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에 해당되는 글 119건

  1. 2014.02.27 태국 가족 여행 #2 방콕-꼬 쑤린 2
  2. 2014.02.27 태국 가족 여행 #1 방콕-치앙마이
  3. 2013.03.24 올레 데이터 로밍 서비스 체험
  4. 2013.02.27 여행 준비하기
  5. 2013.02.27 올레 로밍 체험단
  6. 2013.02.22 osmand
  7. 2011.12.30 Kuta
  8. 2011.12.29 Ubud
  9. 2011.12.27 Bromo
  10. 2011.12.26 Borbudur
  11. 2011.12.25 Yokyakarta
  12. 2011.12.23 Jakarta
  13. 2005.04.11 4/10, 4/11 Bangkok, Incheon 1
  14. 2005.04.11 4/10 2
  15. 2005.04.10 4/8-4/10 Bangkok
  16. 2005.04.08 4/8 back to Yangon
  17. 2005.04.07 4/7 Bagan
  18. 2005.04.05 4/5 to Bagan 3
  19. 2005.04.04 4/4 Back to Mandalay
  20. 2005.04.03 4/3 Hsipaw
  21. 2005.04.02 4/2 Mandalay 1
  22. 2005.04.01 4/1 Bago 2
  23. 2005.03.30 3/30 Yangon 1
  24. 2005.03.29 태국에 도착해서.. 3
  25. 2004.07.13 서울로 돌아와 1
  26. 2004.07.10 방콕으로 돌아와 2
  27. 2004.07.09 수코타이에서
  28. 2004.07.08 다시 방콕에서
  29. 2004.07.06 방콕에서 1
  30. 2004.07.04 크라비에서 1

여행 전에 남부의 어떤 해변에 갈까 궁리했다. 푸켓? 꼬 피피? 아오낭? 크라비? 꼬 따오? 꼬 사무이? 꼬 창? 꼬 사멧? 파타야? 식상하다. 꼬 따오 정도가 괜찮았다. 꼬 창도 가볼만 하지 않을까? 기나긴 화이트 샌드 비치... 카약을 타고 섬을 왕복하며... 그러다가 인도네시아 여행 중 만났던 여행자로부터 태국의 어떤 섬에 관한 얘기를 오래 전에 들은 기억이 났다. 여행자들 하는 얘기는 일정 정도 정형화 되어 있다. 당신이 여행한 곳 중 가장 아름다웠던 곳은? 아내와 아이를 그 섬에 데려가기로 마음 먹었다. 아직 때가 덜 묻은 섬, 무꼬 쑤린으로.


치앙마이에서 방콕 돈무앙으로 가는 녹에어의 비행기는 737-800으로 인천에서 방콕으로 올 때 타고왔던 비행기와 같았다. 그리고 녹에어쪽의 비행기는 앞좌석 간격이 다소 넓었다. 항공권 가격은 두당 1600B 가량. 800B 가량의 기차표는 미리 예약을 시도했지만 침대칸 좌석을 구할 수 없었고, 500B 짜리 버스로 12시간을 달려 방콕에 도착하자 마자 당일 저녁에 다시 9시간을 버스를 타고 가자니 아내의 눈치를 보게 된다.


10.45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 만에 돈무앙 공항에 도착. 공항에서 35B 짜리 A1 버스를 타고 머칫 역에 도착. 머칫에서 아눗싸와리 까지 BTS를 타고 센트럴 플라자에 도착. 왜 이렇게 교통편이 분절되고 복잡하냐면 시위 때문에 길이 막혀서.


MK 수끼에 가 보고 싶어하는 아내에게 더 좋은 대안을 추천. 샤부시에서 수끼와 초밥을 먹었다. 1시간 10분의 시간 제한이 있다. 1시간 4분에 샤부시에서 나왔다. 그 동안 책상 밑의 아웃렛에 충전기를 달고 휴대기기들을 충전시키면서 식사를 했다. 


이번 여행에서 의외로 쓸모가 있었던 것이 Ankor 25W 5 port 충전기였는데, 어쩌다 Aliexpress에서 22$에 구매하고 깜빡 잊고 있었는데 6주가 지나 한국에 도착, 그 이틀 후에 여행을 갔으니 운이 좋은 셈. 이걸로 나, 아내, 아이 휴대폰과 여분 배터리 2개를 한꺼번에 충전할 수 있었다.


밤버스를 타고 가기 전에 셀트럴 플라자의 top super에 들러 필요한 물건을 구입했다. 컵라면, 빵, 따위 섬에서 사면 비싼 것들. 무꼬 쑤린(쑤린 섬)에 관한 정보가 태사랑이나 몇몇 한국 블로그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의외로 알려진 섬인데? 갔더니 관광객으로 버글거리면 어쩌지? 실없는 걱정을 하다가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식료품을 꽤 비싸게 파는 섬의 매점이 점심, 저녁 시간에만 잠시 문을 열고 스노클링 투어라도 갔다오면 식당이 문을 열지 않아 배를 곪는다는. 


아눗싸와리에서 물어물어 512번 버스를 타고 콘 송 사이 따이 마이(남부터미널) 까지 가는데, 12km 가량 되는 거리를 2시간이나 걸려서 도착. 위만멕 궁전에서 짜오프라야 강 근처까지 엄청난 교통체증으로 차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6시가 다 되어 남부터미널에 도착해 버스표를 받고 짐 정리를 한 후 버스에 올랐다.


저녁에 출발한 버스는 새벽 5시 무렵 쿠라부리에 도착했다. 사비나 투어에서 픽업이 나와 국립공원 입구의 여행사까지 데려다 준다. 방콕-쿠리부리 간 왕복 배편과 쿠라부리-꼬 쑤리 사이의 스피드보트 왕복 티켓 등이 포함된 투어 가격이 두당 2100B. 만일 티켓을 개별 구매한다면 대략 1700B 가량 되지 싶다. 좀 더 싸게 한다면 1500B 까지 가능하겠다. 나 혼자라면 아마 그렇게 갔을 것이다.


여행사 사무실에서 샤워를 하고 제공한 간단한 간식꺼리를 먹고 커피도 줬지만 안 마셨다. 생각보다 친절하다. 우연찮게 한국인 부부를 만났다. 예전에 꼬 쑤린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부부가 아이스박스를 사 오길래 우리도 아이스 박스를 샀다. 중간 크기의 스티로폼 박스가 90B, 얼음 한 덩이에 7B x 4 덩이 = 28B. 가게 주인 아저씨 말을 들어보니 여기서 35B 하는 창 캔맥주가 섬에서는 80B 한단다. 그래서 맥주 몇 병과 아이 먹을 음료수 몇 병을 사고 수박도 한 통 사고 오이도 잔뜩 사서 아이스박스에 쟁여놓고 오징어 한 묶음도 샀다. 이렇게 하다보니 섬에 머물 이틀 동안 먹을 것만 잔뜩 챙긴 셈이다.


스피드 보트에 오를 때 어떤 아저씨가 내 딸을 귀여워 하며 이름을 묻길래 알려줬다. 아울러, 아내를 턱으로 가르키며 She's my heart, 그리고 딸을 턱짓으로 가르키며 And she's my soul. 이라고 말했다. 씨익 웃는다. 나도 씨익 웃었다. 하트와 소울은 보트 운전수 옆 상석에 앉았다. 


그러고보니 치앙마이 트래킹 중에 샘이 내 딸 더러 daddy's girl이라며 아빠랑 달싹 붙어 다니며, 감정 표현이 풍부하고 강인하다는 류의 칭찬을 늘어 놓았다. 


한 시간쯤 달리자 에머랄드 색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와 섬이 나타났다. 


아름답다. 


슬로우 보트로 갈아타고 다른 쪽 해변으로 갔다. 


해변에 내려 아까의 한국인 부부가 찜해 놓은 손수레에 짐을 실었다. 이럴 때 경험이 빛을 발하는구나. 짐수레를 끌어 200m 쯤 오솔길을 가니 관리사무소가 나타났다. 우리가 일착으로 도착했고 아내 말대로 관리소에 가장 좋은 자리를 부탁했다.


그래서 가장 좋은 텐트 자리를 확보했다. 열 걸음을 걸으면 바다. 아이가 환호성을 지르며 바다로 달려간 동안 아내는 피로에 지쳐 잠이 들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짐을 풀고 텐트 구석에 아이스 박스를 놓아두고 배낭에서 덜렁거리는 자물쇠를 텐트 출입문에 달았다. 한국인 부부 말에 따르면 여기 섬에 온 사람들 중에 질 나쁜 사람들은 텐트를 털기도 하는데, 돈은 내버려 두고 음식만 털어간단다. 왠지 이해가 갔다. 이 섬에 관해 내가 아는 얘기는, 매 년 방문하는 장기 체류자들이 많다는 것, 일 년 중 6개월, 건기 때만 일반에 문을 개방한다는 것, 그리고 개발을 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우리 옆 텐트는 갓 결혼한 서양 부부였다. 텐트 사이트는 전반적으로 조용하고 한적했다. 이게 내가 내심 바라던 바로 그런 곳이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기대와 달리 낙담스럽거나, 기대 수준을 뛰어넘는 멋진 곳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기대 수준에 딱 알맞는 장소는 생각 이상으로 적었다. 나는 여기에서 아이와 스노클링을 하면서 쉴 생각이다.


얕은 해변에서 아이와 아내에게 스노클링을 가르쳤다. 아내는 물을 싫어하고 무서워했다. 아이는 금방 배웠고 망그로브 숲 주변에서 스노클링을 하며 물고기를 쫓았다. 휴대폰 방수팩에도 불구하고 쓸만한 사진을 찍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놀기 바쁘니까.


소울이는 해변을 사랑했다. 산호사에서 뒹굴고, 밀물에 몸을 맡기고, 썰물에 해변 멀리까지 걸으며 게와 망둥어와 갖가지 신기한 해물을 '발견'했다.


아침 식사 1시간, 점심 식사 1시간, 저녁에는 서너 시간 문을 여는 매점과 식당. 


식당의 각 끼니 때 세트 메뉴는 미리 주문을 해둬야 한다. 우리 식구는 두 번 디너 세트 메뉴를 예약했고 음식은 꽤 먹을만 했다. 두당 250B, 아내와 나만 주문해서 500B에 세 식구가 배불리 먹었다.


아이스 박스에서 차갑게 식힌 맥주와 음료수를 곁들여... 식당 한켠에는 50B 짜리 닭다리 튀김과 상당히 맛있는 70B짜리 솜땀을 팔았다. 


썰물로 바닷물이 빠져나간 망그로브 숲의 뿌리


놀랍게도 산호가 살아나고 있다! 대략 12년쯤 나는 태국에서 산호의 절멸을 목격했다.


식당의 아침식사. 숯불 토스터기. 설탕과 버터와 잼은 식당에서 무료로 제공.


딸애는 해변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오전에 스노클링 투어를 떠났다. 9am에 시작해서 12am쯤 끝난단다. 롱테일 보트를 타고 작은 섬 부근에 정박. 애와 나는 바다로 뛰어 들었다. 살아나기 시작한 산호 사이로 형형색색의 열대어들이 볼륨 댄스를 추듯 부드럽게 미끄러져 갔다. 정신없이 구경하다 내 등짝을 당기는 손길에 수면으로 얼굴을 드니 창백하게 질린 딸애가 배가 저 멀리 가 버렸다고 말한다.


우리를 내려준 배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200m 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애가 무서워해서 배로 가려고 하는데 자꾸 고개를 들어 수면에서 어푸어푸 거리거나 내 손을 잡고 놔주질 않았다. 그 와중에 조류를 타고 천천히 흘러가는 배와 우리 사이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내 힘으로는 아이를 끌고 배까지 갈 수 없을 것 같다. 하는 수 없이 손을 흔들어 배를 불렀지만 이미 너무 멀어져 일렁이는 파도 속에서 흔들어대는 우리 손을 보지 못하는 것 같다. 


아이는 점점 더 겁에 질려 울상이 되었다. 하는 수 없이 그나마 가까운 바위 투성이 해안으로 향했다. 조가비가 날카롭게 박혀 있는 바위 위로 아이를 올렸지만 내가 올라가긴 좀 어려웠다. 간신히 바위에 올라섰지만 이미 조가비가 다리와 손바닥 여기저기 살을 베었다. 내 발바닥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고 아이는 더더욱 공포에 질려 울먹였다. 피 냄새를 맡고 상어가 올 꺼에요. 


손을 흔들고 소리쳤다. Help me! 아이가 따라 했다. Help me! 5분 쯤 그러고 있으니 멀리 있는 배 중 한 척에서 사공이 우릴 알아차리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이와 나는 다시 바다로 뛰어 들었다. 배는 높은 파도 때문에 접안할 수가 없어서였다. 아참 아이가 무서워 한 것을 배가 너무 멀리 떨어진 탓도 있지만 얕은 바다와 달리 여기는 파도가 높아서인 탓도 있었다.


무사히 배 위에 올라왔고 조금 있다가 다른 일행들도 배 위로 올라왔다. 모두 핀을 챙겨 왔다. 핀을 대여해서 가지고 올 껄 하고 후회했다. 핀이 있었으면 소울이를 데리고 배까지 수월하게 갈 수 있었을텐데... 한 친구가 대략 1m 길이의 상어를 봤다고 흥분해서 말했다. 혹시 내 피 때문일까?


다음 스노클링 포인트로 이동했다. 아이는 파도가 높은 그 곳에서 스노클링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여전히 조가비에 베인 발의 상처에서 피가 질질 흘러 나왔다. 우리는 그렇게 30분 쯤 다른 사람들이 자맥질을 하며 스노클링을 즐기는 동안 배안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내 뒷 자리에는 높은 파도가 무서워 바닷속으로 들어가지 않은 남녀 젊은이가 묵묵히 앉아 있었다. 


아이에게 스노클링에 대한 안 좋은 트라우마를 심어준 것이 아닐까? 그게 걱정되었다. 왠 걸? 숙소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는 스노클링 장비를 챙겨 앞 바다에서 신나게 돌아다닌다. 


딸애 디즈니 공주님들 방수 밴드에이드로 도배한 한쪽 발. 다른 발도 저만큼 밴드에이드를 쳐발랐다. 내 처지가 좀 한심해 졌다. 발바닥, 허벅지, 손에 난 상처 때문에 기대거나 걷기가 힘들다. 어처구니 없어 웃음만 나왔다. 여기 와서 아침 저녁으로 신나게 스노클링을 하자는 계획은 반 나절 만에 날아가 버렸다.


숙소에 도착하자 마자 텐트 앞에 설치해 둔 해먹. 내가 누워있지 않은 동안은 다른 사람들이 앉거나 누워 있었다. 그렇게 해서 공공해먹이 되었다.


아내가 내 사진을 찍었다. 앞바다에서 딸애가 놀고 있고 난 저러고 뭘 읽고 있다가 잠이 들었다가 깨어서 읽다가 다시 잠이 들길 반복... 원숭이가 식당에서 식사중인 사람의 달걀을 훔쳐갔고, 그 원숭이가 누군가의 콜라와 먹거리를 훔쳐 나뭇가지 위에서 먹고 남은 찌꺼지를 아래로 던진다더라. 텐트에서 음식을 훔치는게 아마도 사람이 아닌 저 원숭이였지 싶다. 원숭이는 돈에 관심이 없으니까.


함께 꼬 쑤린에 도착한 한국인 내외 중 남자는 빅뱅이론의 레너드를 닮았다. 섬에는 샐든을 닮은 친구도 오락가락했다. 해먹에서 한가하게 흔들리며 잡지 따위를 보는 동안 아내나 한국인 내외 중 여자는 먹거리를 교환하면서 여행할 때 짐만 되는 남자들에 관한 얘기를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았다. 여자들이란... 


아침 산책중, 고운 산호사가 깔린 해변에 게 다리 두 쪽만 남아 있었다. 산새가 게를 잡아 먹은 흔적이었다. 이 해변에는 소라게가 엄청나게 많다. 상어도 돌아다니고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게도 있고 별별 물고기들이 해변가 근처에서 어슬렁거렸다.


섬에서 잠을 잔 지도 이틀째. 이제 나갈 때가 되었다. 오후 배를 타고 쿠라부리로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환대해 주는 여행사에서 샤워를 하고 방콕에 숙소 예약을 했다. 아내 주장대로 이번에는 1650B 짜리 호텔로 간다. 예약은 수월하게 끝났다. 


여행사 직원이 우리 버스표를 미리 예약해 주고, 버스 터미널까지 데려다 주었다. 버스표 예약하고 수수료를 챙긴게 아니라 예약 대행을 무료로 해 준 것. 저렇게 영업하니 매년 단골이 생길 수 밖에. 다음에 쉬러 온다면 다시 이곳에 들를 것 같다. 아무 생각없이, 무위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오고 싶은 곳이다.


이번 밤 버스는 VIP, 춤폰의 대규모 휴게소에서 저녁을 먹었다. 뻐 능과 VIP 버스는 티켓에 저녁이 포함되어 있다. 간단한 간식꺼리와 물을 나눠주고, 하룻밤 숙박비도 절약하게 해 준다. VIP 버스는 과연 편안했다. 


태국에 오면 맨날 쌀국수만 먹어대고 망고스틴에 집착하는 아내에게 다양한 먹거리를 소개해 줬다는 것이 이번 여행에서 유난히 보람스럽다. 


오전 5시 방콕 남부 터미널 도착. 11시 이전엔 체크인이 안 되니 미리 가 있을 수는 없고 방콕 근교 투어 중에서 가장 재미없는 담넌 싸두악 수상시장에 가서 시간을 때우리고 했다. 플랫폼에서 엔진을 공회전 시켜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담넌 싸두악 행 버스에 올랐다. 요금은 두당 73밧, 아이 요금은 받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태국 여행하면서 받아본 가장 긴 버스표를 받았다.


두 시간 가량 졸면서 버스를 탔다. 해가 떠오를 무렵 피어오르는 낮은 안개 위로 야자수가 마치 신기루처럼 평원에 둥실 떠서 흘러갔다. 


세 식구가 배 한 척 전세내려니 800B을 부른다. 아내가 500B 까지 깎았지만 아내가 협상에 별 성의를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내 기억에 두당 150B 정도 였으니 500B이면 뭐 그냥 수긍하고 말자.


9시 무렵의 수상시장에는 별로 배가 많지 않았다.


80B 가량 하는 망고 라이스를 사서 아내에게 맛을 보여줬다. 입 짧은 것은 두 모녀가 비슷한데 아내는 딸애가 음식을 잘 안 먹는다며 맨날 자기 가슴을 쳤다. 내가 보기엔 아내도 만만치 않았다. 망고 라이스가 맛이 없다니, 참 까다로운 입맛의 모녀다.


한 시간 가량의 수상시장은 예상대로 재미가 없었다. 관광객이 관광객을 구경하러 가는 곳이랄까? 암파와는 여기보다 좀 나으려나? 이번 여행에도 암파와에는 시간이 맞지 않아 가지 못한다. 


방콕으로 돌아오는 편은 100B 짜리 롯뚜(미니버스)를 탔다. 1시간 10분이 채 안 되어 아눗싸와리 롯뚜 터미널에 도착. 호텔은 롯뚜 터미널에서 걸어서 5분이 안 걸리는 곳. 체크인 하고 잠깐 눈 좀 붙이며 쉬었다. 모녀는 잠이 들었고 나는 태블릿에서 크레마를 띄워 얼마 전에 구입한 소설을 읽었다. 크레마는 언제봐도 참 거지같은 앱이다.


내일 밤에 한국으로 돌아간다. 오늘과 내일 오전엔 그래서 쇼핑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지난 8일 동안 여행하느라 바빴다. 모녀를 데리고 걸어서 월텟 옆 BigC로 향했다. 아내는 빠두남 시장을 본체만체 지나쳤다. BigC에서 한국에 가져가 먹을 것 따위를 잔뜩 사고 아내는 심지어 호텔에서 먹겠다며 두리안까지 샀다. 호텔에서 두리안은 갖고 들어오지 말라는 사인을 못 봤단다. 어이구...


BigC에서 쇼핑만 하는데 거의 3시간을 보내고 시위대가 점령하고 있는 씨얌까지 걸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밤 아홉시. 모녀를 데려다 놓고 보니 정작 맥주 안주로 먹을 것이 없어 아눗싸와리 쪽으로 걷는데, 문득, 숙소로 바로 가지 말고 매 번 방콕을 방문할 때면 들르곤 하는 섹소폰에 갈까 마음이 흔들렸다. 지금 이 시간이면 본격적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할텐데... 하지만 아내와 딸을 내버려두고 나만 갈 수도 없으니... 오징어 꼬치를 사 들고 호텔로 돌아왔다. 아내는 오징어 꼬치를 처음 먹어보는 것 같다. 아내도 나 못지않게 태국을 자주 방문했는데 어쩌면 식생활에서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을까? 까오만까이 처럼 값싸고 어디에서나 흔한 음식조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아내가 신기했다. 


다음 날 11시 무렵에 체크아웃 하고 짐을 호텔에 맡기고 씨얌에 왔다. 아내는 쇼핑도 제대로 할 줄 모르고 명품을 보는 눈도 없다. 무작정 시얌 부근의 백화점을 오르락 내리락 하다보면 뭐라도 걸리겠지 하는 심정으로 돌아다니는데, 당연히 성과가 있을 리가 없었다. 방수백 하나 달랑 건졌다.


방콕 번화가의 백화점 1층 무대에서 고산족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자는 자선 바자회가 열리고 있었다. 동갑내기 태국 아이.


'We need reform before election' 태국의 정치 상황을 설명하자니... 귀찮다. 관두자.

이 시각 무렵 바로 윗 거리에서 폭탄 테러로 어린이 둘이 사망했다. 


아내 수준(?)에 맞춰 MBK에 갔다. 맛있게 먹고, 배불리 먹고. 가열차게 쇼핑도 하고.


시간이 되어 호텔에 맡겨둔 짐을 찾고 바로 그 앞에 있는 파야 타이 역으로 향했다. 공항행 기차를 타기 위해서인데 아내더러 먼저 역에 올라가 있으라고 하고 아이와 마지막으로 수박쥬스와 꼬치를 먹어보자며 길거리 노점을 찾아 다녔다. 일요일이라서인지 그 많던 노점이 눈에 띄지 않았다. 섭섭하지만 발걸음을 돌렸다.



파야타이에서 city line을 타면 두당 45B. 태국에서 지금까지 찾은 돈이 모두 30000B, 남은 돈이 1150B 이었는데 city line 표를 세 장 끊고 나니 1000B 짜리 지폐 한 장과 각각 10B, 5B 동전 하나 씩이 남았다. 완벽한 예산이었다. 


수하물을 붙이려고 배낭 무게를 재보니 두 배낭을 합쳐 15Kg. 사실 나 혼자 였다면 이것보다 짐을 절반 가량 더 줄였을 것이다. 귀항편이 지연되었다. 비행기는 10pm 뜨려던 것이 1am으로 밀렸다.


항공사에서는 지연 이유로 250B 짜리 식당 이용 바우처를 두당 1매씩 제공했다. 우리 세 식구 것을 합쳐(750B) 피자 컴퍼니에서 피자와 샐러드와 치킨을 시켜 먹었다. 나는 공항 라운지에 가서 음료수 몇개를 가방에 넣어 가지고 나와 모녀를 먹였다. 아내와 나는 맥주를 한 잔씩 하면서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금도 나아진 것 없는 비행기를 탔다. 비행지 지연 사유는 강한 맞바람 때문이란다. 그 시각대에 한국 쪽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중 결항편은 우리가 타는 그 한 편 뿐이었는데, 내 생각에는, 연료 소비량을 줄이기 위해 일부러 지연시키지 않았을까 싶다. 


하여튼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매우 피곤한 상태. 한국에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공항에서 씻고 사무실로 곧바로 가려고 했는데, 아뿔사, 바람막이 점퍼를 수완나품 공항에서 시간 보낼 때 그 자리에 두고 왔다. 그리고 샤워 좀 하려고 보니 출국장에는 priority pass를 사용할 수 있는 라운지가 보이지 않았다. 갈아입을 옷이 없어 꾀죄죄하고... 할 수 없이 집에 들러 샤워하고 출근해야겠다.


방콕에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천공항에서 아내와 나는, 겨우 10일 여행했을 뿐인데 어째 한 6개월 장기여행하다가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라고 공감했다. 하늘이 뿌옇다. 나라 꼴도 그랬다.


내 몸은 대충 이해한다. 한국 음식을 먹고 설사할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 


정리


  • 여행 경비 총계: 269만원 (9박 10일)
  • 항공권을 제외한 1일 생활비: 29000B/10일 = 2900B (9만 6천원/일)
  • 항공권: 인천-방콕 3인 138만원, 치앙마이-방콕 3인 21만원
  • 현지에서 찾은 돈: 30000B (997,002원, 33.23 won/B)
  • 숙박비: 3750B (3박) 
  • 교통비: 3557B 
  • 투어비: 13800B
  • 식비 및 쇼핑비: 7893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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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아내와 태국에 가자고 약속했고, 올해가 결혼 10주년이라 휴가를 내서 10일 동안 태국을 여행했다. 결혼 10주년, 아내 생일, 발렌타인 데이, 딸애 봄방학. 뭐라도 액션을 취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항공편은 아내가 마련. 이스타 항공, 유류할증료와 세금을 포함해 두당 대략 50만원 가량, 3인 150만원. 비슷한 라인을 운영하는 제주 항공보다 이스타 항공이 조금 더 나은 점은 기내식. 이스타 항공의 기내식은 달랑 오이절임 하나를 속에 넣은 김밥 도시락. 


두꺼운 옷을 코트룸 서비스에 맡길까 하다가... 그다지 부피가 크지 않아 배낭에 패킹했다. 아내것과 내 배낭을 수하물로 보냈는데 합쳐서 12kg 가량. 이스타 항공은 두당 15kg 까지 수하물로 보낼 수 있다.


비행기가 착륙. 수완나품 공항에서 첫번째로 한 일은 ATM으로 돈 찾기. 얼마 전에 씨티은행의 국제현금카드 수수료가 많이 올랐다. 그래서 여행 오기 전에 은행에 들러 현금 카드를 새로 발급받았고 EXK 연동을 신청했다. ATM에서 20000B를 현금으로 뽑으니 수수료가 고작 500원! 와우!


그 다음에, AIS에서 판매하는 299B 짜리 1GB data SIM을 둘 구입해서 하나는 아내 휴대폰에, 하나는 내 휴대폰에 꽂았다. 개통은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이 카드는 1주일 동안 3G로 1GB data를 사용할 수 있고 무료 통화를 85B 제공한다. 1GB 데이터를 다 쓰고나면 속도가 느려지지만 그래도 데이터 통신이 가능했다. 여행 8일차 되는 날, 잔여 데이터가 700MB 가량 남아 있었지만 얄짤없이 통신사가 데이터 통신을 끊어 버렸다.


공항에서 카오산으로 가는 길: 3인 기준으로 (ARL 45B + 버스 30B) * 3 = 225B인데 뭐하러 밤 11시가 다 된 시각에 배낭을 메고 애 데리고 고생할까 싶어 400B 짜리 택시를 탔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 도착한 지 한 시간도 안 되었는데 여행을 한 1주일 한 기분이라고 말하니 아내가 공감한다. 매년 어떤 식으로든 해외여행을 하다보니 여행이 반쯤은 생활의 일부인 것 처럼 여겨진다.


2년 만에 방문한 카오산 로드. 여전하다. 카오산에 도착하자 마자 아내는 팟타이를 먹고, 예전에 태국에 온 경험이 있는 아이가 수박쥬스를 기억해서 그걸 사러 거리를 걸었다. 


홍익인간 지기와 안면이 있는 아내가 거길 통해 숙박을 미리 예약해 두었다. 보통 나 같으면 도미토리에서 묵지만 3인 도미토리 비용이 600B 인데, 에어컨 잘 나오고 화장실 딸린 트리플 룸이 800B. 아마 예약을 하지 않았더라면 널찍한 스파르탄 더블룸을 주는 파아팃 거리의 피치 게스트하우스로 가거나, 삼쎈 거리의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갔을 것 같다.


거의 십여년간 탈카오산을 부르짖었지만 카오산만한 곳이 없다. 이건 뭐 숙명같은 거랄까? 숙소에서 샤워하고 빈둥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에 문 연 식당을 찾다가 뿌라 쑤멘 거리에서 쪽을 시켜 먹고 홍익여행사에 들러 Siam Ocean World 표를 예약했다. 홍익인간 아저씨가 아내더러 오션월드에 왜 가냐고, 한국이 훨씬 낫다고 말했단다. 


택시 타고 싸얌으로 가려니 막힐 것 같고, 모처럼 방콕에 왔으니 수상보트를 타고 멀리 빙 둘러 가기로 했다. 파아팃 선착장에서 사톤 선착장 까지는 꽤 긴 거리였고, 거기서 BTS를 타고 싸얌 까지 갔다.


Siam Ocean World. 동남아시아 최대의 수족관은 아주 좋았다. 1200B 짜리 티켓을 여행사를 통해 구매하면 500B에 해 준다. 세 식구가 저녁까지 시간 때울 꺼리가 마땅치 않았는데 세 시간 보내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인근 식당에서 밥을 먹었고, 망고탱고에서 망고 아이스크림을 사 주려니 다들 싫단다. 망고 아이스크림이 얼마나 맛있는지 모르는 것 같다. 망고 아이스크림보다 맛있는 것은 두리안 아이스크림인데, 이거 파는 데가 별로 안 보였던 기억. 두리안 아이스크림을 처음 먹어보고 감탄했던 것이 십년도 더 전, 달랏의 시장에서 였다.



싸얌 스퀘어 부근, 내셔널 스타디움 역 앞에서는 Bangkok Shutdown protest가 한창 진행 중. 한국으로 치면 싸얌 인근은 서울광장 같은 곳이다. 'No more election, No more corruption'이란 문구가 곳곳에 보였고 사람들은 연설이 끝날 때마다 호각을 요란하게 불거나 손뼉 치는 소리가 나는 작대기를 흔들었다. 시위 현장 출입구에 보안요원들이 인원 통제를 하고 있었고 현지인들의 짐을 검사했다. 하지만 외국인은 반기는 미소와 함께 시위 장소로 마음껏 진입 가능했다. 


방콕 여행할 때 빨간 셔츠나 노란 셔츠는 입지 말란다. 이들은 말하자면 반탁신파인 노란 셔츠 쪽인데, 보시다시피 노란 셔츠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테러 염려 때문에 이들도 노란 셔츠를 안 입는 것 같다. 시위장 인근은 인파와 온갖 잡동사니를 파는 가판대로 북적였고 별다른 위험을 느끼지 않았다.


카오산으로 돌아와 밤 버스를 타고 치앙마이로. 여행자 버스 티켓은 두당 500B, 1박 2일 트래킹 티켓은 1300B. 뭐하러 이렇게 하냐 싶기도 하지만 이 더위에 북부 터미널에 가서 치앙마이 티켓을 사고 치앙마이 도착해서 아침에 문을 연 여행사를 찾아다니며 트래킹 예약을 하는 과정이 식구들을 데리고 다니며 하기엔 뭔가 번거로웠다. 하여튼 치앙마이 행 여행자 버스에 올랐다.


새벽 5시 무렵 버스가 도착한 곳은 치앙마이 인근의 어떤 주유소 앞. 여행사 픽업을 기대했으나 썽태우 운전수는 서로 자기네는 픽업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황당하달까. 구글맵을 살펴 보니 배낭 메고 터덜터덜 걸어서 10km 가까이 떨어진 시내에 가기엔 무리다. 어쨌든 시내엔 가야 하니 두당 60B 씩 내고(어린이는 40B?) 썽태우를 탔다. 자기들이 어디에 떨어졌는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세 이탈리아 처녀들의 길을 GPS로 찾아주고, 뉴욕 아가씨를 도와줬는데 아내는 우리 처지가 제일 한심한데 남들 돕기 바쁜 남편을 질타했다. 


썽태우 기사가 내려준 곳은 Nice guesthouse 앞. 영어가 안 통하니 썽태우 기사더러 뭐라 할 수도 없고 손짓으로 그가 가리키는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서 우리는 트래킹 예약을 했는데 여기다 내려 주더라, 여기가 맞냐 하니까 어디서 트래킹을 예약했냐고 묻는다. 홍익 여행사 라니까 알았단다. 아홉시 무렵에 픽업이 올테니 그걸 타고 가면 된단다. 그리고 샤워장은 2층에 있으니 사용하란다. 참 마음에 드는 주인이다. 널직한 수영장이 딸린 게스트하우스도 좋아 보였다. 숙소 예약을 하려니 full이란다.  


샤워하고 짐을 맡겨놓고 성곽 안쪽의 북동쪽 게스트 하우스 밀집 지역을 한가하게 걸어갔다. 내일 계획은 트래킹이 끝나자 마자 방콕행 버스를 타고 내려가는 것. 아내는 사람 잡을 일 있냐며 치앙마이에서 하루 묵잔다. 그래서 아침을 먹을 식당을 찾을 겸, 게스트 하우스도 알아볼 겸 걷는 중인데 찾고자 하는 게스트하우스는 안 보였다.


치앙마이는 세 번째. 저번에 라오스 여행할 때는 님만헤만 부근의 우유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에 묵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성곽 안쪽이 여전히 좋다. 아내는 여기서 며칠 묵었으면 바랬지만 우린 장기 여행자도 아니고 며칠씩 멍 때리면서 시간을 보낼만큼 여유도 없었다.


이 여행은 아내가 원하는 대로 계획되었다. 고전적인 코스인 태국 북부에 갔다가 남부에 가는 것. 아내나 나나 트래킹을 별로 하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아이를 위해서 트래킹을 신청했다. 내가 트래킹을 안 하려는 이유는 뭐 별 건 없었다. 고산족을 관광 상품화 하고 코끼리를 괴롭혀서? 


트래킹 첫 코스는 이렇게 코끼리를 타는 것. 누구 말마따나 코끼리 먹이 주기 같았다. 아내가 기억하는 치앙마이 트래킹은 코끼리를 타고 강을 건너고 밀림 속을 걷는 것이었는데, 조그만 야산을 이렇게 코끼리 등짝에 편히 앉아 30분 가량 한 바퀴 도는 것이 다였다. 투어 맴버가 조촐해서 우리 가족 세 명과 한국인 대학생 두 명. 대학생들과 우리가 서로 사진을 찍어서 카카오톡으로 교환했다. 

그리고 걷기 시작. 건기의 막바지라 떡갈나무 잎사귀처럼 보이는 낙엽이 잔뜩 쌓인 길을 헉헉 대며 올라갔다.


우리 가이드는 샘, 48세 였던가? 카렌족. 목 긴 카렌족 말고 그냥 카렌 족. 아이에게 낙엽 모자를 만들어 주더라. 애는 더운데도 씩씩하게 잘 걸었다. 


중간에 만난 폭포. 폭포 아래서 물을 뒤집어 쓰고 물속에 푹 담궜다 나왔다. 학생 중 한 명은 감기로 골골 거렸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억지로 트래킹에 참가했단다.


10km 가량 걸어서 오늘 밤 묵을 카렌족 마을에 도착했다. 이 촌락은 15년 전에 버마에서 건너온 카렌족들이 만들었고 관광객을 받기 시작한 것은 5년이 안 되었단다. 


아이는 닭, 병아리, 풀어 키우는 돼지 새끼들 사이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먹이를 주고 팔짝팔짝 뛰면서 좋아했다. 그런데 흑돼지 잖아? 


아이가 닭들에게 모이를 주고 있을 때 지나가던 동네 아저씨가 장닭 한 마리를 가르키며 지금 모이를 주는 닭들 중 저 놈은 오늘 당신들의 저녁식사꺼리란다. 아이에게 알려주니 신이 나서 그놈에게만 모이를 준다.


화장실 겸 샤워실. 해가 져서 기온이 떨어지기 전에 얼른 샤워부터 했다. 샤워 꼭지가 달려있고 모터 펌프로 지하수를 끌어 쓴다니, 이 정도면 럭셔리 아닌가?


숙소. 매트리스를 깔았고 모기장을 쳐 놨다. GPS로 고도를 보니 1000m. 모기가 없단다. 저녁이 되자 기온이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벼룩, 빈대류가 염려스러워 폴리에스테르 재질의 깔개와 역시 폴리에스테르제 침낭을 들고 왔다. 벼룩, 빈대로부터 자유로워 지려면 아예 머리부터 발끝까지 폴리에스테르로 도배하면 장땡이다. 


부엌


골골대던 젊은 친구에게 약을 줬었다. 아세트 아미노펜 계열의 타이레놀과 오래된 인연을 끊기로 하고, 이번엔 이부프로펜 계열의 '이지엔6'를 가지고 다녔는데, 약효가 신속하고, 아이 한테도 먹일 수 있으며, 부작용이 없다는 장점이 있다. 저녁 먹을 무렵엔 젊은이가 기운을 차렸다. 트레킹 중 너무 힘들어 해서 샘이 오토바이를 태워 미리 마을에 보냈었다. 산속 깊은 곳이라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다. 이들의 삶은 오토바이로 문명과 연결되었고 멧돼지에게 먹이를 줘서 집돼지로 키우던 수쳔년과 별로 달라보이지 않았다. 다만, 화전은 안 했다. 


저녁을 먹으며 카렌족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별달리 새로운 얘기는 없었다. 아편 농사니, 카렌 반군이니, 미얀마에서 쫓겨나고 태국 정부에서도 쫓겨나고 유엔 캠프에서도 쫓겨나는 얘기들. 그런데 왜 소는 안 키워요? 뭐라고 그러는데 잘 못 들었다. 잠깐 빠져나와 어른들 얘기에 심심해 하는 아이를 데리고 어두운 길섶을 거닐며 은하수를 구경했다. 구글 별지도로 별자리 이름을 찾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모닥불 피워놓고 고기 궈먹게 시장에 들렀을 때 삼겹살을 사올껄, 후회되었다.


아침이 밝아오고 일찌감치 잠에서 깼다. 어젯밤에 8시에 출발하자고 말했다.


아침을 먹었다. 모이를 줬던 닭 요리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씁쓸하고 안타까웠다.


사탕외교. 마누라가 고산족 준다며 집에 있던 사탕을 그러 모으더니... 샘의 딸 중 하나는 아파서 밤새 고생했다더라. 샘은 장모님과 함께 살았다. 아, 모계사회였던가? 잊어버렸다.


대략 8km의 길을 걸어서 내려가는 도중 샘이 아내와 나를 위해 풀반지를 만들어줬다. 샘에게는 딱히 우리 부부가 결혼 십년차 기념으로 여행 중이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아내는 풀반지를 재밌어 했다.


대나무 뗏목을 타고 내려오기. 물에 엉덩이가 잠긴 채 한가하게 40분쯤 떠내려 갔다. 바람이 불자 낙옆이 하늘에서 춤을 추며 떨어졌다. 나같은 어른이야 이런 트래킹이 많이 시시하지만 아이는 코끼리도 타고 뗏목도 타고 아빠와 여행하는 것이 신이 났다. 


아내는 젊은 친구들에게 여행 정보나 팁을 알려줬다. 그들더러 맥주를 사란다. 내가 사오려니 말리며 눈치 빠른 젊은 친구들이 싸가지가 있단다. 아내가 하는 꼰대질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내가 젊은 시절 돌아다닐 때 받은 은혜를 나이 들어서 젊은 여행자들을 돕는 것으로 갚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니 자기는 은혜를 입으면 그때 그때 바로 바로 갚았단다. 


치앙마이로 돌아와서 어제 예약해 두었던 호텔로 갔다. 한국어로 인사를 하고, 무한도전의 메뚜기 아저씨를 좋아하며, 한국 남자친구를 만나고 싶어하는 아가씨가 리셉션에 있었다. 딸애가 수영장에서 노는 동안 벤치에 앉아 한가하게 책을 읽었다. 저녁을 먹으려고 거리로 나왔다. 


여행은 내게 영구적인 뇌손상에 버금가는 변화를 준다. 그것과 비슷한 영향력을 가진 것이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약, 술, 실연 정도? 나열 가능한 항목 중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인 것이 여행이다. 


야시장 까지는 걸어가기 애매한 거리라서 사원이나 돌자고 올드 시티를 한가하게 걸었다.


왓 쩨디 루앙. 아이에게 머리를 만지면 안 된다고, 왜 안 되는지 가르치고 와이도 가르쳤다. 태국도 많이 변해서 왠만한 시골이나 서비스 업종 종사자가 아니면 와이를 하지 않았다. 


왓 쩨디 루앙. 밤에 오니 분위기가 달랐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죽은 선사의 밀납인형을 봉납당 문틈으로 구경했다. 부처와 마찬가지로 깨달은 자는 태국에서 존경받으며 그래서 그의 밀납인형을 만들고 인형 앞에 그가 죽으면서 남긴 투명한 사리 항아리를 진열하고 기복한다고 아이에게 말했다. 


태국인은 점잖다. 그들이 서양인을 칭하는 파랑이란 단어에는 그런 점잖음과 다소의 모호한 경멸과 갖가지 향신료 같은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어쩌다 내가 까올리라고 말하면 친니를 대하는 태도와는 다른 미소를 볼 수 있었다. 중국인은 정말 많았다. 트래킹 중에 샘에게 중국인 여행자들이 많이 오냐고 물으니 그들은 대개 치앙마이에서 머문단다. 적은 수의 중국인 배낭 여행자들이 산간오지를 방문한단다.


아내가 사원 관람이 진력이 났는지 나이트 바자에 가자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야시장에 갔다. 돌이켜보면 나나 사원 관광을 좋아했지 아내는 좋아한 적이 없다. 야시장엔 볼만한 물건이 별로 없었다. 주말시장은 어제 끝났고 치앙마이의 나이트 바자는 십수년전의 팟뽕 야시장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패션프룻과 드래곤프룻을 헷갈려서 마누라가 엉뚱한 쥬스를 마셨다. 아이는 변함없이 수박쥬스로 배를 채웠다. 


이번 여행에서 계획, 기획, 숙소 예약, 일정, 커뮤니케이션은 대부분 내가 했고 아내는 주로 협상을 했다. 아내가 내게 여기서 택시값은 보통 얼마야? 물으면 적정한 택시값을 알려주고, 아내가 흥정하는 식. 


아내는 날더러 길치라고 했지만 나처럼 길을 잘 찾는 여행자는 지극히 드물다. 길에 관한 동물적인 감각이 있달까? 그래서 바라나시의 좁은 골목에서도 길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파리의, 무미건조하고 어디가나 똑같이 거지같은 도로에서는 길을 잃었다. 파리의 도로는 사선으로 비스듬히 누워있고 교차로 다섯 개 정도를 지나면 각 계산이 잘못 되어 옵티멀 패스에서 벗어나 어떤 식으로든 긴 우회 경로가 되어 버렸다. 문화예술의 도시인지 문화관광의 도시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거지같은 도로 계획이 수백년째 이어지는 걸 보면 프랑스인들의 두뇌 구조가 의심스러워 진다. 반면 바라나시는 길의 접속과 분기가 예측 가능했고 거리마다 미묘하게 특색이 있어 분류가 가능했다. 


아내는 아마도 라오스 일주를 할 생각이었다. 수완나품 공항에서 늦은 저녁 무렵에 라오스 국경으로 출발하는 버스가 있어 여정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려고 했다. 나와 딸은 따로 여행하면서 남부의 한적한 시골 해변 마을을 한 바퀴 돌 생각이었다. 방콕에서 헤어졌다가 방콕에서 만나 귀국하는. 아내와 나는 여행 하는 스타일이 워낙 다른데다 피차 개성이 강해 같이 다니면 보통 티격태격 싸움이 났다. 


대부분 만실이라 한참을 여기 저기 걸어다니며 간신히 숙소를 구했던 루앙프라방에서 만난 나이  든 한국인 부부가 값싸게 유럽을 여행하는 방법이라며 까미노에 관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라오스 여행 중 빈대에 심하게 당했고 한쪽 눈을 다친 남편을 아내가 보살피고 있었다. 부부의 말이 계기가 되어 작년에 까미노를 걸었다. 숙소에서 그날 밤 나는 주인장과 라오스의 땅 값, 사업 아이템 따위를 늦은 밤까지 얘기했고, 그 다음 날 몇 명의 여행자들을 그러모아 썽태우를 임대해 폭포를 구경하러 갔다. 폭포에서 한 친구가 거머리에 피를 빨렸다. 힘겹게 다리에 붙은 거머리를 떼어내고, 일행 중 한 명이 호기심에 통통해진 거머리에게 콜라를 부었더니 먹은 피를 다 토해내고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콜라에 이런 효능이 있을 줄이야. 그런데 왜 갑자기 콜라에 말라죽은 거머리  생각이 났지?


아침을 먹으러 들른 식당. 어제, 오늘 두 끼를 여기서 먹었다. 따지기 좋아하는 마누라가 주인장에게 쪽에 계란을 넣었느니 마느니 옥신각신 하는 동안 슬그머니 애를 데리고 나왔다. 


치앙마이 공항 가는 길. 썽태우 적정가는 60B라고 생각했지만, 100B 달라는 거 80B 주고 탔다.  


숙소에서 전날 밤 아내 얘기대로 고생해서 버스나 기차 타고 방콕에 가지 않기로 하고 녹에어의 비행기를 예약하려고 했다. 작년까지는 별 문제 없었던 기억인데, 결재 창에 갑자기 한국 페이지가 나타나 인증서 암호를 요구해서 결재가 안 된다. 망할 대한민국 정부다. 세금이 아깝다. 하는 수 없이 회사 컴퓨터에 원격 접속해 간신히 예약할 수 있었다. 두당 1650B짜리 항공권. 


방콕까지는 1시간 비행. 737-800. 빵과 음료수를 줬다. 터불런스 때문에 비행기가 요동을 치고 착륙을 참 지지리도 못 했다. 태국인들은 쿨해서 스페냐드처럼 착륙에 성공했다고 박수를 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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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띠아고 길을 걷기에 앞서 올레 데이터 로밍 서비스를 보고 이게 쓸모가 있을까 싶어 한 번 사용해보기로 했다. 마침 체험단 신청을 받길래 체험단 신청을 했더니 선정되었다.

2주 유효기간, 50MB 데이터 사용 가능한 요금제가 3만원이다.

공항에서 출국 전에 개통을 했고 파리에 도착해서 통신사를 vodafone으로 변경하니 데이타망이 작동하는 걸 확인했으나, 숙소에서 wifi가 사용 가능해서 굳이 사용할 필요성을 못 느껴 꺼 두었다.

스페인에 넘어와서 다시 통신사업자를 vodafone es로 변경하니 작동되는 걸 확인. 역시 숙소에서 wifi가 되니 딱히 사용 안 하고 있다가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없는 길에서 가족에게 카카오톡으로 안부 인사를 문자로 보내거나 페이스북 앱으로 사진을 업로드할 때 잠깐 사용했다.

50MB라는, 코딱지만한 용량은, 하룻밤 데이터망을 모르고 켜 두었더니 각종 푸시 앱으로 전송되는 데이터 때문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올레에서는 몇 차례에 걸쳐 사용량을 문자로 통보해 주었고 50MB가 초과되는 순간 데이터망을 바로 차단했다.

산띠아고 길을 걷는 동안 와이파이가 안 되는 숙소가 종종 있어 갑갑하던 차에 vodfafone 대리점에서 SIM 카드와 데이터 플랜을 결합한 상품을 판매하는 것 중 하나를 구입했다. 유효 기간이 90일, 1GB 제공하며 가격은 세금 포함해 19유로인데, 한화로 약 25000원 가량이었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스페인 체류 기간이 대략 한 달 정도 되고, 다국가 로밍이 필요치 않으며, 3만원에 50MB짜리 코딱지 같은 서비스를 굳이 비싼 돈 주고 쓸 필요가 없어 보였다. 주윗 사람들에게도 권하지 않는다. 현지 SIM이 짱이다.

올레 데이터 로밍 서비스가 경쟁력이 있으려면, 아니 단지 합리적인 서비스가 되려면, 일단 용량과 유효기간을 늘려야 할 것 같다. 나 같으면 현재 상태의 올레 데이터 로밍 서비스를 쓸 일이 앞으로는 없겠다.

이상 체험단 후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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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준비하기

여행기 2013. 2. 27. 22:59
개인 관리용 위키를 알아보려고 http://www.wikimatrix.org/ 에서 여러 조건을 비교해보니 내게 맞는 것이 DocuWiki였다. 사용해 보려고 열심히 익히다가... 아참, 그러고보니 내 여행 위키가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들어 가보니 여전히 작동한다.

씨티에서 발급한 카드는 세 장으로 그냥 체크카드, 국제 현금 카드, 신용카드가 있는데 그중 국제체크카드에 VISA 마크가 새겨져 있어 대만 호텔 결재할 때 사용해 봤더니 안 된다. 한국에 돌아와서 물어보니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이 가능하며 호텔 같은 곳에선 아마 사용이 안 될 꺼란다. 기존 신용카드에 국제 현금 카드 기능을 추가하길 추천하더라.

Paris -> Saint Jean Pied de Port 까지 가는 TGV+TER 기차표는 인터넷으로 구입이 가능했다. 성수기에 보통 110 EUR 정도 하다가 간혹 68 EUR 짜리가 나왔다. 티켓 가격이 15만4천원에서 9만5천원으로 차이가 5만 9천원 가량, 그래서 날짜에 따른 변동이 별로 크지 않은 항공권을 기차표에 맞췄다.

항공권은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러시아 항공은 108만원, 네덜란드 항공이 118만원, 그외 110~160만원까지 다양한데, 외환 크로스마일 카드로 결재가 가능한 것은 네덜란드 항공 뿐. 암스테르담에서 스탑오버 하려고 했더니 하룻밤을 묵어야 하고 시간도 별로 안 좋아 스탑오버는 관두고... 음... 돌아오는 길에 바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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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 로밍 체험단

여행기 2013. 2. 27. 22:44
올레 로밍 운영 담당자 입니다
올레 로밍 체험단에 응모 해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귀하는 올레 로밍이 모집하는 체험단에 선정 되셨습니다.
다시 한번 축하 드리며, 아래 내용을 참고하셔서 체험단 혜택을 꼭 누리시길 바랍니다

< 신청 내역 확인 >

ㅇ 신청 부가서비스 : 데이터 로밍 3만원 무료
ㅇ 서비스 상세 내용 및 제곡 국가 확인
☞ http://mobile.olleh.com/roaming/_service/service/charged/dr3.asp
http://smartblog.olleh.com/2262

※ 방문 국가가 해당 서비스 지원 가능 여부는 출국 전 커버리지 확인 후, 이용하세요
서비스 신청은 각자 일정에 맞게끔 개별 신청 하세요

< 체험 후기 작성 방법 >

ㅇ 필수 포함 내용 ( 이미지 포함 )
- 서비스 신청 방법
- 서비스 사용 방법
- 사용 후기 및 느낀 점
- 그 외 자유롭게 기술 가능

ㅇ 포스팅 방법
- 개인 운영 블로그 및 각종 사이트 ( tistory 등 ) 포스팅
- 블로그 포스팅 Short URL 포함된 SNS 홍보

ㅇ 혜택 수여 방법
- 로밍 이용 후기 확인 후, 익월 (4월) 로밍 요금에서 차감
*2월 말 / 4월 초에 걸쳐서 사용한 부분은 미포함


ㅇ 주의 사항
- SNS에 블로그 Short URL 없이 단순한 텍스트 나열식의 글은 채택 불가
- 컨텐츠 내용이 부실하여 채택되지 못할 경우 체험단 제공 혜택 수혜 불가
- 사용 후기는 신청한 부가서비스 위주로 작성 필 ( 타 서비스 같이 이용 시 같이 내용 기술 해도 무관 )
- 사용 후, 컨텐츠를 roaming2013@kt.com 으로 3월 내 송부
- 3/29 13시까지 미도착 분에 대해서는 혜택 지원 불가


추가로 궁금한 점은 언제든 문의 주세요 !
그밖에 추가 전달 할 내용은 메일로 다시 전달 드리겠습니다

올레 로밍과 함께 즐거운 여행 되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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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mand

여행기 2013. 2. 22. 10:58
open street map을 사용하는 Gps program으로 쓸만한 것들을 찾다가 osmand를 발견. 이 이상 가는 프로그램은 없을 것 같다.

Osm 벡터 지도를 다운받아 offline 상태에서 사용 가능하다. Bitmap tile을 사용하는 프로그램은 많고 대충 쓸모가 있지만 poi 검색이나 routing은 online으로 연결되어야지만 가능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구글맵인데 외국 여행할 때 인터넷이 가능하다면 이보다 더 좋은 맵은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하지만 구글맵은 스케일링이 자유롭지 않고 온라인 상태에 매우 민감해 인터넷이 안되는 지역에서는 오프라인 캐시에 의존하고 내가 설정한 poi가 다른 프로그램으로 export가 안 되고 수정하기도 어려워 여러 모로 불편하다.

같은 free map이라도 자유도가 극단적으로 높은 osm 지도는 여러 가지 면에서 구글맵을 압도한다. 일단 풍부한 맵 데이터와 이러한 맵 데이터를 가공할 수 있는 무수한 프로그램, 맵을 사용하는 무수한 프로그램들이 있다.

이중에 osmand가 다른 프로그램보다 나은 점이라면 벡터맵의 처리 속도가 빠르고, tracking이 가능하며, poi검색이 되고, routing이 되고, wikipedia poi 정보와 연동이 되고, 플러그인을 설치하면 contour map(등고선 지도)도 볼 수 있다.

사실상 gps계의 끝판왕. 업데이트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앱 구매는 일종의 후원인 셈이라 두 말 않고 구입. 가격은 8000원 가량.

구름은 바람없이 못 가고 인생은 사랑없이 못 가네.

예전에 만든 한국 지도가 나와 흐뭇. 예전에 정리한 Poi 정보를 한 번 업데이트 해야 하는데 어느덧 2년이 흘러 버렸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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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ta

여행기/Indonesia 2011. 12. 30. 12:00
아침에 깨보니 6.30am. 세수만 하고 어제 사온 물을 마셨다. 짐을 정리하고 내려와 아침으로 토스트, 계란 프라이, 커피 따위를 먹고 마셨다. 어제 먹은 팬케잌과 더불어 정말 맛이 없다. 아침 식사를 안 줘도 좋으니까 방값이나 깎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7.30am쯤 숙소를 나와 Monkey Forest를 향해 걸었다. 도착해 보니 이른 시간이라서인지 입장료를 받는 사람이 아직 출근하지 않은 듯. 무료 입장.

인디애너 존스 분위기가 나는 작은 사원과 밀림이 펼쳐졌다. 원숭이들이 코코넛 껍질을 깨먹고 뛰노는 모습을 구경하며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9.10am. 걸었다.

왕궁에 가서 구경할 것도 없는 내부를 하릴 없이 돌아다니다가 북쪽 길을 슬슬 걸어가는데, 앞서가던 서양남녀가 갑자기 서로를 부등켜 안더니 키스를 한다. 보기 민망해서 돌아섰다. 이건 뭐... 우붓에서 열렬한 사랑을 찾아낸 또 다른 쥴리아 로버츠?

어제 못갔던 Dewi Warung이 맛있다길래 그 식당을 찾으러 Jl. Hanuman까지 갔다가 길을 잠시 잃고 헤멨다. 우붓의 중심가는 부띠끄, 마사지샵, 채식주의자 카페, 여행사가 전부인 것 같다. wifi 접속이 안되도 wifi를 켜놓고 있으면 GPS assist data를 인근 wifi ap로부터 다운받아 비교적 빠르게 위치를 찾아주어 여행이 그 동안 편했다. 

들어가보지는 않았지만 Dewi warung에는 wifi가 없었고 전반적인 메뉴가 어제 밥을 먹었던 warung lokal보다 약간 비싼 편. 그래도 들어가려고 했는데 문이 잠겼다. warung lokal에 다시 들러 mie goreng을 시켜 먹었는데 어제 먹었던 나시 고랭과는 달리 영 아니었다. 그래도 무성의한 인스탄트보단 나았다. 어떤 외국인 라면 전문가는 내가 자카르타의 잘란 작사에서 먹었던 인스턴트 미에 고랭을 세계 10대 라면 중에 하나로 꼽았다. 그 미원 덩어리의 맛대가리 없는 비빔면이 뭐가 그리 맛있다는 건지 믿겨지지 않는다. 이 나라 저 나라 온갖 라면을 섭렵해 본 개인적 경험에 따르면 대부분의 국가 라면은 면발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고 자국의 면음식을 단순히 인스탄트화한 것에 불과하다면 한국 라면은 제2의 창조라 불러도 될만큼 독자적인 음식 장르다.

마누라와 딸과 skype로 잠시 통화했다. 딸애는 어젯밤에 아빠가 보고 싶어 자다 깨어나 흑흑 울었단다.

11.30am이 다 되어 숙소에서 도착해 샤워하고 체크아웃했다. 관광 안내소의 벤치에 앉아 셔틀버스를 기다렸다. 

방금 관광 안내소를 찾은 여자는 숙소의 옆 방에 묵고 있던, 혼자 여행 온 인도네시아 아가씨였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면 마치 생쥐처럼 금새 방 안으로 들어가 숨던... 아침에 주인 할머니의 손자로 보이는 정신지체아 소년이 내게 집적거릴 때(사실 우리 둘이 놀았다) 옆 방의 문이 달그락 거리며 잠기는 소리를 들었다. 숙소에는 낮이면 마사지를 하는 젊은 아가씨들이 계단 맡에 걸터 앉아 있었다. 손톱을 손질하고 매니큐어를 만지작거리며... 마치 음란한 마사지 샾이라도 되는 것처럼(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미소 한 번 없이 그들을 스쳐갔다. 친절하지만 피곤에 절은 것 같은 표정이 얼핏 얼핏 지나가곤 하던, 서빙을 보고 방 청소를 하고 음식을 만들던 점원들. 나이를 먹어도 영민한 눈동자가 반짝이던 주인 할머니. 맛없는 음식, 젤라또 가게에 길게 늘어선 관광객들, 길을 가득 메운 차량, 서양 여행자가 오토바이를 몰고 가다가 사고가 나서 차와 오토바이 사이에 다리가 끼어 있는 걸 빼냈다. 시장에서 3,000rps란 대단히 저렴한 가격에 타이거 밤을 팔던 아줌마에게 깍아 달라고 말했다가 혼줄이 나기도 하고, 한국인 신혼여행자들이 북새통의 시장에서 뭐 사갈만한 거 있나 둘러보는 모습을 보았다. 시장통의 과일 가게 앞에서 서성이다가 과일을 내게 하나 주며 먹어보라던 아줌마의 웃는 얼굴, 싸롱을 입지 않고 시내의 사원에서 기다란 장대를 들고 과일을 따던 아저씨, 공사중인 사원 앞에서 담배를 바꿔 피웠던 아저씨 등등이 생각났다. 우붓에는 혼자 온 여자 여행자들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띄었다. 여기 며칠 더 머물렀어야 했다. 조그맣고 사건 당시엔 금새 잊어버렸던 인상들이 광합성하는 수초들의 잎사귀 뒷면에서 풀풀 피어오르는 산소방울처럼 끊임없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관광안내소에는 에코 트래블을 주관하는 무수한 여행사들의 팜플렛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MTB를 타고 논 사이로 난 길을 달리고 건강식이라는 채식을 먹고 마시며 로컬리 마을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놀다가 불편한 침대에 누워 잔다던가... 차가 도착했다. 운전사가 내가 들겠다는데 굳이 짐을 들어 차로 옮겨줬다.

차량은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인도네시아 여행자가 한 명 탔다. 그는 자와섬에서 전국일주 중이다. 길거리에 트렁크를 놔두고 우두커니 앉아있던 미국인 여자가 두 번째로 탔다. 승객은 그걸로 끝이다. 두 명 이상이 안되면 미니버스를 운항하지 않는단다. 그러면서 세 명이라 참 다행이란다. 이게 과연 5만 루피아나 주고 탈만한 가치가 있을까? 그냥 로컬리들이 타는 미니버스를 타고 덴파사르 북부 터미널에 갔다가 거기서 쿠타행 미니버스를 다시 타는게 낫지 않았을까? 난 내가 그렇게 내켜하지 않았던, 여행사나 전전하는 서양 여행자처럼 돌아다니는 중이다. 차는 이제 시작된 교통체증 속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했고 미국 여자는 덥다고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탄소 풋프린트를 적게 남기려고 에어컨을 일부러 고장낸 것 같다고, 인도네시아 어디가나 에어커이 맛간 차들 뿐이라고 말하니 자기는 발리에만 왔고 자와 섬에는 안 가봤단다. 

애리조나 출신. 친구가 내일 쿠타 해변에 도착하고 자기는 해변 근처의 어떤 호텔을 미리 예약해 놓았단다. 뻥 같다. 혼자 다니는 것 같다. 운전사는 지금이 성수기라 쿠타 해변에서 숙소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어떻게 되겠지. 이번 여행은 이제는 기억도 안나는 저번 미얀마 여행처럼 가이드북에 의존하지 않고 그저 포인트만 잡고 되는대로 돌아다니는 중. 졸립다. 땀을 흘리며 늘어진 채 선잠이 들었다가 깨었다가를 반복했다. 

인도네시아 배낭 여행자는 미국인 여자와 어디가 더 더운지 경쟁했다. 애리조나는 무려 150F 란다. 다만 건조해서 여기처럼 덥지는 않다고... 운전사가 숙소 위치를 묻더니 자기는 쿠타 해변 앞에 차를 세우는데 거기서 미국 여자가 예약한 숙소까지는 꽤 거리가 멀다고 원한다면 웃돈을 주면 거기까지 데려다 주겠단다. 200,000rps. 놀랍군. 휴대폰으로 구글 지도를 띄워 그 숙소를 찾아보니 쿠타 해변에서 약 3km 가량 떨어졌다. 하지만 더워서 저 거대한 트렁크를 질질 끌며 가긴 무리같기도 하고... 운전사가 장사하겠다는데 참견하기 뭣해 입을 다물었다. 

지긋지긋한 교통체증 때문에 한 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한다던 쿠타 해변에는 3pm, 그러니까 3시간이 넘게 걸려서 도착했다. 참 희안한 것은 그때까지 대화하는 동안 운전사와 인도네시아 여행자는 내가 인도네시아 사람인 줄 알고 있었단다. 운전사는 내게 행운을 빌어줬다. 숙소를 얻길 바란다며.

내린 곳은 Jl. Legian 남쪽 입구. 레지안 길은 쿠타해변로와 남쪽에서 북쪽으로 몇 킬로미터 가량 주욱 평행하게 이어진다. Kuta 해변은 배낭여행자들 사이에서 3K중 하나로 불리던 곳이다. Kaosan, Katumandu, Kuta. 약 20년 전 배낭여행자들의 성지같았던 곳. 

행운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저가 숙소가 몰려있는 Poppies Gang이란 귀여운 이름의 길거리 근처에 있는 거의 모든 숙소가 full이었다. 거의 모든 숙소란? 골목이 하도 복잡하고 다닥다닥 붙어 있어 '모든' 숙소에 들러보진 못했다. 어쨌든 배낭을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차츰차츰 북쪽으로 떠밀리듯 이동하다 보니 쿠타 해변의 북쪽 끝까지 올라왔다. 250,000짜리 fan room, 250,000짜리 a/c룸 등을 지나쳤다. 더 뒤져보니 150,000짜리 fan 룸이 있다. 삐끼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삐끼의 의견을 무시하고 혼자 찾기도 했다. 지친다. 비싸면서도 방이 너무 구질구질해 북쪽으로 더 올라가니 150,000짜리 그럭저럭 괜찮은 방이 나왔다. 협상이 안 된다. 내일 예약이 걸려 있단다. 그냥 150,000에 잡았다. 숙소 잡는데 무려 두 시간 가량을 보냈다. 어느새 5pm. 피부에서 소금이 벅벅 긁힌다. 짐을 내려놓고 일단 샤워부터 했다.

샤워를 마치고 짐을 정리한 후 해변으로 걷다가 외국인이 현지 여자애를 오토바이로 치는 사고를 봤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아이를 병원에 보낸다. 어제 우붓에서도 사고를 봤다. 심한 교통 체증에 자동차 두 대 사이를 무리하게 헤집고 가던 오토바이가 끼었다. 서양 아줌마를 오토바이에서 빼내고 다리를 살피니 멀쩡했다. 남자는 머쓱한 표정으로 긁힌 오토바이와 자동차를 연신 살폈다. 자동차 운전수들은 괜찮다며 두 사람을 길섶으로 옮겼다. 

해변은 지저분했지만 surfing 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하고 싶다. 한 시간쯤 눈여겨보니 어떻게 타는지 알겠다. 서핑을 할 처지가 아니라서 심난. 해변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일몰을 보았다.

야시장을 찾아갔다. 새우 버터구이 30,000, 빈탕 맥주 큰 병 30,000. 밥 3,000. 총 63,000 밥을 먹었다. 새우는, 달랑 새우만 기름에 튀겨 가져오더라. 홛앟나 나머지 하하 웃고 말았다. 맥도널드 세트 메뉴가 35,000인데 그것보다 더 비싸면서 맛은 별로.

Kuta square에서 뭐 쇼핑할 것 없나 뒤지다가 아내와 내 t-shirt를 카드로 긁었다. 하루가 심심하게 가 버렸다. 내일은 아침 느즈막히 일어나 matahari 내부의 super에서 몇 가지 선물꺼리를 장만하기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mini mart에서 차 7,500짜리를 하나 사서 마시며 wifi를 좀 했다. 왠지 재미가 없다. 

12월의 마지막 날 아침, 7.30am. 딱히 할 일도 없고 checkout time이 11am이라 애매해서 10.30am까지 밍기적거렸다. 드라마 두 편 보고 짐 정리하고 샤워. 나가는 길에 숙소에 짐을 맡기고 해변에 가려니 비가 온다. 살살 온다.

오늘은 쇼핑하는 날이다. 아내는 cinger chocolette가 있으니 사오란다. 까르푸를 찾으러 갔다가 못 찾았다. 엉뚱한 곳에서 길을 헤멨다. discovery mall에 들러(배가 고파서) 점심 세트를 시켰는데 28,000 짜리가 간에 기별도 안 가고 흡사 사기당한 느낌. 엿같은 식사. 까르푸 대신 mall galeria를 찾아 출발. 

일단 아까 먹은 점심이 부실해서 다시 밥을 먹었다. es teh 5,000, nasi soto ayam 10,900. 훨씬 낫다. 샌들 때문에 난 발의 상처가 아파서 밴드에이드 5,000 구입. 인니인으로 안다. 하긴 foot stall에서도 그랬고 인니 여행 며칠 후부터는 죽 인니인으로들 알았다.

수퍼에서 가면 2개를 각각 15,000에 구입. 달걀 부침은 30,000. 비가 그치길 기다리다가 지루해서 ace shop에서 집 꾸미기 용품들을 구경. 우리니라와 달리 직접 집을 꾸미는 사람들이 많은 지 싱크대부터 욕조까지 온갖 것을 다 판다. MTB는 최고가가 한화 60만원 가량. 별로 좋아보이지 않았지만 최근 인니에는 자전거 바람이 불고 있다. 

여전히 비가 와서 mall galeria에 들러 duty free shop에 갔는데 기념품 단가가 너무 비싸 살 엄두가 안 났다. tiger balm이 2.5$, 우붓 시장에서는 3,000. 공시 환율이 9,600인데 여행자 거리에서는 9,300~9,500까지 봤지만 갤러리아 환전소는 8,800. 갤러리아 앞에서 모터바이크를 타고 가던 서양인이 걸렸다. 벌금이 백만 루피아라던가?

꾸따 해변을 향해 걸었다. 여전한 바다. circle k에서 맥주 한 병 16,000 사들고 wifi 사용.wifi 속도가 느려 별로 할만한게 없다. 옆 자리의 십대 애들은 폭죽을 터뜨리며 놀고 있다. 

숙소로 가서 샤워하고 짐을 찾았다. 길리언 도로를 따라 내려 가다가 마타하리의 수퍼에 들러 쇼핑하기 전에 저녁을 먹기로. 빈탕 맥주 한 병, 야채 샐러드, 포모도르 스파게티를 시켰는데 132,250이 나왔다. 카드로 긁었다. 뭔가 이 곳 해변은 나하고 코드가 안 맞는다.

마타하리 수퍼에서 물고기(60,000) arak, 젓가락, 초콜렛 따위를 사니 552,750. 왠지 쇼핑이 마음에 안 든다. 길거리에 인파가 몰리기 시작. 소음 공해다 싶을 정도로 골목마다 쾅쾅 울리는 음악. 

공항까지 걷는다. 중간중간 인도에 구멍이 나 있다. 

Tuban 길에 있는 Krisna Oleh-Oleh Khas Bali 라는 가게에 우연히 들렀다. 9.00pm. 대단한 곳이다. 정신없이 쇼핑. 그래도 286,000 밖에 안 들었다. 기운이 나서 씩씩하게 걸었다. 하늘은 온통 폭죽의 불꽃이고 매케한 연기 속에서 사람들은 새해를 축하하고 있었다. 마치 전쟁난 것 같다.

걸어서 공항에 도착하니 9.40pm, 세수 하고 옷을 갈아입고 출국 절차를 마치니 10.10pm. launge에서 유로 launge(100,00)에 들어가 죽치고 앉아 과자를 먹고 맥주를 마셨다. 여행이 끝났다. 

수원은 여전히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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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ud

여행기/Indonesia 2011. 12. 29. 12:00
며칠 동안 새벽에 일어나곤 했더니 7am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아침을 먹으려고 밖에 나가보니 내가 묵은 곳이 식당 겸 숙소다. 그것도 monkey street의 중심가였다. 아침으로 팬케잌과 티를 주문해 먹는데 Kuchi Kuchi Hotahe가 스피커에서 흘러 나왔다. 인도에 가고 싶다. 주인 할머니는 내가 자기 숙소에 묵은 몇 안 되는 south korean이란다. 우붓의 어디가 볼만하냐고 물었다. Gunug Kawi에 가보란다. 가이드북을 뒤져 보았다. 있다. 거기 가려면 대중교통으론 무리고 자전거로 가려면 상당히 멀다. 투어나 오토바이 밖에 옵션이 없어 보인다. 오토바이를 빌리기로 하고 그쪽 중심으로 어디 갈껀지 미리 경로를 잡았다. 방에 돌아와 샤워하려는데 샤워기가 말을 안 들어 물이 안 나왔다. 샤워기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두 말 없이 2층 방으로 바꿔준다. 어젯밤에 잡은 방보다 더 좋다. 

ubud에서 새벽 1시가 다 되어 어쩔 수 없이 잡은 숙소. 방 크기가 거의 30평대. 내 평생 배낭여행 중 이런 넓이의 숙소는 처음.

숙소 가격 대략 16$(150000rp). 좀 비싸긴 한데 이렇게 럭셔리한 안마당을 가진 숙소라니...

1층 숙소의 샤워 꼭지로 물이 제대로 안 나와 2층으로 옮겼다. 더 좋다. 그런데 우붓에서는 이런 숙소가 그냥 배낭여행자의 숙소일 뿐이고... 아, 생각났다. 쥴리아 로버츠 주연의 eat, pray, love란 영화에서 그 여자가 발리에서 묵었던 숙소가 딱 이랬다.

세상에 무슨 화장실이 내가 평소에 묵던 싱글룸 크기냐...

9am, 별 생각없이 거리에 나왔다. 두리번 거리며 걷고 있으니 어떤 삐끼가 다가와 자전거 빌릴 꺼냐고 묻는다. 스쿠터는? 스쿠터도 있단다. 얼마? 하루에 70,000rps. 좋아요 40,000rps로 합시다. 50,000rps가 좋겠어요. 그럽시다. 라이센스 있냐고 묻는다. 없어요. 나를 다른 가게로 데려갔다. 조용히 말했다. 만일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경찰을 만나면, 수납통을 열어 꾸깃꾸깃 접힌 종이 쪼가리를 가리키며, 이걸 보여주라고 말했다. 이게 뭔데요? 그거에요. 그게 뭔데요? 라이센스 페이퍼요. 마음에 드는 헬멧이 나올 때까지 이것저것 써봤다. 다행히 냄새는 안 났다. 삐끼를 잡고 Gunung Kawi(Gunung은 산이란 뜻)에 가려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었다. 일단 기름을 여기 여기 가서 넣고, 거기서 죽 가다가 삼거리 만나면 좌회전해서 죽 올라가면 된단다. 거참 헷갈리는군. 해 보자.


그 전에 근처 저가 숙소 골목에 들렀다. 세 군데는 리셉션에 물어보니 방이 없고 다른 곳들은 full 팻말을 걸어 두었다. 하이 시즌이라 방 구하기가 어렵단다. 어젯 밤에 벨지움 부부는 방을 구했을까? 두세 군데 더 들러보니 150,000~200,000rps 가량 했다. 몇 군데 숙소를 잡아보니 이제 감이 잡히는데, 인도네시아에서는 방값을 적어놓은 tarif를 의무적으로 비치하게 되어 있다. 메뉴판은 성수기 가격과 비수기 가격으로 나뉘어 있다. 그러니까 이들이 비수기 가격이 적힌 메뉴판을 잘못 내놓았다가 서둘러 바꿔도 딱히 사기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침에 방이 업그레이드 되었는데 굳이 옮길 필요 없을 것 같다. 전반적으로 둘러본 숙소들이 자와섬 보다는 훨씬 나았다. 엊그제 브로모에서 만난 여행자 중에 한 명이 발리 섬이 숙소는 같은 가격이라면 자와섬 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라고 말한 것이 기억났다. 하지만 그는, 엄청나게 비싼 물가와 특히 오버차징에 내내 시달려야 했던 발리섬에서 탈출하길 정말 잘했다고 주장했다. 어제 택시 생각하면... 으...

작년에 제주도에서 스쿠터를 타 봐서 쉽게 타겠거니 했는데, 왠걸, 덕지덕지 기운듯한 1차선 도로에서 쫓기듯이 달리다보니 불알이 오그라들어 속도를 못 내겠다. 도로 왼쪽에 바짝 붙어(맞다 여긴 좌측통행이다) 슬금슬금 달렸다. 속도가 60kmh를 넘지 않았다. 주유소에 들러 꽉 채워서 기름을 넣으니 16,000rps. 고작 2천원이라니!

비가 내렸다. 점점 빗발이 거세졌다. 헬멧을 쓴 머리만 빼고 쫄닥 젖었다. 두리번 거리다가 처마 밑에 스쿠터를 세우고 비가 그치길 멍하니 기다렸다. 건너편에서 젊은 처자들이 깔깔 대며 웃는다. 자와 섬에서는 저런 발랑까진 무슬림 여자애들이 여행객에게 시시덕 거릴 리가 없었다. 내 꼴이 한심해서 담배를 물고 뻑뻑 빨았다. 비가 잦아 들어 다시 스쿠터를 탔다. 40분쯤 달리니 비가 멎었다. 도로가 미끄러워 속도를 내기 겁난다. 

구능 카위에 도착. 주차료는 2,000rps. 싸롱을 파는 삐끼들을 물리치고 입구에서 싸롱을 빌렸다. 입장료는 무려 15,000rps. 밀림 속에 바위를 파서 만든 사원이다. 그럭저럭 볼만했지만 부러 찾아갈만 한 곳인지는 의문이다. 아내 말대로 인도에서 볼 걸 다 보고 나면 다른 어떤 관광지에 가도 시큰둥해지게 마련인지 모르겠다. 

오토바이 타고 비 맞으면서 gunung kawi에 갔다. 입구에서 본, 인도네시아 주요 관광자원 중 하나인 terrace rice paddy. 그러니까 계단식 논. -_-

이렇게 보니 베트남 분위기인데? 아, 그러고보니 계단식 논은 베트남의 주요 관광자원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하루 빨리 계단식 논의 관광자원화가 시급하다. 어쩌다가 쌀농사 포기하고 대농 정책 중심으로 나가다가 이런 귀중한 관광자원 개발을 소홀히 하게 되었을까 -_-


암면을 깎아 만들었다. 정글 한 가운데서 이걸 보니 인디애너 존스 분위기

인디아의 아잔타 석굴과 비슷. 단지 여긴 정글이고, 물이 풍부하다.


manual은 몰 줄 몰라 automatic을 빌렸다. 오토바이 없으면 돌아다니기 힘든 곳. 대중교통이 불편하고 자전거는 우붓 지형 및 열대의 기온 때문에 좀 힘들어 보인다. 실은 자전거 투어가 있는데 그게 명칭이 'eco tour'라고... 전세계 어디가나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의 사업수완이란 정말...

다음 목적지는 Pura Samuan Tiga. 입장료 받는 곳에 사람이 없다. 관광객도 없다. 그늘에 한가하게 앉아 이끼에 뒤덮인 석상과 여기저기 떼지어 몰려다니는 닭들, 어슬렁 거리며 닭을 노리는 고양이들을 구경했다. 어떤 여행자가 자전거를 타고와 인사했다. 그의 사진을 찍어줬다. 멍하니 앉아 그가 사원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작고 방치된 듯한 사원이다. LP에 따르면 이들 사원은 축제 때가 되어야 사람이 찾아오고 활기를 띤단다.

Pura Samuan Tiga 입구의 도깨비. 힌두교에 이런 도깨비가 있었던가?


역사적으로는 천년이 넘은 사원이지만 지진 이후 복구 대신 renewal을 택함. 따라서 이 사원의 역사는 실질적으로 100년 정도?


Yeh Pulu를 찾으려고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었다. 동쪽으로 가다가 남쪽으로 틀어 서쪽으로 가서 다시 북쪽으로 가면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할텐데, 동쪽으로 가다가 남쪽으로 쭉 가서 다시 동쪽으로 교차로 하나 없이 한 없이 이어진 도로를 달리다가 남쪽으로 틀어졌다가 동쪽으로 가다가 비스듬한 북쪽 길을 따라 가며 몇몇 교차로를 지나치고 외통수를 만나 갑자기 좁은 논길이 끝나면... 이런 젠장. GPS를 켰다. 아까 Pura Samuan Tiga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 waypoint를 찍어 놨다. 이건 정말 좋은 버릇이다. 예전에 중남미에서 종종 길을 잃고 헤메던 잊지못할 기억 때문. 그래서 원래 있던 길로 안 가려고 다른 길로 헤멨다. 두어 시간 그렇게 헤메니 진이 다 빠졌다. 인도네시아의 열악한 도로 사정을 뼈저리게 느꼈달까? 가난한 시골 모습을 제대로 구경했다. 사람들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았는데 내가 외국 여행자란 생각은 안 하는 것 같았다. 단지 이런 곳에 올 사람이 아닌 타지인이 길을 잃고 헤메는 모습을 구경했던 거랄까? 어쩌면, gps가 없었더라면, 그들과 교통이 있었을 것이다.

어찌어찌 해서 두 시간 만에 다시 처음 삼거리로 돌아왔다. 삼거리 옆에 Goa Gajah가 있었다. 주차장 크기로 미루어 보건대 유명한 관광지 같다. 대뜸 삐끼가 접근해 자기를 따라가면 고아 가자의 숨겨진 밀림의 신비를 구경할 수 있단다. 어느쪽인데? 저기 저쪽에서 시작해서 저쪽 끝까지. 고마워요 내 힘으로 한 번 가볼께요. 혼자 가면 길을 잃는단다. 내겐 gps가 있어요. 휴대폰이에요? 아뇨 gps에요.

싸롱을 빌려 입고 우편엽서에서 보았던 동굴 입구의 거대한 바위 상을 보았다. 이전 사원에서는 본 적이 없었던 링감이 모셔져 있다. 이런 몹시 작은 링감이면 우주적인 신심이 제대로 우러나질 않을텐데, 발리의 힌두교에 의문이 생겼다. 

발리 엽서에 등장하곳 하던 동굴 사원의 입구. 아, 나도 가이드 끼고 설명 좀 들어봤으면 좋겠건만...


고아 가자 내 작은 사원에서 뿌자 중인 할아범(모처럼 보는 시바파였다) 옆에서 하레람! 하레람! 두 팔을 벌리고 꽥괙 소리 지르며 요란하게 기도했다. 이마에 빈디를 찍어주며 박시시를 요구했다. 거적데기를 들추니 관광객들이 선뜻 기부한 100,000rps 지폐가 보여 인도인에 버금가는 발리 힌두교 삐끼들의 역량에 감탄했다. 대체 어떤 미친 관광객이 영빨이 영 안 받는 보잘 것 없이 이런 작은 사원에서 이마에 빨간 점 하나 찍어줬다고 사제(사원 관리자)에게 100,000rps 씩이나 기부하겠나. 그런 거다; 남들이 이만큼 냈으니 너도 이만큼 내라. 지갑에 1,000rps 짜리가 있었지만 그걸 주면 모욕감을 느낄 것 같아 관뒀다.

'밀림으로 가는 길(way to the jungle)'이란 푯말을 보고 주저없이 들어갔다. 콸콸 흐르는 시냇물, 미끌미끌한 길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왠 삐끼가 버르장머리 없는 어떤 늙은 서양 관광객이 자기들의 성소에 짐을 올려놓았다고 불평과 욕설을 늘어놓았다. 그것도 잠시뿐, 이 밀림은 하도 복잡해서 혼자 다니면 길을 잃으니 자신의 가이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갔다. 내게 관심을 돌리더니 자신의 가이드를 받으라고 말한다. 필요 없을 것 같아 사절했다. 길이야 늘상 잃는 거고.

나무 뿌리 사이로 난 길을 걷다가 아이스 박스를 내 놓고 음료수를 팔고 있는 처자를 만났다. 콜라? 노. 사이다? 노. 그런데 여기 길이 있어요? 이쪽으로 쭉 가면 되요. 인상이 좋아 보여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일어섰다. 아침 바람부터 비맞으며 싸돌아다녔더니 피로가 밀려온다. 그래도 걷자.

정글로 향하는 길

정글에서 길을 잃고 헤메다가 만난 음료수 파는 아가씨.

그저 산책로 정도에 불과한 밀림의 끝자락(?)에서 마을을 만났다. 어깨폭 정도의 미로를 이리저리 걷다가 길을 잃었다. 막다른 골목 끝에 가정집이 나타나 인기척을 냈다. 쪼르르 달려온 젊은 여자애가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 오! 와! 오! 와! 대박!(한국어로 번역하면 그쯤 된다) 그러더니 자기는 슈쥬를 좋아한다며 혼자서 방방 뛰고 난리도 아니다. 휴대폰에 있던 멜론 TOP 100 히트곡 중 소녀시대나 원더걸즈, 2PM 따위를 몇 곡을 들려주니 이거 최신이냐며, 다운해달라고 성화다. 마루에 걸터 앉아 그 아이의 email을 적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최신 히트곡을 보내주마고 약속했다. 아이가 내 주위를 끌더니 거실 TV에서 흘러나오는 한국 드라마를 보여준다. 그 가족은 나도 모르는 무슨 한국 사극을 보고 있었다. 황당하군.

물 한 잔 얻어먹고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보니 길을 물으러 들어갔었지. 소득없는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미로 같은 골목을 헤메는데 아까 그 '신비로운 밀림'에서 만났던 처자를 다시 만났다. 집에 돌아가는 길이란다. 입에 손을 대며 먹는 시늉을 한다. 밥 먹으러 가는 길이군. 어떻게 해야 고아 가자로 돌아갈 수 있어요? 이쪽 길을 따라 가면 되요. 여기 아스팔트 길이요? 네. 이 길을 따라 빙 돌아가면 고아 가자 입구가 나와요. 처자에게 감사의 뜻으로 음료수를 하나 샀다. 5,000rps를 부르길래 깍아줘요 했더니 3,000rps로 깎아준다. 내가 마음에 드는걸까? 나도 마음에 든다. 유부남이라 이걸로 끝이지만. 마누라 걱정대로 난 여행지만 가면 어떻게든 여자들을 만났다. 내가 못 생기고 나이 들어 보잘 것 없건 말건, 화학작용이 없을 뿐.

싸롱을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걷다보니 Yeh Pulu라고 씌어진 표지판을 보았다. 그렇게 찾아 헤멜 땐 보이지도 않더니... 사원에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대략 150여명 가량의 사람들이 차양 밑 의자에 차분히 앉아 있다. 내부로 들어가려니 어떤 젊은이가 부드럽게 길을 막았다. 여긴 지금 장로들의 회합이 벌어지고 있어 들어갈 수 없단다. 누군가가 나서서 설명해준다. 자기들 계급은 크샤트리아인데(황급히 부연설명하길, 요새는 계급 안 따지고 정말 중요한 것은 교육이란다) 지금 2012년 이 지역 마을을 이끌 지도자를 선출하기 위한 원로회가 안에서 '민주적으로' 벌어지고 있단다.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면서 연신 비디오를 찍었다. 음료수는요? 친절하게, 저 밖에 있는 가게에서 사 먹으면 된단다. 

30분쯤 걷자 고아 가자 주차장이 나타났다. 싸롱을 그대로 가져가도 될 것 같지만, 고아 가자 입구에 다시 반납했다. 지친다. 밥도 못 먹고. 아까는 몇 차례나 길을 잃고 헤멨지만 돌다보니 의외로 우붓 중심가가 가까워져서 돌아가는 길은 15분이 채 안 걸렸다. 시내에 가까워질수록 교통체증이 심해졌다. 오토바이를 더 끌고다니자니 지친다. 3pm에 오토바이를 반납했다. 

우붓의 관광명소(?) 기념품 시장. 꽤 크다.

쉽게 찾을 수 있을꺼라 생각했는데... 먹을만한 식당을 찾아 거리를 돌아다녔지만 소득이 없다. 엊그제 헤어졌던 뉴질랜드 박사 학위 소지자를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한 눈에 봐도 할 일 없이 무작정 거리를 헤메고 있다. 지독히 고독한, 나같은 타잎의 나이 든 여행자, 어쩌면 그게 그와 별로 말을 주고 받지 않았던 이유일 지 모르겠다, 인도나 페루의 깡촌 오지 같은 곳에서 로칼 버스를 전전하며 한가하게 돌아다니다 만났더라면 함께 히히덕거리며 돌아다녔을 지도 모르겠다. 나나 그나 이런 곳에서 편하게 관광객 요금 주고 투어 버스나 타고 다니는 사람들과 별로 같이 다니고 싶지 않을 것 같으니까. 나처럼 그도 나를 슬며시 외면했다.

LP에는 도움되는 정보가 없다. 무려 10,000rps에 세금 10% 별도인 스프라이트를 마시며 휴대폰으로 주변 정보 검색. Dewi warung을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warung Lokal('로칼' 식당)에 우연히 들렀는데(메뉴판을 보고 자동으로 멈췄다) 나시 고랭이 9,000, ice tea 3,000. 지금껏 먹어본 나시고랭 중 가장 양이 많고 맛있다. 게다가 무선 인터넷이 된다. 아내와 skype로 통화했다. 식당 참 좋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하고 침대에 누워 천정에서 돌아가는 팬을 멍하니 쳐다봤다. 이상하게도 열대 지방에 오면 에어컨은 '추워서' 안 틀게 된다. 잠시 그렇게 누워 쉬다가 다시 나왔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관광안내소에 들러 내일 Kuta 행 suttle bus 표를 예약하고 시장을 하릴없이 돌아다녔다.

벌써 해가 졌다. 피곤에 지쳐 아까 식사를 한 거리에서 눈에 띄는 아무 가게나 들어가 한 시간에 60,000rps 가량 하는 전신 마사지를 받았다. 아로마 오일을 몸에 발라줬다. 마사지 자체는 생각보다 별로 였지만 피곤한 탓인지 선잠이 들었고, 몸이 나른하다. 8pm. bintang supermarket에 가 보기로 했다. 그리 멀지 않아 뵈는데 시 중심가에서 무려 25분을 걸었다. 빈탕 맥주 큰 것과 음료수 등속을 사서 완전히 껌껌한 거리를 걸어 중심가로 돌아왔다. 낮 동안 교통혼잡으로 도로가 거의 마비되다시피 하는데, 발리의 각지에서 머물다가 민속 공예품 따위를 사러 우붓에 잠시 들러 쇼핑을 마친 사람들이 저녁이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우붓 시내의 저녁에는 왕궁을 중심으로 고급 레스토랑들이 널려 있고 식당 마당에서 디너쇼가 벌어졌다. 그럴 돈도 없고, 디너쇼는 재미없어 보이고, 그래서 이렇게 시내 중심가에서 한참 떨어진 수퍼까지 힘들게 걸어가서 사온 맥주를 숙소에 돌아와 혼자 마신다. 샤워하는데 마사지 가게에서 칠한 기름이 잘 안 진다. 바보 같으니라고. 마사지샵에서 샤워를 하고 나올 껄.

맥주 마시며 내일 계획을 잡았다. 계획이랄 것도 없었다. 쿠타 해변에 도착하면 숙소 잡고 해변에 가서 논다. 그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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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mo

여행기/Indonesia 2011. 12. 27. 12:00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챙기고 체크아웃했다. 주인이 안 보여 할머니 손에 돈을 쥐어주었다. 4대가 한 집에 살고 있는 듯 한데, 일가족이 모두 친절하다. 성수기라서인지 숙소 가격이 더럽게 비싸고 구질구질한 화장실에 샤워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다른 숙소는 다 주는 아침 식사가 없지만, 복도에 놓인 공짜 차 한 잔 마시면 그런 거 다 부질없어진다.

8.15am 여행사 앞 벤치에 앉아 있으니 어제 투어를 같이 했던 스리랑카 출신 변호사와 네덜란드에서 온 남자가 왔다. 네덜란드인은 고향에서 차 팔아서 여행 경비를 마련했단다. 1.5리터 짜리 생수통만 여섯개. 하루에 두 통을 마신단다. 2년째 여행 중. 무척 비싼 차였나 봐요 하니 그게 자기 전 재산이었단다. 2년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 인도만 안 갔다. 직업이 뭐에요? 회사를 관뒀단다. 회사를 관두고 차를 팔고. 다른 여행자들은 주로 겨울 휴가로 10일 짜리 일정으로 인도네시아에 왔다. 그는 오랫만에 보는 장기여행자였는데 플라워 파워 아우라가 전혀 없었다. 세상이 변했다.

8.30am. 새침떼기 뉴질랜드 여자가 쇼핑한 짐을 차 뒷 칸에 한 가득 싣고 끙하며 올라탔다. 나는 스리랑카 남자와 8년 전에 스리랑카에 가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을 얘기했다. 그 망할 크리켓 시즌 때문에 항공권이 없어 캔디에 못 간 사연을. 당신도 크리켓 좋아하냐? 물으니 그 병신같은 크리켓에 왜들 그렇게 환장하는지 모르겠다는, 상당히 영국인스러운 답을 들었다. 그러게 말이야, 게다가 미친 스코티시들은 할 짓이 없어 골프같은 희안한 놀이를 발명했지. 옛날 옛날에 내가 만난 영국 여행자들은 대개 입이 거칠고 술을 미친듯이 쳐마셨다.

길고 지루한 버스 여행 중. 인도네시아의 주요 관광 자원중 하나가 바로 이 논(rice paddy)라니 좀 웃기지도 않아서...

미니버스를 타고 지루한 여행 시작. 인도네시아에는 정녕 고속도로가 없단 말인가? 죽어라고 1차선만 달린다. 그런데 이 미니버스, 좌석이 꽤 넓어 편하다. 에어컨은 뭐... 이젠 포기했다. 내가 탄 좌석열에 스페인에서 컴퓨터 사이언스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연구원이 한 명 탔다. 전공이 Artificial Intelligence다. 왠지 이 친구에게만큼은 별로 말을 걸고 싶지 않다. 창백한 얼굴로 LP에 코를 박고 있다. 앞 자리에는 노르웨이인 남녀가 탔는데 하루에 물을 3리터씩 마시는 네덜란드 호걸이 여자에게 수작 걸다가 진실이 밝혀졌다. 노르웨이 남자가 그녀의 연인이었다. 버스에 정적이 감돌고, 왠지 웃겼다. 스리랑카 변호사만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연신 떠들어댔다. 

맨 앞 자리에 말레이지아인이 탔다. 붙임성 좋은 중국인인데 말하는게 흡사 개똥지빠귀가 우짓는 것처럼 6성조로 영어를 했다. 무슨 말 하는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곧잘 알아 듣는 것 같다. 나? 나는 스리랑카인과 네덜란드인하고만 주로 떠들었다. 어디어디 갔는데 어디가 좋았다느니 하는 평범한 여행 얘기들... 영어가 잘 안되니 정말 갑갑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말벙어리가 된 걸까? 하긴, 한국에서도 업무 관련 얘기 외에는 말벙어리나 다름없었다.

두어번 차가 설 때마다 서양인들끼리 어울려 놀았다. 나하고 스페인 친구는 겉돌았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노르웨이 여자와 식사 중 인도네시아 음식 애기를 했다. 난 점심으로 나시 참푸르를 먹었다. 여러 가지 반찬이 밥과 함께 나오는 부페 같은 음식이다. 저녁은 먹지 않았다. 프로볼링고까지 지루한 여정. 간간히 GPSr을 꺼내 위치를 확인했다. 

8pm 사무실에 차량이 서고 내일 일정을 작전 회의 하듯이 설명한다. 물론 작전 지도도 있었다. 필요한 물품을 사라고 근처 수퍼에 차를 세웠다. 오렌지 쥬스와 물만 샀다. 다시 차를 갈아 타고 9pm 무렵에 브로모 산 중턱의 어느 호텔에 섰다. 날씨가 쌀쌀하다. 기온은 6도. 호텔의 불빛을 빼고 사위가 잠잠하고 칠흑같이 어둡다. 안개처럼 축축한 공기가 볼을 핥았다.

무작위 선정으로 중국계 말레이인과 같은 방에 배정되었다. 말레이 아저씨는 투어 예약할 당시의 호텔과 다르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난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인도네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호텔 프론트(말이 호텔이지 그냥 게스트 하우스)에서 수건을 두 장 얻어와 내게 한 장 나눠주고 수완을 발휘해 온수 샤워가 나오게 했다. 난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휴대폰이 갤럭시S인데 플러그가 맞지 않아 충전을 할 수 없단다. 내 여행용 멀티 어댑터를 빌려줬다. 자기가 사온 맥주를 나눠 마시잔다. 사양했다. 그는 맥주를 마시고 나는 멍하니 벽에 기대 앉아 얘기했다. 옛날 말레이지아 여행 하던 때가 생각났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회사를 관두고, 생명보험을 해약하고 생긴 돈으로 아무 생각없이 동남아시아로 갔다. 말레이 아저씨와 말레이 음식과 인도네시아 음식의 차이점에 관한 얘기를 했다. 이름은 같지만 요리 방식이 다르다. 그는 요리사였다. 아 맞다, 당신들 요리엔 항상 코코넛 밀크가 들어가지요? 그렇단다. 말레이 사람들 싱가폴에 많이 가지요? 그렇단다. 싱가폴 여자를 둘 사귀었다. 그중 한 명과 보트키에서 죽어라 술을 마셨고 포옹을 하고 입을 맞추고 왠지 부아가 치밀어 나 혼자 숙소로 돌아가다가 길을 잃고 밤거리를 헤멨다. 간신히 숙소를 찾아 맛이 간 채로 문을 두들겼다. 말레이지아에서 처음으로 마스지드를 방문했다. 거기 관리자가 내게 손을 씻고 발을 씻고 들어오라고 가르쳐줬다. 반질반질한 회교 사원엔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한국에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대단히 지쳐버린 상태였지만 그래도 여행을 했다. 말레이지아 음식 중에 사태가 가장 맛있었어요. 한국에 와 본 적 있어요? 싱가폴 여자가 한국에 찾아왔다. 일주일쯤 함께 지냈다. 그 당시 나는 여러 외국인 여자를 사귀었다. 중국계 말레이 아저씨 앞에서 이 말은 차마 안 나왔다; 당신들, 중국인 역차별로 말레이인들의 미움을 받지요? 말라카에서 베드웜에 당해 그때 인도네시아 행 배를 타지 못했다. 뜨거운 햇살 아래서 마치 에이즈 환자처럼 무거운 걸음으로 병원을 찾아 말라카 시내를 돌아다녔다. 내 팔다리에 돋은 흉칙한 붉은 반점 때문에 사람들이 피했다. 난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랬었구나... 인도네시아에 오게 된 이유가. 심층 무의식에 남은 미련 말이다. 그럼 언젠가는 내가 자전거로 큐슈와 오키나와를 돌아다니겠네? 무시무시한 심층 무의식에 남은 미련, 또는 악착같이 찌질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옛날 때문에? 남들 말로는 오래된 기억은 색이 바래지며 미화된다는데... 나는 마치 뱃사람처럼 마카오에서 도박을 하고 어떤 가게의 쇼윈도에 진열된 여자 중 하나를 돈 주고 사서 잤다. 그런데 그 세부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이국의 거리에서 마치 뱃사람처럼 혼자 술 먹고 취해서 골목을 전전했다. 그래서 이 망할 블로그질을 계속 하는 것이다. 찌질한 과거를 기록하려고. 하다못해 이 여행기조차 잊지 않기 위해 매일 밤 수첩에 끄적여 놓았다. 

이불 속에 목만 내놓고 한가하게 얘기하다가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말레이 아저씨가 맥주를 다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돌아와 불을 껐나 보다. 

전등이 번쩍 켜져 눈을 떠 보니 3.30am. 세수는 생략하고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숙소 로비 앞의 마당으로 나갔다.

안개 속에서 유령처럼 꾸역꾸역 사람들이 나타났다. 멍하니 기다렸다. 그렇게 춥지는 않았지만 공기가 축축하더니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짚차를 타고 떠났다. 

말레이 아저씨와 나는 뒤늦게 네덜란드인 부부가 타고 온 짚차에 합승했다. 짚차의 헤드라이트로 낙타털 같은 빗줄기가 희끗희끗 어스름에 춤을 췄다. 다른 짚차의 후미등을 따라가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짚차의 행렬이 이어졌다. 잠이 덜 깬 승객들은 말없이 의자에 기댔다. 경사로가 끝나고 차가 멈췄다. 내려보니 인파가 꾸역꾸역 비포장 도로를 올라간다.

기사가 안되는 영어로 유 고, 워크, 아이 웨이트 등등 어렵사리 Viewpoint#1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부부는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는 지불을 했으니 끝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우기며 내릴 생각을 안 한다. 이 부부는 어젯밤 브리핑 때 도대체 뭘 듣고 있었던 거야? 6인승 짚차의 뒤에 앉아 있던 나와 말레이 아저씨는 앞 좌석에서 내려 의자를 접어줘야 차에서 나갈 수 있다. 네덜란드 부부에게, 다른 사람들도 걸어가니 내리자고 말했다. 말레이 아저씨와 내가 내린 다음에도 납득이 안 되는지 기사를 다그치다가 지나가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는다. 짚차론 이 경사의 비포장 도로를 오를 수 없다. 그들을 내버려 둔 채 혼자 올라가기 시작했다.

비가 오다 말다 했다. 길은 질척질척하고 어둡다. 삐끼들이 말을 데리고 다가와 말을 타겠냐고 물었다. 고개를 저었다. 헤드 라이트를 배낭에 두고 왔다. 안 하길 잘했다. 이 어둠 속에서 강렬한 LED 불빛은 오히려 민폐가 될 것 같았다. 

꾸역꾸역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지점까지 올라왔다. 커피와 따뜻한 음료를 파는 가판대가 몇 보이고 털옷으로 중무장한 인도네시아인들이 서성이며 깔깔거렸다. 외국 여행자 반, 현지인 반 정도? 서서히 날이 밝아 오고 있다. 하지만 시야가 막막하다. 절벽 끄트머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솜털같은 안개 뿐... 갑자기 강한 돌풍이 훅 불어 뒤로 떠밀렸다. 쎈데? 잘못하면 추락하겠군. 거리를 두었다. 

gunning bromo(브로모 화산)을 보기 위해 소위 view point #1 지점에 올라왔다. 아직 날이 밝질 않아 아무 것도 안 보인다.

왠걸. 빗발이 잦아들질 않는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 아래 사람들이 펭귄떼처럼 뭉쳐 웅성거렸다. 그 틈에 끼어 내키지 않는 채취와 비 냄새를 맡기보다는... 빗속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산으로 난 길을 보고 꾸역꾸역 올라갔다. 영국인 청년 친구들이(아니면 aussy겠지?) 서로를 향해 정답게 욕설을 주고 받다가 정상 부근에서 막막한 안개와 비바람에 이구동성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oh shit! fuck! 고개를 돌렸다.

인도네시아 아줌마와 아저씨가 나란히 서서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윽고 흙바닥에 깔아놓은 러그에 무릅을 꿇었다. 기도한다. 나도 기도하고 싶다.

끝까지 올라갔지만 비바람 외엔 아무 것도 볼 것이 없었다. 다시 내려왔다. 말레이 아저씨와 네덜란드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날이 완전히 밝았다. 운무에 숨은 브로모 화산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간혹 돌풍이 불었고 안개가 바람에 이리저리 흩어졌다. 안개가 잠깐 동안 사라지면 저 아래 쪽 땅바닥이 살짝 보이곤 했다. 

안개가 강한 바람에 휩쓸려 사라진 틈에 잠시 나타난 칼데라

그렇게 30분쯤 기다렸지만 안개는 가시지 않았다. 내려 오는 길에 경치가 좋은 곳이면 말레이 아저씨의 갤럭시S로 그의 인증샷을 찍어줬다. 나더러 찍겠냐고 물었다. 히죽히죽 웃으며 안 찍겠다고 말했다. 어두울 땐 잘 몰랐지만 내려오는 길이 온통 비에 뭉개진 말똥 투성이였다. 차라리 말을 탔더라면 찝찝하지나 않지. 아! 그래서 말을 타는 거구나...

짚차의 다음 행선지는 브로모 화산 아래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는단다. 더치 부부가 버럭 화를 내며 자기들은 입장료가 포함된 투어를 신청했단다. 그야 우리도 마찬가지고. 기사의 부탁으로 표를 꺼냈지만 정작 입구에서는 표 검사를 하지 않고 차를 통과시켰다. 더치 부부가 머쓱해졌는지 자기들은 인도네시아인들의 거짓말과 삐끼질, 그리고 외국인 관광객 대상의 이중 요금에 분노가 치밀고 피곤해 죽겠단다. 이해가 간다. 마누라가 워낙 깐깐해서 당한 적은 없을 것 같다. 짚차에서 그렇게 욕하던 기사를 끼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낄낄거린다. 활달한 부부다.

마치 달 표면 같은 칼데라에 발을 내렸다. 쓱쓱 검은 토사에 발을 비볐다. 입자가 굵지만 모래보다는 가늘었다. 빗물을 머금어 진흙창처럼 미끌거릴 줄 알았는데 접지가 썩 괜찮다. 

칼데라는 넓고 시원했다.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그리운 이질감을 느꼈다. 그리운 이질감? 말레이 아저씨와 같이 걷다가 우리는 서로 할 말도 없고 각자의 감상에 젖어 차차 거리가 벌어졌다. 칼데라 한 복판에 사원이 있다. 저번 화산 폭발 때 여기 있던 사람들은 무사했을까? 그나저나 활화산 옆에 사원을 차려놓다니 기개가 대단하다.

칼데라로 내려와 브로모 화산으로 가는 길. 브로모 화산은 수 차례 폭발로 산의 형체가 거의 사라지고 분화구 밑둥만 남은 상태

수많은 사람들이 걷거나 말을 타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폭발 후 corn이 날아간 bromo 화산 남쪽으로 향했다. 야트막한 야산 같아뵈던 브로모 화산의 밑둥은 다가갈수록 높아졌고 구릉을 따라 단단한 검은 땅을 밟고 차근차근 오르다가 마지막에 가파른 계단을 접했다. 좁은 계단은 둘로 나뉘어 한쪽은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꾸역꾸역 오르고 상대적으로 한산한 내리막길로는 사람들이 조심스레 걸음을 옮긴다.

저 멀리 계단까지는 말을 타고 갈 수도 있다. 갈길이 별로 안 힘들어 설렁설렁 걸어갔다. 아참 이거 활화산이다. 여차하면 터진다. 2011년 분출 사진: http://photoblog.msnbc.msn.com/_news/2011/03/11/6244672-indonesias-mount-bromo-continues-to-erupt


이렇게 보니 흡사 피난민 행렬 같은데? 화산은 이걸로 세 번 째인데 언제나 비가 내릴 때 방문하게 되는 셈.

내 걸음으로 한 150m 되는 이 정도 야산은 성큼성큼 오를만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사람들로 앞이 꽉막힌 계단을 지루하게 올라 정상에 섰다. 난간이 없다. 급경사를 이룬 분화구 안쪽과 역시 급사면을 이룬 바깥쪽 사이에 폭 1m 가량의 길을 두고 사람들이 교차했다. 여차하면 떨어질 것처럼 위태위태하지만 사람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는다. 분화구 아가리는 여전한 비바람과 안개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기 올라오기 전까지만 해도 분화구 가장자리를 한 바퀴 돌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간헐적으로 불어오는 돌풍과, 갈수록 좁아지는 길 때문에 엄두가 안 났다. 십 분쯤 멍하니 분화구를 노려보고 있는데 누가 툭 친다. 말레이 아저씨다. 걷다가 지쳐 계단까지 말을 타고 왔단다. 뒤를 돌아 남쪽을 바라봤다. 짚차가 일렬로 죽 서 있는 저기 주차장까지 2km는 되어 보였다. 말레이 아저씨의 전용 찍사가 되어 그의 사진을 이리저리 찍어주었다. 앉아서 찰칵, 서서 찰칵, 기대서 찰칵, 현지인과 어깨동무하며 찰칵.

폭 1m 미만의...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길. 엄청 으시시한게, 바람도 쌩쌩 분다.

칼데라의 저 굴곡은 화산탄이 파헤친 땅으로 빗방울이 시내를 이뤄 사면을 타고 내려가면서 물길이 만든 흔적

안개가 다 걷히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분화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탁한 색깔의, 미동도 않는 물이 고여 있다. 으시시. 누군가 칼데라에서부터 걸어 남서쪽 사면을 꾸역꾸역 올라갔다. 워낙 멀어 흰점과 노란점으로만 보였다. 애당초 사람들로 붐비는 돗대기 시장 같은 계단을 오르지 않고 저렇게 오르는 편이 나았을 껄 그랬다. 

분화구가 아까보다 잘 보인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외국인(백인)만 보면 사진 같이 찍자고 우루루 몰려들곤 했다. 뭐 나한테는 사진 같이 찍자는 인도네시아인이 하나도 없었다. 저 검은 머리의 유럽계 외국인도 별로 외국인스럽지 않아 나와 같은 신세. 여기서 한 삼십분 비바람을 맞으며 혼자 온 저런 외국인들 기념사진을 찍어줬다.

어느 소외받고 용감해진 검은 머리 외국인이 기어코 모험을 하러 간다. 그가 리오의 예수같은 십자가 자세를 취하자 인도네시아인들이 환호성을 울리며 그의 사진을 찍었다. 나도 해볼까?

30분쯤 서서 사방을 둘러보다가 시시해져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칼데라 여기 저기 빗물이 내를 이루며 흐르다가 깊이 파인 땅 아래로 내려갔다. 사람이 없어 아늑하고 좋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던 누군가 소리쳐서 내 시선을 끌었다. 더 이상 갈 수 없단다. 무너지는 흙더미를 기어 올라가니 멀리 떨어진 주차장까지 걸었다. 먼저 온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처음에 같이 차를 타고 이곳에 왔던 스리랑카 변호사와 떡대 좋은 더치 청년은 우리와 같은 투어를 신청하지 않고 새벽 세 시에 일어나 둘이 함께 걸어서 뷰포인트에 올라갔다 내려왔단다. 세 시간쯤? 그들은 비바람과 안개에 허탕치고 내려와서 브로모 화산에 갈 생각은 접었고 더치 청년은 하루 더 묵다가 가기로 했단다. 수염을 밀어버리니 말끔한게 어제 저녁에 인도네시아에 왔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밭에 키우는 작물은 무려, 파! 파가 고냉지 식물이었구나!

함께 투어를 온 사람들과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더치 청년이 노트북을 꺼내 보여주며 자기가 이걸 사기 당해 사게 된 사연을 들려줬다. 삐끼를 통해 여행 중에 노트북을 구입한 사람은 처음 봤다. 다들 말 없이 이런 바보는 처음 본다는 깊은 이해의 눈초리로 그의 얘기를 경청했다.

더치 청년은 브로모에 하루 더 묵기로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 미니버스를 타고 떠났다. 말레이 아저씨와 나는 어제처럼 마지막 차를 탔다. 그들의 장례를 보았고, 산비탈에 이어진 밭과 논을 보았고 숲을 태워 연기가 자욱한 길을 통과했다. 창 밖으로 한국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어떤 숙소에서 교통편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곳곳에서 집을 짓는다. 기초라고 할만한 것 없이 맨 땅을 대충 다져 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한편에서 삽과 시멘트로 모르타르를 만들었다. 긴 비탈을 내려가는 동안 두어장 사진을 찍다 말았다. 

브로모 화산 투어를 끝마치고 프로볼링고로 돌아가는 길. 산등성이, 사면의 비교적 심한 경사에서 작물을 재배. 아마, 파?

길가의 어떤 허름한 집 앞에 미니버스가 섰다. 이틀 동안 함께 투어를 했던 사람들과 여러 명의 외국인 여행자들이 벤치에 앉아 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져 있는 여행자들 사이로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망고스틴 접시를 내 놓았다. 스리랑카 변호사가 그중 하나를 까서 내게 건네 주었다. 먹어보니 짓무르고 썩은 내가 나서 마당에 버렸다. 망고스틴 접시는 금새 비었다. 주인이 우리 곁에 와서 먹었으면 돈을 내야 한다고, 돈을 내라고 말했다. 손님에 대한 호의로 생각하고 무시했다. 

수라바야로 가는 사람들과 헤어질 시간이다. 대만 아저씨는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내 드러운 인상 때문인지 가끔 무심결에 Sir라고 경칭을 붙이던 스리랑카 변호사와도 헤어질 시간이다. 내가 스리랑카에 꼭 가게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당신 나라에서 한 군데만 가야 한다면 어디를 추천하겠어요? Sigiriya, Rock Palace가 있는 곳, 그의 주장대로라면 스리랑카의 마추픽추. 휴대폰에 발음나는 대로 적었다. 헤어지는 사람들에게 행운을 빌었다; godspeed fellas. 

안내인이 나타나 사람들을 그러모아 커다란 관광버스로 옮겨 태웠다. 족자에서 봤던 여행자들을 다시 만났다. 그에 더해 열댓 명의 새로운 사람들이 차에 올랐다. 내 앞과 옆에는 이탈리아 여자들이 탔는데 무척 시끄러웠다. 매번 이탈리아 사람들을 볼 때마다 성정이 흡사 한국인 같다고 여겼다. 자리가 많이 남아 옆에 앉았던 이탈리아 아저씨는 뒤로 가고 나도 좀 편하게 앉을 수 있었다.

비가 오다말다 했다. 해변에 화력 발전소가 있었다. 길이 좁아 차가 서행을 하는 동안 어떤 원숭이가 철조망에 기어올라 바다를 뚜러지게 쳐다보는 모습을 보았다. 딸애는 어린이집에서 짐승은 생각을 하지 못 한다고 배웠단다. 나는 딸애에게 짐승도 조금이나마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멍멍이가 아무나 보고 꼬리를 흔들지는 않잖아? 수조의 물고기는 먹이가 나오는 아침이면 수면에서 서성이잖아? 의식과 인식의 기원에 관해 여러 종류의 책을 읽었지만 명쾌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따라서 나는 원숭이가 바다를 보는 동안 그 짐승의 두뇌에서 벌어지는 일을 인간마냥 이입할 수 없다. 다만 원숭이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아득하고 광활한 바다가 주는 평화로운 감정과 그 너머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을 느꼈을 것이라고 어림짐작할 뿐이다. 제한된 지식과 경험을 지녔던 원시 인류와 마찬가지로 원숭이는 이 놀랍고 마술적인 세계에 두려움과 경이, 호기심이 뒤섞인 감정과 한없는 무기력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무기력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살다보면 여러 가지로 엿같은 경우가 생긴다. 9.30am에 출발한 버스는 5pm 무렵이 되어서야 Bali행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가 통째로 여객선에 들어갔다. 비가 올 날씨다. 찬 바닷바람이 불었다. 웃통을 벗은 젊은이 몇 명이 여행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의를 끌었다.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그것을 바다로 던지는 시늉을 하고, 헤엄치는 시늉을 한다. 당신이 바다에 동전을 던지면 찾아 오겠다는 것이다. 구걸이잖아?

다정한 게이로 보이는 이탈리안 남자 둘이(사실 둘씩 무리지어 다니는 이탈리아 남자들은 다들 게이 같아 보인다) 낄낄거리며 동전을 던졌다. 반짝이는 동전을 건져왔지만 그들은 인도네시아 돈에는 관심이 없었다. 완 유로! 완 유로! 1 euro는 12000rps. 12000rps면 미 고랭 한 접시와 박소 한 그릇, 그리고 쌀과자 두세 개를 살 수 있는 돈이다. 83개의 1 euro 동전을 주으면 족자행 미니버스에서 만났던 하루 16시간씩 일하는 요리사의 월급과 같아진다. 하루에 얼마나 많은 동전을 모을까? 이 배에서만 여러 개(6~8개 가량?)의 동전과 지폐가 바다로 날아갔다. 인도네시아는 지난 몇 년과 달리 내년 경제성장률 목표치를 낮췄다. 성장 피로가 찾아왔단 뜻일게다.

이들에 관해 예전에 TV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 때 볼 때는 애들이었는데, 어느새 자라 이렇게 늠름한 거지들이 된 걸까?

어? 한글? 바닷바람이 차가워 선실로 들어가려는데 문 옆 탁자에 웅크리듯 앉아 LP 위에 종이를 얹어 두고 메모하는 사람이 있다. 한국인이세요? 그렇단다. 배가 출발할 무렵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모 외국계 자동차 회사에서 근무한다는 그 친구는 자카르타에서 만난 현지인을 따라 족자행 버스에서 중간에 내려 보르부두르 유적지 인근의 현지인 집에서 하루를 머물렀고, 하루 밖에 안 머무른 것을 후회했다. 그 집 아줌마가 떠날 때 먹으라며 여러 가지 과자를 바리바리 챙겨주었다. 우리는 얘기를 나누면서 그 과자를 나눠 먹었다. 그는 브로모 화산에 이틀을 묵었지만 일출을 보지 못했단다. 대신 오토바이를 타고 광활한 칼데라를, 칼데라의 북쪽을 둘러 보았단다. 나도 그럴껄. 


그런데 발리의 어디로 가요? Tulamben이요.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다 -- 하긴 내가 인도네시아에 관해 아는게 뭐가 있겠나. 툴람벤에는 2차 대전 당시 거대한 화물선이 바다에 침몰했단다. shipwreck은 다이버들이 환장하는 장소다. 그럼 혹시 다이빙 하러요? 그는 수십 차례 다이빙한 경력이 있었다. 툴람벤에는 다이버들 모으려고 작달만한 배를 일부러 침몰시키는 곳이 아니라 정말로 거대한 좌초선이 널부러져 있단다. 그러더니 같이 가잔다. 마음이 흔들렸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데요? 난 Ubud에 가요. 거긴 관광객들이 가는 곳 아니에요? 맞아요. 말은 안했지만 이것도 말해줄 뻔 했다; eat, pray, love란 영화에서 쥴리아 로버츠가 짱박혔던 곳이죠. 망할 뉴욕 된장녀가 돈을 펑펑 써가며 채식과 요가로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날 자전거 사고로 왕자님을 만난 행운의 장소죠. 난 왜 거기 가는 걸까? 그야 뭐... 우붓에서 이틀 편히 묵고 Kuta 해변에서 빈둥거리며 하루 편히 묵고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차 타고 얼마 안 되는 거리를 무려 18시간에 걸쳐 이동하는게 지겨워 졌다. 

배가 항구에 닿았다. 조용한 Lovina 해변에서 빈둥거리며 돌고래 구경하러 가는 여행자들은 차에서 내렸다. 족자에서 본 캐나다인 청년과, 함께 브로모 투어를 했던 스페인 컴퓨터 공학자와 눈인사를 주고 받았다. 그는 내게 로비나 비치가 사람들이 돌고래 구경하러 가는 곳이라고 얘기해줬다(아, 나도 가이드북이나 제대로 읽어볼껄). 그들을 안내원이 나눠준 갈아탈 버스표를 들고 비를 맞으며 어두운 길 건너편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버스가 출발하자 비가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속에서 버스가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7시쯤이면 도착한다더니, 또 연착인가? 

살다보면 여러 가지로 엿같은 경우가 생긴다. 6pm에 항구를 떠난 버스는 11.20pm 무렵이 되어서야 Denpasar 북부 터미널 Udung에 도착했다. 얼마 남지 않았던 여행자들은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빗속에서 뿔뿔이 흩어졌다. 문제는 내가 여기서 Ubud행 미니버스를 잡을 수 있는가다. 아까 배에서 만난 한국인이 서성이는게 눈에 띄었다. 믿을 수 없게도 모든 지역으로 가는 미니버스가 끊겼다. 혹시나 싶어 터미널에 있는 경찰서에 들러 물어보니 끊겼단다. 글쎄다. 툴라벤으로 가는 한국인 친구의 택시를 잡아주려고 동분서주했다. 200만루피아란 터무니없는 가격이 나왔지만(220$) 더 떨어지지 않는다. 그가 그 가격에 가겠다고 오케이 했다. 이놈들이 담합을 했군, 경찰까지 돕는 것 같은데? 날더러 같이 난파선 다이빙하러 가자고 재차 설득했지만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를 보내고 이제 내가 택시를 잡아야 할 차례. 자정이 넘었다. bromo 투어때 불평을 늘어놓던 벨지움 부부가 택시 협상이 잘 안되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들도 우붓에 간단다. 택시 쉐어를 하기로 하고 협상에 들어갔다. 나이 지긋한 미니버스 운전수가 백만 루피아를 불렀다. 허거덕!! 벨지움 부부가 지친 나머지 수긍한다. 날더러 같이 가겠냐고 묻는다. 두당 33만 루피아(36$)인데!!? 망설이니까 그들이 같이 안 갈꺼면 자기들끼리 가겠단다. 미니버스에 짐을 내려 놓았랐다. 운전수가 다른 여행자를 찾아 보겠다며 차를 떠나 주변을 돌아다녔다. 말리지 않았다. 한두 명 더 태우면 단가가 싸지니까. 그 동안 빗속에서 담배를 피우며 지갑을 뒤져 보았다. 수중에 있는 돈은 260,000rps. 택시비가 모자란다. 으쓱. 우붓에 가면 어떻게 되겠지.

남편은 왠지 풀이 죽어 아무 말도 안했다. 나와 그의 아내가 이런 저런 여행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들 부부는 일 년에 두 번 휴가를 받아 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는데 자기들이 가본 곳 중 인도네시아는 이집트 만큼 최악이란다. 인도는요? 인도엔 아직 안 가 봤단다. 인도 가면 삐끼질의 경이로운 신세계가 열리는데... 남편은 회계사고 아내는 교사다. 유럽은 비싸고 재미가 없어서 안 돌아다닌단다. 그래도 전혀 이질적이라 말이 안 통할 것 같은 이 부부와 공통점 하나는 있는 셈이군.

지금까지 인도네시아에서 차를 탄 것 중 가장 시원하게 달린다. 시속 100kmh는 족히 나올 것 같은데 운전사 할아범 만큼 나이를 먹은 것 같은 미니버스의 미터기가 맛이 가서 속도를 알 수 없다. 얼마나 시원하게(서늘하게) 달리냐면 빗길에 차가 미끄러지는게 눈에 보였다. 다행히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는 하나도 없었다. 차 안에 침묵이 흘렀고 놓아 둔 우리 세 여행자의 배낭이 이리 자빠졌다 저리 자빠졌다 바닥을 돌아다녔다. 남편은 그것을 주섬주섬 챙겼다. 가는 길 모퉁이에 편의점과 ATM이 보여 운전사의 어깨를 두들겨 차를 세웠다. ATM에 citi 카드를 넣어 돈을 찾으려 했으나 잔액 부족으로 실패. 깜빡 잊고 월급 통장에서 씨티은행 통장으로 이체를 안 시켜놓은게 기억났다. 눈물을 머금고 수수료가 비싼 비자카드로 1,500,000rps를 찾았다. 

우붓에 도착한 시각은 12.55am. Central Ubud은 매우 한산했다. 밤 늦게 도착하니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터번을 두른 흑인이 우붓에 온 것을 환영한다며 숙소를 찾고 있냐고 물었다. 벨지움 부부는 삐끼 노이로제 때문인지 행운을 빈다며 자기들은 자기들 끼리 숙소를 잡겠다고 걸어가 버렸다. 알아본 숙소가 있는 모양. 나? 난 아무 생각없었다. 삐끼에게 숙소 가격이 얼마냐고 물어보았다. 150,000에 double, a/c, include bath, include breakfast, 방 값이 비싸요. 그는 손가락으로 벨지움 부부를 가르키며 저들이 간 방향에 싼 숙소가 몇 개 있는데 100,000 정도면 방을 잡을 수 있을 꺼라고 말한다. 그들을 따라가겠냔다. 좋아요 일단 당신이 말한 방을 보러 갑시다. 

그가 나를 안내했다. 문을 쿵쿵 두들기자 인터폰으로 나이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플래시가 이리저리 비추더니 문을 빼꼼히 연다. 아저씨가 어둠 속에서 주섬주섬 키를 챙기더니 1층 방에 안내해 줬다. 여태까지 본 숙소 중 가장 럭셔리하다. 5만 아끼려고(약 6$) 이 새벽에 가이드북 펴 들고 문 두들기며 돌아다니느니 하루만 여기서 묵자. 내일 다시 숙소를 잡으면 되지. 키를 받고 짐을 내려 놓았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부터 비 맞으며 화산을 싸돌아다니고 16시간 동안 잠 한 숨 못 자고 돌아다녔더니 파김치가 되었다. 씻기 귀찮아 불 끄고 바로 누워 곯아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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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budur

여행기/Indonesia 2011. 12. 26. 12:00
늦잠을 잤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깼다. 어둑어둑하다. 숙소로 여행사 직원이 나를 데리러 찾아왔다. ISTI 게스트하우스에는 방 번호가 없다. 그래서 여행사 직원이 주인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방마다 문을 두드렸나 보다. 여러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는 그 방문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 보니 투어 시작 시간인 5am. 어지간히 피곤했나 보다. 서둘러 가방을 챙겨 직원을 따라 여행사 앞으로 뛰어갔다(여행지에 있을 때면 불이 나도 곧 바로 뛰쳐나갈 수 있게 짐을 미리 정리해 두고 자는게 버릇). 이미 차량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 때문에 늦어진 것 같아 낯 뜨거워서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더 잤다.

Borbudur 유적지에 도착하니 6am. 투어 비용에 표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외국인 전용 창구에서 입장권을 따로 사지 않아도 된다. 내국인과 외국인 사이 입장권 가격 차이가 상당했다. 내외국인 차등 입장료로 외국인 뜯어먹고 입 닦는 여러 나라의 관광지야 한두 번 방문한 것도 아니니 식상한 성토는 접어두고, 특이하게도 외국인 전용 매표소에서 커피와 차를 무료로 마실 수 있다. 500ml 짜리 물병도 나눠줬다. 왠지 싸가지가 있어 보인다.

8.20am까지 자유 관람하고 음식점이 있는 이 자리로 돌아오란다. 반바지라 나눠준 싸롱을 입고 매표소를 지났다. 화장실에 들러 세수하며 눈꼽을 떼었다. 4am에 출발하는 Borbudur sunrise tour를 신청하지 않아 기쁘다; 해돋이 투어는 더 많은 투어 비용을 치루고 해가 뜨기 전에 유적지에 도착해 유적지에서 해돋는 모습을 관람하는 고생을 자진하는 것이라 취향에 안 맞았다.

앙코르와트 유적지를 볼 때처럼 두근거리지 않았다. 바간에서 마차 타고 투어할 때처럼 햇빛이 쏟아지는 광활한 평원에 불쑥불쑥 튀어나온 스투파를 볼 때처럼 신비스럽고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계단을 하나둘 오르며 서서히 유적이 나타났다.  마치 경주의 불국사처럼 자연스럽게 유적지가 나타났다. 시야각 120도를 살짝 넘어서는 길이와, 굳이 목이 뻐근해져라 고개를 들지 않아도 상하가 한 눈에 들어오는 소박한 유적지, 족자를 강타한 지진에도 인도네시아의 자존심처럼 무너지지 않은 곳. 언덕 위의 사원은 근처의 산등성이에 아직 고여 있는 아침 안개 속에서 차분히 아침햇살을 받았다. 

일출투어를 신청할 껄 그랬다.

5층으로 된 사원을 뺑뺑이 돌아 정상까지 가면 약 2.5km란다. 두 바퀴 돌았다. 

Borbudur 입구. 투어는 4.00am부터 시작. 2시간 동안 투어 버스를 타고 달려왔다. 지금 시각은 6.10am. sunrise tour는 이보다 비싸고 3.00am에 시작.

꿈에 그리던 보르부두르 사원이 보이기 시작.

아무 부조가 없는 기단부에 도착. 아쉽게도 유적 복구는 박정희 스타일로 한 듯.

회랑. 인도네시아의 높은 습도에 부조들 대개가 많이 손상되었다.

부조가 비교적 덜 손상된 곳은 해가 드는 쪽. 해가 들지 않거나 회랑의 안쪽은 높은 습기와, 돌 속으로 침투한 이끼의 침략으로부터 무사할 수 없었다.

곳곳에 난간에 올라가지 말라고 적어놨는데, 유적 보호 보다는 인명상해 때문인 듯. 일부 난간의 모르타르는 부식이 심각해 잘못 발을 디디면 바로 추락할 듯.

보르부두루의 최상단 meru(불교에서 말하는 수미산을 상징). 사원의 상단 꼭대기는 천계에 해당하는데, 불교에서는 이런 형태로 meru를 stupa로 형상화한 듯... 아마도... bagan 유적지에서도 이것과 동일한 형태의 크고 작은 스투파를 무수히 볼 수 있었다.

저기 30여km 떨어진 곳에 보이는 위협적인 gunung merapi (메라피 화산). 메라피 화산은 활화산이라 입산이 통제되고 있으며 아직도 분화구에서 김이 모락모락... 여차하면 불을 뿜는 화산 인근 30km도 안된 곳에 사람들이 잘들 살고 있다.

부조의 표현 방식이 조금씩 차이가 났다. 아마도 아티스트가 수십 명 동원되었을테고, 그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발휘하도록 허락되지 않았겠지만 어떤 것은 멋있고 어떤 것은 그저그렇고...

차라리 이끼를 긁어내지 않던가, 복구를 하려면 많은 시간 공 들여서 하던가 했으면 좋았을 껄... 아쉽다.

보르부두르 투어에서 관람에 허용된 시간은 2시간. 2시간에 이걸 어떻게 자세히 볼 수 있겠냐마는... 한 바퀴 더 돌며 이 멋진 부조를 다시 찍었다. 아쉽다. 관광버스로 돌아가야 할 시간.

시간이 얼마 없어 같이 온 일행이 대기하고 있는 집합 장소로 돌아왔다. 투어에 아침 식사가 포함된 사람들은 토스트와 간단한 과일로 된 아침식사를 먹고 나는 어젯밤 수퍼에서 사온 빵과 오렌지 쥬스를 먹고 마시며 얘기에 끼어 들었다. 

12인승 도요타 승합차에 탄 사람들 중 넷은 스웨덴에서 온 젋은 친구들로 영어를 거의 못 하고 마치 한국인들처럼 뭉쳐서 우르르 몰려다녔다. 한 명은 뉴질랜드 출신 생물학자인데 박사 학위는 environmental science(환경과학?)으로 받았다. 여행자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새침한 편인데 이 여자는 투어 후에도 발리까지 가는 길 내내 나와 줄기차게 다시 만났다(나처럼 여행자와 얘기하는 걸 별로 즐기는 타잎은 아니다). 차에서 내 왼편에 앉았던 프랑스에서 온 늙은 여행자는 쿠알라룸푸르에서 시작해 보르네오와 칼리만탄을 거쳐 자바섬에 다다랐다. 족자에서 장기체류할 생각이고 발리섬을 거쳐 파푸아 섬 끝까지 갈 생각이란다. 내 오른편에 앉았던 친구는 싱가폴 출신 어머니와 캐나다 출신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캐나다인이다. 미국식 영어를 사용하며 마초티를 많이 내는 젊은 친구다, 다른 친구는 말레이지아의 쿠알라캉사르(?)에서 온 대학생 배낭여행자인데 영국에 사는 스리랑카 출신의 변호사와 투어 내내 붙어 다녔다. 이름은 하나도 기억 안 난다.

밥 먹는 중에 캐나다 젊은이가 앙코르와트와 보르부두르를 비교하며 미주알고주알 보르부두르가 후졌다고 평했다. 뭔가 좀 길게 설명해 주려고 했는데 왠걸 몇 년 동안 영어를 사용하지 않았더니 혓바닥이 굳었는지 말이 잘 안 나와 무척 당황했다. 전에는 대체 어떻게 말했지? 영어로 생각하고 영어로 말했다. 그런데 지금 말할 때는 생각은 모국어로 하고 말은 영어로 하니 머리가 희안하게 뒤죽박죽이 되더라. 영어로 말하느라 진땀을 흘렸지만 참을성 있게 들어주더라. 그에게 인도에 반드시 가보라고 말했다. 인도에 가면 끝내주는 자연경관과 당신 좋아하는 사원들이, 엄청난 사원들이 소똥 범벅인 채로 흔하게 널려있다고...

9am 쁘람바난 사원으로 이동하는 중 작은 힌두 사원과 불교 사원에 차가 잠시 멈췄다. 그때쯤 비슷한 시각에 투어를 시작한 다른 차량들이 한 자리에서 만났다. 여행자들은 서로의 여행 얘기로 꽃을 피웠고 난 재미가 없어 보리수 그늘에 앉아 쿠알라캉사르 출신 말레이인과 그의 캐논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쳐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한창 복구중인 힌두 사원과 거대한 보리수


쁘람바난 사원에 가는 길 내내 왼쪽, 오른쪽의 프랑스, 캐나다인은 연신 사진을 찍고 이죽이며 그걸 굳이 보여주며 나와 얘기를 나눴다. 흡사 여행 처음 하는 사람들처럼 천진난만하달까? 차가 족자 시내에 들어서고 보르부두르 유적지 투어만 하기로 한 사람들이 내렸다. 말레이인만 내렸다. 다시 출발. 차 옆으로 곡예하듯이 아슬아슬하게 지나치며 충돌 없이 지나가는 오토바이에 다들 감탄했다. 

10.50am 무렵 쁘람바난에 도착. 12pm까지 관람하고 다시 모이기로. 지진 때문인지 복구하다가 말았는지 돌무더기가 쌓여있다. 화산암들. 보르부두르 유적처럼 아마도 저 멀리 보이는 메라피 화산 근처에서 돌을 날라와 가공한 것 같다. 

Candi Prambanan(짠디 쁘람바난. Candi=사원) 입구


복구가 덜 되었거나 무너진 것들. 아무래도 지진 때 무너진 것 같다. 복구가 덜 된 형태가 아니라서...

주 사원의 압도적인 위용.

자세히 보면 벽감 속의 신상들이 거의 없다. 국립박물관의 수장고에 있겠지? 아니면 누군가 훔쳐가서 어느 부호의 집 장식으로 쓰이고 있던가...


사원의 규모는 놀라웠지만 부조는 조악했고 벽감의 deity는 누군가 도굴한건지 거의 다 사라진 상태다. 자와섬을 지배한 과거의 인도 출신 힌두교도들이 정신줄을 놓은 건지 내부성소로 이어지는 기나긴 회랑도 없고 사원 전체의 바닥을 뒤덮는 판석도 없이 흙바닥(!)에 기초공사만 한 채 사원을 올리고 성소의 조각을 짝퉁스럽게 만들어 실망스럽다. 그렇다는 얘기는 힌두 지배 시기가 그렇게 강력하고 찬란하거나... 길지는 않았던 것 같다. 힌두인들은 신앙심이 돈독해서 카스트로 있는 힘껏 착취해서 사원을 꽃치장하는데 엄청난 비용을 들이니까. 

그런데 왜 여기에 쁘람바난 사원을 지었을까? 저 멀리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메라피 화산을 보고 고향의 히말라야를 연상했던 이주 인도인들이 메라피 화산을 메루산의 아바타 쯤으로 생각한 건 아닐까? 인도에서 유명한 힌두사원은 그 지역의 중심에서 지역생활의 신앙 중심 역할을 하던가, 그냥 의미심장하고 특별한 장소에 사원을 지었다. 강줄기가 둘로 합쳐지는 곳은 엄청나게 중요한 곳이다. 쁘람바난 사원 역시 보르부두르처럼 19세기 무렵 당시 인도네시아를 지배하던 더치가 발굴한 건가? 무슬림은 이런 유적에 관심이 없을 테니까.

사원 옆의 박물관에서 가멜란 연주를 하고 있다. 독창하는 아줌마를 비롯해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공연... 건기 저녁 무렵이면 국립 박물관 뒤쪽 식당에서 쁘람바난 사원을 배경삼아 디너쇼가 벌어진단다. 무척 로맨틱할 것 같다.

캐나다인이 옆에 달싹 붙어 같이 다녔는데 내가 영어가 잘 안 되니까, 사내 흉내 내며 bro, huh 하며 말 붙이는게 불편하고 귀찮았다. 그래도 쁘람바난이 인도의 힌두사원과 하나 닮은 건 있었다. 햇살이 사정없이 내리쬐는 사원 유적지에 그늘이 하나도 없었다. 사원 관광을 끝내고 설렁설렁 투어 차량이 정차해 있는 주차장으로 걸었다. 연휴라서 유적지는 관광 온 인도네시아인들로 버글버글했다. 

운전사는 어디갔는지 안 보인다. 누군가, 햇볕을 피하느라 잎사귀가 다 말라버린 나무 한 그루에 달싹 붙어 뭉쳐 있는 우리를 보더니 운전사를 데리러 갔다. 그새 뉴질랜드 박사 여자는 출구의 시장통에서 뭔가 잔뜩 쇼핑해 와서 가판 벌리듯 늘어놓고 이건 얼마 짜리, 저건 얼마 짜리 설명했다. 네고 참 잘 한다. 마누라 생각이 났다. 운전사는 독실한 무슬림인지 사원 입구 근처에 마련해둔 기도소에 머물러 있었나 보다. 헐레벌떡 뛰어오면서 아임 쏘리, 아임 쏘리를 연발. 인샬라 하니까 낄낄 웃는다.

족자에 돌아오니 12pm. 돌아오는 길에 가이드북을 뒤져 말리오보로 거리 시작 즈음에 위치한 가루다 인도네시아 항공사 사무실을 찾았고 투어 차량이 여행사 앞에 서자 마자 항공사 사무실로 갔다. 에어컨이 망가져 창문 열어 놓고 다니는 차에 있다가 에어컨이 있는 사무실에 오니 살 것 같다. 바깥 기온은 32도, 건기인데도 습도가 높아 등짝이 땀에 절었다. 내 차례가 되어 항공권 프린트 물과 라이온 항공표를 보여주며 사정 설명하고 귀국항공편의 날짜를 하루 앞으로 댕기는 것이 가능한지 문의. 불가능하단다. 그날 좌석이 전 시간 모두 여유 좌석이 없고 웨이팅도 할 수 없단다. 라이온 에어 항공사 위치를 아냐고 물으니 모른단다. 여행사 가면 라이온에어 항공권 날짜를 변경할 수 있을까 물으니 잘 모르겠다며 무척 미안해 한다. 사탕 하나 먹고 물 한 잔 마시고 빙글빙글 웃으며 나왔다. 이 나라 사람들의 친절과 미소는 기분이 참 좋다.

빌어먹을 더위에 거리를 걸어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 잡고 물어물어 여행사를 하나 찾았다. 라이온 항공권을 보여주며 일정 변경이 가능한지 물었다. 워낙 싼 항공권(promotion)이라 불가능할꺼란다. 자기들은 그런 업무를 하지 않는다며 미안해 한다. 그럼 혹시 환불은? 항공사에 직접 가야 한단다. 시내에 항공사가 있나? 없다. 족자 외곽의 공항에 사무실이 있단다. 이게 영어로 한 얘기가 아니지만 뜻만 통한다면 뭐...

하아... 덥다. 옵션이 하나 밖에 안 남았다. 굶으면서 이게 무슨 꼴이지? 얼른 이것저것 볼 일 끝내고 어제 못 본 끄라톤을 보러 가야 하는데. 인도네시아의 관광지들이 다 그런 것 같은데, 2.30pm이면 문을 닫았다. 그러니 서둘러야 한다. 그런데 덥다. 

어제 인터넷으로 뒤져보니 denpasar to jakarta 인도네시아 국내선 항공표는 전 시간 매진되었다. 마지막 남은 옵션은 가루다 항공권의 출발지를 jakarta에서 denpasar로 변경하는 것 뿐이다. 그렇게 되면 라이온 항공권은 환불해야 한다. 가루다 인도네시아 사무실을 다시 찾았다. 아까 그 친절하고 예쁜 아가씨가 맞아 주었다. 출발지 변경이 가능한지 물었다. 2-3분쯤 터미널을 검색하더니 아주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이 항공권의 발권을 한국에서 한 것이라 한국에서만 변경이 가능하단다. 시스템이 후진 거니 미안해 할 만 했다. 국제전화를 해야 하나? 그러고보니 생각났다. 한국에서 귀국편 출발지를 변경하려고 전화하니 추가비용 얘기를 했다. 여기선 결제를 할 수 없다. 천상 아내한테 얘기해야겠다. 라이온 항공편은 환불해야 하니 공항에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종이에 적어준다.

말리오보로 거리의 Indo Mart에서 와이파이를 사용하려고 1700rps 짜리 가장 싼 비누 하나를 달랑 사니 카운터 아가씨가 낄낄 웃는다. 나도 웃겼다. 마침 아내와 스카이프 통화가 되었다. 출발지 변경을 부탁하고 전화를 끊었다. 잘 되야 할텐데... 딸애가 아빠 보고 싶다고 전날밤 울었나 보다. 떠나기 전날 대형마트에 들러 떨이 판매하는 강아지 인형과 카드를 사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이가 걸어놓은 양말에 넣어달라고 아내에게 부탁했다. 카드에는 '다음엔 아빠, 엄마랑 함께 여행가자' 라고 적었다. 마누라가 나랑 같이 가려고 할까? 인도 가자고 하면 미끼를 덥썩 물 것이다.

공항에 가자. 트랜스족자 버스를 타러 말리오보로 거리의 버스 정류장에 갔다. 왠 서양인이 길을 묻길래 친절하게 알려줬다. 내가 인도네시아인인 줄 알았던 모양. 버스 매표원이 버스가 언제 올지 모른단다. 그러면서 거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 교통체증. 길 옆 식당에서 어제 얘기 들은 나시 구덱을 시켰다. 별로인데? 하지만 3000rps 짜리 얼음을 잔뜩 넣은 사탕수수 쥬스는 무척 좋았다. 

밥을 먹으며 현지인과 낄낄 대며 놀다가 교통체증이 좀 완화된 걸 보고 버스정류장에 갔다. 말리오보로 거리는 일방통행이라 버스정류장을 헷갈릴 염려가 전혀 없다. 내 얼굴을 기억한 매표원이 저 버스를 타면 된다고 알려줬다. 쁘람바난행 1A 버스다. 버스는 콩나물 시루 같았고 에어컨은 대충만 작동했다. 50분 정도 땀을 줄줄 흘리며 공항에 도착했다. 오히려 바깥이 더 시원하다.

라이언 항공표를 refund하기 전에 아내가 항공권 스케쥴을 변경했는지 통화해 봐야 한다. 아니면 이 표를 그냥 들고 가서 자카르타에서 하루 버린다 치고 더 묵어야 하니까. 공항 안내소에 와이파이 사용가능한 곳을 물으니 depature launge에서만 사용가능하단다. 역시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아내에게 확인할 길은 없지만 어떻게든 솔루션을 찾을테니 믿고  도박을 하기로.

아침에 함께 투어했던 스웨덴 친구들이 짐을 맨 채 멍하니 서성였다. 눈인사만 하고 항공사 창구에 가서 항공권의 refund를 요구. 영어를 잘 못 알아 듣지만(내 영어도 뭐 시원찮으니 상관없다) 어찌어찌 의사가 통했다. 55% 정도만 환급이 가능했지만 그게 어디야. 

족자로 돌아가려고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누가 허덕허덕 쫓아오며 등을 건드린다. 어? 아까 봤던 스웨덴 사람들 중 그나마 영어가 되는 친구다. 날더러 혹시 surabaya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냐고 묻는다. 공항에 오니 surabaya행 항공권이 매진이란다. 지금 bus나 기차표, 항공권은 아마 구할 수 없을 것이다, holiday season이나 완전히 매진되었다고 하니 다 죽어가는 표정이다. 

수라바야에는 왜 가는데요? 물으니 내일 오후에 수라바야에서 자카르타 가는 항공권을 미리 끊어 놓았단다. 그거 못 타면 엿(totally screwed up)된단다. 그 편을 타야 자카르타에서 집에 가는 귀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으니... 어제부터 표를 구하려고 애쓰다가 결국 못 구하고 공항에 오면 어떻게 될 지도 모른다는 현지인 충고를 듣고 여기 왔지만 표를 구할 수 없었단다. 딱 한 장, 창구에서 낙장 표를 구할 수 있었는데 넷이서 고민하다가 함께 왔으니 끝까지 함께 가자고 얘기하다가 그래도 한 명이라도 보내는게 낫다고 가장 나이 어린 친구를 보내기로 합의하고 표를 사러 갔더니, 그새 팔렸단다. 사정이 딱해서 낄낄 웃었다. 

내 머리로는 도저히 솔루션이 안 나올 것 같기에, 어떤 상황에서건 마술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우리 마누라를 시뮬레이션해 봤다(그러니까 잔머리를 굴렸다). 묘안이 떠올랐다.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게 뭐냐? 족자로 돌아가 여행사에서 브로모 화산 투어표를 끊는 것이다. 여행사 투어 버스는 언제나 있다(비싼 비용을 치루니까). 브로모 화산 투어가 프로볼링고를 거쳐 가는데 거기서 수라바야가 가깝다. 아마도 프로볼링고에서라면 대충 아무 버스나... 또는 히치하이킹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 친구들을 데리러 간다며 공항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불쌍한 녀석들. 아참, 나도 불쌍하지. 여전히 그 친구들 이름을 모른다. 난 왜 사람 이름이 머리에 남지 않을까? 숫자처럼 여행자가 균등해 보여서? 여늬 여행자와 마찬가지로 평등하게 무의미해서? 비록 친절한 편도 아니고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여행자들을 도왔다.

버스를 탔다. 이번엔 에어컨이 작동한다. 그래도 땀을 흘렀다. 산유국이지만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연비가 안 나오면 일단 에어컨을 끄는 안 좋은 관습이 있는 듯. 더더욱 사람을 힘들게 하는 관습은 관공서와 관광지가 입장을 2.30pm까지만 받는 것.

말리오보로 거리에 도착하니 어느새 5pm. 허탈한데? 아까 비누를 산 Indo Mart에서 오렌지 쥬스를 한 병 사서 마시며 아내와 통화. 항공권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러니 다들 마누라 없으면 못 산다고 그러지. 열심히 땀 흘려 삽질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흡족하고 씁쓸하고 노곤하다. 

트윗질 몇 번 하고 구글맵으로 브로모 일대와 발리섬 지도를 다운 받고 생각난 김에 여행사에 들렀다. 숙소에 묵고 있던 일본인 여자가 무려 통역을 데려와 투어를 예약하고 있었다. 아는 척 하니 어디 가냐고 묻는다. 내가 유부남만 아니면 오늘 보르부두르 간 사실을 숨기고 내일 당신이 가는 보르부두르 선라이즈 투어를 신청할 것이다. 사원에 떠오르는 멋진 해돋이를 보며 하루살이처럼 살자고 거듭 다짐할 것이다. 농담이고... 어렸을 때 일본 여자애들과 참 많이 돌아다녔지...

일본 여행자를 보내고, 브로모+이젠 투어를 예약하려니 유독 가스와 화산탄 때문에 이젠 화산은 아직도 출입이 통제되고 있단다.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없어요. 꼭 가고 싶은데요? 제가 죽을 병에 걸렸거든요? 킥킥 웃는다. 정말 안되요. 그래서 브로모 투어만. 일정: 짚차를 타고 view point#1에 올라 일출을 보고 내려와, 브로모 화산까지 걸어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 공항에서 헤메던 스웨덴 청소년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해가 졌다. 숙소에 들러 샤워하고 다시 나왔다. 배가 고파 밥을 먹어야겠다. 오늘 한 일이 대체 뭐지? 아, 여행을 했구나. 말리오보로 거리를 따라 내려갔다. 거리에 돗자리를 펴고 사람들이 앉아 노점에서 파는 밥을 먹는다. 거리에서? 재밌어 보여 밥을 주문하고 먹었다. 낮에 먹은 것처럼 10,000rps에 나시 구덱과 사탕수수 쥬스를 시켰는데 굉장히 맛있어서 쌀 한 톨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었다. 

족자카르타의 유명한 식사 방법: 길바닥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나시 구덱을 먹는단다. 나도 해봤다.

길거리 노점상. 아까 돗자리 깔고 먹던 곳 옆자리.

Mal Malioboro 지하 수퍼에 들러 맥주와 샌달 따위를 샀다. 식빵도 샀다. 내일 아침부터 이틀 동안 다시 강행군이다. 거리에 인터넷 가게가 보여 들렀다. 한 시간에 4000rps. 휴대폰에 찍어놓은 사진을 백업 차원에서 올리려고 했으나 너무 느리다. 값이 싸서 그런가? 항공권을 프린트 하는데 인터넷 까페에 프린터가 없단다. 하는 수 없이 어제 갔던 인터넷 까페에 들러 한 시간에 7000rps 짜리 인터넷을 사용하고 1000rps 주고 일정이 변경된 항공권을 프린트했다. 마찬가지로 인터넷 속도가 느렸다. 

Gang 1 어귀에 있는 작은 가게에서 안주꺼리로 1200rps짜리 쌀과자를 샀다. 아까 거리에서 옆에 앉아 함께 밥을 먹던 현지인이 내가 워낙 게걸스럽게 먹는 것이 웃겼는지 쌀과자를 나눠줬는데 무척 맛있던 기억 때문이다. 숙소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숙소 거실의 소파를 치워놓았다. 방바닥에 앉아 동네 노인네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고 있다. 나더러 함께 먹자고 했지만 배가 찼다고 거절. 아줌마가 나를 주방에 데려가 굳이 밥을 퍼주려고 한다. 비닐봉투를 열어 맥주를 보여주니 히죽 웃는다. 맥주가 팔리는 걸 보면 인도네시아 무슬림이 맥주를 마시는 것 같긴 한데... 하여튼 그 자리에 젊은 사람들이 함께 있었으면 먹었을 지도 모르겠다. 

샤워하고 맥주를 마시며 일정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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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kyakarta

여행기/Indonesia 2011. 12. 25. 12:00
한 삼십분 달리더니 차가 선다. 짐칸에 재봉틀을 실으려고 한다. 재봉틀이 너무 커서 들어가지 않아 여러 사람들이 옥신각신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결국 재봉틀은 포기했다. 승객들이 꾸역꾸역 차에 올랐다.

삼십분 쯤 차가 달리더니 승객을 태운다. 그렇게 해서 네 시간 동안 12명의 승객을 태우고 자카르타 시내를 빠져나간 시각이 12am. 그때쯤 간식으로 빵과 물을 줬다.

아마도 자카르타 시내를 돌며 승객을 모집하는 것 같다. 미니 버스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내가 앉은 열에 4명이 앉았다. 아이 둘, 어른 둘. 앞에 앉은 아이 엄마가 사탕을 준다. 줄 게 없어 민망했다. 여자애한테 말을 걸어봤지만 말이 뚝뚝 끊겼다. 그 옆 자리 아이는 차멀미로 연신 게웠다. 먹은 걸 다 게웠는지 지쳐서 잠이 들었다.

무릎이 앞 좌석에 닿아 불편했다.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날이 밝아올 무렵 바깥을 보니 정글 한 복판에 난 1차선 도로를 열심히 달리고 있다. 고속도로가 없는 건가? 중간에 차가 멈추더니 아침을 먹잔다. gps를 간신히 잡아 살펴보니 족자까지 100km 쯤 남았다. 8am. 넉넉잡아 두 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하지 싶다.

비가 쏟아졌다. 밥은 조금 있으면 도착할 족자에서 먹기로 하고 내 옆에 앉은 아저씨와 장쾌하게 쏟아지는 비를 구경하며 손짓 발짓으로 얘기를 나눴다. 48세, 자식은 다섯. 자카르타와 고향을 한 달씩 오가며 생활. 요리사. 푸딩을 잘 만든단다. 한달 월급은 백만 루피아. 집 없고 차 없다. 임대한 좁은 방에서 아이 셋과 자카르타에 산다. 그래도 히죽히죽 잘만 웃었다. 저 아이들이 당신 딸이냐? (내 옆에 앉아있던 아이들) 아니다. 딸들은 자카르타에 있고 그 중 하나는 대학에 보냈다. 등 허리가 휘어지시겠군. 담배를 교환해서 피웠다. 내 담배가 좋단다. 비가 잦아 들었고 다시 미니 버스에 올랐다.

미니버스가 보르부두르 부근에서 빙빙돌더니 아저씨를 이름 모를 시골 마을에 떨구었다. 나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 

12.30pm 무렵 미니버스는 족자카르타 시 어귀에 닿았다. 그런데 시내로 안 들어가고 시 외곽으로 주욱 빠져 나간다. 어어... gps를 켜서 보여주며 내가 내릴 곳은 족자 시내 tugu stasiun이라고 손짓발짓을 동원해 알렸다. 그저 내 휴대폰의 gps를 신기하게 쳐다보면서 걱정 말란다. 투구역에 내릴 때까지 족자카르타를 뺑뺑이 돌며 모든 손님을 내려주고 거의 마지막에 내렸다. 그 때가 2.10pm. 징하다. 무려 18시간을 비좁은 미니버스를 타고 간신히 이곳에 도착. 운전사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welcome to jogja! 하면서 함박 웃으며 손을 흔들고 떠났다.

대낮부터 마사지 하고 가라는 손길을 뿌리치며... Yogyakarta Tugu Stasiun(족자카르타 투구역) 남쪽길 숙소 밀집 거리를 찾아 가는 중.

투구역 앞 저렴한 숙소가 몰려있는 골목을 돌았다. 여러 숙소를 전전했지만 마음에 들거나, 가격이 싼 곳은 보이지 않았다. 연말이라 방이 꽉 차서 구하기가 쉽지 않다. 골목길을 한 시간쯤 전전하다가 twin bed, bathroom inside를 100,000 루피아에 얻었다. ISTI 라는 곳. 



음... LP를 안 봤다. 봐도 별 무소용이라 그냥 발로 뛰는 형편. 게스트하우스 주인장과 대화를 하는데 숙소에 묵고 있던 일본인 아가씨 둘이 옆에 앉아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다. 주인장은 지금 쁘람바난에 가면 늦을 꺼란다. 오후 다섯시면 돌아오는 버스 타기가 힘들고 연휴라 관광지인 그곳에 사람이 지금 엄청나단다. 한숨... 아닌게 아니라 오는 길에 본 족자 시내는 엄청난 차량과 인파로 미어터졌다. 

주인장에게 여행사 추천을 부탁했다. 대부분 여행사들의 투어 가격이 비슷하지만, Sosro tour가 수익 일부를 떼어 지역 사회에 환원(기여)한단다. 일본 여자애 둘은 각자 따로 와서 족자에 장기 투숙 중이다. 특별히 어디 돌아다닐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난 지금 투어 예약하러 가려는데 같이 가겠어요? 물으니 어물어물한다. 하긴 나 같은 아저씨랑 누가 같이 가고 싶겠어.

미로같은 숙소골목을 돌아 소스로 투어에 찾아 가서 투어 상품을 찾아봤다. 아가씨가 친절해서 이래저래 여러 가지 얘길 나눴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끄라톤과 따만사리를 구경하고 내일 하루 날 잡아서 보르부두르와 쁘람바난 투어를 하는게 낫단다. 디엥고원은? 투어로 가지 말로 근처 도시에 하루 묵으며 1박 2일 정도로 가는게 좋다 -- 투어 비용도 비싸고 하루종일 차만 탄단다. 아가씨가 추천한 투어에서 아침식사를 뺀 것으로 예약했다. 히죽 웃으며 말한다; 그래요 식사는 숙소에서 주니까 필요없죠. 내가 묵은 숙소는 식사 대신 무한 리필 차만 준다. 투어 가격은 60,000rp. 보르부두르 입장료 120,000 + 쁘람바난 입장료 105,000. 한 방에 285,000루피아를 썼다.

Jalan Malioboro(말리오보로 거리)의 인파로 붐비는 상점들. 연말연시 탓인지, 아니면 족자카르타가 워낙 유명한 관광지라서인지 하루종일 인파로 북적거렸다.

박물관과 kraton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숙소거리에서 약 1.6km 정도. 인파로 미어터진 Jalan Malioboro를 걷다가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사람이 방글방글 웃으며 손을 흔들어 반겼다. 지금 가봤자 kraton이 문을 닫았을 꺼란다. 영어가 유창하고 사람 좋게 생겨서 한 동안 대화를 나눴다. 결론은 자기가 아는 사람이 하는 어떤 바틱 전시장에 가서 훌륭한 예술품을 감상하라는 것. 바틱에 관심이 없어 그냥 가겠다고 했다. 아까 듣기론 끄라톤은 그래도 따만사리는 그냥 들어가서 구경할 수 있다고 들었다.



마스지드에서 기도 중인 사람들. 손과 발을 씻고 신발을 마당에 벗고 마스지드에 들어갔다. 기도할 시간. 같은 이슬람 국가인 옆 나라 말레이지아와도 사뭇 다른 내부 분위기. 마치 흔한 동남아의 불교 사원 분위기랄까...

끄라톤은 문을 닫았다. 배가 고파서 자리를 접고 떠나려는 미 아얌 포장마차를 잡아 음식을 시켰다. 맛 없다. 마스지드에 들러 손발을 씼고 잠시 쉬다가 따만사리로 가니 자칭 경비(security)라는 친구가 벌떡 일어나 다가오더니 날 안내해 주겠단다. 혼자 가면 길을 잃는다나? 돈을 줄 수 없다고 하니 무료란다. 한 눈에 봐도 삐끼인데 이렇게 아는 척 해주시니 고맙다. 난 삐끼가 없으면 여행이 안 되는 타잎이라서...

삐끼의 아버지는 끄라톤에서 근무하는 공무원(government officer)인데 여전히 잘 살고 있으며 족자에서 심하게 존경 받는 술탄을 위해 봉사하고 있고(공무원이?) 엄마는 와양극 가수란다. 자기 집은 따만 사리 옆에 있단다. 

그림자 인형극에 사용하는 인형을 만드는 장인. 버팔로 가죽에 세공


따만사리의 목욕탕. 술탄의 부인들이 여기서 목욕.

길을 잃기 딱 좋은 거리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술탄의 목욕탕을 구경하고 골목 어귀의 kakilima에서 과일을 사서 나눠 먹었다. 까끼리마는 다섯(lima) 다리(kaki)라는 의미로 노점의 두 바퀴와 스탠드, 그리고 주인의 두 다리를 뜻한다. 나시 고랭, 미에 고랭, 박소(bakso, baksu), 과일 등을 파는 간단한 노점상인데 인도네시아 어디 가나 널려 있다. nasi는 rice, mie는 noodle, goreng은 볶았다는 뜻. 논에서 자라는 벼는 padi라고 부르고 시장에서 파는 쌀은 beras, nasi는 찐(끓인) 쌀.

따만사리의 미로같은 골목길을 가다가 만난 과일장수 아저씨. 1달러 정도(10000rp)면 한끼 식사 대용으로 열대 과일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

삐끼가 족자에 왔으니 Nasi Gaduk을 먹어 보란다. 한참 친절하고 싹싹하게 군 다음 가족이 운영한다는 바틱 매장에 나를 데려갔다. 자기 친형님이란 분이 나와(그럴 리가 없겠지만) 물건을 이것저것 보여주신다. 훌륭하고 아름답다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하지만 바틱이나 그림자 연극 소품엔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형님이란 사람은 하지만 왜? 왜 물건을 안 사냐? 이렇게 훌륭한데? 라고 의아해 하며 안타까워했다. 나는 눈으로 찰칵찰칵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찰칵찰칵. 조카, 아우가 운영하는 다른 매장을 두어 군데 더 돌며 찰칵찰칵 눈으로 사진을 찍는 시늉을 하니까 삐끼는 실망했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가이드해 줘서 고마웠다.

길 잃은 미아처럼 두리번거리며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렸다. 따만사리 근처 어딘가에 새시장이 있다는 말은 들었다. 새소리를 따라 가니 여러 명의 심사위원이 새장을 하늘에 매달고 맵시와 울음소리를 듣고 새를 품평하고 있다. 새 주인들은 새들을 북돋아 자기가 키우는 새들이 좀 더 아름답게 짖도록 촉구하고, 구경꾼 무리가 미소띤 얼굴로 광경을 바라본다. 한 켠에는 까끼리마에서 박소를 팔고 있다. 한가하고 기분 좋은 광경이다. 

지나가다 본 인터넷 가게(wartel). 30분에 보통 2000rp. 정도, 1시간에 3000~4000rp 가량인데, 여행자 거리에서는 시간 당 7000~10000rp 사이. 256 Kbps ADSL 라인이라 속도는 어느 정도 나온다.

왕궁 앞 광장으로 천천히 걸었다. 놀이기구 사이로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장터에 널린 자자난(길에서 파는 여러 종류의 간식꺼리를 총칭)을 몇 개 사 먹었다. 하나당 2000~4000rps. 시골 장터 구경하는 기분. 티셔츠 하나가 10000~20000rps. 품질이 조악. 단기 여행이라 굳이 옷을 살 필요가 없었다.

놀이터에서 파는 잡다한 간식꺼리들(대개 0.5달러 미만)을 주워 먹으며 한가하게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70~80년대 한국의 모습을 보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기도 21세기다.

해 질 무렵 동네 한 바퀴 도는 기분으로 말리오보로 거리를 벗어나 크게 외곽으로 걸었다. 거리는 퇴근하는 사람들로 붐볐고 어제처럼 오토바이와 자동차들이 1차선 도로에 한데 뒤엉켜 심한 교통체증으로 정체되어 있다. 가는 길에 과학관으로 보이는 건물을 바깥에서 구경했다. 


족자카르타(Yogyakarta)는 우리나라로 치면 경주 같은 고적지이자, 문화예술의 중심 도시. 한낫 신호등 제어기에도 까꿍 괴물같은 수묵 그래피티를 그려놨더라. 그 때문에 도시가 지저분해 보였다.

말리오보로 거리의 한 복판에 있는 커다란 쇼핑몰(Mal Malioboro) 꼭대기 층의 food court에서 박수 세트 메뉴를 주문. 1층에서 바비걸 경진대회가 벌어졌다. 조그만 아이들이 저마다 미를 뽐내며 날카롭게 짹짹 거리는 소음을 들으며 거리에서 먹는 음식보다 현저하게 맛없는 음식을 꾸역꾸역 삼켰다. 테이블에서 흡연이 가능했다. 카운터에서 재떨이를 들고와 딱히 할 일도 없고 담배 한 대 빨며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쁘람바난과 보르부두르 유적지에 관한 책을 사려고 쇼핑몰 지하의 서점에 들렀다. 우리나라로 치면 동네 서점만한 곳이었고 유적지에 관한 책은 없었다. 지하에 있는 수퍼에서 내일 아침 꺼리와 맥주 따위를 사고 거리에서 안주로 먹을 간식꺼리를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비에 젖고 땀에 젖고 먼지와 분진으로 누더기가 되다시피 한 옷가지들을 모아 빨래를 하고 맥주를 들이키며 일정을 점검했다.

가져온 전자항공권의 날짜를 보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마침 일 층에 앉아 있던 주인장에게 물어 근처 인터넷 까페를 찾아갔다. 떠나기 전날 밤, 웹질을 하다가 아무 생각없이 12/31 Denpasar(Bali) to Jakarta 항공권을 덥썩 산 생각이 났다. 일정이 꼬여 디엥 고원에 가는 여정을 포기했음에도 자카르타에서 족자행 교통편을 구할 수 없어 하루를 보낸 덕에 발리에서 비행기를 타고 자카르타로 돌아와서 자카르타에서 하루 묵으며 관광하려던 계획은 의미가 없어졌다. 그냥 발리에서 1/1 아침이나 점심 비행기(라이온 에어편?)를 타고 자카르타로 가서 1/1 밤 23:30에 출발하는 자카르타 to 인천 행 비행기를 타면 된다. 

옵션은 넷이다. 만날 이런 저런 기획을 하다보니 옵션이 이렇게 많을 땐 왠지 기쁘다.

  • 라이온 에어 항공권의 스케쥴을 12/31에서 1/1로 변경. 
  • 가루다 인도네시아의 귀국 항공편 스케줄을 12/31로 하루 댕기기.
  • 그게 안되면 라이온 에어 항공권을 환불하고 1/1 다른 항공편으로 자카르타로 간다. 연휴인데 가능할까?
  • 그마저 안되면 라이온 에어 항공권을 환불하고 인천행 가루다 인도네시아 항공편을 jakarta to incheon에서 denpasar(bali) to incheon으로 변경한다. 생각해보니 가루다 인도네시아에 출발지 변경을 문의했었고 답변을 준다고 했는데 답변이 없었다. 바빠서 다시 연락할 틈이 없어 떠나기 전 날 밤 갑자기 생각나서 백업으로 라이온 에어 항공권을 구입한 것이다  -- 요새 하도 바빠서 경황이 없다.
인터넷 가격이 30분에 5000rps로 비싼 편. 256K ADSL 라인은 꽤 속도가 잘 나와 옆 자리의 여행자는 헤드셋으로 스카이프 음성 통화 중. windows server 2003이 설치되어 있다. 한글을 볼 수는 있지만 korean ime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한글 타이핑은 할 수 없다. 예전에는 인터넷 까페이 들르면 카메라 사진을 업로드하고 사진을 올리는 동안 한글 설치한 다음 블로그 따위를 썼다. 와이파이 되는 휴대폰으로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간단히 올리면 되니 뭐 그럴 필요가 있을까?

라이온 에어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환불 신청하는 메뉴가 없다. 어떡하지? 내일 항공사 사무실을 찾아가자. 18시간 동안 불편한 버스를 타며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족자에 도착해서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니 피곤하다. 숙소로 돌아가 잠이나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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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karta

여행기/Indonesia 2011. 12. 23. 12:00
새벽 5시에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짐은 그저께 밤에 챙겨뒀다. 어제는 송년회가 있었고 신입사원에게 엔지니어링은 마인드와 소울을 단련하는 과정이라고 뻘소리를 한 것이 기억 나서 민망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게 민망한 얘기는 아니었다. 꼰대스러울 뿐이지.

자고 있는 아이와 아내를 놔두고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시내버스 정류장에 어렴풋한 사람 그림자가 보인다. 발발 떨다가 버스를 타고 서수원 터미널로 갔다. 생뚱맞은 위치에, 이용객이 별로 없는 터미널. 매표소에서 공항버스 표를 12000원 주고 샀다. 한 시간 걸려 공항에 도착. 짐을 붙이고 항공좌석표를 찾았다. 

자동출입국 심사라는 것이 눈에 띄었다. 여권을 스캔하고 지문을 찍으면 등록이 끝난다. 자동출입국 심사대에서 여권을 스캔하고 지문을 검사하니 광속으로 통과. 하지만 수속을 밟고 공항 대기실까지 가는데 무려 2시간이 걸렸다. 공항이 사람들로 몹시 붐볐다. 공항에 두 시간 전에 도착했으나 항공기 탑승까지 15분 정도의 여유 밖에 없었다. 

공항 라운지에는 naver wifi가 무료다. 인도네시아 정보를 적어둔 파일을 회사 컴퓨터에 놔두고 온 게 기억난다. androidvnc로 회사 컴퓨터에 접속을 시도했으나 안 붙는다. 출근한 직원에게 물어보니 인터넷이 다운되었단다. 그 파일을 google docs로 옮겨야 하는데... 포기. 남은 10여분 동안 휴대폰의 Locus App으로 600MB 분량의 인도네시아 지도 tile 파일을 다운로드 했지만 해상도가 떨어져 쓸모없는 수준. 괜히 휴대폰 배터리만 낭비한 것 같다. 미련없이 로커스 앱과 데이타를 지웠다. 
 

인도네시아 국적기(?) 가루다 인도네시아 항공기. A330

항공기 탑승. 기내에서 LP 인도네시아 가이드북을 잠깐 공부. 여행 준비할 시간이 없어 루트조차 제대로 못 짰다. 어디로 갈까. 계획은 이렇다; 자카르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공항 셔틀 버스를 타고 Gambir train stasiun에 가서 Yogyakarta행 기차표를 산다. 기차표를 구할 수 없으면 Pasar Senen Stasiun역으로 걸어가서 가격이 싼 bisunis class 기차를 시도해본다. 자바섬을 가로질러 여행하다가 Surabaya까지 가서 다시 자카르타로 돌아와 하루쯤 자카르타 시내 관광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 중간 과정은 여행하면서 차차 생각해 보기로. 플랜B까지 짰으니 잠이나 자자.

도착 1시간 전. 자와해 보르네오 섬 부근

깨보니 기내식을 나누어 주고 있다. Garuda Indonesia 항공기 기내식은 halal을 따랐고 그래서인지 맛이 없었다. 순한 필스너인 bintang 맥주 한 캔 마셨다. 자바 커피는 맛있었다. VOA(visa on arrival)을 기내에서 받았다. 25$. 인천공항 가루다 인도네시아 카운터 옆에서 바우처를 구매하고 그걸 내밀면 기내에서 비자를 주는 식. 아니면 공항에서 긴 줄을 기다려 비자를 받아야 한다.


공항 도착. 후덥지근. Baggage Claim으로 가는 길에 화장실에 들러 겨울옷을 벗고 배낭에 넣었다. 반바지에 반팔. 이 동네에선 반바지 입고 돌아다니면 이상하게 본다는데? 나와보니 어디에서 짐을 찾는지 몰라 공항 직원으로 보이는 친구에게 물으니 친절하게 데려다 주고 짐을 찾아준다. 그러더니, '모니'를 요구. 히죽 웃으며 거절. 

환전소의 환율이 형편없어 ATM을 찾으러 돌아다녔다. arrival에 있는 한 ATM에서 거래에 실패. 더 이상 ATM이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헤메다가 물어보니 2F Depature에 있단다. 씨티 국제 체크카드로 200만루피아를 찾았다. 이걸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Gambir Stasiun행 Damri 버스 티켓 가격은 20,000루피아. 담배 한 대 피우면서 기다리다가 4.40pm 쯤 버스에 올랐다. 지랄맞은 교통체증 때문에(안 그래도 자카르타의 교통체증은 국제적인 명성을 자랑) 한 시간이면 닿을 거리를 두 시간이나 걸려, 6.40pm이 되어서야 도착. 가는 길 내내 samsung, LG, SK, Lotte 광고판이 눈에 띄었다. 별 감흥이 없었다.

감비르역의 매표 창구에는 보아뱀처럼 구불구불한... 기나긴 줄이 드리워져 있었다. 표 구하긴 글른 것 같은데? 안내센터로 보이는 곳에 들어가 물어보니 holiday season이라 기차표를 내일까지 구할 수 없단다. 파사르 세넨 역에서는? 마찬가지란다. 혹시 버스표는 구할 수 있을까요? 고개를 설레설레. 거기도 아마 마찬가지일 꺼란다. 어영부영 하다보니 7.30pm.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오니 비가 쏟아진다. 어떻게 할까... 별 수 없다. 자카르타에서 하룻밤 묵으며 여행사에서 가는 교통수단이 있는지 알야봐야지. 예정에 없던 플랜 C다.

모자를 눌러 쓰고 비를 맞으며 어두운 밤거리를 터덜터덜 걸었다. 현지인들은 차가 오건 말건 무단횡단을 했다. 나도 그렇게 했다. 비가 와서 가이드북을 꺼내볼 형편이 아니라서 순전히 감을 믿고 내려가면... 안 되지.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Jalan Jaksa(작사길)을 찾아갔다. 잘란 작사는 조용한 버전의 카오산 같달까? 

숙소부터 잡자. 첫번째 게스트하우스는 8.5만을 불렀다. 침대 하나 선풍기 하나 달랑. 네고가 안된다. 다음 GH는 7만. 상태가 더더욱 안 좋다. 처마 밑에서 LP를 꺼내 뒤적여 Hostel 35를 찾아갔다. 12.5만 싱글. 비싸서 포기하고 다른데 가보니 24만. 

인니인들은 숫자를 말할 때 아래 천 단위는 잘랐다. 그래서 24만은 two hundred forty. 뉴스에서 내년쯤 인도네시아에서 화폐의 denomination을 한다는 소식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럼 천 단위 이하 절삭? 

그곳의 친절한 매니저가 싼 GH를 소개해 준다. 이쪽 골목으로 죽 들어가면 있다고. Kresna Hostel은 8만에 spartan room. 그 옆의 bloem steen은 single이 다 나가고 double을 8만 달란다. patio도 있고 해서 햇볕은 절대 안 들 것 같은 그 방으로 잡았다. 샤워하고 게스트하우스 정원에 나와 담배 한 대 빨고 있으니 비가 멎었다.

Bloem Steen Hostel. Jalan Jaksa 북쪽 입구에서 얼마 안 가서 왼쪽 골목(Gang) 안쪽에 있는 숙소. 휴일 성수기라 방이 없어 double 80,000rp에 잡았다. 옆 Kresina Hostel은 거지같은 single room이 80,000rps.

배 고프지만 여행사부터 들렀다. 족자행(Yogyakarta니까 욕야카르타 라고 해야 하는데 족자카르타 또는 jogja로 부르더라) 내일 저녁 출발하는 투어버스(A/C 달린 미니버스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를 알아봤다. 240,000rp. 매우 비싸다. 일반적인 버스 가격이 90,000rp인데... 그건 가이드북에 적힌 작년 가격이고 인도네시아의 엉망진창인 경제 사정과 높은 인플레이션을 감안해도 12만 이상은 안 나올 것 같은데... 다른 여행사도 같은 가격을 불렀다. 담합같다. 족자까지는 12시간쯤 걸린단다.

첫번째 여행사로 돌아와 예약. 길거리에서 나시 고랭을 파는 노점을 발견. 8,000rp. 아직 이게 싼 건지 비싼 건지 감이 안 잡힌다. 말레이지아와는 조리 방법이 조금 달랐다. 웍에 기름 두르고 익은 쌀과 시금치 같은 야채를 썰어 볶다가 소스를 좀 치고 계란 하나 풀어 같이 볶아 접시에 내 주는게 끝. 소스의 주성분은 MSG. 동남아시아 여행하면서 MSG를 피할 수는 없겠지. 맛있게 먹었다. 

노점상 근처의 24시간 편의점 Circle K에 들렀더니 창문에 free wifi라고 써 있었다. 편의점에서 물 한 병(1800rp) 사고 어떻게 wifi를 사용하냐고 물으니 암호가 적힌 종이를 준다.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트윗질을 좀 하고 아내와 skype로 영상통화를 한 다음 정보를 뒤졌다. jakarta는 볼 것 없는 도시란다. 

오늘 하루 종일 휴대폰의 GPS가 잡히지 않다가 wifi가 되니 GPS가 바로 잡힌다. GPS 화면을 보면서 걷다가 숙소 근처 까페의 의자에 앉아있는 한국인처럼 보이는 사람을 보았다. 숙소에 돌아와 담배 한 대 피웠다. 휴대폰을 충전시키고 잠들었다. 

숭숭 뚫린 구멍으로 방문해 주신 모기에 뜯기다가 8am 기상. 샤워하고 체크아웃하면서 짐을 게스트하우스에 맡기고 National Monumentum(일명 Monas)까지 걸었다.

출입구를 찾아 한참 헤멨다. 친절한 현지인들 도움으로 남서쪽에 있는 입구를 찾았다. 볼게 없었고 타워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는 학생들의 긴 줄이 서 있어 올라가지 않았다.

National Monumentum. 줄여서 Monas. 입구는 지도상 좌하단 하나만 개방되어 있다. 입구 찾아 돌아다니느라 진이 다 빠졌다. 개구멍이 있다는데 수선을 다 해놨는지 안 보이고... 왼쪽의 빨간 차는 유료 화장실.


거리는 차량과 오토바이로 시끄러웠다. National Museum까지 걸어갔다. 아무렴 여행의 시작과 끝은 박물관이지! 아이들이 바글거려서 신관부터 구경. 말로만 듣던 Homo Florensis를 감동적으로 쳐다봤다. 

Homo Floresiensis. 2003년 Flores의 Liang Bua 동굴에서 발견된 이 난쟁이 유골은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 사이 인간 진화의 연결 고리로 추정되어(9만년에서 10만년 전)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옆에 적힌 설명이 그렇다는 얘기고...). 내가 알기론 플로레시엔시스는 현재는 현생인류와 다른 종류로 분류된 걸로 알고 있음. 어쨌거나 박물관에 온 보람을 느낀 화석


국립박물관 구관. 카이로 박물관처럼, 박물관의 유물 보관하는 유리 케이스가 식민지 시절부터 이어져온 듯. 저게 모두 티크목.


아담한 국립박물관을 나와 근처의 Inscription park까지 걸었다. 입장료를 안 받는다. 하지만 볼 것이 없다. 공원 근처의... Masakan Padang이라 씌어진 식당에 들어갔다. 마사칸 파당은 아마도 부페를 말하는 것 같다. 접시에 밥을 담고 원하는 반찬을 접시에 담아서 먹는 것 같다. Es teh(ice tea)까지 합쳐 18,000rp. 죽어라고 나시 고랭만 먹게 될 줄 알았는데 이런 음식이 있다니... 꽤 먹을만 했다. 

박물관 앞으로 돌아왔다. TransJakarta 버스를 타려고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과일 모듬을 10000rp에 파는데 양이 부담스러워서 먹지 않았다. 버스는 3500rp로 정액이며 무제한 환승이 가능. 지하철이 없는 이 대도시에 지하철을 대체하는 대중교통수단. kota에 도착. 더치 시대의 식민지풍 건물들이 조그만 광장을 중심으로 즐비하게 들어서 있고 근처에 박물관이 네 개쯤 있었다. 

Cafe Batavia에 들어가 무선랜을 사용(wifi 암호는 cafevatavia 1085). es kopi(Ice Coffee)가 무려 37,500rp. 인도네시아에서 사용하는 말은 영어에서 차용해 온 것이 많은데 음가만 비슷. 한 동안 인도네시아의 어떤 부족이 한글을 문자로 사용한다는 한국 기사가 인기를 끌었다. 수천 개의 섬에서 살아가는 300여개의 ethnic group 대부분이 인도네시아 정부가 공식적으로 지정한 문자인 영어를 사용 중. 표음문자인 한글이 굉장히 우수하다고 하지만 한글로도 꽤 많은 음가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한글이나 영어나 음가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별 차이를 못 느낄 뿐더러, 또 어떤 문자가 다른 문자보다 더 우수하다는 견해엔 별로 공감이 안 간다. 나중 기사를 보니 한글 사용하는 댓가로 돈을 주기로 했단다. 흔한 삽질?

watch tower까지 걸어가다가 더워서 멈췄다. kota 중심가로 돌아와 노점상에서 파는 시원한 과일 쥬스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입장료 20000rp를 내고 Wayang Museum에 들어갔다. 한국인이라고 반가워한다. 인형 박물관이 무척 만족스럽다.

마하바라타의 한 장면. 크리슈나가 마차를 몰며 활을 쏘는 아르주나를 재촉한다. 죽여라, 저들을 모두 죽여라




무대인사 중인 배우들. 인도네시아 여행 중에 인형극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미디어를 통해 가멜란 음악이나 와양극을 어린 시절에 본 적이 있어서... 본 적이 있다는 이유로, 니벨룽겐의 반지나 오페라의 유령 등도 직접 보는 일은 없지 싶어지는데?


도자기 박물관과 자카르타 역사 박물관은 가지 않았다. Mandiri bank Museum에서 오래된 컴퓨터를 구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애플 ][다. ][+도 아니고! caps lock이 없어 대문자만 가능했던 기억이...


kota역에서 버스를 탔다. 수퍼마켓에 들러 물가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요량으로 Plaza Indonesia에 가보려고 Sarinah에 내렸다. 문간에서 경비원이 가방을 검사했다. 보안검색대를 통과했다. 심상치 않은데? 플라자 인도네시아는 부자들만 오는 곳 같다. 별로 볼 것이 없어 나왔다. 

Plaza Indonesia 부근의 skyscraper. 부러 열흘 휴가를 내서 이런 곳을 관광하는 타잎은 아니라서...

Plaza Indonesia 내부를 헤메다가 발견한 서점의 romance 코너. paperback을 한 권, 한 권 정성스럽게 비닐로 포장해 놔서 페이지를 열어볼 수가 없다 -_-


다시 버스를 타고 Monas 근처에서 내려 잘란 작사까지 걸었다. 


거리 입구의 포장마차에서 미에 고랭을 시켜 먹으며 동네에서 축구하던 애들과 얘길 나눴다. 계산할 때 아저씨가 8000rp를 부르니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나도 눈치가 있다. 오버차징이구나. 수퍼에서 산듯한 인스탄트 라면을 끓여 풀데기 몇 개 얹은 것을 외국인이라고 비싸게 받으니 같이 먹던 애들이 할 말을 잃어 조용.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지금 먹고 있는 이 인스탄트 미에 고랭은 어떤 작자가 세계 10대 라면 중 하나라고 꼽던 것이다. 계산하고 어제 묵었던 숙소로 돌아가 짐을 찾으며 샤워 좀 하자고 부탁했다. 개운하다.

길가에서 망고를 좀 사 먹고 여행사에 짐을 내려놓고 Circle K 앞에서 인터넷으로 아내와 딸과 얘기했다. 옆에 앉은 인도네시아 여자가 어떤 서양 남자를 걷어차는 중이다. 자기는 예쁘지도 않고 기혼에 애까지 있으며 남자를 온 마음으로 사랑했으나 자신의 마음을 따라가련단다. 그리고 자기는 섹스를 정말 좋아해서 별별 사람들과 다 자 봤다. 하지만 섹스 외에 자기에게는 something inside가 있단다. 듣고 있자니 그걸 맞장구 치며 듣고 있는 서양 남자가 무척 불쌍했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듣는 동안 겨우 겨우 회사 컴에 접속해서 모아놓은 인니 정보 텍스트 파일을 Google Docs에 올리고 폰의 문서도구를 열어봤다. 인코딩이 안 맞아 글자가 깨진다. 텍스트 파일을 utf-8로 변환하고 구글 닥스에 다시 올렸다. 이번엔 된다. 그런데 적어놓은 정보가... 워낙 빈약해서 도움이 안된다. 이걸 대체 왜 적어놨지?

차가 온다는 6pm에 맞춰 여행사에 들어갔다. 아직 차가 안 왔단다. 담배를 두어 대 피우는 동안 게이 같아 보이는 손톱이 긴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300만루피아를 주면 섹스 마사지가 가능하단다. 관심없다. 인니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 얘기를 나놨다. 한국 기업이 큰 건물을 많이 지어 놨단다.

출발 예정 시간에서 시간 반을 기다리며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과 하릴없는 얘기를 나누다보니(과일장수, 어제 나시고랭 먹었던 포장마차 아저씨, 인니에 정착해 관광객 상대로 술집을 하는 잘란 작사의 독일인 아저씨 등등) 기사가 도착했다. 드디어 출발인가? 미니 버스에 아무도 없다. 뒷좌석에 다리를 뻗고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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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동안 같이 돌아다닌 한국인은 자신이 '맛따라 길따라'라고 밝힌 바 있다. 아, 반갑군. 맛따라 길따라는 말이야, 숙소나 교통은 처절하게 싸구려를 지향해도 음식 만큼은 결코 양보해서는 안되지. 하지만 나를 따라 다니다가 계산서가 500밧, 700밧(18$ 가량?) 씩 나올 때면 표정이 안 쓰럽게 변했다. 나하고 같이 다니면 배낭여행자처럼 할 수는 없어. 라고도 말했다. 왜냐하면 나는 하루에 천밧씩 쓸 예정이거든? 보통은 하루에 200밧으로 식사 두 끼와 숙박비, 느적거리며 여기 저기 버스 타고 돌아다니고, 거기에 150밧 정도를 보태면 적당한 바에서 맥주 한 잔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하루 생활비를 한 끼로 썼다. 물론 국수와 길거리 음식도 보이는 족족 꾸준히 먹어 주었다. 하루에 간식 빼고라도 여섯 끼 정도는 먹어줘야 하니까. 그 친구는 원래 방콕에 이틀 정도 있다가 북부로 갈 생각이었는데, 인도에서 굶주리다 온 탓에 태국의 풍부함 음식에 눈을 반짝이다가 결국 방콕에서 일주일 가량을 묵게 되었다 -- 주저앉았다. 머리는 땋아서 파인애플처럼 만들어 놓았다. 앞으로 그가 여행할 어떤 도시도 방콕 같지 않을 것이고 방콕 보다 좋지도 않을 것이다.


새 아침. 8시. 너무 일찍 일어났다. 묵고 있는 도미토리에 아무도 없다. 벌써들 나간건가? 만남의 광장이 좋은 점은 숙박객이 별로 없어 팬티만 입고 복도를 활기차게 돌아다녀도 된다. 저 빨간 바지는 여행 내내 입었던 단 한 벌 뿐인 바지. 저녁마다 빨았다. 빨아도 빨아도 빨간 물은 줄기차게 흘러 나왔다. 인도제나 네팔제나... -_-

카오산을 흐느적거리며 걷고 있는데(더위는 아침이라고 봐주지 않으니까) 왠 시크 교도가 불러 세우며 날더러 다짜고짜 행운아라고 한다. 암 행운아지. 평상시에는 운이 안 따라줘서 안 해도 되는 삽질을 꼭 하게 되는데 죽을 일이 생기면 운이 따라붙는단 말이야? 장수하면서 고생하는 운이라는 것이지. 그러더니 손금을 봐주겠다며, 내 어머니 이름을 알아맞출 수 있단다. 아침부터 재수가 없다. 난 행운아가 아네요. 당신을 만난 것만 봐도 그래요. 그러고는 히히히 웃어주었다. 그 친구도 히히히 웃는다.

문을 연 가게가 없어 시장통에서 아침 밥을 먹고 인터넷 좀 하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샤워하고 어젯밤 숙소에 체크인한 미국계 일본인과 그가 온 몸에 새겨 놓은 문신에 관해 노닥거리다가 체크아웃하고 짐을 맡겨 놓고 월텟행 버스를 탔다. 딱히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월텟의 일 층에서 일식당을 본 것 같아 한 번 방문해 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여전하다. 태국에서 먹는 초밥은 변함없이 꽝이다. 나를 일본인으로 아는지 중업원들이 무척 어려워 하면서 말 끝마다 일본어를 사용했다. 카드로 결제하려니 안 된다. 어제부터, 이상한 일일세?

에어컨 펑펑 나오는 월텟의 벤치에 앉아 놀았다. pda에 책 몇 권을 담아 왔는데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그 동안 나름대로 바빠서 읽지 못했던 '데프콘'을 읽었다. 숙소에 일본인 둘이 있었는데 자기 전에 그들의 얼굴을 흘낏 쳐다보고, 데프콘 한-일전 편을 마저 읽기도 했다. 소설에서는 한국이 핵폭탄으로 일으킨 해일에 일본이 침몰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본이 어이없이 아작나서 고개를 갸웃했다. 일주일 가량 인터넷을 못했고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그 동안 모르고 있었는데 방콕에서 뉴스 사이트를 돌아보니 중국에서 일본을 비난하는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상임이사국 엿 될 것 같다. 일본은 왜 저럴까? 얻는 것도 없으면서. 원숭이기 때문일까? 혹시 요즘 일본 여성 여행자들의 얼굴이나 몸매가 영... 그런 것과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책 읽으며 빈둥거리다 보니까 어느새 오후 4시. 빅씨로 가서 1kg 가량의 망고스틴을 사고 근처 이탈리안 식당에서 스파게티를 먹었다. 스파게티 맛이 꽝이다. 먹다 말고 남기고(배도 부르고 해서) 냅킨으로 입술을 닦고 주문한 루트 비어로 목을 축였다. 요새는 민트 티나 루트 비어 따위 이상한 것들도 시켜 마셨다. 계산하려고 식탁에 그동안 철렁거리던 남은 잔돈 동전을 파고다처럼 쌓아 놓았다. 스카이스크래이퍼, 장관이다. 종업원을 향해 히죽 웃어보였다. 요즘 방콕 사람들은 외국인을 향해 잘 웃지 않는다.

11시 30분 인천행 항공권이지만 방콕의 악명 높은 교통체증 때문에 일찌감치 서둘러야 한다. 버스를 타고 카오산에 도착하니 6시. 카오산은 지나치게 바글거렸다. 내가 마지막으로 카오산에서 맥주 마시고 노닥거린 때가 언제인지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최근 몇 년 동안 카오산에서 논 적이 없다.


코카콜라 협찬 송크란인가 보다. 펄럭이는 코카콜라 깃발 밑에서 펩시 깡통 차(좌측)가 나타나 공짜로 펩시 콜라를 나눠 준다. 며칠 전부터 하루에 여섯끼씩 먹느라 배가 불러서 콜라 같은 저질 싸구려 탄산음료는 영 손이 가지 않는다.

길 가는데 어떤 여자애가 물을 뿌렸다. 뒤돌아 봤다. 그 표정. 뭔가 말할까 하다가 돌아섰다. 나는 아내에게 충실했다. 그건 짝짓기나 사랑 나부랑이 등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의 문제였다. 게다가 21세기는 신용사회다.

숙소에 맡긴 짐을 찾고 수박쥬스 한 잔 마시고 짐을 챙겨 일어나 복권청 앞에서 59번 버스를 한 시간 가량 기다렸지만 안 온다. 오후 7시 30분. 교통체증을 감안하면 공항에 도착하는 시각은 9시 무렵이 될 텐데... 더 늦으면 땀나는데... 송크란 때문일까? 아침부터 재수가 없나보다 싶어 짐을 들었다. 하는 수 없이 공항 버스를 타기로 했다.

걷는 도중 59번 버스가 막 오고 있다. 반전해서 버스 정류장으로 허겁지겁 뛰었다. 가까스로 버스에 올랐다. 졸다가 눈을 떠보니 공항에 가까워진 듯. 짐을 챙겨 확인도 안 하고 성급하게 내렸더니 공항까지는 아직 3km 남았다. 에고야... 이런 실수를. 마지막 순간까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걷게 되다니.

망고스틴을 넣은 가방이 걱정이다. 쿼런틴에서 걸리지 않을까. 망고스틴 몇 개가 한국의 자연환경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리는 없다. 그 보다는 컨테이너 선저에 담겨오는 이국의 바닷물에 포함된 미생물이나, 검역을 소홀히 한 육가공품, 엄청난 양의 채소들에 함께 딸려오는 작은 생물군이 지역 생태계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한 종의 멸절, 먹이 사슬을 구성하는 피라미드의 한쪽 변이 무너지면서 그 종과 연관된 주변 종들이 트럼프로 지은 집처럼 함께 무너져 내려 생태계 전체가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는 가설이 있다 <-- 여러 모로 의구심이 많이 생기는 썰이긴 하나, 주접 떨기보다는 망고스틴 잘 챙기고 여행기나 마무리 짓자. 산처럼 쌓아놓은 망고스틴 피라미드에서 망고스틴을 하나 하나 고를 때마다 심혈을 기울였다. 심지어 지나가는 아줌마에게 망고스틴 고르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꼭지는 연노랑, 잡티 없고 짙은 보라빛의 탱글탱글한 바디라인, 배꼽이 단단한 것들.

공항 대기실에 도착하니 9시 50분. 수속은 10시 30분. 아까 빅씨에서 사온 100밧 짜리 초밥 도시락을 꺼내 흡족하게 배를 채웠다. 어떻게 고급 일식당의, 그때 그때 만들어 배에 얹어 띄우는 초밥 보다 대형 수퍼마켓에서 대충 만들어 파는 초밥이 더 맛있을 수가 있을까. 신기한 일이지. 오늘은 다섯 끼 밖에 안 먹었지만 나머지는 기내식으로 보충하자고 마음먹었다. 대기실 구석에 앉아 ac 아웃렛에 어댑터를 꽂고 노트북을 연결해 이 글을 쓰고 있다.

탑승 수속이 11시 50분으로 밀렸다. 대기실은 갑자기 사람들로 미어터졌다. 돗대기 시장 같다. 무슨 일인가 물으니 송크란 휴일로 한국에 가는 사람들과, 아침부터 송크란 때문에 항공기가 연착하여 밀린 사람들이 몰렸단다. 그래서 전세기가 3대나 동시에 출발한다. (여러 이유 탓에 동남아의 중산층이 가장 선호하는 관광지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같다) 어느 나라에 가나 축제는 일정을 틀어지게 만드는 귀신같은 것이다. 축제 때는 이동이나 숙소 구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축제를 요리조리 피해가는 것을 기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술 먹은 한국인 아저씨가 옆에서 고성을 지르고 있다. 여행사에 사기 당했다고 소리 지르는 것 같은데, 비행기 한두 시간 연착한 걸 가지고 뭘 그리... 아무도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지만 참 열심히도 소리를 지른다.

담배나 한 대 피우려고 흡연실에 들어가니 어떤 한국인이 말을 걸어오며 한국 담배를 권한다. 고맙게 받았다. 화보 촬영차 태국에 왔다는 것이다. 음식 값이 싸다면서 식당에서 한끼 식사로 15만원을 썼단다. 그 시간에 누군가는 미얀마에서 42도 뙤약볕에 죽을 고생을 하고 있었다(45도라는 설도 있다). 방콕 가면 에어컨 펑펑 나오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한끼에 무려 10$나 하는 음식으로 우아하게 배를 채우자, 뭐 그런 다짐을 하면서. 담배를 다 태우고 나니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왠지 나와는 클래스가 다른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나를 오지만 찾아 빡세게 여행하는 용가리같은 비일상적 존재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아는 비일상적인 여행이란 이런 것이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 얘기하면서 미얀마 북부의 외국인 여행자 제한 지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북부 기점 도시에 도착하면 버스를 이용하지 않고 픽업을 탄다. 픽업으로 30분에서 한 시간 단위로 짧게 이동한다. 무수한 검문소가 있으므로 여행자 티나는 복장을 하지 않는 편이... 해가 지는 오후 6시가 넘을 때까지 제한 지역으로 계속 밀고 들어가서 도시에 도착한다. 외국인 여행자 숙박이 인가된 숙소를 제외하고는 외국인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이미 해가 져서 오도가도 할 형편이 못되고, 미얀마 사람들은, 참, 친절하다. 태국에서 따지렉을 거쳐 육로로 미얀마에 입국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그 역은 가능하다. 그리고 미얀마에서 중국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인도는 모르겠다. 하지만 시도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한번쯤 장기여행을 해 봐서 인지 도시에서 도시를 잇는 것이 아닌, 아무도 안 가본 곳을 가는 것이 요즘은 여행 같다고 느끼고 있고, 가끔(그걸 가끔이랄 수 있을까?) 만나는 히피같은 작자들은 나와 달리 그런 비일상적 여행을 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인터넷에 블로그 따위를 안 올리고 책도 안 쓴다. 그래서 세상에 알려진 바가 없다. 알려지면 대단한 오지탐험가쯤 되는 오해를 받는다. 이를테면 한비야같은 사람. :) 구설을 통해서만 몇몇 이름과 사연이 알려지고(대개는 어느 나라의 '아무개'가 어떻게 몇 년을 여행했다는 식으로), 우연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 그 도시의 가장 싸구려 숙소의 도미토리가 이상적인데 마치 이들 숙소는 체인점이라도 되는 것처럼 히피 해픈 라인을 연결하여 도시에서 도시로, 점에서 점으로 가늘고 희미하게 이어져 있다. 아마도 내가 그런 여행자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던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싶다 -- 싼 숙소만 찾아 가니까. 그들을 통해 다른 여행자들과는 약간 색다르고 상대적으로 '진기한' 경험담을 들을 수 있다. 마치 신밧드의 모험처럼. 하지만 그건 남들 얘기고, 해보지 않은 나와는 상관없다. 이런 직업 생활하면서 가능한 것도 아니다. 여행과 직업생활 중 어떤 것이 더 재미있다고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었다. 그러니 교대로 해 보고 나서 몸이 뜻대로 잘 안 움직일 때 다시 평가해 보자.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는 올 때보다 더 형편없었다. 기내식, 서비스, 기타 등등... 무의식적으로 포장도 안 뜯은 모포를 챙겨 가방에 넣었다.

아침, 랜딩 후 이어지는 지루한 택싱이 끝나고 인천 공항에 도착. 검역소에서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i hvae nothing, nothing to declare. 인천은, 서울은, 한국은 마치 거대한 에어컨 룸 같다.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고 덜덜 떨면서 버스를 기다렸다. 크룽 팁 담배곽에서 마지막 가치를 꺼내 빨았다. 입맛이 쓰다.

내 앞에서 서양인 둘이 어떻게 버스를 타야될 지 몰라 헤메고 있었다. 내 옆에 앉아있던 싱가폴 항공 기장이 그들을 도와준다. 나와 가는 방향이 같다. 602-1.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버스를 타려니 카드가 되지 않는다. 어제부터 왜 이리 말썽인가. 원화가 하나도 없어 10달러를 내고 7000원짜리 (어이없이 비싼) 버스표를 끊고 잔돈으로 2500원을 거슬러 받았다. 카드 받기를 거부하는 운전사나, 환율을 적당히 때려맞춰 적당히 잔돈을 거슬러주는 두 양반에게 그래도 삿대질을 하고 으르렁거리지 않았다. 여긴 모든 것을 협상하고 타협해야 하는 여행지가 아니다. 안되면 안되는 거고 주는대로 받으면 되는거다. 이 곳은 한국이다. 게기면 표 안 팔고 버스 안 태워준다. 무서운 여행지다.

인도네시아에 지진과 해일이 덮치기 바로 전 인도네시아 보르부두르 유적지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휴가 계획은 그랬다. 항공권을 안 끊은 아내의 게으름이 내 생명(?)을 구했고, 그래서 바꾼 여행지가 고생만 죽어라고 한 미얀마였다. 동남아 3대 고대 유적지 중 두번째가 그렇게 끝났다. 동남아(south east asia)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 독일인 학자였다. 지리적 편의상 지어진 그 이름보다 나은 것은 정녕 없었을까.

집에 와서 짐을 풀고 잤다. 휴대폰으로 전화가 와서 깼다. 태국에서 카드 사용하셨죠? 네. 거래를 중단시켰습니다. 동남아에서 말이죠... 그러니까... 불법 도용... 그래서... 안되고... 카드를... 그러므로... 다시... 발급하세요...

이런 망할. 이불 덮고 다시 잠을 청했다. 노트북 배터리는 완전방전되어 고물이 되고 회사에 안부 인사하니 지난 2주 동안 파란만장한 사연이 절절하게 흘러나온다. 나는 내가 없어도 일은 잘 돌아간다고 굳게 믿었다 -- 굽힐 수 없는 사내의 신념으로.

--끝--

총 여행일수: 미얀마(7일), 방콕(4일) = 12일
총 여행비용: 294+490 = 784$

미얀마 여행 경비: 168+26+17+83 = 294$

* 방콕->양곤 항공권 6600밧(168$, 푸켓에어 한달 오픈), 밍글라돈 공항 출국세: 10$

* 숙박비: 양곤(2박, 6+5=11$), 만들래(2박, 6$), 시뽀(1박, 1500짯), 바간(2박, 7$) = 약 26$
* 입장료: 보타따웅(2$), 쉐다곤(5$), 바간(10$) = 17$
* 교통,음식,기타비용: 환전(70$ = 63000chat, 환율 900chat/$), 보유액(12000) = 75000(약 83$)
* 항공권, 공항세를 제외한 일평균 비용: 126/7일 = 18$

태국 여행 경비: 360+104+26 = 490$

* 인천<->방콕 항공권: 세 포함 360000원, 돈무앙 공항 출국세: 500+500 = 1000baht = 26$

* 숙박비: 방콕(4박, 400밧) = 약 10$
* 교통,음식,기타비용: 3600밧 = 약 94$
* 항공권, 공항세를 제외한 일평균 비용: 104/4일 =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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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

여행기/Myanmar 2005. 4. 11. 12:41
아침 8시에 일어났다. 할일 없이 빈둥거리다가 씰롬에 괜찮은 식당이 있대서 찾아갔으나 문을 닫았고,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오이시에 들어가 수끼+초밥 부페를 먹었다. 배불리 먹었다. 오이시가 돈 좀 벌더니 예전 같지 않아 입맛을 다셨는데 아직 부페를 하는구나... 그러나 역시 초밥은 맛이 없었다. 배 터지게 먹고 펭귄처럼 걷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월텟 4층에 올라가 벤치에 누워 시원한 에어컨 바람 쐬면서 잤다. -_-

아내는 참 운이 없다. 이세탄 백화점에 들러 두 시간 동안이나 쪽팔림을 무릅쓰고 정성들여 보석을 둘러보고 간신히 25만원짜리 썩 괜찮은 사파이어 목걸이를 골라 포장까지 마치고 계산 하는데, 점원이 실수로 4밧 더 많게 계산해서 그걸 취소하고 다시 카드로 긁으려니까 카드 결제가 되지 않았다. 한참 시도 해 봤지만 만밧이 조금 넘는 트랜젝션을 두 번 실수한 탓인지, 아니면 한국의 은행이 영업시간을 넘긴 탓인지 거래가 되지 않는다. 점원 말로는 하루 사용 금액을 초과했다고 한다. 글쎄? 내가 한미카드 vip고객인 것으로 아는데? 국제 전화를 걸어야 하는 등, 일이 귀찮게 꼬여서 거래를 취소하다. 한가하게 돌아다니며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을 사 먹었다.

에어컨이 나오는 대형 백화점 사이를 전전하며 빈둥대다가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영화를 보기로 했다. '사하라' 영화가 별로 재미 없다.

밤 아홉시 가까이 되어 수쿰빗으로 가서 이런 저런 바를 돌아다녔다. 생음악 하는 술집들은 보통 아홉시 반에 시작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술은 안 마시고 서성이며 분위기 보다가 다른 바로, 또 다른 바로, 여기저기 메뚜기처럼 바 호핑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일본인들 상가 부근의 도쿄 조'스 블루스 바에 들렀는데 분위기 괜찮다. 사약같은 기네스 드라프트를 시켜 먹으면서 흥겨운 음악을 들었다. 아, 방콕에 이런 곳이 있었구나. 바 안에 있는 사람들 절반이 뮤지션이다. 오늘 잼 세션이 있는 날이라서 악기를 들고 서성이는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분위기 매우 훌륭하다. 블루스가 워낙 마초 폼 잡는 음악이라 그런지 집적거리는 게이도 없고 재즈바처럼 음악에는 별 관심없는 찌꺼지들 아니 계집애들도 없고 담배 연기 자욱한 가운데 다들 입 다물고 음악을 듣는다. 연주솜씨가 괜찮다. 분위기가 좋아서 자정을 넘겼다. 너무 늦어버렸다. 거리로 나오니 썰렁하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카오산으로 돌아왔다.

아쉽다. 엊그제 한국인 젊은 친구 도와준답시고 이틀을 같이 다니는 바람에 밤마다 수쿰빗의 바를 전전하는 계획이 틀어진 것이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방콕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 동안 배낭 여행 한답시고 거지처럼 돌아다니느라 방콕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런데, 나는 왜 맨날 방콕에 올 때마다 처음 방콕에 오는 친구들의 가이드질을 하게 될까. 아무래도 한국인 게스트 하우스에 묵어서 그런 것일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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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10 Bangkok

여행기/Myanmar 2005. 4. 10. 01:07


화이트 하우스 옥상에서. 만달래 맥주 마시고 알딸딸.

아침에 일어나 아침을 정신없이 먹었다. 게스트 하우스 손님들은 8시 정각에 기상해서 개떼처럼 식사를 하러 내려오지만 거의 아무 말도 없이 아침만 먹고 일어나는 지극히 특이한 분위기였다. 배 채우기 바빠서? 아니면 최근 여행자들 추세가 인터넷이나 가이드북으로 인해 충분한 사전 정보를 가지고 오기 때문에 서로 할 말이 없어져서?

양곤에 온 후 엽서를 구하려고 돌아다녔지만 품질이 좋으면 가격이 비싸고 가격이 싸면 품질이 떨어져서 망설여졌다. 화이트하우스에서 50짯에 한 장 짜리를 15장 구매했다. 아침을 든든이 먹고 숙소를 나와 시장통을 돌아다녔지만 택시 협상이 신통치 않다. 아홉시가 넘었고, 1달러 깎으려고 보낸 시간이 벌써 30분째, 에라 모르겠다. 협상은 그만 하고... 2500짯 주고 택시에 올랐다. 35분을 달려 공항에 도착. 수속을 재빨리 마치고 대합실에 들어가니 썰렁하다.


양곤 밍글라돈 공항 대합실 맞은편 흡연실. 한산. 대합실에서 기다리는 무료한 시간 동안 남은 돈 1340짯을 어떻게 처분할까 고민했다. 아내를 본받아 엉뚱한 짓을 해보기로 했다. 대합실 윗편의 레스토랑으로 올라갔다. FEC(Foreign Exchange Currency)만 받는다고 써 있었다. 여행자들 사이에서 악명 높았던 FEC는 얼마 전에 사라졌다. 메뉴판에는 달러만 받는다고 써 있었다. 매니저를 불러 나한테 지금 1300짯이 있는데 이 2 달러짜리 코카콜라를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 순순이 오케이 한다. 700짯 짜리를 1300짯 주고 마셨으니 왠지 스스로가 바보같았지만 최소한 그 걸레같은 지폐 쪼가리들을 처분했다.


돌아오는 727-200편의 좌석은 30여석만 차고 나머지는 비었다. 일제 중고 시내버스를 타고 비행기를 향해 간다. 내리려면 위의 버튼을 눌러야 한다. :)


방콕에 도착하니 억수같은 비가 내렸다. 버스 정거장까지 비 맞고 간신히 걸어갔다. 미얀마에서 돌아와서 그런지 방콕이 상대적으로 쌀쌀했다.

송크란 축제가 예년같지 않다. 푸켓 해일로 막심한 피해를 입은 태국이 대대적으로 준비하는 듯한 인상.

만남의 광장에 다시 가니 이번에는 사람이 들어차 있다. 빨랫줄에 걸어놓은 빨래들을 보니 인도에 갔다온 사람인 듯. 대충 씻고 빈둥거리니까 들어온다. 24살, 450만원 짜리 1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완 월드 티켓을 들고 처음 들른 곳이 인도. 함께 돌아다녔다. 나랑 돌아다니면 안 좋을텐데... 왜냐하면 나는 하루에 천밧씩 사용할 작정으로 방콕에서 나흘 있을 예정이니까. 방콕에 온 기념으로 쌀국수 가게를 소개해 주고 저녁에 함께 수끼를 먹었다.

그랜드 쉐라톤 호텔에 밤 아홉시 사십분쯤 도착. 썩 괜찮은 재즈를 들을 수 있다길래 찾아온 것이다. 스트릭트 드레스 코드 때문에 문전박대 당했다. 젠장. 예상했어야 했다. 인도 갔다온 복장, 미얀마 갔다온 복장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그냥 나가기 뭣해서 옆 자리에 구겨져 않아 두당 235밧 짜리 맥주를 마셨다.

방콕에서는 평생 다시 탈 일이 없을 것 같은 마이크로 버스에 매달려 카오산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젊은 친구와 함께 대충 밥을 먹고 빤팁 플라자로 향했다. 그의 도시바 노트북이 부팅이 안 되는데 그걸 계속 들고다니려니 애물단지가 되고, 한국에 보내려니 안에 넣은 것들이 많아 아깝다. usb 외장 cdrom drive를 구하면 windows xp를 다시 깔기만 하는 것으로 복구가 가능하리라 짐작했다. 빤팁 플라자의 여러 매장을 돌아다녔지만 usb external cdrom drive를 구하기가 만만찮다. pcmcia cdrom drive로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 usb floppy로 시도했으나 파티션이 ntfs로 포맷되어 있고 리패어 서비스 센터에는 ntfs를 다룰 수 있는 툴이 없다. 외외로군. 간신히 물어물어 usb cdrom drive를 찾았는데 그것도 안 된다. 주인장 말로는 도시바 전용 cdrom drive만 가능할 꺼란다. 벌써 네 시간이 흘렀고 지쳐서 그냥 나왔다.

빅씨의 4층 일식당에서 돈까스를 먹고 평일에도 밀리는 길을 버스 타고 돌아오는 길에 축제 행렬을 만났다. 축제가 시작된 것인지 교통 체증이 보통이 아니다.




즐겨 피우는 크룽 팁의 겉 표지에 이런 사진을 올리다니... 태국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트랜스젠더다.


역시 트랜스젠더다.


사타구니 사이가 솟아있는 것을 보면 아직 덜 트랜스했다.


뭔가 할 것 처럼 한참 지껄이더니...


닌자 차림의 두 남자가 무대에 나타나 굉장히 재미없는 퍼펫쇼를 한다.


파아팃 선착장 옆, 무슨 공원에서 바라본 라마 xx 다리


공연, 꽤 재미있었지만 밥 먹으러 갔다.


파아팃 선착장 옆의, 적당한 가격에 괜찮은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인데, 이름을 잊었다. 방콕에 처음 방문한 외국인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오늘의 추천 메뉴를 소개해 달라니 뿌 팟뽕 까리와 똠 얌 꿍을 주저없이 권한다. 푸훗. 그 둘과 싱하 두 병, 밥 두 접시 해서 740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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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권 일자 변경은 실패. 버스표를 어제 간신히 예매했는데, 이번에는 정말 좌석이 없다. 복도 중간에 앉았다. 거참 자리 훌륭하다.

이 더위에 버스에 에어컨이 안 나오는 거야 뭐 늘 그랬으니 그렇다치고. 버스에 정말 전형적인 jerk처럼 생긴 젊은 미국인 남녀가 탔다. 여기가 발리섬이라도 되는지 하와이안 꽃무늬 반바지와 난방을 입고 있었다. 분위기가 상당히 안 어울린다. 밤새도록 미국 여자애가 징징대고 옆 자리의 아가는 울어대고 앞 자리 아줌마는 바닥에 드러눕고 차는 타이어가 터져서 새벽에 허허벌판 한 가운데 멎었다. 새로 간 타이어 역시 어디가 잘못 되었는지 얼마 못 가서 다시 차를 세운다. 승객들과 운전수가 합심해서 지나가는 버스를 세워 바퀴를 하나 빌려 돌돌 굴려왔다. 터진 두 바퀴는 짐칸에 다시 쑤셔넣고 그 분량의 짐을 객실로 옮겼다. 버스 안은 난장판이 되었다. 일이 다 끝나자 차장이 미안한 지, 그들이 스노우 타월이라 부르는 '물수건'을 공짜로 하나씩 더 나눠준다. 다들 뜬 눈으로 고생 많았다. 잠도 못 자고, 미얀마에서 탄 것 중 최악의 버스다.

양곤에 도착해서 지친 나머지 택시를 타고 술레 파고다 까지 갈까, 삐끼와 간신히 2천에 협상 하고 택시에 짐을 실었다. 얼른 숙소 가서 씻었으면 좋겠다. 옷가지, 짐, 드러난 팔 다리에 온통 땀과 기름과 먼지가 얼룩덜룩 앉았다.

두 미국인은 나와 택시를 쉐어 해서 양곤에 들어가려다 말고 미얀마에 질렸다면서 바로 공항으로 간단다. 가 봤자 비행기 좌석이 당장 안 나와서 한참 기다려야 할텐데... 미얀마에 있는 내내 죽어라고 바나나로 연명하고 값 비싼 코카콜라를 마시면서(스타 콜라 가격의 무려 일곱배다)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아 택시 협상을 도와주려고 했는데, 뭐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니 멀뚱히 쳐다봐 주었다. 어쨌든 꽃무늬 티셔츠, 반바지 차람의 럭셔리 배낭 관광객은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처음 봤다. 버스 터미널에서 공항까지 천짯이면 충분한데 무려 십 달러를 준다. 가는 길을 지켜봐 줬다. 힘들었는지 표정이 많이 안 좋다. 불쌍한 녀석들...

택시가 손님 더 끌어모으려고 기다리길래, 짐을 내려 터덜터덜 버스 터미널 입구까지 걸었다. 바보같은 택시 삐끼 녀석들, 밤새 고생해서, 2천씩이나 내고 자진해서 봉이 되 주겠다는데 다른 손님 태우려고 욕심을 부리니까 손님을 놓치는 거지. 50짯 주고 물어물어 시내버스에 올랐다.

옆 자리에 미얀마 에너지성에서 근무하는 샨족 출신의 할아버지가 앉았다. 그의 고향은 시뽀였고, 일본에서 컴퓨터 컨트롤 시스템 교육을 받고 캐나다에도 있었지만 정부에 소속된 관리라 다시 미얀마로 돌아왔다. 언젠가 내가 다시 미얀마를 방문하게 되면, 자기는 내년에 은퇴하여 고향에 돌아가니까, 시뽀로 놀러오란다. 40여년을 기술자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가 부럽다. 행상을 짊어지고 나와 함께 버스 타고 열일곱 시간을 달려왔지만 몰골은 그래보여도 아세안 에너지 부문 미팅에 참석하는 엘리트다. 이 나라의 엘리트들은 말년에 쉬지도 못하고 텔렉스 전문 한 통과 동봉한 버스표 한 장 달랑 받고 먼 길을 제발로 찾아와 국제 행사에 참석하나 보다. 그는 자신이 샨족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악수하고 헤어졌다.

단지, 전세계 배낭 여행자 숙소 중 세계 최고의 무료 아침 식사를 제공한다는 자화자찬을 확인할 겸(디스커버리에도 나온 적이 있는지 요란한 선전 문구가 입구에서부터 새겨져 있다), 화이트 하우스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6달러 짜리 값비싼 8층 독방에 체크인 하고(아무 생각없다. 이 상태로 도미토리에서 도저히...) 샤워하고 8시부터 시작하는 아침을 먹으러 식당에 내려갔다. 거짓말이 아니다. 돌아다녀 본 어떤 나라도 아침 식사가 이런 성찬인 곳은 없다. 심지어 '식중독 경고'까지 붙어 있었다; 아래와 같은 것은 함께 먹지 말 것, 식중독 걸림: 수박과 계란, 라임과 우유, 망고스틴과 설탕. 아... 그렇구나. 하나 배웠다. 그런데 음식을 그렇게 안 내 놓으면 될 것 아니야?

샤워하고 방 안에 퍼져 있다가 티켓 오피스가 문 열 시간 즈음에 프론트로 내려가 푸켓 에어라인 오피스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니 왠 여행사를 가르쳐 준다. 사쿠라 빌딩 일층의 sun far라는 곳. 지쳤지만 이놈에 신년 때문에 또 발이 묶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어 꾸역꾸역 걸어갔다. 직원이 30분 쯤 간신히 전화하고 나서야 티켓 날짜를 '드디어' 바꿨다. 아... 만들래, 바간 때부터 계속 시도했는데 정말 징하다. 이 나라의 전화는 대체...

아까 할아버지 말로는 미얀마의 인터넷 라인은 바간넷 이라는 사설 회사가 아이비스타의 회선을 임대해서 운영한다고 하는데(그의 처제?가 그곳에 근무한다), 다른 데는 안 될지 몰라도 양곤에서는 인터넷이 가능할 꺼라고 말한 기억이 나서 사이버월드라는 인터넷 카페로 찾아갔다. 그는 자신의 대부가 살고 있는 캐나다와 자주 email을 주고 받았는데 얼마전부터 계정을 차단 당했다고 한다. 옆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어서 자세한 얘기를 더 하지는 못했다. 입 조심 해야지.

인터넷 카페에 찾아가 양 손을 비비며 이제 사진을 올릴 수 있겠구나 히히 했는데 왠 걸, ftp 포트를 여전히 막아놨다. 한 장, 한 장 손으로 올리면 되지만 20메가 분량의 백여장 사진을 그렇게 올릴 수는 없고. 터미널 서비스 포트도 막아놨고 메신저 포트도 막혀 있고 dns 연동이 안 되고, 심지어 nslookup조차 막아놨다. 웹질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그것도 프록시에 여러 제한을 둬서. 중국도, 이란도, 시리아도, 이 지경까지는 아니었는데. 이 나라 군부독재 여러분, 정말 대단하십니다요.

미얀마 여행은 끝났다. 짧은 시간 동안 메뚜기처럼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체력이 허덕여 힘들었다. 더워서 많이 둘러 보지 못했고 더 돌아다니다가는 여행이 아니라 고행이 될 것 같아 인레 호수는 가지 않고 양곤으로 돌아왔다. 미얀마에 대한 인상이 참 좋다. 새해와 건기 막바지가 겹치고 물이 몸에 안 맞아 항상 입이 바짝 타 있는 등 여행하기에는 괴로웠지만, 시골에서 사람들이 보여준 친절은 잊지 못할 것 같다. 그것 외에는, 볼 것은 없는 나라다. 파고다 매니아라면 또 모를까. 기예하고는 '약간' 거리가 있는 무수한 파고다, 파고다, 또 파고다, 부다, 부다, 부다들은 좀...

윌리엄스라는 학자는 미얀마의 역사를 이라와디 강의 흐름에 비유했다. 이라와디 강의 저류는 변화하지 않고 상층부는 흐른다는 것. 그러니까 외세의 침탈과 수난, 모진 식민 역사를 겪어 왔지만 버마 사람들의 문화와 사회는 마치 강바닥의 저류처럼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남아에는 문자화된 역사 기록이 오직 베트남에만 남아있어 서기 이전의 역사 기록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지만, 나는 너무나 오랫 동안 동남아를 식민지 침탈의 정치경제적 역사 현장으로만 인식해 왔고, 그러한 내 관점이 동남아를 바라보는 시선을 상당히 왜곡했다고 생각한다. 다음 번 여행에서는 접근 방법에 변화가 있을 것 같다.

왜 여행 중에 방문하는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알기 위해 이 지랄을 떨고 있을까. 일부를 제외하고 개인사는 보잘 것 없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문화와 사회 전통은 그들의 삶이 영위되는 살아있는 현장이다. 따라서 문화와 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그들을 이해하는 주요한 지침이 된다 -- 이런 대외적 선전 문구 보다는, 그 나라를 좋아하기 위해서다.

시프트, 컨트롤, 영문 o, 숫자 일, 숫자 9 키가 안 먹는 맛이 간 리브레또의 키보드로 몹시 힘들게 타이핑 한, 미얀마에 대한 '문자화된' 내 여행 기록은 여기까지다.

방콕 도착. 할 꺼 다 하셨으니 맛있는 거 먹으며 스킨 케어하고 살 찌우고 놀자. 얼굴이 정말 맛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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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Bagan

여행기/Myanmar 2005. 4. 7. 20:34
아침에 일어나니 벼룩 물린 자리가 예닐곱 군데 생겼다. 미얀마 벼룩은 36.7도의 따뜻한 고기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것 같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 식사 중에 영국인 여자와 '데이'를 '다이'라고 발음하는 영국인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인도에 있다 와서 짜이맛을 그리워 했다. 그가 양곤에서 만난 세 한국인 여자들 얘기를 했다. 꼴까타에서 비행기를 타고 무작정 양곤에 왔는데 가진 것이 카드 뿐이고 수중에 달러가 없어서 애를 먹어 한국 대사관을 찾고 있단다.

미얀마에는 us 달러 외에는 거의 사용하기 힘들다. 어제 만난 오스트라아 친구는 유로당 850짯이라는 환율상의 불이익을 무릅쓰고 간신히 유로를 짯으로 환전할 수 있었다. 대사관 주소와 전화번호가 있긴 하지만, 만날 수가 있어야 도와주지. 인터넷은 커녕 전화기에도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야 간신히 통화할 수 있는 형편이니. 옆에 있는 영국 여자가 참견하길, 큰 호텔에서 비자 카드로 7퍼센트의 수수료를 떼고 현금 지급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자기는 그렇게 했다고. 혹시 시도나 호텔 아뇨? 그렇단다.

항공권 일자 변경이 잘 안되어(전화가 잘 안된다) 열 시까지 시도하다가 전날 예약한 마차 투어를 시작했다. 어쩐지 타운에서 나만 마차 투어하는 외국인 '봉' 같다.

바간은 미얀마 최초의 통일 왕조가 들어섰던 곳이고 왕조를 형성한 지 3대 만에 몽골이 심심해서 침략했다가 멸망했다 -- 몽골 녀석들은 말을 한 번 타면 어떻게 멈추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왔다가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시시했는지 그냥 돌아갔다. 그걸 역사상 중요한 사건으로 여기는 관점과 달리 미시 역사 해석에서는 왕조의 절멸이 북부 미얀마 문명의 절멸을 의미하지는 않고, 미얀마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역사학자들이 즐기는 그 관점에서는 몽골의 침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 3대째 왕의 무리한 파고다 건설 작업에 의해 국부가 바닥난 상황이라 몽골의 침략은 단지 마지막 쐐기를 틀어박은 것이라고 한다. 대다수 파고다는 바고에서 끌고 온 3만여명의 중들이 설계하고 만든 것이다. 지역 전체에는 4천 여개의 파고다가 있었고, 그중 2천개는 지진이나 전란 등으로 무너졌다.

파고다에 관해 일일이 설명하기가 귀찮다. 사실상 이곳에서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원 외형은 몇 안되었다.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이고 무지한 관점에서다.

마부는 젊은 친구인데 적당히 일하고 돈을 벌려는 생각인 것 같아 다소 빡세게 굴렸다. 오후 세 시가 넘자 눈에 띄게 지쳐서 음료수 하나 사주고 다독이며 계속 굴렸다. 별 이유는 없었다. 바고에서 늙은 싸이카 운전수는 다섯 시간 넘게 그 앙상한 몸뚱이로 제 다리를 놀리고 땀을 뻘뻘 흘리며 죽을둥 말둥 일해 간신히 돈을 벌었는데 이 녀석은 6천짯이나 되는 돈을 마차를 몰며 편히 다니는데도 날더러 다른 관광객은 그렇게 많은 곳을 둘러보지 않는다 둥, 날도 더운데 두 시쯤 마무리하고 돌아가자는 둥 바간의 무수한 파고다를 향한 활활 타오르는 열정을 지닌 손님을 무시하는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계약의 무서움도, 돈벌이의 힘겨움도 모르는 스물 네살 짜리 인생에게 다소 살벌하게 구는 것을 보니 나도 많이 늙은 것 같다.

그의 이름은(미얀마 남자는 여자와 달리 성이 없다) 바간 왕조의 두번째 왕의 이름이지만 자기 이름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미얀마인은 출생한 요일에 해당하는 미얀마 글자 자음으로 시작하는 이름을 갖는다.

파고다의 여러 사이트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가끔, '오빠', '진짜 루비', '구경하고 가세요' 따위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들이 프레젠트를 주고 받은 천원 짜리 지폐를 짯으로 바꿔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그들은 손으로 만든 작고 보잘 것 없는 선물을 건네주고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관광객의 주머니에서 기어이 천원, 오십밧, 십위엔, 백 리알 짜리 지폐를 꺼내게 만들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들과 자주 마주쳤고, 그들에게 그들이 그린 그림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주기도 했다. 상황이 웃겼다. 바간의 환쟁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은 그림을 그려서 판매하는데, 자기가 그린 그림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크리슈나를 부처라고 하기도 하고, 마라를 천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날도 더운데 돌겠다.

바간의 넓은 사이트에서 만난 미얀마 사람들은 이곳이 유명한 관광지임을 느끼게 했을 뿐이다. 하지만 앙코르와트에서 만난 사람들도 이 지경까지 '무식'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뽑기에서 아주 나쁜 패를 뽑은 것 같다. 고수들은 이 더위에 집에서 쉬고 있나 보다.

몇몇 사이트에서 본 페인팅은 더 바랄 나위없이 훌륭했다. 작열하는 태양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사원들을 팔짝팔짝 뛰어다닌 보람이 있다.

비록 겉 껍데기는 인도 짝퉁 사원이지만(수학적 엄밀함에 필적하는 대칭성에서 비롯된 아름다움, 복제 손실과 그 문화가 지닌 독자적인 창조적 재해석 등 여러 관점에서) 그런 그림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대개의 그림은 부처의 행적을 묘사한 것인데 면 캔버스에 회반죽을 입히고 벽면에 고착시킨 후 여러 암석에서 추출한 염료와 금가루를 섞은 안료로 그렸다. 십이세기 무렵의 그림인데 열대성 기후에서도 그 화려한 색채를 잃지 않은 것도 있다. 십이세기나 되었는데 사실 그림의 정교함은 좀...

보전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지만(터키의 카파도키아라고... 네스토리우스의 버섯 둥지에서 본 적이 있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페인팅을 생각하면 관광객으로서 판단컨대 가격대 성능비가 양호하다) 관광객들이 마음대로 만지게 하고, 백열등을 비추는 등 관리 상태는 아주 나빴다. 나야 늘 그렇듯이 사진 찍지 말라는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대다수 역사 유적지에서, 플래시를 터뜨리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전등을 비추는 것이 그림을 더 손상시키는 것임에도, 디지탈 카메라를 들이대지 못하게 하는 것을 대단히 우스꽝스럽게 여긴다.

바간 지역은 워낙 광활해서 둘러보는데 만도 며칠이 걸릴 것 같다. 이 더위에 제대로 둘러보긴 무리일 듯. 마차를 타고 편하게 돌아다니는데도 지친다.

지나가다가 자전거를 타고 사이트를 순회하는 일본계 미국인 여자를 만났는데, 날더러 대뜸 '마차를 타고 돌아다니니까 편하고 좋겠어요' 라고 말한다. 그녀의 남편은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면서 자전거를 허리춤에 기대놓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암요. 그 재미죠(yep, that's why i took the horse wagon) 라고 말하고 미소지으며 그녀의 헉헉거리는 자전거를 추월했다. 그녀는 의식있는 훌륭한 남편을 둬서 정.말. 좋겠다. 답사는 역시 말 다리가 아닌 자신의 두 다리로 직접 해야지, 나처럼 마차 타고 드러 누워 한가하게 돌아다니면 안되고 말고. 정말 서양인들의 체력은 끝내주는 것 같다. 자전거야 500짯이면 빌리고 원하는 곳은 어디나 갈 수 있는데, 이 놈에 호스웨건은 6000짯이나 하면서도 드라이버와 어디 가자 어디 가지 말자 신경전을 벌여야 하니 말이다. 아, 덥다. 이번에는 어느 사원으로 다그닥다그닥 느긋하게 달려가 볼까.

거의 모든 한가한 삐끼들은 한결같이 내 목에 두른 손수건을 탐냈다. 한국 천의 품질과 발색의 우수성이야 두 말 하면 잔소리지. 물건 볼 줄 아는군. '진짜 루비' 정도면 견줄만 한 거야. 이것하고 같은 빨간색 루비하고 바꾸자니까 손사레를 친다. 손수건을 물에 적셔 목에 두르면 시원하고 신경계의 열폭주도 막아준다. 내 시계도 탐을 냈지만 그에 상응하는 값어치를 지닌 물건은 안 보인다.

어떤 녀석은 불상 머리를 잘라 팔려고 했다. 왜 그러는거야 대체 엉? 한참 캄보디아가 앙코르와트 하나로 먹고 살고, 문화재가 어쩌고 저쩌고 설교를 늘어놓았다. 이 김에 인디아나 정스 짓이나 해볼까. 11세기 무렵의 빨리 한 보따리 가지고 오면 시계와 바꾸겠다고 말했더니 표정들이 진지해진다. 구하지 못할 꺼니까 어떻꼐 잔머리 굴려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관광객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모조품을 미리미리 준비해 둘 것이지. 파고다에서 방금 캐낸 것처럼 적당히 박쥐똥 냄새와 썩은 내도 나게 해서. 산스크리트와 빨리어 잘 아는 나이 든 중 하나 꼬셔서. 장삿꾼들이라 장사만 안다. 장사 잘하려면 물건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안 그럼 용팔이처럼 헛소리나 늘어놓고...

물론 미얀마 정부는 안틱의 외부 유출을 막고 있다. 지나가는 관광객 한테 자기들 유물의 가치에 관해 되레 설명을 듣고 있으니 어디 관광지에 가나 장사꾼들이 무시당하는 거다. 뭐 일단 값어치 있는 것들은 일찌감치 벌써 털려 나갔을 것이다. 남은 것들은 쓰레기 뿐. 그러나 시리아 다마스커스의 평범한 시장통에서 오래된 골동품이 보이듯이 여기도 대외적으로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던 국가였던 터라 잘 뒤지면 뭔가 나오긴 할 것 같다.

투어가 끝나니 오후 6시, 말은 뻗은게 이해가 가는데, 마부도 뻗었다. 소파에 널부러진 그의 손에 돈을 쥐어 주고, 내년에 또 보자니까 질렸다는 듯이 히히 웃고 슬며시 외면한다. 녀석... 마음에 안 든다. 이 놈은 한국인을 좀 더 만나봐야 할 것 같긴 한데, 워낙 아는 것이 없고 제 편한대로 게을러서 추천해주긴 뭣하다.

사진은 많이 안 찍었다.





































저녁에 누와 레스토랑에 들러 가격대 성능비가 우수한 천짯짜리 미얀마 백반을 주문하는데, 날더러 일본인이냐길래 한국인이라니까 일하는 아가씨들이 꺅꺅 소리를 지르며 난리 법석을 부린다. 조금 있으면 저기 틀어놓은 tv에 한국 드라마가 나온단다. 태국에서 요즘 한창 '불새'라는 드라마를 하는데 혹시 그건가? 그렇잖아도 미얀마인들이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본다는 얘기를 나한테 부러 하던데, 날더러 뭘 어쩌라고. tv에서 한국 드라마가 나오기 전에 재빨리 밥 먹고 튀었다.

다음 날은 아침부터 냐웅 우 주변 마을과 쉐지곤 파고다를 돌아다녔다. 라기 보다는 길을 잃어 정처없이 헤멨다. 숙소와 레스토랑이 몰려있는 관광지인 냐웅 우 지역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미얀마 촌락의 살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하게 산다. -끝-

오늘도 어제 만났던 일본계 미국인 여성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쉐지곤 파고다를 방문했다. 난ㄴ 일본 여성들에게는 비교적 친절한 편이다. 그런데 어제 나하고 함께 온 오스트리아 외톨이는 어디 짱 박혔길래 관광 안 하고 있는 것일까. 만나서 내가 신경 써서 완성한 밀리터리 캠프 아이디어를 들려주고 어떤지 물어보고 싶은데. 일본 여성에게 남편은 어디 갔냐고 물으니 숙소에서 쉬고 있단다. 푸훗.

특이하게도 그녀는 일본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 삐끼들이 돈 많은 일본인 취급해서 귀찮지 않냐고 물으니 그렇잖아도 괴롭단다. 그럴 땐 한국인 행세를 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마흔이 넘은 지금이 처음 동남아를 방문하는 것이다. 일본도 안 가봤다. 남편 참 대단한 사람이다. 여긴 인도에서 굴러다니는 녀석들이나 좋아할만한 곳이지 왠만한 사람들은 견디기 힘들텐데. 학교 교사고 딸이 하나 있고 자기는 남편 말 듣고 따라 왔는데 이렇게 고생스러운 줄 몰랐단다. 잠시 뒷골이 땡겼다. 아내하고 다닐 때 저 아줌마 남편처럼 나도 그랬던 것 같긴 한데, 함께 파고다 경내의 달구어진 돌위를 팔짝팔짝 뛰어다니다가 버스 시간이 가까워져서 헤어졌다.


Shwezigon paya, 붓다의 치사리를 등에 지고 돌아다니던 코끼리가 '''더위에 지쳐''' 멈춘 자리에 세운 사원.


Shwezigon paya, 아, 이것은 남인도에서 많이 보던 방식. 왠만큼은 건전한데, 한 군데, 반나의 여자들이 승려 밑에서 춤추고 있다. 뭐하자는 걸까. 약올리는건가? 아니면 육보시?


Shwezigon paya, 미로처럼 얽힌 회랑을 따라 걷기. 만만해 보였는데, 십분 가량 걸은 것 같은데, 미로가 끝이 안 난다. 그래서 허들을...


Shwezigon paya, 그럴듯. 설교듣는 분위기 나올 듯.


Shwezigon paya, 동쪽 입구의 긴 회랑을 걷던 중 왼편에 보이던 힌두 사원. 아저씨는 사방을 두리번 거리더니 오줌을 누었다.


쉐지곤 파야 Shwezigon paya, 동쪽 입구의 긴 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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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to Bagan

여행기/Myanmar 2005. 4. 5. 14:32
6시 기상. 숙소 카운터에 가서 티켓을 다시 물었다. 금시초문인 듯 한 말 또 하게 만든다. 어젯밤 다시 이 숙소를 찾아왔지만 도무지 나로서는 숙소 스태프들이 친절한 줄 모르겠다. 남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저 앵무새처럼 '안녕하세요'하는 정도랄까. 그들은 백불 환전해 달라는 내 부탁도 잊어 버렸고, 바간 버스 시간표를 아는 내 앞에서 바간 버스는 하루에 오후 한 편 뿐이라고 우겼고, 아침식사 준다는 말도 안 해서 저번에는 아침을 걸렀고, 체크인 다 마치고 20분 기다리는 동안에도 방 청소가 안 끝났고, 다시 찾아온 손님을 이래저래 귀찮게 하고(두번째 체크인인데 패스포트를 다시 꺼내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어젯밤 부탁한 티켓을 알아보지 않아 다시 묻게 만들었다. 좋은 숙소란 생글생글 웃으며 안녕하세요 라고 말 붙이는 것보다 손님을 위해 할 일을 제대로 하는 곳을 말한다.

사적인 통화를 하느라 20분이 지나서야 티켓 상황을 알려준다. 자리가 없단다. 입석이라도 괜찮냐고 묻는다. 일종의 감이 있어 괜찮다고 말했다. 오늘 바간 가는 사람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 명 있단다. 그러고는 은방울 자매와 스태프는 그 건을 잊은 채 태평하게 앉아 있어서, 내려오는 여행자들 마다 바간 가냐고 물었다. 이틀 동안 본 친구다. 택시 쉐어 하기로 하고 숙소를 나왔다. 로얄 게스트 하우스가 친절? 그냥 평범한, 그저 그런 숙소다.

택시를 같이 탄 친구는 오스트리아에서 왔다. 내가 구질구질하게 이 사람 저 사람 만난 얘기를 줄곳 장황스럽게 늘어놓는 이유는, 아내가 나는 사람들을 만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다.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평범하고 구질구질한 얘기, 한 이야기 또 하게끔 하는 이야기가 별로 내키지 않아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처음 나누는 말들이 무엇인가. 신변과 하는 일(여행에서 만난 여행자라면 여행 얘기)에 관한 것들이다. 서너번 하다보면 질린다. 어쨌거나 그게 얼마나 재미없고 지겨운 얘기인지(특히 아내는 거의 믿지 않을테지만, 나처럼 사람을 많이 만나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증명하려면 좀 더 흥미로운 주제를 제쳐두고 사람들 만난 얘기를 늘어놓겠다. 그러다보면 여행이 사람을 만나는 과정이라는 남들의 개똥철학이 가진 자기모순이 스스로 드러나겠지.

택시 잡으려고 돌아다니다가 택시 삐끼가 하나 접근해서 버스 터미널까지 간다니까 운전수가 2천 달라고 하자 대뜸 하는 말이 i don't like cheating. don't cheat me. 였다. 갑자기 앞날에 먹구름이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 원체 서양 여행자들하고 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지만 왜 가격 뻔한 걸 가지고... 그 친구가 잠깐 환전하러 간 사이 여러 택시 삐끼들과 환담을 나눠 판단해보니 2천이 적정선 맞다. 20분 남았는데 500짯 주고 싸이카 타고 가기는 시간이 늦고, 택시를 잡았다. i don't like cheating 어쩌구 하기 전에 시계를 보여줘서 입을 막았다. i don't like cheating이라니... 간만에 들어본다. 내가 알기로 치팅을 즐기는 여행자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숙소에서는 좌석이 없다고 했지만 믿는 구석이 있어서,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 돈을 지불했다. 4200짰, 이제 대충 교통비를 감 잡았는데, 시간당 500짯으로 계산하면 소여시간과 도시간 이동 교통비가 얼추 드러난다. 4200짯이면 8시간 거리라는 뜻이다. 그리고 빙고! 좌석이 있다. 그럼 그렇지. 한 시간 전에 예약해도 자리는 난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좌석을 강제로 양보당했을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짐을 버스 상판에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오스트리아 친구와 나란히 일,이번 상석이다. 버스는 30분 후에 출발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이 친구는 치앙마이에서 항공권을 끊어 만달래로 곧장 날아왔다. 복식의 특징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인도에 다닌 티가 났다. 정말 그랬다. 제일 좋아하는 인도의 도시가 어디냐고 물으니 푸시카르란다. 푸시카르? 버스 여행 하다가 속이 뒤집혀서 푸시카르에서 묵게 되었는데 요양겸 며칠 쉬다보니 3주를 묵었단다. 25루삐짜리 숙소에서. 스물일곱, 독신, 학생. 가족은 아버지와 스페인에 살고 있는 여동생이 하나 뿐이고 빈에서 비즈니스 스쿨을 6년 다녔다. 빠이에서 잘 놀다가 누가 미얀마가 좋다는 소리를 해서 왔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빠이는 완전히 맛이 갔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태국 동부와 태국 최남단의 괜찮은 처녀지가 아직 남아 있다.

그의 아버지는 기차 운전수였고, 그는 열살때 처음으로 기차를 몰아봤다. 기분 끝내줬겠다. 그래서 기차를 좋아하지만 버스는 영 아니란다. 남인도 얘기를 하다보니 그가 사원에도 제대로 들어가 본 적이 없고 프리스트와 노가리 까 본 적도 없고, 사두와 놀아본 적도 없는 등 다른 많은 서양 여행자들처럼 인도에서 재미있는 것만 쏙 빼고 불쌍하게도 다르질링이나 스리나가르 같은 곳에서 짱박혀 시간 죽이다 보니 깔리가 년인지 놈인지 잘 파악이 안 되는 상황인 것 같다. 다른 많은 '전형적인' 여행자처럼 여행 이야기가 나오면 고생담을 줄줄이 엮고 가끔 나이스 플레이스 한둘 쯤 튀어나오는 뭐 그런 것이다.

날더러 종교가 있냐길래 없다니까 놀라워 하는 눈치다. 한국에서는 출생 신고서에 종교를 적지 않냐고 묻는다. 한국에 종교 비슷한 것이 있는데 종교 라기보다는 종교 마케팅과 종교 삐끼와 종교 시장이 있어서 수요자들이 종교 쇼핑을 한다고 대꾸했다.

네가 한국에서 밤 비행기 타고 돌아다니게 되면 엄청나게 많은 네온 글로우 크로스를 볼 수 있는데(월리엄 깁슨을 아냐? 알면 상상이 될꺼다. 모른다) 마치 거대한 그레이브 야드를 연상시킬 것이라고, 도시는 그런데, 한국의 모든 산에는 호국 몽크들이 죽치고 있는 템플이 있어서 크리스찬과 몽크가 종교시장에서 경합을 벌이는 중이며 공식적으로는 한국의 종교시장을 크리스찬과 몽크가 7:3으로 나눠 먹고 있는데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은 관계로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고 말해줬다. 종교시장은 그렇지만 그 생활과 문화가 종교와 분리되지 않은 의미에서의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한국의 개신교가 선교 활동이라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활동을 여전히 하고 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에게는 그게 무척 신선했던가 보다. 종교 얘기를 한참 하고 나서야, 중국, 일본, 한국의 유사성과 차이점에 관한 얘기가 뒤따랐다.

말한 것 중 요점만 간략하게 정리하면, 한국, 일본은 중국은 한 뿌리다. 자기들끼리는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그 문화, 역사가 동아시아권 역사로 통합될 수 있고 그것 때문에 앞으로 골치아픈 문제들이 많다. 뭐 그 정도. 한국이 어디 붙어 있는 지도 모르는 형편이라 한국이 20세기 신흥공업국가 중에서 매우 큰 생장(성장이 아니다)포텐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없이 약하다는 것도 모른다. 그가 한국이 모더나이즈된 국가라고 할 때 나는 한국이 웨스터나이즈된 국가라고 야유했다. 그는 내심 한국의 생활 수준이 동남아 여러 국가 보다 약간 나은 정도로 생각하는 편이었다. 아는게 그거 밖에 없으면 그거라도 알면 된 거다 굳이 알려줄 필요 없고 서양 사람들한테 한국이 어떻다느니 설명하는 것을 별로 잘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는 여행을 통해 동양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그 나라 사정을 알게 되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한국의 숙소 가격이 얼마냐고 묻길래 미니멈 십불이고 그걸로는 거지같은 방 하나 간신히 구하니까 유스호스텔을 잘 찾아보라고 말해줬다.

십오세가 넘은 사람은 오스트리아에서 직업과 진학 둘 중에 하나를 스스로 선택하는데 대부분 직업을 선택해서 오스트리아 인들 중에서 자기만큼 영어를 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며 유럽식 교육의 문제점을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그만큼 영어를 잘 하는 오스트리아 사람을 여러 번 만났던 것 같다.

어쨌거나, 인간은 호모 제록스라서 반복암기, 복제를 통한 학습이 창의력 운운하며 실제로는 그저 스스로 생각하게 하려고 '방치하는' 학습보다는 유효하다고 본다. 창의력의 상당 부분이 섬세한 복제 능력, 따라하기에 좌우된다는 것은 창의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만한 얘기다. 소위 창의력(창조적 문제해결 능력이라고 좀 더 기술자스럽게 말해)의 습득 시기가 영아 때 일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20세 이전까지 단순 암기 학습한 것들이 전면에 등장해 뇌에서 조화로운 양자 폭풍(패턴 일치, 깨달음 등 뭐라고 부르건 간에)을 일으키는 시점은 십육세-이십세 무렵이 맞지 않을까 싶다.

(영아때 사고의 자율성을 통제하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는 그것이 발현될 토양이나 사고 선택의 자유가 현세 이전에 단지 부족했을 뿐일 수도 있다. 한국인이 밀집 사회에서 별고없이 존재하려면 자신의 미친 생각을 합의 가능한 최저-상한 수준으로 노말라이즈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을 보라. 이제 아무도 한국 사회가 초딩부터 보수 꼴통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다양성을 수용하지 못한다고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사회 구성원의 상당수가 사회를 박살낼 것 같은 반타협적이고 자기중심적 규준으로부터 균등 조화와 이데올로기의 일치를 목말라 하지 않던가?

내 견해는 그러니까 창의적 사고방식은 반복적이고 단순한 암기 등의 방식으로 충분한 지식을 습득하고(이 과정이 가장 중요. 영아 시기를 지나면 지식의 흡수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진다. 지식-수단을 확보하지 않은 채 사고를 전개하는 것은 맨땅에 헤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봄) 더불어 학습의 방법을 배우는 등의(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자발적인 사고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맞지 않냐 하는 것이다. 그는 이 이야기를 그럴듯 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저 그의 자유방만한 유럽식 교육의 문제점에 맞장구를 쳐 준 것이고, 한국에서 유행하는 창의력 교육이나 대안교육이 기존의 강압적이고 전통적인 학습에 비해 효과가 현저하게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며 오히려 더 나쁠 수도 있다고 여겼다.

흠, 영어나 학습은 그렇다치고,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 세계 인식이 없으면 그냥 오스트리아라는 깡촌에 사는 촌뜨기에 불과하다. 그는 여행이 한국인을 만나 한국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 여행의 즐거움이라고 여기는 것 같지만 지적인 면에서 나같은 한국 여행자를 통해 그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극히 한정적이다. 차라리 한국에 관한 책을 한두 권 읽고 한국에 찾아가서 사회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아야지, 나 같은 한국인을 만나면 한국 상황은 나름대로 즐거운 무협지가 되어 버린다. 학습에 관한 얘기 이후로는 입 안으로 먼지를 삼키며 졸기 바빠서 더 이상 대화에 진전이 없었다.

그러다가 차가 송아지를 치일 뻔 해서 깨어나 다시 잡담을 늘어 놓았다. 어찌된 일인지 승객이 30퍼센트는 늘어난 것 같아 버스가 미어터질 지경이다. 그가 한국에서 갈만한 곳이 어딘지 추천해 달란다. 한국만의 독특한 관광 아이템이 뭐가 있을까... 외국인을 만나면 떠들어대는 내 십팔번은 백두대간 종주이지만 너무 자주 써먹어서 나 자신이 식상해진 나머지 새로운 아이템을 떠올려 보았다.

요즘 유행하는 템플스테이를 알려주었다. 외국인 여행객 상대하는 여행사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하면 성공할 것 같은데, 절간에서 몽크들과 함께 참선하다가 잠시 딴 생각하거나 조는 머리통에 죽대를 한방씩 날리면 중들도 재밌어 할 것 같다. 제대로 하기 위해, 머리는 민다. 자기가 먹을 나물은 자기가 캐도록 하고 숙소 청소 등속도 '마음 수양'을 위해 본인이 알아서 하게 하면 되니까 절간에도 여러 모로 큰 노력 안 들이고 이익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두번째 테마는(이건 말하지 않았다) 한국 고유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밀리터리 트레이닝 캠프다. 제대해서 놀고 있는 조교들 모아 가슴에 명찰 하나씩 붙여준다. 'license to kick'이라고, 한국 군대의 강도높은 훈련은 주둥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자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일단 한국의 살벌한 분단 대치 상황을 설명하고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를 잠시 브리핑한 후, 돈 내고 들어온 여러분은 조인트를 까여도, 불알 한 쪽이 터져도 그 책임을 묻지 않겠으며 여기서 받은 훈련 내용을 절대로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는(별 이유는 없다. 장사속이다) 피의 각서를 쓰게 한 후 입교시킨다.

훈련은 6주 과정이다. 여행자 훈련생들의 인생에 길이길이 남을(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이마데 돋은 식은 땀을 닦게 될 정도로) 살벌한 훈련과 갖은 구타를 통해 그들은, 한국식 군대용어로, 드디어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만일 자기 힘 믿고 개기는 혈기 왕성한 놈이나 방법론적 회의에 심취한 녀석이 있으면 그 즉시 조교들 떼거리로 집단구타를 실시한다. 그리고 훈련이 없는 날에는 잔디깎기와 경쟁을 붙여준다.

훈련 일주차, 마리화나에 쩔은 몸을 갱생하고 플라워 파워를 믿는 온갖 히피스러운 정신상태를 고상한 맨정신, 즉 군바리 정신으로 일깨운다. 훈련 2주차, 익숙해질만하면 온갖 트집을 다 잡아 군대란 그저 집에 키우는 강아지처럼 상사에게 철저하게 복종하는 곳임을 똑똑히 깨닫게 만든다. 훈련 3주차 pt열나게 시키고 마지막에 실탄 사격 훈련 5분 실시하고 훈련 4주차에 일주일간 행군을 실시하여 개인주의자에게 동성애, 아 실수, 동지애를 가르치고, 5주차에 야산을 빌려 서바이벌 북진 통일 게임과 일본 원숭이 정벌 게임을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영예로운 향토 예비군복을 지급한 후 이틀에 걸쳐 진정한 전역 군인의 행동거지를 지도한다. 이거 의외로 익사이팅하고 도전적이다. 대다수 국가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군 경험이 전무하며 한국군의 훈련 강도는 세계적으로 수준이 높다. 장비가 후져 정신력으로 버티다보니... 이 밀리터리 캠프의 단점은 실탄 사격 연습이 가능한가와 이런 걸 즐기는 개마초들에게 묘한 중독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 친구에게는 아시아권 최고의 밤문화를 자랑하는 한국의 나이트 부킹 또는 루어낚씨질을 소개해 줬다. 한국에 놀러온 여행자들이 동아시아 일대를 휩쓸고 있는 영어 학습 열풍에 힘입어 쉽게 강사 자리를 얻고 수많은 현지 여자들을 골라 사귀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등등.

이렇게 쓰잘데기 없는 얘기를 여덟 시간에 걸쳐 했다. 내 자신이 지겹다. 이런 얘기나 늘어놓으려고 비싼 돈 들여 여행하겠나. 아내 말대로 나는 사람을 가린다. 귀찮아 한다. 오늘 충분히 했고 아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만은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매우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사람이라면 믿지 않겠지. 가급적 안 만난다. 안 만나고 얘기 안 한다. 그게 내 삶에서 앞으로 주욱 나아갈 방식이다.

한국이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오스트리아 촌뜨기는 버스에 내려서 삐끼떼가 몰려오는데도 전혀 기뻐하지 않고 그들을 마다했다. 나는 마음에 드는 삐끼 하나 골라잡아 마차에 누워 숙소까지 띵까띵까 가는데 그는 배낭 메고 졸졸 따라온다. 마치 다른데 갈 것 처럼 두리번거리면서. 숙소에 도착해서 안 도와줬다. 협상 안되니까 멍하니 있다가 다른 데 가서 에어컨도 없는 방을 이틀에 십불로 잡았다. 나? 나는 그가 협상하다가 실패한 아가씨더러 예쁘다고 한 마디 해주고 더블룸 에어컨 있고 배쓰 포함해서 이틀에 7불.

이번 여행에서는 가이드북도 안 들고 왔고, 프린트물도 쳐다보지도 않고, 아내가 즐겨하는 방식대로 무작정 가서 알아서 하는 방식을 택했다. 숙소 매니저에게 항공권 날짜를 바꿀 수 있는지 항공권을 맡기고 괜찮은 식당을 물었다. 미얀마식 백반으로 오랫만에 포식했다. 대략 2달러에 고기 커리 한 가지와 열 다섯가지 반찬, 국, 한 솥 분량의 밥이 통째로 나오고 식사가 끝나면 세 가지 디저트를 먹는 코스다. 모든 반찬이 기름에 볶아 기름기가 너무 많고 약간 짜서 반찬을 많이 먹지는 못했다.

숙소에 벼룩이 있는 것 같다. 에어컨을 틀고 나일론으로 된 츄리닝을 입고 잤다. 벼룩은 나일론을 싫어한다. 그나저나 젠장 난 왜 맨날 벼룩에 물리냐...

열시 무렵에 픽 쓰러지듯이 잠들었다. 빨래를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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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일어났다. 닭들이 우짖는다. 미얀마 닭들은 마지막 여운을 생략하는 경향이 있다. '꼬끼요꼬끼요' 대신 '꼬끼요 꼭'하고 잘룩 울음허리를 끊었다. 낮에는 발음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베란다로 붉디 붉은 해가 떠올랐다. 해 뜨는 시각 5:30am, 해지는 시각 6:30pm.


2달러가 안되는 괜찮은 숙소의 아침.

주인 아줌마의 추천으로 옆집에 가서 '꼭이요 꼭' 아침 닭으로 국물을 우려낸 맛있는 샨족 스타일 국수나 먹을까 했는데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근처 찻집에 앉아 라파이를 시켜 한 잔 들이키고 뜨거운 차를 몇 잔 더 마셔 속을 풀었다. 입술이 하얗게 떠 있다. 숙소 주인장에게 기차 시간을 물으니 'nine thrity maybe'에 출발한다고 알려준다. '아마도 9시 30분'까지는 '최소한 한 시간'쯤 여유가 있어 동네를 좀 더 둘러보기로 했다.


아름다운 동네 정경. 오른쪽의 쓰레기만 빼고. 아침을 만들어 먹으려고 곳곳에서 피운 장작불 탓에 대기가 뿌옇다. 어쨌든 호빗족이 사는 평화로운 마을같지 않을까 싶다. 오른쪽 쓰레기만 빼고.


잠에서 깬 사람들이 다운타운에서 먹거리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

샨 궁전에 갔으나 너무 이른 시각인지 문이 닫혀 있다. 그에게 샨족 역사에 관해 듣고 싶었는데 아쉽다. 샨족은 아마도 중국 서북부에 사는 장족이 이주한 것이 아닐까 싶다. 샨 궁전만 빼고 사실상 이 동네의 모든 '관광' 포인트를 어제 다 둘러본 것 같다. 트레킹이 있는데 소수민족 구경거리는 별로 내키지 않는다.

숙소로 돌아왔다. 어제는 주인장한테 온수 샤워는 필요없다고 떵떵거렸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쌀쌀하다. 공동 샤워장에서 슬그머니 온수 수도꼭지를 돌려보았다. 윽 차거. 태양열 축열로 쌓아놓은 온수는 어젯밤에 벌써 다 식었나 보다. 방값을 지불하고 체크아웃했다. 주인 아줌마는 장사속이라고는 볼 수 없는 목소리로 며칠 더 쉬다가지... 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묻지도 않았는데 기차역 가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해준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고개를 끄떡이며 들었다.


아침 시주 행렬에서 본 괴승. 가다가 pda를 숙소에 두고 온 것 같아 철로변에 쭈그리고 앉아 배낭을 열어 뒤적이고 있었는데, 슬며시 다가와 시주받은 과자 하나 건네주고 쓰읍 웃더니 자기 갈 길을 간다. 중들이 원래 시주받은 거 사바세계의 평민 족속과 나눠먹기도 하던가? 아니, 그건 그렇고, 내 몰골이 뭐가 어쨌길래 자비심이 발동한 거지?

기차역은 정말 징하게 생겨 먹었다. 식당인지 역사무실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공무원'이 앉아 외국인 삥 뜯어먹고 있었다. 오늘 출발하는 외국인이 있냐고 물으니 없단다. 2달러짜리 티켓을 사려다가 마음이 변해 4달러 짜리 티켓을 끊었다. 기차여행을 별로 즐기는 편이 아니다. 사연 많다. 인도에 있을 때 라즈다니는 물론 샤탑디 한 번 타보지 못했고 중국에서는 꼬랑내가 진동해서 거의 미쳐버릴 것 같은 3등석 기차만 타고 다녔다. 베트남에서 딱 한 번 타 본 기차는 멀미로 밤새도록 왝왝대는 아줌마가 옆에 앉아 있었다. 파키스탄에서 탄 기차는 그나마 컴파트먼트였는데 사막을 가로지르다 보니 자나깨나 먼지를 뒤집어 썼다. 모처럼 분위기 잡고 안데스에서 탄 기차는 파업 때문에 가다가 멎었다.

이쯤 되면 기차에 한이 맺히는 것이 당연해서 기차를 안 타게 된다. 특별히 띠보에서 핑우린까지 기차를 타고 가는 이유는 이 구간이 세계에서 두번째로 깊은 협곡을 통과하는 코스이고 경치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며, 매번 기차운이 나쁠 수는 없을 꺼라는 확률적 믿음이 있었다. 암 뽑기지. 그래서 띠보를 방문한다기 보다는 기차여행이 여기까지 올라온 목적이다. 그리고 이왕 가는 김에 2달러 더주고 좀 더 안전빵하게 럭셔리 기차 한 번 타보자고 마음 먹은 것이다.

기차는 정확히 나인 써티 펄햅스에 도착해서 텐 섬씽에 출발했다. 와우! 제 시간에 오는 기차라니 신선한 충격이다. 한 시간 밖에 안 늦었다. 만사가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자리를 보니... 2달러 짜리 ordinary class와 내가 끊은 4달러 짜리 first class 좌석 사이에 차이점은 앉는 자리에 쿠션이 하나 더 깔려 있는 것 밖에 없다. 좌석 번호는 일번. first class라서 일반인들이 범접치 못할 뭐 그런 멋진 칸을 상상했는데, 오디너리와 마찬가지로 온 사방에 짐짝들이 꾸깃꾸깃 쑤셔 넣어져 있고 닭장처럼 바글거렸다. 내 자리에 젊은 처자가 앉아 있다. 눈치 주니까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손짓 발짓을 해보니 대충 무슨 뜻인지 알아먹겠다. 멀미가 날 것 같으니 자리를 좀 양보해 줄 수 없겠냐는 것이다. 멀미? 아, 그러라고. 얼마든지.

멀미가 난다는 처자가 왠일인지 스테이션에 도착할 때마다 자꾸 창문을 닫아 달라고 부탁한다. 뭐 부탁이니까 들어주지만 왜 저럴까. 그 처자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랬다.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창문에 유리창이 달린 것이 아니라 숨구멍이 숭숭 뚫린 그냥 철판이다.

다음 역에서 창문을 좀 늦게 닫다가 물벼락을 맞았다. 역 주변에 양동이와 컵을 들고 어슬렁 거리는 꼬마애들이 바글거렸는데, 양동이 물을 손님한테 파는가 보다, 야, 저렇게 물도 한 컵씩 팔다니 여행 오래 하고 볼 일이야, 나름대로 신선하고 여유롭게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는데, 기차가 슬슬 출발하기 시작하자마자 컵으로 양동이 물을 퍼다가 창문 마다 냅다 뿌려대는 것이다. 일부 힘 좋은 놈들은 양동이 채로 들이 부었다. 호스도 있었다.

그 양동이 물을 뒤집어 썼다. 역마다 있는 그 망할 녀석들이 집요하게 부어대는 통에 옷이 흠뻑 젖고 젖은데 또 젖으니까 옷이 마를 새가 없다. 쫓아가서 알밤이라도 먹여주려고 하니까 말린다. 처음에 뭔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페스티벌 이란다. 워터 페스티벌, 낀쏨? 태국식으로 송크란 축제, 그게 앞으로 일주일 후에 시작되는데 이 깡촌에서는 일주일 전부터 이 난리다. 아니 컨츄리 사이드에서는 축제를 무려 한달 동안 한단다. 그래서 매 스테이션 마다 속수무책으로 물을 뒤집어 쓰고, 축제지, 허,허, 암, 축제니까, 허허 웃었다. 그나저나 내 기차여행은 매 번... 관두자.


정겹고 친근한 보통 시골역 풍경같지? 처음에는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오른쪽 구석에 물 양동이와 컵을 들고 승객을 바라보는 저 불순한 눈빛이 군중 속에 틈틈이 도사리고 있다. 저 앞에도 한 놈 있다. 이 놈들은 물을 뿌려대고 움직이는 기차를 향해 악귀처럼 낄낄 웃는다.

카메라가 젖어 세상에서 두번째로 깊은 계곡 모습은 사진에 담지 못했다.

핑우린에 도착. 기차는 두 시간 연착. 조금 있으면 해가 진다. 픽업이 역 앞에 있다. 픽업을 몇 번 타보니 사람들에 치이는게 끔찍해서 500짯 더 주고 운전수 옆, 앞 좌석에 앉기로 했다. 만달래까지 1500. 짐을 다 싣고 그 비좁아 터진 좌석에 사람들이 꽉 차고 열댓 명쯤 차 난간에 샹들리에에 달린 유리조각처럼 주렁주렁 매달리고 나서야 차가 출발한다.

내 옆에는 군바리가 앉았다. 대학 마치자 마자 하사관으로 들어가서 지금 captain이란다. 자기는 일반 군인과 다르단다. 자꾸 스왓, 스왓, 람보, 코만도 하길래 뭔 소리인가 했더니 특무대(special army force)소속인 것 같다. 인상 참 드러웠지만 화끈하게 자기는 타이놈들을 쓸어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한다.
애 둘 딸린 아버지 답지 않게.

ak47과 m16을 사용한다니 반갑긴 하다. 이들의 정신력은 소총으로 능히 코브라를 하늘에서 떨굴만도 했다. 그런데 특무대가 그런 구질구질한 소총을 사용한단 말인가? 담배를 자꾸 권하고 휴게소에서 쉴 때 음료수도 사준다. 그러더니, 한국은 핵을 가져서 좋겠다는 것이다. 얼떨떨하다. 또, 미군 탱크에 깔려죽은 한국 여중생 얘기를 한다. 자기 같았으면 미국놈들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보다 더 분해한다. 나는 그저 평범하고 애국심 강한 바보 군바리인 줄 알았는데, 이 나라엔 대체 얼마나 많은 구두닦기 대학생과 해골 바가지 그림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다니고 온 몸에 문신을 새긴 날나리 처럼 생긴 장교들이 있는 것인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하나 더, 한국의 소식은 미얀마로 전해지는데, 한국의 여러 신문에서 아시아 관련 뉴스 중에 컨텐츠가 제대로 된 것을 본 적이 없다. 자기 주변 나라 소식도 모르는 우물안 개구리인 셈이다. 언제까지 그러려는지들.

잘 가던 픽업이 멎었다. 운전수가 뒤에 가서 한참 소리를 질러댄다. 승객 중 몇 명이 사라진 것이다. 앞 좌석에 타고 있어서 몰랐는데 장교가 통역해주길, 뒷 손님 중에 한 명이 술을 사들고 타서 컨덕터를 포함한 뒷좌석 손님들이 한 모금씪 병나발을 불었는데(아마 400짰 짜리 지독한 만들래 럼일 것이다) 다들 기분이 좋아진 나머지 휴게소에서 술을 잔뜩 사 들고 올라타서 몇 병인가 더 마시고 잠시 엔진 식히는 틈에(여기 차들은 가끔 엔진을 식혀줘야 한다) 숲 속에 짱 박혀 자고 있다가 못 탔단다. 다들 삘리리 맛이 가서 누가 안 타고 누가 탄 건지도 파악이 안된단다.

안타까웠다. 평소 아내는 내가 현지인들과 잘 안 어울린다고 구박을 주고는 했는데, 뒷좌석에서 술이 도는 줄 알았더라면 앞에 타지 않았을텐데... 아무튼 차장은 근무중 술을 마셨다고 운전수한테 욕을 바가지로 먹고 향방중인 향토예비군처럼 여기 저기 짱 박힌 사람들을 수거하러 돌아다녔다.

그래서 예정보다 한 시간 반 늦게 만달래 기차역에 도착했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애 딸린 미얀마 람보는 담배를 한 가치 더 권하고, 손님들은 휘청휘청 말 그대로 그들이 가져온 푸댓자루와 함께 떨어져 내리고, 운전수는 자기가 태운 최초의 외국인을 잊지 않겠다며 악수를 청했다. 그는 과자도 줬다. 그는 힌두교도라서 도로를 가로지르는 소떼를 전혀 짜증스러워 하지 않았고(요즘은 인도인들도 툭하면 도로를 가로막고 똥을 싸는 성스러운 흰 소에 짜증을 내는 판인데) 그들이 다 건네갈 때까지 차를 멈추고 기다렸다. 그가 말하고 장교가 통역해 주길, 한국이라면 손님들이 술 처먹고 행패 부리지도 않고 시간도 엄수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차가 좀 늦게 오면 술도 안 처먹은 손님이 운전수를 두들겨 팬다고 말해줄까 하다가, 그래도 사람 사는게 어디나 똑같으면 재미없으니까, 한국은 품위있고 교양있는 나라로 남겨두자. 사실 그거 통역하기 힘들다.

다시 로얄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가끔 빗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제발 도착할 때까지 비야 오지 말아라... 너무 늦어 바간행 표를 예약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열블럭쯤 걸어 도착. 얼른 체크인하고 바간행 버스를 예약할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티켓 오피스가 문을 닫았단다. 내일 아침 일찍 꼭 좀 부탁한다고 말했다.

탁자 위에 어디서 많이 보던 담배곽이 눈에 띄었다. 디스 플러스, 한국인이세요? 물으니 그렇단다. 이렇게 반가울 데가... 여행자들이 가물에 콩나듯 눈에 띄어 쓸쓸했는데... 5주 동안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대만을 돌아다니는 바쁜 일정이다. 5주라니 부럽다.

하루 종일 거의 물만 마셔 허기가 져서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지경이라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 재빨리 밥 먹고 돌아왔다. 바나나 스플릿은 이번에도 먹지 못했다. 전 세계의 바나나 스플릿을 다 먹어보자는 소박한 꿈이 그 동안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시도였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숙소에서 그가 기다려 주고 있었다. 함께 맥주 한 잔 했다.

별 일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정신없는 하루였다. 비틀즈를 듣다가 세상 모르게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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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Hsipaw

여행기/Myanmar 2005. 4. 3. 14:27
6시 알람이 울렸다. 십오분쯤 잠자리에서 누워 있었다. 벌떡 일어나 샤워하고 짐을 챙기니 6시 45분. 늦겠다. 남은 옷가지들을 챙겨 얼른 체크아웃하고 버스 티켓 오피스 앞으로 갔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근처 노점 야채상에서 토마토 두 개를 사 먹었다. 여행할 때는 본능적으로 야채나 과일을 찾았다. 밥은 안 먹어도 야채와 과일은 먹어야 한다.

버스 터미널까찌 승객을 실어나르는 픽업 트럭은 7시 십오분 출발. 7시 45분 버스 터미널에 도착. 짐을 꾸리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버스는 여덟시 이십분이 되어서야 출발. 요마 익스프레스, 고속도로를 올라가는 이 버스의 바닥에는 상자들이 가득했다. 온갖 종류의 짐이 다 실리고 사람이 짐짝과 골고루 잘 섞여 빼곡히 들어찬 후에야 버스가 털털 거리며 움직이기 시작. 그러고도 굴러가는 것이 신통하다.

차가 핑우린까지 올라가는 도중에 더위에 퍼진 차들이 즐비하게 길가에 늘어서 있다. 중국, 일본 등지에서 수입한 중고차다. 운전수들은 제각각 물병을 들고 라디에이터에 직접 뿌리거나 공구를 꺼내 엔진을 분해한 후 실린더를 한가하게 걸레로 닦고 있었다!! 이 나라 운전수들은 대체...

좌석이 좁아 역시 편히 자기는 글른 듯. 왠 중이 하나 다가와 미얀마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고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어릴 적에 출가해서 줄곳 중 생활을 해 왔는데 절간에서 대학을 마쳤단다. 총명하고 잘 생긴 친구라 절간에서 썩히기에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출가했으면서 왜 자기 여동생과 놀러 다니는 걸까. 날도 더운데.

만나는 미얀마 사람들마다 마치 누추한 집에 초대한 귀한 손님 맞듯이 나를 대하니 좀 불편했다. 중은 멀리 떨어진 좌석에 앉아 있는데도 졸졸 따라다니며 밥 먹을 때나 담배를 피울 때나 충심을 다해 도와주려고 애썼다.

내 옆에도 중이 하나 앉아 있었는데 영어를 할 줄 몰라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버스를 갈아타야 할 때, 멋모르고 어리둥절해 있는 동안 자기 갈 길을 안 가고 내가 버스 탈 때까지 도와줬다. 말은 안 통해도 고마운 작자들이다. 마치 이란에 온 듯한 기분. 대하면 대할 수록 미얀마 사람들 참 좋은 사람들이다. 자기 하는 일 열심히 하고 사람 불편해 할까봐 노심초사 하면서 눈길을 안떼고 쳐다보고 있다가 '살며시' 도와주고 '슬그머니' 사라진다. 이런 사람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은 그저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미얀마가 잘 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군부 독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많이 늦어 기회를 얻지 못했고 앞으로 기회를 얻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제3세계 거북이들이 느릿느릿 움직일 동안 서구세계(서구화된 세계) 토끼들은 이미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버스가 해발 천여미터의 핑우린을 지날 무렵 잠시 시원했을 뿐, 얼레벌레 도착한 띠보 역시 어나더 더운타운(hot town)이었다. 별 정보 없이 왔으니 어디로 가야 하나 거리를 휘휘 둘러봐도 마땅히 보이는 것이 없어(그러나 가이드북을 들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길 건너편의 Mr. Kid 게스트 하우스로 들어갔다. 천오백짯(under 2$) 짜리 방을 보여준다. 얼씨구나 하고 잡았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상관없다. 주인장이 지도를 건네주고 이것저것 자세히 설명해준다.


게스트하우스 리노베이션 중 -- 침대 매트리스를 가는 일. 새로 산 그 매트리스에 처음으로 자빠져 누운 놈이다.

차를 일곱시간 탔더니 드러난 피부에 먼지가 앉고 얼굴은 햇빛에 타서 시커멓고 콧구멍에서 검정때가 나왔다. 샤워 할까 하다가 시간이 얼마 없어 자전거를 빌렸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아 2시간에 200짯(하루 종일은 400짯, 아쉽지만).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신나게 달려 두 마을을 방문, 동네방네 기웃거리며 '저 왔어요'하고 인사하고 다녔다. 인도였다면 어떤 꼬마가 날더러 헬로 하고 인사를 할 때 응수라도 한 마디 해 주면 지쳐 나가 떨어질 때까지 쫓아오면서, 게다가 그 수가 점점 불어나, 헬로 헬로 미친듯이 짹짹거릴 터이지만, 이곳 동남아에서는 그렇지 않다. 다정하고 따뜻하달까. 아내가 이곳에 오지 않은 것은 후회할 만한 것이다. 이렇게 좋은 곳인데...

하늘이 흐려 멋진 선셋을 뷰포인트에서 바라보기는 글른 것 같아 강변으로 내려가 빨래하는 동네 아줌마들과 동네 꼬마들이 물장구 치는 곳에서 옷을 벗고 강에 뛰어들었다. 동남아 치고는 덜 똥물이다, 아니 이 경우에는 맑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께다. 상쾌한 기분으로 병아리들을 괴롭히다가 더운타운으로 돌아왔다.

단 시간에 자갈길을 미친듯이 달렸더니 엉덩이 곳곳이 욱신거린다. 신사용 자전거다. 신사용 자전거로 폭 2-30cm의 자갈이 비쭉비쭉 돋아난 농로를 달렸다. 그 길로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교차하기도 했다. 내가 자전거를 이리도 잘 탔던가? 옷가지에서 물이 두둑두둑 흘러내리고 봉두난발에 히죽히죽 웃으면서...


샤워 하고 저녁 준비중인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맞은편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조금 지나면 강변이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 나타난다. 다만 그 곳이 공공 쓰레기 투기 장소라서 냄새가 좀 난달까...

마을(이 아니라 엄연히 도시지만)이 참 예쁘다. 이곳에서 하루 더 머물까 하다가 내일 아침 기차를 타고 돌아가기로 했다.


게스트 하우스에 돌아와 빨래하고 잠시 자리에 앉아 쉬었다. 입고 다니는 옷이 하나 뿐이라 그 점이 좀 아쉽다. 빨고 나니 입을 것이 없어 이 더위에 츄리닝을 입고 있는 꼬라지라니.

츄리닝 입고 다시 동네를 돌아다녔다. 동네 중국 음식점(Mr. Food)에 들러 터민쪼(볶음밥)와 800짯 짜리 만들래 비어 스트롱을 시켰다. 도시에서는 똑같은 맥주 한 병에 천이백짯을 받았다. 맥주 한 잔 시원하게 들이켰다. 두 잔째, 알딸딸하다. 볶음밥을 정성 들여 만들었고, 맛도 있었다. 술을 더 먹을까 하다가 여행 초심 생각이 다시 나서 자제했다.

맞은편 식탁에는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앉았다. 행색을 보아하니 근처 농가 사람인 듯 한데 아내한테 호강 한 번 시켜 주려고 이 중국집에 들러 값비싼 음식을 시켜 먹은 것 같다. 단순히 알딸딸한 내 상상에 불과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미얀마 농민은 한 달에 30 달러를 못 번다. 그들이 시켜먹은 볶음밥 2인분과 여자 앞에 놓인 스타 콜라 한 병은 다 합쳐 0.8$ 가량 된다. 돌아갈 때 보니 자전거나 오토바이가 없다. 남자가 앞서고 여자가 뒷서서 걸어간다. 내 상상일 따름이지만, 어쨌든 보기 좋다.

전기가 '덜' 들어오는 관계로 별빛이 화창하게 빛나는 거리를 휘적휘적 걸어 숙소로 돌아간다. 생맥주 집에 가서 한 잔 더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참았다. 이 동네 정말 마음에 든다. 지금까지 돌아다녀 본 도시 중 단연 순박함 만큼은 최고다. 그래서인지 실수 하는게 아닐까 싶다. 며칠 더 있다가도 괜찮은 동네다.

숙소에 도착하니 하나뿐인 외국인 손님인 나를 위해 발전기를 돌려 주셨다. 얼른 할 일을 마무리 짓고(남은 돈 세기, 일기 쓰기) 자리에 누웠다. 재빨리 불을 껏다. 발전기가 슬며시 멎는다. 주인 내외도 이제 자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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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Mandalay

여행기/Myanmar 2005. 4. 2. 21:06

만달래에 다다르기 전 마지막 휴게소.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다. 잠을 거의 못자고 꼬박 밤을 샜다. 일부는 밤새 틀어놓은 비디오 때문이다.

휴게소에 들러 비빔 국수를 먹었다. 우리네 참기름과 유사한 것에 땅콩가루와 양념을 넣고 비벼준다. 그리고 작은 종지에 배추국을 담아 주는데 흔히 휴게소에서 파는 쓰레기 같은 음식치고는 둘 다 맛있다. 지불하려고 하니 잔돈을 사탕으로 준다. 이 녀석이 외국인이라고 몹시 순진한 방법으로 골탕 먹이네. 캔디를 돌려주고 돈으로 받았다.

만달래 도착. 시외버스 터미널이 시 중심 시가지와 4km쯤 떨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11km인 것 같다. 미얀마 삐끼들은 몇 마디 안해도 알아서 자기가 다 말해준다. 세상에 이런 순박한 삐끼가 어디 있을지. 시내까지 천짯에 갈 수 있단다. 700이면 가겠다고 했다. 어차피 단가도 모르고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불러대면 대충 감 잡을 수 있겠지... 700에 가겠다는 친구가 나타났다. 500부터 시작할껄...

론지 뒤에 수첩을 차고 있길래 빼서 읽어봐도 되냐고 물었다. 그는 세 아이의 아버지다. 젊은 아버지다. 아무튼 삐끼와 이렇게 많은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 그의 수첩 첫 장에는 경구가 2개 국어로 적혀 있고 그 다음 장에 청동 캐스팅에 관한 얘기가 있고, 그 다음부터 그가 공부한 여러 가지 분야의 학습 내용이 적혀 있다. 찬찬히 읽었다. 작은 노트라 35분 가는 동안 다 읽을 수 있었다. 감동했다. 수준의 고저를 떠나 이 친구는 낮에 싸이카 운전수로 밥벌이하고 틈틈이 시간나는 대로 이것 저것 공부하는 중이다. 그는 자신의 영어 발음에 자신이 없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정치 얘기가 나오자 그가 쉿 하면서 주변에 사람들이 보고 있다고 말한다.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그가 미얀마에 살고 있는 나가 라는 원시 종족에 관한 얘기를 해줬다. 나가 종족에는 두 가지 타잎이 있는데 한 쪽은 조상이나 적의 머리를 베는 습속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 쪽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갑자기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 나중에 조사해보자.

로얄 게스트 하우스 앞에 도착. 천짯을 운전수에게 건넸다. 300은 당신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나라에 온 후로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자꾸 감상적이 되는 것 같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날더러 '안녕하세요' 라고 말한다. 설마 이곳을 2주 전에 다녀간 아내가 가르친 것은 아니겠지. 한국인들이 지나가면서 그런 걸 가르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새로운 도시에 도착했을 때 사방에서 들려오는 '곤니찌와' 만으로도 충분히 지겹다. 5달러 짜리 방을 보여주다가 살며시 아래위로 내 분위기를 살피더니 3달러 짜리 방이 있다고 말한다. 그야 당근 3불이지. 방 상태는 살피지도 않고 얼씨구나 하고 잡았다. 이제 오전 열시 이십분.

띠보(Thibow, Hsipaw)행 버스를 예약하려고 은방울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를 가진 게스트 하우스 주인 자매에게 물었다. 내가 알고 있는 좌표를 그대로 말한다.

만들래의 거리는 격자형. 가로 도로 넘버와 세로 도로 넘버로 참조. 아주 쉽다. 티켓 오피스에 가기 전에 그 유명한 나일론(닐론) 아이스크림 샵에 들렀다. 300짯 짜리 아이스볼(팥빙수)을 주문했다. 명불허전,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좀더 이것저것 시켜봐야겠다. 그리고 이번에는 바나나 스플릿을 꼭 먹자.

버스 티켓 오피스에 찾아갔다. 버스 회사 사무실이 안 보인다. 한참 헤메다가 원점으로 돌아왔다. 인터넷이나 일단 하자. 가게에 들어가니 30분당 이천짯을 부른다. 순 날강도네. 6메가 분량의 파일을 올려야 하는데 속도가 나올까? 해보니 너무 느리다. 그만하겠다고 하자 2천짯을 달란다. 에게 3분 사용했는데? 그래도 받겠단다. 하는 수 없이 줬다.

다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티켓 오피스를 찾으러 돌아다녔다. 원점으로 돌아왔다. 도저히 티켓 오피스라고 믿어지지 않는 위치에 그것이 간신히 존재했다. 2800짯, 내일 아침 티켓을 예매. 할 일 다 한 기분이 들어 밥이나 먹자는 생각으로 라쇼 레이 식당(Lashio Lay)을 찾아 북쪽으로 올라갔다. 거리가 워낙 orthographical해서 n 블럭 동쪽으로 이동 후 n 블럭 북쪽으로 이동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언젠가 어느 책에서 읽은 바로는 이런 도로 설계법이 몇 가지 단점이 있단다. 단점이 뭔지 잊어버렸다. 라쇼레이에서 새우 한 접시와 돼지고기 한 접시, 밥 한 됫박(정말 됫박이다), 카믈라 티를 시켜 먹고 워낙 양이 많아 남겼다. 2550짯 나왔다.

엄청나게 럭셔리한 식사를 한 탓에 죄책감이 들어 만들래 힐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대략 6km, 오후 1시 20분, 열심히 걸으면 1시간 내 도착할 거리. 걷기 시작했다. 양곤과 달리 만들래 거리에는 그늘이 거의 없다. 40도 땡볕에서 30분을 걷자 온몸이 뜨거워지고 입 안이 타 들어갔다. 그때쯤 객기 그만 부리고 싸이카를 탔어야 하는데 한 30분 더 걷고 나니까 악이 생겼다. 오냐 끝까지 가보자. 6km 걷는데 1시간 30분 걸렸다. 엄청나게 더웠고 더 걷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 무렵 만들래 언덕의 입구가 나타났다. 오렌지 쥬스 한 잔 사 마시고 잠깐 쉬다가 계단을 오르기 시작. 790여개인지 1600여개의 계단인지 모르겠지만 중간에 가다가 멈췄다. 더 걷다간 쓰러진다. 사원에 누워 30분 동안 잤다. 그리고 물을 끊임없이 마셨다. 탈진하기 바로 직전인 상태였다. 아, 내가 미쳤구나...


'아뵤! 여기야 여기! 내가 죽은 후에 여기서 불교가 열나 뜰꺼야!!' 라고 지존께서 말씀하신 언덕이 바로 만들래 언덕이다. 그는 불법을 설파하기 위해 인도로부터 그 먼 길을 걸어왔고 바로 이 자리에서 만들래라는 도시가 융성하게 될 것을 예언했다. 하지만 동상의 생김새는 그 분위기가 아닌 것 같다.

이 자리에 그대로 뻗어 잤다. 더 이상 올라가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이쯤에서 숙소로 돌아가 닐론 아이스크림에서 맛있는 아이스크림이나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 몸이 나른한 것이 일사병 증세다. 손수건에 물을 적셔 온 몸을 닦고 목덜미에 얹었다. 사원마다 조그만 물항아리가 있다. 나그네가 사원을 방문하면 더위를 식히라고 떠놓은 '구원의 물'이다. 그 물로 버텼다. 한동이는 썼다. 그 물, 사먹는 물보다 시원하고 맛있다. 토기 항아리라 먼지가 잔뜩 낀 물이라도 몇 시간 놓아두면 먼지는 모두 침전되고 항아리 숨구멍을 통해 수증기가 증발하면서 내용물이 차가와지는 것. 어린 시절 시골에서 이런 물을 마셨는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물맛이 달았다.

30분 쉬고 힘없이 계단을 내려왔다. 다섯시 전에는 내려와야 싸이카 삐끼를 만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헬렐레 하고 있는데 삐끼가 다가왔다. 1500짯이면 다운타운까지 데려다 준단다. 500짯. 그건 불가능하단다. 8km나 되는 거리를 500짯에 어떻게 가냐고. 난 그 거리를 걸어왔다. 천짯 부른다. 가라고 힘없이 손짓했다. 그럼 천짯에 만들래 힐 주변의 몇몇 관광명소를 둘러보고 가는 코스는 어떻겠냐고 오히려 삐끼가 제안. 좋다. 3군데 둘러보고 다운타운까지 가는 조건으로 천, 합의. 하지만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상황에서 관광이고 나발이고 전혀 기운이 안 난다. 겉모습만 후다닥 보고 얼른 닐론 아이스크림으로 가고 싶은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도착하자 마자 닐론 아이스크림에서 300짯 짜리 후루츠 칵테일을 먹고 담배 한대 피우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건기 40도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더위 속에서 걷는 것은 확실히 미친 짓이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자.

숙소에서 샤워를 마치고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나일론 호텔로 갔다. 내 백달러 짜리를 상인들이 거절하기 일쑤였다. 나일론 호텔에서 여러 모로 내 헌드레드 노트를 살피더니 스몰 헤드는 안된단다. 상인한테도 그 얘기를 들은 바 있다. 스몰 헤드 말고 빅헤드를 달라고. 왜 거두를 선호하는지, 그게 무슨 뜻인가 물어보니, 백달러 노트 신권은 큰 대가리 얼굴이 새겨져 있는데 구권은 작은 대가리란다. 아항... 내게 있는 것들은 모두 스몰 헤드라서 앞으로 애로사항이 꽃필 전망이다. 이런 젠장할. 숙소에 물어보니 역시나, 숙소에서도 바꿔줄 수 없단다.

궁리하다가 길거리에 보이는 싸이카 운전수 중 가장 몰골이 형편없는 작자를 골랐다. 이왕 도와줄 바에는 손님들에게 선택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가엾은 사람을 도와주자 싶었다. 시도나 호텔까지 투웨이로 얼마요? 투 따우잔드. 노 완 따우잔드. 잇츠 파. 완 따우잔드. 타협이 안 되서 그를 보냈다. 내 수중에는 마침 천 짯 밖에 없다. 그가 가다가 말고 돌아와서 오케이 한다.

시도나 호텔은 정말 멀었다. 그러나 난 관광객이 아니고, 그 가격은 (최소한 내 감으로는) 맞다. 호텔 입구에 그를 기다리게 해 놓고 들어갔다. 미얀마 기준에서는 으리으리한 호텔이다. 프론트에서 다짜고짜 도와 달라고 청하고 백달러 노트를 꺼내 작은 돈으로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매니저 눈치를 보는 아가씨가 망설이다가 매니저의 눈짓을 받고 바꾸러 가는 동안 옆에 있던 아가씨가 말을 붙여온다. '안녕하세요, 한국인이시죠?' 꽥. 왠 난데없는 한국어람. 한국어 배우는 중인데 발음이 안 되서 고민이란다. 참하고 예쁘장한 아가씨다. 국경과 신분을 초월해 사랑을 꽃피울 정도는 되었다. 그 동안 여자애들을 봐도 시큰둥했는데 미얀마에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있을 줄이야... 꼬시면 백퍼센트 넘어온다. 뭐 그런 확신이 들었지만 내게는 훌륭한 아내가 있다. 미련없이 홱 돌아서서 나왔다. 호텔 앞에서 플라타너스 잎사귀처럼 흔들리는 수많은 삐끼들을 마다하고 내 전용 운전사의 싸이카에 올라타고 다시 나일론 호텔 앞으로 왔다.

숙소에서 몇천짯 꺼내와 즉시 사람들이 버글거리는 나일론 아이스크림으로 들어가 아이스볼을 주문해 먹었다. 아, 정말 맛있다.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가는 크림과 오도독 오도독 씹히는 얼음 덩이, 그리고 혓바닥을 흥건히 적시는 과즙. 베트남 시장통에서 먹어본 잊을 수 없는 푸룻 아이스크림에 필적했다. 그러고 보니 내 생애 하루에 세 번 들른 음식점은 이 곳이 처음이다.

숙소에 돌아와 노트북으로 음악을 듣다가 그대로 뻗었다. 정말 피곤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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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Bago

여행기/Myanmar 2005. 4. 1. 21:00
여섯시 기상. 숙박비에 포함된 아침을 먹었다. 토스트 3장. 커피와 인디아식 밀크티, 짜이의 인스탄트 버전을 맛보다.


담배 한 대 빨면서 밝아오는 아침을 구경.


숲의 도시 양곤의 중심 시가지.

이틀 정신없이 걸어 다녔더니 몸 여기저기서 삐걱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젯밤에 숙소 점원에게 바고로 갈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을 물어봤으나 아웅 밍글라 버스 터미널로 가라는 말을 되풀이 했다. 친절하게 미얀마어로 적어주었다. 중심가 어딘가에서 분명히 바고로 가는 픽업이나 버스가 있을테지만 한시간 반을 고생해서 가는 것보다는 버스를 이용하는 편이 낫다는 것일까... 좀 쉬고, 움직이자.

시청 맞은편에서 43번 버스를 기다렸다. 무수히 많은 43번 버스가 지나갔지만 차장이 아니란다. 원숭이처럼 오는 버스마다 팔짝 팔짝 뛰어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라 담배 파는 아저씨에게 부탁했다. 탔다. 어제 열나게 걸어다니던 인야 호수가를 지나 시골 마을 몇 군데를 거쳐 50분을 달려 아웅 밍 갈라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삐끼가 친절하게 맞아 주신다. 10시 차가 때마침 있다. 1000짯 주고 올라탔다. 그럼 그렇지. 2500짯이라니 놀랐잖아. 버스는 열 시 정각에 출발했다. 기다리는 15분 동안 땀을 비오듯이 흘렸다. 덥다. 몹시 덥다.

버스가 잠시 정차할 때마다 후끈한 열파가 밀어닥쳤다. 어서 달려서 바람이라도 들어와 주셨으면... 열두 시에 바고에 도착했다. 사이카(자전거 옆에 좌석을 붙인 세발 달린 트릭쇼, 탈 것) 삐끼가 반갑게 맞아 주신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내내 삐끼의 어원을 궁리해 봤다. 아무래도 picky 같다.

일단 삐끼의 사이카에 올라 코딱지만한 바고 중심가를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바고에서 만달래(mandalay)로 가는 버스가 있는지 알아 보았다. 사기꾼 같이 생긴 친구가 에어컨 버스를 8천 부른다. 넌에어컨 버스는 6천. 하다야 까페에서 물어보니 자리는 없고 4500에 midst seat를 끊을 수 있단다. midst seat가 뭘까 궁금해 하니 aisle에 붙여놓은 좌석을 말하는 것 같다. 누군가 타면 일어서 주고, 누군가 나가면 일어서 주는, 그러니까, 밤새도록 잠도 못 자고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는 좌석이랄까. 그 좌석은 좀 난감해서 하다야 까페 옆의 노상에서 버스표를 파는 친구에게 물어봤다. 좌석이 없단다. 샌프란시스코 호텔로 갔다. 역시 없다. 미야난다 호텔 직원이 슬며시 끼어들며 자기한테 좌석이 있단다.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가 사기꾼이라고 말한다. 분위기를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삐끼가 자기가 아는 장소가 하나 더 있다며 데려간다. 정부 관리 호텔, 자리 없음. 구둣방 주인, 전화 한참 해 봤으나 역시 자리 없음. 남은 옵션은 하다야 까페에서 4500짯 짜리 표를 사는 것과 10$짜리 엄청나게 비싸고 5시간 더 늦게 도착하는 기차표 정도. 만난 사람 누구도 삐끼와 커넥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입술을 씹고 하다야 까페에서 미디스트 좌석을 예약했다. 로봇처럼 말하길, 5.30pm까지 까페로 오란다.

나 때문에 1시간 넘게 자전거를 끌고 땀을 질질 흘리면서 이리저리 함께 돌아다닌 40살 먹은 말라깽이 삐끼를 그냥 보내기도 뭣하고 해서(뭐 그걸 노리고 하는 일이지만), 그와 투어 협상을 했다. 1500에 여섯 군데 사이트를 모두 돌기로 합의봤다. 혹시 10$이나 하는 입장료 안 내고 들어갈 방법은 없는지 물어보니 자기한테 입장료의 반액을 주면 4-5pm 이후 외국인 입장객 감시원들이 퇴근할 때 맞춰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것 봐라? 머리 굴리는데? 그 얘긴 즉슨, 내가 천오백짯만 줘도 시간 잘 맞추면 여섯 군데 다 들러볼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당신한테 5달러 줄 필요가 없지.

그가 강가 까페로 나를 데려갔다. 분위기 괜찮다. 110짯 짜리 음료수 하나 시켜놓고 가격 협상을 하다가, 문득 자선하는 셈치고 이 친구한테 5달러를 주는 것이 어떨까 싶었다. 지도를 그리고, 동선을 따져보면 이 친구가 나를 태우고 40도의 뙤약볕에서 하룻동안 운행하는 거리가 20km 가량 된다. 시간으로 따지면 3시간 반 이상.

입장료 수입은 정부가 챙긴다. 따라서 각 사이트에서 감시하는 사람들도 자기 수입으로 들어오는 일이 아니니 근무시간이 끝나면 외국인이 입장하건 말건 그냥 멀뚱히 쳐다보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이 얘기는 여러 여행 사이트에서 확인한 것이다. 내가 굳이 자선할 이유가 없지만 이 친구의 행실을 보니 사기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겨우 5천원 벌려고, 이 비수기에 열파 속에서 삽질하는 그 친구를 가여워 해서라기 보다는 군부 독재정권에게 고스란히 돈을 갖다 바치는 대신 현지인이 이득을 보게 하는 방법이 나쁘지 않다. 하지만 5달러는 큰 돈이고 만일 내가 5달러를 준다면 그것이 선례가 되어 다음에 오는 여행자들이 5달러씩 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마음 속으로 생각한 적정가는 2천5백짯이고 제시할 협상가는 2천짯이지만 눈 질끈 감고 5달러로 했다. 마음 속에서 너는 지금 큰 실수를 하는 것이다, 라는 메아리가 들렸다.


먼저 들른 곳은 무슨 monastry(승원). 아마 Kha Khat Wain Khaung일 것이다. 4년 동안 빨리(pali, 원래는 팜트리 껍데기에 산 스크리트어로 새겨진 독경 같은 것)를 열나게 외우는 어린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이다. 돗데기 시장같은 분위기지만 삐끼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그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한가하게 지켜보았다. 암기교육의 본산.

그는 40살 먹었고 두 자식을 데리고 있다. 그는 대학을 나왔고 병원에서 안경을 조제하는 일을 하다가 싸이카 모는 것이 수입이 더 좋을 것 같아 업종 전환했다. 사이카 한 대 가격은 15만 짯, 사이카의 라이센스 플레이트를 정부로부터 받으려면 7만짯을 내야 하고, 자기 사이카를 장만하기 위해 월부금을 열심히 붓고 있는 중.

아들은 중학교 다니고 미얀마는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이며 대학에 입학하고 공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단다. 정부를 몹시 싫어했지만 입 밖에 내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워 한다. 버마와 타일랜드의 역사 때문에 그 두 민족은 알게 모르게 일본과 한국처럼 자존심 싸움을 가끔 벌이는 것 같다. 미얀마 군은 육군 밖에 없고 그나마 가지고 있는 무기라고는 2차대전 때나 쓰던 소총 뿐이라 타이와 한판 붙으면 작살 나는 쪽은 가난한 미얀마지만, 마치 북한처럼 그저 자존심과 악과 깡이 남았다. 그럴 때는 안 건드리는 것이 이롭다.

미얀마는 불교 국가로 알고 있는데 타이를 침공했을 때 부처 대가리는 왜 베었소? 하니까 그때는 전쟁중이었으니까, 하는 따위의 말을 했다. 아웅산 수지 사건을 그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심지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폭탄 테러범의 이름까지도 알고 있었다.

바고에 한국인 individual traveller는 얼마나 왔소? 하니 일 년에 다섯명 보기 힘들단다. 성수기때 그의 수입은 하루에 5달러 정도씩 삥 뜯어서(유러피안은 사정이 나아서 20달러까지 가능하단다) 한달 250달러 가량. 꽤 수입이 괜찮은 편. 약은 일본 학생들은 투어 단가를 3천짯까지 떨구기도 한단다. 말은 안 했지만 그 가격이 내 생각(2500)에도 적정가 맞다. 물론 태국 여행자는 미얀마에 극히 드물다. 형편이 풀린 태국 학생 배낭 여행자들이 최근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이고 보면 역사란게 무섭긴 하다.

과거 미얀마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영국과의 관계는? 그들과의 비즈니스는 국가 차원에서 잘 이루어지고 있으며 관계는 나쁘지 않다. 그런 정치적 멘트야... 그러나 미얀마인들, 특히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in deep inside of mind, i...)... 서구 열강에 의해 식민 시절을 보냈던 모든 동남아 국가들에 관해 유난히 알고 싶은 내용이었다. 내가 평소 특히나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것은, 이 동남아 새끼들은 더위 먹어서 배알이 없나? 였다. 알았으니 됐다.


여기가 어디더라... 마하깔랴니시마(Maha Kalyani Sima). 옛날에 승려들 출가 의식 하는 곳. 누워서 한숨 자기 좋다. 개와 사람들이 누워 자고 있다.


마하깔랴니시마에서 눈 붙이고 있는데 다가와서 히히거리던 아이들. 얼굴에 칠한 것은 단라까 라고, 오래되어 기억나지 않지만 무슨 나무에서 추출한 가루인데 천연 자외선 차단/보습제 같은 것. 여기 여자들이나 아이들이 칠하고 다니는데 효과가 우수한 것 같다. 미얀마 여자들 피부 곱다.


그래도 명색이 투어 인지라 갈 곳은 빠짐없이 들렀다. 뭔가 설명을 들었는데 뭐 하는 곳인지 모르겠다.


보리수 그늘에서 깨달음을 얻은 부처와 함께 있던 제자들. 미얀마 나름의 시뮬라시옹. 보리수도 심고, 제자들도 잘 배치해 놓고... 저 아이랑 놀았다. 참 순진하다. 발랑 까진 한국의 초딩과 워낙 비교가 되었다. 날 졸졸 따라다니며 부처님 계시니까 신발 벗으라고... 알았다니깐... 응... 벗을께. 됐지?



싸이카로 하는 싸구려 투어인 관계로 바고시 입구의 사면 부처상은 못 보러가고 대신 짝퉁이나마... 아, 진짜 관광사진 찍기 싫다.


쉐구레 파고다 Shwegulay pagoda, 파고다 내부에 64명의 부처상을 모셔놓은 곳.

2시가 좀 넘자 시계에 찍힌 기온이 41도다. 믿어지지 않았다. 바짝 마른 싸이카 운전사는 땀나게 페달을 밟고 있는데 나는 오르막에서 내려 주거나 그가 쉴 시간을 벌어주려고 투어를 늦추거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41도라니 이건 좀 심하다 싶어 노점에 자전거를 세우고 그가 좋아하는 스타콜라를 사줬다. 그 맛없는 청량음료를 미얀마 사람들이 자주 먹더라. 나는 얼음에 담가놓은 멜론을 썰어 먹었다. 60짯. 얼음에 담근 멜론을 썰고 설탕과 연유를 뿌려 컵에 내오는데 맛있어서 하나 더 먹었다.

어제부터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 이번 미얀마 여행에서는 대체로 초심으로 돌아왔다. 말하자면 열심히 돌아다니고 식사는 대충 되는 대로 줏어 먹고 숙소는 잠만 잘 수 있으면 된다. 그래야만 했다. 몸이 맛이 간 것은 둘째치고 정신상태가 글러먹어 이런 식으로는 안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입가에 군침이 도는 그 맛있어 보이는(약간 짤 것이다) 샨 음식이나 버마식 백반을 멀리했다.

우리는 점심을 먹지 않았다. 싸이카 운전사는 눈에 띄게 지쳐 있었다. 어쩌겠나. 5달러 벌려면 그만한 노력을 해야지.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다시 출발. 태양의 기세는 좀 수그러 들었다. 38도, 약간의 바람과 다양한 흙먼지, 이 정도면 견딜만 하다. 슬슬 '공무원'이 빠져 나갔을 장소로 향하자.


힌타곤 파고다 Hintha Gon pagoda, 무당, 기(gyi)라고 한다. 낫 신앙에서 비롯된 우리나라의 무당과 비슷한 여자. 머리에 아카시아 꽃을 두르고 소매, 주머니 여기 저기, 그리고 입에 지폐를 문 채 퍼쿠션에 맞춰 춤을 추며 쉰 목소리로 실성한 사람처럼 뭔가를 중얼거린다. 한국에서야 제대로 신을 맞았는지 무당질을 부탁하는 사람들이 꼼꼼이 확인하고 칼에서 춤을 추지만, 이 친구들은 워낙 순박해서인지 무당이 사기꾼인지 아닌지 굳이 확인하지 않는 듯. 하다못해 간단한 차력 시범 정도는 보여줘야지 싶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신통력도 없는 무당을 신뢰할 수 있다고...


힌타곤 파고다, 시원해서 낮잠 자기 딱 좋게 생겼지만 시간 관계상... 싸이카 운전수를 좀 고생시켜 쉴 새 없이 계획에도 없던 곳들을 돌리고 있다. 어쩌겠나. 시작한 투어는 제대로 해야지. 누운 부처상(shwethalyaung budha)은 흘낏 보고 지나쳤다. '크다'는 것 외에 별 감흥이 없다. 대신 그 둘레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힌타공 파고다에서 바라본 쉐모도 파고다.


쉐모도 파고다 Shwemawdaw Pagoda, 오늘의 메인 이벤트. 5pm이 되어 도착. 20분 이내에 다 보고 나와야 하다야 까페에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듯. 사진을 재빨리 찍었다.


쉐모도 파고다야 쉐다곤 파고다 만큼이나 유명하니... 이제 만들래에 가서 마하무니 파고다만 보면 짜익티요 삐고는 다 보는 셈인가.


마치 이란의 모스크처럼 이것들은 끊임없이 금칠을 새로 하고 보수한다. 국제적인 기준에서 보았을 때 그저 찢어지게 가난할 뿐인 싸이카 운전수는 자기한테 2000달러가 있으면 여기에 파고다를 만들 것이란다. 왜? 그것은 지위, 부, 체면, 명성, 그러니까 그들 사회의 근본적인 계급 구조와 사회 구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니 굶어 죽어도 파고다는 수십만 개를 만들어 놓았지. 백만 달러 정도면 100m 짜리 웅장한 파고다를 만들 수 있단다. 잘들 한다.


그래서 저 새끼 파고다는 기증자들이 돈 되는대로, 쥐꼬리만한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전시하는 것이다.
그들 문화를 비아냥거릴 생각은 없다.


쉐모도 파고다 안에서 만난 이 친구, 한참 이야기 하는 중에는 웃기도 잘 웃고 다정하고 재밌었는데, 얼씨구? 사진기를 들이대자 곧바로 근엄해지네? 이래서 종교가 싫다니깐.


투어를 마치고 돈을 건네주니 사색이던 얼굴에 콰광 희망의 번개가 쳤다. 입이 찢어지게 좋아한다. 이 비수기에 단비같은 돈인건가. 돼지같은 군부는 대체 뭘 하고 있는걸까. 벌이가 짭짤해 뵈는 파고다를 중들로부터 빼앗아 보수해서 외화벌이 한 돈으로, 이 나라 저 나라에 자기 딸들을 수출한 돈으로 대체 뭘 하고 있을까. 하다못해 국민이 굶주린다고 찔찔 짜다가 자기 아니면 나라 못 바꾼다고 말년에 머리가 돌아버린 박정희 대통령이라도 닮았으면...

하다야 까페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며 라파이를 시켜 홀짝 홀짝 마셨다. 인디아의 짜이와 그 맛이 백퍼센트 똑같은데 과자 몇 접시가 함께 나왔다. 과자를 집어 먹으면 나중에 합산해서 계산해준다. 하다야 까페 주인은 마치 rpg 게임에 나오는 mob처럼 대사가 기묘하게 정해져 있었다. 재밌다. 좋은 사람 같다.

영어할 줄 아는 미얀마 인한테 필수 생존 미얀마어 세 가지를 배웠다. i want to go to mandalay -- 쩐노 만달래 꽈찬례, please tell me this is mandalay -- 만달래 야오예 뚀바, how much is it -- 배 라울래

그 다음부터는 고독했다. 옆 자리에 아일랜드 여자와 남자가 앉았다. 평소에는 여행자에게 말을 안 붙이는 편인데 여행자가 하도 없다보니 반가워서 말을 걸었다. 인레 호수로 간단다. 난 아마 안 가게 될 것 같다. 나를 미얀마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제임스 조이스를 안다니까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쳐다봤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전공이 조이스였다. 호, 이런 즐거운 우연의 일치가... 그래서 나는 먹고 살기 위해 낮에는 구두 수선하다가(이 나라에는 그런 대학생들 천지다) 저녁에 잠깐 시간이 나면 이 책 저 책 읽어본 미얀마의 대학생 정도 되는 신분으로, 그녀는 조이스의 본고장에서 온 조이스를 공부하는 학생쯤 되는 사람으로서, 대화를 시작했다. 일단 기본적인 초식부터 보여줘야 하니까 내가 읽은 조이스의 저서를 얘기했다. 어 포트레이트 오브 영 아티스트, 피네간스 나잇, 율리시즈. 그녀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제외하고 다른 책들은 읽어본 적이 없었나 보다. 게다가 night가 아니라 wake인데 알아채지 못했다. 말을 더듬더듬하더니 그런 스스로가 당황스러웠는지 눈알을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렸다. 나는 조이스가 왜 미쳤는지 얘기 중이었다. 차가 와서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미얀마가 세계에서 고립된 깡촌오지가 아니라는 점만 알았으면 된 거다.

차에 오르니, 얼씨구? 4500으로 들었는데 5500을 내란다. 무슨 소리냐? 설마 자리라도 있는거냐. 고개를 끄떡인다. 미얀마인들의 보이지 않는 친절은 사람을 바보로 만들기 일쑤다. 누군가 나 때문에 midst seat로 옮겨간 것이 뻔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나는 각기 다른 에이전시를 통해 이미 표가 없음을 수 차례 확인했다. 없는 표가 하늘에서 떨어질 일은 없고, 미얀마에서는 차를 잡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다. 특히 지금은 새해를 맞이해 엄청난 인구가 이동중이라 못해도 하루 전에 예약을 해야 표를 구할 수 있다. 게다가 내 자리에 있어야 할 물병과 물수건이 없다. 누군가 앉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져간 것이다. 어쩌면 하다야 까페 주인이 손을 쓴 것일지도 모르겠다.

쓴웃음을 짓고 돈을 건넨 후 자리에 앉았다. 차가 좁아 허리가 아프다. 에어컨 버스인데 에어컨 나오는 모양을 보니 기대할 형편은 아닌 것 같고, 사람들이 창문을 열어놓았다. 자리가 불편해 잠이 안 온다. 비디오를 틀어놓으니 차안의 모든 미얀마인들이 그 비디오를 보느라 정신 없다. 차 안에 있는 외국 여행자는 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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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 Yangon

여행기/Myanmar 2005. 3. 30. 20:56
이번 여행부터 찍는 사진은 1024x768로 사이즈를 바꿨다. 파일 크기가 3배쯤 늘어나지만 최소한 프린팅이 가능한 수준이 되도록.

아침에 일어나니 목이 뻐근하다. 잘 때 자세가 안 좋았던 듯. 6시에 깨어 세수하고 짐을 챙겨 숙소를 나왔다. 남은 잔돈으로 쥬스를 하나 사 먹고 50밧 지폐는 나중을 위해 남겨 두었다. 쓸모가 있으리라. 59번 에어컨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며 졸았다. 이틀 묵었던 만남의 광장이 마음에 든다. 마치 누가 죽고 누가 경찰에 잡혀가는 등 해서 사람들의 발길이 갑자기 뜸해진 델리의 나브랑 게스트하우스처럼 묵고 있는 투숙객은 나와 어느 방송사 PD를 비롯한 방송팀 뿐, 남은 객실은 텅 비었다. 만남의 광장이 운하 옆으로 이전해서 아침에 식당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건너편 상인들이 장사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 보며 담배를 피웠다. 방콕에 가게 될 일이 있으면 다시 만남의 광장으로 갈 것이다. 24개의 침대가 텅 비어있는 도미토리를 혼자 쓸 수 있는 기회는 당분한 흔치 않을 테니까.

양곤행 비행기는 대략 1시간 운행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기내식과 음료 서비스가 나왔다. 배 고픈데 잘 되었다. 주는 대로 빼놓지 않고 받아 먹었다. 양곤에 가면 점심 한 끼 안 사먹어도 된다. 푸켓 에어의 737-200 항공기 좌석수는 200여개지만 손님은 30명이 채 안 되었고 배낭을 든 사람이 없는 걸 보니 그나마 나같은 배낭 여행자는 없는 것 같다.


동남아를 꽤 많이 다닌 셈이지만 비행기에서 델타를 본 것은 처음. 양곤에 거의 접근. 버마를 거저 먹은 영국은 이 델타의 가치를 일찌감치 알아채고 양곤을 전략 수출입 도시로 키웠다. 그나저나 미얀마의 주요 수출품은 티크목재, 황마, 쌀, 그리고 흥미롭게도, 아편이다.


미얀마의 비옥한 델타. 뭔가를 한창 건설중인 듯. 버마는 영국 식민 시절의 이름인데, 나중에 만나는 미얀마 사람들마다 물어보니 영국에 별다른 적개심을 가진 것 같지 않다. 동남아 대개 국가는 제국주의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은데, 나같은 제 3자가 오히려 더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선교사가 동남아시아로 넘어오면서 친절하게도 이 종족, 저 종족의 아이덴티티를 확실히 해 주시는 바람에 종족 간에 잘 지내던 나라들이 불화에 휩쌓이게 된 것이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 북부 카렌족은 여전히 군부독재와 투쟁중이고, 여전히 핍박받으며 도망다닌다. 자기들이 버마족이라고 믿고 있는 미얀마인들의 태반은 몬족이다. 마치 한국에 양반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처럼. 티벳 몽고어족인 미얀마어는 한국어와 어순이 같다. 버마족은 과거 매우 강대한 종족이었고... 이런...

양곤 공항에서 출입국 수속을 대충 마치고 공항 바깥으로 빠져 나오니 삐끼가 달라 붙는다. 양곤 시내까지 택시 3$ 부른다. 협상이나 할까 하다가 마음이 바뀌어 그에게 어디서 버스 탈 수 있냐고 물으니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친절하게라... 의외로군. 택시가 글른 것 같으니까 환전하지 않겠냐고 되묻는다. 달러당 얼마? 450짯. 900으로 해 주세요.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동료들과 뭐가 재미있는지 킥킥 웃더니 좋은 여행 되길 빈다고 말한다. 미얀마 첫 인상이 상쾌하다. 생각해보니 시리아가 그랬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물어 20짯 짜리 픽업을 타고(시외버스 터미널처럼 생긴 아담한 공항을 빠져 나와 왼쪽으로 직진, 주욱 가면 픽업들이 서 있는 교차로가 나타남) 잔시(?) 라는 곳으로 가서 내린 다음 버스를 기다려 탔다. 51번 버스 40짯. 둘 다 사람들이 미어터져 몸을 꼼짝할 수가 없다. 아무튼 미얀마 숫자 쓰는 법을 익혀둔 덕택에 버스 번호가 눈에 보인다. 미얀마 알파벳도 좀 알아두고 싶은데 자료를 구하지 못했다.

버스에서 영어를 썩 잘 하는 대학생과 얘기했다. 전공이 경제학인데 한국에 내년에 가게 될 것 같다고 한다. 그의 형은 부산에서 일한다. 한국에서 일하게 되면 어떤 직업을 갖을 수 있을 것 같냐고 묻는다.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뭐라고 해야할 지... 전공이 뭐든 상관없이 동남아에서 풍운의 꿈을 안고 온 대학생들이 별로 적절치 않은 대접을 받으며 공장에서 나사 만드는 등의 일을 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해줄까. 이 지역에서 대학생이면... 그러나 교육수준이나 질은 한국과 상당히 다르다. 물론 그들 역시 많은 것을 바라거나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삽질해서 번 '큰 돈'으로 미얀마에서 부유하게 살아보는 것이 꿈일 테니까. 버스가 신호등에 걸렸을 때 옆 라인에 토니여행사의 짚차가 섰다. 미얀마 여행을 계획할 때 한 번 쯤은 접하게 되는 이름.

대학생의 안내로 술레 파고다에 내려 오끼나와 게스트하우스까지 함께 가면서 그에게 내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한국에 오게 되면 한번 연락하라고... 오끼나와 게스트하우스는 시설이 꽤 좋은데 가격이 비싸 그냥 나왔다. 그의 말에 따르면 미얀마에 온 한국인은 무슨무슨 호텔에 묵는다고 하더라. 내가 묵으려 하는 곳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좀 싼 편이라고 한다.

기절할 정도로 쌌으면 바랄 나위가 없겠다. 술레 파고다 바로 앞에 있는 가든 게스트 하우스로 올라갔다. 싼 방은 다 나가고 에어컨 방 밖에 없단다. 6$, 고민하다가 잡았다. 오끼나와에서 5$주고 도미토리에 묵는 것보다는 낫지. 이 숙소에 대한 트래블 게릴라의 평가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5층을 오르락 내리락하기에는 불편하단다. 술레 파고다를 바라보는 끝내주는 전망 얘기는 없었다. 어쩌면 탑들이 지겨워서인지도.


Sule Pagoda, 붓다의 머리카락이 여기 있다는 소문이 있다. 양곤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본 파고다. 한국으로 치면 남대문쯤 되겠지. 앞으로 수천 개의 파고다를 보게 될 것이다.


이 정도면 양호한 숙소 아닐까 싶다. 물론 2002년에 새로 지은 오끼나와의 럭셔리함과는 비교가 되겠지.

시장통에서 달러당 900에 50$만 환전. 론지를 살까 하다가 3000씩이나 한대서 망설였다. 삐끼와 바고 가는 차가 있냐 없냐로 옥신각신했다. 그의 말로는 2500짯이라는데 바고 까지 고작 한 시간에 2500짯이면 어딘가 가격이 불합리해 보인다. 걸어서 보따타웅 파고다까지 갔다. 2$를 삥 뜯기고(현지인은 무료입장) 낫 사당부터 보았다.


낫(nat, 정령) 신앙의 본거지인 뽀빠산에는 안 갈 생각. 절간의 삼신각과 비슷한데 한국에서는 절간 어느 한구석에 조그맣게 쳐 박혀 있는 것이 이곳에서는 금칠도 하고 대접 받는다. 이놈은 좋은 신령 같다.


어서옵쇼


보따(군인) 타웅(천명)은, 다곤(현재의 양곤)에 살던 두 형제인 Okkla와 Bhallika가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곳인 인디아의 부다가야로 찾아가 부처에게 꿀케잌을 바치고 그가 건네준 여덟 가닥의 성스러운 머리카락을 받아 다곤으로 돌아올 때 오칼라파 왕이 천명의 지휘관을 데리고 나와 영접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천명의 군인과 자비의 화신이라...


이 파고다는 내부를 공개하여 부처의 머리카락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이곳에 오면 부처의 머리카락을 보려고 안간힘을 다 썼다. 나도 노력했다. 그런데 저렇게 방치해도 되는 것일까? 저렇게 털기 쉬운 성물이라니... 이 김에 인디아나 정스가 되서 털어봐...


정말 성스러운 곳이라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려면 입장료와 별개로 1$를 더 내야 한다. 딱히 감시하는 것 같지는 않고 해서 사진기를 들이댔다. 안의 거울처럼 꾸민 여러 방에는 각각 의미가 있겠지만...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갯벌이 반인 이 해변에서 무려 천 명이나 되는 지휘관이 서서 부처의 머리카락이 당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천명의 군바리와 부발의 묘한 아이러니. 부처는 왜 미얀마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뜯어 줬을까? 팜플렛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부처는 불교가 미얀마에서 융성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부처는 락이 가고 블루스가 왔던 것처럼 미얀마에서 불교가 뜨리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았던 것이다.


2500년이 지난 현재, 해변 도로의 건너편에는 천 개의 컨테이너 박스가 있다.

시계를 흘낏 보니 기온이 38.5, 최근 12시간 동안 기압은 안정적. 아까도 꽤 더워서 땀을 많이 흘렸는데 이 더위에 차욱타지 파고다까지 6km를 걷는 것은 몹시 위험한 짓인 것 같아 중간에 택시를 세웠다. 1200짯에 대충 협상하고 올랐다. 아내가 늘상 하는 양상의 호구 조사를 해보니 운전수에게는 1년 7개월된 딸 하나 있고 딸 생각만 하면 입이 찢어지려고 한다. 심도있게 조사해보니 수입은 하루 7000짯 가량, 많을 때는 15000짯 까지 벌었다. 환산하면 8$-20$쯤. 택시는 렌트해서 사용하는 것, 하루 렌트비가 7000짯. 일인당 국민소득이 150$이라는 나라에서 의외로 고소득자였다. 아니면 개방 이후 다른 많은 나라처럼 미얀마 경제가 급속히 팽창하는 중이라던가, 관광객이 늘어났던가. 호구조사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는 영어라고는 숫자가 거의 전부인 기사 양반과 별별 수단을 동원해서 알아낸 것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깨달음도 얻었고 해서, 팔자 좋게 늘어져 있는 길이 195m 짜리 부처


이 나라 부처의 피부는 유난히 희다. 그가 미얀마어로 말했다; 아웅 레베 까잇데(아웅 목 아파), 뭐 재밌는 일 없을까?


쫄따구들이 오늘 공양은 잘 했는지... 내가 일어서기만 하면 군부 독재 정권 쯤이야 우습지. 보살들 시켜서 법륜 한 번 땀나게 굴려봐?


저 아저씨는 안 가고 아예 죽치고 살려나 보네. 그냥 눕지 그래... -- 이 나라에서 네번째로 큰 이 집 부처가 하루를 보내는 방법.

차욱따지 파고다를 나와 축축 늘어지는 더위 속에서 걸었다. 쉐다곤 파고다까지 만큼은 걸어볼 심산이다. 지나가던 아이가 앞에서 쳐다보길래 싱긋 웃어주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모르는 아이답게 내 얼굴을 한참 노려본다. 한 시간쯤 걸어가니 아까 그 아이가 어떻게 앞서 갔는지 앞에 다시 서 있다. 다시 웃어 주었다. 이번에는 아이도 살짝 웃는다. 낯선 외국인이 미소 지을 때는 함께 미소지으면 된다는 것을 깨닫고, 혼자 연습도 해 보고, 실무에 적용해 본 것이다. 재밌긴 하다.

쉐다곤 파고다 앞에서 파는 150짰 짜리 얼음 넣은 사탕수수 즙 먹고 힘냈다. 쉐다공 파고다에 다 왔다. 5$ 삥뜯길 준비도 했다. 가능한 안 걸려서 안 냈으면 좋겠다. 계단을 오르려니 아이가 따라와서 비닐 봉투를 덥석 손에 쥐어주고 신발을 싸서 들고 가란다. 5짯 주니까 히힛 웃으면서 사라졌다. 5짯이면 우리나라 돈으로 5원 가량? 이들 물가 수준이 아직 감이 안 잡힌다. 수퍼에 들러 대충 가격이라도 알아봤으면 좋겠는데 그럴 시간이 없다.

소문대로, 어디선가 귀신같이 나타난 젊은 친구가 나를 잡더니 티켓 판매소로 친절하게 안내해 주셨다. 외국인은 돈을 내야 하는 것이다. 친절은 계속되었다. 티켓 안내소의 아가씨들은 미소를 지으며 5000짯이라고 말하고, 꼭 사야할 것 같은 팜플렛은 1000짯 별도라고 말한다. 달러로 내겠다고 했다. 그 편이 계산하면 더 싸니까. 팜플렛을 사양하니 풀이 죽은 것 같다. 갑자기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혹시 카메라 있으시냐고 묻는다. 카메라는 1$ 더 내야 한다. 없다고 했다.


카메라가 없긴 왜 없어. 있지.


지나가던 카메라 촬영사나 가이드는 내 생일이 금요일이라니까 공교롭게도 붓다의 생일도 금요일이라고 기뻐하며, 오늘 당신이 이곳을 방문한 것은 행운이라고 자기들이 더 기뻐한다. 저게 행운의 참 모습이냐? 공사중이라 찬란한 황금빛에 대나무 금이 갔다. 공사는 5월에나 끝난단다. 내가 불만을 토로하자, 삐끼들은 그러나 여전히 당신은 행운아라고 말했다. 아직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공사가 마무리된 꼭대기의 찬란한 보석들은 볼 수 있지 않냐는 것이다.


신경질이 난 나머지(마누라는 먼저 갔다오고도 공사중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가이드와 쉐다공 파고다에 대해 누가 더 많이 아는지 서로서로를 가이드 해주기 시작했다. 그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전과 후 뭐가 달라졌는지 구분 안하였다. 나는 그가 겪은 고난 중에 마야(마라)가 특히 그의 심경을 괴롭혔음을 강조하고 틈틈이 미얀마 숫자를 자유자재로 읽을 수도 있음을 과시했다. 그리고 쉐다곤 파고다에 박혀 있는 무수한 보석들이 밤에 조명을 받아 반짝여 봤자, 꼭대기에 달린 다이아몬드의 찬란한 번쩍임 만큼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루비는 피빛으로 붉고 사파이어는 안다만 바다처럼 시퍼런데, 직접 보고 나서 말하라고 한다. 구석에 몰려도 아웅산 수지가 감방에서 밥은 잘 먹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주저 앉아서 지나가는 카메라 삐끼들과 한가한 얘기나 나누며 사람들이 절하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파고다의 이름에 스웨가 접두어로 붙는 것들이 많다. 스웨는 황금이란 뜻이다. 스웨다곤은 황금 다곤, 다곤은 양곤의 옛 이름. 파고다에 자기 몸무게 만큼의 금을 기부하는 풍속은 미얀마에서는 신소부 여왕때부터 시작된 것 같은데, 그녀가 기증한 금은 40kg이었다. 그녀가 기부한 금의 무게가 현재에 살아가는 많은 여성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지, 공주가 만약 80kg의 금을 기부했다면 지금처럼 존경받았을까? 의문이다.


쉐다곤 파고다에서 받은 이미지: 쪼리를 질질 끌고 다니며 담배를 뻑뻑 빨고 있는 승려, 콘크리트 붓다, 부처 머리에 앉아 똥 싸는 참새, 한가한 가족 나들이, 한 줄로 주욱 즐비하게 늘어선 기부함, 라이브 도네이션 현장. 사원에서 기부받은 돈을 즉석해서 회계처리하는 인디아식의 영리함을 이곳에서는 보지 못했다. 인도에서 가장 큰 사원의 회계사에게 물었다. 하루에도 수십만의 사람이 들락거리는데 어떻게 한푼의 에누리도 없이 정확하게 계산이 맞아 떨어지는가? 그야 신께서 도와주시니까. 영적으로나 회계적으로나 한국의 개신교에서도 그 분께서 장부 처리를 도와주고 있을까? 돈을 세고 있는 하나님 모습을 상상했다. 지나가던 독일인이 지겹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부다, 부다, 부다, 어나더 부다...' 부처가 참 많긴 한데, 각 부처마다 보살피는 것이 다른 것 같다. 낫 신앙과 뒤섞인 힌두식 남방불교. 미얀마는 대승 불교에서 소승 불교로 갈아탄 것으로 알고 있다. 인상깊은 것이 하나 더 있다. 세계 주요 도심에서 나름대로 진화하기 전의, 닭둘기 조상이 이곳에 대거 서식한다.


저녁 8시쯤 정전. 술레 파고다는 그래도 희미하게 빛났다. 성스러운 전용 발전기가 있는 것 같다. 정전으로 암흑에 휩싸인 도심의 한복판에서 파고다가 surealistic하게 반짝인다. 그야말로 sf였다. 노출보정 +1, 노출시간 0.6초, iso200, 손 삼각대. 아마추어 사진에 더 많은 것을 바래서는 안되겠지. 더 이상의 노력은 포기.

오끼나와 식당에서 1200짯 짜리 오끼나와 특별 수프를 시켜 먹었다. 정전 탓에 촛불을 켜고. 방콕에 있을 때 똠양꿈을 못 먹어 섭섭했는데 여기서 먹게 될 줄이야... 오끼나와 스페셜 스프는 똠양꿈 맛인데 그런 줄 모르고 설탕을 안 넣어 시디 신 라임소다를 곁들여 먹었다.


에어컨 프로텍터. 전압이 242v 이상 치솟으면 에어컨 전원을 off 시키는 것 같다. 인디아에서는 왜 이런 장치를 본 적이 없을까. 60-250v까지 제멋대로 정신없이 변하는 전압에서는 섬세한 일본 기기나, 유럽, 미국의 전자기기들은 가차없이 나가 떨어졌다. 한국의 모 기업의 tv가 인디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은 60-250v까지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전압으로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줄이려고 정격의 수 배에 달하는 내압을 지닌 값비싼 컨덴서를 포함한 회로를 전자기기에 장치하면서 부터다. 발전 사정이 좋지 못한 비서구권 제3세계 국가에서 한국 전자기기는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훌륭한 현지적응 사례다.

보조제 마켓의 한 노점상에서 손톱깎이를 살 때 상인은 태국제, 중국제, 한국제를 구별했다. 한국제가 가장 비싸다. 주저없이 중국제를 골랐다.


어둠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좋아 날뛰고, 불빛 주변에는 사람들이 불나방처럼 모였다. 덕택에 미얀마의 수도에서 별을 보았다. 쩨주베(고맙다).

인터넷 까페는 아홉시에 문을 닫고 이 글은 언제쯤에나 블로그에 올리게 될지. 노트북에 저장해 둔 비틀즈의 노래를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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츄리닝을 입고 인천 공항에 도착. 아내가 뭐라고 그러더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긴 했다. 수속을 마치니 간신히 비행기에 오를 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1시 방콕 도착. 공항을 빠져 나와 버스 정류장에서 20분을 넘게 기다려서야 59번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그것도 에어컨 버스, 20밧. 버스 가격이 올랐나?

카오산에 도착해 싸구려 숙소들을 돌아다녀봤지만 방이 모두 찼다. 간신히 새로 옮긴 만남의 광장에 도착하니 새벽 3시. 도미토리를 잡고 들어갔다. 한국인이 한명 자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시간당 120밧 하는 맛사지를 두 시간 받았다. 그럭저럭 괜찮은 편. 항공권을 컨펌하고 날짜로 모두 11일로 고쳤다. 13일은 죽어도 표가 안 난다. 그놈에 송크란 때문에..

그리고 파아팃 선착장으로 가서 보트를 타고 창 선착장으로, 창 선착장에서 다시 보트를 타고 50여분을 달려 방야이로, 방야이에서 버스를 타고 남 선착장으로, 남 선착장에서 논타부리 선착장으로... 논타부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파 아팃 선착장으로... 이렇고 돌아다니니 5시간 걸렸다. 오늘 테마는 챠오프라야 강을 보트 타고 돌아다니자... 였는데 방야이에 가니 방콕이 수상도시라는 것이 실감났다.


챠오프라야 강


방야이로 가는 길.

숙소로 돌아와 샤워 하고 차이나 타운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차이나타운 갈 때도 보트를 타고 가면 되지만 귀찮아서 버스를 탔더만 교통체증에 걸려 중간에 내려 걸어갔다. 거리에서 파는 50밧 짜리 제비집 수프를 먹고 딤섬을 이것 저것 줏어 먹었다. 오렌지 쥬스를 15밧 주고 샀는데, 이럴수가... 거의 1리터 가량을 갈아서 줬다. 먹다가 속으로 '좆됬다'고 중얼거렸다. 더 이상 다른 것을 먹을 수가 없었으니까...

배도 채웠고 차이나타운에서 걸어서 방람푸까지 왔다. 시계의 나침반도 실험할 겸 운동도 할겸. 방람푸에서 다시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8번 버스를 타고 빅토리 모뉴먼트로 갔다. 섹소폰 2층에서 맥주 한 병 시켜놓고 다리를 쉬었다. 연주 솜씨는 그저 그랬다. 아마추어 티를 갓 벗어난...

전승기념탑 주변에서 버스를 타고 어떻게 돌아가야 할 지 난감해서 MRT를 타고 일단 씨암에서 내려 15번 버스를 타고 방람푸로 돌아와 죽 한 그릇 먹었다.

내일은 그렇게 속을 썩이던 미얀마 들어가는 날. 아내는 미얀마에서 10일을 보내고 돌아왔고 볼만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버강 유적지는 앙코르 와트, 보르부르드와 다불어 동남아시아 3대 유적지다. 아내나, 동남아를 여행하는 여행자 대부분이 동남아 문화와 역사에 대해 그다지 공부하는 것 같지 않았다. 흠... 미얀마의 선사시대, 고고학적 역사에 관해서 얘기해 봤자 들어줄 사람도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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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0

아내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한결같이 최근 여행자들은 예전만 못하게 질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일리가 있어 보였다. 뭐 대단한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 나라 언어나, 문화, 역사조차 공부하지 않고, 중대 결심을 해야 나올 수 있던 소위, '해외여행'을 이제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옆집 애가 갔으니 나도 갈 수 있다 분위기. 그리고 머리가 나쁘다는 것. 뒈지게 더운 나라에 와서 뒈지게 덥다고 말하는 바보가 있는 것이 증거? 현지어는 한 마디도 모르고 영어만 사용하는 여행자나 그 사회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자기가 살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워낙 교조적인 이야기이고 저마다 개성과 취향이 있지만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고 먹지 않거나(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벌레를 먹어야 한다) 오른쪽 차선 통행인데 죽어라고 왼쪽 차선으로 오토바이를 모는 것. 태국 같은 좋은 나라에 와서는, 외국에 나와서 한국음식을 먹는 것이 이해가 안 간다며 자기는 팍치도 잘 먹는다고 하면서 죽어라고 태국음식만 먹어대는 것도 이해가 잘 안가긴 마찬가지다. 이런 예를 보면 질이 떨어지는 지는 확실치 않지만 예전 여행자들에 비해 지능이 떨어지는 것 만큼은 확실했다.

저녁에 땅화생 백화점에 들러 쇼핑을 했다.

오징어에 대한 아내의 불가해한 정열로 인해: 오징어포 17, 생선포 16, 비스켓 스틱 9,
집에서 노상의 불량식품 스러운 수박 쥬스를 만들어 먹으려면 : 연유 18
꿰이띠오 남을 집에서 해 먹자: 쌀국수 3개 단가 6.75, 쁘라놈 소스 17.5, 고추 소스 11, 남 쁠라 18, 고추가루 15.25, 갈릭 파우더 27.5
아내가 월남쌈을 만들어 보겠단다 그래서 : 라이스 페이퍼 59
술먹은 다음날 꿀차? : 꿀 228
그리고 집에서 월남미로 카우 팟을... : 쌀 20

쌀 까지 산 것은 좀 너무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들을 아내와 내 배낭에 나눠서 차곡차곡 쑤셔 넣었다. 남 쁠라를 매번 느억 맘이라고 말하는 실수를 자주 했다. 남 쁠라는 참치나 멸치 등의 생선을 발효시켜(썩혀) 만든 생선 간장같은 것인데 태국의 모든 요리에 들어가는, 말하자면 핵심 컴포넌트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쁘라놈은 달고 시고 매운 소스인데 남 쁠라와 마찬가지로 식탁에 항상 놓여 있다. 국수 먹을 때 마다 내오는 다섯 가지 소스 중 빠진 것은 고추기름과 고추 식초 절임인데 쉽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고추 절임에 라임이 살짝 들어가는지 안들어가는지 확실치 않다. 수퍼 마켓에는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향신료가 있었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거리를 거닐다가 그리웠던 카우 카 무(족발덮밥)을 먹었다. 아내는 쌀국수 매니아다. 시공사의 Just Go 태국편을 잠깐 봤는데 대부분 나하고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음식 섹션 하나 만큼은 장관이다. 생판 듣도 보도 못한 음식들이 즐비하게 나와 있다. 어디서 그런 음식을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태국 음식 기행은 할만한 것이다. 이렇게 싸고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 태국 말고 다른 나라가 있을까 의문이다.

숙소에 들어왔다가 잠깐 나갔다. 빗속을 거닐어 홍익인간 앞에서 봉지 구아바를 샀다. 나보다 앞서 구아바를 산 용감한 한국인들이 이게 대체 무슨 과일인데 맛이 하나도 없냐고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판매상은 술에 취해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중인데 내가 '알로에 막막'이란 말을 제대로 발음하도록 갖은 애를 썼다. 얌마, 정신차리고 구아바나 제대로 깎아라. 니가 지금 발음이 안 되는거야.

7/11

새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월텟에 들러 몇 가지 쇼핑을 하고 돈이 남으면 영화를 보고 마사지를 하고 수끼를 먹기로 했다. 물론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일반 버스 대신 에이컨 버스를 타는 바람에 빠두남 시장에서 내렸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의 용산 전자 상가에 해당하는 빤팁 플라자에 들러 일 없이 에어컨 바람을 쐬다가 월텟으로 갔다. 지갑을 몇 개 사려고 들렀지만 백화점이다 보니 흔해빠진 가오리 지갑이 1000밧이 넘어갔다. 50% 할인을 하더라도 500밧 가량?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것이라고 해서 뭔가 남다른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평범한 디자인, 평범한 박음질.

원래 가려고 했던 MBK로 발걸음을 옮겼다. 태국에서 뭔가 물건을 살 일이 있으면 마지막에는(본의아니게) 항상 MBK에 들렀다. 적당한 가격에 쓸만한 물건을 구할 수 있으니까. 선물, 기념품은 짜두짝 주말시장과 나라야 판, 이세탄, 센 백화점 따위를 전전했고 생필품을 살 때는 삔까오 다리 건너 있는 이름을 잊어버린 백화점과 짜두짝, 빠두남, 나이럿 시장, 카오산 옆 시장을 배회했다. 가격대 성능비가 가장 형편없는 곳은 언제나 카오산이었다. 카오산에서는 가짜 학생증을 만들거나, 가이드북이나 중고소설을 구매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도착하자마자 팟 타이와 바나나 팬 케잌(로띠)을 먹는 장소였다. 방콕에 가면 매번 숙소를 수쿰윗에 잡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어김없이 카오산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아직 많은 여행자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만난 그때 그 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MBK 6층 Thai Corporation 매장에서 코끼리 가죽 지갑을 샀다. 가오리 지갑이나 상어 가죽 지갑은 워낙 흔해빠진 아이템이라 희소성이 떨어졌다. 게다가 상어 가죽은 비싸다. 코끼리 가죽으로 밀어 붙이자.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선물하기로 했다 -- 휴가를 일주일 갔다오기로 했는데 일주일 더 놀았다. 지갑은 정가 600밧 가량 하는 것이고 잘 깎아봤자 300밧 정도 될 꺼라고 생각했는데 아내의 협상 솜씨는 여전히 눈부셨다. 개당 225밧 가량, 일곱 개를 샀다. 그리고 860밧 짜리 실크 삼각 베게를 600밧에 샀다. 협상이 가능하지만 마침 파는 곳이 거기 뿐이고 기념품 천지인(게다가 상점 점원들의 악어처럼 상큼한 미소) 나라야 판까지 가기는 이 더위에 거리가 멀다.

카오산에서 워낙 싸구려 같은 것들만 봐서인지 이 가게에서 산 것은 의외로 품질이 좋았다. 가진 돈이 얼마 없어서 아내가 가지고 있던 65$ 미화 짜투리를 다 환전해서 간신히 물건들을 구매했다.

거대한 비닐봉투에 삼각 베게를 담고 묵직해진 보조 배낭을 어깨에 맨 채 다시 센트랄 월드 플라자로 향했다. 제철이 아니라 시중에서 구하기 어렵다는 데도 아내는 망고스텐을 먹고 싶단다. 정 먹고 싶으면 빅 씨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빅 씨의 단 한 코너에서 망고스텐을 팔고 있다. 껍질을 보아하니 맛이 간 것 같다. 실패할 것이 뻔해 반 케이지(kg)만 샀다. 그리고 저녁 대신 먹을 이런저런 식품들을 샀다. 바나나빵 6개(13), 초밥 세트(99), 구아바 쥬스(10), 벨프룻 쥬스(10), 드래곤 프룻 반 토막(9). 초밥을 맛 때문에 먹는 것은 아니다.


싸얌에서 월텟 쪽으로 가는 길에서 보는 철사 공예품 판매상. 몇 년이 지났건만 매번 그 자리에 있다.


이세탄 백화점. 이런 사진은 대체 왜...


방콕의 악명높은 교통 체증... 가변 차선... 아니다. 이 구간은 체증이 없다.


Big C 수퍼마켓의 과일 판매대

시간이 너무 지나 초조하다. 카오산에 도착하니 6시 무렵. 서둘러 숙소에 맡겨 놓았던 짐을 찾고 복권청 앞에서 59번 버스를 기다렸다. 남은 돈은 34밧 뿐인데 59번 일반 버스는 올 생각을 안 한다. 돈이 모자라 탈 수 없는 59번 에어컨 버스는 벌써 두 대가 지나갔다. 기다린 지 50분이 지났다. 머칫까지의 교통 체증이 걱정되고 초조해서 하는 수 없이 다음에 오는 에어컨 버스를 탔다.

수중에 남아 있는 돈은 1034밧, 500밧 짜리 공항세 티켓 두 장을 사면 34밧 밖에 남지 않아 에어컨 버스 비용인 두당 20밧에서 6밧이 모자란다. 아내가 안내양에게 사정하자 옆에 있던 태국인이 10밧을 그냥 준다. 아내가 답례로 10밧 짜리 구아바 쥬스를 그에게 줬다.

나는 공항에 도착하면 가방에 잔뜩 들은 몇 가지 물건을 꺼내 태국인들에게 물건을 주고 모자란 돈을 얻을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한심한 기분이었다. 바로 전에 레몬티만 마시지 않았어도 59번 에어컨 버스에 진작 탈 수 있었을 터인데! 하지만 먹다 얼음만 남은 레몬티 봉지는 초밥을 차갑게 식히는데 쓸모가 있다. 초밥은 차가워야 한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카오산 옆 랏담넌 거리. 겁나게 피어오르는 구름.

아내는 짐을 부치고 나는 짐을 들고 비행기에 타기로 했다. 아내 비행기는 10.30pm에 떠나고 내가 타는 비행기는 11.15pm에 떠난다. 통로 옆 의자에 앉아 아까 BigC에서 산 음식들을 꺼내 펼쳐 놓고 먹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니들 99밧 짜리 럭셔리한 초밥 도시락 먹어봤냐? 주머니에 한 푼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내를 먼저 보내고 탑승대기실에 앉아 있다. pda를 꺼내 오늘 일정을 정리했다. 대기실은 한국인들의 수다로 시끄럽다. 지나가던 한국인이 아는 척 한다. 이전에 만났던 사람이다. 저장해 놓은 mp3를 들으며 이 글을 작성중이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리얼타임 로그는 여기까지다.


공항에 앉아. PDA 속에 담긴 내 여행 기록의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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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돌아와서 계속; 보딩 패스를 내밀고 문을 나와 셔틀버스를 탔다. 이런 저런 비행기가 창 밖으로 보인다. 예전 숙소에서 봤던 아줌마가 아는 척을 했다.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간다. 버스가 비행기를 향해 공항을 한가하게 운행하고 있을 때 PDA에서 마침 Mascagni, Cavalleria Rusticana, Intermezzo (3:31) 가 흘러 나왔다. 대화를 중단하고 음악을 들었다. 뭔가 사무치는 감정이 일었다. 이런 것이다; 항공권 본전도 제대로 못 뽑고 이 좋은 열대를 떠난다는...

옆 자리에 앉은 한국인 아가씨들은 CA(cabin attendant가 맞다)가 하는 영어를 당체 알아듣지 못했다. 시선이 느껴져 옆을 흘낏 쳐다보니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사람 같다. '줄거리'라고 씌어있는 문서 뭉치를 읽고 있다. 옛날 중국 여행할 때 따리에 짱박혀 뭔가를 쓰고 있다는 작가인지 시나리오 작가가 아닐까 싶었다. 굳이 아는 척 하지 않았다.

이번 열대에서는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았다. 황가나 아내에게 부처 얘기를 해 줬다. 옛날에 부처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 자신이 누린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주자는 순수한 마음에서 설교를 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물 위를 걷거나 치료기적을 행하거나 하다 못해 공중 제비 돌기 등의 아크로바트 하나 변변히 할 줄 아는 것이 없는데다 쓸만한 제자 하나 없는 부처가 민심을 움직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인도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사두들이, 바바들이 있었다.

제자가 열댓명은 되야 그나마 한 가닥 하는 성자 축에 끼고 무슨 말을 하건 들어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자기 패거리를 늘리기 위해 제자를 수집(구걸)하고 다녔다. 똘똘한 제자를 거느려야 성자의 후광도 그만큼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다. 팔정도 같은 것은 부처가 만들지도 않았다. 비교적 역사화가 잘 된 예수의 예를 보면 알겠지만, 똘똘한 제자들이야 말로 성자의 값어치를 높여줄 뿐만 아니라, 영성사업의 흥망을 좌지우지하는 키 포인트가 된다.

제자 수집 사업을 열심히 하다보니 오버했다. 그의 밑에 따르는 무리가 한떼거지가 되니까 부처 및 제자 일동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떼거지를 몰고 다니면 패권을 다투는 지역제후나 동종 업종(영성 사업)에 근무하는 바바지들과 불편한 관계가 될 우려가 있으므로 그 수를 제한하기도 했다. 부처가 워낙 유명한 성자다 보니 그의 그런 궁상은 잊혀지거나 무시당했다. 내가 그 얘기를 하는 동안 황가는 슈렉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고, 아내는 내가 또 신열에 들떠 헛소리를 늘어놓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NWD theory 같은 것을 차마 설명할 수는 없었다.

한국에서는 서양이 동양을 재평가하고 있다는 류의 얘기들이 즐비했다. 동양의 정신적 문화에 대한 서구의 관심에 관한 얘기다. 까보면 의외로 보잘 것 없는 정신성 나부랑이에 스스로 흡족해 하면서 과학기술에 비딱한 태도를 보이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과학기술은 아직도 상당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동양에만 특이한 스피리튜얼리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 문화적 차이를 혼동하거나 착각했을 따름이라고 생각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서양인들에게 동양인의 정신세계는 서양인들이 죽어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개뻥을 늘어놓았다) 내가 이렇게도 정신적인 것들에 부정적인 이유는 어렸을 적부터 지나치게 영적인 삶을 살아서 일께다. 마치, 청자라면서 흔해빠진 싸구려 개밥 그릇을 박물관에 전시해 놓고 서양인들이 그 개밥그릇을 보고 감탄하는 것을 옆에서 구경하는 것과 기분이 비슷했다. 아무튼 건강한 육신과 건강한 정신 상태에서 제대로 된 회의(skeptism)가 나온다.

아내가 오기 전부터 한 달 동안 고생하고 왔으니 편히 지내라고 먹을만한 식당을 물색했다. 황가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방콕에 있는 동안 사전답사도 하고 여기 저기 알아보고 있었다. 태국에 오기 전부터 내 PDA에는 방콕의 유명한 식당 리스트와 여차하면 호텔에 들어가려고(아마리 워터게이트 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호텔 할인 바우처를 발급받을 수 있는 여행사 전화번호 따위를 저장해 두었다. 번번이 한 두 시간씩 일정이 늦어지고 호텔 대신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고, 유명 식당 대신 25밧 짜리 국수를 파는 식당이나 노상에서 음식을 해결했다. 아내는 가난한 배낭 여행자스럽게 돈 몇푼에 조잔해지는 내 궁상(?)을 미리 알고(게다가 심하게 영적이라서 욕심이 없기까지 하다) 편한 숙소나 맛있는 음식을 부러 마다했다. 일정은 수시로 변경되었고 쓸만한 레스토랑 리스트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한번쯤은 호강시켜 주고 싶었지만 그 반편에는 돈을 쳐발라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적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아내는 내가 1500밧 짜리 호텔에 들어간 다음 카드 결제액수를 보고 신경질을 낼 꺼라고 부러 짐작했다. D-flawless나 스바로프스키, fossil 매장을 쓰레기 봉투같은 짐을 질질 끌면서 빈티나게 돌아다닐 때 비교적 값싼 다이아몬드나 괜찮은 시계를 사주고 싶었다. 단가 100$ 내외면 심하게 동양적인 내 영혼이나 아내의 불가해하고 이니그마틱한 영혼이 동시에 만족하지 않을까 싶었다.

보잉 777-200 이 떴다. 보잉 777의 엔진은 ETOPS 롤스 로이스 엔진(Extended-range twin-engine operations)이다. 777은 사연 많은 비행기다. 시시한 기내식. 하지만 시시한 비행기. 다섯 시간 비행 후 오전 6:40분 인천공항에 도착. 이미그레이션을 광속으로 빠져나왔다.

아내가 먼저 도착해서 어라이벌 라운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6800원 짜리 602번 버스를 타고 신촌역에서 내렸다. 비가 추절추절 내리고 있다. 집에 돌아와 배낭을 풀어 헤치고 방콕의 수퍼에서 산 각종 '생필품들'을 정리한 다음 오후 7시까지 내리 잤다.

깨어나서 김치말이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냉장고에 드래곤 프룻과 밤이 있다. 배낭여행자는 세관에서도 검역에서도 잡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집이 불에 타 없어진 '파이트 클럽'적인 당황스러운 상황을 상상했다. 하지만 집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지금까지 쓴 태국 휴가 기록을 살펴봤다. 잘못 적어놓거나 모호한 것들이 몇몇 눈에 띄었다. 실수한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여행 기간: 13일 (6.29 ~ 7.11)
항공료: 309000원 (세금 포함)
2주간 여행 경비: 420000원. 일평균 32300원(28$).
쇼핑(여행경비와 겹침): 3000 baht -> 8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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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8시 기상. 아내가 느적거려(쉬러 왔으니까... 란다) 9시쯤 체크아웃. 내가 짐 싸는 속도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2-3분이면 숙소 사방에 널부러져 있는 짐을 '순서대로' 차곡차곡 배낭에 쑤셔넣을 수 있다. 배낭의 밸런스를 맞추는 일을 다년간 연구한 결산이다. 짐이 없기도 했다. 티셔츠 하나, 런닝 하나, 새로산 반바지, 팬티 두 장, 양말 두 켤레가 옷가지의 전부.

숙소 주인장이 카오산까지 바로 가는 여행사 버스는 없단다. 버스 터미널까지 픽업해줄테니 10분만 기다리란다. 아침을 먹기로 했다. 은근히 걱정되었다. 방콕에 오후 다섯시쯤 떨어지면 교통체증 때문에 머칫에서 방람푸까지 가는데 두 시간은 걸릴 것이다. 따라서 가능한 빨리 버스를 타는 것이 바람직했다.

종업원들이 밤이나 낮이나 묵고있는 손님을 대하면 생글생글 웃어서 괴기스럽다. 밥 먹으면서 숙소에 있던 코엘료의 eleven minutes를 잠깐 읽었다. 주인이 책이 마음에 들면 가져가란다. 도로 내려놨다. 꿈을 꾸게 한다는 코엘료의 소설은 다음에 읽자. 지금은 노트북에 있는 아즈망가를 마저 봐야 한다.

주인이 차로 데려다 주면서 TR 게스트 하우스에 식당이 생긴 다음 부터는 아침에 공짜로 주던 티가 없어졌고 대신 버스 터미널까지 프리 픽업을 투 웨이로 해준다며 가이드북에 꼭 그 내용을 업데이트해 달라고 신신당부한다.

한국인 여행자들 중 일부는 자기 숙소에 묵으면 말 한 마디 없이 앉아 있다가 그냥 간다고 한다. 여행 중 묵게 되는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은 보통 정보 수집의 1차 소스다. 그 다음은 삐끼. 그런 사람들에게 정보를 얻지 못하면 가이드북에 코박고 있어야 할텐데? 영어의 장벽이 그리 심할까? 믿기지 않는다. 그들은 과묵한 사람들이거나 나처럼 늘상 뻔한 대화가 귀찮고 지겨워서 안 하고 자력갱생하는 타잎일 것이다.

터미널에서 티켓을 끊으려니 250b란다. 올 때 2등 에어컨 버스를 200밧 준 기억이 나서 카운터에 물었더니 정부버스가 200밧, 자기들 wintour의 사설 버스는 1등 버스이고 요금이 250밧이라고 말하며 웃는다. 999 또는 99번 창구에서 판매하는 정부 버스는 가격에 비해 서비스가 떨어지는 편이라서 내심 꺼리는 편. 두 말 없이 wintour의 1등 에어컨 버스를 끊었다. 빵과 우유, 음료를 두 번쯤 나눠준다. 티켓에 붙어있는 식권으로 간단한 점심을 먹었다.

고양이 머리띠를 한 안내양은 유니폼으로 입는 치마 폭에 다리가 걸려 뒤뚱뒤뚱 펭귄처럼 걸었다. 안내양은 손님들이 점심을 먹는 동안 그들이 사용한 컵을 모아 휴게소 뒤켠에서 씻는다. 체크 포인트나 검문소를 만날 때마다 쪼르르 달려나가 사인을 받고 일지를 기록한다. 새로운 손님이 타면 자리를 안내해 준다. 손님들이 음료나 담요를 요구하면 갖다 준다. 안내군도 있다. 안내군은 노는 것 같다.


장거리 버스가 잠시 정차하는 휴게소. 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는 2년 전에 비해 눈부시게 발전했다. 눈부시게!

지루한 버스 여행 동안 노트북을 꺼내고 pda를 꺼내고 그동안의 일정을 정리했다. sony에 번들로 포함된 intellisync는 업그레이드를 안해서인지 outlook과 싱크할 때 엔트리를 자꾸 잃어버렸다. 그동안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일전에 메모리 스틱이 날아갔을 때 하드리셋을 한 후 싱크를 하니 최근 2주 간의 엔트리가 하나도 싱크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소니는 역시 소니스럽다. 하여튼 일정을 다시 입력했다.

6시간 걸린다던 버스는 방콕에 다 이르러 갑작스러운 교통체증 때문에 한 시간 가량 서행했다. 알고보니 교통 경찰 ten birds이 멀쩡한 도로를 막아놓았다. 어느 나라나 경찰 ten birds이 문제다.

그러고보니 며칠 전에 시내에서 오토바이를 단속하던 경찰을 봤다. 과속은 아니고, 보호구를 제대로 착용했고 머플러를 개조한 것도 아니고 나이도 먹을만큼 먹은 녀석을 잡아 세웠다. 면허증도 제대로 제시한다. 힐끔힐끔 쳐다봤지만 도무지 무슨 꼬투리로 멀쩡히 잘 가던 오토바이를 세웠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옆에 있던 황가가 '쯧쯔... 반바지로군' 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런건가? 잡힌 놈만 유달리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착하니 5시. 끔찍스러운 교통체증 때문에 3번 버스를 타고 짜두짝 공원까지 가는데만 1시간이 걸렸다. 방람푸까지 가려면 얼마나 시간이 더 걸릴 지 알 수 없다. 갈길이 멀다. 물론 이런 상황도 예상했다. 차야 가던말던 한가히 뵈는 아내와 달리 나는 '언제나' 대안이 있었다. 미련없이 머칫 역 앞에서 버스를 내렸다. BTS로 갈아 타고 Chit Lom으로 갔다. 여섯 정거장 밖에 안되는데 표값이 35밧이다. 서민이 이런걸 타고 다닐 수 있을까? 시민 한 사람이 평균적으로 한달에 400달러를 버는 나라에서. 벌이는 그렇지만 먹을 것이 워낙 많아 굶어죽는 거지는 절대 없다는 것이 태국의 '자랑거리'다.

방을 잡기 전에 먼저 아내에게 약속했던 대로, 야마네에 들러 김초밥과 오에코돈, 짬뽕을 먹고 오이시에서 80밧 짜리 초밥 세트와 35밧 짜리 날치알이 들은 삼각김밥을 샀다. 교통체증이 심화되기 전에 월텟 앞에서 2번 버스를 탔다. 복권청에서 내려 볼수록 정 떨어지게 생긴 카오산 로드를 횡단해 사원 뒷편 길로 이동. 러브호텔로 지역 주민들에게 명망높은 쑥바삿 게스트하우스에 투숙. 400밧, double, with bath, a/c, tv.

쑥바삿 게스트 하우스 바로 옆에 붙어있는 인터넷 가게에서 한 시간에 35밧 짜리 인터넷을 했다. 어제, 그제 쓴 로그를 올렸다.

오후 10시. 땅에 복수라도 하듯이 미친듯이 비가 내린다. 우산을 쓰고 세븐일레븐에 들러 맥주와 오징어, 물을 사왔다. 장대처럼 쏟아지는 비를 피해 사방팔방에서 바퀴벌레처럼 튀어나와 우왕좌왕 거리를 헤메는 여행자들이 보였다. 나는 '홀로' 우산을 쓴 채 그 모양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발바닥이 빗물에 잠긴다. 반바지 섶이 젖어든다. 우산을 뚫고 들어온 빗방울이 물안개를 이룬다. 비맞은 생쥐들이 처마 밑에서 벌벌 떨고 있다. 내 우산과 나를 쳐다본다. 거리는 텅 비었다. 비는 그칠 줄 몰랐다. 숙소로 돌아와 아내와 건배.

빨래하고 샤워했다. 11시가 넘었다.

7/10

9시 기상. 바깥의 습기는 60%가 넘지만 통유리로 막아놓은 방에서 에어컨을 밤새 틀어 놓으니 방이 몹시 건조하다. 아내가 홍익인간에 들러 아는 척 하고 싶어하는 눈치다. 아내가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만남의 광장을 싫어한다면 나는 홍익인간을 꺼렸다. 별 이유는 없다. 만나는 장기여행자마다 만남의 광장이나 홍익인간 얘기를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홍익인간은... 특별히 아는 사람이 아닌 한 노골적인 푸대접 때문인 듯. 장기여행자들 대개가 아는 사람이 많아서 한 사람 들어오면 떼거지로 우르르 몰려들어 좁은 일층 식당을 점령한 채 나갈 생각을 안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어쨌든 일 없으면 안 가고 안에서 개기지 않는 것이 타지에서 고생하는 교민을 돕는 길인 듯 싶다.

아내가 벌써 여러 번 한국에 통화를 시도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전화카드를 구입하란다. 아내더러 인터넷 까페에서 인터넷으로 전화하라니 자주 끊긴다며 전화를 찾아 이리저리 카오산을 돌아다녔다. 걷다가 지칠 무렵 분당 15밧 하는 인터넷 전화를 걸었다. 통화 품질이 깨끗하고 전화도 잘 걸렸다. 15밧이면 그리 비싼 가격도 아니다.

땅화생 백화점 가는 길에 있는 국수집에서 25밧 짜리 꿰이띠오 남을 먹었다. 파쑤멘 거리에서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 위만맥 맨션으로 향했다. 47밧. 50밧을 내고 아내는 3밧을 거슬러 주지 않는다고 기사와 실갱이를 벌였다. 우수리는 보통 기사에게 그냥 주는 것이고 태국인들도 그렇게 한다고 말해줬다. 방콕 시내의 택시가 모두 미터로 바뀐 다음 sur-(over-) charge는 없어졌다. 방콕에 무수히 들렀지만 아내는 그런 세세한 것들을 잘 몰랐다. 카오산의 어딘가 숙소에 짱박힌 채 어디 돌아다닐 생각도 안 하고 식당과 숙소 사이를 전전하며 아는 사람들 만나는 장소 정도로 알고 있으니까 관광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아내와 여행할 때 한번도 택시를 탄 적이 없다. 오늘 그 사실을 알았다. 택시란 3인 이상의 사람들이 모였을 때 그들이 버스에 투자하는 돈을 다 합친 가격의 3배 이내일 때라야 내키진 않지만 탈만 하다고 본다. 위만맥 멘션까지 가는 버스비가 4밧이니까 둘이 합치면 8밧, 택시비가 50밧이니 무려 6배나 되는 가격이다. 50밧이면 쌀국수(25) 두 그릇 또는 꼬치(10) 다섯 개, 또는 계란(5)을 얹은 팟타이(15) 한 접시 먹고 고명을 얹은 밥 한 접시(20) 먹고 수박 쥬스 한 봉지(15) 마실 돈이다.

위만맥 멘션의 입장료는 100밧, 뭐 그리 대단한 볼꺼리가 있다고 이다지도 비쌀까 싶었는데 12군데의 전시장을 구경할 수 있었다. 어? 이거 의외로 보람차네? 열한시 부터 두 시까지 여기저기 둘러 보았다. Royal Carriage Building, Suan Hong Residential hall, HRH(his royal highness) Princess Orathai Thep Kanya residential hall, HRH Princess Arunwadi Residential Hall, HRH princess Puang Soi Sa-ang Residential Hall 등 특히 공주들 방을 집중적으로 방문했다. 공주들은 하나같이 못 생겼다. 현재의 국왕이 재즈에 미쳐 있다는 얘긴 오래 전에 들은 바 있고, 그가 찍은 그저 그런 사진들도 구경할 수 있었다.


Suan Hong Residential hall


HRH princess Puang Soi Sa-ang Residential Hall. 공주집. 인형, 오래된 시계들.

오늘의 주요 관람꺼리인 Vimanmek mansion을 구경했다. 라마 5세가 기거하던 곳인데 들어가기 전에 짐 맡기는 곳에서 20밧을 삥 뜯겼다. 다른 곳은 돈 안내고 짐을 무료로 보관해 주는데 유독 비만맥 맨션에서만 돈을 받으니 확실히 이건 삥이 맞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짐을 다른 곳에 보관해 두는 건데! 10밧 짜리 동전 두개를 바꿔 코인락커에 짐을 넣은 후 잠그려는데 안 잠긴다. 직원을 불러 안 잠긴다고 말하니 동전을 넣지 않은 것 아니냐, 다른 동전을 넣은 것 아니냐며 되레 의심한다. 시간을 질질 끌면서 해결할 생각을 않길래 버럭 화를 냈다. 무슨 도둑놈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더니 우리 짐을 무료로 맡길 수 있는 곳에 맡기는 것이 아닌가. 나쁜...


티크목으로 만든 건물 중 세상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인 Vimanmek Mansion을 방문한 중학생들. 300개의 창문, 200개의 문.

1시 15분 영문 안내를 받으며 맨션을 돌아다녔다. 안내원이 한쪽 구석을 가르키며 여기는 2차대전 중 일본이 폭탄을 떨구어 파손된 부분입니다 라고 말하니 어떤 노인네가 'fuck japan'이라고 중얼거렸다. 안내원: 여기 일본사람 없지요?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맞아요 fuck japan이에요. 라고 말한다. 중국에서 보내온 썩 괜찮은 청자가 온전한 상태로 보전되어 있었다. 눈여겨 보면 볼만한 것들이 꽤 많지만 후다닥 해치우려는지 머물 시간을 안 준다. 설명을 들으면서 다니려니 영 지겨웠다. 위만맥 맨션은 라마 5세가 5년만 살고 주욱 잊혀져 있다가 현재 국왕의 왕비가 82년에 리노베이션해서 박물관으로 열어놓은 것.

두 개의 운하에는 똥물이 흐르고 있지만 두씻 정원은 시원한 열대를 보여줬다. 맨션에서 창밖으로 바라보는 풍경도 그럴듯 했다. 그 기분에 왕 노릇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00밧 내고 뙤약볕 아래서 여기저기 땀을 펑펑 흘리며 구경하는 왕궁 보다는 두씻 정원과 맨션이 훨씬 나았다. 왕궁은 일반에 공개된 장소가 별로 없어 사실상 볼꺼리가 없는 곳이다.

오후 두 시부터 위만맥 맨션 옆 스테이지에서 타이 전통 춤 공연을 했다. 생각보다 별 볼 일 없다. 여기저기서 한 부분씩 훌쩍 떼어내 맥락없는 내용을, 약간 솜씨가 떨어지는 것 같은 춤꾼들이 공연한다. 이들 공연중 볼만한 것은 라마야나인데 오래되어서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다섯이나 여섯 스테이지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아내에게는 라마야나 얘기를 몇 차례 해줬지만 관심없어 보였다. 라마는 나쁜 놈이라고 몇 번쯤 말했던 것 같다. 고생스럽게 구한 아내가 악마와 놀아났다고 그녀를 버린 놈이다. 그녀가 불 속에 뛰어들어 자신의 순결을 증명했지만 라마는 끝끝내 아내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인도놈들은 마음에 안드는 아내를 태워 죽이거나 자발적으로 뛰어들어 열녀가 되는 풍습이 아직도 남아 있다. 불에 태웠는데도 타 죽지 않고 살아 남아야 '정품 인증' 마누라다. 옛날옛날에 자기 마누라를 마녀로 고발해 태워 죽인 유럽인들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몹시 궁금해지는군.


라마와 시타. 기쁨의 춤.


그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보낸 나날(라마야나의 앞부분? 또는 시타를 구한 뒷부분?). 나도 내가 왜, 어떻게, 어째서 이들의 춤이 라마야나의 한 장면 임을 추측도 아니고 확신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재주부리는 얘는 하누만 같다.


두씻 정원의 한가운데 쯤 있는 거대한 나무. 매력적.

abhisek dusit throne hall을 구경했다. 대관식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안을 꽉 채운 것은 공예품들 뿐이었다. 하지만 수공예품의 손기술 수준은 비교적 높은 편. 저런 물건을 시장통에서 구할 수는 없겠지 싶다. 그런데, 이란의 보물들을 구경한 다음 부터는 왠간한 보석들은 시시해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어 건축 양식으로부터 확연한 영향을 받은 것 같은 Abhisek Dusit throne hall의 입구.

어느 건물에 들어가나 건물을 지키는 사람들이 졸졸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는지, 물건을 훔쳐가는지 감시했다. 사진은 기회가 되면 찍었다. 반도 채 보지 못했지만 오후 3시가 넘었고 배도 고프고 지쳐서 궁전 옆에 임시로 가설한 건물에 들어선 오이시에서 초밥(65)과 샐러드(40)를 사 먹고 방람푸로 돌아가는 택시(41)를 탔다.

꼬치를 먹고 싶은데 아직 때가 일러 꼬치구이가 노변에 보이지 않아 계란을 넣은 팟타이(20; 비싸네?)를 사 먹고 구아바(10)과 수박(10)을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구아바를 우습게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별 맛이 없다는 이유로), 비타민의 황제, 열대과일 중 가격 대 성능비가 가장 뛰어난 과일이다. 구아바 3개는 지각있는 여성의 하루 두 끼 식사로 더 바랄 나위가 없을 정도다. 태국 여성들의 건강한 피부는 구아바가 책임지고 있다. 구아바는 그렇고,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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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9시에 일어났다. 죽과 쌀국수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썽태우를 타고(10b) 므앙까오(수코타이 역사공원)로 갔다. 자전거를 빌리고(하루 20b) 아내를 뒷자석에 태워 공원 입구로 향했다.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입장권(150b)을 샀다. 그리고 역사공원을 동에서 서로 관통해 성벽을 지나 Wat Si Thone 까지 달렸다. 별 것 없다.

자전거 체인이 빠져 애를 먹었다. 어느 도시에서건 자전거 탈 때 마다 한 번씩은 체인이 빠졌다. 지나가던 서양 소년이 체인을 다시 달도록 도와줬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소들이 풀을 뜯어먹는 한가로운 농촌을 유람했다. 150밧이나 주고 왔으니 뭔가 봐야겠기에 다시 역사공원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더 이상 살이 안 탈 꺼라고 생각했는데 살이 조금씩 더 타들어갔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왠 태국인이 한국인 여성을 데리고 돌아다니는 줄 알았단다. (뭐야? 부러운거야?) 수코타이 역사공원이 원래 생긴 모양이 그런 것인지 아니면 말레이지아의 타이핑처럼 노동자들을 동원해 대단위 인공 호수를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얕은 인공호수는 대량의 물을 증발시키면서 다소간 더위를 식혀주었다. 돌은 여전히 뜨겁다. 시원하게 생긴 나무그늘에 앉아 워터멜론 쥬스를 쪽쪽 빨아먹으며 누워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자전거를 타지 않고 뙤약볕 아래 걸어다니면서 유적지를 관람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종종 그런 사람들이 보였다. 가엾다. 땀흘리며 빌빌 거리는 가엾음이다.

람캉행 대왕의 동상을 얼핏 보고 지나갔다. 더워서 자세히 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얼굴은 봐줘야 할 것 같았다. 태국어를 만든 왕이다. 동서로 엄청나게 영토를 넓힌 알렉산더 더 그레이트 같은 놈팽이는 별로 대단한 인간 취급을 안 하지만 글자를 만든 선행을 한 왕이라면야...

오후 1시쯤 돌아가기로 했다. 입구의 가게에서 얼어 붙은 수박쥬스를 급히 마시다가 골이 띵하더니 줄곳 두통이 달라 붙었다. 숙소에 돌아가기 전에 인터넷 가게에 들렀다. 두 가게 모두 windows 98이라 메모리 카드 리더의 usb storage 가 잡히지 않았다. 캐논의 생각없는 엔지니어들은 WIA(windows image acqusition) 드라이버와 twain만을 지원했다. removable drive를 지원하지 않아 메모리카드에 텍스트 파일이나 실행 파일 따위에 접근할 수 없다. 그래서 수 년 전에 싼 맛(9900원)에 구매한 메모리 카드 리더기를 이번 여행에 들고 왔다. 하여튼 windows 98 용의 usbstor.inf 파일만 있으면 쉽사리 해결될 문제인데 아쉽게 되었다. 다른 곳에 가보니 usb 포트가 없다. usb 포트가 있는 곳을 부러 알려준다며 방금 나온 가게를 손짓했다. 아내는 메신저질을 하면서 재밌는 방식을 사용했다. 메신저에서 한글 입력이 안 되니까 내 블로그 페이지를 열어 놓고 거기 코멘트의 텍스트 창에 한글로 문장을 입력한 다음 메신저 대화창에 컷앤 페이스트 했다. 그런 방법도 있구나 싶다.

점심 먹으러 시장통으로 갔다. 그린 커리와 밥을 시켰는데 평범한 덮밥이 나왔다. 어째 커리와 밥을 합쳐 20 밧 밖에 안 하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다. 양이 안 찬다. 가판에서 태국식 팬케익을 사 먹었다. 7밧이다. 이 동네 사람들이 참 착하고 순한 것 같다. 관광객 상대로 도무지 사기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근처 사원(wat rajthanee)에서 원숭이들에게 먹이를 주고 중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쳐다보다가 두통이 심해서 숙소로 돌아와 타이레놀을 삼키고 잤다.

동네를 둘러봐도 마땅히 식사할 만한 곳이 없어 숙소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타이 커리와 밥(60b), 야채볶음과 밥(60b), 수박쥬스(20b), 싱하(35b)을 주문했다. 레드 커리가 나왔다. 커리(깽인데, 까리라고도 하는 것 같다)는 갖가지 향신료와 야채, 코코넛 밀크를 넣고 끓인 것이다. 태국의 대표적인 음식인 똠얌꿍보다 어떤 면에서는 맛있고 여러 향신료 때문에 시큼하면서도 담백하고 또한 깊고 은근한 매운맛이 난다 -- 태국 음식은 본질적으로 맵다. 깽이 한국인 입맛에 잘 맞을 꺼라고 확신하지만 대부분 여행자들은 볶음밥과 쌀국수만 죽어라고 먹었다. 음식점에서 볼 수 있는 깽의 징그러운 첫인상 때문인지 잘 안 먹는 것 같다. 편의상 색깔로 나누어 레드, 그린, 옐로우 커리가 있고 해산물이나 닭고기, 소고기 따위를 넣는다. 벌써 두끼를 먹은 숙소의 음식 솜씨가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다. 추천해도 되겠다.

주인장이 밥 먹는 동안 tv를 틀어주었다. YTN이 나와서 화들짝 놀랐다. 주 5일 근무제에 관한 토론 방송이 나오는 중이다. 뭐 다른 것은 모르겠고 일한 만큼만 임금을 지급했으면 좋겠다.

맥주 한 잔 하면서 이 글을 작성중. 대체 왜 이렇게 시시콜콜한 여행기를 작성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주인장이 게스트북을 들고와 82년생 아가씨가 혼자 와서 외로워 하고 있다며 방 번호를 가르쳐준다. 맥주 다 마실 때까지 안 오면 방으로 들어갈란다.

누군가 방문을 발로 걷어차는 소리가 들려 밖을 내다보니 아까 그 한국인 아가씨다. 방에 놀러오라고 했다. 여행 처음 하고 한 달 일정이고 치앙라이, 치앙마이, 치앙센 등을 다녀왔고 북쪽에서 방콕까지 슬슬 내려가는 중이고 18명이나 되는 엄청난 떼거지와 함께 트래킹을 했고(그중 15명이 한국인) 캄보디아와 푸켓 등에 갈 예정이란다. 오늘이 생일이라 케잌을 들고 왔는데 잘 안 먹어서 내가 세 조각 중 두 조각을 먹었다. 아내는 남은 과일을 다 줬다. 딱히 더 할 말이 없다. 그러고보니 우리 부부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여행중 눈이 맞아 사랑의 행각을 벌이는 커플이라고 알아두면 될 듯 싶다.

아내가 pda에 있는 여자들 이름을 가지고 트집을 잡았다. 옛 여자친구 전화번호를 보더니 연락할 필요 없으니 지워버리겠단다. 놔두라고 했다. pda에는 6년 동안의 지난 기록이 있다. 언제 누구를 만났고 어디를 여행했으며 누구와 술을 마셨나 따위. 최근 1년 동안은 거의 아무 것도 적지 않았다. 결혼, 신혼여행, 이번 여행 기록 정도 밖에. 지난 1년은 지지난 1년에 비해 사건이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을 흔히 생활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생활, 죽을 때까지 하게 될 일.

일찍 잔다. 더 볼 것이 없고 심심해서 내일 아침 일찍 방콕에 내려가 식도락이나 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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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 Si Thone. 스리랑카에서 불교를 공부한 고승이 남쪽 망고숲 옆의 Si Thone에 살았다는 말이 왓 파마무앙에 적혀 있다. 남은 것은 무의미한 폐허 뿐.



호수 공원.


눈 감고 걷는다.


갖가지 '양식'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700년 전의 석조 유적.


비정상적인 손가락 길이. 비정상적인 귀의 길이. 머리에 난 뿔 등등,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고, 거대로봇류 처럼 생겼다. 악당에 대한 자비심으로 그들을 지옥에 보내주는 마징가 제트같은 거대 로봇.


특이하게 생긴 입술. 열반의 끝없는 기쁨 때문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반쯤 감은 눈으로 반은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고 그 반은 사바세계를 보고 있다. 늘어진 귀로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으며... 부처 머리에 난 뿔은 깨달은 자만이 누리는 크나큰 기쁨, 완전히 열린 차크라를... 맞나? 열반이란 맛있는 음식을 먹고 흡족한 나머지 눈을 게슴츠레 감은 채 입가에 미소를 짓는 상태와 비슷해 뵌다.


피사의 사탑? 동남아 열대 문명의 건축은 왠일인지 다 이 모양이다.


부처가 즐거워 보인다. 뭐 당연한 일이겠지만. 유적지에는 거대로봇이 많았다. 부처들끼리 벌떡 일어나 한판 붙어 폐허가 된 것은 아닐까. 슈로대(슈퍼로봇 대전)


호박


Wat Mahathat. 스님 한 분이 단체사진을 찍고 짐을 챙겨 나가는 중.


제단에서 향을 피우고 절 했다.


폐허를 배경으로 한 골프 코스는 없는 것일까? 부처님 머리에 맞을 지도 모르겠군.


금색 매니큐어, 푸른 눈물. 지긋이 감은 눈.


매부리코, 달관.


악마들을 무찌르러 금방이라도 출격할 것만 같은... 손 길이.


SD 몽크


어딘가 모르게 크메르 양식을 생각나게 하는... 벽돌을 굽지 않아서인지 습기를 먹어 눌려 탑들은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일쑤였다. 그나마 반반해 보이는 것들은 '완벽하게' 시멘트로 복구한 것.



등 돌린 부처


등과 힙 라인의 저 섹시함이란...


부처의 팔 다리에는 근육이 없다. 그가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


Wat Mahathat의 스투파.


유적 공원에서 Wat Mahathat만 봐도 전체 유적지의 절반은 본 것 같다.


표정만 봐도 흐뭇한걸.


반석을 받치고 있는 도깨비


반석 밑에 거꾸로 매달린 도마뱀


해골을 든 인간?


골프 코스로 정말... 딱이다.


Wat Sasi.


우유 먹다가 흘렸나?


필라가 제각각.


새집. 가짜 새까지..


구운 거위 모양의 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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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쇼핑하러 간다길래 싸얌 스퀘어에서 황가와 헤어졌다. 앞에 보이는 건물에 커다랗게 적혀있는 MBK가 무슨 뜻일까. 선경을 SK라고 하고, 럭키 골드스타를 LG라고 하듯이 아마도 마분콩을 MBK라고 하다가, 마분콩이란 이름은 SK나 LG처럼 자연소멸할 것 같다. 더워서 움직이기 귀찮아 MBK에서 oishi에 들러 품질에 비해 심하게 비싼 뎀뿌라 라멘(89)을 먹었다. 오늘은 이상하게 일식이 먹고 싶다.

태국 전역은 바겐세일 중이다. 의류 매장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690밧 하는 반바지를 50% 세일가인 345밧에 샀다. 디자인은 꽝이지만 품질은 만족스럽다. 닷새째 수영복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짓을 이제 그만 하게 된 것이다.

MBK의 SF Cinema City에서 스파이더맨 2(100b)를 봤다. 그저 더위에 바깥에 나가기 싫다. 그래피컬한 스파이더맨의 움직임이 재미있고 동전 빨래방에서 유니폼을 빠는 '영웅'의 일상사가 재미있다. 여하튼 영화의 분위기를 망치고 '영웅'이란 것들을 궁상 떨게 만드는 것들은 항상 여성이다. 그놈에 궁상은 끝이 없다.


불 지르고 왼쪽으로 튀어라?


석쇠에 남녀를 가지런히 올려 구운 후 오른쪽으로 서빙

저녁은 뭘 먹을까. 일식집에서 초밥을 먹자고 결심을 굳히고 Big C 4층의 Yamane에서 오코노미야키(59b)와 마키모노모리(130b)을 시켜 먹었다. 마요네즈를 잔뜩 처바른 오코노미야키는 영 꽝이고 김초밥 맛은 평범했지만 간만에 찰밥을 먹으니 위장이 즐겁다. 그러나 잘 만든 인디카종 쌀밥 맛과 향기좋고 단맛이 강한 자포니카 쌀밥의 맛에 굳이 우열을 가릴 수 있을까? 문화 때문이지. 중국의 일부 지역, 한국, 일본만이 자포니카 종을 소비하는 별종들이다. 태국식 찰밥의 이름이 카우 니여우란 것이 갑자기 생각났고 라오스와 태국 북부에서도 먹었다. 손가락으로 돌돌 뭉쳐 먹는 찰밥의 맛이란...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월텟 앞에서 미어터지는 2번 버스를 타고 숙소에 도착하니 저녁 9시다. 일반 시내버스 요금은 0.5밧씩 올라 각각 4밧(주야간), 5.5밧(심야)씩 했다. 에어컨 버스의 가격은 올랐다가 내렸다. 황가는 쇼핑한다고 젓가락 몇 개를 사고 7시에 돌아 왔는데 내가 방 열쇠를 가지고 있어 샤워를 못하고 있었다.

숙소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낄낄거리면서 어제 하다만 여행 얘기를 계속 했다. 젊은이들 셋이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말레이지아, 싱가폴을 25일 동안 주파한다는 말에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의문스러웠다. 말레이지아에서의 정글 트래킹과 산악 트래킹은 사나이의 피를 끓어 오르게 하지만, 말레이지아를 루트에서 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충고하면서 뒤가 캥겨 멈칫멈칫 했다. 여행을 처음 하는 사람들이 나같은 사람들 몇 명에 둘러 싸여 미주알 고주알 경쟁적으로 자기가 아는 만큼만 늘어놓는 '경험담'을 들어 좋을 것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 여행일진대 가이드북에 나오는 도시 중에서도 특히 그곳을 지나간 경험이 있어 어디를 가고 어디를 빼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다 보면 사서 고생하는 여행의 '진미'를 제대로 맛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경험자의 그런 말을 듣고 여행을 하다 보면 늘상 뻔한 코스 밖에 안 나온다. 25일 일정 중 거의 10일을 차 안에서 보내게 되는 가엾은 상황이라도 애당초 계획했던 일정대로 해볼만한 가치는 있다. 낯선 도시에서 헤메고, 졸다가 엉뚱한 장소에서 내리고, 연속적인 실패로 좌절하고, 피치못할 사고로 일정을 드라마틱하게 변경하게 될 때부터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된다. 심하게 말하자면 그렇지 못한 나머지는 관광과 다를 것이 없다고 봤다. 모험심이 별로 없는 한국인 여행자들에게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다. 한국문학에서 상상력을 기대하지 않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해봐야 하지 않을까, 남들 안가는 별난 도시의 시시함과 진부함을 진중히 견디며 문명의 결절점인 도시의 내재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 말이야 그럴듯 하지만 난 피곤해서 그렇게 안 한다.

오전 0시, 아내를 마중나갈 시각. 동대문에서 만나기로 했다. 여행객 말을 들어보니 동대문은 오후 10시 30분쯤 문을 닫는단다. 어쩌다 그렇게 된걸까. 카오산이 변하긴 했지만 오전 두 시까지 안 변하는 것 하나 쯤은 남아 있었으면 했는데. 그뿐만 아니라 사원 옆길의 장황한 노상 주점도 사라졌다. 길거리에서 칼부림하고 웩웩 거리며 지나가는 취객들이 못마땅한 나머지 사원에서 철거를 요구했을 지도 모른다. 동대문 역시 취객들의 소란이 귀찮아서 일찌감치 건전하게 문을 닫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동대문이 일찍 문을 닫아 하는 수 없이 옆 술집에 앉아 땀냄새, 몸냄새 풀풀 풍기는 서양인들 틈에 끼어 한가하게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미 술을 많이 마신 듯 혀가 꼬부라졌다. 서양인들이 불교 얘기를 하는 것은 언제 들어도 신기했다.

황가와 싱하 한 병(90b) 시켜놓고 히주그레 앉아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나타나 자리에 앉았다. 어? 새벽 2시쯤에 도착할 줄 알았는데? 열시 좀 넘어 도착했는데 승객이 거의 없어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하자마자 짐도 바로 찾을 수 있었고 그대로 택시 잡고(200b) 카오산에 왔단다. 그 좋은 59번 버스 놔두고 값비싼 택시는 왜 혼자 타는지, 게다가 150밧에 올 수 있는데... 등등 조잔하게 궁시렁거렸다.

황가에게 줄 선물로 석류즙을 인도에서 사왔다. 아침 방송에서 본 적이 있다. 여성 성인병 예방에 도움이 되고, 에스트로겐과 유사하다던지 그것을 보충해 줄 수 있는 수단이라고 떠들어 댔다. 아침 방송의 주부들을 상대로 하는 건강 코너는 순 구라 같아 보였다. 궁금해서 여기저기 뒤져보니 석류즙이 여성 성인병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입증된 적이 없다. 희안한 민간 전승 대로라면 지네나 고양이 먹고 허리가 튼실해졌다는 말도 주부들에게는 먹혀 들어간다는 뜻이겠지. 이 나라의 주부'님'들은 과학적 사고방식과 무관한 인생을 살아왔을 지도 모른다.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궁금하지 않은건가?

아내에게 쌀국수를 먹이고 시원한 수박 쥬스를 사주고(그래, 이 맛이야! 라고 감탄한다) 숙소로 돌아오니 아까 화기애애하게 떠들던 무리는 사라졌다. 방 안에서 잡담을 늘어놓다가 야심한데 떠든다고 빈축을 사고 오전 두 시쯤 잠들었다. 팟뽕 갔다 돌아온 옆방 아가씨들이 그때쯤 방에 돌아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났다. 방과 방 사이가 베니어 판이라 온갖 소리가 다 전도되니까 아내가 왜 이런 방을 잡았냐고 궁시렁 거렸다. 필리핀에서의 '허니문' 첫날밤도 베니어판으로 지은 방에서 잤는데 새삼스럽게 뭘... 에어컨 펑펑 잘 나오고 사위가 조용하고 창문과 발코니까지 달린 방을 카오산에서 300밧에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하지 않던가?

7/7

황가는 아침 일찍 공항으로 떠났다. 문을 두들기지 않았고, 일어나기에는 좀 피곤했다. 황가 생각을 하면 미안한 맘 뿐이다. 일주일 내내 나같은 놈하고 같이 다니느라 된통 걸어다니기만 했다. 택시는 딱 한 번 탔는데, 아가씨들 둘이 있어서 일행이 넷이라 쉐어하니 두당 10밧 정도 밖에 안 나올 것 같아 눈 딱 감고 잡았다. 개중 하일라이트는 거의 40도에 육박하는 숨 막히는 더위에서 길이 1.6km짜리 빠통 비치를 네 번 왕복한 후 저녁에 다시 세번 왕복한 다음 몇 시간 못자고 아침에 일어나 섬에 들어가 한 시간 반을 길을 잃고 헤메다가 간신히 숙소를 잡고 퍼진 일이다. 밥도 안 먹이고 온 사방으로 걸어다녔다. 건강한 육신에 건강한 회의가 깃든다. 어쨌건 미안한 맘 뿐이라(히히 웃음이 나왔다) 한국에 돌아가면 삼겹살에 소주 한잔 사야겠다.

아홉시 조금 넘어 일어나니 할 일이 없다. 그저 방콕을 탈출해야 만사가 지겨워지는 이 망할 방콕병에서 벗어날 것만 같아 어젯밤 그렇게 좋다는 수코타이로 가기로 했다. 가이드북에는 오전 중에 차편이 하나 정도 나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가이드북을 믿지 않았다.

숙소에서 나오는 길에 아내가 이틀 전에 숙소에서 나와 함께 얘기하던 아저씨를 아는 척 한다. 3년 전 베트남에서 만났단다. 베트남?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사람에 대한 아내의 기억력은 종종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는 하노이에서 아내에게 고추장을 줬고 아내는 라오스의 방비엥에서 나를 만났다. 방비엥에서 전날 술을 먹고 완전히 뻗어있던 나를 깨워 시장에서 사온 찰밥에 그가 준 고추장을 비벼 줬다. 꿀맛이었다. 우리 셋은 고추장으로 연달아 맺어진 인연인 셈이다. 고추장에 비빈 밥이 영 맛이 없었다면 한국에서 아내를 다시 안 만났을 것이고 혼인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가 준 맛있는 고추장 때문이다. 그는 오늘 라오스에 간단다. 길지 않은 대화 였지만 이런 사정이 꽤 재미있었다.

버스터미널에서 콘송 머칫 마이(북부 터미널, 이런 단어가 갑자기 메모리에서 팝업되는 것도 놀랍다. 대체 이런 기억들은 어디 숨어있다가 나타나는 것일까) 행 버스 번호를 물었다. 3번 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도착. 28번인지 29번 창구에서 수코타이 행 2등 에어컨 버스표를 샀다. 7시간 30분이 걸린다. 터미널에 가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왔는데 버스표가 있었다. 수코타이가 안되면 아유타야나 깐차나부리, 또는 롭부리, 정 안 되면 치앙마이나 치앙라이로 갈 생각이었다. 이런 '낙천적인'(될대로 되라) 사고방식은 여행이 내게 가져다 준 부작용이자, 덧없는 즐거움이다. 간단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차에 올랐다.

오후 열두시 출발. 태국어로 화장실이 헝남이란 것마저 떠올랐다. 급하면 뭔가 머리속에서 하나씩 떠올랐다. 정말 신묘하다. 아내와 나는 버스 뒷좌석에 불량(?) 청소년처럼 편한 자세로 널부러져 쉴새없이 떠들었다. 오후 7시 30분 수코타이 터미널 도착.

대충 협상하고 좀 많이 준다 싶은 기분으로 쌈러를 타고 20밧에 숙소로 찍어준 TR 게스트하우스까지 갔다. 이 사람 저 사람이 깐차나부리나 아유타야를 말리면서까지 추천한 도시에다가 숙소까지 꼭 거기 가보라고 찍어 주던데, 생글생글 웃는 아가씨나 체크인이 끝나기 무섭게 지도 한 장 펼쳐놓고 수코타이 시내와 유적지를 일일이 설명하는 친절한 주인 아저씨 덕택에 인상이 좋다. 방도 널찍하고 그럭저럭 훌륭했다. 전화하면 버스 터미널에서 픽업까지 해준다던데... 그 점을 잊고 있었다.

짐을 풀고 곧장 밥 먹으러 나갔다. 호텔 식당에 들러 79밧 짜리 부페 수끼 2인분과 싱하 큰 병(65b)을 시켜 먹었다. 재료가 많지 않아 약간 맛이 떨어지는 편이지만 아내는 오랫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어서인지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참 잘 먹는다. 비가 살살 와서 우산을 쓰고 과일시장에 들러 sallaca(0.5kg, 15b)와 람부탄(1kg, 40b)을 샀다. 망고스틴은 보이지 않았다. 부직포같은 껍데기를 벗기면 시큼한 알맹이가 들어있는 살랏(sallaca)은 이번 여행에서 처음 먹어보는 열대과일이다.

사람들 표정이 순하고, 도시가 작아 마음에 든다. 오랫만에 유적지를 볼 생각을 하니 두근거리기도 했다. 오래전에 여행중 태국 역사를 공부할 때 얼핏 기억하고 있는 수코타이는 아마도 태국의 최초 왕조였던 것 같다. 태국에 와서 유적지를 구경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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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에서

여행기/Thailand 2004. 7. 6. 16:26
7/5

그래서는 안되는데, 일찍 일어났다. 배편은 오후 1:30에 있고 일어난 시각은 7:00am이었다. 남은 시간 동안 노트북 가지고 장난치다가 클리에에 꽂아두었던 렉사 128MB 메모리 스틱을 망가뜨렸다. 포맷을 해야겠는데 인식이 안되니 똥줄이 탔다. 포기했다. 방콕 가서 고치자. 소니는 역시 소니스럽다.

피피섬의 세븐 일레븐 앞에서 만난 친구는 가슴에 한자 세 글자를 문신으로 새겨 놓았다. 그게 무슨 글자인지 아느냐고 물어보니 놀랍게도 서양인스럽지 않게 선, 의, 애를 제대로 설명한다. 뭐하는 친구일까 의문은 생기지 않았다. 한눈에 태국에서 굴러먹은 히피... 라고 나왔다.

배에 올랐다. 그는 나하고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배 꼭대기 '선텐하는 서양인들'을 교묘하게 피한 좋은 자리, 말하자면, 여행 노하우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상석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우리는 뜬금없이 브라흐마에 관해 얘기했다. 브라흐마는 힌두교에서 가장 인기없는(을) 신인데 우주를 만든 것 외에 그가 딱히 한 일이 없다. 우주를 만든 행위조차 별로 감동적이거나 영웅적이지 않았다. 한무더기의 쓰레기를 생산한 것이 기뻐해야 할 일이라도 되나? 히피가 내 의견에 공감해줘서 기뻤다. 그는 개구리같은 자세로 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눈알을 이리저리 히번뜩이고 있었다.

'다빈치 코드' 상권을 다 읽었다. 베스트셀러용으로 제작한 소설인듯 싶은데 내용이 3류스럽고 번역은 꽤나 버벅거렸는데, 우스꽝스럽긴 했지만 비슷한 역자들을 생각해보니 비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모르겠으면 차라리 영어 병기를 해 놔라.

크라비의 선착장은 기억하고 있던 그 모습이 아니다. 선착장이 시 외곽에 위치해 있는데 그 위치가 어디인지 몰라 난감하다. 배에서 뒤늦게 나오는 바람에 썽태우는 이미 떠난 상태고 배에서 내린 찌꺼지들을 어딘가로 날라주고 왕창 뜯어먹을 심산으로 보이는 몇 안되는 삐끼들이 가격 담합을 끝낸 후 선택의 여지를 없애버렸다. 크라비 타운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아니, 여기가 대체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다. 어... 여기가 어딜까. 택시에 30밧을 주면서 내심 속이 쓰렸지만 크라비타운으로 들어섰다.

300밧 짜리 여행자 버스를 거절한 채 버스 터미널에서 에어컨 2등 버스를 황가에게 경험시켜 주자고 생각하고 있었다. 에어컨 2등 버스는 일반버스보다 한 등급 위로, 고장이 극히 적고 길 한 가운데서 연료가 떨어져 세워야 하는 일반버스처럼 차가 퍼지거나 뒤에서 밀어야 할 일이 없어 보이는 고급 버스다. 여행사에서 예약하면 300밧에 카오산까지 갈 수 있음에도, 380여밧을 주고 게다가 방콕의 남부 터미널에서 시내 버스를 타야 카오산에 도착하는 귀찮은 코스를 선택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그리고 남는 시간 동안 별로 관광지스럽지 않은 순박함이 아직은 조금쯤 남아있는 크라비를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내 뜻과는 상관없이 타운의 어떤 인터넷 까페에서 주인장에게 마우스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컴퓨터를 손봐 주었다. 그래서 out of time. 썽태우를 타고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나서야 황가가 내일모레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말하자면 크라비에 오래전부터 하루쯤은 묵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푸켓이나 파타야와는 달리 이곳에는 그나마 순진한 사람들이 살았고 인사라도 할라치면 수줍어서 어쩔 줄 모르는 여자애들도 있었다. 그 재미에 여행하는데 말이다.

섬에 있는 동안 섬 개미들이 내 몸을 물어뜯어 알러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개미산이 침투해 부풀어 오른 조그만 몽우리가 서서히 몸 전체로 퍼져 나가고 있다. 개미에게 물리면 항상 일어나는 현상이다. 옛날에 섬에 있을때 같은 숙소에 묵고 있던 녀석이 말하길, 가끔 sweet body가 있는데 개미들이 그런 사람들에게 꼬인다는... 달콤해? 약을 사먹어야 겠는데, 크라비 타운에서 이러저런 이유로 시간을 지체하다보니 약국 찾아갈 시간이 없다. 어쨌건 가지고 있던 약을 몇 알 삼켰고 그래서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

크라비 타운에서 방콕으로. 열두시간 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도착, 30번 버스를 타고 카오산에 도착. '정글뉴스'를 찾아 파아팃 거리 건너편으로... 새벽의 카오산은 굴러 다니는 송장도 안 보이고 의외로 얌전했다. 죽집이 사라져서 기분이 비참했다. 서양인 둘이 밤새 술을 쳐먹고 비틀거리다가 건널목에서 말을 걸어온다. 한국의 붐붐걸들은 리얼리 썩스라고 말한다. 동감이라 고개를 끄떡이다. 한국의 여자들이 외국인들에게 따먹히든 말든 어린 시절에 느끼던 분노와 증오심은 사라졌다.

정글 뉴스 게스트하우스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키가 바깥에 있으니 문을 열고 들어와 쉬고 있으란다. 주변은 주택가로 조용하다. 여덟시 조금 넘어 체크인.

짐을 내려놓고 카오산으로. 해가 떠오르면서 갓 생긴 시장통이 활기를 더해간다. 하지만 옷 가게들은 아직 문을 덜 열어 바지를 살 수 없다. 빠통 해변의 토니 리조트에 혁대를 두고 왔다. 반바지는 혁대가 없으면 지퍼가 자꾸 열리고 그렇잖아도 다 낡아 더 입고 다닐 수 없어 버렸다.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작은 바지 빼고는 입을 옷이 없어 그후 하루종일 시내에서 수영복을 입고 돌아다녔다. 수영복 만이 내가 가진 유일하게 제대로 된 옷인 셈.

약국에서 zirtec을 사고 인터넷을 한 시간쯤 하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황가의 피부에서 발진이 생겨 지르텍을 먹였다. 샤워하고 '다빈치 코드'를 마저 읽었다. so what? 소설에 묻고 싶은 질문이다. 왠 얼간이가 이것저것 억지로 짜맞춰 써놓은 시시껄렁한 소설 같아 뵌다. 퍼즐 대부분이 따분하기 그지 없는 것들. so what? 베르베르의 '뇌'에게도 묻고 싶은 질문이다. 잘 쓰지도 못하고, 재미 없는 소설인데 베르베르가 썼기 때문에 잘 팔리는 것일까?

한두 시간 쯤 자고 일어나 15번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갔다. 가는 길에 길이 막혀 버스에서 내렸다. 마침 내린 곳이 Jim Tomson's house 앞이었다. 내린 김에 들렀다. 짐 톰슨은 실크 수입상인데 어느날 행방불명되었다. 미수금을 갚지 않으려고 토낀 것은 아닐까 싶다. 그에 관한 몇가지 얘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별 관심없다.

아내에게 주려고 코끼리 그림이 있는 480밧 짜리 연분홍색 실크 스카프를 샀다. 썩 괜찮은 제품들이 눈에 띄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다. 정작 관광해야 할 톰슨의 집은 입장료가 100밧 씩이나 해서 들어가지 않았다.

피피에서 제비집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황가가 제비집과 샥스핀을 먹고 싶단다. 별 맛이 없음을 미리 경고했다. 걸어서 학생들이 우글거리는 싸얌까지 갔다. 싸얌의 한 중국식 레스토랑(scala restaurant)에서 무려 800밧이나 하는 샥스핀과 500밧에 종지 하나 달랑 나오는 제비집을 시켜 먹었다. 맛있냐고 물으니 맛있단다. 내가 먹어본 샥스핀 중 지느러미의 양이 가장 많았다. 게살과 계란, 녹말가루로 적당히 얼버무려 양을 늘려놓지도 않았다. 제비집은 그저 그랬다. 제비집이 쥐꼬리 만큼 밖에 없다. 후루룩 쩝쩝 먹어치우고 한끼 식사로 1300밧이라는 거금을 카드로 긁었다. 그다지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먹을 일도 없을 것이다.

황가가 말했다. 다음 식당은 어디에요? 그래 오늘, 내일은 맛따라 길따라 하기로 했다. 뿌 팟뽕 까리(fried crab with curry)를 먹여주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실롬까지 슬슬 걸어갔다. 뿌 팟뽕 까리를 방콕에서 가장 맛있게 한다는 somboon seafood는 오후 4시부터 11시까지 밖에 영업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

한 시간 동안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노점상에서 만들어준 10밧 짜리 차갑고 맛있는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솜씨가 예술이다.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빵 속에 넣어 팔고 있다. 고소한 바베큐 냄새가 거리에 진동했다. 그런것들을 먹고 싶지만 뿌 팟뽕 가리를 먹기 위해 한 시간을 넘게 걸어왔으니, 참자. 최고급 식당 중 하나인 부사라쿰이 근처에 있다. 그곳에 수영복 입고 입장이 가능할지 늘 궁금했다.

실롬까지 가는 길에 소니 간판이 보여 무작정 들어가 메모리를 포맷해 달라고 부탁했다. 클리에에서 정상적으로 인식한다. 기쁘다. 거리에서 이것저것 사 먹었다. 거리음식이 레스토랑에서 비싼 돈 주고 먹는 음식들보다 항상 맛있었다.

오후 4시를 3분 남겨놓고 솜분식당에 들어갔다. 뿌 팟뽕 까리 두 접시와 작은 밥, 그리고 맥주를 시켜 통통하게 살이 오른 게를 즐겼다. 이런 저런 기회 때문에 먹어봤지만 이렇게 살이 토실한 게는 처음 봤다. 커리가 너무 진해 게 맛을 압도하지도 않았고 양념과 잘 어울렸다. 생각해보니 상하이 게 요리 스타일이다. 기름이 워낙 많아 끝맛은 약간 느끼한 편. 황가가 말하길, 여자들이 좋아하겠다고. 너가 여자 마음을 알아? 라고 쏘아 붙였다. 절대 모를껄 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난 알지 라고 생각했다.

15번 버스를 타고 카오산 로드까지 가는데 1시간 20분이 걸렸다. 태국이 경제난으로 위기에 처한 후 서민들이 신분과시용으로 구매했던 자가용을 다 팔아버려 교통체증이 완화되었다던데, 경제 사정이 나아져서 이 사람들이 다시 신분 과시에 열을 올리는 것일까?

숙소로 돌아와 한국인 여행객들과 얘기를 하며 꼬치에 맥주를 마셨다. 69년생 아저씨는 날더러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꺼리는 타잎인 듯 하여 생섬(럼주)를 권하지 않았다고 미안해했다. 그가 제대로 본 것이다. 사람보다는 생섬에 관심이 더 많았다.

게스트하우스 복도에서 연주씨가 남긴 메시지를 보았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열두 시가 조금 넘어 잠들었다.

7/6


아침에 에어컨 룸으로 방을 옮겼다. 황가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자기와 여행 다닐 때는 죽어라고 팬룸만 가더니 중얼중얼... 내 방은 2층 W2, 보라색 침대시트, 큼지막한 창틀, 베란다, 시원한 에어컨이 특히 마음에 든다. 겁먹은 고양이가 베란다의 귀퉁이에서 얼굴만 살며시 내민 채 쳐다보고 있었다. 푸른 눈.

511번 에어컨 버스를 타고 수쿰윗으로 향했다. 날도 더운데 움직이는 일이 귀찮다. 방콕병 증세가 나타난 것 같다.

수쿰윗 쏘이 23을 주욱 올라가면 유명한 베트남 식당인 Le Dalat이 나온다. 그 맞은 편이 Baan Kanita, 2001년, 2003년 태국 요리 부문 베스트로 선정된 식당. 길 하나 건너 쏘이 24에는 명성이 하늘을 찌를 것 같긴 하지만 쥐꼬리만한 음식이 나오는 레몬 그라스가 있다. 레몬 그라스를 가느니 골목 귀퉁이의 꼬치집에서 꼬치를 200개 사 먹고 만다. 세트 메뉴 가격은 2년전 그대로 380밧이었다. 맥주 한 병에 잘 먹고 배를 채웠다. 보기 드문 종류의 소박하지만 기품있고 은근한 맛, 그래서 다시 찾은 곳이지만 태국 음식하면 이 집 음식이 떠올랐다.

TAT 부스에 대고 영어를 정말 유창하게 늘어놓는 아가씨에게 이 근처(쏘이 23)에서 가장 좋은(best) 타이 마사지 가게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니 타임 스퀘어 지하를 가르쳐 준다. 타임 스퀘어 지하에 있는 맛사지 가게의 이름은 'best thai massage'였다. -_-;

황가가 오일 맛사지를 받는 동안 나는 이층의 한국인 사장님이 만든듯한 인터넷 까페에 앉아 이렇게 로그를 작성중. 이제 나가자. 나가서 바지를 사자. 수영복을 입고 며칠째 벌건 대낮의 시내를 활보했다. 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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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한 시에 잤다가, 새벽에 잠깐 깨어 여명이 끼어든 새벽을 관람했다. 전깃불 덕택에 원시적인 새벽은 기대할 수 없었다. 아침에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얼굴만 문대고 어리벙벙한 상태로 숙소에서 일하는 친구를 따라 450밧 짜리 스노클링 투어를 신청했다. 항구 앞에서 사람들이 모이자 커다란 녹색 배를 타고 피피 레를 향해 배가 나아갔다. 피피 돈과 피피 레 사이에서 강한 해류가 흘렀다. 조류라고 해야할지 해류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배가 치솟다가 가라앉길 반복했다. 왼쪽으로 기울었다가 오른쪽으로 기울기도 했다. 앞으로 고꾸라졌다가 고물이 치켜 올라가기도 했다. 상석에 앉아 있었던 관계로 거진 바이킹 놀이기구에 가까왔다.

사진기나 현금은 하나도 챙기지 못했다. 장비를 챙겨 입수. 이번 스노클링은 '빵'과 함께 했다. 빵을 부숴서 뿌리니 물고기들이 떼로 몰려 들었다. 어, 정말 재미있다. 빵을 자꾸만 뿌려 내 주변은 온통 물고기떼로 가득 찼다. 봉투 안에서 빵을 떼어 내려니 더 이상 빵이 없다. 대신 소세지가 잡혔다. 물고기들이 소세지를 좋아할까? 좋아한다. 훨씬 좋아했다. 백 빵 보다 소세지 하나가 더 낫다. 소세지를 흔들며 물고기를 희롱하면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소세지 하나로 한 30분을 잘 놀았다. 소세지가 1/3 토막 밖에 남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손 바닥으로 소세지를 잡고 살짝 손바닥을 펼쳐 물고기떼가 미친듯이 몰려들 때 재빨리 손가락을 오무려 소세지를 감췄다. 이거 정말 재미있다. 물고기는 지능이 낮은 탓인지 그렇게 놀려대는 데도 쉴 새 없이 몰려 들고 흩어졌다. 물고기떼는 마치 삐끼들처럼 행동했다.

스노클링 한 번, 밥을 먹고, 다시 두 번 더, 각각 한 시간씩 하니 기진맥진했다. 황가는 겁을 집어먹고 스노클링을 하다가 말았다. 입수하자 마자 10-20m 깊이여서 혈압이 솟구치고 팔다리가 뻣뻣해 진단다. 배 위에는 여러 국적의 여자들이 비슷한 이유로 우아하게 썬텐을 하고 있었다. 스노클링은 깡으로 하는 거야. 말했다. 내가 두번째 스노클링을 할 때는 함께하는 여행자가 없었다. 롱 테일 보트에서 뱃사공과 함께 바다에 나가 그냥 막무가내로 떨구고 (살아서) 헤엄쳐 돌아오는 것이었다. 수영은 전혀 할 줄 몰랐고 라이프 자켓이라고 준 것은 어설픈 스티로폼이었다. 어쨌거나 살기 위해 버둥거렸다. 그 다음부터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캐러비언 씨에서의 스노클링은 개중 가장 멋졌고 가장 무서웠다. 1-2미터씩 오르락 내리락 하는 파도의 골과 용마루 사이를 왕복하면서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내팽개쳐지고 수도 없이 튜브로 물이 들어왔고, 목구멍으로 쓰디쓴 바닷물을 넘겼다. 라이프 자켓을 벗으면 무서워서 못할 것이다. 그 이후로 절대로 라이프 자켓을 벗지 않았을 뿐더러 핀을 벗어 던지는 등의 만용도 부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신의 한계를 안다.

배 갑판에 누워 살이 타들고 가고 있을 때 황가에게 도가 사람들이 단전이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관해 얘기해줬다. 어제는 부처 얘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태국이나 필리핀의 무인도로 가는 왕복 배편을 만들고 현지 여자들을 몇명 사들여 섬에다 풀어놓은 다음 사냥해서 잡아 먹는 계모임에 관한 얘기도 했다.

네번째 스노클링은 하지 않았다. 조류가 거세 사람들이 이리저리 떠내려갔다. 그렇잖아도 지쳤는데 그 조류에서 버틸 재간은 없었다. 스노클링 투어는 오전 열 시에 시작해서 오후 네 시에 끝났다. 세 시간쯤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여섯 시간이나 했고, 밥도 주고 물은 무제한 공짜였고, 과일 쪼가리도 몇 개 준다. fin을 빌리려면 별도로 50밧을 내야 할 꺼라고 생각했는데 그 비용도 투어 비용에 포함되어 있었다. 450밧에 여섯 시간을 잘 놀았으면 괜찮은 투어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선실로 몰아놓고 우리가 투어를 할 동안 비디오를 찍던 친구가 찍었던 비디오를 틀어주었다. DV로 찍은 것으로 화질이 생생하고 스노클링 하면서도 미처 보지도 못했던 것들을 보여준다. 말미잘, 산호 사이를 오가는 물고기들, 바닷속에서 형형색색으로 반짝이는 여러 생물체들이 그야말로 총천연색으로 하늘거리는 멋진 비디오였다. 500밧에 cd로 떠 준단다. 필요없다. 내가 나오는 장면은 고작 두 컷 뿐이었고 소세지를 든 채 대마왕처럼 물고기떼를 이리저리 몰고 다니는 기가 막히게 멋진 모습은 누락되었다.


물 빠진 해변

시장통에서 40밧 짜리 쇠고기 국수를 먹고 숙소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입구에서 어제 방을 안내해준 직원이 불러 세웠다. 오늘 방값을 지불하란다. 어제 이틀치 600밧 다 줬잖아? 아니란다. 600밧은 하루치 방값이란다. 무슨 소리냐, 너가 어제 방 하나에 300밧이라서 여기 온 거잖아. 코 피피에서 방 안에 냉장고, 온수를 제공하고, 해변에서 이렇게 가까운 숙소가 300밧 짜리는 없고, 두당 300밧이란다. 어제 분명히 너가 그렇게 말해서 따라온 거지 안 그랬으면 내가 미쳤다고 따라오냐고 따져 물었다. 그는 영수증을 보여줬다. 영수증에는 어제 하루치 방값 600밧을 지불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황가 얼굴을 쳐다 봤다. 황가는 숙소를 잡아본 적이 없다. 지불할 때 확인을 안 한 것이다. 직원의 말이 괘씸해서 더 따져볼까 하다가 600밧 더 주고 그냥 숙소로 걸어갔다.

여행사에 들러 200밧 짜리 크라비행 배편을 예약했다. 해변을 가로질러 뷰 포인트로 올라갔다. 해가 지는 모습이나 구경하자 싶어서 였다. 다들 올라가는 계단으로 안 가고 반대쪽 로달람 비치 쪽으로 난 비스듬한 산등성이를 기어 올라갔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해가 지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다. 해가 지기도 전에 사진을 다 찍은 태국인들이 먼저 내려가고, 그 다음으로 사진을 다 찍고 볼일을 마친 일본인들이 내려갔다. 지평선에 떠 있는 구름의 형태로 보건대 오늘 '끝내주는' 석양을 구경하기는 다 글렀다고 생각한 우리도 해가 지기 5분 전에 내려왔다. '로맨틱' 운운하며 끝내 남아 있는 떨거지들도 있었다. 석양은 필리핀의 보라카이가 드라마틱하고 멋졌다. 아무래도 보라카이가 석양 만큼은 최고같다.



내려오는 길에 '활달하게' 뛰어가는 무슬림 아가씨가 있었다. 어쩌다가 말을 해 보니 난생 처음 보는 '타이 무슬림'이었다. 타이 무슬림 여자는 남자와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나 보다, 무척 신기했다.

다시 시장통에 들렀다. 황가에게 해변의 해산물 요리를 사주기는 커녕 시장통에서 밥 사다가 숙소에서 먹는 궁상을 차마 더 하기에는 미안한 나머지 혹시나 해서 수년 전 추억의 맛집에 들렀다. 음식은 여전히 맛있다. 주인은 여전히 친절했고 그 친절한 주인은 여전히 날 보고 '곤니찌와'라고 말했다. 바나나 쉐이크 25밧 짜리 2개, 코코넛 밀크로 만든 커리 50밧, 플레인 라이스 10밧, 카오 팟 까이 40밧 이렇게 해서 135밧을 지불했다. 주인은 15밧을 덜 계산했다. 오래오래 추억의 맛집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숙소로 돌아오니 8시 30분. 냉장고에는 물병만 다섯개가 있었다. 샤워하고 맥주 한 잔 하면서 쉬었다. 살은 끔찍하게도 많이 탔다. 더 뭔가를 하기에는 지친 하루다.

'다빈치 코드'를 읽기 시작. 나는 책 한 권 들고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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