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젤라즈니'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8.10.13 별을 쫓는 자 7

별을 쫓는 자

잡기 2008. 10. 13. 18:51
이것도 써놓고 안 올렸던 떨거지: 아마도 책 읽고 평가를 한 줄 밖에 안 올린다는 것에 자극받아 쓴 듯. (근데 써서 뭐하나... 재밌는 건 그냥 재밌으면 된거지)

별을 쫓는 자(Eye of Cat) -- '고양이 눈깔'이라고 하긴 좀 어색하니까, '삵의 눈'이나 '미친 나바호의 노래' 정도? 번역한 제명이 '별을 쫓는 자'인 까닭은 종반의 한 싯귀에서 따온 걸까?

내가 가는 길, 내 마음 속에 가득 찬 별들.
회전하는 거대한 수레바퀴처럼
봄을 향해 가는 별들이여

문구만 봐도 구색이 어떨지, 확 삘이 오는 젤라즈니의 글들은 대체로 비평가 프렌들리해서 썰었다가 붙이기도 편하다. 게다가 독자를 빨아들이는 매그너티즘도 강하고. 
"베고치디 여자와 베고치디와 '말하는 신'과 '검은 신'이 사녕감을 창조했기 때문에 그들이 사냥을 지배한다는 얘기가 맞습니까?"
"그럼. 마음이 내킨다면 그들은 사냥꾼을 도울 수 있지."
"하지만 당신은 예전과는 달리 거의 사냥을 안 하던데요?"
"사실이야."
"그럼 그들도 최근엔 별로 할 일이 없겠군요."
"아마 뭔가 다른 일을 찾아내서 열중하고 있겠지."
"그런데요, 당신이 속한 부족의 구조적 맥락에서 볼 때, 그런 행동은 토템적 존재의 규정을 벗어나는 일 아닐까요?"
"무슨 뜻이야?"
"그러니까 다들 원래 맡은 역할만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 우리에 관해서 헛소리만 늘어놓는 인류학자 놈들에게 대신 복수를 해 주기도 해."
공감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겠지만, 젤라즈니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별을 쫓는 자'는 모험 소설 또는 하드보일드 마초 소설의 표준 모델을 준수한다. 자학적이고 운명론에 심취한 주인공이 극중 전개를 통해 자기 본성과 운명론으로 수렴회귀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기가 구축한 세계의 정당성을 편의에 걸맞게 리믹스한다.

잃어버린 여자가 있고, 잃어버린 여자의 대체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이 헛소리를 늘어놓기 일쑤다. 교미는 하지만 번식이 안되는 멸종 직전의 별난 짐승과 마찬가지랄까? 메이팅이 없으니 자손이 없어서 사회 일반과의 공감각이 의도적으로 차단된다-차단시킨다. 제임스 본드는 그래서 아이가 없다. 인디애나 존스도 마찬가지다. 유사 대용품이 있긴 한데, 이들(주로 아이들, 맞고 모욕당하는 힘없는 여자들)의 출연과 역할은 어쩐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 이를테면 아이를 좋아하는 한 개마초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다른 개마초보다 사회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진다 -- 아이를 좋아하는 개마초는 여자들의 호감을 쉽게 얻어 교미에도 유리하다. (사실 문화인류학은 그놈에 시적이고 자의적인 부분을 거세하고 단층처럼 존재하는 사실을 건조하게 추렴함으로써 '사회생물학'에서도 똑같이 느끼는 그런 시적인 메스꺼움을 깔끔하게 제거할 수 있지 않을까? 인디언이 인류학자를 희롱하듯이)

또한,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는 부평초 같은 삶을 살아간다, 단발성 인생은 극단적인 선택을 주저하지 않게 한다. 소설 전후반에 줄기차게 등장하는 찌질스런 숙명론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마초인) 주인공의 극단적인 선택과 세계에서 벌어지는 자기 통제를 벗어난 우연한 사건(의 연속)이다. 젤라즈니 소설은 늘 그랬지만. 주인공은 샤먼의 길을 걸음으로써, 완곡하게 말해, 시대를 초월해서 퇴행한다.
 
별을 쫓는 자는, 이상과 같은 이유로 마초물이다(내가 왜 젤라즈니 소설군이 마초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꿀릴까? 하지만 사실 타협하고 그들 견해를 존중한다). 이 소설에는 여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등장하는 여자는 이미 죽은 애인 하나 뿐이다(얼마나 편리한가? 불가능한 정조를 통한 여성 일반에 대한 호감과 신뢰의 구축 면에서는 아이를 좋아하는 개마초와 경우가 같다). 마초 표준 모델에 부합하는 또 다른 측면을 들라면; 깡촌오지에서 자기만의 세계관에 시달리며 삽질하다 소득없이 쫑나거나 자기 만족에 집착한다.

그럼, 교미 유희 없이 외계 깡촌 오지에서 고립되어 개고생하는 소설을 종종 쓰는 우르술라 르귄 같은 여작가의 글은 마초물일까? 그렇진 않다. 그의 여러 작품을 보면 여성의 목소리로 글을 쓰는 법이 별로 없고, 여성의 목소리로 쓰여진 소설은 영 꽝이다(할멈 스스로가 더 잘 알지 싶다). -- 젤라즈니와 르귄은 스타일과 벡터가 영 딴판이라고 느끼곤 했다.
 
시대를 리믹스한 마초 활극 신화물이란 유사성에서 비교로 사용할만한 젤라즈니의 전작들로는 '신들의 사회'와 '내 이름은 콘라드' 정도. 엇비슷한 신화적 맥락을 따라가지만 별을 쫓는 자에서는 영웅의 길이 내재화되었고(실은 없고) 트릭스터의 역할이 크지 않으며(심지어 자기자신을 기만하는 자기자신이라고 텍스트에서 노골적으로 떠들어댄다), 작가가 주인공과의 감정이입을 의도적으로 차단한다. 젤라즈니 소설이 언제 안 그랬냐고 마지막 항목에 반박할 수 있겠지만, 전작들처럼 작가가 독자를 희롱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길을 막아 버렸다. 멸종을 눈 앞에 둔  주인공은 그걸 반복해서 언급할 정도로 처량하고 감상적이다. 숲에 취해 아름다움에 휩싸여 걷는 미친 인디언이 툭하면 헛소리를 늘어놓는 대목에서 감정이입은 커녕 뭔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캣의 추격과 친니의 추격이 심화될수록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은 갈수록 (적응 안 되는 현대에서 소외되어 뽕 맞고 술병에 주둥이를 아예 갖다붙인) 인디언식 횡설수설로 빠져든다. 거진 마스터베이션 수준. 주인공 스스로 경계인이라고 스스로 자인하면서도 그 모양이다. 젤라즈니가 즐기는 독자 상대 희롱이 아니라 갖은 인디언 키취로 간을 본 의도적인 독자 개무시인 것 같다.
 
별을 쫓는 자의 스토리 요약은 한 줄로 충분하지 싶다. 한물간 인디언이 암살자를 제거해 달라는 의뢰를 받고 예전에 자기가 힘겹게 잡아들인 외계인 짐승을 풀어 암살자를 사냥하지만, 그 짐승이 투사한 악몽에 시달리다 결국 미쳐 버린다.
 
어느 신화나 마찬가지로 나바호 신화에서도 항상 선의 뒤를 잇는 악이 쫓아오고 도깨비처럼 간교한 트릭스터가 존재한다. 특별히 티나는 점은 베스터의 스타일을 계승했다는 것. 어린 시절에 어설픈 자유연상에 시달리고, 글자가 알록달록 색깔로 보이는 공감각 때문에 미치겠던 나같은 꼬마나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횡설수설과 텔레파시 묘사로 글자들이 행과 열을 채우고 있다는 점 -- 미친 인디언을 다루기 적합한 구조? 그리고 콜로라도 협곡 여정과 툭하면 겹치는 친니를 잡는 내적 탐사. 이 둘은 외연->캣을 통한 소통->거울상인 자기 자신의 소멸(또는 적멸)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젤라즈니는 이런 글을 쓰는데 타고난 사람이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독자 신경 안 쓰고(개무시하고) 그걸 전개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신들의 사회나, 콘라드와 완전 딴판인 신세계로 독자를 낚시질한다. 그 낚시질이 워낙 심오한 탓에 오의를 깨닫고 기꺼이 낚여주는 이가 적은 건 아닌지, 노파심이 생긴다.
 
재밌는 소설은 형식과 스타일에 상관없이 웃겨야 한다(훈계 모드. 그걸 아는 사람이 말야!). 웃을 일이라곤 없는 실세계의 불완전한 동태를 잠시 잊어버릴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뭣하면 내가 모르던 신기한 것들이나 영악한 아이디어가 무성한 잎사귀 처럼 그 매력적인 설정과 세계관을 풍요롭게 팔딱팔딱 손짓하던가. 그것도 아니면 감정이입이 이루어지는 캐릭터 구현을 통해서. 이 셋과는 동떨어졌지만 이 소설은 다른 이유에서 심금을 울렸다.

물론 종종 그 세 가지 이유가 아니어도 소설에 애착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한 인간이 이토록 많은 변화를 목격하면 영혼이 상처입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많은 변화를 목격했다...
남자는(또는 인간은) 유체이탈을 해봐야 한다. 세계와의, 타인과의 간섭이 최소화되는 상황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봐야 한다. 자신이 지각하는 현재와 세계가 불완전하게 틀어져 있고 자신의 정신과 육체가 세계에서 유리되고, 존재가 연속성과 항상성을 지니지 않다는 '유체이탈'적 경험의 대표적인 과정이 가상이든, 실제든, 방랑-여행이다.

그래서 하시시 빨고 뿅가는 것도 여행이고 빌리가 콜로라도 협곡을 헤메는 것도 여행이다. 여행이 방랑이 되고, 삽질이 되면 여행에서 만나는 또다른 찌질한 자아 / 거울상 / 생존을 위해 선택한 불가피한 악마와 대면하게 된다. 마치 빌리가 트립박스를 통해 무수한 점프를 거듭했음에도 언제나 그를 죽이려는 적인 캣을 만났던 것처럼, 자기가 대면하고 싶어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허약한 빈 틈을 후비고 들어오는, 자기 존재에 위협적인 네메시스를 만나는 것처럼 말이다.

방랑-여행은 삶의 연속성을 파괴하는 인간의 여러 자발적인 행위중 하나다. 생존과 존재를 위한 여행은 그래서 종종 내면화된다. 비록 빌리가 미쳤지만, 그점에서는 개개의 타자들이 다 그런 셈 아닐까? 어쩔 수 없이 지각하는 그런 광막한 절곡심상 만화경같은 여행을 통해 (심지어 나는 내가 착한 사람이란 걸 알아차리기도 했으며) 자기가 몰랐던 또 다른 자기를 발견하고(제2자) 이도저도 아닌 세 번째 사람(제 3자)이 될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를 잡기도 한다. 그래서 여행중독증을 합리화하려는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제2자와 제3자에 취해 여정은 끝이 없어진다. 그리고 결절마다 또다른 여정을 갈망하기도 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죽은 인디언들의 영혼이 떠도는 계곡에서 헤메며 죽을 고생을 하는 Man Vs. Wild의 쿠퍼 캐년 편이 떠올랐다. 빌리가 떠도는 그.. 사막과 유사한 협곡, 별로 가고 싶지 않지만 살다보면 어쩌다 처하게 되는 물리적이기도 하고 정서적이기도 한 그 지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