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것들은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야 한다: 얼마전 몇 안 되는 진리와 함께 신경세포의 가소성과 IQ의 정규 분포 따위로 지루하고 난폭한 대화를 했다. 책읽기에 관해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 머리를 채우는 것이 부끄럽지 않느냐?'는 소리를 들었다. 읽던 책을 나꿔채 손수 찢은 후 진짜 삶을 살라고 충고해주는 나름 편안한 친구도 있었다. 부끄럽지. 그래도 요 몇 년 동안 대화 중에 인용구를 거의(99%) 안 쓰잖아!
책벌레들 만나도 즐거웠던 적은 흔치 않았다. 게걸스럽게 잡식한다고 해도 결국은 취향으로 귀결되어 각자의 행성에서 꽃을 키우니까.
책을 읽는 것은 지적 호기심이나 재미를 추구하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관성에 불과하다. 저번 주에는 5권, 이번 주엔 3권 읽었다. 주말엔 책을 안 읽었다 -- 독실해 보인다. '랍비의 고양이'에서는 유태인과 무슬림이 길에서 만나 친구가 되어 각자 메카와 예루살렘에 기도하고 알라흐 아크바르, 하카도쉬 바루쿠 후 따위를 말한다. 랍비의 고양이는 좋은 책이다. 좋은 책은 널리 읽히도록 소개해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손에서 떨어지면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이건 놀랍기 그지없는 신경세포의 가소성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랍비의 고양이'를 읽었군!
시간이 흘렀는데 제목을 기억하다니!
TV에서는 savant syndrome에 관한 프로그램이 나왔다. 애와 놀아주며 자다 깨다 주말을 보냈다. 서번트 신드롬도 꽤 오랫만에 듣는 말. 자폐증, 사이코패스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듯. 이런 다큐의 시청율은 높은 편일까? EBS에서 매일 아침에 하는 뽀로로는 한국에서도 인기지만 프랑스 방영 당시 평균 시청율이 47%에 육박했다. 얼마전 기사에서는 뽀로로가 불법복제 영상물 1위로 꼽혔다.
아내를 비롯한 여러 여자들이 공감하던 것인데, 내가 입 다물고 있을 때가 상태가 개중 나아 보인단다. 입만 열면 유창하게 헛소리를 하는데 감정이 느껴지지 않고 내용에 공감이 안 되서? 사이코패스와 거리가 너무 멀었다. 타고난 범죄자로서는 역량 부족이다. 사이코패스가 반드시 가져야 할 자질: 깊이없는 달변, 자기중심적, 심한 과장, 공감능력 부족, 유창한 거짓말과 속임수, 피상적인 감정, 충동적, 서투른 행동제어, 자극 추구, 책임감 없음. -- 한때 온라인을 떠들썩하게 했던 속칭, 완전체라 불리는 외계인들은 이중 몇 가지 자질(?)을 공유하는 것 같다.
얼마전에 '진단명: 사이코패스'란 책에서 본 것이다. 관심사는 사이코패스의 유전, 변별, 치료, 사회 통계 분석 등등 이었는데 책 내용의 대부분은 저런 자질 설명에 곁들여진 사례 연구였고, 사회생물학적 해석 몇 페이지, 애착형성 이론 몇 페이지를 합쳐, 전체 300여 페이지중 약 10페이지 정도만 알아두어야 할(알고 싶은) 내용이 나왔다.
사이코패스는 현재에만 집착하고 충성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스파이, 테러리스트, 갱단으로 성공하기 힘들단다. 질문을 받은 Ted Bundy 왈, " 좋은 질문이군요. 나도 나같은 사람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진단: 전문가가 아니면 하지 말 것.
치료: 현재 불가능.
대책: 그들의 점진적 사회화를 모색
생존전략: 사이코패스의 자질을 반드시 염두에 두고 자신의 약점을 평소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면서 그들의 공허한 염소눈을 극도로 조심하는 것 외에, 근본적으로 방법 없음.
연구자의 성의와 필생의 과업이 절절이 느껴지지만, 안타깝게도 책에서 건진 것이 없다. 아줌마들 미용실 호들갑에나 등장할법한 경악스럽고 공포스러운 사례 연구는 몇 껀 정도 빼고 별로 관심도 없고. 어쩌면 일반인 상대로 너무 쉽게 책을 쓴 탓인지, 저자가 오판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너무 몸을 사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 같으면 극형 예정의 범죄자를 fMRI나 PET로 스캔하면서 그들에게 감정을 유발하는 자극을 주어 실험 데이터를 모으겠다. 연구자 중에도 사이코패스 같은 놈들 많다. 그들에게 맡기고 데이터를 얻은 후, 인간으로서 일말의 양심도 없는 그들은 없애버리면 간단하지 않을까? <-- 사이코패스 말투로 적어봤는데, 내 평소 말투와 거의 차이가 없다.
법칙: 누구든 나와 함께 다니는 사람은 몹시 개고생한다. 하여튼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아내가 신통하게도 이 사진을 찾아 보여줬다. 대체 어떻게 저 친구를 찾아낸 거지? 라고 생각했다가... 당시엔 장기 여행자들은 어떻게든 연결되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아이가 남자아이였다면 가지 못할 곳이 없는데... 모험할 수 있는데... 라고 생각했다.
얼터드 카본(Altered Carbon) -- 오랫만에 하드보일드 사이버펑크 'SF'를 읽었다. 이 정도 작문이면 고래적 하드보일드 소설가들의 오마쥬 운운하며 은근히 내리깔 수준이 아니다. 원서를 사서 1/5쯤 읽다가 번역된 것을 알고 무려 4개월을 기다려 손에 쥐게 되었다. 4개월쯤 기다리다 보면 뽕빨을 뽑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 그 기간을 기다린 반발로 백퍼센트 불건전한 냉소와 회의가 싹트기 마련인데, 중반쯤 흘러가면 용두사미격으로 힘을 잃어가는 많은 소설과 달리 갈수록 나아진다.
하드보일드 소설이라면 반드시 등장해야 하는 어리석은 냉소와 니힐리즘, 그리고 싸이코패스 범죄자의 무감각에 버금가는 잔혹한 폭력, 양념처럼 곁들이는 너절한 자기중심적 감상주의 따위를 두루 늘어놓고, 거기에 통통 튀는 유머감각에 주류문학 필의 문장력까지 갖췄다. 이게 심지어 데뷔작이다. 뭐 이런 작자가 다 있지? 3류 하드보일드 사이버펑크 패치물이라던데, 아니다. 다르다. 전반부 까지만 읽으면 그저그런 빌어먹을 양의 탈을 쓴 하드보일드 사이버펑크라고 오쉣 하면서 집어던질텐데 후반부 가면서 공작이 날개를 펼치듯 색채가 분명한 오리지널리티를 발산한다. 도약이 워낙 심해 빨리 읽다보면 흐름을 놓친다. 작가는 독자가 자기가 쓴 글을 읽어주길 바란건지, 마치 갈구리에 등짝이 꿴 참치처럼 넘실거리는 파도의 굴곡을 훑으며 배로 끌려가게 된다.
미친 재단사 루드밀라는 망해 가는 벨라위드 공장을 갖고 있었는데 자식 셋은 어머니 일을 전혀 돕지 않았소. 늦게까지 밖으로만 돌아다니고 오락이나 하고 하루 종일 잤지. 그래서 어느 날 어머니는 발끈했소. 어느날 저녁, 아이들이 외출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루드밀라는 커피에 약을 탔소. 아이들은 몽롱해졌지만 아직 의식은 있었는데, 루드밀라는 그런 애들을 미첨스 포인트로 데려가서 하나씩 탈곡기에 집어넣어 버린 거요. 늪지 건너편까지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하지. 루드밀라는 쓸모없는 애들을 처치했지만 그렇다고 도움이 된 것도 없었소. 약품 처리통을 관리할 사람, 벨라위드를 들고 공장 계단을 오르내릴 사람은 필요한데 돈은 여전히 없었으니까. 루드밀라는 아이들의 조각난 시체를 다시 건져온 다음 바늘로 기워서 키가 3미터나 되는 거대한 송장으로 만들었소. 그런 다음 어둠의 힘이 지배하는 어느 날 밤에 덴구를 불러내서 송장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덴구를 불러낸 뒤 송장 안에 넣고 기워 버렸소. 루드밀라는 덴구의 영혼을 안에 넣고 기웠지만, 9년 동안 봉사하면 풀어 주겠다고 약속했어. 9는 할란의 신전에서는 신성한 숫자이기 때문에, 덴구와 마찬가지로 루드밀라도 이 약속을 지킬 의무를 지게 됐지. 불행하게도 덴구는 참을성이 별로 없는 족속이고, 루드밀라 역시 같이 일하기 쉬운 사람이었을 것 같진 않거든. 어느날 밤 계약 기간이 1/3도 끝나기 전에 덴구는 루드밀라를 덮쳐서 갈기갈기 찢어 버렸소. 혹자는 기시모진이 덴구의 귀에 뭔가 끔찍한 이야기를 불어넣은 거라고 하지만, 어쨌든 그 결과 덴구는 주문에 사로잡혀 송장 안에 영원히 갇혀 있게 되었소. 원래 주문을 불어넣었던 사람이 죽었고 게다가 배신 때문에 그렇게 됐으니 송장은 썩기 시작했지. 여기 한 조각, 저기 한 조각, 살려낼 수 없이. 그래서 덴구는 섬유 지대 인근의 공장과 거리를 배회하며 썩은 부분을 대신할 신선한 육체를 찾아다니게 됐소. 언제나 아이들만 죽였지. 대체해야 하는 부위가 모두 아이들 거니까. 하지만 몸을 갈아 넣어도 며칠만 지나면 새로 간 부분도 썩기 시작해서 다시 사냥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소. 섬유 지대에서는 이 요괴를 조각보 사나이라고 불렀소.얼터드 카본의 주제 의식이 드러나는 도시전설. 어디서 본 듯하지만 다른 듯한. 주제의식? 제목이 워낙 '적나라'해서 굳이 설명이 필요없을 듯 하나, 소설에서는 친절하게 아래 하이쿠까지 적어놓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왜 적었는지 좀 바보같긴 했다. 마땅히 적을 데가 없지만 작가가 생각하기에 멋졌는지 꼭 끼워놓고 싶었던 것 같다).
빌린 장갑처럼 새 몸을 입으니
다시금 손가락을 데는 고행이 시작되누나
치앙, 닥터로우에 버금가는 호소력 있는(?) 글빨, 안정적인 내러티브, 잘 설계된 임팩트 포인트와 클라이막스, 수준 급의 대사 처리, (워드로 타잎하고 고민한 티가 줄줄 나는) 문단의 세심한 마이크로 매니징, 그래도 잊지 않고 막가는 하드보일드, 성분 함량을 제대로 지키고 모르는 것은 입닥치고 아는 것은 제대로 설명한 '모던' 사이버펑크, 계산된 우연과 행운, 끝은 해피 엔드. hellblazer와 달리 얼터드 카본의 주인공은 담배를 끊기 위해 (내 입에서 욕 나올 정도로) 짜증나게 군다. 아참, 기시감이 느껴지는 친숙한 경구: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자'
누군가 싸구려 오마쥬라고 혹평한 '얼터드 카본'이 자기와 상생이 맞는지 확인할 겸 낚시용 문장 몇 개 적어 하드보일드 SF 팬이 기꺼이 낚이길 기대해 보겠다.
관중은 열광했다. 나는 어두침침한 객석 쪽으로 시선을 들고, 문명의 피부가 벗겨져 나가고 분노가 속살처럼 드러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잊어버려. 다 업무니까. 경찰들을 끌어들인 건 미안한데 지원병력이 급하게 필요했어. 여기서는 경찰을 그렇게 부르잖아? 인근에서 가장 큰 갱단이라고."라이커의 몸에 인생의 시련에 온 몸으로 돌진한 남자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면, 거울 속의 남자는 역경이 닥칠 때마다 약삭빠르게 살짝 비켜서서 운명의 신이 꼴사납게 옆으로 넘어지는 모습을 구경할 것 같은 인상이었다. 고양이 같은 동작이었다. 매끈하고 수월해 보이는 경제적인 움직임은 앙카나 살로마오의 무대에 서도 될 것 같았다. 남색에 가까운 숱 많은 머리카락이 날렵한 어깨 위로 찰랑거렸고, 우아하게 찢어진 눈빛에는 우주가 살만한 곳이라는 듯한 부드럽고 무심한 표정이 담겨 있었다."취할 때까지 마실건가?"
"물론. 나 자신과 이야기 하면서 꼭 멀쩡할 이유는 없으니까."
나는 다음 계단을 향해 돌아서면서 가슴 속 어딘가에서 나직한 클클거림을 찾아 내뱉었다. 순간 확 치밀어 오르더니 웃음 비슷하게 입 밖으로 나왔다.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자.
소표 칼국수 - 건면임에도 맛있다. 영남일보 맛기행을 보니 60여년전 우후죽순 생겨난 국수공장들 끼리 혈투를 벌이다가 90년대쯤 오뚜기 OEM 국수 공장이 대구를 제패한 이후에도 명맥을 유지하는 몇 안 되는 국수공장 중 하나란다. 다가수 국수야 요즘 개나 소나 다 만들지만 소표 칼국수는 유난히 맛있다. 오죽하면 출출한 밤에 먹고는 하던 라면을 거의 끊다시피 하고 칼국수를 끓여먹을까? 칼국수 조리 시간은 4분, 재료는 애호박, 양파, 파, 마늘, 감자, 당근, 바지락 중에 냉장고에 있는 것으로. 라면은 조리 시간 3분, 아무리 좋은 라면이라고 해도(맛있는 라면 같은) 생야채 넣고 끓인 소표 칼국수만 못 했다.
The Unusuals. 최근 시작한 범죄물. 음악을 언어처럼 사용. 그런데 캡쳐할 마땅한 장면이 없다. 꽤 웃겨서, 요즘은 범죄물이 코믹으로 개종하는 추세인가 싶다.
파트너. 시대가 다른건지, 문화가 다른건지, 첫 몇 화가 지루하다.
"내가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생각 중이야."
"뭘 원하는데?"
"평화로운 영혼."
"뭐가 필요한데?"
"더 큰 총."
매 화마다 뭔가 좀 별난 장면이 한 번씩은 나오는 라이프가 2시즌을 마감했다. 저 장면은 형사가 차로 사람을 들이받아 죽이는 장면. 카메라 각도를 보면 이 장면 찍던 스태프와 감독과 연출이 히히덕거리며 즐겼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