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2.12.07 Crow Road Part III
  2. 1999.08.09 인디아#1: 인디아

Crow Road Part III

여행기/Asia 2002. 12. 7. 19:57
2002.12.20, 어젯밤에 보름달을 보았다. 크리스마스를 카스피해 연안의 작고 아름다운 도시에서 보낼 생각이다. 캐비어와 청어를 먹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캐비어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스픈으로 듬뿍 듬뿍 퍼서 식빵에 질펀하게 퍽퍽 발라 보드카를 곁들여 우걱우걱 씹어 먹는 것이다.

7개월 동안 돌아다닌 것 치고는 말끔한 편. 누가봐도 처음 여행하는 사람처럼 다니고 있다. 말끔하고 친근감이 드는 거지는 도움을 받기 쉽다. 이란에 오기 전에 가슴이 조금 두근거리긴 했다. 기대만큼 좋은 곳이었다. 곳곳에 'down with usa'같은 표어가 붙어 있어서 친근감이 들었다.

아프간 난민한테 시디를 선물받아서 기분이 좀 우습긴 했다. 아프간에 갈 수도 있었지만 완전히 황폐화되어 먼지만 날리는 곳에 가서 뭐하나 싶었다.

여행한지 7개월째. 여섯 번 째 모자를 잃어버렸다. 한국 생각은 별로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에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심한 거리감을 느꼈다. 강을 건너고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16000km쯤 되는 거리감이었다. 16000 킬로 미터는 항공시간으로 다섯 시간 거리다. 그러니까 다섯 시간 짜리 거리감이었다. 하지만 이동에 소비한 그 많은 낮과 밤을 생각하면 최소한 해가 삼십 번은 떴다가 지는 거리였다. 보름달은 일곱 번 보았다. 보름달을 볼 때는 늘 상황이 특별했는데 늘 아연 실색케 하는 광경이었다. 거칠은 파도 위에 떠오른 달, 이국에서 값비싼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을 때 떠오른 달, 히말라야에 떠오른 달, 카라코럼에 떠오른 달 등등 총천연색 스펙타클 돌비 디지탈 시네마스코프였다.

생일에는 미역국을 먹기도 했다. 7개월중 7개월은 화장실에서 한번도 휴지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단히 인상적인 회상은 아닐 듯 싶지만, 화장실의 변사에 관해 이제는 일종의 식견을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해 화장실에서 보내는 시간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과 전문가적인 식견. 동남아 가이들 조차 나보다 더 똥을 합리적으로 잘 싸지는 못할 듯 싶다. 아... 무슨 얘기를 한거지...

이방인이 살며시 다가와 which country are you from? 이라고 물으면 i'm falling angel from above. looking for a good man이라고 대답하는데 전혀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다.

미셀 투르니예와 장 클로드 반담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즐거워 했다.
그 점에 관해 언젠가 투르니예에게 편지를 보낼지도 모르겠다. :)

내가 이슬람이 된 것은 모스크에 있던 빌어먹을 놈의 농간이었다. 영예롭게도 이맘(?)이 물었다. 당신은 무슬람인가? 거짓말을 했다. 나는 무슬람이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파탄족 애꾸가 금장을 두른 두꺼운 코란을 건네주며 내 눈을 뚜러지게 쳐다 보았다. 자존심이 강한 사내였다. 이슬람은 기독교도를 같은 신을 따르는 형제로 생각했다. 그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청결하며 2차 대전 이후 전멸했다고 여겨졌던 사나이들이었다.

먹여 살릴 가족이 있는 사나이와 먹여 살릴 가족이 없는 사나이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 점은 분명히 밝혀둬야 한다고 본다.

파키스타니가 대답했다. 닥터 코지프를 만나시오. 내가 15kg짜리 그... 핵시한폭탄을 사겠다니까. 다라 마켓에서 psg-7을 220달러에 구할 수 있다. 파키스탄에서는 무기를 구하기가 정말 쉬웠다. 얼른 결혼해서 평범하고 시시하게 살아야지 하고 결심했다가도 국제뉴스를 읽고 현실감각을 되찾으면 악의 축, 부시를 제거해서 세계평화에 기여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가끔 들고는 했다.

away from crow road가 return to the old and fucking good place where our ancester still lives happily forever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날이 갈수록 정이 드는 작가인 이안 뱅크스의 소설 제목이 crow road였다. rory 삼촌은 인디아를 여행하면서 두 개의 폴더를 남겼다. CR I과 CR II였다. 인생이 재밌거나, 웃기거나, 고통스럽거나, 지루한, 그러면서 지속적인 여행 상태를 의미한다면 이것은 로리가 크리스티아니티와 문명을 버리고 스스로의 삶을 바꾸었던 까마귀 길의 세번째 파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문명권에서 실종 상태였다.

음...

아니면 미셀 투르니예와 장 클로드 반담이다.

-*-

정신이 다 얼얼해지는 뱅골만의 강한 파도를 맞은 후 무굴에 의해 도륙당했던 피 비린내 나는 역사가 적적하게 남아있는 함피를 지나 비자야와르에서 줄곧 마음 속에 담아두게 되었던 이례적인 축복을 신전의 사제로부터 받았다. 인도 최대의 IT 도시로 성장한 방갈로르에서 거리를 헤메고 화재와 번갯불로 잿더미가 되었다가 재건된 후 웨일즈의 왕자에게 패배하여 쫓겨난 비운의 마하라자 궁전이 있는 마이소르를 지나갔다. 패배한 티푸왕은 그러나 사나이였고, 마이소르는 맛있었다. 고대의 유적과 아직도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거대한 고뿌람이 있는 사원 도시들, 마말라뿌람, 꿈바꼬남, 깐치뿌람, 탄자부르, 스물 두 개의 우물에서 솟아나오는 성수로 66번 몸을 씻고 지성소에서 신의 세 가지 모습, creator, destructor, preserver를 만났던 라메스와람(사실 많은 사람들은 g.o.d 즉, generetor, organizer, destroyer를 더 선호했다), 그곳에서 수년 만에 처음으로 명상 상태에 놓였다. 마지막으로 극적인 형식미와 웅장함을 자랑하던 마두라이의 미낙쉬 사원에 이르기 까지 사원 순례를 반복했다.

종종 얼이 빠져서 사원의 사진을 찍는 것을 잊었다. 비힌두인은 출입할 수 없는 성소에 은밀히 들어가 들킬까봐 땀 흘리며 보낸 시간, 세계의 가장 높은 산 메루를 호위하는 웅장한 고뿌람, 삶이 그렇듯이 해가 뜨는 곳에 입구가 있고 해가 지는 곳에 출구가 있는 정방형의 사원들, 네 방위는 우주를 상징했다. 베다의 네 갈래를 의미하는 수천 년 전의 야자나무, 우주의 자궁 속에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성스러운 시바 링가, 회랑에는 현생에 살아 움직이는 영원한 신들의 부조가, 천정과 바닥에는 그들의 역사를 경배하는 성화가 있었다. 서쪽에 네크로폴리스는 없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었던 다신교인 힌두 신앙의 내면을 보았던 것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도시와 평원과 바람과 무더위는 계속 되었다. 기록적인 가뭄으로 우기에도 비가 안오는 말라붙은 땅을 지나, 뱅골만과 아라비아 해와 인도양이 만나는 깐야꾸마리에서 장엄하고 아포칼립틱한 석양을 보았다. 그리하여 석양에 관해 한 마디는 할 수 있게 되었다. 오! 달이 차오르는 꼬발람 비치에서 죽어가는 해파리와 복어를 보았다. 가끔은 강한 파도에 휩쓸려 사람이 죽어가기도 했다. 여러 자연 현상과 마찬가지로.

트리반드룸의 보행자 도로를 느긋하게 산책하고 다시 로칼 버스에 올라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고 검뎅이로 얼굴이 시꺼매지면서 피곤한 여정을 계속했다.

도시는 매연과 소음으로 가득차 있고 갓 들어온 문명은 이내 먼지에 뒤덮인 채 시간을 먹고 있었다. 꼴람, 알레피, 꼬친을 거쳤다. 께랄라 주는 수많은 작가들의 고향이었다. 께랄라 작가들은 종종 인도의 본질 운운하는 웃기는 서구 언론의 찬사를 받아왔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께랄라는 인도같지가 않다. 에르나꿀람에서 56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선잠결에 성스러운 강가 강을 건너 파트나에 도착했다. 빙하에서 시작된 기나긴 강가 강은 흘러가면서 여러 이름으로 불리었다. 강은 아무렇게나 불리워도 성스러웠다.

7시간 동안 날이 밝기를 뜬눈으로 기다렸다. 안개비가 어스름한 새벽을 축축하게 빛냈다. 어둠 속에서 버스를 잡아타고 여러 대의 트럭과 버스가 나뒹굴던 도로를 지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락사울에 도착했다. 과격한 공산주의자들이 득세하고 있는 악명높은 비하르 주를 그렇게 통과했다. 사이클 릭샤를 타고 국경을 건넜다. 6시간 동안 새우잠을 자고 아스팔트의 구멍을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총격전의 흔적과 진창길, 버스의 고장, 삼엄한 군인들의 경계와 지리하게 반복되는 간첩 수사와 짐 수색을 마치고, 절벽길을 따라 12시간을 버스로 달렸다. 사람들은 철지난 이념과 국왕의 권력욕 때문에 죽어갔다. 죽어갔다. 죽어갔다.

태양은 변함없이 뜨거웠다. 히말라야의 하늘 위를 지옥의 염화처럼 태우고 있는 핏빛 석양, 96시간동안 3400km를 달리는 고통스러운 여정을 마치고 god's own country를 떠나 rooftop of the world, 또는 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로 들어섰다. 영원한 처녀, 차가운 세 바다가 만나는 깐야꾸마리에서 사원 순례를 마감하고, 첫 월경으로 순수함을 잃으면 여신 자리(꾸마리)를 박탈당해 때로는 창녀로 전락하는 네팔의 카트만두에 도착.

지나가는 버스를 잡아타고 배낭을 물어뜯는 염소 대가리를 샌달로 때려가며 포카라에 다다라 내 인생에서 한번은 꿈꾸어 봤던 그런 생활을 했다. 아침에 일어나 담배 한 대 빨면서 멍하니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를 바라보다가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면 가을 햇살이 따사롭게 비추는 강가를 자전거를 타고 지나치다가 서점에 들러 책 구경을 하다가 엽서 몇장 사서 근처 까페에 들러 텅빈 내부에서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골라 앉아 메뉴를 고르고 천천히 엽서를 끄적인다. 밥을 먹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우체통에 엽서를 넣은 다음 숙소에 돌아와 책을 읽다가 창 밖의 장엄한 희말라야를 쳐다본다. 저녁 무렵에는 어떤 만찬을 즐길까 고민해본다. 오늘은 중식으로? 저녁을 먹고 입가심으로 일식 집에서 덴뿌라 한 접시에 시원한 맥주 한 잔.

다시 국경을 넘어 시체 태우는 냄새가 메케한 바라나시에서 골목길을 나흘 동안 헤메고 카쥬라호에서 인도-아리안 건축양식의 걸작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오차에서는 무굴의 성벽에 기대앉아 책을 읽다가 졸았다. 아그라에서 타지마할을 보았다. 3년 만에 델리로 돌아왔다. 여행중에 만났던 사람들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되었다. 3년만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을 다시 만났다. 인도 여행은 이제 다 끝났다. 내 왼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는 인도 대륙 형상을 한 다이아몬드 모양의 상처가 있었다. 불완전하기는 하지만(더더욱 인도스럽게도) 대륙의 네 꼭지점을 이었다. 공교롭게도 인도를 떠나자 상처의 형태가 바뀌었다.

사원 앞에서 거지떼와, 거지떼와 별 다른 차이점이 없는 수행자, 이른 바 sadhu라 불리는 사람들이 밥통과 손바닥을 내민다. 그들의 전직과 지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지위와 재산을 버리고 인도의 각지를 방랑하며 수행한다는 점이 중요할 뿐. 그들도 밥을 먹어야 겠기에 구걸을 한다. 입구를 지난다. '거지떼'는 여전하다. 신발을 벗는다. 신에게 바칠 꽃과 기름 등잔과 버터와 과일을 산다. 웅장한 고뿌람을 지난다. 뙤약볕 아래, 발바닥을 뜨겁게 달구는 너른 마당이 나타나 인내심을 시험한다. 탄자부르의 사원은 그래서 지옥 같았다.

웃도리를 벗는다. 성수로 손을 씻는다. 때로는 온 몸에 성수를 뒤집어 쓴다. 문간을 넘는다. 문간을 밞으면 안된다. 열주를 지난다. 열주는 시계방향으로 돈다. 내부 성소로 이어지는 복잡한 길을 지난다. 지성소 앞에서 문에 달린 종을 쳐서 신들의 주의를 끈다. 그러면 자다가 깬 신들이 체통을 차리는 것으로 추측된다.

지성소의 땅굴같은 모습은 창생의 신비를 간직한 우주의 자궁을 상징했고 그 자궁 속이나 둘레를 시바의 단단한 화강암 자지로 치장했다. 시바링가, 시바링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원은 좆 투성이다. 사원은 좆나게 큰 우주를 상징했고 신은 그 우주의 중심에 있는 요니 속에 거한다.

인사(기도)하며 지성을 바친다. 지성소의 사제가 성수를 건넨다. 마신다. 약초를 건넨다. 씹는다. 화환을 걸어준다. 목을 내민다. 꿈꿈가루를 이마에 발라준다. 빨갛다.

신의 대리자는 이러 저런 방법으로 신의 말씀과 축복을 전한다. 제단에 신에게 바칠 제물을 놓는다. 그리고 사제가 내민 접시나 도네이션 박스에 돈을 바친다. 즉, 성의껏 주머니를 털어 가진 돈을 바친다. 때로는 많은 돈을 요구한다. 생깐다. if i'm happy, god would be happy. 돈은 순전히 사원을 유지하는데 쓰인다. 하루에 4천 5백만 루피를 걷어들이는 티루파티 사원에는 어카운탄트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제대로 돌아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신께서 역사하시니까.

사제가 컵으로 머리를 덮어 축복해준다. 때로는 놀고있는 사제장과 언어의 장벽을 너머서 무의미한 대화를 나눈다. 지성소를 나온다. 발효되어 술 냄새가 나는 코코넛을 깨고 과즙과 하얀 속살을 나누어 먹고 마신다. 비힌두에게 금지된 여러 사원들 중 몇몇은 외국인에 대한 호의로 진입을 허용했다.

위대한 철학자 비베카난다의 정의에 따르면 힌두교도는 인도인들만이 될 수 있다. 논쟁의 여지가 없다. 힌두교는 괴상한 강요를 일삼는 포교 활동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메스꺼운 '성전'을 치르지 않았다. 베다는 브라민의 것이다. 힌두이즘은 브라민이 지배 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정치적/종교적 장치였다. 민중의 신은, 하나 밖에 없는 좆으로는 부족해서 젖 짜는 여자들의 성기를 손가락으로 희롱하는 크리슈나, 비쉬누의 화신이다. 그리고 브라민을 비롯한 모든 것을 짓밟아 파괴하는 깔리, 그리고 락쉬미와 가네샤와 하누만 역시 민중의 신이었다. 이들은 영원을 상징하는 돌에 새겨진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영원'을 상징하려면 스테인레스 스틸이나 티타늄 합금을 써서 신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무는 썩는다. 돌은 세월을 먹으며 뭉개진다. 구리는 녹이 슨다. 금은 탐욕을 부추긴다. 플라스틱은 약하다. 그래서 이제는 스테인레스와 티타늄 합금 신상의 시대인 것이다!

다신교 국가에서는 내부에서 종교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농담) 언제나 유일신 종교가 문제를 일으켰다. 지상에서 가장 혁신적인(?) 유일신 종교는 아케나톤에 의해 이집트에서 한차례 꽃을 피운 적이 있었다. 아케나톤은 유일신교를 만들 정도로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던 관계로 거의 모든 이집트 학자들에게 씹히는 존재였다.

그의 뒤를 이은 투탄카멘은 아케나톤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렸다. 이집트 학자들은 람세스 2세 치정 무렵 모세와 아케나톤의 유일신 신앙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지 않을까 추측했다. 모세는 특이하게도 유일신 신앙을 추구했다. 그는 에굽의 신들이 너무 많아 머리가 아프고 짜증이 났을 지도 모른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시대는 단순하고 깔끔했다. 이삭의 신은 세계를 만든 후 그것들을 파괴하거나 유지하는데 있어 딱히 활동적인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마치 휴화산처럼.

달리 말해 창조된 세상은 방기되어 있는 상태였다. 아담들은 사과 하나 먹었다고 쫓겨났다. 그 사과나무를 심은 놈이 누군가. 내 생각엔 인간을 상대로 장난질 쳤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밖에도 질투심과 분노로 똘똘 뭉친 그들의 신은 허구헌날 자신에 대한 믿음을 테스트 한답시고 설쳐댔다. 아무튼 이 세상은 신에게 버림받은 아담의 자손들이 알아서 잘 해 볼 문제였다. 모세는 석수공이기도 했다. 산에 올라갔더니 신이 번갯불로 지져서 석판을 새겨주었다. 세속적인 사람들을 위해: 또는 신의 지시에 따라 정과 망치로 재주껏 스스로 석판을 새겼다. 신의 지시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매스 커뮤니케이션과 자연의 이치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는 사람들의 생활이 피곤했고 교육을 받지 못해 두려움이 많았으며 순진했고 기적을 믿었다.

무른 석회암 석판은 이집트의 서기관이 애용하던 연습장이었다. 돌은 그 당시에 구할 수 있는 값싼 '영원'의 재료 였으며 모세가 산에서 가지고 내려온 석판은 이집트 치정 당시에는 신의 말씀을 영구히 공고하는 가장 보편적인 수단이었다. 모세는 이집트 신전 건축의 공사판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석판에 글쓰기를 연습하고 파피루스에 옮겨 적는다. 광야에서는 고급 파피루스를 구하기 힘든 관계로 모세의 신은 석판에 계율을 적어줬다. 이집트인들에게는 파피루스에 적히지 않고 돌판에만 계율을 새긴 신이 다소 검소하게 보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싸구려로 보였을 지도 모른다. 모세가 우상숭배를 거절했던 것은 허허벌판에 끌고 나온 사람들에게 신전 공사를 명했다가 불만을 살지도 몰라서 그러지 않았을까?

일곱번째 계명은 그 당시 사회상을 돌아보건대 지나치게 파격적이거나 모세의 신이 세상물정 모르는 미친놈이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최소한 지난 이천년 동안 그 신의 추종자들이 세상 물정을 모르는 미친놈처럼 행동한 것만큼은 사실이다. 아직도 모세가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것에는 많은 의문이 남아 있다.

그가 일으켰다는 기적에는 더더욱 많은 의문이 남아 있었다(놀랄 일도 아니지만 인도를 방문한 크리스찬 중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이 인간에 의해 날조된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을 품어 개종했다. 그 드라마는 눈물나는 코메디에 가까웠다). 신 앞에서는 쓸데없고 무의미한 과학은 그가 일으킨 기적이 이집트의 자연현상중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넌지시 밝혔다. 유일신 종교는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면서 늘 피와 학살을 동반했다. 그 원인은 유일신이나 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는 주장들을 한다. 그럼 다신교를 믿는 사람들은 왜 교리나 어떤 신이 잘랐다거나 신이 한 개 인지 여러 개인지 하는 문제로 싸우지 않았을까? 가령 힌두교도는 당신의 신앙이 무엇이건 간에 인정해 준다. 인정 안 하는 것은 상대방 뿐이다. 여호와는 힌두교도들에게는 늘 횡설수설 하면서 사람을 괴롭히는 약간 머리가 이상한 신이었다. 기독교인들의 견해에 힌두인들이 동의하는 것은 딱 한 가지가 있다. 그 미친놈들(신)이 다음에 무슨 짓을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 심지어 이슬람도 그 점에는 동감이다. 인샬라!

평화로운 힌두인들의 인도는 독립 후 탐욕스럽게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주변국을 괴롭혔다. 이런 문제를 다루는 인도의 tv토론쇼는 종종 지나치게 과격해지고는 했다. 힌두에게도 정의는 이미 사라지고 이익이 중요해졌다... 그 평화로운 힌두인들의 인도는 독립 후 탐욕스럽게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주변국을 괴롭히고 있다. 때로는 얍삽하게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가 했다. 인도- 파키스탄 분쟁의 와중에 인도 총리는 테러리즘에 강경대처한다는 명분을 들어 미국에 얍삽하게 붙었다. 개나 소나 테러, 테러 하고들 자빠졌다. 독립후 갈팡질팡하던 체첸이 완전히 정신이 나가 극장에 인질을 잡고 대처할 때 부시가 푸틴을 두둔하면서 한 말이 걸작이었다. '테러는 근절되어야만 한다' 이를테면 사상 최악의 원숭이 대가리를 가지고 있다는 평을 듣는 부시(그의 또다른 별명은 ostrich)는 러시아가 체첸에서 자행한 끔찍스러운 폭력과 학살에 대한 지식이나 견해가 전혀 없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농담)

파키스탄에 인접한 카시미르 지역은 독립을 빌미로 지속적인 분쟁상태에 놓인 채 굉장한 과부공장을 운영한다. 인도는 카시미르의 독립을 결사적으로 저지하면서 그 원흉으로 파키스탄을 지목했다. 파키스탄은 또한 전통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인도인에게 테러리즘의 본고장으로 알려져왔다. 인도인 대다수가 인도는 평화를 사랑한다고 우겨도 이윤이 별로 안 남을 땐 입을 닦을 놈들이다. 파키스탄의 카시미르 지역에 대한 입장 내지는 정서가 이렇게 간단하다: 카시미르, 너희들의 운명은 너희들이 알아서 결정할 것. 카시미르의 경제는 이미 오래전에 붕괴된 상태이고 분쟁 상태가 끝끝내 해결되지 않는 가장 큰 원인은 카시미르 지역의 정치가들이 전시체계에서 얻는 크나큰 반사이익, 무정부상태와 부패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기 때문이다.

카시미르의 대다수 인구는 이슬람인데 주 정부를 운영하는 작자만 힌두다. 뭔가 핀트가 안 맞는다. 인도- 파키스탄 분쟁을 소재로 한 전쟁 영화가 최근에 개봉되었다. 두 인도 람보가 사악한 이슬람 테러리스트를 맨 주먹으로 박살내는 영화인데 인도 람보는 미제 스팅거 미사일과 소련제 akm 기관총에 무수히 맞았지만 간단한 병원 치료 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십 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이러한 폭력과 분쟁의 원흉은 성자로 추대받고 있는 마하트마 간디일 수도 있다 라는 것이 힌두 지식층의 은밀한 주장이다. 하지만 인도에서 간디 욕하면 맞아 죽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인도? 독립은 그렇다쳐도 비굴한 제국주의의 개 같은 국민성은 여전하다. 요즘 인도 지식인들의 고민은 그것이다: 도대체 전쟁으로 쏙대밭이 된 일본이나 한국은 잘 살고 있는데 풍부한 부존자원과 광활한 대지, 그리고 엄청난 맨 파워를 가지고 있는 인도는 185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뭐 하나 나아지는 것이 없다는 패배의식, 오죽하면 김이 샌 그들 사이에서 인도를 자랑스럽게 하는 50가지라는 어거지를 위안을 삼고 있겠는가.

파키스탄에서 들은 카시미르 사정은 전혀 달랐다. 어떻게 이슬람이 살고 있는 땅을 영토욕만으로 자기 땅이라고 우길 수 있는가. 하지만 그들은 카시미르의 문제를 카시미르가 해결하길 원했다. 사우디 아라비아가 기특해서 돌봐주고 미국이 전략적 발판으로 삼고 있는 막강 이슬람 파키스탄 테러리스트들은 생각보다 점잖고 정치적으로 지나친 편향을 보이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인도보다 시끄럽지가 않았다. 요컨대 '이슬람'을 골칫덩이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주로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 특히 무슬림식 표현대로 하자면, 시오니스트 뿐인듯 싶었다.

힌두교도는 종종 생활의 편의(?) 때문에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이처럼 플렉시블한 힌두교는 양말도 팔고 소포도 붙이고 컵라면도 사먹을 수 있는 24시간 편의점 같은 종교로 보인다. 내 생각에는 인도를 개선의 여지없이 엉망진창으로 망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힌두교같다.

아프간에서 납치되어 자신을 살려주면 이슬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는 어떤 서방 여기자는 살아난 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그녀는 부르카를 거절했다. 이슬람은 부르카를 벗고 현대화될 필요가 있다. 유목사회는 경제적 파탄 위기에 처해 있었다. 현대화의 조짐은 이슬람 세계에 퍼진 인터넷을 통한 서방의 타락한 문화, 소위 풍속 산업의 유입으로부터 일어났다. 섹스 산업은 인터넷 인프라를 부추기고, 인터넷 인프라는 시민들에게 입을 열 기회를 제공했다. 이제 그들은 서구의 섹스 문화를 즐기면서 지하 방송이 되어 자유를 떠들기 시작했다.

원리주의자는 얼마나 원리적일까? 이맘은 코란을 해석한다. 요즘은 재해석한다. 확대 해석할 필요도 있었다. 세상이 복잡해지니까. 재해석하고 확대 해석을 자꾸 하다 보니까 짜증이 나는 관계로 가장 단순한 선택을 한다. 원리주의가 그것이다. 해석이 여럿이다 보니까 의견 충돌이 생긴다. 그래서 원리주의에는 언제나 이견과 해석의 공포로 잔뜩 짜증기가 배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세계는 친절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것을 개코메디라고 한다.

이슬람은 신과 일대 일로 대면한다. 크리스찬과 가톨릭은 사제를 통해 신과 면접을 치룬다. 힌두는 이것 저것 다 사용했다. 지금 나는 힌두가 좋다고 말한 것인가? 그건 아니다.

이슬람과 크리스틴은 몇 가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세파에 시달리면서 세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언어에 광적일 정도로 집착한다는 점이다. 알라의 첫번째 예언자가 한 말과, 여호와의 말씀을 적은 히브리 두루마리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해석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이미 신성함을 지니고 있었다. 성서는 별로 우주적이지 못한 관계로 예수 이전이나 이후의 세계에서 예수의 존재를 알 턱이 없는 수십억 우주의 지적 생명체들이 몽땅 지옥에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또는 다른 우주의 지적 생명체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저지른 죄악 때문에 예수의 어깨가 백만배는 더 무거웠을 지도 모른다. 이슬람은 그점에 대해서 비슷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크리스틴 역시 성서의 올바른 해석이라는 이슬람과 완벽하게 똑 같은 원리주의적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성서에 코를 박고 있는 크리스틴과 코란에 코를 박고 있는 이슬람은 참 많이 비슷하다. 그리고 그들은 우상 숭배를 몸서리를 치며 싫어했다. 게다가 그들이 섬기는 신의 사고방식을 해석하는 절차가 좀 달라서(필경 귀가 어두운 누군가가 알라와 여호와의 철자를 헷갈려 적었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줄곳 개죽음을 당했다.

별 이유없이.

어쩌다가 무신론자가 되었을까... 종교가 진리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었을까? 잘 생각 안난다. 귀찮은 과거사는 생각 안 하는 편이 낫다. 귀찮은 과거사 중에는 생전에는 무척 소중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신이 없어 허전하다고 구차하게 구걸하지 않았다. 누가 생각난다고 찔끔찔끔 짜지도 않았다. 종교를 양심의 방패로 삼지 않았다. 만났던 어떤 중은 '마음단속' 이라는 핑계를 대고 술 먹고 담배 피우고 계집질 하는 것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걸작이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이런 거 못하잖아.' 절간은 채식으로 장수한 선사들이 죽기 전에 깨달은 것을 제대로 잘 따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많은 세속적인 땡중들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들은 신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고 신이 이렇네 저렇네 하는 사람들은 요즘 유행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나는, 올드패션이다.

러시아 정교는 러시아에 의해 통치체계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 아이콘이라는 독특한 상징을 사용했다. 아이콘은 근대적인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의 부활이라고 할 수도 있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림을 통해 신앙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었으니까. 러시아 정교는 러시아에 수입되는 거의 모든 종교를 현재까지도 탄압하고 있다. 그들은 가톨릭과의 경쟁에서 그들을 몰살 시키고 여전히 살아남았다. 러시아 정교의 만행 역시 싸이코 드라마가 되어가는 중이다.

종교는 21세기가 된 지금도 수천 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정정했다. 어떤 영화에서처럼 과학이 커버하지 못하는 미지의 분야에 종교가 미치는 영향력은 강력하기 그지없다. 특히나 파키스탄 이슬람은 생활과 종교가 대단히 잘 일치했다. 기독교는 이해가 잘 안가는 종교다. 기독교는 삶을 백 배쯤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 점에서는 모든 사안을 꼬치꼬치 기술한 마호멧 역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반면, 한국불교는 이제사 경전의 무의미함을 깨달은 것 같아 보였다.

한 요기에게 21세기 하이테크 수행자가 어떤 놈들인지, 뉴에이지를 틀어놓고 메디테이션과 컨센트레이션과 릴렉싱과 하이퍼마인드가 어떻게 최근 추세에 맞게 진화(?) 했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의 답변은 완벽하고 심플해서 심지어는 전율스럽기까지 했다;

와... 정신 사납다!

그의 방법은 여전했다. 히말라야 땅굴에 짱박혀서 추운지 더운지도 모르고 그저 앉아 있는 것이 최고랄까.. 올디스 벗 구디스.

카트만두에서 시바의 초승달을 보았다. 시바의 초승달은 옴 이란 성스러운 글자에서 생각하는 마음, 움직이는 마음, 그리고 상호 작용 하는 마음 따위를 의미한다고도 말한다. 사실 정확하게 번역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도 말한다. 시바의 초승달은 그냥 온 마음의 전이 상태를 의미하면 된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마음의 전이에 관해서는 이런 저런 생각들이 있는데 공통점이 저 셋 정도 될 것 같다. 옴 글자의 세 변은 각각 신의 세 이름을 나타낸다고 한다. 아... 나도 그들처럼 상상력을 발휘해서 궤변을 닦아둘 껄 그랬나? 시바의 초승달에 얽힌 이 모든 잡설을 종식시키는 다른 설명은 그것은 그냥 옴 글자를 쓸 때 붙는 평범한 방점과 변형된 우물렛이라는 것이다. 과중한 의미 부여와 궤변 따위로 옴은 반쯤 무너져 내린 것 같다.

그러나 히말라야를 보았다.

몇 시간 동안 무너진 산길을 타고 기어 올라가 히말라야 산골짝 깊숙이 짱박혀 수십 년을 수행한 사두를 보았다. 그의 눈은 흔들리는 등잔처럼 크고 그의 입은 늙은 언어를 말했다. 썩은 이빨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수천년 전의 산스크리트는 기괴하고 전율스러웠다. 그의 뱃가죽은 붙어 있었다. 하지만 벌어진 입으로 웃고 있었다. 절벽 자리가 그의 처소였고 불쏘시개와 깡통 하나가 전재산이다. 웃고 있었다.

최첨단 하이테크 사두란 것들은 뉴에이지와 마약에 눈이 풀려 요가 자세를 한 채 해피네스에 관한 나름대로의 해석 내지는 핑계꺼리를 갖다 붙이기 바쁜 반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미소였다. 마을에서 힘겹게 걸어 올라온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늙은 농부가 친구처럼 그에게 말을 붙이고 떠날 때 그에게 경배했다. 바바에게 하시시를 얻어 피웠다. 그가 나뭇가지를 그러모아 불을 피우고 차를 끓여 건네 주었다. 산 중턱에서 나는 왜 수행자가 되지 않기로 했을까, 기타 등등으로 아주 슬퍼지고 말았다. 산을 내려와서 존 레논의 oh my love를 오랫만에 들었다. i see the window... 아 창 밖이 아주 잘 보이는데 말이야. 눈물이 찔끔 나왔다. 며칠은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번 인도 여행의 아무래도 지적(?) 핵심은 힌두이즘과 수행자 문화(?)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수행자들과 세속 철학을 주고받는 것으로 얘기될 수 있다. 베다는 좆도 아니었다. 힌두신앙의 오직 3%에 해당하는 브라민들이 믿는 브라만에서나 줏어 섬기는 것. 힌두의 여러 신들에 대한 이야기는 적어도 네 번, 각기 다른 버전을 들었다. 힌두 신앙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증거는 자신의 고유 버전 내지는 시스템을 만들 때라야 가능할 것 같다.

개중 사두들과 칠룸 빠는 얘기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거론하는 것만큼은 조심하는게 좋지 않겠느냐는 말을 들었다. 그래... 그들과 하시시와 마리화나를 나눠 피우는 것이 워낙 사회 윤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겠지. 조심해야겠지. 음. 음?

하여튼 진짜 사두와 제대로 대화하려면 아우라 통신이나 텔레파시 통신만이 유일한 길이다. 나야 잘 되니까 상관없지만서도. 내가 사두랑 대화 하는 모습 보면 꽤 웃기긴 한데... 서로 다른 언어로 서로 즐겁게 오랫동안 대화를 나눌 수 있으려면 흠. 아무렴. 옆에서 보면 정신병자들 같겠지. 그러다가 어느 날 한 사두를 울리고 말았다. 다른 사두들한테는 망고 쥬스를 돌렸는데 한 사두 것만 빼먹었다. 자기는 왜 안 사주냐고 삐졌다. 가게에 망고 쥬스가 다 떨어졌다니까 그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말았다. 원숭이들과 바나나를 사이에 놓고 티격태격 다투는 중이라 바빴기 때문에 무시했다.

그중 누군가가 시내까지 한참 걸어서 간신히 망고쥬스를 사다 건네주니까 그가 헤벌쭉 웃었다. 그들과 헤어질 때 두 눈 사이에 꿈꿈 가루를 발라주며 내게 축복을 해 주었다. 사띠암, 진실의 기쁨을 누릴 것. 그것으로 내가 사두와 제사장에게 받은 축복은 세번 째가 되었다. 하지만 사두떼와 함께 있으면... 후유... 누구 말대로 유치원 한복판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원숭이한테 먹이를 빼앗겨서 기분도 더럽고... 수십 년을 수행하고 나서 망고 쥬스 하나 때문에 삐진다는게 이해가 되냐? 태연히 앉아서 죽음과 공포에 관해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하는 작자들이란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내가 아는 여성 사두는 단 한 명 뿐이다. 그녀의 별명은 허깅 마더였다. 다짜고짜 껴안는다. 그래서 안 만났다. 그녀 역시 유치원 놀이에 심취해 있었다. 어떤 궤변에 따르면 여성들은 깨달을 필요가 없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깨달았기 때문이란다. 뭘 깨달았는지 모르겠으나 '깨달음' 자체가 지극히 주관적인 현상이라 속인에게는 기적을 통한 예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치유하는 손이나 공중에 떠오르기나 물 위를 걷거나 죽었다 깨어나기 같은 것이다. 안 그러면 그가 정말 깨달았는지 안 깨달았는지는 그 자신의 문제가 된다.

더더군다나 어떤 작자는 주위에서 당신은 깨달았습니다 하니까 어? 내가 깨달은건가? 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사두들은 저 마다 독특한 개성을 자랑했다. 한 팔이 석화될 정도로 평생 들고 있거나 하는 등의 요가 자세를 취하는 사두들이 있고 벌거벗고 다니거나 자기 자지를 길쭉하게 늘려 놓아 늘어진 그것을 허리에 칭칭 감아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개중 면류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고 다니던 사두도 있었다. <-- 철저하게 인도인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는 그 거지같은 사두가 깨달음과 명망을 얻어 바바(구루)가 된 케이스에서 더도 덜도 아니다.

존재란 무엇인가, 자유란 무엇인가, 나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기타 등등의 식상하고 밥맛 떨어지는 질문들을 굳이 기억해야 하는 까닭은 그 질문을 하는 놈이 충분히 장난끼가 지나쳐서 그런 것이 아니라면 평소 그런 피하고 싶은 의문꺼리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틈이 없을 정도로 바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은 대답이 종종 궤변이 되곳하는 그런 질문이 무의미하다고 하는데 본의 아니게도 인류는 지난 수 십만 년 동안 같은 의문을 품어 왔고 일부는 그 답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늘어놓았다. 요즘은 '죽었다 깨어나도 도를 통할 수 없는' 서양인들 조차 앵무새처럼 지껄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 답변들은 tv를 발명하고 로켓을 우주로 띄워 보내는데는 별 쓸모가 없었다.

종종 그 답변이 주는 열정적인 사해동포 정신에 감격스러운 나머지 인간의 욕망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잊어버리고는 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자신을 살게 하는 힘들의 역학에 관하여.

관찰에 의해 검증될 수 없고 논리에 의해서도 증명될 수 없는 그런 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사실이라는 주장을 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감정이나 태도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신과 신앙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태도와 유사하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 삶의 다른 모습이 죽음이다, 생명은 존귀하다 따위의 막무가내 역시 그렇다.

생명은 왜 존귀한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공교롭게도 질문의 의도를 우회한다.

생명은 존귀하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올바른 답이 된다.

존귀하지 않은 것을 존귀하게 만드는 것이야 말로 존귀한 행동이 되니까.


내게 필요한 것은 저런 빌어먹을 궤변이 아니다. 생명은 존귀하지 않다. 생명은 흔해빠진 자연 현상이다. 사랑은 소중하지 않다. 우리는 인간의 사랑 이외의 다른 생명체 사이에서 사랑과 유사한 감정이 발현되는 것을 관찰할 수 없었다. 하다 못해 인간의 사랑이란 정신적 체험의 명명이 과연 사회적 산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죽음은 생명 현상의 종결을 의미한다. 사실이 그렇더라도, 그리고 '신념'과 '신앙'으로 점철된 헛소리가 아니더라도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데는 하등 지장이 없을 따름이다.

그것을 종교의 이름으로 행하지 마라. 개새끼들아.

프로이트와 프로이트의 어설프게만 여겨져 잊혀진 이론이 희안하게도 맞아 떨어진다는 것을 눈치챈 현대 분자생물학과 수행자의 깨달음이 지니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 셋은 모두 의식과 인식을 다루고 있으며 인간의 욕망 중 그들의 생존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어떤 본능에 관해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일께다. 성욕이나 식욕 얘기는 아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자신을 살게 하는 힘들의 역학에 관하여! 그것을 공포의 밑바닥까지!

프로이트의 성에 대한 지나친 집착 내지는 독자가 프로이트의 시스템을 오독함으로서 발생하는, 프로이트의 성에 대한 집착을 의식하는 독자 자신의 정신상태(실제로 프로이트는 성이 인간의 정신활동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했지 그 어디에도 정신활동 전체를 지배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고 후기이론에 가서는 심지어 성을 '이상화'된 욕망으로 표현함으로서 에로스라면 침착함을 잃고마는 수 많은 독자를 실망시키고 심지어는 그 이론에 욕설을 퍼붓길 서슴치 않았다.

그는 과학자가 아니거나 어설픈 과학자라나?(누가 뭐래나?) 이런 실망과 욕지기는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무의식화되거나 내재화된, 또는 충족되지 못한 욕망의 전이와 투사인 것이다 ^^;) 등의 사소한 문제를 무시한다면 프로이트에게 여전히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는데 그의 '꿈의 해석'에 드러난 고대 마술사와 전적으로 동일한 예술적/예언적/치료술사적인 재능이다. 그는 환자의 괴상한 꿈을 아주 그럴듯하게 해석하여 환자를 만족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자각하지 못했던 자신과 연루된 신기한 판타지를 통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환한 기억의 회랑을 만들어 주었다.

프로이트의 이러한 독특한 치료술은, 그가 자신이 철저한 과학자로 기억되기를 희망했음에도(프로이트를 정신분석해 보면 그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기계론적인 용어, 특히 '에네르기'같은 물리적인 용어를 쓰려고 용을 쓴다고나 할까...아니면 공돌이들의 근본적인 한계라고 해두지 머) 그가 지닌 고대 구술 예술가로서의 재능,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고대 예언가로서의 재능, 이야기를 대화 상대자에게 납득시키는 것, 치료술사로서의 재능, 환자와의 은밀하고 개인적인 관계를 통하는 그의 방법론에 입각한 고대 주술사 내지는 치료술사에 버금가는 믿음과 신뢰를 구축하였다는 점 등이다.

그는 현대에 부활한 주술사같은 존재였다. 그냥 내 생각일 따름이다. 프로이트적 심리치료사의 사실 상의, 그리고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철저한 실패는 프로이트 이후 이러한 극히 드문 '천재성'을 타고난 사람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과 장기간의 치료 기간과 그에 따른 막대한 비용 손실에 미치지 못하는 미미한 치료 효과에 대한 환자들의 불만, 약물에 의한 물리적인 정신 질환의 치료가 정신 분석보다 효과적임이 종종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그 중요하고 점잖은 융이 프로이트보다 맥 빠지고 김새고 시시하게 보이는 이유는 융은 그냥 단순한 학자였지 치료술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의 심리치료사들은 현대사회에서 격증하는 스트레스성 심리 질환에 포커스를 집중하고 있는데 스트레스를 전문적으로 치료한다는 것이 참 묘하다면 묘한 일이긴 하다. 이를테면 농부가 비가 안 와서 올해 농사를 완전 작살내게 된 형편이라 엄청난 스트레스 내지는 심적 부담을 느끼는 것을 싸이코 쎄라피스트들이 치료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일을 쉬고 안정을 취하며 약 조금 타먹고 병원을 계속 다니라고? 그럴 때 하는 말이 있다.

어절씨구~ 조까고 있네~

자연 재해에 의해 인간이 받는 생존압은 일을 쉬고 안정을 취하며 약 조금 타 먹고 병원을 빼먹지 않고 다닌다는 갖잖은 방식으로 치료될 수 없는 것이고, 현대 생활은 그러한 자연의 개념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고도로 추상화된 생존압과 그러한 변화되고 복잡해진 '자연'과의 유기적 상호 작용에 대한 부적응은 사회가 자라나는 '환자'에게 적응력에 관해 무엇인가 잘못된 망상을 심어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자연으로 돌아가야 인간이 편하다는 류의 시대착오적인 주장이나 그들이 말하는 자연이 바로 인간에 의해 통제된 자연이라는 점에서 역시 문명권에 속하게 된 것을 말하면서도) 의심을 품게 된다. 그런 얘기는 사실 본론에서 좀 벗어난 것이고...

심리치료를 받는다면 프로이트같은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과 정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 툭 하면 과학입네 스트레스입네 하며 얼토당토 않은 소리를 늘어놓는 현대의 싸이코 쎄라피스트들의 개소리는 듣고 싶지가 않다. 그래 그들은 분명 현대적이고 과학적이고 기적적인 치료 결과를 내놓는다.

어린 시절의 나는 아주 활달했던 것 같은데 어느날 책을 잡고 손에서 떨구지 않게 되었다. 소설이라면 평생 읽을 일이 없었을 것 같은데 심심할 때면 소설을 읽었다. 도대체 어린 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혹시 아무 글자만 보면 흥분하는 이상성욕의 한 사례가 아닐까?

어쩌면 프로이트 같은 위대한 이야기꾼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내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상상력의 지평을 뛰어넘을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어쩌면 sf를 읽는 것이 다음 페이지에 나타나는 얼토당토 않고 유쾌하지만 때로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밤새 흥분해서 두근두근하며 뒷 일을 나름대로 궁리해 보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매력적인 시절은 갔다. 3초 전에 창틀에 앉았다가 금새 날아가버린 참새처럼.

짹짹.

그동안 '기적의 깨랄라 오이'로 맛사지 한 탓에 얼굴만큼은 보송보송했다.

'신에게 버림받은 카트만두 오이'의 성능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카트만두 시내로부터 조금 떨어진 내가 거한 처소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다. 창틀에 창이 안 달려 있고 출입구에 문이 안 달려 있어 딱히 방이라고 하기는 민망한, 공사하다 만 건물에서 침낭에 누워 잤다. 창문은 아니지만, 하여튼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키 큰 나무에서 낙엽이 날려와 방바닥에 내려 앉으면 혹자는 이것이야말로 인공물에 자연이 가미된 조화로운 건축 공간이자 놀 줄 아는 무굴 건축의 마지막 계승이라고 감탄사를 내뱉던 곳이다.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이다 보니 밤에는 약간 추웠지만 아침에 밖에 나가 햇살을 쬐며 얼린 몸을 녹이다보면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건물에서는 일종의 작은 공동체 실험이 진행 중이었다. 그들에 관해 할 말은 없다. 밥 먹고 요가하고 춤추고 노래하고 운동하고 연주하고 글쓰고 파티 하고, 그런 종류의... 그곳에서 내가 한 일은 아직 전기가 없는 관계로 전등을 달고 전등갓을 만드는 일 따위였다. 나머지 시간에는 밥 먹고 요가하고 춤추고 노래하고 운동하고 글 쓰고 파티를 했다. 밤에는 모닥불을 피워 놓고 개 짖는 소리를 듣거나, 아니면 개 짖는 소리 비슷한 음악을 들었다. 가끔 시내에 나가 식료품을 사거나 인터넷을 사용했다.

개천절에 한국 대사관에서 주최하는 디너 파티에 참석해 음식을 축냈다. 양복과 드레스를 빼입은 고관 대작들 틈에서 마리화나로 나른해진 몸에 걸레처럼 꾀죄죄한 옷을 걸친 채 나보다 잘 차려입은 웨이터들을 불러 고급 와인과 온 더 락을 연거푸 마셨다. 취했다. 개중에는 왕족도 있었고 마오이스트를 학살한 장군도 있었을 것이다. 무장한 군인들이 파티장을 지키고 있었다. 차라리 네팔 정세를 모른다면 편했을 것이다. 이제는 너무 잘 안다. 땅 투기와 네팔의 암울한 현실과 권력 투쟁과 산간 벽지에서 벌어지는 피비린내나는 학살극 따위를.

파티와 학문과 노동과 예술을 즐기는 히피가 되기에는 세속적이었다. simplest is best는 웃기는 말이다. 세상이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는데 단순한 삶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 맥을 짚을 수 있다면 세상과 삶은 의외로 단순한 것 일지도 모른다. 그중 하나만 단순하여 우둔한 자는 돌대가리를 시멘트 벽에 박고 있는 중이다. 단순하게 살라는 괴로운 충고를 들으면서.

이 단순한 삶은 과거를 되돌아보지도 않았고 실패를 교훈 꺼리로 삼지 않았다. 상상 만으로 웃음짓게 만드는 미래가 있을 뿐. 그래서 삶을 발견한 자들의 유골 속에서 공명하는 잠언이나, 희미한 안개처럼 신비스럽고 영속적인 도그마를 개발한 선배의 언어를 들먹이는 일이 없다.

그냥 마야꼬프스키의 싯귀처럼, 나 또한 노동과 투쟁의 한가운데서 태어났다. 자신을 세계와 현재와 연결시키려는 애절한 투쟁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치 얘기면 환장한다는 어떤 중 아저씨와 동아시아 정세에 관해 상호 신념을 교환하고 있을 때, 우리는 동아시아 전 국가의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에 멈칫 닭살이 돋아났고 심지어는 계란 마저 낳을 지경이 되었다. 각 나라 고유문화의 보존 계승보다 더 심각한 얘기였다.

문화가 각광받는 21세기란 것은 대체로 어딘가 모르게 어리둥절하기만 한 것이었다. 자기들이 만든 것에 자기들이 엉뚱하게 끌려가는 희한한 유행이 요즘 문화라 불리는 것인데 매스컴의 대중 선동과 잘 구분이 안 되는 것만큼은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그 덕에 블라디미르 비쇼프스키의 노래도 듣게 되었지만. 좋드만. 자신의 대가리를 품 안에 넣고 세상 참 따뜻하다고 주장하는 닭대가리가 많은데 그 점에서 만큼은 나 자신이 자유롭지도 심플하지도 못했다.

여행과 자유?

신랄하게 떠들어대기보다는 그런 쥐꼬리만한 자유조차 없었던 한국을 기억해냈다.

자유=돈이라고 온 몸으로 웅변하던 부모들이 생각났다.


알 쿠에다는 투항 후 반란군의 조직적인 수용소 살해계획으로 떼죽음을 당했다. 그 수는 아무도 모른다. 중국에 인도주의를 강요하는 미국은 모른 척 눈을 감았다. 밀폐된 컨테이너에 포로를 싣고 가면서 물 한 모금 안 주고 쪄 죽이는 아주 계획적인 방법을. 컨테이너 문이 열리자 죽은 시체가 생선처럼 쏟아져 나왔다.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시장에서는 야채와 양고기와 함께 무기를 판다. 소녀가 열차에서 강간 당하는 동안 다섯 명의 사내가 무기력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회면에나 얼핏 나타나기에는 한 국가의 변화를 지독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너무나 너무나 상징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미친 놈에 관한 기사는 또 있다. 한 기독교 목사가 자기 교구에서 장사가 잘 안 되었는지 힌두인들을 상대로 설교를 늘어놓는 도중 이슬람을 악마로 규정하자 이슬람 폭도들이 힌두인들을 때려 죽였다. 인도에서 이슬람과 힌두는 그 무수한 분쟁에도 불구하고 사이가 퍽 좋은 편이었다. 아니라고? 이슬람을 열받게 하는 것은 대단히 쉽다. 자존심만 살짝 건드리면 광분하니까. 파키스탄 접경의 테러리즘 활동에도 불구하고 80%의 인도인들은 대화와 평화를 원한다. 미친 BJP는 부시와 연대해서 테러리즘의 총 본산인 파키스탄에 따끔한 맛을 보여주는 한편 실리를 챙기려 하고 있다. 이 인도라는 나라가 과연 성자들 수천을 배출한,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다신교의 국가인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가로막는 놈들이 누군가. 저런 개 같은 목사를 만든 서구 문명이다. 서구 문명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내 정열은 나이를 먹어갈 수록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그리고 서구 제국주의 내지는 악마주의의 축은 기독교라고 생각했다.

자유 좋아하고 자빠졌고, 수행 좋아하고 자빠졌다.

현생을 살아가는 참된 방법론이란 신앙을 초월한 단순철학의 실천 뿐이다.

함께 살자 라는.


파키스탄의 북부, 훈자 마을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걱정거리가 다음 끼니는 뭘로 할까 정도 밖에 없는 평화로운 생활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침대에 누운 채 4000-7000 미터가 넘는 지척의 고봉을 따라 피어나는 구름을 보다가 세수하고 밥 먹고 하릴없이 햇볕을 쪼이며 시간을 보냈다. 게스트 하우스 위치가 끝내줬다. 누워서 창 밖의 설산을 볼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비수기에 라마단까지 겹쳐 동네의 거의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저녁쯤 전기가 나가면 가스등을 켜고 읍내에서 사온 등유 스토브에 불을 붙여 식사꺼리를 준비했다. 그전 오후에는 동네에서 야채와 식재료를 샀다. 다섯 시가 넘으면 라마단이 끝났음을 알리는 꾸란의 독경 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마치 낮게 깔린 장작 연기처럼 동네에 나즈막히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불을 피우고 음식을 준비한다. 저녁 늦게 전기가 나가면 보름이 다 되어가는 달빛에 설산은 비인간적인 자태를 드러냈다.

내가 본 것은 빛과 바람이었다.

전기가 나가면 라디오 방송조차 들리지 않았다. 비수기인 이 동네에 외국인이라고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로컬리들이 읍내를 오고가는 차 안에서 외국인은 언제나 나 혼자였다. 그들은 내게 말을 건네왔고 뻔한 질문에 뻔한 대답들이 오고갔다. 어디서 왔느냐, 언제 왔느냐 등등 장소와 시간을 묻는 질문들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의 배경이 되었던 이 마을은 그러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보다는 라퓨타를 생각나게 했다. 언제 어느 때 비행석 목걸이를 목에 건 여자애가 하늘에서 천천히 떨어질 지 알 수 없었고 떨어지기만 하면 언제든지 덮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빵 모자를 쓴 서양인도 동양인도 아닌 어린 아이의 맑은 눈빛은 지나치게 흔했다. 지금껏 보았던 사람들 중 가장 친절했고 이처럼 서로 서로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다. 옆집 가게에 주인이 없으면 대신 가게 물건을 보아주고 금고를 열어 돈 계산을 해 주는가 하면, 장례 행렬에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참가하는 모습을 보았다. 모순이었다. 세계 3대 장수촌에서 두 번 씩이나 장례 행렬을 본 것은.

훈자 마을은 해발 2500 미터 위에 있다. 훈자 마을은 인도의 스리나가르, 레가 있는 카시미르와 같은 지역이라 그 나물에 그 밥인 화성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그런 동네에 사람들이 사는 것이 신기했다. 훈자 마을에 머무르는 동안 경치도 경치지만 그 지역의 제반 여건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관광지로서의 훈자 마을은 이미 비수기에 들어선 상태였고 마침 라마단 기간이라 그나마 있던 식당들도 문을 닫은 상태였다.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재료를 사서 음식을 만들어 먹거나 훈자 마을에 관해 곰곰히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4천미터에서 7천 미터에 이르는 높은 산들로 둘러 싸여 있고 동에서 서로 흐르는 인더스 강 줄기를 남쪽에 두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가 비추는 경사진 마을이다. 훈자 마을은 기본적으로 자급자족 사회다. 외부와 수출입을 하긴 하지만 근대 이전의, 마을과 마을 사이에서 벌어지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덜 필수적인 생필품의 교환을 하는 수준이랄까. 그들이 외부 세계에 판매하는 것은 기껏해야 그 지역 특산물인 살구를 가지고 만든 살구잼 정도였다. 단가 당 단위무게가 꽤 나가는 물건이라 살구잼을 팔아서는 큰 장사가 되지 못한다. 주요 수입 품목은 밀, 빵(난)을 만들어 먹을 때 필요한 것.

사방이 산으로 꽉 막혀 있고 1968년 캐라코럼 하이웨이가 마을 아래를 지나가기 전에는 그럭 저럭 조용히들 살고 있었다. 전체 인구의 대다수가 무슬림이고 그래서 인지 손님을 후하게 접대하는 편이다. 말하자면 시골 인심을 느낄 수 있다. 몽골, 투르크, 코카서스, 라틴의 피가 섞인, 절대 다수가 무슬림인 마을. 여전히 대가족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고 가구당 평균 7.5명의 구성원,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아들, 소 한 마리, 닭 한 마리, 고고학자 한 마리 정도다.

평균이 그렇다는 얘기고 보통 20-30명 정도가 한 가구를 이룬다. 마을의 총 인구는 7000명 정도, 마을 사람들은 서로 서로가 아는 사람들이고 목격한 바에 따르면 장례식 동안 적어도 2-300명 되는 사람들이 장례 행렬을 이루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마을의 구성원 전부가 서로 서로를 알고 있다고 본다. 문맹률은 거의 0%다. 파키스탄의 평균적인 상황에 비교해 보면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천연적으로 외부 세계와 고립된 채 자급자족하는 작은 공동체, 그것도 최소한 천 년 이상 이어져 내려온 마을.

제임스 힐튼이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샹그릴 라를 묘사했다. 잃어버린 지평선이란, 지평선을 찾아볼 수 없다는 뜻에서 산골짝으로 둘러쌓인 엄청나게 깡촌틱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세어보니까 세상에는 적어도 네 개의 샹그릴 라가 있다. 네팔의 무슨 산골짜기, 중국 사천성의 무슨 산골짜기, 중국 운남성의 무슨 산골짜기, 그리고 훈자 마을이 위치한 길깃 부근의 산골짜기. 중국의 사천성과 운남성은 한동안 자기네가 진짜 샹그릴 라 라고 우기다가 공식적으로 한 성 만이 샹그릴 라라는 이름을 중국 내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법원의 판결을 받았다. 따라서 그곳만 샹그릴 라 라는 관광지로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뜻이 된다.

훈자 마을에 관한 이런 저런 머리 속에서 번쩍 스파크가 튀어 오르면서 떠오른 것이 십년은 잃어버린 단어였던 꼬뮨이었다. 이어 줄줄이 공산 이상 사회 건설과 산업화가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마르크스적 소외란 것도 떠올랐다. 물론 우주 개발에 필수적인 자급자족하는 제한된 계와 99.999% 실패한 히피 공동체도 역시 떠올랐다. 이제 단 하나 남았다고 여겨지는 히피 공동체인 오로빌 역시 별다른 수입이 없어 거의 망해가다가 최근부터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훈자 마을은 천 년 동안 주욱 외부의 도움없이 잘 지내오다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반쯤 관광지화 되고 나서부터 슬슬 변해가기 시작했다.

변화는 변화고, 매력적인 개념 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들이 그렇게 지속적이고 안정된 공동체를 유지해 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농경 경작 생활을 지속하기 위한 대가족, 외부로부터의 고립, 제한적이지만 적어도 생존을 지속할 수 있을 만큼의 경작지, 약간은 가혹한 환경, 실크로드 상의 주요 경로로부터 유입된 외부인과 피가 계속 섞임으로서 사회적으로 외국인에 대해 거부감을 갖지 않게 된 것, 국가나 사회체계, 심지어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외부로부터의 접근이 어렵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슬림이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슬림의 유입 과정은 대충 짐작이 갔다. 실크로드의 대상 무역을 통해 세금 감면 혜택을 노린 상인들이 이슬람으로 전향했을 터이고 그들중 일부가 중국까지 이어지는 경로 중 이곳을 택해 현지인과 맺어지면서 피가 섞이고 일종의 인종적 다양성과 스펙트럼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대상의 피와 인종 혼합이 외국인에 대한 경계심을 완화시켰을 것이다. 게다가 무슬림식 자비와 타인에 대한 호의, 그리고 무슬림식 위생은 더더욱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공동 경작, 공동 재산, 이런 것들을 혼자에서 보았다. 꿈에서나 보던 '당이 없는' 공산사회였다. 매우 흐뭇했다.

당과 이념이 없는 자급 자족 공산 사회.

-*-

추워지고 있다. 동방견문록을 본따 다음 이야기의 목차를 정해본다.

'여기서 그는 어떻게 거대한 사막을 건너 페르시아로 가게 되었는지 이야기한다'
'여기서 그는 6000년 전의 고대도시에 살고 있는 펭귄의 신기한 습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그는 사파비드 왕조의 영광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그는 왜 무슬림이 되었는지, 어떤 이름을 얻었는지 이야기한다'
`여기서 그는 제 2차 이슬라믹 레볼루션을 예언한다'

알라는 누구에게나 능력 이상의 부담을 지우지 않으셨다.
,
인도에서 쓰던 일기장을 옮겨 적은 것이다.
사진은 안 찍었다.
비행기 시간에 맞춰 깨달음을 얻으러 그곳에 간 것은 아니었다.
'값싸게 놀자'가 목적이었다.
해발 4000여미터의 고지에서 별을 바라보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런 여행 계획은 모두 틀어졌다.

고향에서 죽는 자는 행복하다.

8/9 떠나는 날

방을 나올 때 전기기구를 하나하나 꺼 나갔다. 핸드폰의 플러그를 빼고, 선풍기의 플러그를 빼고, TV와 VTR의 플러그를 뺐다. 컴퓨터의 서지오 플러그를 벽에서 빼냈다. 보일러와 세탁기의 플러그도 뽑았다. 마지막으로 냉장고의 플러그를 뽑았다. 그러자 처음으로 전기 계량기의 미터가 서서히 멎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치 마술처럼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신을 신고 사무실에 배낭 메고 출근해 마저 일 하다가 비행기 시간에 맞춰 공항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문구점에서 대충 고른 노트에는 'freedom and peace, it's our goal'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개소리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8/10

저녁,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 도착. 출국 방법을 잘 몰라 헤멨다. 공항에서 잘 곳을 확보하지 못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난바까지 가는데 지하철(기차)은 몹시 지루했다. 오사카의 야경은 참담한 수준이었다. 어서 빨리 이 지긋지긋한 문명을 벗어나고 싶다.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난바에서 유흥가로, 다음은 시장으로, 다음은 광장으로 이동했다. 마땅한 숙소를 찾을 수 없었다. 광장에 앉아 멍청히 쇼를 구경했다. 그곳에서 노숙을 하기로 했다. 근처에 있던 거지 아저씨가 박스를 건네주었다.


이침에 일어나 근처 건물의 화장실에서 칫솔질과 세면을 했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출국세를 냈다. 더럽게 비싸다. 수타 우동이란 것을 먹었다. 그럭저럭 맛있다. 공항 건물의 설계는 감탄스러웠다.


8/11

지루한 비행기 여행. 빌어먹을 여행. 형편없는 기내식. 형편없는 맥주. 맛없는 브랜디. 못생긴 스튜어디스.

8/12 16:05

뭄바이 도착. 평화롭게 썩었다. 기분이 몹시 좋다. 한국인 몇몇이 눈에 띄었다. 패스포트의 사인이 내가 쓰는 것과 달라서 앞으로 문제가 생길 터이고, 이번에도 문제가 생겼다. 입국 심사에서 약간 지체되었다. 말도 안되는 변명을 늘어 놓았다. 입국심사관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통과. 환전을 하기 위해 환전소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렸다. 환전을 해주는 녀석이 500 루피짜리 지폐를 슬쩍 끼워넣어 100 루피 짜리로 달라니까 없다고 우겼다. 으쓱. 공항 입구에서 왠 시꺼먼 놈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가 없어 눈을 가늘게 뜨고 가까이 다가갔다. 상돈형! 자칭, 크리슈나였다. 라즈니쉬 아쉬람에서 기괴한 짓을 하다가 문득 내 생각이 나서 뛰쳐나왔단다.


크리슈나는 이렇게 깨끗한 도시는 처음이라며 눈을 휘뚱그레 뜨고 사방을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걸 깨끗하다고 하는 건가? 크리슈나는 부랑자 같은 차림에 다 뜯어진 슬리퍼를 질질 끌고 있었다. 할 일도 없고,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주장대로 택시를 타고 뭄바이 북부에서 남부, 빅토리아 역까지 가기로 했다. 크리슈나는 택시기사와 언성을 높이며 흥정을 하기 시작했다. 묘했다. 1년 전에 만났던 이 녀석은 얌전했고, 직장생활에 환멸을 느끼는 그저 그런 직장인이었다. 대략 200 루피 정도의 비용. 싼건지 비싼건지 물가에 대한 감각이 없어 잘 모르겠다.

거리가 몹시 지저분하다. 머리통은 텅 비어 있었다. 택시는 무척 빨리, 그리고 위험스럽게 달려서 기분이 좋았다. 택시에는 사이드미러나 백미러등 불필요한 것들이 생략되어 있었다. 카 스테레오 따위는 없었다. 그저 달린다는 단순한 목적에 걸맞았다. 앞 차의 뒷범퍼에 붙어있는 스티커에는 'Horn me please'라고 적혀 있었다. 미소를 지었다.

살베이션 아미 게스트 하우스에 투숙하기로 했다. 비용은 합쳐서 400 루피, 조식 포함. 영국식의 지루한 천정과 비좁고 어두운 복도였다. 일행과 함께 일단 밥맛 부터 보기로 했다. 탈리. 먹자마자 정이 들었다.

Gate of India를 방문. 게이가 하나 지나간다고 크리슈나가 손가락질을 했다. 똥배가 나온 게이는 처음 보았다. 크리슈나는 그를 본 것이 길조라고 말했다. 살금살금 비가 오고 있었고 파도는 철썩철썩, 어둠 저편에 엘리펀트 섬이 희미하게 보였다. 근처의 시장통을 방문해 필요한 물건을 구입했다. 사실 제대로 준비해 온 것이 없었다. 무엇 보다도 자물쇠를 샀다. 나는 아무 것도 사지 않았다. 모든 것이 낯설고 생경하지만 불안하다거나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저 묘하게 이국적일 뿐이다.

별볼일 없는 식당의 이층에서 식사를 했다. 가격은 더럽게 비쌌고 종업원들은 불친절했다. 외국인들이 왜 이런 곳에 들어와 식사를 하는지, 비웃는 것 같았다. 인도의 상류층 사람들이 와서 먹는 곳이란다. 외국인은 불가촉 천민 취급을 받았다. 식당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동물원 원숭이처럼 관람하며 수근덕거리고 있었다.

배군의 배낭 자물쇠가 망가져 배낭을 열 수 없다. 그는 재수가 없었다. 야밤에 짐을 풀고 도미토리의 침대에 걸터앉아 팩소주를 꺼내들고 잡담을 하고 있을 때 한 이란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여행 경력이 7년 가량 되었고 인도를 사랑하노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가는 중에 내가 life is a isle in the sea of death라고 말하자 그가 life is icecream. so you must enjoy that till it melt down 이라고 말했다. 그는 치과의사였다. 조금 있다가 뉴질랜드 친구가 들어왔다. 여행경력 14년 짜리. 어딘가 게으르고 느릿느릿 한 것이 만사가 귀찮은 모양이다. 그는 카트만두에서 5루피를 주고 그곳 여자와 결혼했다는 무용담을 들려주었다. 그는 결혼을 세 번 했으며 사진사였다. 한국에서 온 세 친구와 나머지 친구들 사이에 영어가 잘 통하지 않았다. 영국에서 온 흑인은 무술을 하는 친구였으나 그의 자세는 내가 보기에도 엉망진창이었다. 크리슈나는 합기도와 쿵푸를 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자세를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8/13 9:00

어젯밤에 보았던 이란인을 식당에서 만났다. 커다란 가방을 탁자 옆에 두고 식사중이었다. 오늘 이란으로 떠난다고 말했다. 길 옆의 짜이샵에서 짜이를 마셨다. 달콤하고 짭짜름했다. 더러운 흰 옷을 입은 검은 인도인들이 서성이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쳐다보았고, 나뭇가지 위에 있는 까마귀들도 우리를 쳐다보았다. 소문으로 듣던 시선이지만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기차표를 구하기 위해 뭄바이 센트랄에 먼저 들렀다. 버스를 타고 갔다. 기차 예약은 불편했고 의사처럼 차려입은 인도인들이 창구에서 외국인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매표원이 되려면 대학을 졸업해야 한다. 고군과 배군이 앉아 인도인들의 영어를 알아들어 보려고 애를 썼다. 그들은 인도의 기차 중에서는 가장 비싼 라즈다니 익스프레스를 타고 북쪽으로 갈 예정이었다. 역 앞에서 컴퓨터 관련 서적들을 팔고 있었다. 거리는 복잡하고 정신 사나웠다.

길가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로칼빠니'에는 먼지와 이물질이 둥둥 떠있었다. 그냥 마셨다. 그곳은 고기를 파는 회교도 식당인듯 싶었다. 그들은 알라신에게 기도할 시간에 영업을 계속해서 돈을 벌 생각이었는지 남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바깥 문을 닫고 주위를 살폈다. 어두침침한 식당 안에는 몇 안 되는 음험하고 조용한 인도인 손님들이 접시에 담긴 음식을 먹고 있었다. 맛살라 향기는 머리를 편안하게 해주었고 인도 음식이 마음에 들었다. 배군과 고군도 거리낌 없이 잘 먹었다.

CST 역에서 기차표를 예매했다. 그리고 인도문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었다. 크리켓 경기장이 보였다. 너저분한 노점상을 지나쳐, 거지들이 득실거리는 거리를 지나갔다. 손들이 내게 다가왔다가 가이르 잎사귀처럼 사라졌다. 한 갤러리에 들어가 그림과 조각 따위를 구경했다. 인도인들이 우리 일행을 보며 웃었다. 외국인 관람객이 신기한듯 했다. 기차표를 사기위해 여권을 창구에 건네고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와 크리슈나는 허겁지겁 역으로 되돌아가 그것들을 받아왔다. 그리고 룽기를 샀다. 옷을 거의 가져오지 않아 룽기가 필요했다.

저녁 무렵, 프린스 웨일즈 뮤지움에 들러 그림과 칼 따위를 구경했다. 공항에서 보았던 한국인 둘을 만나 동행했다. '인도 맛따라 길따라'와 '지나가는 여행객'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한다. 그들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간단히 생맥주를 마셨다. 그들 중 남자쪽이 '신라면 컵버젼'을 크리슈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아울러 디스 플러스 여덟 갑도 건네준다. 그는 곧 인도를 떠난다고 말했다. 그들이 투숙하고 있는 YWCA 건물은 비교적 깨끗하고 비쌌다.

저녁에 할 일이 없어 주점에 들어가 위스키를 한잔 마시기로 했다. 형편없는 맛이었다. 나는 더 마시겠다는 사람들 틈에서 술을 사양했다.

8/14

처치 게이트 역에서 고군과 배군을 배웅해 주었다. 기차는 무척 길었고 나무로 된 좌석은 불편해 보였다. 그들은 의자에 앉아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불안해 보였다. 그들의 여행에 행운이 깃들기를 빌어 주었다. 여자들에게나 보여주던 웃음을 보여주며.

기차 역 부근에서 점심을 먹었다. 할 일도 없고 저녁에나 출발하는 기차라서 거리를 느적느적 걸어다녔다. 그러다가 버스 스탠드에 죽치고 앉아 언제 올지도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크리슈나는 내 파일럿으로 vexed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인도의 특별한 시간 리듬에 동화되어 가고 있었고, 그 적응속도에 스스로 당혹감을 느꼈다. 이를 잡듯이 시간소를 죽였다. 인도에서의 며칠 간이 친근한 일상처럼 느껴지는 탓에 서울에서의 내 생활은 새롭게 평가되었다. 나는 서울에서 에일리언처럼 살고 있었다.

역 앞에서 무게를 달아 보았다. 1루피를 내고 몸무게를 재는 저울이다.

저녁. 거리 모퉁이에 창녀가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오늘자 힌두스탄 타임즈는 창녀들의 이동을 사회칸에 조그맣게 다루고 있었다. 크리슈나는 도와 명상, 마음의 진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나를 '우리 동네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예수, 장자, 노자, 라즈니쉬, 붓다가 그가 말하는 '우리동네 사람들'이었다. 저자거리를 헤메며(그저 걷는다는 것은 내게 지나치게 익숙한 것이었다) 내쪽에서는 '마음'의 진화에 관해, 그는 '명상과 수도'에 관해 두서없는 토론을 벌였다. 그는 나를 지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규정되는 타입의 인간은 아니었다. 토론은 용서와 화해, 타협, 그리고 서로에 대한 몰이해를 확인함으로서 끝났다.

인도에 도착하여 가장 경제적인 식사를 했다. 크리슈나는 어제 한국인으로부터 받은 신라면을 통해 '세포적 환희'를 느껴보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나는 스넥처럼 바삭바삭한 dosa를 한입 한입 뜯어먹었다. 기차를 타기 위해 중앙역으로 향했다.

8/15 새벽 5:05

인도 숫자나 연습해 볼까 하고 공책에 숫자들을 두세 번 적어 보았으나 숫자들이란 본래 신성할 따름이라서 잘 외워지지 않았다. 영어 발음이 영 형편없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 인도인 한 떼와 만났다. 한 녀석은 똑똑해 보여 그와 안부를 주고 받았다. 그는 가족 이야기를 했다. 스스럼 없는 천진함이 진기했다.

기찻간에서 만난 영국인들은 Lonely Planet을 너무 읽은 탓인지 커다란 짐 한보따리를 들고와 무의미한 애기를 늘어 놓았다. 인도 여행이 처음이라느니, 두려운듯이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돌이켜보건대 내 인생도 무의미하고 심심하긴 마찬가지였다. 영국인들이 애써 내 곁에 앉아있는 인도인들을 무시할 동안, 나는 인도애들 중 그나마 잘 생겼다고 할 수 있는 젊은 친구의 몇 가지 질문에 답해 주었다. 그에게 먹고 있던 크래커를 나누어 주었다. 영국애들이 내게 준 것이었다. 영국 애들은 우리가 인도인들과 '아주 잘' 놀고 있는 꼴을 경이롭게 쳐다보았다. 인도애들이 식사로 탈리를 꺼내 먹기 시작했다. 먹지 않겠노라고 의사를 밝혔다. 젊은 친구는 왜? 라고 물었다. 왜긴 왜겠어. 지저분해 보이니까 그렇지. 처음으로 인도인들과 가까이 앉아 대화같은 대화를 해 본 셈이다.

영국 커플중 여자애는 몹시 불안스러워 했다. 그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녁에 눈을 떠보니 남자애가 차창 밖을 닭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잠들었다.

기찻간에서 만난 인도인들께서는너무들 잘 해 주셨다. 무척 귀찮게 굴었다. 새벽녁 추위에 깨어 배낭을 뒤적여 룽기를 꺼내려던 참이었다. 맞은 편에 앉아있던 호기심에 가득찬 검은 눈의 인도인이 아우랑가바드에 도착했음을 알려 주었다. 그는 우리가 줄곳 잠들어 있는 동안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하는 말의 대부분을 알아듣지 못했다.

영국인 커플과 역 앞에 내려 두리번거렸다. 역 근처에 숙소가 있었지만 아잔타/엘로라로의 여행을 편히 하기 위해서 버스 터미널 근처로 숙소를 잡기로 했다. 오토 릭샤비는 30루피. 버스 터미날 앞의 짜이 샵에서 짜이를 한잔씩 했다. 영국인 커플은 두려운 나머지 거의 우리에게 매달려 있다시피 했다. 여러 호텔을 돌아보았으나 마당한 곳이 없었다. 샹그릴라 호텔. 125루피. 23번은 영국인 커플에게, 우리는 26번 방에 묵었다. 숙소는 개판이었다. 샤워 꼭지가 없었고 방이 몹시 지저분했다. 침대에는 벼룩이 뛰어다니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뻰질뻰질하게 생긴 보이는 팁으로 10루피를 요구했다.


오후 1시쯤 불편히 깨었다. 꿈을 꾼건지 기억하기는 힘들지만 몇몇 적었으면 싶은 귀절이 떠올랐으나 그러지 못했다. 날은 흐리고 우울했다. 창 밖으로 한 인도인이 장작을 지펴 물을 데우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아우랑가바드에 회교도들이 잔뜩 방문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들이 코란을 읆조리는 소리가 어디선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새벽에 샤워를 했던 크리슈나의 머리칼은 흩어져 있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샤워했다. 샤워가 끝날 때쯤 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아우랑가바드의 첫인상: 어둡고 음침하다. 그리고 지저분하다.

아침겸 점심을 먹고 자전거를 빌리러 갔다. 자전거는 시간당 4루피. 거리는 뭄바이와 마찬가지로 매연으로 가득차 있었다. 폭주하듯 달리는 차량들이 넘실거리는 위태스러운 거리를 지나 리틀 타지마할에 들렀다. 그 보잘것 없는 성냥갑 같은 건물을 구경했다. 정원은 방치되어 있었다. 풀들이 앞다투어 위로 치솟아 있었다. 외국인을 신기해하는 인도인들과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악수를 청했다. 입구에 중국인이 서 있었다. 우리에게 말을 걸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산 중턱에 있다는 동굴로 자전거를 몰았다. 사막처럼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았다. 그리고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절벽을 따라 물이 몇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먹을 물이 없어 오래 머물러 있기는 힘들었다. 관리인으로 보이는 인도인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온 인도인 연인이 눈을 마주보며 웃고 있었다. 내가 쳐다보자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계단가에 누워 눈부신 하늘을 바라보았다. 젊은 녀석들 넷이 곁을 지나가며 입을 다물었다. 고원의 지평선이 희미하게 보였다. 햇살을 받은 도시의 하얀 건물들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우기를 맞아 자라기 시작한 나무들이 들판을 따라 듬성듬성 돋아 있었다.

시간은 마치 정지해있는 것 같았다. 수천 년의 세월이 바로 내 눈 앞에 장면을 포개고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광복절을 맞아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음식을 나눠먹고 흩어지는 모습을 구경했다. 인도 꼬마들이 손을 흔들었다. 길 복판을 점령하고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는 거의 1킬로 미터에 달하는 소떼의 행렬을 뚫고 지나갔다. 사람들이 인사했다. 고양이도 인사했다. 리틀 타지마할 근처에 자전거를 세웠다. 학교에서 소풍온 듯한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그것도 재미있게. 수십명의 아이들이 hello를 연발했다. 손바닥을 펴 나를 또렷이 보면서. 한 여자애가 아이 러브 유라고 말한 것이 몹시 인상깊었다. 선생이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달려왔다. 선생 역시 우리들에게 호기심을 보이며 멋적은 미소를 지었다.

노상 짜이샵에서 담배를 한 대 물었다. 동네 늙은이들이 길가에 주저 앉아 나를 쳐다 보았다. 그중 한 명에게 담배를 한 대 권했다. 선글라스도 빌려 주었다. 번쩍번쩍한 라이터를 구경시켜 주었다. 노인네들은 잠자코 앉아 얼굴에 미소를 띈 채 하시시를 피우다가 내게 권해주었다. 나는 손을 가볍게 흔들어 거절했다. 사실은 피우고 싶었다.

8/15 오후 16:00 무렵

자전거를 몰아 무굴 정원에 들렀다. 자전거 주차료 4루피. 입장료는 2루피였다. 무굴양식의 건축이 지닌 '세심한' '마음'을 두세 시간 동안 떠들어대며 흥분해서 건물 사이를 오락가락 했다. 역대 마하라자(king)들이 술자리는 제대로 만들 줄 알았다. 술 먹고 여흥을 즐기기 알맞은 배치였다. 무굴인들은 지배력(power)과 흥청망청한 파티(party)의 역학적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노트의 나머지 칸에 정원을 스케치했다. 내 눈 앞에는 수천 년 전 그곳에서 향연을 벌이는 광경이 오락가락했다.

연못이 있었다. 산악에서 이곳까지 지하도관을 이용해 작은 폭포를 꾸미고 한 켠에는 흘러나오는 물로 물레방아를 돌리고 있었다. 인생처럼 복잡하게 얽힌 반얀 트리에 기대 앉아 연못 쪽을 바라보고 있는 아가씨의 뒷모습을 보았다. 한국어로 지껄이니 뒤돌아보았다. 우리가 티베탄인줄 알았단다. 한동안 얘기했다. 어쩐지 이국 땅에서 동포를 만나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크리슈나는 자전거 주차료를 챙기는 꼬마를 상대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귀찮긴 했지만 그녀와 저녁 약속을 했다. 아가씨는 기차표를 취소하고 하루 더 머물기로 했다. 장씨, 대구 출생, 71년생. 회교 식당에서 후추덩이가 통째로 씹히는 에그 비리아니를 먹었다. 장씨는 이 맛있는 것을 태반은 남겼다. 밤이 되었고 응큼한 인도인들은 장씨를 놀리려 했다. 나는 마치 그녀의 남편처럼 굴어 인도인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Fatnfa Fun이란 놀이시설에 들러 놀았다. 장씨의 소원이었으나 혼자 가기 무서워서 못가고 있었다. 도박으로 40루피를 날리고 놀이시설 도는데 90루피 가량을 소비했다. 별 재미는 없었지만 쓰러질듯이 삐거덕 거리는 철골 때문에 엄청나게 무서웠다.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다가 크리슈나의 바지 엉덩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우리는 놀이시설의 폐점시간까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벤치에 앉아 있었다.

담배를 사들고 크리슈나와 함께 그녀가 묵고 있는 Tourist home을 방문했다. 거지소굴같은 샹그릴라 호텔에 비하면 엄청나게 깨끗한 곳이다. 새벽 다섯 시까지 얘기했다. 그녀는 크리슈나와 나 사이에 오고간 이야기를 무척 즐거워했다. 크리슈나에게 관심이 있어 보였다. 크리슈나는 여행의 역정을 얘기했다. 나는 네번째로 듣는 것이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여행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듣게 될까? 장씨는 테잎과 그림들을 보여주었다. 자수를 해 놓은 그림은 볼품없어 보였다. 손재주는 한국인들 것이 낫다. 내게도 그림이 있었다. 역에서 구입한 30루피짜리 인도 전역 지도였다. Tourist Home의 입구에 붙은 문구: what you're is god's gift to you, what you become is gift to god. 멈춰 서서 이미 머리 속에서는 잊어버린 그러한 '존재의 소중함'을 생경하게 되씹어 보았다.

새벽 6시, 장씨의 숙소를 나와 느적느적 새벽 거리를 걸어갔다. 크리슈나는 엊그제 헤어진 고군과 배군의 걱정을 했다. 쓸데 없다. 하지만 그에게 배군은 아마도 빨리 적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새벽 늦게까지 하는 노상 짜이샵에 들러 짜이를 한잔 했다. 이 맛에 정이 들 것 같다. 숙소로 돌아와 보니 문 밑으로 살짝 집어놓은 어제 만난 영국인 커플의 메모가 눈에 띄었다. 스스로들을 dumb couple이라고 부르며 사인을 해두었다. Tourist Home으로 간다는 내용. 우리더러 고맙다며 만나서 술이나 한잔 하자고 적혀 있었다. 그럴 여유는 없을 것 같았다. the great truth are the simplest.

8/16 12:14

오후 1시, 일어나 샤워하고 룽기를 빨았다. 딱히 할 일이 없어 엘로라의 동굴 구경이나 하러 가기로 했다. 로컬버스 10루피. 잘못 도착해 ellora caves가 아닌 근처의 shrine에 도착. 크리슈나는 들어가길 꺼려서 나혼자 신발을 벗고 들어섰다. 경비가 막아섰다. 신성한 장소이니 웃통을 벗으라고 했다. 인도 아줌마들이 나를 무서운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신성한 사원에 들어온 외국인?

안 벗고 그냥 들어가려고 개기다가 벗고 들어갔다. 사두 몇 마리가 '인생상담'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부에는 진한 하시시 냄새가 풍겼고 그들은 모닥불에 꽃을 던지며 모닥불 주위를 어슬렁 어슬렁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고향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사두가 담배대를 권했다. 한모금 빨았다. 하시시였다. 그에게 나는 패턴을 걷고 있노라고 꽥 소리질렀다. 그는 내 눈을 들여다 보며 빙글빙글 웃었다. 바깥에서는 코코넛을 까 그 하얀 속내를 사람들이 나눠먹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태양이 추락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늙은이가 내 이마에 빨간 점을 찍으려 했다. 아줌마가 꽃을 내밀었다.

엘로라 동굴에 도착했으나 월요일이라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경비는 속삭이듯이 40루피를 요구했다. 관료의 부패는 이럴 때는 반가운 것이었다. 잠시 망설이는 중에 공무원처럼 보이는 친구가 곁에 다가와 '규정상 출입이 안된다'고 말했다. 규정? 돈이 더 들겠지. 할 일이 없어 잔디밭에 앉아 어제 산 지도를 쳐다보며 볼펜을 떨구면서 빈둥대다가 호텔로 돌아왔다.

장씨와 오후 다섯 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40분쯤 늦었다. 그녀는 로비에서 일기를 쓰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기장에는 우리를 만난 얘기가 적혀 있었다. 일기장을 황급히 감추며 부끄러워 했다. 그녀에게 아잔타로부터 산치로 가는 길을 물었다.

빌어먹을 복대를 벗어던지고 싶었지만 그냥 참았다. 또다른 한국인이 투어리스트 홈에 묵고 있다고 해서 만나러 갔다. 70년생 이씨 아가씨. 45일 일정으로 와서 9/3에 돌아갈 예정이란다. 세계로 가는 기차에서 공동구매한 퍼펙트 가방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소금에 절인 무와 물렁하게 습기가 배인 구운 땅콩을 나누어 주었다. 산치에서 김치를 해먹기로 재차 다짐했다. 마당에서 무와 땅콩을 먹다가 기차역 부근에 술집이 있다고 하여 그리로 갔다. 멋진 회교도들! 멋진 아우랑가바드!

장씨는 저녁 늦게 뭄바이로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하루 더 미루기로 했다.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술을 마시는 것이라고 말해 나를 놀라게 했다. 기분좋게 취해 헤롱거리다가 훌쩍였다. 그녀의 엄마는 인도를 싫어했다. 장씨가 결혼하지 않은 이유는, 약혼까지 했다가 깨고서, 공유할 수 있는 것이 그 남자와 없어서 였다. 듣는 내내 남 얘기 같지 않아 가슴이 아팠다. 자신의 미래에 그닥 자신감이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신 맥주의 상표는 king fisher strong, 안주는 계란 프라이였다. 회교도들이 여자 둘이서 담배 피고 술 먹는 광경을 신기하다는듯이 쳐다보았고 주인이 달려와 겉 쪽문을 닫았다. 나는 문을 다시 열었다. 회교도들이 수근거렸다.

나는 재차 반복되는 크리슈나 얘기가 지겨워 좀이 쑤셨다. 이씨는 하시시 얘기를 했고, 장씨는 해보고 싶어했으나 내 생각에는 그걸 안해도 그녀는 알콜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이씨는 박시시(구걸)에 관해 얘기했고, 나는 여행자들이란 인도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를 비판하거나 해결하기 위해 인도에 오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대화가 지겨워져서 산책 겸 밖을 떠돌았다.

흰 암소가 새들이 짹짹대는 나무 밑에서 빈둥거리며 놀고 있었다. 발로 걷어찼다. 짜이를 한잔 마셨다. 인도인들이 내 더러운 인상을 흘낏 흘낏 쳐다보며 두려움이 담긴 관심을 보였다. 술집 근처에 앉아 술집을 바라보았다. 술자리는 내가 없어지자 30분도 안되어 파장이 난듯 싶었다. 크리슈나는 나를 찾으러 돌아다녔다고 말했다. 그는 화가 나 있었다. 나는 길을 잃지 않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남은 돈으로 인도산 위스키를 한병 사들고 이씨의 방으로 갔다. 새벽 3:00, 이씨의 책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갈리마르 총서를 번역한 시공사 디스커버리 시리즈를 이곳에서 보게될 줄은 몰랐다. 담배를 사러 나가려 하니 이씨가 따라왔다. 여자애가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영 마땅치 않았다. 역전 근처로 향하면서 그녀는 신중하고 또박또박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인도의 밤거리를 처음으로 돌아다녀 본다고 말했다. 이씨는 기차표를 취소하려고 생각했으나 창구는 닫혀 있었다. 이씨나 장씨나 우리가 마음에 든 것일까? 담배를 사지 못했다. 싹싹한 이씨의 도움으로 거리에 앉아있던 방범대원에게 비리를 세 가치 얻을 수 있었다. 이씨의 방에서 네 명이 새우잠을 잤다. 자는 내내 모기에게 시달렸다. 새벽 5시쯤 문득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장씨가 마당을 배회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당의 자갈을 자근자근 밟는 불안한 발자국 소리.

5:30 쯤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장씨가 입구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그녀는 오늘 떠난다고 말했다. 장씨의 무사귀환을 빌어주었다.

오전 6시,호텔에 도착. 그러나 체크 아웃할 시간이다. 졸려서 잠시 누웠다.

오전 8:30, 할일이 없어 엘로라 행 버스를 탔다. 햇볕은 따가웠고 졸음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 있었다. 입장료 5루피. 16번째
동굴만 구경하기로 했다. 거대한 암반을 깍아 만든, 미완성된 건물이었다. 세공은 세월에 무뎌져 있었고 일부는 파손된 상태였다. 동굴 속에는 박쥐가 살고 있었다. 박쥐똥 냄새가 지독했다.

한 인도 꼬마와 그의 친구들이 할 말을 미리 만들어 질문하고, 대답을 듣고, 허겁지겁 도망쳤다. 인도인들의 묘한 영국식 발음이 차츰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크리슈나는 그것을 힝글리시라고 했다. 힌두가 하는 잉글리시. 꼬마애들과 숨바꼭질같은 대화를 여러번 반복하는 동안 나도 질문꺼리를 만들어 두었다. 그들이 화려한 사원의 어둠속에서 달려나왔다. 그들은 부유한 집안의 자제분들이었고 그들의 부모는 나와 꼬마애들이 대화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사원 안에는 여러 종류의 새들이 북적거렸다. 알록달록한 앵무새가 눈에 띄었다. 다행히 그놈은 힌디어를 하지 않았다.

입구에서 돌을 파는 곰보 투성이의 녀석과 흥정을 벌였다. 60루피를 주고 하나 샀다. 크리슈나에게 용도를 설명해 주었다. 안에 메모를 넣어 여자친구에게 주라고. 미덥지 않아하던 크리슈나는 내 말에 솔깃해 2개에 75루피를 주고 그것을 샀다. 그리고 자신의 흥정 솜씨가 더 좋다고 자랑했다. 우리 둘은 비싼 값을 치루고 속아서 산 것이었다.

입구를 빠져나와 동굴의 언덕으로 올라가 아래를 쳐다보았다. 사진을 찍는 일본인 하나, 인도인 여럿, 크리슈나가 내 꾀죄죄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주었다. 나는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우물에 머리를 들이밀고 낄낄낄 웃었다. 지나가던 인도인이 말을 걸어왔다.

나뭇 그늘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인도에서는 희안하게 아무 것도 안해도 시간이 잘만 흘러갔다. 입구를 빠져나오며 원숭이랑 놀다가 오이를 사먹으며 내려왔다. 배낭을 맡겨놓았던 가게에서 탈리를 시켜먹었다. 마침 시장하던 참이었다. 화장실을 묻자 건물 뒤의 숲을 가르켰다. 식사를 마칠 때쯤 이씨와 장씨가 오토릭샤를 타고 도착했다. 의외였다. 장씨는 오늘밤 9:30 휘황찬한한 first class를 타고 뭄바이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두 여자에게 아까 우리에게 짱돌을 속여 팔아먹은 녀석이 둘씩이나 붙어 귀찮게 굴었다.

이씨가 귀찮았는지 20루피를 주고 돌 하나를 샀다. 돌장수에게 왜 우리에게는 60-70루피씩에 팔았나고 따졌다. 녀석은 저번
거래는 저번 거래고 이번 거래는 이번 거래다 라고 잘라 말했다. 멍청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아우랑가바드로 돌아가는 차를 타기 전에 우리를 향해 웃고 있는 이씨와 장씨를 보았다. 그들에게 email 주소를 적어줄까 망설였다. 그들이 수첩과 펜을 내밀었다. 크리슈나가 적고 있을 때 가만히 있었다. 수첩은 펼쳐진 채로 탁자 위에 놓여있었고 나는 적고 싶지가 않았지만, 이렇게 무의미하게 실갱이하듯 시간을 보낼 수는 없어 할 수 없이 적었다.

오후 세 시, 아잔타 행 버스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한 '지나치게 친절한' 꼬마 녀석 덕택에 아잔타 근처로 가는 파르다푸르행 버스를 탈 수 있었다. 피곤했으나 잠이 오질 않아 많은 생각을 했다. 버스에서 담배를 한대 빨았다. 인도인이 담배를 한대 달래서 그냥 주었다. 크리슈나가 말렸다. 시가렛은 인도인들에게는 귀한 것이라고. 버스가 멈출 때마다 품팔이 하는 소년들이 올라왔다. 어떤 녀석이 인도어로 무언가 중얼거리며 나를 놀려댔다.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놈들은 폭력을 싫어한다고 들었으니까(책에 적힌 말이 틀리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덜컹거리는 시골버스 때문에 다소 지쳤다. 고원에서 석양이 지고 있었다. 우기가 끝난 증거란다. MTDC 도미토리에서 50 루피를
주고 투숙. 크리슈나의 발가락 사이에 난 상처는 눈에 띄게 나빠지고 있었다. 회랑에서 수정 쪼가리를 주며 쫓아다니는 삐끼를 따라 숙소에서 약 15분 정도 떨어진 허허벌판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치킨 커리를 먹었다. 대지의 수평선 위로 태양이 지고 슬슬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경찰이 우리를 그 음식점까지 태워 주었다. 말라 비틀어진 닭 한마리에 215 루피나 했다. 경찰은 길 근처에 누워 단속을 시작하고 있었다. 근처 가게에서 무려 24루피를 주고 담배를 구입했다. 관광지라 모든 것이 비쌌다.

도미토리에 투숙한 외국인은 셋이었다. 한 녀석은 영국인, 두 녀석은 이스라엘인으로 보였다. 도미토리에 뒤늦게 들어온 인도인 셋은 한쪽 구석에서 외국인들을 피해 불편하게 쭈그리고 있었다. 비교적 깨끗한 옷차림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들은 관광객 같았다. 이스라엘리들은 300 루피나 주고 쓸모없는 수정 조각을 잔뜩 구입했다. 나는 수정을 감정한답시고 들쳐보다가 그가 사기를 당한 것을 알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샤워가 안돼 약간 기분이 상했다. 서양애들이 주저리 주저리 떠들어대는 소리에 끼어 들었다가 하품이 나왔다.

8/18 9:00

30루피를 주고 오토릭샤를 탔다. 15루피면 떡을 칠 것 같았지만 놈은 아침이고, 왕복을 해야 한다며 가엾은 표정을 지었다. 이제 대충 인도의 물가가 감이 잡혔다. 서울의 택시가 생각나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고' 릭샤를 타고 아잔타 동굴에 도착했다. 돈을 조금 더 쓰더라도 '품위를 손상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크리슈나가 강조했다. 바람에 머리칼이 흩날렸다. 도로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달과 짜파티로 아침 식사를 간단히 치뤘다. 식사가 부실한 듯 싶다. 인도에 온지 일주일 째, 체력의 저하를 차츰 느끼고 있었다. 채식을 한 탓일까? 크리슈나가 달걀 먹는(에그 커리) 모습을 부럽게 쳐다 보았다. 5루피에 수정을 구입했다. 전날밤 멍청한 이스라엘리는 이런 것을 300루피나 주고 샀다.

박쥐똥 냄새가 나는 2-3천년 묵은 동굴이나 보러 돌아다니는 것은 원래 취향에 맞지 않았다.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한국인을 보았다.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이란다. 비행기를 타고 왕복한다는 말인가? 점점 한국인을 만나는 것이 싫어졌다. 그는 말끔하게 차려 입고 있었으며 크리슈나와 나는 대단히 꽤재재했다. 옷을 빨아 입었는데도 이 모양이다.


배낭을 경찰이 운영하는 짐 보관소에 맡겼다. 동굴의 입장료는 5루피. 라이트 티켓이 없으면 문제가 될 것이라는 말을 무시하고 들어갔다가 1번 동굴 입구에서 출입을 제지당했다. 라이트 티켓 5루피. 동굴에서 전등 불빛을 비추려면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우습군.

동굴 근처는 마치 한국에 온듯한 친근감이 드는 풍광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위쪽은 평평하고 갑자기 절벽을 이루는 산. 1번 동굴의 보살 모습은 아름다웠다. 아니. 새까맣게 탄 보디사트바의 눈앞에서 얼어붙은 채 넋을 잃었다. 그림을 그린 놈은 지옥맛이 뭔가를 아는 놈이었다. 크리슈나는 신이 났는지 내가 '인류사에 길이남을 기적적인 건축물인 타지마할'을 꼭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1, 2, 16, 17번만 보고 나오려 했으나 넋이 나가서 1 번에서 26번 동굴까지 다 보게 되었다. 내평생 이렇게 아름다운 것은 처음이었다.

점심 무렵에 동굴을 나왔다. 20루피를 주고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지옥에 들어갔다 나온 보디사트바의 사진이 들어있는 엽서를 구입했다. 귀찮은 녀석들이 날파리처럼 꼬여 관광 용품을 팔고 있었으며 어떤 일본 녀석은 100 루피나 주고 엽서를 사고 있었다. 요지경이다. 콜라를 마시면서 인도인들과 농담 따먹기를 했다.

짜이 한잔 마시고 할일없이 빈둥대가가 반얀 트리에 기대 누워 잘가온행 버스를 기다렸다. 이제 시간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버스는 언제와도 상관없다. 버스는 문제가 아니다. 공기중에는 시간소를 무력화시키는 무엇인가 떠다니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발등에는 새까맣게 파리가 달라붙었다. 담배재를 샌들 밑에 뿌려두자 더이상 파리가 꼬이지 않았다.

14:10, 버스를 탔다. 파루다푸르 부근에서 버스가 서고 물 또는 음료 구입을 독촉하는 나이어린 삐끼가 탔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던 탓에 꼬마들에 둘러싸여 장난감이 된 기분이었다. 크리슈나가 보다못해 인도인에게 쫓아줄 것을 부탁, 결국 나갔지만 꼬마애와 우리 사이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인도인들의 장난기어린 시선은 기억할 만한 것이다. 아침에 인도가 만만해 보인다고 생각한 것이 한심스러웠다.

16:50 무렵, 잘가온에 도착. 인도인들은 아우랑가바드에서와는 다른 눈초리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오토릭샤를 타고 역 앞으로
향했다. 릭샤 왈라는 잎담배를 싸서 우리에게 권해 주었다. 거절했다. 그 자식은 오버차징을 하려고 했다. 크리슈나가 화가 나서 따지자 인도인들이 몰려들었다. 내가 5루피를 더주고 웃으며 헤어졌다.


기차 예약 시간이 애매했다. 5:45pm 보팔행이 있었지만 여덟 시간이 소여되었다. 다음날 2:00am이 있었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다. 우리는 몹시 피곤했다. 크리슈나는 발가락에 난 상처 때문에 발을 절었다. 피곤하니까 짜증이 났다. 새벽 5:50am 표를 되는대로 예약하고 역 근처에서 숙소를 잡기로 하고 슬슬 기차역을 빠져나왔다. 240 루피짜리 방에 커먼 배쓰였다. 두번째 간 곳은 140루피 짜리였다.

호텔을 잡아두고 거리를 거슬러 올라가며 크리슈나의 발상처를 치료할 약을 사기 위해 약국을 찾아다녔다. 크리슈나는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요오드와 붕대를 구입, 근처 중국 레스토랑에 들어갔으나 중국 음식은 없었다. 삶은 계란과 야채 수프를 먹었다. 크리슈나가 원치도 않는 밥을 나 대신 시켰다. 여행 내내 느끼는 것이지만 내게는 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기차표 예매부터 해서... 다소 갑갑했다. 나오다가 가방을 레스토랑에 둔 것이 기억났다. 웨이터가 가방을 들고 허겁지겁 쫓아왔다. 그는 팁을 요구했으나 파리 쫓듯이 쫓아냈다.

여관으로 돌아왔다. 룽기를 치마처럼 입고 웃통은 벗은 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복도에 단 한 대 있는 TV에는 인도인들이 얼이 빠진 채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시험삼아 거리로 나와보았다. 내 피부는 인도인들보다 희다. 담배 두 갑을 사는 동안 인도인들의 시선을 느꼈다. 밤이 되자 그들의 시선은 마치 먹이를 쫓는 짐승의 눈을 닮아 있었다. 정신 차리자. 인도는 만만한 곳이 아니다.

숙소로 돌아와 거울을 보았다. 볼 안쪽은 움푹 들어가고, 피부는 깔리처럼 검게 타들어가고, 입술은 석류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빛은... 살기를 띠고 있었다. 표면을 살짝 씌우고 있었던 위선의 껍데기가 돌아다니는 동안 자연스럽게 벗겨진 것 같다. 마치 등껍데기 살갗이 차츰 벗겨져 나가듯이. 응시를 여러가지 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초롱초롱하게 반짝이는 무수한 인도인들의 눈빛 속에서 그들을 똑 바로 쳐다보고 관찰할 수 있는 기회는 한국에서는 누릴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크리슈나의 상처는 다소 심각해 보였다. 오늘 특히 많이 걸은 탓인지, 아니면 마이신 알약을 뽀개 상처에 바른 탓인지 상처가 크게 벌어져 있었다. 상처를 밤에 열어두고 낮에는 닫아두라고 한 것이 빌미가 되어 말을 바꾼다는 핀잔을 들었다. 어쨌거나 내말에는 별 신용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을 터이니 그녀석 상처에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내 몸에 난 상처들은 희안하게 빨리 낳았다. 델리행 일정을 계산해 보았다. 다람살라까지 올라갈 일정 때문에 다소 조바심이 생겼다. 오늘은 여러 모로 짜증이 많이 나는 날이다.

8/19 05:30

일어나기는 4:00 쯤 일어났지만 크리슈나의 상처를 봐줘야 했기 때문에 5:30이 되어서야 호텔을 나올 수 있었다. 줄린 상태에서 서두르다가 짐의 일부를 여관에 두고 나온 것 같다. 스테이션에는 여러 트랙이 있었다. 마침 기차가 도착하고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방금 도착한 이 기차가 보팔 행이 맞냐고 인도인들에게 세 번을 물어 보았다. 마치 베드로처럼. 그들은 고개를 끄떡였다. 우리는 서둘러 기차에 오르고 오르자 마자 부족한 잠을 채우기 위해 바로 곯아 떨어졌다.

깨어나서 지도를 살펴 보았다. 지나치는 역 중에 보팔까지의 역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해서 옆 사람에게 물어보고서야 낭패감이 들었다.

중간에서 이타르시를 거쳐 동쪽으로 빠져 캘커타로 향하는 엉뚱한 기차를 탄 것이었다. 크리슈나와 나는 서둘러 다음 역에서 내렸다. 내리고 나서야 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 깡촌이었다. 외국인인 우리 주변을 인도인들이 둘러싼 채 떠날 줄을 몰랐다. 우리는 언어 소통을 위해 쇼를 했다. 그리고 기차역 근처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다른 인도인들처럼 땅바닥에 주저않아 반성의 시간을 가져 보았다. 이곳에서 진짜 인도인들을 보았다. 그들과는 영어가 통하지 않았다. 서너 시간을 한심스럽게 보내고 나서 오후 2:30분 경에 완행에 올라탔다.


이 완행기차는 달리는 거리가 10여 킬로미터 안팎에 불과함에도 이타르시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4시간 가량이나 되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몹시 피로한 상태였다. 자신의 실수 때문에 화도 치밀었고 기찻간에서 노려보는 인도인들에게도 화가 치밀었다. 일부러 완행의 한칸에 들어가 나를 쳐다보는 인도인들과 눈싸움을 벌여 몽땅 이겼다. 그리고 다음 칸으로 가서 욕설을 퍼부어 시끄러운 인도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어쨌거나 우리에게 다가와 시건방진 개소리를 늘어놓는 인도인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크리슈나는 그 동안 얌전히 앉아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혼자 길길이 날뛴 것이 후회되었다.

인도인에게 물어 열차가 도착하기 전에 그들처럼 열차에서 뛰어 내렸다. 인도인들의 태반은 완행열차에 무임으로 승차하는 듯 했고 플랫폼에 닿기 전에 재빨리 뛰어내렸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반은 거지꼴을 한 크리슈나는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눈빛이 사나웠다. 아니 크리슈나는 내 눈빛에서 살기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 살기는 나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군 옥수수를 질겅질겅 씹으며 흙탕물에도 개의치 않고 걸었다. 이곳에서도 인도인들은 외국인을 처음 보는듯 했다. 영어를 쓸 줄 아는 사람이 없어 버스 터미널에서 이 사람 저사람을 붙잡고 손짓발짓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인도에서는 무엇이든 서두르면 안되게 마련인가?


깡촌 및 이타르시에서 사람들의 친절 덕에 완행열차와 버스를 간신히 탈 수 있었다. 이타르시에서 보팔로 기어나왔다. 우기의 막바지였다. 고원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몬순의 마지막 빗줄기 속에서, 내 자신의 업보(배낭)를 짊어진 채. 똥과 알수없는 시체들이 둥둥 떠다니는 거리의 흙탕물 속을 휘적휘적 걸어갔다.

22:20, 보팔 역에서 내려 미리 찍어둔 굴산 호텔을 찾기 위해 걸음을 빨리 했는데 다리를 절룩거리는 크리슈나가 화가 났는지 같이 좀 가자고 악을 썼다. 인도를 그렇게 여행하고도 그 녀석은 이곳에서 겁을 집어먹은 듯 했다. 하루종일 길을 잃고 헤메다니면서 크리슈나와 나 사이에 긴장감이 생긴 듯 싶었다. 아니 내가 그에게 좀 친절하질 못했다. 워낙 오랫동안 혼자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데 무심했다. 나 혼자라면 아마도 훨씬 잘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이 나빠지고 이틀 동안 실수가 계속되자 묘하게도 크리슈나는 내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크리슈나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동행하는 것이 거의 실패했다는 것을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는 여행하기 좋은 파트너였다. 하지만 나는 누구와도 여행하기 불편한 파트너일 것이 분명했다.

굴산 호텔을 찾지 못해 호텔 램슨에 들어갔다. 매우 비싸 보였다. 바깥에는 비가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첫번째 방에서 나는 지독한 곰팡내를 피해 들어간 두번째 방은 TV가 켜지지 않았다. 그나마 깍아서 250루피나 했지만 가격에 비하면 방은 형편없다. 물이 나오지 않아 프런트에 대고 악을 썼다.

크리슈나를 남겨두고 바깥에 나가 판타를 사들고 왔다. 프런트에서 모기향을 얻어 올라오면서 따뜻한 물을 틀어달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기름이 없다고 우겼다. 그럼 기름을 사오라고 말했다. 그러겠다고 말했다. 지금 당장! 내 악랄한 본성이 자꾸만 드러나는 것만 같았다. 아니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서울에서 너무 위선적으로 착한 척하며 살아왔다. 방까지 따라온 보이에게 TV를 켜 보라고 또 악을 썼다. 그 자식은 나가면서 팁을 요구하는 눈치였지만 콧방귀를 뀌었다. 침대 곁에 달라붙어 말라죽어가는 도마뱀을 베란다 바깥으로 내던졌다. 침대 위에 기어다니는 개미 따위는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친근할 지경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베란다에서 비오는 소리를 들었다. 12시가 넘었다. TV 방송은 끝났다. 고작 20여분 남짓을 보기 위해 그 지랄을 한 셈인가? 웃음이 나왔다.

지금 일기를 쓰면서 크리슈나를 쳐다 보았다. 피곤한지 곧바로 잠이 들었다. 산치-비디샤-아그라 행을 검토해 보았다. 벌써 며칠째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벼룩이 있는 것 같아서 담배 가루를 물에 풀어 희석하여 온 몸에 발랐다. 몸뚱이 전체가 화끈거렸다.

오늘은 푹 자고 싶다. 뜻대로 되길.

담배 한대 피우자 보팔행 버스간에서 보았던 어둠이 생각났다. 보팔은 큰 도시였다. 하루종일 기차던 버스던 졸면서 왔다. 낮에 본 신문에서는 earth girls are easy가 방영된다는 기사를 보았다. 서른해를 살아오는 동안 익숙해진 문명을 느낄만한 유일한 것이었던 것 같다. 영화의 스토리를 생각했다.

8/20 11:00

잠을 푹 잤다. 오랜 수면 탓인지 머리는 개운치가 않았다. 크리슈나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방은 눅눅하고 곰팡내와 함께 무언가가 썩어가는 냄새가 풍겨왔다. 밤에 사기로 했던 몇가지 물건들(비누, 세탁가루, 라이터 오일, 모기향)을 사러 바깥으로 나갔다. 기차역과 버스역 사이를 오락가락 했지만 결국 호텔 앞의 노점상에서 비누와 담배만 사가지고 돌아왔다. 크리슈나는 깨어나서 상처를 치료중이었고, 바깥에는 비가 오기 시작했다. 스콜인 것 같다.

프런트에서 크리슈나의 비자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노인네에게 당신 문제가 아니니 신경쓰지 말라고 좀 심하게 대했다. 그래도 그는 무표정했다. 할아범은 비자기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 크리슈나의 비자 때문에 쉴새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할아범은 무비자 체류자를 자기 호텔에 두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기껏 비용을 들여 들어왔더니 이런 개떡같은 호텔이라니... 크리슈나에게는 비자 문제에 관해 알리지 않았다.

빗물을 보며 지난 8일간의 일정을 되돌아 보았다. 지난 8일 동안 숙소라 할만한 것은 단 하나밖에 없었으며, 그것조차도 도미토리였고, 운이 따랐을 뿐이었다. 생각해보니 크리슈나와 나는 되는대로 우왕좌왕하며 여행하고 있었다. 가이드북을 들고 오지 않은 것이 실수였을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크리슈나에게 기대 모든 것을 맡긴 채 뒷짐을 지고 느적느적 다니려고 한 것이 실수였다. 역시 혼자 다녀야 한다. 서바이빙 감각이 무뎌졌음은 물론이고, 평화가 보장되지 않았다. 아그라 행을 접었다. 크리슈나가 그리 간다 해도 같이 가지 않을 것이다. 아그라의 그 미친 놈이 지은 타지마할 같은 것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다. 이 여행의 목적은 틀림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일 터였다.

오후 2시, 호텔에서 나가고 싶었지만 크리슈나 치료 때문에 늦어지고 있었다. 비가 오고 있었다. 2:40쯤 체크아웃했다. 비가 잦아 들어가고 있었다. 크리슈나더러 비닐로 발을 감고 그 위에 양말을 신으라고 충고했다. 바깥의 흙바닥에 고인 구정물 때문에 감염이 염려스러웠다.

나는 체력을 완전히 회복했고 어제보다 낙천적이었다. 어쨌거나 정신을 차리면 나는 서바이벌에 관해서는 전문가 수준이었다. 첫날 맨손으로 먹기 시작, 음식점에서도 악명높은 local 빠니를 마셨다. 둘째날, 왼손으로 똥구멍을 닦았다. 세째날, 룽기를 입기 시작했다. 네째날, 간단한 힌디로 주문을 시작. 다섯째날, 삐끼와 거지떼를 한 손으로 쫓을 수 있게 되었다. 여섯째날, 거지들에게 손을 내밀어 1루피를 요구했다. 일곱째날, 하루는 쉬기로 했다. doing nothing.

크리슈나는 날더러 인도에 이렇게 빨리 적응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인도에 적응? 서바이벌 게임일 따름이었다. 나와 여행하는 동안 크리슈나의 시각은 조금씩 바뀌어 내가 아마도 전생에는 학승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크리슈나더러, 명상 수련을 한 놈이 어째서 약이 몸에 들어갔을 때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모르냐고 핀잔을 주었다. 명상이던 모든 마음에 관한 잡것들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볼 수 있는 정도가 되면 통제가 되게 마련이다. 통제란 자기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정도는 군바리 교육에도 나왔다.

식당에서 간단히 식사했다. 로칼 빠니와 짜파티를 계속 주문하자 점원은 외국인이 인도인들처럼 먹는 것이 워낙 신기했는지 우리에게 계속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다. 나나 크리슈나 녀석이나 여유를 되찾았고 서로를 향해 낄낄거리며 멍청한 인도놈들에 관해 농담따먹기를 했다.

17:45, 산치에 도착했다. 지금까지중 가장 좋은 버스를 타고 왔다. 버스의 앞대가리는 꽃치장을 해 두었으며 운전수는 제복을 입고 있었다. 비록 에어컨이 없고 지독한 매연을 뿜어대는 TATA 버스 였지만 의자에는 심지어 쿠션까지 있었다. 갑자기 호강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산치, 거리는 조용하고 깨끗했다. 멀리 스투파(탑)이 보였다. 보슬비가 솔솔 내리고 있었다. 1루피를 요구하거나 스쿨펜을 달라는 녀석도 있었다. 이 거리는... 인도답지가 않았다. 평화로웠다. 마하보디 소사이어티의 필그림스 레스트 하우스는 문이 걸려 있었다.

두번째 들른 곳은 340 루피를 요구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인은 바로 옆의 레스트 하우스를 추천해 주었다. 아줌마가 몇몇 아이들을 이끌고 우리를 맞았다. 240루피, 아침과 저녁 포함해서 240루피면 그리 나쁜 가격은 아니었다. 하이츠 풍의 아담한 가옥이었으며 매우 조용했다. 나는 눈이 뒤집혀서 240 루피를 주고 머물 용의가 있었다. 1층은 그닥 마음에 안들어 2층으로 올라갔다. 아줌마보다 아이가 영어를 더 잘했고 그래서 편했다. 아이에게 모기향과 씻을 물을 부탁했다.

시내를 둘러보러 나갔다가 경찰의 눈에 띄어 경찰서로 끌려갔다. 말은 외국인에 대한 인터뷰 였지만 꽤죄죄한 꼬락서니로 깡패처럼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우리 둘의 모습은 아마도 유난히 눈에 띄었을 것이다. 형사 두 놈이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우리 맞은 편에 앉아 서장과 우리가 주고받는 대화를 귀담아 듣고 있었다. 가능한 웃으려고 애를 썼다. 나올 때는 허탈해서 정말 웃음이 나왔다.

숙소로 다시 돌아와 짐을 풀고 빨래를 시작했다. 크리슈나는 다양한 비명소리를 지르며 발의 고통을 호소했다.

19:00 다짐했던 대로 시장에 들러 김치만들 꺼리를 샀다. 양배추, 열무, 마늘, 생강, 고춧가루, 소금. 그리고 대야를 아줌마에게 빌려 김치를 만들었다. 두가지 실수를 했다. 물을 너무 많이 부은 것과, 소금을 너무 많이 뿌린 것.

20:00 저녁, 전기가 나갔다. 어둠 속에서 플래시를 켜고 김치를 주물럭거렸다. 촛불을 켜놓고 주인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주인은 게스트 하우스의 요리사였던 자신의 아버지에 관해 자랑을 늘어놓았다. 집이 이 모양으로 인도적이지 않게 훌륭했던 것은 나름대로 그런 이유가 있었다. 이곳은 인도에 국빈이 찾아올 때 잠시 쉬어가는 별장같은 곳이었고 주인장은 이곳의 관리인이었으며, 일년 중 수백일이 비는 동안에 여행객들에게 방을 대여해 주면서 짭짤한 부수입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주인장은 반은 뻥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의 아버지는 럭나우의 왕을 대접했고 달라이라마를 바로 이 식탁에서 대접했노라고 말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는 이곳을 자주 방문하는 한국인이 있다며 그들이 남기고 간 방명록을 보여주었다. 그 방명록에는 한국인이 적어놓은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정신이 나가 있는 동안에는 몰랐지만(이렇게 좋은 숙소는 여행중 처음이었다) 방 주변을 둘러보니 염소똥이 즐비했다.

22:00, 저녁을 먹고 옥상 마당에 나가 바람을 쐬었다. 특별히 할 일이 없어 하늘을 보았지만 날이 흐려 별은 보이지 않았다. 0:00, 잠잘 채비를 했다. 크리슈나는 여러모로 헛소리를 하던가 아부를 했다. 그 역시 숙소가 마음에 들어서 마음이 소박해진 것 같았다.

8/21 9:00

메에메에 염소가 울어대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염소가 침대 시트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먼 나뭇가지에 까마귀가 앉아 울어대고 있었다. 방문을 열었다. 공기는 맑고 신선했다. 주인장이 간단한 아침식사를 가져왔다. 에그 스크램블과 기에 튀긴 짜빠티 한장, 그리고 푸짐한 짜이 한잔. 튀긴 짜파티는 흡사 파전처럼 생겼다. 주인장은 한국인들이 이런 걸 좋아하더라고 부언하며 어울리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에그 오물렛에는 양파가 있었다.

신음 소리를 듣고 방 안의 크리슈나를 보다가 나와보니 접시 곁에 까마귀가 앉아 음식을 노리고 있었다. 살짝 다가가자 통통 튀키며 접시로부터 멀어졌다. 뒷걸음질을 치니 다시 접시 앞으로 다가왔다. 산까마귀 한마리, 집까마귀 한마리. 파일럿을 들고 이것저것 들쳐 보았다. 평화로운 아침이다.

크리슈나의 상처를 본 주인장은 주술로 치료하겠다며 푸른 잉크를 가져와 상처를 둘렀다. 나는 주술의 효과를 알고 있었지만 크리슈나는 주술(마술)의 힘을 믿지 않았으며 나같은 이성의 신봉자가 어째서 주술을 믿느냐고 되물었다. 너는 의사도 믿지 않고 약도 믿지 않는다. 그래서 치료가 더딘 것이다 라고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의사의 치료중 적어도 30%는 의사에 대한 믿음 때문에 가능해진다고도 말해 주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주술사를 믿어야 한다.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닌 마음으로. 나같은 이성주의자도 살기 위해서 그런 따위는 알고 있었다.

근처의 자그마한 시장에 들러 비누와 옥수수를 사왔다. 옥수수는 레몬즙과 소금으로 버무린 것이었다. 그것과 짠 김치로 점심을 때웠다. 맛은 그럭저럭 참을만 했다. 크리슈나가 SF에 관해 이것저것 물었다. 날이 약간 지루했다. 크리슈나가 아파서 나 역시 집에 틀어박혀 책을 보았다. 배군에게 빌렸던 실마릴리온을 보다가 오후쯤 낮잠이 들었다. 개가 책의 겉장을 물어 뜯었다. 크리슈나가 녀석이 똥오줌을 질질 쌀 때까지 두들펴 팼다.


14:00, 탑을 보러 언덕을 올라갔다. 인도애들이 담배를 한대 줄 수 없겠냐고 해서 담배를 주었다. 녀석은 환하게 웃었다. 스투파는 볼 것이 별로 없었다. 수천년된 탑이지만 내게 세월은 그리 큰 의미가 없었다. 작은 폐허쯤? 관리인으로 보이는 작자가 돌벽의 풀을 뽑고 있었다. 그는 늙고 메말라 있었다. 관광객을 늘상 대해서인지 눈빛은 인간에 대한 옅고 무뚝뚝한 회의를 담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박물관에 들를까 했으나 관두었다. 언덕 정상에서 바라본 산치는 아담하고 평화로웠다. 인도 아줌마들이 마치 한국 아줌마들처럼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어디가나 이 광경은 똑같을 것만 같았다.

새로운 김치를 만들기로 했다. 오이에 마늘과 생강, 주인집에서 얻어온 고춧가루, 소금으로 오이소박이를 만들었다. 날이 더워서 어제 만든 김치도 빨리 익었고 이것도 빨리 익을 것이다. 그리고 등나무 의자에 앉아 거리 저쪽을 바라 보았다. 크리슈나는 그 반대편에서 아이들이 낚시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걸어둔 빨래가 말라가고 있었다. 시간이 산들바람처럼 흘러갔다.

16:00, 어떤 한국인 아가씨가 도착했다. 저녁쯤에 우리 방으로 놀러오라고 말해두었다. 바로 옆방이다. 그 아가씨 방에 불이
안들어와 주인집에서 전구를 얻어와 갈아끼워 주었다. 모기장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날더러 설치해달라는 건가? 무시했다. 그러다가 모기장 치면서 버벅대는 것을 도와주었다.

잔디라 불리는 아가씨는 4개월째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원에서 봉사를 하다가 고아에서 34시간 걸려 산치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새까만 피부에 바짝 말라 있었다. 특식을 먹기로 했다. 저녁값을 분담해서 300 루피짜리 백숙 반마리와 치킨 커리 반마리, 거기에 오후에 만든 오이김치와 시장에서 사온 삶은 달걀 셋, 그리고 시장에서 4 루피를 주고 사온 짜이 한잔을 곁들여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잠시 대화, 그녀는 그제서야 체크인을 했다. 그후로 줄곳 대화. 지겨워서 10:30분쯤 바깥에 나가 아가씨가 자기 방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렸지만 입담좋은 크리슈나가 잔디를 붙잡고 계속 애기를 하고 있었다. 몸이 약간 차가운 것이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다. 콘택 600을 먹었다.

8/22 10:20

아홉시쯤 아침을 먹었다. 오늘도 상쾌한 아침이다. 어제 모기향을 심하게 켜놓았던 탓에 목이 아픈 것이 감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해열,진통,소염제(?)를 되는대로 입안으로 쓸어 담았다. 크리슈나가 고통을 호소할 때 일부러 모른 척 했다. 그는 자기를 보살펴 줄 여자가 필요하다고 누차 호소했으며 어제온 여자애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꺼라고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하는 듯 했다. 두고 볼 생각이다.

잔디가 갖고온 두 권의 책(베르테르의 슬픔, invisible cities)중 invisible cities를 읽기 시작했다. 크리슈나는 그 나이가 되도록 괴테의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책을 읽다가 지겨운지 책을 내려놓고 떠들기 시작했다. 조용히 입다물고 책을 읽을 녀석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도시, 상상속의 도시. 마치 내가 지금 여행하는 것처럼. 마르코 폴로는 쿠블라이 칸의 영토를 돌아다닌다. 쿠블라이 칸은 자신의 상상력으로 한 도시를 머릿속에서 창조하고 그것과 같은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가를 묻는다. 잔디에게 이 책을 빌려준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문장이 아름다웠다.

13:00, 주인장에게 오토바이를 빌려 크리슈나를 바깥으로 끌어내려 했으나 오토바이가 고장났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잔디를 데리고 자전거 하이킹을 하러 가야 할텐데... 다소 꺼려졌지만 동행하기로 했다. 비디샤까지 10km,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달려가는 동안 적어도 200여번은 인도인들과 인사했다. 그들의 천진함은 저항하기 힘든 것이었다.

자그마한 중소도시, 비디샤의 골목골목을 헤멨다. 잔디를 앞장 세웠더니 같은 길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나는 이 애가 '날 잡아봐라' 식의 장난을 치나 했더니만 길을 잃고 헤메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디샤를 빠져나와 리드하며 우다이기리 동굴군을 향해 달렸다. 언덕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급경사에서 잔디가 자전거와 함께 굴렀다. 보기에는 큰 사고를 당한 것 같았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여자애와 같이 가는 것이 좀 불편했다.

잔디는 내가 동굴 속에 고여있던 다 썩어가는 흙탕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습을 놀라서 쳐다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신경을 덜 썼더니 잔디에게 다시 사고가 났다. 차를 타고 지나가던 인도인들이 멍청히 서서 잔디를 기다리고 있던 내게 그 소식을 전해 주었고 나는 걱정이 되어 달려갔지만 그저 자전거가 진흙창에 빠져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소들을 걷어차며 자전거를 몰았다. 한 꼬마가 귀찮게 달라붙어 스쿨펜을 요구했다. 30분쯤 참아주다가 무섭게 노려보았다. 아이는 겁을 먹고 떨어져나갔다.

내가 그리 친절한 편은 아니었지만 산치로 돌아오는 도중에 인도인 보부상 네놈이 잔디를 둘러싸고 추파를 던지는 모습을 보고 가이드를 해 줬다. 인도인들은 내가 험악한 인상을 짓고 쫓아가니까 무서웠는지 슬쩍 도망갔다. 자기 때문에 내가 걸리적 거린다는 걸 알았는지 포장도로가 나오자 돌아가는 길은 자기가 알아서 가겠다고 말했다. 잔디를 놔두고 나혼자 달려갔다. 그러다가 미안한 기분이 들어 중간에 자전거를 세우고 잔디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도중에 물을 마시고 자전거를 빌린 곳에 가보니 잔디는 아직 안 돌아왔다. 바나나등와 살구를 시장에서 사들고 숙소로 돌아오니 크리슈나는 자고 있었다. 살구를 먹어치웠다. 뙤약볕에서 감기 기운을 무시하고 달렸더니 몸 상태가 매우 안 좋다.

16:00, 한시간쯤 자다 깨보니 크리슈나가 깨어 있었다. 주인장이 와서 맥주를 마시라고 꼬셨다. 아니 잔디가 꼬셨다. 한 병에 75루피 정도, 주인에게 부탁해 맥주를 다섯 병 쯤 사왔다. 전기가 나가 촛불을 켜고 오이김치와 옥수수를 곁들여 맥주를 마셨다. 몸 상태가 영 안좋아 견디기가 힘들어 21:00쯤 먼저 눕기로 했다. 저녁이 그때쯤 도착했고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전거 타고 돌아다닌 것이 감기를 악화시킨 것 같다.

맥주를 마시다가 잔디는 취해서 잠들었다. 크리슈나는 발이 아파서 남은 저녁을 억지로 먹었다. 크리슈나는 잔디를 살짝 안았다가 내가 쳐다보자 겸면쩍은 지 얼굴을 붉혔다. 어지간히 여자에 굶주렸나 보다. 잔디를 안아 그애 방으로 옮겨 주었다. 잔디는 테레사 수녀원에서의 봉사활동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 듯 했다.

8/23 9:00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콧물이 흘러 나오고, 마른 기침도... 아무래도 감기약을 구했으면 좋겠는데...

11:00 크리슈나를 데리고 병원에 가기로 했다. 잔디는 비디샤에서 캘커타행 열차를 예매하러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비디샤 도착. 릭샤를 탔으나 이놈이 병원이 아닌 엉뚱한 곳에 내려주었다. 다시 릭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서 아우성치는 인도인들을 뚫고 크리슈나 대신 OPD카드(아마도 Operation dispatch)를 2루피 주고 만든 후 8번 방에서 진료라고 할 것도 없는 진료를 받고 인젝션 룸에서 주사를 맞게 했다. 유리 주사기를 알콜에 씻어 재사용하는 것이 매우 더러워 보였다. 크리슈나는 그 주사기를 보자 겁을 집어 먹었다. 프리스크립션에서 opd를 내밀자 바깥에서 약을 사먹으라고 말했다. 잔디와 크리슈나를 데리고 약국 앞에 앉힌 다음 약을 사느라 안되는 영어로 한참을 고생했다. 내 감기약도 샀다. 믿을 수가 없는 약이었다.

13:00, 릭샤를 타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캘커타 행은 없었다. 델리행 2155, 10:10pm(8/24), 228루피짜리 표를 구매하려 했다. 잔디는 영어를 잘 못 알아들어 거의 울상이었고 내가 대신 나서서 얘기를 했다. 표가 없었다. 버스 터미널로 릭샤를 타고 가다가 마음이 바뀌어 산치까지 곧장 가기로 했다. 50루피. 도착해보니 크리슈나 신발이 없어졌다. 릭샤를 타고 오는 도중에 떨어진 것 같다. 보팔에서 기차표를 예매하러 가는 잔디더러 슬리퍼를 하나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20:00, 아파서 미칠 지경이었다. 점점 감기가 악화되고 있었다. 혹시 말라리아가 아닌가 하고 스스로 점검해 보았지만 부합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냥 몸살이기다. 온 몸에서 열이 나고 근육 마디마디가 쑤셨다. 낮에 산 약은 역시 효과가 없었다. 크리슈나가 가지고 있던 라면 스프로 국물을 끓여 먹었지만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잔디는 돌아오면서 이래저래 먹을 것들을 사가지고 왔다. 잔디가 준 화이투벤을 먹고 이불을 주섬주섬 모아와 세장 덮고 땀을 냈다. 잔디가 수건을 물에 적셔 이마에 덮어 주었다. 잔디가 고마웠다. 역시 여자애들이 달랐다.

크리슈나와 잔디는 밤늦게까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고 나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잘 안되었다. 내가 몹시 아픈 것 같다. 지금 옆에서는 두 연놈이 히히덕 거리며 서로를 만지작 거리고 있다.

8/24 6:00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자꾸 깨었다. 엉뚱하게 이제는 허리까지 아파왔다. 바깥이 너무 어두워 fever에 의한 시력 상실이 아닌가 싶었다. 어떻게든 자려고 애썼다.

9:00, 식사를 하는데 무슨 맛인지 통 모르겠다. 크리슈나와 잔디는 스투파를 보러나갔다. 나는 열 때문에 반쯤 정신이 나갔지만 그들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자 감기약을 사러 시내로 갔다. 눈앞이 흐릿하고 온몸에서 심하게 열이 났다. 입안은 타 들어갔다.

거리가 잘 보이지 않았고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약국 옆에 붙어있는 조그만 진료실에서 의사를 만났다. 그에게 말했다. got a cold, fever, running nose, some muscle pain. 의사는 거의 죽어 들어가는 내 말을 알아듣고 프리스크립션을 써주었다. 약국에서 그걸 내밀고 약을 샀다. 복용방법이 다소 복잡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환타 한병과 빨래할 때 사용할 세제를 샀다. 어지러움이 점점 심해졌다.


12:00, 잔디가 캘커타로 떠난다고 말했다. 갈때 이름을 물었다. 어젯밤 나를 보살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힘이 없었지만 손을 잡았다. 크리슈나가 잔디를 바래다 주었다. 돌아와서는 포옹을 했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점심으로 계란과 바나나를 먹었다. 미란다를 9루피에 사왔다. 난 정말 생각없이 사는 놈이다. 자기가 사람인 줄 아는 개새끼가 방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그 녀석이 방 한구석에 누워 침을 흘리면서 잠들어 있었다. 달리는 꿈을 꾸는지 사지를 바들바들 떨었다. 엊그제 그렇게 얻어터진 후로는 우리 주위로 오는 것을 꺼려했다. 햇빛을 쪼이며 바깥에 앉아 있었다. 약은 서서히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지러움증은 여전했다.

17:00, 주인장이 방문해 언제 떠날 꺼냐고 물었다. 크리슈나가 귀후비개를 그에게 선물로 주었다. 일종의 match였던 것 같다.
방을 나온 때가 18:00, 노을이 멋지다. 옷을 잔뜩 끼어 입고 있었다. 아래는 반바지 위에 룽기를 입고 위에 긴팔 티셔츠를
입고 크리슈나의 땀복 상의를 입은 후 지퍼를 목 끝까지 채웠다. 몸이 으실으실 떨렸다. 버스에 올라 비디샤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고 짜이 샵에서 한 시간 반 가량 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인도인들의 희안해 하는 눈빛에 끼득끼득 웃어보였다. 어두컴컴하고 더러운 식당의 벽에는 시바의 새파란 얼굴이 걸려 있었다. 사원에서 중얼중얼 대는 사두와 신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육체가 와해되자 마음이 그것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22:45, 기차를 제대로 탈 때까지 자이나교 사람들과 대화했다. 꽤 친절했다. 목이 맛이 가서 대화를 제대로 하지는 못했다. 기차에 타자 마자 잠이 들었다. 다섯 시간, 여섯 시간, 땀을 흠뻑 흘리며 잠다운 잠을 잤다.

8/25 9:00


아침 무렵에 깨어났었다. 델리 변두리의 니자무딘 역에 도착. 기차를 타고 가면서 줄곳 대마초의 홍수를 보았다. 벌판에 물이 약간 고인 곳이라면 어디나 대마초가 우후죽순처럼 돋아나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침을 맞은 아이나 어른들이 엉덩이를 까고 들판에서 볼일을 보며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었지만 엉덩이를 까고 있는 놈에게 손을 흔들어대는 것은 다소 희안한 경험이었다.

신문을 보았다.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고 BJP와 Congress 양 정당간의 비방이 치열했다. 인구가 18억이 된 것을 자축하고 있었다. 햇살이 따사로왔다. 사람들에게 몇 번인가 물어 뉴델리 역으로 가는 로컬 트레인을 탈 수 있었다.

처음으로 인도 군인과 이야기를 해 보았다. 크리슈나는 소매치기를 당할 뻔 했다. 그에게는 훔칠 것이 없었다. 오랜 생각 끝에 우리는 아잔타의 석굴을 둘러볼 때 경찰에 맡겨둔 배낭이 그 때 털렸다는 것을 알았다. 경찰이 우리를 턴 것이다. 녀석들은 지능적으로 몇 가지 물건만 배낭에서 살짝 빼냈다. 그래서 오랫동안 우리가 털린 줄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크리슈나처럼 카메라나 카셋 따위가 없었다. 녀석들은 내 타월과 몇가지 상비약들 외에 털어간 것이 없었다. 크리슈나는 꽤 많이 털렸다.

뉴 델리역에 도착하자 마자 나브랑 호텔에 웨이팅을 걸어놓았다. 크리슈나는 하리라는 반라의 올챙이 배가 튀어나온 땅딸만하고 머리칼이 지저분한 한국인 아저씨와 포옹을 하고 있었다. 나브랑 호텔 앞에는 일본애들이 죽치고 앉아 뭐가 좋은지 낄낄 대고 있었다. 크리슈나와 내 차림은 그 꾀죄죄한 일본애들보다도 한참은 더 꾀죄죄했다. 나는 호텔의 냉장고에서 초콜렛과 콜라를 꺼내 약과 함께 입에 우겨넣고 우걱우걱 씹어먹었다. 감기가 낫고 있는 중이다. 일본애들은 나와 크리슈나를 신기한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수 년간 인도를 여행한 경험많은 여행자들처럼 보고 있었다. 하긴... 그간 외국인 여행자들을 숱하게 만나봤지만 우리처럼 꾀죄죄해서 무척 노련해 보이는 놈들은 없었다. 한 일본인 여자애가 추파를 던졌다. 이해가 안갔다.

하리인지 하는 아저씨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어쩐지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다. 여행객이나 한국인이나 인도인이나 나로서는 영 밥맛이 떨어지는 판이었지만 그는 좀 달라보였다. 크리슈나와 동양인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하다는 골든 까페에 들러 아침 겸 점심으로 치킨 초우면을 시켜 먹었다. 오랫만에 문명의 음식을 먹어보는 듯 했지만 맛은 별로 였다. 크리슈나는 이곳의 음식맛이 유명하다고 떠들었다. 먹는동안 korean guest book에 몇 줄 남겼다. 도착한 후 헤어진 고군과 배군 일행은 뭘 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고서점에서 Lonely Planet을 찾았다. 주인이 상태가 좋으니 450은 줘야 한다고 우겼다. 웃기고 있네. 삐끼들을 상대로 갈고닦은 흥정 솜씨로 300에 샀다.

꼬마 애들이 졸졸 따라왔다. 한 녀석과 장난을 쳤다. 그 녀석이 천진한 눈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영화배우를 닮았다고 말했다. 삐끼라는 생각이 들자 기분을 잡쳤다. 누구? 아르준. 아르준? 그래서 누가 내 이름을 물어보면 아르주나라고 대답하기로 했다.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신화속의 영웅... 푸훗. 인도에 온 후 긴장감이 많이 엷어져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인도에 와서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그건 비록 삐끼새끼가 말한 것이지만 내가 받아들인 이름이다.

돈이 모자라 환전했다. 나브랑에 가니 방이 났다. 100루피, 더블, 배쓰가 있었다. 아주 좋은 방이다. 운이 좋은걸까? 잠깐 바깥으로 나가 식사하러 갈 때 보아둔 email 서비스 가능한 곳으로 가서 편지 한 통 보냈다. 나브랑으로 돌아와보니 아무도 없다. 호텔 앞의 의자에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니 하리형과 말총머리, 크리슈나가 돌아왔다. 크리슈나에게 꾼 500루피를 갚았다. 하리형과는 금방 친해졌다. 그들은 돼지고기와 보드카, 커드, 과일들을 잔뜩 사들고 돌아왔다. 보드카라니... 기뻐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하리형 방에서 커드를 만들어 먹고 밥솥에 토마토와 미역과 감자와 돼지고기를 넣고 꿀꿀이죽 비슷한 것을 끓이기 시작했다. 한국 소녀 두 명이 잠시 방문했다가 떠났다. 돼지고기에 까라마조프 보트카 한병을 마시자 속이 다 흐뭇했다. 모자라서 고기를 더 사러갔다. 티벳인이 운영하는 가게였다. 이번에는 마늘도 잔뜩 사왔다. 늦은 시간까지 배불리 먹어 다들 더 먹긴 힘들었다.

하레 라마 호텔 라운지로 하리형을 따라 잠시 산책. 이스라엘인들이 점령한 곳 같다. email 서비스에 들러 신용카드 분실했음을 신고해 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사무실에 email을 보냈다. 라운지에서는 말총머리와 하리형이 체스를 두고 있었다. 음료수를 먹으며 조용한 저녁을 즐겼다. 그들과 인생과 사업과 여행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다. 하리형이 여행지를 조언해 주었다. 아마도 충고였을 것이다. 시베리아로 가라. 시베리아로 가게 될 것이다.

델리는 복잡하고 엄청나게 큰 도시로 보였고 모든 것이 신기했다. 하긴, 크리슈나와 내가 깡촌만 돌아다닌 탓이리라. 나는 더 술먹기가 싫어 먼저 들어가 자려 하다가 하리형 방에 들러보니 세 사람이 하시시를 하고 있었다. 몇 모금 빨다가 돌아왔다. 품질이 매우 좋았고 그래서 정신이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날리에서 이번에 경작한 하시시는 최고의 품질을 자랑했다. 내평생 그렇게 좋은 것은 처음이었다. 단지 하시시하려고 온다는 일본애들이 이해가 갔다. 방으로 돌아오자 예상대로 어슴프레 환각이 시작되었다. 패턴이 보였다. 에전에 지긋지긋하게 보아왔던 그것이었다.

크리슈나가 비틀거리며 돌아왔다. 그는 하리형이 하시시로 자신의 마음을 조정하려 한다는 어리석을 주장을 했다. 그의 환각 상태는 조금 심각했다. 명상이랍시고 하던 놈이니 알아서 하겠지 싶었지만 시끄럽게 굴었고 점점 상태가 나빠지는 듯 했다. 그에게 물을 잔뜩 먹이고 집중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정작 나란 놈은 명상을 중단한지 오래되었다. 녀석은 옆에서 아기처럼 잠들어 있다. 마음이 심란했다. 크리슈나가 길을 걷게 되면 이런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마야를 극복해야 한다. 녀석이 걱정스러웠다.

8/26 9:00

재빨리 일어나 카드를 확인해 보니 분실한 것은 삼성카드가 아니라 외환카드였다. 그래서 email을 한통 더 보냈다. 거리에서 담배를 사려고 돌아다니다 지쳐서 거리의 가게에 앉아 판타를 시켜 먹었다. 그리고 한 시간쯤 앉아 거리를 구경했다. 몇몇 외국인들이 길을 묻거나 아는 척 했다. 국적을 물으면 일본인인척 했다. 귀찮아서 줄곳 그래왔던 것 같다. 아니, 일본인인 척 하면 '한국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나쁜 짓을 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얍삽한 잔머리였다.

10:00, 크리슈나를 깨워 골든 까페에 가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겄다. 한국인 초짜 둘과 어제 보았던 두 여자가 함께 있었다. 무려 50달러나 주고 호텔에 묵었단다. 바보같은 녀석들. 나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그 초짜들은 내가 인도인인줄 알고 내 앞에서 한국말을 곧잘 알아듣는다는 둥 헛소리를 하다가 갔다.

하리형을 깨워 어제 먹다남은 돼지고기를 마저 먹었다. 여전히 맛있었다. 제대로된 고기를 먹어본 것이 얼마만일까?

골든까페에 있던 한국인 방명록은 무슨 사건기록부 같았다. 자신이 어떻게 인도인에게 형편없이 당했는지가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사기꾼이라는 그 인도인들을 만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코넛 플레이스 주변을 여러차례 뺑뺑이 돌며 내 구두에 똥을 던지고 잽싸게 달려와 shoe shine! shoe shine!을 외치는 놈을 만나 멋지게 엿먹이고 싶었다. 하지만 내겐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크리슈나가 포기하라고 말해주었다. 왜? 그는 말없이 내 몰골을 얼굴에서 발끝까지 훌터보며 낄낄거렸다. 하긴 사람들이 나를 인도인으로 알 정도였다.

한국 대사관에 가보려 했으나 시간이 너무 지나 말총머리와 함께 꾸따 미나르행 버스를 타러 코넛 플레이스로 향했다. 버스에 오르는 순간 한 여자가 소매치기를 하려는 것을 눈치챘다. 쪼개 보았다. 미소도 지어보였다.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겁을 집어먹었는지 황급히 내렸다. 꾸따 미나르에 도착했을 때 말총머리의 가방 지퍼가 열려 있었지만 그는 여행을 오래했는지 잃어버릴 만한 것이 없었다. 유럽에서 인도로 온 친구인데 다른 한국인처럼 시끄럽지 않고 무던해 마음에 들었다. 좋은 사진기를 들고 있었다. 멋진 복장과 가방을 들고 있었다.

외계인이 만들어놓은 것 같은 괴퍅한 건축양식과 특이한 시점 때문에 공원이 문을 닫을 때까지 잔디밭에 자빠져 멍하니 올려다 보았다. 나도 감동이란 것을 알고 있다.

저녁 어스름이 깔렸다. 경윤주씨 댁에 전화해 보았지만 찾아가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았다. 릭샤를 타고 파하르간즈로 돌아왔다. 30루피였는데 100루피를 내라고 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실갱이가 벌어졌다. 주변에 있던 인도인들이 릭샤 왈라를 거들어 주었고 우리편은 하나도 없다. 주위에 인도인들이 꾸역꾸역 모여 들었다. 화가 나서 셋이 배낭을 땅바닥에 던져두고 한판 붙으려고 폼을 잡았다. 셋이서 2-30명 하는 인도인들을 상대하려고 했는데 이상한 일이지만 인도놈들이 별로 무섭지가 않았다. 어떤 녀석이 중재를 해서 싸움이 무산되었다. 녀석들이 꼬리를 내리고 슬금슬금 주위로 흩어졌다. 괜히 기분이 좋았다.

하리형 방에 들르기 전에 돼지고기를 사서 끓이고 술을 마셨다. 인도에 온 이래로 이틀 연짱 호강을 하고 있다.

23:00, 할일이 없어 다시 하레 라마 라운지로 향했다. 크리슈나는 의자에 앉자마자 잠이 들었고 나 역시 하리형과 말총머리와 두런두런 대화를 주고받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굉장한 바람소리에 깨어보니 라운지에는 아무도 없었고 폭풍이라도 오고 있는지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브랑으로 돌아왔다. 이런 저런 애기를 하다보니 새벽 5:00가 넘었다. 영어로 잠깐 일기를 써 보았다. 거의 매일 영어를 사용하다 보니 술술 잘만 써졌다.

8/27 10:00

잠에서 깨자마자 크리슈나를 깨우고 샤워했다. 크리슈나는 이란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나는 윈드 자켓이라도 한벌 구하려고 코넛 플레이스의 바자르에 갔으나 마땅한 옷이 보이지 않았다. 맥도널드에서 환타, 물 한 잔, 햄버거와 밀크쉐이크를 먹었다. 맛대가리가 없었다.

누군가 등뒤에서 한국인이죠? 라고 소리쳐서 뒤돌아보았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여자애가 있었다. 나는 슬금슬금 그들을 피해 도망쳤다. 물 한 병 사들고 코넛 플레이스를 빙글 빙글 한가하게 돌아다녔다. 애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거나 삐끼들과 옥신각신 골탕먹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숙소로 돌아와 샤워하고 잠깐 눈을 붙였다.

14:00, 크리슈나가 대사관에 갔다가 돌아왔으나 허탕을 쳤다. 과일과 커드를 사와서 하리형 방에서 랏시를 만들어 먹기로 했다. 하리형 방에는 한국 여자 둘이 와 있었고 랏시는 맛대가리가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다람살라로 갈 채비를 했다. 낮에 email 체크를 위해 들렀을 때 고군이 다람살라로 온다는 메일을 보냈다. 말총머리와 크리슈나, 아가씨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나가다가 여권을 두고온 것이 생각나 다시 돌아왔다. 가장 중요한 여권을 두고 다니다니, 바보 소리를 들었다. 델리에서 너무 편하게 지낸 탓에 긴장이 풀어진 탓이리라.

크리슈나와는 이제 안녕이다. 뉴델리 역 앞에서 카시미르 게이트의 버스 스테이션으로가는 릭샤를 알아보았다. 이제는 왠간히 왈라들과 실랑이질에 익숙해져 왈라들을 데리고 놀았고 대부분 인디언 프라이즈로 끝장을 봤다. 성격이 잔인해진 것일까?

오늘 하루만 담배, 전지 따위 등으로 돈을 많이 썼다. 버스 스테이션에서 막 떠나려는 정부 소속의 딜럭스 버스를 세우고 잡아탔다. 343루피. 창가로 달려드는 상인으로부터 망고쥬스와 물을 샀다. 버스는 줄기차게 달렸고 옆에 앉아 있는 여행객이나 인도인들과 잡담을 늘어놓는 것도 지쳤다. 사람들이 빠져 나가면서 버스는 점점 한산해졌다.

어느새 밤이다. 버스는 한적한 어느 가게 앞에 잠시 정차했다. 깜빡 졸았던 것 같다. 환타 한병을 먹었다. 식사는 하지 않았다. 오줌을 누면서 아름다운 달을 보았다.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날씨가 차츰 선선해 지고 있었다. 다음 정차때 노상에서 따뜻한 짜이를 한 잔 마셨다. 버스에는 거의 사람들이 남아있지 않았다. 졸다 깨다 하면서 시시각각 변해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인도의 자연은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변화무쌍하며 아름다웠다. 비좁은 한국의 '금수강산' 따위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17:45, 델리를 출발해 23:15 찬디가르 도착, 6:00am 다람살라 도착 예정. 구불구불한 산길로 접어들면서 찬바람이 창틈으로
스며 들어왔다. 찬 바람 때문에 손이 약간 곱아 글씨 쓰기가 다소 힘들다.

5:40am, 깨어보니 운전수가 다람살라에 도착했다고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탑승객이 나를 포함해 둘 밖에 없었다. 새벽녁이라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날씨가 차가웠다. 따뜻한 짜이와 희안하게 생긴 빵 한조각으로 정신을 차린 후 물어물어 버스를 타고 맥로드간즈에 도착, 거리를 왕복하며 팔조 가킬 게스트 하우스를 찾았다. 가이드북이 있으니 이제는 헤메다닐 일은 없었다. 팔조르 가킬의 도미토리에 짐을 풀어놓았다. 외국인이 두 명 밖에 없다.

간단히 세수하고 박샤 방면으로 슬슬 걸어갔다. 중간에 목이 타서 환타 한 병을 마시고 산을 타고 올라갔다가 계곡에서 발을 식혔다. 시원하다. 산등성이로 올라갔다. 바위 위에 앉아 구름과 산을 바라보았다. 그림처럼 하얀 집들이 산 비탈을 따라 듬성듬성 늘어서 있었다. 바람결에 따라 창밖으로 커튼이 흔들렸다. 간단한 워드 프로세서 대용의 중고 노트북을 들고와 이런 공기맑고 평화로운 곳에 짱박혀 글을 써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글 하나 써서 책을 내면 적어도 인도에서 6개월은 개길 수 있는 돈이 나오니까. 내가 글을 쓰면 팔릴까? 아... 물론 힘들꺼야. 지금 시각 10:50. 샌들을 신고 선글라스를 끼고 뛰어서 돌아갈 생각.

티벳승이 길가에 앉아 있었다. 컴팩 선전에 나오는 녀석처럼 생겼다. 구두를 신고 벤치에 앉아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 말을 걸었고 티벳 불교와 아스트롤로지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가 도서관에 가 볼 것을 추천해 주었다.

16:35, 애기 상대도 없고(도미토리에 투숙한 외국인들은 어디론가 나가 보이지 않았다), 방이 너무 어둡고 추워 사실상 아무
것도 할 짓이 없어 거리로 나와 고서점 주변을 떠돌았다. Fear Principle이 140루피인데 계산해 보니 책값이 비싸서 사기가 좀 그랬다. 돈이 별로 없었다. 돈을 아껴야지 앞으로 10일은 버틸 수 있다. 현금은 이제 300달러 밖에 없고, 내 멍청함 때문에 카드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남은 돈은 2200루피, 고군을 만날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 친구에게 50달러 만큼 환급해서 꾸면 되니까. 정말 할 지랄이 없다. 밥 먹을 때까지 이렇게 노는 수밖에. 안되겠다. 책이라도 사야지. 지겹다 지겨워.

식당에서 도미토리의 옆 침대를 사용하는 일본인을 보았다. 뭘 먹나 궁금했으나 그다지 말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산책로를 따라 조깅을 했다. 치킨 텐툭을 25루피에 먹었다. 이게 '그들'이 말하던 수제비인가? 역시 할 짓이 없어 숙소로 돌아와 담배 한 대 빨고 책을 읽다가 그냥 잠들었다.

8/29 8:30

일찍 잔 덕분에 일찍 일어났다. 샤워 후 짐을 챙겨 박수 폭포를 구경하러 산책로를 따라갔다. 내 옷차림은 이곳 여행자들이 보기에도 개판이 아닐까 싶다. 한 티벳인이 자기가 한국에 갔다 온 적이 있다고 아는 척 했다. 그와 거리에 앉아 얘기를 주고 받았다.

거리에서 일본 여자애가 말을 걸었다. 일본인인줄 알았단다. 같이 올라가다가 살짝 빠졌다. 얼굴이 이쁘장했지만 왠지 내키지가 않았다. 뛰었다. 산책로 중간에서 원숭이들이 보였다. 돌을 살짝 숨겨 놈을 상대로 장난을 쳤고 자기 가슴을 펑펑 치면서 무척 약이 오른 표정을 지었다. 재미있었다.

박수 폭포 전의 힌두 사원에서 티벳승과 힌디인이 어울려 수영을 하고 있었다. 나도 끼어들어 수영을 했다. 물이 몹시 차가웠다. 힌두녀석들이 짓궂게 옆에서 물을 튀겨댔다. 인도인들은 배불뚝이 아저씨마저 애들같았다. 인도 아줌마들이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며 깔깔 거리고 웃고 있었다. 옷을 챙겨 입고(그래봤자 웃도리와 반바지만)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른쪽에 펼쳐진 계곡의 강 주변에는 티벳 승들이 펼쳐놓은 노랗고 빨간 장삼이 현란하게 펼쳐져 있었다.

폭포로 가는 길. 중간이 유실 되어 매우 위험해 보였다. 몇몇 여행객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길 앞에서 진행을 망설이고 있었다. 올라가는 걸 도와주자 서양 여자애가 이것저것 말을 붙이며 친근한 척 하며 추근덕거려서 다소 귀찮았다. 그 바보가 환타를 40루피나 주고 사려는 걸 말려 15 루피에 사주었다. 다리 근처에 한국인처럼 보이는 인간들이 사진을 찍고 있어서 피해갔다. 이런 곳에서조차 한국인을 본다는 것은 왠지 끔찍했다. 차라리 심심한게 나았다. 폭포 근처에 작은 못이 있었지만 가기는 다소 겁이 났다. 밑은 100여미터에 이르는 절벽이었다. 포기하고 거기 앉아있는 인도인과 얘기를 주고 받았다. 그는 한국인을 잘 알고 있었고 함께 히말라야에서 야영했다고 말했다. 얼굴이 참 잘 생겼다. 날더러 트랙킹 해 보고 싶은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고개를 저었다.

돌아오는 길에 한국인이 아는 체 하려는 폼을 잡길래 외면하고 길을 서둘렀다. 길 옆에 독일인과 그의 손녀가 얘기를 주고 받고 있었고 그들 틈에 끼어 몇마디 나누다가 독일인의 영어가 영 형편없어서 무슨 얘기를 진행하려면 2-3분씩 걸렸다. 내 영어도 별볼일 없어 대화는 웃음과 제스처를 빼면 공허해졌다.

길가의 황소들을 희롱해서 투우 비슷한 것을 했다. 황소들은 길길이 날뛰었고 그러면 재빨리 달아났다. 뛰는 일은 이제 자신이 있었다. 내 몸은 점점 튼튼해져갔다.

어제 갔던 인터넷 까페이 들러 메일을 체크해 보았으나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어제갔던 칼라시 호텔 밑의 티벳 서민 식당에 들러 어제 먹어본 국수를 다시 먹었다. 아줌마가 친절했다. 마치 한국의 시골 할머니처럼 생겼다. '가뚝'이라고 하는 것 같다. 영어가 불편하지 않을 만큼은 통했고 티벳인들이 친절해서 인도놈들과는 다른 맛이었다. '뚝바'는 그들이 먹는 수프 이름인듯 하다. 티벳 승들이 얌전히 앉아 고기만두와 고기 국수 따위를 먹고 있었다. 다람살라는 정말 할 지랄이 없을 때 짱박혀있기 좋은 곳 같다.

다람살라에 거주하는 티벳인들과 인도인들의 빈부의 격차는 눈에 띄게 심했다. 어쩐지 인도인들이 게으른 탓에 티벳인들이 상대적으로 부유해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티벳 사람이 인도인에게 박시시를 하고 있었다. 길 모퉁이에는 여러 거지들이 줄줄이 앉아 박시시를 요구하고 있었다.

13:00, 숙소 앞의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다. 비가 와서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12:00부터 1:00까지는 어김없이 비가 오는듯 했다. 비가 그치자마자 dal 호수까지 산책도 할겸 해서 뛰어갔다. 방금전 비가 내려서 인지 길에는 인적이 보이지 않았다. 한가한 소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고산지대였지만 숨이 금새 차거나 하지는 않았다. 호수의 물은 대단히 썩어 있었지만 물고기가 살고 있었다.돌아와보니 16:30 가량 되었다. 뭔가 먹으러 다시 식당에 들러 치킨 가뚝을 시켜 먹었다. 채식만 하다가 허기가 져서 죽을 맛이었는데 여기서 영양보충이란 걸 하나보다. 옥상에 올라가 몇몇 외국인과 담소했다. 저쪽 옥상에는 영국인들이 모여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올라오는 길에 다시 산책을 갔다. 외국인 여자애가 바위에 앉아 그림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니 프랑스라고 했다. 영어로 말할 때마다 힘겨워 했다. 잠깐 대화를 해 보았더니 티벳의 문화를 배우러 온 친구였다. 길을 걷다가 옆 침대에 누워있던 일본인을 만났다. 눈길을 주자 어쩔 줄을 몰라했다. 녀석은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하며 나처럼 산책이나 하면서 그저 빈둥대고 있는 것 같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미소를 지었다.

방에 돌아와 샤워하고(차갑다) 빨래하고 론리 플래닛을 쳐다보았다. 예상대로 가이드북을 안보는 바람에 나는 많은 것을 놓치고 있었다. 일본애가 돌아와 영 형편없는 발음으로 기타를 연주해도 되냐고 물었다. 지금까지 20분 내내 조율만 하고 있다. 오늘 쓴돈: 인터넷 30루피, 가뚝 20루피, 가뚝 25루피, 담배 10루피.

20:00, 계속 책을 읽었다. fear principle이라. 웃기기도 했다. SF로 치자면 별볼일 없었다. 문장도 별볼일 없었다. 일본애가 하시시를 한 것 같다. 눈을 붙이려고 시도하다가 잘 안되자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얼핏 보니 영어 관련 책이었다. 늘 침낭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쓰고 잤다.

8/30 7:30

회사 생활 할 때도 이렇게 빨리 일어나본 적은 없었다. 저녁 때마다 날이 흐려져서 별보기는 다 글렀고 해서 일찌감치 누웠다가 일찌감치 일어나 산책겸 조깅이나 하는게 당산일듯 싶다. 일어나자 마자 세수하고 짜이 한잔 마시고 티벳 라이브러리를 찾아갔다. 시장에서 산 사과를 먹으며 가는 길에 엊그제 봤던 일본 여자애를 또 보았다. 길 중간에 서서 카메라를 든 채 나를 쳐다 보는둥 마는둥 했다. 말을 걸까 하다가 지나쳐갔다. 이상한 일이다. 일본 여자애들이 나한테 관심을 갖다니? 거참.

길을 잃어 한참 헤메다가 친척을 만나러 카트만두에서 온 티벳인의 도움을 받았다. 그의 형이 티벳 의학 및 점성학 재단에서 일한다고 말했다. 히말라야에서 자라 씩씩하게 잘 걸을 줄 알았더니만 고갯마루에서 몹시 헉헉댔다. 아니면 이곳에 온 후로 내가 맨날 뜀박질만 해서 상대적으로 몸이 좋아진 것일까? 아니다. 나는 가난한 그보다 잘 먹기 때문일 것이다.

도서관에 들어가 잡지 두 권을 보다가 점심이나 먹을까 해서 나왔지만 그길로 맥로드 간즈로 돌아와 새로운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모모(만두), 레몬티, 흑빵 해서 38루피를 썼다. 배불리 먹다. 그로엔 호텔의 인터넷 까페에 들러 새로 도착한 메시지가 있나 살폈지만 없다.

오는 길에 비리 두 갑과 담배 한 갑을 샀다. 서점 앞의 아가씨들이 내 몰골을 보고 킥킥 웃고 있었다. 들어와보니 일본애가 기타를 치고 있다. 로망스를 쳐보려고 하다가 잘 안되자 때려치웠다. 잘했다. 이러다가 동물 행동 관찰일지가 되겠구나. 현재시각 13:42. 일본애가 간신이 용기를 내어 내게 말을 걸었다. 그 말 한 마디 해보려고 영어책을 보고 있었단 말인가... 두세 번 듣고 나서야 이 친구가 체스를 한 판 두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려고 이렇게 땀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체스를 두었다. 졌다. 그는 내가 체스를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쪽 팔려서 파일럿에 체스를 깔아두고 매일 연습이라도 해야할 것 같다. 일본애가 나갔고 나도 조금있다가 나갔다. 산책로에서 다시 만났다. 매번 산책로를 거꾸로 올라가기 때문에 사람들을 보기가 쉬웠다. 아침에 갔던 절간에 가볼까 해서 헤메다녔지만 제자리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노변에서 웅성이고 있었다. 달라이 라마가 도착하기라도 하나보다 하고 30분 가량 멍청히 기다렸다. 티벳인들이 종교적인 겸손함을 보이며 다소곳이 길가에 늘어서 있었다. 거리를 지나가던 암캐가 사람들의 발에 이리저리 채이며 쫓겼다. 식당도 문을 닫은 상태였다. 누군가 중요한 인물이 오는 듯 해서 물어보니 역시 달라이 라마가 온다는 것이다. 차창을 통해 그의 성안을 얼핏 보았지만 별 감상은 없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델리까지의 시간표를 살펴 보았다. 돈이 별로 없어서 이모저모로 망설이게 된다. 한잔할까 망설였다. 기념품 구매는 취향에 안 맞고 서점에서 파는 책들은 지독하게 비쌌다. 근처의 술집으로 향하기 전에 먼저 식당에 들러 램즈 텐뚝을 시켜먹었다. 산양고기라더니 더럽게 맛이 없었다.

인터넷 까페에서 하이텔에 게시물을 하나 작성. 술집에 들러 맥주를 시켜놓고 홀짝였다. 옆자리에 시끄러운 이스라엘 놈들(델리에서 시작하여 요새 자주 보는데 영 밥맛이 떨어졌다)이 앉아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한 이탈리아인이 자기 술병을 들고 내 자리에 함께 합석하자며 앉았다. 재미있는 친구였다. 내일 파티에 나를 초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시간나면 가겠다고 말했다. 이제는 대화할 때 문법 따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술 먹다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녀석들에게 닥치라고 한 것이 화근이 되어 싸움이 날 뻔 했다. 이탈리아 친구가 내일 파티를 같이 할 녀석들이라고 소개해서 밥맛이 떨어졌다.

집에 돌아와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21:30, 일본애가 일본친구들을 만났는지 나가서 떠들다가 돌아와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파일럿을 들고 황급히 밖으로 나왔다. 불빛 때문에 별이 잘 안보였고, 추웠고, 새벽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어 책을 읽다가 그냥 잤다.

8/31 9:00

약간 늦게 일어났다. 근처 짜이샾에서 짜이와 빵을 먹고 어제처럼 노상에서 파는 큼직한 사과를 하나 사 길가의 수돗가에서 씻어 먹으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어제 다소 무리하게 뛰어다닌 탓에 다리가, 특히 발목이 조금 아팠다. 도서관에서 라마의 일대기를 읽었다.

11:30쯤 바깥으로 나와 근처 까페에 물어 식당을 찾아갔다. 식당은, 베지타리안이었고 히멀건 계란 프라이 하나와 야채 모모를
시켜먹었는데 모모에서 맛살라 냄새가 났다. 기분을 잡쳤다.

도서관에 더 있다가(양놈들이 우글거리는 것이 어제 달라이 라마 때문일까?) 바깥에서 문을 잠그는 바람에 어이가 없어졌다. 세 시에 도서관을 닫는 줄은 몰랐다. 사람을 애타게 불러 간신히 열람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올라오는 길에 비가 내릴듯 하여 서둘러 오르막길을 뛰는 바람에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거지같은 차림의 일본인 삼인조가 비틀비틀 비를 맞으며 걷고 있었다. 거리는 비오기 전의 안개(구름) 속에 휩싸여 있었다. 환상적이었다. 샤워를 했다.

아직 비가 내리고 있다. 천둥소리가 들린다. 14:44. 인터넷 까페에 들렀다가 내일 표를 예매할지를 결정해야겠다. 빨래가 며칠째 잘 안 말랐다.

15:00, 책을 읽고 있는데 누군가 우산을 쓰고 게스트 하우스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고군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고군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잠깐 얘기를 나눴다. 그는 언덕 밑의 레이디스 벤쳐에 묵기로 했고 방금 전에 도착했다. 한국인들과 줄곳 돌아다녔던 것처럼 보였다. 옷이 무척 깨끗했다. 20여일 만에 같이 온 일행중 하나를 만난 것이다.

고군에게 거리를 잠시 소개해 주고 이곳에 와 있다는 한국인을 찾아 mbm에 가보았으나 한국인은 없었다. 내심 귀찮은 데 잘되었다. 맥주 네병과 과자를 사서 그의 숙소 옥상에 올라가 맥주를 들이키며 그간의 애기를 늘어놓았다. 전망이 무척 좋았고 비싼 방이었다. 아니면 내가 그간 너무 가난하게 여행한 것일까?

하늘에는 오랫만에 은하수가 얼굴을 내밀었고 히말라야가 제대로 잘 보였다. 맥주가 모자라 버스 스탠드 앞의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70루피 짜리 갓파더 스트롱을 시켜먹었다. 맛은 없었다. 숙소로 비틀거리며 돌아왔다.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문을 두드리자 일본인이 열어주었다. 그와 몇 마디 주고 받았다. 그는 곧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1개월째 이곳에 짱박혀 빈둥거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 친구들이 왔다고 말했다. 여행은 무척 오래했다고 한다. 같이 대화를 하기가 힘들었다. 그의 영어는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한국에 오게되면 나를 찾아오라고 했지만 정작 연락처를 안 알려주었다. 책을 읽는 둥 마는 둥하고 불을 껐다. 0:00 무렵이었을 것이다. 구름이 끼어 별은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9/1 8:30

어김없이 일찍 일어났고 어제 마신 맥주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버스 스탠드에 들러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어떤 외국인이 표를 못사 쩔쩔매고 있는 것을 도와주었다. 머리가 계속 아파서 짜이샵에 들러 짜이를 마셨다. 50루피짜리 지폐를 내밀자 잔돈이 없다며 거절. 그래서 공짜로 마신 셈. 다시 버스 스탠드로 돌아와 델리행 개인 버스를 예약했다. 20:30.

고군을 깨우러 가려는데 거리에서 우연히 만났다. 아침 먹으러 가잔다. 아침 먹을만한 식당은 호텔밖에 없었다. 3:50pm에 비디오샵에서 매트릭스를 한다는 것을 기억해 두었다. 고군을 데리고 이곳저곳 구경시켜 주었다. 사원을 돌 때쯤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기 시작. 할 일이 없어 비를 맞으며 고군의 숙소를 방문. 그는 누워서 시체처럼 자고 있었다. 잡담을 늘어놓고 따뜻한 물이 나오는 그곳에서 발을 씻으러 들어갔다가 자빠졌다.

고군에게 산책로를 가르쳐 주기 위해 길을 나섰다. 정상 부근에서 환타를 마셨다. 가이드와 함께 트래킹을 하러가는 것으로 보이는 서양 여행객을 만났으나 고군이 영 영어가 안되 대화를 하지는 못했다. 그들을 조용히 따라 나디로 향했다. 중간쯤에서 달 호수 쪽으로 내려왔다. 옥수수 구운 것을 5루피나 했다.

세인트 존스 성당 앞의 모지에서 묘비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성당에 들러 별볼일없는 스테인드 글라스를 보고 티벳어로 쓰여진 선교용 소책자를 하나 들었다. 하나님이 정의의 수퍼맨 복장을 하고 꼬랑지가 셋으로 갈라진 악마를 창으로 무찌르는 희안한 삽화가 있었다.

돌아오니 이미 16:00이 넘었다. 마지막 식사로 티벳 키친 레스토랑에서 치킨 가뚝을 시켜 먹었다. 그간 계속 먹었더니 느끼해서 그만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오히려 인도음식이 먹고 싶어졌다. 입가심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올라가는 길에 한국인 둘을 만났다. 간단히 인사만 하고 모른척 했다. 이스라엘 기자로 보이는 녀석이 길가던 나를 세워서 다큐멘타리를 찍는다며 이스라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당신은 인도에서 어떤 체험을 하고 있느냐 따위를 물어 보았다. 어제 이스라엘 놈들에게 성질을 부린 탓에 눈에 띈 모양이었다. 생글생글 웃으며 대꾸해주었다. 빌어먹을 자식들.

밀크 쉐이크와 바나나 케익을 먹고 짐을 가지러 올라갔다. 고군이 맥주를 사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맥주 한 병을 더 사들고 물이 발목까지 찬 그의 숙소 옥상으로 올라가 구름속의 희말라야를 보면서 한잔했다. 멋있다. 시간 맞춰 30분 전에 버스 스탠드로 가서 기다렸다.

황소를 가지고 놀았다. 후줄그래한 버스를 탔을 때 오줌이 마려워 할 수 없이 운전수를 닥달해 차를 세우고 오줌을 누었다.
중간에 깨어보니 인도인 어깨에 기대 팔자좋게 잠들었던 것 같다. 나는 딜럭스 버스보다는 늘 타오던 완행 버스가 체질에 맞는 것 같다. 이쪽 좌석과 저쪽 좌석에 걸쳐 발을 쭉 뻗고 편히 잤다. 인도인들이 나를 깨웠다. 여자들이 있으니 자리를 좀 비켜 달라는 것이었다. 자리를 비켜주었다가 그들이 내리자 다시 발을 쭉 펴고 잤다. 버스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다니 천국같다.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사는 것이 어떨까 하는 여러가지 잡생각들이 떠올랐다. 고향에 돌아가봤자 나를 기다려주는 여자는 없었다.

9/2 8:30


델리 카시미르 게이트 앞의 ISBT에 도착. 릭샤를 타고 40루피를 주고(에누리도 안하고) 나브랑에 도착. 80루피를 주고 일 층의
무척 시끄러운 방에 싱글로 묵었다. 하리형을 깨워서 미안했다. 크리슈나는 말총머리와 함께 어제 이란으로 떠났다고 한다. 왜 일찍 돌아오지 않았냐며 내가 없어서 아쉬웠다고 말했다. 골든 까페에 들러 샌드위치와 환타를 먹었다. 사방에 한국인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을 구별하기는 쉬웠다. 방명록에 인도 병원에 관해 썰을 풀었다.

코넛 플레이스 근처를 헤메며 물어물어 찾아 ANA 오피스에 들러 리컨펌을 했다. 옆에 한국인에게 인사를 했다. 느적느적 근처를 돌아다니며 삐끼들을 놀리거나 인도 애들과 장난을 쳤다. 책방에 잠깐 들렀지만 볼만한 책이 없어 빈손으로 나왔다. 극장 근처에서 인도애들과 놀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하리형은 방콕으로 떠난다고 한다. 그는 나에게 암모나이트 화석을 맡기고 싶어했다.

돌아오니 새로온 한국 여자애가 하리형 방에서 고깃국을 끓이고 있었다. 맛이 없었다. 그애 역시 1개월짜리 단타였다. 곧 돌아간다고 말했다. 할 일도 없고해서 말아 피는 담배를 420루피나 주고 샀다. 인터넷 까페에서 시간당 50루피를 주고 icq를 하려다가 icq 다운로드 속도가 너무 느려 포기했다. 어제 만난 고군에게 꾼 50 달러로 2150루피어치 환전했다.


국을 끓여 먹겠다는 한국인 넷을 하리형 방에 남겨둔 채 샤워하고 할일 없이 빈둥거렸다. 거리를 돌아다녔다. 환타 한병, 골든 까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세제와 담배 두 갑을 사고 술을 사러 돌아다녔다. 인도 녀석과 담배를 교환했다. 중국에서 4년째 유학하고 있다는 한국인 아가씨를 만났다. 사람들이 그녀의 잘난척을 참고 들어주지 못해 비교적 조용한 나를 상대로 하염없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콧대높은 돌대가리처럼 보였다. 옥상에 올라가 누워 있었다.

9/3 10:00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배군이 도착했다. 이제 인도를 떠날 때가 가까워진 것이다. 호텔 앞에서 빈둥 대니까 주인장이 문을 걸어 잠그고 다니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내게는 훔쳐갈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대꾸 했다. 배군이 왔고, 비용도 아낄 겸 더블룸으로 옮겼다. 식사를 하기 위해 골든 까페에 들렀다. 하리형이 써놓은 메시지가 보였다. 에그 오믈렛과 치킨 수프를 먹고 까페에서 만난 박씨 아가씨를 데리고 코넛 플레이스의 ANA 사무실에 데려다 주었다. 배군의 항공일정도 조정했다. 배군과 나는 할일이 워낙 없어서 내셔널 뮤지움으로 향했다.

도중에 만난 릭샤왈라와 흥정하다가 담배 한 개피 주고 뮤지움까지 릭샤를 타게 되었다. 숙소로 돌아간다는 박씨 아가씨는 거래에 서툴러보여 파하르간즈까지 릭샤에게 10루피이상 주지 말 것을 충고했다.

인도역사에 관해 일천한 관계로 뮤지움의 전시물은 별 재미가 없었지만 무척 시원했다. 바깥으로 나와 환타 두병을 시켜 먹었다. 박물관에 들어갈 때 운전 면허증과 주민등록증으로 학생증인양 사기를 친 덕택에 수십루피를 절약할 수 있었다. 나무 밑에 앉아 쉬고 있을 때 새가 똥을 쌌고 한방울이 팔에 튀었다. 릭샤를 잡아 25루피에 흥정하고 파하르간즈로 돌아왔다. 박씨 아가씨와 방에서 수다를 떨었다. 4:10, 저녁을 먹으러 외국인들이 자주 들르는 것으로 보이는 식당에서 어니언 도사를 시켜 먹었다.

술가게를 찾아 길을 헤멨으나 3일간 크리슈나 축제 때문에 술집들이 문을 닫아 기분이 한심스러웠다. 찾다가 포기하고 돌아와 방에서 티벳 점성학을 공부하며 책을 읽는둥 마는둥 그간 여행하면서 경험했던 것에 관해 수다를 떨었다. 하리형에게 부탁해 술을 구할 수 있었다. 그걸 들고 하레 라마 라운지에서 마셨다. 같이 간 한 친구는 술도 안 마셨고 몹시 지겨워했다. 한국인들은 뭐든지 급한 게 탈이다. 인도 오면 그 버릇을 고쳐야 한다.

감자 튀김을 20루피 주고 먹었다. 담배를 사러 나갔다가 인도인들의 정치판에 쓸려들어가 그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며 골목을 돌아다녔다. 한 인도인이 내게 악수를 청했다. 선기유세 동안 고작 인도인 세 명이 죽었는데 의외로 평화로웠던 선거였다. BJP를 옹호하는 교조적인 힌두스탄 타임즈와 달리 타임즈 오브 인디아는 선거에 대해 약간의 '사실'과 '냉소적인 비판적 관점'을 써놓기도 했다. 선거결과는? 글쎄다. 나는 소피아 간디를 지지하고 있었다. BJP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녀는 인도인 남편과 결혼해 인도인 두서넛을 낳아 인도의 인구를 12억이나 되게 하는데 기여한 것 외에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단다. (그당시 힌두스탄 타임즈는 12억이 된 것을 경축하고 있었다. 참 재밌는 놈들이야) BJP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녀는 정치를 모르고, 그런 외국인을 끌어들인다면 클린턴을 인도 선거에 참가 못 시킬 것도 없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시골에서는 그저 간디 가문이라고만 해도 소피아 간디를 찍을 것이다. BJP의 로고는 사이바바가 들고 있던 오른손이었던 것 같다. 어디가나 사이바바의 그 띨한 표정이 담긴 초상화를 쉽사리 발견할 수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옥상으로 올라가 룽기를 깔고 누워 별과 구름과 유성을 보았다. 인도의 신화를 주제로 한 듯한 축제를 잠시 보고, 환타와 초콜렛을 사들고 옥상에서 놀았다. 몇몇 사람들이 더 올라왔으며 하모니카를 불었다.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샤워하고 잘 준비, 지금 시각은 0:15, 계단에서 만난 일본인과 잠깐 대화했다. 박양의 빡빡머리 동거남에게 책을 한 권 주고 한 권은 빌려주었다.


9/4 7:00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이번에는 고군이 도착. 잠을 더 자고 싶어 나중에 다시오라고 말하고 보냈다. 희안한 꿈을 꾸다가 일어났다. 어떤 녀석이 내게 템플릿을 두세방 쏴서 두들겨 팼다. 그의 친구, 가족들이 몇시간 후 들이닥쳐 나를 질질 끌고가 두들겨 팼다. 복수.

간단히 샤워하고 배군의 티켓 웨이팅을 확인할 겸 술을 사러 코넛 플레이스로 나갔다. 여전히 웨이팅이 걸려 있었고, 물어물어 술집을 찾아갔더니 오후 1시부터 문을 연단다. 근처의 wimpy에 들러 무려 98루피나 하는 햄버거를 먹으며 잡담을 늘어놓다가 한국인을 발견. 내키진 않았지만 그 친구와 합석하여 한 시간 가량 인도 여행의 정수에 관해 뻥을 쳤다. 박물관에 간다길래 데려다줄 겸 간패스로 내려갔다. 가는 길에 1루피로 네 사람이 릭샤에 구겨타고 박물관에 도착. 역시 1루피의 관람료만 내고 박물관에 들어가자 그 친구는 어안이 벙벙해진 것 같았다. 하긴 담배 한 개피나 1루피로 이곳을 왔다갔다하는 것은 베테랑도 못한다. 워낙 가난하고 빡세게 돌아다녔던 나같은 놈이나 하는 것이지.

릭샤왈라와 흥정하여 25루피에 파하르 간즈에 도착. 초짜 친구는 우리에게 거의 몸을 맡겼다. 그에게 골든 까페의 위치를 알려주고 바나나 랏시를 먹이며 잡담. 짜이를 사줬다. 그는 세계를 간다(일명 세계를 헤멘다) 같은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가이드북을 들고 다녔다. 고군과 배군이 이바구를 풀어 그의 일정을 조정해 주었다. 그 친구를 데리고 하레 라마의 테라스로 이동, 21:00 무렵까지 떠들다가 히말라야로 떠나는 그 친구를 배웅해주고 나왔다. 거리에서 한국어를 하는 인도인을 만났다. 이 녀석이 그간 이 거리에서 속여넘긴 한국인이 몇 명이나 될까 궁금했다.

나브랑으로 돌아와 룽기를 찾아 헤메다가 샤워. 물이 꿀럭이며 잘 나오지 않았다. 재빨리 비누칠한 몸뚱이부터 씻어냈다. 그전에 영희인지 하는 친구를 배웅해 주었다. 보드가야로 떠난단다. 23:00까지 놀다가 룽기를 찾았다. 방에 틀어박혀 론리 플래닛을 읽었다.

9/5 11:00

늦게 일어났다. 짜이 한잔 방으로 시켜놓고 배군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한국인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배군과 둘이 식사하러 어제 도사를 먹었던 곳으로 가서 간만에 탈리를 시켜먹었다. 또다시 담배가게를 찾아 헤메다가 인도인들이 살고 있는 거리에 들어섰다.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았다. 이런 곳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배군을 남겨두고 고군과 영화를 보러 나올때쯤 날이 몹시 흐려 있었다. 가게들이 모두 문을 닫았고 영화관은 무척 붐비고 있었다. 드라이 데이라고 술집에서 술을 팔지 않았다.

되는 일이 없어 숙소로 허탈하게 돌아와 배군에게 힌두교와 티벳 불교에 관해 떠들었다. 힌두는 경전을 완성하는데만 1500년이 걸렸다고. 1500년동안 지속된 한 여름의 무시무시한 폭염과 그에 어울리는 인도인들의 게으름은 경탄을 자아낼 만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날 내가 알고 있었던 파드마 삼바바의 가르침 대부분은 쓰레기였다, 티벳왕자와 결혼하기 위해 데려운 중국공주가 전해준 점성술 역시 쓰레기적으로 재해석했다. 사실상 서양것과 짱께것을 리믹스한 것이었다. 당신의 개같은 현생(그러니까 present life)는 당신의 개보다 더했던 전생에서의 발전을 의미하거나 당신의 개보다는 약간 나았던 전생의 후퇴를 의미한다는 점에서만 수긍할만 했다. 하지만 티벳불교에 대한 결정적인 불신감은, 달라이 라마의 머리통 주변에 반드시 있어야할 영롱한 할로가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불만족을 토로하고 있을 때 어떤 서양 친구가 충고해 주었다. 그를 보는 것과(마치 바위를 보는 것처럼) 그와 대화하는 것은 틀리다고 말했다. 대화? 생각했다. 대화에 대해 무척 많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전략과 게임, 그리고 약간의 유미적인 디스터번스를 의미한다. 훌륭한 대화란 결코 믿음과 화합의 하모니에 대한 리트머스가 아닌, 경쟁과 불일치의 아름답고 끊임없는 '희망적인' 변주를 의미했다. 30년간 적어도 6000종 이상의 생물과 대화해 본 개인적인 경험의 스펙트럼을 집대성 하자면, 어떤 시기에 이르러 대화의 무가치함을 가능케하는 지적,영적 지평선이 존재함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밥이나 먹을까?'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그러므로 내가 달라이 라마의 영적 신비스러움(his holiness)을 알아채기 위해 그와 대화할 필요는 없었다. 그와의 대화는 인간 족속의 두가지 부류랄 수도 있는, 빌리버와 언빌리버 정도를 구분하는 선에서 끝나고 말 것이다. 하물며 빌리버들도 중생들의 혼란을 덜어주기 위해 비밀을 유지하느라 사기를 치고 있다. Q: who am i? how shell i live? A: enlightenment. 영성을 다루는 잡지의 이런 빌어먹을 광고도 있다. seven stages of money maturity - understanding the spirit and value of money in your life, live a fulfilling ilfe both financially and spiritually. 영적 계류의 신비스러운 미묘함(?)에 대한 납득하기 곤란한 혼란을 느낀 나머지 도서관에 달려가 달라이 라마가 쓴 책을 몇 번 읽어보았다고 배군에게 말했다. 첫장에는 역시 예상했던 헛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티벨불교의 종교적 미묘함으로 인해 티벳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곤란한데, 그것은 영어와 티벳불교 양면에 정통한 사람이 없는 작금의 피치못할 상황 탓이란다. 하지만 상황은 개선될 여지가 충분히 있단다. 달라이 라마의 친필로 이렇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오리지널 부디즘은 그렇게 너저분하지가 않았다. 하여튼, 여러가지 추잡스러움을 뒤로하고, 부디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종교들이 피치못하게 세속적일 동안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즉, 붓다는 사정상 열반에 들기위해 그 짦은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몇 마디 남기지 않음으로서 품위를 유지했던 것이었다. 예를 들어보자. (종교적인 면에서 보자면) 부디즘은 다른 대부분의 종교와 달리 한 개인적인 삶의 sex-life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반면, 티벳불교는 탄트라를 언급하면서 그것이 불교의 커다란 지류로 메인스트림에 소속된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개뻥을 늘어놓았다. 누구와 자지 말라고 꼬치꼬치 지저분하게 언급하는 종교들의 경전은 다소 넌더리가 나는 것이 사실이었다. 붓다는 그점에 관해서 점잖게 입을 다물었다. 여자와 마음껏 자도 깨달음을 얻는데는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겠지. 부처의 위대한 자비심이 느껴졌다.

인도의 여성들은 카스트와 하잘것 없는 점성술로서 결혼을 결정지었다. 별점 따위로 결혼과 인생이 좌지우지 된다면, 당신이 자신을 우주의 어떤 지점에 놓았을 때 임의적으로 뒤바뀌는 별자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점성술은 예외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을까? 항성간 여행에서 태어난 아가의 피치못할 운명이란 무엇인가? 티벳불교처럼 달라이 라마가 만들어주는 스페샬 아물렛 하나로 어처구니없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일까?

불쑥 한국 여자애가 하나 들어와 같이 떠들었다. 여자애가 흥미를 느낄리 없는 종교 얘기는 이쯤에서 중단했다. 7시쯤 식당에 가서 에그 비리야니를 시켜먹으며 역시 노닥거렸다. 밤 11:00 까지 떠들었다. 할 일 없이 입만 놀리며 보낸 하루였다.

9/6 10:00

일어나자마자 세수하고 짜이 한 잔 시키러 나갔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소똥과 작은 동물들의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흙탕물을 개의치 않고 첨벙첨벙 걸어다녔다. 이젠 이런 것들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오늘은 dry day였고 술을 팔지 않았다. 릭샤왈라에게 그런 사정을 토로하고 그도 나와 공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나를 공짜로 숙소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배군은 나에게 삐끼를 다루는 궁극의 경지에 오른 것 같다고 말했다.

방에서 남은 돈과 물건들을 도네이션했다. 공항 택시를 부르고(200루피) 첵아웃 하고도 돈이 많이 남았다. 밥을 먹으러 사람들을 따라가 골목 곁에 있는 티벳식당에서 김치볶음밥을 흉내낸 음식을 먹었다. 배군을 림 레스토랑에 남겨두고 비를 맞으며 차를 사러갔다.

골든 레스토랑에서 눈여겨두고 친해졌던 삐끼를 따라가 차값을 알아보니 개당 100루피, 비싸보여서 흥정만 하다가 나왔다. 마침 잠깐 문을 연 씨킴 찻집에 들어가 50루피짜리 차를 세 봉지 살 수 있었다. 림 레스토랑으로 돌아와 음료수를 마시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브랑으로 돌아오니 우리와 함께 떠난다는 아가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브랑을 나올 때 거기 투숙하고 있는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 그저 빈둥대기만 했는데, 왜 박수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일본애들과 심지어 외국애들도 덩달아 박수를 쳤고, 우리와 함께 간다는 아가씨는 환영인파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인도를 떠나야만 한다며 신파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빈디가 붙어 있었고 빈디 덕택에 예뻐 보였다. 인도 남자와 정을 통했다는 소문을 어렴풋이 들었다. 나는 그녀가 아주 쉽게 인도를 잊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16:00, 차 바퀴가 덜그럭거리고 있었다. 여자애는 울다가 잠이 들었다.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재잘거리며 떠들 기분이 나지 않았다. 인도를 떠난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공항 입구로 들어가 간단히 짜이 한 잔씩 하고 이미그레이션으로 향했다. 짐을 검사하고 항공권을 보딩 패스로 바꾸고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해 면세점 상가에 도착했다.

문명이란 이렇게 휘황찬란한 것인가 보다. 탑승 대기실로 들어가려니 클레임 태그가 필요하대서 아나까지 갔다오느라 애를 먹었다. 탑승 대기실에서 잠깐 기다렸다. 여긴 TV도 설치되어 있었다. 비행기를 탔다. 보잉 777 기종이었다. 기내식은 여전히 형편없었고 게임에는 흥미가 안생겨 모세를 보았다. 인도를 떠난다는 것이 왠지 서글프기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