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
5일간 휴가를 냈다. 2년만에 휴가인 셈인데 그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피곤했다. 뭔가 머리를 식힐 것이 필요했고 휴가계를 내라길래 6월초에 낼름 제출했다. 금요일 미팅은 장시간 이어졌다. 끝날 때쯤에야 오늘이 환전 가능한 마지막 날이란 것을 깨달았다. 은행 마감 직전에 도착해 간신히 돈을 환전했다.
씨티은행이 날이 갈수록 마음에 들지 않는다. 환전 수수료 할인을 받으려고 전날 인터넷으로 환전 예약을 해놨더니 환전하려는 돈이 거의 쓰지도 않는 외환거래 통장으로 들어갔다. 어안이 벙벙. 시티은행의 홈페이지에는 그런 내용에 관해 일언반구 말이 없었고 아침에 찾으러 갔을 때 외환거래 통장이 없으면 인출이 안된다고 해서 되돌아왔다. 하루가 지나고 외환거래 통장을 들고가서 은행 마감 시간 전에 환전을 하려니 적지않은 환전 수수료를 내란다. 휴...
6/30 격주 휴일
여행 전 준비물: 여권, 여권 복사본, 캠프장 예약 복사본, 카메라, 미니삼각대, AA 충전지 4알, AAA 충전지 4알, 휴대폰, 작은 수첩, 볼펜, 테이프, 모포, 휴지, 얇고 큰 비닐 봉투, 읽을만한 작은 책 한 권, 사제스프.
의약품: 마데카솔 연고, 반창고 4장, 타이레놀 몇 알, 항생제 몇 알
구매한 물건: 1인용 텐트(35000원), 얇고 부피가 작은 은박 깔개(7000원), 튼튼한 실(1000원), 바르는 모기약(5000원), 선 블럭 크림(6800원), 여행용 세면 도구 세트(4200원), 미니 버너(17000원), 1인용 코펠(23000원), 가스 1통(?원), 쓰레기 봉투 75리터(?원), 100리터 (?원)
옷가지: 져지 상하의(28000원), 쿨맥스 반팔 상의, 수영복 하의, 비닐비옷, 양말 2켤레, 장갑, 모자(캡).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 케이블 타이, WD-40 조그만 것.
오전에는 자전거를 정비했다. 비 맞을 것에 대비해 양 바퀴 베어링에 그리스를 듬뿍 발라 주고, 주요 구동부에는 테프론 오일을 듬뿍듬뿍 쳐줬다. 야후 일본 사이트의 일기예보를 읽어보니 규슈 쓰시마의 날씨가 심상치 않다. 일요일 비, 월,화,수 흐림, 목 비. 첫날과 마지막 날에 비를 맞을 것 같다. 적어도 한국의 일기예보처럼 엉터리는 아니겠지? 아쉬운 것은 업무 때문에 시간에 쫓겨 구입하지 못했던 방청제(WD-40)와 테프론 오일.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경로 설정을 시간 내에 하지 못했다. 다음의 GPSGIS 동호회 자료실에 얼마 전에 대마도 DEM 지도가 올라왔다. 그것과 월초에
대마도 부산 사무소의 게시판에서 주문한 지도를 참조해서 간략한 경로 정보를 일단 구성했다. 구글맵과 GPS Trackmaker를 오가며 대강의 도로 윤곽을 만들었다.
아내는 휴가여행 간다고 오랫만에 고기 먹으로 가잔다. 준비할 것들이 아직 많은데... 아내가 먹고 싶어하는 눈치라 나가서 소불고기에 밥을 먹었다. 집에 돌아오니 오후 8시가 넘었다. 밤 10시 30분에는 출발해야 시간을 맞출텐데 뭐 준비해놓은 것이 있어야지. 일단 허겁지겁 전지를 충전기에 걸었는데 10시가 다 되어도 충전이 덜 되었다. 일단 빼내서 가방에 물건들을 우겨넣고 자전거에 실었다. 밤 10시 40분 무렵 황망히 출발.
강변 도로에 이르자 비가 살살 오기 시작한다. 뒷 잔차 두 대가 추월한다. 상대속도는 1~2kmh. 여행만 시작했다하면 다짜고짜 비를 맞는 것은 무슨 징크스일까? 라고 생각하며 한가하게 자전거를 몰고 가다가 능력도 안되면서 괜히 추월해가는 잔차를 보니 약이 올라 비 때문에 거의 인적이 없는 도로를 고속주행하기 시작했다.
두 친구는 쌔근하게 잘 빠진 값비싼 자전거와 자기 몸뚱이 뿐이지만 나는 15kg짜리 유사 MTB에 7kg짜리 짐을 얹어 상당히 중량감있게 움직인다. 하지만 시속 23kmh로 달리는 상대를 27kmh로 추월하는 것은 자전거 3년 탄 자존심과 관련이 있다. 쫓아오지 못한다. 하하하. 이런 부질없는 만족감이라니... 강남 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 비를 흠뻑 맞았다. 1시간 35분 걸렸다. 경부선 버스 타는 곳을 찾느라 좀 헤멨다.
가만, 비상식량과 커피믹스를 챙기지 못했군. 아참, 집 열쇠도! 서두르다 보니 실수 투성이다.
창구에서 이틀 전에 예약한 표를 찾으려고 씨티은행 카드를 내미니 은행 사정으로 서비스가 중단되었단다. 씨티은행이 한미은행과 합병된 후부터 뭐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어 3-4개월에 한 번은 민원을 냈다. 예를 들면 기차 시간 임박해서 예매한 기차표를 뽑으려니 은행 전산망이 다운되어 차시간을 놓치거나, 서비스가 지금처럼 일시 중지되거나, 외국에서 거래하려고 보니 불법거래로 의심되어 카드 사용을 중단시키거나, 심지어는 현금이체를 하려는데 은행 전산망이 세 차례나 다운되었다.
예전에 장기 여행을 할 때 씨티은행의 현금카드가 외국에서 현금인출할 때 꽤 도움이 된다는 얘기를 듣고 만든 적이 있다. 도움은 커녕 국제 현금 카드로 돈을 뽑을 수 있는 ATM을 찾느라 일정을 변경하는 등 갖은 고생을 다 했다. 환율이 일반 VISA 신용카드보다 나쁘면서 수수료는 수수료 대로 빠져나가 실질적인 이익이 없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주거래은행으로써 내가 받은 이익이 아무 것도 없다. 심지어 작년에 아시아나 마일리지 카드를 발급 받으려고 할 때는 주거래은행임에도 카드 한 장 만들려고 생쑈를 다 했다.
오전 12시에 간신히 백업용으로 가지고 있던 현대카드 동양종금 CMA 카드로 현금 서비스를 받아 심야우등 표를 구매했다. 32300원. 이틀에 걸쳐 씨티은행으로부터 엿먹고 나니 월급 통장을 갈아버리자는 결심이 섰다. 우대고객은 무슨 얼어죽을 우대고객이냐.
7/1
자전거를 버스에 실었다. 출발했다. 새벽 3시 버스가 휴게소에 멈춘다. 비가 줄기차게 내린다. 휴게소로 뛰는 동안 비를 흠뻑 맞았다. 오뎅 하나 사서 먹었다. 저녁이 부실해 배가 고프다. 다시 비를 흠뻑 맞으며 버스에 올랐다.
잠에서 깨니 오전 5시 30분. 부산에 도착. 비가 퍼붓고 있다. 도저히 자전거를 몰고 부산국제여객터미널까지 갈 엄두가 안 난다. 버스에서 내려 자전거를 빼내는 그 잠깐 동안 퍼붓는 비를 맞으니 몸이 으실으실 떨린다. 자판기에서 평생 거의 먹지 않던 따뜻한 커피 한 잔 뽑아 마시고 버스 터미널에 붙어 있는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무거운 자전거를 들고 계단을 차곡차곡 내려갔다. 정말 무겁다.
자전거를 지하철에 싣는 것이 아직 법제화된 것 같지는 않지만, 검표기 앞에서 역무원이 제지하지 않는다. 자전거는 장애인석에 실으면 된다. 장애인석은 보통 지하철 마지막 차량 칸(주행 방향의 마지막 칸)에 설치되어 있다. 지하철역의 계단을 어떻게 내려가라는 것인지 몹시 의문이 생기지만 지하철 차량에는 잊지않고 장애인석이 설치되어 있다.
버스터미널과 인접한 노포동 지하철 역에서 부산국제페리터미널이 있는 중앙동 역까지 대략 40여분이 걸린다. 비 때문에 선로가 미끄러워 지하철이 서행한다는 메시지가 흘러 나왔다. 이왕이면 걸죽한 부산 사투리로 안내방송이 나왔으면 좋으련만.
차량 진동이 심해 자전거가 쓰러졌다. 콰당 하는 듬직한 소리가 차량내에 울려퍼지자 자다 깬 사람들이 놀라 흠칫한다. 히히 웃다가 바퀴 사이에 가방을 괘어놨다.
지하철 역 바깥에는 아직 비가 내리고 있다. 짐을 비닐로 싸고 우비를 입은 다음 역 바깥으로 나왔다. 국제 페리 터미널이 역에서 몇 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놈에 비.
대아고속해운(부산-대마도간 페리를 운행하는 회사) 에 며칠 전에 대마도행 편도 배편을 예약했다. 그들 홈페이지에는 부산->이즈하라 편도가 65000원으로 나와 있고 왕복이 13만원인데, 히타카쓰->부산 편도는 6900엔으로 적혀 있다. 최근 환율을 고려하면 왕복 배편을 끊지 말고 엔화로 계산해 돌아오는 배편을 히타카쓰에서 끊으면 훨씬 이익이 되리라 생각했는데, 무슨 착각을 했는지 창구 직원더러 왕복 배편을 달라고 했다.
3년 전에 자전거를 산 이유가 일본 여행 때문이다. 여러 나라 여행자들에게 듣기로는 뉴질랜드 다음으로 일본이 자전거 여행하기에 좋은 곳이란다. 몇 개월 자전거 사서 연습 좀 해보고 일본에 가려던 계획이 3년이나 미뤄진 셈이다.
첫번째 목표는 대마도, 두번째는 후쿠오카를 기점으로 한 규슈 원점 회귀 코스, 세번째는 후쿠오카에서 오사카/도쿄까지, 네번째는 훗카이도 일주 코스다. 나름 그렇게 계획을 세웠다. 맞은편에 후쿠오카 행 페리 창구가 보인다. 언제쯤 저 곳에 가볼 수 있으려나...
출입국 관리 직원이 자전거 타고 대마도 가냐고 묻는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히죽히죽 웃었다. 괜찮아요. (늘 있는 일인데요 뭐) 짐 엑스레이 검색 중 가방에서 가스통을 발견한 직원이 claim tag를 끊어준다. 가스통은 따로 선적하고 이 claim tag를 내리기 전에 배 승무원에게 보여주면 가스통을 돌려줄 꺼라고 한다.
출국 카운터를 거쳐 배에 올랐다. 십수 년 전에 전국일주를 한 적이 있다. 부산에서 돈이 떨어져 부산역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꿔 기차를 탔다. 하여간 그때는 돈 없이 잘 돌아다녔는데, 대학생 형들 흉내를 냈던 것이다. 그들에게 무전여행은 일종의 자랑스러운 무공훈장이었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된 이후 여행씬은 완전히 달라졌다 -- 국내에서 하던 거지짓을 해외로 확장한 것이다. 나는 그 10년 후에야 간신히 거지(또는 구도자)여행 대열에 낄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부산 방문은 무척 오랫만이다. 부산에 관해 기억 나는 곳이라야 해운대와 광안리 해수욕장, 자갈치 시장, 그리고 항구 부근의 러시아 간판이 전부지만.
생각해 보니 해운대 해수욕장(?)에 김씨 아저씨와 단 둘이 내려온 적이 있다. 해수욕장에서 썬텐을 해보자는 계획이었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썬텐 크림을 덕지덕지 바르고 해변에 누워 비를 맞았다. 암울했다.
아무튼. 예전과 비교해 보면 부산이 엄청나게 큰 도시가 된 것 같다. 저렇게 많은 아파트가 있었나? 저 크레인은 독에서 배를 건조할 때 쓰는 것 아닌가? 아니면 컨테니어 하적용?
8.40am. 배가 출항한다. 빗물이 창가를 적신다. 바깥 풍경이 흐릿하다. 직원들 대화를 들어보니 손님은 모두 150명. 자리가 꽉 차지는 않았다. 그중 자전거를 끌고 온 사람은 나 혼자다. 직원이 좌석 뒷전의 물통을 쌓아둔 곳에 자전거를 거치하면서 원래 자전거는 못 싣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이 빗 속에 어떻게 다닐꺼냐고 되레 걱정한다. 완전 무장한 아저씨 둘이 대마도로 낚시여행을 간단다. 나를 포함해 세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단체 관광객인듯 하다.
가이드가 단체관광객들에게 귀미테를 나눠준다. 내 뒷좌석의 아줌마는 배멀미로 혼쭐이 났다. 아이고, 윽, 아이고 하는 작은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배가 상하로 크게 흔들렸다. 뭐 나야 배멀미를 안 하니까 배가 크게 흔들릴 수록 재밌어 했다.
아침에 먹은 커피 때문에 정신이 말똥말똥 한 것이 영 안 좋다. 버스에서 잠을 좀 자두는건데.
멍하니 앉아 있었다. 1시간 40분이 지나 흐릿한 빗속에 섬의 윤곽이 드러났다. 왜 이렇게 빨리왔지? 2시간 40분 걸린다더만. 배가 정박하기 전에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카운터에 가서 클레임 태그를 보여주니 가스통을 돌려준다.
너무 일찍 도착해 약간 어리둥절한 가운데 이즈하라 항에 닿았다. 비가 내린다. 자전거가 걸리적거려 짐이 많은 낚시꾼 아저씨 둘과 함께 마지막으로 내렸다. 평소 입출국할 땐 다람쥐처럼 빨리빨리 움직였는데 이번에는 안하던 실수를 한 셈 -- 입국수속에만 40여분이 걸렸다.
입국장이 달랑 건물 한 동으로 두 명의 입국 심사관이 참 꼬치꼬치 살핀다. 건물이 허름하고 영어가 안 통해 흡사 제3세계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입국심사관이 어디서 묵을꺼냐고 묻는다. 프린트해 둔 '캠핑장 예약 신청서'를 꺼내 보여줬다. 손짓 발짓으로 미우다 캠핑장은 지금 문을 열지 않았단다. 이이에, 나이. 젠장. 일어 공부를 좀 해뒀어야 하는데. 뭔 소린지 알아먹을 수가 없잖아. 결국 고개를 끄떡인다.
입국장 바깥으로 여전히 비가 내린다. 짐을 비닐로 잘 싸고 우비를 챙겨 입었다. GPS를 켜니 아직 위성 신호를 잡지 못한다. 3-4분 빗속에서 기다렸지만 여전하다. 간신히 시그널이 잡혔다. 뭔가 좀 이상하다. 집에서 GPS Trackmaker로 입력한 waypoint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이즈하라 항도 나타나지 않았다. 시내 중심쯤에 위치한 화장실에서 져지로 갈아입고 우비를 걸친 후 짐을 다시 챙겼다. 지도를 살펴 이즈하라 항의 시내 윤곽을 그려보았다. 자전거로 시내를 서너바퀴 돌아봤지만 알만한 지명이 눈에 띄지 않는다. 뭔가 좀 이상한데?
다리에 올라 이즈하라 항을 쳐다 봤다. 시내가 지나치게 작다. 적어도 남북으로 1km 이상되고 시내를 관통하는 382번 도로와 몇몇 지방도가 겹쳐야 하는데...
이렇게 작은 항구가 이즈하라 항이란 말인가? gps에 aziro가 찍힌다. 아, 아는 지명이다. '아지로의 연흔'이구나. 일단 오늘은 아소베이 파크 캠핑장까지 갈 예정인데, 이즈하라 시내에서 30km 가량 떨어져 있고 자전거로 한두 시간이면 도착할 거리니 이즈하라에서 관광 좀 하며 빈둥거리다가 천천히 가도 되겠지 싶어 일단 아지로의 연흔을 찾아갔다.
신선한 삼나무숲 한가운데 억수로 쏟아지는 비 때문에 범람한 작은 개울이 흙탕물을 튀기며 흐르고 있다. 사람의 흔적이 닿지 않은 원시 천연림에서 느껴지는 신선한 내음. 하늘을 가린 숲 속을 가로지르며 아기자기하게 이어진 구불구불한 도로가 꽤 재밌다. 재밌는 여행이 될 것 같다.
아지로의 연흔. 화강암에 새겨진 파도의 흔적. 멀리 항구를 떠나는 배(타고왔던 배)가 보인다.
파도가 약해 바닷가를 첨벙거리며 걸었다. 파도의 흔적이라고? 흠... 암석의 한층에 난입된 다른 층이 켜켜이 쌓이며 압축되다가 조산작용으로 일부분 바닷가에 노출되 약한 층이 파도에 깎인 것이 아닐까..
거대한 통짜 바위에 조가비 껍질이 다닥 다닥 달라붙어 있다. 물이 몹시 맑다.
이즈하라 항을 중심으로 지형지물을 파악하기 위해 시내 곳곳을 누비고 다녔지만 도무지 알만한 지명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쯤에는 반쇼인이 있어야 하는데, 이쯤에는 하치만구 신사가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네? 혹시 내가 GPS Trackmaker로 작업하는 도중에 waypoint가 엉뚱한 곳으로 옮겨가 버린 것이 아닐까?
골목길 사이를 헤메다 빗 속에서 찍은 사진. 바다로 향하는 저 작은 개울에 물고기들이 오락가락한다.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어 흡사 유령도시 같다.
한 시가 좀 넘어 시장기가 돌았다. 어젯밤부터 먹은 것이 거의 없어 배가 고프다. 이즈하라에서 헤메는 것은 관두고 이제 슬슬 아소베이 파크로 향해야겠다. GPS가 쓸모가 없으니 일단 382번 도로를 따라가보자. 그래서 시내를 뺑뺑이도는 짓을 그만두고 북쪽을 향해 무작정 달렸다. 가다보면 뭔가 나오겠지.
가는 길에 'VALUE'라는 커다란 할인매장이 나타났다. 아직 환율이 익숙치 않아 계산이 잘 안되지만 100엔을 대략 760원으로 계산해서 매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한국의 물가와 비교했다. 의외로 한국의 물건 가격과 큰 차이가 없다. 파 한단에 140엔 즉 1000원 가량. 서울에서는 700원 정도. 인스탄트 라면 한 봉이 80엔 가량(600원). 도시락 500엔(3800원). 반찬이 대략 200-300엔. 밥 한 공기가 100엔 가량. 반찬 두어가지와 밥을 사느니 도시락 하나 사 먹는 것이 가격대 성능비가 좋아 보인다. 과일은 몹시 비싼 편이다.
음료와 도시락을 하나 사들고 카운터에 가니 계산해 주면서 예쁘게 포장 해주고 얼마얼마라고 큰 소리로 말한다. 계산대에 가격이 표시되니 굳이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상관없다. 사실 준비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내가 아는 일본어는 몇 개 되지 않았다. 딴지일보에 따르면, 일본어는 '도조' 한 마디만 알아도 여행이 가능하단다. 그보다 약간 더 많은 단어를 알았다.
스미마셍 (실례합니다)
이쿠라 데스까? (얼마에요?)
이치,니,산 (1,2,3, 그 다음은 모른다. 안 외웠다 -_-)
오하이오/곤니치와/곰방와(아침,점심,저녁 인사)
아리가또[고자이마스] (감사합니다)
혼또니 아리가또[고자이마스] (매우 감사합니다)
도조 (뭘요)
도조 (괜찮습니다)
라멘, 도조 (라면 주세요)
고레, 도조 (그거 부탁합니다 -- 뭔가 주문할 때)
이즈하라, 도조 (이즈하라가 어디에요?/이즈하라로 부탁합니다 -- 어딘가 가고 싶을 때)
사실 아는 일본어라고는 웃쓰, 야메떼, 이이에, 오네상, 이따이 정도였다.
근처 한적한 공터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일본에 대해 배운 상식 중 한가지는 콘비니(편의점)에서는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어 있어서 뭘 사든 바깥에 나와 쭈그리고 앉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인도 다 그렇게 하니까 거지같아 보여도 기죽을 것 없다. 그런데 아무도 공터에서 음식을 까먹지 않았다. 왠지 거지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꿋꿋이 밥을 먹었다. 이게 바로 문화적 차이란 거야.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문화에 적응해야지.
이즈하라 시내를 배회하다보니 왼쪽 차도로 가는 것도 대충 익숙해진 것 같다. 2년 만에 해외여행이라 기분이 달뜨기도 했고 점심 먹는 내내 마치 축복이라도 해주듯이 비가 멎어 아, 이제는 날이 개이는구나 싶어 앞으로의 4박 5일 여행이 기대되었다. 도시락이 아주 맛있다. 일본인들은 쌀밥을 참 정성들여 지었다. 이런 싸구려 종합선물세트 도시락의 밥맛이 평소 한국의 왠간한 음식점에서 먹는 밥맛보다 좋다니 참 어이가 없다.
밥도 다먹고 기분도 좋아 이제 슬슬 출발하려고 주위를 둘러봤다. 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에는 내가 빠져 나온 곳이 'Hitakatsu'라고 적혀 있다. 히타카쓰 라니? 말도 안되잖아? 하하하. 그러다가 등골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혹시...? 지갑에서 배표를 꺼내보았다. 배표에는,
Busan -> Hitakatsu
라고 크게 적혀 있다.
허걱. 그럼 여태까지 헤메던 저 곳이 이즈하라 항구의 완전 반대편인 히타카쓰란 말이냐? 가슴이 철렁했다. 때마침 극적으로, 먹구름이 몰려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다시 VALUE의 처마 밑으로 허겁지겁 자전거를 몰고가 벤치에 앉아 대체 어디서 부터 잘못된 것인지 되집어 보았다.
나흘 전, 인터넷으로 대아해운고속 사이트에 접속해 이즈하라행 토요일(6월 30일) 배편을 예약하려고 했다. 대마도행 배편은 아직 인터넷으로 예약이 안된다. 그날은 만석이란다. 그럼 일요일은요? 일요일엔 배편이 있단다. 오케이 그럼 그걸로 예매해 주세요. 몇 시에 출발이죠? 오전 8:40분입니다. 이즈하라행 배편은 보통 오전 10:40에 떠나는데 홈페이지에 적힌 스케쥴이 틀린 거였군. 아마 성수기에 접어들면서 배가 증편된 것이리라. 그보다 급한 것은 닷새 전에 예약한 캠핑장 3곳의 도착 일자를 수정해 다시 국제 팩스를 넣어야 한다.
1주일 전 대마도 부산 사무소에 문의해 보니 캠핑장에서 숙박하려면 캠핑장에 예약이 필수란다. 속으로 그럴리가, 하다가 어떤 여행기에서 캠핑장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을 때 관리인이 퇴근하고 없어서 캠핑을 못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고 한다. 일본인은 집요하게 룰을 중시해 룰에 어긋나는 것은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라는 일본 문화 특유의 괴상한 풍속에 관한 글을 읽기도 했다. 문화적 차이니까 괴상하다고 말하지 말자.
사무실에 팩스가 없어 팩스를 보내려면 근처 문방구에서 한 장에 500원씩이나 하는 팩스를 보내야하는데(500원은 국내용 단가다. 해외는 단가가 어떻게 되는지 모른다) 인터넷 여기저기 검색해 인터넷으로 국제 팩스를 보내는 사이트 몇 군데를 알아뒀다. http://fax.empas.com
그런데 그날 공교롭게도 국제팩스 보내는 사이트를 비롯한 다수의 사이트가 중국의 개떼같은 해킹 공격에 당해 사이트가 다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팩스를 보내는데 4시간이 걸렸고 그나마도 실패해서 그 다음날 다시 간신히 팩스를 보낼 수 있었는데(업무 시간에 이런 짓 하면 죄책감을 느낀다), 이제 그렇게 예약한 것을 취소하고 다시 팩스를 보내야 한다.
팩스를 보낸 후 confirm fax를 그쪽에서 보내주는데 팩스를 받을 형편이 안되니 대마도 부산 사무소로 컨펌 팩스를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대충 컨펌이 났는데, 어제 예약을 취소하고 예약 일자를 하루씩 미룬다는 것을 일본어로 어떻게 써야할 지 몰라 캠핑장 예약 신청서의 비고란에 영어와 일어를 뒤죽박죽 섞어 다시 작성한 것을 인터넷 국제 팩스 사이트를 통해 보냈다. 부가세 포함해 장당 220원이다. 그런 팩스질을 3차례에 걸쳐 3군데에 보내고 다시 컨펌받는 복잡한 절차를 거친 것이다. 이런 간단한 일거리인데도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팩스 보낼 걱정 때문에 배편이 이즈하라 도착인지 히타카쓰 도착인지 확인하지 않았다. 배표를 받아들었을 때도 확인하지 않았다. 어차피 도착하면 어떻게 되겠지, 뭐 준비한 것도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GPS에 입력한 좌표가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을 때도 내가 좌표점들을 잘못 입력했거니 생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어젯밤부터 줄기차게 쏟아지는 재수없는 빗줄기를 바라보면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다. 기억이 맞다면 히타카쓰에서 아소베이 파크까지는 고저차를 고려하지 않고 대략 80km다. 하루에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다. 만약 여행일정을 변경해 히타카쓰에서 이즈하라로 역순으로 내려간다 해도 마지막 날에는 히타카쓰로 되돌아와야 한다. 차라리 그보다는 하루 일정 까질 각오로 아소베이 파크로 가서 히타카쓰로 올라오는 편이 낫다.
결심이 서자 자전거에 올랐다. 오후 2시다. 멍청하게 히타카쓰 시내를 한가하게 배회하지 않고 상황판단을 제대로 했어도 쓸데없이 낭비하는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저 여행 나와서 기분이 좋아 헤벌레 하고 있다보니 이런 이런...
어차피 gps보고 미리 설정해 둔 경로를 트랙백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지도를 보고 히타카쓰에서 아소베이 파크까지 가는 가장 편한 길로 보이는 39번 해안도로를 타기로 했다. 주욱 가다가 382번 국도와 만나는 지점에서 382번 국도를 타고 조금 진행하다보면 아소베이 파크가 나타난다. 출발했다.
비가 참 살벌하게 내린다. 쓰시마의 여름철 7,8월 평균 강수량이 350mm란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우 속에서 사실 걱정꺼리는 하나 밖에 없었다. 자전거의 체인과 구동부에 스며든 물이 녹을 만들어 체인을 뻑뻑하게 해서 주행을 힘들게 하는 것이다.
39번 해안도로는 그야말로 절경이다. 비가 이렇게 억수로 퍼붓는데도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삼나무 숲과 도로에 연접한 개울이 졸졸 흐르는 1차선(한국에서의 1차선 개념이 아니라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가는 도로폭 정도의 1차선) 지방도는 제주도의 1100 도로, 516 도로를 연상시켰다. 아니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도로는 처음 봤다. 해안선을 타고 가다가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해안으로 나오는 길이 계속 반복된다. 표고차가 40m 이내라 주행이 쉽다. 흡사 자전거 여행을 위해 만들어 놓은 도로같다. 10분에 한 대 꼴로 간간히 지나가는 차량들은 친절하게도 속도를 늦추거나 물을 안 튀기려고 크게 우회해서 자전거를 지나친다. 일본인들의 운전 매너가 훌륭하다.
Video: 쓰시마 39번 국도
이렇게 훌륭한 도로가 있는데 어째서 한국의 자전거 동호회에서 대마도 원정 자전거 여행이 드문 것일까? 쓰시마의 39번 도로에 비하면 제주도의 12번 해안도로나 한국의 동해안 해안 도로는 고개를 수그려야 할 판이다.
잠시 쉬면서 개울에 손과 발을 담궜다. 비가 하도 내려 우비 속까지 척척하게 젖었다.
아소베이 파크 캠핑장에 시간내에 도착하긴 글렀다. 벌써 6pm. GPS의 sunset 타임을 보니 7.30pm에 해가 진다. 비가 잠시 그쳤다. 1km만 달리면 항상 나타나는 자판기 앞에서 잔돈을 꺼내 음료수를 뽑아 먹었다. 500ml짜리 탄산음료 한병에 150엔. 한국돈으로 1200원 가량. 물은 120엔. 그렇다면 누가 미쳤다고 물을 사먹나? 30엔만 더내면 비타민씨가 듬뿍 든 기능성 음료를 마실 수 있는데.
배는 고픈데 먹은 건 없고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니, 그야말로 서바이벌 분위기가 물씬 난다. 작은 어촌 마을에 멈춰 어느 창고 처마 밑에서 오늘 예정은 가볍게 관광이나 하고 즐기다가 별빛이 총총한 밤하늘 아래 텐트치고 누워 mp3나 들으면서 스르르 잠드는 것이 일정 아니었나? 내 팔자에 그런 로또같은 하루가 있을리가 없지 신세한탄 하다가 흘낏 옆을 보니, 수퍼가 있다. 빙고. 이것이 바로 서민의 5천원짜리 로또 당첨이 아니고 뭐겠나. 알맞은 때에 먹이를 구할 수 있게 되다니. 하하. 수퍼에서 롯데 크런치 초콜렛 2개를 사서 하나를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빗물 때문에 쫄닥 젖어 이건 뭐...
자전거 앞에 트럭이 멈춘다. 트럭 짐칸에 아무 것도 실려 있지 않다. 운전수에게 부탁해 자전거를 싣고 아소베이 파크까지 직행하는 방법이 있다. 자동차로 가면 얼마 걸리지도 않고 돈을 받아봤자 몇푼깨나 하겠나? 어쩌면 불쌍한 나머지 공짜로 태워줄 지도 모르지. 태워 달라고 해, 말어? 천둥번개가 콰과광 울렸다. 트럭이 떠났다.
아무리 빈둥빈둥 관광을 부르짖어도 지난 십수년간 써바이벌 아닌 관광은 해본 적이 없다. 빌어먹을 빗물과 함께 운명을 받아들이자. 히치하이킹은 관두고 그냥 가자.
비가 잠시 멎은 틈에 전봇대에 매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쓰시마에 온 후로 온 사방에 매와 까마귀 투성이다. 평생 매 울음소리는 몇 번이나 들어보게 될까? 어린 시절에는 시골에 살아 병아리를 채가는 매를 자주 보았다. 그후로 주욱 못 보다가 안데스의 산악 지방에서 매와 흡사하게 움직이는 콘도르를 보았다. 천미터가 넘는 절벽의 틈새에서 활강하는 콘도르. 매, 콘도르 따위가 상승기류에 저항하며 공중에서 stance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날개를 살짝 살짝 틀어가며 제자리에 멈춰선 채 지상을 기어다니는 먹잇감을 뚜러지게 노려보다가 갑자기 날개를 비틀어 쏜살같이 땅으로 쳐박히듯이 빠른 속도로 활강한다.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시 떠오르면 어느새 발톱 사이로 꿈틀대는 무언가를 낚았다. 그러고서는 석양 속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 이건 내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보곤 하던 광경이다. 서울 도회 촌뜨기들은 그런 우아한 모습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매의 눈에는 내가 땅 위를 꿈틀꿈틀 기어가는 조금 큰 지렁이처럼 보이지 않을까?
이제 좀 날이 개려나? 기지개를 펴고 자전거에 올랐다. 왠걸. 다시 퍼부어 대기 시작한다. 10분 쉬고 50분 퍼붓는게 참, 학교수업마냥, 또는 군바리 훈련처럼 주기적이다. 해안에 인접한 39번 국도는 비록 고저차가 40m 내외지만 급격한 헤어핀 구간이 많다. 차가 거의 안 다니니 날이 맑으면 평속 40~50kmh로 다운힐에서 브레이크 감속 안하고 주행이 가능하지만 빗길이 미끄러워 여지없이 브레이크를 잡게 된다.
쓰시마에 오기 전에 브레이크 패드 걱정을 했다. 뒷 브레이크의 패드가 거의 다 닳아 wear line이 거의 사라진 상태인데 이렇게 계속 브레이크를 밟아대면 나중에 브레이크가 듣지 않을 것이다.
시험삼아 평지에서 앞/뒤 브레이크를 끝까지 당겨 보았다. 빗물 코팅이 된 아스팔트 도로에서 주아악 미끄러지며 30m 이상 나간다. 그러고도 완전히 정지하지 않는다. 허걱. 이거 좀 위험한데? 여분의 브레이크 패드를 챙겨오지 않았다. 진부령에서 브레이크가 듣지 않아 신나야 할 다운힐 구간에서 끌바(자전거 끌고가기)를 해야만 했던 눈물겨운 사연을 자전거 동호회에서 본 적이 있다. 비지땀을 흘리며 혼신의 힘을 다해 꼭대기 휴게소까지 올라가서 자전거를 끌고 내려와 봐라. 그저 허허 웃음 밖에 안 나오지.
382 국도로 들어섰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382 도로로 들어서자 길이 넓어졌다. 갓길도 제법 있고 차량 소통량이 늘었다. 하지만 길은 밋밋하고 재미가 없어졌다. 흐린 날이라 금방 어둑어둑 해 졌다.
아소베이 파크 캠핑장 입구에 다다랐다. 7pm. 대략 5시간쯤 달린 셈이다. 비가 안 왔더라면 더 일찍 도착했을 것이다. 이즈하라에서 히타카쓰까지 대략 100km 가량, 자전거로 하루면 주파할 수 있는 거리다. 물론 그렇게 달리면 정말 재미가 없을 것이다. 자전거 '여행'을 온거지 자전거 '주행'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관광이란 말이다!
아소베이 파크 캠핑장 입구는 쇠사슬로 막혀 있다. 통행 금지. 6pm에 캠핑장이 문을 닫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예약을 했고 예약을 했으니까 관리인이 기다려주거나, 캠핑장 안에 들어가 캠프를 하는 것이 워낙 당연하게 여겨져 자전거를 쇠사슬 너머로 넘겼다. 일단 캠핑 후, 저간 사정을 빌자. 옆 샛길에서 짐차가 나타나더니 백밀러로 흘낏 보고 올라간다. 아, 저 아저씨가 관리인이구나. 저 트럭을 쫓아가면 되겠구나! 고개를 한 두 개 넘어 헉헉 거리며 올라가니 캠핑장 관리 사무소가 나타난다.
아저씨가 반겨준다. 일본어로 인사했다. 곰방와! 굿 이브닝! 자랑스럽게 캠핑 예약 신청서를 내밀었다. 말은 안 통하지만(나는 영어로, 그 아저씨는 일어로 서로 유려하게 말했다) 팩스, 레저베이션, 예야꾸(예약), 캠핑, 투데이, 투모로우 정도는 서로 대화가 통해 내가 여기서 2박을 머무를 예정이라는 것을 아저씨가 알아 들었다. 그런데 컨펌까지 받았는데 예약된 것이 없다. 다시 신청서를 작성했다. 뭐 예약에 무슨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캠핑장 예약 신청서'는 떳떳한 부적의 역할만 하면 되는 것이다.
1박 캠핑이 1000엔이란다. 600엔으로 알고 있는데요? 600엔은 없고 차량용 캠핑 코너가 1000엔이란다. 떨떠름하지만 오케이. 2박 2000엔을 건넸다. 아저씨가 차를 몰고 캠핑장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러더니 화장실을 보여준다. 샤워 오케이. 토이레(toilet) 오케이. 레인?, 레인!, 뭐 이런 제3세계 스러운 대사를 주고받았다. 아저씨 말은 비가 오니까 지붕이 있는 화장실 구석에 텐트를 치란다. 그러면서 비가 그치면 내일은 저기 오토캠핑장으로 텐트를 옮기라는 것 같다. 오케이. 하이. 예스.
빌어먹을. 제대로 된 일어 공부 좀 하고 오는 건데... 도서관에서 기초 일어회화 책을 빌려왔는데 '와따시와 한코쿠진 데쓰', '와따시와 나마에 산돈데쓰' 같은 하등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대사 밖에 없다. 시계가 있는데 시간은 물어서 뭣하고 뻔히 아는 물건 더러 '고레와 난데스까?' 하는 바보스러운 말을 할 이유가 없다.
그 회화책, 하루 봤다. 하룻동안 외운 것은 아이우에오, 카키쿠케코의 히라카나 글자 모양이 어떻게 생겼나 하는 것 정도다. 비를 많이 맞으니까 이젠 기억이 안 난다. 그러니까 일본어 글자도 못 읽는다 -_- 그동안 업무에 시달리느라 바빴고 밀린 책들 읽느라 바빴다. 어떻게 되겠지 하고 왔는데 정말 어떻게 되긴 된다. 하지만 독도, 위안부, 일본의 최근 우경화 성향에 관한 현지인과의 진지한 토론은 못 하잖아?
노심초사 끝에 옥션에서 3만 5천원 주고 구입한 1인용 낚시 텐트. 15만원짜리 비박용 텐트가 있긴 하지만 누에고치처럼 안에 들어가면 꼼짝 달싹도 못하는 바보스러운 텐트에 눕고 싶은 생각은 없다. 결정적으로 그런 텐트는 1kg이 넘는데 비해 이 텐트의 무게는 750g 밖에 안 된다. 750g인데 내부는 한 사람이 충분히 눕고도 여러 짐들을 안에 넣을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있다. 폴대만 밀어 넣어 교차시키면 모기장 텐트가 완성되고 그 위에 플라이를 씌우면 방수 커버가 된다. 텐트의 방수 성능을 순진하게 믿지는 않아서 넓고 얇은 비닐을 함께 들고 왔다. 여러 모로 흡족한 텐트다.
아소베이 파크 캠핑장. 기본적으로 오토캠핑장이다. 자동차 들여놓고 저 나무판 위에 텐트를 설치한다. 사이트 하나 마다 장작을 지필 수 있는 바베큐 그릴이 있고 그 옆에 110V 아웃렛이 달려 있다. 220V->110V 컨버터 플러그만 있으면 얼마든지 충전이 가능하다. 공동 취사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쓰시마가 그렇게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서 이용객이 많지 않을 것 같은데 관리 상태는 상당히 좋다.
무려 23000원이나 주고 구입한 1인용 산악 코펠. 달랑 냄비 하나, 플레이트가 전부인데 무게가 가볍고 길죽하게 생겨 짐을 챙길 때 용적을 덜 차지한다. 수저와 젓가락, 버너 등을 코펠 안에 넣을 수 있어 좋다. 군대에서 라면 끓여먹을 때 쓰는 짬빱통이 더 싸고 훌륭하지만 시장통 돌아다닐 시간이 없어 인터넷으로 값비싼 것을 구입했다. 물론 철밥통보다는 무게가 현저하게 가볍다.
그 위에 17000원 짜리 초소형 미니 버너가 있다. 이건 잘못 샀다. 히타카쓰에 도착해 여기저기 수퍼에서 가스통을 찾아 봤는데(없을꺼라 짐작하고 한국에서 가스통을 구입해 오긴 했지만) 한국에서 휴대용 렌지에 쓰는 가스통은 많이 있지만 버너를 돌려 나사로 결속하는 형태의 저런 둥근 가스통은 두 가게를 돌아보는 동안 보지 못했다. 낚시점은 안 가봐서 모르겠다. 차라리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는 형태의 가스통에 장착이 가능한 버너나, 일반 가스통을 장착할 수 있는 어댑터가 포함된 버너를 사는게 나았을 것 같다. 작은 크기임에도 화력이 꽤 좋아 성능에 불만은 없다.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곤 도시락이 전부라 라면을 끓였다. 예전에 일본의 인스탄트 라면을 여러 종류 먹어봤는데 도저히 맛있다고는 할 수 없는 희안한 맛의 라면들이라 라면 맛은 기대하지 않았다. 공동 취사장의 그릴에는 장작을 뗄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장작들이 젖어 있고, 보통 캠핑장에서 장작은 공짜가 아니니 그냥 가스 버너로 해먹는게 낫지 싶다. 밥을 해 먹을 때는 가스버너보다 장작 쪽이 훨씬 맛있게 밥이 된다. 거기다가 소세지, 옥수수, 감자, 통 돼지고기 따위를 구워 먹으면... 츄릅. 생각만 해도 침이 넘어오네... 여행 중에 주방을 빌려 밥을 해먹은 적은 많지만 캠핑을 해 본 지가 십 년이 넘어서 캠핑용 기어를 어떻게 골라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요즘 캠핑 장비는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좋아진 것 같은데...
워낙 가난한 캠핑만 해봐서(어린 시절에도 혼자 다녔다. 얘들을 몇번 데리고 태백산맥을 헤메고 나면 다시는 같이 안 가려 들었다. 늘 비를 몰고 다녔고 늘 여지없이 개고생을 한 탓도 있다) 당시에 들고 다닌 음식이라곤 쌀 한 주머니, 고추장 한 덩이 정도가 고작이다. 나중에 생활이 펴서 라면도 들고 다니고 인스턴트 카레 따위도 들고 다녔다. 다 어린 시절 얘기다. 이건 사제 스프다. 멀쩡한 라면 뜯어서 스프만 챙겨 들고갈 수는 없고, 예전에는 라면 스프만 따로 팔았는데 요즘은 안 보이는 것 같고... 그래서 라면 스프를 만들었다. 마늘가루 있으면 넣고, 다시다 가루, 멸치, 다시마, 새우 약간, 소금 왕창, 후추 약간, 고춧가루 왕창 넣고 블랜더에 함께 갈아낸다. 거기에 마른 오징어, 표고버섯, 다시마 따위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넣으면 완성이다. 일종의 천연 조미료인 셈이다.
일본 면발에 사제 스프로 끓인 라면. 삼양라면 맛이 난다. 신라면같은 칼칼한 맛을 내려면 청양고추를 냉동 건조시킨 다음 바짝 말려서 블랜더에 같이 갈아야 하는데 뭐 그럴 시간은 없고 적어도 일본의 인스탄트 라면 같이 느끼하고 한 입 먹으면 괜히 먹었다 이 닦고 그냥 잘 껄 하는 기분은 안 나는 그럭저럭 괜찮은 맛이 나는 라면이 완성되었다.
라면 끓여먹고 젖은 옷을 빨아서 짰다. 9pm.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한 이틀 제대로 잠을 못잤더니 피곤하다. 잠이나 자자 누웠지만 말똥말똥. 평소 새벽 2-3시에 자던 사람이 9pm에 자려니 잠이 오겠나.
아소베이 파크에 오기 전에 마땅한 수퍼가 보였으면 술이나 몇 병 사오는 건데. 너무 늦지 않으려고 정신없이 왔더니 달랑 라면 하나와 먹다 남은 크런치 초콜렛 밖에 먹을 것이 없다.
인터넷 어딘가에서 구한 지도. 요점 정리가 잘되어 있어 원작자에게 감사하다. 하타카쓰는 맨 위, 아소베이 파크는 중간 아래 '대산' 부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