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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1.12.26 Borbudur
  5. 2011.12.25 Yokyakarta
  6. 2011.12.23 Jakarta

Kuta

여행기/Indonesia 2011. 12. 30. 12:00
아침에 깨보니 6.30am. 세수만 하고 어제 사온 물을 마셨다. 짐을 정리하고 내려와 아침으로 토스트, 계란 프라이, 커피 따위를 먹고 마셨다. 어제 먹은 팬케잌과 더불어 정말 맛이 없다. 아침 식사를 안 줘도 좋으니까 방값이나 깎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7.30am쯤 숙소를 나와 Monkey Forest를 향해 걸었다. 도착해 보니 이른 시간이라서인지 입장료를 받는 사람이 아직 출근하지 않은 듯. 무료 입장.

인디애너 존스 분위기가 나는 작은 사원과 밀림이 펼쳐졌다. 원숭이들이 코코넛 껍질을 깨먹고 뛰노는 모습을 구경하며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9.10am. 걸었다.

왕궁에 가서 구경할 것도 없는 내부를 하릴 없이 돌아다니다가 북쪽 길을 슬슬 걸어가는데, 앞서가던 서양남녀가 갑자기 서로를 부등켜 안더니 키스를 한다. 보기 민망해서 돌아섰다. 이건 뭐... 우붓에서 열렬한 사랑을 찾아낸 또 다른 쥴리아 로버츠?

어제 못갔던 Dewi Warung이 맛있다길래 그 식당을 찾으러 Jl. Hanuman까지 갔다가 길을 잠시 잃고 헤멨다. 우붓의 중심가는 부띠끄, 마사지샵, 채식주의자 카페, 여행사가 전부인 것 같다. wifi 접속이 안되도 wifi를 켜놓고 있으면 GPS assist data를 인근 wifi ap로부터 다운받아 비교적 빠르게 위치를 찾아주어 여행이 그 동안 편했다. 

들어가보지는 않았지만 Dewi warung에는 wifi가 없었고 전반적인 메뉴가 어제 밥을 먹었던 warung lokal보다 약간 비싼 편. 그래도 들어가려고 했는데 문이 잠겼다. warung lokal에 다시 들러 mie goreng을 시켜 먹었는데 어제 먹었던 나시 고랭과는 달리 영 아니었다. 그래도 무성의한 인스탄트보단 나았다. 어떤 외국인 라면 전문가는 내가 자카르타의 잘란 작사에서 먹었던 인스턴트 미에 고랭을 세계 10대 라면 중에 하나로 꼽았다. 그 미원 덩어리의 맛대가리 없는 비빔면이 뭐가 그리 맛있다는 건지 믿겨지지 않는다. 이 나라 저 나라 온갖 라면을 섭렵해 본 개인적 경험에 따르면 대부분의 국가 라면은 면발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고 자국의 면음식을 단순히 인스탄트화한 것에 불과하다면 한국 라면은 제2의 창조라 불러도 될만큼 독자적인 음식 장르다.

마누라와 딸과 skype로 잠시 통화했다. 딸애는 어젯밤에 아빠가 보고 싶어 자다 깨어나 흑흑 울었단다.

11.30am이 다 되어 숙소에서 도착해 샤워하고 체크아웃했다. 관광 안내소의 벤치에 앉아 셔틀버스를 기다렸다. 

방금 관광 안내소를 찾은 여자는 숙소의 옆 방에 묵고 있던, 혼자 여행 온 인도네시아 아가씨였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면 마치 생쥐처럼 금새 방 안으로 들어가 숨던... 아침에 주인 할머니의 손자로 보이는 정신지체아 소년이 내게 집적거릴 때(사실 우리 둘이 놀았다) 옆 방의 문이 달그락 거리며 잠기는 소리를 들었다. 숙소에는 낮이면 마사지를 하는 젊은 아가씨들이 계단 맡에 걸터 앉아 있었다. 손톱을 손질하고 매니큐어를 만지작거리며... 마치 음란한 마사지 샾이라도 되는 것처럼(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미소 한 번 없이 그들을 스쳐갔다. 친절하지만 피곤에 절은 것 같은 표정이 얼핏 얼핏 지나가곤 하던, 서빙을 보고 방 청소를 하고 음식을 만들던 점원들. 나이를 먹어도 영민한 눈동자가 반짝이던 주인 할머니. 맛없는 음식, 젤라또 가게에 길게 늘어선 관광객들, 길을 가득 메운 차량, 서양 여행자가 오토바이를 몰고 가다가 사고가 나서 차와 오토바이 사이에 다리가 끼어 있는 걸 빼냈다. 시장에서 3,000rps란 대단히 저렴한 가격에 타이거 밤을 팔던 아줌마에게 깍아 달라고 말했다가 혼줄이 나기도 하고, 한국인 신혼여행자들이 북새통의 시장에서 뭐 사갈만한 거 있나 둘러보는 모습을 보았다. 시장통의 과일 가게 앞에서 서성이다가 과일을 내게 하나 주며 먹어보라던 아줌마의 웃는 얼굴, 싸롱을 입지 않고 시내의 사원에서 기다란 장대를 들고 과일을 따던 아저씨, 공사중인 사원 앞에서 담배를 바꿔 피웠던 아저씨 등등이 생각났다. 우붓에는 혼자 온 여자 여행자들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띄었다. 여기 며칠 더 머물렀어야 했다. 조그맣고 사건 당시엔 금새 잊어버렸던 인상들이 광합성하는 수초들의 잎사귀 뒷면에서 풀풀 피어오르는 산소방울처럼 끊임없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관광안내소에는 에코 트래블을 주관하는 무수한 여행사들의 팜플렛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MTB를 타고 논 사이로 난 길을 달리고 건강식이라는 채식을 먹고 마시며 로컬리 마을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놀다가 불편한 침대에 누워 잔다던가... 차가 도착했다. 운전사가 내가 들겠다는데 굳이 짐을 들어 차로 옮겨줬다.

차량은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인도네시아 여행자가 한 명 탔다. 그는 자와섬에서 전국일주 중이다. 길거리에 트렁크를 놔두고 우두커니 앉아있던 미국인 여자가 두 번째로 탔다. 승객은 그걸로 끝이다. 두 명 이상이 안되면 미니버스를 운항하지 않는단다. 그러면서 세 명이라 참 다행이란다. 이게 과연 5만 루피아나 주고 탈만한 가치가 있을까? 그냥 로컬리들이 타는 미니버스를 타고 덴파사르 북부 터미널에 갔다가 거기서 쿠타행 미니버스를 다시 타는게 낫지 않았을까? 난 내가 그렇게 내켜하지 않았던, 여행사나 전전하는 서양 여행자처럼 돌아다니는 중이다. 차는 이제 시작된 교통체증 속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했고 미국 여자는 덥다고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탄소 풋프린트를 적게 남기려고 에어컨을 일부러 고장낸 것 같다고, 인도네시아 어디가나 에어커이 맛간 차들 뿐이라고 말하니 자기는 발리에만 왔고 자와 섬에는 안 가봤단다. 

애리조나 출신. 친구가 내일 쿠타 해변에 도착하고 자기는 해변 근처의 어떤 호텔을 미리 예약해 놓았단다. 뻥 같다. 혼자 다니는 것 같다. 운전사는 지금이 성수기라 쿠타 해변에서 숙소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어떻게 되겠지. 이번 여행은 이제는 기억도 안나는 저번 미얀마 여행처럼 가이드북에 의존하지 않고 그저 포인트만 잡고 되는대로 돌아다니는 중. 졸립다. 땀을 흘리며 늘어진 채 선잠이 들었다가 깨었다가를 반복했다. 

인도네시아 배낭 여행자는 미국인 여자와 어디가 더 더운지 경쟁했다. 애리조나는 무려 150F 란다. 다만 건조해서 여기처럼 덥지는 않다고... 운전사가 숙소 위치를 묻더니 자기는 쿠타 해변 앞에 차를 세우는데 거기서 미국 여자가 예약한 숙소까지는 꽤 거리가 멀다고 원한다면 웃돈을 주면 거기까지 데려다 주겠단다. 200,000rps. 놀랍군. 휴대폰으로 구글 지도를 띄워 그 숙소를 찾아보니 쿠타 해변에서 약 3km 가량 떨어졌다. 하지만 더워서 저 거대한 트렁크를 질질 끌며 가긴 무리같기도 하고... 운전사가 장사하겠다는데 참견하기 뭣해 입을 다물었다. 

지긋지긋한 교통체증 때문에 한 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한다던 쿠타 해변에는 3pm, 그러니까 3시간이 넘게 걸려서 도착했다. 참 희안한 것은 그때까지 대화하는 동안 운전사와 인도네시아 여행자는 내가 인도네시아 사람인 줄 알고 있었단다. 운전사는 내게 행운을 빌어줬다. 숙소를 얻길 바란다며.

내린 곳은 Jl. Legian 남쪽 입구. 레지안 길은 쿠타해변로와 남쪽에서 북쪽으로 몇 킬로미터 가량 주욱 평행하게 이어진다. Kuta 해변은 배낭여행자들 사이에서 3K중 하나로 불리던 곳이다. Kaosan, Katumandu, Kuta. 약 20년 전 배낭여행자들의 성지같았던 곳. 

행운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저가 숙소가 몰려있는 Poppies Gang이란 귀여운 이름의 길거리 근처에 있는 거의 모든 숙소가 full이었다. 거의 모든 숙소란? 골목이 하도 복잡하고 다닥다닥 붙어 있어 '모든' 숙소에 들러보진 못했다. 어쨌든 배낭을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차츰차츰 북쪽으로 떠밀리듯 이동하다 보니 쿠타 해변의 북쪽 끝까지 올라왔다. 250,000짜리 fan room, 250,000짜리 a/c룸 등을 지나쳤다. 더 뒤져보니 150,000짜리 fan 룸이 있다. 삐끼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삐끼의 의견을 무시하고 혼자 찾기도 했다. 지친다. 비싸면서도 방이 너무 구질구질해 북쪽으로 더 올라가니 150,000짜리 그럭저럭 괜찮은 방이 나왔다. 협상이 안 된다. 내일 예약이 걸려 있단다. 그냥 150,000에 잡았다. 숙소 잡는데 무려 두 시간 가량을 보냈다. 어느새 5pm. 피부에서 소금이 벅벅 긁힌다. 짐을 내려놓고 일단 샤워부터 했다.

샤워를 마치고 짐을 정리한 후 해변으로 걷다가 외국인이 현지 여자애를 오토바이로 치는 사고를 봤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아이를 병원에 보낸다. 어제 우붓에서도 사고를 봤다. 심한 교통 체증에 자동차 두 대 사이를 무리하게 헤집고 가던 오토바이가 끼었다. 서양 아줌마를 오토바이에서 빼내고 다리를 살피니 멀쩡했다. 남자는 머쓱한 표정으로 긁힌 오토바이와 자동차를 연신 살폈다. 자동차 운전수들은 괜찮다며 두 사람을 길섶으로 옮겼다. 

해변은 지저분했지만 surfing 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하고 싶다. 한 시간쯤 눈여겨보니 어떻게 타는지 알겠다. 서핑을 할 처지가 아니라서 심난. 해변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일몰을 보았다.

야시장을 찾아갔다. 새우 버터구이 30,000, 빈탕 맥주 큰 병 30,000. 밥 3,000. 총 63,000 밥을 먹었다. 새우는, 달랑 새우만 기름에 튀겨 가져오더라. 홛앟나 나머지 하하 웃고 말았다. 맥도널드 세트 메뉴가 35,000인데 그것보다 더 비싸면서 맛은 별로.

Kuta square에서 뭐 쇼핑할 것 없나 뒤지다가 아내와 내 t-shirt를 카드로 긁었다. 하루가 심심하게 가 버렸다. 내일은 아침 느즈막히 일어나 matahari 내부의 super에서 몇 가지 선물꺼리를 장만하기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mini mart에서 차 7,500짜리를 하나 사서 마시며 wifi를 좀 했다. 왠지 재미가 없다. 

12월의 마지막 날 아침, 7.30am. 딱히 할 일도 없고 checkout time이 11am이라 애매해서 10.30am까지 밍기적거렸다. 드라마 두 편 보고 짐 정리하고 샤워. 나가는 길에 숙소에 짐을 맡기고 해변에 가려니 비가 온다. 살살 온다.

오늘은 쇼핑하는 날이다. 아내는 cinger chocolette가 있으니 사오란다. 까르푸를 찾으러 갔다가 못 찾았다. 엉뚱한 곳에서 길을 헤멨다. discovery mall에 들러(배가 고파서) 점심 세트를 시켰는데 28,000 짜리가 간에 기별도 안 가고 흡사 사기당한 느낌. 엿같은 식사. 까르푸 대신 mall galeria를 찾아 출발. 

일단 아까 먹은 점심이 부실해서 다시 밥을 먹었다. es teh 5,000, nasi soto ayam 10,900. 훨씬 낫다. 샌들 때문에 난 발의 상처가 아파서 밴드에이드 5,000 구입. 인니인으로 안다. 하긴 foot stall에서도 그랬고 인니 여행 며칠 후부터는 죽 인니인으로들 알았다.

수퍼에서 가면 2개를 각각 15,000에 구입. 달걀 부침은 30,000. 비가 그치길 기다리다가 지루해서 ace shop에서 집 꾸미기 용품들을 구경. 우리니라와 달리 직접 집을 꾸미는 사람들이 많은 지 싱크대부터 욕조까지 온갖 것을 다 판다. MTB는 최고가가 한화 60만원 가량. 별로 좋아보이지 않았지만 최근 인니에는 자전거 바람이 불고 있다. 

여전히 비가 와서 mall galeria에 들러 duty free shop에 갔는데 기념품 단가가 너무 비싸 살 엄두가 안 났다. tiger balm이 2.5$, 우붓 시장에서는 3,000. 공시 환율이 9,600인데 여행자 거리에서는 9,300~9,500까지 봤지만 갤러리아 환전소는 8,800. 갤러리아 앞에서 모터바이크를 타고 가던 서양인이 걸렸다. 벌금이 백만 루피아라던가?

꾸따 해변을 향해 걸었다. 여전한 바다. circle k에서 맥주 한 병 16,000 사들고 wifi 사용.wifi 속도가 느려 별로 할만한게 없다. 옆 자리의 십대 애들은 폭죽을 터뜨리며 놀고 있다. 

숙소로 가서 샤워하고 짐을 찾았다. 길리언 도로를 따라 내려 가다가 마타하리의 수퍼에 들러 쇼핑하기 전에 저녁을 먹기로. 빈탕 맥주 한 병, 야채 샐러드, 포모도르 스파게티를 시켰는데 132,250이 나왔다. 카드로 긁었다. 뭔가 이 곳 해변은 나하고 코드가 안 맞는다.

마타하리 수퍼에서 물고기(60,000) arak, 젓가락, 초콜렛 따위를 사니 552,750. 왠지 쇼핑이 마음에 안 든다. 길거리에 인파가 몰리기 시작. 소음 공해다 싶을 정도로 골목마다 쾅쾅 울리는 음악. 

공항까지 걷는다. 중간중간 인도에 구멍이 나 있다. 

Tuban 길에 있는 Krisna Oleh-Oleh Khas Bali 라는 가게에 우연히 들렀다. 9.00pm. 대단한 곳이다. 정신없이 쇼핑. 그래도 286,000 밖에 안 들었다. 기운이 나서 씩씩하게 걸었다. 하늘은 온통 폭죽의 불꽃이고 매케한 연기 속에서 사람들은 새해를 축하하고 있었다. 마치 전쟁난 것 같다.

걸어서 공항에 도착하니 9.40pm, 세수 하고 옷을 갈아입고 출국 절차를 마치니 10.10pm. launge에서 유로 launge(100,00)에 들어가 죽치고 앉아 과자를 먹고 맥주를 마셨다. 여행이 끝났다. 

수원은 여전히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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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ud

여행기/Indonesia 2011. 12. 29. 12:00
며칠 동안 새벽에 일어나곤 했더니 7am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아침을 먹으려고 밖에 나가보니 내가 묵은 곳이 식당 겸 숙소다. 그것도 monkey street의 중심가였다. 아침으로 팬케잌과 티를 주문해 먹는데 Kuchi Kuchi Hotahe가 스피커에서 흘러 나왔다. 인도에 가고 싶다. 주인 할머니는 내가 자기 숙소에 묵은 몇 안 되는 south korean이란다. 우붓의 어디가 볼만하냐고 물었다. Gunug Kawi에 가보란다. 가이드북을 뒤져 보았다. 있다. 거기 가려면 대중교통으론 무리고 자전거로 가려면 상당히 멀다. 투어나 오토바이 밖에 옵션이 없어 보인다. 오토바이를 빌리기로 하고 그쪽 중심으로 어디 갈껀지 미리 경로를 잡았다. 방에 돌아와 샤워하려는데 샤워기가 말을 안 들어 물이 안 나왔다. 샤워기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두 말 없이 2층 방으로 바꿔준다. 어젯밤에 잡은 방보다 더 좋다. 

ubud에서 새벽 1시가 다 되어 어쩔 수 없이 잡은 숙소. 방 크기가 거의 30평대. 내 평생 배낭여행 중 이런 넓이의 숙소는 처음.

숙소 가격 대략 16$(150000rp). 좀 비싸긴 한데 이렇게 럭셔리한 안마당을 가진 숙소라니...

1층 숙소의 샤워 꼭지로 물이 제대로 안 나와 2층으로 옮겼다. 더 좋다. 그런데 우붓에서는 이런 숙소가 그냥 배낭여행자의 숙소일 뿐이고... 아, 생각났다. 쥴리아 로버츠 주연의 eat, pray, love란 영화에서 그 여자가 발리에서 묵었던 숙소가 딱 이랬다.

세상에 무슨 화장실이 내가 평소에 묵던 싱글룸 크기냐...

9am, 별 생각없이 거리에 나왔다. 두리번 거리며 걷고 있으니 어떤 삐끼가 다가와 자전거 빌릴 꺼냐고 묻는다. 스쿠터는? 스쿠터도 있단다. 얼마? 하루에 70,000rps. 좋아요 40,000rps로 합시다. 50,000rps가 좋겠어요. 그럽시다. 라이센스 있냐고 묻는다. 없어요. 나를 다른 가게로 데려갔다. 조용히 말했다. 만일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경찰을 만나면, 수납통을 열어 꾸깃꾸깃 접힌 종이 쪼가리를 가리키며, 이걸 보여주라고 말했다. 이게 뭔데요? 그거에요. 그게 뭔데요? 라이센스 페이퍼요. 마음에 드는 헬멧이 나올 때까지 이것저것 써봤다. 다행히 냄새는 안 났다. 삐끼를 잡고 Gunung Kawi(Gunung은 산이란 뜻)에 가려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었다. 일단 기름을 여기 여기 가서 넣고, 거기서 죽 가다가 삼거리 만나면 좌회전해서 죽 올라가면 된단다. 거참 헷갈리는군. 해 보자.


그 전에 근처 저가 숙소 골목에 들렀다. 세 군데는 리셉션에 물어보니 방이 없고 다른 곳들은 full 팻말을 걸어 두었다. 하이 시즌이라 방 구하기가 어렵단다. 어젯 밤에 벨지움 부부는 방을 구했을까? 두세 군데 더 들러보니 150,000~200,000rps 가량 했다. 몇 군데 숙소를 잡아보니 이제 감이 잡히는데, 인도네시아에서는 방값을 적어놓은 tarif를 의무적으로 비치하게 되어 있다. 메뉴판은 성수기 가격과 비수기 가격으로 나뉘어 있다. 그러니까 이들이 비수기 가격이 적힌 메뉴판을 잘못 내놓았다가 서둘러 바꿔도 딱히 사기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침에 방이 업그레이드 되었는데 굳이 옮길 필요 없을 것 같다. 전반적으로 둘러본 숙소들이 자와섬 보다는 훨씬 나았다. 엊그제 브로모에서 만난 여행자 중에 한 명이 발리 섬이 숙소는 같은 가격이라면 자와섬 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라고 말한 것이 기억났다. 하지만 그는, 엄청나게 비싼 물가와 특히 오버차징에 내내 시달려야 했던 발리섬에서 탈출하길 정말 잘했다고 주장했다. 어제 택시 생각하면... 으...

작년에 제주도에서 스쿠터를 타 봐서 쉽게 타겠거니 했는데, 왠걸, 덕지덕지 기운듯한 1차선 도로에서 쫓기듯이 달리다보니 불알이 오그라들어 속도를 못 내겠다. 도로 왼쪽에 바짝 붙어(맞다 여긴 좌측통행이다) 슬금슬금 달렸다. 속도가 60kmh를 넘지 않았다. 주유소에 들러 꽉 채워서 기름을 넣으니 16,000rps. 고작 2천원이라니!

비가 내렸다. 점점 빗발이 거세졌다. 헬멧을 쓴 머리만 빼고 쫄닥 젖었다. 두리번 거리다가 처마 밑에 스쿠터를 세우고 비가 그치길 멍하니 기다렸다. 건너편에서 젊은 처자들이 깔깔 대며 웃는다. 자와 섬에서는 저런 발랑까진 무슬림 여자애들이 여행객에게 시시덕 거릴 리가 없었다. 내 꼴이 한심해서 담배를 물고 뻑뻑 빨았다. 비가 잦아 들어 다시 스쿠터를 탔다. 40분쯤 달리니 비가 멎었다. 도로가 미끄러워 속도를 내기 겁난다. 

구능 카위에 도착. 주차료는 2,000rps. 싸롱을 파는 삐끼들을 물리치고 입구에서 싸롱을 빌렸다. 입장료는 무려 15,000rps. 밀림 속에 바위를 파서 만든 사원이다. 그럭저럭 볼만했지만 부러 찾아갈만 한 곳인지는 의문이다. 아내 말대로 인도에서 볼 걸 다 보고 나면 다른 어떤 관광지에 가도 시큰둥해지게 마련인지 모르겠다. 

오토바이 타고 비 맞으면서 gunung kawi에 갔다. 입구에서 본, 인도네시아 주요 관광자원 중 하나인 terrace rice paddy. 그러니까 계단식 논. -_-

이렇게 보니 베트남 분위기인데? 아, 그러고보니 계단식 논은 베트남의 주요 관광자원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하루 빨리 계단식 논의 관광자원화가 시급하다. 어쩌다가 쌀농사 포기하고 대농 정책 중심으로 나가다가 이런 귀중한 관광자원 개발을 소홀히 하게 되었을까 -_-


암면을 깎아 만들었다. 정글 한 가운데서 이걸 보니 인디애너 존스 분위기

인디아의 아잔타 석굴과 비슷. 단지 여긴 정글이고, 물이 풍부하다.


manual은 몰 줄 몰라 automatic을 빌렸다. 오토바이 없으면 돌아다니기 힘든 곳. 대중교통이 불편하고 자전거는 우붓 지형 및 열대의 기온 때문에 좀 힘들어 보인다. 실은 자전거 투어가 있는데 그게 명칭이 'eco tour'라고... 전세계 어디가나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의 사업수완이란 정말...

다음 목적지는 Pura Samuan Tiga. 입장료 받는 곳에 사람이 없다. 관광객도 없다. 그늘에 한가하게 앉아 이끼에 뒤덮인 석상과 여기저기 떼지어 몰려다니는 닭들, 어슬렁 거리며 닭을 노리는 고양이들을 구경했다. 어떤 여행자가 자전거를 타고와 인사했다. 그의 사진을 찍어줬다. 멍하니 앉아 그가 사원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작고 방치된 듯한 사원이다. LP에 따르면 이들 사원은 축제 때가 되어야 사람이 찾아오고 활기를 띤단다.

Pura Samuan Tiga 입구의 도깨비. 힌두교에 이런 도깨비가 있었던가?


역사적으로는 천년이 넘은 사원이지만 지진 이후 복구 대신 renewal을 택함. 따라서 이 사원의 역사는 실질적으로 100년 정도?


Yeh Pulu를 찾으려고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었다. 동쪽으로 가다가 남쪽으로 틀어 서쪽으로 가서 다시 북쪽으로 가면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할텐데, 동쪽으로 가다가 남쪽으로 쭉 가서 다시 동쪽으로 교차로 하나 없이 한 없이 이어진 도로를 달리다가 남쪽으로 틀어졌다가 동쪽으로 가다가 비스듬한 북쪽 길을 따라 가며 몇몇 교차로를 지나치고 외통수를 만나 갑자기 좁은 논길이 끝나면... 이런 젠장. GPS를 켰다. 아까 Pura Samuan Tiga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 waypoint를 찍어 놨다. 이건 정말 좋은 버릇이다. 예전에 중남미에서 종종 길을 잃고 헤메던 잊지못할 기억 때문. 그래서 원래 있던 길로 안 가려고 다른 길로 헤멨다. 두어 시간 그렇게 헤메니 진이 다 빠졌다. 인도네시아의 열악한 도로 사정을 뼈저리게 느꼈달까? 가난한 시골 모습을 제대로 구경했다. 사람들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았는데 내가 외국 여행자란 생각은 안 하는 것 같았다. 단지 이런 곳에 올 사람이 아닌 타지인이 길을 잃고 헤메는 모습을 구경했던 거랄까? 어쩌면, gps가 없었더라면, 그들과 교통이 있었을 것이다.

어찌어찌 해서 두 시간 만에 다시 처음 삼거리로 돌아왔다. 삼거리 옆에 Goa Gajah가 있었다. 주차장 크기로 미루어 보건대 유명한 관광지 같다. 대뜸 삐끼가 접근해 자기를 따라가면 고아 가자의 숨겨진 밀림의 신비를 구경할 수 있단다. 어느쪽인데? 저기 저쪽에서 시작해서 저쪽 끝까지. 고마워요 내 힘으로 한 번 가볼께요. 혼자 가면 길을 잃는단다. 내겐 gps가 있어요. 휴대폰이에요? 아뇨 gps에요.

싸롱을 빌려 입고 우편엽서에서 보았던 동굴 입구의 거대한 바위 상을 보았다. 이전 사원에서는 본 적이 없었던 링감이 모셔져 있다. 이런 몹시 작은 링감이면 우주적인 신심이 제대로 우러나질 않을텐데, 발리의 힌두교에 의문이 생겼다. 

발리 엽서에 등장하곳 하던 동굴 사원의 입구. 아, 나도 가이드 끼고 설명 좀 들어봤으면 좋겠건만...


고아 가자 내 작은 사원에서 뿌자 중인 할아범(모처럼 보는 시바파였다) 옆에서 하레람! 하레람! 두 팔을 벌리고 꽥괙 소리 지르며 요란하게 기도했다. 이마에 빈디를 찍어주며 박시시를 요구했다. 거적데기를 들추니 관광객들이 선뜻 기부한 100,000rps 지폐가 보여 인도인에 버금가는 발리 힌두교 삐끼들의 역량에 감탄했다. 대체 어떤 미친 관광객이 영빨이 영 안 받는 보잘 것 없이 이런 작은 사원에서 이마에 빨간 점 하나 찍어줬다고 사제(사원 관리자)에게 100,000rps 씩이나 기부하겠나. 그런 거다; 남들이 이만큼 냈으니 너도 이만큼 내라. 지갑에 1,000rps 짜리가 있었지만 그걸 주면 모욕감을 느낄 것 같아 관뒀다.

'밀림으로 가는 길(way to the jungle)'이란 푯말을 보고 주저없이 들어갔다. 콸콸 흐르는 시냇물, 미끌미끌한 길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왠 삐끼가 버르장머리 없는 어떤 늙은 서양 관광객이 자기들의 성소에 짐을 올려놓았다고 불평과 욕설을 늘어놓았다. 그것도 잠시뿐, 이 밀림은 하도 복잡해서 혼자 다니면 길을 잃으니 자신의 가이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갔다. 내게 관심을 돌리더니 자신의 가이드를 받으라고 말한다. 필요 없을 것 같아 사절했다. 길이야 늘상 잃는 거고.

나무 뿌리 사이로 난 길을 걷다가 아이스 박스를 내 놓고 음료수를 팔고 있는 처자를 만났다. 콜라? 노. 사이다? 노. 그런데 여기 길이 있어요? 이쪽으로 쭉 가면 되요. 인상이 좋아 보여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일어섰다. 아침 바람부터 비맞으며 싸돌아다녔더니 피로가 밀려온다. 그래도 걷자.

정글로 향하는 길

정글에서 길을 잃고 헤메다가 만난 음료수 파는 아가씨.

그저 산책로 정도에 불과한 밀림의 끝자락(?)에서 마을을 만났다. 어깨폭 정도의 미로를 이리저리 걷다가 길을 잃었다. 막다른 골목 끝에 가정집이 나타나 인기척을 냈다. 쪼르르 달려온 젊은 여자애가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 오! 와! 오! 와! 대박!(한국어로 번역하면 그쯤 된다) 그러더니 자기는 슈쥬를 좋아한다며 혼자서 방방 뛰고 난리도 아니다. 휴대폰에 있던 멜론 TOP 100 히트곡 중 소녀시대나 원더걸즈, 2PM 따위를 몇 곡을 들려주니 이거 최신이냐며, 다운해달라고 성화다. 마루에 걸터 앉아 그 아이의 email을 적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최신 히트곡을 보내주마고 약속했다. 아이가 내 주위를 끌더니 거실 TV에서 흘러나오는 한국 드라마를 보여준다. 그 가족은 나도 모르는 무슨 한국 사극을 보고 있었다. 황당하군.

물 한 잔 얻어먹고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보니 길을 물으러 들어갔었지. 소득없는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미로 같은 골목을 헤메는데 아까 그 '신비로운 밀림'에서 만났던 처자를 다시 만났다. 집에 돌아가는 길이란다. 입에 손을 대며 먹는 시늉을 한다. 밥 먹으러 가는 길이군. 어떻게 해야 고아 가자로 돌아갈 수 있어요? 이쪽 길을 따라 가면 되요. 여기 아스팔트 길이요? 네. 이 길을 따라 빙 돌아가면 고아 가자 입구가 나와요. 처자에게 감사의 뜻으로 음료수를 하나 샀다. 5,000rps를 부르길래 깍아줘요 했더니 3,000rps로 깎아준다. 내가 마음에 드는걸까? 나도 마음에 든다. 유부남이라 이걸로 끝이지만. 마누라 걱정대로 난 여행지만 가면 어떻게든 여자들을 만났다. 내가 못 생기고 나이 들어 보잘 것 없건 말건, 화학작용이 없을 뿐.

싸롱을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걷다보니 Yeh Pulu라고 씌어진 표지판을 보았다. 그렇게 찾아 헤멜 땐 보이지도 않더니... 사원에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대략 150여명 가량의 사람들이 차양 밑 의자에 차분히 앉아 있다. 내부로 들어가려니 어떤 젊은이가 부드럽게 길을 막았다. 여긴 지금 장로들의 회합이 벌어지고 있어 들어갈 수 없단다. 누군가가 나서서 설명해준다. 자기들 계급은 크샤트리아인데(황급히 부연설명하길, 요새는 계급 안 따지고 정말 중요한 것은 교육이란다) 지금 2012년 이 지역 마을을 이끌 지도자를 선출하기 위한 원로회가 안에서 '민주적으로' 벌어지고 있단다.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면서 연신 비디오를 찍었다. 음료수는요? 친절하게, 저 밖에 있는 가게에서 사 먹으면 된단다. 

30분쯤 걷자 고아 가자 주차장이 나타났다. 싸롱을 그대로 가져가도 될 것 같지만, 고아 가자 입구에 다시 반납했다. 지친다. 밥도 못 먹고. 아까는 몇 차례나 길을 잃고 헤멨지만 돌다보니 의외로 우붓 중심가가 가까워져서 돌아가는 길은 15분이 채 안 걸렸다. 시내에 가까워질수록 교통체증이 심해졌다. 오토바이를 더 끌고다니자니 지친다. 3pm에 오토바이를 반납했다. 

우붓의 관광명소(?) 기념품 시장. 꽤 크다.

쉽게 찾을 수 있을꺼라 생각했는데... 먹을만한 식당을 찾아 거리를 돌아다녔지만 소득이 없다. 엊그제 헤어졌던 뉴질랜드 박사 학위 소지자를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한 눈에 봐도 할 일 없이 무작정 거리를 헤메고 있다. 지독히 고독한, 나같은 타잎의 나이 든 여행자, 어쩌면 그게 그와 별로 말을 주고 받지 않았던 이유일 지 모르겠다, 인도나 페루의 깡촌 오지 같은 곳에서 로칼 버스를 전전하며 한가하게 돌아다니다 만났더라면 함께 히히덕거리며 돌아다녔을 지도 모르겠다. 나나 그나 이런 곳에서 편하게 관광객 요금 주고 투어 버스나 타고 다니는 사람들과 별로 같이 다니고 싶지 않을 것 같으니까. 나처럼 그도 나를 슬며시 외면했다.

LP에는 도움되는 정보가 없다. 무려 10,000rps에 세금 10% 별도인 스프라이트를 마시며 휴대폰으로 주변 정보 검색. Dewi warung을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warung Lokal('로칼' 식당)에 우연히 들렀는데(메뉴판을 보고 자동으로 멈췄다) 나시 고랭이 9,000, ice tea 3,000. 지금껏 먹어본 나시고랭 중 가장 양이 많고 맛있다. 게다가 무선 인터넷이 된다. 아내와 skype로 통화했다. 식당 참 좋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하고 침대에 누워 천정에서 돌아가는 팬을 멍하니 쳐다봤다. 이상하게도 열대 지방에 오면 에어컨은 '추워서' 안 틀게 된다. 잠시 그렇게 누워 쉬다가 다시 나왔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관광안내소에 들러 내일 Kuta 행 suttle bus 표를 예약하고 시장을 하릴없이 돌아다녔다.

벌써 해가 졌다. 피곤에 지쳐 아까 식사를 한 거리에서 눈에 띄는 아무 가게나 들어가 한 시간에 60,000rps 가량 하는 전신 마사지를 받았다. 아로마 오일을 몸에 발라줬다. 마사지 자체는 생각보다 별로 였지만 피곤한 탓인지 선잠이 들었고, 몸이 나른하다. 8pm. bintang supermarket에 가 보기로 했다. 그리 멀지 않아 뵈는데 시 중심가에서 무려 25분을 걸었다. 빈탕 맥주 큰 것과 음료수 등속을 사서 완전히 껌껌한 거리를 걸어 중심가로 돌아왔다. 낮 동안 교통혼잡으로 도로가 거의 마비되다시피 하는데, 발리의 각지에서 머물다가 민속 공예품 따위를 사러 우붓에 잠시 들러 쇼핑을 마친 사람들이 저녁이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우붓 시내의 저녁에는 왕궁을 중심으로 고급 레스토랑들이 널려 있고 식당 마당에서 디너쇼가 벌어졌다. 그럴 돈도 없고, 디너쇼는 재미없어 보이고, 그래서 이렇게 시내 중심가에서 한참 떨어진 수퍼까지 힘들게 걸어가서 사온 맥주를 숙소에 돌아와 혼자 마신다. 샤워하는데 마사지 가게에서 칠한 기름이 잘 안 진다. 바보 같으니라고. 마사지샵에서 샤워를 하고 나올 껄.

맥주 마시며 내일 계획을 잡았다. 계획이랄 것도 없었다. 쿠타 해변에 도착하면 숙소 잡고 해변에 가서 논다. 그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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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mo

여행기/Indonesia 2011. 12. 27. 12:00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챙기고 체크아웃했다. 주인이 안 보여 할머니 손에 돈을 쥐어주었다. 4대가 한 집에 살고 있는 듯 한데, 일가족이 모두 친절하다. 성수기라서인지 숙소 가격이 더럽게 비싸고 구질구질한 화장실에 샤워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다른 숙소는 다 주는 아침 식사가 없지만, 복도에 놓인 공짜 차 한 잔 마시면 그런 거 다 부질없어진다.

8.15am 여행사 앞 벤치에 앉아 있으니 어제 투어를 같이 했던 스리랑카 출신 변호사와 네덜란드에서 온 남자가 왔다. 네덜란드인은 고향에서 차 팔아서 여행 경비를 마련했단다. 1.5리터 짜리 생수통만 여섯개. 하루에 두 통을 마신단다. 2년째 여행 중. 무척 비싼 차였나 봐요 하니 그게 자기 전 재산이었단다. 2년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 인도만 안 갔다. 직업이 뭐에요? 회사를 관뒀단다. 회사를 관두고 차를 팔고. 다른 여행자들은 주로 겨울 휴가로 10일 짜리 일정으로 인도네시아에 왔다. 그는 오랫만에 보는 장기여행자였는데 플라워 파워 아우라가 전혀 없었다. 세상이 변했다.

8.30am. 새침떼기 뉴질랜드 여자가 쇼핑한 짐을 차 뒷 칸에 한 가득 싣고 끙하며 올라탔다. 나는 스리랑카 남자와 8년 전에 스리랑카에 가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을 얘기했다. 그 망할 크리켓 시즌 때문에 항공권이 없어 캔디에 못 간 사연을. 당신도 크리켓 좋아하냐? 물으니 그 병신같은 크리켓에 왜들 그렇게 환장하는지 모르겠다는, 상당히 영국인스러운 답을 들었다. 그러게 말이야, 게다가 미친 스코티시들은 할 짓이 없어 골프같은 희안한 놀이를 발명했지. 옛날 옛날에 내가 만난 영국 여행자들은 대개 입이 거칠고 술을 미친듯이 쳐마셨다.

길고 지루한 버스 여행 중. 인도네시아의 주요 관광 자원중 하나가 바로 이 논(rice paddy)라니 좀 웃기지도 않아서...

미니버스를 타고 지루한 여행 시작. 인도네시아에는 정녕 고속도로가 없단 말인가? 죽어라고 1차선만 달린다. 그런데 이 미니버스, 좌석이 꽤 넓어 편하다. 에어컨은 뭐... 이젠 포기했다. 내가 탄 좌석열에 스페인에서 컴퓨터 사이언스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연구원이 한 명 탔다. 전공이 Artificial Intelligence다. 왠지 이 친구에게만큼은 별로 말을 걸고 싶지 않다. 창백한 얼굴로 LP에 코를 박고 있다. 앞 자리에는 노르웨이인 남녀가 탔는데 하루에 물을 3리터씩 마시는 네덜란드 호걸이 여자에게 수작 걸다가 진실이 밝혀졌다. 노르웨이 남자가 그녀의 연인이었다. 버스에 정적이 감돌고, 왠지 웃겼다. 스리랑카 변호사만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연신 떠들어댔다. 

맨 앞 자리에 말레이지아인이 탔다. 붙임성 좋은 중국인인데 말하는게 흡사 개똥지빠귀가 우짓는 것처럼 6성조로 영어를 했다. 무슨 말 하는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곧잘 알아 듣는 것 같다. 나? 나는 스리랑카인과 네덜란드인하고만 주로 떠들었다. 어디어디 갔는데 어디가 좋았다느니 하는 평범한 여행 얘기들... 영어가 잘 안되니 정말 갑갑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말벙어리가 된 걸까? 하긴, 한국에서도 업무 관련 얘기 외에는 말벙어리나 다름없었다.

두어번 차가 설 때마다 서양인들끼리 어울려 놀았다. 나하고 스페인 친구는 겉돌았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노르웨이 여자와 식사 중 인도네시아 음식 애기를 했다. 난 점심으로 나시 참푸르를 먹었다. 여러 가지 반찬이 밥과 함께 나오는 부페 같은 음식이다. 저녁은 먹지 않았다. 프로볼링고까지 지루한 여정. 간간히 GPSr을 꺼내 위치를 확인했다. 

8pm 사무실에 차량이 서고 내일 일정을 작전 회의 하듯이 설명한다. 물론 작전 지도도 있었다. 필요한 물품을 사라고 근처 수퍼에 차를 세웠다. 오렌지 쥬스와 물만 샀다. 다시 차를 갈아 타고 9pm 무렵에 브로모 산 중턱의 어느 호텔에 섰다. 날씨가 쌀쌀하다. 기온은 6도. 호텔의 불빛을 빼고 사위가 잠잠하고 칠흑같이 어둡다. 안개처럼 축축한 공기가 볼을 핥았다.

무작위 선정으로 중국계 말레이인과 같은 방에 배정되었다. 말레이 아저씨는 투어 예약할 당시의 호텔과 다르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난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인도네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호텔 프론트(말이 호텔이지 그냥 게스트 하우스)에서 수건을 두 장 얻어와 내게 한 장 나눠주고 수완을 발휘해 온수 샤워가 나오게 했다. 난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휴대폰이 갤럭시S인데 플러그가 맞지 않아 충전을 할 수 없단다. 내 여행용 멀티 어댑터를 빌려줬다. 자기가 사온 맥주를 나눠 마시잔다. 사양했다. 그는 맥주를 마시고 나는 멍하니 벽에 기대 앉아 얘기했다. 옛날 말레이지아 여행 하던 때가 생각났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회사를 관두고, 생명보험을 해약하고 생긴 돈으로 아무 생각없이 동남아시아로 갔다. 말레이 아저씨와 말레이 음식과 인도네시아 음식의 차이점에 관한 얘기를 했다. 이름은 같지만 요리 방식이 다르다. 그는 요리사였다. 아 맞다, 당신들 요리엔 항상 코코넛 밀크가 들어가지요? 그렇단다. 말레이 사람들 싱가폴에 많이 가지요? 그렇단다. 싱가폴 여자를 둘 사귀었다. 그중 한 명과 보트키에서 죽어라 술을 마셨고 포옹을 하고 입을 맞추고 왠지 부아가 치밀어 나 혼자 숙소로 돌아가다가 길을 잃고 밤거리를 헤멨다. 간신히 숙소를 찾아 맛이 간 채로 문을 두들겼다. 말레이지아에서 처음으로 마스지드를 방문했다. 거기 관리자가 내게 손을 씻고 발을 씻고 들어오라고 가르쳐줬다. 반질반질한 회교 사원엔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한국에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대단히 지쳐버린 상태였지만 그래도 여행을 했다. 말레이지아 음식 중에 사태가 가장 맛있었어요. 한국에 와 본 적 있어요? 싱가폴 여자가 한국에 찾아왔다. 일주일쯤 함께 지냈다. 그 당시 나는 여러 외국인 여자를 사귀었다. 중국계 말레이 아저씨 앞에서 이 말은 차마 안 나왔다; 당신들, 중국인 역차별로 말레이인들의 미움을 받지요? 말라카에서 베드웜에 당해 그때 인도네시아 행 배를 타지 못했다. 뜨거운 햇살 아래서 마치 에이즈 환자처럼 무거운 걸음으로 병원을 찾아 말라카 시내를 돌아다녔다. 내 팔다리에 돋은 흉칙한 붉은 반점 때문에 사람들이 피했다. 난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랬었구나... 인도네시아에 오게 된 이유가. 심층 무의식에 남은 미련 말이다. 그럼 언젠가는 내가 자전거로 큐슈와 오키나와를 돌아다니겠네? 무시무시한 심층 무의식에 남은 미련, 또는 악착같이 찌질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옛날 때문에? 남들 말로는 오래된 기억은 색이 바래지며 미화된다는데... 나는 마치 뱃사람처럼 마카오에서 도박을 하고 어떤 가게의 쇼윈도에 진열된 여자 중 하나를 돈 주고 사서 잤다. 그런데 그 세부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이국의 거리에서 마치 뱃사람처럼 혼자 술 먹고 취해서 골목을 전전했다. 그래서 이 망할 블로그질을 계속 하는 것이다. 찌질한 과거를 기록하려고. 하다못해 이 여행기조차 잊지 않기 위해 매일 밤 수첩에 끄적여 놓았다. 

이불 속에 목만 내놓고 한가하게 얘기하다가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말레이 아저씨가 맥주를 다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돌아와 불을 껐나 보다. 

전등이 번쩍 켜져 눈을 떠 보니 3.30am. 세수는 생략하고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숙소 로비 앞의 마당으로 나갔다.

안개 속에서 유령처럼 꾸역꾸역 사람들이 나타났다. 멍하니 기다렸다. 그렇게 춥지는 않았지만 공기가 축축하더니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짚차를 타고 떠났다. 

말레이 아저씨와 나는 뒤늦게 네덜란드인 부부가 타고 온 짚차에 합승했다. 짚차의 헤드라이트로 낙타털 같은 빗줄기가 희끗희끗 어스름에 춤을 췄다. 다른 짚차의 후미등을 따라가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짚차의 행렬이 이어졌다. 잠이 덜 깬 승객들은 말없이 의자에 기댔다. 경사로가 끝나고 차가 멈췄다. 내려보니 인파가 꾸역꾸역 비포장 도로를 올라간다.

기사가 안되는 영어로 유 고, 워크, 아이 웨이트 등등 어렵사리 Viewpoint#1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부부는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는 지불을 했으니 끝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우기며 내릴 생각을 안 한다. 이 부부는 어젯밤 브리핑 때 도대체 뭘 듣고 있었던 거야? 6인승 짚차의 뒤에 앉아 있던 나와 말레이 아저씨는 앞 좌석에서 내려 의자를 접어줘야 차에서 나갈 수 있다. 네덜란드 부부에게, 다른 사람들도 걸어가니 내리자고 말했다. 말레이 아저씨와 내가 내린 다음에도 납득이 안 되는지 기사를 다그치다가 지나가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는다. 짚차론 이 경사의 비포장 도로를 오를 수 없다. 그들을 내버려 둔 채 혼자 올라가기 시작했다.

비가 오다 말다 했다. 길은 질척질척하고 어둡다. 삐끼들이 말을 데리고 다가와 말을 타겠냐고 물었다. 고개를 저었다. 헤드 라이트를 배낭에 두고 왔다. 안 하길 잘했다. 이 어둠 속에서 강렬한 LED 불빛은 오히려 민폐가 될 것 같았다. 

꾸역꾸역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지점까지 올라왔다. 커피와 따뜻한 음료를 파는 가판대가 몇 보이고 털옷으로 중무장한 인도네시아인들이 서성이며 깔깔거렸다. 외국 여행자 반, 현지인 반 정도? 서서히 날이 밝아 오고 있다. 하지만 시야가 막막하다. 절벽 끄트머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솜털같은 안개 뿐... 갑자기 강한 돌풍이 훅 불어 뒤로 떠밀렸다. 쎈데? 잘못하면 추락하겠군. 거리를 두었다. 

gunning bromo(브로모 화산)을 보기 위해 소위 view point #1 지점에 올라왔다. 아직 날이 밝질 않아 아무 것도 안 보인다.

왠걸. 빗발이 잦아들질 않는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 아래 사람들이 펭귄떼처럼 뭉쳐 웅성거렸다. 그 틈에 끼어 내키지 않는 채취와 비 냄새를 맡기보다는... 빗속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산으로 난 길을 보고 꾸역꾸역 올라갔다. 영국인 청년 친구들이(아니면 aussy겠지?) 서로를 향해 정답게 욕설을 주고 받다가 정상 부근에서 막막한 안개와 비바람에 이구동성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oh shit! fuck! 고개를 돌렸다.

인도네시아 아줌마와 아저씨가 나란히 서서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윽고 흙바닥에 깔아놓은 러그에 무릅을 꿇었다. 기도한다. 나도 기도하고 싶다.

끝까지 올라갔지만 비바람 외엔 아무 것도 볼 것이 없었다. 다시 내려왔다. 말레이 아저씨와 네덜란드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날이 완전히 밝았다. 운무에 숨은 브로모 화산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간혹 돌풍이 불었고 안개가 바람에 이리저리 흩어졌다. 안개가 잠깐 동안 사라지면 저 아래 쪽 땅바닥이 살짝 보이곤 했다. 

안개가 강한 바람에 휩쓸려 사라진 틈에 잠시 나타난 칼데라

그렇게 30분쯤 기다렸지만 안개는 가시지 않았다. 내려 오는 길에 경치가 좋은 곳이면 말레이 아저씨의 갤럭시S로 그의 인증샷을 찍어줬다. 나더러 찍겠냐고 물었다. 히죽히죽 웃으며 안 찍겠다고 말했다. 어두울 땐 잘 몰랐지만 내려오는 길이 온통 비에 뭉개진 말똥 투성이였다. 차라리 말을 탔더라면 찝찝하지나 않지. 아! 그래서 말을 타는 거구나...

짚차의 다음 행선지는 브로모 화산 아래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는단다. 더치 부부가 버럭 화를 내며 자기들은 입장료가 포함된 투어를 신청했단다. 그야 우리도 마찬가지고. 기사의 부탁으로 표를 꺼냈지만 정작 입구에서는 표 검사를 하지 않고 차를 통과시켰다. 더치 부부가 머쓱해졌는지 자기들은 인도네시아인들의 거짓말과 삐끼질, 그리고 외국인 관광객 대상의 이중 요금에 분노가 치밀고 피곤해 죽겠단다. 이해가 간다. 마누라가 워낙 깐깐해서 당한 적은 없을 것 같다. 짚차에서 그렇게 욕하던 기사를 끼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낄낄거린다. 활달한 부부다.

마치 달 표면 같은 칼데라에 발을 내렸다. 쓱쓱 검은 토사에 발을 비볐다. 입자가 굵지만 모래보다는 가늘었다. 빗물을 머금어 진흙창처럼 미끌거릴 줄 알았는데 접지가 썩 괜찮다. 

칼데라는 넓고 시원했다.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그리운 이질감을 느꼈다. 그리운 이질감? 말레이 아저씨와 같이 걷다가 우리는 서로 할 말도 없고 각자의 감상에 젖어 차차 거리가 벌어졌다. 칼데라 한 복판에 사원이 있다. 저번 화산 폭발 때 여기 있던 사람들은 무사했을까? 그나저나 활화산 옆에 사원을 차려놓다니 기개가 대단하다.

칼데라로 내려와 브로모 화산으로 가는 길. 브로모 화산은 수 차례 폭발로 산의 형체가 거의 사라지고 분화구 밑둥만 남은 상태

수많은 사람들이 걷거나 말을 타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폭발 후 corn이 날아간 bromo 화산 남쪽으로 향했다. 야트막한 야산 같아뵈던 브로모 화산의 밑둥은 다가갈수록 높아졌고 구릉을 따라 단단한 검은 땅을 밟고 차근차근 오르다가 마지막에 가파른 계단을 접했다. 좁은 계단은 둘로 나뉘어 한쪽은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꾸역꾸역 오르고 상대적으로 한산한 내리막길로는 사람들이 조심스레 걸음을 옮긴다.

저 멀리 계단까지는 말을 타고 갈 수도 있다. 갈길이 별로 안 힘들어 설렁설렁 걸어갔다. 아참 이거 활화산이다. 여차하면 터진다. 2011년 분출 사진: http://photoblog.msnbc.msn.com/_news/2011/03/11/6244672-indonesias-mount-bromo-continues-to-erupt


이렇게 보니 흡사 피난민 행렬 같은데? 화산은 이걸로 세 번 째인데 언제나 비가 내릴 때 방문하게 되는 셈.

내 걸음으로 한 150m 되는 이 정도 야산은 성큼성큼 오를만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사람들로 앞이 꽉막힌 계단을 지루하게 올라 정상에 섰다. 난간이 없다. 급경사를 이룬 분화구 안쪽과 역시 급사면을 이룬 바깥쪽 사이에 폭 1m 가량의 길을 두고 사람들이 교차했다. 여차하면 떨어질 것처럼 위태위태하지만 사람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는다. 분화구 아가리는 여전한 비바람과 안개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기 올라오기 전까지만 해도 분화구 가장자리를 한 바퀴 돌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간헐적으로 불어오는 돌풍과, 갈수록 좁아지는 길 때문에 엄두가 안 났다. 십 분쯤 멍하니 분화구를 노려보고 있는데 누가 툭 친다. 말레이 아저씨다. 걷다가 지쳐 계단까지 말을 타고 왔단다. 뒤를 돌아 남쪽을 바라봤다. 짚차가 일렬로 죽 서 있는 저기 주차장까지 2km는 되어 보였다. 말레이 아저씨의 전용 찍사가 되어 그의 사진을 이리저리 찍어주었다. 앉아서 찰칵, 서서 찰칵, 기대서 찰칵, 현지인과 어깨동무하며 찰칵.

폭 1m 미만의...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길. 엄청 으시시한게, 바람도 쌩쌩 분다.

칼데라의 저 굴곡은 화산탄이 파헤친 땅으로 빗방울이 시내를 이뤄 사면을 타고 내려가면서 물길이 만든 흔적

안개가 다 걷히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분화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탁한 색깔의, 미동도 않는 물이 고여 있다. 으시시. 누군가 칼데라에서부터 걸어 남서쪽 사면을 꾸역꾸역 올라갔다. 워낙 멀어 흰점과 노란점으로만 보였다. 애당초 사람들로 붐비는 돗대기 시장 같은 계단을 오르지 않고 저렇게 오르는 편이 나았을 껄 그랬다. 

분화구가 아까보다 잘 보인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외국인(백인)만 보면 사진 같이 찍자고 우루루 몰려들곤 했다. 뭐 나한테는 사진 같이 찍자는 인도네시아인이 하나도 없었다. 저 검은 머리의 유럽계 외국인도 별로 외국인스럽지 않아 나와 같은 신세. 여기서 한 삼십분 비바람을 맞으며 혼자 온 저런 외국인들 기념사진을 찍어줬다.

어느 소외받고 용감해진 검은 머리 외국인이 기어코 모험을 하러 간다. 그가 리오의 예수같은 십자가 자세를 취하자 인도네시아인들이 환호성을 울리며 그의 사진을 찍었다. 나도 해볼까?

30분쯤 서서 사방을 둘러보다가 시시해져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칼데라 여기 저기 빗물이 내를 이루며 흐르다가 깊이 파인 땅 아래로 내려갔다. 사람이 없어 아늑하고 좋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던 누군가 소리쳐서 내 시선을 끌었다. 더 이상 갈 수 없단다. 무너지는 흙더미를 기어 올라가니 멀리 떨어진 주차장까지 걸었다. 먼저 온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처음에 같이 차를 타고 이곳에 왔던 스리랑카 변호사와 떡대 좋은 더치 청년은 우리와 같은 투어를 신청하지 않고 새벽 세 시에 일어나 둘이 함께 걸어서 뷰포인트에 올라갔다 내려왔단다. 세 시간쯤? 그들은 비바람과 안개에 허탕치고 내려와서 브로모 화산에 갈 생각은 접었고 더치 청년은 하루 더 묵다가 가기로 했단다. 수염을 밀어버리니 말끔한게 어제 저녁에 인도네시아에 왔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밭에 키우는 작물은 무려, 파! 파가 고냉지 식물이었구나!

함께 투어를 온 사람들과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더치 청년이 노트북을 꺼내 보여주며 자기가 이걸 사기 당해 사게 된 사연을 들려줬다. 삐끼를 통해 여행 중에 노트북을 구입한 사람은 처음 봤다. 다들 말 없이 이런 바보는 처음 본다는 깊은 이해의 눈초리로 그의 얘기를 경청했다.

더치 청년은 브로모에 하루 더 묵기로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 미니버스를 타고 떠났다. 말레이 아저씨와 나는 어제처럼 마지막 차를 탔다. 그들의 장례를 보았고, 산비탈에 이어진 밭과 논을 보았고 숲을 태워 연기가 자욱한 길을 통과했다. 창 밖으로 한국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어떤 숙소에서 교통편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곳곳에서 집을 짓는다. 기초라고 할만한 것 없이 맨 땅을 대충 다져 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한편에서 삽과 시멘트로 모르타르를 만들었다. 긴 비탈을 내려가는 동안 두어장 사진을 찍다 말았다. 

브로모 화산 투어를 끝마치고 프로볼링고로 돌아가는 길. 산등성이, 사면의 비교적 심한 경사에서 작물을 재배. 아마, 파?

길가의 어떤 허름한 집 앞에 미니버스가 섰다. 이틀 동안 함께 투어를 했던 사람들과 여러 명의 외국인 여행자들이 벤치에 앉아 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져 있는 여행자들 사이로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망고스틴 접시를 내 놓았다. 스리랑카 변호사가 그중 하나를 까서 내게 건네 주었다. 먹어보니 짓무르고 썩은 내가 나서 마당에 버렸다. 망고스틴 접시는 금새 비었다. 주인이 우리 곁에 와서 먹었으면 돈을 내야 한다고, 돈을 내라고 말했다. 손님에 대한 호의로 생각하고 무시했다. 

수라바야로 가는 사람들과 헤어질 시간이다. 대만 아저씨는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내 드러운 인상 때문인지 가끔 무심결에 Sir라고 경칭을 붙이던 스리랑카 변호사와도 헤어질 시간이다. 내가 스리랑카에 꼭 가게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당신 나라에서 한 군데만 가야 한다면 어디를 추천하겠어요? Sigiriya, Rock Palace가 있는 곳, 그의 주장대로라면 스리랑카의 마추픽추. 휴대폰에 발음나는 대로 적었다. 헤어지는 사람들에게 행운을 빌었다; godspeed fellas. 

안내인이 나타나 사람들을 그러모아 커다란 관광버스로 옮겨 태웠다. 족자에서 봤던 여행자들을 다시 만났다. 그에 더해 열댓 명의 새로운 사람들이 차에 올랐다. 내 앞과 옆에는 이탈리아 여자들이 탔는데 무척 시끄러웠다. 매번 이탈리아 사람들을 볼 때마다 성정이 흡사 한국인 같다고 여겼다. 자리가 많이 남아 옆에 앉았던 이탈리아 아저씨는 뒤로 가고 나도 좀 편하게 앉을 수 있었다.

비가 오다말다 했다. 해변에 화력 발전소가 있었다. 길이 좁아 차가 서행을 하는 동안 어떤 원숭이가 철조망에 기어올라 바다를 뚜러지게 쳐다보는 모습을 보았다. 딸애는 어린이집에서 짐승은 생각을 하지 못 한다고 배웠단다. 나는 딸애에게 짐승도 조금이나마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멍멍이가 아무나 보고 꼬리를 흔들지는 않잖아? 수조의 물고기는 먹이가 나오는 아침이면 수면에서 서성이잖아? 의식과 인식의 기원에 관해 여러 종류의 책을 읽었지만 명쾌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따라서 나는 원숭이가 바다를 보는 동안 그 짐승의 두뇌에서 벌어지는 일을 인간마냥 이입할 수 없다. 다만 원숭이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아득하고 광활한 바다가 주는 평화로운 감정과 그 너머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을 느꼈을 것이라고 어림짐작할 뿐이다. 제한된 지식과 경험을 지녔던 원시 인류와 마찬가지로 원숭이는 이 놀랍고 마술적인 세계에 두려움과 경이, 호기심이 뒤섞인 감정과 한없는 무기력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무기력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살다보면 여러 가지로 엿같은 경우가 생긴다. 9.30am에 출발한 버스는 5pm 무렵이 되어서야 Bali행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가 통째로 여객선에 들어갔다. 비가 올 날씨다. 찬 바닷바람이 불었다. 웃통을 벗은 젊은이 몇 명이 여행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의를 끌었다.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그것을 바다로 던지는 시늉을 하고, 헤엄치는 시늉을 한다. 당신이 바다에 동전을 던지면 찾아 오겠다는 것이다. 구걸이잖아?

다정한 게이로 보이는 이탈리안 남자 둘이(사실 둘씩 무리지어 다니는 이탈리아 남자들은 다들 게이 같아 보인다) 낄낄거리며 동전을 던졌다. 반짝이는 동전을 건져왔지만 그들은 인도네시아 돈에는 관심이 없었다. 완 유로! 완 유로! 1 euro는 12000rps. 12000rps면 미 고랭 한 접시와 박소 한 그릇, 그리고 쌀과자 두세 개를 살 수 있는 돈이다. 83개의 1 euro 동전을 주으면 족자행 미니버스에서 만났던 하루 16시간씩 일하는 요리사의 월급과 같아진다. 하루에 얼마나 많은 동전을 모을까? 이 배에서만 여러 개(6~8개 가량?)의 동전과 지폐가 바다로 날아갔다. 인도네시아는 지난 몇 년과 달리 내년 경제성장률 목표치를 낮췄다. 성장 피로가 찾아왔단 뜻일게다.

이들에 관해 예전에 TV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 때 볼 때는 애들이었는데, 어느새 자라 이렇게 늠름한 거지들이 된 걸까?

어? 한글? 바닷바람이 차가워 선실로 들어가려는데 문 옆 탁자에 웅크리듯 앉아 LP 위에 종이를 얹어 두고 메모하는 사람이 있다. 한국인이세요? 그렇단다. 배가 출발할 무렵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모 외국계 자동차 회사에서 근무한다는 그 친구는 자카르타에서 만난 현지인을 따라 족자행 버스에서 중간에 내려 보르부두르 유적지 인근의 현지인 집에서 하루를 머물렀고, 하루 밖에 안 머무른 것을 후회했다. 그 집 아줌마가 떠날 때 먹으라며 여러 가지 과자를 바리바리 챙겨주었다. 우리는 얘기를 나누면서 그 과자를 나눠 먹었다. 그는 브로모 화산에 이틀을 묵었지만 일출을 보지 못했단다. 대신 오토바이를 타고 광활한 칼데라를, 칼데라의 북쪽을 둘러 보았단다. 나도 그럴껄. 


그런데 발리의 어디로 가요? Tulamben이요.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다 -- 하긴 내가 인도네시아에 관해 아는게 뭐가 있겠나. 툴람벤에는 2차 대전 당시 거대한 화물선이 바다에 침몰했단다. shipwreck은 다이버들이 환장하는 장소다. 그럼 혹시 다이빙 하러요? 그는 수십 차례 다이빙한 경력이 있었다. 툴람벤에는 다이버들 모으려고 작달만한 배를 일부러 침몰시키는 곳이 아니라 정말로 거대한 좌초선이 널부러져 있단다. 그러더니 같이 가잔다. 마음이 흔들렸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데요? 난 Ubud에 가요. 거긴 관광객들이 가는 곳 아니에요? 맞아요. 말은 안했지만 이것도 말해줄 뻔 했다; eat, pray, love란 영화에서 쥴리아 로버츠가 짱박혔던 곳이죠. 망할 뉴욕 된장녀가 돈을 펑펑 써가며 채식과 요가로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날 자전거 사고로 왕자님을 만난 행운의 장소죠. 난 왜 거기 가는 걸까? 그야 뭐... 우붓에서 이틀 편히 묵고 Kuta 해변에서 빈둥거리며 하루 편히 묵고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차 타고 얼마 안 되는 거리를 무려 18시간에 걸쳐 이동하는게 지겨워 졌다. 

배가 항구에 닿았다. 조용한 Lovina 해변에서 빈둥거리며 돌고래 구경하러 가는 여행자들은 차에서 내렸다. 족자에서 본 캐나다인 청년과, 함께 브로모 투어를 했던 스페인 컴퓨터 공학자와 눈인사를 주고 받았다. 그는 내게 로비나 비치가 사람들이 돌고래 구경하러 가는 곳이라고 얘기해줬다(아, 나도 가이드북이나 제대로 읽어볼껄). 그들을 안내원이 나눠준 갈아탈 버스표를 들고 비를 맞으며 어두운 길 건너편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버스가 출발하자 비가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속에서 버스가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7시쯤이면 도착한다더니, 또 연착인가? 

살다보면 여러 가지로 엿같은 경우가 생긴다. 6pm에 항구를 떠난 버스는 11.20pm 무렵이 되어서야 Denpasar 북부 터미널 Udung에 도착했다. 얼마 남지 않았던 여행자들은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빗속에서 뿔뿔이 흩어졌다. 문제는 내가 여기서 Ubud행 미니버스를 잡을 수 있는가다. 아까 배에서 만난 한국인이 서성이는게 눈에 띄었다. 믿을 수 없게도 모든 지역으로 가는 미니버스가 끊겼다. 혹시나 싶어 터미널에 있는 경찰서에 들러 물어보니 끊겼단다. 글쎄다. 툴라벤으로 가는 한국인 친구의 택시를 잡아주려고 동분서주했다. 200만루피아란 터무니없는 가격이 나왔지만(220$) 더 떨어지지 않는다. 그가 그 가격에 가겠다고 오케이 했다. 이놈들이 담합을 했군, 경찰까지 돕는 것 같은데? 날더러 같이 난파선 다이빙하러 가자고 재차 설득했지만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를 보내고 이제 내가 택시를 잡아야 할 차례. 자정이 넘었다. bromo 투어때 불평을 늘어놓던 벨지움 부부가 택시 협상이 잘 안되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들도 우붓에 간단다. 택시 쉐어를 하기로 하고 협상에 들어갔다. 나이 지긋한 미니버스 운전수가 백만 루피아를 불렀다. 허거덕!! 벨지움 부부가 지친 나머지 수긍한다. 날더러 같이 가겠냐고 묻는다. 두당 33만 루피아(36$)인데!!? 망설이니까 그들이 같이 안 갈꺼면 자기들끼리 가겠단다. 미니버스에 짐을 내려 놓았랐다. 운전수가 다른 여행자를 찾아 보겠다며 차를 떠나 주변을 돌아다녔다. 말리지 않았다. 한두 명 더 태우면 단가가 싸지니까. 그 동안 빗속에서 담배를 피우며 지갑을 뒤져 보았다. 수중에 있는 돈은 260,000rps. 택시비가 모자란다. 으쓱. 우붓에 가면 어떻게 되겠지.

남편은 왠지 풀이 죽어 아무 말도 안했다. 나와 그의 아내가 이런 저런 여행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들 부부는 일 년에 두 번 휴가를 받아 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는데 자기들이 가본 곳 중 인도네시아는 이집트 만큼 최악이란다. 인도는요? 인도엔 아직 안 가 봤단다. 인도 가면 삐끼질의 경이로운 신세계가 열리는데... 남편은 회계사고 아내는 교사다. 유럽은 비싸고 재미가 없어서 안 돌아다닌단다. 그래도 전혀 이질적이라 말이 안 통할 것 같은 이 부부와 공통점 하나는 있는 셈이군.

지금까지 인도네시아에서 차를 탄 것 중 가장 시원하게 달린다. 시속 100kmh는 족히 나올 것 같은데 운전사 할아범 만큼 나이를 먹은 것 같은 미니버스의 미터기가 맛이 가서 속도를 알 수 없다. 얼마나 시원하게(서늘하게) 달리냐면 빗길에 차가 미끄러지는게 눈에 보였다. 다행히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는 하나도 없었다. 차 안에 침묵이 흘렀고 놓아 둔 우리 세 여행자의 배낭이 이리 자빠졌다 저리 자빠졌다 바닥을 돌아다녔다. 남편은 그것을 주섬주섬 챙겼다. 가는 길 모퉁이에 편의점과 ATM이 보여 운전사의 어깨를 두들겨 차를 세웠다. ATM에 citi 카드를 넣어 돈을 찾으려 했으나 잔액 부족으로 실패. 깜빡 잊고 월급 통장에서 씨티은행 통장으로 이체를 안 시켜놓은게 기억났다. 눈물을 머금고 수수료가 비싼 비자카드로 1,500,000rps를 찾았다. 

우붓에 도착한 시각은 12.55am. Central Ubud은 매우 한산했다. 밤 늦게 도착하니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터번을 두른 흑인이 우붓에 온 것을 환영한다며 숙소를 찾고 있냐고 물었다. 벨지움 부부는 삐끼 노이로제 때문인지 행운을 빈다며 자기들은 자기들 끼리 숙소를 잡겠다고 걸어가 버렸다. 알아본 숙소가 있는 모양. 나? 난 아무 생각없었다. 삐끼에게 숙소 가격이 얼마냐고 물어보았다. 150,000에 double, a/c, include bath, include breakfast, 방 값이 비싸요. 그는 손가락으로 벨지움 부부를 가르키며 저들이 간 방향에 싼 숙소가 몇 개 있는데 100,000 정도면 방을 잡을 수 있을 꺼라고 말한다. 그들을 따라가겠냔다. 좋아요 일단 당신이 말한 방을 보러 갑시다. 

그가 나를 안내했다. 문을 쿵쿵 두들기자 인터폰으로 나이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플래시가 이리저리 비추더니 문을 빼꼼히 연다. 아저씨가 어둠 속에서 주섬주섬 키를 챙기더니 1층 방에 안내해 줬다. 여태까지 본 숙소 중 가장 럭셔리하다. 5만 아끼려고(약 6$) 이 새벽에 가이드북 펴 들고 문 두들기며 돌아다니느니 하루만 여기서 묵자. 내일 다시 숙소를 잡으면 되지. 키를 받고 짐을 내려 놓았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부터 비 맞으며 화산을 싸돌아다니고 16시간 동안 잠 한 숨 못 자고 돌아다녔더니 파김치가 되었다. 씻기 귀찮아 불 끄고 바로 누워 곯아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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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budur

여행기/Indonesia 2011. 12. 26. 12:00
늦잠을 잤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깼다. 어둑어둑하다. 숙소로 여행사 직원이 나를 데리러 찾아왔다. ISTI 게스트하우스에는 방 번호가 없다. 그래서 여행사 직원이 주인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방마다 문을 두드렸나 보다. 여러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는 그 방문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 보니 투어 시작 시간인 5am. 어지간히 피곤했나 보다. 서둘러 가방을 챙겨 직원을 따라 여행사 앞으로 뛰어갔다(여행지에 있을 때면 불이 나도 곧 바로 뛰쳐나갈 수 있게 짐을 미리 정리해 두고 자는게 버릇). 이미 차량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 때문에 늦어진 것 같아 낯 뜨거워서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더 잤다.

Borbudur 유적지에 도착하니 6am. 투어 비용에 표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외국인 전용 창구에서 입장권을 따로 사지 않아도 된다. 내국인과 외국인 사이 입장권 가격 차이가 상당했다. 내외국인 차등 입장료로 외국인 뜯어먹고 입 닦는 여러 나라의 관광지야 한두 번 방문한 것도 아니니 식상한 성토는 접어두고, 특이하게도 외국인 전용 매표소에서 커피와 차를 무료로 마실 수 있다. 500ml 짜리 물병도 나눠줬다. 왠지 싸가지가 있어 보인다.

8.20am까지 자유 관람하고 음식점이 있는 이 자리로 돌아오란다. 반바지라 나눠준 싸롱을 입고 매표소를 지났다. 화장실에 들러 세수하며 눈꼽을 떼었다. 4am에 출발하는 Borbudur sunrise tour를 신청하지 않아 기쁘다; 해돋이 투어는 더 많은 투어 비용을 치루고 해가 뜨기 전에 유적지에 도착해 유적지에서 해돋는 모습을 관람하는 고생을 자진하는 것이라 취향에 안 맞았다.

앙코르와트 유적지를 볼 때처럼 두근거리지 않았다. 바간에서 마차 타고 투어할 때처럼 햇빛이 쏟아지는 광활한 평원에 불쑥불쑥 튀어나온 스투파를 볼 때처럼 신비스럽고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계단을 하나둘 오르며 서서히 유적이 나타났다.  마치 경주의 불국사처럼 자연스럽게 유적지가 나타났다. 시야각 120도를 살짝 넘어서는 길이와, 굳이 목이 뻐근해져라 고개를 들지 않아도 상하가 한 눈에 들어오는 소박한 유적지, 족자를 강타한 지진에도 인도네시아의 자존심처럼 무너지지 않은 곳. 언덕 위의 사원은 근처의 산등성이에 아직 고여 있는 아침 안개 속에서 차분히 아침햇살을 받았다. 

일출투어를 신청할 껄 그랬다.

5층으로 된 사원을 뺑뺑이 돌아 정상까지 가면 약 2.5km란다. 두 바퀴 돌았다. 

Borbudur 입구. 투어는 4.00am부터 시작. 2시간 동안 투어 버스를 타고 달려왔다. 지금 시각은 6.10am. sunrise tour는 이보다 비싸고 3.00am에 시작.

꿈에 그리던 보르부두르 사원이 보이기 시작.

아무 부조가 없는 기단부에 도착. 아쉽게도 유적 복구는 박정희 스타일로 한 듯.

회랑. 인도네시아의 높은 습도에 부조들 대개가 많이 손상되었다.

부조가 비교적 덜 손상된 곳은 해가 드는 쪽. 해가 들지 않거나 회랑의 안쪽은 높은 습기와, 돌 속으로 침투한 이끼의 침략으로부터 무사할 수 없었다.

곳곳에 난간에 올라가지 말라고 적어놨는데, 유적 보호 보다는 인명상해 때문인 듯. 일부 난간의 모르타르는 부식이 심각해 잘못 발을 디디면 바로 추락할 듯.

보르부두루의 최상단 meru(불교에서 말하는 수미산을 상징). 사원의 상단 꼭대기는 천계에 해당하는데, 불교에서는 이런 형태로 meru를 stupa로 형상화한 듯... 아마도... bagan 유적지에서도 이것과 동일한 형태의 크고 작은 스투파를 무수히 볼 수 있었다.

저기 30여km 떨어진 곳에 보이는 위협적인 gunung merapi (메라피 화산). 메라피 화산은 활화산이라 입산이 통제되고 있으며 아직도 분화구에서 김이 모락모락... 여차하면 불을 뿜는 화산 인근 30km도 안된 곳에 사람들이 잘들 살고 있다.

부조의 표현 방식이 조금씩 차이가 났다. 아마도 아티스트가 수십 명 동원되었을테고, 그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발휘하도록 허락되지 않았겠지만 어떤 것은 멋있고 어떤 것은 그저그렇고...

차라리 이끼를 긁어내지 않던가, 복구를 하려면 많은 시간 공 들여서 하던가 했으면 좋았을 껄... 아쉽다.

보르부두르 투어에서 관람에 허용된 시간은 2시간. 2시간에 이걸 어떻게 자세히 볼 수 있겠냐마는... 한 바퀴 더 돌며 이 멋진 부조를 다시 찍었다. 아쉽다. 관광버스로 돌아가야 할 시간.

시간이 얼마 없어 같이 온 일행이 대기하고 있는 집합 장소로 돌아왔다. 투어에 아침 식사가 포함된 사람들은 토스트와 간단한 과일로 된 아침식사를 먹고 나는 어젯밤 수퍼에서 사온 빵과 오렌지 쥬스를 먹고 마시며 얘기에 끼어 들었다. 

12인승 도요타 승합차에 탄 사람들 중 넷은 스웨덴에서 온 젋은 친구들로 영어를 거의 못 하고 마치 한국인들처럼 뭉쳐서 우르르 몰려다녔다. 한 명은 뉴질랜드 출신 생물학자인데 박사 학위는 environmental science(환경과학?)으로 받았다. 여행자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새침한 편인데 이 여자는 투어 후에도 발리까지 가는 길 내내 나와 줄기차게 다시 만났다(나처럼 여행자와 얘기하는 걸 별로 즐기는 타잎은 아니다). 차에서 내 왼편에 앉았던 프랑스에서 온 늙은 여행자는 쿠알라룸푸르에서 시작해 보르네오와 칼리만탄을 거쳐 자바섬에 다다랐다. 족자에서 장기체류할 생각이고 발리섬을 거쳐 파푸아 섬 끝까지 갈 생각이란다. 내 오른편에 앉았던 친구는 싱가폴 출신 어머니와 캐나다 출신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캐나다인이다. 미국식 영어를 사용하며 마초티를 많이 내는 젊은 친구다, 다른 친구는 말레이지아의 쿠알라캉사르(?)에서 온 대학생 배낭여행자인데 영국에 사는 스리랑카 출신의 변호사와 투어 내내 붙어 다녔다. 이름은 하나도 기억 안 난다.

밥 먹는 중에 캐나다 젊은이가 앙코르와트와 보르부두르를 비교하며 미주알고주알 보르부두르가 후졌다고 평했다. 뭔가 좀 길게 설명해 주려고 했는데 왠걸 몇 년 동안 영어를 사용하지 않았더니 혓바닥이 굳었는지 말이 잘 안 나와 무척 당황했다. 전에는 대체 어떻게 말했지? 영어로 생각하고 영어로 말했다. 그런데 지금 말할 때는 생각은 모국어로 하고 말은 영어로 하니 머리가 희안하게 뒤죽박죽이 되더라. 영어로 말하느라 진땀을 흘렸지만 참을성 있게 들어주더라. 그에게 인도에 반드시 가보라고 말했다. 인도에 가면 끝내주는 자연경관과 당신 좋아하는 사원들이, 엄청난 사원들이 소똥 범벅인 채로 흔하게 널려있다고...

9am 쁘람바난 사원으로 이동하는 중 작은 힌두 사원과 불교 사원에 차가 잠시 멈췄다. 그때쯤 비슷한 시각에 투어를 시작한 다른 차량들이 한 자리에서 만났다. 여행자들은 서로의 여행 얘기로 꽃을 피웠고 난 재미가 없어 보리수 그늘에 앉아 쿠알라캉사르 출신 말레이인과 그의 캐논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쳐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한창 복구중인 힌두 사원과 거대한 보리수


쁘람바난 사원에 가는 길 내내 왼쪽, 오른쪽의 프랑스, 캐나다인은 연신 사진을 찍고 이죽이며 그걸 굳이 보여주며 나와 얘기를 나눴다. 흡사 여행 처음 하는 사람들처럼 천진난만하달까? 차가 족자 시내에 들어서고 보르부두르 유적지 투어만 하기로 한 사람들이 내렸다. 말레이인만 내렸다. 다시 출발. 차 옆으로 곡예하듯이 아슬아슬하게 지나치며 충돌 없이 지나가는 오토바이에 다들 감탄했다. 

10.50am 무렵 쁘람바난에 도착. 12pm까지 관람하고 다시 모이기로. 지진 때문인지 복구하다가 말았는지 돌무더기가 쌓여있다. 화산암들. 보르부두르 유적처럼 아마도 저 멀리 보이는 메라피 화산 근처에서 돌을 날라와 가공한 것 같다. 

Candi Prambanan(짠디 쁘람바난. Candi=사원) 입구


복구가 덜 되었거나 무너진 것들. 아무래도 지진 때 무너진 것 같다. 복구가 덜 된 형태가 아니라서...

주 사원의 압도적인 위용.

자세히 보면 벽감 속의 신상들이 거의 없다. 국립박물관의 수장고에 있겠지? 아니면 누군가 훔쳐가서 어느 부호의 집 장식으로 쓰이고 있던가...


사원의 규모는 놀라웠지만 부조는 조악했고 벽감의 deity는 누군가 도굴한건지 거의 다 사라진 상태다. 자와섬을 지배한 과거의 인도 출신 힌두교도들이 정신줄을 놓은 건지 내부성소로 이어지는 기나긴 회랑도 없고 사원 전체의 바닥을 뒤덮는 판석도 없이 흙바닥(!)에 기초공사만 한 채 사원을 올리고 성소의 조각을 짝퉁스럽게 만들어 실망스럽다. 그렇다는 얘기는 힌두 지배 시기가 그렇게 강력하고 찬란하거나... 길지는 않았던 것 같다. 힌두인들은 신앙심이 돈독해서 카스트로 있는 힘껏 착취해서 사원을 꽃치장하는데 엄청난 비용을 들이니까. 

그런데 왜 여기에 쁘람바난 사원을 지었을까? 저 멀리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메라피 화산을 보고 고향의 히말라야를 연상했던 이주 인도인들이 메라피 화산을 메루산의 아바타 쯤으로 생각한 건 아닐까? 인도에서 유명한 힌두사원은 그 지역의 중심에서 지역생활의 신앙 중심 역할을 하던가, 그냥 의미심장하고 특별한 장소에 사원을 지었다. 강줄기가 둘로 합쳐지는 곳은 엄청나게 중요한 곳이다. 쁘람바난 사원 역시 보르부두르처럼 19세기 무렵 당시 인도네시아를 지배하던 더치가 발굴한 건가? 무슬림은 이런 유적에 관심이 없을 테니까.

사원 옆의 박물관에서 가멜란 연주를 하고 있다. 독창하는 아줌마를 비롯해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공연... 건기 저녁 무렵이면 국립 박물관 뒤쪽 식당에서 쁘람바난 사원을 배경삼아 디너쇼가 벌어진단다. 무척 로맨틱할 것 같다.

캐나다인이 옆에 달싹 붙어 같이 다녔는데 내가 영어가 잘 안 되니까, 사내 흉내 내며 bro, huh 하며 말 붙이는게 불편하고 귀찮았다. 그래도 쁘람바난이 인도의 힌두사원과 하나 닮은 건 있었다. 햇살이 사정없이 내리쬐는 사원 유적지에 그늘이 하나도 없었다. 사원 관광을 끝내고 설렁설렁 투어 차량이 정차해 있는 주차장으로 걸었다. 연휴라서 유적지는 관광 온 인도네시아인들로 버글버글했다. 

운전사는 어디갔는지 안 보인다. 누군가, 햇볕을 피하느라 잎사귀가 다 말라버린 나무 한 그루에 달싹 붙어 뭉쳐 있는 우리를 보더니 운전사를 데리러 갔다. 그새 뉴질랜드 박사 여자는 출구의 시장통에서 뭔가 잔뜩 쇼핑해 와서 가판 벌리듯 늘어놓고 이건 얼마 짜리, 저건 얼마 짜리 설명했다. 네고 참 잘 한다. 마누라 생각이 났다. 운전사는 독실한 무슬림인지 사원 입구 근처에 마련해둔 기도소에 머물러 있었나 보다. 헐레벌떡 뛰어오면서 아임 쏘리, 아임 쏘리를 연발. 인샬라 하니까 낄낄 웃는다.

족자에 돌아오니 12pm. 돌아오는 길에 가이드북을 뒤져 말리오보로 거리 시작 즈음에 위치한 가루다 인도네시아 항공사 사무실을 찾았고 투어 차량이 여행사 앞에 서자 마자 항공사 사무실로 갔다. 에어컨이 망가져 창문 열어 놓고 다니는 차에 있다가 에어컨이 있는 사무실에 오니 살 것 같다. 바깥 기온은 32도, 건기인데도 습도가 높아 등짝이 땀에 절었다. 내 차례가 되어 항공권 프린트 물과 라이온 항공표를 보여주며 사정 설명하고 귀국항공편의 날짜를 하루 앞으로 댕기는 것이 가능한지 문의. 불가능하단다. 그날 좌석이 전 시간 모두 여유 좌석이 없고 웨이팅도 할 수 없단다. 라이온 에어 항공사 위치를 아냐고 물으니 모른단다. 여행사 가면 라이온에어 항공권 날짜를 변경할 수 있을까 물으니 잘 모르겠다며 무척 미안해 한다. 사탕 하나 먹고 물 한 잔 마시고 빙글빙글 웃으며 나왔다. 이 나라 사람들의 친절과 미소는 기분이 참 좋다.

빌어먹을 더위에 거리를 걸어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 잡고 물어물어 여행사를 하나 찾았다. 라이온 항공권을 보여주며 일정 변경이 가능한지 물었다. 워낙 싼 항공권(promotion)이라 불가능할꺼란다. 자기들은 그런 업무를 하지 않는다며 미안해 한다. 그럼 혹시 환불은? 항공사에 직접 가야 한단다. 시내에 항공사가 있나? 없다. 족자 외곽의 공항에 사무실이 있단다. 이게 영어로 한 얘기가 아니지만 뜻만 통한다면 뭐...

하아... 덥다. 옵션이 하나 밖에 안 남았다. 굶으면서 이게 무슨 꼴이지? 얼른 이것저것 볼 일 끝내고 어제 못 본 끄라톤을 보러 가야 하는데. 인도네시아의 관광지들이 다 그런 것 같은데, 2.30pm이면 문을 닫았다. 그러니 서둘러야 한다. 그런데 덥다. 

어제 인터넷으로 뒤져보니 denpasar to jakarta 인도네시아 국내선 항공표는 전 시간 매진되었다. 마지막 남은 옵션은 가루다 항공권의 출발지를 jakarta에서 denpasar로 변경하는 것 뿐이다. 그렇게 되면 라이온 항공권은 환불해야 한다. 가루다 인도네시아 사무실을 다시 찾았다. 아까 그 친절하고 예쁜 아가씨가 맞아 주었다. 출발지 변경이 가능한지 물었다. 2-3분쯤 터미널을 검색하더니 아주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이 항공권의 발권을 한국에서 한 것이라 한국에서만 변경이 가능하단다. 시스템이 후진 거니 미안해 할 만 했다. 국제전화를 해야 하나? 그러고보니 생각났다. 한국에서 귀국편 출발지를 변경하려고 전화하니 추가비용 얘기를 했다. 여기선 결제를 할 수 없다. 천상 아내한테 얘기해야겠다. 라이온 항공편은 환불해야 하니 공항에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종이에 적어준다.

말리오보로 거리의 Indo Mart에서 와이파이를 사용하려고 1700rps 짜리 가장 싼 비누 하나를 달랑 사니 카운터 아가씨가 낄낄 웃는다. 나도 웃겼다. 마침 아내와 스카이프 통화가 되었다. 출발지 변경을 부탁하고 전화를 끊었다. 잘 되야 할텐데... 딸애가 아빠 보고 싶다고 전날밤 울었나 보다. 떠나기 전날 대형마트에 들러 떨이 판매하는 강아지 인형과 카드를 사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이가 걸어놓은 양말에 넣어달라고 아내에게 부탁했다. 카드에는 '다음엔 아빠, 엄마랑 함께 여행가자' 라고 적었다. 마누라가 나랑 같이 가려고 할까? 인도 가자고 하면 미끼를 덥썩 물 것이다.

공항에 가자. 트랜스족자 버스를 타러 말리오보로 거리의 버스 정류장에 갔다. 왠 서양인이 길을 묻길래 친절하게 알려줬다. 내가 인도네시아인인 줄 알았던 모양. 버스 매표원이 버스가 언제 올지 모른단다. 그러면서 거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 교통체증. 길 옆 식당에서 어제 얘기 들은 나시 구덱을 시켰다. 별로인데? 하지만 3000rps 짜리 얼음을 잔뜩 넣은 사탕수수 쥬스는 무척 좋았다. 

밥을 먹으며 현지인과 낄낄 대며 놀다가 교통체증이 좀 완화된 걸 보고 버스정류장에 갔다. 말리오보로 거리는 일방통행이라 버스정류장을 헷갈릴 염려가 전혀 없다. 내 얼굴을 기억한 매표원이 저 버스를 타면 된다고 알려줬다. 쁘람바난행 1A 버스다. 버스는 콩나물 시루 같았고 에어컨은 대충만 작동했다. 50분 정도 땀을 줄줄 흘리며 공항에 도착했다. 오히려 바깥이 더 시원하다.

라이언 항공표를 refund하기 전에 아내가 항공권 스케쥴을 변경했는지 통화해 봐야 한다. 아니면 이 표를 그냥 들고 가서 자카르타에서 하루 버린다 치고 더 묵어야 하니까. 공항 안내소에 와이파이 사용가능한 곳을 물으니 depature launge에서만 사용가능하단다. 역시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아내에게 확인할 길은 없지만 어떻게든 솔루션을 찾을테니 믿고  도박을 하기로.

아침에 함께 투어했던 스웨덴 친구들이 짐을 맨 채 멍하니 서성였다. 눈인사만 하고 항공사 창구에 가서 항공권의 refund를 요구. 영어를 잘 못 알아 듣지만(내 영어도 뭐 시원찮으니 상관없다) 어찌어찌 의사가 통했다. 55% 정도만 환급이 가능했지만 그게 어디야. 

족자로 돌아가려고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누가 허덕허덕 쫓아오며 등을 건드린다. 어? 아까 봤던 스웨덴 사람들 중 그나마 영어가 되는 친구다. 날더러 혹시 surabaya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냐고 묻는다. 공항에 오니 surabaya행 항공권이 매진이란다. 지금 bus나 기차표, 항공권은 아마 구할 수 없을 것이다, holiday season이나 완전히 매진되었다고 하니 다 죽어가는 표정이다. 

수라바야에는 왜 가는데요? 물으니 내일 오후에 수라바야에서 자카르타 가는 항공권을 미리 끊어 놓았단다. 그거 못 타면 엿(totally screwed up)된단다. 그 편을 타야 자카르타에서 집에 가는 귀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으니... 어제부터 표를 구하려고 애쓰다가 결국 못 구하고 공항에 오면 어떻게 될 지도 모른다는 현지인 충고를 듣고 여기 왔지만 표를 구할 수 없었단다. 딱 한 장, 창구에서 낙장 표를 구할 수 있었는데 넷이서 고민하다가 함께 왔으니 끝까지 함께 가자고 얘기하다가 그래도 한 명이라도 보내는게 낫다고 가장 나이 어린 친구를 보내기로 합의하고 표를 사러 갔더니, 그새 팔렸단다. 사정이 딱해서 낄낄 웃었다. 

내 머리로는 도저히 솔루션이 안 나올 것 같기에, 어떤 상황에서건 마술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우리 마누라를 시뮬레이션해 봤다(그러니까 잔머리를 굴렸다). 묘안이 떠올랐다.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게 뭐냐? 족자로 돌아가 여행사에서 브로모 화산 투어표를 끊는 것이다. 여행사 투어 버스는 언제나 있다(비싼 비용을 치루니까). 브로모 화산 투어가 프로볼링고를 거쳐 가는데 거기서 수라바야가 가깝다. 아마도 프로볼링고에서라면 대충 아무 버스나... 또는 히치하이킹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 친구들을 데리러 간다며 공항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불쌍한 녀석들. 아참, 나도 불쌍하지. 여전히 그 친구들 이름을 모른다. 난 왜 사람 이름이 머리에 남지 않을까? 숫자처럼 여행자가 균등해 보여서? 여늬 여행자와 마찬가지로 평등하게 무의미해서? 비록 친절한 편도 아니고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여행자들을 도왔다.

버스를 탔다. 이번엔 에어컨이 작동한다. 그래도 땀을 흘렀다. 산유국이지만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연비가 안 나오면 일단 에어컨을 끄는 안 좋은 관습이 있는 듯. 더더욱 사람을 힘들게 하는 관습은 관공서와 관광지가 입장을 2.30pm까지만 받는 것.

말리오보로 거리에 도착하니 어느새 5pm. 허탈한데? 아까 비누를 산 Indo Mart에서 오렌지 쥬스를 한 병 사서 마시며 아내와 통화. 항공권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러니 다들 마누라 없으면 못 산다고 그러지. 열심히 땀 흘려 삽질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흡족하고 씁쓸하고 노곤하다. 

트윗질 몇 번 하고 구글맵으로 브로모 일대와 발리섬 지도를 다운 받고 생각난 김에 여행사에 들렀다. 숙소에 묵고 있던 일본인 여자가 무려 통역을 데려와 투어를 예약하고 있었다. 아는 척 하니 어디 가냐고 묻는다. 내가 유부남만 아니면 오늘 보르부두르 간 사실을 숨기고 내일 당신이 가는 보르부두르 선라이즈 투어를 신청할 것이다. 사원에 떠오르는 멋진 해돋이를 보며 하루살이처럼 살자고 거듭 다짐할 것이다. 농담이고... 어렸을 때 일본 여자애들과 참 많이 돌아다녔지...

일본 여행자를 보내고, 브로모+이젠 투어를 예약하려니 유독 가스와 화산탄 때문에 이젠 화산은 아직도 출입이 통제되고 있단다.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없어요. 꼭 가고 싶은데요? 제가 죽을 병에 걸렸거든요? 킥킥 웃는다. 정말 안되요. 그래서 브로모 투어만. 일정: 짚차를 타고 view point#1에 올라 일출을 보고 내려와, 브로모 화산까지 걸어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 공항에서 헤메던 스웨덴 청소년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해가 졌다. 숙소에 들러 샤워하고 다시 나왔다. 배가 고파 밥을 먹어야겠다. 오늘 한 일이 대체 뭐지? 아, 여행을 했구나. 말리오보로 거리를 따라 내려갔다. 거리에 돗자리를 펴고 사람들이 앉아 노점에서 파는 밥을 먹는다. 거리에서? 재밌어 보여 밥을 주문하고 먹었다. 낮에 먹은 것처럼 10,000rps에 나시 구덱과 사탕수수 쥬스를 시켰는데 굉장히 맛있어서 쌀 한 톨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었다. 

족자카르타의 유명한 식사 방법: 길바닥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나시 구덱을 먹는단다. 나도 해봤다.

길거리 노점상. 아까 돗자리 깔고 먹던 곳 옆자리.

Mal Malioboro 지하 수퍼에 들러 맥주와 샌달 따위를 샀다. 식빵도 샀다. 내일 아침부터 이틀 동안 다시 강행군이다. 거리에 인터넷 가게가 보여 들렀다. 한 시간에 4000rps. 휴대폰에 찍어놓은 사진을 백업 차원에서 올리려고 했으나 너무 느리다. 값이 싸서 그런가? 항공권을 프린트 하는데 인터넷 까페에 프린터가 없단다. 하는 수 없이 어제 갔던 인터넷 까페에 들러 한 시간에 7000rps 짜리 인터넷을 사용하고 1000rps 주고 일정이 변경된 항공권을 프린트했다. 마찬가지로 인터넷 속도가 느렸다. 

Gang 1 어귀에 있는 작은 가게에서 안주꺼리로 1200rps짜리 쌀과자를 샀다. 아까 거리에서 옆에 앉아 함께 밥을 먹던 현지인이 내가 워낙 게걸스럽게 먹는 것이 웃겼는지 쌀과자를 나눠줬는데 무척 맛있던 기억 때문이다. 숙소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숙소 거실의 소파를 치워놓았다. 방바닥에 앉아 동네 노인네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고 있다. 나더러 함께 먹자고 했지만 배가 찼다고 거절. 아줌마가 나를 주방에 데려가 굳이 밥을 퍼주려고 한다. 비닐봉투를 열어 맥주를 보여주니 히죽 웃는다. 맥주가 팔리는 걸 보면 인도네시아 무슬림이 맥주를 마시는 것 같긴 한데... 하여튼 그 자리에 젊은 사람들이 함께 있었으면 먹었을 지도 모르겠다. 

샤워하고 맥주를 마시며 일정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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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kyakarta

여행기/Indonesia 2011. 12. 25. 12:00
한 삼십분 달리더니 차가 선다. 짐칸에 재봉틀을 실으려고 한다. 재봉틀이 너무 커서 들어가지 않아 여러 사람들이 옥신각신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결국 재봉틀은 포기했다. 승객들이 꾸역꾸역 차에 올랐다.

삼십분 쯤 차가 달리더니 승객을 태운다. 그렇게 해서 네 시간 동안 12명의 승객을 태우고 자카르타 시내를 빠져나간 시각이 12am. 그때쯤 간식으로 빵과 물을 줬다.

아마도 자카르타 시내를 돌며 승객을 모집하는 것 같다. 미니 버스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내가 앉은 열에 4명이 앉았다. 아이 둘, 어른 둘. 앞에 앉은 아이 엄마가 사탕을 준다. 줄 게 없어 민망했다. 여자애한테 말을 걸어봤지만 말이 뚝뚝 끊겼다. 그 옆 자리 아이는 차멀미로 연신 게웠다. 먹은 걸 다 게웠는지 지쳐서 잠이 들었다.

무릎이 앞 좌석에 닿아 불편했다.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날이 밝아올 무렵 바깥을 보니 정글 한 복판에 난 1차선 도로를 열심히 달리고 있다. 고속도로가 없는 건가? 중간에 차가 멈추더니 아침을 먹잔다. gps를 간신히 잡아 살펴보니 족자까지 100km 쯤 남았다. 8am. 넉넉잡아 두 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하지 싶다.

비가 쏟아졌다. 밥은 조금 있으면 도착할 족자에서 먹기로 하고 내 옆에 앉은 아저씨와 장쾌하게 쏟아지는 비를 구경하며 손짓 발짓으로 얘기를 나눴다. 48세, 자식은 다섯. 자카르타와 고향을 한 달씩 오가며 생활. 요리사. 푸딩을 잘 만든단다. 한달 월급은 백만 루피아. 집 없고 차 없다. 임대한 좁은 방에서 아이 셋과 자카르타에 산다. 그래도 히죽히죽 잘만 웃었다. 저 아이들이 당신 딸이냐? (내 옆에 앉아있던 아이들) 아니다. 딸들은 자카르타에 있고 그 중 하나는 대학에 보냈다. 등 허리가 휘어지시겠군. 담배를 교환해서 피웠다. 내 담배가 좋단다. 비가 잦아 들었고 다시 미니 버스에 올랐다.

미니버스가 보르부두르 부근에서 빙빙돌더니 아저씨를 이름 모를 시골 마을에 떨구었다. 나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 

12.30pm 무렵 미니버스는 족자카르타 시 어귀에 닿았다. 그런데 시내로 안 들어가고 시 외곽으로 주욱 빠져 나간다. 어어... gps를 켜서 보여주며 내가 내릴 곳은 족자 시내 tugu stasiun이라고 손짓발짓을 동원해 알렸다. 그저 내 휴대폰의 gps를 신기하게 쳐다보면서 걱정 말란다. 투구역에 내릴 때까지 족자카르타를 뺑뺑이 돌며 모든 손님을 내려주고 거의 마지막에 내렸다. 그 때가 2.10pm. 징하다. 무려 18시간을 비좁은 미니버스를 타고 간신히 이곳에 도착. 운전사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welcome to jogja! 하면서 함박 웃으며 손을 흔들고 떠났다.

대낮부터 마사지 하고 가라는 손길을 뿌리치며... Yogyakarta Tugu Stasiun(족자카르타 투구역) 남쪽길 숙소 밀집 거리를 찾아 가는 중.

투구역 앞 저렴한 숙소가 몰려있는 골목을 돌았다. 여러 숙소를 전전했지만 마음에 들거나, 가격이 싼 곳은 보이지 않았다. 연말이라 방이 꽉 차서 구하기가 쉽지 않다. 골목길을 한 시간쯤 전전하다가 twin bed, bathroom inside를 100,000 루피아에 얻었다. ISTI 라는 곳. 



음... LP를 안 봤다. 봐도 별 무소용이라 그냥 발로 뛰는 형편. 게스트하우스 주인장과 대화를 하는데 숙소에 묵고 있던 일본인 아가씨 둘이 옆에 앉아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다. 주인장은 지금 쁘람바난에 가면 늦을 꺼란다. 오후 다섯시면 돌아오는 버스 타기가 힘들고 연휴라 관광지인 그곳에 사람이 지금 엄청나단다. 한숨... 아닌게 아니라 오는 길에 본 족자 시내는 엄청난 차량과 인파로 미어터졌다. 

주인장에게 여행사 추천을 부탁했다. 대부분 여행사들의 투어 가격이 비슷하지만, Sosro tour가 수익 일부를 떼어 지역 사회에 환원(기여)한단다. 일본 여자애 둘은 각자 따로 와서 족자에 장기 투숙 중이다. 특별히 어디 돌아다닐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난 지금 투어 예약하러 가려는데 같이 가겠어요? 물으니 어물어물한다. 하긴 나 같은 아저씨랑 누가 같이 가고 싶겠어.

미로같은 숙소골목을 돌아 소스로 투어에 찾아 가서 투어 상품을 찾아봤다. 아가씨가 친절해서 이래저래 여러 가지 얘길 나눴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끄라톤과 따만사리를 구경하고 내일 하루 날 잡아서 보르부두르와 쁘람바난 투어를 하는게 낫단다. 디엥고원은? 투어로 가지 말로 근처 도시에 하루 묵으며 1박 2일 정도로 가는게 좋다 -- 투어 비용도 비싸고 하루종일 차만 탄단다. 아가씨가 추천한 투어에서 아침식사를 뺀 것으로 예약했다. 히죽 웃으며 말한다; 그래요 식사는 숙소에서 주니까 필요없죠. 내가 묵은 숙소는 식사 대신 무한 리필 차만 준다. 투어 가격은 60,000rp. 보르부두르 입장료 120,000 + 쁘람바난 입장료 105,000. 한 방에 285,000루피아를 썼다.

Jalan Malioboro(말리오보로 거리)의 인파로 붐비는 상점들. 연말연시 탓인지, 아니면 족자카르타가 워낙 유명한 관광지라서인지 하루종일 인파로 북적거렸다.

박물관과 kraton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숙소거리에서 약 1.6km 정도. 인파로 미어터진 Jalan Malioboro를 걷다가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사람이 방글방글 웃으며 손을 흔들어 반겼다. 지금 가봤자 kraton이 문을 닫았을 꺼란다. 영어가 유창하고 사람 좋게 생겨서 한 동안 대화를 나눴다. 결론은 자기가 아는 사람이 하는 어떤 바틱 전시장에 가서 훌륭한 예술품을 감상하라는 것. 바틱에 관심이 없어 그냥 가겠다고 했다. 아까 듣기론 끄라톤은 그래도 따만사리는 그냥 들어가서 구경할 수 있다고 들었다.



마스지드에서 기도 중인 사람들. 손과 발을 씻고 신발을 마당에 벗고 마스지드에 들어갔다. 기도할 시간. 같은 이슬람 국가인 옆 나라 말레이지아와도 사뭇 다른 내부 분위기. 마치 흔한 동남아의 불교 사원 분위기랄까...

끄라톤은 문을 닫았다. 배가 고파서 자리를 접고 떠나려는 미 아얌 포장마차를 잡아 음식을 시켰다. 맛 없다. 마스지드에 들러 손발을 씼고 잠시 쉬다가 따만사리로 가니 자칭 경비(security)라는 친구가 벌떡 일어나 다가오더니 날 안내해 주겠단다. 혼자 가면 길을 잃는다나? 돈을 줄 수 없다고 하니 무료란다. 한 눈에 봐도 삐끼인데 이렇게 아는 척 해주시니 고맙다. 난 삐끼가 없으면 여행이 안 되는 타잎이라서...

삐끼의 아버지는 끄라톤에서 근무하는 공무원(government officer)인데 여전히 잘 살고 있으며 족자에서 심하게 존경 받는 술탄을 위해 봉사하고 있고(공무원이?) 엄마는 와양극 가수란다. 자기 집은 따만 사리 옆에 있단다. 

그림자 인형극에 사용하는 인형을 만드는 장인. 버팔로 가죽에 세공


따만사리의 목욕탕. 술탄의 부인들이 여기서 목욕.

길을 잃기 딱 좋은 거리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술탄의 목욕탕을 구경하고 골목 어귀의 kakilima에서 과일을 사서 나눠 먹었다. 까끼리마는 다섯(lima) 다리(kaki)라는 의미로 노점의 두 바퀴와 스탠드, 그리고 주인의 두 다리를 뜻한다. 나시 고랭, 미에 고랭, 박소(bakso, baksu), 과일 등을 파는 간단한 노점상인데 인도네시아 어디 가나 널려 있다. nasi는 rice, mie는 noodle, goreng은 볶았다는 뜻. 논에서 자라는 벼는 padi라고 부르고 시장에서 파는 쌀은 beras, nasi는 찐(끓인) 쌀.

따만사리의 미로같은 골목길을 가다가 만난 과일장수 아저씨. 1달러 정도(10000rp)면 한끼 식사 대용으로 열대 과일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

삐끼가 족자에 왔으니 Nasi Gaduk을 먹어 보란다. 한참 친절하고 싹싹하게 군 다음 가족이 운영한다는 바틱 매장에 나를 데려갔다. 자기 친형님이란 분이 나와(그럴 리가 없겠지만) 물건을 이것저것 보여주신다. 훌륭하고 아름답다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하지만 바틱이나 그림자 연극 소품엔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형님이란 사람은 하지만 왜? 왜 물건을 안 사냐? 이렇게 훌륭한데? 라고 의아해 하며 안타까워했다. 나는 눈으로 찰칵찰칵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찰칵찰칵. 조카, 아우가 운영하는 다른 매장을 두어 군데 더 돌며 찰칵찰칵 눈으로 사진을 찍는 시늉을 하니까 삐끼는 실망했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가이드해 줘서 고마웠다.

길 잃은 미아처럼 두리번거리며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렸다. 따만사리 근처 어딘가에 새시장이 있다는 말은 들었다. 새소리를 따라 가니 여러 명의 심사위원이 새장을 하늘에 매달고 맵시와 울음소리를 듣고 새를 품평하고 있다. 새 주인들은 새들을 북돋아 자기가 키우는 새들이 좀 더 아름답게 짖도록 촉구하고, 구경꾼 무리가 미소띤 얼굴로 광경을 바라본다. 한 켠에는 까끼리마에서 박소를 팔고 있다. 한가하고 기분 좋은 광경이다. 

지나가다 본 인터넷 가게(wartel). 30분에 보통 2000rp. 정도, 1시간에 3000~4000rp 가량인데, 여행자 거리에서는 시간 당 7000~10000rp 사이. 256 Kbps ADSL 라인이라 속도는 어느 정도 나온다.

왕궁 앞 광장으로 천천히 걸었다. 놀이기구 사이로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장터에 널린 자자난(길에서 파는 여러 종류의 간식꺼리를 총칭)을 몇 개 사 먹었다. 하나당 2000~4000rps. 시골 장터 구경하는 기분. 티셔츠 하나가 10000~20000rps. 품질이 조악. 단기 여행이라 굳이 옷을 살 필요가 없었다.

놀이터에서 파는 잡다한 간식꺼리들(대개 0.5달러 미만)을 주워 먹으며 한가하게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70~80년대 한국의 모습을 보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기도 21세기다.

해 질 무렵 동네 한 바퀴 도는 기분으로 말리오보로 거리를 벗어나 크게 외곽으로 걸었다. 거리는 퇴근하는 사람들로 붐볐고 어제처럼 오토바이와 자동차들이 1차선 도로에 한데 뒤엉켜 심한 교통체증으로 정체되어 있다. 가는 길에 과학관으로 보이는 건물을 바깥에서 구경했다. 


족자카르타(Yogyakarta)는 우리나라로 치면 경주 같은 고적지이자, 문화예술의 중심 도시. 한낫 신호등 제어기에도 까꿍 괴물같은 수묵 그래피티를 그려놨더라. 그 때문에 도시가 지저분해 보였다.

말리오보로 거리의 한 복판에 있는 커다란 쇼핑몰(Mal Malioboro) 꼭대기 층의 food court에서 박수 세트 메뉴를 주문. 1층에서 바비걸 경진대회가 벌어졌다. 조그만 아이들이 저마다 미를 뽐내며 날카롭게 짹짹 거리는 소음을 들으며 거리에서 먹는 음식보다 현저하게 맛없는 음식을 꾸역꾸역 삼켰다. 테이블에서 흡연이 가능했다. 카운터에서 재떨이를 들고와 딱히 할 일도 없고 담배 한 대 빨며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쁘람바난과 보르부두르 유적지에 관한 책을 사려고 쇼핑몰 지하의 서점에 들렀다. 우리나라로 치면 동네 서점만한 곳이었고 유적지에 관한 책은 없었다. 지하에 있는 수퍼에서 내일 아침 꺼리와 맥주 따위를 사고 거리에서 안주로 먹을 간식꺼리를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비에 젖고 땀에 젖고 먼지와 분진으로 누더기가 되다시피 한 옷가지들을 모아 빨래를 하고 맥주를 들이키며 일정을 점검했다.

가져온 전자항공권의 날짜를 보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마침 일 층에 앉아 있던 주인장에게 물어 근처 인터넷 까페를 찾아갔다. 떠나기 전날 밤, 웹질을 하다가 아무 생각없이 12/31 Denpasar(Bali) to Jakarta 항공권을 덥썩 산 생각이 났다. 일정이 꼬여 디엥 고원에 가는 여정을 포기했음에도 자카르타에서 족자행 교통편을 구할 수 없어 하루를 보낸 덕에 발리에서 비행기를 타고 자카르타로 돌아와서 자카르타에서 하루 묵으며 관광하려던 계획은 의미가 없어졌다. 그냥 발리에서 1/1 아침이나 점심 비행기(라이온 에어편?)를 타고 자카르타로 가서 1/1 밤 23:30에 출발하는 자카르타 to 인천 행 비행기를 타면 된다. 

옵션은 넷이다. 만날 이런 저런 기획을 하다보니 옵션이 이렇게 많을 땐 왠지 기쁘다.

  • 라이온 에어 항공권의 스케쥴을 12/31에서 1/1로 변경. 
  • 가루다 인도네시아의 귀국 항공편 스케줄을 12/31로 하루 댕기기.
  • 그게 안되면 라이온 에어 항공권을 환불하고 1/1 다른 항공편으로 자카르타로 간다. 연휴인데 가능할까?
  • 그마저 안되면 라이온 에어 항공권을 환불하고 인천행 가루다 인도네시아 항공편을 jakarta to incheon에서 denpasar(bali) to incheon으로 변경한다. 생각해보니 가루다 인도네시아에 출발지 변경을 문의했었고 답변을 준다고 했는데 답변이 없었다. 바빠서 다시 연락할 틈이 없어 떠나기 전 날 밤 갑자기 생각나서 백업으로 라이온 에어 항공권을 구입한 것이다  -- 요새 하도 바빠서 경황이 없다.
인터넷 가격이 30분에 5000rps로 비싼 편. 256K ADSL 라인은 꽤 속도가 잘 나와 옆 자리의 여행자는 헤드셋으로 스카이프 음성 통화 중. windows server 2003이 설치되어 있다. 한글을 볼 수는 있지만 korean ime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한글 타이핑은 할 수 없다. 예전에는 인터넷 까페이 들르면 카메라 사진을 업로드하고 사진을 올리는 동안 한글 설치한 다음 블로그 따위를 썼다. 와이파이 되는 휴대폰으로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간단히 올리면 되니 뭐 그럴 필요가 있을까?

라이온 에어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환불 신청하는 메뉴가 없다. 어떡하지? 내일 항공사 사무실을 찾아가자. 18시간 동안 불편한 버스를 타며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족자에 도착해서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니 피곤하다. 숙소로 돌아가 잠이나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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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karta

여행기/Indonesia 2011. 12. 23. 12:00
새벽 5시에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짐은 그저께 밤에 챙겨뒀다. 어제는 송년회가 있었고 신입사원에게 엔지니어링은 마인드와 소울을 단련하는 과정이라고 뻘소리를 한 것이 기억 나서 민망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게 민망한 얘기는 아니었다. 꼰대스러울 뿐이지.

자고 있는 아이와 아내를 놔두고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시내버스 정류장에 어렴풋한 사람 그림자가 보인다. 발발 떨다가 버스를 타고 서수원 터미널로 갔다. 생뚱맞은 위치에, 이용객이 별로 없는 터미널. 매표소에서 공항버스 표를 12000원 주고 샀다. 한 시간 걸려 공항에 도착. 짐을 붙이고 항공좌석표를 찾았다. 

자동출입국 심사라는 것이 눈에 띄었다. 여권을 스캔하고 지문을 찍으면 등록이 끝난다. 자동출입국 심사대에서 여권을 스캔하고 지문을 검사하니 광속으로 통과. 하지만 수속을 밟고 공항 대기실까지 가는데 무려 2시간이 걸렸다. 공항이 사람들로 몹시 붐볐다. 공항에 두 시간 전에 도착했으나 항공기 탑승까지 15분 정도의 여유 밖에 없었다. 

공항 라운지에는 naver wifi가 무료다. 인도네시아 정보를 적어둔 파일을 회사 컴퓨터에 놔두고 온 게 기억난다. androidvnc로 회사 컴퓨터에 접속을 시도했으나 안 붙는다. 출근한 직원에게 물어보니 인터넷이 다운되었단다. 그 파일을 google docs로 옮겨야 하는데... 포기. 남은 10여분 동안 휴대폰의 Locus App으로 600MB 분량의 인도네시아 지도 tile 파일을 다운로드 했지만 해상도가 떨어져 쓸모없는 수준. 괜히 휴대폰 배터리만 낭비한 것 같다. 미련없이 로커스 앱과 데이타를 지웠다. 
 

인도네시아 국적기(?) 가루다 인도네시아 항공기. A330

항공기 탑승. 기내에서 LP 인도네시아 가이드북을 잠깐 공부. 여행 준비할 시간이 없어 루트조차 제대로 못 짰다. 어디로 갈까. 계획은 이렇다; 자카르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공항 셔틀 버스를 타고 Gambir train stasiun에 가서 Yogyakarta행 기차표를 산다. 기차표를 구할 수 없으면 Pasar Senen Stasiun역으로 걸어가서 가격이 싼 bisunis class 기차를 시도해본다. 자바섬을 가로질러 여행하다가 Surabaya까지 가서 다시 자카르타로 돌아와 하루쯤 자카르타 시내 관광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 중간 과정은 여행하면서 차차 생각해 보기로. 플랜B까지 짰으니 잠이나 자자.

도착 1시간 전. 자와해 보르네오 섬 부근

깨보니 기내식을 나누어 주고 있다. Garuda Indonesia 항공기 기내식은 halal을 따랐고 그래서인지 맛이 없었다. 순한 필스너인 bintang 맥주 한 캔 마셨다. 자바 커피는 맛있었다. VOA(visa on arrival)을 기내에서 받았다. 25$. 인천공항 가루다 인도네시아 카운터 옆에서 바우처를 구매하고 그걸 내밀면 기내에서 비자를 주는 식. 아니면 공항에서 긴 줄을 기다려 비자를 받아야 한다.


공항 도착. 후덥지근. Baggage Claim으로 가는 길에 화장실에 들러 겨울옷을 벗고 배낭에 넣었다. 반바지에 반팔. 이 동네에선 반바지 입고 돌아다니면 이상하게 본다는데? 나와보니 어디에서 짐을 찾는지 몰라 공항 직원으로 보이는 친구에게 물으니 친절하게 데려다 주고 짐을 찾아준다. 그러더니, '모니'를 요구. 히죽 웃으며 거절. 

환전소의 환율이 형편없어 ATM을 찾으러 돌아다녔다. arrival에 있는 한 ATM에서 거래에 실패. 더 이상 ATM이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헤메다가 물어보니 2F Depature에 있단다. 씨티 국제 체크카드로 200만루피아를 찾았다. 이걸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Gambir Stasiun행 Damri 버스 티켓 가격은 20,000루피아. 담배 한 대 피우면서 기다리다가 4.40pm 쯤 버스에 올랐다. 지랄맞은 교통체증 때문에(안 그래도 자카르타의 교통체증은 국제적인 명성을 자랑) 한 시간이면 닿을 거리를 두 시간이나 걸려, 6.40pm이 되어서야 도착. 가는 길 내내 samsung, LG, SK, Lotte 광고판이 눈에 띄었다. 별 감흥이 없었다.

감비르역의 매표 창구에는 보아뱀처럼 구불구불한... 기나긴 줄이 드리워져 있었다. 표 구하긴 글른 것 같은데? 안내센터로 보이는 곳에 들어가 물어보니 holiday season이라 기차표를 내일까지 구할 수 없단다. 파사르 세넨 역에서는? 마찬가지란다. 혹시 버스표는 구할 수 있을까요? 고개를 설레설레. 거기도 아마 마찬가지일 꺼란다. 어영부영 하다보니 7.30pm.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오니 비가 쏟아진다. 어떻게 할까... 별 수 없다. 자카르타에서 하룻밤 묵으며 여행사에서 가는 교통수단이 있는지 알야봐야지. 예정에 없던 플랜 C다.

모자를 눌러 쓰고 비를 맞으며 어두운 밤거리를 터덜터덜 걸었다. 현지인들은 차가 오건 말건 무단횡단을 했다. 나도 그렇게 했다. 비가 와서 가이드북을 꺼내볼 형편이 아니라서 순전히 감을 믿고 내려가면... 안 되지.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Jalan Jaksa(작사길)을 찾아갔다. 잘란 작사는 조용한 버전의 카오산 같달까? 

숙소부터 잡자. 첫번째 게스트하우스는 8.5만을 불렀다. 침대 하나 선풍기 하나 달랑. 네고가 안된다. 다음 GH는 7만. 상태가 더더욱 안 좋다. 처마 밑에서 LP를 꺼내 뒤적여 Hostel 35를 찾아갔다. 12.5만 싱글. 비싸서 포기하고 다른데 가보니 24만. 

인니인들은 숫자를 말할 때 아래 천 단위는 잘랐다. 그래서 24만은 two hundred forty. 뉴스에서 내년쯤 인도네시아에서 화폐의 denomination을 한다는 소식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럼 천 단위 이하 절삭? 

그곳의 친절한 매니저가 싼 GH를 소개해 준다. 이쪽 골목으로 죽 들어가면 있다고. Kresna Hostel은 8만에 spartan room. 그 옆의 bloem steen은 single이 다 나가고 double을 8만 달란다. patio도 있고 해서 햇볕은 절대 안 들 것 같은 그 방으로 잡았다. 샤워하고 게스트하우스 정원에 나와 담배 한 대 빨고 있으니 비가 멎었다.

Bloem Steen Hostel. Jalan Jaksa 북쪽 입구에서 얼마 안 가서 왼쪽 골목(Gang) 안쪽에 있는 숙소. 휴일 성수기라 방이 없어 double 80,000rp에 잡았다. 옆 Kresina Hostel은 거지같은 single room이 80,000rps.

배 고프지만 여행사부터 들렀다. 족자행(Yogyakarta니까 욕야카르타 라고 해야 하는데 족자카르타 또는 jogja로 부르더라) 내일 저녁 출발하는 투어버스(A/C 달린 미니버스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를 알아봤다. 240,000rp. 매우 비싸다. 일반적인 버스 가격이 90,000rp인데... 그건 가이드북에 적힌 작년 가격이고 인도네시아의 엉망진창인 경제 사정과 높은 인플레이션을 감안해도 12만 이상은 안 나올 것 같은데... 다른 여행사도 같은 가격을 불렀다. 담합같다. 족자까지는 12시간쯤 걸린단다.

첫번째 여행사로 돌아와 예약. 길거리에서 나시 고랭을 파는 노점을 발견. 8,000rp. 아직 이게 싼 건지 비싼 건지 감이 안 잡힌다. 말레이지아와는 조리 방법이 조금 달랐다. 웍에 기름 두르고 익은 쌀과 시금치 같은 야채를 썰어 볶다가 소스를 좀 치고 계란 하나 풀어 같이 볶아 접시에 내 주는게 끝. 소스의 주성분은 MSG. 동남아시아 여행하면서 MSG를 피할 수는 없겠지. 맛있게 먹었다. 

노점상 근처의 24시간 편의점 Circle K에 들렀더니 창문에 free wifi라고 써 있었다. 편의점에서 물 한 병(1800rp) 사고 어떻게 wifi를 사용하냐고 물으니 암호가 적힌 종이를 준다.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트윗질을 좀 하고 아내와 skype로 영상통화를 한 다음 정보를 뒤졌다. jakarta는 볼 것 없는 도시란다. 

오늘 하루 종일 휴대폰의 GPS가 잡히지 않다가 wifi가 되니 GPS가 바로 잡힌다. GPS 화면을 보면서 걷다가 숙소 근처 까페의 의자에 앉아있는 한국인처럼 보이는 사람을 보았다. 숙소에 돌아와 담배 한 대 피웠다. 휴대폰을 충전시키고 잠들었다. 

숭숭 뚫린 구멍으로 방문해 주신 모기에 뜯기다가 8am 기상. 샤워하고 체크아웃하면서 짐을 게스트하우스에 맡기고 National Monumentum(일명 Monas)까지 걸었다.

출입구를 찾아 한참 헤멨다. 친절한 현지인들 도움으로 남서쪽에 있는 입구를 찾았다. 볼게 없었고 타워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는 학생들의 긴 줄이 서 있어 올라가지 않았다.

National Monumentum. 줄여서 Monas. 입구는 지도상 좌하단 하나만 개방되어 있다. 입구 찾아 돌아다니느라 진이 다 빠졌다. 개구멍이 있다는데 수선을 다 해놨는지 안 보이고... 왼쪽의 빨간 차는 유료 화장실.


거리는 차량과 오토바이로 시끄러웠다. National Museum까지 걸어갔다. 아무렴 여행의 시작과 끝은 박물관이지! 아이들이 바글거려서 신관부터 구경. 말로만 듣던 Homo Florensis를 감동적으로 쳐다봤다. 

Homo Floresiensis. 2003년 Flores의 Liang Bua 동굴에서 발견된 이 난쟁이 유골은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 사이 인간 진화의 연결 고리로 추정되어(9만년에서 10만년 전)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옆에 적힌 설명이 그렇다는 얘기고...). 내가 알기론 플로레시엔시스는 현재는 현생인류와 다른 종류로 분류된 걸로 알고 있음. 어쨌거나 박물관에 온 보람을 느낀 화석


국립박물관 구관. 카이로 박물관처럼, 박물관의 유물 보관하는 유리 케이스가 식민지 시절부터 이어져온 듯. 저게 모두 티크목.


아담한 국립박물관을 나와 근처의 Inscription park까지 걸었다. 입장료를 안 받는다. 하지만 볼 것이 없다. 공원 근처의... Masakan Padang이라 씌어진 식당에 들어갔다. 마사칸 파당은 아마도 부페를 말하는 것 같다. 접시에 밥을 담고 원하는 반찬을 접시에 담아서 먹는 것 같다. Es teh(ice tea)까지 합쳐 18,000rp. 죽어라고 나시 고랭만 먹게 될 줄 알았는데 이런 음식이 있다니... 꽤 먹을만 했다. 

박물관 앞으로 돌아왔다. TransJakarta 버스를 타려고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과일 모듬을 10000rp에 파는데 양이 부담스러워서 먹지 않았다. 버스는 3500rp로 정액이며 무제한 환승이 가능. 지하철이 없는 이 대도시에 지하철을 대체하는 대중교통수단. kota에 도착. 더치 시대의 식민지풍 건물들이 조그만 광장을 중심으로 즐비하게 들어서 있고 근처에 박물관이 네 개쯤 있었다. 

Cafe Batavia에 들어가 무선랜을 사용(wifi 암호는 cafevatavia 1085). es kopi(Ice Coffee)가 무려 37,500rp. 인도네시아에서 사용하는 말은 영어에서 차용해 온 것이 많은데 음가만 비슷. 한 동안 인도네시아의 어떤 부족이 한글을 문자로 사용한다는 한국 기사가 인기를 끌었다. 수천 개의 섬에서 살아가는 300여개의 ethnic group 대부분이 인도네시아 정부가 공식적으로 지정한 문자인 영어를 사용 중. 표음문자인 한글이 굉장히 우수하다고 하지만 한글로도 꽤 많은 음가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한글이나 영어나 음가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별 차이를 못 느낄 뿐더러, 또 어떤 문자가 다른 문자보다 더 우수하다는 견해엔 별로 공감이 안 간다. 나중 기사를 보니 한글 사용하는 댓가로 돈을 주기로 했단다. 흔한 삽질?

watch tower까지 걸어가다가 더워서 멈췄다. kota 중심가로 돌아와 노점상에서 파는 시원한 과일 쥬스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입장료 20000rp를 내고 Wayang Museum에 들어갔다. 한국인이라고 반가워한다. 인형 박물관이 무척 만족스럽다.

마하바라타의 한 장면. 크리슈나가 마차를 몰며 활을 쏘는 아르주나를 재촉한다. 죽여라, 저들을 모두 죽여라




무대인사 중인 배우들. 인도네시아 여행 중에 인형극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미디어를 통해 가멜란 음악이나 와양극을 어린 시절에 본 적이 있어서... 본 적이 있다는 이유로, 니벨룽겐의 반지나 오페라의 유령 등도 직접 보는 일은 없지 싶어지는데?


도자기 박물관과 자카르타 역사 박물관은 가지 않았다. Mandiri bank Museum에서 오래된 컴퓨터를 구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애플 ][다. ][+도 아니고! caps lock이 없어 대문자만 가능했던 기억이...


kota역에서 버스를 탔다. 수퍼마켓에 들러 물가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요량으로 Plaza Indonesia에 가보려고 Sarinah에 내렸다. 문간에서 경비원이 가방을 검사했다. 보안검색대를 통과했다. 심상치 않은데? 플라자 인도네시아는 부자들만 오는 곳 같다. 별로 볼 것이 없어 나왔다. 

Plaza Indonesia 부근의 skyscraper. 부러 열흘 휴가를 내서 이런 곳을 관광하는 타잎은 아니라서...

Plaza Indonesia 내부를 헤메다가 발견한 서점의 romance 코너. paperback을 한 권, 한 권 정성스럽게 비닐로 포장해 놔서 페이지를 열어볼 수가 없다 -_-


다시 버스를 타고 Monas 근처에서 내려 잘란 작사까지 걸었다. 


거리 입구의 포장마차에서 미에 고랭을 시켜 먹으며 동네에서 축구하던 애들과 얘길 나눴다. 계산할 때 아저씨가 8000rp를 부르니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나도 눈치가 있다. 오버차징이구나. 수퍼에서 산듯한 인스탄트 라면을 끓여 풀데기 몇 개 얹은 것을 외국인이라고 비싸게 받으니 같이 먹던 애들이 할 말을 잃어 조용.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지금 먹고 있는 이 인스탄트 미에 고랭은 어떤 작자가 세계 10대 라면 중 하나라고 꼽던 것이다. 계산하고 어제 묵었던 숙소로 돌아가 짐을 찾으며 샤워 좀 하자고 부탁했다. 개운하다.

길가에서 망고를 좀 사 먹고 여행사에 짐을 내려놓고 Circle K 앞에서 인터넷으로 아내와 딸과 얘기했다. 옆에 앉은 인도네시아 여자가 어떤 서양 남자를 걷어차는 중이다. 자기는 예쁘지도 않고 기혼에 애까지 있으며 남자를 온 마음으로 사랑했으나 자신의 마음을 따라가련단다. 그리고 자기는 섹스를 정말 좋아해서 별별 사람들과 다 자 봤다. 하지만 섹스 외에 자기에게는 something inside가 있단다. 듣고 있자니 그걸 맞장구 치며 듣고 있는 서양 남자가 무척 불쌍했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듣는 동안 겨우 겨우 회사 컴에 접속해서 모아놓은 인니 정보 텍스트 파일을 Google Docs에 올리고 폰의 문서도구를 열어봤다. 인코딩이 안 맞아 글자가 깨진다. 텍스트 파일을 utf-8로 변환하고 구글 닥스에 다시 올렸다. 이번엔 된다. 그런데 적어놓은 정보가... 워낙 빈약해서 도움이 안된다. 이걸 대체 왜 적어놨지?

차가 온다는 6pm에 맞춰 여행사에 들어갔다. 아직 차가 안 왔단다. 담배를 두어 대 피우는 동안 게이 같아 보이는 손톱이 긴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300만루피아를 주면 섹스 마사지가 가능하단다. 관심없다. 인니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 얘기를 나놨다. 한국 기업이 큰 건물을 많이 지어 놨단다.

출발 예정 시간에서 시간 반을 기다리며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과 하릴없는 얘기를 나누다보니(과일장수, 어제 나시고랭 먹었던 포장마차 아저씨, 인니에 정착해 관광객 상대로 술집을 하는 잘란 작사의 독일인 아저씨 등등) 기사가 도착했다. 드디어 출발인가? 미니 버스에 아무도 없다. 뒷좌석에 다리를 뻗고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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