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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 cum laude

잡기 2008. 4. 30. 01:52
기상청 예보는 믿을 게 못 되서, 오랫만에 아내, 애와 함께 산정호수로 놀러갔더니 기상청 기준으로 맑을 날에 비가 와서 콘도에 주욱 박혀 지냈다. 날씨가 왜 이 모양인지... 갑자기 중국에서 올림픽 깡패 구름이 개떼처럼 몰려오기라도 했나?

산정호수는 두 번 갈만한 곳은 아니었다. 아내나 나나 젊을 때 여기저기 돌아다닌 탓에 왠만한 곳은 그게 그거 같다고 생각하는 편. 경찰서 옆의 음식점 하나 빼고는 딱히 먹을 만한 곳이 없다. 분식점에서나 팔 것 같은 부실한 우렁된장 2인분을 15000원씩이나 받아먹는 심하게 관광지스러운 곳.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시내버스 관광을 해 보잔다. 몇 년 전에 유행하던 시내버스 타고 전국 일주 하는 그 것? 이 몸은 어린 시절에 이미 해 봤다. 시대가 좋아져서, 웹에 그쪽 버스 정보가 체계적으로 정리된 곳이 많다.

"믿었던 론리플래닛, 거짓 또는 표절"  -- 심지어 검증되지 않은 입소문도 천연덕스럽게 사실처럼 늘어놓지만 그래도 LP가 개중 제일 낫다. 마누라는 나를 가이드북만 믿고 여행가는 반병신들 중에 하나 라고 생각하는 편. 하여튼 여행자들 사이에선 '가이드북에서 지도(약도)만 본다'는 사람들 많다.

네팔 마오반군黨, 총선개표 초반 돌풍(종합)  --경축. 이후 기사에서 마오반군이 과반을 점했다. 네팔의 마오이스트 정부는 과연 몇 년 안에 왕당파들처럼 썩어버릴까? 수년 전 카트만두 시민의 반응: 이놈이나 그놈이나 똑같죠 뭐. 그래도 민주화는 축하할 일이다.

월드 사이언스 포럼 TV 광고를 보다가 뇌 과학의 권위자들, 특히 제럴드 에델만의 얼굴이 스쳐 갔다. TV에 왜 저런 광고가 나오지? 오래 전에 에델만의 책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문에 며칠 잠도 못 자고 공상에 빠졌다. 책 제목이 워낙 강렬해서 아직도 기억한다. Bright Air, Brilliant Fire. 내친 김에 알라딘을 검색해 보니 뇌는 하늘보다 넓다(Wider than the sky)가 2006년 번역되어 나왔다. 의식과 인식에 관한 독창적이고 흥미진진한 가설을 펼치는 학자라 기대가 된다. 신경과학과 마음의 세계(Bright Air, Brilliant Fire)는 내 생애 읽은 것 중 몇 안되는 최고에 속한다.

TV 광고 등의 어떤 자극이나 계기가 주어지지 않으면 장애인의 삶에 희망의 에너지를 퍼부어 준 걸작들은 일부러 기억해 낼 수가 없다. 아쉽다. 나이 들어 할 일이 없어지면 그것들을 다시 보고 싶은데.

취향 테스트 -- 다섯 번 해보니 4번은 아방가르드 어쩌구로 나왔고 한 번은 '키치 예술 취향'이라고 나왔다. 아방가르드 어쩌구 설명 인용: '이런 선천적인 예술 에너지는 당신을 수준 높은 문화/예술 소비자로 만들어 줍니다.' -- 소비할 문화가 없어 찌질한 미드나 보고 있다. 미드가 수준 높고 완성도 높다느니 하는 말들은 미드의 수준을 과대평가 했을 뿐더러, 상대적일 뿐이라서 아방가르드적인 내 예술혼을 제대로 운율하기엔 함량 미달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 시절부터 드라마란 것들은 본래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찌질이들이다'란 것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미천한 인생 경험으로 이바구를 까는 극작가들의 보잘 것 없는 견해와 달리 인간은 그보다 나아질 수 있다.
 
유전질환 내지는 광우병 같은 치료 불가능한 키취 취향 때문인지 제목이 특이해서 어쩌다가 현시연이란 만화책을 봤다. 현대시각문화 연구회라는 오타쿠 모임에 관한 것. 어렸을 적엔 간혹 코믹 페스티발에 가보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동인지 나부랑이를 사려고 밤새 기다린다는 소릴 들은 후 생각을 접었다. 만화책은 그런 녀석들에 관한 얘기다. 3천종에 달하는 그놈이 그놈같은 바퀴벌레를 구분하거나, 플라이트 시뮬레이터로 폐인이 된 긍정적인 종류와 달리(적어도 비행기 몰 줄은 알게 되잖아?) 방 안에 틀어박혀 벌거벗은 어린 여자애들 그림 쳐다보는 오타쿠에 관해선 매우 부정적이다. 키취 취향(20%)의 아방가르드 예술혼(80%) 때문에 하여튼 종류를 막론하고 오타쿠들하고는 비교적 사이가 좋았지만. 흠... 그러고보니 불우한 환경 탓에 어린 시절 내 주위에 일반인이 드물었다. 일반인 여성의 따뜻한... 이건 아니군.
 
며칠 전부터 쿰 라우데가 입에 붙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불행한 어린 시절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그런 것들은 보통 잠재의식에 짱박혔다가 적절한 수단을 통해 부분적인 복원이 가능하다는 말들이 있는데, 뇌의 대부분을 텍스트로 채우고, 슬프고 기분나쁘거나, 단지 쓸모가 다해 버려지는 기억들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일반인이나 하는 말이다. 하루에 평균 2MB 이상의 텍스트를 30년 이상 쑤셔놓다 보면 오컬트나 독일군에 대한 방대한 지식으로 12시간 이상 떠들어도 지치지 않는 김씨 같은 양반의 얘기 상당 부분에 기시감을 느끼거나, 지어낸 얘기와 책에서 본 얘기를 구별하는데 어려움이 없다(그러고보니 얼마 전에 두 김씨와 시가를 피웠다. 살맛 났다).

뿌붕이, 포로로, 선물공룡 티보 -- 미친놈처럼 '안녕'만 해대는 텔레토비보다 진보한 아이들용 사극들. 특히 포로로는 품질이 우수해서 먹고 살기 바빠 미처 성장할 틈이 없던 성인 또는 정신병자들도 봐야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소울이는 방귀대장 뿌붕이만 좋아한다. 야후 꾸러기에 상위 10위권 동요의 가사를 외우고 EBS 아침 방송의 유아 프로그램 주제가를 흥얼거릴 줄 알게 된 나는야 일반인 '아빠'다. 과연 소울이가 자라서 가오가이거같은 애니를 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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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울프.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기술 때문에 CG 영화를 그다지 미더워하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예산 절감 목적으로 만든 저예산 3류 CG 영화같다. 원작을 하도 어린 시절에 읽어 영화가 원작과 같은지 모르겠다. 앞부분은 비슷한 것 같은데 뒷부분으로 갈수록 점점 이상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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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장면과 마찬가지로 이런 자궁 회귀 퇴행스러운 장면이 나왔다. 희대의 영웅도 여자의 뱃속에서 잉태되었다 -- 암 그런 말이 많지. 여자와 사욕 때문에 인생을 조지는 평범하고 구질구질한 스토리로 전락. 이런 것들은 연출을 아무리 훌륭하게 잘 해도 원래 재미가 없다. 인간성의 찌질한 한계를 무한반복하는 고전 서사란 것들이 그래서 재미가 없다. 인간에 관해 배울 점이 많은데다가 어린 시절엔 뭘 봐도 재미가 있으니, 고전 서사는 어린시절에나 보면 되는 것이다. 베오울프, 바리데기, 콩쥐팥쥐, 리어왕 따위를 어린 시절에 봐서 정말 다행이다.

난 아무래도 애들 성장만화 체질이지 싶고, 아방가르드 예술혼이 빚은 거대한 자존심 때문에 재테크 서적, 처세술 책, 기타 등등 요령, 요행, 점술책 류를 거의 보지 않았다. 그보다는 쇼펜하우어의 책 중에 '의지와 표상으로써의 세계' 란 것이 있는데, 제목에서부터 넉넉히 짐작할 수 있듯이, 내용도 그렇고, 쥐죽은 듯이 고요하게, 하루하루 근근이 먹고 살아가는 개마초의 일일 세계관에 얼추 부합한다.

자의든 타의든 마초로 불리는 한 배우는 카메라 앞에 사무라이처럼 무릎을 꿇고 노인을 두들겨 팬 것을 사과한다. 플래시가 펑펑 터진다. 제대로 된 개마초라면 애당초 움실거리는 근육이나, 물리적 폭력, 천금같은 말 한 마디가 실제로는 만고에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을 정도의 지능은 있을 것 같다. 그 배우는 '자기 마음 속에 감방을 만들어 자기를 가두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다'고 말한다. -- 안해도 될 짓을 하고 나서 하게 되는 '부질없는 말 한 마디'의 대표적인 사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이왕 납치, 감금할 꺼면 폭행, 고문, 항문 강간까지 염두에 두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그가 지은 가장 큰 죄는 오만함과 멍청함이다. 민주사회의 법률은 정신병과 더불어 그 둘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것 같다.

The Office 4기 10화까지 보며 낄낄거렸다. 팸은 참 귀여운 아가씨다. 여흥을 즐긴 후 다시 극악무도한 연쇄 살인의 세계로 돌아와, Criminal Mind를 3기까지 봤다. 흡사 현실감이 결여된 개뻥같이 황당할 정도로 쪽집게처럼 범인을  집어내는 판타지스러움을 제외한다면('범인은 20-35세 사이의 백인 중류층으로 다른 사람들의 눈에 거의 띄지 않는 존재이며 어린 시절 매를 맞고 자랐으며 최근 여자친구와 헤어지거나 직장에서 해고된 사람으로 이 지역에 연고를 두고 30km 떨어진 도심까지 출퇴근 함') 크리미널 마인드는 제목 그대로 연쇄살인범의 프로파일링, 살인자의 심리가 주된 테마다. 개중 인상에 남는 경구: 삶의 진정한 비극은 어른이 되어 빛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연쇄살인범에 맞서는 주연들은 하나둘 피폐해져 간다. 크리미널 마인드 1기 첫 화에서 아마(?) 니체의 유명한 경구가 나왔던 것 같다; 심연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 역시 당신을 들여다 본다. 4기쯤 되어 이런 말도 나왔다; 어느 한 쪽을 믿다 보면(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그 반대 쪽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암, 그렇게 해서 3억의 신을 섬기는 힌두교가 되는 거지~ 가톨릭이나 기독교의 우둔하고 딱딱한(그 기본이 워낙 단순해서 유치한) 사상체계로는 그래서 시바, 깔리를 이해할 수 없는 듯.

저간의 사정을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다룰 수 있는 인간 이성에 관한 신뢰가 매우 부족하지만 그래도 사형에 찬성한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점입가경의 극악무도한 연쇄살인마들이 날뛰는 크리미널 마인드를 몇 주 동안 계속 보았기 때문일까?

여자친구가 잔혹하게 살해당한 후 FBI Behavioral Analysis Unit을 떠나며 인간에 대한 실낫같은 희망을 되찾고 싶다고 말하던 아저씨에게 공감한다. 나도 그것을 평생 찾아다니는 안스러운 꼴이지 싶다. 문학, 예술 제반에도 있고, 기술, 과학에도 있다. 심지어 쓰레기장 같은 웹에도 끄나풀은 있다.

사형에 찬성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어린 아이를 죽인 극악무도한 살인마에 관해 격렬한 감정을 발산할 만큼 감정이 풍부한 편은 아닌 것 같고, 사형법 폐지 및 사형 반대론에 관해선 충분히 들었다. 인간 본성에 관해선 성선설이나 성악설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으며(감상적인 부분?), 생명의 고귀함에도 이견이 있다(가치관의 문제?). 살인마를 죽임으로써 인간 사회의 다양성의 감소로 인한 제한적 유전자풀 때문에 닥칠 미래 환경 재앙(농담), 인권으로써 누구에게나 동등하다는 생명의 가치와 사회를 독소로부터 격리하기 위해 한 개인의 생명을 앗아가는 '잔혹한 행위'를 혼동하는 것도 아니고, 사형 제도 존속을 주장하며 법치사회의 근간이 되는 인권을 굳이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사회 비용을 줄이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계산없는 막연한 추측에 기댄 기계적인 효율 때문에 AI 걸린 닭들 살처분 하듯 사형에 찬성할 따름.

거듭 강조하지만, 내 자신이 인간 이성에 관한 신뢰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사회가 인간을 살해하는 행위를 용납하는 것이 쉬워 보이지 않는다는 현학적인 문제가 있다.

말하고 나니 사람 목숨 가지고 한가하게 농담따먹기 한 셈이군.
언젠 안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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