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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1.19 제주도 여행 2/3
11/19

아내는 아침 일찍 게스트 하우스 식구들과 함께 나갔다. 어제처럼 늦잠을 잤다. 깨어보니 딸애와 나만 남아 있었다. 아이 밥 먹이고 할 일이 없으니 올레길이나 걷자.

게스트 하우스의 컴퓨터에서 네이버 지도를 열어 쇠소깍 가는 대중교통을 미리 알아두었다.

제주감귤
동네 어귀 돌담 너머 익어가는 감귤. 요새 한창 감귤이 무르익었다. 제주에서 한가하게 돌아다니던 기간 내내 감귤을 원없이 먹어봤다.

마을 앞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5번 버스를 기다렸다. 20분쯤 지나 버스가 도착했는데 아뿔사 지갑에 천원 짜리가 하나도 없다. 버스 기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근처 가게로 뛰어가 돈을 바꾸려고 했는데 가게에 주인이 없다. 손을 흔들어 버스를 그냥 보냈다.

다음에 오는 버스를 타고 서귀포 시에 도착하니 벌씨 한 시간이 지났다. 8번 버스를 타고 효돈중학교 앞에서 내렸다. 쇠소깍까지 한가하게 걸었다. 날씨 좋고 경치 좋다. 아이 데리고 하루 20킬로씩 걷는 것은 무리여서 10km 정도만 걸을 생각이다.

쇠소깍
제주도 와서(이번이 다섯 번째다!) 번번이 지나치곤 했던 쇠소깍(쇠:소,소:연못,깍:끄트머리). 용연도 마찬가지다. 저번에 제주도 자전거 여행할 땐 하도 비가 퍼부어대서(지난 제주 여행 네 번 중 비가 오지 않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여길 그냥 지나쳐버렸다.

쇠소깍 테우
쇠소깍(클릭=확대). 테우라 불리는 저 배는 무척 재미가 없어 보인다.

쇠소깍 카누
딸 애가 타고 싶어해서 바닥이 보이는 투명한 카약을 탔다. 아이 5천원, 성인 7천원, 합쳐서 30분에 12000원. 그러고보니 보트는 주욱 여자하고만 탔다. 다시 생각해보니 보트를 혼자 타거나 남자랑 타는 건 이상해 보일 것 같다. 여러 번 타다 보니 보트 젓는 솜씨가 좋아진 것도 같다. 그러고보니 마누라하고는 보트를 타 본 적이 없다.

쇠소깍
쇠소깍이 바다와 만나는 곳. 검은 모래는 현무암이 풍화된 것. 올레 5길이 끝나고 올레 6길이 시작된다. 여기서 숙소까지 6길, 7길을 줄곳 걸어가면 되는데 거리가 꽤 되어 중간을 건너뛰고 6길 중간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올레길 시작점에 있는 매점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쇠소깍에서 다시 효돈 중학교 앞으로 가서 8번 버스를 타고 서귀포 시내에서 내렸다. 바닷가쪽, 그러니까 남쪽으로 걸어가 정방폭포에서 시작. 뭐 이미 4km는 걸었는데 아이가 아직 멀쩡하다.

천지연 폭포
천지연 폭포 가는 길(클릭=확대). 중국인, 일본인 관광객 밖에 안 보인다. 한국 관광객들 다수는 아마도 올레길을 걷고 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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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교를 지나 새섬교 가는 길. 3:50pm 무렵.

새섬교
새섬교에서 시내쪽을 바라본 모습.  

새섬
올레길은 아니지만 새섬의 풍광이 훌륭했다(클릭=확대). 갯바위까지 펜스를 설치해놓았다. 올레6길이 서귀포 시내를 지나가는 것을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다. 정방폭포를 나와 서귀포 방면으로 틀어 천지연 폭포를 지나 새섬을 한 바퀴 돌고 외돌개로 지그재그 올라가는 것이 낫지 않나?

하여튼 올레길은 처음 만들어진 다음부터 조금씩 경로가 조정되었다.

범섬
아이가 지치면 무등을 태웠다. 무등 태우고 1-2km 걸으면 온 몸이 땀범벅이 된다. 무등을 탄 동안만큼 아이는 기운을 차리고 다시 팔짝팔짝 뛰어다니며 올레길 표지를 찾았다. 올레길 표지는 빨간색, 파란색을 함께 달아놓은 올레 리본, 사람 인자 모양의 올레 화살표, 제주 조랑말을 의미하는 간세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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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섬교를 나와 올레 7길을 걸었다. 멀리 보이는 저 범섬은 전체가 사유지란다.

외돌개
외돌개(클릭=확대). 5:20pm. 오늘 해 지는 시각은 5.17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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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돌개를 지나 돔베낭길을 걸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돔베낭길은 다섯살 짜리 아이도 지치지 않고 쉽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아이 때문에 올레 7길을 택했다. 나 혼자 돌아다녔으면 6,7길을 한 번에 주파했을 것 같다. 놀멍 쉬멍 가야 한다는 올레길 소개 책자에는 올레길 중 어느 길이 가장 아름다워요? 라고 물으면 어제 갔던 길이라고 말한단다.

해가 저물었다. 어두컴컴한데 등불 하나 없는 바윗길(일강정 바당올레)을 애 데리고 걷기는 무리라 잠깐 퇴근차량이 휭휭 지나가는 도로로 나와 걷다가 법환동 마을회관 근처에서 해안 올레길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일곱 시가 넘었다. 아이가 피곤한지 밥 먹고 씻자마자 곯아 떨어졌다.

아이를 재우고 아시안 게임 축구와 야구를 보다가 게스트 하우스 사람들과 막걸리를 마셨다. 별 안주 없이 김치만 먹었는데 김치맛이 워낙 좋아 술이 술술 들어갔다. 아내에게 얘기를 들어보니 도착한 다음날에 9코스를 아이와 걸었단다. 하루에 8km 정도는 충분히 걷는 것 같다.

어제처럼 푹 잤다.

11/20

아침에 일어났다. 어제 마신 막걸리 탓인지 다리가 무겁다. 오늘도 딱히 할 일이 없다. 게스트 하우스에 돌아다니는 강아지 이름은 '하루'였다. 하루만 맡아서 봐 주기로 했는데 어쩌다 보니 주인이 안 데리고 가서 하룻강아지가 되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중문 해수욕장 앞까지 픽업해 준단다. 아내는 게스트 하우스 사람들과 바삐 떠나고 아이와 나는 시작점인 월평마을이 아니라 중문 해수욕장에서 올레 8길을 계속 걷다가 대평리에서 아내와 만나기로 했다. 좀 이상한 휴가에, 가족여행이지만,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한 번도 티격태격하지 않고 넘어간 적이 없었는데, 아내와 여행 스타일이 워낙 달라 이렇게 따로 다니면 덜 싸우지 싶다.

중문 해수욕장
중문 해수욕장. 이렇게 보니 아름다운 걸? 십여 년 전에는 홧김에 소주 한 병 나발 불고 이 바닷가에 내려와 산 밑둥까지 덮쳐오는 폭풍을 향해 별별 욕설을 다 퍼붓고 혼자 발광하다가 다시 기어 올라가 비바람을 맞으며 꾸역꾸역 텐트를 세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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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아이와 여기에 다시 올 꺼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모래밭에서 놀다가 바지가 흠뻑 젖었다. 바닷물이 아직은 따뜻한 편. 귤을 까먹으며 햇볕에 바지를 말렸다.

하얏트 호텔
하야트 호텔 앞길이 사유지일텐데... 여기도 올레길인가? 의외다.

해병대길
해병대길 시작(클릭=확대). 아이 데리고 다니기에는 불편한 너덜지대. 아이 발이 작아 맞는 등산화가 없다. 사실, 하체와 발목 힘이 약해 등산화의 접지력만으로는 바위 사면에서 버티기 힘들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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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확대. 울퉁불퉁한 해병대길을 별 사고없이 지나고 마지막에 갯깍 주상절리(갯:바다, 깍:끄트머리)를 만났다. 경사가 완만한 동서 해안과 달리 남북해안으로 흐르던 빠른 속도의 현무암 용암류는 급속히 냉각되면서 주상절리를 형성했다. 중문 근처의 주상절리는 육각형 모양이지만 여기는 연필심 모양의 30~40m는 됨직한 수직 기둥을 형성.

해병대길
해병대길이 거의 다 끝나간다.

열리 해안길
열리 해안길.

논짓물 남자 노천 목욕탕
논짓물의 남자 노천 목욕탕. 여탕도 이렇게 생겼을 듯. 흘러내린 민물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수영장이나 목욕탕을 만들어 놓았다. 아이가 힘들어 해서 잘 걸으면 아이스크림 사준다고 꼬셨다. 물 마시고 아이스크림 먹고 준비해간 과자 따위로 허기를 달랬다. 나는 아침에 숙소에서 조금 떠먹은 미역국으로 버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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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만년 전 일이 절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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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확대. 온도가 낮고 점성이 큰 용암이 느릿느릿 해안으로 흐르면서 외부는 굳고 내부는 계속 흘러 외부 표면이 파쇄되고 밀려드는 바닷물에 펑펑 터지는 지옥같은 장관이 상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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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평리에 거의 도착했다. 길이 비교적 단순하고 표시가 잘 되어 있어 GPSr을 켜는 걸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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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만 돌아가면 대평리 마을이다. 카메라와 휴대폰 카메라를 번갈아 가며 사진을 찍었다. 팔자 좋다.

박수기정
박수기정 뒤로 산방산이 보인다. 박수기정 위는 사유지라 올레길이 돌아간다.

대평리 마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밥 먹을 곳을 찾다가 용왕난드르 음식점에서 보말국을 먹었다(보말=고둥). 특별한 감동(?)은 없고 성게미역국처럼 그저 그랬다(미역국이 다 맛있지 뭐).

아내가 숙소 주인장인 박씨와 친구인데(나도 옛날에 인도에서부터 안면이 있는 사람이고...) 대평리에서 집을 구입해 보수공사를 하느라 왔다갔다 하는 중. 옥상에 방수 페인트를 칠하기 전에 옥상 바닥을 쇠솔로 긁어 정리하는 작업 중. 아이와 나도 공사를 좀 도와주다가 대평리 마을 구경이나 할 겸 한가하게 동네를 돌아다녔다. 동네가 어느 모로 보나 장기 여행자들이 죽 때리기 좋은 외국의 어느 조그만 촌락을 떠오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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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귀에서 발견한 공사하다 만 집. 위치가 좋다. wuthering heights 같은 분위기도 마음에 들고. 뭐 하는 집인지 물어보니 주인이 미국에 가 있어서 거래가 안된단다.

빈둥거리며 놀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서귀포 emart에 들러 이것 저것 먹을 것들을 사고 숙소 마당에서 강아지와 놀다가, 숙소 손님과 함께 흑돼지 앞다리 살로 만든 수육과 굉장히 맛있는 돼지 김치찌게에 소주 잔을 기울였다. 마침 박씨 남편이 도착해 내일 두 가족이 함께 놀러가기로 했다. 숙소에 손님이 다 차서 우리는 월드컵 경기장에 있는 찜질방으로 이동했다.

제주 첫 여행 때, 지금은 4, 5, 6 코스라 불리는 올레길을 정처없이 걸었던 기억이 난다. 서귀포에서 표선 해수욕장 근처까지 열 댓시간을 아무 생각없이 해안길을 따라 걷고, 걷고, 계속 걸었다.

산티아고 길을 다녀왔던 서명숙이 제주 올레길을 기획했단다. 수도자들이 고생스럽게 장기간 동안 걷던 산티아고 길과 달리(내 취향) 한가하게 어기적거리며 걷자는 취지의 올레 길 사이에 딱히 유사점을 찾을 수 없으니 창조적 모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주도는 올레길에 힘을 쏟는 모양이다. 건강 트렌드와 제주행 저가 항공편까지 가세해 사실상 두 번째 제주 관광의 역사적 부흥기가 도래했다. 제주도를 일주하는 길이 모두 개척(?)되면 대략 300km 쯤 되지 싶다. 하루에 50km씩 물집을 터뜨리며 걷는 강행군을 한다면(12시간 동안 먹고 쉬고 걷는 것) 일주일 가량 걸릴 것 같다.

제주도에 온 첫 날부터 지금까지 줄곳 아무 생각없이 통나무처럼 잘 잤다.
이런게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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