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El Salvador'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3.04.21 San Salvador
  2. 2003.04.21 El Salvador 2

San Salvador

여행기/El Salvador 2003. 4. 21. 18:50
아침부터 온두라스 대사관을 찾아 다녔다. 가이드북에 나온 주소는 옛날 것이고, 온두라스 대사관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 난감하다. 용감하게 버스를 타고 거리에 내리긴 했는데 대책이 없네. 전화번호도 바뀌고... 무작정 걸었다. 인터넷 까페가 보이면 들어가 온두라스 대사관 주소를 확인해 볼 참이었다. 중간 중간 대략 3-40여명 정도의 사람들에게 끈질기게 물었다. 결국 택시 한번 안 타고 땀 흘리며 걸어 대사관을 찾았다. 비자 발급은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아줌마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묵묵히 비자 스티커를 붙인 후 10달러 달라고 말한다. 감동했다.

대낮의, 멀쩡한 대로에서 술 취한 작자가 시비를 건다. 무시하고 가려니 모자를 나꿔챈다. 본의 아니게 인상을 구겼다. 기분이 나빠져서 안경을 벗었다. 거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반쯤 일어섰다. 생략. 가던 길을 갔다. 그나저나 도시 분위기가 왜 이 모양일까. 7000번의 지진이 나는 동안 시민들의 두개골이 심하게 흔들려서 정신이 어떻게 된건가? 아니겠지. 술 취한 녀석들 중 일부는 자신에게 관심과 사랑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굳이 거리 퍼포먼스를 하는 것 같다.

미친 가이드북이 산 살바도르를 이렇게 묘사했다. '많은 여행자들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도시지만 그 짧은 동안에 경험하게 되는 산 살바도르 시민의 친절과 미소는 영원히 가슴에 남을 것이다.'

아무렴.

엘 살바도르 사진
,

El Salvador

여행기/El Salvador 2003. 4. 21. 11:02
8.20am. 늦게 일어났다. 대충 씻고 체크아웃했다. 걷기 싫어서 매연을 꼬리처럼 달고 다니는 시내버스를 타고 터미널까지 갔다. 산 살바도르행 버스에 올랐다. 2시간 반쯤 아름다운 풍경을 달리자 다리가 나타났다. 국경인가 보다. 출입국 수속은 어이없게 간단했다.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한국은 엘 살바도르에 비자나 투어리스트 카드 없이 들어갈 수 있다지만 제대로 출입국을 한 것인지 의아할 따름이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밖에 나오니 삐끼가 환전하라고 달라붙었지만 하지 않았다. 38불 어치를 28불에 환전 해준다니 도둑놈이 따로 없다. 협상이 잘 안되고 일요일이라 은행이 문을 닫아 어쩔 수 없이 과떼말라 꿰찰을 그냥 들고 버스에 올랐다.

산 살바도르에 내렸지만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이 더위에 또 걷고 싶지는 않아 물어물어 시내 버스를 탔다. 달러를 사용할 수 있다길래 급한 김에 달러를 내미니 달러로 거슬러준다. 허거덕.

숙소까지 걸었다. 긴장했다. 공원에 할 일 없이 앉아 있는 사람들은 거의 실업자처럼 보였다. 지진과 내전 때문에 나라 꼴이 말이 아니라서 무장 강도가 판을 친다나? 과떼말라 시티의 사설 경호원 숫자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많은 숫자의 사설 경호원들이 가게 곳곳에 널려 있었다. 경찰은 방탄복을 입고... 어? 저 총은 k2 잖아? 반가워서 꼬리를 흔들며 유심히 쳐다보니 살벌한 눈빛이 되돌아온다. 선량한 시민은 관심 끄고 조용히 꺼져 주십쇼 하는 듯한.

숙소에 짐을 내려놓았지만 일요일이라 딱히 할 일이 없다. 볼거리도 없는 나라다. 거리를 세 시간쯤 돌아다녔다. 시장통을 빼고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어쩌면 그런 거리를 돌아다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길을 물어도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 알아듣질 못한다. 아니면 엘 살바도르 최대의 대학은 시민의 관심꺼리가 못 되던가.

간간이 골목에서 불쑥 나타나 말을 걸어온 다섯 중 넷은 평범한 거지였고 하나는 구걸이 아니라 뻔뻔하게 돈을 요구하는 인상 드러운 녀석이다. 소리를 꽥 지르며 돌로레스! 라고 외친다. 하핫. 중미 1개월이면 에스파뇰을 안다고, 돌로레스가 무슨 뜻인지 알지. dollor말이지? 사방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다. 쪼개보면서 진중하게 한 마디 했다. 쫄았잖아 새꺄. 영양상태가 부실한 놈이 총도 아닌 조그마한 쇠꼬챙이를 흔들며 위협해서 가당찮았다. 손사레를 하고 등을 보인 채 그냥 걸었다. 뒤에서 그라시아스! 하고 소리쳤다. 뭐가 고맙다는 걸까. 길을 못 찾아서 더운 날씨에 가뜩이나 열 나는데 홧김에 두들겨 패지 않아서? 대낮부터 이 모양인 걸 보니 밤에 돌아다니기는 글른 것 같다. 메뜨로센뜨로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해산물이 잔뜩 들은 이런 저런 부페를 4불 주고 먹었다. 맛있긴 한데, 식사비가 왜 이렇게 비싸냐... 가난하다면서...

엘 살바도르에는 변변한 쇠 쪼가리 하나 없어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정복이나 학살은 없었다. 옥수수만 무럭무럭 자라는 무심한 땅이다. 가끔 지진이 모든 것을 쓸어갔다. 2001년 3개월 동안 여진을 포함해 7000번의 지진이 있었다. 애나 어른이나 건물이나 나무들이나 하는 수 없이 지진에 맞춰 살사를 땡겼을 것이다. 산 살바도르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화산이다. 참 지지리도 복이 없는 나라다.

마음이 변해서 지폐 몇 장 챙기고 간소한 옷차림에 시계마저 벗어두고 맥주를 마시러 밤 거리로 나섰다. 술집 입구에서 경비원이 몸수색을 한다. 맥주나 마실까 하고 들어간 바에는 왠 여자들이 앉아 무슨 말인가를 한다. 문맥상, 분위기상, 자기도 한 병 사달라는 뜻인 것 같다. 거절했다. 쥬크박스에서 음악이 흘러 나왔다. 쥐구멍만한 가게가 왠만한 디스코텍 못지 않게 출력이 쎄다. 보헤미안 랩소디가 그 볼륨이니 머큐리의 정신병자같은 절규가 들어줄만 했다. 노래가 열댓 곡 쯤 이어지는 동안 담배를 피우고 목구멍을 축이면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노랫가사가 왠지 심금을 울린다고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에 거리에서 서성이는 창녀들이 쳐다보았다. 마주 쳐다 보았다. 금새 외면한다. 그들은 저렴한 남자를 한 눈에 알아보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왠지... 쓸쓸했다. 이 동네에서 내가 좀 이국적인 편 아닌가?

아홉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어두운 거리에는 이상한 녀석들만 간간히 보이고 개조차 지나 다니지 않는다. 분위기가 영 안 좋아 발걸음을 서둘렀다. 숙소 문이 잠겨 있다. 떨린다. 문을 두들기자 호텔 주인이 문을 열어준다.

내 욕망과, 내가 가진 것 만큼 이 밤거리가 위험한 것인가? 거리에서 서성이는 창녀나, 술에 취한 거지는 위험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가진 것이 별로 없고 그렇고 그런 동네에서 지금껏 살았으니까. 스승께서는 요점만 말씀하셨다. 욕망을 버릴 것, 마음을 비울 것. 그런데 갑자기 골목에서 괴한이 불쑥 나타나 그의 불알을 꽉 움켜쥐고 가진 거 다 내놔 라고 말하면 앞서 깨달은 스승은 과연 뭐라고 말할까? 음. 이를테면 라즈니쉬나 예수가 괴한에게 불알을 잡혔다면? 가진 거 없어. 라고 정직하게 말하겠지? 그럼 네 머리라도 내놔. 생각할 수 없는 머리가 없으면 일곱 차크라를 열고 군달리니의 기쁨을 누리는 머리도,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는 머리도, 사랑이 샘솟는 머리도 없다. 스승이라도 그 상황에서는 별 수 없다. 머리를 잘리던가, 안 잘리던가. 그건 괴한의 의지니까. 괴한이 에스빠뇰을 사용하고 스승은 에스빠뇰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가정해 보았다. 불알이 잡힌 상황에서 스승의 처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스승은 어떻게 목이 안 잘리고 살 수 있을까. 막무가내인 괴한에게 고작 1달러만 주면 되는데, 평소 무소유라 그 돈이 없고... 말이 안 통하니 설교가 안되고... 불알은 아파 죽겠고... 고민해 봐야겠다.

이왕 고민하는 김에 이순신, 강감찬, 김두한, 김구, 노무현 들이 괴한에게 불알을 잡힌 수치스럽고 괴로운 정국에서 1 달라를 줄까 안 줄까도 함께 고민해 봐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