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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7.05 쓰시마 자전거 여행 5/5
  2. 2007.07.04 쓰시마 자전거 여행 4/5
  3. 2007.07.03 쓰시마 자전거 여행 3/5
  4. 2007.07.02 쓰시마 자전거 여행 2/5
  5. 2007.07.01 쓰시마 자전거 여행 1/5

7am 기상. 숙취도 없고 말끔한게 기분이 좋다. 구름 사이로 얼핏 해가 보인다. 스프를 끓여 식빵을 찢어 넣고 아침으로 먹었다. 전에 여행할 때 어떤 여행자한테 배운건데 꿀꿀이 죽같지만 보기와 달리 맛이 그럴듯 하다.

누가 보기 전에 텐트를 걷었다.


론머맨 아저씨가 나타나 오늘 여기서 캠핑할 꺼냐고 묻는다. 이이에. 오늘 오후 부산에 갑니다. 캠핑은 유료라고 말하며 언덕으로 올라가 잔디를 깎기 시작한다. 4.40pm 배가 출항이라 적어도 3pm까지는 시간이 많아 남아 오늘은 한국 전망대에 가볼까 한다. 날이 맑으면 일찍 돌아올 생각이다. 텐트 등속을 화장실 앞 식수대 밑에 감춰두었다.


아침에 보니 해변이 더욱 맑아 보인다. 해수욕에 제격이다. 가벼운 짐만 꾸린 채 9am 출발했다.



아무 생각 없이 패달을 밟다가 '토요 포대 흔적'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발견했다. 비포장 도로로 10분쯤 올라가자 포대가 나타났다. 뭐하는 곳이지?



자전거 전조등을 뽑아 어두컴컴한 미로 같은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포탄 캐리어 같은 것이 보인다. 아, 이즈하라의 하치만구 신사에 있던 폭탄이 혹시 여기 쓰이던 것인가 보구나.


이곳이 설마... 저 정도 규모면 정말 엄청난 포가 있던 자리인데.. 흡사 아발론의 포처럼.


지도를 보니 쓰시마의 이 포대에서 부산과 큐슈 지방 사이의 적 이동을 방어할 목적으로 포대를 세운 것 같다.


포대에 관한 무슨 설명이 있는데, 다른 관광지와 달리 영어나 한글 병기된 설명이 없다. 게다가 일부 문장을 지웠다. 왜 지웠을까. 알아야만 하는 내용일까. 하치만구 신사의 대포알들이 호국의 의지가 담긴 신령한 대포알이었던가? 뭐가 캥기는지 문장을 지운 것으로 미루어 보아 한국 또는 미국에 적대적인 포대였던 것 같다.

더 생각하지 말자. 조잔하기 그지없는 일본의 금리나 주식시장, 위안부 할머니들이 돌아가실 때까지 면피하며 기다리는 비겁한 일본 정부. 일본인들조차 원숭이라 부르는 아베. 도로에서 보곤하던 아베의 사진들. 눈을 마주치지 않는 일본인들. 비포장 내리막길을 흡사(?) MTB를 타듯이 내려갔다. 비포장 도로에서는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전방 주시. 목덜미가 뻗뻗해진다. 자전거와 온 몸이 미친듯이 떨린다. 딴 생각하다가 삐끗하면 바로 자빠링이다.


해안도로를 따라갔다. 한국 전망대로 향하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 길의 끝에는 전복 양식 공장이 있었다. 구경하다가 사진 찍기 뭣해서 나왔다.


거진 자동차 대시보드 콘솔 분위기 물씬 풍기는 '핸들바 콘솔' 지도나 웹 상에 소개된 위치가 정확하지 않아 waypoint가 종종 달라 전복 양식 공장 등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GPS 덕택에 쓰시마 여행이 손쉬웠다. 전조등은 터널 주행시 필요해서 대낮에도 달고 다녔다.

카시오 손목시계(Casio PRG-70V3)는 자기 나침반, 기압계, 시계, 온도계 따위가 포함된 것이다. 터프 솔라 배터리를 사용해 배터리 교환이 필요없는 반영구적인 제품. GPS(110$)보다 더 비싼 17만원짜리. 2005년 2월 여행할 때 사용하려고 구입. 그런데 3일 동안 비를 펑펑 맞았더니 그... 알량한 생활방수가 견디질 못했다. 유리창에 낀 습기는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야 사라졌다. 저렇게 습기가 끼어 있으니 기압계가 엉망으로 작동해 일기 예측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10.30am. 한국전망대 도착. 건자재를 한국에서 공수해와 한국풍으로 꾸몄다는 건물. 다시 휴대폰에 전원을 넣고(안테나가 만땅으로 잡혔다) 아내와 통화를 시도했다. 빙고. 이번에는 된다. 거참 통화 한 번 하기 되게 힘드네.

와니우라 마을의 이팝나무 자생지에서 오락가락했다. 봄에 왔더라면 나무마다 하얗게 핀 꽃들을 구경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맑고 작은 하천에 물고기들이 우르르 몰려다니고 있다. 이렇게 깨끗하고 맑은 하천이 집 앞에 있는 기분이 어떨까. 참 부럽다. 사진을 찍을까 하다가 말았다.


미우다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VALUE에 들러 점심꺼리를 장만했다. VALUE에서 2007년 7월 7일 무슨 행사를 하나보다. 미신에 사로잡힌 미국인들과 일본인들은 21세기 첫 쓰리세븐 데이를 축하하거나 심지어 결혼까지 한다. 해수욕장에 도착하니 12pm. 날이 뜨거워 바다로 뛰어 들었다. 바다 속에서 자맥질 몇 번 하고 놀다가 텐트 세웠던 장소로 기어 올라와 맥주에 초밥(599엔)을 먹었다. 초밥이 의외로 맛있고 꽤 커서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다.

샌달에 모래가 잔뜩 묻었다. 등산할 때 신으려고 몇년 전에 산 산악 트래킹용 샌달. 샌달의 특성상 앞 발가락들이 노출되어 산악 트래킹 중 자갈, 돌부리, 날카로운 잔가지나 풀뿌리에 취약하다. 발등을 보호해야 하므로 발등 부위는 두껍게 감싸 놓아 보통 샌달보다 통기성이 떨어진다. 꽤 애매한 제품이다. 그래도 40도 경사의 릿지에서 확실한 접지력을 보장하는 밑창 때문에 여름에 즐겨 신었다.

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젊은 남녀가 한다발인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몰려와 해변에서 플랭카드를 들고 기념 사진을 찍는다. 그들은 바닷가에 살짝 발만 담그고 나와 수돗가에서 발을 씻느라 부산을 떨었다.

시원한 기린 생맥주를 마시며 그 부산한 광경을 쳐다 보았했다. 한국인들이 내가 앉아 있는 쪽으로 몰려와 수다를 떤다. 자전거를 흘낏흘낏 쳐다본다. 나는 일본인이므로 아무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수경을 끼고 다시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빵 부스러기를 던지고 물 속을 노려보았지만 고기떼는 몰려오지 않았다. 시각이 시각인지라 물고기가 통 보이지 않는다. 스노클이 있으면 좀 더 깊은 곳까지 갈 수 있겠지만 수영도 못하는 주제에 장비도 없이 만용을 부리지 않았다. 등이 탈까봐 수영복 하의에 티셔츠를 입은 채 물에 들어갔다. 30분쯤 놀고 바깥으로 나오니 한국인들이 떠났다.

수돗가에서 웃옷을 빨고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다. 화장실로 들어가 재빨리 수영복을 벗어 세면대에서 빨았다. 자리에 앉아 남은 우롱차를 마시며 음악을 들으며 햇빛을 쬐는 도마뱀처럼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짐을 정리했다. 충전지에 녹이 잔뜩 슬었다. GPS의 자전거 마운트에 부착하는 뒷판은 방수 커버가 안 되어 있어 비맞는 동안 물이 새어 들어 충전지에 녹이 슨 것이다. 다음 번 여행 때는 대책을 세우자.

준비해간 충전지는 enelop 2000mAh 4알, 산요 2300mAh 2알로 완전 충전된 상태가 아닌데도 5일을 충분히 버텨줬다. 마지막 2알의 잔량이 반쯤(1000mAh) 남았다. 하긴 길어봤자 하루 8시간 정도 밖에 주행을 하지 않았으니 전지가 남는 것이 당연.

1pm. 자 이제 쓰시마에서 해 볼 마지막 관광 일정이 남았다. 자전거에 짐을 싣고 해수욕장 위의 캠프장 화장실 옆에 자전거를 숨겼다. 그리고 여권, 지갑, 수건, GPS, 시계 등 귀중품과 수건을 챙겨 캠프장 옆에 있는 나기사노유 온천장으로 향했다.

간혹 도로의 윗쪽에 은빛으로 빛나는 구조물을 보고는 했다. 온천수를 끌어올려 아마도 열병합 발전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열병합 발전이 아니라면 다만 온수라도 모아놓았을 것이다. 일본인의 온천에 대한 강한 집착. 그 구조물을 볼 때마다 꼭 온천에 가자고 다짐했다.


나기사노유 온천. 노천 온천. 1pm ~ 9pm 사이 오픈. 온천에 들어가 신발을 벗어 신발함에 넣고 신발함 열쇠를 들고 카운터에 가니 옆의 자판기에서 표를 뽑으란다. 한국인 전용 티켓이 500엔. 사람들이 시야에 없는 동안 살짝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한국의 일반 사우나과 크게 다른 점이 없다. 온탕, 냉탕이 있고...

창 밖으로 시원한 바다 풍경이 펼쳐진다. 저 창문은 단지 방충망이라 바람이 솔솔 들어온다. 오른편에 노천 온천이 있다. 낮에는 주로 노인들이 이용하는 듯.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도 관광 코스로 이곳에 들렀다. 간간이 한국어로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수건을 제공하지 않는 것 같다. 뭐, 그럴 줄 알고 스포츠 타월을 들고간 것이지만. 들어서면서 양 손으로 수건 끄트머리르 잡고 수건을 늘어뜨려 국부를 살짝 가렸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길래 나도 그렇게 했다.

따끈한 거품탕 속에 들어가 근육을 풀었다. SPF 27짜리 썬 블럭 로션을 발랐는데도 의외로 살이 많이 탔다. 적당히 씻고 일본인 할아버지들과 노천 온천에 앉아 바다를 구경했다. 파도 소리, 바람 소리가 들린다. 흐뭇하다.

그런데 캠핑장의 화장실이 오른쪽으로 살짝 보인다. 화장실 옆에 숨겨 세워두웠던 자전거 끄트머리가 보인다. 어? 그럼 저기서도 여기가 다 보이는 거잖아? 여탕은 엄폐가 잘 되어 안 보인다. 일본 만화책에서처럼 남여 노천탕을 대나무로 간단하게 구분지워 놓아 옆 여탕의 대화 소리나 깔깔 대는 웃음소리가 들리거나 하는 일은 없다. 실망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여탕에는 할머니들이 조용히 온천욕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실망할 것 없다.


적당히 씻고 한 시간 반쯤 있다가 온천을 나왔다. 엇, 그런데 GPS를 락커에 두고 왔다. 카운터에 가서 영어할 줄 모른다는 종업원에게 영어로 물어보니 락커 열쇠를 건네준다. 거기 지배인이 GPS를 알아본다. 잠깐 손짓발짓으로 서로 원숭이들처럼 대화하다가 웃으며 헤어졌다. 휴게소에서 야마네코 스티커를 한 장 챙져준다. 자전거 프레임에 붙여 놓으면 괜찮을 것 같다. 자기도 산에 갈 때 GPS를 들고 다닌단다. 첫날 히타카쓰에 떨어져 일정이 틀어지는 바람에 남 쓰시마를 돌지 못한 것이나 아리아케 산에 못 가본 것이 아쉽다. 다른 일본인과 달리 이 친구는 눈을 쳐다보며 말한다. 얼굴이 그을리고 다부진 체격이 스포츠맨이나 조폭 스타일이다. 마음에 든다. 웃쓰! 사요나라~

히타카쓰 항구의 2층에서 노란색 영수증을 탑승권과 교환했다. 3pm. 한 시간이나 남아 할 일은 없고 잔돈은 철렁거리고 해서 시내로 슬슬 자전거를 몰고가 동전을 털어 Life Value 수퍼에서 도시락과 환타를 샀다. 히타카쓰 항구 대기실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마지막까지 도시락을 먹는구나 -_-

환전한 10000엔 + 15000엔 중 남은 돈은 12067엔. 사용한 돈은 12746엔, 정산 중 어디론가 새버린 돈은 187엔(아마 뭔가 사 먹었을 것이다). 사용한 돈 중 숙박비는 단 돈 2000엔, 한화로 15200원. 700엔짜리 방청제 구입 및 온천 500엔을 제외하고 9733엔을 5일 동안 순전히 먹는데 사용했다. 한화로 73970원.


4.10pm. 출국수속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제일 먼저 출국수속을 마쳤다. 출입국장에서는 동작이 빨라야 한다.


4.30pm 배가 출발한다. 인구의 대다수가 노인들이라 노무원들 나이가 지긋하다.


히타카쓰 항 바로 옆은 해상자위대(또는 해안경비대; japan coast guard)의 배가 정박해 있다.


오징어 배가 일찌감치 출항한다. 쓰시마의 특산물 중에 오징어가 있었다.

6.20pm 부산 도착. 입국장에서 짐을 풀어 엑스레이 기기에 통과시키고 자전거는 별도의 문으로 뺀다. 부산항에서 중앙동 역으로 향했다. 자전거를 끌고 지하철 검표기 앞으로 향했다. 검표원 아저씨가 친절하게 문을 열어준다. 장애인석에 자전거를 박아두고 mp3를 들으며 책을 읽었다. 아! 생각해 보니 집 열쇠가 없다. 아내는 내가 여행 가 있는 동안 처가에 가 있다. 서울에 돌아가면 집에 못 들어간다 -_-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텐트 등속해서 캠핑 장비가 다 있고 일요일까지 3일 남았는데 굳이 집에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부산 터미널에서 바로 울진으로 가서 양양까지 자전거 여행을 계속할까? 7.30pm 노포동 지하철 역에 도착. 부산 터미널의 매표소 앞 시간표를 살펴보았다. 마땅히 갈만한 데가 없다. 게다가 자전거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캠핑하다가 또 비를 맞으면 노래가 심하게 튀어나올 것 같다. 그래 그냥 처가집에 가자. 8.20pm 표를 끊어 대구행 버스를 탔다.

대구에서 장인장모님께 인사드리고 하룻밤 자고 다음날 서울행 버스를 탔다. 남부터미널에 도착. 덥다. 집까지 자전거를 몰고 가 짐을 내팽개쳐두고 간단히 세면만 한 다음 집을 나왔다. 동네 고깃집에 가서 김치 오겹살과 소주를 마셨다. 캬... 좋다. 바로 이거다. 맛있는 도시락이나 맛있는 생맥주로는 절대로 채울 수 없는 것.

주행거리: 315km (쓰시마에서만)
평속: 의미없다. 자전거 주행이 아니라 자전거 여행이다.

GTM Trackmaker file

Google Earth File
여행일정 및 경비내역 

쓰시마의 좋은 점:

* 풍경이 끝내주고 개울, 해변, 숲을 함께 즐길 수 있다.
* 도로가 텅 비다시피 해서 자전거 주행에 최적이다.
* 평균 2km마다 자판기가 널려 있다.
* 요소마다 대형 수퍼가 있어 먹거리 장만이 편하다.
* 맥주가 싼 편. 꿀맛이다.

나쁜 점:

* 사람이 적어 일본인들과의 접촉이 극히 적다
* 이즈하라를 나오면 음식점이 별로 눈에 안띈다.
* 볼꺼리가 별로 없다.

가볼만한 곳(가본 곳이 별로 없어 민망 -_-)

* 이즈하라: 반쇼인, 하치만구 신사
* 히타카쓰: 미우다 해수욕장, 나기사노유 온천
* 39번 지방도, 와타즈미 신사, 토요 포대 흔적

준비물 중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것

* 양말: 맑은 날 샌달을 신었을 때 발가락에 때가 끼거나 타는 걸 막아주고 사고 났을 때 발가락을 일차적으로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죈종일 비가 와서...

* 삼각대: 핸들바에 거치해서 움직이는 동영상을 찍으려 했다. 손에 들고 찍는 것이 더 편하다. 셀카 찍을 때도 써먹으려고 했는데 귀찮았다.

* 여권 복사본: 캠핑장에 등록할 때 여권 복사본을 제출해야 한다던데 무의미했다. 하지만 해외 여행할 때 여권 복사본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여행의 기본 상식.

* 테이프: 케이블 타이와 마찬가지로 거의 만능에 가까운 수리 도구. 찢어진 옷, 비옷, 찢어진 천, 부서진 도구의 고정 등 역할이 광범위. 장기여행 때는 실과 바늘처럼 거의 필수적인 아이템.

* 읽을 책 한 권: 보통 아홉시에 잠들어 아침 일찍 일어나 일정을 시작했으며 무료한 버스, 페리 이동 중 읽으려고 했는데 음악 듣고 지도 보고 계획 짜고 수첩에 메모하고 정산하기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거의 없었다.

* 의약품: 여행 중 필수 의약품은 진통제(두통약), 항생제, 항히스타민제(알러지 약), 반창고(밴드). 항히스타민제가 왜 필요하나 싶겠지만 개미, 진드기 따위에 물려 피부가 가렵고 부어오를 때 이것만큼 효과가 좋은 것이 없다.

없어서 아쉬웠던 것: 방청제, 여분의 브레이크 패드





아소베이 파크에서의 이틀째, 샤워를 마친 후. 여행이란 SF적인 비일상적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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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am 아침 일찍 일어났다. 세면을 하면서 라면을 끓였다. 이번에는 라면에 어제 먹다 남은 어묵 2장과 먹다 남은 김치를 넣고 끓였다. 김치가 달아서 먹기가 좀... 어묵을 다 먹고 면을 2/3쯤 먹다가 화장실 변기에 버렸다. 비가 줄기차게 내린다. 코펠을 씻은 후 찻물을 끓여 PET 병에 담았다.

정자 안에서 출발하기 전에 자전거를 손봤다. 비가 억수로 쏟아진다. 출발해야 하나 망설여진다. 오늘은 대략 80km를 이동해야 한다.

어젯밤에 고민을 좀 했다. 밋밋한 382 도로로 가지 말고 첫날처럼 풍광이 아름다운 39번 도로로 가는게 좋지 않을까? 아니다. 그래도 382 도로로 가자. 39번 도로는 이미 가봤다. 382 국도는 가보지 않았다. 선택이 단순했다. 가본 길 보다는 가보지 않은 길을 가자. 여태까지 그래왔지 않았던가.

어제 하루 비를 못 뿌린 것이 억울했는지 비가 폭포수처럼 펑펑 쏟아져 내렸다. 담배를 물었다. 자전거 체인을 다시 한번 닦았다. 브레이크 이격은 이 정도면 충분히 버틸만 하다. 뭐 이젠 더 조이고 싶어도 조일 수가 없는 한계에 다다랐다. 브레이크를 있는 힘껏 꽉 쥐어도 바퀴가 슬슬 미끄러진다. 그래도 어제 날이 맑았으니 망정이지.

9am. 자판기에서 음료를 하나 뽑아먹고 쏟아지는 빗속에서 출발. 얼씨구 이젠 번개도 치네? 도로에 바짝 붙어 달렸다.


9.20pm. 비가 하도 내려 어제 지나온 쓰시마 패밀리 파크에 잠깐 자전거를 세웠다. 비닐봉투 안에 습기가 차서 지도가 너덜너덜해졌다. QAMM 가방 안쪽에도 물이 고여 있다. 져지 뒷주머니에 넣어둔 지갑은 완전히 젖었다. 지폐가 너덜너덜하다. 가방을 뒤집어 물을 퍼냈다. 농구대가 4개인 이 전천후 운동장은 과연 이용객이 얼마나 될까. 시설 하나는 정말 끝내준다. 비가 잦아들길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려고 가방을 뒤져보니, 아차, 아침에 담배를 피우고 정자 난간 위에 담배를 그냥 두고 온 것이 생각난다. 지난 나흘 동안 담배 한갑을 피우고 새로 한 갑을 뜯어 겨우 세 가치 밖에 피우지 못했는데...

다시 출발. 어제와 달리 382 국도만 타고 와서 진행 속도가 무척 빠르다. 충분히 쉬면서도 한 시간이 안되어 미네에 도착했다. 미네 시내를 지나 니타로 향했다. 우비를 입은 채 내리막길에서 상체를 둥글게 구부리는 것이 의외로 브레이크 효과가 있다. 이젠 걱정없다.

아침에 라면을 먹다 말아서인지 배가 출출하다. 10시 조금 넘어 니타에 도착. 도로가 평이하고 커브가 거의 없어 브레이크 잡을 일도 없다. 이 속도라면 12시면 히타카쓰에 도착한다. 니타에서 잠시 멈춰 자판기에서 마일드 세븐 one 100s 1갑을 구입했다. 300엔. 대체 무슨 자판기이길래 마일드 세븐만 30종류가 있는거지?

예전에 오사카에서 럭키 스트라이크를 자판기에서 산 기억이 난다. 그 독하디 독한 담배를 그저 멋으로 피웠다. 근데 라이터가 없다. 자전거 타고 지나가다가 수퍼를 발견하고 들어가 삼각김밥과 삶은 달걀을 샀다. 라이터가 눈에 띄지 않는다. 설마 하면서 주인에게 담배에 불을 붙이는 시늉을 하며 '라이타, 도조' 하니까 라이타를 찾아준다. 캬... 짐작대로 라이타는 일본어 외래어였던 것이다.

신사 앞에서 무려 한화로 천원이나 하는 따뜻한 삼각김밥을 까먹었다. 한국의 삼각김밥에 비하면 맛이 없는 편. 역시 도시락을 사 먹을껄 그랬나? 삶은 달걀을 먹고 물을 몇모금 마신 후 다시 출발.

니타에서 줄곳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오르막길이 끝이 없어 보인다. 왠간한 업힐이라도 자전거의 앞뒤 기어비를 2:2 이하로 내리지 않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2:1이 되었고 다시 1:2가 되다가 흔히 막장 모드라 일컬어지는 1:1까지 내려왔다. 1:1은 걷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자전거를 타면서 기어비를 3:8, 3:7, 2:6, 2:4, 2:2, 2:1, 1:2, 1:1로 차례로 다운 시프트하고 업시프트는 그 역순으로 했다. 기어비를 제대로 맞춰 하는 것인지 잘 판가름이 안되었는데 남들도 다들 그렇게 하는 것 같다. 3:8에서 최고 속도는 35kmh 가량. 소위 2단 크루즈 기어를 사용하여 주로 평지 주행할 때 사용하는 2:6에서는 보통 25~27kmh 정도가 나왔다. 요즘은 3:6이나 3:7로 넘어가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3:6 정도면 평속 28kmh가 나올 것 같은데 근육이 받쳐주지 않는 것이다. 한 사흘 주행하니까 다리도 많이 피곤해져 젖산이 어느 정도 축적된 것 같다. 일주일에 고작 한 번 타는 정도론 올해에도 한 시간 동안 평속 30kmh를 유지하긴 어려울 것 같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간신히 간신히 최고점에 이르렀다. 해발 136m. 쓰시마에서 이 이상 높은 고도에 다다라 본 적이 없으므로 아마도 이 지점이 쓰시마 도로의 최고점이지 않나 싶다. (무슨 소리. 44번 지방도의 가미자카 공원을 못 가봤고 아유모도시 자연공원도 못 가 보고서 섣불리 말하긴 뭣하지 않나) 하여튼 382번 국도의 최고점은 이 지점이다. 평소라면 북악 스카이웨이의 고도차 200m도 별 걱정없이 올라갈 수 있었겠지만 며칠 동안 업힐, 다운힐을 수백번 반복하다 보니 근피로가 누적되어 고도차 136m에서 안간힘을 쓰다시피 하다가 결국은 정상을 얼마 안 남기고 끌바를 했다. 이제 다운힐이다.

10분쯤 신나게 내려오다 보니 (평속 54kmh) 널찍한 공원이 눈에 띄었다. 미타케 공원이다. 세우자! 끼끼끼긱... 대략 70m를 미끄러져 공원을 지나쳤다. 브레이크 같지도 않은 브레이크. 다시 올라갔다. 공원에 다다르자 마자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5분쯤 멍하니 앉아있으니 비가 잦아 들으면서 관광버스가 눈앞에 멈춰섰다.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내렸다. 내 자전거 앞을 오락가락 하면서 핸들에 붙어있는 GPS를 보고 속도계니 뭐니 하는 말을 주고 받는다. GPS에요. 그랬더니 한 아저씨가 오, GPS! 베리 굿, 베리 나이스!를 외친다. 아무래도 내가 일본인인 줄 아는 모양. 잘됐다. 말하기도 귀찮은데 입 다물고 있자. 단체 관광객들의 가이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골이 잔뜩 나 있었다. 한 아저씨가 '열 받았나봐' 라고 중얼거린다. 옆에 있던 아저씨가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비 오지. 볼 거 하나도 없지. 뭐 이런 거지같은 섬이 다 있어?'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재미없는 관광지에 놀러와서 재미가 없다고 가이드에게 푸념을 늘어놓은 모양. 쓰시마에 볼 꺼 없다. 자전거가 아니면. 관광버스로는, 여러분들은 절대 볼 수 없는 것이죠.

나도 절대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쓰시마의 리아스식 해안을 카약으로 돌아보는 것. 카약을 못 탄 것이 못내 아쉽다. 쓰시마의 대다수 관광지는 5월의 이팝나무 축제를 제외하고 7,8월의 특정 시기만 성수기다. 심하게는 8월이 약 2주 동안만 성수기다. 카약을 타지 않아보고 쓰시마를 논할 수 없다 -_-

담배 한 대 피우고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아저씨, 아줌마들이 화장실에서 볼 일을 마치고 버스에 올랐다. 앞자리에 앉아 있는 가이드를 뚜러지게 쳐다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사무적인 표정. 그 여자도 나를 쳐다본다.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벤치에 앉아 자기를 쳐다보는 몰골이 처연한 남자. 씨익 웃었다. 내가 진실과 애정을 담아 웃으면 남들은 '기운내 멍청아'라고 번역했다. 그래서일까? 외면한다.

그러고보니 쓰시마에 와서 일본인들과 얘기할 때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다. 그들 얼굴을 쳐다보고 대화를 할라치면 고개를 공손하게 수그리거나 시선을 거두었다. 여행 중에는 선글라스를 쓰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쓰면 상대가 내 눈을 볼 수 없고 그럼 대화가 안되니까. 대화가 되려면 눈을 쳐다봐야지. 뚜러지게 쳐다볼 것 까지야 없지만서도.

친절하게 입바른 말을 늘어놓지만 눈을 쳐다보지 않으니 그다지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많은 일본인을 만나 본 적이 없으니 섣불리 단정하기는 힘들다.

애니웨이, 할 일이 있다.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마자 가방을 풀어 코펠을 꺼내고 화장실에서 '이 물은 먹는 물이 아닙니다'라고 적힌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틀어 코펠에 물을 담았다.


스프를 끓였다. 배 고프고 비를 계속 맞아 춥다. 물도 다 떨어졌다. 먹을 것이라곤 바나나 튀긴 과자 밖에 없는데 입안이 말라 목구멍으로 넘어갈 것 같지 않다. 이제 라면도 다 떨어지고.


자전거와 가방으로 바람을 막아 옥수수 스프 두 봉지를 끓였다. 따뜻한 스프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살 것 같다. 후르륵 쩝쩝 입 천정과 혀가 데이는 것도 개의치 않고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비는 여전하지만, 그리고 머리속에서 끊임없이 왕성하게 노래가 샘솟았지만, 기운이 난다. 기운이 나니까 딴 생각이 들었다. 히타카쓰에 일찍 갈 필요가 있나? 관광하자.


미타케 공원 숲길 산책로. 이 길을 죽 따라가면 주차장이 나오고, 주차장부터 산꼭대기까지 숲길이 이어진다. 정말 아름다운 길인데 비가 퍼부어대니 걷기는 좀 무리다. 아쉽지만 되돌아 나왔다.

382 국도를 5-6km쯤 달리다가 오른쪽 샛길로 빠졌다. 버드워칭 공원이 어딘지 모르겠다. 하여튼 쓰시마에는 별로 없다는 논이 주욱 이어지고 곧 해안도로가 나타났다. 해안도로를 따라 사오자키 공원으로 향했다.


해안의 끝에 도달했다. 어? 사오자키 공원이 방금 지나쳐온 자그마한 공원이었나? 그럴리가... 테트라 포트가 널부러진 전형적인 방파제와 전형적인 바닷가 풍경.


조그만 공원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에 충신 박제상에 관해 잘 적혀 있으니 설명은 생략.


해변을 빠져나오는 길에 소철이 늘어서 있는 분위기 좋은 신사를 발견.


어렴풋이 소개서에서 본 기억이 난다. 사오자키 공원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운운. 공원에는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피할 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다. 대규모 바베큐 식탁이 줄줄이 있고 아이들 놀이 기구와 작은 해변, 적당한 크기의 공원이 있다.


방향을 틀어 길을 되돌아가 다리를 건넜다. '이국이 보이는 언덕 전망대'로 향하는 길. 역시 비바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마법의 사진. 길이 흡사 제주도를 닮았다. 꾸준한 오르막길. 맞바람에 많이 지쳐서 끌바했다. 비바람에 시달리다 보니 악에 받쳐 노래가 저절로 흘러 나온다.


뭔 꽃인지 모르겠지만 토양의 산성도에 따라 색깔이 흰색, 파란색, 빨간색으로 다양하게 피어 있다. 간혹 미친 노란꽃도 있었다. 토양에 나트륨이나 황이라도 포함된 걸까?


전망대에 다다랐다. 전망대 건너편은 한국이다. 휴대폰을 꺼내 아내에게 전화 통화를 시도했다. 역시 안된다.


셀카 한 장. 해발 103m.
관광은 역시 비바람과 함께 해야 제맛이다.
맥주 한 잔 하고 싶다.


앞으로 가야 할 길. 저 산너머에 '한국전망대'가 있다. 오늘은 한국 전망대에 안간다. 이국이보이는언덕전망대에서 이쿠치하마 해수욕장까지 갔다가 히타카쓰를 거쳐 미우다 해수욕장에 도착하면 오늘 일정은 끝이다. 지금 시각은 1.16pm


이국이 보이는 전망대. 역시 태양전지가 있다. 전력선을 여기까지 끌어쓰지 않고 자가발전을 한다니, 합리적이다.


심지어는 화장실에도 태양전지와 충전지가 있다.


이국이 보이는 전망대 아래 해변.

다시 출발. 커다란 트럭이 자전거를 피해 위험스럽게 추월한다.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전거를 아슬아슬하게 스쳐가며 라이더를 공포로 몰아놓는 그 쏠쏠한 재미를 놓치고 싶어할 트럭 운전수가 어디 있겠나. 일본인의 운전 매너가 훌륭한 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자기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상호 믿음이 사회적으로 성립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3pm. 382 국도를 타고 별 볼 일 없는 이쿠치하마 해수욕장을 그냥 지나치다시피 하여 히타카쓰 부근까지 왔다. 히타카쓰에 도착하여 첫 식사, 그러니까 첫 도시락 식사를 하던 바로 그 지점에 다시 도착했다. 근처 VALUE 마트에서 기린 생맥주와 닭 바베큐, 생선가스 덮밥을 사와 궁상스럽게 먹었다.


그렇게 기름칠을 정성스럽게 했건만 종일 폭우를 맞으니 체인이 다소 뻑뻑해졌다. 둘쨋날 방청제/오일 anyway를 구입하지 못했더라면 여행이 과연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비 맞으면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다.


QAMM 가방의 벨크로가 걸핏하면 벗겨져 이틀 전에 한국에서 여행준비할 때 다이소에서 산 천원짜리 튼튼한 실로 고리를 꿰어 묶어 두었다. 이제는 안심하고 울퉁불퉁한 길을 달릴 수 있다.


4.50pm. 니시도마리 해수욕장을 미우다 해수욕장으로 잘못 알아 고개를 갸웃하다가 거의 2km를 더 달려 미우다 해수욕장을 지나쳤다. 다시 되돌아와 자세히 표지판을 살펴보니 고갯마루에 미우다 해수욕장이 있다. 그런데 캠핑장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는 미우다 해수욕장.

짐을 일단 내려놓고 쇼핑하러 갔다. 온 길을 헤멘 것에 비해 고개 하나 넘으니 히타카쓰가 바로 나타났다. 히타카쓰 시내 중심부의 Life Value라는 마켓에서 쇼핑을 하고 살짝 내리는 비를 맞으며 미우다 해수욕장으로 돌아왔다. 해수욕장에는 딱 한 사람이 멍하니 앉아 있다가 사라졌다. 쓰시마에는 왜 이렇게 혼자 노는 사람이 많은 걸까.


아무리 봐도 캠핑장 같지는 않은데. 맞은편 건물은 샤워시설. 오른편 건물은 대체 뭘까. 건물 뒤에는 화장실이 얼핏 보인다. 취사장이나 오토캠핑장이 보이질 않았다.



더 찾아다니기도 귀찮고 어차피 관리인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아 속 편하게 널직한 이곳에 텐트를 쳤다. 분위기가 정말 좋아 보인다.








해변 여기 저기 돌아다녔다. 일본의 청정 해변 100선 중 하나로 손꼽히는 해수욕장이란다. 동굴이 보여 찾아가보니 얕은 동굴에 누군가 변기 뚜껑을 올려 놓았다. 센스 한 번 죽여준다. 작은 자갈을 덮은 산호 시체를 발견. 이건 이 여행의 기념물이다. 아내에게 선물해 주자! 아내는 내가 맨날 길에서 주운 것만 선물해 준다고 불만이 많았다. 길에서 주운 것들 중에도 좋은 것들이 많다. 7pm이 다 되었고 하루종일 비를 맞아 노곤해진데다 바닷물이 차가워 바닷속에 들어가긴 꺼려진다. 물이 참 맑았다. 발만 담그고 해변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작은 해변이다. 작고 쓸쓸한 해변이다. 혼자 와서 깡소주에 오징어 발을 질겅질겅 씹기에 제격이다.


얼씨구? 이건 뭐야? 언덕을 오르니 갑자기 캠핑장이 나타났다. 텐트를 다 쳐놓은 상태니 다시 텐트를 걷어 여기까지 올리기가 귀찮다. 에라 그냥 무시하자. 저녁이나 먹어야지.


오늘은 특별히 와인샵에서 사케 작은 것 한 병 사왔다. 일반 수퍼에서는 술을 못 팔게 되어 있는 것 같은데 VALUE처럼 매장이 크면 매장 한 구석에 술만 따로 파는 매대가 있다. 히타카쓰 시내에는 큰 수퍼가 없어 와인샵이 따로 있다. 알콜 농도 25%.


여행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 오늘 만큼은 도시락을 안 먹으려고 했는데 워낙 가격대 성능비가 좋고 마침 550엔 짜리를 100엔 할인해 450엔에 팔고 있어 낼름 집어들었다.

mp3를 들으며 날이 어두워지길 기다렸다. 한 시간쯤 지나 날이 어두워졌다. 술병을 따서 병나발을 불었다. 목구멍부터 위장까지 뜨뜻해진다. 와인샵에서 가장 싼 사케를 샀더니(525엔) 맛은 영 아닌데 그렇다고 큰 병을 사자니 다 마시려면 대책이 안선다. 일단 25% 짜리 술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 내리니 기분이 좋아진다. 도시락을 안주 삼아 천천히 술을 마셨다.

혼자 와서 3일 내내 비를 맞으며 이게 무슨 궁상인가 싶지만 한편으로는 아내와 아이를 데려오지 않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술병을 다 비우고 밥도 다 먹었다. 해변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다. 기둥에 몸을 기대고 알코올에 예민해진 정신을 파고 드는 음악을 들었다. 주로 클래식. 모처럼 히트 가요 백여곡을 mp3에 담아왔지만 들어도 순 사랑타령에 신세한탄이라 재미가 없었다.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술에 취하니 마음 속의 별들이 빛났다. Mendelssohn, Symphony No4 in A major op90, Andante con moto

10.24pm.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섬의 해변에 가면 항상 바람이 바뀌는 때를 기다렸다. 미소가 저절로 떠올랐다. 11pm쯤 잠자리에 들었다. 4am쯤 깼다. 들리는 거라곤 파도소리 뿐. 음료 한 병을 모두 비웠다. 근처 자판기에서 음료를 한 병 뽑아왔다. 해변을 한바퀴 돌고 텐트 안으로 기어 들어가 다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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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am. 새벽에 추워서 깼다. 텐트에서 버너를 켰다. 부러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으면 사진의 EXIF 정보에 타임스탬프가 찍힌다. 집에 돌아가면 EXIF를 보고 시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디카의 또다른 용도를 개발해 낸 것 같아 흐뭇하다.


6.15am. 산 중턱에 해가 떠오르고 까마귀가 힘차게 날아오른다. 어슴프레 아침이 찾아왔다. 비가 안 온다!


6.28am. 아침은 역시 라면으로. 어묵 두 장을 얹어 변화를 주었다. 어묵이 무척 맛있다. 한국에서 처럼 포장용기에 파는 것이 아니라 그날 그날 두부처럼 만들어서 파는 것 같다. 어떤 것들은 가격이 상당하다. 라면을 다 먹고 설겆이를 한 후 코펠에 물을 끓이고 애플 티를 우렸다. 충분히 식은 다음 어제 다 마시고 빈 음료수 병에 담았다. 오늘 마실 물이다. 자전거를 타면 하루에 물을 2리터 이상 마셨다. 사막에서도 물을 거의 안 먹던 내가 그 정도면 보통 사람은 3-4리터 이상은 마셔야 할께다.

캠핑하면서 밥을 지어 먹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쌀은 한 주먹 반 정도가 대충 일인분이다. 한국에서 떠나기 전에 인스탄트 국 몇 개 사고, 천원에 두 봉지씩 파는, 물에 넣어 끓이기만 하면 되는 카레, 짜장 등의 소스를 사가지고 다니면 싼 값에 그럭저럭 다양한 식단을 꾸밀 수 있다. 맨밥에 고추장 비벼먹어도 되고.

여기 마트의 야채 코너에서 양파, 당근 따위를 보았을 때 야채밥을 만들어 먹고 싶어졌다. 야채밥이야 쉽지. 감자나 고구마, 버섯 따위를 쌀과 함께 끓여도 괜찮다. 사실 캠핑 음식은 간단하고 쉽다(하지만 가족, 친구들과 함께 가는 캠핑과 다르다). 카레 짜장 소스는 밥을 지을 때 둘둘 말아 코펠에 함께 넣어두고 밥이 다 되면 개봉해 밥에 부어먹으면 될 정도로 간단하다. 한두 홉 정도의 쌀로 짓는 밥은 평지에서 15~20분이면 조리가 끝난다. 밥 하고 나서 플레이트에 밥을 덜어놓고 밥알이 붙어 있는 상태 그대로 인스턴트 국거리를 넣고 물을 부어 끓인 후 코펠에 밥을 부으면 간단한 국밥이 된다. 아침에 점심에 먹을 계란이나 감자 삶아 두거나 아침에 밥을 넉넉히 한 다음 남은 밥은 소금과 섞어 주먹밥을 만든다.

여행할 때 미역처럼 영양가가 풍부하면서 보관, 이동이 손쉬운 식재료도 없다. 마른 미역 한 봉지면 1-2주 동안 질리게 먹을 수 있다. 야채에 고추장 넣고 그저 끓이기만 하면 되는 고추장 찌게도 있다. 돼지갈비 고추장 볶음은 돼지갈비에 전날 저녁 먹던 소주 좀 붓고 고추장 섞고 단과일 아무거나 으께 넣고 양파, 당근, 마늘 따위를 넣어 몇 시간 잼겨 놓았다가 볶기만 하면 된다. 심지어 리조또도 만들어 먹는데. 이쯤되면 생존을 위해 억지로라도 밥을 꾸역꾸역 먹는 것이 아니라 '럭셔리 서바이벌'이 된다.

그런데 아침부터 라면이나 끓여먹고 있다.

7am. 이 닦고 세면 하고 텐트를 걷었다. 짐을 챙겨놓고 자전거 상태를 살폈다. 어젯밤에 체인에 기름을 듬뿍 먹여두어 체인 상태는 양호하다. 브레이크 패드의 안쪽 허브 나사 위치를 변경해 손아귀로 반쯤 브레이크 레버를 당겼을 때 앞 바퀴가 움직이지 않는 정도의 브레이크 이격을 확보했다.

뒷 브레이크 패드는 너무 닳아 이격을 좁혀도 브레이크가 잘 먹지 않는다. 오늘은 앞 브레이크만 써도 상관없을 것 같다. 뒷 짐받이에 짐을 싣고 체중을 뒤로 옮기면 뒷브레이크를 적게 잡고 앞브레이크를 잡으면 될 것 같다. 잠자가다 꿈속에서 브레이킹에 관해 좀 더 그럴듯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마치 활주로에 착륙하는 비행기에서 파라슈트가 펼쳐져 감속을 하듯이 몸을 활처럼 둥글게 구부려 공기저항을 증대시키면 비슷한 감속 효과가 나지 않을까? 우비를 걸치고 있으면 금상첨화다.

8.30am 관리인 아저씨가 화장실에 들러 짐을 챙기는 것을 도와주었다. 아저씨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사요나라'를 외치고 떠났다. 9am. 날이 개이니 기분이 상쾌하다. 신화의 마을까지는 거리가 얼마 안되니 점심 전에 도착할 것이다.


쓰시마는 예전에 왜구들의 전진기지였다. 일부는 쓰시마에 거주하고 일부는 나가사키, 후쿠오카를 비롯한 규슈 지방에 거주하며 중앙 정부의 지배력이 약해져 내외로 곪아터진 조선에 노략질을 일삼았다. 대마도에서 쌀의 재배가 어려워 노략질 말고는 여기 사람들이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쌀이 있어야 초밥을 만들어 먹을 것이 아닌가! 웃음. 쓰시마 주민들은 심하게 말해 생계형 해적들의 후손이다. 쓰시마는 요즘 한국과의 선린우호, 화의와 평화를 가치있는 정책으로 삼았다. 기실 쓰시마는 일본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의 섬이고 쓸만한 부존자원이나 중대한 전략적 가치가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다 대부분의 수입을 한국의 관광객을 통해 벌어들이고 있는 것 같아 보여서인지 한국과의 화의와 평화는 의미있는 정책처럼 보인다. (부정적으로 말한 것 같지만 그렇진 않다)


왜구 후손들의 마을이라고 생각하니 풍경이 새삼스럽다. 가난한 어촌 주민들치고는 복지수준이 높다. 이 작은 섬에 병원과 소학교, 중학교 등의 교육시설이 거의 2km마다 있고 문화센터와 편의시설이 온 사방에 널려 있다. 비록 도쿄나 인근 부산 만큼의 생활수준을 유지하지는 못하겠지만 젊은이들이 없어도, 부존자원과 개발여력이 없어도 여생을 부족함없이 살만한 환경이지 싶다. 그게 꼭 일본과 한국의 경제력 차이만큼이겠지?


오징어 배치고는 전등 수가 너무 적어 보이는데? 쓰시마는 낚시꾼들에게도 잘 알려진 곳인듯 하다. 전에 어디서 보니 쓰시마에 가면 하루 배를 빌려 참돔을 수십 마리씩 낚아 본전은 뽑고도 남는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낚시꾼들이 허풍이 좀 센 편이지만). 사장님을 설득해서 쓰시마로 낚시 관광을 오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그런데 젠장 여긴 대체 어디지? 개짖는 소리만 요란한데.


야마네코 조심. 야마네코=산 고양이=삵쾡이. 쓰시마의 천연기념물인 듯 곳곳에서 보이는 표지판. 게들이 도로를 건너다가 납작하게 짜부러진 모습은 많이 봤지만 삵쾡이 시체는 통 보지 못했다. 제한속도 표지판이 있지만 차들이 워낙 느리게 달린다. 도로폭이 좁고 구불구불해 80kmh를 안 넘는 듯. 삵쾡이의 개채수가 100여마리 밖에 안 남았다는 말을 거의 믿지 못하겠다. 야생 고양이들의 대단한 번식력을 감안하면...


길가에 앉아 짐을 정리하는데 꽃밭에 손바닥만한 나비가 앉았다. 앗, 이놈은... 이놈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9.40am. 담배 한 대 피우면서 길가에 앉아 쉬었다. 혹시 비가 올지 몰라 뒷짐은 쓰레기 봉투로 감싸놓았다. 앞가방은 QAMM 사에서 나온 카메라 가방인데 몇 년 전 처음 출시되었을 때 운좋게 할인가로 싸게 구매했다. 핸들이 묵직해져 조향이 잘 안되는 단점과 핸들바에 고정시키는 고리가 바엔드에 안 맞아 별도의 찍찍이를 사용하는데 힘이 약해 충격을 받으면 종종 풀어지는 것, 방수가 안되는 것 빼고는 가방 자체는 훌륭하다.

훌륭한 이유: 비를 맞아도 금새 마른다. 주머니가 많아 물건 관리가 편하다. 내용적이 크다. 만약 뒷 짐받이를 제대로 된 것을 장착하면 뒷 짐받이에도 장착이 가능하다.

QAMM 홈페이지에서 QR 레버에 장착이 가능한 뒷 페니어를 3만5천원에 판매하고 있다. 뒷 짐받이는 자전거를 구매할 당시 구입한, 재질이 알루미늄으로 된 것인데 뒷짐이 무거우면 싯 포스트가 팩 돌아버려 아주 귀찮다. 싯 포스트가 돌아 싯 방향이 틀어지면 양 다리 패달링에 변화가 생겨 엉덩짝 한쪽 근육이 땡긴다. 게다가 10kg 미만의 짐만을 실을 수 있고 충격을 받으면 상하로 흔들려 여러모로 불편했다. 돈 주고 산 게 아까워서 아직 못 버리고 있다.

382에서 샛길로 빠져 고갯길을 오르락 내리락 반복했다. 땀이 뻘뻘 흘러 나왔다. 절벽이 무너져 돌조각들이 도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차량 통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용하지 않는 도로인 것 같다. 빽빽한 삼림 탓에 시야가 도로로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러지 말고 니이(도시이름)을 거쳐 들어올 껄 그랬나? 한참 GPS를 바라보며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다가(GPS에 입력한 적이 없는 소로다) 신화의 마을 입구가 나타났다. 왼쪽은 신화의 마을. 오른쪽은 니이 시내로 향하는 길.


와타즈미 신사에 도착. 신화의 마을은 작은 고개 너머에 있다. 해신을 모시는 신사로 다섯 개의 문중 두개는 밀물 때 물 속에 잠긴다. 쓰시마의 대표적인 관광지.


세번째 문. 일본의 건국신화가 서려있단다. 설화 인용:


하늘의 신 니니기(彌徵藝)의 아들 히고호호데미(彦火火出見)가 잃어버린 형의 낚시 바늘을 찾아 바다를 헤매다가 용궁까지 가게 되어 용왕의 딸 도요다마히메(豊玉姬)와 결혼하여 3년간 지낸 후 낚시 바늘을 찾아 나오게 되었는데 그때 아내는 만삭이어서 같이 뭍으로 나오지 못했다. 며칠 뒤 풍랑을 타고 도요다미히매는 여동생 다마요리히메(豊依姬)를 데리고 남편을 찾아 뭍으로 나와서 바닷가에 손수 집을 짓고 들어가며 남편에게 절대로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런데 남편은 궁금증을 견디다 못해 이 약속을 어기고 안을 들여다보니 큰 뱀이 괴로워 나뒹구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에 화가 난 도요다마히메는 낳은 아이를 해변에 그대로 버려 둔 채 용궁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아이가 우가야우기아에스신이고 그 신이 다시 이모벌 되는 다마요리히메와 결혼하여 낳은 사람이 신에서 인격화된 진무텐노(神武天皇)로 일본의 초대 천황이라는 건국신화가 있다.
이곳에는 바다에서부터 도리이(鳥居)가 세워져 신사에 이르고 바닷물이 신사에까지 닿아 있는데 사실은 제사를 지내던 장소로 추정되며 여기에서 내려다보면 바다 가운데까지 도리이가 직선으로 다섯 개가 늘어서 있어 가히 용궁으로 들어가는 길을 연상케도 한다. 현재 와다쓰미 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히고호호데미와 도요다마히메로서 하늘과 바다가 영합한 축복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도리이가 우리나라 쪽으로 뻗어 있어 고대 우리나라 사람이 이곳으로 온 것을 신처럼 모시지 않았을까 역사학자들은 추측하기도 한다.
신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도리이 말고도 용비늘이 떨어졌다고 용비늘 비슷한 울툭불툭한 돌이 있는 곳에 종이로 금줄을 만들어 쳐 놓고, 신성시하고 있었고, 손 씻고, 입 씻고 몸을 정결히 하고 들어오라는 바위샘도 꾸며져 있었다.



와타즈미 신사. 다른 각도에서 본 첫번째, 두번째 문. 흡사... 중국 지우자이거우의 호수 한 가운데 있던 정자를 연상시키는 분위기. 바다 속에 신사의 문을 설치한 아이디어가 훌륭하다.


이 여자는 누굴까. 앞에 동전 접시가 놓여있다. 100엔짜리도 눈에 띈다. 욕심이 생겼지만 동전을 집어둘지는 않았다.


선착장에서 셀카. 10.30am. 아소베이 파크에서 여기까지 1시간 30분. 도로가 마르니 타이어 접지력이 좋아져서 내리막에서 브레이크를 잡을 일이 없어 좋았다. 대부분 382 국도를 따라와서 커브가 완만하고 굴곡도 적어 도로는 평이한 수준. 아소베이 파크로부터 쉬지 않고 밟으면 30-40분 이내에 여기 도착이 가능할 것 같다.

옥션에서 각각 14000원씩 주고 산 져지 상/하의는 몹시 쓸모가 있다. 그전까지만 해도 살갗에 찰싹 달라붙는 져지는 민망해서 입기가 꺼려졌는데 져지를 입으니 확실히 편하다. 엉덩이의 두꺼운 패드는 안장으로 전해지는 충격을 흡수해 주고 기저귀처럼 불알을 감싸는 쿨맥스 패드는 열과 땀의 배출이 잘된다.

져지 하의를 입을 때 팬티를 입지 않는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져지를 입기 전에는 쿨맥스 팬티를 입고 그 위에 반바지를 걸쳤는데 아무리 쿨맥스 팬티라지만 한참 자전거를 타고 가면 불알이 척척해지는 찝찝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런 복장을 장시간 착용하면 엉치뼈 부근이 살살 아파온다. 져지의 가격에 거품이 너무 많이 끼어 상하의 한 벌에 보통 10만원은 우습게 나가 하이테크 로우라이프를 추구하는 21세기 테크노거지 생활을 하던 나는 애써 져지를 외면하고 있었다. 대체 져지가 왜 그렇게 비싼 거야? 이유가 없잖아?

한편으로는 자전거를 잘 타지도 못하는데 거진 선수복이나 다름없는 화려한 져지를 입는 것이 왠지 부담스러웠다. 져지를 입으려면 자전거를 잘 타야 한다...는 생각은 한강 강변로에서 자전거를 자주 타면서 사라졌다. 잘 타는 사람들에 비하면 평속 25kmh는 별로 대단한 것이 못되지만(잘 타는 사람들은 30kmh 이상 나온다. 평지 주행 평속 30kmh 란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3년 넘게 타도 그게 안 된다. 평균속도 35kmh 이상이면 자전거 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간이 아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짐승' 취급하는 것 같다) 왠만해서는 그런 '선수복장'을 추월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게 여겨지는 최근 상황 때문에 '내가 이제 당당하게 1~2kmh의 속도차에 연연하며 져지를 입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슬며시 든 것도 사실이다.


아까 왜구, 왜구 했는데 왜인들이 고기도 잡고 틈틈히 노략질도 하던 배가 와타즈미 신사에 보관되어 있다. 야.. 말로만 듣던 그 배를 여기서 보게 되는구나... 농담이고, 설화의 주인공을 영접하기 위한 배일 것이다.


와타즈미 신사 내부. 건축 형태도 지진많은 나라치고 좀... 아니지 싶은...


무려 한글로 설명이 나오는 가이드 패널. 오른쪽 상단에 태양광전지가 보인다. '신화의 마을'이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동네라고 말한다.


와타즈미 신사 앞. 신사 앞에 왠 스모장? 신사에 들어가기 전 형식적이나마 스모를 하고 들어가야 한단다. 누구하고? 도깨비하고?

신화의 마을 캠핑장 입구는 쇠사슬로 막혀 있었다. 아무도 없냐고 소리쳤지만 인근 산에 부딫혀 메아리가 되서 돌아올 따름이다. 거참 분위기가 신비스럽기 짝이 없군.

화장실은 있는데 샤워장이 없다. 수도꼭지는 죄다 뽑아놓았다. 즉 물이 나오는 곳은 화장실 뿐이다. 한 30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트럭이 한 대 도착한다. 자판기 음료 캔을 채운 후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황황히 사라진다.

이거야 원. 이 무거운 짐을 끌고 돌아다닐 수도 없고 해서 불필요한 짐을 풀어 상설 텐트 속에 감춰 두었다. 햇볕으로 땀에 절은 얼굴과 팔 다리에 물을 묻히고 간단한 짐만 자전거 뒷짐받이에 묶어둔 채 신화의 마을 캠핑장을 벗어났다. 니이 시내를 관통해 382 국도를 타고 잠깐 내려갔다가 39번 국도로 갈아타 엔쓰지를 거쳐 미네에 들러 미네마치 역사민속자료관 앞에서 오마에하마 공원으로 향한다는 계획. GPS의 경로 트랙백이 가능하므로 굳이 지도를 살펴보며 주행하지 않아도 된다. 햇살이 따갑다. 11.40am 출발.


1.20pm. 48번 지방도에서 미네로 들어서기 전 작은 개울에 멈췄다. 몹시 덥기도 하고 물이 맑아서 잠시 발 담그고 쉬어 가련다. 발만 담궜다가 손도 담궜고 머리도 거꾸로 담구고 에라 모르겠다 급기야 물 속에 온 몸을 담궜다. 우아! 정말 시원하다.

웃통을 벗어 젖히고 물 속에 드러누워 30분쯤 히히덕 거리며 놀았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림을 가로지르는 개울이란 이런 것일께다. 자전거를 멈추면 개울이고, 달리면 울창한 숲이고. 고개를 돌리면 바다가 나타나고. 쓰시마 만큼 자전거 여행하기 좋은 곳이 있을까? 있긴 있다. 강원도 홍천에서 인제로 이어진 길. 비록 바다는 없지만 참 호젓하고 좋은 길이다. 언제 시간내서 갔다와야겠다.


판타지 소설에서 야영할 때 토끼고기와 함께 삶아먹을 때 자주 등장하는 야생 양파? 아니면 구근식물의 일종? 토마토와 아스파라거스, 로즈매리, 코리안더 등등. 버터 한 덩이, 치즈 한 덩이, 밀 한 푸대만 들고 동부에서 황금을 찾아 서부를 향해 떠났다가 굶어죽은 사람들이 갑자기 생각난다.

미네에 도착. 니이보다 작은 마을. 아소베이 파크에서 관리인에게 니이에 자전가 가게가 있는지 물었다. 있단다. 미네에는? 미네에는 없을 꺼란다. 신화의 마을에서 니이 시내로 나와 돌아다녀봐도 자전거 가게 비슷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날씨도 맑으니 브레이크 걱정을 잊어 버리자. 타이어 그립이 좋아 헤어핀에서 어느 정도 고속 회전이 가능하다. 그래도 안전 운행.

해안도로가 이어진다. 평지라 자전거가 제법 잘 나간다.


Video: 쓰시마 미네에서 오마에하마공원 주행


작은 터널이 나타났다. 고갯마루에는 언제나 터널이 있었다. 터널이 나타났다는 것은 고갯마루에 이르렀다는 증거다. 흡사 무슨 법칙이라도 되는 양 항상 맞아 떨어져 신기하다. 일본 도로망의 규칙성을 발견한 것이다.

다른 터널과 달리 아주 오래 전에 지은 듯한 이 터널의 분위기가 아주 마음에 든다. 천정에서 빗물이 똑똑 떨어지고 그 소리가 이끝에서 저끝까지 낭랑하게 울렸다. 팅-잉잉, 팅-잉잉, 팅통-팅동-팅동, 팅-잉잉, 아침에 정비를 열심히 해 기름을 잘 먹여놓은 자전거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아늑하고 서늘한 터널, 위험하지 않은 터널 -- 뒤에서 차가 덮칠듯이 달려들어 심장 박동수가 빨라지지 않는 터널. 길지 않지만 짧지도 않아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터널. 천천히 즐기면서 통과했다. 터널이 길고 조명이 어두우면 전조등을 켜야 한다. 맞은 편의 밝은 쪽 때문에 눈 아래에 암맹이 형성되 바닥의 요철이 보이지 않는다. 맞은편에서 오는 차량은 자전거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 382번 국도도 가끔은 좁아지는 편인데, 이런 지방도나 소도로에서는 터널 폭이 좁아 차 한 대 지나가면 간신히 지전가 한 대 지나갈 여유 밖에 없다.

터널을 통과하고 잠깐 주행하니 다시 해안 도로가 나타났다. 바닷냄새가 물씬 풍긴다. 여기는 쓰시마의 북쪽, 그러니까 한국의 남부 해안과 마주보는 면이다. 아소만이나 쓰시마의 동쪽 해변과 달리 파도가 제법 쳐서 제대로 바다 분위기가 난다.


오마에하마 공원 도착. 야영장. 수도꼭지를 틀어보니 물이 나온다. 오른쪽의 빨간 지붕의 화장실도 정상 작동한다. 관리가 허술한지 잡초가 우거져 있지만 화장실은 깨끗하다. 쓰시마에 와서 느낀 점이지만 화장실 옆에서 자도 지저분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화장실 특유의 암모니아 냄새가 없고 깔끔하게 관리가 잘 되어 있다. 일본 여행할 때 공원의 화장실에서 샤워도 하고 화장실 옆에 텐트를 치고 자기도 한다는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구나.


오마에하마 공원 앞 자갈 해변. 바다에서 기어 올라온 갖은 표류물 때문에 해변이 지저분하다. 돌무더기를 쌓아놓은 것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인 듯. 바다 앞에 자갈 무덤 쌓아놓고 소원을 비나보지? 해변이 지저분해서 물이 맑은데도 발을 들여놓고 싶은 생각이 싹 가셨다.


자갈밭이라 맨발로 돌아다니긴 힘들어 보인다.


공원을 빠져나와 옆길을 돌아 전망대까지 올라가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도 많고 할 일은 없고. 햇빛이 짱짱하니 오늘은 제대로 관광모드다. 해변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자전거 타고 지나온 길이 잘 보인다. 여기는 해발 80m. 끌바 안하고 여기까지 단숨에 올라오니 숨이 턱에 찬다. 올라오면서 헉헉대는 비디오도 찍었다. 소리가 묘해서 나름 19금이다.


Video: 오마에하마 공원 전망대 향하는 길


야생 조류의 숲 근처에 있는 추모비. 조선에서 오던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거친 조류와 파도에 떼죽음을 당해 이 비를 세웠단다. 별 관심이 없어서 자세히 읽어보지 않았다.


내 관심사는 저 맞은편에 틀림없이 있을 한국땅까지 휴대폰 전파가 닿느냐, 여기서 한국까지 휴대폰이 터지나 마느냐 하는 것이다. 그 동안 휴대폰의 배터리를 아끼려고 꺼 두었는데 켜 보았다. 안테나가 2-3개 잡힌다. 시험삼아 아내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안테나는 잡히는데 신호가 안 간다. 휴대폰을 껐다.


추모비 옆의 NTT docomo 안테나 시설물을 둘러친 철책 문을 향해 무인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아마도 움직임을 감지하여 누군가 시설물 내부로 침입하는 것을 기록하기 위한 것일께다. 그러려면 카메라를 안 보이게 설치해야지 저렇게 뻔히 보이게 설치해 두면 옆으로 돌아 다른 쪽으로 타 넘어 들어가 카메라 선을 뽑아버리면 그만이잖아? 시험 삼아 앞에서 헤벌쭉 웃으며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카메라가 움직임을 감지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나를 쫓는 기색이 없다. 저거 전원은 들어가기나 하는 걸까? 한국의 도로 이곳 저곳에 설치되어 있는 가짜 과속 방지 카메라처럼 순전히 위협용 목업이 아닐까...


일본의 유명한 영화 촬영지였다는 곳. 하! 여기서 저기까지는 고도차가 대략 100m. 내려갔다가 샛빠지게 다시 기어 올라갈 이유가 없으니 관광지고 뭐고 그냥 지나치자! 다운힐에 헤어핀이 많다. 브레이크를 살짝 살짝 잡았다. 소똥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어 어쩔 수 없이 소똥을 밟았다. 소똥이 덜 말라 미끌미끌하다. 물컹거리면서 미끄러지자 머리털이 쭈볏 곤두선다.

이즈하라에 무료 족욕탕이 있는데 못 가봤다. 왠지 마음 아프다. '무료'인데.


어라? 이게 어떻게 된거지? 아까 안 올라가기로 한 길로 올라가야 하잖아? 헉헉 거리면서 올라갔다. 저 반대편에서 신나게 내려왔는데 탄력 한 번 못 받고 처음부터 순 패달질로 그 만큼 올라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을 구경이라도 하고 가는건데 -_- 절로 노래가 나오는군.


3pm. 오우미노사토 해수욕장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피둥피둥 살찐 황소. 흡사 serious sam에 나오는...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지축을 울리며 달려올 것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뭘 먹었길래 저렇게 근육이 우락부락한 것일까. 그러고보니 아까 내가 밟은 소똥이 바로... 황소가 빤히 노려본다. 흡사, 이봐, 거긴 길이 없어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오우미노사토 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 길. 경사가 가파르고 계속되는 헤어핀 구간이라 어쩔 수 없이 끌바.


끌바하면서 찍은 오우미노사토 해수욕장의 모습. 해수욕장에 들를 생각은 없고 저 중간에 살짝 보이는 길 모퉁이를 돌면 미네로 가는 길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왠걸. 그 길은 막혔다. 끊겼다. 오우미노사토 해수욕장은 인적이 끊긴지 오래된 탓인지 수풀이 우거져 있고 길이 막다른 골목이다. 어쩔 수 없이 내려온 길을 다시 올라가야 하는데 기어비 1:1로도 숨이 가쁘다. 오르다 말고 생각했다. 빌어먹을. 이렇게 힘들 바엔 해수욕장에서 놀다 가자. 다시 내려왔다.


저 바다 너머는 한국이다. 바닷물이 정말 맑다. 아무도 없는 해수욕장에서 혼자 생쑈를 하며 놀았다. 벌거벗고 물 속에 들어갔다. 뭐 보는 사람도 없으니. 성년이 지난 후 벌거벗고 물놀이를 한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동해의 무릉도원 계곡에서, 중국의 창산에 말 타고 놀러갔을 때, 도미토리의 여자 샤워실에서 모르고 샤워하다가 벌거벗은 여자들과 마주친 정말 인상깊었던 기억 정도? 그래도 사진 찍을 때 아랫도리는 걸쳤다. 동영상도 찍었는데 카메라가 기울어 한참 쇼를 하고 난 후 플레이를 눌러보니 하늘만 찍혀 있었다. 거참. 다시 할 수도 없고.

해변에서 놀다보니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4pm 무렵 개울가에 옷가지를 빨고 힘겹게 끙끙거리며 자전거를 타고 황소와 마주쳤던 곳에 다시 이르렀다. 왠 할아버지가 인사를 한다. 곤니찌와. 곤니찌와라니. 그거 점심 인사인데 저녁에 해도 되는건가? 부에나스 노체스가 무심결에 튀어나왔다. 워낙 이 나라 저 나라 인삿말을 배워 인사할 때면 몹시 헷갈린다. 아주 미치겠다. 옷가지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겸면쩍어서 허겁지겁 지나갔다. 어쩐지 저 소새끼가 바닷가에서 나혼자 생쑈한 걸 노인네한테 일러바친 것 같은 쪽팔리는 기분이다. 근처에서 까마귀도 까악까악 울어댔다.

하늘이 어두워졌다. 비가 올 것 같다. 도로는 끊임없는 오르락 내리락이다. 땀이 뻘뻘 흘러 내렸다. 고개 막바지에 이르렀다. 미네까지 쭉 뻗은 내리막. 신나게 내려갔다. 미네에서 쓰시마 패밀리 파크 쪽의 해변 도로를 따라갔다. 하루종일 별로 먹은 것이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니 배가 고프다. 자판기에서 레모네이드와 로얄밀크티로 배를 채웠다. 로얄밀크티는 인도에서 먹던 짜이와 맛이 같았다. 설탕을 덜 탄 듯 싶지만. 그리고 소로로 접어들어 줄곳 해변도로를 달렸다. 평탄해서 꾸준히 시속 25kmh가 나온다.


탄력을 있는 대로 받아 평지에서 속도가 무려 30kmh를 오락가락 한다. 저 멀리 고릴라 두상을 닮았다는 섬이 보인다. 쓰시마에서 석양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데, 유감스럽게도 구름이 많이 끼었고 5pm이니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다. 힘차게 패달을 밟았다.

다시 오르락 내리락, 산 중턱을 싸고 도는 헤어핀 코스가 이어진다. 내리막길에서 고속 주행하다가 맞은편의 차를 보았다. 내쪽에서는 안쪽으로 90도 꺽어지는 코스다. 각을 줄이기 위해 차선 중앙으로 주행하고 있었다. 순간 방심해서 자전거 방향을 튼다는 것이 오른쪽, 그러니까 차쪽으로 틀어버렸다. 한국과 달리 차량의 진행 방향이 도로 왼쪽인데 지난 3일간 익숙해졌다고 믿고 있었지만 의식과 다르게 무의식적으로 평소처럼 도로에서 위험할 때는 오른쪽 구석으로 틀어버린 것이다.

브레이크를 잡았다. 자전거가 지지직 미끄러진다. 자동차도 브레이크를 잡는 것이 보인다. 자동차 왼쪽 본넷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탄력을 회복한 자전거가 왼쪽으로 기울며 자동차와 오른쪽 길 틈새 사이로 지나갔다. 자전거를 멈춰 세우고 죄송하다는 말이라도 해야 하지만 참 빌어먹게도 지금 브레이크가 제대로 안 먹는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완벽한 사고 케이스다. 차창을 통해 공포에 질려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아줌마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내가 방금 한 것이 자전거 드리프트다. 솔직히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타이어 타는 냄새만 살짝 맡았다. 희안한 것은 저 드리프트를 맨정신에서는 성공시켜 본 적이 없다. 공포 때문에 근육이 위축되어 브레이크를 너무 일찍 밟던가 너무 늦게 밞아 자전거가 휘청대기 일쑤였다.

뒤늦게 솟구친 아드레날린으로 머리가 멍하다. 내가 미쳤구나. 아아... 터널을 통과했다. 곧 니이 시내가 나타났다. 수퍼에 들러 쇼핑했다. 아직도 정신이 나간 것처럼 멍하다. 아줌마는 얼마나 놀랬을까? 그 자동차가 조금이라도 속도가 빨랐더라면, 그 자동차가 조금이라도 늦게 브레이크를 밟았더라면 나는 헤드라이트 모서리에 다리를 부딫히면서 (슬로우모션으로) 자전거 차체가 급격하게 왼쪽으로 틀어졌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틀어지면서 몸이 회전하여 한 바퀴 휘리릭 돌고 차체의 왼쪽 유리창에 오른팔을 부딫힌 다음(쾅!) 도로 오른편으로 튕겨 나갔을 것이다.


젤리를 샀다. 100엔이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쳤다. 정신 좀 똑바로 차리고 다니자.


생선까스도 샀다. 이제 주행 중에 mp3 귀에 꽂고 다니지 말자.


밥도 한 공기 샀다. 딴 생각하지 말자. 밥에 집중하자.


내가 정말 죽을라고 환장했지. 꽁치 간장 조림도 샀다.


아사히 생맥주 500ml. 5%, 김치 한 봉지. 김치에 어찌나 설탕을 많이 탔는지 달달해서 먹고 나면 인상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이게 무슨 김치야... 기무치지.


아무도 없는 캠핑장에서 안주, 반찬, 밥, 생맥주를 배불리 먹고 마셨다. 6.20pm.


관리인은 안 오려나 보다. 관리사무소 근처에 차가 한 대 섰다가 내 기척을 느꼈는지 황급히 사라진다. 캠프장에 바로 붙어 있는 일본 정원과 가옥 한켠에 불이 켜졌다. 화장실에도 불이 들어왔다. 비가 올까 염려스러워 정자 안에 텐트를 쳤다. 화장실에서 땀에 절은 져지를 빨았다. 자전거에 기름칠을 다시 했다. 브레이크 패드의 이격을 좀 더 좁혔다. 이제 거의 한계다. 사고 기억은 잊어버리자. 소심해 지면 더 큰 실수를 하게 된다.


7.50pm. 밥과 맥주를 다 먹었다. 원래는 조금 남겨 아침에 라면에 밥 말아먹고 반찬하려던 것인데 긴장하고 흥분한 탓인지 김치 약간을 빼고 그 많은 양의 음식을 남기지 않고 먹었다. 신화의 마을 캠핑장 전경. 뒷쪽에는 아이들 놀이기구와 캠프 파이어장. 화장실 따위가 있다. 오토 캠핑장과 함께 미리 쳐진 천막을 대여하기도 하나 보다. 천막 안에 들어가보니 냄새가 퀴퀴하고 습해서 도저히 안에서 자고 싶은 생각이 안든다. 저 맞은편 끝은 선착장으로 바다와 인접해 있다.

8pm. 해가 완전히 졌다. 개구리 합창 소리가 왼쪽에서 들린다. 오른쪽에는 반딧불이가 깜빡이며 날아다닌다. 반딧불이를 대체 얼마만에 보는거냐... 삭막한 도시 생활이라니... 장작을 몇개 꺼내 캠프 파이어나 해 볼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 먹었다. 돈도 안 내고 캠핑하는 중인데 혹시라도 지나가는 사람의 이목을 끌어 좋을게 뭐 있겠나 싶다.

먹은 것이 별로 없어 그동안 완전 소화가 되었는데 오늘은 3일 만에 화장실에서 큰일을 봤다. 일 보는 동안 모기들이 엉덩이와 불알을 물었다. 거참 긁기 민망한 곳을 물어버리네.

9pm. 텐트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날이 비교적 맑아서 인지 별로 춥지 않다. 눈을 붙였다. 12시쯤 깨었다. 가랑비가 내리고 반딧불이가 좀 더 늘었다. 개구리는 우렁차게 울다 말다를 반복한다. 캠핑장을 산책했다. 2am. 폭우 소리에 설핏 잠에서 깨다. 4am. 쏟아지는 빗소리에 다시 잠에서 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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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잠들었는지, 밤에 깼다. 12시. 바람 소리가 요란하다. 곧 이어 쏴아- 비가 오는 소리. 억수로 비가 내린다. 다시 잠들었다. 쏴아- 하는 소리에 깼다. 2am. 여전히 폭우가 쏟아진다. 버킷으로 퍼부을 듯이 쏟아지는 빗물. 물이 튀겨 목재 바닥이 젖으니 춥다. 자전거에 빗물이 튀긴다. 자전거를 여자 화장실 안으로 끌어 넣었다.

텐트 안에 버너를 들여와 물을 끓였다. 금새 훈훈해졌다. 따끈한 물을 마셔 속을 따뜻하게 데웠다. 캠핑 중에 추울 때는 물을 끓여 먹는 것이 최고다. 체온을 올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체내에 따뜻한 액체를 주입하는 것이다. 체온을 올리고 버너로 텐트 공기의 온도를 높이고 이미 한번 끓었던 물이 흡수한 잠열이 천천히 방사되는 동안 텐트는 따뜻하게 유지된다. 어렸을 적에 저런 아이디어를 냈을 때는 내가 참 꾀돌이구나 싶었는데, 산악인들 대개가 텐트 속에서 추위를 이기기 위해 물을 끓이고 커피, 차를 마셨다.

텐트 바깥에서 관리인이 뭐라고 웅웅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고보니 어젯밤 관리인이 떠나기 전에 하치... 뭐뭐라고 그랬던 것 같다. 수첩에 일본어 숫자 발음을 적어둔 것을 어젯밤에 잠깐 읽었다. 하치는 8이었지. 잠결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지금은 아침 8시... 좀 더 자자.

9am에 깨었다. 텐트 바깥으로 고개를 내미니 찬 바람이 휙 분다. 텐트 속으로 머리를 들여놓고 어젯밤에 코펠에 담아놓은 물을 끓여 사제 스프를 듬뿍 퍼 넣고 라면을 끓였다. 금새 텐트 내부가 훈훈해진다. 뜨거운 라면을 먹으니 살 것 같다.

새벽 내내 내리던 비는 이슬비로 바뀌었다. 간단하게 헛둘헛둘 체조를 하고 텐트를 접었다. 텐트 등속의 캠핑 장비와 오늘 주행에 필요한 장비를 제외한 나머지 물건을 바리바리 싸서 샤워실 옷장 칸 너머에 올려두었다.

관리인 아저씨가 나타났다. 그에게 텐트 등속을 저 위에 올려놓을테니 저녁 때 사정 봐서 텐트를 바깥에 치겠다고 말했다. 알아 듣는다. 햐, 거참 희안하다. 한국어, 영어로 되는대로 말하면 대충 말이 통한다. 따로 일본어를 배우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접자. 관리인이 '키요츠케테' 라고 말했다. 하핫. 아는 문장이다. 일본 애니에서 들었던 문장이다. '몸 조심하쇼'. 댕큐~


아소베이 파크를 빠져나와(9.30am) 만제키시바(시바가 다리라는 뜻인 듯)까지 단숨에 갔다. 쓰시마는 원래 하나의 섬이었는데 일본군이 배를 통과시킬 목적으로 산 하나를 박살 내어 물길을 틀고 그 사이에 다리를 올렸다. 다리가 조그맣고 별볼일 없는데 여기가 쓰시마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하나로 소개되어 있다. 설마 고작 40여m 폭의 물길을 내고 일본인들이 파나마 운하를 만든 것 같은 흐뭇한 착각에 빠진 것은 아니겠지? 이 다리만 보더라도 쓰시마에 얼마나 볼꺼리가 없는지 알만하다.

다리 옆 휴게소에서 담배 한대 빨고 한가하게 짐을 다시 정리했다. 가랑비가 폭우로 바뀌었다. 일본 야후 기상정보를 뒤져 찾아낸 어떤 기상 캐스터는 20년 동안 기상예보만을 전문으로 하던 아저씨인데 후덕하게 생긴 미소띤 얼굴에는 프로페셔널의 자신감이 만면에 철철 넘쳐흘렀다. 그 양반의 예보에 따르면 올해 장마는 어이없을 정도로 일찌감치 끝났고 오키나와와 규슈에서 장마전선이 멀찌감치 이동했으며 쓰시마의 날씨는 한 동안 흐리겠지만 앞으로 3일 동안 비올 확률은 40%가 안된다고 했다.

분명히 그랬다. 첨단 전자기술과 훌륭한 기상과학에 세계에서 몇 대 안 되는 고성능 슈퍼 컴퓨터, 그리고 20년의 내력이면 아무리 비선형 동역학중 가장 어려운 체계라는 기상현상 예측이라지만 이제는 일기예보를 제대로 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 하다못해 20년을 해 먹었으면 그동안 쌓인 '감'으로 찍기라도 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일본이 왜 한국하고 똑같은 거냐?

목구멍으로 욕설이 치밀었다. 참자. 나잇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좋지 않은 상황에 부닥치면 자동사처럼 튀어나오는 욕설을 자제해야지, 애도 있는데. 이제부터는 욕이 튀어나올 때마다 노래를 부르자.

폭우를 보자 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기분이 저조해졌다.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섬이라서 하늘에 고작 구름 한 조각 떠 있어도 비가 내리는 사정은 이해한다. 하지만 하루종일 비가 온다는 건 좀 심하지 않은가. 특이한 것은 이게 분명히 빗속에서 찍은 사진인데 빗자국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카메라를 비롯한 작은 장비들은 집에서 음식을 쌀 때 쓰는 요리용 포장 비닐로 하나하나 쌌다. 요리용 포장 비닐은 무게가 거의 없을 뿐더러 크기가 알맞아 가방 속의 짐을 싸기에 적합했다.

텐트를 넣은 큰 배낭은 천몇백원을 주고 산 75리터짜리 쓰레기 봉투로 쌌다. 예전에는 김장용 비닐을 문방구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몇 군데 집 근처 문구점을 들러도 비닐을 팔지 않아 궁리 끝에 쓰레기 봉투를 생각해 냈다. 쓰레기 봉투는 그 목적상 비닐의 두께가 두껍고 튼튼하게 박음질되어 있어 내용물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가방을 쓰레기 봉투로 싸 놓으니까 정말 그럴듯 했다. 여차해서 우렁차게 노래가 튀어나올 상황이면 쓰레기통에 짐째 던져 버리고 아베 총리를 모욕한 후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노래는 그만 부르고 가자. 잘 가다가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를 잡았는데... 어어... 브레이크가 잡히지 않는다. 어.. 이러면 안되는데... 어어... 흙길이나 빗물 아스팔트에서는 자전거로 드래프트가 가능하다. 고속으로 코너를 회전할 때 뒷 브레이크와 앞 브레이크를 적당히 밟아주면서 자전거 차체를 기울이면 자전거가 기운 채 움직이지 않는 타이어가 아스팔트에서 미끄러진다. 원하는 만큼 미끄러졌을 때 회전방향 반대편 패달을 강하게 반바퀴 밟으면서 브레이크를 풀어주면 코너에서 직각 회전이 가능하다. 어쩌다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죽지 않으려고) 다시는 써보고 싶지 않다. 얼마만한 속도에 얼마나 미끄러질지 가늠이 안된다. '진짜' 산악 자전거를 타고 비포장 다운힐을 60kmh로 내려가는 것을 신나해 하며 이니셜D처럼 자전거로 '공도최속이론'을 완성할 생각이 전혀 없다. 멀쩡하게 살아서 집에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관광이다.

그렇게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아내는 요 며칠전 내가 자전거 타다가 두 차례나 사고날 뻔 한 적이 있은 다음 날 왜 헬멧을 안 쓰고 다니냐고 바가지를 긁었다. 내가 죽으면 자기는 과부가 되는데 아이를 대체 어떻게 키워야 한단 말인가? 항상 감정이 앞서고 비논리적인 아내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조심하자. 아내가 여행가기 전 만원짜리 여행자 보험을 들어줬다. 보험 들기를 미룬지 벌써 몇 년이 지났다. 아내의 바가지 이후 안전 운행 하겠다고 마음 먹었고 그래서 60kmh 이상은 안 하련다.

헬멧을 썼더라면 빗속 주행이 힘들었을 것 같다. 자전거 주행할 땐 항상 캡을 썼다. 챙이 안경을 적당히 가려줘서 빗물이 안경에 덜 닿는다. 비올 때는 캡이 최고다.

폭우 속에서 내리막길을 53kmh로 미친듯이 내려가(다행히 헤어핀이 아니다) 패달링을 안한 채 오르막길 중턱에서 자전거를 자연 정지시켰다. 상황을 좀 더 살펴보려고 자전거에서 내렸다.

빗줄기 때문에 안경알에 빗물이 방울져 있다. 얼마전에 6만원 주고 산 초발수 코팅 렌즈란 건데 이런 비에는 거의 쓸모가 없다. 브레이크 패드가 거의 다 닳아 위어라인이 사라졌다. 브레이크 레버를 끝까지 당겨도 패드가 림에 얄팍하게 닿는 정도, 림은 패드의 합성 고무(alloy면 합금일텐데 재질이 왜 사각사각하는 단단한 합성고무처럼 느껴질까?) 가 남긴 검은 띠로 시꺼멓게 뒤덮여 있다. 흠... 문제군.

체인을 살펴 보았다. 체인은 기름, 물, 먼지가 떡진 채 붙어 있다. 손가락으로 문지르니 쫄깃쫄깃한 본드같은 것이 묻어나온다. 체인이 뻑뻑하다. 한 3일 비를 맞았더니 체인도 맛이 갔다. 거참... 문제야.

일단 자전거를 질질 끌고 언덕을 올라가서 T자 도로 교차로의 인도에 자전거를 세웠다. 자판기에서 청량음료를 뽑아 마셨다. 하도 비를 맞아서 이젠 머리가 다 아픈 지경인데 음료수를 마시니 목부터 위장까지 시원한게, 평안해진다. 어떻게 할까. 이즈하라에 자전거 가게가 있을꺼야. 어디 마트에 들르면 체인에 칠할 방청제나 기름 정도는 구할 수 있겠지. 382번 국도는 비교적 평탄해서 브레이크를 심하게 잡을 일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비인데, 희망을 갖자.

자전거로 하는 첫 해외 여행이다. 앞으로 많은 여행이 내 인생 앞에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수업료를 치르지 않고 낼름 얍삽하게 집어먹겠다는 생각은 버리자. 자전거는 정직하다. 자전거는 몸의 일부같은 것이라 버리고 떠날 수 없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이란 책은 주제가 여행이고 자전거는 부자재 내지는 까메오에 불과했다. 자전거이기에 가능했다는 여행에 대한 격찬과 화려한 감상적 너즈레는 넘쳐나면서도 끊임없이 손을 봐야 하는 자전거 정비에 관해선 거의 말이 없다시피 했다. 인문학적 감수성의 너저분한 나열이 자전거 여행을 이끄는 동인이 될지는 모르나, 워낙 재미가 없고 혼자 치는 딸딸이 같아 무의미해서 집어던진 책이 되었다.

회의론자의 철학적 성찰이 넘치는 zen and the art of motorbike maintenance 같은 책이나 '나는 걷는다' 같은 책에서 배울 점이 많았다. 나는 걷는다의 주인공은 손수레를 끌면서 죽어라고 걷는다. 그의 손수레는 자주 고장이 나고 자주 손을 봐야 했고 손수레가 없으면 불가능한 여행이었고 그래서 손수레 때문에 여행을 멈추기도 한다. 그게 정상이다. 자전거 여행에 왜 자전거가 빠지냐?

우스개로, '자전거에서 가장 중요한 부속이 뭐냐'는 질문이 있다. 정답은 엔진이다. 자전거에 타고 있는 인간 엔진. 인간 엔진도 정비가 잘 되어 있어야 한다. 인간 마음의 정비는 건실하고 튼튼한 뚝심과 의지, 그리고 세계에 대한 건전한 회의를 갈고 닦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공학이 세계를 유지하고 개선하며 인류에게 새로운 비전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또한 믿는다. 그래서 쓰잘데기 없는 미사여구의 허튼소리 대신 생존에 필요한 자전거 정비 기술을 배웠다. 심지어 벽을 향해 치킨런을 하며 브레이크 감각을 익히기도 했다. 아스팔트에 납작하게 죽어있는 개구리같은 모양으로 벽에 아주 많이 박았다. no pain, no gain.

급경사의 다운힐 앞에서 자전거를 끌었다. 허허 웃음이 나왔다. 어떤 아저씨가 경험한 진부령의 그 눈물나는 사연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빙고. 커다란 VALUE 상점과 100엔 샵이 연달아 붙어 있다. 쓰시마 관광 안내지도에서는 100엔 샵도 쓰시마의 관광 포인트였다. 다이소와 뭐 다를 것도 없는 100엔샵이 관공지라니, 쓰시마, 너 정말 그렇게 볼 게 없는 곳이냐? 하여튼 100엔 샵에서 마땅한 물건을 구하지 못했다. 찾는 것은 방청/윤활제다. VALUE에도 없다.

그보다는 자전거에서 가장 중요한 부속인 엔진의 출력을 유지하기 위해 뭣 좀 먹어야겠다. 메가 밀크와 세일중인 빵을 사서 간단히 요기했다. 단시간에 에너지로 가장 잘 바뀌는 것은 탄수화물인데, 직접적인 경험이나 여러 문서를 살펴보더라도 바나나는 가장 극찬을 받는 음식이다. 포도, 감자, 고구마 따위도 마찬가지였다. 마땅한 대용물이 없을 땐 빵과 밥이 최고다. 운동이 끝난 다음에는 탄수화물보다 단백질을 섭취하는 것이 좋다. 격렬한 운동으로 파괴된 근육을 재생시키고 에너지를 축적해 둬야 하니까?

거리 상으로 얼마 안 남은 이즈하라에 가면 맛있는 거 많을테니 지금은 대충 때우자. 우유가 맛있다. 한국에서 지지리도 맛 없는 것으로 손꼽을만한 것이 우유와 오렌지 쥬스, 그리고 맥주다. 셋의 공통점은 물이라도 탄 것인지 맹숭맹숭해서 전혀 진한 맛이 안 나오고 특히 오렌지 쥬스는 단맛을 내려고 설탕 또는 아스파탐이라도 탄 것 같은 기분. 옆의 원예상가에 들러봐야 되는 거 아닌가 싶다가 이즈하라에 가면 자전거 상점이 있을테니 거기서 브레이크 패드를 교체하면서 기름칠도 하면 일석이조겠거니 싶다.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

교차로에 서 있다가 흘낏 뒤를 보니 건축용 자재를 판매하는 가게가 눈에 띄었다. 무작정 가게로 들어섰다. 히라카나, 가타카나 조차 읽을 줄 모르면서 선반에 놓인 스프레이 캔들을 살펴보았다. 옷! 우연찮은 발견. 용도를 그림으로 설명하는데 자전거 스프라켓이 그려져 있다. 방청제인지 자전거 오일인지는 모르겠다. 소레, 도조(이거 부탁합니다) 하니까 700엔이라면서 뭐라고 중얼중얼 거린다. 까막귀라 700엔을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냥 천엔 짜리 지폐를 건네니 300엔을 거슬러주면서 나나 하야쿠 라고 말했다. 하야쿠는 엊저녁 공부하기로 100이었다. 나나는 아마 7? 그러니까 700엔. 캬. 죽인다. 일본어를 하나하나 배워가는 이 맛.

가게 처마에 쭈그리고 앉아 작업 장갑을 껴고 체인 횡축을 앞뒤로 비틀어 보았다. 뿌지직 뿌지직 소리가 난다. 기름에 쩔은 모래 알갱이들이 강철 체인을 마찰하면서 나는 기분 나쁜 소리다. 불과 3일 전에 등유로 깨끗이 닦은 체인인데 이 모양이다. VALUE에서 슬쩍한 수건(가게의 포장대 앞에 비닐이나 박스로 포장하고 나면 손을 씻으라고 걸어둔 수건. 어쩔 수 없었다. 타월을 팔지 않는 것 같길래...)을 1/4 찢어 체인을 한번 죽 닦아주고 방청제 캔에 노즐을 꽂은 후 아낌없이 듬뿍 뿌렸다. 가스 압력이 높아 뿜어져 나오는 액체가 기름때를 밀어낼 땐 흡족했다. 스프라켓, 디레일러, 프리휠셋에 뿜어대니 기름때가 밀려나가면서 말끔해진다. 정말 기분이 째지게 좋다. 한참 작업하는데 가게 주인 아저씨가 나와 쳐다본다. 이것저것 묻길래 체인이 빡빡해서 기름을 치고 있다고 손짓발짓을 하니 자전거를 들어주며 기름칠을 도와준다. 아저씨에게 '자전거 가게'가 이즈하라에 있냐고 물었다. 어리둥절해 한다. '바이크 샵' 하니까 알아듣는다. 손가락으로 시내에 몇 개 있단다. 가서 물어보라는 것 같다. 댕큐 입니다.


드디어 이즈하라 시내 도착. 내 실수의 총합체인 이즈하라 항구에 들러 일단 눈도장을 찍었다. 오후 12.30pm.

문제 한 가지를 해결하고 나니 기분이 좋아져서 일단 가볍게 관광이나 하자고 마음먹었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 팜플렛에 다 적혀 있고 비문에도 적혀 있으니 기념물 설명은 생략. 꽃은 대체 누가 갖다 바치는 것일까? 이런 정성이라니. 결혼 축하 기념비 앞이 유적지라 한참 발굴공사가 진행중이다. 역사에 무지해 덕혜옹주는 듣도 보도 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비문 내용을 보니 정략결혼을 한 듯.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 앞에 있는 고려문. 야자수와의 묘한 조화. 조선의 통신사들이 쓰시마를 방문하면 이 문을 지나친 것 같다.



반쇼인 신사 입구


반쇼인: 쓰시마를 지배했던 여러 군주들의 위패가 세워진 사당. 쓰시마의 대표적인 관광지. 문이 닫혀 있어(휴관일?) 안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반쇼인


반쇼인


조선통신사비. 역시 관광사진은 재미가 없다. 조선통신사들이 오락가락 하던 시절에는 일본에 '햐쿠라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좋은 물건, 외래품을 뜻하고 어원을 살피면 백제에서 온 물건이란 뜻이란다.


1pm. 비가 잠시 그쳤다. '호카호카테' 라는 도시락 전문점에서 450엔 짜리 도시락을 사서 그 앞 공원에 앉아 먹었다. 역시 밥맛이 좋다. 일본인은 음식을 일종의 소우주라 생각하여 음식에 칸을 쳐두고(서로를 분명하게 구분짓는 선을 그어) 하나하나 서로 다른 맛을 즐긴다고 했던가? (개뻥 같은데) 오전 내내 비 맞다가 따뜻한 밥이 목구멍을 넘어가니 살 것 같다. 구분은 시장기 해소와 별 상관없다. 음식의 양과 질은 음식 모양과 상관 없는 한 단계 높은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이다! 나는 영양가를 잘근잘근 씹어 먹는다! 이게 기쁨이고 삶의 의미이고, 고생 끝에 맛있는 밥을 먹고 오이시 하면서 오열하는 남자의 인생이다!


하나도 남김없이 깨끗하게 비웠다. 나무 젓가락(와르바시?)이 한국에서 쓰는 것과 달리 목재의 밀도가 높고 나무 젓가락을 포장한 종이 안쪽에 이쑤시개가 들어있는 점이 한국과 다른 듯.


빗속에서 노래를 멈추게 해 준 이름모를 방청제/오일 anyway. 여러 가지 공구와 자전거 스프라켓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영어로 설명되어 있으면 더 좋았을텐데.

일본에서 어설픈 일어를 쓰는 것보다 영어를 쓰면 더 대접받는다는 말이 있었다. 그 말을 철썩같이 믿지는 않았지만 일본의 개화 후 물밀듯이 들어온 서양문물 탓도 있고(일종의 화물숭배) 일본어에 상당한 비율로 편입된 외래어의 사용 밀도로 보건대 일본인들이 서양 것에 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한국과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어쨌거나 영 단어와 한자 사용비중이 높은 한국어를 섞어 쓰는 것만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 정말 신기하다. 비슷한 한자문화권인 중국 여행할 땐 성조 때문에 말이 안 통해 환장하는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면 일본과 한국이 참 가까운 나라인 것 같다.


하치만구 신사. 쓰시마를 주행하며 길가에서 무수한 신사를 접했지만 이 정도 규모는 처음. 일본의 신사는 애니미즘의 본거지. 모든 (움직이는, 또는 움직이지 않는? 정지도 애니메이션의 여러 동태 중 하나니까) 것에 정령이 깃들어 있단다.


그런데 신사가 둘로 나뉘어 있다. 둘이 하나인지 둘이 둘인지 모르겠다.


바로 옆나라지만 일본 문화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 탑의 형태로 보건대 지배자/지도자/계급자의 신분과 지위에 걸맞는 일종의 위령탑이 아닐까 싶다.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구분하는 것일까? 둘이 둘이라면 하나는 실존했던 인물의 기념비가 되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민간 정령신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무언가를 상징하는 상징물이 아닐까? 하치=8이니까 8신을 모시는??


뭐 일본의 정령신앙 체계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 신사 입구 양 편에 여우 상이 많고 여우가 재물을 상징한다는 얘기 정도를 알 뿐. 사진의 해태 같이 생긴 짐승은 고마이누라 라고 하는 것 같은데 그 뜻이 '용감한 고구려개'라고 들었다. 말 타고 달리는 고구려인을 쫓아다니는 사납고 충직한 그... 맛없어 보이는 강아지구나.


왼편에 말이 보인다. 사람이 안 타고 있다. 그럼 혹시 대마도에 전래된 우수한 외래말에 대한 숭배...?


아. 이건 안다. 물을 떠서 왼손을 씻고 다시 오른손을 씻고 그 다음에 손바닥에 물을 담아 살짝 맛을 보고, 저 타월에 물 묻은 손을 닦는 것이지? 한국의 절간에서처럼 지나가는 과객의 목을 축이는 우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사에서 예의를 차리기 위한... 인간의 방법과 신령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겠지. 손은 씻는데 발을 안 씻는 것은 신령이 하도 신령스러워서 신전에 범접하지 못하게 아예 사전에 차단한다는 뜻이겠지. 같은 만신을 섬기는데 인도는 내부신전까지 사람의 발길을 허용하는 반면 일본은 내부 신전에는 사람이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고 사제만 접근하게 되어 있는 듯. 일본인들이 만신숭배에 관해 인도에 친숙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렇게 알만했다.


돌로 만든 위패인듯. 돌은 영원하니까. 그런데 순 김씨네. 하하


솔직히 말해 예술적인 감각은 좀...


허걱. 신사에 왠 폭탄들이지? 일본산 극우 원숭이들이 불현듯 생각났다. 이 사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저기 어디야.. 교토의 몇몇 건물들 빼고는 일본건물이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은 없다. 그런데 왠 새끼줄일까... 새끼줄의 보편적인 의미는 차단과 금지 였던 것 같은데(한국의 경우) 저건 무슨 의미일까. 일본인의 상징 체계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바로 옆나라인데 아는게 전혀 없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분위기가 을씨년스럽다. 하치만구 신사에 마리아를 섬기는 사당이 있다던데 혹시 저것 아닐까?


하여튼 쓰시마(시마는 아마도 섬이란 뜻일께다. 다께시마, 쓰시마 등등) 여행중 여러 신사를 보며 느낀 점은 을씨년스럽고 괘괘하여 인간 친화적이지 않다는 것. 머무르거나 쉴 공간이 없어 보인다는 것. 저 나무는 아마 녹나무인 것 같다.

관광은 적당히 접고 자전거 가게를 찾았다. 근처 어딘가에 쓰시마 관광물산협회(visitor center)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찾아가 봤지만 보이지 않고 공사중인 건물만 보인다. 옆에 향토민속관에 들어가 비지터 센터가 어딘지 물으니 공사중인 건물을 가르킨다.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는 동안 인부들이 제지하지 않는다. 나와서 조선통신사 비석 옆 건물로 가니 문이 닫혀 있다. 뒤돌아서자 향토민속관에서 관광물산협회를 물어보았던 아가씨가 서 있다. 서로 손짓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해보니 이즈하라 항에 관관안내소가 있다고 가르쳐 준다. 예쁜 아가씨다. 아리가또 하니 활짝 웃는다. 얼기설기한 이빨이 보인다. 이빨이 그래도 친절이 예쁜 아가씨다.

이즈하라 항에 가니 수많은 한국인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 관광 안내소의 할머니에게 바이크 샵을 물으니 항구 앞의 가게를 가르쳐 준다. 빗속을 달려 항구 앞의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진열된 가게로 갔다. 브레이크 패드를 보여주며 부품이 있는지 물으니 없단다(이이에). 그러면서 다른 가게를 가르쳐 주었다. 그 가게에 가니 일본의 전형적인 생활 자전거를 수리하는 곳이다.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내 자전거에 맞는 브레이크 패드는 자기 가게에 없단다. 친절하게 지도를 보여주며 382 국도에 면한 한 가게를 짚어 주었다. 가게에 들르니 역시 부품이 없단다.

여기저기 자전거 가게를 돌아다니다가 시간을 다 보냈다. 오후나에나 가미자카공원 등에는 들르지 못했다. 시간이 꽤 되어서 유타리랜드 쓰시마나 쓰시마후루사토 전승관, 가네다성유적지도 방문하지 못할 것 같다. 이즈하라 시내만 바둑판 훑듯이 샅샅이 쏘다녔다. 시내 구경도 할만하다. 쓰시마에 지진이 있던가? 건물이 나즈막하니 2층 이상 가옥이 아주 드물었다. 쓰시마에 별장 한 채 있어도 나쁘지 않겠다.

무가저택(사무라이 저택; 부케이시키) 부근을 두리번 거리며 배회했다. 자전거 가게가 통 보이지 않는다. 이즈하라 시내는 생각보다 크기가 작다. 시내 중심부에는 모스 버거 매장이 있다. 배가 불러서 모스 버거를 맛보긴 좀 그렇고. 3.30pm.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가다가 마트에 들러 저녁꺼리도 준비해야 한다. 아쉽지만 쓰시마 특산물이라는 메밀소바(이리야키소바)를 못 먹어봤다.

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실망한 채 가게 앞에서 브레이크 패드의 허브 암나사와 브레이크 와이어의 긴장 정도를 조절해(이미 브레이크 레버의 앞 나사를 돌려 패드의 압박 정도를 조절하는 범위는 지났다) 어느 정도 브레이크가 말이 듣게 손봤다.

브레이크가 이 모양인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382국도에서는 크게 문제가 없다. 또는 날씨가 개이기만 해도 문제가 안 된다. 내일 신화의 마을 까지는 아소베이 파크에서 30km 안팎의 거리다. 브레이크 때문에 상당히 위험한 상황인데 마음은 그지없이 평화로웠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패달을 밟아 이즈하라 시내를 빠져나왔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VALUE에 다시 들러 저녁꺼리를 흡족하게 장만했다. 대형마트의 카운터 앞에는 식수대가 있다. 식수대에서 빈 물병이 판매된다. 빈 물병에 물을 얼마든지 담을 수 있다. 물은 찬 물과 뜨거운 물이 모두 나온다. 그런데 물은 별로 마시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 대신 음료수만 마셨다.


돌아가는 길에 잠깐 들른 쓰시마 그린 파크. 저 멀리 미쓰시마마치 해수욕장이 보인다. 쓰시마 그린파크 자체가 훌륭한 캠핑장이다. 여기저기 엄폐물을 잘 이용하면 돈 안 들이고 캠핑이 가능할 것 같다.


인구중 대다수가 노인과 어린이들 뿐이고 청년이 드문 쓰시마의 복지시설은 정말 훌륭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길래 이렇게 훌륭한 공원을 갖추고 있는 것일까... 인구도 별로 없으면서.


이건 뭐지? 애들 놀이기구 같은데?


한국 같았으면 사람들도 거의 방문하지 않는 저 작은 폭포의 수도꼭지를 잠궈 놓았을 터인데... 아내한테 전화하려고 전화기를 찾았지만 domestic 전용. 공중전화에 ISDN 외부 연결 포트가 달려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일본도 작년인지 제작년인지 FTTH가 도입된 상태인데 ISDN을 쓰는 사람이 과연 있을지 의문이다.


쓰시마 그린 파크에서 아소베이 파크까지는 30분이 채 안 걸렸다. 관리사무소의 문은 걸려 있다. 관리 사무소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아소만 전경. 섬의 침강에 의해 리아스식 해변이 형성되었다. 제주도와 달리 섬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다. 날이 궂지 않으면 아소만에서 대여 카누를 타고 돌아다니고 싶었다. 두어 시간에 6900엔이나 하는 값비싼 투어지만 카누를 타본 적이 없어 한 번 쯤은 타 보고 싶었다.

십여분 관리인 아저씨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6시가 안 되었는데 벌써 퇴근한 모양이다. 캠핑장 화장실에 도착하니 어떤 중년 부인이 강아지 산책을 시키고 있다. 개가 날 보더니 반가운 나머지 미친듯이 짖는다. 중년부인이 던진 공을 줏어서 갔다주다가 중간에 꾀를 부린다 -- 공을 줏어 화장실 뒤편에 슬쩍 숨어 공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헉헉 숨을 몰아쉬다가 충분히 쉬고 나면 다시 공을 물고 부인에게 뛰어간다. 자식. 지능은 있어 가지고.

오늘도 아무도 캠핑하러 오지 않았다. 중년 부인은 캠프장이 문을 닫는 6시 무렵 강아지를 자동차에 태우고 떠났다. 어제, 오늘 가끔 공원에서 자전거를 세우면 거기에 차 한 대씩은 꼭 있는데 주로 남자나 여자 혼자 차 안에 앉아서 뭔가 멍하니 있다가 내가 나타나면 곧 차를 몰고 사라졌다. 일본에 혼자 노는 사람들이 많다던데 그것 때문일까? 왠지 외로워 보이는 사람들.

나야 뭐, 나를 따라 자신을 채찍질하는 마조히즘 투어를 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그렇지 혼자라서 외롭다는 등의 감정을 느낀 적이 없다. 되레 예전에 장기여행 때 사람들이 날파리떼처럼 꼬여 귀찮아 한 적이 많았다. 숙소나 술집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한 잔 하는 것에는 별로 거리낌이 없다. 하여튼 사람 만나는 것은 귀찮다. 세네카 말대로 아무리 여기저기 사방팔방 돌아다니고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봤자 끝끝내 맞부닥치는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오늘은 쇼핑을 좀 과하게 했다. 라면 두 개, 어묵 한 봉지. 12가지 차 세트, 스프 4봉, 바나나 과자, 안주용 햄, 그리고 사뽀로 맥주 draft one.

'남자라면 입 닥치고 사뽀로 맥주를 마시자' 라는 옛날 광고문구 때문에 훗카이도에 가고 싶어졌다. 훗카이도에는 어쩐지 제대로 된 일본식 선술집이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재밌게 본 '마구로와 일본인'도 일본의 최북단 근처다. 눈 내리는 어느 추운 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 가기 전 얼핏 불을 밝힌 선술집에 들러 따뜻하게 데운 사케에 어묵 한 점 먹고 낯 모르는 사람들과 간빠이를 외치며 껄껄 웃어보는 것. 박여사는 예전에 말하길, 훗카이도에 가려면 꼭 겨울에 가란다. 눈이 30cm씩 올텐데 자전거는 어쩌라고?


500엔짜리 도시락. 이것만큼 가격대 성능비가 좋은 식사가 있을까? 한화로 3700원 가량. 먹으면 배부르다. 다만 나물 등의 야채 식단에 익숙한 만큼, 부실한 야채와 국이 없어 먹어도 뭔가 부족함이 느껴지는 식단. 끓는 물을 부으면 즉석으로 먹을 수 있는 미소된장국을 팔았지만 정작 수퍼에서 찾아 헤멨던 것은 어묵국이었다.


깨끗이 비웠다. 짜장면을 먹고 나면 다꾸앙으로 짜장면 소스를 긁어 깨끗이 먹어치웠다. 일부분은 절 음식 먹던 버릇 때문이고, 일부분은 음식을 남기면 안된다는 옛날 교육 때문이기도 하고, 일부는 그렇게 깨끗하게 비운 그릇을 보면 기분이 좋아져서 였다. 그런 습속을 다른 사람들은 다소 변태 취급해 주셨다.


7pm. 비가 멎어 소화도 시킬 겸 아무도 없는 캠핑장 주변을 배회했다. 앞 건물은 집회장.


호숫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바닷물. 아소베이 만의 복잡한 해안선 구조 때문에 바다임에도 파도가 거의 없다. 흡사 호숫가 같다. 바다인데 마치 호수처럼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이색적인 모습.


선착장. 물고기가 가끔 튈 뿐 적막하기 그지 없다.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뭍과 바다 사이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게들 중 하나.


밤에 출출할 때 라면에 넣어 끓여먹으면 어떨까. 아서라. 뒷발로 지긋이 밟아 게를 잡았지만 곧 놓아주었다.


Video: 아소베이파크 캠핑장 게


을씨년 스러운 화장실. 이층은 2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깔끔한 객사 또는 관리인 숙소.


7.20pm. 아소베이 파크 캠핑장 전경.


해가 졌다. 왠일인지 비가 안 온다. 버너에 불을 붙이고 햄을 볶아 맥주 안주로 먹었다. 일본 맥주들은 저녁 식사나 목욕 후 한 잔 가볍게 마시는 용도, 어느 음식에 곁들여도 그다지 튀어 보이지 않는 연한 깔끔함과 시원함이 특징인 것 같다. 한국 맥주의 몰개성함/특색없음에 질린 상태였고 그래서인지 한국 맥주가 베트남, 중국, 심지어 태국 맥주만도 못하게 느껴졌다. 브류어리 기술이 그렇게 형편없는 것일까? 왜 그렇게 '상대적으로' 맛이 없는 걸까.

일본 맥주 가격이 의외로 싸서(환율 때문이지만) 여행 기간 내내 마셔주기로 했다. 어제도 마시지 못한 것이 사뭇 안타깝기만 하다. 5% 500ml짜리니 대낮에 마셔도 부담이 없을 것이다. 중국 여행할 땐 하루에 서너잔씩 끼니때마다 7%짜리 500~1000ml의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마시면 세상이 아름답고 정말 좋았다. 그래서 노래가 절로 나왔다. 윌 아이 비 핸섬? 윌 아 비 리치? 아 텔 뎀 텐덜리. 케쎄라쎄라, 왓에버 윌 비 윌 비. 더 퓨쳐스 낫 아우워스 투 씨, 케쎄라 쎄라~ 당시 중국 여행은 말이 전혀 통하질 않아 될대로 되라 여행이었다.


8.30pm. 텐트의 플라이를 벗겼다가 다시 덮었다. 밤에는 쌀쌀할 것이다. 날이 어두워져서 뭐 할 것도 없다. 슬슬 잘 시간이다.

mp3를 들으며 가져온 얇은 소설을 한두 페이지 읽어보았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김씨 아저씨한테 빌린 James Hogan의 1977년 작품인 Inherit the Stars인데 쌔근한 최신기술과는 거리가 먼 구리구리한 70년대 스타일의 SF다. 투과성이 좋은 뉴트리노를 이용한 스코프는 아직 개발되지도 않았고 또, 여전히 앞으로 등장할 최신기술에 속하는 것이긴 하나... 인류가 즐겨하던 취미생활인 전쟁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세계 정부 구성을 목전에 둔 채 우주로 막 진출할 무렵, 5만년전의 우주비행사 시체가 뜬금없이 발견되는 것으로 얘기가 시작된다.

부산에서 비록 50여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이 괘괘하고 적막한 캠핑장에 나 혼자 앉아 기분좋게 취해 있으니 한국과의 거리가 거진 안드로메다 성운과 지구만큼이나 떨어져 있는 듯하여, 분위기가 얼추 SF스러워 굳이 SF소설이 주는 실세계와의 주관적 거리감(소격화)의 확보가 필요없을 정도였다.

바르는 모기약을 팔 다리 여기저기 발랐음에도 집요하게 달라붙는 모기떼와 스르륵 스르륵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 그리고 강산의 적막감. 하루종일 비를 맞아 머리를 맑고 투명하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아내, 딸아이, 일 등은 굳이 생각해야지만 머리 속에 떠오른다.


디지탈 카메라에 PC로 옮기다 만 아이 사진이 남아 있었다. 이 아이가 자라면 제 부모처럼 여행을 다니게 될까? 말 타고, 옆에 맛 없어 보이는 강아지를 데리고. 여행은 재테크, 노후설계에 도움이 안된다.

아무 생각없는 머리로 텐트로 기어들어가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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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5일간 휴가를 냈다. 2년만에 휴가인 셈인데 그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피곤했다. 뭔가 머리를 식힐 것이 필요했고 휴가계를 내라길래 6월초에 낼름 제출했다. 금요일 미팅은 장시간 이어졌다. 끝날 때쯤에야 오늘이 환전 가능한 마지막 날이란 것을 깨달았다. 은행 마감 직전에 도착해 간신히 돈을 환전했다.

씨티은행이 날이 갈수록 마음에 들지 않는다. 환전 수수료 할인을 받으려고 전날 인터넷으로 환전 예약을 해놨더니 환전하려는 돈이 거의 쓰지도 않는 외환거래 통장으로 들어갔다. 어안이 벙벙. 시티은행의 홈페이지에는 그런 내용에 관해 일언반구 말이 없었고 아침에 찾으러 갔을 때 외환거래 통장이 없으면 인출이 안된다고 해서 되돌아왔다. 하루가 지나고 외환거래 통장을 들고가서 은행 마감 시간 전에 환전을 하려니 적지않은 환전 수수료를 내란다. 휴...

6/30 격주 휴일

여행 전 준비물: 여권, 여권 복사본, 캠프장 예약 복사본, 카메라, 미니삼각대, AA 충전지 4알, AAA 충전지 4알, 휴대폰, 작은 수첩, 볼펜, 테이프, 모포, 휴지, 얇고 큰 비닐 봉투, 읽을만한 작은 책 한 권, 사제스프.

의약품: 마데카솔 연고, 반창고 4장, 타이레놀 몇 알, 항생제 몇 알

구매한 물건: 1인용 텐트(35000원), 얇고 부피가 작은 은박 깔개(7000원), 튼튼한 실(1000원), 바르는 모기약(5000원), 선 블럭 크림(6800원), 여행용 세면 도구 세트(4200원), 미니 버너(17000원), 1인용 코펠(23000원), 가스 1통(?원), 쓰레기 봉투 75리터(?원), 100리터 (?원)

옷가지: 져지 상하의(28000원), 쿨맥스 반팔 상의, 수영복 하의, 비닐비옷, 양말 2켤레, 장갑, 모자(캡).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 케이블 타이, WD-40 조그만 것.

오전에는 자전거를 정비했다. 비 맞을 것에 대비해 양 바퀴 베어링에 그리스를 듬뿍 발라 주고, 주요 구동부에는 테프론 오일을 듬뿍듬뿍 쳐줬다. 야후 일본 사이트의 일기예보를 읽어보니 규슈 쓰시마의 날씨가 심상치 않다. 일요일 비, 월,화,수 흐림, 목 비. 첫날과 마지막 날에 비를 맞을 것 같다. 적어도 한국의 일기예보처럼 엉터리는 아니겠지? 아쉬운 것은 업무 때문에 시간에 쫓겨 구입하지 못했던 방청제(WD-40)와 테프론 오일.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경로 설정을 시간 내에 하지 못했다. 다음의 GPSGIS 동호회 자료실에 얼마 전에 대마도 DEM 지도가 올라왔다. 그것과 월초에 대마도 부산 사무소의 게시판에서 주문한 지도를 참조해서 간략한 경로 정보를 일단 구성했다. 구글맵과 GPS Trackmaker를 오가며 대강의 도로 윤곽을 만들었다.

아내는 휴가여행 간다고 오랫만에 고기 먹으로 가잔다. 준비할 것들이 아직 많은데... 아내가 먹고 싶어하는 눈치라 나가서 소불고기에 밥을 먹었다. 집에 돌아오니 오후 8시가 넘었다. 밤 10시 30분에는 출발해야 시간을 맞출텐데 뭐 준비해놓은 것이 있어야지. 일단 허겁지겁 전지를 충전기에 걸었는데 10시가 다 되어도 충전이 덜 되었다. 일단 빼내서 가방에 물건들을 우겨넣고 자전거에 실었다. 밤 10시 40분 무렵 황망히 출발.

강변 도로에 이르자 비가 살살 오기 시작한다. 뒷 잔차 두 대가 추월한다. 상대속도는 1~2kmh. 여행만 시작했다하면 다짜고짜 비를 맞는 것은 무슨 징크스일까? 라고 생각하며 한가하게 자전거를 몰고 가다가 능력도 안되면서 괜히 추월해가는 잔차를 보니 약이 올라 비 때문에 거의 인적이 없는 도로를 고속주행하기 시작했다.

두 친구는 쌔근하게 잘 빠진 값비싼 자전거와 자기 몸뚱이 뿐이지만 나는 15kg짜리 유사 MTB에 7kg짜리 짐을 얹어 상당히 중량감있게 움직인다. 하지만 시속 23kmh로 달리는 상대를 27kmh로 추월하는 것은 자전거 3년 탄 자존심과 관련이 있다. 쫓아오지 못한다. 하하하. 이런 부질없는 만족감이라니... 강남 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 비를 흠뻑 맞았다. 1시간 35분 걸렸다. 경부선 버스 타는 곳을 찾느라 좀 헤멨다.

가만, 비상식량과 커피믹스를 챙기지 못했군. 아참, 집 열쇠도! 서두르다 보니 실수 투성이다.

창구에서 이틀 전에 예약한 표를 찾으려고 씨티은행 카드를 내미니 은행 사정으로 서비스가 중단되었단다. 씨티은행이 한미은행과 합병된 후부터 뭐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어 3-4개월에 한 번은 민원을 냈다. 예를 들면 기차 시간 임박해서 예매한 기차표를 뽑으려니 은행 전산망이 다운되어 차시간을 놓치거나, 서비스가 지금처럼 일시 중지되거나, 외국에서 거래하려고 보니 불법거래로 의심되어 카드 사용을 중단시키거나, 심지어는 현금이체를 하려는데 은행 전산망이 세 차례나 다운되었다.

예전에 장기 여행을 할 때 씨티은행의 현금카드가 외국에서 현금인출할 때 꽤 도움이 된다는 얘기를 듣고 만든 적이 있다. 도움은 커녕 국제 현금 카드로 돈을 뽑을 수 있는 ATM을 찾느라 일정을 변경하는 등 갖은 고생을 다 했다. 환율이 일반 VISA 신용카드보다 나쁘면서 수수료는 수수료 대로 빠져나가 실질적인 이익이 없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주거래은행으로써 내가 받은 이익이 아무 것도 없다. 심지어 작년에 아시아나 마일리지 카드를 발급 받으려고 할 때는 주거래은행임에도 카드 한 장 만들려고 생쑈를 다 했다.

오전 12시에 간신히 백업용으로 가지고 있던 현대카드 동양종금 CMA 카드로 현금 서비스를 받아 심야우등 표를 구매했다. 32300원. 이틀에 걸쳐 씨티은행으로부터 엿먹고 나니 월급 통장을 갈아버리자는 결심이 섰다. 우대고객은 무슨 얼어죽을 우대고객이냐.

7/1

자전거를 버스에 실었다. 출발했다. 새벽 3시 버스가 휴게소에 멈춘다. 비가 줄기차게 내린다. 휴게소로 뛰는 동안 비를 흠뻑 맞았다. 오뎅 하나 사서 먹었다. 저녁이 부실해 배가 고프다. 다시 비를 흠뻑 맞으며 버스에 올랐다.

잠에서 깨니 오전 5시 30분. 부산에 도착. 비가 퍼붓고 있다. 도저히 자전거를 몰고 부산국제여객터미널까지 갈 엄두가 안 난다. 버스에서 내려 자전거를 빼내는 그 잠깐 동안 퍼붓는 비를 맞으니 몸이 으실으실 떨린다. 자판기에서 평생 거의 먹지 않던 따뜻한 커피 한 잔 뽑아 마시고 버스 터미널에 붙어 있는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무거운 자전거를 들고 계단을 차곡차곡 내려갔다. 정말 무겁다.


자전거를 지하철에 싣는 것이 아직 법제화된 것 같지는 않지만, 검표기 앞에서 역무원이 제지하지 않는다. 자전거는 장애인석에 실으면 된다. 장애인석은 보통 지하철 마지막 차량 칸(주행 방향의 마지막 칸)에 설치되어 있다. 지하철역의 계단을 어떻게 내려가라는 것인지 몹시 의문이 생기지만 지하철 차량에는 잊지않고 장애인석이 설치되어 있다.

버스터미널과 인접한 노포동 지하철 역에서 부산국제페리터미널이 있는 중앙동 역까지 대략 40여분이 걸린다. 비 때문에 선로가 미끄러워 지하철이 서행한다는 메시지가 흘러 나왔다. 이왕이면 걸죽한 부산 사투리로 안내방송이 나왔으면 좋으련만.

차량 진동이 심해 자전거가 쓰러졌다. 콰당 하는 듬직한 소리가 차량내에 울려퍼지자 자다 깬 사람들이 놀라 흠칫한다. 히히 웃다가 바퀴 사이에 가방을 괘어놨다.

지하철 역 바깥에는 아직 비가 내리고 있다. 짐을 비닐로 싸고 우비를 입은 다음 역 바깥으로 나왔다. 국제 페리 터미널이 역에서 몇 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놈에 비.

대아고속해운(부산-대마도간 페리를 운행하는 회사) 에 며칠 전에 대마도행 편도 배편을 예약했다. 그들 홈페이지에는 부산->이즈하라 편도가 65000원으로 나와 있고 왕복이 13만원인데, 히타카쓰->부산 편도는 6900엔으로 적혀 있다. 최근 환율을 고려하면 왕복 배편을 끊지 말고 엔화로 계산해 돌아오는 배편을 히타카쓰에서 끊으면 훨씬 이익이 되리라 생각했는데, 무슨 착각을 했는지 창구 직원더러 왕복 배편을 달라고 했다.


3년 전에 자전거를 산 이유가 일본 여행 때문이다. 여러 나라 여행자들에게 듣기로는 뉴질랜드 다음으로 일본이 자전거 여행하기에 좋은 곳이란다. 몇 개월 자전거 사서 연습 좀 해보고 일본에 가려던 계획이 3년이나 미뤄진 셈이다.

첫번째 목표는 대마도, 두번째는 후쿠오카를 기점으로 한 규슈 원점 회귀 코스, 세번째는 후쿠오카에서 오사카/도쿄까지, 네번째는 훗카이도 일주 코스다. 나름 그렇게 계획을 세웠다. 맞은편에 후쿠오카 행 페리 창구가 보인다. 언제쯤 저 곳에 가볼 수 있으려나...

출입국 관리 직원이 자전거 타고 대마도 가냐고 묻는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히죽히죽 웃었다. 괜찮아요. (늘 있는 일인데요 뭐) 짐 엑스레이 검색 중 가방에서 가스통을 발견한 직원이 claim tag를 끊어준다. 가스통은 따로 선적하고 이 claim tag를 내리기 전에 배 승무원에게 보여주면 가스통을 돌려줄 꺼라고 한다.


출국 카운터를 거쳐 배에 올랐다. 십수 년 전에 전국일주를 한 적이 있다. 부산에서 돈이 떨어져 부산역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꿔 기차를 탔다. 하여간 그때는 돈 없이 잘 돌아다녔는데, 대학생 형들 흉내를 냈던 것이다. 그들에게 무전여행은 일종의 자랑스러운 무공훈장이었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된 이후 여행씬은 완전히 달라졌다 -- 국내에서 하던 거지짓을 해외로 확장한 것이다. 나는 그 10년 후에야 간신히 거지(또는 구도자)여행 대열에 낄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부산 방문은 무척 오랫만이다. 부산에 관해 기억 나는 곳이라야 해운대와 광안리 해수욕장, 자갈치 시장, 그리고 항구 부근의 러시아 간판이 전부지만.

생각해 보니 해운대 해수욕장(?)에 김씨 아저씨와 단 둘이 내려온 적이 있다. 해수욕장에서 썬텐을 해보자는 계획이었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썬텐 크림을 덕지덕지 바르고 해변에 누워 비를 맞았다. 암울했다.

아무튼. 예전과 비교해 보면 부산이 엄청나게 큰 도시가 된 것 같다. 저렇게 많은 아파트가 있었나? 저 크레인은 독에서 배를 건조할 때 쓰는 것 아닌가? 아니면 컨테니어 하적용?


8.40am. 배가 출항한다. 빗물이 창가를 적신다. 바깥 풍경이 흐릿하다. 직원들 대화를 들어보니 손님은 모두 150명. 자리가 꽉 차지는 않았다. 그중 자전거를 끌고 온 사람은 나 혼자다. 직원이 좌석 뒷전의 물통을 쌓아둔 곳에 자전거를 거치하면서 원래 자전거는 못 싣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이 빗 속에 어떻게 다닐꺼냐고 되레 걱정한다. 완전 무장한 아저씨 둘이 대마도로 낚시여행을 간단다. 나를 포함해 세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단체 관광객인듯 하다.

가이드가 단체관광객들에게 귀미테를 나눠준다. 내 뒷좌석의 아줌마는 배멀미로 혼쭐이 났다. 아이고, 윽, 아이고 하는 작은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배가 상하로 크게 흔들렸다. 뭐 나야 배멀미를 안 하니까 배가 크게 흔들릴 수록 재밌어 했다.

아침에 먹은 커피 때문에 정신이 말똥말똥 한 것이 영 안 좋다. 버스에서 잠을 좀 자두는건데.

멍하니 앉아 있었다. 1시간 40분이 지나 흐릿한 빗속에 섬의 윤곽이 드러났다. 왜 이렇게 빨리왔지? 2시간 40분 걸린다더만. 배가 정박하기 전에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카운터에 가서 클레임 태그를 보여주니 가스통을 돌려준다.

너무 일찍 도착해 약간 어리둥절한 가운데 이즈하라 항에 닿았다. 비가 내린다. 자전거가 걸리적거려 짐이 많은 낚시꾼 아저씨 둘과 함께 마지막으로 내렸다. 평소 입출국할 땐 다람쥐처럼 빨리빨리 움직였는데 이번에는 안하던 실수를 한 셈 -- 입국수속에만 40여분이 걸렸다.

입국장이 달랑 건물 한 동으로 두 명의 입국 심사관이 참 꼬치꼬치 살핀다. 건물이 허름하고 영어가 안 통해 흡사 제3세계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입국심사관이 어디서 묵을꺼냐고 묻는다. 프린트해 둔 '캠핑장 예약 신청서'를 꺼내 보여줬다. 손짓 발짓으로 미우다 캠핑장은 지금 문을 열지 않았단다. 이이에, 나이. 젠장. 일어 공부를 좀 해뒀어야 하는데. 뭔 소린지 알아먹을 수가 없잖아. 결국 고개를 끄떡인다.

입국장 바깥으로 여전히 비가 내린다. 짐을 비닐로 잘 싸고 우비를 챙겨 입었다. GPS를 켜니 아직 위성 신호를 잡지 못한다. 3-4분 빗속에서 기다렸지만 여전하다. 간신히 시그널이 잡혔다. 뭔가 좀 이상하다. 집에서 GPS Trackmaker로 입력한 waypoint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이즈하라 항도 나타나지 않았다. 시내 중심쯤에 위치한 화장실에서 져지로 갈아입고 우비를 걸친 후 짐을 다시 챙겼다. 지도를 살펴 이즈하라 항의 시내 윤곽을 그려보았다. 자전거로 시내를 서너바퀴 돌아봤지만 알만한 지명이 눈에 띄지 않는다. 뭔가 좀 이상한데?


다리에 올라 이즈하라 항을 쳐다 봤다. 시내가 지나치게 작다. 적어도 남북으로 1km 이상되고 시내를 관통하는 382번 도로와 몇몇 지방도가 겹쳐야 하는데...


이렇게 작은 항구가 이즈하라 항이란 말인가? gps에 aziro가 찍힌다. 아, 아는 지명이다. '아지로의 연흔'이구나. 일단 오늘은 아소베이 파크 캠핑장까지 갈 예정인데, 이즈하라 시내에서 30km 가량 떨어져 있고 자전거로 한두 시간이면 도착할 거리니 이즈하라에서 관광 좀 하며 빈둥거리다가 천천히 가도 되겠지 싶어 일단 아지로의 연흔을 찾아갔다.


신선한 삼나무숲 한가운데 억수로 쏟아지는 비 때문에 범람한 작은 개울이 흙탕물을 튀기며 흐르고 있다. 사람의 흔적이 닿지 않은 원시 천연림에서 느껴지는 신선한 내음. 하늘을 가린 숲 속을 가로지르며 아기자기하게 이어진 구불구불한 도로가 꽤 재밌다. 재밌는 여행이 될 것 같다.


아지로의 연흔. 화강암에 새겨진 파도의 흔적. 멀리 항구를 떠나는 배(타고왔던 배)가 보인다.


파도가 약해 바닷가를 첨벙거리며 걸었다. 파도의 흔적이라고? 흠... 암석의 한층에 난입된 다른 층이 켜켜이 쌓이며 압축되다가 조산작용으로 일부분 바닷가에 노출되 약한 층이 파도에 깎인 것이 아닐까..


거대한 통짜 바위에 조가비 껍질이 다닥 다닥 달라붙어 있다. 물이 몹시 맑다.

이즈하라 항을 중심으로 지형지물을 파악하기 위해 시내 곳곳을 누비고 다녔지만 도무지 알만한 지명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쯤에는 반쇼인이 있어야 하는데, 이쯤에는 하치만구 신사가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네? 혹시 내가 GPS Trackmaker로 작업하는 도중에 waypoint가 엉뚱한 곳으로 옮겨가 버린 것이 아닐까?


골목길 사이를 헤메다 빗 속에서 찍은 사진. 바다로 향하는 저 작은 개울에 물고기들이 오락가락한다.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어 흡사 유령도시 같다.

한 시가 좀 넘어 시장기가 돌았다. 어젯밤부터 먹은 것이 거의 없어 배가 고프다. 이즈하라에서 헤메는 것은 관두고 이제 슬슬 아소베이 파크로 향해야겠다. GPS가 쓸모가 없으니 일단 382번 도로를 따라가보자. 그래서 시내를 뺑뺑이도는 짓을 그만두고 북쪽을 향해 무작정 달렸다. 가다보면 뭔가 나오겠지.

가는 길에 'VALUE'라는 커다란 할인매장이 나타났다. 아직 환율이 익숙치 않아 계산이 잘 안되지만 100엔을 대략 760원으로 계산해서 매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한국의 물가와 비교했다. 의외로 한국의 물건 가격과 큰 차이가 없다. 파 한단에 140엔 즉 1000원 가량. 서울에서는 700원 정도. 인스탄트 라면 한 봉이 80엔 가량(600원). 도시락 500엔(3800원). 반찬이 대략 200-300엔. 밥 한 공기가 100엔 가량. 반찬 두어가지와 밥을 사느니 도시락 하나 사 먹는 것이 가격대 성능비가 좋아 보인다. 과일은 몹시 비싼 편이다.

음료와 도시락을 하나 사들고 카운터에 가니 계산해 주면서 예쁘게 포장 해주고 얼마얼마라고 큰 소리로 말한다. 계산대에 가격이 표시되니 굳이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상관없다. 사실 준비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내가 아는 일본어는 몇 개 되지 않았다. 딴지일보에 따르면, 일본어는 '도조' 한 마디만 알아도 여행이 가능하단다. 그보다 약간 더 많은 단어를 알았다.

스미마셍 (실례합니다)
이쿠라 데스까? (얼마에요?)
이치,니,산 (1,2,3, 그 다음은 모른다. 안 외웠다 -_-)
오하이오/곤니치와/곰방와(아침,점심,저녁 인사)
아리가또[고자이마스] (감사합니다)
혼또니 아리가또[고자이마스] (매우 감사합니다)

도조 (뭘요)
도조 (괜찮습니다)
라멘, 도조 (라면 주세요)
고레, 도조 (그거 부탁합니다 -- 뭔가 주문할 때)
이즈하라, 도조 (이즈하라가 어디에요?/이즈하라로 부탁합니다 -- 어딘가 가고 싶을 때)

사실 아는 일본어라고는 웃쓰, 야메떼, 이이에, 오네상, 이따이 정도였다.

근처 한적한 공터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일본에 대해 배운 상식 중 한가지는 콘비니(편의점)에서는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어 있어서 뭘 사든 바깥에 나와 쭈그리고 앉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인도 다 그렇게 하니까 거지같아 보여도 기죽을 것 없다. 그런데 아무도 공터에서 음식을 까먹지 않았다. 왠지 거지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꿋꿋이 밥을 먹었다. 이게 바로 문화적 차이란 거야.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문화에 적응해야지.

이즈하라 시내를 배회하다보니 왼쪽 차도로 가는 것도 대충 익숙해진 것 같다. 2년 만에 해외여행이라 기분이 달뜨기도 했고 점심 먹는 내내 마치 축복이라도 해주듯이 비가 멎어 아, 이제는 날이 개이는구나 싶어 앞으로의 4박 5일 여행이 기대되었다. 도시락이 아주 맛있다. 일본인들은 쌀밥을 참 정성들여 지었다. 이런 싸구려 종합선물세트 도시락의 밥맛이 평소 한국의 왠간한 음식점에서 먹는 밥맛보다 좋다니 참 어이가 없다.

밥도 다먹고 기분도 좋아 이제 슬슬 출발하려고 주위를 둘러봤다. 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에는 내가 빠져 나온 곳이 'Hitakatsu'라고 적혀 있다. 히타카쓰 라니? 말도 안되잖아? 하하하. 그러다가 등골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혹시...? 지갑에서 배표를 꺼내보았다. 배표에는,


Busan -> Hitakatsu


라고 크게 적혀 있다.

허걱. 그럼 여태까지 헤메던 저 곳이 이즈하라 항구의 완전 반대편인 히타카쓰란 말이냐? 가슴이 철렁했다. 때마침 극적으로, 먹구름이 몰려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다시 VALUE의 처마 밑으로 허겁지겁 자전거를 몰고가 벤치에 앉아 대체 어디서 부터 잘못된 것인지 되집어 보았다.

나흘 전, 인터넷으로 대아해운고속 사이트에 접속해 이즈하라행 토요일(6월 30일) 배편을 예약하려고 했다. 대마도행 배편은 아직 인터넷으로 예약이 안된다. 그날은 만석이란다. 그럼 일요일은요? 일요일엔 배편이 있단다. 오케이 그럼 그걸로 예매해 주세요. 몇 시에 출발이죠? 오전 8:40분입니다. 이즈하라행 배편은 보통 오전 10:40에 떠나는데 홈페이지에 적힌 스케쥴이 틀린 거였군. 아마 성수기에 접어들면서 배가 증편된 것이리라. 그보다 급한 것은 닷새 전에 예약한 캠핑장 3곳의 도착 일자를 수정해 다시 국제 팩스를 넣어야 한다.

1주일 전 대마도 부산 사무소에 문의해 보니 캠핑장에서 숙박하려면 캠핑장에 예약이 필수란다. 속으로 그럴리가, 하다가 어떤 여행기에서 캠핑장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을 때 관리인이 퇴근하고 없어서 캠핑을 못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고 한다. 일본인은 집요하게 룰을 중시해 룰에 어긋나는 것은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라는 일본 문화 특유의 괴상한 풍속에 관한 글을 읽기도 했다. 문화적 차이니까 괴상하다고 말하지 말자.

사무실에 팩스가 없어 팩스를 보내려면 근처 문방구에서 한 장에 500원씩이나 하는 팩스를 보내야하는데(500원은 국내용 단가다. 해외는 단가가 어떻게 되는지 모른다) 인터넷 여기저기 검색해 인터넷으로 국제 팩스를 보내는 사이트 몇 군데를 알아뒀다. http://fax.empas.com

그런데 그날 공교롭게도 국제팩스 보내는 사이트를 비롯한 다수의 사이트가 중국의 개떼같은 해킹 공격에 당해 사이트가 다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팩스를 보내는데 4시간이 걸렸고 그나마도 실패해서 그 다음날 다시 간신히 팩스를 보낼 수 있었는데(업무 시간에 이런 짓 하면 죄책감을 느낀다), 이제 그렇게 예약한 것을 취소하고 다시 팩스를 보내야 한다.

팩스를 보낸 후 confirm fax를 그쪽에서 보내주는데 팩스를 받을 형편이 안되니 대마도 부산 사무소로 컨펌 팩스를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대충 컨펌이 났는데, 어제 예약을 취소하고 예약 일자를 하루씩 미룬다는 것을 일본어로 어떻게 써야할 지 몰라 캠핑장 예약 신청서의 비고란에 영어와 일어를 뒤죽박죽 섞어 다시 작성한 것을 인터넷 국제 팩스 사이트를 통해 보냈다. 부가세 포함해 장당 220원이다. 그런 팩스질을 3차례에 걸쳐 3군데에 보내고 다시 컨펌받는 복잡한 절차를 거친 것이다. 이런 간단한 일거리인데도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팩스 보낼 걱정 때문에 배편이 이즈하라 도착인지 히타카쓰 도착인지 확인하지 않았다. 배표를 받아들었을 때도 확인하지 않았다. 어차피 도착하면 어떻게 되겠지, 뭐 준비한 것도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GPS에 입력한 좌표가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을 때도 내가 좌표점들을 잘못 입력했거니 생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어젯밤부터 줄기차게 쏟아지는 재수없는 빗줄기를 바라보면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다. 기억이 맞다면 히타카쓰에서 아소베이 파크까지는 고저차를 고려하지 않고 대략 80km다. 하루에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다. 만약 여행일정을 변경해 히타카쓰에서 이즈하라로 역순으로 내려간다 해도 마지막 날에는 히타카쓰로 되돌아와야 한다. 차라리 그보다는 하루 일정 까질 각오로 아소베이 파크로 가서 히타카쓰로 올라오는 편이 낫다.

결심이 서자 자전거에 올랐다. 오후 2시다. 멍청하게 히타카쓰 시내를 한가하게 배회하지 않고 상황판단을 제대로 했어도 쓸데없이 낭비하는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저 여행 나와서 기분이 좋아 헤벌레 하고 있다보니 이런 이런...

어차피 gps보고 미리 설정해 둔 경로를 트랙백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지도를 보고 히타카쓰에서 아소베이 파크까지 가는 가장 편한 길로 보이는 39번 해안도로를 타기로 했다. 주욱 가다가 382번 국도와 만나는 지점에서 382번 국도를 타고 조금 진행하다보면 아소베이 파크가 나타난다. 출발했다.

비가 참 살벌하게 내린다. 쓰시마의 여름철 7,8월 평균 강수량이 350mm란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우 속에서 사실 걱정꺼리는 하나 밖에 없었다. 자전거의 체인과 구동부에 스며든 물이 녹을 만들어 체인을 뻑뻑하게 해서 주행을 힘들게 하는 것이다.

39번 해안도로는 그야말로 절경이다. 비가 이렇게 억수로 퍼붓는데도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삼나무 숲과 도로에 연접한 개울이 졸졸 흐르는 1차선(한국에서의 1차선 개념이 아니라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가는 도로폭 정도의 1차선) 지방도는 제주도의 1100 도로, 516 도로를 연상시켰다. 아니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도로는 처음 봤다. 해안선을 타고 가다가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해안으로 나오는 길이 계속 반복된다. 표고차가 40m 이내라 주행이 쉽다. 흡사 자전거 여행을 위해 만들어 놓은 도로같다. 10분에 한 대 꼴로 간간히 지나가는 차량들은 친절하게도 속도를 늦추거나 물을 안 튀기려고 크게 우회해서 자전거를 지나친다. 일본인들의 운전 매너가 훌륭하다.


Video: 쓰시마 39번 국도

이렇게 훌륭한 도로가 있는데 어째서 한국의 자전거 동호회에서 대마도 원정 자전거 여행이 드문 것일까? 쓰시마의 39번 도로에 비하면 제주도의 12번 해안도로나 한국의 동해안 해안 도로는 고개를 수그려야 할 판이다.

잠시 쉬면서 개울에 손과 발을 담궜다. 비가 하도 내려 우비 속까지 척척하게 젖었다.

아소베이 파크 캠핑장에 시간내에 도착하긴 글렀다. 벌써 6pm. GPS의 sunset 타임을 보니 7.30pm에 해가 진다. 비가 잠시 그쳤다. 1km만 달리면 항상 나타나는 자판기 앞에서 잔돈을 꺼내 음료수를 뽑아 먹었다. 500ml짜리 탄산음료 한병에 150엔. 한국돈으로 1200원 가량. 물은 120엔. 그렇다면 누가 미쳤다고 물을 사먹나? 30엔만 더내면 비타민씨가 듬뿍 든 기능성 음료를 마실 수 있는데.

배는 고픈데 먹은 건 없고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니, 그야말로 서바이벌 분위기가 물씬 난다. 작은 어촌 마을에 멈춰 어느 창고 처마 밑에서 오늘 예정은 가볍게 관광이나 하고 즐기다가 별빛이 총총한 밤하늘 아래 텐트치고 누워 mp3나 들으면서 스르르 잠드는 것이 일정 아니었나? 내 팔자에 그런 로또같은 하루가 있을리가 없지 신세한탄 하다가 흘낏 옆을 보니, 수퍼가 있다. 빙고. 이것이 바로 서민의 5천원짜리 로또 당첨이 아니고 뭐겠나. 알맞은 때에 먹이를 구할 수 있게 되다니. 하하. 수퍼에서 롯데 크런치 초콜렛 2개를 사서 하나를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빗물 때문에 쫄닥 젖어 이건 뭐...

자전거 앞에 트럭이 멈춘다. 트럭 짐칸에 아무 것도 실려 있지 않다. 운전수에게 부탁해 자전거를 싣고 아소베이 파크까지 직행하는 방법이 있다. 자동차로 가면 얼마 걸리지도 않고 돈을 받아봤자 몇푼깨나 하겠나? 어쩌면 불쌍한 나머지 공짜로 태워줄 지도 모르지. 태워 달라고 해, 말어? 천둥번개가 콰과광 울렸다. 트럭이 떠났다.

아무리 빈둥빈둥 관광을 부르짖어도 지난 십수년간 써바이벌 아닌 관광은 해본 적이 없다. 빌어먹을 빗물과 함께 운명을 받아들이자. 히치하이킹은 관두고 그냥 가자.


비가 잠시 멎은 틈에 전봇대에 매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쓰시마에 온 후로 온 사방에 매와 까마귀 투성이다. 평생 매 울음소리는 몇 번이나 들어보게 될까? 어린 시절에는 시골에 살아 병아리를 채가는 매를 자주 보았다. 그후로 주욱 못 보다가 안데스의 산악 지방에서 매와 흡사하게 움직이는 콘도르를 보았다. 천미터가 넘는 절벽의 틈새에서 활강하는 콘도르. 매, 콘도르 따위가 상승기류에 저항하며 공중에서 stance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날개를 살짝 살짝 틀어가며 제자리에 멈춰선 채 지상을 기어다니는 먹잇감을 뚜러지게 노려보다가 갑자기 날개를 비틀어 쏜살같이 땅으로 쳐박히듯이 빠른 속도로 활강한다.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시 떠오르면 어느새 발톱 사이로 꿈틀대는 무언가를 낚았다. 그러고서는 석양 속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 이건 내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보곤 하던 광경이다. 서울 도회 촌뜨기들은 그런 우아한 모습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매의 눈에는 내가 땅 위를 꿈틀꿈틀 기어가는 조금 큰 지렁이처럼 보이지 않을까?

이제 좀 날이 개려나? 기지개를 펴고 자전거에 올랐다. 왠걸. 다시 퍼부어 대기 시작한다. 10분 쉬고 50분 퍼붓는게 참, 학교수업마냥, 또는 군바리 훈련처럼 주기적이다. 해안에 인접한 39번 국도는 비록 고저차가 40m 내외지만 급격한 헤어핀 구간이 많다. 차가 거의 안 다니니 날이 맑으면 평속 40~50kmh로 다운힐에서 브레이크 감속 안하고 주행이 가능하지만 빗길이 미끄러워 여지없이 브레이크를 잡게 된다.

쓰시마에 오기 전에 브레이크 패드 걱정을 했다. 뒷 브레이크의 패드가 거의 다 닳아 wear line이 거의 사라진 상태인데 이렇게 계속 브레이크를 밟아대면 나중에 브레이크가 듣지 않을 것이다.

시험삼아 평지에서 앞/뒤 브레이크를 끝까지 당겨 보았다. 빗물 코팅이 된 아스팔트 도로에서 주아악 미끄러지며 30m 이상 나간다. 그러고도 완전히 정지하지 않는다. 허걱. 이거 좀 위험한데? 여분의 브레이크 패드를 챙겨오지 않았다. 진부령에서 브레이크가 듣지 않아 신나야 할 다운힐 구간에서 끌바(자전거 끌고가기)를 해야만 했던 눈물겨운 사연을 자전거 동호회에서 본 적이 있다. 비지땀을 흘리며 혼신의 힘을 다해 꼭대기 휴게소까지 올라가서 자전거를 끌고 내려와 봐라. 그저 허허 웃음 밖에 안 나오지.

382 국도로 들어섰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382 도로로 들어서자 길이 넓어졌다. 갓길도 제법 있고 차량 소통량이 늘었다. 하지만 길은 밋밋하고 재미가 없어졌다. 흐린 날이라 금방 어둑어둑 해 졌다.

아소베이 파크 캠핑장 입구에 다다랐다. 7pm. 대략 5시간쯤 달린 셈이다. 비가 안 왔더라면 더 일찍 도착했을 것이다. 이즈하라에서 히타카쓰까지 대략 100km 가량, 자전거로 하루면 주파할 수 있는 거리다. 물론 그렇게 달리면 정말 재미가 없을 것이다. 자전거 '여행'을 온거지 자전거 '주행'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관광이란 말이다!

아소베이 파크 캠핑장 입구는 쇠사슬로 막혀 있다. 통행 금지. 6pm에 캠핑장이 문을 닫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예약을 했고 예약을 했으니까 관리인이 기다려주거나, 캠핑장 안에 들어가 캠프를 하는 것이 워낙 당연하게 여겨져 자전거를 쇠사슬 너머로 넘겼다. 일단 캠핑 후, 저간 사정을 빌자. 옆 샛길에서 짐차가 나타나더니 백밀러로 흘낏 보고 올라간다. 아, 저 아저씨가 관리인이구나. 저 트럭을 쫓아가면 되겠구나! 고개를 한 두 개 넘어 헉헉 거리며 올라가니 캠핑장 관리 사무소가 나타난다.

아저씨가 반겨준다. 일본어로 인사했다. 곰방와! 굿 이브닝! 자랑스럽게 캠핑 예약 신청서를 내밀었다. 말은 안 통하지만(나는 영어로, 그 아저씨는 일어로 서로 유려하게 말했다) 팩스, 레저베이션, 예야꾸(예약), 캠핑, 투데이, 투모로우 정도는 서로 대화가 통해 내가 여기서 2박을 머무를 예정이라는 것을 아저씨가 알아 들었다. 그런데 컨펌까지 받았는데 예약된 것이 없다. 다시 신청서를 작성했다. 뭐 예약에 무슨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캠핑장 예약 신청서'는 떳떳한 부적의 역할만 하면 되는 것이다.

1박 캠핑이 1000엔이란다. 600엔으로 알고 있는데요? 600엔은 없고 차량용 캠핑 코너가 1000엔이란다. 떨떠름하지만 오케이. 2박 2000엔을 건넸다. 아저씨가 차를 몰고 캠핑장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러더니 화장실을 보여준다. 샤워 오케이. 토이레(toilet) 오케이. 레인?, 레인!, 뭐 이런 제3세계 스러운 대사를 주고받았다. 아저씨 말은 비가 오니까 지붕이 있는 화장실 구석에 텐트를 치란다. 그러면서 비가 그치면 내일은 저기 오토캠핑장으로 텐트를 옮기라는 것 같다. 오케이. 하이. 예스.

빌어먹을. 제대로 된 일어 공부 좀 하고 오는 건데... 도서관에서 기초 일어회화 책을 빌려왔는데 '와따시와 한코쿠진 데쓰', '와따시와 나마에 산돈데쓰' 같은 하등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대사 밖에 없다. 시계가 있는데 시간은 물어서 뭣하고 뻔히 아는 물건 더러 '고레와 난데스까?' 하는 바보스러운 말을 할 이유가 없다.

그 회화책, 하루 봤다. 하룻동안 외운 것은 아이우에오, 카키쿠케코의 히라카나 글자 모양이 어떻게 생겼나 하는 것 정도다. 비를 많이 맞으니까 이젠 기억이 안 난다. 그러니까 일본어 글자도 못 읽는다 -_- 그동안 업무에 시달리느라 바빴고 밀린 책들 읽느라 바빴다. 어떻게 되겠지 하고 왔는데 정말 어떻게 되긴 된다. 하지만 독도, 위안부, 일본의 최근 우경화 성향에 관한 현지인과의 진지한 토론은 못 하잖아?


노심초사 끝에 옥션에서 3만 5천원 주고 구입한 1인용 낚시 텐트. 15만원짜리 비박용 텐트가 있긴 하지만 누에고치처럼 안에 들어가면 꼼짝 달싹도 못하는 바보스러운 텐트에 눕고 싶은 생각은 없다. 결정적으로 그런 텐트는 1kg이 넘는데 비해 이 텐트의 무게는 750g 밖에 안 된다. 750g인데 내부는 한 사람이 충분히 눕고도 여러 짐들을 안에 넣을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있다. 폴대만 밀어 넣어 교차시키면 모기장 텐트가 완성되고 그 위에 플라이를 씌우면 방수 커버가 된다. 텐트의 방수 성능을 순진하게 믿지는 않아서 넓고 얇은 비닐을 함께 들고 왔다. 여러 모로 흡족한 텐트다.


아소베이 파크 캠핑장. 기본적으로 오토캠핑장이다. 자동차 들여놓고 저 나무판 위에 텐트를 설치한다. 사이트 하나 마다 장작을 지필 수 있는 바베큐 그릴이 있고 그 옆에 110V 아웃렛이 달려 있다. 220V->110V 컨버터 플러그만 있으면 얼마든지 충전이 가능하다. 공동 취사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쓰시마가 그렇게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서 이용객이 많지 않을 것 같은데 관리 상태는 상당히 좋다.


무려 23000원이나 주고 구입한 1인용 산악 코펠. 달랑 냄비 하나, 플레이트가 전부인데 무게가 가볍고 길죽하게 생겨 짐을 챙길 때 용적을 덜 차지한다. 수저와 젓가락, 버너 등을 코펠 안에 넣을 수 있어 좋다. 군대에서 라면 끓여먹을 때 쓰는 짬빱통이 더 싸고 훌륭하지만 시장통 돌아다닐 시간이 없어 인터넷으로 값비싼 것을 구입했다. 물론 철밥통보다는 무게가 현저하게 가볍다.

그 위에 17000원 짜리 초소형 미니 버너가 있다. 이건 잘못 샀다. 히타카쓰에 도착해 여기저기 수퍼에서 가스통을 찾아 봤는데(없을꺼라 짐작하고 한국에서 가스통을 구입해 오긴 했지만) 한국에서 휴대용 렌지에 쓰는 가스통은 많이 있지만 버너를 돌려 나사로 결속하는 형태의 저런 둥근 가스통은 두 가게를 돌아보는 동안 보지 못했다. 낚시점은 안 가봐서 모르겠다. 차라리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는 형태의 가스통에 장착이 가능한 버너나, 일반 가스통을 장착할 수 있는 어댑터가 포함된 버너를 사는게 나았을 것 같다. 작은 크기임에도 화력이 꽤 좋아 성능에 불만은 없다.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곤 도시락이 전부라 라면을 끓였다. 예전에 일본의 인스탄트 라면을 여러 종류 먹어봤는데 도저히 맛있다고는 할 수 없는 희안한 맛의 라면들이라 라면 맛은 기대하지 않았다. 공동 취사장의 그릴에는 장작을 뗄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장작들이 젖어 있고, 보통 캠핑장에서 장작은 공짜가 아니니 그냥 가스 버너로 해먹는게 낫지 싶다. 밥을 해 먹을 때는 가스버너보다 장작 쪽이 훨씬 맛있게 밥이 된다. 거기다가 소세지, 옥수수, 감자, 통 돼지고기 따위를 구워 먹으면... 츄릅. 생각만 해도 침이 넘어오네... 여행 중에 주방을 빌려 밥을 해먹은 적은 많지만 캠핑을 해 본 지가 십 년이 넘어서 캠핑용 기어를 어떻게 골라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요즘 캠핑 장비는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좋아진 것 같은데...


워낙 가난한 캠핑만 해봐서(어린 시절에도 혼자 다녔다. 얘들을 몇번 데리고 태백산맥을 헤메고 나면 다시는 같이 안 가려 들었다. 늘 비를 몰고 다녔고 늘 여지없이 개고생을 한 탓도 있다) 당시에 들고 다닌 음식이라곤 쌀 한 주머니, 고추장 한 덩이 정도가 고작이다. 나중에 생활이 펴서 라면도 들고 다니고 인스턴트 카레 따위도 들고 다녔다. 다 어린 시절 얘기다. 이건 사제 스프다. 멀쩡한 라면 뜯어서 스프만 챙겨 들고갈 수는 없고, 예전에는 라면 스프만 따로 팔았는데 요즘은 안 보이는 것 같고... 그래서 라면 스프를 만들었다. 마늘가루 있으면 넣고, 다시다 가루, 멸치, 다시마, 새우 약간, 소금 왕창, 후추 약간, 고춧가루 왕창 넣고 블랜더에 함께 갈아낸다. 거기에 마른 오징어, 표고버섯, 다시마 따위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넣으면 완성이다. 일종의 천연 조미료인 셈이다.


일본 면발에 사제 스프로 끓인 라면. 삼양라면 맛이 난다. 신라면같은 칼칼한 맛을 내려면 청양고추를 냉동 건조시킨 다음 바짝 말려서 블랜더에 같이 갈아야 하는데 뭐 그럴 시간은 없고 적어도 일본의 인스탄트 라면 같이 느끼하고 한 입 먹으면 괜히 먹었다 이 닦고 그냥 잘 껄 하는 기분은 안 나는 그럭저럭 괜찮은 맛이 나는 라면이 완성되었다.

라면 끓여먹고 젖은 옷을 빨아서 짰다. 9pm.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한 이틀 제대로 잠을 못잤더니 피곤하다. 잠이나 자자 누웠지만 말똥말똥. 평소 새벽 2-3시에 자던 사람이 9pm에 자려니 잠이 오겠나.

아소베이 파크에 오기 전에 마땅한 수퍼가 보였으면 술이나 몇 병 사오는 건데. 너무 늦지 않으려고 정신없이 왔더니 달랑 라면 하나와 먹다 남은 크런치 초콜렛 밖에 먹을 것이 없다.


인터넷 어딘가에서 구한 지도. 요점 정리가 잘되어 있어 원작자에게 감사하다. 하타카쓰는 맨 위, 아소베이 파크는 중간 아래 '대산'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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