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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2.07.10 중국,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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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2.05.21 중국 사진 #1

중국, 베트남

여행기/Asia 2002. 7. 10. 19:33
전혀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중국인에게 뭔가를 간절히 묻고 있는, 중국어를 한 마디도 알아 들을 수 없는 한 한국인이 만나 필담을 나누지 않은 채 대화가 진행되는 과정은 대충 이렇다: 동상이몽 -> 동문서답 -> 마이동풍 -> 주마간산 -> 오리무중 -> 막무가내 -> 점입가경 -> 자포자기 (-> 오비이락).

베트남 여행이 통 재미가 없는데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읽으면 무진장 재미있게 다녔다는 듯이 써 놓은 글들이 많았다. 참 긍정적인 생각을 잘 한다고 생각했다(또 다른 이유도 있지만 사람들 비아냥거리는 것이 참 안 좋은 짓인 것 같기도 하다). 난 그저 긍정적인 생각도, 부정적인 생각도 잘 안 하려는 편이다. 어떤 나라에 가면 어서 빨리 그 나라에 적응해 섞여 들어가길 바라는 정도랄까. 그래서 수염을 밀고 머리를 깎기도 했다. 여행 중에는 할 일이 여행 밖에 없으므로 그 나라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다. 사람, 경제, 사회 정도. 그것 말고도 이 생각 저 생각 많이 했다. 그래서 여행자보다는 현지인과의 대화를 선호했다.

베트남의 명승유적지는 대체로 쓰레기 같았고 여행지로 볼 때 무척 황량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황무지에 하이에나와 콘돌이 어슬렁거린다. 길게 얘기해 볼까 하다가 귀찮기도 하고 내 말이 정말인지 확인하고 싶은 사람은 자기가 알아서 와서 보겠지 싶었다. 여행자라는 사람들은 가고 싶을 때 가지 말라고 말린다고 안 갈 사람들이 아니니까.

여행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되서 툭하면 바람난 미친년처럼 싸돌아다니는 여자들에 대해서도 뭐라고 안 한다. 그건 술 마시고 계집질하다가 인생 망치는 녀석에게도 나름대로 그의 인생에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비록 삐끼한테 속아 몸 망치고 돈 갖다 바치면서도 다시 거길 가겠다고 우기더라도.

로맨틱하다는 것은 약간 슬픈 것이긴 하다. 마치 트루게네프의 연애소설처럼. 에... 또는 트루게네프 같은 어떤 제비의 경구처럼. "상대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그 상대를 결코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즐겁고 재밌고 그렇게 평범한 여행은 어느 것이나 비슷해 보이지만 빡쎈 여행은 저마다 나름대로 각자의 사정이 있다고 톨스토이 만세가 말씀하셨다.

...

중국에서는 일이 잘 안 풀릴 때면 맥주를 한 잔 들이키고 '될대로 되라' 스피릿을 고양시켰다. 일이 정말 잘 안 풀릴 때는 맥주를 좀 더 마셨다. 베트남 와서는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사람들이 '상냥해서' 그 양을 4배로 늘렸다. 350CC 짜리 아주 맛있는 생맥주 한 잔에 한화로 120원 정도니까, 시원하게 그것을 들이키면 불가능한 일은 하나도 없었고 모든 일은 원래 되어야 하는 바대로 자연스럽게 진행되어 나갔다. 다시말해, 될 대로 되었다.

터덜터덜 걸어서 국경을 넘어갔다. 이전에 너무 잘 쉬어 배낭이 무거웠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걸으면서 왜 이렇게 재수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국인 만나려고 찾아간 한국인 게스트하우스의 도미토리에서 조차 홍콩인과 같은 방을 썼다. 뭐, 재밌긴 했지만, 그나마 그는 하루 묵고 떠났다. 그리고 내내 아무도 안 왔다. 아무도.

여행 내내 도미토리를 마치 싱글룸처럼 사용했다. 대여섯 명이 누울 수 있는 침대만 썰렁하게 남아 있었다. 중요한 정보를 얻으려 해도 그 루트를 간 사람이 없었다. 개척은 생각보다 피를 말렸다. 기차마다 3등이었고 타는 버스마다 3등이었다. 티켓을 그렇게 끊어주니 날더러 어쩌란 말인가. 서양애들처럼 트래블 에이전시를 통할까? 누군가의 말대로 그게 '어나더 이코노미컬 임페리얼리즘'으로 보이기도 했다; 값싼 나라에서 비싸게 여행하는 법. 참고로 내 여행의 모토는 이랬다.

값싸게 살자.

날 졸졸 따라다니던 프랑스 친구가 길에서 방금 먹은 음식을 토해냈다. 내 흉내 내며 꾀죄죄한 소수민족 틈에 끼어 값 싸고 비위생적인 식사를 했으니까. 그러게 니들은 분위기 있는 여행자 식당에서 바게트나 커틀렛 따위를 먹으며 안전하고 시시한 투어 버스를 탈 것이지. 임페리얼리즘 계속하고.

'제국주의자들의 영어'가 안 통하는 공산권 사람들을 붙들고 버스 터미널을 못 찾아 손짓 발짓 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버스 터미널 같은 것은 애시당초 없었다. `버스`라는 고유명사같은 것도 없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적당히 협상하고 오토바이 뒤에 앉아 산을 넘었다. 죽여주는 비포장 도로였다. 산기슭에 걸린 운무 속에서 비인지 우박인지를 아프게 맞고 홀딱 젖고 진흙 투성이가 되어 한 시간 반 넘게 달려 소수민족이 우글거리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하여튼 그 과정은 재미있었다.

소수민족이라면 입에서 신물이 넘어올 정도로 많이 봤다. 이들이 없어지기 전에 보는 것을 행운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비둘기 모이 주듯 소수민족이 파는 기념품 하나 사면서 그걸 미끼로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소수민족의 사진은 찍지 않았다. 그들은 천연기념물이 아니다. 왜 이곳에 와 보라고 했을까. 뭐, 나야 일정도 없고 가이드북도 없지만. 노래 한 곡:

이것 저것 아무 것도 없는 잡초라네~

옆에 앉아 있던 몽족 할아버지가 술을 권했다. 머루주같은 술이었다. 마시고 나자 강력한 '될대로 되라' 스피릿이 용솟음쳤다. 그래서 한 병을 다 비우고 삐끼들을 이끌고 함께 가격을 고민하며 거리를 헤메다가 전망좋은 방을 잡았다. 주인 아줌마가 한국인은 모두 잘 생겼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내 생각은 달랐다.

다르긴 하지만 잘 생긴 한국인은 그래서 7$에 한 층 전체의 숙소를 잡았다. 그리고 그 숙소가 그 나라를 떠날 때까지 묵었던 숙소 중 가장 비싼 것이었다 -- 잘 생긴 한국인은 화끈하게 돈도 잘 썼다. 침대에 레이스 달린 모기장이 있었다. 3면이 유리창이라 운무가 피어오르는 멋진 산을 3차원적으로 볼 수 있었다. 심지어는 fireplace마저 있었다. 풍광이 아름다운 베란다에 멍하니 앉아 왜 이리 재수가 없을까 곰곰히 생각했다. 멀리 산길을 따라 소수민족이 꾸역꾸역 지나갔다. 그들은 '관광 흐몽족'이었다.


베트남에서 묵었던 최고의 숙소.

여행 가이드를 하던 친구는 내가 태국 북부에 가겠다니까 적극적으로 말렸다. 인류학과 출신인데 내가 소수민족에 관심이 아주 많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여행 내내 인류학 얘기만 하게 된 셈인가? 우린 카렌족과 위구르 족의 진실에 관한 이야기와 최신 골상학에 관한 정보를 주고 받았다. 그와 나는 서바이벌 여행을 해보기로 결심하고 이메일 주소를 교환했다. 아... 소수민족은 정말 지겹다. 이제 왠간한 인류학도는 나하고 지식 면에서 쨉이 안된다. 예:

콜로라도에 사는 울분을 참지 못하는 소수민족, 인디언은 수십년전 콜로라도 강 유역을 돌려 달라는 소송을 연방정부에 청구했다. 대대로 물려받아 그들이 거주하던 땅을 백인들이 잔혹하게 빼앗았다는 것이다. 이제 좋은 세상이 왔으니까 계산을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냐?

그 와중에 한 과학자가 그 지역에서 뼈다귀를 몇 개 발견했다. 연대 측정을 해 보니 인디언이 살기 훨씬 이전에 들판에서 엉덩이에 창 맞고 아프게 죽은 '코카서스'였다. 아메리카에 백인 선주민이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신대륙이 발칵 뒤집혔다.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되고, pc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쪼다들도 많이 생겼다. (political correctness는 사내가 가져야 할 태도가 못 된다고 믿는 편이다) 뼈다귀는 군이 압수하고 더 이상의 과학적 조사가 금지되었다. 또다른 뼈가 발견될 우려가 있을지도 몰라 그곳에 돌과 부식토를 쏟아 부어 십수만 년 전의 증거(?)를 없애려 한다는 음모론이 나돌았다. 알고 그랬든 모르고 그랬든 군바리들은 실재로 그렇게 했다.

인디언이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는 영험스러운 땅의 현재 값어치는 천문학적이었다. 과학자는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그들 모두(인디언, 군 관계자, 정치가, 기타 이것저것 꼬치꼬치 쓸데없는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절규했다. 과학자는 사회 생활을 적게 한 탓인지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 소수민족도 남들처럼 먹고 살아야 하며, 복지생활을 누려야 하고, 문화생활도 해야 하고, 심지어는 투표권도 가지고 있다는 점. 중차대한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소수민족 마을에 티비가 있고 전화가 있고 그들 모두가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을 하고, 수공예품이라고 사기를 치며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을 팔고 있는 것이다. 하여튼 관광지 기념품의 유일한 내재 가치는 요새 이렇게 변해갔다:

왔다 갔다.

개중 아메리칸 인디언이 제일 고단수인데 그들은 '내비둬 정신'과 안먹어도 배부른 '영적 가치'를 장사수단으로 삼았다. 참고로, 내가 본 소수민족은 모두 가라오케에 지나치게 열중했다. 덕택에 몇몇 티베탄 가수는 요새 아주 잘 나가고 있다. 노래는 그저 그런 시시한 락 발라드임에도 불구하고 민속의상 입고 민속악기로 장단만 맞추면 희안하게도 불티나게 팔리는 것이다. 조만간 바이족의 비애를 담은, 랩송이 히트칠 전망이다. 아 인도식 찬트도 있다. 3000여명을 한 곳에 모아 놓고 하레라마를 부르게 한 후 테잎으로 떴는데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샴발라 썬과 엔라이트먼트의 정기구독자들, 메디테이션과 뉴에이지와 몸을 꼬는 요가가 장수에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하나씩은 테잎을 가지고 있다. 나도 어쩌다 수백곡을 가지고 있지만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느긋하고 희망적인 생각을 해야 장수 한다고 믿는 편이었다. 뭐 그런 시답잖은 서구 장르 음악 흉내낸 것들 말고 구닥다리 민속음악이 좋기만 하더라.

하여튼 정말 그들을 그들 모습대로 살게 하고 싶으면 인디언이 밥 먹듯이 하는 말, 그냥 좀 내비둬라. 조상이 묻힌 신성한 땅을 과학과 이성의 이름으로 그만 파헤치고 이상한 환상 갖지 말고 함께 문명을 만끽하도록 해줘라.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엉덩이에 창을 꼿고 돌아다니다가 비참하게 죽은 소수민족 코카서스의 진실은 하여튼 그러했다.

중국에서 소수민족을 하도 많이 봐서 나중에는 그들의 복식이 헷갈렸다. 어렸을 적에 복식의 역사 인가 하는 책을 보고 머리가 무척 아팠던 기억이 난다. 복식에 오랜 역사적 당위성 내지는 합리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순진한 소년이었다. 지금은 그냥 복식이 저렇게 희안한 것은 날씨 탓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공식적으로 중국정부가 인정한 소수민족은 25족, 실제로는 50여족 이상이 살고 있었다. 헷갈리니까 전부 통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중화사상이란 것이 그런 것인 것 같다. 한족은 전체 인구의 30% 밖에 안되니까 걔들도 소수민족이 된다. 한족으로부터 훌륭한 레이시즘을 배웠는데(자기들 말로는 '중국에는 인종차별주의가 없다. 왜냐하면 흑인이 없으니까.' 라고 하던데 한 한족 어른의 생생한 증언에 따르면, '소수민족은 머리가 나쁜 관계로 쓰레기 수거 정도나 시키면 좋다') 소수민족은 국가 운영에 방해가 되므로 없애 버려야 한다. 그러니까 한족의 씨를 말려야 한다.

길 가다가 잡아 세우고 상호 이해(동상이몽)에 바탕을 둔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다. 여관? 교통? 여기까지는 남들하고 똑 같다. 여자? 환전? 최근에 레파토리가 몇 개 더 추가 되었는데 아편? 마리화나? 였다. 여행자들과 얘기를 해보니 대체 어디서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느냐고 날더러 가르쳐 달랜다. 흠. 도대체 시도 때도 없이 골목에서 불쑥 튀어나와 이것 저것 제안하는 그놈들은 날 뭘로 보고 있는 것일까.

한 동안은 어떤 남자나 여자가 다가와 짝짝 손뼉을 쳤다.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하니 서 있으니까 '붐붐'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순식간에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그런 각성의 순간을 `아하 모멘트`라고 부른다. 거리를 걷다보면 나를 향해 짝짝 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이래서 으슥한 밤거리가 좋다. 최소한 나한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는 거,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다가 박수 부대를 만나 공황 상태에 빠졌다. 정신 차리고 살펴보니 연단에서 누군가가 연설을 하고 그에 호응하기 위해 박수를 친 것이다. 문화적 차이를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하여튼 거리에서 만난 다양한 종족의 삐끼들에게 가장 즐겨, 자주 사용했던 단어는 이것이었다.

노 땡쓰.

보통 30세가 넘은 남자는 삐끼나 창녀의 친절한 도움 없이도 뭐든지 알아서 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었다. 이를테면 절박한 상황에서의 암환전 같은 것.

암환전 하는 동안은 조마조마했다. 떡대 넷에 둘러싸여 으슥한 뒷골목을 한참 돌아 들어가 사방을 살피는 배달조가 들고온 달러를 세는 동안 잔대가리가 삼삼하게 굴러갔다. 은행 사무원들은 권위적인 말투로 환전 영수증이 없으면 환전해줄 수 없다고 해서 이렇게 으슥한 곳에서 뇌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피식 웃고 긴장을 풀었다. 한 놈이 돈 중 일부를 떼어 떡대 중 한 놈에게 건네주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 짐작에 그 놈은 사복 공안이다. 그래서 그런 말도 있지 않던가? 어디가나 경찰은 개새끼다.

지나가는 사람들 붙잡고 어제 한국 대 포르투갈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다. 한국이 이겼단다. 한국이 이겨줘야 어디 가서 한국인이라고 떠들고 특혜를 받을 수 있지. 이를테면 중국-베트남 국경을 넘을 때 미국비자 보고도 못 본 척 슬쩍 지나쳐 준다던가. 일본애들은 이겨도 미워 죽겠다는데야 어쩔 수 없지. 여긴 아시아잖아? 한국이 이긴 덕택인지 옆의 일본인들은 두 시간 내내 짐 검사를 하는데 나는 안 했다. 그런데 기쁜 소식을 전해준 이 친구는 장족 같은데. 장족이 술을 마시던가? 위족은 맥주를 마시고 백족은 아무거나 되는 대로 먹었다. 그들 모두 찢어지게 가난했다. 후족 젊은이들 대부분은 그들 지역이 관광특구로 개발되어 벌이가 짭잘해지자 양아치가 되어 있었다. 모습을 보면 영 골때렸다. 뒤통수를 한 대 치니 순박해졌다. 암. 소수민족은 순박해야 제맛이지.

토한다는 것. 설사, 배탈, 그리고 motion sickness(한국어로 뭐더라?) 베트남에서 역시 재수가 없어 10시간 기다리고 끊은 티켓은 그 멋진 컴파트먼트 베드가 있는 슬리퍼 티켓이 아니라 정말 잠 안 오게 생긴 딱딱한 공원 벤치 같은 나무 의자, 하드 시트였다.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아줌마는 세 번쯤 게웠고 그때마다 등을 두드려 주었다. 잠을 못 잤다. 새벽 2시쯤 먹은 거 다 토하고 나서야 아줌마는 잠들었다. 히죽 웃고 자다가 누가 흔들어서 깨어보니 아줌마는 안간힘을 다해 구토를 참다가 바닥에 쏟아 부었다. 그렇게 해서 결국 30시간을 자지 못했다. 그래도 토사물 냄새가 중국인 발 꼬랑내에 비하면 훨씬 상큼했다. 이후, 베트남 버스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토했거나 토하는 중인 장면을 목격했으며, 토하는 것이 버스 안에서 천천히 전염되어 웩웩 거리는 일종의 오케스트라를 형성하는 과정을 잠 못 자서 핏발 선 눈으로 목격했다. 구토가 멎으면 얌전히 내 어깨에 기대어 시들은 버드나무처럼 잠들었다. 닭과 거위들도 그제서야 잠이 들었다.

시속 45킬로미터로 달리는 초고속 버스는 밤이나 낮이나 건너편에 차가 있건 말건 앞에 가는 똥차를 추월했다. 그리고 밤이나 낮이나 건너 차선의 버스와 인사를 주고 받았다. 빠-앙(내가 간다) 빠빠빠빵(너냐? 나다) 빠앙 빵빵(굿 모닝) 빵 빵(빙신. 지금은 저녁이다) 중국 최고의 슈퍼 럭셔리 버스인 대우 딜럭스를 타보는 것이 소원 이었다. 그 버스에서는 닭똥 냄새도 안 날 것 같고 에어컨이 있어서 창문을 열고 다니느라 20시간만 타면 얼굴이 매연으로 시꺼매지지도 않을 것 같고 길 가는 아무 거위떼나 태우지도 않고 가끔 자다가 일어나서 차에서 내려 차를 밀어야 한다거나 퓨즈가 나가 차가 시동이 안 걸려서 비슷한 차가 지나가면 세워서 퓨즈를 빌리거나 어쩐 일인지 다 증발한 냉각수를 채우려고 계곡에서 물을 떠 올 때까지 무더위에 기다리거나 지붕에 얹어놓은 짐을 내릴 때마다 기어 올라가 짐을 고정시키는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오버 크라우드는 그냥 기본이었다. 45명 짜리 버스에 120명이 타고 다녔다. 난 그저 잠만 잘 수 있다면 무릅이 앞 의자에 닿고 커튼이 없는 창틀에 기댄 대가리가 엉망진창인 도로 때문에 심하게 덜덜 떨다가 멍이 들어도 별 상관 없었다. 아름다운 눈을 표현할 때 거위같은 눈이라고 했던가? 빌어먹을 버스 덕택에 옆에 무례하게 앉아있는 거위 눈이 참 예쁘다는 사실을 알았다. 조금 시끄러워서 몇 마리는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긴 했다. 그건 다 참을 수 있다. 다른 여행자들 중 그런 버스를 타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나는 모든 버스가 그런 줄 알았으며 수퍼 럭셔리 대우 디럭스 버스는 갑부들만 타는 줄 알았다. 늘 재수가 없다는 점, 그 점이 견디기 힘들었다. 버스는 그 정도고 기차는 매번 기차에서 내려 플랫폼을 빠져 나올 때는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18시간 동안 하드 시트에 앉아 옆에서 비비적거리는 고통스러운 인파를 헤치고 나올 때는 맑은 공기, 푸른 하늘, 살아있다는 환희, 자유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역시 다른 여행자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들은 최소한 하루 전에 표를 구입했던 것이다.

어딘가 구국의 칼이 묻혀 있다는 엑스칼리버적인 전설이 서려 있는 시내 중심가 호수에서(공짜니까) 다른 거지들처럼 자고 있는데, 누가 내 샌달을 훔쳐갔다. 한국에서 3년 전에 5000원 주고 산 것인데 거의 누더기가 된 그것을 왜 훔쳐갔을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한데 자신의 신발을 1$에 팔아 어떻게든 주린 배를 채우려고 애원하다시피하는 거지를 설득해(할 일도 없지 않냐?) 그의 신발을 빌려 신고 그에게 맨발로 시장까지 안내하도록 지시했다. 개중 가장 싸고 후져 보이는 쪼리를 1$에 사자, 거지가 왜 자기껀 단가가 7$이나 하는건데 싸게 파는 걸 안 사 주냐고 떼를 썼다. 니껀 헌 것이고 이건 새 것이잖아 임마.

하지만 얼핏 보기에도 그 거지의 헌 신발이 새로 산 것 보다는 나아 보여서 후회가 되었다. 그렇다고 체면에 거지 신발을 중고로 사서 신고 다닐 수도 없고... 벤치에 앉아 그 거지한테 동료 거지의 못된 짓에 관한 심정적인 연대 책임을 물어 담배를 뺏어 피우면서 신발을 업어간 새끼를 저주했다. 그는 뭐 그럴 수도 있는거지 하면서 내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우리는 0.0703125$짜리 바게뜨를 사서 사이좋게 나눠 먹으며 주변 거지떼와 함께 멍하니 호수를 쳐다봤다. 그 구국의 칼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거북이가 입에 물고 나타난다고 했다. 어쩌면 그 거북이 새끼가 나중에 구국의 샌달로 요긴하게 써먹으려고 업어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발 냄새 날텐데... 거북이란 동물은 생긴 모양도 웃기지만 참 엉뚱한 동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못된 거북이 생각으로 부루퉁해 있는 나를 향해 새 쪼리를 신은 내 모습이 참 어엿해 보인다고 위로해 주었다. 말하자면 힘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내 빵을 한 조각 뜯어 주었다.

소문으로만 듣고 있는 무이네 해변에는 모래둔덕이 있다. 한쪽은 사막이고 한쪽은 바다가 있고 그 가운데를 야자수가 갈라놓고 있다. 바람은 모래둔덕의 형상을 천천히, 그러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쉼없이 바꾸어 놓는다. 마음에 드는 완벽한 모래언덕을 찍으려고 사진작가는 뙤약볕에 땀을 흘리며 수많은 시간을 참을성있게 보낸다. 사진에 담을만한 그 완벽한 순간을 사진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Kodak Moment

겁나게 사진이 잘 찍힐 것 같아 보이는, 그 무게만큼의 금덩이 같은 코닥 카메라를 만져봤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왠지 고작 1200장 밖에 못 찍는 내 디지탈 카메라는 보잘 것 없어 보였다. 사진을 배우고 싶다. 망원 렌즈가 있었더라면 사람들의 표정을 아무런 간섭 없이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담을 수 있을텐데 하고 중얼거리자 카메라 주인이 즉시, 단호하게 충고했다. 일단 찍고 보고, 나중에 뺨 맞을 각오하지 않으면 사진 찍을 생각하지 말라고. 그렇군. 뺨 맞을 각오를 해야 되는군.

내 사진에는 사람이 없다. 자기를 찍으려는 카메라를 향해 웃는 사람에게 별로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뺨 맞기도 그렇고. 짐승들은 그 점에서는 참 좋았다. 하지만 20원이나 내고 방문한 동물원의 자이언트 판다는 멀리 한국에서 날아온 손님을 맞이할 생각은 안 하고 덥다고 엎어져 자고 있었다.

백족 뱃사공과 만났던 어느 늦은 오후가 생각났다. 햇살과 바람이 등을 떠밀던, 할 일 없는 날이었다. 그래서 지나가는 배를 잡아 탔다. 그는 아이가 둘이고 호수에는 청어, 백어, 황어가 산다고 주장했다. 그가 즐겨 마시는 술은 백주 였고 동네에서는 황주, 홍주, 백주를 판다고 주장했다. 마오타이주는? 유감스럽게도 마오타이 주는 백족의 역사와 무관했다.

그는 호수에 둥둥 떠다니는 오리떼를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중얼거렸다. 저게 다 내꺼요. 토탈 250마리지. 하루에 200개의 알을 낳는다오. 정말 다 당신꺼냐고 멍청하게 물었다. 내가 부르면 제까닥 집으로 돌아가지. 하하. 그러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오리는 물속에 고개를 쳐박고 생각에 잠겨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휘파람을 몇 차례 더 불었지만 생각을 마친 오리는 관심 없다는 듯이 다른 방향으로 유유히 흘러갔다. 백족 아저씨는 정열적으로 오리를 향해 뭔가를 중얼거렸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백족의 언어였지만 굳이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이쯤 된다:

개새끼.

엎어져 자고 있던 판다한테 내가 한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호수는 넓었고 그는 노를 놓은 채 오리가 250마리나 있으면서도 나한테 바가지를 씌웠다. 자기는 수영할 줄 알고 나는 수영 못했다. 못 주겠다고 우기니까 백족 언어로 (그들은 문자가 없다) 욕설을 중얼거렸다. 나는 문자도 있는 한국어로 분위기 있게 몇 마디 진실한 욕설을 했다. 살벌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그가 입을 다물었다. 그까짓 협박이야 나한테 통하지 않는다. 슬슬 어스름이 깔리면 아무도 못 볼테니까 목 졸라 죽이고 발장구 쳐서 가면 되니까.

3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는 흘러가는 노를 주워왔고 우리는 다시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맨손 오리 사냥은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썰렁한 중국 시 나부랑이 따윈 생각나지 않았다.

문득 판다가 그리워졌다. 판다의 엄지라는 책을 아주 오래 전에 읽었다. 그리고 스티븐 제이 굴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최근에 읽은 그의 책에서, 그는 자신만만하게 확률적 죽음의 그물을 빠져나온 자신의 투병 생활 얘기를 했다. 그는 강력한 이성을 지닌 암 환자였다. 그는 자신만만했으며 승리의 나팔을 불었다. 그런데 그는 그 암으로 죽었다. 기분이 씁쓸했다.

백족 아저씨랑 호수 한가운데에서 술이나 마시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어차피 이 호수는 제대로 흐르지 않았고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호수는 귀 모양으로 생겨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개뻥을 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중국인들이 그 호수를 바다라고 칭했다. 내 고향에도 바다라 불리는 강이 있었다.

소수민족은 먹고 살아야 한다. 조선족은 중국의 25개 소수민족 중 그나마 중국 정부로부터 우대를 받고 있었다. 자기들 언어를 갖고 있고 깨끗하고 근면한,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중국의 화폐중 가장 액면가가 낮은 화폐에 한복 입고 조선족이 등장한다.

한족은 공식적으로 애를 하나만 낳을 수 있다. 소수민족은 둘까지 낳을 수 있다. 그러나 밤에 할 일이 없는 시골(소수민족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이 전체 인구의 70% 정도라면)에서는 아이를 오리알처럼 꾸준히 생산한다. 그들은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 사회보장 번호가 없으며 국적도 지니지 못한다. 그들은 도시로 팔려간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정도로도 기꺼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중국돈으로 30원을 주면 그렇게 국적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한 어린 여자애 중 아무하고나 잘 수 있다. 그래도 고마워 한다. 돈 줘서 고맙다고. 걔네들 중 그나마 한달에 월급 잘 받아봤자 500원에서 1000원이다. 30원이면 나는 국수 여섯 그릇을 먹거나, 요리 네 가지 정도를 한끼 식사로 먹을 수 있다. 500원 받으면 그걸로 뭘하나... 4개월 푼푼이 모아서 핸드폰 산다. 분당 0.7원 하는 전화를 걸어 애인을 만들고 찢어지게 가난할 소수민족 생산에 박차를 가한다. 한 마디로 소수민족은 똥값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돈을 함부로 쓸 수 없게 된다. 그러니 맨날 거지같이 다니지.

조선족을 무수히 만나면서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은 한국인과 같은 문자, 같은 정서, 같은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중국인이다. 문화중 일부가 아니 어떤 부분이 어떤 정서가 미묘하게 다르다. 결론에 스스로 충격을 받았다. 중국이 훗날 어떤 치명적인 계기로 말미암아 소수민족 문제와 빈부격차, 이것들을 주도한 산아제한이라는 유명무실한 당 정책, 그리고 내부 권력투쟁으로 갈갈이 찢어져도 만주국이 생길 지언정 한국이 넓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느낀 그 불안한 '차이'를 다른 사람도 느끼고 있을까? 조선족은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

중국을 떠나기 바로 전날, 푸짐한 마지막 만찬을 갖고, 게스트하우스에서 마지막 샤워를 하러 샤워룸에 들어갔다. 옷걸이에는 누군가 잊고 간 특대 사이즈의 브라가 걸려 있었다. 장관이었다.

중국의 어떤 게스트하우스는 샤워룸이 유니섹스라 여자들이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샤워를 한참하고 있는데 옆 칸에서 여자들 말소리가 들려왔고 곧 이어 옷을 벗고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나오면서 그들의 몸에 난 털을 정성을 기울여 세심하게 그러나 무뚝뚝하게 슬쩍 쳐다보면서 나왔다. 아래 위로 훑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자 몸과 달리 여자의 몸에는 퀄리티를 결정하는 중요한 상수(변수?) 3개가 있으니까.

나오는 입구에서 건너편 문패가 보였다. Men 이라고 씌여 있었다. 뒤돌아서서 방금 나온 곳의 문패를 보았다. Women이라고 씌여 있었다. 그후로 한 주 동안은 꿈꿀 때마다 그들의 벗은 모습이 생각났다. 코닥 모멘트였다.

코코넛 모멘트라는 것도 있다. 어떤 해변에서 아무런 연장 없이 코코넛 먹는 방법을 드디어 발견했다. 해변에서 떼굴떼굴 굴러 다니며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가까운 야자수에 쌓여있는 코코넛을 보았지만 도끼가 없어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떼의 아이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마치 원숭이 같았다. 그들은 코코넛을 힘차게 바위에 던졌다. 간단히 말해, 존나게 바위에 두들기자, 코코넛이 갈라지면서 안의 액체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 반쯤 깨진 야자를 번쩍 들어 액체를 코와 입으로 사정없이 흡입했다. 그들의 흉부를 흠뻑 적시며 흘러내리는 야자의 달콤미적지근한 수액... 그리고 다시 존나게 코코넛을 두들겨 반 토막을 내어 안의 흰 부위를 손으로 마구 긁어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머리 속에서 전구가 번쩍 켜지는 순간이었다. 고구마를 씻어 먹는 백번째 원숭이가 된 기분으로 벌떡 일어나 코코넛을 깼다. 일순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잊을 수 없는 코코넛 모멘트였다.

보름달을 보았다. 호수와 야트막한 대지와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 속으로 거대한 보름달이 갑자기 떠올랐다. 카메라로 허겁지겁 그 광경을 담으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카메라의 성능이 별로 좋지 않았고 조작 기술이 한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장면을 마음 속 깊이 새겨 놓았다. 2002년 유월 이십사일 오후 일곱시 이십이분, 호수가 바라다 보이는 선선한 달랏, 일명 '사랑의 계곡'에 위치한 어떤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젊고 행복해 보이는 한국인 부부 여행자와 식사를 함께 하며 아름다운 달을 뿌듯하게 감상하다.

서술적 기억은 시공간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잡아내는데는 상당히 부족해 보인다 -- 말의 끊임없는 연쇄와 비유를 재생산하는 형편없이 비효율적인 공정이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지 않던가?

닥쳐!

베트남인들의 오버차징에 사정없이 당해 마음의 상처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오버차징에는 이유가 있었다. 베트남은 못 살고 너희들(외국인)은 잘 살기 때문이다 라는. 베트남은 매우 윤택한 자연 환경을 타고 났다. 그들의 생활은 궁핍하지 않았고 삶의 질도 높은 편이었다. 단지, 그들은 머리가 좀 이상했다.

베트남에 오기 전부터 베트남 사람들이 부지런하다는 말을 들었다. 새벽 5시에 이미 거리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 행렬과 밤 늦게까지 일하는 근면성, 그리고 몽골과 프랑스와 미제국주의를 물리친 그들의 강한 긍지와 자부심 등등. 그런데 그들이 정말 부지런한가 자세히 봤더니 별로 그렇지도 않았다. 새벽 5시에 일어나는 이유는 더위를 피하려고 선선한 새벽 일찌감치 일어나는 것일 따름이었다. 국토의 대부분이 동쪽의 바다를 면한 평지라 아침이 매우 빨리 찾아오는 탓도 있었다. 낮시간의 대부분은 다른 열대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별일 없이 흘려보낸다. 밤이 되면 시장과 거리가 다시 북적거린다. 사람들은 노천 까페에 앉아 맥주나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낸다. 남자들 대개는 할일없이 낮 시간 대부분을 그늘에서 놀고 있었다. 공사판에서는 여자가 삽질을 주로 했다.

동양의 대부분 국가들이 그렇듯이 베트남 여자들도 흰 피부를 숭상했다. 회족이 아니다 뿐이지 차림은 회족 처럼 온몸의 노출된 부위를 햇볕으로부터 철저하게 차단했다. 피부가 참 알맞게 잘 익으셨군요 라는 말을 베트남 여성에게 한다면 그건 틀림없는 욕설이다.

대부분의 가게, 음식점, 심지어는 여행 사무소 마저 여자들이 일하고 있다. 베트남 여성은 교육수준이 매우 높으나 대학을 나와 별로 할 일이 없어 글자를 받아 쓰는 사무실의 사서 노릇 정도를 하고 있었다. 사자의 사회라고 중얼거렸다. 아일랜드 친구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사자들 수컷은 놀고 암컷이 다 하잖아. 그 친구의 얼굴에 만족한 듯한 미소가 번졌다. 베트남 여성은 그런 식으로도 사랑 받았다.

베트남에서 사람들의 표정에 미소가 충만하다는 것은 그들이 별 걱정없이 행복하고 태평스럽게 살아간다는 증거다.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태국은 확실히 베트남보다는 덜 일하지만 아주 다른 이유로 베트남처럼 외국인 탓을 하지 않았다. 태국과 베트남은 비슷한 점이 참 많은데도 각기 다른 길을 걸어왔다. 하여튼 베트남이 못사는 마땅한 이유가 머리속에 떠오르지 않아 며칠을 생각해봤다.

이유는 정치에 있었다. 대내정책, 대외정책에서 베트남은 완벽하게 실패했다. 도이 모이(경제 개혁 정책) 이후 베트남은 자본주의의 가장 더럽고 치사한 탐욕 만을 수입했다. 다른 모든 국가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베트남은 사회 경제발전의 근간을 이루는 도로체계 조차 엉망진창인 나라다. 관료주의는 중국을 따라잡고 겉멋은 프랑스식이고 멍청함은 미국을 닮았다. 그래서 그들이 중국(몽골)과 프랑스와 미국을 이겼다는 자부심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권위있어 보이는 중국식 언어와 명명과 프랑스식으로 엉망인 거리 이름을 사용하고 미국 달러를 그들의 화폐와 동등하게 사용했다. 음식도, 문화도 그런 식으로 뒤죽박죽이었다. 그들의 화폐인 dong을 d에 강한 액센트를 주고 발음해 볼 것: 그들 화폐의 값어치다. 베트남은 그래서 아무리 좋게 봐도 개판이었다.

중국인과 친해졌다. 우리는 서로의 친연,가족관계와 월 수입, 집의 크기, 소유하고 있는 자동차 배기량에 관해 납득할만큼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한 후 이름을 교환했다. 그는 종이에 쓴 내 이름을 이렇게 큰 소리로 읽었다.

딩! 씨앙! 돈!

베트남인과 친해졌다. 우리는 노천까페에서 만나 서로의 가족 관계를 묻고 미혼 상태는 죄악이며 자식은 역시 둘이 좋다는 점에 합의하고 맥주잔을 부딛친 후, 서로의 이름을 교환했다. 그는 말로 알려준 내 이름을 이렇게 발음했다. 친근하게.

미스터 팅동~

그들의 이름은 각각 4성조, 6성조로 지빠귀 지저귀듯이 발음해야 하는데, 복잡해서 그냥 잊어 버렸다. 그들이 내 이름 만큼은 잊어줬으면 좋겠다. 장미의 이름이 그 모양이듯이.

베트남에서 `효도관광`중 처음 만난 한 한국인 아가씨는 이렇게 말을 걸어왔다.

맛있어요?

첫 인사 치고는 참 기괴했지만 입을 우물거리면서 이렇게 대꾸했다.

그럭저럭 먹을만 하군요.

그와 식당에서 밥 먹다 말고 한국전을 보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겼고,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아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축구 얘기는 5분 안에 끝났다. 피차 아는게 없으니까. 그의 전직은 약사였다. 나는 진화의학과 이브의 이동 원인에 관한 세 가지 흥미로운 주장들, 그리고 코카 콜라 유전자에 관한 얘기를 했다.보통 술집에서 친구들에게 그런 류의 얘기를 하면 얘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다들 쓰러졌다. 지겨워 하니까.

그에게 배우자 선택에 관한 재밌는 실험 결과에 관한 얘기도 했다. 그에게 내 주장, 그러니까 세상에 약은 세 종류 밖에 없는데 진통제와 항생제와 영양제가 그것이다 라고 하니까 맞다고 고개를 끄떡여 주었다. 그래서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될 때까지, 가게 주인 아줌마가 지쳐 잠들 때까지 즐겁게 얘기할 수 있었다.

문득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고 이 여자가 내 애인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이렇게 내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마치 내 뇌에서 뽑아가는 것처럼. 헤어진 다음에야 이름도 email 어드레스도 묻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맥주를 평소 보다 많이 마신 탓이다. 맥주를 많이 마셔서 평상시 보다 심한 '될대로 되라' 상태였던 것 같다.

나처럼, 아무도 흥미를 가지지 않는(그러나 흥미진진한) 과학 분야의 얘기를 하는 주인공을 어떤 소설에서 보았다. 소설의 작가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일본 이름은 너무 복잡해서 잘 기억하기 어렵다. 소설 제목은 `Go!`였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그는 '갈 데까지 가보자' 스피릿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조총련계 민단계 재일교포 2세로 하와이 이민을 잠시 고려하다가 무국적자로 남기로 작정했다. 소설은 사랑 얘기였으나 사랑 얘기는 시시했고 그보다 더 먹음직스러운 주제(갈 데까지 가보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화 되기도 했고 주연배우 이름 때문에(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영화를 보고 싶었다. 주연배우는 그 소설의 주인공으로 딱이었다. 주인공은 치킨 레이스를 즐기는 양아치였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즐기는 얘기가 날씨 얘기다. 스트랜저 대 스트랜저로 만났을 때 서로의 뻘쭘함을 없애려면 날씨 얘기만큼 환상적인 것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우리가 4개 국어로 모자라 손짓, 발짓을 사용하여 날씨 얘기를 하게 된 동기는 그것이었다. 폭풍을 온 몸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좋았던 원숭이 시절을 생각나게 했다. 피차 말이 안 통할 땐 날씨 얘기 같은 것은 할 짓이 못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몰디브의 어떤 환상적인 섬(수퍼, 양변기, 화장지로부터 해방된 무인도)에 함께 가서 아담과 이브가 되자고 꼬시는 메일을 써봤다. 그냥 장난이다. 나는 가고, 이브는 이브의 인생을 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여행은 걸음 걸음마다 목숨을 건 글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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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진 #3

여행기/Asia 2002. 6. 11. 19:06

구채구. 폭포.
 
구채구. 여긴 좀 춥다.
 
 
구채구. 티베탄 민박집. 
 
구채구. 티베탄 민박집. 
 
구채구. 타이거호수
 
구채구. 물레방앗간.
 
송판. 북문
 
송판. 성벽에서 바라본 도시 정경.
 
호스 트레킹. 가이드.
 

호스 트레킹. 내 말.
 
호스 트래킹 도중.
 
호스 트래킹 도중.
 
호스 트래킹. 캠핑 사이트. 해발 3500m.
 
호스 트래킹. 더럽게 차가운 시냇물. 바로 1000m 위에서 눈이 녹아 형성된...
 
호스 트래킹. 소수민족이 기르는 돼지들.
 
호스 트래킹. 소수민족의 마굿간으로 추측됨.
 
호스 트래킹. 캠핑 사이트.
 
호스 트래킹. 캠핑 사이트에 방문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수민족 여인.
 
호스 트래킹. 
 
호스 트래킹.
 
호스 트래킹.
 
호스 트래킹. 양.
 
호스 트래킹. 양. 이놈을 찍기 위해 6-70도의 가파른 비탈을 가시에 찔리며 '메에~ 메에~' 울었다.
 
호스 트래킹.
 
호스 트래킹. 
 
호스 트래킹.
 
호스 트래킹. 여기서 부터 눈이 녹아 흘러 작은 시내를 이루었다.
 
호스 트래킹.
 
호스 트래킹. 캠핑 사이트. 얼어붙을 정도로 춥다.
 
호스 트래킹. 캠핑 사이트. 얼어붙을 정도로 춥다.
 
쳉두에서 무단횡단 하다가 받은 딱지.
 
쳉두. 말타고 온 후 많이 탔다.
 
쳉두의 화려한 밤거리.
 
쳉두
 
쿤밍의 도심
 
쿤밍. 구름이 뒤덮은 듯한 도시.
 
쿤밍. 한심하기 그지 없는 박물관.
 
쿤밍. 박물관. 퓨마가 황소의 뒤에서 ... 하고 있다. 대체 뭘까.
 
중국에 온 인도 부처는 원래 이랬다.
 
중국에 온 인도 부처는 중국 음식 먹고 배가 나왔다.
 
이건 인도의...
 
그래 인도야...
 
쿤밍에서 세명의 호객하는 창녀를 만났던 광장.
 

따리

따리

따리에 비치는 구름과 햇살.
 
따리. 도미토리가 텅텅 비어서 이 넓은 방을 나 혼자 쓸쓸하게 사용했다.
 
쿤밍에서 만난 일본인. 꽤 많은 얘기를 나눴다.
 
따리. 박물관. 화장실 가는 길.
 
따리. 화장실.

따리. 박물관. 좀 더웠다.
 
따리. 박물관.
 
따리. 박물관.
 
따리. 박물관.
 
따리. 창산의 cloud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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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진 #1

여행기/Asia 2002. 5. 21. 18:27
인천항의 모습
 
인천항을 떠나며...
 
중국측 예인선(pilot)
 
텐진의 탕구항의 데까당한 모습
 
선두에서 바라본 탕구항의 일몰
 
텐진(천진) 역에서 찍은 상당히 정상적이고 멀쩡한 모습
 
천안문 광장... 여길 배낭 메고 돌아다녔다.
 
천안문에서 바라본 천안문 광장. 광장의 국기 개양/하강식은 중국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듯. 나하고는 상관없다. 국기 게양대 뒤는 마오쩌뚱 시체가 누워있는 마오쩌뚱 기념관으로 기억됨.
 
자금성(forbidden city)의 엔트리
 
중국인들의 건물 정문에 늘상 있는 괴수. 발바닥으로 밟고 있는 것은 세계
 
자금성의 가장 깊은 문을 통과하여... 영화속에서나 보던 바로 거기.
 
천안문 광장에 있는 인민무슨기념비. 이것 때문에 천안문 광장이 갑자기 작아졌다. 아무래도 대규모 집단 시위를 막으려고 광장 한복판에 만들어놓은 듯하다는...
 
천단공원의 무슨 제사 지내는 곳 같은데...
 
천단공원. 둘러선 벽이 회음벽(소리가 돌아오는 벽)
 
천단공원. 제사 지내는 곳. 앞에 모자쓴 애가 나랑 탕구역에 껌껌한 밤에 떨어져 벙찐 상태에서 함께 헤메다가 베이징까지 같이 온 친구.
 
베이징의 후진 지하철 내부에서 본 대중계몽을 촉구하는...
 
이화원. 인공호수 주제에 바람과 파도가 거세다.
 
이화원. 꽤 아름다운 사찰인데, 사진 실력 부족.
 
이화원. 장랑(long corridor). 각기 다른 그림들이 천정에 그려져 있는데 이거 쳐다보다가 목이 아팠다. 누워서 보며 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이화원. 여전히 실패가 돋보이는.
 
이화원. 아까 실패한 사진의 사찰에서 찍은...
 
이화원. 내 평생 강렬한 태양을 마주보고 편광필터 없이 이렇게 잘 찍은 사진을 처음.
 
이화원. 높은 사찰에서 바라본 정경.
 
이화원. 으...
 
이화원. 아주 잘 만든 청동 소다. 소 등위에 쓰여진 상형문자들..
 
베이징. 경극 관람중.
 
베이징. 경극 관람중. 제목은 아마도 river of the automn하고 silver snake의 하일라이트만 모아놓았던 것으로 기억남. 아크로바트.
 
빠따링(팔달령). 달리 말해 장성.
 
장성. 몹시 가파르다. 등산하는 기분.
 
장성의 총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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