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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w Road Part III

여행기/Asia 2002. 12. 7. 19:57
2002.12.20, 어젯밤에 보름달을 보았다. 크리스마스를 카스피해 연안의 작고 아름다운 도시에서 보낼 생각이다. 캐비어와 청어를 먹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캐비어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스픈으로 듬뿍 듬뿍 퍼서 식빵에 질펀하게 퍽퍽 발라 보드카를 곁들여 우걱우걱 씹어 먹는 것이다.

7개월 동안 돌아다닌 것 치고는 말끔한 편. 누가봐도 처음 여행하는 사람처럼 다니고 있다. 말끔하고 친근감이 드는 거지는 도움을 받기 쉽다. 이란에 오기 전에 가슴이 조금 두근거리긴 했다. 기대만큼 좋은 곳이었다. 곳곳에 'down with usa'같은 표어가 붙어 있어서 친근감이 들었다.

아프간 난민한테 시디를 선물받아서 기분이 좀 우습긴 했다. 아프간에 갈 수도 있었지만 완전히 황폐화되어 먼지만 날리는 곳에 가서 뭐하나 싶었다.

여행한지 7개월째. 여섯 번 째 모자를 잃어버렸다. 한국 생각은 별로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에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심한 거리감을 느꼈다. 강을 건너고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16000km쯤 되는 거리감이었다. 16000 킬로 미터는 항공시간으로 다섯 시간 거리다. 그러니까 다섯 시간 짜리 거리감이었다. 하지만 이동에 소비한 그 많은 낮과 밤을 생각하면 최소한 해가 삼십 번은 떴다가 지는 거리였다. 보름달은 일곱 번 보았다. 보름달을 볼 때는 늘 상황이 특별했는데 늘 아연 실색케 하는 광경이었다. 거칠은 파도 위에 떠오른 달, 이국에서 값비싼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을 때 떠오른 달, 히말라야에 떠오른 달, 카라코럼에 떠오른 달 등등 총천연색 스펙타클 돌비 디지탈 시네마스코프였다.

생일에는 미역국을 먹기도 했다. 7개월중 7개월은 화장실에서 한번도 휴지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단히 인상적인 회상은 아닐 듯 싶지만, 화장실의 변사에 관해 이제는 일종의 식견을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해 화장실에서 보내는 시간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과 전문가적인 식견. 동남아 가이들 조차 나보다 더 똥을 합리적으로 잘 싸지는 못할 듯 싶다. 아... 무슨 얘기를 한거지...

이방인이 살며시 다가와 which country are you from? 이라고 물으면 i'm falling angel from above. looking for a good man이라고 대답하는데 전혀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다.

미셀 투르니예와 장 클로드 반담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즐거워 했다.
그 점에 관해 언젠가 투르니예에게 편지를 보낼지도 모르겠다. :)

내가 이슬람이 된 것은 모스크에 있던 빌어먹을 놈의 농간이었다. 영예롭게도 이맘(?)이 물었다. 당신은 무슬람인가? 거짓말을 했다. 나는 무슬람이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파탄족 애꾸가 금장을 두른 두꺼운 코란을 건네주며 내 눈을 뚜러지게 쳐다 보았다. 자존심이 강한 사내였다. 이슬람은 기독교도를 같은 신을 따르는 형제로 생각했다. 그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청결하며 2차 대전 이후 전멸했다고 여겨졌던 사나이들이었다.

먹여 살릴 가족이 있는 사나이와 먹여 살릴 가족이 없는 사나이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 점은 분명히 밝혀둬야 한다고 본다.

파키스타니가 대답했다. 닥터 코지프를 만나시오. 내가 15kg짜리 그... 핵시한폭탄을 사겠다니까. 다라 마켓에서 psg-7을 220달러에 구할 수 있다. 파키스탄에서는 무기를 구하기가 정말 쉬웠다. 얼른 결혼해서 평범하고 시시하게 살아야지 하고 결심했다가도 국제뉴스를 읽고 현실감각을 되찾으면 악의 축, 부시를 제거해서 세계평화에 기여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가끔 들고는 했다.

away from crow road가 return to the old and fucking good place where our ancester still lives happily forever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날이 갈수록 정이 드는 작가인 이안 뱅크스의 소설 제목이 crow road였다. rory 삼촌은 인디아를 여행하면서 두 개의 폴더를 남겼다. CR I과 CR II였다. 인생이 재밌거나, 웃기거나, 고통스럽거나, 지루한, 그러면서 지속적인 여행 상태를 의미한다면 이것은 로리가 크리스티아니티와 문명을 버리고 스스로의 삶을 바꾸었던 까마귀 길의 세번째 파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문명권에서 실종 상태였다.

음...

아니면 미셀 투르니예와 장 클로드 반담이다.

-*-

정신이 다 얼얼해지는 뱅골만의 강한 파도를 맞은 후 무굴에 의해 도륙당했던 피 비린내 나는 역사가 적적하게 남아있는 함피를 지나 비자야와르에서 줄곧 마음 속에 담아두게 되었던 이례적인 축복을 신전의 사제로부터 받았다. 인도 최대의 IT 도시로 성장한 방갈로르에서 거리를 헤메고 화재와 번갯불로 잿더미가 되었다가 재건된 후 웨일즈의 왕자에게 패배하여 쫓겨난 비운의 마하라자 궁전이 있는 마이소르를 지나갔다. 패배한 티푸왕은 그러나 사나이였고, 마이소르는 맛있었다. 고대의 유적과 아직도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거대한 고뿌람이 있는 사원 도시들, 마말라뿌람, 꿈바꼬남, 깐치뿌람, 탄자부르, 스물 두 개의 우물에서 솟아나오는 성수로 66번 몸을 씻고 지성소에서 신의 세 가지 모습, creator, destructor, preserver를 만났던 라메스와람(사실 많은 사람들은 g.o.d 즉, generetor, organizer, destroyer를 더 선호했다), 그곳에서 수년 만에 처음으로 명상 상태에 놓였다. 마지막으로 극적인 형식미와 웅장함을 자랑하던 마두라이의 미낙쉬 사원에 이르기 까지 사원 순례를 반복했다.

종종 얼이 빠져서 사원의 사진을 찍는 것을 잊었다. 비힌두인은 출입할 수 없는 성소에 은밀히 들어가 들킬까봐 땀 흘리며 보낸 시간, 세계의 가장 높은 산 메루를 호위하는 웅장한 고뿌람, 삶이 그렇듯이 해가 뜨는 곳에 입구가 있고 해가 지는 곳에 출구가 있는 정방형의 사원들, 네 방위는 우주를 상징했다. 베다의 네 갈래를 의미하는 수천 년 전의 야자나무, 우주의 자궁 속에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성스러운 시바 링가, 회랑에는 현생에 살아 움직이는 영원한 신들의 부조가, 천정과 바닥에는 그들의 역사를 경배하는 성화가 있었다. 서쪽에 네크로폴리스는 없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었던 다신교인 힌두 신앙의 내면을 보았던 것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도시와 평원과 바람과 무더위는 계속 되었다. 기록적인 가뭄으로 우기에도 비가 안오는 말라붙은 땅을 지나, 뱅골만과 아라비아 해와 인도양이 만나는 깐야꾸마리에서 장엄하고 아포칼립틱한 석양을 보았다. 그리하여 석양에 관해 한 마디는 할 수 있게 되었다. 오! 달이 차오르는 꼬발람 비치에서 죽어가는 해파리와 복어를 보았다. 가끔은 강한 파도에 휩쓸려 사람이 죽어가기도 했다. 여러 자연 현상과 마찬가지로.

트리반드룸의 보행자 도로를 느긋하게 산책하고 다시 로칼 버스에 올라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고 검뎅이로 얼굴이 시꺼매지면서 피곤한 여정을 계속했다.

도시는 매연과 소음으로 가득차 있고 갓 들어온 문명은 이내 먼지에 뒤덮인 채 시간을 먹고 있었다. 꼴람, 알레피, 꼬친을 거쳤다. 께랄라 주는 수많은 작가들의 고향이었다. 께랄라 작가들은 종종 인도의 본질 운운하는 웃기는 서구 언론의 찬사를 받아왔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께랄라는 인도같지가 않다. 에르나꿀람에서 56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선잠결에 성스러운 강가 강을 건너 파트나에 도착했다. 빙하에서 시작된 기나긴 강가 강은 흘러가면서 여러 이름으로 불리었다. 강은 아무렇게나 불리워도 성스러웠다.

7시간 동안 날이 밝기를 뜬눈으로 기다렸다. 안개비가 어스름한 새벽을 축축하게 빛냈다. 어둠 속에서 버스를 잡아타고 여러 대의 트럭과 버스가 나뒹굴던 도로를 지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락사울에 도착했다. 과격한 공산주의자들이 득세하고 있는 악명높은 비하르 주를 그렇게 통과했다. 사이클 릭샤를 타고 국경을 건넜다. 6시간 동안 새우잠을 자고 아스팔트의 구멍을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총격전의 흔적과 진창길, 버스의 고장, 삼엄한 군인들의 경계와 지리하게 반복되는 간첩 수사와 짐 수색을 마치고, 절벽길을 따라 12시간을 버스로 달렸다. 사람들은 철지난 이념과 국왕의 권력욕 때문에 죽어갔다. 죽어갔다. 죽어갔다.

태양은 변함없이 뜨거웠다. 히말라야의 하늘 위를 지옥의 염화처럼 태우고 있는 핏빛 석양, 96시간동안 3400km를 달리는 고통스러운 여정을 마치고 god's own country를 떠나 rooftop of the world, 또는 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로 들어섰다. 영원한 처녀, 차가운 세 바다가 만나는 깐야꾸마리에서 사원 순례를 마감하고, 첫 월경으로 순수함을 잃으면 여신 자리(꾸마리)를 박탈당해 때로는 창녀로 전락하는 네팔의 카트만두에 도착.

지나가는 버스를 잡아타고 배낭을 물어뜯는 염소 대가리를 샌달로 때려가며 포카라에 다다라 내 인생에서 한번은 꿈꾸어 봤던 그런 생활을 했다. 아침에 일어나 담배 한 대 빨면서 멍하니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를 바라보다가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면 가을 햇살이 따사롭게 비추는 강가를 자전거를 타고 지나치다가 서점에 들러 책 구경을 하다가 엽서 몇장 사서 근처 까페에 들러 텅빈 내부에서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골라 앉아 메뉴를 고르고 천천히 엽서를 끄적인다. 밥을 먹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우체통에 엽서를 넣은 다음 숙소에 돌아와 책을 읽다가 창 밖의 장엄한 희말라야를 쳐다본다. 저녁 무렵에는 어떤 만찬을 즐길까 고민해본다. 오늘은 중식으로? 저녁을 먹고 입가심으로 일식 집에서 덴뿌라 한 접시에 시원한 맥주 한 잔.

다시 국경을 넘어 시체 태우는 냄새가 메케한 바라나시에서 골목길을 나흘 동안 헤메고 카쥬라호에서 인도-아리안 건축양식의 걸작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오차에서는 무굴의 성벽에 기대앉아 책을 읽다가 졸았다. 아그라에서 타지마할을 보았다. 3년 만에 델리로 돌아왔다. 여행중에 만났던 사람들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되었다. 3년만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을 다시 만났다. 인도 여행은 이제 다 끝났다. 내 왼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는 인도 대륙 형상을 한 다이아몬드 모양의 상처가 있었다. 불완전하기는 하지만(더더욱 인도스럽게도) 대륙의 네 꼭지점을 이었다. 공교롭게도 인도를 떠나자 상처의 형태가 바뀌었다.

사원 앞에서 거지떼와, 거지떼와 별 다른 차이점이 없는 수행자, 이른 바 sadhu라 불리는 사람들이 밥통과 손바닥을 내민다. 그들의 전직과 지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지위와 재산을 버리고 인도의 각지를 방랑하며 수행한다는 점이 중요할 뿐. 그들도 밥을 먹어야 겠기에 구걸을 한다. 입구를 지난다. '거지떼'는 여전하다. 신발을 벗는다. 신에게 바칠 꽃과 기름 등잔과 버터와 과일을 산다. 웅장한 고뿌람을 지난다. 뙤약볕 아래, 발바닥을 뜨겁게 달구는 너른 마당이 나타나 인내심을 시험한다. 탄자부르의 사원은 그래서 지옥 같았다.

웃도리를 벗는다. 성수로 손을 씻는다. 때로는 온 몸에 성수를 뒤집어 쓴다. 문간을 넘는다. 문간을 밞으면 안된다. 열주를 지난다. 열주는 시계방향으로 돈다. 내부 성소로 이어지는 복잡한 길을 지난다. 지성소 앞에서 문에 달린 종을 쳐서 신들의 주의를 끈다. 그러면 자다가 깬 신들이 체통을 차리는 것으로 추측된다.

지성소의 땅굴같은 모습은 창생의 신비를 간직한 우주의 자궁을 상징했고 그 자궁 속이나 둘레를 시바의 단단한 화강암 자지로 치장했다. 시바링가, 시바링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원은 좆 투성이다. 사원은 좆나게 큰 우주를 상징했고 신은 그 우주의 중심에 있는 요니 속에 거한다.

인사(기도)하며 지성을 바친다. 지성소의 사제가 성수를 건넨다. 마신다. 약초를 건넨다. 씹는다. 화환을 걸어준다. 목을 내민다. 꿈꿈가루를 이마에 발라준다. 빨갛다.

신의 대리자는 이러 저런 방법으로 신의 말씀과 축복을 전한다. 제단에 신에게 바칠 제물을 놓는다. 그리고 사제가 내민 접시나 도네이션 박스에 돈을 바친다. 즉, 성의껏 주머니를 털어 가진 돈을 바친다. 때로는 많은 돈을 요구한다. 생깐다. if i'm happy, god would be happy. 돈은 순전히 사원을 유지하는데 쓰인다. 하루에 4천 5백만 루피를 걷어들이는 티루파티 사원에는 어카운탄트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제대로 돌아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신께서 역사하시니까.

사제가 컵으로 머리를 덮어 축복해준다. 때로는 놀고있는 사제장과 언어의 장벽을 너머서 무의미한 대화를 나눈다. 지성소를 나온다. 발효되어 술 냄새가 나는 코코넛을 깨고 과즙과 하얀 속살을 나누어 먹고 마신다. 비힌두에게 금지된 여러 사원들 중 몇몇은 외국인에 대한 호의로 진입을 허용했다.

위대한 철학자 비베카난다의 정의에 따르면 힌두교도는 인도인들만이 될 수 있다. 논쟁의 여지가 없다. 힌두교는 괴상한 강요를 일삼는 포교 활동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메스꺼운 '성전'을 치르지 않았다. 베다는 브라민의 것이다. 힌두이즘은 브라민이 지배 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정치적/종교적 장치였다. 민중의 신은, 하나 밖에 없는 좆으로는 부족해서 젖 짜는 여자들의 성기를 손가락으로 희롱하는 크리슈나, 비쉬누의 화신이다. 그리고 브라민을 비롯한 모든 것을 짓밟아 파괴하는 깔리, 그리고 락쉬미와 가네샤와 하누만 역시 민중의 신이었다. 이들은 영원을 상징하는 돌에 새겨진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영원'을 상징하려면 스테인레스 스틸이나 티타늄 합금을 써서 신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무는 썩는다. 돌은 세월을 먹으며 뭉개진다. 구리는 녹이 슨다. 금은 탐욕을 부추긴다. 플라스틱은 약하다. 그래서 이제는 스테인레스와 티타늄 합금 신상의 시대인 것이다!

다신교 국가에서는 내부에서 종교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농담) 언제나 유일신 종교가 문제를 일으켰다. 지상에서 가장 혁신적인(?) 유일신 종교는 아케나톤에 의해 이집트에서 한차례 꽃을 피운 적이 있었다. 아케나톤은 유일신교를 만들 정도로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던 관계로 거의 모든 이집트 학자들에게 씹히는 존재였다.

그의 뒤를 이은 투탄카멘은 아케나톤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렸다. 이집트 학자들은 람세스 2세 치정 무렵 모세와 아케나톤의 유일신 신앙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지 않을까 추측했다. 모세는 특이하게도 유일신 신앙을 추구했다. 그는 에굽의 신들이 너무 많아 머리가 아프고 짜증이 났을 지도 모른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시대는 단순하고 깔끔했다. 이삭의 신은 세계를 만든 후 그것들을 파괴하거나 유지하는데 있어 딱히 활동적인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마치 휴화산처럼.

달리 말해 창조된 세상은 방기되어 있는 상태였다. 아담들은 사과 하나 먹었다고 쫓겨났다. 그 사과나무를 심은 놈이 누군가. 내 생각엔 인간을 상대로 장난질 쳤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밖에도 질투심과 분노로 똘똘 뭉친 그들의 신은 허구헌날 자신에 대한 믿음을 테스트 한답시고 설쳐댔다. 아무튼 이 세상은 신에게 버림받은 아담의 자손들이 알아서 잘 해 볼 문제였다. 모세는 석수공이기도 했다. 산에 올라갔더니 신이 번갯불로 지져서 석판을 새겨주었다. 세속적인 사람들을 위해: 또는 신의 지시에 따라 정과 망치로 재주껏 스스로 석판을 새겼다. 신의 지시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매스 커뮤니케이션과 자연의 이치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는 사람들의 생활이 피곤했고 교육을 받지 못해 두려움이 많았으며 순진했고 기적을 믿었다.

무른 석회암 석판은 이집트의 서기관이 애용하던 연습장이었다. 돌은 그 당시에 구할 수 있는 값싼 '영원'의 재료 였으며 모세가 산에서 가지고 내려온 석판은 이집트 치정 당시에는 신의 말씀을 영구히 공고하는 가장 보편적인 수단이었다. 모세는 이집트 신전 건축의 공사판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석판에 글쓰기를 연습하고 파피루스에 옮겨 적는다. 광야에서는 고급 파피루스를 구하기 힘든 관계로 모세의 신은 석판에 계율을 적어줬다. 이집트인들에게는 파피루스에 적히지 않고 돌판에만 계율을 새긴 신이 다소 검소하게 보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싸구려로 보였을 지도 모른다. 모세가 우상숭배를 거절했던 것은 허허벌판에 끌고 나온 사람들에게 신전 공사를 명했다가 불만을 살지도 몰라서 그러지 않았을까?

일곱번째 계명은 그 당시 사회상을 돌아보건대 지나치게 파격적이거나 모세의 신이 세상물정 모르는 미친놈이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최소한 지난 이천년 동안 그 신의 추종자들이 세상 물정을 모르는 미친놈처럼 행동한 것만큼은 사실이다. 아직도 모세가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것에는 많은 의문이 남아 있다.

그가 일으켰다는 기적에는 더더욱 많은 의문이 남아 있었다(놀랄 일도 아니지만 인도를 방문한 크리스찬 중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이 인간에 의해 날조된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을 품어 개종했다. 그 드라마는 눈물나는 코메디에 가까웠다). 신 앞에서는 쓸데없고 무의미한 과학은 그가 일으킨 기적이 이집트의 자연현상중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넌지시 밝혔다. 유일신 종교는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면서 늘 피와 학살을 동반했다. 그 원인은 유일신이나 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는 주장들을 한다. 그럼 다신교를 믿는 사람들은 왜 교리나 어떤 신이 잘랐다거나 신이 한 개 인지 여러 개인지 하는 문제로 싸우지 않았을까? 가령 힌두교도는 당신의 신앙이 무엇이건 간에 인정해 준다. 인정 안 하는 것은 상대방 뿐이다. 여호와는 힌두교도들에게는 늘 횡설수설 하면서 사람을 괴롭히는 약간 머리가 이상한 신이었다. 기독교인들의 견해에 힌두인들이 동의하는 것은 딱 한 가지가 있다. 그 미친놈들(신)이 다음에 무슨 짓을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 심지어 이슬람도 그 점에는 동감이다. 인샬라!

평화로운 힌두인들의 인도는 독립 후 탐욕스럽게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주변국을 괴롭혔다. 이런 문제를 다루는 인도의 tv토론쇼는 종종 지나치게 과격해지고는 했다. 힌두에게도 정의는 이미 사라지고 이익이 중요해졌다... 그 평화로운 힌두인들의 인도는 독립 후 탐욕스럽게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주변국을 괴롭히고 있다. 때로는 얍삽하게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가 했다. 인도- 파키스탄 분쟁의 와중에 인도 총리는 테러리즘에 강경대처한다는 명분을 들어 미국에 얍삽하게 붙었다. 개나 소나 테러, 테러 하고들 자빠졌다. 독립후 갈팡질팡하던 체첸이 완전히 정신이 나가 극장에 인질을 잡고 대처할 때 부시가 푸틴을 두둔하면서 한 말이 걸작이었다. '테러는 근절되어야만 한다' 이를테면 사상 최악의 원숭이 대가리를 가지고 있다는 평을 듣는 부시(그의 또다른 별명은 ostrich)는 러시아가 체첸에서 자행한 끔찍스러운 폭력과 학살에 대한 지식이나 견해가 전혀 없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농담)

파키스탄에 인접한 카시미르 지역은 독립을 빌미로 지속적인 분쟁상태에 놓인 채 굉장한 과부공장을 운영한다. 인도는 카시미르의 독립을 결사적으로 저지하면서 그 원흉으로 파키스탄을 지목했다. 파키스탄은 또한 전통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인도인에게 테러리즘의 본고장으로 알려져왔다. 인도인 대다수가 인도는 평화를 사랑한다고 우겨도 이윤이 별로 안 남을 땐 입을 닦을 놈들이다. 파키스탄의 카시미르 지역에 대한 입장 내지는 정서가 이렇게 간단하다: 카시미르, 너희들의 운명은 너희들이 알아서 결정할 것. 카시미르의 경제는 이미 오래전에 붕괴된 상태이고 분쟁 상태가 끝끝내 해결되지 않는 가장 큰 원인은 카시미르 지역의 정치가들이 전시체계에서 얻는 크나큰 반사이익, 무정부상태와 부패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기 때문이다.

카시미르의 대다수 인구는 이슬람인데 주 정부를 운영하는 작자만 힌두다. 뭔가 핀트가 안 맞는다. 인도- 파키스탄 분쟁을 소재로 한 전쟁 영화가 최근에 개봉되었다. 두 인도 람보가 사악한 이슬람 테러리스트를 맨 주먹으로 박살내는 영화인데 인도 람보는 미제 스팅거 미사일과 소련제 akm 기관총에 무수히 맞았지만 간단한 병원 치료 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십 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이러한 폭력과 분쟁의 원흉은 성자로 추대받고 있는 마하트마 간디일 수도 있다 라는 것이 힌두 지식층의 은밀한 주장이다. 하지만 인도에서 간디 욕하면 맞아 죽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인도? 독립은 그렇다쳐도 비굴한 제국주의의 개 같은 국민성은 여전하다. 요즘 인도 지식인들의 고민은 그것이다: 도대체 전쟁으로 쏙대밭이 된 일본이나 한국은 잘 살고 있는데 풍부한 부존자원과 광활한 대지, 그리고 엄청난 맨 파워를 가지고 있는 인도는 185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뭐 하나 나아지는 것이 없다는 패배의식, 오죽하면 김이 샌 그들 사이에서 인도를 자랑스럽게 하는 50가지라는 어거지를 위안을 삼고 있겠는가.

파키스탄에서 들은 카시미르 사정은 전혀 달랐다. 어떻게 이슬람이 살고 있는 땅을 영토욕만으로 자기 땅이라고 우길 수 있는가. 하지만 그들은 카시미르의 문제를 카시미르가 해결하길 원했다. 사우디 아라비아가 기특해서 돌봐주고 미국이 전략적 발판으로 삼고 있는 막강 이슬람 파키스탄 테러리스트들은 생각보다 점잖고 정치적으로 지나친 편향을 보이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인도보다 시끄럽지가 않았다. 요컨대 '이슬람'을 골칫덩이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주로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 특히 무슬림식 표현대로 하자면, 시오니스트 뿐인듯 싶었다.

힌두교도는 종종 생활의 편의(?) 때문에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이처럼 플렉시블한 힌두교는 양말도 팔고 소포도 붙이고 컵라면도 사먹을 수 있는 24시간 편의점 같은 종교로 보인다. 내 생각에는 인도를 개선의 여지없이 엉망진창으로 망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힌두교같다.

아프간에서 납치되어 자신을 살려주면 이슬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는 어떤 서방 여기자는 살아난 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그녀는 부르카를 거절했다. 이슬람은 부르카를 벗고 현대화될 필요가 있다. 유목사회는 경제적 파탄 위기에 처해 있었다. 현대화의 조짐은 이슬람 세계에 퍼진 인터넷을 통한 서방의 타락한 문화, 소위 풍속 산업의 유입으로부터 일어났다. 섹스 산업은 인터넷 인프라를 부추기고, 인터넷 인프라는 시민들에게 입을 열 기회를 제공했다. 이제 그들은 서구의 섹스 문화를 즐기면서 지하 방송이 되어 자유를 떠들기 시작했다.

원리주의자는 얼마나 원리적일까? 이맘은 코란을 해석한다. 요즘은 재해석한다. 확대 해석할 필요도 있었다. 세상이 복잡해지니까. 재해석하고 확대 해석을 자꾸 하다 보니까 짜증이 나는 관계로 가장 단순한 선택을 한다. 원리주의가 그것이다. 해석이 여럿이다 보니까 의견 충돌이 생긴다. 그래서 원리주의에는 언제나 이견과 해석의 공포로 잔뜩 짜증기가 배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세계는 친절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것을 개코메디라고 한다.

이슬람은 신과 일대 일로 대면한다. 크리스찬과 가톨릭은 사제를 통해 신과 면접을 치룬다. 힌두는 이것 저것 다 사용했다. 지금 나는 힌두가 좋다고 말한 것인가? 그건 아니다.

이슬람과 크리스틴은 몇 가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세파에 시달리면서 세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언어에 광적일 정도로 집착한다는 점이다. 알라의 첫번째 예언자가 한 말과, 여호와의 말씀을 적은 히브리 두루마리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해석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이미 신성함을 지니고 있었다. 성서는 별로 우주적이지 못한 관계로 예수 이전이나 이후의 세계에서 예수의 존재를 알 턱이 없는 수십억 우주의 지적 생명체들이 몽땅 지옥에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또는 다른 우주의 지적 생명체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저지른 죄악 때문에 예수의 어깨가 백만배는 더 무거웠을 지도 모른다. 이슬람은 그점에 대해서 비슷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크리스틴 역시 성서의 올바른 해석이라는 이슬람과 완벽하게 똑 같은 원리주의적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성서에 코를 박고 있는 크리스틴과 코란에 코를 박고 있는 이슬람은 참 많이 비슷하다. 그리고 그들은 우상 숭배를 몸서리를 치며 싫어했다. 게다가 그들이 섬기는 신의 사고방식을 해석하는 절차가 좀 달라서(필경 귀가 어두운 누군가가 알라와 여호와의 철자를 헷갈려 적었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줄곳 개죽음을 당했다.

별 이유없이.

어쩌다가 무신론자가 되었을까... 종교가 진리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었을까? 잘 생각 안난다. 귀찮은 과거사는 생각 안 하는 편이 낫다. 귀찮은 과거사 중에는 생전에는 무척 소중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신이 없어 허전하다고 구차하게 구걸하지 않았다. 누가 생각난다고 찔끔찔끔 짜지도 않았다. 종교를 양심의 방패로 삼지 않았다. 만났던 어떤 중은 '마음단속' 이라는 핑계를 대고 술 먹고 담배 피우고 계집질 하는 것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걸작이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이런 거 못하잖아.' 절간은 채식으로 장수한 선사들이 죽기 전에 깨달은 것을 제대로 잘 따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많은 세속적인 땡중들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들은 신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고 신이 이렇네 저렇네 하는 사람들은 요즘 유행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나는, 올드패션이다.

러시아 정교는 러시아에 의해 통치체계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 아이콘이라는 독특한 상징을 사용했다. 아이콘은 근대적인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의 부활이라고 할 수도 있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림을 통해 신앙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었으니까. 러시아 정교는 러시아에 수입되는 거의 모든 종교를 현재까지도 탄압하고 있다. 그들은 가톨릭과의 경쟁에서 그들을 몰살 시키고 여전히 살아남았다. 러시아 정교의 만행 역시 싸이코 드라마가 되어가는 중이다.

종교는 21세기가 된 지금도 수천 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정정했다. 어떤 영화에서처럼 과학이 커버하지 못하는 미지의 분야에 종교가 미치는 영향력은 강력하기 그지없다. 특히나 파키스탄 이슬람은 생활과 종교가 대단히 잘 일치했다. 기독교는 이해가 잘 안가는 종교다. 기독교는 삶을 백 배쯤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 점에서는 모든 사안을 꼬치꼬치 기술한 마호멧 역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반면, 한국불교는 이제사 경전의 무의미함을 깨달은 것 같아 보였다.

한 요기에게 21세기 하이테크 수행자가 어떤 놈들인지, 뉴에이지를 틀어놓고 메디테이션과 컨센트레이션과 릴렉싱과 하이퍼마인드가 어떻게 최근 추세에 맞게 진화(?) 했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의 답변은 완벽하고 심플해서 심지어는 전율스럽기까지 했다;

와... 정신 사납다!

그의 방법은 여전했다. 히말라야 땅굴에 짱박혀서 추운지 더운지도 모르고 그저 앉아 있는 것이 최고랄까.. 올디스 벗 구디스.

카트만두에서 시바의 초승달을 보았다. 시바의 초승달은 옴 이란 성스러운 글자에서 생각하는 마음, 움직이는 마음, 그리고 상호 작용 하는 마음 따위를 의미한다고도 말한다. 사실 정확하게 번역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도 말한다. 시바의 초승달은 그냥 온 마음의 전이 상태를 의미하면 된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마음의 전이에 관해서는 이런 저런 생각들이 있는데 공통점이 저 셋 정도 될 것 같다. 옴 글자의 세 변은 각각 신의 세 이름을 나타낸다고 한다. 아... 나도 그들처럼 상상력을 발휘해서 궤변을 닦아둘 껄 그랬나? 시바의 초승달에 얽힌 이 모든 잡설을 종식시키는 다른 설명은 그것은 그냥 옴 글자를 쓸 때 붙는 평범한 방점과 변형된 우물렛이라는 것이다. 과중한 의미 부여와 궤변 따위로 옴은 반쯤 무너져 내린 것 같다.

그러나 히말라야를 보았다.

몇 시간 동안 무너진 산길을 타고 기어 올라가 히말라야 산골짝 깊숙이 짱박혀 수십 년을 수행한 사두를 보았다. 그의 눈은 흔들리는 등잔처럼 크고 그의 입은 늙은 언어를 말했다. 썩은 이빨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수천년 전의 산스크리트는 기괴하고 전율스러웠다. 그의 뱃가죽은 붙어 있었다. 하지만 벌어진 입으로 웃고 있었다. 절벽 자리가 그의 처소였고 불쏘시개와 깡통 하나가 전재산이다. 웃고 있었다.

최첨단 하이테크 사두란 것들은 뉴에이지와 마약에 눈이 풀려 요가 자세를 한 채 해피네스에 관한 나름대로의 해석 내지는 핑계꺼리를 갖다 붙이기 바쁜 반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미소였다. 마을에서 힘겹게 걸어 올라온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늙은 농부가 친구처럼 그에게 말을 붙이고 떠날 때 그에게 경배했다. 바바에게 하시시를 얻어 피웠다. 그가 나뭇가지를 그러모아 불을 피우고 차를 끓여 건네 주었다. 산 중턱에서 나는 왜 수행자가 되지 않기로 했을까, 기타 등등으로 아주 슬퍼지고 말았다. 산을 내려와서 존 레논의 oh my love를 오랫만에 들었다. i see the window... 아 창 밖이 아주 잘 보이는데 말이야. 눈물이 찔끔 나왔다. 며칠은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번 인도 여행의 아무래도 지적(?) 핵심은 힌두이즘과 수행자 문화(?)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수행자들과 세속 철학을 주고받는 것으로 얘기될 수 있다. 베다는 좆도 아니었다. 힌두신앙의 오직 3%에 해당하는 브라민들이 믿는 브라만에서나 줏어 섬기는 것. 힌두의 여러 신들에 대한 이야기는 적어도 네 번, 각기 다른 버전을 들었다. 힌두 신앙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증거는 자신의 고유 버전 내지는 시스템을 만들 때라야 가능할 것 같다.

개중 사두들과 칠룸 빠는 얘기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거론하는 것만큼은 조심하는게 좋지 않겠느냐는 말을 들었다. 그래... 그들과 하시시와 마리화나를 나눠 피우는 것이 워낙 사회 윤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겠지. 조심해야겠지. 음. 음?

하여튼 진짜 사두와 제대로 대화하려면 아우라 통신이나 텔레파시 통신만이 유일한 길이다. 나야 잘 되니까 상관없지만서도. 내가 사두랑 대화 하는 모습 보면 꽤 웃기긴 한데... 서로 다른 언어로 서로 즐겁게 오랫동안 대화를 나눌 수 있으려면 흠. 아무렴. 옆에서 보면 정신병자들 같겠지. 그러다가 어느 날 한 사두를 울리고 말았다. 다른 사두들한테는 망고 쥬스를 돌렸는데 한 사두 것만 빼먹었다. 자기는 왜 안 사주냐고 삐졌다. 가게에 망고 쥬스가 다 떨어졌다니까 그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말았다. 원숭이들과 바나나를 사이에 놓고 티격태격 다투는 중이라 바빴기 때문에 무시했다.

그중 누군가가 시내까지 한참 걸어서 간신히 망고쥬스를 사다 건네주니까 그가 헤벌쭉 웃었다. 그들과 헤어질 때 두 눈 사이에 꿈꿈 가루를 발라주며 내게 축복을 해 주었다. 사띠암, 진실의 기쁨을 누릴 것. 그것으로 내가 사두와 제사장에게 받은 축복은 세번 째가 되었다. 하지만 사두떼와 함께 있으면... 후유... 누구 말대로 유치원 한복판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원숭이한테 먹이를 빼앗겨서 기분도 더럽고... 수십 년을 수행하고 나서 망고 쥬스 하나 때문에 삐진다는게 이해가 되냐? 태연히 앉아서 죽음과 공포에 관해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하는 작자들이란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내가 아는 여성 사두는 단 한 명 뿐이다. 그녀의 별명은 허깅 마더였다. 다짜고짜 껴안는다. 그래서 안 만났다. 그녀 역시 유치원 놀이에 심취해 있었다. 어떤 궤변에 따르면 여성들은 깨달을 필요가 없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깨달았기 때문이란다. 뭘 깨달았는지 모르겠으나 '깨달음' 자체가 지극히 주관적인 현상이라 속인에게는 기적을 통한 예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치유하는 손이나 공중에 떠오르기나 물 위를 걷거나 죽었다 깨어나기 같은 것이다. 안 그러면 그가 정말 깨달았는지 안 깨달았는지는 그 자신의 문제가 된다.

더더군다나 어떤 작자는 주위에서 당신은 깨달았습니다 하니까 어? 내가 깨달은건가? 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사두들은 저 마다 독특한 개성을 자랑했다. 한 팔이 석화될 정도로 평생 들고 있거나 하는 등의 요가 자세를 취하는 사두들이 있고 벌거벗고 다니거나 자기 자지를 길쭉하게 늘려 놓아 늘어진 그것을 허리에 칭칭 감아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개중 면류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고 다니던 사두도 있었다. <-- 철저하게 인도인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는 그 거지같은 사두가 깨달음과 명망을 얻어 바바(구루)가 된 케이스에서 더도 덜도 아니다.

존재란 무엇인가, 자유란 무엇인가, 나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기타 등등의 식상하고 밥맛 떨어지는 질문들을 굳이 기억해야 하는 까닭은 그 질문을 하는 놈이 충분히 장난끼가 지나쳐서 그런 것이 아니라면 평소 그런 피하고 싶은 의문꺼리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틈이 없을 정도로 바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은 대답이 종종 궤변이 되곳하는 그런 질문이 무의미하다고 하는데 본의 아니게도 인류는 지난 수 십만 년 동안 같은 의문을 품어 왔고 일부는 그 답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늘어놓았다. 요즘은 '죽었다 깨어나도 도를 통할 수 없는' 서양인들 조차 앵무새처럼 지껄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 답변들은 tv를 발명하고 로켓을 우주로 띄워 보내는데는 별 쓸모가 없었다.

종종 그 답변이 주는 열정적인 사해동포 정신에 감격스러운 나머지 인간의 욕망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잊어버리고는 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자신을 살게 하는 힘들의 역학에 관하여.

관찰에 의해 검증될 수 없고 논리에 의해서도 증명될 수 없는 그런 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사실이라는 주장을 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감정이나 태도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신과 신앙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태도와 유사하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 삶의 다른 모습이 죽음이다, 생명은 존귀하다 따위의 막무가내 역시 그렇다.

생명은 왜 존귀한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공교롭게도 질문의 의도를 우회한다.

생명은 존귀하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올바른 답이 된다.

존귀하지 않은 것을 존귀하게 만드는 것이야 말로 존귀한 행동이 되니까.


내게 필요한 것은 저런 빌어먹을 궤변이 아니다. 생명은 존귀하지 않다. 생명은 흔해빠진 자연 현상이다. 사랑은 소중하지 않다. 우리는 인간의 사랑 이외의 다른 생명체 사이에서 사랑과 유사한 감정이 발현되는 것을 관찰할 수 없었다. 하다 못해 인간의 사랑이란 정신적 체험의 명명이 과연 사회적 산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죽음은 생명 현상의 종결을 의미한다. 사실이 그렇더라도, 그리고 '신념'과 '신앙'으로 점철된 헛소리가 아니더라도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데는 하등 지장이 없을 따름이다.

그것을 종교의 이름으로 행하지 마라. 개새끼들아.

프로이트와 프로이트의 어설프게만 여겨져 잊혀진 이론이 희안하게도 맞아 떨어진다는 것을 눈치챈 현대 분자생물학과 수행자의 깨달음이 지니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 셋은 모두 의식과 인식을 다루고 있으며 인간의 욕망 중 그들의 생존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어떤 본능에 관해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일께다. 성욕이나 식욕 얘기는 아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자신을 살게 하는 힘들의 역학에 관하여! 그것을 공포의 밑바닥까지!

프로이트의 성에 대한 지나친 집착 내지는 독자가 프로이트의 시스템을 오독함으로서 발생하는, 프로이트의 성에 대한 집착을 의식하는 독자 자신의 정신상태(실제로 프로이트는 성이 인간의 정신활동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했지 그 어디에도 정신활동 전체를 지배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고 후기이론에 가서는 심지어 성을 '이상화'된 욕망으로 표현함으로서 에로스라면 침착함을 잃고마는 수 많은 독자를 실망시키고 심지어는 그 이론에 욕설을 퍼붓길 서슴치 않았다.

그는 과학자가 아니거나 어설픈 과학자라나?(누가 뭐래나?) 이런 실망과 욕지기는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무의식화되거나 내재화된, 또는 충족되지 못한 욕망의 전이와 투사인 것이다 ^^;) 등의 사소한 문제를 무시한다면 프로이트에게 여전히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는데 그의 '꿈의 해석'에 드러난 고대 마술사와 전적으로 동일한 예술적/예언적/치료술사적인 재능이다. 그는 환자의 괴상한 꿈을 아주 그럴듯하게 해석하여 환자를 만족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자각하지 못했던 자신과 연루된 신기한 판타지를 통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환한 기억의 회랑을 만들어 주었다.

프로이트의 이러한 독특한 치료술은, 그가 자신이 철저한 과학자로 기억되기를 희망했음에도(프로이트를 정신분석해 보면 그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기계론적인 용어, 특히 '에네르기'같은 물리적인 용어를 쓰려고 용을 쓴다고나 할까...아니면 공돌이들의 근본적인 한계라고 해두지 머) 그가 지닌 고대 구술 예술가로서의 재능,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고대 예언가로서의 재능, 이야기를 대화 상대자에게 납득시키는 것, 치료술사로서의 재능, 환자와의 은밀하고 개인적인 관계를 통하는 그의 방법론에 입각한 고대 주술사 내지는 치료술사에 버금가는 믿음과 신뢰를 구축하였다는 점 등이다.

그는 현대에 부활한 주술사같은 존재였다. 그냥 내 생각일 따름이다. 프로이트적 심리치료사의 사실 상의, 그리고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철저한 실패는 프로이트 이후 이러한 극히 드문 '천재성'을 타고난 사람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과 장기간의 치료 기간과 그에 따른 막대한 비용 손실에 미치지 못하는 미미한 치료 효과에 대한 환자들의 불만, 약물에 의한 물리적인 정신 질환의 치료가 정신 분석보다 효과적임이 종종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그 중요하고 점잖은 융이 프로이트보다 맥 빠지고 김새고 시시하게 보이는 이유는 융은 그냥 단순한 학자였지 치료술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의 심리치료사들은 현대사회에서 격증하는 스트레스성 심리 질환에 포커스를 집중하고 있는데 스트레스를 전문적으로 치료한다는 것이 참 묘하다면 묘한 일이긴 하다. 이를테면 농부가 비가 안 와서 올해 농사를 완전 작살내게 된 형편이라 엄청난 스트레스 내지는 심적 부담을 느끼는 것을 싸이코 쎄라피스트들이 치료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일을 쉬고 안정을 취하며 약 조금 타먹고 병원을 계속 다니라고? 그럴 때 하는 말이 있다.

어절씨구~ 조까고 있네~

자연 재해에 의해 인간이 받는 생존압은 일을 쉬고 안정을 취하며 약 조금 타 먹고 병원을 빼먹지 않고 다닌다는 갖잖은 방식으로 치료될 수 없는 것이고, 현대 생활은 그러한 자연의 개념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고도로 추상화된 생존압과 그러한 변화되고 복잡해진 '자연'과의 유기적 상호 작용에 대한 부적응은 사회가 자라나는 '환자'에게 적응력에 관해 무엇인가 잘못된 망상을 심어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자연으로 돌아가야 인간이 편하다는 류의 시대착오적인 주장이나 그들이 말하는 자연이 바로 인간에 의해 통제된 자연이라는 점에서 역시 문명권에 속하게 된 것을 말하면서도) 의심을 품게 된다. 그런 얘기는 사실 본론에서 좀 벗어난 것이고...

심리치료를 받는다면 프로이트같은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과 정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 툭 하면 과학입네 스트레스입네 하며 얼토당토 않은 소리를 늘어놓는 현대의 싸이코 쎄라피스트들의 개소리는 듣고 싶지가 않다. 그래 그들은 분명 현대적이고 과학적이고 기적적인 치료 결과를 내놓는다.

어린 시절의 나는 아주 활달했던 것 같은데 어느날 책을 잡고 손에서 떨구지 않게 되었다. 소설이라면 평생 읽을 일이 없었을 것 같은데 심심할 때면 소설을 읽었다. 도대체 어린 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혹시 아무 글자만 보면 흥분하는 이상성욕의 한 사례가 아닐까?

어쩌면 프로이트 같은 위대한 이야기꾼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내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상상력의 지평을 뛰어넘을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어쩌면 sf를 읽는 것이 다음 페이지에 나타나는 얼토당토 않고 유쾌하지만 때로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밤새 흥분해서 두근두근하며 뒷 일을 나름대로 궁리해 보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매력적인 시절은 갔다. 3초 전에 창틀에 앉았다가 금새 날아가버린 참새처럼.

짹짹.

그동안 '기적의 깨랄라 오이'로 맛사지 한 탓에 얼굴만큼은 보송보송했다.

'신에게 버림받은 카트만두 오이'의 성능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카트만두 시내로부터 조금 떨어진 내가 거한 처소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다. 창틀에 창이 안 달려 있고 출입구에 문이 안 달려 있어 딱히 방이라고 하기는 민망한, 공사하다 만 건물에서 침낭에 누워 잤다. 창문은 아니지만, 하여튼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키 큰 나무에서 낙엽이 날려와 방바닥에 내려 앉으면 혹자는 이것이야말로 인공물에 자연이 가미된 조화로운 건축 공간이자 놀 줄 아는 무굴 건축의 마지막 계승이라고 감탄사를 내뱉던 곳이다.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이다 보니 밤에는 약간 추웠지만 아침에 밖에 나가 햇살을 쬐며 얼린 몸을 녹이다보면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건물에서는 일종의 작은 공동체 실험이 진행 중이었다. 그들에 관해 할 말은 없다. 밥 먹고 요가하고 춤추고 노래하고 운동하고 연주하고 글쓰고 파티 하고, 그런 종류의... 그곳에서 내가 한 일은 아직 전기가 없는 관계로 전등을 달고 전등갓을 만드는 일 따위였다. 나머지 시간에는 밥 먹고 요가하고 춤추고 노래하고 운동하고 글 쓰고 파티를 했다. 밤에는 모닥불을 피워 놓고 개 짖는 소리를 듣거나, 아니면 개 짖는 소리 비슷한 음악을 들었다. 가끔 시내에 나가 식료품을 사거나 인터넷을 사용했다.

개천절에 한국 대사관에서 주최하는 디너 파티에 참석해 음식을 축냈다. 양복과 드레스를 빼입은 고관 대작들 틈에서 마리화나로 나른해진 몸에 걸레처럼 꾀죄죄한 옷을 걸친 채 나보다 잘 차려입은 웨이터들을 불러 고급 와인과 온 더 락을 연거푸 마셨다. 취했다. 개중에는 왕족도 있었고 마오이스트를 학살한 장군도 있었을 것이다. 무장한 군인들이 파티장을 지키고 있었다. 차라리 네팔 정세를 모른다면 편했을 것이다. 이제는 너무 잘 안다. 땅 투기와 네팔의 암울한 현실과 권력 투쟁과 산간 벽지에서 벌어지는 피비린내나는 학살극 따위를.

파티와 학문과 노동과 예술을 즐기는 히피가 되기에는 세속적이었다. simplest is best는 웃기는 말이다. 세상이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는데 단순한 삶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 맥을 짚을 수 있다면 세상과 삶은 의외로 단순한 것 일지도 모른다. 그중 하나만 단순하여 우둔한 자는 돌대가리를 시멘트 벽에 박고 있는 중이다. 단순하게 살라는 괴로운 충고를 들으면서.

이 단순한 삶은 과거를 되돌아보지도 않았고 실패를 교훈 꺼리로 삼지 않았다. 상상 만으로 웃음짓게 만드는 미래가 있을 뿐. 그래서 삶을 발견한 자들의 유골 속에서 공명하는 잠언이나, 희미한 안개처럼 신비스럽고 영속적인 도그마를 개발한 선배의 언어를 들먹이는 일이 없다.

그냥 마야꼬프스키의 싯귀처럼, 나 또한 노동과 투쟁의 한가운데서 태어났다. 자신을 세계와 현재와 연결시키려는 애절한 투쟁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치 얘기면 환장한다는 어떤 중 아저씨와 동아시아 정세에 관해 상호 신념을 교환하고 있을 때, 우리는 동아시아 전 국가의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에 멈칫 닭살이 돋아났고 심지어는 계란 마저 낳을 지경이 되었다. 각 나라 고유문화의 보존 계승보다 더 심각한 얘기였다.

문화가 각광받는 21세기란 것은 대체로 어딘가 모르게 어리둥절하기만 한 것이었다. 자기들이 만든 것에 자기들이 엉뚱하게 끌려가는 희한한 유행이 요즘 문화라 불리는 것인데 매스컴의 대중 선동과 잘 구분이 안 되는 것만큼은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그 덕에 블라디미르 비쇼프스키의 노래도 듣게 되었지만. 좋드만. 자신의 대가리를 품 안에 넣고 세상 참 따뜻하다고 주장하는 닭대가리가 많은데 그 점에서 만큼은 나 자신이 자유롭지도 심플하지도 못했다.

여행과 자유?

신랄하게 떠들어대기보다는 그런 쥐꼬리만한 자유조차 없었던 한국을 기억해냈다.

자유=돈이라고 온 몸으로 웅변하던 부모들이 생각났다.


알 쿠에다는 투항 후 반란군의 조직적인 수용소 살해계획으로 떼죽음을 당했다. 그 수는 아무도 모른다. 중국에 인도주의를 강요하는 미국은 모른 척 눈을 감았다. 밀폐된 컨테이너에 포로를 싣고 가면서 물 한 모금 안 주고 쪄 죽이는 아주 계획적인 방법을. 컨테이너 문이 열리자 죽은 시체가 생선처럼 쏟아져 나왔다.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시장에서는 야채와 양고기와 함께 무기를 판다. 소녀가 열차에서 강간 당하는 동안 다섯 명의 사내가 무기력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회면에나 얼핏 나타나기에는 한 국가의 변화를 지독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너무나 너무나 상징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미친 놈에 관한 기사는 또 있다. 한 기독교 목사가 자기 교구에서 장사가 잘 안 되었는지 힌두인들을 상대로 설교를 늘어놓는 도중 이슬람을 악마로 규정하자 이슬람 폭도들이 힌두인들을 때려 죽였다. 인도에서 이슬람과 힌두는 그 무수한 분쟁에도 불구하고 사이가 퍽 좋은 편이었다. 아니라고? 이슬람을 열받게 하는 것은 대단히 쉽다. 자존심만 살짝 건드리면 광분하니까. 파키스탄 접경의 테러리즘 활동에도 불구하고 80%의 인도인들은 대화와 평화를 원한다. 미친 BJP는 부시와 연대해서 테러리즘의 총 본산인 파키스탄에 따끔한 맛을 보여주는 한편 실리를 챙기려 하고 있다. 이 인도라는 나라가 과연 성자들 수천을 배출한,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다신교의 국가인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가로막는 놈들이 누군가. 저런 개 같은 목사를 만든 서구 문명이다. 서구 문명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내 정열은 나이를 먹어갈 수록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그리고 서구 제국주의 내지는 악마주의의 축은 기독교라고 생각했다.

자유 좋아하고 자빠졌고, 수행 좋아하고 자빠졌다.

현생을 살아가는 참된 방법론이란 신앙을 초월한 단순철학의 실천 뿐이다.

함께 살자 라는.


파키스탄의 북부, 훈자 마을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걱정거리가 다음 끼니는 뭘로 할까 정도 밖에 없는 평화로운 생활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침대에 누운 채 4000-7000 미터가 넘는 지척의 고봉을 따라 피어나는 구름을 보다가 세수하고 밥 먹고 하릴없이 햇볕을 쪼이며 시간을 보냈다. 게스트 하우스 위치가 끝내줬다. 누워서 창 밖의 설산을 볼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비수기에 라마단까지 겹쳐 동네의 거의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저녁쯤 전기가 나가면 가스등을 켜고 읍내에서 사온 등유 스토브에 불을 붙여 식사꺼리를 준비했다. 그전 오후에는 동네에서 야채와 식재료를 샀다. 다섯 시가 넘으면 라마단이 끝났음을 알리는 꾸란의 독경 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마치 낮게 깔린 장작 연기처럼 동네에 나즈막히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불을 피우고 음식을 준비한다. 저녁 늦게 전기가 나가면 보름이 다 되어가는 달빛에 설산은 비인간적인 자태를 드러냈다.

내가 본 것은 빛과 바람이었다.

전기가 나가면 라디오 방송조차 들리지 않았다. 비수기인 이 동네에 외국인이라고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로컬리들이 읍내를 오고가는 차 안에서 외국인은 언제나 나 혼자였다. 그들은 내게 말을 건네왔고 뻔한 질문에 뻔한 대답들이 오고갔다. 어디서 왔느냐, 언제 왔느냐 등등 장소와 시간을 묻는 질문들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의 배경이 되었던 이 마을은 그러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보다는 라퓨타를 생각나게 했다. 언제 어느 때 비행석 목걸이를 목에 건 여자애가 하늘에서 천천히 떨어질 지 알 수 없었고 떨어지기만 하면 언제든지 덮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빵 모자를 쓴 서양인도 동양인도 아닌 어린 아이의 맑은 눈빛은 지나치게 흔했다. 지금껏 보았던 사람들 중 가장 친절했고 이처럼 서로 서로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다. 옆집 가게에 주인이 없으면 대신 가게 물건을 보아주고 금고를 열어 돈 계산을 해 주는가 하면, 장례 행렬에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참가하는 모습을 보았다. 모순이었다. 세계 3대 장수촌에서 두 번 씩이나 장례 행렬을 본 것은.

훈자 마을은 해발 2500 미터 위에 있다. 훈자 마을은 인도의 스리나가르, 레가 있는 카시미르와 같은 지역이라 그 나물에 그 밥인 화성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그런 동네에 사람들이 사는 것이 신기했다. 훈자 마을에 머무르는 동안 경치도 경치지만 그 지역의 제반 여건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관광지로서의 훈자 마을은 이미 비수기에 들어선 상태였고 마침 라마단 기간이라 그나마 있던 식당들도 문을 닫은 상태였다.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재료를 사서 음식을 만들어 먹거나 훈자 마을에 관해 곰곰히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4천미터에서 7천 미터에 이르는 높은 산들로 둘러 싸여 있고 동에서 서로 흐르는 인더스 강 줄기를 남쪽에 두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가 비추는 경사진 마을이다. 훈자 마을은 기본적으로 자급자족 사회다. 외부와 수출입을 하긴 하지만 근대 이전의, 마을과 마을 사이에서 벌어지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덜 필수적인 생필품의 교환을 하는 수준이랄까. 그들이 외부 세계에 판매하는 것은 기껏해야 그 지역 특산물인 살구를 가지고 만든 살구잼 정도였다. 단가 당 단위무게가 꽤 나가는 물건이라 살구잼을 팔아서는 큰 장사가 되지 못한다. 주요 수입 품목은 밀, 빵(난)을 만들어 먹을 때 필요한 것.

사방이 산으로 꽉 막혀 있고 1968년 캐라코럼 하이웨이가 마을 아래를 지나가기 전에는 그럭 저럭 조용히들 살고 있었다. 전체 인구의 대다수가 무슬림이고 그래서 인지 손님을 후하게 접대하는 편이다. 말하자면 시골 인심을 느낄 수 있다. 몽골, 투르크, 코카서스, 라틴의 피가 섞인, 절대 다수가 무슬림인 마을. 여전히 대가족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고 가구당 평균 7.5명의 구성원,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아들, 소 한 마리, 닭 한 마리, 고고학자 한 마리 정도다.

평균이 그렇다는 얘기고 보통 20-30명 정도가 한 가구를 이룬다. 마을의 총 인구는 7000명 정도, 마을 사람들은 서로 서로가 아는 사람들이고 목격한 바에 따르면 장례식 동안 적어도 2-300명 되는 사람들이 장례 행렬을 이루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마을의 구성원 전부가 서로 서로를 알고 있다고 본다. 문맹률은 거의 0%다. 파키스탄의 평균적인 상황에 비교해 보면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천연적으로 외부 세계와 고립된 채 자급자족하는 작은 공동체, 그것도 최소한 천 년 이상 이어져 내려온 마을.

제임스 힐튼이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샹그릴 라를 묘사했다. 잃어버린 지평선이란, 지평선을 찾아볼 수 없다는 뜻에서 산골짝으로 둘러쌓인 엄청나게 깡촌틱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세어보니까 세상에는 적어도 네 개의 샹그릴 라가 있다. 네팔의 무슨 산골짜기, 중국 사천성의 무슨 산골짜기, 중국 운남성의 무슨 산골짜기, 그리고 훈자 마을이 위치한 길깃 부근의 산골짜기. 중국의 사천성과 운남성은 한동안 자기네가 진짜 샹그릴 라 라고 우기다가 공식적으로 한 성 만이 샹그릴 라라는 이름을 중국 내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법원의 판결을 받았다. 따라서 그곳만 샹그릴 라 라는 관광지로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뜻이 된다.

훈자 마을에 관한 이런 저런 머리 속에서 번쩍 스파크가 튀어 오르면서 떠오른 것이 십년은 잃어버린 단어였던 꼬뮨이었다. 이어 줄줄이 공산 이상 사회 건설과 산업화가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마르크스적 소외란 것도 떠올랐다. 물론 우주 개발에 필수적인 자급자족하는 제한된 계와 99.999% 실패한 히피 공동체도 역시 떠올랐다. 이제 단 하나 남았다고 여겨지는 히피 공동체인 오로빌 역시 별다른 수입이 없어 거의 망해가다가 최근부터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훈자 마을은 천 년 동안 주욱 외부의 도움없이 잘 지내오다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반쯤 관광지화 되고 나서부터 슬슬 변해가기 시작했다.

변화는 변화고, 매력적인 개념 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들이 그렇게 지속적이고 안정된 공동체를 유지해 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농경 경작 생활을 지속하기 위한 대가족, 외부로부터의 고립, 제한적이지만 적어도 생존을 지속할 수 있을 만큼의 경작지, 약간은 가혹한 환경, 실크로드 상의 주요 경로로부터 유입된 외부인과 피가 계속 섞임으로서 사회적으로 외국인에 대해 거부감을 갖지 않게 된 것, 국가나 사회체계, 심지어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외부로부터의 접근이 어렵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슬림이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슬림의 유입 과정은 대충 짐작이 갔다. 실크로드의 대상 무역을 통해 세금 감면 혜택을 노린 상인들이 이슬람으로 전향했을 터이고 그들중 일부가 중국까지 이어지는 경로 중 이곳을 택해 현지인과 맺어지면서 피가 섞이고 일종의 인종적 다양성과 스펙트럼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대상의 피와 인종 혼합이 외국인에 대한 경계심을 완화시켰을 것이다. 게다가 무슬림식 자비와 타인에 대한 호의, 그리고 무슬림식 위생은 더더욱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공동 경작, 공동 재산, 이런 것들을 혼자에서 보았다. 꿈에서나 보던 '당이 없는' 공산사회였다. 매우 흐뭇했다.

당과 이념이 없는 자급 자족 공산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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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워지고 있다. 동방견문록을 본따 다음 이야기의 목차를 정해본다.

'여기서 그는 어떻게 거대한 사막을 건너 페르시아로 가게 되었는지 이야기한다'
'여기서 그는 6000년 전의 고대도시에 살고 있는 펭귄의 신기한 습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그는 사파비드 왕조의 영광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그는 왜 무슬림이 되었는지, 어떤 이름을 얻었는지 이야기한다'
`여기서 그는 제 2차 이슬라믹 레볼루션을 예언한다'

알라는 누구에게나 능력 이상의 부담을 지우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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