으니 없단다. 2달러짜리 티켓을 사려다가 마음이 변해 4달러 짜리 티켓을 끊었다. 기차여행을 별로 즐기는 편이 아니다. 사연 많다. 인도에 있을 때 라즈다니는 물론 샤탑디 한 번 타보지 못했고 중국에서는 꼬랑내가 진동해서 거의 미쳐버릴 것 같은 3등석 기차만 타고 다녔다. 베트남에서 딱 한 번 타 본 기차는 멀미로 밤새도록 왝왝대는 아줌마가 옆에 앉아 있었다. 파키스탄에서 탄 기차는 그나마 컴파트먼트였는데 사막을 가로지르다 보니 자나깨나 먼지를 뒤집어 썼다. 모처럼 분위기 잡고 안데스에서 탄 기차는 파업 때문에 가다가 멎었다.

이쯤 되면 기차에 한이 맺히는 것이 당연해서 기차를 안 타게 된다. 특별히 띠보에서 핑우린까지 기차를 타고 가는 이유는 이 구간이 세계에서 두번째로 깊은 협곡을 통과하는 코스이고 경치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며, 매번 기차운이 나쁠 수는 없을 꺼라는 확률적 믿음이 있었다. 암 뽑기지. 그래서 띠보를 방문한다기 보다는 기차여행이 여기까지 올라온 목적이다. 그리고 이왕 가는 김에 2달러 더주고 좀 더 안전빵하게 럭셔리 기차 한 번 타보자고 마음 먹은 것이다.

기차는 정확히 나인 써티 펄햅스에 도착해서 텐 섬씽에 출발했다. 와우! 제 시간에 오는 기차라니 신선한 충격이다. 한 시간 밖에 안 늦었다. 만사가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자리를 보니... 2달러 짜리 ordinary class와 내가 끊은 4달러 짜리 first class 좌석 사이에 차이점은 앉는 자리에 쿠션이 하나 더 깔려 있는 것 밖에 없다. 좌석 번호는 일번. first class라서 일반인들이 범접치 못할 뭐 그런 멋진 칸을 상상했는데, 오디너리와 마찬가지로 온 사방에 짐짝들이 꾸깃꾸깃 쑤셔 넣어져 있고 닭장처럼 바글거렸다. 내 자리에 젊은 처자가 앉아 있다. 눈치 주니까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손짓 발짓을 해보니 대충 무슨 뜻인지 알아먹겠다. 멀미가 날 것 같으니 자리를 좀 양보해 줄 수 없겠냐는 것이다. 멀미? 아, 그러라고. 얼마든지.

멀미가 난다는 처자가 왠일인지 스테이션에 도착할 때마다 자꾸 창문을 닫아 달라고 부탁한다. 뭐 부탁이니까 들어주지만 왜 저럴까. 그 처자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랬다.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창문에 유리창이 달린 것이 아니라 숨구멍이 숭숭 뚫린 그냥 철판이다.

다음 역에서 창문을 좀 늦게 닫다가 물벼락을 맞았다. 역 주변에 양동이와 컵을 들고 어슬렁 거리는 꼬마애들이 바글거렸는데, 양동이 물을 손님한테 파는가 보다, 야, 저렇게 물도 한 컵씩 팔다니 여행 오래 하고 볼 일이야, 나름대로 신선하고 여유롭게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는데, 기차가 슬슬 출발하기 시작하자마자 컵으로 양동이 물을 퍼다가 창문 마다 냅다 뿌려대는 것이다. 일부 힘 좋은 놈들은 양동이 채로 들이 부었다. 호스도 있었다.

그 양동이 물을 뒤집어 썼다. 역마다 있는 그 망할 녀석들이 집요하게 부어대는 통에 옷이 흠뻑 젖고 젖은데 또 젖으니까 옷이 마를 새가 없다. 쫓아가서 알밤이라도 먹여주려고 하니까 말린다. 처음에 뭔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페스티벌 이란다. 워터 페스티벌, 낀쏨? 태국식으로 송크란 축제, 그게 앞으로 일주일 후에 시작되는데 이 깡촌에서는 일주일 전부터 이 난리다. 아니 컨츄리 사이드에서는 축제를 무려 한달 동안 한단다. 그래서 매 스테이션 마다 속수무책으로 물을 뒤집어 쓰고, 축제지, 허,허, 암, 축제니까, 허허 웃었다. 그나저나 내 기차여행은 매 번... 관두자.


정겹고 친근한 보통 시골역 풍경같지? 처음에는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오른쪽 구석에 물 양동이와 컵을 들고 승객을 바라보는 저 불순한 눈빛이 군중 속에 틈틈이 도사리고 있다. 저 앞에도 한 놈 있다. 이 놈들은 물을 뿌려대고 움직이는 기차를 향해 악귀처럼 낄낄 웃는다.

카메라가 젖어 세상에서 두번째로 깊은 계곡 모습은 사진에 담지 못했다.

핑우린에 도착. 기차는 두 시간 연착. 조금 있으면 해가 진다. 픽업이 역 앞에 있다. 픽업을 몇 번 타보니 사람들에 치이는게 끔찍해서 500짯 더 주고 운전수 옆, 앞 좌석에 앉기로 했다. 만달래까지 1500. 짐을 다 싣고 그 비좁아 터진 좌석에 사람들이 꽉 차고 열댓 명쯤 차 난간에 샹들리에에 달린 유리조각처럼 주렁주렁 매달리고 나서야 차가 출발한다.

내 옆에는 군바리가 앉았다. 대학 마치자 마자 하사관으로 들어가서 지금 captain이란다. 자기는 일반 군인과 다르단다. 자꾸 스왓, 스왓, 람보, 코만도 하길래 뭔 소리인가 했더니 특무대(special army force)소속인 것 같다. 인상 참 드러웠지만 화끈하게 자기는 타이놈들을 쓸어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한다.
애 둘 딸린 아버지 답지 않게.

ak47과 m16을 사용한다니 반갑긴 하다. 이들의 정신력은 소총으로 능히 코브라를 하늘에서 떨굴만도 했다. 그런데 특무대가 그런 구질구질한 소총을 사용한단 말인가? 담배를 자꾸 권하고 휴게소에서 쉴 때 음료수도 사준다. 그러더니, 한국은 핵을 가져서 좋겠다는 것이다. 얼떨떨하다. 또, 미군 탱크에 깔려죽은 한국 여중생 얘기를 한다. 자기 같았으면 미국놈들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보다 더 분해한다. 나는 그저 평범하고 애국심 강한 바보 군바리인 줄 알았는데, 이 나라엔 대체 얼마나 많은 구두닦기 대학생과 해골 바가지 그림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다니고 온 몸에 문신을 새긴 날나리 처럼 생긴 장교들이 있는 것인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하나 더, 한국의 소식은 미얀마로 전해지는데, 한국의 여러 신문에서 아시아 관련 뉴스 중에 컨텐츠가 제대로 된 것을 본 적이 없다. 자기 주변 나라 소식도 모르는 우물안 개구리인 셈이다. 언제까지 그러려는지들.

잘 가던 픽업이 멎었다. 운전수가 뒤에 가서 한참 소리를 질러댄다. 승객 중 몇 명이 사라진 것이다. 앞 좌석에 타고 있어서 몰랐는데 장교가 통역해주길, 뒷 손님 중에 한 명이 술을 사들고 타서 컨덕터를 포함한 뒷좌석 손님들이 한 모금씪 병나발을 불었는데(아마 400짰 짜리 지독한 만들래 럼일 것이다) 다들 기분이 좋아진 나머지 휴게소에서 술을 잔뜩 사 들고 올라타서 몇 병인가 더 마시고 잠시 엔진 식히는 틈에(여기 차들은 가끔 엔진을 식혀줘야 한다) 숲 속에 짱 박혀 자고 있다가 못 탔단다. 다들 삘리리 맛이 가서 누가 안 타고 누가 탄 건지도 파악이 안된단다.

안타까웠다. 평소 아내는 내가 현지인들과 잘 안 어울린다고 구박을 주고는 했는데, 뒷좌석에서 술이 도는 줄 알았더라면 앞에 타지 않았을텐데... 아무튼 차장은 근무중 술을 마셨다고 운전수한테 욕을 바가지로 먹고 향방중인 향토예비군처럼 여기 저기 짱 박힌 사람들을 수거하러 돌아다녔다.

그래서 예정보다 한 시간 반 늦게 만달래 기차역에 도착했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애 딸린 미얀마 람보는 담배를 한 가치 더 권하고, 손님들은 휘청휘청 말 그대로 그들이 가져온 푸댓자루와 함께 떨어져 내리고, 운전수는 자기가 태운 최초의 외국인을 잊지 않겠다며 악수를 청했다. 그는 과자도 줬다. 그는 힌두교도라서 도로를 가로지르는 소떼를 전혀 짜증스러워 하지 않았고(요즘은 인도인들도 툭하면 도로를 가로막고 똥을 싸는 성스러운 흰 소에 짜증을 내는 판인데) 그들이 다 건네갈 때까지 차를 멈추고 기다렸다. 그가 말하고 장교가 통역해 주길, 한국이라면 손님들이 술 처먹고 행패 부리지도 않고 시간도 엄수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차가 좀 늦게 오면 술도 안 처먹은 손님이 운전수를 두들겨 팬다고 말해줄까 하다가, 그래도 사람 사는게 어디나 똑같으면 재미없으니까, 한국은 품위있고 교양있는 나라로 남겨두자. 사실 그거 통역하기 힘들다.

다시 로얄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가끔 빗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제발 도착할 때까지 비야 오지 말아라... 너무 늦어 바간행 표를 예약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열블럭쯤 걸어 도착. 얼른 체크인하고 바간행 버스를 예약할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티켓 오피스가 문을 닫았단다. 내일 아침 일찍 꼭 좀 부탁한다고 말했다.

탁자 위에 어디서 많이 보던 담배곽이 눈에 띄었다. 디스 플러스, 한국인이세요? 물으니 그렇단다. 이렇게 반가울 데가... 여행자들이 가물에 콩나듯 눈에 띄어 쓸쓸했는데... 5주 동안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대만을 돌아다니는 바쁜 일정이다. 5주라니 부럽다.

하루 종일 거의 물만 마셔 허기가 져서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지경이라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 재빨리 밥 먹고 돌아왔다. 바나나 스플릿은 이번에도 먹지 못했다. 전 세계의 바나나 스플릿을 다 먹어보자는 소박한 꿈이 그 동안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시도였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숙소에서 그가 기다려 주고 있었다. 함께 맥주 한 잔 했다.

별 일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정신없는 하루였다. 비틀즈를 듣다가 세상 모르게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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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Hsipaw

여행기/Myanmar 2005. 4. 3. 14:27
6시 알람이 울렸다. 십오분쯤 잠자리에서 누워 있었다. 벌떡 일어나 샤워하고 짐을 챙기니 6시 45분. 늦겠다. 남은 옷가지들을 챙겨 얼른 체크아웃하고 버스 티켓 오피스 앞으로 갔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근처 노점 야채상에서 토마토 두 개를 사 먹었다. 여행할 때는 본능적으로 야채나 과일을 찾았다. 밥은 안 먹어도 야채와 과일은 먹어야 한다.

버스 터미널까찌 승객을 실어나르는 픽업 트럭은 7시 십오분 출발. 7시 45분 버스 터미널에 도착. 짐을 꾸리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버스는 여덟시 이십분이 되어서야 출발. 요마 익스프레스, 고속도로를 올라가는 이 버스의 바닥에는 상자들이 가득했다. 온갖 종류의 짐이 다 실리고 사람이 짐짝과 골고루 잘 섞여 빼곡히 들어찬 후에야 버스가 털털 거리며 움직이기 시작. 그러고도 굴러가는 것이 신통하다.

차가 핑우린까지 올라가는 도중에 더위에 퍼진 차들이 즐비하게 길가에 늘어서 있다. 중국, 일본 등지에서 수입한 중고차다. 운전수들은 제각각 물병을 들고 라디에이터에 직접 뿌리거나 공구를 꺼내 엔진을 분해한 후 실린더를 한가하게 걸레로 닦고 있었다!! 이 나라 운전수들은 대체...

좌석이 좁아 역시 편히 자기는 글른 듯. 왠 중이 하나 다가와 미얀마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고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어릴 적에 출가해서 줄곳 중 생활을 해 왔는데 절간에서 대학을 마쳤단다. 총명하고 잘 생긴 친구라 절간에서 썩히기에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출가했으면서 왜 자기 여동생과 놀러 다니는 걸까. 날도 더운데.

만나는 미얀마 사람들마다 마치 누추한 집에 초대한 귀한 손님 맞듯이 나를 대하니 좀 불편했다. 중은 멀리 떨어진 좌석에 앉아 있는데도 졸졸 따라다니며 밥 먹을 때나 담배를 피울 때나 충심을 다해 도와주려고 애썼다.

내 옆에도 중이 하나 앉아 있었는데 영어를 할 줄 몰라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버스를 갈아타야 할 때, 멋모르고 어리둥절해 있는 동안 자기 갈 길을 안 가고 내가 버스 탈 때까지 도와줬다. 말은 안 통해도 고마운 작자들이다. 마치 이란에 온 듯한 기분. 대하면 대할 수록 미얀마 사람들 참 좋은 사람들이다. 자기 하는 일 열심히 하고 사람 불편해 할까봐 노심초사 하면서 눈길을 안떼고 쳐다보고 있다가 '살며시' 도와주고 '슬그머니' 사라진다. 이런 사람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은 그저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미얀마가 잘 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군부 독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많이 늦어 기회를 얻지 못했고 앞으로 기회를 얻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제3세계 거북이들이 느릿느릿 움직일 동안 서구세계(서구화된 세계) 토끼들은 이미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버스가 해발 천여미터의 핑우린을 지날 무렵 잠시 시원했을 뿐, 얼레벌레 도착한 띠보 역시 어나더 더운타운(hot town)이었다. 별 정보 없이 왔으니 어디로 가야 하나 거리를 휘휘 둘러봐도 마땅히 보이는 것이 없어(그러나 가이드북을 들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길 건너편의 Mr. Kid 게스트 하우스로 들어갔다. 천오백짯(under 2$) 짜리 방을 보여준다. 얼씨구나 하고 잡았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상관없다. 주인장이 지도를 건네주고 이것저것 자세히 설명해준다.


게스트하우스 리노베이션 중 -- 침대 매트리스를 가는 일. 새로 산 그 매트리스에 처음으로 자빠져 누운 놈이다.

차를 일곱시간 탔더니 드러난 피부에 먼지가 앉고 얼굴은 햇빛에 타서 시커멓고 콧구멍에서 검정때가 나왔다. 샤워 할까 하다가 시간이 얼마 없어 자전거를 빌렸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아 2시간에 200짯(하루 종일은 400짯, 아쉽지만).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신나게 달려 두 마을을 방문, 동네방네 기웃거리며 '저 왔어요'하고 인사하고 다녔다. 인도였다면 어떤 꼬마가 날더러 헬로 하고 인사를 할 때 응수라도 한 마디 해 주면 지쳐 나가 떨어질 때까지 쫓아오면서, 게다가 그 수가 점점 불어나, 헬로 헬로 미친듯이 짹짹거릴 터이지만, 이곳 동남아에서는 그렇지 않다. 다정하고 따뜻하달까. 아내가 이곳에 오지 않은 것은 후회할 만한 것이다. 이렇게 좋은 곳인데...

하늘이 흐려 멋진 선셋을 뷰포인트에서 바라보기는 글른 것 같아 강변으로 내려가 빨래하는 동네 아줌마들과 동네 꼬마들이 물장구 치는 곳에서 옷을 벗고 강에 뛰어들었다. 동남아 치고는 덜 똥물이다, 아니 이 경우에는 맑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께다. 상쾌한 기분으로 병아리들을 괴롭히다가 더운타운으로 돌아왔다.

단 시간에 자갈길을 미친듯이 달렸더니 엉덩이 곳곳이 욱신거린다. 신사용 자전거다. 신사용 자전거로 폭 2-30cm의 자갈이 비쭉비쭉 돋아난 농로를 달렸다. 그 길로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교차하기도 했다. 내가 자전거를 이리도 잘 탔던가? 옷가지에서 물이 두둑두둑 흘러내리고 봉두난발에 히죽히죽 웃으면서...


샤워 하고 저녁 준비중인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맞은편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조금 지나면 강변이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 나타난다. 다만 그 곳이 공공 쓰레기 투기 장소라서 냄새가 좀 난달까...

마을(이 아니라 엄연히 도시지만)이 참 예쁘다. 이곳에서 하루 더 머물까 하다가 내일 아침 기차를 타고 돌아가기로 했다.


게스트 하우스에 돌아와 빨래하고 잠시 자리에 앉아 쉬었다. 입고 다니는 옷이 하나 뿐이라 그 점이 좀 아쉽다. 빨고 나니 입을 것이 없어 이 더위에 츄리닝을 입고 있는 꼬라지라니.

츄리닝 입고 다시 동네를 돌아다녔다. 동네 중국 음식점(Mr. Food)에 들러 터민쪼(볶음밥)와 800짯 짜리 만들래 비어 스트롱을 시켰다. 도시에서는 똑같은 맥주 한 병에 천이백짯을 받았다. 맥주 한 잔 시원하게 들이켰다. 두 잔째, 알딸딸하다. 볶음밥을 정성 들여 만들었고, 맛도 있었다. 술을 더 먹을까 하다가 여행 초심 생각이 다시 나서 자제했다.

맞은편 식탁에는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앉았다. 행색을 보아하니 근처 농가 사람인 듯 한데 아내한테 호강 한 번 시켜 주려고 이 중국집에 들러 값비싼 음식을 시켜 먹은 것 같다. 단순히 알딸딸한 내 상상에 불과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미얀마 농민은 한 달에 30 달러를 못 번다. 그들이 시켜먹은 볶음밥 2인분과 여자 앞에 놓인 스타 콜라 한 병은 다 합쳐 0.8$ 가량 된다. 돌아갈 때 보니 자전거나 오토바이가 없다. 남자가 앞서고 여자가 뒷서서 걸어간다. 내 상상일 따름이지만, 어쨌든 보기 좋다.

전기가 '덜' 들어오는 관계로 별빛이 화창하게 빛나는 거리를 휘적휘적 걸어 숙소로 돌아간다. 생맥주 집에 가서 한 잔 더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참았다. 이 동네 정말 마음에 든다. 지금까지 돌아다녀 본 도시 중 단연 순박함 만큼은 최고다. 그래서인지 실수 하는게 아닐까 싶다. 며칠 더 있다가도 괜찮은 동네다.

숙소에 도착하니 하나뿐인 외국인 손님인 나를 위해 발전기를 돌려 주셨다. 얼른 할 일을 마무리 짓고(남은 돈 세기, 일기 쓰기) 자리에 누웠다. 재빨리 불을 껏다. 발전기가 슬며시 멎는다. 주인 내외도 이제 자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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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Mandalay

여행기/Myanmar 2005. 4. 2. 21:06

만달래에 다다르기 전 마지막 휴게소.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다. 잠을 거의 못자고 꼬박 밤을 샜다. 일부는 밤새 틀어놓은 비디오 때문이다.

휴게소에 들러 비빔 국수를 먹었다. 우리네 참기름과 유사한 것에 땅콩가루와 양념을 넣고 비벼준다. 그리고 작은 종지에 배추국을 담아 주는데 흔히 휴게소에서 파는 쓰레기 같은 음식치고는 둘 다 맛있다. 지불하려고 하니 잔돈을 사탕으로 준다. 이 녀석이 외국인이라고 몹시 순진한 방법으로 골탕 먹이네. 캔디를 돌려주고 돈으로 받았다.

만달래 도착. 시외버스 터미널이 시 중심 시가지와 4km쯤 떨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11km인 것 같다. 미얀마 삐끼들은 몇 마디 안해도 알아서 자기가 다 말해준다. 세상에 이런 순박한 삐끼가 어디 있을지. 시내까지 천짯에 갈 수 있단다. 700이면 가겠다고 했다. 어차피 단가도 모르고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불러대면 대충 감 잡을 수 있겠지... 700에 가겠다는 친구가 나타났다. 500부터 시작할껄...

론지 뒤에 수첩을 차고 있길래 빼서 읽어봐도 되냐고 물었다. 그는 세 아이의 아버지다. 젊은 아버지다. 아무튼 삐끼와 이렇게 많은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 그의 수첩 첫 장에는 경구가 2개 국어로 적혀 있고 그 다음 장에 청동 캐스팅에 관한 얘기가 있고, 그 다음부터 그가 공부한 여러 가지 분야의 학습 내용이 적혀 있다. 찬찬히 읽었다. 작은 노트라 35분 가는 동안 다 읽을 수 있었다. 감동했다. 수준의 고저를 떠나 이 친구는 낮에 싸이카 운전수로 밥벌이하고 틈틈이 시간나는 대로 이것 저것 공부하는 중이다. 그는 자신의 영어 발음에 자신이 없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정치 얘기가 나오자 그가 쉿 하면서 주변에 사람들이 보고 있다고 말한다.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그가 미얀마에 살고 있는 나가 라는 원시 종족에 관한 얘기를 해줬다. 나가 종족에는 두 가지 타잎이 있는데 한 쪽은 조상이나 적의 머리를 베는 습속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 쪽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갑자기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 나중에 조사해보자.

로얄 게스트 하우스 앞에 도착. 천짯을 운전수에게 건넸다. 300은 당신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나라에 온 후로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자꾸 감상적이 되는 것 같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날더러 '안녕하세요' 라고 말한다. 설마 이곳을 2주 전에 다녀간 아내가 가르친 것은 아니겠지. 한국인들이 지나가면서 그런 걸 가르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새로운 도시에 도착했을 때 사방에서 들려오는 '곤니찌와' 만으로도 충분히 지겹다. 5달러 짜리 방을 보여주다가 살며시 아래위로 내 분위기를 살피더니 3달러 짜리 방이 있다고 말한다. 그야 당근 3불이지. 방 상태는 살피지도 않고 얼씨구나 하고 잡았다. 이제 오전 열시 이십분.

띠보(Thibow, Hsipaw)행 버스를 예약하려고 은방울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를 가진 게스트 하우스 주인 자매에게 물었다. 내가 알고 있는 좌표를 그대로 말한다.

만들래의 거리는 격자형. 가로 도로 넘버와 세로 도로 넘버로 참조. 아주 쉽다. 티켓 오피스에 가기 전에 그 유명한 나일론(닐론) 아이스크림 샵에 들렀다. 300짯 짜리 아이스볼(팥빙수)을 주문했다. 명불허전,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좀더 이것저것 시켜봐야겠다. 그리고 이번에는 바나나 스플릿을 꼭 먹자.

버스 티켓 오피스에 찾아갔다. 버스 회사 사무실이 안 보인다. 한참 헤메다가 원점으로 돌아왔다. 인터넷이나 일단 하자. 가게에 들어가니 30분당 이천짯을 부른다. 순 날강도네. 6메가 분량의 파일을 올려야 하는데 속도가 나올까? 해보니 너무 느리다. 그만하겠다고 하자 2천짯을 달란다. 에게 3분 사용했는데? 그래도 받겠단다. 하는 수 없이 줬다.

다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티켓 오피스를 찾으러 돌아다녔다. 원점으로 돌아왔다. 도저히 티켓 오피스라고 믿어지지 않는 위치에 그것이 간신히 존재했다. 2800짯, 내일 아침 티켓을 예매. 할 일 다 한 기분이 들어 밥이나 먹자는 생각으로 라쇼 레이 식당(Lashio Lay)을 찾아 북쪽으로 올라갔다. 거리가 워낙 orthographical해서 n 블럭 동쪽으로 이동 후 n 블럭 북쪽으로 이동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언젠가 어느 책에서 읽은 바로는 이런 도로 설계법이 몇 가지 단점이 있단다. 단점이 뭔지 잊어버렸다. 라쇼레이에서 새우 한 접시와 돼지고기 한 접시, 밥 한 됫박(정말 됫박이다), 카믈라 티를 시켜 먹고 워낙 양이 많아 남겼다. 2550짯 나왔다.

엄청나게 럭셔리한 식사를 한 탓에 죄책감이 들어 만들래 힐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대략 6km, 오후 1시 20분, 열심히 걸으면 1시간 내 도착할 거리. 걷기 시작했다. 양곤과 달리 만들래 거리에는 그늘이 거의 없다. 40도 땡볕에서 30분을 걷자 온몸이 뜨거워지고 입 안이 타 들어갔다. 그때쯤 객기 그만 부리고 싸이카를 탔어야 하는데 한 30분 더 걷고 나니까 악이 생겼다. 오냐 끝까지 가보자. 6km 걷는데 1시간 30분 걸렸다. 엄청나게 더웠고 더 걷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 무렵 만들래 언덕의 입구가 나타났다. 오렌지 쥬스 한 잔 사 마시고 잠깐 쉬다가 계단을 오르기 시작. 790여개인지 1600여개의 계단인지 모르겠지만 중간에 가다가 멈췄다. 더 걷다간 쓰러진다. 사원에 누워 30분 동안 잤다. 그리고 물을 끊임없이 마셨다. 탈진하기 바로 직전인 상태였다. 아, 내가 미쳤구나...


'아뵤! 여기야 여기! 내가 죽은 후에 여기서 불교가 열나 뜰꺼야!!' 라고 지존께서 말씀하신 언덕이 바로 만들래 언덕이다. 그는 불법을 설파하기 위해 인도로부터 그 먼 길을 걸어왔고 바로 이 자리에서 만들래라는 도시가 융성하게 될 것을 예언했다. 하지만 동상의 생김새는 그 분위기가 아닌 것 같다.

이 자리에 그대로 뻗어 잤다. 더 이상 올라가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이쯤에서 숙소로 돌아가 닐론 아이스크림에서 맛있는 아이스크림이나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 몸이 나른한 것이 일사병 증세다. 손수건에 물을 적셔 온 몸을 닦고 목덜미에 얹었다. 사원마다 조그만 물항아리가 있다. 나그네가 사원을 방문하면 더위를 식히라고 떠놓은 '구원의 물'이다. 그 물로 버텼다. 한동이는 썼다. 그 물, 사먹는 물보다 시원하고 맛있다. 토기 항아리라 먼지가 잔뜩 낀 물이라도 몇 시간 놓아두면 먼지는 모두 침전되고 항아리 숨구멍을 통해 수증기가 증발하면서 내용물이 차가와지는 것. 어린 시절 시골에서 이런 물을 마셨는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물맛이 달았다.

30분 쉬고 힘없이 계단을 내려왔다. 다섯시 전에는 내려와야 싸이카 삐끼를 만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헬렐레 하고 있는데 삐끼가 다가왔다. 1500짯이면 다운타운까지 데려다 준단다. 500짯. 그건 불가능하단다. 8km나 되는 거리를 500짯에 어떻게 가냐고. 난 그 거리를 걸어왔다. 천짯 부른다. 가라고 힘없이 손짓했다. 그럼 천짯에 만들래 힐 주변의 몇몇 관광명소를 둘러보고 가는 코스는 어떻겠냐고 오히려 삐끼가 제안. 좋다. 3군데 둘러보고 다운타운까지 가는 조건으로 천, 합의. 하지만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상황에서 관광이고 나발이고 전혀 기운이 안 난다. 겉모습만 후다닥 보고 얼른 닐론 아이스크림으로 가고 싶은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도착하자 마자 닐론 아이스크림에서 300짯 짜리 후루츠 칵테일을 먹고 담배 한대 피우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건기 40도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더위 속에서 걷는 것은 확실히 미친 짓이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자.

숙소에서 샤워를 마치고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나일론 호텔로 갔다. 내 백달러 짜리를 상인들이 거절하기 일쑤였다. 나일론 호텔에서 여러 모로 내 헌드레드 노트를 살피더니 스몰 헤드는 안된단다. 상인한테도 그 얘기를 들은 바 있다. 스몰 헤드 말고 빅헤드를 달라고. 왜 거두를 선호하는지, 그게 무슨 뜻인가 물어보니, 백달러 노트 신권은 큰 대가리 얼굴이 새겨져 있는데 구권은 작은 대가리란다. 아항... 내게 있는 것들은 모두 스몰 헤드라서 앞으로 애로사항이 꽃필 전망이다. 이런 젠장할. 숙소에 물어보니 역시나, 숙소에서도 바꿔줄 수 없단다.

궁리하다가 길거리에 보이는 싸이카 운전수 중 가장 몰골이 형편없는 작자를 골랐다. 이왕 도와줄 바에는 손님들에게 선택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가엾은 사람을 도와주자 싶었다. 시도나 호텔까지 투웨이로 얼마요? 투 따우잔드. 노 완 따우잔드. 잇츠 파. 완 따우잔드. 타협이 안 되서 그를 보냈다. 내 수중에는 마침 천 짯 밖에 없다. 그가 가다가 말고 돌아와서 오케이 한다.

시도나 호텔은 정말 멀었다. 그러나 난 관광객이 아니고, 그 가격은 (최소한 내 감으로는) 맞다. 호텔 입구에 그를 기다리게 해 놓고 들어갔다. 미얀마 기준에서는 으리으리한 호텔이다. 프론트에서 다짜고짜 도와 달라고 청하고 백달러 노트를 꺼내 작은 돈으로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매니저 눈치를 보는 아가씨가 망설이다가 매니저의 눈짓을 받고 바꾸러 가는 동안 옆에 있던 아가씨가 말을 붙여온다. '안녕하세요, 한국인이시죠?' 꽥. 왠 난데없는 한국어람. 한국어 배우는 중인데 발음이 안 되서 고민이란다. 참하고 예쁘장한 아가씨다. 국경과 신분을 초월해 사랑을 꽃피울 정도는 되었다. 그 동안 여자애들을 봐도 시큰둥했는데 미얀마에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있을 줄이야... 꼬시면 백퍼센트 넘어온다. 뭐 그런 확신이 들었지만 내게는 훌륭한 아내가 있다. 미련없이 홱 돌아서서 나왔다. 호텔 앞에서 플라타너스 잎사귀처럼 흔들리는 수많은 삐끼들을 마다하고 내 전용 운전사의 싸이카에 올라타고 다시 나일론 호텔 앞으로 왔다.

숙소에서 몇천짯 꺼내와 즉시 사람들이 버글거리는 나일론 아이스크림으로 들어가 아이스볼을 주문해 먹었다. 아, 정말 맛있다.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가는 크림과 오도독 오도독 씹히는 얼음 덩이, 그리고 혓바닥을 흥건히 적시는 과즙. 베트남 시장통에서 먹어본 잊을 수 없는 푸룻 아이스크림에 필적했다. 그러고 보니 내 생애 하루에 세 번 들른 음식점은 이 곳이 처음이다.

숙소에 돌아와 노트북으로 음악을 듣다가 그대로 뻗었다. 정말 피곤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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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Bago

여행기/Myanmar 2005. 4. 1. 21:00
여섯시 기상. 숙박비에 포함된 아침을 먹었다. 토스트 3장. 커피와 인디아식 밀크티, 짜이의 인스탄트 버전을 맛보다.


담배 한 대 빨면서 밝아오는 아침을 구경.


숲의 도시 양곤의 중심 시가지.

이틀 정신없이 걸어 다녔더니 몸 여기저기서 삐걱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젯밤에 숙소 점원에게 바고로 갈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을 물어봤으나 아웅 밍글라 버스 터미널로 가라는 말을 되풀이 했다. 친절하게 미얀마어로 적어주었다. 중심가 어딘가에서 분명히 바고로 가는 픽업이나 버스가 있을테지만 한시간 반을 고생해서 가는 것보다는 버스를 이용하는 편이 낫다는 것일까... 좀 쉬고, 움직이자.

시청 맞은편에서 43번 버스를 기다렸다. 무수히 많은 43번 버스가 지나갔지만 차장이 아니란다. 원숭이처럼 오는 버스마다 팔짝 팔짝 뛰어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라 담배 파는 아저씨에게 부탁했다. 탔다. 어제 열나게 걸어다니던 인야 호수가를 지나 시골 마을 몇 군데를 거쳐 50분을 달려 아웅 밍 갈라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삐끼가 친절하게 맞아 주신다. 10시 차가 때마침 있다. 1000짯 주고 올라탔다. 그럼 그렇지. 2500짯이라니 놀랐잖아. 버스는 열 시 정각에 출발했다. 기다리는 15분 동안 땀을 비오듯이 흘렸다. 덥다. 몹시 덥다.

버스가 잠시 정차할 때마다 후끈한 열파가 밀어닥쳤다. 어서 달려서 바람이라도 들어와 주셨으면... 열두 시에 바고에 도착했다. 사이카(자전거 옆에 좌석을 붙인 세발 달린 트릭쇼, 탈 것) 삐끼가 반갑게 맞아 주신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내내 삐끼의 어원을 궁리해 봤다. 아무래도 picky 같다.

일단 삐끼의 사이카에 올라 코딱지만한 바고 중심가를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바고에서 만달래(mandalay)로 가는 버스가 있는지 알아 보았다. 사기꾼 같이 생긴 친구가 에어컨 버스를 8천 부른다. 넌에어컨 버스는 6천. 하다야 까페에서 물어보니 자리는 없고 4500에 midst seat를 끊을 수 있단다. midst seat가 뭘까 궁금해 하니 aisle에 붙여놓은 좌석을 말하는 것 같다. 누군가 타면 일어서 주고, 누군가 나가면 일어서 주는, 그러니까, 밤새도록 잠도 못 자고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는 좌석이랄까. 그 좌석은 좀 난감해서 하다야 까페 옆의 노상에서 버스표를 파는 친구에게 물어봤다. 좌석이 없단다. 샌프란시스코 호텔로 갔다. 역시 없다. 미야난다 호텔 직원이 슬며시 끼어들며 자기한테 좌석이 있단다.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가 사기꾼이라고 말한다. 분위기를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삐끼가 자기가 아는 장소가 하나 더 있다며 데려간다. 정부 관리 호텔, 자리 없음. 구둣방 주인, 전화 한참 해 봤으나 역시 자리 없음. 남은 옵션은 하다야 까페에서 4500짯 짜리 표를 사는 것과 10$짜리 엄청나게 비싸고 5시간 더 늦게 도착하는 기차표 정도. 만난 사람 누구도 삐끼와 커넥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입술을 씹고 하다야 까페에서 미디스트 좌석을 예약했다. 로봇처럼 말하길, 5.30pm까지 까페로 오란다.

나 때문에 1시간 넘게 자전거를 끌고 땀을 질질 흘리면서 이리저리 함께 돌아다닌 40살 먹은 말라깽이 삐끼를 그냥 보내기도 뭣하고 해서(뭐 그걸 노리고 하는 일이지만), 그와 투어 협상을 했다. 1500에 여섯 군데 사이트를 모두 돌기로 합의봤다. 혹시 10$이나 하는 입장료 안 내고 들어갈 방법은 없는지 물어보니 자기한테 입장료의 반액을 주면 4-5pm 이후 외국인 입장객 감시원들이 퇴근할 때 맞춰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것 봐라? 머리 굴리는데? 그 얘긴 즉슨, 내가 천오백짯만 줘도 시간 잘 맞추면 여섯 군데 다 들러볼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당신한테 5달러 줄 필요가 없지.

그가 강가 까페로 나를 데려갔다. 분위기 괜찮다. 110짯 짜리 음료수 하나 시켜놓고 가격 협상을 하다가, 문득 자선하는 셈치고 이 친구한테 5달러를 주는 것이 어떨까 싶었다. 지도를 그리고, 동선을 따져보면 이 친구가 나를 태우고 40도의 뙤약볕에서 하룻동안 운행하는 거리가 20km 가량 된다. 시간으로 따지면 3시간 반 이상.

입장료 수입은 정부가 챙긴다. 따라서 각 사이트에서 감시하는 사람들도 자기 수입으로 들어오는 일이 아니니 근무시간이 끝나면 외국인이 입장하건 말건 그냥 멀뚱히 쳐다보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이 얘기는 여러 여행 사이트에서 확인한 것이다. 내가 굳이 자선할 이유가 없지만 이 친구의 행실을 보니 사기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겨우 5천원 벌려고, 이 비수기에 열파 속에서 삽질하는 그 친구를 가여워 해서라기 보다는 군부 독재정권에게 고스란히 돈을 갖다 바치는 대신 현지인이 이득을 보게 하는 방법이 나쁘지 않다. 하지만 5달러는 큰 돈이고 만일 내가 5달러를 준다면 그것이 선례가 되어 다음에 오는 여행자들이 5달러씩 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마음 속으로 생각한 적정가는 2천5백짯이고 제시할 협상가는 2천짯이지만 눈 질끈 감고 5달러로 했다. 마음 속에서 너는 지금 큰 실수를 하는 것이다, 라는 메아리가 들렸다.


먼저 들른 곳은 무슨 monastry(승원). 아마 Kha Khat Wain Khaung일 것이다. 4년 동안 빨리(pali, 원래는 팜트리 껍데기에 산 스크리트어로 새겨진 독경 같은 것)를 열나게 외우는 어린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이다. 돗데기 시장같은 분위기지만 삐끼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그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한가하게 지켜보았다. 암기교육의 본산.

그는 40살 먹었고 두 자식을 데리고 있다. 그는 대학을 나왔고 병원에서 안경을 조제하는 일을 하다가 싸이카 모는 것이 수입이 더 좋을 것 같아 업종 전환했다. 사이카 한 대 가격은 15만 짯, 사이카의 라이센스 플레이트를 정부로부터 받으려면 7만짯을 내야 하고, 자기 사이카를 장만하기 위해 월부금을 열심히 붓고 있는 중.

아들은 중학교 다니고 미얀마는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이며 대학에 입학하고 공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단다. 정부를 몹시 싫어했지만 입 밖에 내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워 한다. 버마와 타일랜드의 역사 때문에 그 두 민족은 알게 모르게 일본과 한국처럼 자존심 싸움을 가끔 벌이는 것 같다. 미얀마 군은 육군 밖에 없고 그나마 가지고 있는 무기라고는 2차대전 때나 쓰던 소총 뿐이라 타이와 한판 붙으면 작살 나는 쪽은 가난한 미얀마지만, 마치 북한처럼 그저 자존심과 악과 깡이 남았다. 그럴 때는 안 건드리는 것이 이롭다.

미얀마는 불교 국가로 알고 있는데 타이를 침공했을 때 부처 대가리는 왜 베었소? 하니까 그때는 전쟁중이었으니까, 하는 따위의 말을 했다. 아웅산 수지 사건을 그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심지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폭탄 테러범의 이름까지도 알고 있었다.

바고에 한국인 individual traveller는 얼마나 왔소? 하니 일 년에 다섯명 보기 힘들단다. 성수기때 그의 수입은 하루에 5달러 정도씩 삥 뜯어서(유러피안은 사정이 나아서 20달러까지 가능하단다) 한달 250달러 가량. 꽤 수입이 괜찮은 편. 약은 일본 학생들은 투어 단가를 3천짯까지 떨구기도 한단다. 말은 안 했지만 그 가격이 내 생각(2500)에도 적정가 맞다. 물론 태국 여행자는 미얀마에 극히 드물다. 형편이 풀린 태국 학생 배낭 여행자들이 최근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이고 보면 역사란게 무섭긴 하다.

과거 미얀마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영국과의 관계는? 그들과의 비즈니스는 국가 차원에서 잘 이루어지고 있으며 관계는 나쁘지 않다. 그런 정치적 멘트야... 그러나 미얀마인들, 특히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in deep inside of mind, i...)... 서구 열강에 의해 식민 시절을 보냈던 모든 동남아 국가들에 관해 유난히 알고 싶은 내용이었다. 내가 평소 특히나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것은, 이 동남아 새끼들은 더위 먹어서 배알이 없나? 였다. 알았으니 됐다.


여기가 어디더라... 마하깔랴니시마(Maha Kalyani Sima). 옛날에 승려들 출가 의식 하는 곳. 누워서 한숨 자기 좋다. 개와 사람들이 누워 자고 있다.


마하깔랴니시마에서 눈 붙이고 있는데 다가와서 히히거리던 아이들. 얼굴에 칠한 것은 단라까 라고, 오래되어 기억나지 않지만 무슨 나무에서 추출한 가루인데 천연 자외선 차단/보습제 같은 것. 여기 여자들이나 아이들이 칠하고 다니는데 효과가 우수한 것 같다. 미얀마 여자들 피부 곱다.


그래도 명색이 투어 인지라 갈 곳은 빠짐없이 들렀다. 뭔가 설명을 들었는데 뭐 하는 곳인지 모르겠다.


보리수 그늘에서 깨달음을 얻은 부처와 함께 있던 제자들. 미얀마 나름의 시뮬라시옹. 보리수도 심고, 제자들도 잘 배치해 놓고... 저 아이랑 놀았다. 참 순진하다. 발랑 까진 한국의 초딩과 워낙 비교가 되었다. 날 졸졸 따라다니며 부처님 계시니까 신발 벗으라고... 알았다니깐... 응... 벗을께. 됐지?



싸이카로 하는 싸구려 투어인 관계로 바고시 입구의 사면 부처상은 못 보러가고 대신 짝퉁이나마... 아, 진짜 관광사진 찍기 싫다.


쉐구레 파고다 Shwegulay pagoda, 파고다 내부에 64명의 부처상을 모셔놓은 곳.

2시가 좀 넘자 시계에 찍힌 기온이 41도다. 믿어지지 않았다. 바짝 마른 싸이카 운전사는 땀나게 페달을 밟고 있는데 나는 오르막에서 내려 주거나 그가 쉴 시간을 벌어주려고 투어를 늦추거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41도라니 이건 좀 심하다 싶어 노점에 자전거를 세우고 그가 좋아하는 스타콜라를 사줬다. 그 맛없는 청량음료를 미얀마 사람들이 자주 먹더라. 나는 얼음에 담가놓은 멜론을 썰어 먹었다. 60짯. 얼음에 담근 멜론을 썰고 설탕과 연유를 뿌려 컵에 내오는데 맛있어서 하나 더 먹었다.

어제부터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 이번 미얀마 여행에서는 대체로 초심으로 돌아왔다. 말하자면 열심히 돌아다니고 식사는 대충 되는 대로 줏어 먹고 숙소는 잠만 잘 수 있으면 된다. 그래야만 했다. 몸이 맛이 간 것은 둘째치고 정신상태가 글러먹어 이런 식으로는 안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입가에 군침이 도는 그 맛있어 보이는(약간 짤 것이다) 샨 음식이나 버마식 백반을 멀리했다.

우리는 점심을 먹지 않았다. 싸이카 운전사는 눈에 띄게 지쳐 있었다. 어쩌겠나. 5달러 벌려면 그만한 노력을 해야지.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다시 출발. 태양의 기세는 좀 수그러 들었다. 38도, 약간의 바람과 다양한 흙먼지, 이 정도면 견딜만 하다. 슬슬 '공무원'이 빠져 나갔을 장소로 향하자.


힌타곤 파고다 Hintha Gon pagoda, 무당, 기(gyi)라고 한다. 낫 신앙에서 비롯된 우리나라의 무당과 비슷한 여자. 머리에 아카시아 꽃을 두르고 소매, 주머니 여기 저기, 그리고 입에 지폐를 문 채 퍼쿠션에 맞춰 춤을 추며 쉰 목소리로 실성한 사람처럼 뭔가를 중얼거린다. 한국에서야 제대로 신을 맞았는지 무당질을 부탁하는 사람들이 꼼꼼이 확인하고 칼에서 춤을 추지만, 이 친구들은 워낙 순박해서인지 무당이 사기꾼인지 아닌지 굳이 확인하지 않는 듯. 하다못해 간단한 차력 시범 정도는 보여줘야지 싶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신통력도 없는 무당을 신뢰할 수 있다고...


힌타곤 파고다, 시원해서 낮잠 자기 딱 좋게 생겼지만 시간 관계상... 싸이카 운전수를 좀 고생시켜 쉴 새 없이 계획에도 없던 곳들을 돌리고 있다. 어쩌겠나. 시작한 투어는 제대로 해야지. 누운 부처상(shwethalyaung budha)은 흘낏 보고 지나쳤다. '크다'는 것 외에 별 감흥이 없다. 대신 그 둘레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힌타공 파고다에서 바라본 쉐모도 파고다.


쉐모도 파고다 Shwemawdaw Pagoda, 오늘의 메인 이벤트. 5pm이 되어 도착. 20분 이내에 다 보고 나와야 하다야 까페에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듯. 사진을 재빨리 찍었다.


쉐모도 파고다야 쉐다곤 파고다 만큼이나 유명하니... 이제 만들래에 가서 마하무니 파고다만 보면 짜익티요 삐고는 다 보는 셈인가.


마치 이란의 모스크처럼 이것들은 끊임없이 금칠을 새로 하고 보수한다. 국제적인 기준에서 보았을 때 그저 찢어지게 가난할 뿐인 싸이카 운전수는 자기한테 2000달러가 있으면 여기에 파고다를 만들 것이란다. 왜? 그것은 지위, 부, 체면, 명성, 그러니까 그들 사회의 근본적인 계급 구조와 사회 구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니 굶어 죽어도 파고다는 수십만 개를 만들어 놓았지. 백만 달러 정도면 100m 짜리 웅장한 파고다를 만들 수 있단다. 잘들 한다.


그래서 저 새끼 파고다는 기증자들이 돈 되는대로, 쥐꼬리만한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전시하는 것이다.
그들 문화를 비아냥거릴 생각은 없다.


쉐모도 파고다 안에서 만난 이 친구, 한참 이야기 하는 중에는 웃기도 잘 웃고 다정하고 재밌었는데, 얼씨구? 사진기를 들이대자 곧바로 근엄해지네? 이래서 종교가 싫다니깐.


투어를 마치고 돈을 건네주니 사색이던 얼굴에 콰광 희망의 번개가 쳤다. 입이 찢어지게 좋아한다. 이 비수기에 단비같은 돈인건가. 돼지같은 군부는 대체 뭘 하고 있는걸까. 벌이가 짭짤해 뵈는 파고다를 중들로부터 빼앗아 보수해서 외화벌이 한 돈으로, 이 나라 저 나라에 자기 딸들을 수출한 돈으로 대체 뭘 하고 있을까. 하다못해 국민이 굶주린다고 찔찔 짜다가 자기 아니면 나라 못 바꾼다고 말년에 머리가 돌아버린 박정희 대통령이라도 닮았으면...

하다야 까페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며 라파이를 시켜 홀짝 홀짝 마셨다. 인디아의 짜이와 그 맛이 백퍼센트 똑같은데 과자 몇 접시가 함께 나왔다. 과자를 집어 먹으면 나중에 합산해서 계산해준다. 하다야 까페 주인은 마치 rpg 게임에 나오는 mob처럼 대사가 기묘하게 정해져 있었다. 재밌다. 좋은 사람 같다.

영어할 줄 아는 미얀마 인한테 필수 생존 미얀마어 세 가지를 배웠다. i want to go to mandalay -- 쩐노 만달래 꽈찬례, please tell me this is mandalay -- 만달래 야오예 뚀바, how much is it -- 배 라울래

그 다음부터는 고독했다. 옆 자리에 아일랜드 여자와 남자가 앉았다. 평소에는 여행자에게 말을 안 붙이는 편인데 여행자가 하도 없다보니 반가워서 말을 걸었다. 인레 호수로 간단다. 난 아마 안 가게 될 것 같다. 나를 미얀마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제임스 조이스를 안다니까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쳐다봤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전공이 조이스였다. 호, 이런 즐거운 우연의 일치가... 그래서 나는 먹고 살기 위해 낮에는 구두 수선하다가(이 나라에는 그런 대학생들 천지다) 저녁에 잠깐 시간이 나면 이 책 저 책 읽어본 미얀마의 대학생 정도 되는 신분으로, 그녀는 조이스의 본고장에서 온 조이스를 공부하는 학생쯤 되는 사람으로서, 대화를 시작했다. 일단 기본적인 초식부터 보여줘야 하니까 내가 읽은 조이스의 저서를 얘기했다. 어 포트레이트 오브 영 아티스트, 피네간스 나잇, 율리시즈. 그녀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제외하고 다른 책들은 읽어본 적이 없었나 보다. 게다가 night가 아니라 wake인데 알아채지 못했다. 말을 더듬더듬하더니 그런 스스로가 당황스러웠는지 눈알을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렸다. 나는 조이스가 왜 미쳤는지 얘기 중이었다. 차가 와서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미얀마가 세계에서 고립된 깡촌오지가 아니라는 점만 알았으면 된 거다.

차에 오르니, 얼씨구? 4500으로 들었는데 5500을 내란다. 무슨 소리냐? 설마 자리라도 있는거냐. 고개를 끄떡인다. 미얀마인들의 보이지 않는 친절은 사람을 바보로 만들기 일쑤다. 누군가 나 때문에 midst seat로 옮겨간 것이 뻔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나는 각기 다른 에이전시를 통해 이미 표가 없음을 수 차례 확인했다. 없는 표가 하늘에서 떨어질 일은 없고, 미얀마에서는 차를 잡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다. 특히 지금은 새해를 맞이해 엄청난 인구가 이동중이라 못해도 하루 전에 예약을 해야 표를 구할 수 있다. 게다가 내 자리에 있어야 할 물병과 물수건이 없다. 누군가 앉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져간 것이다. 어쩌면 하다야 까페 주인이 손을 쓴 것일지도 모르겠다.

쓴웃음을 짓고 돈을 건넨 후 자리에 앉았다. 차가 좁아 허리가 아프다. 에어컨 버스인데 에어컨 나오는 모양을 보니 기대할 형편은 아닌 것 같고, 사람들이 창문을 열어놓았다. 자리가 불편해 잠이 안 온다. 비디오를 틀어놓으니 차안의 모든 미얀마인들이 그 비디오를 보느라 정신 없다. 차 안에 있는 외국 여행자는 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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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 Yangon

여행기/Myanmar 2005. 3. 30. 20:56
이번 여행부터 찍는 사진은 1024x768로 사이즈를 바꿨다. 파일 크기가 3배쯤 늘어나지만 최소한 프린팅이 가능한 수준이 되도록.

아침에 일어나니 목이 뻐근하다. 잘 때 자세가 안 좋았던 듯. 6시에 깨어 세수하고 짐을 챙겨 숙소를 나왔다. 남은 잔돈으로 쥬스를 하나 사 먹고 50밧 지폐는 나중을 위해 남겨 두었다. 쓸모가 있으리라. 59번 에어컨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며 졸았다. 이틀 묵었던 만남의 광장이 마음에 든다. 마치 누가 죽고 누가 경찰에 잡혀가는 등 해서 사람들의 발길이 갑자기 뜸해진 델리의 나브랑 게스트하우스처럼 묵고 있는 투숙객은 나와 어느 방송사 PD를 비롯한 방송팀 뿐, 남은 객실은 텅 비었다. 만남의 광장이 운하 옆으로 이전해서 아침에 식당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건너편 상인들이 장사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 보며 담배를 피웠다. 방콕에 가게 될 일이 있으면 다시 만남의 광장으로 갈 것이다. 24개의 침대가 텅 비어있는 도미토리를 혼자 쓸 수 있는 기회는 당분한 흔치 않을 테니까.

양곤행 비행기는 대략 1시간 운행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기내식과 음료 서비스가 나왔다. 배 고픈데 잘 되었다. 주는 대로 빼놓지 않고 받아 먹었다. 양곤에 가면 점심 한 끼 안 사먹어도 된다. 푸켓 에어의 737-200 항공기 좌석수는 200여개지만 손님은 30명이 채 안 되었고 배낭을 든 사람이 없는 걸 보니 그나마 나같은 배낭 여행자는 없는 것 같다.


동남아를 꽤 많이 다닌 셈이지만 비행기에서 델타를 본 것은 처음. 양곤에 거의 접근. 버마를 거저 먹은 영국은 이 델타의 가치를 일찌감치 알아채고 양곤을 전략 수출입 도시로 키웠다. 그나저나 미얀마의 주요 수출품은 티크목재, 황마, 쌀, 그리고 흥미롭게도, 아편이다.


미얀마의 비옥한 델타. 뭔가를 한창 건설중인 듯. 버마는 영국 식민 시절의 이름인데, 나중에 만나는 미얀마 사람들마다 물어보니 영국에 별다른 적개심을 가진 것 같지 않다. 동남아 대개 국가는 제국주의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은데, 나같은 제 3자가 오히려 더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선교사가 동남아시아로 넘어오면서 친절하게도 이 종족, 저 종족의 아이덴티티를 확실히 해 주시는 바람에 종족 간에 잘 지내던 나라들이 불화에 휩쌓이게 된 것이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 북부 카렌족은 여전히 군부독재와 투쟁중이고, 여전히 핍박받으며 도망다닌다. 자기들이 버마족이라고 믿고 있는 미얀마인들의 태반은 몬족이다. 마치 한국에 양반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처럼. 티벳 몽고어족인 미얀마어는 한국어와 어순이 같다. 버마족은 과거 매우 강대한 종족이었고... 이런...

양곤 공항에서 출입국 수속을 대충 마치고 공항 바깥으로 빠져 나오니 삐끼가 달라 붙는다. 양곤 시내까지 택시 3$ 부른다. 협상이나 할까 하다가 마음이 바뀌어 그에게 어디서 버스 탈 수 있냐고 물으니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친절하게라... 의외로군. 택시가 글른 것 같으니까 환전하지 않겠냐고 되묻는다. 달러당 얼마? 450짯. 900으로 해 주세요.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동료들과 뭐가 재미있는지 킥킥 웃더니 좋은 여행 되길 빈다고 말한다. 미얀마 첫 인상이 상쾌하다. 생각해보니 시리아가 그랬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물어 20짯 짜리 픽업을 타고(시외버스 터미널처럼 생긴 아담한 공항을 빠져 나와 왼쪽으로 직진, 주욱 가면 픽업들이 서 있는 교차로가 나타남) 잔시(?) 라는 곳으로 가서 내린 다음 버스를 기다려 탔다. 51번 버스 40짯. 둘 다 사람들이 미어터져 몸을 꼼짝할 수가 없다. 아무튼 미얀마 숫자 쓰는 법을 익혀둔 덕택에 버스 번호가 눈에 보인다. 미얀마 알파벳도 좀 알아두고 싶은데 자료를 구하지 못했다.

버스에서 영어를 썩 잘 하는 대학생과 얘기했다. 전공이 경제학인데 한국에 내년에 가게 될 것 같다고 한다. 그의 형은 부산에서 일한다. 한국에서 일하게 되면 어떤 직업을 갖을 수 있을 것 같냐고 묻는다.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뭐라고 해야할 지... 전공이 뭐든 상관없이 동남아에서 풍운의 꿈을 안고 온 대학생들이 별로 적절치 않은 대접을 받으며 공장에서 나사 만드는 등의 일을 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해줄까. 이 지역에서 대학생이면... 그러나 교육수준이나 질은 한국과 상당히 다르다. 물론 그들 역시 많은 것을 바라거나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삽질해서 번 '큰 돈'으로 미얀마에서 부유하게 살아보는 것이 꿈일 테니까. 버스가 신호등에 걸렸을 때 옆 라인에 토니여행사의 짚차가 섰다. 미얀마 여행을 계획할 때 한 번 쯤은 접하게 되는 이름.

대학생의 안내로 술레 파고다에 내려 오끼나와 게스트하우스까지 함께 가면서 그에게 내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한국에 오게 되면 한번 연락하라고... 오끼나와 게스트하우스는 시설이 꽤 좋은데 가격이 비싸 그냥 나왔다. 그의 말에 따르면 미얀마에 온 한국인은 무슨무슨 호텔에 묵는다고 하더라. 내가 묵으려 하는 곳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좀 싼 편이라고 한다.

기절할 정도로 쌌으면 바랄 나위가 없겠다. 술레 파고다 바로 앞에 있는 가든 게스트 하우스로 올라갔다. 싼 방은 다 나가고 에어컨 방 밖에 없단다. 6$, 고민하다가 잡았다. 오끼나와에서 5$주고 도미토리에 묵는 것보다는 낫지. 이 숙소에 대한 트래블 게릴라의 평가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5층을 오르락 내리락하기에는 불편하단다. 술레 파고다를 바라보는 끝내주는 전망 얘기는 없었다. 어쩌면 탑들이 지겨워서인지도.


Sule Pagoda, 붓다의 머리카락이 여기 있다는 소문이 있다. 양곤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본 파고다. 한국으로 치면 남대문쯤 되겠지. 앞으로 수천 개의 파고다를 보게 될 것이다.


이 정도면 양호한 숙소 아닐까 싶다. 물론 2002년에 새로 지은 오끼나와의 럭셔리함과는 비교가 되겠지.

시장통에서 달러당 900에 50$만 환전. 론지를 살까 하다가 3000씩이나 한대서 망설였다. 삐끼와 바고 가는 차가 있냐 없냐로 옥신각신했다. 그의 말로는 2500짯이라는데 바고 까지 고작 한 시간에 2500짯이면 어딘가 가격이 불합리해 보인다. 걸어서 보따타웅 파고다까지 갔다. 2$를 삥 뜯기고(현지인은 무료입장) 낫 사당부터 보았다.


낫(nat, 정령) 신앙의 본거지인 뽀빠산에는 안 갈 생각. 절간의 삼신각과 비슷한데 한국에서는 절간 어느 한구석에 조그맣게 쳐 박혀 있는 것이 이곳에서는 금칠도 하고 대접 받는다. 이놈은 좋은 신령 같다.


어서옵쇼


보따(군인) 타웅(천명)은, 다곤(현재의 양곤)에 살던 두 형제인 Okkla와 Bhallika가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곳인 인디아의 부다가야로 찾아가 부처에게 꿀케잌을 바치고 그가 건네준 여덟 가닥의 성스러운 머리카락을 받아 다곤으로 돌아올 때 오칼라파 왕이 천명의 지휘관을 데리고 나와 영접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천명의 군인과 자비의 화신이라...


이 파고다는 내부를 공개하여 부처의 머리카락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이곳에 오면 부처의 머리카락을 보려고 안간힘을 다 썼다. 나도 노력했다. 그런데 저렇게 방치해도 되는 것일까? 저렇게 털기 쉬운 성물이라니... 이 김에 인디아나 정스가 되서 털어봐...


정말 성스러운 곳이라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려면 입장료와 별개로 1$를 더 내야 한다. 딱히 감시하는 것 같지는 않고 해서 사진기를 들이댔다. 안의 거울처럼 꾸민 여러 방에는 각각 의미가 있겠지만...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갯벌이 반인 이 해변에서 무려 천 명이나 되는 지휘관이 서서 부처의 머리카락이 당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천명의 군바리와 부발의 묘한 아이러니. 부처는 왜 미얀마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뜯어 줬을까? 팜플렛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부처는 불교가 미얀마에서 융성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부처는 락이 가고 블루스가 왔던 것처럼 미얀마에서 불교가 뜨리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았던 것이다.


2500년이 지난 현재, 해변 도로의 건너편에는 천 개의 컨테이너 박스가 있다.

시계를 흘낏 보니 기온이 38.5, 최근 12시간 동안 기압은 안정적. 아까도 꽤 더워서 땀을 많이 흘렸는데 이 더위에 차욱타지 파고다까지 6km를 걷는 것은 몹시 위험한 짓인 것 같아 중간에 택시를 세웠다. 1200짯에 대충 협상하고 올랐다. 아내가 늘상 하는 양상의 호구 조사를 해보니 운전수에게는 1년 7개월된 딸 하나 있고 딸 생각만 하면 입이 찢어지려고 한다. 심도있게 조사해보니 수입은 하루 7000짯 가량, 많을 때는 15000짯 까지 벌었다. 환산하면 8$-20$쯤. 택시는 렌트해서 사용하는 것, 하루 렌트비가 7000짯. 일인당 국민소득이 150$이라는 나라에서 의외로 고소득자였다. 아니면 개방 이후 다른 많은 나라처럼 미얀마 경제가 급속히 팽창하는 중이라던가, 관광객이 늘어났던가. 호구조사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는 영어라고는 숫자가 거의 전부인 기사 양반과 별별 수단을 동원해서 알아낸 것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깨달음도 얻었고 해서, 팔자 좋게 늘어져 있는 길이 195m 짜리 부처


이 나라 부처의 피부는 유난히 희다. 그가 미얀마어로 말했다; 아웅 레베 까잇데(아웅 목 아파), 뭐 재밌는 일 없을까?


쫄따구들이 오늘 공양은 잘 했는지... 내가 일어서기만 하면 군부 독재 정권 쯤이야 우습지. 보살들 시켜서 법륜 한 번 땀나게 굴려봐?


저 아저씨는 안 가고 아예 죽치고 살려나 보네. 그냥 눕지 그래... -- 이 나라에서 네번째로 큰 이 집 부처가 하루를 보내는 방법.

차욱따지 파고다를 나와 축축 늘어지는 더위 속에서 걸었다. 쉐다곤 파고다까지 만큼은 걸어볼 심산이다. 지나가던 아이가 앞에서 쳐다보길래 싱긋 웃어주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모르는 아이답게 내 얼굴을 한참 노려본다. 한 시간쯤 걸어가니 아까 그 아이가 어떻게 앞서 갔는지 앞에 다시 서 있다. 다시 웃어 주었다. 이번에는 아이도 살짝 웃는다. 낯선 외국인이 미소 지을 때는 함께 미소지으면 된다는 것을 깨닫고, 혼자 연습도 해 보고, 실무에 적용해 본 것이다. 재밌긴 하다.

쉐다곤 파고다 앞에서 파는 150짰 짜리 얼음 넣은 사탕수수 즙 먹고 힘냈다. 쉐다공 파고다에 다 왔다. 5$ 삥뜯길 준비도 했다. 가능한 안 걸려서 안 냈으면 좋겠다. 계단을 오르려니 아이가 따라와서 비닐 봉투를 덥석 손에 쥐어주고 신발을 싸서 들고 가란다. 5짯 주니까 히힛 웃으면서 사라졌다. 5짯이면 우리나라 돈으로 5원 가량? 이들 물가 수준이 아직 감이 안 잡힌다. 수퍼에 들러 대충 가격이라도 알아봤으면 좋겠는데 그럴 시간이 없다.

소문대로, 어디선가 귀신같이 나타난 젊은 친구가 나를 잡더니 티켓 판매소로 친절하게 안내해 주셨다. 외국인은 돈을 내야 하는 것이다. 친절은 계속되었다. 티켓 안내소의 아가씨들은 미소를 지으며 5000짯이라고 말하고, 꼭 사야할 것 같은 팜플렛은 1000짯 별도라고 말한다. 달러로 내겠다고 했다. 그 편이 계산하면 더 싸니까. 팜플렛을 사양하니 풀이 죽은 것 같다. 갑자기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혹시 카메라 있으시냐고 묻는다. 카메라는 1$ 더 내야 한다. 없다고 했다.


카메라가 없긴 왜 없어. 있지.


지나가던 카메라 촬영사나 가이드는 내 생일이 금요일이라니까 공교롭게도 붓다의 생일도 금요일이라고 기뻐하며, 오늘 당신이 이곳을 방문한 것은 행운이라고 자기들이 더 기뻐한다. 저게 행운의 참 모습이냐? 공사중이라 찬란한 황금빛에 대나무 금이 갔다. 공사는 5월에나 끝난단다. 내가 불만을 토로하자, 삐끼들은 그러나 여전히 당신은 행운아라고 말했다. 아직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공사가 마무리된 꼭대기의 찬란한 보석들은 볼 수 있지 않냐는 것이다.


신경질이 난 나머지(마누라는 먼저 갔다오고도 공사중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가이드와 쉐다공 파고다에 대해 누가 더 많이 아는지 서로서로를 가이드 해주기 시작했다. 그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전과 후 뭐가 달라졌는지 구분 안하였다. 나는 그가 겪은 고난 중에 마야(마라)가 특히 그의 심경을 괴롭혔음을 강조하고 틈틈이 미얀마 숫자를 자유자재로 읽을 수도 있음을 과시했다. 그리고 쉐다곤 파고다에 박혀 있는 무수한 보석들이 밤에 조명을 받아 반짝여 봤자, 꼭대기에 달린 다이아몬드의 찬란한 번쩍임 만큼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루비는 피빛으로 붉고 사파이어는 안다만 바다처럼 시퍼런데, 직접 보고 나서 말하라고 한다. 구석에 몰려도 아웅산 수지가 감방에서 밥은 잘 먹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주저 앉아서 지나가는 카메라 삐끼들과 한가한 얘기나 나누며 사람들이 절하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파고다의 이름에 스웨가 접두어로 붙는 것들이 많다. 스웨는 황금이란 뜻이다. 스웨다곤은 황금 다곤, 다곤은 양곤의 옛 이름. 파고다에 자기 몸무게 만큼의 금을 기부하는 풍속은 미얀마에서는 신소부 여왕때부터 시작된 것 같은데, 그녀가 기증한 금은 40kg이었다. 그녀가 기부한 금의 무게가 현재에 살아가는 많은 여성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지, 공주가 만약 80kg의 금을 기부했다면 지금처럼 존경받았을까? 의문이다.


쉐다곤 파고다에서 받은 이미지: 쪼리를 질질 끌고 다니며 담배를 뻑뻑 빨고 있는 승려, 콘크리트 붓다, 부처 머리에 앉아 똥 싸는 참새, 한가한 가족 나들이, 한 줄로 주욱 즐비하게 늘어선 기부함, 라이브 도네이션 현장. 사원에서 기부받은 돈을 즉석해서 회계처리하는 인디아식의 영리함을 이곳에서는 보지 못했다. 인도에서 가장 큰 사원의 회계사에게 물었다. 하루에도 수십만의 사람이 들락거리는데 어떻게 한푼의 에누리도 없이 정확하게 계산이 맞아 떨어지는가? 그야 신께서 도와주시니까. 영적으로나 회계적으로나 한국의 개신교에서도 그 분께서 장부 처리를 도와주고 있을까? 돈을 세고 있는 하나님 모습을 상상했다. 지나가던 독일인이 지겹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부다, 부다, 부다, 어나더 부다...' 부처가 참 많긴 한데, 각 부처마다 보살피는 것이 다른 것 같다. 낫 신앙과 뒤섞인 힌두식 남방불교. 미얀마는 대승 불교에서 소승 불교로 갈아탄 것으로 알고 있다. 인상깊은 것이 하나 더 있다. 세계 주요 도심에서 나름대로 진화하기 전의, 닭둘기 조상이 이곳에 대거 서식한다.


저녁 8시쯤 정전. 술레 파고다는 그래도 희미하게 빛났다. 성스러운 전용 발전기가 있는 것 같다. 정전으로 암흑에 휩싸인 도심의 한복판에서 파고다가 surealistic하게 반짝인다. 그야말로 sf였다. 노출보정 +1, 노출시간 0.6초, iso200, 손 삼각대. 아마추어 사진에 더 많은 것을 바래서는 안되겠지. 더 이상의 노력은 포기.

오끼나와 식당에서 1200짯 짜리 오끼나와 특별 수프를 시켜 먹었다. 정전 탓에 촛불을 켜고. 방콕에 있을 때 똠양꿈을 못 먹어 섭섭했는데 여기서 먹게 될 줄이야... 오끼나와 스페셜 스프는 똠양꿈 맛인데 그런 줄 모르고 설탕을 안 넣어 시디 신 라임소다를 곁들여 먹었다.


에어컨 프로텍터. 전압이 242v 이상 치솟으면 에어컨 전원을 off 시키는 것 같다. 인디아에서는 왜 이런 장치를 본 적이 없을까. 60-250v까지 제멋대로 정신없이 변하는 전압에서는 섬세한 일본 기기나, 유럽, 미국의 전자기기들은 가차없이 나가 떨어졌다. 한국의 모 기업의 tv가 인디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은 60-250v까지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전압으로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줄이려고 정격의 수 배에 달하는 내압을 지닌 값비싼 컨덴서를 포함한 회로를 전자기기에 장치하면서 부터다. 발전 사정이 좋지 못한 비서구권 제3세계 국가에서 한국 전자기기는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훌륭한 현지적응 사례다.

보조제 마켓의 한 노점상에서 손톱깎이를 살 때 상인은 태국제, 중국제, 한국제를 구별했다. 한국제가 가장 비싸다. 주저없이 중국제를 골랐다.


어둠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좋아 날뛰고, 불빛 주변에는 사람들이 불나방처럼 모였다. 덕택에 미얀마의 수도에서 별을 보았다. 쩨주베(고맙다).

인터넷 까페는 아홉시에 문을 닫고 이 글은 언제쯤에나 블로그에 올리게 될지. 노트북에 저장해 둔 비틀즈의 노래를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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츄리닝을 입고 인천 공항에 도착. 아내가 뭐라고 그러더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긴 했다. 수속을 마치니 간신히 비행기에 오를 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1시 방콕 도착. 공항을 빠져 나와 버스 정류장에서 20분을 넘게 기다려서야 59번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그것도 에어컨 버스, 20밧. 버스 가격이 올랐나?

카오산에 도착해 싸구려 숙소들을 돌아다녀봤지만 방이 모두 찼다. 간신히 새로 옮긴 만남의 광장에 도착하니 새벽 3시. 도미토리를 잡고 들어갔다. 한국인이 한명 자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시간당 120밧 하는 맛사지를 두 시간 받았다. 그럭저럭 괜찮은 편. 항공권을 컨펌하고 날짜로 모두 11일로 고쳤다. 13일은 죽어도 표가 안 난다. 그놈에 송크란 때문에..

그리고 파아팃 선착장으로 가서 보트를 타고 창 선착장으로, 창 선착장에서 다시 보트를 타고 50여분을 달려 방야이로, 방야이에서 버스를 타고 남 선착장으로, 남 선착장에서 논타부리 선착장으로... 논타부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파 아팃 선착장으로... 이렇고 돌아다니니 5시간 걸렸다. 오늘 테마는 챠오프라야 강을 보트 타고 돌아다니자... 였는데 방야이에 가니 방콕이 수상도시라는 것이 실감났다.


챠오프라야 강


방야이로 가는 길.

숙소로 돌아와 샤워 하고 차이나 타운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차이나타운 갈 때도 보트를 타고 가면 되지만 귀찮아서 버스를 탔더만 교통체증에 걸려 중간에 내려 걸어갔다. 거리에서 파는 50밧 짜리 제비집 수프를 먹고 딤섬을 이것 저것 줏어 먹었다. 오렌지 쥬스를 15밧 주고 샀는데, 이럴수가... 거의 1리터 가량을 갈아서 줬다. 먹다가 속으로 '좆됬다'고 중얼거렸다. 더 이상 다른 것을 먹을 수가 없었으니까...

배도 채웠고 차이나타운에서 걸어서 방람푸까지 왔다. 시계의 나침반도 실험할 겸 운동도 할겸. 방람푸에서 다시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8번 버스를 타고 빅토리 모뉴먼트로 갔다. 섹소폰 2층에서 맥주 한 병 시켜놓고 다리를 쉬었다. 연주 솜씨는 그저 그랬다. 아마추어 티를 갓 벗어난...

전승기념탑 주변에서 버스를 타고 어떻게 돌아가야 할 지 난감해서 MRT를 타고 일단 씨암에서 내려 15번 버스를 타고 방람푸로 돌아와 죽 한 그릇 먹었다.

내일은 그렇게 속을 썩이던 미얀마 들어가는 날. 아내는 미얀마에서 10일을 보내고 돌아왔고 볼만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버강 유적지는 앙코르 와트, 보르부르드와 다불어 동남아시아 3대 유적지다. 아내나, 동남아를 여행하는 여행자 대부분이 동남아 문화와 역사에 대해 그다지 공부하는 것 같지 않았다. 흠... 미얀마의 선사시대, 고고학적 역사에 관해서 얘기해 봤자 들어줄 사람도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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