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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2.27 Bromo

Bromo

여행기/Indonesia 2011. 12. 27. 12:00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챙기고 체크아웃했다. 주인이 안 보여 할머니 손에 돈을 쥐어주었다. 4대가 한 집에 살고 있는 듯 한데, 일가족이 모두 친절하다. 성수기라서인지 숙소 가격이 더럽게 비싸고 구질구질한 화장실에 샤워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다른 숙소는 다 주는 아침 식사가 없지만, 복도에 놓인 공짜 차 한 잔 마시면 그런 거 다 부질없어진다.

8.15am 여행사 앞 벤치에 앉아 있으니 어제 투어를 같이 했던 스리랑카 출신 변호사와 네덜란드에서 온 남자가 왔다. 네덜란드인은 고향에서 차 팔아서 여행 경비를 마련했단다. 1.5리터 짜리 생수통만 여섯개. 하루에 두 통을 마신단다. 2년째 여행 중. 무척 비싼 차였나 봐요 하니 그게 자기 전 재산이었단다. 2년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 인도만 안 갔다. 직업이 뭐에요? 회사를 관뒀단다. 회사를 관두고 차를 팔고. 다른 여행자들은 주로 겨울 휴가로 10일 짜리 일정으로 인도네시아에 왔다. 그는 오랫만에 보는 장기여행자였는데 플라워 파워 아우라가 전혀 없었다. 세상이 변했다.

8.30am. 새침떼기 뉴질랜드 여자가 쇼핑한 짐을 차 뒷 칸에 한 가득 싣고 끙하며 올라탔다. 나는 스리랑카 남자와 8년 전에 스리랑카에 가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을 얘기했다. 그 망할 크리켓 시즌 때문에 항공권이 없어 캔디에 못 간 사연을. 당신도 크리켓 좋아하냐? 물으니 그 병신같은 크리켓에 왜들 그렇게 환장하는지 모르겠다는, 상당히 영국인스러운 답을 들었다. 그러게 말이야, 게다가 미친 스코티시들은 할 짓이 없어 골프같은 희안한 놀이를 발명했지. 옛날 옛날에 내가 만난 영국 여행자들은 대개 입이 거칠고 술을 미친듯이 쳐마셨다.

길고 지루한 버스 여행 중. 인도네시아의 주요 관광 자원중 하나가 바로 이 논(rice paddy)라니 좀 웃기지도 않아서...

미니버스를 타고 지루한 여행 시작. 인도네시아에는 정녕 고속도로가 없단 말인가? 죽어라고 1차선만 달린다. 그런데 이 미니버스, 좌석이 꽤 넓어 편하다. 에어컨은 뭐... 이젠 포기했다. 내가 탄 좌석열에 스페인에서 컴퓨터 사이언스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연구원이 한 명 탔다. 전공이 Artificial Intelligence다. 왠지 이 친구에게만큼은 별로 말을 걸고 싶지 않다. 창백한 얼굴로 LP에 코를 박고 있다. 앞 자리에는 노르웨이인 남녀가 탔는데 하루에 물을 3리터씩 마시는 네덜란드 호걸이 여자에게 수작 걸다가 진실이 밝혀졌다. 노르웨이 남자가 그녀의 연인이었다. 버스에 정적이 감돌고, 왠지 웃겼다. 스리랑카 변호사만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연신 떠들어댔다. 

맨 앞 자리에 말레이지아인이 탔다. 붙임성 좋은 중국인인데 말하는게 흡사 개똥지빠귀가 우짓는 것처럼 6성조로 영어를 했다. 무슨 말 하는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곧잘 알아 듣는 것 같다. 나? 나는 스리랑카인과 네덜란드인하고만 주로 떠들었다. 어디어디 갔는데 어디가 좋았다느니 하는 평범한 여행 얘기들... 영어가 잘 안되니 정말 갑갑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말벙어리가 된 걸까? 하긴, 한국에서도 업무 관련 얘기 외에는 말벙어리나 다름없었다.

두어번 차가 설 때마다 서양인들끼리 어울려 놀았다. 나하고 스페인 친구는 겉돌았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노르웨이 여자와 식사 중 인도네시아 음식 애기를 했다. 난 점심으로 나시 참푸르를 먹었다. 여러 가지 반찬이 밥과 함께 나오는 부페 같은 음식이다. 저녁은 먹지 않았다. 프로볼링고까지 지루한 여정. 간간히 GPSr을 꺼내 위치를 확인했다. 

8pm 사무실에 차량이 서고 내일 일정을 작전 회의 하듯이 설명한다. 물론 작전 지도도 있었다. 필요한 물품을 사라고 근처 수퍼에 차를 세웠다. 오렌지 쥬스와 물만 샀다. 다시 차를 갈아 타고 9pm 무렵에 브로모 산 중턱의 어느 호텔에 섰다. 날씨가 쌀쌀하다. 기온은 6도. 호텔의 불빛을 빼고 사위가 잠잠하고 칠흑같이 어둡다. 안개처럼 축축한 공기가 볼을 핥았다.

무작위 선정으로 중국계 말레이인과 같은 방에 배정되었다. 말레이 아저씨는 투어 예약할 당시의 호텔과 다르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난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인도네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호텔 프론트(말이 호텔이지 그냥 게스트 하우스)에서 수건을 두 장 얻어와 내게 한 장 나눠주고 수완을 발휘해 온수 샤워가 나오게 했다. 난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휴대폰이 갤럭시S인데 플러그가 맞지 않아 충전을 할 수 없단다. 내 여행용 멀티 어댑터를 빌려줬다. 자기가 사온 맥주를 나눠 마시잔다. 사양했다. 그는 맥주를 마시고 나는 멍하니 벽에 기대 앉아 얘기했다. 옛날 말레이지아 여행 하던 때가 생각났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회사를 관두고, 생명보험을 해약하고 생긴 돈으로 아무 생각없이 동남아시아로 갔다. 말레이 아저씨와 말레이 음식과 인도네시아 음식의 차이점에 관한 얘기를 했다. 이름은 같지만 요리 방식이 다르다. 그는 요리사였다. 아 맞다, 당신들 요리엔 항상 코코넛 밀크가 들어가지요? 그렇단다. 말레이 사람들 싱가폴에 많이 가지요? 그렇단다. 싱가폴 여자를 둘 사귀었다. 그중 한 명과 보트키에서 죽어라 술을 마셨고 포옹을 하고 입을 맞추고 왠지 부아가 치밀어 나 혼자 숙소로 돌아가다가 길을 잃고 밤거리를 헤멨다. 간신히 숙소를 찾아 맛이 간 채로 문을 두들겼다. 말레이지아에서 처음으로 마스지드를 방문했다. 거기 관리자가 내게 손을 씻고 발을 씻고 들어오라고 가르쳐줬다. 반질반질한 회교 사원엔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한국에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대단히 지쳐버린 상태였지만 그래도 여행을 했다. 말레이지아 음식 중에 사태가 가장 맛있었어요. 한국에 와 본 적 있어요? 싱가폴 여자가 한국에 찾아왔다. 일주일쯤 함께 지냈다. 그 당시 나는 여러 외국인 여자를 사귀었다. 중국계 말레이 아저씨 앞에서 이 말은 차마 안 나왔다; 당신들, 중국인 역차별로 말레이인들의 미움을 받지요? 말라카에서 베드웜에 당해 그때 인도네시아 행 배를 타지 못했다. 뜨거운 햇살 아래서 마치 에이즈 환자처럼 무거운 걸음으로 병원을 찾아 말라카 시내를 돌아다녔다. 내 팔다리에 돋은 흉칙한 붉은 반점 때문에 사람들이 피했다. 난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랬었구나... 인도네시아에 오게 된 이유가. 심층 무의식에 남은 미련 말이다. 그럼 언젠가는 내가 자전거로 큐슈와 오키나와를 돌아다니겠네? 무시무시한 심층 무의식에 남은 미련, 또는 악착같이 찌질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옛날 때문에? 남들 말로는 오래된 기억은 색이 바래지며 미화된다는데... 나는 마치 뱃사람처럼 마카오에서 도박을 하고 어떤 가게의 쇼윈도에 진열된 여자 중 하나를 돈 주고 사서 잤다. 그런데 그 세부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이국의 거리에서 마치 뱃사람처럼 혼자 술 먹고 취해서 골목을 전전했다. 그래서 이 망할 블로그질을 계속 하는 것이다. 찌질한 과거를 기록하려고. 하다못해 이 여행기조차 잊지 않기 위해 매일 밤 수첩에 끄적여 놓았다. 

이불 속에 목만 내놓고 한가하게 얘기하다가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말레이 아저씨가 맥주를 다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돌아와 불을 껐나 보다. 

전등이 번쩍 켜져 눈을 떠 보니 3.30am. 세수는 생략하고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숙소 로비 앞의 마당으로 나갔다.

안개 속에서 유령처럼 꾸역꾸역 사람들이 나타났다. 멍하니 기다렸다. 그렇게 춥지는 않았지만 공기가 축축하더니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짚차를 타고 떠났다. 

말레이 아저씨와 나는 뒤늦게 네덜란드인 부부가 타고 온 짚차에 합승했다. 짚차의 헤드라이트로 낙타털 같은 빗줄기가 희끗희끗 어스름에 춤을 췄다. 다른 짚차의 후미등을 따라가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짚차의 행렬이 이어졌다. 잠이 덜 깬 승객들은 말없이 의자에 기댔다. 경사로가 끝나고 차가 멈췄다. 내려보니 인파가 꾸역꾸역 비포장 도로를 올라간다.

기사가 안되는 영어로 유 고, 워크, 아이 웨이트 등등 어렵사리 Viewpoint#1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부부는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는 지불을 했으니 끝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우기며 내릴 생각을 안 한다. 이 부부는 어젯밤 브리핑 때 도대체 뭘 듣고 있었던 거야? 6인승 짚차의 뒤에 앉아 있던 나와 말레이 아저씨는 앞 좌석에서 내려 의자를 접어줘야 차에서 나갈 수 있다. 네덜란드 부부에게, 다른 사람들도 걸어가니 내리자고 말했다. 말레이 아저씨와 내가 내린 다음에도 납득이 안 되는지 기사를 다그치다가 지나가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는다. 짚차론 이 경사의 비포장 도로를 오를 수 없다. 그들을 내버려 둔 채 혼자 올라가기 시작했다.

비가 오다 말다 했다. 길은 질척질척하고 어둡다. 삐끼들이 말을 데리고 다가와 말을 타겠냐고 물었다. 고개를 저었다. 헤드 라이트를 배낭에 두고 왔다. 안 하길 잘했다. 이 어둠 속에서 강렬한 LED 불빛은 오히려 민폐가 될 것 같았다. 

꾸역꾸역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지점까지 올라왔다. 커피와 따뜻한 음료를 파는 가판대가 몇 보이고 털옷으로 중무장한 인도네시아인들이 서성이며 깔깔거렸다. 외국 여행자 반, 현지인 반 정도? 서서히 날이 밝아 오고 있다. 하지만 시야가 막막하다. 절벽 끄트머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솜털같은 안개 뿐... 갑자기 강한 돌풍이 훅 불어 뒤로 떠밀렸다. 쎈데? 잘못하면 추락하겠군. 거리를 두었다. 

gunning bromo(브로모 화산)을 보기 위해 소위 view point #1 지점에 올라왔다. 아직 날이 밝질 않아 아무 것도 안 보인다.

왠걸. 빗발이 잦아들질 않는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 아래 사람들이 펭귄떼처럼 뭉쳐 웅성거렸다. 그 틈에 끼어 내키지 않는 채취와 비 냄새를 맡기보다는... 빗속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산으로 난 길을 보고 꾸역꾸역 올라갔다. 영국인 청년 친구들이(아니면 aussy겠지?) 서로를 향해 정답게 욕설을 주고 받다가 정상 부근에서 막막한 안개와 비바람에 이구동성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oh shit! fuck! 고개를 돌렸다.

인도네시아 아줌마와 아저씨가 나란히 서서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윽고 흙바닥에 깔아놓은 러그에 무릅을 꿇었다. 기도한다. 나도 기도하고 싶다.

끝까지 올라갔지만 비바람 외엔 아무 것도 볼 것이 없었다. 다시 내려왔다. 말레이 아저씨와 네덜란드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날이 완전히 밝았다. 운무에 숨은 브로모 화산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간혹 돌풍이 불었고 안개가 바람에 이리저리 흩어졌다. 안개가 잠깐 동안 사라지면 저 아래 쪽 땅바닥이 살짝 보이곤 했다. 

안개가 강한 바람에 휩쓸려 사라진 틈에 잠시 나타난 칼데라

그렇게 30분쯤 기다렸지만 안개는 가시지 않았다. 내려 오는 길에 경치가 좋은 곳이면 말레이 아저씨의 갤럭시S로 그의 인증샷을 찍어줬다. 나더러 찍겠냐고 물었다. 히죽히죽 웃으며 안 찍겠다고 말했다. 어두울 땐 잘 몰랐지만 내려오는 길이 온통 비에 뭉개진 말똥 투성이였다. 차라리 말을 탔더라면 찝찝하지나 않지. 아! 그래서 말을 타는 거구나...

짚차의 다음 행선지는 브로모 화산 아래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는단다. 더치 부부가 버럭 화를 내며 자기들은 입장료가 포함된 투어를 신청했단다. 그야 우리도 마찬가지고. 기사의 부탁으로 표를 꺼냈지만 정작 입구에서는 표 검사를 하지 않고 차를 통과시켰다. 더치 부부가 머쓱해졌는지 자기들은 인도네시아인들의 거짓말과 삐끼질, 그리고 외국인 관광객 대상의 이중 요금에 분노가 치밀고 피곤해 죽겠단다. 이해가 간다. 마누라가 워낙 깐깐해서 당한 적은 없을 것 같다. 짚차에서 그렇게 욕하던 기사를 끼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낄낄거린다. 활달한 부부다.

마치 달 표면 같은 칼데라에 발을 내렸다. 쓱쓱 검은 토사에 발을 비볐다. 입자가 굵지만 모래보다는 가늘었다. 빗물을 머금어 진흙창처럼 미끌거릴 줄 알았는데 접지가 썩 괜찮다. 

칼데라는 넓고 시원했다.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그리운 이질감을 느꼈다. 그리운 이질감? 말레이 아저씨와 같이 걷다가 우리는 서로 할 말도 없고 각자의 감상에 젖어 차차 거리가 벌어졌다. 칼데라 한 복판에 사원이 있다. 저번 화산 폭발 때 여기 있던 사람들은 무사했을까? 그나저나 활화산 옆에 사원을 차려놓다니 기개가 대단하다.

칼데라로 내려와 브로모 화산으로 가는 길. 브로모 화산은 수 차례 폭발로 산의 형체가 거의 사라지고 분화구 밑둥만 남은 상태

수많은 사람들이 걷거나 말을 타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폭발 후 corn이 날아간 bromo 화산 남쪽으로 향했다. 야트막한 야산 같아뵈던 브로모 화산의 밑둥은 다가갈수록 높아졌고 구릉을 따라 단단한 검은 땅을 밟고 차근차근 오르다가 마지막에 가파른 계단을 접했다. 좁은 계단은 둘로 나뉘어 한쪽은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꾸역꾸역 오르고 상대적으로 한산한 내리막길로는 사람들이 조심스레 걸음을 옮긴다.

저 멀리 계단까지는 말을 타고 갈 수도 있다. 갈길이 별로 안 힘들어 설렁설렁 걸어갔다. 아참 이거 활화산이다. 여차하면 터진다. 2011년 분출 사진: http://photoblog.msnbc.msn.com/_news/2011/03/11/6244672-indonesias-mount-bromo-continues-to-erupt


이렇게 보니 흡사 피난민 행렬 같은데? 화산은 이걸로 세 번 째인데 언제나 비가 내릴 때 방문하게 되는 셈.

내 걸음으로 한 150m 되는 이 정도 야산은 성큼성큼 오를만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사람들로 앞이 꽉막힌 계단을 지루하게 올라 정상에 섰다. 난간이 없다. 급경사를 이룬 분화구 안쪽과 역시 급사면을 이룬 바깥쪽 사이에 폭 1m 가량의 길을 두고 사람들이 교차했다. 여차하면 떨어질 것처럼 위태위태하지만 사람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는다. 분화구 아가리는 여전한 비바람과 안개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기 올라오기 전까지만 해도 분화구 가장자리를 한 바퀴 돌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간헐적으로 불어오는 돌풍과, 갈수록 좁아지는 길 때문에 엄두가 안 났다. 십 분쯤 멍하니 분화구를 노려보고 있는데 누가 툭 친다. 말레이 아저씨다. 걷다가 지쳐 계단까지 말을 타고 왔단다. 뒤를 돌아 남쪽을 바라봤다. 짚차가 일렬로 죽 서 있는 저기 주차장까지 2km는 되어 보였다. 말레이 아저씨의 전용 찍사가 되어 그의 사진을 이리저리 찍어주었다. 앉아서 찰칵, 서서 찰칵, 기대서 찰칵, 현지인과 어깨동무하며 찰칵.

폭 1m 미만의...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길. 엄청 으시시한게, 바람도 쌩쌩 분다.

칼데라의 저 굴곡은 화산탄이 파헤친 땅으로 빗방울이 시내를 이뤄 사면을 타고 내려가면서 물길이 만든 흔적

안개가 다 걷히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분화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탁한 색깔의, 미동도 않는 물이 고여 있다. 으시시. 누군가 칼데라에서부터 걸어 남서쪽 사면을 꾸역꾸역 올라갔다. 워낙 멀어 흰점과 노란점으로만 보였다. 애당초 사람들로 붐비는 돗대기 시장 같은 계단을 오르지 않고 저렇게 오르는 편이 나았을 껄 그랬다. 

분화구가 아까보다 잘 보인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외국인(백인)만 보면 사진 같이 찍자고 우루루 몰려들곤 했다. 뭐 나한테는 사진 같이 찍자는 인도네시아인이 하나도 없었다. 저 검은 머리의 유럽계 외국인도 별로 외국인스럽지 않아 나와 같은 신세. 여기서 한 삼십분 비바람을 맞으며 혼자 온 저런 외국인들 기념사진을 찍어줬다.

어느 소외받고 용감해진 검은 머리 외국인이 기어코 모험을 하러 간다. 그가 리오의 예수같은 십자가 자세를 취하자 인도네시아인들이 환호성을 울리며 그의 사진을 찍었다. 나도 해볼까?

30분쯤 서서 사방을 둘러보다가 시시해져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칼데라 여기 저기 빗물이 내를 이루며 흐르다가 깊이 파인 땅 아래로 내려갔다. 사람이 없어 아늑하고 좋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던 누군가 소리쳐서 내 시선을 끌었다. 더 이상 갈 수 없단다. 무너지는 흙더미를 기어 올라가니 멀리 떨어진 주차장까지 걸었다. 먼저 온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처음에 같이 차를 타고 이곳에 왔던 스리랑카 변호사와 떡대 좋은 더치 청년은 우리와 같은 투어를 신청하지 않고 새벽 세 시에 일어나 둘이 함께 걸어서 뷰포인트에 올라갔다 내려왔단다. 세 시간쯤? 그들은 비바람과 안개에 허탕치고 내려와서 브로모 화산에 갈 생각은 접었고 더치 청년은 하루 더 묵다가 가기로 했단다. 수염을 밀어버리니 말끔한게 어제 저녁에 인도네시아에 왔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밭에 키우는 작물은 무려, 파! 파가 고냉지 식물이었구나!

함께 투어를 온 사람들과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더치 청년이 노트북을 꺼내 보여주며 자기가 이걸 사기 당해 사게 된 사연을 들려줬다. 삐끼를 통해 여행 중에 노트북을 구입한 사람은 처음 봤다. 다들 말 없이 이런 바보는 처음 본다는 깊은 이해의 눈초리로 그의 얘기를 경청했다.

더치 청년은 브로모에 하루 더 묵기로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 미니버스를 타고 떠났다. 말레이 아저씨와 나는 어제처럼 마지막 차를 탔다. 그들의 장례를 보았고, 산비탈에 이어진 밭과 논을 보았고 숲을 태워 연기가 자욱한 길을 통과했다. 창 밖으로 한국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어떤 숙소에서 교통편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곳곳에서 집을 짓는다. 기초라고 할만한 것 없이 맨 땅을 대충 다져 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한편에서 삽과 시멘트로 모르타르를 만들었다. 긴 비탈을 내려가는 동안 두어장 사진을 찍다 말았다. 

브로모 화산 투어를 끝마치고 프로볼링고로 돌아가는 길. 산등성이, 사면의 비교적 심한 경사에서 작물을 재배. 아마, 파?

길가의 어떤 허름한 집 앞에 미니버스가 섰다. 이틀 동안 함께 투어를 했던 사람들과 여러 명의 외국인 여행자들이 벤치에 앉아 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져 있는 여행자들 사이로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망고스틴 접시를 내 놓았다. 스리랑카 변호사가 그중 하나를 까서 내게 건네 주었다. 먹어보니 짓무르고 썩은 내가 나서 마당에 버렸다. 망고스틴 접시는 금새 비었다. 주인이 우리 곁에 와서 먹었으면 돈을 내야 한다고, 돈을 내라고 말했다. 손님에 대한 호의로 생각하고 무시했다. 

수라바야로 가는 사람들과 헤어질 시간이다. 대만 아저씨는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내 드러운 인상 때문인지 가끔 무심결에 Sir라고 경칭을 붙이던 스리랑카 변호사와도 헤어질 시간이다. 내가 스리랑카에 꼭 가게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당신 나라에서 한 군데만 가야 한다면 어디를 추천하겠어요? Sigiriya, Rock Palace가 있는 곳, 그의 주장대로라면 스리랑카의 마추픽추. 휴대폰에 발음나는 대로 적었다. 헤어지는 사람들에게 행운을 빌었다; godspeed fellas. 

안내인이 나타나 사람들을 그러모아 커다란 관광버스로 옮겨 태웠다. 족자에서 봤던 여행자들을 다시 만났다. 그에 더해 열댓 명의 새로운 사람들이 차에 올랐다. 내 앞과 옆에는 이탈리아 여자들이 탔는데 무척 시끄러웠다. 매번 이탈리아 사람들을 볼 때마다 성정이 흡사 한국인 같다고 여겼다. 자리가 많이 남아 옆에 앉았던 이탈리아 아저씨는 뒤로 가고 나도 좀 편하게 앉을 수 있었다.

비가 오다말다 했다. 해변에 화력 발전소가 있었다. 길이 좁아 차가 서행을 하는 동안 어떤 원숭이가 철조망에 기어올라 바다를 뚜러지게 쳐다보는 모습을 보았다. 딸애는 어린이집에서 짐승은 생각을 하지 못 한다고 배웠단다. 나는 딸애에게 짐승도 조금이나마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멍멍이가 아무나 보고 꼬리를 흔들지는 않잖아? 수조의 물고기는 먹이가 나오는 아침이면 수면에서 서성이잖아? 의식과 인식의 기원에 관해 여러 종류의 책을 읽었지만 명쾌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따라서 나는 원숭이가 바다를 보는 동안 그 짐승의 두뇌에서 벌어지는 일을 인간마냥 이입할 수 없다. 다만 원숭이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아득하고 광활한 바다가 주는 평화로운 감정과 그 너머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을 느꼈을 것이라고 어림짐작할 뿐이다. 제한된 지식과 경험을 지녔던 원시 인류와 마찬가지로 원숭이는 이 놀랍고 마술적인 세계에 두려움과 경이, 호기심이 뒤섞인 감정과 한없는 무기력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무기력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살다보면 여러 가지로 엿같은 경우가 생긴다. 9.30am에 출발한 버스는 5pm 무렵이 되어서야 Bali행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가 통째로 여객선에 들어갔다. 비가 올 날씨다. 찬 바닷바람이 불었다. 웃통을 벗은 젊은이 몇 명이 여행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의를 끌었다.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그것을 바다로 던지는 시늉을 하고, 헤엄치는 시늉을 한다. 당신이 바다에 동전을 던지면 찾아 오겠다는 것이다. 구걸이잖아?

다정한 게이로 보이는 이탈리안 남자 둘이(사실 둘씩 무리지어 다니는 이탈리아 남자들은 다들 게이 같아 보인다) 낄낄거리며 동전을 던졌다. 반짝이는 동전을 건져왔지만 그들은 인도네시아 돈에는 관심이 없었다. 완 유로! 완 유로! 1 euro는 12000rps. 12000rps면 미 고랭 한 접시와 박소 한 그릇, 그리고 쌀과자 두세 개를 살 수 있는 돈이다. 83개의 1 euro 동전을 주으면 족자행 미니버스에서 만났던 하루 16시간씩 일하는 요리사의 월급과 같아진다. 하루에 얼마나 많은 동전을 모을까? 이 배에서만 여러 개(6~8개 가량?)의 동전과 지폐가 바다로 날아갔다. 인도네시아는 지난 몇 년과 달리 내년 경제성장률 목표치를 낮췄다. 성장 피로가 찾아왔단 뜻일게다.

이들에 관해 예전에 TV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 때 볼 때는 애들이었는데, 어느새 자라 이렇게 늠름한 거지들이 된 걸까?

어? 한글? 바닷바람이 차가워 선실로 들어가려는데 문 옆 탁자에 웅크리듯 앉아 LP 위에 종이를 얹어 두고 메모하는 사람이 있다. 한국인이세요? 그렇단다. 배가 출발할 무렵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모 외국계 자동차 회사에서 근무한다는 그 친구는 자카르타에서 만난 현지인을 따라 족자행 버스에서 중간에 내려 보르부두르 유적지 인근의 현지인 집에서 하루를 머물렀고, 하루 밖에 안 머무른 것을 후회했다. 그 집 아줌마가 떠날 때 먹으라며 여러 가지 과자를 바리바리 챙겨주었다. 우리는 얘기를 나누면서 그 과자를 나눠 먹었다. 그는 브로모 화산에 이틀을 묵었지만 일출을 보지 못했단다. 대신 오토바이를 타고 광활한 칼데라를, 칼데라의 북쪽을 둘러 보았단다. 나도 그럴껄. 


그런데 발리의 어디로 가요? Tulamben이요.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다 -- 하긴 내가 인도네시아에 관해 아는게 뭐가 있겠나. 툴람벤에는 2차 대전 당시 거대한 화물선이 바다에 침몰했단다. shipwreck은 다이버들이 환장하는 장소다. 그럼 혹시 다이빙 하러요? 그는 수십 차례 다이빙한 경력이 있었다. 툴람벤에는 다이버들 모으려고 작달만한 배를 일부러 침몰시키는 곳이 아니라 정말로 거대한 좌초선이 널부러져 있단다. 그러더니 같이 가잔다. 마음이 흔들렸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데요? 난 Ubud에 가요. 거긴 관광객들이 가는 곳 아니에요? 맞아요. 말은 안했지만 이것도 말해줄 뻔 했다; eat, pray, love란 영화에서 쥴리아 로버츠가 짱박혔던 곳이죠. 망할 뉴욕 된장녀가 돈을 펑펑 써가며 채식과 요가로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날 자전거 사고로 왕자님을 만난 행운의 장소죠. 난 왜 거기 가는 걸까? 그야 뭐... 우붓에서 이틀 편히 묵고 Kuta 해변에서 빈둥거리며 하루 편히 묵고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차 타고 얼마 안 되는 거리를 무려 18시간에 걸쳐 이동하는게 지겨워 졌다. 

배가 항구에 닿았다. 조용한 Lovina 해변에서 빈둥거리며 돌고래 구경하러 가는 여행자들은 차에서 내렸다. 족자에서 본 캐나다인 청년과, 함께 브로모 투어를 했던 스페인 컴퓨터 공학자와 눈인사를 주고 받았다. 그는 내게 로비나 비치가 사람들이 돌고래 구경하러 가는 곳이라고 얘기해줬다(아, 나도 가이드북이나 제대로 읽어볼껄). 그들을 안내원이 나눠준 갈아탈 버스표를 들고 비를 맞으며 어두운 길 건너편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버스가 출발하자 비가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속에서 버스가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7시쯤이면 도착한다더니, 또 연착인가? 

살다보면 여러 가지로 엿같은 경우가 생긴다. 6pm에 항구를 떠난 버스는 11.20pm 무렵이 되어서야 Denpasar 북부 터미널 Udung에 도착했다. 얼마 남지 않았던 여행자들은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빗속에서 뿔뿔이 흩어졌다. 문제는 내가 여기서 Ubud행 미니버스를 잡을 수 있는가다. 아까 배에서 만난 한국인이 서성이는게 눈에 띄었다. 믿을 수 없게도 모든 지역으로 가는 미니버스가 끊겼다. 혹시나 싶어 터미널에 있는 경찰서에 들러 물어보니 끊겼단다. 글쎄다. 툴라벤으로 가는 한국인 친구의 택시를 잡아주려고 동분서주했다. 200만루피아란 터무니없는 가격이 나왔지만(220$) 더 떨어지지 않는다. 그가 그 가격에 가겠다고 오케이 했다. 이놈들이 담합을 했군, 경찰까지 돕는 것 같은데? 날더러 같이 난파선 다이빙하러 가자고 재차 설득했지만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를 보내고 이제 내가 택시를 잡아야 할 차례. 자정이 넘었다. bromo 투어때 불평을 늘어놓던 벨지움 부부가 택시 협상이 잘 안되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들도 우붓에 간단다. 택시 쉐어를 하기로 하고 협상에 들어갔다. 나이 지긋한 미니버스 운전수가 백만 루피아를 불렀다. 허거덕!! 벨지움 부부가 지친 나머지 수긍한다. 날더러 같이 가겠냐고 묻는다. 두당 33만 루피아(36$)인데!!? 망설이니까 그들이 같이 안 갈꺼면 자기들끼리 가겠단다. 미니버스에 짐을 내려 놓았랐다. 운전수가 다른 여행자를 찾아 보겠다며 차를 떠나 주변을 돌아다녔다. 말리지 않았다. 한두 명 더 태우면 단가가 싸지니까. 그 동안 빗속에서 담배를 피우며 지갑을 뒤져 보았다. 수중에 있는 돈은 260,000rps. 택시비가 모자란다. 으쓱. 우붓에 가면 어떻게 되겠지.

남편은 왠지 풀이 죽어 아무 말도 안했다. 나와 그의 아내가 이런 저런 여행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들 부부는 일 년에 두 번 휴가를 받아 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는데 자기들이 가본 곳 중 인도네시아는 이집트 만큼 최악이란다. 인도는요? 인도엔 아직 안 가 봤단다. 인도 가면 삐끼질의 경이로운 신세계가 열리는데... 남편은 회계사고 아내는 교사다. 유럽은 비싸고 재미가 없어서 안 돌아다닌단다. 그래도 전혀 이질적이라 말이 안 통할 것 같은 이 부부와 공통점 하나는 있는 셈이군.

지금까지 인도네시아에서 차를 탄 것 중 가장 시원하게 달린다. 시속 100kmh는 족히 나올 것 같은데 운전사 할아범 만큼 나이를 먹은 것 같은 미니버스의 미터기가 맛이 가서 속도를 알 수 없다. 얼마나 시원하게(서늘하게) 달리냐면 빗길에 차가 미끄러지는게 눈에 보였다. 다행히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는 하나도 없었다. 차 안에 침묵이 흘렀고 놓아 둔 우리 세 여행자의 배낭이 이리 자빠졌다 저리 자빠졌다 바닥을 돌아다녔다. 남편은 그것을 주섬주섬 챙겼다. 가는 길 모퉁이에 편의점과 ATM이 보여 운전사의 어깨를 두들겨 차를 세웠다. ATM에 citi 카드를 넣어 돈을 찾으려 했으나 잔액 부족으로 실패. 깜빡 잊고 월급 통장에서 씨티은행 통장으로 이체를 안 시켜놓은게 기억났다. 눈물을 머금고 수수료가 비싼 비자카드로 1,500,000rps를 찾았다. 

우붓에 도착한 시각은 12.55am. Central Ubud은 매우 한산했다. 밤 늦게 도착하니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터번을 두른 흑인이 우붓에 온 것을 환영한다며 숙소를 찾고 있냐고 물었다. 벨지움 부부는 삐끼 노이로제 때문인지 행운을 빈다며 자기들은 자기들 끼리 숙소를 잡겠다고 걸어가 버렸다. 알아본 숙소가 있는 모양. 나? 난 아무 생각없었다. 삐끼에게 숙소 가격이 얼마냐고 물어보았다. 150,000에 double, a/c, include bath, include breakfast, 방 값이 비싸요. 그는 손가락으로 벨지움 부부를 가르키며 저들이 간 방향에 싼 숙소가 몇 개 있는데 100,000 정도면 방을 잡을 수 있을 꺼라고 말한다. 그들을 따라가겠냔다. 좋아요 일단 당신이 말한 방을 보러 갑시다. 

그가 나를 안내했다. 문을 쿵쿵 두들기자 인터폰으로 나이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플래시가 이리저리 비추더니 문을 빼꼼히 연다. 아저씨가 어둠 속에서 주섬주섬 키를 챙기더니 1층 방에 안내해 줬다. 여태까지 본 숙소 중 가장 럭셔리하다. 5만 아끼려고(약 6$) 이 새벽에 가이드북 펴 들고 문 두들기며 돌아다니느니 하루만 여기서 묵자. 내일 다시 숙소를 잡으면 되지. 키를 받고 짐을 내려 놓았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부터 비 맞으며 화산을 싸돌아다니고 16시간 동안 잠 한 숨 못 자고 돌아다녔더니 파김치가 되었다. 씻기 귀찮아 불 끄고 바로 누워 곯아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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