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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tis incognita

잡기 2007. 7. 17. 01:59
이씨가 추천해 줬는데 잘못 들어 '그랜드나간'으로 검색하니 나타나지 않았다. grand + naga + n이라고 생각했다. '열혈 로봇물'로 웹을 어렵게 검색하니 비슷한 것이 나타났다. 앞으로는 뭘 들으면 글자로 적자. -_- 제대로 된 제목은 '천원돌파 그렌라간' 간만에 가이낙스제 열혈물을 봤다. 그러고보니 그 동안 열혈물은 씨가 말랐던 것이 아닌가? '너를 믿는 나를 믿어' 굉장한 횡설수설을 늘어놓지만, 의지가 있는 한 움직여야 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실낫같은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사변은 인류 역사상 사나이들에게 품질이 보증된 몇 안되는 잠언중 하나다. 애들 만화인데 그 정도의 대사가 나왔다. '너를 믿는 나를 믿어'는 언제든 골로 갈 준비를 갖춘 신념의 사나이들간에 흔히 일어나는 MAD(상호 확증 파괴; mutual assured destruction)를 막을 수 있는 대안이다.

여자애들 역시 상호 확증 파괴의 잔취미를 가지고 있으나 그 영향력은 미미하다. 인류를 쓸어버릴 수 있는 것은 역시 사나이들뿐.

옛날옛날에 영웅본색을 좋아했다. 지킬 것이 없었던 주인공이 땅바닥에 떨어진 밥알을 줏어먹으며 비굴하다가도, 지킬 것이 생기자 갑자기 쌍권총 명사수가 되어 친구를 위해, 사랑하는 동생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지금 봐도 재밌다. 이타적인 행동의 가치는 그야말로 무량했다. 이 문명은 선조의 시체가 남긴 피바다 위에 선 것이다. 비근한 예로 한국을 들자면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 그리고 동족상잔의 비극과 민주화 투쟁 등 지난한 노도의 시간을 거쳐 이 땅에 무개념이 상팔자라고 믿는듯한 100일녀가 태어나기도 했다. 수백년간의 양적, 질적 희생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댓가라고 할 수 있겠다. 군가산점 폐지에는 찬성하지만 100일녀하고는 이유가 다르다. 이 세상에 공정한 경쟁이 없으며 핸디캡은 필연적이다. 공부와 학습이 유일한 신분상승의 갖잖은 기회일 수 밖에 없어 어쩌다보니 알파걸들이 늘었다지만 남성이 지녀야 하는 핸디캡은 애당초 필연이다. 군가산점이 있건 없건. 어쨌거나 남자아이들은 철밥통 땡땡거리며 사는 것보다는 땅바닥에 떨어진 밥알 줏어먹으며 비굴하지만 위험하게 살았으면 싶다. 평안하고 잔잔한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어지는 남은 찌꺼지들은 여자들이 차지하도록 내버려두자.

처절함과 악다구니 근성 면에서 좀 부족했던 그렌+라간은 그저 먹고살기 위해 땅을 파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두더지소년의 맹활약을 다룬 것인데, 관점을 달리 해서 보면, 흡사 일본의 두더지같은 히키코마리를 위한 절전형 진혼광시곡 같았다. 골방의 천정을 뚫고 나가라. 첫 합체씬은 걸작이다. 비웃는 것은 아니고, 새벽에 의자에서 나동그라질 정도로 웃었다. 그래, 그렇게들 어설프게 의지와 용기만 믿고 정점을 향해 병신 몸으로 달렸다.

그러고 보니 최근 읽은 윌리엄 니얼리의 '혼자 배우는 산악자전거'라는 걸작이 생각난다. 몸에 관한 책이다. '기술적으로 근사하게 나가떨어지는 방법'을 가르치며, 자전거를 타다가 나동그라져 심한 부상을 입은 동료에게 '네 자전거는 이상 없어. 어이, 넌 어때?' 라고 말해주는 품위있는 매너를 가르친다. 훌륭한 라이더가 되려면 그을린 피부, 찰과상과 타박상의 무도회로 점철된 무릎, 최근에 치료한 쇄골, 윗옷에 묻은 진흙, 그리고 못이 박힌 손바닥이 있어야 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라이딩시 항상 광적인 미소를 잊지않는 것이다. 덤으로 산악 자전거를 타면서 이성에게 올바르게 접근하는 방식도 가르친다 '제가 묵는 곳으로 가서 함께 자전거나 광나게 닦아보지 않을래요?'

자전거 주행의 철학적 교훈도 잊지 않았다 '어떤 시련도 그대를 죽이지만 않는다면 그대를 더욱 강하게 단련시킬 것이다 -- 니체' '산악자전거의 단일성은 존재의 단일성에 우선한다 -- 변증법적 유물론' '사색할만한 가치를 지닌 대상들은 새로운 부품과 섹스다'

preface에 '이 책을 사랑하는 홀리에게 바친다'라고 적혀 있는데 아무리봐도 홀리가 옆에 누워 TV보고 있는 마누라같진 않고, 아마도 자전거 이름인 것 같다. 마지막 장에는 원조 열혈이었던 니체의 경구가 말 그대로 선명하게 번쩍였다.

자신을 믿어라! 인생에서 최고의 결실을 거두고 최고의 기쁨을 누리는 비결은 위험하게 사는 것이다.


니체의 저 익숙한 경구를 믿었다. 아동 로봇물인 그렌+라간의 교훈과 정말 똑같지 않은가?

워낙 인쇄상태가 훌륭한 책이라 산악자전거를 타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권해줄만하다. 이런 책을 만나는 것은 큰 기쁨이다. 그래서 내가 쓴 '쓰시마 여행기'를 보고 흥미를 느껴 여름 휴가로 쓰시마를 가겠다는 직원에게 빌려주려고 한다.

그는 엊그제 자전거를 처음 샀다. 그에게 추천해 준 자전거는 알톤의 알로빅스 500과 RCT 마스터 터보였다. 고리를 뜯는 옥션과 달리 gmarket에서는 20만원 미만으로 자전거를 구할 수 있었다. RCT 마스터 터보는 로드 타이어를 단 13kg대 국산 자전거였다. 국민자전거감이다. 불과 몇 년 전에는 꿈도 못꿨을 상당히 괜찮은 스펙의 자전거지만 값비싼 외산 자전거를 선호하는 한국에서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내 자전거는 뒷짐받이를 달지 않은 상태에서 17kg쯤 된다(15kg인줄 알았는데 전자저울로 달아보니 17kg였다). 무거워서 한 손으로 자전거를 들어 어깨에 들쳐메고 석양의 설악산을 오른다던가 하는 로맨틱한 라이딩은 할 수 없다.

자전거 여행을 하겠다는 친구에게 마이크로파이버로 만든 버프가 얼마나 훌륭한 장비인지 시범을 보여줬다. 8천원짜리 버프를 산 지 딱 하루만이다.

주말 오후에는 자전거 정비를 했다. 7월 5일 돌아온 후 부속이 없어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팽개쳐 둔 자전거다. 여행 중 하도 비를 맞아 인기 가수 비가 싫어졌다. 가랑비라도 맞으면 쓰시마의 악몽이 떠올라 평소 취향에 안 맞는 노래들이 여럿 튀어나왔다. 버킷으로 퍼붓는 듯한 빗속이었지만 휴가를 알차게 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꺾이지 않았다. 그 반대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당시에는 선구자의 가르침인 '광적인 미소' 역시 잊지 않았다. 여행기는 직원에게 보여주기 위해 수위를 많이 낮췄지만(최소한 합리적인 사람으로 보여야 할 것 아닌가?) 그런 여행을 할 때 내가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미친개처럼 싸돌아다닌다는 것쯤은 마누라도 안다.


체인의 늘어난 정도. 처음,중간,끝. 아래의 새 체인과 대비해 한 마디 정도 늘어났다. 아직은 버틸만한 수준인데 좌우로 비틀면 이격이 상당해서 교체하기로 마음먹었다. 체인 2~3회 교체에 스프라켓/체인링을 교체하는 정도니까 앞으로 3년 안에 자전거를 갈아야 한다. 체인+체인링+스프라켓+체인 공구 등속을 합치면 차라리 자전거 한 대 사는 것이 낫다. 내 자전거는 그만큼 싸구려다. 구한말 40kg짜리 짐자전거에 짐을 싯고 어렵게 살았던 선조들과 밥알을 줏어먹던 주윤발을 상상해보자. 요즘 자전거 동호회에서 나이 서른일곱에 직장을 때려치우고 독도에서 제주도까지 전국일주를 하는 양반의 글을 읽는다. 인생을 바꾸겠다는, 무언가 이루어보겠다는, 그것은 용기다. 후쿠오카에서 도쿄까지 자동차에 치여 병원 신세를 지고도 계속 자전거를 타고 가겠다는 것도 용기다. 용기는 무모한 의지 없이 성립되지 않는다.


앞 브레이크 패드. 아랫 것은 wear line이 전부 닳아버린 원래 자전거의 브레이크. 윗 것은 3000원에 2조를 판매하는 싸구려 브레이크 패드


윗 것은 한 조에 5000원이나 하는 시마노의 정품 브레이크 패드. 아랫것은 원래 자전거의 다 닳아버린(녹아내린) 뒷 브레이크 패드. 저런 앞/뒤 브레이크 패드로 빗속의 내리막길에서 속된 말로 쌔려 밟았다는 생각을 하니 소름이 쫙 끼쳤다. 하긴 그때는 브레이크 패드는 신경 끄고 타이타닉 호 뱃전에서 바람을 안은 케이트 윈슬랫 같은 자세로 다운힐을 했다. 아무도 없는 길에서 으하하하 광적인 웃음을 머금은 채.


스프라켓을 닦고 새 체인을 장착.


디레일러의 폴리에는 주행중 압력이 거의 가해지지 않는다. 체인의 텐션을 유지하는 정도인데 워낙 깨끗하게 닦아 눈이 부시다. 이 정도면 새것이나 다름없는 거다.


완전 새것은 아니고... 체인링은 닦기가 참 어렵다.


앞 브레이크도 번쩍번쩍


믿음직하게 번쩍이는 새 뒷 브레이크. 진부령 다섯개 정도는 문제없어 보인다. 나는 나를 믿는 너를 믿는 cogitan이다.


정비 다 하고 나니 속이 시원하네.

무려 4시간에 걸쳐 땡볕 아래서 닦고 기름칠하고 조인 정비였지만 자전거는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4시간 동안 바퀴 청소, 스포크 장력 조절, 림 청소, 스프라켓 청소, 체인링 청소, 체인 교체, 뒷 디레일러 청소, 앞 디레일러 청소, 브레이크 패드 교체, 각종 와이어 정비, 앞뒤 디레일러 조정 밖에 하지 못했다. 차체를 닦는 다거나 구동부를 제외한 다른 부분을 손 볼 시간은 없었다. 그 동안 자전거를 정비하느라 구입한 각종 부품과 공구, 시간과 정성을 생각하면 17만원짜리 RCT 마스터 터보를 사는 것이 싸게 먹힌다.

와일드 바이크 사이트의 산악 자전거 주행 동영상을 밤새 쳐다봤다. 풀샥을 장착한 다운힐 자전거는 심장을 쿵쿵 뛰게 한다. 해 보고 싶다. 해 보고 싶다. 산길을 60kmh로 달려보고 싶다. 버니홉은 커녕 스탠딩 조차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자전거 동호회에서 하룻동안 280km를 달리고 자기는 초보자라고 말하는 아저씨의 글을 봤다. 그 양반이 초보면 나는 최근에 감정을 가지게 된 뉴본차일드다. 소울이처럼 말을 배우기 전 소위 천사의 목소리라는 것으로 꽥꽥 기버리시를 주절거리는 수준이다.


소울아, 자세 똑바로 하고 들어. 네가 세계 거울을 이해하게 되면 아빠가 안 맞는 몸뚱이에 머리통을 꽂아 합체하고 아빠의 삶을 이끈 니체의 잠언을 가르쳐 주겠다. 영혼은 iskra, 타오르는 불꽃일 때가 아름답다. 네 아빠가 애들 열혈물을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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